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七十七
魏公子列傳第十七
魏公子無忌者,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昭王薨,安釐王即位,封公子為信陵君。[一]是時范睢亡魏相秦,以怨魏齊故,秦兵圍大梁,破魏華陽下軍,走芒卯。魏王及公子患之。
위나라 공자 무기는 위나라 소왕의 작은 아들로 위나라 안리왕으 이모제이다. 소왕이 죽고 안리왕이 즉위하자 공자를 봉하여 신릉군이라 했다. 이 때 범수가 위나라를 도망하여 진나라 재상이 되었는데 위나라와 제나라를 원망하였기 때문에 진나라 군대가 대량을 포위하고, 위나라 아래서 군대를 깨트리니 망요로 달아났다. 위나라 왕과 공자가 그것을 근심하였다.
[一] 索隱按:地理志無信陵,或是鄉邑名也。
[一] 【索隱】 살펴보니 『地理志』에 신릉이 없으니 혹 이는 향읍의 이름일 것이다.
公子為人仁而下士,士無賢不肖皆謙而禮交之,不敢以其富貴驕士。士以此方數千里爭往歸之,致食客三千人。當是時,諸侯以公子賢,多客,不敢加兵謀魏十餘年。
공자의 사람됨이 어질고 선비에게 낮추어 선비들은 현명하고, 현명하지 않음을 가리지 않고 모두 겸손하고 예로 사귀어 감히 그 부귀함으로써 선비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이 때문에 사방 수 천리에서 다투어 가서 귀의하니 식객이 3천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제후들이 공자가 어질고 식객이 많았기 때문에 감히 군대를 가하여 위나라를 도모하지 못한 것이 10여년이었다.
公子與魏王博,而北境傳舉烽,言「趙寇至,且入界」。[一]魏王釋博,欲召大臣謀。公子止王曰:「趙王田獵耳,非為寇也。」[二]復博如故。王恐,心不在博。居頃,復從北方來傳言曰:「趙王獵耳,非為寇也。」魏王大驚,曰:「公子何以知之?」公子曰:「臣之客有能深得趙王陰事[三]者,趙王所為,客輒以報臣,臣以此知之。」是後魏王畏公子之賢能,不敢任公子以國政。
공자와 위나라 왕이 도박을 하는데 북쪽 경계에서 봉화를 든 것을 전하고 말하기를 “조나라 도적이 이르고, 또한 경계에 들어왔다.” 했다. 위나라 왕이 도박을 풀고 대신을 불러 도모하고자 하였다. 공자가 왕을 저지하면 말하기를 “조나라 왕의 사냥일 뿐으로 도적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했다. 위나라 왕이 크게 놀라서 말하기를 “공자는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신의 식객 중에 깊이 조나라 왕의 몰래 하는 일을 얻은 자가 있는데 조나라 왕이 하는 바는 객이 문득 신에게 보고하기 때문에 신이 아는 것입니다.”했다. 이 후 위나라 왕이 공자의 현명함과 능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공자에게 국정을 맡기지 못하였다.
[一] 集解文穎曰;「作高木櫓,櫓上作桔槔,桔槔頭兜零,以薪置其中,謂之烽。常低之,有寇即火然舉之以相告。」
[一]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높은 나무로 망루를 만들고, 망루 위에 桔槹(길고: 두레박)을 만들며, 두레박 머리에 바구니를 달고 그 안에 섶을 두는데 그것을 烽(봉: 봉화)이라 말한다. 항상 밑에 두었다가 도적이 있으면 곧 불태우고 그것을 들어서 서로 알린다.
[二] 正義為,于偽反。
[二] 【正義】 ‘爲’는 ‘于’와 ‘僞’의 反이다.
[三] 索隱按:譙周作「探得趙王陰事」。
[三] 【索隱】 살펴보니 초주는 “探得趙王陰事(조나라 왕의 비밀스러운 일을 찾아냈다.)”라고 썼다.
