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一百十
匈奴列傳第五十
正義此卷或有本次平津侯後,第五十二。今第五十者,先生舊本如此,劉伯莊音亦然。若先諸傳而次四夷,則司馬、汲鄭不合在後也。
【正義】 이 권은 혹 본래 평진후 뒤 제52에 차례 되어있다. 지금 제 50은 선생의 구본이 이와 같고, 유백장의 한서음의가 또한 그러하다. 만약 여러 전들이 앞서고 사이를 다음으로 하면 곧 사마와 급암, 정당시 전은 뒤에 있지 않을 것이다.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一]唐虞以上有山戎、[二]獫狁、葷粥,[三]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其畜之所多則馬、牛、羊,其奇畜則橐駝、[四]驢、驘、[五]駃騠、[六]騊駼、[七]驒騱。[八]逐水草遷徙,毌城郭常處耕田之業,然亦各有分地。[九]毌文書,以言語為約束。兒能騎羊,引弓射鳥鼠;少長[一0]則射狐兔:用為食。士力能毌弓,[一一]盡為甲騎。其俗,寬則隨畜,因射獵禽獸為生業,急則人習戰攻以侵伐,其天性也。其長兵則弓矢,短兵則刀鋋。[一二]利則進,不利則退,不羞遁走。苟利所在,不知禮義。自君王以下,咸食畜肉,衣其皮革,被旃裘。壯者食肥美,老者食其餘。貴壯健,賤老弱。父死,妻其後母;兄弟死,皆取其妻妻之。其俗有名不諱,而無姓字。[一三]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후예인데 ‘순유’라 한다. 당우 이상은 ‘산융’, ‘험윤’, ‘훈육’이 있었는데 북만에 말면서 가축을 따라 기르고 옮겨 다녔다. 그 기르는 바의 많은 것은 말, 소이고, 기이한 가축은 곧 탁타, 나귀, 노새, 결제, 도도, 탄해이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성곽과 항상 머물러 사는 곳과 농사짓는 업이 없다. 그러나 또한 땅을 나눔은 있다. 문서없이 말로써 약속한다. 아이들은 양을 탈 수 있고, 활을 당겨 새와 쥐를 쏘아 잡으며 조금 자라서는 곧 여우와 토기를 쏘아 잡아 써서 밥을 삼는다. 군사는 힘이 세어 활을 당길 수 있고, 모두 갑옷을 입고 말을 탄다. 그 풍속은 넉넉하면 곧 가축을 따르고, 인하여 짐승을 쏘아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급하면 곧 사람들이 싸우고 공격하는 것을 익혀 침벌하는데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이다. 그 장병기는 활과 화살이고, 단병기는 칼과 작은 창이다. 이로우면 곧 나아가고, 불리하면 곧 물러나는데 도망하고 숨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만약 이로운 바가 있으면 예의를 알지 못한다. 군왕으로부터 이하가 모두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옷으로 입으며 그 모직물을 입는다. 강건한 자는 살찌고 맛있는 것을 먹고, 늙은 자는 그 나머지를 먹는다. 강건한 것을 귀하게 여기고, 늙고 약한 것을 천하게 여긴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버지의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하고, 형제가 죽으면 모두 그 처를 취하여 아내로 한다. 그 풍속에 이름은 있지만 이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으며 성은 없다.
[一] 集解漢書音義曰:「匈奴始祖名。」 索隱張晏曰「淳維以殷時奔北邊」。又樂產括地譜云「夏桀無道,湯放之鳴條,三年而死。其子獯粥妻桀之眾妾,避居北野,隨畜移徙,中國謂之匈奴」。其言夏后苗裔,或當然也。故應劭風俗通云「殷時曰獯粥,改曰匈奴」。又服虔云「堯時曰葷粥,周曰獫狁,秦曰匈奴」。韋昭云「漢曰匈奴,葷粥其別名」。則淳維是其始祖,蓋與獯粥是一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흉노는 시조의 이름이다.” 했다. 【索隱】 장안이 말하기를 “순유가 은나라 때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했고, 또 「악산괄지보」에 “하나라 걸왕이 무도하여 은나라 탕왕이 명조에 추방하였는데 3년 후에 죽었다. 그 아들 훈육 걸왕의 여러 첩을 아내로 하고, 피하여 북쪽들에 살면서 가축을 따라 옮겨 다녔는데 중국에서 그들을 흉노라 불렀다.” 했다. 그들을 하후의 후예라 말하는 것은 혹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응소의 『풍속통』에 “은나라 때는 훈육이라 하다 고쳐서 흉노라 한 것이다.” 했다. 또 복건이 말하기를 “요임금 때는 훈육, 주나라 때는 험윤, 진나라 때는 흉노라 불렀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한에서는 흉노라 불렀는데 훈육은 그 별명이다.” 했다. 곧 순유를 이에 그 시조라 한 것은 대개 휸육과 한 가지 이다.
[二] 正義左傳莊三十年「齊人伐山戎」,杜預云「山戎、北戎、無終三名也」。括地志云「幽州漁陽縣,本北戎無終子國」。
[二] 【正義】 『좌전』 장왕 30년에 “제나라 사람들이 산융을 정벌하였다.”하였는데 두예가 “산융, 북융, 무종은 세 이름이다.” 했다. 『괄지지『에 “유주 어양현은 본래 북융 무종자의 나라이다.” 했다.
[三] 集解晉灼云:「堯時曰葷粥,周曰獫狁,秦曰匈奴。」
[三]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요임금 때는 훈육, 주나라는 험윤, 진나라는 흉노라 불렀다.” 했다.
[四] 索隱橐他。韋昭曰:「背肉似橐,故云橐也。」包愷音託。他,或作「駝」。 正義畜,許又反。
[四] 【索隱】 탁타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등의 고기가 전대와 비슷하여 ‘橐’이라 한 것이다.” 했다. 포개는 음을 ‘託’이라 했다. ‘他’는 혹 ‘駝’라 쓴다. 【正義】 ‘畜’의 음은 ‘許’와 ‘又’의 反이다.
[五] 索隱案:古今注云「驢牡馬牝,生驘」。正義驘音力戈反。
[五] 【索隱】 살펴보니 「고금주」에 “당나귀 수컷과 말 암컷이 낳은 것을 노새라 한다.” 했다. 【正義】 ‘驘’의 음은 ‘力’과 ‘戈’의 反이다.
[六] 集解徐廣曰:「北狄駿馬。」 索隱說文云「駃騠,馬父驘子也」。廣異志音決蹄也。發蒙記「刳其母腹而生」。列女傳云「生七日超其母」。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북쪽 오랑캐의 좋은 말이다.” 했다. 【索隱】 『설문』에 “결제는 말을 아비로 둔 노새이다.” 했다. 광이지는 음이 결제라 했다. 『발몽기』에 “그 어미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다.” 했다. 『열녀전』에 “태어 난지 7일에 그 어미를 뛰어 넘는다.” 했다.
[七] 集解徐廣曰:「似馬而青。」 索隱按:郭璞注爾雅云「騊駼馬,青色,音淘塗」。又字林云野馬。山海經云「北海有獸,其狀如馬,其名騊駼」也。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말과 비슷한데 색이 푸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곽복이 주석한 『이아』에 “도도 말은 푸른색이고 음은 ‘淘塗’이다.” 했다. 또 『자림』에 “야생말이다.” 했다. 『산해경』에 “북해에 짐승이 있는데 그 형상은 말 같은데 그 이름을 도도라 한다.” 했다.
[八] 集解徐廣曰:「音顛。巨虛之屬。」 索隱驒奚。韋昭驒音顛。說文「野馬屬」。徐廣云「巨虛之類」。一云青驪白鱗,文如鼉魚。鄒誕生本「奚」字作「騱」。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음은 ‘顚’이다. ‘巨虛’의 등속이다.” 했다. 【索隱】 탄해이다. 위소는 “‘驒(연전총 탄)’은 음이 ‘顚’이다.” 했다. 『설문』에 “야생말의 등속이다.” 했다. 서광은 “거허의 등속이다.” 했다. 한편으로 푸른색 말로 흰 비늘이고 무늬는 악어와 같다. 추탄생 본에는 ‘奚’를 ‘騱’라 썼다.
[九] 索隱上音扶糞反。
[九] 【索隱】 위 음은 ‘扶’와 ‘糞’의 反이다.
[一0] 索隱上音式紹反,下音陟兩反。少長謂年稍長。
[一0] 【索隱】 위의 음은 ‘式’과 ‘紹’의 反이고, 아래 음은 ‘陟’과 ‘兩’의 反이다. 少長은 나이가 조금 많은 것이다.
[一一] 索隱上音彎,如字亦通也。
[一一] 【索隱】 위의 음은 ‘彎’이고, 글자 와 같은 것도 또한 통한다.
[一二] 集解韋昭曰:「鋋形似矛,鐵柄。音時年反。」 索隱音蟬。埤蒼云「鋋,小矛鐵矜」。古今字詁云「■,通作『矜』」。
[一二]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鋌’의 형상은 창과 비슷하고 쇠자루이다. 음은 ‘時’와 ‘年’의 反이다.” 했다. 【索隱】 음은 ‘蟬 ’이다. 비창에 말하기를 “‘鋌’은 작은 창으로 쇠자루가 달려있다.” 했다. 「고금자고」에 “‘■’는 ‘矜’이라 써도 통한다.” 했다.
[一三] 集解漢書曰:「單于姓攣鞮氏。」 索隱攣音六緣反。鞮音丁啼反。
[一三] 【集解】 『한서』에 “선우의 성은 ‘련제’씨이다.” 했다. 【索隱】 ‘攣’의 음은 ‘六’과 ‘緣’의 反이다. ‘鞮’의 음은 ‘丁’과 ‘啼’의 反이다.
夏道衰,而公劉失其稷官,[一]變于西戎,邑于豳。其後三百有餘歲,戎狄攻大王亶父,[二]亶父亡走岐下,而豳人悉從亶父而邑焉,作周。[三]其後百有餘歲,周西伯昌伐畎夷氏。[四]後十有餘年,武王伐紂而營雒邑,復居于酆鄗,放逐戎夷涇、洛之北[五],以時入貢,命曰「荒服」。其後二百有餘年,周道衰,[六]而穆王伐犬戎,得四白狼四白鹿以歸。自是之後,荒服不至。於是周遂作甫刑之辟。穆王之後二百有餘年,周幽王用寵姬褒姒之故,與申侯有卻。[七]申侯怒而與犬戎共攻殺周幽王于驪山之下,[八]遂取周之焦穫,[九]而居于涇渭之閒,侵暴中國。秦襄公救周,於是周平王去酆鄗而東徙雒邑。當是之時,秦襄公伐戎至岐,始列為諸侯。[一0]是後六十有五年,而山戎[一一]越燕而伐齊,齊釐公與戰于齊郊。其後四十四年,而山戎伐燕。燕告急于齊,齊桓公北伐山戎,山戎走。其後二十有餘年,而戎狄至洛邑,伐周襄王,襄王奔于鄭之氾邑。[一二]初,周襄王欲伐鄭,故娶戎狄女為后,與戎狄兵共伐鄭。已而黜狄后,狄后怨,而襄王後母曰惠后,有子子帶,欲立之,於是惠后與狄后、子帶為內應,開戎狄,戎狄以故得入,破逐周襄王,而立子帶為天子。於是戎狄或居于陸渾,[一三]東至於衛,侵盜暴虐中國。中國疾之,故詩人歌之曰「戎狄是應」,「薄伐獫狁,至於大原」,[一四]「出輿彭彭,城彼朔方」。[一五]周襄王既居外四年,乃使使告急于晉。晉文公初立,欲修霸業,乃興師伐逐戎翟,誅子帶,迎內周襄王,居于雒邑。
하나라의 도가 쇠퇴하고 공유가 그 직관을 잃고 서융에게 변을 당하여 빈 땅에 도읍하였다. 그 후 300여년이 지난 후 융적이 태왕 단보를 공격하니 단보가 도망하여 기산 아래로 달아났는데 빈 땅 사람들이 모두 단보를 따라서 여기에 도읍하여 주나라를 세웠다. 그 후 100여년 후 주나라 서백 창이 견이씨를 정벌하였다. 10여년 후 무왕이 주를 치고 낙읍을 경영하고 풍호 땅에 돌아와 살면서 융이를 경수와 낙수 북쪽으로 추방하여 내쫒으니 때에 맞게 들어와 공물을 바쳤는데 명하여 ‘황복’이라 하였다. 그 후 200여년 후 주나라의 도가 쇠퇴하고, 목왕이 견융을 정벌하여 네 마리 흰 이리와 네 마리 흰 사슴을 얻어 돌아왔다. 이로부터 이후로 황복이 이르지 않았다. 이에 주나라가 마침내 보형의 법을 만들었다. 목왕 후 200여년 후 주나라 유왕이 사랑하는 여자 포사의 일 때문에 신후와 틈이 있었다. 신후가 노하여 견융과 함께 공격하여 유왕을 여산의 아래서 죽이고 마침내 주나라의 초확 땅을 취하여 경수와 위수의 사이에 살면서 중국을 침략하고 사납게 했다. 진나라 양공이 주나라를 구원하였는데 이에 주나라 평왕이 풍호 땅을 떠나 동쪽 낙읍으로 옮겼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나라 양공이 융을 치면서 기산에 이르러 처음으로 반영하여 제후가 되었다. 이 65년 후 산융이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 이공이 제나라 교에서 싸웠다. 44년 후 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급함을 알렸는데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치니 산융이 달아났다. 20년 후 융적이 낙읍에 이르러 주나라 양왕을 쳤는데 양왕이 달아나 정나라의 범읍에 갔다. 처음 주나라 양왕이 정나라를 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융적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로 삼고 융적의 군대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이윽고 적후를 쫒아내니 적후가 원망하였다. 양왕의 계모를 혜후라 하고 아들 자대가 있어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혜후와 적후, 자대가 안으로 응대하여 융적에게 열어주니 융적이 이 때문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주나라 양왕을 깨트려 축출하고 자대를 세워 천자라 하였다. 이에 융적이 혹은 육혼 땅에 살면서 동쪽으로 위나라에 이르고, 중국을 침탈하고 포학하게 했다. 중국이 그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것을 노래하여 말하기를 “융적을 이에 응징하도다. 험윤을 쳐부수어 태원에 이르렀도다. 수많은 수레 내어 저 삭방에 성을 쌓도다.” 했다. 주나라 양왕이 밖에서 산지 4년에 사자로 하여금 진나라에 다급함을 알리게 하였다. 진나라 문공이 처음 즉위하여 패업을 닦고자 하였으므로 이에 군대를 일으켜 융적을 쳐서 축출하고 자대를 죽이며 주나라 양왕을 맞아들여 낙읍에서 살게 했다.
