三國史記卷第三十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雜志 第一 祭祀·樂
잡지 제1 제사, 악
祭祀
제사
按新羅宗廟之制 第二代南解王三年春 始立始祖赫居世廟 四時祭之 以親妹阿老主祭 第二十二代智證王 於始祖誕降之地奈乙 創立神宮 以享之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濟·高句麗 有大功德 並爲世世不毁之宗 兼親廟二爲五廟 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 又見於祀典 皆境內山川 而不及天地者 蓋以王制曰 『天子七廟 諸侯五廟 二昭二穆與太祖之廟而五』
신라 종묘의 제도를 살펴보니 제 2대 남해왕 3년(6) 봄 처음 시조 혁거세묘(혁거세 사당)를 세우고 네 계절(四時)에 제사하였는데 친 여동생 아로가 제사를 주관하였다. 제 22대 진증왕이 시조가 탄생한 땅 나을에 신궁을 창건하고 제사하였다. 36대 혜공왕에 이르러 처음 오묘를 정하고, 미추왕을 김씨 시조로 삼아 태종대왕, 문무대왕은 백제,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으므로 나란히 대대로 헐지 않는 제사로 삼고, 부모사당 둘을 겸하여 오묘로 했다. 제 37대 선덕왕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 또 사전을 보니 모든 경내 의 산천이고, 천지에는 미치지 않았다. 대개 《예기》 왕제에 말하기를 “천자는 7묘이고, 제후는 5묘인데 2소2목과 태조의 사당을로 다섯이다.”했다.
又曰 『天子祭天地·天下名山大川 諸侯祭社稷·名山大川之在其地者』 是故 不敢越禮而行之者歟 然其壇堂之高下 壝門之內外 次位之尊卑 陳設登降之節 尊爵·籩豆·牲牢·冊祝之禮 不可得而推也 但粗記其大略云爾 一年 六祭五廟 謂正月二日·五日 五月五日 七月上旬 八月一日·十五日 十二月寅日 新城北門祭八䄍 豐年用大牢 凶年用小牢 立春後亥日 明活城南熊殺谷祭先農 立夏後亥日 新城北門祭中農 立秋後亥日 䔉園祭後農 立春後丑日 犬首谷門祭風伯 立夏後申日 卓渚祭雨師 立秋後辰日 本彼遊村祭靈星(檢諸禮典 只祭先農 無中農·後農) 三山·五岳已下 名山大川 分爲大·中·小祀
또 말하기를 “천자는 천지와 천하의 이름있는 산과 큰 내(명산대천)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 명산대천으로 그 땅에 있는 것을 제사한다.”했다. 이 때문에 감히 예를 넘지않고 실행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그 단과 당의 높고 낮음, 담과 문의 안과 밖, (신위)자리의 존비와 차례, (제물을)진설하여 올리고 내림의 절차, 술잔, 제기, 희생, 축문의 예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없다. 다만 그 대략을 대충 적을 뿐이다. 1년에 여섯 번 오묘에 제사하는데 정월 2일, 5일, 5월 5일, 7월 상순, 8월 1일, 15일을 이른다. 12월 인일에는 신성 북문에서 팔자에 제사하였는데 풍년에는 대뢰를 쓰고, 흉년에는 소뢰를 썼다. 입춘 후 해일에는 명활성 남쪽 웅살곡에서 선농에 제사하고, 입하 후 해일에는 신성북문에서 중농에 제사하고, 입추 후 해일에는 산원에서 후농에 제사하였다. 입춘 후 축일에는 견수곡문에서 풍백을 제사하였다. 입하 후 신일에는 탁저에서 우사에게 제사하고, 입추 후 진일에는 본피유촌에서 영성에 제사하였다.(여러 예전을 조사해 보건대 다만 선농에 제사하였고, 중농, 후농은 없다.) 3산, 5악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 중, 소사로 삼았다.
大祀 三山 一奈歷(習比部) 二骨火切也火郡 三穴禮大城郡
대사는 삼산인데 일은 나력(습비부)이고, 둘째는 골화(절야화군), 셋째는 혈례(대성군)이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城郡) 南地理山(菁州) 西雞龍山(熊川州) 北太伯山(奈已郡) 中父岳(一云公山 押督郡)
중사
오악 동쪽은 토함산, 남쪽은 지리산(청주), 서쪽은 계룡산(웅천주), 북쪽은 태백산(나리군), 중은 부악(일운 공산, 압독군)이다.