魏有隱士曰侯嬴,[一]年七十,家貧,為大梁夷門監者。公子聞之,往請,欲厚遺之。不肯受,曰:「臣脩身絜行數十年,終不以監門困故而受公子財。」公子於是乃置酒大會賓客。坐定,公子從車騎,虛左,自迎夷門侯生。侯生攝敝衣冠,直上載公子上坐,不讓,欲以觀公子引車入巿,侯生下見其客朱亥,俾倪[二]故久立,與其客語,微察公子。公子顏色愈和。當是時,魏將相宗室賓客滿堂,待公子舉酒。巿人皆觀公子執轡。從騎皆竊罵侯生。侯生視公子色終不變,乃謝客就車。至家,公子引侯生坐上坐,遍贊賓客,[三]賓客皆驚。酒酣,公子起,為壽侯生前。侯生因謂公子曰:「今日嬴之為公子亦足矣。[四]嬴乃夷門抱關者也,而公子親枉車騎,自迎嬴於眾人廣坐之中,不宜有所過,今公子故過之。然嬴欲就公子之名,故久立公子車騎巿中,過客以觀公子,公子愈恭。巿人皆以嬴為小人,而以公子為長者能下士也。」於是罷酒,侯生遂為上客。公子。公子執轡愈恭。侯生又謂公子曰:「臣有客在市屠中,願枉車騎過之。」
위나라에 은사 가운데 후영이라 불리는 자로 나이는 70세이고 집은 가난하며 대량의 이문 감(대량성 동문 수문장)이 된 자가 있었다. 공자(신릉군)가 듣고 가서 청하여 후히 주고자 하였다. (후영)이 즐겨 받지 않고 말하기를 “신이 뭄을 닦고 행동을 깨끗하게 한한 것이 수십 년인데 마침내 문을 감독하는 곤궁한 일 때문에 공자(신릉군)의 재물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했다. 공자(신릉군)가 이에 술을 두고 크게 빈객을 모았다. 자리를 정하고 공자가 수레를 따르게 하면서 수레 왼쪽자리를 비우고 스스로 이문에서 후생(후영)을 맞이하였다. 후생이 헤진 옷과 관을 정돈하고 곧바로 공자(신릉군)의 윗자리에 올라타면서 사양하지 않고 공자(신릉군)를 관찰하고자 하였다. 공자(신릉군)가 고삐를 잡고 더욱 공손히 하였다. 후생(영)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신은 객이 있는데 시장의 도살장(푸줏간)에 있으니 수레를 굽혀서(돌려서) 그곳을 지나가기를 원합니다.” 했다. 공자(신릉군)가 수레를 이끌고 시장에 들어가니 후생이 내려서 그 객 주해를 만났는데 흘겨보면서 오래서서 그 객과 말하며 은밀히 공자(신릉군)를 살폈다. 공자(신릉군)의 안색이 더욱 온화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위나라 장상과 종실, 빈객이 집을 가득 채우고 공자(신릉군) 술을 들기를 기다렸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공자(신릉군)가 고삐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말을 타고 따르는 이가 모두 몰래 후생(후영)을 몰래 욕하였다. 후생(후영)이 공자의 얼굴색이 끝내 변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이에 객을 하직하고 수레에 올랐다. 집에 이르러 공자가 후생(영)을 인도하여 윗자리에 앉히고 두루 빈객들에게 알리니(소개하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주연이 한창 무르익자 공자(신릉군)가 일어나 후생(영) 앞에서 축수하였다. 후생(영)이 공자(신릉군)에게 말하기를 “오늘 제가 공자를 위하는 것이 또한 충분합니다.(만족합니다.) 저는 곧 이문의 관을 지키는 자일 뿐인데 공자(신릉군)께서 직접 수레를 돌리시고 스스로 저를 여러 사람이 있는 넓은 자리의 가운데에서 맞아주시고, 마땅히 지나치는 곳이 있지 않음에도 오늘 공자(신릉군)께서 일부러 지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공자의 이름을 나아가고자(높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오래 동안 공자(신릉군)의 수레를 시장 가운데 세워두어 지나는 객이 공자를 관찰하게 하였는데 공자(신릉군)께서 더욱 공손하였습니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저를 소인이라 하고, 공자는 장자(귀한 사람)이면서도 선비에게 낮출 수 있는 이라 하였습니다.”했다. 이에 술마시기를 마치고 후생(영)을 마침내 상객으로 삼았다.
[一] 索隱音盈。又曹植音「羸瘦」之「羸」。
[一] 【索隱】 음은 ‘盈’이다. 또 조식은 음이 ‘羸瘦(리수)’의 ‘羸(파리할 리)’라 했다.
[二] 索隱上音浦計反,下音五計反。鄒誕云又上音疋未反,下音五弟反。正義不正視也。
[二] 【索隱】 위의 음은 ‘浦’와 ‘計’의 反이고, 아래의 음은 ‘五’와 ‘計’의 反이다. 추탄이 말하기를 “위의 음은 ‘疋’과 ‘未’의 反이고, 아래의 음은 ‘五’와 ‘弟’의 反이다. 【正義】 바로 보지 않는 것이다.]
[三] 索隱遍音遍。贊者,告也。謂以侯生遍告賓客。
[三] 【索隱】 ‘遍’의 음은 ‘遍(변)’이다. ‘贊’은 알리는 것이다. 후생(영)을 두루 빈객에게 알리는 것이다.
[四] 集解徐廣曰:「為,一作『羞』。」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爲’는 ‘羞’라고도 쓴다.” 했다.
侯生謂公子曰:「臣所過屠者朱亥,此子賢者,世莫能知,故隱屠閒耳。」公子往數請之,朱亥故不復謝,公子怪之。
후생이 공자(신릉군)에게 말하기를 “신이 지난 곳인 도살장(푸줏간)의 주해는 이 사람은 현명한자(어진 자)인데 세상에서 능력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도살장에 숨었을 뿐입니다.” 했다. 공자(신릉군)이 가서 여러 번 청하였으나 주해가 일부러 다시 사양하지 않으니 공자(신릉군)이 괴이하게 여겼다.