[一] 集解徐廣曰:「后稷之曾孫。」 正義周本紀云「不窋失其官」。此云公劉,未詳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후직의 증손이다.” 했다. 【正義】 「주본기」에 “불줄이 그 관직을 잃었다.” 했는데 이는 공유를 말하는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二] 集解徐廣曰:「公劉九世孫。」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공유의 9세손이다.” 했다.
[三] 索隱按:謂始作周國也。
[三] 【索隱】 살펴보니 처음 주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四] 索隱韋昭云:「春秋以為犬戎。」按:畎音犬。大顏云「即昆夷也」。山海經云「黃帝生苗龍,苗龍生融吾,融吾生弄明,弄明生白犬。白犬有二牡,是為犬戎」。說文云「赤狄本犬種,字從犬」。又山海經云「有人面獸身,名曰犬夷」。賈逵云「犬夷,戎之別種也」。
[四]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춘추』에는 ‘견융’이라 했다.” 살펴보니 ‘畎(밭도랑 견)’의 음은 ‘犬’이다. 대안이 말하기를 “곧 ‘곤이’이다.” 했다. 『산해경』에 “‘황제’가 ‘묘룡’을 낳고, ‘묘룡’은 ‘융오’를 낳고, ‘융오’는 ‘농명’을 낳고, ‘농명’은 ‘백견’을 낳았다. ‘백견’에게는 두 수컷이 있었는데 이가 ‘견융’이 되었다.” 했다. 『설문』에 “‘적융’은 본래 ‘견종’인데 글자는 ‘犬’을 따랐다.” 했다. 또 『산해경』에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한 이가 있는데 ‘견이’라 불렀다.” 했다. 가규가 말하기를 “‘견이’는 ‘융’의 별종이다.” 했다.
[五] 索隱晉灼曰:「洛水在馮翊懷德縣,東南入渭。」又案:水經云出上郡雕陰泰昌山,過華陰入渭,即漆沮水也。
[五] 【索隱】 진작이 말하기를 “낙수는 풍익 회덕현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위수에 들어간다.” 또 살펴보니 『수경』에 “상군 조음 진창산에서 나와 화음을 지나 위로에 들어가는데 곧 칠저수이다.” 했다.
[六] 索隱案:周紀云「懿王時,王室衰。詩人作怨刺之詩」,不能復雅也。
[六] 【索隱】 살펴보니 「주기」에 “의왕 때 왕실이 쇠퇴하였다. 시인이 원망하고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 했는데 雅를 회복할 수 없었다.
[七] 正義故申城在鄧州南陽縣北三十里,周宣王舅所封。
[七] 【正義】 옛 신성은 등주 남양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주 선왕의 장인이 봉해진 곳이다.
[八] 集解韋昭曰:「戎後來居此山,故號曰驪戎。」
[八]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융’이 뒤에 이 산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여융’이라 불렀다.” 했다.
[九] 正義括地志云:「焦穫亦名刳口,亦曰刳中,在雍州涇陽縣城北十數里。周有焦穫也。」
[九] 【正義】 『괄지지』에 “‘초확’은 또한 ‘고구’라 하고, 또 ‘고중’이라 하는데 옹주 경양현성 북쪽 십수리에 있다. 주나라에 ‘초확’이 있다.” 했다.
[一0] 正義今岐州。高誘云「秦襄公救周有功,受周故地酆鄗,列為諸侯」也。
[一0] 【正義】 지금의 기주이다. 고유가 말하기를 “진나라 양공이 주나라를 구원하는데 공이 있어 주나라의 옛 땅 풍호를 받고 제후에 반열되었다.
[一一] 索隱服虔云:「山戎蓋今鮮卑。」按:胡廣云「鮮卑,東胡別種」。又應奉云「秦築長城,徒役之士亡出塞外,依鮮卑山,因以為號」。
[一一]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산융’은 대개 지금의 ‘선비’이다.” 했다. 살펴보니 호광이 말하기를 “‘선비’는 ‘동호’의 별종이다.” 했다. 또 응봉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장성을 쌓을 때 역에 동원된 군사들이 도망하여 요새 밖으로 나가 선비산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부르게 되었다.” 했다.
[一二] 索隱蘇林氾音凡。今潁川襄城是。按:春秋地名云「氾邑,襄王所居,故云襄城」也。
[一二] 【索隱】 소림은 “‘氾(넘칠 범)’의 음을 ‘凡’이라.” 했다. 지금의 영천 양성이 이것이다. 살펴보니 「춘추지명」에 “‘범읍’은 양왕이 살던 곳이기 때문에 ‘양성’이라 했다.” 한다.
[一三] 集解徐廣曰:「一為『陸邑』。」 索隱春秋左氏「秦晉遷陸渾之戎于伊川」。杜預以為「允姓之戎居陸渾,在秦晉之閒,二國誘而徙之伊川,遂從戎號,今陸渾縣」是也。
[一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같이 ‘육읍’이라 한다.” 했다. 【索隱】 『춘추좌씨전』에 “秦나라와 晉나라가 ‘육혼’의 융을 ‘이천’으로 옮겼다.” 했다. 두예는 “윤씨 성의 융이 육혼에 살았는데 秦나라와 晉나라의 사이에 있고, 두 나라가 꾀어 이천으로 옮겨가게 하여 마침내 융의 이름을 따르게 되었는데 지금의 육혼현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一四] 集解毛詩傳曰:「言逐出之而已。」
[一四] 【集解】 「모시전」에 “축출하였음을 말했을 뿐이다.” 했다.
[一五] 集解毛詩傳曰:「彭彭,四馬貌。朔方,北方。」 正義獫狁既去,北方安靜,乃築城守之。
[一五] 【集解】 「모시전」에 “彭彭은 四馬의 모습이다. 朔方은 북쪽이다.” 했다. 【正義】 험윤이 떠난 후 북쪽이 안정되어 이에 성을 쌓고 그것을 지킨 것이다.
當是之時,秦晉為彊國。晉文公攘戎翟,居于河西圁、洛之閒,[一]號曰赤翟、[二]白翟。[三]秦穆公得由余,西戎八國服於秦,故自隴以西有綿諸、[四]緄戎、[五]翟、豲之戎,[六]岐、梁山、涇、漆之北有義渠、[七]大荔、[八]烏氏、[九]朐衍之戎。[一0]而晉北有林胡、[一一]樓煩之戎,[一二]燕北有東胡、山戎。[一三]各分散居谿谷,自有君長,往往而聚者百有餘戎,然莫能相一。
이러한 때를 당하여 秦나라와 晉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었다. 晉나라 문공이 융적을 쫓아내고 하서의 은수와 낙수의 사이에서 살면서 적적, 백적이라 불렀다. 秦나라 목공이 유여를 얻어 서융 8개 나라를 秦나라에 복속시켰는데 농으로부터 서쪽에 면저, 곤융, 적, 환의 융이 있고, 기산, 양산, 경수, 칠수의 북쪽에 의구, 대려, 오씨, 구연의 융이 있다. 晉 나라 북쪽에는 임호, 누번의 융이 있고, 燕나라 북쪽에는 동호, 산융이 있다. 각기 나뉘고 흩어져 골짜기에서 사는데 스스로 군장을 두어 자주 모이는 자는 100개가 넘는 융이 있다. 그러나 서로 하나로 할 수 없었다.
[一] 集解徐廣曰:「圁在西河,音銀。洛在上郡、馮翊閒。」 索隱西河圁、洛。晉灼音嚚。三蒼作「圜」。地理志云圜水出上郡白土縣西,東流入河。韋昭云「圜當為『圁』。」續郡國志及太康地志並作「圁」字也。正義括地志云:「白土故城在鹽州白池東北三百九十里。」又云:「近延州、綏州、銀州,本春秋時白狄所居,七國屬魏,後入秦,秦置三十六郡。」洛,漆沮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은수는 서하에 있는데 음은 ‘銀’이다. 낙수는 상군과 풍익의 사이에 있다.” 했다. 【索隱】 서하의 은수와 낙수이다. 진작은 음이 ‘嚚(어리석을 은)’이라 했다. 삼창은 ‘圜’이라 썼다. 「지리지」에 “환수는 상군 백토현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황하에 들어간다.” 했고, 위소는 “‘圜’은 마땅히 ‘圁’이 되어야 한다.” 했다. 『속군국지』와 『태강지지』는 같이 ‘圁’자를 썼다. 【正義】 『괄지지』에 “백토 옛 성은 염주 백지 390리에 있다.” 하고 또 “연주, 수주, 은주에 가까우며, 본래 춘추시대에는 백적이 살던 곳이었고, 7국은 위나라에 속하였다가 후에 진나라에 들어갔으며 秦 나라는 36군을 두었다.” 했다. ‘낙수’는 칠수와 저수이다.
[二] 索隱案:左氏傳云「晉師滅赤狄潞氏」。杜氏以「潞,赤狄之別種也,今上黨潞縣」。又春秋地名云「今曰赤涉胡」。
[二] 【索隱】 살펴보니 『좌씨전』에 “晉나라 군대가 적적 로씨를 없앴다.” 했다. 두씨는 “‘潞’는 적적의 별종인데 지금의 상당 로현이다.” 했다. 「춘추지명」에 “지금은 적섭호라 말한다.” 했다.
[三] 索隱左氏「晉師敗狄于箕,郤缺獲白狄子」。杜氏以為「白狄之別種,故西河郡有白部胡」。又國語云「桓公西征,攘白狄之地,遂至于西河」也。正義括地志云:「潞州本赤狄地。延、銀、綏三州白翟地。」按:文言「圁、潞之閒號赤狄」,未詳。
[三] 【索隱】 좌씨는 “晉나라 군대가 적을 기에서 무너뜨리고 각결이 백적의 아들을 잡았다.” 했다. 두씨는 “백적의 별종으로 옛 서하군 백부호에 있다.”여겼다. 또한 『국어』에 “환공이 서쪽을 정벌하여 백적의 땅을 빼앗고 마침내 서하에 이르렀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노주는 본래 적적의 땅이다. 연주, 은주, 수주의 3개주가 백적의 땅이다.” 했다. 살펴보니 글에서 말하기를“은수와 노주의 사이를 적적이다.”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四] 索隱地理志天水有綿諸道。正義括地志云:「綿諸城,秦州秦嶺縣北五十六里。漢綿諸道,屬天水郡。」
[四] 【索隱】 「지리지」에 “천수에 면저도가 있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면저성은 진주 진령현 북쪽 56리에 있다. 한의 면저도는 천수군에 속한다.” 했다.
[五] 正義上音昆。字當作「混」。顏師古云:「混夷也。」韋昭云:「春秋以為犬戎。」
[五] 【正義】 위의 음은 ‘昆’이다. 글자는 마땅히 ‘混’이라 써야 한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混夷’이다.” 했고, 위소는 “『춘추』는 ‘견융’이라 했다.” 한다.
[六] 集解徐廣曰:「在天水。豲音丸。」 索隱地理志天水豲道。應劭以「豲戎邑。音桓」。正義括地志云:「豲道故城在渭州襄武縣東南三十七里。古之豲戎邑。漢豲道,屬天水郡。」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천수에 있다. ‘豲’의 음은 ‘丸’이다.” 했다. 【索隱】 「지리지」의 ‘천수환도’이다. 응소는 “환융읍이다. 음은 ‘桓’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환도 옛 성은 위주 양무현 동남쪽 37리에 있다. 옛 날의 환융읍이다. 한의 환도는 천수군에 속한다.” 했다.
[七] 索隱韋昭云:「義渠本西戎國,有王,秦滅之。今在北地郡。」 正義括地志云:「寧州、慶州,西戎,即劉拘邑城,時為義渠戎國,秦為北地郡也。」
[七]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의거는 본래 서융국인데 왕이 있고, 秦나라가 없앴다. 지금의 북지군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영주, 경주는 서융이니 곧 유구읍성으로 당시는 의거융국이라 했고, 秦나라 때 북지군이 되었다.” 했다.
[八] 集解徐廣曰:「後更名臨晉,在馮翊。」 索隱按:秦本紀厲共公伐大荔,取其王城,後更名臨晉。故地理志云臨晉故大荔國也。 正義括地志云:「同州馮翊縣及朝邑縣,本漢臨晉縣地,古大荔戎國。今朝邑縣東三十步故王城,即大荔王城。」荔,力計反。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후에 이름을 임진으로 고쳤으며 풍익에 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秦본기」에 “여공공이 대려를 쳐서 그 왕성을 취하고 후에 임진으로 이름을 고쳤다.” 했다. 옛 지리지에 “임진은 옛 대려국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동주 풍익현과 조읍현이 본래 한 임진현인데 옛 대려융국이다. 지금 조읍현 동쪽 30보에 옛 왕성이 있는데 곧 대려왕성이다.” 했다. ‘荔’의 음은 ‘力’과 ‘計’의 反이다.
[九] 集解徐廣曰:「在安定。」 正義氏音支。括地志云:「烏氏故城在涇州安定縣東三十里。周之故地,後入戎,秦惠王取之,置烏氏縣也。」
[九]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안정에 있다.” 했다. 【正義】 ‘氏’의 음은 ‘支’이다. 『괄지지』에 “오씨 옛 성은 경주 안정현 동쪽 30리에 있다. 주나라 옛 땅인데 후에 융에 편입되었다가 秦나라 혜왕이 취하여 오씨현을 두었다.