四鎭 東溫沫懃(牙谷停) 南海恥也里(一云悉帝 推火郡) 西加耶岬岳(馬尸山郡) 北熊谷岳(比烈忽郡)
4진 동쪽은 온말근(아곡정), 남쪽은 취야리(한편 실제 추화군 이라 한다.), 서쪽은 가야갑악(마시산군), 북쪽은 웅곡악(비욜홀균)이다.
四海 東阿等邊(一云斤烏兄邊 退火郡) 南兄邊(居柒山郡) 西未陵邊(屎山郡) 北非禮山(悉直郡)
4해는 동쪽 아등변(일운 근오형변이라 한다. 퇴화군), 남 형변(거칠산군), 서 미릉변(미산군), 북 비례산(실직군)이다.
四瀆 東吐只河(一云槧浦 退火郡) 南黃山河(歃良州) 西熊川河(熊川州) 北漢山河(漢山州) 俗離岳(三年山郡) 推心(大加耶郡) 上助音居西(西林郡) 烏西岳(結已郡) 北兄山城(大城郡)淸海鎭(助音島)
4독은 동 토지하(일운 참포라 한다. 퇴화군), 남 황산하(삽량주), 서 웅천하(웅천주), 북 한산하(한산주), 속리악(삼년산군), 추심(대가야군), 상조음거서(서림군), 오서악(결이군), 북형산성(대성군), 청해진(조음도)이다.
小祀
霜岳(高城郡) 雪岳(䢘城郡) 花岳(斤平郡) 鉗岳(七重城) 負兒岳(北漢山州) 月奈岳(月奈郡) 武珍岳(武珍州) 西多山(伯海郡 難知可縣) 月兄山(奈吐郡 沙熱伊縣) 道西城(萬弩郡) 冬老岳(進禮郡 丹川縣) 竹旨(及伐山郡) 熊只(屈自郡 熊只縣) 岳髮(一云髮岳 于珍也郡) 于火生(西良郡 于火縣) 三岐(大城郡) 卉黃(牟梁 高墟沙梁) 嘉阿岳(三年山郡) 波只谷原岳(阿支縣) 非藥岳(退火郡) 加林城(加林縣 一本有靈嵒山·虞風山 無加林城) 加良岳(菁州) 西述(牟梁)
소사
상악(고성군), 설악(수성군), 화악(근평군), 겸악(칠중성), 부아악(북한산주), 월내악(월내군), 무진악(무진주), 서다산(백해군 난지가현), 월형산(나토군 사열이현), 도서성(만노군), 동노악(진례군 단천현), 죽지(급벌산군), 웅지(굴자군 웅지현), 악발(일운 발악이다. 우진야군), 우화(생서량군 우화현), 삼기(대성군), 훼황(모량), 고허(사량), 가아악(삼년산군), 파지곡원악(아지현), 비약악(퇴화군), 가림성(가림현 어떤 책은 영암산·우풍산은 있는데 가림성은 있다.), 가량악(청주), 서술(모량)
四城門祭 一大井門 二吐山良門 三習比門 四王后梯門
4성문제사는 첫째는 대정문, 둘째는 토산량문, 셋째는 습비문, 넷째는 왕후제문이다.
部庭祭 梁部 四川上祭 一犬首 二文熱林 三靑淵 四樸樹 文熱林行日月祭 靈廟寺南行五星祭 惠樹行祈雨祭
부정제사는 양부 사천상제 첫째는 견수, 둘째는 문열림, 세째는 청연, 넷째는 박수이다. 문열림에서는 일월제를 지내고, 영묘사 남쪽에서는 오성제를 지내고, 혜수에서는 기우제를 지낸다.
四大道祭 東古里 南簷幷樹 西渚樹 北活倂岐
4대도제사는 동쪽은 고리, 남쪽은 첨병수, 서쪽은 저수, 북쪽은 활병기에서 제사한다.
壓丘祭 辟氣祭 上件或因別制 或因水旱 而行之者也
압구제, 벽기제는 윗건의 제사는 별도의 제도로 인하여, 혹은 혹수와 가뭄으로 인하여 지냈던 것이다.