魏安釐王二十年,秦昭王已破趙長平軍,又進兵圍邯鄲。公子姊為趙惠文王弟平原君夫人,數遺魏王及公子書,請救於魏。魏王使將軍晉鄙[一]將十萬眾救趙。秦王使使者告魏王曰:「吾攻趙旦暮且下,而諸侯敢救者,已拔趙,必移兵先擊之。」魏王恐,使人止晉鄙,留軍壁鄴,名為救趙,實持兩端以觀望。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讓魏公子曰:「勝所以自附為婚姻者,以公子之高義,為能急人之困。今邯鄲旦暮降秦而魏救不至,安在公子能急人之困也!且公子縱輕勝,棄之降秦,獨不憐公子姊邪?」公子患之,數請魏王,及賓客辯士說王萬端。魏王畏秦,終不聽公子。公子自度終不能得之於王,計不獨生而令趙亡,乃請賓客,約車騎百餘乘,欲以客往赴秦軍,與趙俱死。
위나라 안리왕 20년 진나라 소왕이 이미 조나라 장평에서 군대를 깨트리고 또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한단을 포위하였다. 공자(신릉군)의 누이는 조나라 혜문왕의 동생인 평원군의 부인인데 여러 번 위나라 왕과 공자(신릉군)에게 글을 보내 위나라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위나라 왕이 장군 진비로 하여금 1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진나라 와이 사자를 시켜 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나라를 아침에 공격하고 저녁에 또한 함락시켜 제후로 감히 구하려는 자는 이미 조나라를 함락하고 반드시 군대를 옮겨 먼저 공격할 것이다.” 했다. 위나라 왕이 두려워하여 사람을 시켜 진비를 멈추게 하고는 군대를 벽업에 머물게 하고 이름만 조나라를 구원한다하고 실제는 두 끝을 잡고 관망하였다.
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讓魏公子曰:「勝所以自附為婚姻者,以公子之高義,為能急人之困。今邯鄲旦暮降秦而魏救不至,安在公子能急人之困也!且公子縱輕勝,棄之降秦,獨不憐公子姊邪?」公子患之,數請魏王,及賓客辯士說王萬端。魏王畏秦,終不聽公子。公子自度終不能得之於王,計不獨生而令趙亡,乃請賓客,約車騎百餘乘,欲以客往赴秦軍,與趙俱死。
평원군의 사자가 관을 쓰고 위나라에 서로 이어지게 하면서 위나라 공자(신릉군)을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붙이는 것으로써 혼인한 까닭은 공자(신릉군)의 높은 의로움으로써 급한 사람의 곤궁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단이 아침저녁으로 진나라에 항복하려 하는데 위나라의 구원군이 이르지 않으니 어찌 공자(신릉군)께서(공자의 뜻이) 급한 사람의 곤궁함을 잘 하는데(잘 돕는데) 있다 할 수 있을까! 도한 공자(신릉군)가 나(勝:평원군)를 가벼이 여기고 진나라에 항복하도록 버려두니 홀로되는 공자(신릉군)의 누이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가?” 했다. 공자(신릉군)가 근심하여 여러 차례 위나라 왕에게 청하고, 빈객, 변사들이 왕에게 만 가지 단서로 유세함에 이르렀다.(여러 가지 방법으로 왕을 설득하였다.) 위나라 왕이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끝내 공자(신릉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자(신릉군)가 스스로 왕에게 끝내 그것(구원군의 파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 홀로 살아서 조나라를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헤아리고 이에 빈객을 청하고 수레 100여대를 묶고 객이 가서 진나라 군대에 나아가게 하여 조나라와 함께 죽고자 하였다.
[一] 索隱魏將姓名也。
[一] 【索隱】 위나라 장수의 성명이다.
行過夷門,見侯生,具告所以欲死秦軍狀。辭決而行,侯生曰:「公子勉之矣,老臣不能從。」公子行數里,心不快,曰:「吾所以待侯生者備矣,天下莫不聞,今吾且死而侯生曾無一言半辭送我,我豈有所失哉?」復引車還,問侯生。侯生笑曰:「臣固知公子之還也。」
가서 이문을 지나다 후생(영)을 보고는 진나라 군대와 함께 죽으려하는 형상을 말하였다. 하직하고 가려는데 후생(영)이 말하기를 “공자(신릉군)께서는 힘쓰십시오. 노신은 다르지 못합니다.” 했다. 공자가 수리를 가다가 마음에 불쾌하여 말하기를 “후생(영)을 대우한 것이 갖추어졌음은 천하가 듣지 않음이 없는데 지금 내가 또한 죽으려는데 후생(영)이 일찍이 한마디 말과 반 마디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보내니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는가?” 하고는 다시 수레를 끌고 돌아가 후생(영)에게 물었다. 후생(영)이 웃으며 말하기를 “신은 진실로 공자(신릉군)께서 돌아올 것을 알았습니다.” 했다.