[一0] 集解徐廣曰:「在北地。朐音詡。」 索隱案:地理志朐衍,縣名,在北地。徐廣音詡。鄭氏音吁。正義括地志云:「鹽州,古戎狄居之,即朐衍戎之地,秦北地郡也。」
[一0]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북지에 있다. ‘朐(멍에 구)’의 음은 ‘詡(자랑할 후)’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지리지」에 ‘후연’은 현의 이름으로 북지에 있다. 서광은 음을 ‘詡’라 하고, 정씨는 음을 ‘吁(탄식할 우)’라 하였다. 【正義】 『괄지지』에 “염주는 옛날 융적이 살았으니 곧 후연융의 땅인데 秦 나라 북지군이다.
[一一] 索隱如淳云:「林胡即儋林,為李牧所滅也。」 正義括地志云:「朔州,春秋時北地也。如淳云即澹林也,為李牧滅。」
[一一]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임호는 곧 담림이니 이목이 없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삭주’는 춘추시대 북지이다. 여순이 말하기를 곧 담림인데 이목이 없앴다.” 했다.
[一二] 索隱地理志樓煩,縣名,屬鴈門。應劭云「故樓煩胡地」。正義括地志云:「嵐州,樓煩胡地也。風俗通云故樓煩胡地也。」
[一二] 【索隱】 「지리지」에 “누번은 현 이름으로 안문에 속한다.” 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누번은 오랑캐 땅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풍주 누번은 오랑캐 땅이다.” 했다. 『풍속통』에 “옛 누번은 오랑캐 땅이다.” 했다.
[一三] 集解漢書音義曰:「烏丸,或云鮮卑。」 索隱服虔云:「東胡,烏丸之先,後為鮮卑。在匈奴東,故曰東胡。」案:續漢書曰「漢初,匈奴冒頓滅其國,餘類保烏桓山,以為號。俗隨水草,居無常處。以父之名字為姓。父子男女悉髡頭為輕便也」。
[一三] 【集解】 「한서음의」에 “오환은 혹은 선비라 한다.” 했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동호는 오환의 선조인데 후에 선비가 되었다. 흉노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호라 한다.” 했다. 살펴보니 『속한서』에 “한 초에 흉노 모돈이 그 나라를 없애니 나머지 류들이 오환산을 지켰으므로 오환으로 불려졌다. 풍속에 물과 풀을 따라 다녀서 항상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 아버지의 이름자로서 성을 삼는다. 부자와 남녀가 모두 머리를 깍아 가볍고 간편하게 한다.” 했다.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戎翟朝晉。後百有餘年,趙襄子踰句注[一]而破并代以臨胡貉。[二]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分晉地而有之,則趙有代、句注之北,魏有河西、上郡,以與戎界邊。其後義渠之戎築城郭以自守,而秦稍蠶食,至於惠王,遂拔義渠二十五城。惠王擊魏,魏盡入西河及上郡于秦。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三]亂,有二子。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遂起兵伐殘義渠。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築長城以拒胡。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築長城,[四]自代並[五]陰山[六]下,至高闕為塞。[七]而置雲中、鴈門、代郡。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八]至襄平。[九]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當是之時,冠帶戰國七,而三國邊於匈奴。[一0]其後趙將李牧時,匈奴不敢入趙邊。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為塞,[一一]築四十四縣城臨河,徙適[一二]戍以充之。而通直道,[一三]自九原至雲陽,[一四]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一五]又度河據陽山北假中。[一六]
이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 晉나라 도공이 위강으로 하여금 적적과 화친하게 하니 적적이 晉나라에 조회했다. 100여년 후 조나라 양자 구주를 넘어 대를 깨트리고 병합하여 호락을 마주하였다. 그 후 한, 위와 함께 지백을 멸한 후 晉나라 땅을 나누어 소유하니 곧 조나라는 대와 구주의 북쪽을 소유하고, 위나라는 하서, 상군을 소유하여 융과 경계를 함께 하였다. 그 후 의거의 융이 성곽을 쌓는 것으로서 스스로 지켰으되 秦나라가 점점 잠식하여 혜왕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 25개성을 함락시켰다. 혜왕이 위를 치니 위가 秦나라에 서하와 상군을 모두 편입시켰다. 秦나라 소왕 때 의거융의 왕과 선태후가 음란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선태후가 속여서 의거융 왕을 감천에서 죽이고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의거를 멸망시켰다. 이에 秦나라가 농서, 북지, 상군을 소유하고 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다. 趙나라 무령왕이 도한 풍속을 바꾸어 오랑캐 옷을 입고, 말타고 활쏘기를 연습하여 북쪽으로 임호, 누번을 깨트렸다. 장성을 쌓고 대로부터 음산 아래를 병합하여 고궐에 이르러 요새로 삼고 운중, 안문, 대군을 두었다. 그 후 燕나라의 현명한 장군 진개가 오랑캐에게 인질이 되었는데 오랑캐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였다. 돌아가 동호를 습격하여 깨트리고 달아나게 하니 동호가 천여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秦王을 찌른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가 또한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부터 양평에 이르렀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고 오랑캐를 막았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관대를 갖춘(문명을 갖춘) 전국이 7개였는데(전국7웅) 그 중 세 나라가 흉노와 경계를 마주하였다. 그 조나라 장군 이목이 있을 때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 변경을 침입하지 못하였다. 후에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가 몽렴으로 하여금 1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북쪽의 오랑캐를 쳐서 황하 남쪽 땅을 모두 거두었다. 때문에 황하를 요새로 삼아 44개 현성을 쌓아 황하를 마주하고, 죄수를 보내 수자리를 채웠다. 길을 곧게하여 구원으로부터 운양에 이르게 하였는데 산의 험한 곳을 경계로 하고 계곡을 해자로 하며 수선할 만한 것은 수리하여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리였다. 또한 황하를 건너 양산 북쪽 가중에 웅거하였다.
[一] 集解音鉤,山名,在鴈門。 索隱服虔云:「句音拘。」韋昭云:「山名,在陰館。」
[一] 【集解】 음은 ‘鉤’인데 산 이름으로 안문에 있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句’의 음은 ‘拘’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산 이름으로 음관에 있다.” 햇다.
[二] 索隱案:貉即濊也。音亡格反。
[二] 【索隱】 살펴보니 ‘貉(오랑캐 맥, 담비 학)’은 ‘濊(깊을 예)’이다. 음은 ‘亡’과 ‘格’의 反이다.
[三] 集解昭王母也。索隱服虔云「昭王之母」也。
[三] 【集解】 소왕의 어머니이다. 【索隱】 보건이 말하기를 “소왕의 어머니이다.” 했다.
[四] 正義括地志云:「趙武靈王長城在朔州善陽縣北。案水經云白道長城北山上有長垣,若穨毀焉,沿谿亙嶺,東西無極,蓋趙武靈王所築也。」
[四] 【正義】 『괄지지』에 “조나라 무령왕 장성은 삭주 선양현 북쪽에 있다.” 했다. 살펴보니 『수경』에 “백도장성 북쪽 산위에 긴 담장이 있는데 마치 무너진 듯하나 골짜기를 따라 고개를 이어 동서로 다함이 없으니 대개 조나라 무령왕이 쌓은 것이다.” 했다.
[五] 集解音傍,白浪反。
[五] 【集解】 음은 ‘傍’이니 ‘白’과 ‘浪’의 反이다.
[六] 索隱徐廣云:「五原西安陽縣北有陰山。陰山在河南,陽山[在河]北。並音傍,白浪反。」 正義括地志云:「陰山在朔州北塞外突厥界。」
[六]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오원 서쪽 안양현 북쪽에 음산이 있다. 음산은 하남에 있고, 양산은 하북에 있다. 모두 음이 ‘傍’이니 ‘白’과 ‘浪’의 反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음산은 삭주 북쪽 요새 밖 동궐의 경계에 있다.“ 했다.
[七] 集解徐廣曰:「在朔方。」 正義地理志云朔方臨戎縣北有連山,險於長城,其山中斷,兩峰俱峻,土俗名為高闕也。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삭방에 있다.” 했다. 【正義】 「지리지」에 “삭방 임융현 북쪽 연산에 있는데 장성보다 험하며, 그 산 가운데가 끊어져 두 봉우리가 모두 가팔라 그 지역 풍속에 이름하여 고궐이라 한다.
[八] 集解韋昭曰:「地名,在上谷。」 正義按:上谷郡今媯州。
[八]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지명이니 상곡에 있다.” 【正義】 살펴보니 상곡군은 지금의 규주이다.
[九] 索隱韋昭云:「今遼東所理也。」
[九]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지금 요동을 다스리는 곳이다.” 했다.
[一0] 索隱案:三國,燕、趙、秦也。
[一0] 【索隱】 살펴보니 삼국은 연, 조, 진나라이다.
[一一] 索隱案:太康地記「秦塞自五原北九百里,謂之造陽。東行終利賁山南,漢陽西也」。漢,一作「漁」。
[一一] 【索隱】 살펴보니 『태강지기』에 “진나라 요새는 오원으로부터 북쪽으로 900리인데 그것을 일러 조양이라 한다. 동쪽으로 가서 이분산 남쪽에서 마치는데 한양의 서쪽이다.” 했다. ‘漢 ’은 ‘漁’라고 쓰기도 한다.
[一二] 集解音丁革反。索隱丁革反。
[一二] 【集解】 음은 ‘丁’과 ‘革’의 反이다. 【索隱】 ‘丁’과 ‘革’의 反이다.
[一三] 索隱蘇林云:「去長安八千里,正南北相直道也。」
[一三] 【索隱】 소림이 말하기를 “장안에서 8천리 떨어지고, 정 남북이 서로 곧은 길이다.” 했다.
[一四] 索隱韋昭云:「九原,縣名,屬五原也。」 正義括地志云:「勝州連谷縣,本秦九原郡,漢武帝更名五原。雲陽雍縣,秦之林光宮,即漢之甘泉宮在焉。」又云:「秦故道在慶州華池縣西四十五里子午山上。自九原至雲陽,千八百里。」
[一四]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구원은 현의 이름인데 오원에 속한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승주 연곡현은 본래 진나라 구원군인데 한 무제가 이름을 바꾸어 오원이라 했다. 운양 옹현이 진나라의 임광군이니 곧 한의 감천궁이 여기에 있다.” 했다. 또 말하기를 “진나라 옛 길은 경주 화지현 서쪽 45리 자오산 위에 있다. 구원으로부터 운양에 이르기까지 1천 8백리이다.” 했다.
[一五] 索隱韋昭云:「臨洮,隴西縣。」 正義括地志云:「秦隴西郡臨洮縣,即今岷州城。本秦長城首,起岷州西十二里,延袤萬餘里,東入遼水。」
[一五]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임조는 농서현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진나라 농서군 임조현은 곧 지금의 민주성이다. 본래 진나라 장성의 처음으로 민주 서족 13리에서 일어나 길이가 만여리에 뻗혀 동쪽으로 요수에 들어간다.” 했다.
[一六] 集解北假,北方田官。主以田假與貧人,故云北假。索隱應劭云:「北假在北地陽山北。」韋昭云:「北假,地名。」又按:漢書元紀云「北假,田官」。蘇林以為北方田官也。主以田假與貧人,故曰北假也。正義括地志云:「漢五原郡河目縣故城在北假中。北假,地名也,在河北,今屬勝州銀城縣。漢書王莽傳云『五原北假,膏壤殖穀』也。」
[一六] 【集解】 북가는 북방의 전관이다. 밭을 임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북가라 한 것이다. 【索隱】 응소가 말하기를 “북가는 북지 양산 북쪽에 있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북가는 지명이다.” 했다. 또 살펴보니 『한서원기』에 “북가는 전관이다.” 했다. 소림은 “북방의 전관으로 여겼다. 주로 밭을 임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북가라 한 것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한 오원군 하목현 옛 성은 북가 안에 있다. 북가는 지명이니 하북에 있으며 지금 승주 은성현에 속한다. 『한서』 왕망전에 ‘오원 북가는 토양이 기름져 곡식을 번식할 수 있다.” 했다.
當是之時,東胡彊而月氏盛。[一]匈奴單于[二]曰頭曼[三],頭曼不勝秦,北徙。十餘年而蒙恬死,諸侯畔秦,中國擾亂,諸秦所徙適戍邊者皆復去,於是匈奴得寬,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이러하 때를 당하여 동호가 강해지고, 월씨가 번성했다. 흉노 선우는 두만이라 하였는데 두만이 진나라를 이기지 못하자 북쪽으로 옮겨갔다. 10여년이 지나 몽렴이 죽자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하여 중국이 소란스러워지고, 진나라가 옮겨보내 변경을 지키게 했던 자들이 모두 돌아가자 이에 흉노가 느슨함을 얻어 다시 점점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중국과 경계를 옛 요새에서 마주하였다.
[一] 正義氏音支。括地志云:「涼、甘、肅、延、沙等州地,本月氏國。」
[一] 【正義】 ‘氏’의 음은 ‘支’이다. 『괄지지』에 “양, 감. 숙. 연, 사 등의 주 땅은 본래 월지국이다.” 했다.
[二] 集解漢書音義曰:「單于者,廣大之貌,言其象天單于然。」 索隱案:漢書「單于姓攣鞮氏,其國稱之曰『撐黎孤塗單于』。而匈奴謂天為『撑黎』,謂子為『孤塗』,單于者,廣大之貌也。言其象天,故曰撑黎孤塗單于」。又玄晏春秋云「士安讀漢書,不詳此言,有胡奴在側,言之曰:『此胡所謂天子。』與古書所說符會也」。
[二] 【集解】 「함서음의」에 “‘單于’는 넓고 큰 모양이니 그 형상이 하늘이 넓고 큰 것을 말한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선우의 성은 영제씨이고, 그 나라를 일컳어 ‘탱리고도선우’라 했다. 흉노는 하늘을 일러 ‘撑犂’라 하고, ‘자(아들 자)’를 ‘孤塗’라 하고, ‘單于’는 광대한 모양이다. 그 하늘을 형상하여 말했기 때문에 ‘탱리고도선우’라 하는 것이다.” 했다. 또 『현안춘추』에 “사안 황보밀이 『한서』를 읽다가 이 말이 자세하지 않았는데 오랑캐 종이 옆에 있다가 그 것을 말하기를 ‘이는 오랑캐의 이른 바 천자이다.’하였는데 옛 글이 설명한 바와 부합하였다.” 했다.