高句麗·百濟祀禮不明 但考古記及中國史書所載者 以記云爾 後漢書云 『高句麗好祠鬼神·社稷·零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襚神 亦以十月迎而祭之』北史云 『高句麗常以十月祭天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高登神 云是始祖 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고구려와 백제의 제사 예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기와 중국 역사서에 실린 것을 가지고 기록할 뿐이다. 《후한서》에 “고구려는 귀신, 사직, 영성에 제사하기를 좋아하고, 10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크게 모이는데 이름을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는데 수신이라 부르고, 또 10월에 맞이하여 제사한다.”했고, 《북사》에는 “고구려는 항상 10월 하늘에 제사하고, 음사가 많다. 신묘가 둘인데 하나는 부여신으로 나무를 깍아 부인상을 만들었다. 둘째는 고등신인데 이가 시조 부여신의 아들로 모두 관청을 설치하고 사람을 보내 지키고 보호한다. 대개 하백녀와 주몽이라 한다.”했다.
梁書云 『高句麗於所居之左 立大屋 祭鬼神 又祠零星·社稷』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國左有大穴 曰神隧 每十月 王皆自祭』古記云 『東明王十四年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太祖王六十九年冬十月 幸扶餘 祀太后廟 新大王四年秋九月 如卒本 祀始祖廟 故國川王元年秋九月 東川王二年春二月 中川王十三年秋九月 故國原王二年春二月 安臧王三年夏四月 平原王二年春二月 建武王二年夏四月 並如上行 故國壤王九年春三月 立國社』
《양서》에 “고구려는 사는 곳의 왼쪽에 큰 집을 세우고 귀신에게 제사한다. 또 영성, 사직을 제사한다.”했고, 《당서》에는 “고구려의 풍속은 음사가 많고, 영성과 해, 기자, 가한 등의 신을 제사한다. 나라 왼쪽에 큰 구멍이 있는데 수신이하 하고, 매 10월 왕이 모두에게 제사한다.”했다. 고기에 “동명왕 14년(25)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으니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 장례하고 마침내 신묘를 세웠다. 태조왕 69년(121) 겨울 10월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태조사당)에 제사하였다. 신대왕 4년(168) 가을 9월 졸본에 가 시조묘에 제사하고, 고국천왕 1년(179)가을 9월, 동천왕 2년(228) 봄 2월, 중천왕 13년(260) 가을 9월, 고국원왕 2년(332) 봄 2월, 안장왕 3년(521) 여름 4월, 평원왕 2년(560) 봄 2월, 건무왕(영류왕) 2년(591) 여름 4월에 위와 같이 행하였다. 고국양왕 9년(392) 봄 3월 국사(국가의 사직)를 세웠다.” 했다.
又云 『高句麗 常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獲猪鹿 祭天及山川』冊府元龜云 『百濟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 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또 이르기를 “고구려는 항상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고, 잡은 돼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다.”했다. 《책부원귀》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 4중의 달(네 철의 가운데 달)에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한다. 그 시조 구태묘를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번 제사한다.”했다.(《해동고기》를 살펴보니 혹 “시조 동명”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이다.”했다. 《북사》와 《수서》에 모두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가 있는데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했다. 여기서 말한 시조를 구태라 했으나 동명을 시조라 한 일의 자취가 명백하니 그 나머지는 믿을 수 없다.)
古記云 『溫祚王二十年春二月 設壇祠天地 三十八年冬十月 多婁王二年春二月 古尔王五年春正月 十年春正月 十四年春正月 近肖古王二年春正月 阿莘王二年春正月 腆支王二年春正月 牟大王十一年冬十月 並如上行 多婁王二年春正月 謁始祖東明廟 責稽王二年春正月 汾西王二年春正月 契王二年夏四月 阿莘王二年春正月 腆支王二年春正月 並如上行』
고기에 “온조왕 20년(2) 봄 2월 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하였다. (온조왕)38년(20) 10월, 다루왕 2년(29) 봄 2월, 고이왕 5년(238) 봄 정월, 10년(243) 봄 정월, 14년(247) 봄 정월, 근초고왕 2년(347) 봄 정월,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전지왕 2년(406) 봄 정월, 모대왕 11년(489) 겨울 10월은 위에서 행한 것과 같다. 다루왕 2년(29) 봄 정월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였다. 책계왕 2년(287) 봄 정월, 분서왕 2년(299) 봄 정월, 계왕 2년(345), 여름 4월, 아신왕 2년(393) 봄 정월, 전지왕 2년(406) 봄 정월에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했다.
樂
악
新羅樂 三竹 三絃 拍板 大鼓 歌舞 舞二人 放角幞頭 紫大袖公襴 紅鞓 鍍金銙腰帶 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笒 二中笒 三小笒
신라 음악은 삼죽, 삼현, 박판, 대고, 가무였다. 춤은 두 사람이 추었으니 방각복두를 쓰고 자줏빛 큰 소매가 달린 공란을 입고, 붉은 가죽 띠에 도금한 띠고리를 단 허리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목신발을 신었다. 삼현은 첫째 현금, 둘째는 가야금, 셋째는 비파이다. 삼죽은 첫째 대금, 둘째는 중금, 셋째는 소금이다.