曰:「公子喜士,名聞天下。今有難,無他端而欲赴秦軍,譬若以肉投餒虎,何功之有哉?尚安事客?然公子遇臣厚,公子往而臣不送,以是知公子恨之復返也。」公子再拜,因問。侯生乃屏人閒語,[一]曰:「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而如姬最幸,出入王臥內,力能竊之。嬴聞如姬父為人所殺,如姬資之三年,[二]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莫能得。如姬為公子泣,公子使客斬其仇頭,敬進如姬。如姬之欲為公子死,無所辭,顧未有路耳。公子誠一開口請如姬,如姬必許諾,則得虎符奪晉鄙軍,北救趙而西卻秦,此五霸之伐也。」公子從其計,請如姬。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
(후영이) 말하기를 “공자(신릉군)께서 선비를 기쁘게 한다는 명성은 천하가 들었습니다.(천하에 알려졌습니다.) 지금 어려움이 있는데 다른 실마리가 없어 진나라 군대에 나아가고자 하시니 비유하면 고기를 주린 범에게 던지는 것과 같으니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어찌 객을 섬기겠습니까? 그러나 공자(신릉군)께서 신을 대우함이 두터운데도 공자(신릉군)게서 감에도 신이 전송하지 않는 것은 공자(신릉군)께서 그것을 한스럽게 여겨 돌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했다. 공자(신릉군)가 두 번 절하고 물었다. 후생(영)이 이에 사람을 막고 조용히 말하기를 “영(제가)이 들으니 진비의 병부는 항상 왕의 침실 안에 있다 하고 여희를 가장 사랑하여 왕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으니 힘으로 그것을 훔칠 수 있습니다. 영이(제가)들으니 여희의 아비가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여희가 3년 동안이나 재물을 써서 왕으로부터 이하하가 그 아비의 원수를 보복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희가 공자(신릉군)에게 눈물을 흘리자 공자(신릉군)께서 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공경히 여희에게 올렸습니다. 여희는 공자를 위해 죽어도 거절하는 바가 없고자 할 것인데 다만 길이 있지 않았을 뿐입니다. 공자(신릉군)께서 한번 입을 열어 여희에게 청하면 여희는 반드시 허락할 것이니 곧 호부(병부)를 얻어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북쪽으로는 조나라를 구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물리치면 이는 5覇의 공적이 될 것입니다.” 했다. 공자(신릉군)이 그 계책을 따라 여희에게 청하였다. 여희가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서 공자(신릉군)에게 주었다.
[一] 索隱閒音閑。[閒]語謂靜語也。
[一] 【索隱】 ‘閒’의 음은 ‘閑’이다. ‘[閒]語’는 ‘靜語’를 말한다.
[二] 索隱舊解資之三年謂服齊衰也。今案:資者,畜也。謂欲為父復讎之資畜於心已得三年矣。
[二] 【索隱】 ‘資之三年’의 옛 풀이는 ‘齊衰 3년 복을 입는다.’를 말한다고 했다. 지금 살펴보니 ‘資’는 ‘畜’ 쌓는 것이다. 아비의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에 쌓아두기를 이미 3년을 했다는 말이다.
公子行,侯生曰:「將在外,主令有所不受,以便國家。公子即合符,而晉鄙不授公子兵而復請之,事必危矣。臣客屠者朱亥可與俱,此人力士。晉鄙聽,大善;不聽,可使擊之。」於是公子泣。侯生曰:「公子畏死邪?何泣也?」公子曰:「晉鄙嚄唶[一]宿將,往恐不聽,必當殺之,是以泣耳,豈畏死哉?」於是公子請朱亥。朱亥笑曰:「臣迺市井鼓刀屠者,而公子親數存之,所以不報謝者,以為小禮無所用。今公子有急,此乃臣效命之秋也。」遂與公子俱。公子過謝侯生。侯生曰:「臣宜從,老不能。請數公子行日,以至晉鄙軍之日,北鄉自剄,以送公子。」公子遂行。
공자(신릉군)가 가려는데 후생(영)이 말하기를 “장수는 밖에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이 있는데 국가를 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신릉군)께서 부절(병부)을 합하여도 진비가 공자에게 군대를 주지 않고 다시 (임금에게) 청하면 일이 반드시 위태로워 질 것입니다. 신의 객인 도살장(푸줏간)의 주해와 함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니 이 사람은 역사입니다. 진비가 들으면 크게 좋은 것이나 듣지 않으면 치게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이에 공자(신릉군)이 눈물을 흘렸다. 후생(영)이 말하기를 “공자(신릉군)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어찌하여 눈물을 흘립니까?” 했다. 공자(신릉군)이 말하기를 “진비는 크게 소리치는 경험 많은 노련한 장수인데 가서 듣지 않으면 반드시 마땅히 죽여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일 뿐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했다. 이에 공자(신릉군)가 주해를 청하였다. 주해가 웃으며 말하기를 “신은 시장에서 소 잡는 백정인데 공자(신릉군)께서 친히 여러 번 살펴주셨는데도 갚고 사례하지 않은 까닭은 작은 예는 쓸 바가 없다 여겨서입니다. 지금 공자(신릉군)께서 급함이 있고, 이는 곧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공자(신릉군)와 함께 하였다. 공자(신릉군)가 지나면서 후생(영)에게 사례하였다. 후생(영)이 말하기를 “신이 마땅히 다라야 하나 늙어 하지 못합니다. 공자(신릉군)께서 가는 날을 헤아려 진비의 군대에 이르는 날에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맬 것을 청하는 것으로써 공자(신릉군)를 전송합니다.” 했다. 공자(신릉군)가 드디어 갔다.