[三] 集解韋昭曰:「音瞞。」 索隱音莫官反。韋昭音瞞。
[三]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음은 ‘瞞(속일 만)’이다.” 했다. 【索隱】 음은 ‘莫’과 ‘官’의 反이다. 위소는 “음이 ‘瞞’이다.” 했다.
單于有太子名冒頓。[一]後有所愛閼氏,[二]生少子,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乃使冒頓質於月氏。冒頓既質於月氏,而頭曼急擊月氏。月氏欲殺冒頓,冒頓盜其善馬,騎之亡歸。頭曼以為壯,令將萬騎。冒頓乃作為鳴鏑,[三]習勒其騎射,令曰:「鳴鏑所射而不悉射者,斬之。」行獵鳥獸,有不射鳴鏑所射者,輒斬之。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左右或不敢射者,冒頓立斬不射善馬者。居頃之,復以鳴鏑自射其愛妻,左右或頗恐,不敢射,冒頓又復斬之。居頃之,冒頓出獵,以鳴鏑射單于善馬,左右皆射之。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從其父單于頭曼獵,以鳴鏑射頭曼,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冒頓自立為單于。
선우는 태자가 있는데 이름은 묵돈이다. 후에 사랑받던 알씨가 작은 아들을 낳자 선우가 묵돈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고 묵돈을 월지에 인질로 하게 하였다. 묵돈이 월지에 인질이 되자 두만이 월지를 급히 공격하였다. 월지가 묵돈을 죽이려하니 묵돈이 좋은 말을 훔쳐 타고 도망하여 돌아갔다. 두만이 건장하다하여 일만기를 거느리게 하였다. 묵돈이 이에 명적을 만들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을 염습하게 하고 명령하여 말하기를 “명적이 향하는 곳으로 활을 쏘라 모두 쏘지 않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했다. 짐승을 사냥할 때 명적이 쏘는 곳으로 쏘지 않는 자는 문득 목을 베었다. 이윽고 모돈 명적으로 자신의 그 좋은 말을 쏘았는데, 좌우가 혹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돈이 좋은 말을 쏘지 못하는 자를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 얼마 후 다시 명적을 스스로 사랑하는 아내에게 쏘니 좌우가 혹 자못 두려워하여 감히 쏘지 못하였는데, 묵돈이 또한 다시 그들을 목 베었다. 얼마 후 묵돈이 사냥을 나가 명적으로 선우의 좋은 말을 쏘니 좌우가 모두 그것을 쏘았다. 이에 묵돈이 그 좌우가 모두 쓸 만함을 알았다. 그 아버지 선우 두만을 따라 사냥할 때 명적으로 두만을 쏘자 그 좌우가 또한 모두 명적을 따라 선우 두만을 쏘아 죽이고, 마침내 그 계모와 동생 및 대신으로 다르지 않는 자를 모두 죽였다. 묵돈이 스스로 선우의 지위에 올랐다.
[一] 索隱冒音墨,又如字。
[一] 【索隱】 ‘冒’의 음은 ‘墨’이고, 또 글자와 같다.
[二] 索隱舊音於連、於曷反二音。匈奴皇后號也。習鑿齒與燕王書曰:「山下有紅藍,足下先知不?北方人探取其花染緋黃,挼取其上英鮮者作煙肢,婦人將用為顏色。吾少時再三過見煙肢,今日始視紅藍,後當為足下致其種。匈奴名妻作『閼支』,言其可愛如煙肢也。閼音煙。想足下先亦不作此讀漢書也。」
[二] 【索隱】 옛 음은 ‘於’와 ‘連’과 ‘於’와 ‘曷’의 反 두 음이다. 흉노 황후의 호이다. 습착치가 연왕에게 준 글에 “산 아래 붉은 쪽풀이 있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북방의 사람들은 그것을 찾아 취하여 비색과 황색을 물들이고, 그 위 꽃봉오리의 신선한 것을 주물러 취하여 연지를 만들어 부인들이 얼굴색을 삼는데 쓴다. 내가 어렸을 때 두 번 세 번 지나다 연지를 보았는데 오늘 처음 홍람을 보았으니 후에 마땅히 그대를 위해 그 종자를 보낼 것이다. 흉노는 아내를 이름하여 ‘연지’라 쓰는데 그 사랑할만 함이 연지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閼’의 음은 ‘煙’이다. 생각하기에 그대는 앞서 또한 이렇게 쓴 것을 『한서』에서는 읽지 못하였을 것이다.” 했다.
[三] 集解漢書音義曰:「鏑,箭也,如今鳴箭也。」韋昭曰:「矢鏑飛則鳴。」 索隱應劭云「髐箭也。」韋昭云:「矢鏑飛則鳴。」
[三] 【集解】 「한서음의」에 “‘鏑’은 화살인데 지금의 ‘鳴箭’과 같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화살이 날면 곧 소리가 난다.” 했다. 【索隱】 응소가 말하기를 “髐(해골 효)箭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화살이 날면 곧 소리가 난다.” 했다.
冒頓既立,[一]是時東胡彊盛,聞冒頓殺父自立,乃使使謂冒頓,欲得頭曼時有千里馬。冒頓問群臣,群臣皆曰:「千里馬,匈奴寶馬也,勿與。」冒頓曰:「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遂與之千里馬。居頃之,東胡以為冒頓畏之,乃使使謂冒頓,欲得單于一閼氏。冒頓復問左右,左右皆怒曰:「東胡無道,乃求閼氏!請擊之。」冒頓曰:「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遂取所愛閼氏予東胡。東胡王愈益驕,西侵。與匈奴閒,中有棄地,莫居,千餘里,各居其邊為甌脫。[二]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匈奴非能至也,吾欲有之。」冒頓問群臣,群臣或曰:「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於是冒頓大怒曰:「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諸言予之者,皆斬之。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擊東胡。東胡初輕冒頓,不為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既歸,西擊走月氏,南并樓煩、白羊河南王。[三](侵燕代)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關故河南塞,至朝那、膚施,[四]遂侵燕、代。是時漢兵與項羽相距,中國罷於兵革,以故冒頓得自彊,控弦之士三十餘萬。
묵돈이 즉위한 이 때 동호가 강성하여졌는데 묵돈이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는 것을 듣고 이에 사신을 보내 묵돈에 말하게 하여 두만 때에 소유하였던 천리마를 얻고자 하였다. 묵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로운 말이니 주어서는 안됩니다.” 했다. 묵돈이 말하기를 “어떻게 다른 사람의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말 한 마리를 아끼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천리마를 주었다. 얼마 후 동호가 묵돈이 두려워한다. 여기고 이에 사신을 시켜 묵돈에게 “선우의 한 연지를 얻고자 한다.”고 말하게 했다. 묵돈이 다시 좌우에게 물으니 좌우가 모두 노하여 말하기를 “동호가 무도하게 연지를 구하는 구나! 그들을 공격하기를 청합니다.” 했다. 묵돈이 말하기를 “어떻게 다른 사람의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한 여자를 아끼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사랑받던 연지를 취하여 동호에게 주었다. 동호 왕이 더욱 교만하여 서쪽으로 침략하였다. 흉노와의 사이 중간에 버려진 땅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천여리가 있어서 각기 그 변경에 머물면서 甌脫을 만들었다. 동호가 사신을 시켜 묵돈에게 말하기를 “흉노는 우리 경계의 甌脫 밖 버려진 땅을 넘기라. 흉노는 이를 수 없는 곳이니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했다. 묵돈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신하 중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는 버려진 땅이니 그것을 주어도 되고, 주지 않아도 또한 된다.” 했다. 이에 묵동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땅은 나라의 근본인데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하고는 그것을 주라고 말한 자를 모두 목 베게 했다. 묵돈이 말에 올라 명령하기를 나라 안에서 뒤에 있는 자는 목을 벤다 하고 마침내 동쪽으로 가 동호를 습격하였다. 도호가 처음에 묵돈을 가벼이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묵돈이 군대로 이러러 쳐서 크게 동호왕을 깨트리고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과 가축을 포로로 하고 빼앗았다. 돌아 온 후 서쪽으로 월지를 치고, 남쪽으로 누번, 백양 하남왕을 병합하였다. (연과 대를 침범하여) 진나라가 몽렴을 시켜 빼앗았던 흉노의 땅을 모두 수복하고 한과는 옛 하남의 요새를 관문으로 하고 조나, 부시에 이르고, 마침내 연과 대를 침범하였다. 이 때 한의 군대는 항우와 서로 대치하고 있어서 중국이 병란으로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묵돈이 스스로 강해 질 수 있었고, 활을 쏠 수 있는 군사가 30만이었다.
[一] 集解徐廣曰:「秦二世元年壬辰歲立。」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秦나라 2세 1년 임진년에 즉위하였다.” 했다.
[二] 集解韋昭曰:「界上屯守處。」 索隱服虔云「作土室以伺漢人」。又纂文曰「甌脫,土穴也」。又云是地名,故下云「生得甌脫王」。韋昭云「界上屯守處也」。甌音一侯反。脫音徒活反。正義按:境上斥候之室為甌脫也。
[二]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경계 위에 주둔하여 지키는 곳이다.” 했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土室(흙집)을 짓고 한나라 사람을 엿보는 것이다.” 했다. 또 「찬문」에 “‘甌脫’은 땅 구명이다.” 했다. 또 이는 지명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말하기를 “구탈왕을 산채로 얻었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경계 위에 주둔하여 지키는 곳이다.” 했고, ‘甌’의 음은 ‘一’과 ‘侯’의 反이다. ‘脫’의음은 ‘徒’와 ‘活’의 反이다. 【正義】 살펴보니 경계 위 척후의 집을 ‘甌脫’이라 한다.
[三] 索隱如淳云:「白羊王居河南。」
[三]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백양왕은 하남에 산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在上郡。」 正義漢朝那故城在原州百泉縣西七十里,屬安定郡。膚施,縣,[因]秦(因)不改,今延州膚施縣是。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상군에 있다.” 했다. 【正義】 한의 조나 옛 성은 원주 백천현 서쪽 70리에 있는데 안정군에 속한다. ‘부시’는 현이니 진나라 때부터 고치지 않았는데 지금의 연주 부시현이 이것이다.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歲,時大時小,別散分離,尚矣,其世傳不可得而次云。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盡服從北夷,而南與中國為敵國,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순유로부터 두만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때로는 크고, 때로는 적으며, 떨어져 흩어지고 나뉘어 떨어진 것이 오래되어 그 세상에 전하는 것을 얻어 차례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묵돈에 이르러 흉노가 가장 강대하여 북쪽 오랑캐를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 중국과 대적하는 나라가 되어 그 세상에 전해지는 나라의 官號를 얻어 기록할 수 있다.
置左右賢王,左右谷蠡王,[一]左右大將,左右大都尉,左右大當戶,左右骨都侯。[二]匈奴謂賢曰「屠耆」,[三]故常以太子為左屠耆王。自如左右賢王以下至當戶,大者萬騎,小者數千,凡二十四長,立號曰「萬騎」。諸大臣皆世官。呼衍氏,蘭氏,[四]其後有須卜氏,[五]此三姓其貴種也。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六]以往者,東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七]以西,接月氏、氐、羌;[八]而單于之庭直代、雲中:[九]各有分地,逐水草移徙。而左右賢王、左右谷蠡王最為大(國),左右骨都侯輔政。諸二十四長亦各自置千長、百長、什長、[一0]裨小王、相、封[一一]都尉、當戶、且渠之屬。[一二]
좌, 우현왕, 좌, 우녹리왕, 좌, 우대장, 좌, 우대도위, 좌, 우대당호, 좌, 우골도후를 두었다. 흉노는 현명한 사람을 일러 ‘屠耆’라 하였으므로 평소 태자를 ‘좌도기왕’이라 하였다. 좌우현왕으로부터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 큰 자는 만기, 작은 자는 수천을 거느린 자가 모두 24명 있었는데 부르기를 ‘만기’라 했다. 여러 대신들은 관직을 세습한다. 호연씨, 난씨와 그 후 수복씨가 있었는데 이 세 성은 그 귀한 종족이었다. 여러 좌방의 왕들과 장군들은 동쪽에 살고, 상곡을 담당하러 갔던 자는 동쪽으로 ‘예맥’, ‘조선’을 접하였고, 우방의 왕들과 장군들은 서쪽에 살았는데 상군 이서를 담당하면서 ‘윌지’, ‘저’, ‘강’과 접하였고, 선우의 조정은 대와 운중을 담당하였으며 각기 땅을 나누어 소유하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다. 좌우현왕, 좌우곡려왕이 가장 큰 나라가 되고, 좌우골도후가 정사를 보좌하였다. 여러 24장이 또한 각기 스스로 천장, 백장, 십장, 비소왕, 상, 봉도위, 당호, 차거의 등을 두었다.
[一] 集解服虔曰:「谷音鹿。蠡音離。」 索隱服虔音鹿離。蠡,又音黎。
[一]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谷’의 음은 ‘鹿’이고, ‘蠡’의 음은 ‘離’이다.” 했다. 【索隱】 복건은 “음이 ‘녹리’라 했다. ‘蠡’는 또 음이 ‘黎’이다.” 했다.
[二] 集解骨都,異姓大臣。索隱按:後漢書云「骨都侯,異姓大臣」。
[二] 【集解】 ‘骨都’는 성이 다른 대신이다. 【索隱】 『후한서』에 “骨都侯는 성이 다른 대신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屠,一作『諸』。」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屠’는 한 편으로 ‘諸’라 쓰기도 한다.” 했다.
[四] 正義顏師古云:「呼衍,即今鮮卑姓呼延者也。蘭姓今亦有之。」
[四] 【正義】 안사고가 말하기를 “‘呼衍’은 곧 지금의 선비의 성인 ‘呼延’이다. 난씨 성도 지금 또한 있다.” 했다.