玄琴
거문고
象中國樂部琴而爲之 按琴操曰 『伏犧作琴 以修身理性 反其天眞也』 又曰 『琴長三尺六寸六分 象三百六十六日 廣六寸 象六合 文上曰池(池者水也 言其平) 下曰濱(濱者服也) 前廣後狹 象尊卑也 上圓下方 法天地也 五絃象五行 大絃爲君 小絃爲臣 文王·武王加二絃』 又風俗通曰 『琴長四尺五寸者 法四時五行 七絃法七星』
중국 악부의 금을 본받아 만들었다. 《금조》를 살펴보니 “복희가 금을 만들어서 몸을 닦고 본성을 다스려서 그 천진함을 되찾게 하였다.”했다. 또 말하기를 “금의 길이는 세 자 여섯 치 여섯 푼은 삼백육십육일을 상징하고, 너비 여섯 치는 육합(천지와 사방)을 상징한다. 문의 위를 지(지는 물이니 그 평평함이다.)라 하고, 아래를 빈(빈은 복이다.)이라 한다. 앞은 넓고 뒤는 좁으니 존비를 상징한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나니 천지를 본받았다. 노현은 오행을 상징한다. 대현은 임금이 되고, 소현은 신하가 되고, 문왕과 무왕이 두 줄을 더하였다.”했다. 또 《풍속통》에 “금의 길이 네 자 다섯 치는 4시와 5행을 본받았고, 7현은 칠성을 본받았다.”했다.
玄琴之作也 新羅古記云 『初 晉人以七絃琴 送高句麗 麗人雖知其爲樂器 而不知其聲音及鼓之之法 購國人能識其音而鼓之者 厚賞 時 第二相王山岳 存其本樣 頗改易其法制而造之 兼製一百餘曲以奏之 於時 玄鶴來舞 遂名玄鶴琴 後但云玄琴 羅人沙湌𦷧永子玉寶高 入地理山雲上院 學琴五十年 自製新調三十曲 傳之續命得 得傳之貴金先生 先生亦入地理山不出 羅王恐琴道斷絶 謂伊湌允興 方便傳得其音 遂委南原公事 允興到官 簡聰明少年二人 曰安長·淸長 使詣山中傳學 先生敎之 而其隱微不以傳 允興與婦偕進曰 “吾王遣我南原者 無他 欲傳先生之技 于今三年矣 先生有所秘而不傳 吾無以復命” 允興捧酒 其婦執盞膝行 致禮盡誠 然後 傳其所秘飄風等三曲 安長傳其子克相·克宗 克宗制七曲 克宗之後 以琴自業者 非一二』
현금의 제작은 신라고기에 “처음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니 고구려 사람이 비록 그것이 악기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 성음과 연주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 중에 그 음을 알고 연주할 수 있는 자를 찾으면서 후한 상을 주었다. 그 때 제2상 왕산악이 그 본래 모양을 보존하면서 자못 그 법제를 고쳐 만들고, 1백여 곡을 만들어 연주하였다. 그 때 검은 학이 와 춤추었다. 드디어 현학금이라 이름하였는데 후에는 단지 현금이라 이름하였을 뿐이다. 신라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 가 50년 동안 금을 배우고 스스로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선생에게 전하였는데 선생이 또한 지리산에 들어 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이 금의 연주법이 단절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찬 윤흥에게 일러 ‘방편을 써서 그 소리를 전할 수 있게 하라.’하고는 남원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이 관청에 이르러 총명한 소년 두 사람을 가렸으니 안장과 청장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산중에 나아가(들어 가) 전수받아 배우게 하였다. 선생이 그들을 가르쳤으나 그 은미한 것은 전하지 않았다. 윤흥과 부인이 함께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왕이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예를 전수받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3년이 되었는데도 선생이 비밀되는(숨기는) 바를 두고 전하지 않으시니 내가 복명할 것이 없습니다.’했다. 윤흥은 술을 받들고 그 부인은 잔을 잡고 무릎걸음으로 가서 지극한 예로 정성을 다하였다. 그 후 그 비밀인(숨긴 것인) 표풍 등 세 곡을 전하였다. 안장은 그 아들 극상, 극종에게 전하고, 극종은 일곱 곡을 지었다. 극종 후손으로 금을 스스로의 업(직업)으로 하는 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했다.