[一] 集解上音烏百反,下音莊白反。索隱上烏白反,下爭格反。案:嚄唶謂多詞句也。正義聲類云:「嚄,大笑。唶,大呼。」
[一] 【集解】 위의 음은 ‘烏’와 ‘百’의 反이고, 아래 음은 ‘莊’과 ‘白’의 反이다. 【索隱】 위는 ‘烏’와 ‘白’의 반이고, 아래는 ‘爭’과 ‘格’의 反이다. 살펴보니 ‘嚄唶’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다. 【正義】 「聲類」에 “‘嚄’은 크게 웃는 것이다. ‘唶’는 크게 부르짖는 것이다.” 했다.
至鄴,矯魏王令代晉鄙。晉鄙合符,疑之,舉手視公子曰:「今吾擁十萬之眾,屯於境上,國之重任,今單車來代之,何如哉?」欲無聽。朱亥袖四十斤鐵椎,椎殺晉鄙,公子遂將晉鄙軍。勒兵下令軍中曰:「父子俱在軍中,父歸;兄弟俱在軍中,兄歸;獨子無兄弟,歸養。」得選兵八萬人,進兵擊秦軍。秦軍解去,遂救邯鄲,存趙。趙王及平原君自迎公子於界,平原君負籣矢[一]為公子先引。趙王再拜曰:「自古賢人未有及公子者也。」當此之時,平原君不敢自比於人。公子與侯生決,至軍,侯生果北鄉自剄。
업에 이르자 위나라 왕의 명령을 속여서 진비를 대신하려 했다. 진비가 부절(병부)가 부합함에도 의심하여 손을 들고 공자(신릉군)를 보며 말하기를 “지금 내가 1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국경 상에 주둔하여 나라의 중임을 맡고 있는데 지금 수레 한 대로 와서 대신하려하면 어떠하겠는가?” 하고는 듣지 않으려 했다. 주해가 소매에서 40근의 철추(쇠몽둥이)를 내고 쇠몽둥이로 진비를 죽이니 공자(신릉군)가 마침내 진비의 군대를 거느렸다. 군대를 윽박질러 군중(부대)에 명령하기를 “부자가 함께 부대에 있으면 아비는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부대에 있으면 형이 돌아가고, 아들이 하나여서 형제가 없으면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했다. 군대 8만명을 선발하고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진나라 군대를 쳤다. 진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나니 마침내 한단을 구원하고 조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조나라 왕과 평원군이 스스로 경계에서 공자(신릉군)를 맞이하였는데 평원군은 화살통과 화살을 등에 지고 공자(신릉군)를 앞서 인도하였다. 조나라 왕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옛날부터 현인으로 공자에 미치는 이는 있지 않았습니다.” 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평원군이 감히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견주지 못하였다. 공자(신릉군)와 후생(영)이 결단하여 군에 이르니 후생(영)이 과연 북쪽을 향하여 스스로 목을 메고 죽었다.