[五] 集解呼衍氏、須卜氏常與單于婚姻。須卜氏主獄訟。索隱按:後漢書云「呼衍氏、須卜氏常與單于婚姻。須卜氏主獄訟」也。正義後漢書云:「呼衍氏、須卜氏常與單于婚姻。」
[五] 【集解】 ‘호연’씨, ‘수복’씨는 평소 선우와 혼인한다. ‘수복’씨는 옥사와 송사를 주관한다. 【索隱】 살펴보니 『후한서』에 “‘호연’씨, ‘수복’씨는 항상 선우와 혼인한다. ‘수복’씨는 옥사와 송사를 주관한다.” 했다. 【正義】 『후한서』에 “‘호연’씨, ‘수복’씨는 항상 선우와 혼인한다.
[六] 索隱案:姚氏云「古字例以『直』為『值』。值者,當也」。正義上谷郡,今媯州也。言匈奴東方南出,直當媯州也。
[六] 【索隱】 살펴보니 요씨가 말하기를 “「고자예」에 ‘直’을 ‘值(값 치)’라 하였는데 ‘值’는 담당함이다.” 했다. 【正義】 상곡군은 지금의 규주이다. 흉노가 동방의 남쪽으로 나와 바로 규주와 마주한다는 말이다.
[七] 正義上郡故城在涇州上縣東南五十里。言匈奴西方南直當綏州也。
[七] 【正義】 상군의 옛 성은 경주 상현 동남쪽 50리에 있다. 흉노가 서방의 남쪽에서 바로 수주를 마주한다는 말이다.
[八] 索隱西接氐、羌,案:風俗通云「二氐,本西南夷種。地理志武都有白馬氐」。又魚豢魏略云「漢置武都郡,排其種人,分竄山谷或號青氐,或號白氐」。纂文云「氐亦羊稱」。說文云「羌,西方牧羊人」。續漢書云「羌,三苗姜姓之別,舜徙于三危,今河關之西南羌是也」。
[八] 【索隱】 서쪽으로 ‘저’, ‘강’을 접하는데 살펴보니 『풍속통』에 “두 氐(근본 저)는 본래 서남이의 종족이다. 「지리지」 무도에 ‘백마저’가 있다.” 했다. 또 어환의 『위략』에 “한이 무도군을 두고 그 종족 사람을 밀어내니 산과 골짜기에 나누어 도망하여 혹은 ‘청저’라 하고, 혹은 ‘백저’ 불렀다.” 했다. 『찬문』에 “‘저’는 또한 양을 일컳는다.” 했다. 『설문』에 “‘강’은 서방에서 양을 기르는 사람들이다.” 했다. 『속한서』에 “강‘은 삼묘 강성의 별종으로 순임금이 삼위에 옮겼는데 지금의 하관 서남쪽의 강족이 이것이다.” 했다.
[九] 索隱案:謂匈奴所都處為「庭」。樂產云「單于無城郭,不知何以國之。穹廬前地若庭,故云庭」。正義代郡城,北狄代國,秦漢代縣城也,在蔚州羌胡縣北百五十里。雲中故城,趙雲中城,秦雲中郡,在勝州榆林縣東北四十里。言匈奴之南直當代、雲中也。
[九] 【索隱】 살펴보니 흉노가 도읍한 곳을 ‘庭’이라 말한다. 낙산은 “선우는 성곽이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나라라 하는지 알 수 없다. ‘穹廬’ 앞의 땅이 조정과 같기 때문에 ‘庭 ’이라 말한 것이다. 【正義】 대군성은 북적의 대국인데 진나라, 한나라의 대현성으로 울주 강호현 북쪽 150리에 있다. 운중 옛 성은 조나라 운중성, 진나라 운중군으로 승주 유림현 동북쪽 40리에 있다. 흉노는 남쪽으로 바로 대와 운중을 마주한다.
[一0] 索隱案:續漢書(郡國)[百官]志云「里有魁,人有什伍。里魁主一里百家,什主十家,伍長五家,以相檢察」。故賈誼過秦論以為「俛起什百之中」是也。
[一0] 【索隱】 살펴보니 『속한서』 「군국백관지」에 “마을에 ‘魁’가 있고, 사람들은 ‘십’과 ‘오’가 있다. 마을의 ‘魁’는 한 마을 100家를 주관하고, ‘什’은 10家를 주관하고, ‘伍長’은 5家로 서로 점검하고 살핀다.” 했다. 그러므로 가의가 「과진론」에서 “힘써 ‘什’과 ‘百’의 안에서 일어났다.” 한 것이 이것이다.
[一一] 集解徐廣曰:「一作『將』。」
[一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 편으로 ‘將’이라 쓴다.” 했다.
[一二] 正義且,子餘反。顏師古云:「今之沮渠姓,蓋本因此官。」
[一二] 【正義】 ‘且’는 ‘子’와 ‘餘’의 反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지금의 ‘저거성’은 대개 이 관에서 근본하고 유래 한 것이다.
歲正月,諸長小會單于庭,祠。五月,大會蘢城,[一]祭其先、天地、鬼神。秋,馬肥,大會蹛林,[二]課校人畜[三]計。其法,拔刃尺者死,坐盜者沒入其家;有罪小者軋,[四]大者死。獄久者不過十日,一國之囚不過數人。而單于朝出營,拜日之始生,夕拜月。其坐,長左而北鄉。[五]日上戊己。其送死,有棺槨金銀衣裘,而無封樹喪服;[六]近幸臣妾從死者,多至數千百人。[七]舉事而候星月,月盛壯則攻戰,月虧則退兵。其攻戰,斬首虜賜一卮酒,而所得鹵獲因以予之,得人以為奴婢。故其戰,人人自為趣利,善為誘兵以冒敵。故其見敵則逐利,如鳥之集;其困敗,則瓦解雲散矣。戰而扶輿死者,盡得死者家財。
매년 정월 여러 장들이 선우의 뜰에서 작은 모임을 열고 제사하였다. 5월에 용성에서 크게 모여 그 선조와 천지, 귀신에게 제사하였다. 가을에는 말이 살찌니 대림에서 크게 모여 사람과 가축을 헤아리고 따져 세금을 부과하였다. 그 법에 칼을 한자 넘게 뽑은 자는 죽이고, 절도죄를 지은 자는 그 집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을 잡아들이며, 죄가 적은 자는 軋刑에 처하고, 큰 자는 죽인다. 옥에 오래 있은 자가 10일을 지나지 않고, 한 나라의 죄수가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선우는 아침에 營을 나가 떠오르는 해에 절하고, 저녁에는 달에 절한다, 그 앉는 것은 장은 외편으로 북쪽을 향한다. 날은 戊일과 己일을 길하게 여겼다. 그 죽음을 보내는 것은 (장례는) 관곽에 시신을 넣고, 시신은 금은으로 꾸민 옷과 갓옷을 입히는데 봉분과 나무를 심거나 상복은 없으며, 가까운 신하와 첩들로 따라 죽는 자가(순장하는 자가) 많으면 수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일을 할 때는 별과 달의 조짐을 살펴 달이 성대하고 강건하면 공격하여 싸우고, 달이 이지러지면 곧 군대를 물린다. 공격하여 싸울 때 머리를 베거나 포로를 잡으면 한 잔의 술을 내리고, 노획물을 얻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주고 잡은 사람은 노비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 싸움은 사람들 마다 이익에 달려 나가 군대를 꾀는 것으로서 적을 덮어씌우기를 잘하였다. 그러므로 적을 보면 곧 이익을 쫓아 마치 새가 모이듯 하고, 곤궁하고 패하면 곧 기와가 깨지고 구름이 흩어지듯 하였다. 싸우다 죽은 자를 수레에 싣고 온자는 죽은 자 집의 재물을 모두 얻었다.
[一] 索隱漢書作「龍城」,亦作「蘢」字。崔浩云「西方胡皆事龍神,故名大會處為龍城」。後漢書云「匈奴俗,歲有三龍祠,祭天神」。
[一] 【索隱】 『한서』에 “龍城”이라 썼다. 또 ‘蘢(개여뀌 롱(농)’자로 썼다. 최호가 말하기를 “서방의 오랑캐는 모두 용신을 섬기기 때문에 크게 모이는 곳의 이름을 ‘용성’이라 한 것이다.” 했다. 『후한서』에 “흉노의 풍속에 매년 三龍祠를 두고 천신에게 제사하였다.” 했다.
[二] 集解漢書音義曰:「匈奴秋社八月中皆會祭處。蹛音帶。」 索隱服虔云:「音帶。匈奴秋社八月中皆會祭處。」鄭氏云:「地名也。」晉灼云「李陵與蘇武書云『相競趨蹛林』」,則服虔說是也。又韋昭音多藍反。姚氏案:李牧傳「大破匈奴,滅襜襤」,此字與韋昭音頗同,然林襤聲相近,或以「林」為「襤」也。正義顏師古云:「蹛者,遶林木而祭也。鮮卑之俗,自古相傳,秋祭無林木者,尚豎柳枝,眾騎馳遶三周乃止,此其遺法也。」
[二] 【集解】 「한서음의」에 “흉노의 ‘秋社’는 8월 중에 모두 제사지내는 곳에 만난다. ‘蹛(밟을 대)’의 음은 ‘帶’이다.” 했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음은 ‘帶’이다. 흉노의 추사는 8월 중에 제사지내는 곳에 모인다.” 했다. 정씨는 “지명이다.” 했고, 진작은 “이릉이 소무에게 준 글에 ‘서로 다투어 蹛林에 달려 나간다.’”하였으니 곧 복건이 말한 것이 이것이다. 또 위소는 “음을 ‘多’와 ‘蓋’의 反이다.” 했다. 요씨가 살펴보니 「이목 전」에 “크게 흉노를 깨트리고 襜襤(담람)을 멸하였다.” 하였는데 이 글자와 위소의 음이 자못 같다. 그러나 ‘林’과 ‘襤’은 소리가 서로 비슷하여 혹은 ‘林’이라 하고, 혹은 ‘襤’이라 했다. 【正義】 안사고가 말하기를 “‘蹛’는 나무를 둘러치고 제사하는 것이다. 선비족의 풍속에 예부터 서로 전하던 것인데 秋祭는 林木이 없고 오히려 버드나무가지를 세우고, 여러 사람이 말을 타고 세 바퀴를 치달아 돌고 그치는데 이는 그 남겨진 법니다.” 했다.
[三] 正義許又反。
[三] 【正義】 ‘許’와 ‘又’의 反이다.
[四] 集解漢書音義曰:「刃刻其面。」 索隱服虔云:「刀割面也,音烏八反。」鄧展云:「歷也。」如淳云:「撾,抶也。」三蒼云:「軋,輾也。」說文云:「輾,轢也。」 正義顏師古云:「軋者謂輾轢其骨節,若今之厭踝者也。」
[四] 【集解】 「한서음의」에 “칼로 그 어굴을 새기는 것이다.” 했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칼로 얼굴을 가르는 것으로 음은 ‘烏’와 ‘八’의 反이다.” 했다. 등전이 말하기를 “歷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撾’는 매질함이다.” 했다. 삼창이 말하기를 “‘軋’은 삐걱거림이다.” 했다. 『설문』에 말하기를 “‘輾’은 수레바퀴에 침이다.” 했다. 【正義】 안사고가 말하기를 “‘軋’은 그 뼈마디를 수레바퀴를 굴려 치는 것이니 지금의 ‘厭踝(복사 뼈를 누르다.)’와 같은 것이다.” 했다.
[五] 正義其座北向,長者在左,以左為尊也。
[五] 【正義】 그 자리를 북쪽을 향하고, 장이 왼편에 있음이니 왼쪽을 높음으로 삼은 것이다.
[六] 集解張華曰:「匈奴名冢曰逗落。」
[六] 【集解】 장화가 말하기를 “흉노는 ‘冢(무덤 총)’을 ‘逗(머무를 두)落’이라 한다.” 했다.
[七] 正義漢書作「數十百人」。顏師古云:「或數十人,或百人。」
[七] 【正義】 『한서』에 “數十百人”이라 썼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혹은 수십 명이고, 혹은 백명이다.” 했다.
後北服渾庾、屈射、[一]丁零、[二]鬲昆、薪犁之國。[三]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以冒頓單于為賢。
후에 북쪽으로 ‘혼유’, ‘굴석’, ‘정영’, ‘격곤’, ‘신리’의 나라를 굴복시켰다. 이에 흉노의 귀인과 대신들이 모두 복종하니 모돈선우를 현명하다 하였다.
[一] 索隱國名。射音亦,又音石。
[一] 【索隱】 나라 이름이다. ‘射’의 음은 ‘亦’이고 도 음은 ‘石’이다.
[二] 索隱按:魏略云「丁零在康居北,去匈奴庭接習水七千里」。又云「匈奴北有渾窳國」。
[二] 【索隱】 살펴보니 『위략』에 “‘정영’은 강거 북쪽에 있는데 흉노의 조정이 접한 습수에서 7천리 떨어져 있다.” 했다. 또 말하기를 “흉노 북쪽에 ‘혼유국’이 있다.” 했다.
[三] 正義已上五國在匈奴北。
[三] 【正義】 이상 5개 나라는 흉노 북쪽에 있다.