所製音曲有二調 一平調 二羽調 共一百八十七曲 其餘聲遺曲 流傳可記者無幾 餘悉散逸 不得具載 玉寶高所制三十曲 上院曲一 中院曲一 下院曲一 南海曲二 倚嵒曲一 老人曲七 竹庵曲二 玄合曲一 春朝曲一 秋夕曲一 吾沙息曲一 鴛鴦曲一 遠岵曲六 比目曲一 入實相曲一 幽谷淸聲曲一 降天聲曲一 克宗所製七曲 今亡
지은 음곡으로 두 조가 있으니 하나는 평조이고, 둘째는 우조인데 모두 187곡이나 그 나머지 소리와 남은 곡 중에 전해져 기록할만한 것은 거의 없고, 나머지는 모두 흩어져 갖추어 실을 수 없다. 옥보고가 지은 것은 30곡이다. 상원곡 하나, 중원곡 하나, 하원곡 하나, 남해곡 둥, 기암곡 하나, 노인곡 일곱, 죽암곡 둘, 현합곡 하나, 춘조곡 하나, 추석곡 하나, 오식곡 하나, 원앙곡 하나, 원호곡 여섯, 비목곡 하나, 입실상곡 하나, 유곡청성곡 하나, 강천성곡 하나이다. 극종이 지은 것은 일곱 곡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加耶琴 亦法中國樂部箏而爲之 風俗通曰 『爭 秦聲也』 釋名曰 『箏施絃高 箏箏然 幷·梁二州箏 形如瑟』 傅玄曰 “上圓象天 下平象地 中空准六合 絃·柱擬十二月 斯乃仁智之器” 阮瑀曰 “箏長六尺 以應律數 絃有十二 象四時 柱高三寸 象三才” 加耶琴 雖與箏制度小異 而大槩似之 羅古記云 『加耶國嘉實王 見唐之樂器 而造之 王以謂 “諸國方言各異 聲音豈可一哉” 乃命樂師省熱縣人于勒 造十二曲 後于勒以其國將亂 儶樂器 投新羅眞興王 王受之 安置國原 乃遣大奈麻注知·階古·大舍萬德 傳其業 三人旣傳十二曲 相謂曰 “此繁且淫 不可以爲雅正” 遂約爲五曲 于勒始聞焉而怒 及聽其五種之音 流淚歎曰 “樂而不流 哀而不悲 可謂正也 爾其奏之王前” 王聞之大悅 諫臣獻議 “加耶亡國之音 不足取也” 王曰 “加耶王 淫亂自滅 樂何罪乎 蓋聖人制樂 緣人情以爲撙節 國之理亂 不由音調” 遂行之 以爲大樂』
가야금 또한 중국 악부의 쟁을 본받아 만들었다. 《풍속통》에 “쟁은 진나라 음악이다.”했고, 《석명》에 “쟁은 줄을 놀이 매어 소리가 쟁쟁하며 병주와 양주의 쟁은 형상이 슬과 비슷하다.”했다. 부현이 말하기를 “위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래가 평평한 것은 땅을 상징하고, 가운데가 빈 것은 하늘과 땅, 사방을 본받았다. 현과 기둥은 열두 달에 비겼으니 이는 곧 인과 지혜의 기물이다.”했다. 완우가 말하기를 “쟁의 길이는 여섯자인데 율의 수에 대응한 것이고, 현은 12줄로 네 철을 상징한다. 기둥의 높이는 세 치로 삼재를 상징한다.”했다. 가야금은 비록 쟁의 제도와는 다르나 크게는 비슷하다. 신라 고기에 이르기를 “가야국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다. 왕이 이르기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른데 소리가 어찌 한 가지 일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에 악사 성열현 사람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짓게 하였다. 후에 우륵이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지려하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들어갔다. 진흥왕이 그을 받아들여 국원에 있게 하고, 대나마 주지, 계고와 대사 만덕에게 그 업(악기와 음악)을 전하였다. 세 사람이 12곡을 전해 받았다. 서로 일러 말하기를 ‘이는 번잡하고 또 음란하여 아정(우아하고 바른 음악이)이 될 수 없다.’하고는 마침내 요약하여 5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 듣고 노하였으나 그 다섯 종류의 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복해 말하기를 ‘즐겁되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른 음악이라 할만하다. 너희는 그것을 앙의 앞에서 연주하라.’했다. 왕이 그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니 간하는 신하가 논의하여 말하기를 ‘가야를 망하게 한 음악이니 취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했다 진흥왕이 말하기를 ‘가야왕이 음란하여 스스로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이겠는가? 대개 성인이 음악을 만든 것은 사람의 정에 연유하여 법도를 따르도록 한 것이지 나라의 다스려짐과 혼란은 음악의 곡조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하고는 마침내 음악을 시행하게 하고 대악으로 삼았다.”했다.