[一] 集解呂忱曰:「籣盛弩矢。」 索隱籣音蘭。謂以盛矢,如今之胡簏而短也。呂姓,忱名,作字林者。言籣盛弩矢之器。
[一] 【集解】 여침이 말하기를 “‘籣’은 화살을 담는 것이다.” 했다. 【索隱】 ‘籣’의 음은 ‘蘭’인데 화살을 담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胡簏’과 같은데 짧다. ‘呂’는 성이고 ‘忱’은 이름인데 글자를 ‘林’이라고 쓴 것이다. ‘籣’은 화살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
魏王怒公子之盜其兵符,矯殺晉鄙,公子亦自知也。已卻秦存趙,使將將其軍歸魏,而公子獨與客留趙。趙孝成王德公子之矯奪晉鄙兵而存趙,乃與平原君計,以五城封公子。公子聞之,意驕矜而有自功之色。客有說公子曰:「物有不可忘,或有不可不忘。夫人有德於公子,公子不可忘也;公子有德於人,願公子忘之也。且矯魏王令,奪晉鄙兵以救趙,於趙則有功矣,於魏則未為忠臣也。公子乃自驕而功之,竊為公子不取也。」
위나라 왕이 공자가 그 병부를 훔치고, 거짓(왕명으로) 진비를 죽인 것에 대해 노한 것을 공자(신릉군)가 또한 스스로 알았다. 이미 진나라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보존하고 나서 장수들로 하여금 그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에 돌아가게 하고 공자(신릉군)는 홀로 객과 함께 조나라에 머물렀다. 조나라 효성왕이 공자(신릉군)의 속여서 진비의 군대를 빼앗은 덕으로 조나라를 보존시켰다. 여겨서(공자(신릉군)의 속여서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보존시킨 덕을 베풀었다 여겨서) 이에 평원군과 (공, 덕을)헤아려 5개성으로써 공자(신릉군)을 봉하였다. 공자(신릉군)가 그것을 듣고 뜻이 교만하여 지나치게 자랑하고 스스로 공을 자랑하는 모습이 있었다. 객이 있어 공자(신릉군)에게 말하기를 “사물에는 잊을 수 없는 것과 혹 잊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이 공자(신릉군)에 덕을 베푼 것이 있는 것은 공자(신릉군)께서 잊을 수 없는 것이고, 공자(신릉군)께서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푼 것이 있으면 공자(신릉군)게서는 그것을 잊어버리기를 원합니다. 또 위나라 왕의 명령을 속여서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한 것은 조나라에는 공이 있는 것이지만 위나라에는 곧 충신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공자(신릉군)께서 곧 스스로 교만하고, 공이 있다 여기는 것을 공자(신릉군)께서는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했다.
於是公子立自責,似若無所容者。趙王埽除自迎,執主人之禮,引公子就西階。公子側行辭讓,從東階上[一]。自言罪過,以負於魏,[二]無功於趙。趙王侍酒至暮,口不忍獻五城,以公子退讓也。公子竟留趙。趙王以鄗[三]為公子湯沐邑,魏亦復以信陵奉公子。公子留趙。
이에 공자(신릉군)가 스스로를 꾸짖어 마치 용납하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조나라 왕이 주인의 예를 집행하여 공자(신릉군)를 인도하여 서쪽 계단으로 나아갔다. 공자(신릉군)가 옆으로 가면서 사양하고 동쪽 계단을 따라갔다. 스스로 죄와 허물을 말하기를 위나라를 저버렸고, 조나라에는 공이 없다. 하였다. 조나라 왕이 모시고 술을 마시는데 저녁에 이르기까지 입으로 차마 5개성을 바친다 말하지 못하였는데 공자(신릉군)가 물리치고 사양하였기 때문이다. 공자(신릉군)이 마침내 조나라에 머물렀다. 조나라 왕이 䧚(호)땅으로서 공자(신릉군)의 湯沐邑으로 삼았고, 위나라가 또한 다시 공자를 신릉군으로 봉하였다. 공자는 조나라에 머물렀다.
[一] 集解禮記曰:「主人就東階,客就西階。客若降等,則就主人之階。」
[一] 【集解】 『禮記』에 “주인은 동쪽 계단으로 가고(오르고) 객은 서쪽 계단으로 간다.(오른다.) 객이 만약 등급을 내리면(降等) 곧 주인의 계단으로 나아간다.(오른다.)” 했다.
[二] 索隱負音佩。
[二] 【索隱】 ‘負’의 음은 ‘佩’이다.
[三] 索隱音臛,趙邑名,屬常山。
[三] 【索隱】 음은 ‘臛’이니 조나라의 읍명으로 상산에 속한다.
公子聞趙有處士毛公藏於博徒,薛公藏於賣漿家,[一]公子欲見兩人,兩人自匿不肯見公子。公子聞所在,乃閒步往從此兩人游,甚歡。平原君聞之,謂其夫人曰:「始吾聞夫人弟公子天下無雙,今吾聞之,乃妄從博徒賣漿者游,公子妄人耳。」夫人以告公子。公子乃謝夫人去,曰:「始吾聞平原君賢,故負魏王而救趙,以稱平原君。平原君之游,徒豪舉耳,[二]不求士也。無忌自在大梁時,常聞此兩人賢,至趙,恐不得見。以無忌從之游,尚恐其不我欲也,今平原君乃以為羞,其不足從游。」乃裝為去。夫人具以語平原君。平原君乃免冠謝,固留公子。平原君門下聞之,半去平原君歸公子,天下士復往歸公子,公子傾平原君客。