是時漢初定中國,徙韓王信於代,都馬邑。匈奴大攻圍馬邑,韓王信降匈奴。匈奴得信,因引兵南踰句注,攻太原,至晉陽下。高帝自將兵往擊之。會冬大寒雨雪,卒之墮指者十二三,於是冒頓詳敗走,誘漢兵。漢兵逐擊冒頓,冒頓匿其精兵,見其羸弱,於是漢悉兵,多步兵,三十二萬,北逐之。高帝先至平城,[一]步兵未盡到,冒頓縱精兵四十萬騎圍高帝於白登,[二]七日,漢兵中外不得相救餉。匈奴騎,其西方盡白馬,東方盡青駹馬,[三]北方盡烏驪馬[四],南方盡騂馬。[五]高帝乃使使閒厚遺閼氏,閼氏乃謂冒頓曰:「兩主不相困。今得漢地,而單于終非能居之也。且漢王亦有神,單于察之。」冒頓與韓王信之將王黃、趙利期,而黃、利兵又不來,疑其與漢有謀,亦取閼氏之言,乃解圍之一角。於是高帝令士皆持滿傅[六]矢外鄉,從解角直出,竟與大軍合,而冒頓遂引兵而去。漢亦引兵而罷,使劉敬結和親之約。
이 때는 한이 중국을 안정시킨 초라서 한왕 신을 대 땅으로 옮기고, 마읍을 도읍으로 했다. 흉노가 크게 마읍을 공격하여 포위하니 한왕 신이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흉노가 신을 얻고는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구주를 넘어 태원을 공격하고 진양 아래에 이르렀다. 고제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쳤다. 경울의 큰 추위와 비, 눈을 만나 군졸의 소가락 발가락이 떨어진 자가 10명 중 두, 세 명이었으니 이에 모돈이 거짓으로 달아나면서 한의 군대를 꾀었다. 한의 군대가 모돈을 쫓아 치니 모돈이 그 정예 군대는 숨겨두고, 파리하고 여윈 것을 보여주니 이에 한이 군대를 모두 동원하였는데 보병을 많이 하여 32만 명으로 북쪽으로 쫓아갔다. 고제가 먼저 평성이 이르렀으나 보병은 아직 모두 도달하지 못하였는데 모돈이 졍예 군사 40만기를 놓아 백등에서 고제를 포위하게 하니 7일 동안 한의 군대 안과 밖이 서로 먹을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다. 흉노의 기병은 그 서쪽 방향은 모두 백마로 하고, 동쪽 방향은 모두 청방마로 하고 북쪽 방향은 모두 오려마로 하고, 남쪽 방향은 모두 성마로 하였다. 고제가 이에 사신으로 하여금 연지에게 많은 뇌물을 주며 이간하니 연지가 이에 모돈에게 말하기를 “두 임금이 서로 두 군주가 곤궁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한의 땅을 얻었으되 선우가 끝내 살지 못합니다. 또한 한의 왕이 또한 신묘하니 선우는 그것을 살피십시오.” 했다. 모돈이 한왕 신의 장군 왕황과 조이와 함께하기를 약속하였는데 왕황과 조이의 군대가 또한 오지 않으니 한과 함께 꾀함이 있는가 의심하고, 또한 연지의 말을 취하여 이에 포위의 한 모퉁이를 풀었다. 이에 고제가 군사로 하여금 화살을 재우고 밖을 향하게 하고 포위가 풀린 모퉁이를 다라 곧바로 나와 마침내 대군과 합하였고, 모둔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갔다. 한이 또한 군대를 이끌고 그만두면서 유경으로 하여금 화친의 약속을 맺게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在鴈門。」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안문에 있다.” 했다.
[二] 正義白登臺在白登山上,朔州定襄縣東三十里。定襄縣,漢平城縣也。
[二] 【正義】 ‘백등대’는 백등산 위에 있는데 삭주 정양현 동쪽 30리이다. 정양현은 한의 평성현이다.
[三] 索隱駹音武江反。案:青駹馬,色青。正義鄭玄云:「駹,不純也。」說文云:「駹,面顙皆白。」爾雅云黑馬面白也。
[三] 【索隱】 ‘駹’은 음이 ‘武’와 ‘江’의 反이다. 살펴보니 ‘靑駹馬’는 색이 청색이다. 【正義】 정현이 말하기를 “‘駹’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했다. 『설문』에 “‘駹’은 얼굴과 이마가 흰 것이다.” 했다. 『이아』에 “검은 말이 얼굴만 흰색이다.” 했다.
[四] 索隱說文云:「驪,黑色。」
[四] 【索隱】 『설문』에 “‘驪’는 검은 색이다.” 했다.
[五] 索隱案:詩傳云「赤黃曰騂」。
[五] 【索隱】 살펴보니 『시전』에 “적황색을 ‘騂’”이라 했다.
[六] 索隱音附。
[六] 【索隱】 음은 ‘附’이다.
是後韓王信為匈奴將,及趙利、王黃等數倍約,侵盜代、雲中。居無幾何,陳豨反,又與韓信合謀擊代。漢使樊噲往擊之,復拔代、鴈門、雲中郡縣,不出塞。是時匈奴以漢將眾往降,故冒頓常往來侵盜代地。於是漢患之,高帝乃使劉敬奉宗室女公主為單于閼氏,歲奉匈奴絮繒酒米食物各有數,約為昆弟以和親,冒頓乃少止。後燕王盧綰反,率其黨數千人降匈奴,往來苦上谷以東。高祖崩,孝惠、呂太后時,漢初定,故匈奴以驕。冒頓乃為書遺高后,妄言。高后欲擊之,[一]諸將曰:「以高帝賢武,然尚困於平城。」於是高后乃止,[二]復與匈奴和親。
이후 한왕 신이 흉노의 장군이 되고, 조리와 왕황 등과 여러 번 약속을 어기고 대와 운중을 침범하고 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희가 배반하고, 도 한신과 함하여 대를 칠 것을 모의하였다. 한이 번쾌로 하여금 가서 치게하여 다시 대와 안문, 운중의 군현을 함락시키고 요새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 때 한의 장군들이 흉노에게 가서 항복하였으므로 모돈은 항상 오고가면서 대 땅을 침범하고 훔쳤다. 이에 한이 그것을 근심하였다. 고제가 이에 유경으로 하여금 황실의 딸인 공주를 선우의 연지로 삼게 하고 해마다 흉노에게 솜옷과 비단, 술, 쌀의 먹을거리가 각각 일정한 수량을 받들고 형제의 맹약으로 화친을 약속하니 모돈이 조금 그쳤다. 후에 연왕 노관이 배반하고 그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흉노에게 항복하면서 모돈이 왕래하니 상곡 이동이 괴롭게 여겼다. 고조가 죽고 효헤제, 여태후 때는 한이 안정된 처음이기 때문에 흉노가 교만하였다. 모돈이 이에 글을 고후에게 보내 망녕되이 말하였다. 고후가 그들을 치고자 하니 여러 장군들이 말하기를 “고제의 현명함과 위엄으로도 오히려 평성에서 곤궁하였습니다.” 했다. 이에 고후가 그치고, 다시 흉노와 화친하였다.
[一] 索隱案:漢書云「高后時,冒頓寖驕,乃使使遺高后書曰:『孤僨之君,生於沮澤之中,長於平野牛馬之域,數至邊境,願遊中國。陛下獨立,孤僨獨居,兩主不樂,無以自娛,願以所有,易其所無。』。高后怒,欲擊之」。
[一]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고후 때 모돈이 점점 교만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고후에게 글을 전하게 하여 말하기를 ‘외로워 설 수없는 임금이 낮고 물기가 많은 땅 가운데서 태어나 평야의 소와 말의 영역에서 자랐으나 여러 번 변경에 이르러 중국에서 놀기를 원하였습니다. 폐하가 홀로 즉위하시니 외로워 설수 없는 과부의 신세입니다. 두 임금이 즐겁지 않고 스스로 편안함이 없어 있는 바로써 그 없는 바를 바꾸기를 원합니다.” 했다. 고후가 노하여 그들을 공격하고자 했다.
[二] 索隱案漢書,季布諫,高后乃止。
[二] 【索隱】 『한서』를 살펴보니 “계포가 간하여 고후가 이에 그쳤다.” 했다.
至孝文帝初立,復修和親之事。其三年五月,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侵盜上郡葆塞蠻夷,殺略人民。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詣高奴,[一]擊右賢王。右賢王走出塞。文帝幸太原。是時濟北王反,文帝歸,罷丞相擊胡之兵。
효문제가 즉위한 초에 이르러 화친의 약속을 다시 닦았다. 그 3년 5월에 흉노 우현왕 하남 땅에 들어와 살면서 상군의 요새를 지키던 오랑캐를 침범하여 훔치고,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효문제가 승상 관영에게 명령하여 수레와 기병 8만 5천 명을 징발하여 고노에 나아가 우현왕을 치게 하였다. 우현왕이 달아나 요새를 나갔다. 문제가 태원에 갔다. 이 때 제북왕이 배반하므로 문제가 돌아와 오랑캐의 군사를 치려던 승상의 군대를 그만두게 했다.
[一] 正義延州城本漢高奴縣舊都。
[一] 【正義】 연주성은 본래 한 고노현의 옛 도읍이다.
其明年,單于遺漢書曰:「天所立匈奴大單于敬問皇帝無恙。前時皇帝言和親事,稱書意,合歡。漢邊吏侵侮右賢王,右賢王不請,聽後義盧侯難氏[一]等計,與漢吏相距,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皇帝讓書再至,發使以書報,不來,漢使不至,漢以其故不和,鄰國不附。今以小吏之敗約故,罰右賢王,使之西求月氏擊之。以天之福,吏卒良,馬彊力,以夷滅月氏,盡斬殺降下之。定樓蘭、[二]烏孫、呼揭[三]及其旁二十六國,皆以為匈奴。[四]諸引弓之民,并為一家。北州已定,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以應始古,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未得皇帝之志也,故使郎中係雩淺奉書[五]請,獻橐他一匹,騎馬二匹,駕二駟。[六]皇帝即不欲匈奴近塞,則且詔吏民遠舍。使者至,即遣之。」以六月中來至薪望之地。[七]書至,漢議擊與和親孰便。公卿皆曰:「單于新破月氏,乘勝,不可擊。且得匈奴地,澤鹵[八],非可居也。和親甚便。」漢許之。
그 다음해 선우가 한에 글을 남겨 말하기를 “하늘이 세운 흉노의 대선우가 공경히 황제의 근심이 없는지를 여쭙니다. 지난번에 황제가 화친의 일을 말한 것이 글의 뜻에 걸맞고 부합하여 기쁩니다. 한의 변경의 관리가 우현왕을 침범하고 모욕하자 우현왕이 선우에게 청하지 않고 ‘후의’, ‘노후’, ‘난씨’ 등의 계책을 듣고 한의 관리와 서로 대항하여 두 임금의 약속을 끊고, 형제의 친함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께서 꾸짖는 글이 두 번 이르렀으므로 사신을 내어 글을 가지고 보고하였으나 돌아오지 않고 한의 사신도 이르지 않으니 한이 그 일 때문에 화친하지 않는다면 이웃 나라(흉노)도 화친에 붙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하급관리가 약속을 무너뜨린 일 때문에 우현왕을 벌주어 그로 하여금 서쪽으로 월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하늘의 복과 이졸의 선량함과 말의 강력함으로 월지를 멸망시켜 모두 목 베어 죽이고 항복시켰습니다. ‘누란’, ‘오손’, ‘호게’와 그 옆의 26개 나라를 평정하여 모두 흉노가 되었습니다. 여러 활을 당기는 백성들을 아울러 一家가 되었습니다. 북쪽의 주가 이미 안정되었으니 전쟁을 끝내 사졸을 쉬게 하고, 말을 기르며 앞의 일을 없애 옛 약속을 회복함으로써 변경의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써 옛 날로 돌아가 젊은이들은 그 자람을 이루게 하고, 늙은이는 그 자리를 편안하게 하여 대대로 편안하고 즐겁게 하기를 원합니다. 황제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낭중 계우천으로 하여금 글을 받들게 하여 청하며, 탁타 1필, 타는 말 2필, 수레 끄는 말 2사(1駟는 네 마리)를 바칩니다. 황제께서 곧 흉노가 요새에 가까이 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곧 또한 조칙으로 관리와 백성들에게 집을 멀리하도록 하십시오. 사신이 이르면 곧 그들을 보내주십시오. 했다. 6월 중에 흉노의 사신이 와서 신망의 땅에 이르렀다. 글이 이르자 한은 공격하는 것과 화친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편한지를 의논하였다. 공경이 모두 말하기를 “서우가 새로 월지를 깨트리고 이김을 타고 있으니 공격할 수 없습니다. 또한 흉노의 땅을 얻더라도 땅이 습하여 살만하지 않습니다. 화친하는 것이 매우 편리합니다.” 했다. 한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一] 集解徐廣曰:「音支。」 索隱匈奴將名也。氏音支。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음은 ‘支’이다.” 했다. 【索隱】 흉노 장군의 이름이다. ‘氏’의 음은 ‘支’이다.
[二] 集解徐廣曰:「一云『樓湟』。」 正義漢書云鄯善國名樓蘭,去長安一千六百里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누항’이라 쓴다.” 했다. 【正義】 『한서』 에 “‘선선국’의 이름은 ‘누란’인데 장안으로부터 1600리 떨어져 있다.” 했다.
[三] 集解音桀。索隱音傑,又音丘列反。正義揭音桀,又其例反。二國皆在瓜州西北。烏孫,戰國時居瓜州。
[三] 【集解】 음은 ‘傑(뛰어날 걸)’인데 도 음이 ‘丘’와 ‘列’의 反이다. 【正義】 ‘揭’의 음은 ‘傑’인데 또 ‘其’와 ‘例’의 反이다. 두 나라는 모두 과주 서북쪽에 있다. ‘오손’은 전국시대에 과주에서 살았다.
[四] 索隱案:謂皆入匈奴一國。
[四] 【索隱】 살펴보니 모두 흉노 한 나라에 편입되었음을 말한다.
[五] 集解雩音火胡反。索隱係,胡計反。雩,火胡反。
[五] 【集解】 ‘雩(기우제 우)’의 음은 ‘火’와 ‘胡’의 反이다. 【索隱】 ‘係’는 ‘胡’와 ‘計’의 反이다. ‘雩’는 ‘火’와 ‘胡’의 反이다.
[六] 正義顏師古云:「駕,可駕車也。二駟,八匹馬也。」
[六] 【正義】 안사고가 말하기를 “‘駕(멍에 가)’는 수레에 멍에 지울 수 있음이다. ‘二駟’는 8필의 말이다.” 했다.
[七] 集解漢書音義曰:「塞下地名。」 索隱望薪之地。服虔云:「漢界上塞下地名,今匈奴使至於此也。」
[七] 【集解】 「한서음의」에 “요새 아래의 땅 이름이다.”했다. 【索隱】 망신의 땅이다. 복건이 말하기를 “한의 경계 우, 요새 아래 땅이름이니 지금 흉농, 사신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했다.
[八] 正義上音舄。
[八] 【正義】 위의 음은 ‘舃(신 석, 까치 작)’이다.