加耶琴有二調 一河臨調 二嫩竹調 共一百八十五曲 于勒所製十二曲 一曰下加羅都 二曰上加羅都 三曰寶伎 四曰達已 五曰思勿 六曰勿慧 七曰下奇物 八曰師子伎 九曰居烈 十曰沙八兮 十一曰爾赦 十二曰上奇物 泥文所製三曲 一曰烏 二曰鼠 三曰鶉 (赦字未詳)
가야금에는 두 조가 있으니 하나는 하임조이고, 둘째는 눈죽조인데 모두 1백8십5곡이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 둘째 상가라도, 셋째 보기, 넷째 달이, 다섯째 사물, 여섯째 물혜, 일곱째 기물, 여덟째 사자기, 아홉째 거열, 열째 사팔혜, 열하나 이사, 열둘 상기물이다. 이문은 세곡을 지었는데 첫째는 오, 둘째 서, 셋째 순이다. (사자는 미상이다.)
琵琶 風俗通曰 『近代樂家所作 不知所起 長三尺五寸 法天·地·人與五行 四絃 象四時也』 釋名曰 『琵琶 本胡中馬上所鼓 推手前曰琵 引手却曰琶 因以爲名』 鄕琵琶 與唐制度 大同而少異 亦始於新羅 但不知何人所造 其音有三調 一宮調 二七賢調 三鳳皇調 共二百一十二曲
비파는 《풍속통》에 말하기를 “근대의 음악가가 만든 것으로 기원을 알 수 없다. 길이는 세 자 다섯치인데 천지인과 오행을 본받았고, 네 현은 사시를 상징한다.”했다. 《석명》에 말하기를 “비파는 본래 오랑캐 사이에 말 위에서 연주하던 것인데 손으로 앞으로 미는 것을 비라하고, 손을 밀어 끌어당기는 것을 파라하였기 때문에 이름 한 것이다.”했다. 향비파와 당나라 제도가 크게는 같으나 조금 다르다. 또한 신라에서 비롯된 것이나 어떤 사람이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할 뿐이다. 그 음에는 3조가 있으니 첫째는 궁조, 둘째는 현조, 셋째는 봉황조이다. 모두 212곡이다.
三竹 亦模倣唐笛 而爲之者也 風俗通曰 『笛 漢武帝時 丘仲所作也 又按 宋玉有笛賦 玉在漢前 恐此說非也 馬融云 『近代雙笛 從羌起』 又 笛 滌也 所以滌邪穢 而納之於雅正也 長二尺四寸 七孔』 鄕三竹 此亦起於新羅 不知何人所作 古記云 『神文王時 東海中忽有一小山 形如龜頭 其上有一竿竹 晝分爲二 夜合爲一 王使斫之作笛 名萬波息』 雖有此說 怪不可信 三竹笛有七調 一平調 二黃鐘調 三二雅調 四越調 五般涉調 六出調 七俊調 大笒三百二十四曲 中笒二百四十五曲 小笒二百九十八曲 會樂及辛熱樂 儒理王時作也
3죽은 또한 당나라 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풍속통》에 말하기를 “적은 한나라 무제 때 구중이 지은 것이다. 또 살펴보니 송옥의 적부가 있다. 송옥은 한나라 이전에 있었으니 아마도 이 설명은 잘못인 듯하다. 마융이 말하기를 ‘근대의 쌍적은 강족에세서 기원하였다.’했다. 또 적은 척이니 삿되고 더러운 것을 씻어내어 우아함과 바름에 들게하기 때문이다. 길이는 2자 4치이고 구명은 일곱 개 이다. 향삼죽은 이것 또한 신라에서 기원하나 어떤 사람이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고기에 말하기를 ‘신문왕 때 동해중에 갑자기 한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형상이 거북의 머리 같았다. 그 위에 한줄기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나뉘어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왕이 그것을 잘라 적을 만들게 하고 이름을 만파식이라 하였다.’했다. 비록 이런 말이 있으나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삼죽적은 7조가 있으니 하나는 평조, 둘째는 황종조, 셋째는 이아조, 넷째는 월조, 다섯째는 반섭조, 여섯째는 출조, 일곱째는 준조이다. 대금은 324곡, 중금은 245곡, 소금은 298곡이다. 회학과 신열악은 유리왕 때 지었다.