공자(신릉군)가 조나라에는 처사가 있는데 모공은 도박하는 무리에게 숨어있고, 설공은 술을 파는 집에 숨어 있다는 것을 듣고는 공자(신릉군)가 두 사람을 보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은 스스로 숨어 즐겨 공자(신릉군)를 보려하지 않았다. 공자(신릉군)가 있는 곳을 듣고는 곧 한가로운 걸음으로 가서 이 두 사람을 따라 놀았는데 매우 즐거워하였다. 평원군이 그것을 듣고는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나는 부인의 동생인 공자(신릉군)가 천하에 둘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내가 들어보니 곧 망녕되이 도박하는 무리와 술을 파는 자와 노닐고 있으니 공자(신릉군)는 망녕된 사람일 뿐입니다.” 했다. 부인이 공자(신릉군)에게 알렸다. 공자(신릉군)가 부인에게 사례하고 떠나서 말하기를 “처음에 나는 평원군이 현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위나라 왕을 저버리고 조나라를 구원하는 것으로써 평원군에 걸맞게 하였습니다. 평원군이 노니는 것은 한갓 호쾌한 행동뿐으로 선비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無忌: 신릉군의 이름) 대량에 있을 때부터 항상 이 두 사람이 현명하다는 것을 들었고, 조나라에 이르러서는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을 따라 노닐면서 오히려 그들이 나를 바라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평원군이 곧 수치스럽게 여기니 (평원군을)따라 노닐기에는 부족합니다.” 하고는 이에 짐을 꾸려서 떠나갔다. 부인이 갖추어서 평원군에게 말하였다. 평원군이 관을 벗고 사과하면서 굳게 공자(신릉군)를 만류하였다. 평원군의 문하에서 그것을 듣고 반이 평원군을 떠나 공자(신릉군)에게 돌아갔으며, 천하의 선비들이 다시 공자(신릉군)에게 돌아갔으니 공자(신릉군)는 평원군의 객도 기울게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漿,一作『醪』。」 索隱按:別錄云「漿,或作『醪』字」。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漿’은 ‘醪’라고 쓰기도 한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別錄』에 “‘漿’은 ‘醪’자로 쓰기도 한다.” 했다.
[二] 索隱謂豪者舉之。舉亦音據也。
[二] 【索隱】 호탕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擧’의 음은 ‘據’이다.
公子留趙十年不歸。秦聞公子在趙,日夜出兵東伐魏。魏王患之,使使往請公子。公子恐其怒之,乃誡門下:「有敢為魏王使通者,死。」賓客皆背魏之趙,莫敢勸公子歸。毛公、薛公[一]兩人往見公子曰:「公子所以重於趙,名聞諸侯者,徒以有魏也。今秦攻魏,魏急而公子不恤,使秦破大梁而夷先王之宗廟,公子當何面目立天下乎?」語未及卒,公子立變色,告車趣駕歸救魏。
공자(신릉군)이 조나라에 10년을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았다. 진나라가 공자(신릉군)이 조나라에 있다는 것을 듣고는 밤낮으로 군대를 내어 위나라를 쳤다. 위나라 왕이 그것을 근심하여 사신을 가게 하여 공자(신릉군)를 (위나라로 돌아오게)청하였다. 공자(신릉군)가 그 노함을 두려워하여 이에 문하에 경계하기를 “감히 위나라 사자(사신)와 통하는 자는 죽인다.” 했다. 빈객이 모두 위나라를 배신하고 조나라에 가서 감히 공자(신릉군)의 귀국을 권하지 못하였다.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가서 공자(신릉군)를 보고 말하기를 “공자(신릉군)가 조나라에서 귀중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명성이 제후에게 알려졌던 이유는 무리가 위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가 다급함에도 공자(신릉군)가 돌보지 않으니 진나라가 대량을 깨트려서 선왕(돌아가신 왕)의 종묘를 멸하면 공자(신릉군)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겠습니까?” 했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자(신릉군)가 일어서면서 얼굴색이 변하고 수레에 달려가면서 멍에 지워 돌아가 위나라를 구할 것을 말하였다.
[一] 索隱史不記其名。
[一] 【索隱】 사서에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魏王見公子,相與泣,而以上將軍印授公子,公子遂將。魏安釐王三十年,公子使使遍告諸侯。諸侯聞公子將,各遣將將兵救魏。公子率五國之兵破秦軍於河外,走蒙驁。遂乘勝逐秦軍至函谷關,抑秦兵,[一]秦兵不敢出。當是時,公子威振天下,諸侯之客進兵法,公子皆名之,[二]故世俗稱魏公子兵法。[三]
위나라 왕이 공자(신릉군)를 보고 서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상장군의 인을 공자(신릉군)에게 주니 공자(신릉군)가 마침내 장수가 되었다. 위나라 안리왕 30년 공자(신릉군)가 사신을 시켜 두루 제후에게 알렸다. 제후들이 공자(신릉군)가 장수가 되었다는 것을 듣고 각기 장군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구원하였다. 공자(신릉군)가 5개국의 군대를 인솔하고 진나라 군대를 하외에서 깨트리고 몽오를 달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이김을 타고 진나라 군대를 쫓아 함곡관에 이르러 진나라 군대를 막으니 진나라 군대가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공자(신릉군)의 위엄이 천하에 떨쳤는데 제후의 객이 병법을 올리자 공자(신릉군)가 모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魏公子兵法』이라 말하였다.
[一] 索隱抑音憶。按:抑謂以兵蹙之。
[一] 【索隱】 ‘抑’의 음은 ‘憶’이다. 살펴보니 ‘抑’은 군대를 위축 시키는 것을 말한다.