孝文皇帝前六年,漢遺匈奴書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使郎中係雩淺遺朕書曰:『右賢王不請,聽後義盧侯難氏等計,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漢以故不和,鄰國不附。今以小吏敗約,故罰右賢王使西擊月氏,盡定之。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朕甚嘉之,此古聖主之意也。漢與匈奴約為兄弟,所以遺單于甚厚。倍約離兄弟之親者,常在匈奴。然右賢王事已在赦前,單于勿深誅。單于若稱書意,明告諸吏,使無負約,有信,敬如單于書。使者言單于自將伐國有功,甚苦兵事。服繡袷綺衣、[一]繡袷長襦、[二]錦袷袍各一,比余一,[三]黃金飾具帶一,[四]黃金胥紕一,[五]繡十匹,錦三十匹,赤綈、[六]綠繒各四十匹,使中大夫意、謁者令肩遺單于。」
효문황제 전원 6년 한이 흉노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황제가 흉노 대선우의 몸에 탈이 없는지 묻습니다. 낭중 ‘계우천’으로 하여금 짐에게 보낸 글에 말하기를 ‘우현왕이 선우에게 청하지 않고 후의, 노후, 난시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두 임금의 약속을 끊고, 형제의 친함을 이간하여 한이 이 일 때문에 화친하지 않아 이웃나라에 붙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하급관리가 약속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우현왕을 벌주어 서쪽으로 월지를 공격하게 하여 모두 평정하였습니다. 전쟁을 종식시켜 사졸을 쉬게 하고 말을 기르며, 앞의 일을 없애 옛 약속을 회복하여 변경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젊은이는 그 자람을 이루게 하고, 늙은이는 그 사는 곳을 편안하게 하여 대대로 편안하고 즐겁게 하기를 원합니다.’ 했습니다. 짐은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이것이 옛 성스러운 임금의 뜻이라 여깁니다. 한과 흉노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던 것은 선우가 매우 두터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어기고, 형제의 친함을 이간하는 자는 항상 흉노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현왕의 일은 이미 앞서 용서함이 있었으니 선우께서는 깊이 죽이지는 마십시오, 선우게서 만약 글에 걸맞는 뜻이라 여긴다면 여러 관리에게 분명하게 말하여 약속을 등짐이 없게 하시어 믿음이 있어야 공경히 선우의 글과 같을 것입니다. 사자가 선우께서 스스로 장군이 되어 나라를 정벌하여 공이 있으되 군사의 일에서 매우 괴롭다. 말하였습니다. 내가 입는 ‘수겹기의’, ‘수겹장유’, ‘금겹포’ 각 한 벌, 비여 1개, ‘황금식구대’ 1개, ‘황금서비’ 1개, 수놓은 비단 10필, 염색한 비단 30필, 적제, 녹증 각각 40필을 중대부 의와 알자령 견을 시켜 선우에게 보낸다. 했다.
[一] 索隱案:小顏云「服者,天子所服也。以繡為表,綺為裏」。以賜冒頓。字林云「袷衣無絮也。音公洽反」。
[一] 【索隱】 소안이 말하기를 “‘服’은 천자가 입는 옷이다. 꽃을 수놓은 비단으로 겉을 만들고, 꽃무늬를 짜 넣은 비단으로 안감을 대었다.” 했다. 모돈에게 내렸다. 『자림』에 “겹된 옷은 솜이 없다. 음은 ‘公’과 ‘洽’의 反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一本無『袷』字。」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 어떤 본에는 ‘袷(겹옷 겹)’자가 없다.
[三] 集解徐廣曰:「或作『疏比』也。」 索隱案:漢書作「比疏一」。比音鼻。小顏云「辮髮之飾也,以金為之」。廣雅云「比,櫛也」。蒼頡篇云「靡者為比,■者為梳」。按蘇林說,今亦謂之「梳比」,或亦帶飾者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혹은 ‘疏(트일 소)比’라 썼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比疏一”이라 썼다. ‘比’의 음은 ‘鼻’이다. 소안은 “변발의 꾸밈으로 금으로 만든다.” 했다. 『광아』에 “‘比’는 ‘櫛(빗 즐)’이다.” 했다. 창힐편에 “‘靡(쓰러질 미)’는 比라 하고, ■는 梳(얼레빗 소) 라 한다.” 했다. 소림의 말을 살펴보니 지금 또한 그것을 일러 ‘소비’라 하거나 혹은 허리 띠 꾸밈이라 한다.
[四] 集解漢書音義曰:「要中大帶。」 索隱按:謂要中大帶。
[四] 【集解】 「한서음의」에 “허리 가운데의 큰 띠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허리 가운데의 큰 띠를 말한다.
[五] 集解徐廣曰:「或作『犀毗』,而無『一』字。」 索隱漢書見作「犀毗」,或無下「一」字。此作「胥」者,犀聲相近,或誤。張晏云「鮮卑郭落帶,瑞獸名也,東胡好服之」。按:戰國策云「趙武靈王賜周紹具帶黃金師比」。延篤云「胡革帶鉤也」。則此帶鉤亦名「師比」,則「胥」「犀」與「師」並相近,而說各異耳。班固與竇憲牋云「賜犀比金頭帶」是也。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혹은 ‘犀毗’라 쓰는데 ‘一’자가 없다.” 했다. 【索隱】 『한서』를 보니 ‘犀毗’라 썼는데 혹 아래 ‘一’자가 없다. 여기서 ‘胥’라 쓴 것은 ‘犀’와 소리가 서로 비슷해서인데 혹은 잘못이다. 장안이 말하기를 “선비족의 ‘곽락대’는 상서로운 짐승의 이름으로 동호가 그것을 띠기를 좋아한다.” 했다. 살펴보니 『전국책』에 “조나라 무령왕이 주소에게 구대와 황금 허리 띠 고리를 내렸다.” 했다. 연독이 말하기를 “오랑캐의 가죽 허리띠 고리이다.”했다. 곧 이는 허리띠 고리로 또한 ‘師比’라 히니 곧 ‘胥’와 ‘犀’가 모두 서로 비슷한데 말이 각각 달랐을 뿐이다. 반고가 두헌에게 준 牋(장계 전, 편지)‘에 “서비’와 ‘금두대’를 내렸다.” 한 것이 이것이다.
[六] 正義音啼。索隱案:說文云「綈,厚繒也」。
[六] 【正義】 음은 ‘啼’이다. 【索隱】 살펴보니 『설문』에 “‘綈(깁 제)’는 두텁게 짠 비단이다.”했다.
後頃之,冒頓死,子稽粥立,[一]號曰老上單于。
얼마 후 모돈이 죽고 아들 계육이 즉위하였는데 ‘노상선우’라 불렀다.
[一] 索隱稽音雞。粥音育。
[一] 【索隱】 ‘稽(머무를 계)’의 음은 ‘雞’이다. ‘粥’의 음은 ‘育’이다.
老上稽粥單于初立,[一]孝文皇帝復遣宗室女公主為單于閼氏,使宦者燕人中行說[二]傅公主。說不欲行,漢彊使之。說曰:「必我行也,為漢患者。」中行說既至,因降單于,單于甚親幸之。
노상계육선우가 처음 즉위하자 효문황제가 다시 종실의 딸인 공주를 보내 선우의 연지로 삼으면서 환관인 연나라 사람 중항설로 하여금 공주를 돌보게 하였다. 중항열이 가고자하지 않자 한이 억지로 가게 했다. 중항열이 말하기를 “반드시 나를 가게 한다면 한이 근심하는 자가 될 것이다.” 했다. 중항열이 이른 후 선우에게 항복하니 선우가 매우 가까이하고 총애하였다.
[一] 集解徐廣曰:「一云『稽粥第二單于』,自後皆以弟別之。」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계육은 제2선우’이다 하였고, 이후로부터 모두 동생들과 구별하였다.” 했다.
[二] 正義行音胡郎反。中行,姓;說,名也。
[二] 【正義】 ‘行’의 음은 ‘胡’와 ‘郞’의 反이다. ‘중항’은 성이고, ‘설’은 이름이다.
初,匈奴好漢繒絮食物,中行說曰:「匈奴人眾不能當漢之一郡,然所以彊者,以衣食異,無仰於漢也。今單于變俗好漢物,漢物不過什二,則匈奴盡歸於漢矣。[一]其得漢繒絮,以馳草棘中,衣袴皆裂敝,以示不如旃裘之完善也。得漢食物皆去之,以示不如湩酪[二]之便美也。」於是說教單于左右疏記,以計課其人眾畜物。[三]
처음 흉노가 한의 비단과 솜, 먹을거리를 좋아하자 중항열이 말하기를 “흉노의 사람들은 한의 한 개 군을 당하지 못하지만 강한 까닭은 옷과 먹는 것이 다르고, 한을 우러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가 풍속을 바꾸고 한의 물건을 좋아하는데 한의 물건이 열에 두 개를 지나지 않아도 곧 흉노는 모두 한에 귀속될 것입니다. 한의 비단과 명주솜을 얻으면 풀과 가시 속을 치달려서 윗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지고 헤지는 것으로써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의 완전하고 좋음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한의 먹을거리를 얻으면 모두 버려서 소나 말의 젖의 편하고 맛있음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했다. 이에 중항열이 선우의 좌우에게 기록하는 법을 가르쳐서 그 사람들과 가축을 헤아려 세금을 부과하게 했다.
[一] 集解韋昭曰:「言漢物什中之二入匈奴,匈奴則動心歸漢矣。」
[二]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한의 물건 10개 중에 2개가 흉노에 들어가면 흉노는 곧 마음이 흔들려 한에 귀속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했다.
[二] 集解湩,乳汁也。音都奉反。索隱重駱。音潼酪二音。按:三蒼云「潼,乳汁也」。字林云「竹用反」。穆天子傳云「牛馬之湩,臣菟人所具」。
[二] 【集解】 ‘湩(젖 동)’은 유즙이다. 음은 ‘都’와 ‘奉’의 反이다. 【索隱】 重駱이다. 음은 ‘潼’과 ‘酪’ 두 음이다. 살펴보니 삼창이 말하기를 “‘潼’은 유즙이다.” 했다. 『자림』에 “‘竹’과 ‘用’의 反이다.” 했다. 「목천자전」에 “소와 말의 젖으로 신토 사람들이 갖추었다.(썼다.)” 했다.
[三] 正義上許又反。
[三] 【正義】 위는 ‘許’와 ‘又’의 反이다.
漢遺單于書,牘以尺一寸,辭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所遺物及言語云云。中行說令單于遺漢書以尺二寸牘,及印封皆令廣大長,倨傲其辭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所以遺物言語亦云云。
한이 선우에게 글을 보내는데 서판(나무 쪽)을 한 자 한 치로 하고, (서두에)말하기를 “황제가 공경히 흉노의 대선우가 무탈한지를 묻습니다.” 하고, 보내는 바의 물건과 말하려는 것(용건은) 무엇 무엇이라 하였다. 중항열이 선우가 한에 보내는 글은 한 자 두 치의 나무쪽으로 하게하고, 도장을 찍어 봉하는에 이르기 까지 모두 넓고, 크고 길게 하고 그 말을 거만하고 오만하게 하여 말하기를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둔 흉노의 대선우가 공경히 한 황제의 무탈함을 묻습니다.”하고, 보내는 물건과 말하려는 것(용건은)은 또한 무엇 무엇이라 하였다.
漢使或言曰:「匈奴俗賤老。」中行說窮漢使曰:「而漢俗屯戍從軍當發者,其老親豈有不自脫溫厚肥美以齎送飲食行戍乎?」漢使曰:「然。」中行說曰:「匈奴明以戰攻為事,其老弱不能鬥,故以其肥美飲食壯健者,蓋以自為守衛,如此父子各得久相保,何以言匈奴輕老也?」漢使曰:「匈奴父子乃同穹廬而臥。[一]父死,妻其後母;兄弟死,盡取其妻妻之。無冠帶之飾,闕庭之禮。」中行說曰:「匈奴之俗,人食畜肉,飲其汁,衣其皮;畜食草飲水,隨時轉移。故其急則人習騎射,寬則人樂無事,其約束輕,易行也。君臣簡易,一國之政猶一身也。父子兄弟死,取其妻妻之,惡種姓之失也。故匈奴雖亂,必立宗種。今中國雖詳[二]不取其父兄之妻,親屬益疏則相殺,至乃易姓,皆從此類。且禮義之敝,上下交怨望,而室屋之極,生力必屈。[三]夫力耕桑以求衣食,築城郭以自備,故其民急則不習戰功,緩則罷於作業。嗟土室之人,顧無多辭,令喋喋[四]而佔佔,[五]冠固何當?」[六]
한의 사신이 언젠가 말하기를 “흉노의 풍속은 늙은이를 천하게 여긴다.” 하니 중항열이 한의 사신에게 모질게 말하기를 “한의 풍속에도 군영을 지키고, 종군하러 징발당할 때 그 늙은 부모가 스스로 따뜻하고 두터운 옷을 벗어 주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으로서 수자리 가는 자에게 먹고 마시게 하여 보내지 않습니까?” 하니 한의 사신이 말하기를 “그러합니다.”했다. 중항열이 말하기를 “흉노는 분명하게 전공으로써 일을 삼는데 그 노약자는 잘 싸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살찌고 맛있는 것으로써 건장한 자에게 마시고 먹게 하는 것은 대개 스스로 지키기 위한 때문인데 이 같이 부자가 각각 오래 동안 서로 보호하는 것이 어찌 흉노가 늙은이를 가벼이 여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했다. 한의 사신이 말하기를 “흉노는 부자가 곧 같은 동굴식 집에 눕고, 아버지가 죽으면 그 계모를 아애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모두 취하여 아내로 삼는다. 관을 매고, 띠를 매는 조정의 예가 없다.” 하니 중항열이 말하기를 “흉노의 풍속은 사람이 가축의 고리를 먹고 그 즙(젖)을 마시며 그 가죽을 입기 때문에 가축에게 풀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해야 하므로 때에 따라 옮겨 다녀야 한다. 그러므로 다급하면 곧 사람들은 말을 타고 활쏘기를 익히고 편안해지면 곧 사람들은 일이 없음을 즐기고 그 약속이 간단하여 쉽게 행한다. 임금과 신하는 간단하고 쉬워 한 나라의 정사가 한 몸과 같다. 부자와 형제가 죽었을 때 그 처를 취하여 아내로 하는 것은 종족의 성을 잃는 것(대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비록 어지러워도 반드시 종실로 세울 수 있다. 지금 중국이 비록 드러내 놓고 그 부형의 이내를 취하지 않으나 친속이 더욱 멀어지면 곧 서로 죽이고 성을 바꿈에 이르는데 모두 이러한 부류를 따르는 것이다. 또한 예의의 폐해로 상하가 서로 원망하고 집짓기를 지극하게 하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힘은 반드시 굽혀진다. 대저 힘써 밭 갈고 누에치는 것으로써 옷과 음식을 구하고, 성곽을 쌓는 것으로써 스스로 대비하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급하여도 싸우는 일에 익숙하지 않고 느슨하여도 곧 일을 함에 지친다. 슬프다. 흙 집에 사는 사람들이 돌아보고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수다를 떨고 웃옷 아래옷을 잘 입더라도 진실로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穹廬,旃帳。」
[一] 【集解】 「한서음의」에 “‘穹(하늘 궁)廬(오두막집 려)’는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이다.” 했다.