突阿樂 脫解王時作也 枝兒樂 婆娑王時作也 思內(一作詩惱樂) 奈解王時作也 笳舞 奈密王時作也 憂息樂 訥祗王時作也 碓樂 慈悲王時人百結先生作也 竽引 智大路王時人川上郁皆子作也 美知樂 法興王時作也 徒領歌 眞興王時作也 捺絃引 眞平王時人淡水作也 思內奇物樂 原郞徒作也 內知 日上郡樂也 白實 押梁郡樂也 德思內 河西郡樂也 石南思內 道同伐郡樂也 祀中 北隈郡樂也 此皆鄕人喜樂之所由作也 而聲器之數·歌舞之容 不傳於後世
돌아악은 탈해왕 때 지은 것이고, 기아악은 파사왕 때 지었다. 사내(시내악이라 쓰기도 한다.) 나해왕 때 지었다. 가무는 나밀왕 때 지었고, 우식악은 눌지왕 때 지었고, 대악은 자비왕 때 사람 백결선생이 지었다. 우인은 지대로왕 때 사람인 천상욱개자가 지었다. 미지악은 법흥왕 때 지었고, 도령가는 진흥왕 때 지었고, 날현인은 진평왕 때 사람 담수가 지었다. 사내기물악은 원랑도가 지었다. 내지는 일산군 음악이다. 자실은 압량군 음악이다. 덕사내는 하서군 음악이다. 석남사내는 도동벌군 음악이다. 사중은 북외군 음악이다.”했다. 이는 모두 우리나라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함으로 말미암아 지었다. 악기의 수와 가무의 내용은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但古記云 『政明王九年 幸新村 設酺奏樂 笳舞 監六人 笳尺二人 舞尺一人 下辛熱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三人 思內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韓岐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上辛熱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歌尺二人 小京舞 監三人 琴尺一人 舞尺一人 歌尺三人 美知舞 監四人 琴尺一人 舞尺二人 哀莊王八年 奏樂 始奏思內琴 舞尺四人靑衣 琴尺一人赤衣 歌尺五人彩衣·繡扇並金鏤帶 次奏碓琴舞 舞尺赤衣 琴尺靑衣』 如此而已 則不可言其詳也
다만 고기에 말하기를 “정명왕(신문왕) 9년(689) 신촌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가무는 감 6인, 가척 2인, 무척 1인이다. 하신열무는 감 4인, 금척 1인, 무척 2인, 가척 3인이다. 사내무는 감 3인, 금척 1인, 무척 2인, 가척 2인이다. 한기무는 감 3인, 금척 1인, 무척 1인이다. 상행열무는 감 3인, 금척 1인, 무척 2인, 가척 1인이다. 소경무는 감 3인, 금척 1인, 무척 1인, 가척 3인이다. 미지무는 감 4인, 금척 1인, 무척 2인이다. 애장왕 8년(807) 음악을 연주할 때 처음으로 사내금을 연주하였는데 무척 4인은 푸른 옷을 입었고, 금척 1인은 붉은 옷을 입었고, 가척 5인은 채색 옷에다 수놓은 부채와 금으로 새긴 대였다. 다음으로 대금무를 연주하였는데 무척은 붉은 옷이고, 금척은 청의였다.”했으나 이 같을 뿐이니 곧 그 자세한 것은 말할 수 없다.