[二] 索隱言公子所得進兵法而必稱其名,以言其恕也。
[二] 【索隱】 공자(신릉군)가 올리는 병법을 얻으면 반드시 그 이름을 붙인 것을 말하며 공자(신릉군)의 어짐을 말한 것이다.
[三] 集解劉歆七略有魏公子兵法二十一篇,圖七卷。
[三] 【集解】 유흠의 『七略』에 『위공자병법』 21편과 도 7권이 있다.
秦王患之,乃行金萬斤於魏,求晉鄙客,令毀公子於魏王曰:「公子亡在外十年矣,今為魏將,諸侯將皆屬,諸侯徒聞魏公子,不聞魏王。公子亦欲因此時定南面而王,諸侯畏公子之威,方欲共立之。」秦數使反閒,偽賀公子得立為魏王未也。魏王日聞其毀,不能不信,後果使人代公子將。公子自知再以毀廢,乃謝病不朝,與賓客為長夜飲,飲醇酒,多近婦女。日夜為樂飲者四歲,竟病酒而卒。其歲,魏安釐王亦薨。秦聞公子死,使蒙驁攻魏,拔二十城,初置東郡。其後秦稍蠶食魏,十八歲而虜魏王,[一]屠大梁。
진나라 왕이 그것을 근심하여 위나라에 금 10000근을 뿌리고 진비의 객을 구하여 위나라 왕에게 공자(신릉군)를 헐뜯는 말을 하게 하기를 “공자(신릉군)가 도망하여 (나라 밖에) 있은 지가 10년인데 지근 위나라 장수가 되어 제후와 장수들이 모두 속하였고, 제후의 무리들이 위나라 공자(신릉군)의 명령은 듣고 위나라 왕의 명령은 듣지 않습니다. 공자(신릉군)가 또한 이러한 때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왕이 되고자 하고, 제후들이 공자(신릉군)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함께 (신릉군을 임금으로)세우고자 합니다.” 했다. 진나라가 여러 번 이간하게하고 거짓으로 공자(신릉군)가 위나라 왕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물으며 축하하였다. 위나라 왕이 매일 그 비방을 듣고 믿지 않을 수 없었는데 후에 과연 사람을 시켜 공자(신릉군)의 장군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공자(신릉군)이 스스로 두 번이나 비방으로 폐해졌음을 알고는 이에 병을 핑계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고 빈객과 함께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독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많이 가까이 하였다.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즐기기를 4년이나 하더니 마침내 술병이 들어 죽었다. 그 해 위나라 안리왕이 또한 죽었다 진나라가 공자(신릉군)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는 몽오로 하여금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20개성을 함락시키고 처음으로 동군을 두었다. 그 후 진나라가 점점 위나라를 잠식하여 18년 후에 위나라 왕을 포로로 하고 대량을 무찔렀다.
[一] 索隱魏王名假。
[一] 【索隱】 위나라 왕의 이름은 ‘假’이다.
高祖始微少時,數聞公子賢。及即天子位,每過大梁,常祠公子。高祖十二年,從擊黥布還,為公子置守冢五家,世世歲以四時奉祠公子。
고조가 처음 미천하고 어렸을 때 여러 번 공자(신릉군)의 현명함을 들었다. 천자의 자리에 올라서는 매번 대량을 지날 때 항상 공자(신릉군)를 제사하였다. 고조 12년 경포를 치고 돌아오다 공자(신릉군)를 위하여 守塜(수총: 무덤을 지기) 5家를 두고 대대로 해마다 四時로 공자(신릉군)에게 제사하게 했다.
太史公曰:吾過大梁之墟,求問其所謂夷門。夷門者,城之東門也。天下諸公子亦有喜士者矣,然信陵君之接巖穴隱者,不恥下交,有以也。名冠諸侯,不虛耳。高祖每過之而令民奉祠不絕也。
태사공이 말하기를 “내가 대량의 빈터를 지나다 이른 바 이문을 물어 찾아보았다. 이문은 성의 동문이다. 천하의 여러 공자들이 또한 선비를 기쁘게 하였으나 신릉군만이 바위굴에 숨은 자를 대접하고, 아랫사람과 사귐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다. 명예가 제후들 중에 으뜸인 것은 빈 것이 아니다. 고조가 매번 지나가면서 백성을 시켜 제사를 받들게 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했다.
【索隱述贊】信陵下士,鄰國相傾。以公子故,不敢加兵。頗知朱亥,盡禮侯嬴。遂卻晉鄙,終辭趙城。毛、薛見重,萬古希聲。
【索隱述贊】 신릉군이 선비에게 낮추니 이웃나라가 서로 기울었다. 공자의 일 때문에 감히 군대를 더하지 못하였다. 자못 주해를 알아보고 후영에게 예를 다하였다. 마침내 진비를 물리치고 모공, 설공을 귀중하게 보니 만고에 드문 명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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