羅時 樂工皆謂之尺 崔致遠詩 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金丸 廻身掉臂弄金丸 月轉星浮滿眼看 縱有宜僚那勝此 定知鯨海息波瀾 月顚 肩高項縮髮崔嵬 攘臂羣儒鬪酒盃 聽得歌聲人盡笑 夜頭旗幟曉頭催 大面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趍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束毒 蓬頭藍面異人間 押隊來庭學舞鸞 打鼓冬冬風瑟瑟 南奔北躍也無端 狻猊 遠涉流沙萬里來 毛衣破盡着塵埃 搖頭掉尾馴仁德 雄氣寧同百獸才
신라 때 악공을 모두 척이라 했다. 최치원 시에 향악잡영 5수가 있는데 지금 이를 기록한다. 금환은 ‘몸을 빙빙 돌리고 팔을 휘두르며 금환을 희롱하니, 달이 구르고 별이 떠다녀서 눈에 가득 차 보이네. 의료가 있다한들 어찌 이보다 나을쏜가! 이제야 큰 바다의 물결이 잠잠해진 이유를 알겠네.’ 월전은 ‘어깨 높고 목 오그라지고 머리카락 우뚝 솟아, 팔뚝 걷은 여러 선비 술잔을 다투네. 노랫소리 들으면서 사람들 모두 웃는구나! 초저녁에 세운 깃발이 새벽녘을 재촉하네.’ 대면 ‘황금빛 얼굴색이 바로 그 사람인데, 구슬채찍 손에 들고 귀신을 부리네. 빠른 걸음 느린 달음질, 우아한 춤 드러나니, 마치 붉은 봉새가 태평성대에 춤추는 것 같구나.’ 속독은 ‘쑥대머리 남빛 얼굴이 사람 같지 않은 데, 떼지어 뜰에 와서 난새 춤을 배우네. 북치는 소리 둥둥, 바람은 솔솔! 남쪽으로 북쪽으로 뛰고 달리며 끝이 없구나.’ 산예는 ‘멀리 유사를 건너 만리를 오느라, 털옷은 다 해어지고 먼지를 뒤집어썼네. 머리를 흔들고 꼬리를 휘두름에 어진 덕이 배었으니, 굳센 그 기상 어찌 온갖 짐승 재주와 같을소냐!’
高句麗樂 通典云 『樂工人紫羅帽 飾以鳥羽 黃大袖 紫羅帶 大口袴 赤皮鞾 五色緇繩 舞者四人 椎髻於後 以絳抹額 飾以金璫 二人黃裙襦·赤黃袴 二人赤黃裙襦·袴 極長其袖 烏皮鞾 雙雙倂立而舞 樂用 彈箏一 搊箏一 臥箜篌一 竪箜篌一 琵琶一 五絃一 義觜笛一 笙一 橫笛一 簫一 小篳篥一 大篳篥一 桃皮篳篥一 腰鼓一 齊鼓一 擔鼓一 貝一 大唐武太后時 尙二十五曲 今唯能習一曲 衣服亦寖衰敗 失其本風』 冊府元龜云 『樂有五絃·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 吹蘆以和曲』
고구려 음악 《통전》에 “악공인은 자줏빛 비단 모자에 새 깃으로 구미고, 누른 큰 소매 옷에 자줏빛 비단 대를 하고 통 넓은 바지를 입으며, 붉은 색 가죽 목신발을 신고 오색의 검은 노끈을 매었다. 춤추는 자 4인은 뒤에 상투를 틀고 진홍색을 이마에 바르고 금귀고리로 꾸몄다. 두 사람은 누름 빛 치마저고리에 적황색 바지를 입었다. 두 사람은 적황색 치마저고리와 바지에 그 소매를 지극히 길게 하고, 검은 가죽 목신발을 신고, 쌍쌍이 나란히 서서 춤을 추었다. 음악에는 탄쟁 하나, 추쟁 하나, 와공후 하나, 수공후하나, 비파 하나, 오현하나, 의자적 하나, 생 하나, 횡적 하나, 소 하나, 소필률 하나, 대필률 하나, 도피필률 하나, 요고 하나, 제고 하나, 담고 하나, 패 하나이다. 대당 무 태후(측천무후) 때는 오히려 25곡이었으나 지금은 오직 한 곡을 익힐 수 있고, 의복도 또한 점차 낡아 없어져서 그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했다. 《책부원귀》에는 “음악에는 5현 · 금 · 쟁 · 필률 · 횡취 · 소 · 고의 등속이며, 갈대를 부는 것으로서 곡조를 맞추었다.”했다.
百濟樂 通典云 『百濟樂 中宗之代 工人死散 開元中 岐王範爲太常卿 復奏置之 是以音伎多闕 舞者二人 紫大袖·裙襦 章甫冠 皮履 樂之存者 箏·笛·桃皮篳篥·箜篌』 樂器之屬 多同於內地 北史云 『有鼓·角·箜篌·箏·竽·箎·笛之樂』
백제 음악은 《통전》에 “백제 은악은 중종대 공인들이 죽고 흩어졌다. 개원 중에 기왕범이 태상경이 되어 다시 둘 것을 아뢰었다. 이 때문에 음악과 재주가 많이 빠졌다. 춤추는 사람은 2인으로 자줏빛 큰 소매와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장보관을 썼고, 가죽신을 신었다. 음악의 남은 것은 쟁 · 적 · 도피필률 · 공후이다.”했다. 악기의 등속이 어내지와 만ㄹ이 같다. 《북사》에 “고 · 각 · 공후 · 쟁 · 우 · 호 · 적의 음악이 있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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