[二] 索隱漢書作「陽」,此亦音羊。
[二] 【索隱】 『한서』에 “‘陽’이라 썼는데 이 또한 음은 ‘羊’이다.
[三] 索隱以言棟宇室屋之作,人盡極以營其生,至於氣力屈竭也。屈音其勿反。
[三] 【索隱】 집을 짓는일을 말하는 것으로써 사람들이 모두 그 삶을 영위하는 것을 다하니 기력이 굽히고 다함에 이른다. 한 것이다.
[四] 集解音諜,利口也。
[四] 【集解】 음은 ‘諜(염탐할 첩)’이니 말을 잘 하는 것이다.
[五] 集解音昌占反,衣裳貌。
[五] 【集解】 음은 ‘昌’과 ‘占’의 反이니 윗옷과 치마의 모습이다.
[六] 集解言雖復著冠,固何當所益。索隱鄧展曰:「喋音牒。佔,囁耳語。」服虔曰:「口舌喋喋。」如淳曰:「言汝漢人多居室中,固自宜著冠,且不足貴也。」小顏云:「喋喋,利口也。佔佔,衣裳貌。喋音昌涉反,佔音占。言當思念,無為喋喋佔佔耳。雖自謂著冠,何所當益也。」
[六] 【集解】 비록 다시 관을 쓰더라도 진실로 무슨 이익되는 바가 있을까 하고 말한 것이다. 【索隱】 등전이 말하기를 “‘喋(재잘거릴 첩)’의 음은 ‘牒’이다. ‘佔(볼 점)’은 귀속 말이다.” 했다. 복건이 말하기를 “말을 수다스럽게 하는 것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너희 한 사람들이 많이 집에서 살면서 스스로 알맞게 관을 쓸지라도 또한 귀함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했다. 소안이 말하기를 “‘喋喋’은 말을 잘 하는 것이다. ‘佔佔’은 윗옷과 아래옷의 모양이다. ‘喋’의 음은 ‘昌’과 ‘涉’의 反이고, ‘佔’의 음은 ‘占’이다. 생각에 알맞게 하고 수다스럽고 옷을 잘 챙겨 입는다는 말이다. 비록 스스로 관을 썼다 말할지라도 무슨 이익됨이 있으리오. 한 것이다.” 했다.
自是之後,漢使欲辯論者,中行說輒曰:「漢使無多言,顧漢所輸匈奴繒絮米糱,令其量中,必善美而己矣,何以為言乎?且所給備善則已;不備,苦惡,[一]則候秋孰,以騎馳蹂而稼穡耳。」[二]日夜教單于候利害處。
이 이후로부터 한의 사신이 변론하고자 하면 중행열이 문득 말하기를 “ 한의 사신은 말을 많이 하지 마시오. 한이 흉노에게 보내줄 비단과 솜, 쌀, 누룩을 돌아보아 그 양을 알맞게 하고 반드시 질을 좋게 할 뿐이지 무슨 말을 하시오? 또한 주는 바가 좋고 갖추어졌으면 그만일 뿐이고, 갖추어지지 않고, 질도 나쁘다면 곧 가을의 익음을 살펴서 기마로 치달려 농사지은 것을 짓밟을 뿐입니다.” 하고는 밤낮으로 선우에게 이로운 곳과 해로운 곳을 가르쳤다.
[一] 集解韋昭曰:「苦,麄也。音若『靡盬』之『盬』。」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苦’은 거침이다. 음은 ‘靡盬(염지 고)의’ ‘盬’와 같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蹂音而九反。」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蹂’의 음은 ‘而’와 ‘九’의 反이다.” 했다.
漢孝文皇帝十四年,匈奴單于十四萬騎入朝那、蕭關,殺北地都尉卬,[一]虜人民畜產甚多,遂至彭陽。[二]使奇兵入燒回中宮,[三]候騎[四]至雍甘泉。[五]於是文帝以中尉周舍、郎中令張武為將軍,發車千乘,騎十萬,軍長安旁以備胡寇。而拜昌侯盧卿[六]為上郡將軍,甯侯魏遫為北地將軍,隆慮侯周灶為隴西將軍,東陽侯張相如為大將軍,成侯董赤[七]為前將軍,大發車騎往擊胡。[八]單于留塞內月餘乃去,漢逐出塞即還,不能有所殺。匈奴日已驕,歲入邊,殺略人民畜產甚多,雲中、遼東最甚,至代郡萬餘人。漢患之,乃使使遺匈奴書。單于亦使當戶報謝,復言和親事。
한 효문제 14년 흉노 선우가 14만기로 조나 소관에 들어와 북지도위 앙을 죽이고 백성과 가축을 매우 많이 포로로 잡고 마침내 팽양에 이르렀다. 기습하는 무대로 하여금 회중궁을 불사르게 하고, 척후 노릇하는 기병이 옹 땅의 감천궁에 이르렀다. 이에 문제가 중위 주사, 낭중령 장무를 장군으로 삼아 수레 천대, 기병 10만을 징발하여 장안 옆에 주둔시키는 것으로써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고, 창후 노경에게 벼슬을 주어 상군 장군을 삼고 영후 위속을 북지장군, 융여후 주조를 농서장군으로 삼고, 동양후 장상여를 대장군으로 삼고, 성후 동적을 전장군을 삼아 크게 수레와 기병을 징발하고 가서 오랑캐를 치게하였다. 선우가 요새 안에서 한 달 정도 머물다 가니 한이 쫓아서 요새를 나갔다가 곧 돌아왔으나 죽인 바가 없었다.(전과가 없었다.) 흉노가 날로 교만해져 해마다 변경에 들어와 백성과 가축을 죽이고 노략질 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운중과 요동이 가장 심하였고, 대군에서는 반여명이 이르렀다. 한이 그것을 근심하여 이에 사신으로 하여금 흉노에 글을 보내게 하였다. 선우가 또한 당호로 하여금 사과하게 하여 다시 화친의 일을 말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姓孫。其子單,封為鉼侯。白丁反。」 索隱卬音五郎反。徐廣曰:「姓孫,其後子單封為瓶侯。音白丁反。」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성은 손이다. 그 아들 단이 봉하여져 ?후가 되었다. ‘白’과 ‘丁’의 反이다.
[二] 集解徐廣曰:「在安定。」 索隱出彭陽。韋昭云:「安定縣。」 正義「城」字誤也。括地志云:「彭城故城在涇州臨城縣東二十里。」案:彭城在媯州,與北地郡甚遠,明非彭城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안정에 있다.” 했다. 【索隱】 팽양을 나왔다. 위소가 말하기를 “안정현이다.” 했다. 【正義】 ‘城’자는 잘못이다. 『괄지지』에 “팽성의 옛 성은 경주 임성현 동쪽 20리에 있다.” 살펴보니 팽성은 규주에 있는데 북지군과는 매우 멀어서 팽성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三] 索隱服虔云:「在北地,武帝作宮」。始皇本紀二十七年,「登雞頭山,過回中」。武帝元封四年,通回中道。正義括地志云:「秦回中宮在岐州雍縣西四十里,即匈奴所燒者也。」
[三]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북지에 있는데 무제가 궁을 지었다.” 했다. 「시황본기」 27년에 “계두산에 올라 회중을 지났다.” 했다. 무제 원봉 4년 회중도를 통하였다. 【正義】 『괄지지』에 “진 회중궁은 기주 옹현 서쪽 40리에 있는데 곧 흉노가 불사른 것이다.” 했다.
[四] 索隱崔浩云:「候,邏騎。」
[四] 【索隱】 최호가 말하기를 “‘候’는 ‘邏(순행할 라)騎’이다.” 했다.
[五] 正義括地志云:「雲陽也。秦之林光宮,漢之甘泉,在雍州雲陽西北八十里。秦始皇作甘泉宮,去長安三百里,望見長安。秦皇帝以來祭天圜丘處。」
[五] 【正義】 『괄지지』에 “운양이다. 진의 임광궁, 한의 감천궁인데 옹주 운양 서북쪽 80리에 있다. 진 시황제가 감천궁을 지었는데 장안에서 300리 떨어져 있는데 장안을 바라본다. 진 황제 때부터 하늘과 환구에 제사하는 곳이다.”했다.
[六] 索隱案:表「盧」作「玈」,古今字耳。
[六] 【索隱】 살펴보니 「표」에 “‘盧’는 ‘玈(검을 로)’자로 썼는데 고금의 글자가 같다.
[七] 正義音赫。
[七] 【正義】 음은 ‘赫’이다.
[八] 集解徐廣曰:「內史欒布亦為將軍。」
[八]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내사 欒(나무이름 란)이 또한 장군이 되었다.” 했다.
孝文帝後二年,使使遺匈奴書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使當戶且居[一]雕渠難、[二]郎中韓遼遺朕馬二匹,已至,敬受。先帝制:長城以北,引弓之國,受命單于;長城以內,冠帶之室,朕亦制之。使萬民耕織射獵衣食,父子無離,臣主相安,俱無暴逆。今聞渫惡民貪降其進取之利,倍義絕約,忘萬民之命,離兩主之驩,然其事已在前矣。書曰:『二國已和親,兩主驩說,寢兵休卒養馬,世世昌樂,闟然更始。』[三]朕甚嘉之。聖人者日新,改作更始,使老者得息,幼者得長,各保其首領而終其天年。朕與單于俱由此道,順天恤民,世世相傳,施之無窮,天下莫不咸便。漢與匈奴鄰國之敵,匈奴處北地,寒,殺氣早降,故詔吏遺單于秫糱金帛絲絮佗物歲有數。今天下大安,萬民熙熙,朕與單于為之父母。朕追念前事,薄物細故,謀臣計失,皆不足以離兄弟之驩。朕聞天不頗覆,地不偏載。朕與單于皆捐往細故,俱蹈大道,墮壞前惡,以圖長久,使兩國之民若一家子。元元萬民,下及魚鱉,上及飛鳥,跂行喙息[四]蠕動之類,[五]莫不就安利而辟危殆。故來者不止,天之道也。俱去前事:朕釋逃虜民,單于無言章尼等。[六]朕聞古之帝王,約分明而無食言。單于留志,天下大安,和親之後,漢過不先。單于其察之。」
효문제 후원 2년에 사신으로 하여금 흉노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황제가 삼가 흉노 대선우는 무탈한지를 묻습니다. 당호 겸 저거 조거난과 낭중 한유로 하여금 짐에게 보낸 말 두 필이 이미 이르렀으므로 삼가 잘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황제의 조칙에는 장성 이북의 활을 잘 쏘는 나라는 천명을 선우에게 받고, 장성 이내는 관을 쓰고 허리에 띠를 매는 집은 짐이 또한 다스립니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밭 갈고 길쌈하며 활을 쏘아 사냥하여 입고 먹게 하며, 부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신하와 임금이 서로 편안하여 모두 사납게 거스름이 없다. 했습니다. 더럽혀지고 악한 백성이 그 나아가 취하는 이익을 탐하여 의리를 배반하고 약속을 끊어 모든 백성의 생명을 잊고, 두 임금의 기쁨을 이간하였다. 하나 그 일은 이미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서경』에 말하기를 ‘두 나라가 이미 화친하여 두 임금이 기뻐하고, 전쟁을 끝내 병사를 쉬게 하며 말을 길러 대대로 즐거움을 번성하게 하여 안정이 다시 시작한다.’ 하니 짐이 매우 아름답게 여깁니다. 성인의 도를 따라 날로 새로워지고, 허물을 고쳐 다시 시작하면 늙은이로 하여금 쉬게 할 수 있고, 어린애는 자랄 수 있으니 각기 그 수령을 보호하며 그 천수를 마치게 할 수 있습니다. 짐과 선우가 모두 이 도로 말미암아 하늘에 순응하고 백성을 불쌍하게 여겨 대대로 서로 전하여 그것을 베픔이 다함이 없으니 천하가 모두 누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한과 흉노는 이웃의 대등한 나라인데 흉노는 북지에 있어 춥고 죽이는 기운이 일찍 내리기 때문에 관리들에게 명하여 선우에게 차조, 누룩, 비단, 실과 솜과 다른 물건들을 보태어 해마다 수가 있게 보냈습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편안하고 백성은 화목하여 짐과 선우가 그들의 부모가 되었습니다. 짐이 앞의 일을 회상해보니 자잘한 일과 도모하는 신하들의 계책이 잘못이 모두 형제의 기쁨을 떨어지게 함에는 부족합니다. 짐이 들으니 ‘하늘은 치우쳐 덮지 않고 땅은 편벽되게 싣지 않는다.’ 합니다. 짐과 선우가 모두 과거의 자잘한 일을 버리고 함께 대도를 밟아 앞의 악을 떨어뜨리고 무너뜨려 장구함을 도모하여 두 나라의 백성으로 하여금 한 집안의 자식과 같이 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백성과 아래로 물고기와 자라에 이르고 위로는 나는 새에 이르고 곤충과 부리로 숨을 쉬는 동물,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벌레 따위에 이르기까지 편안하고 이로움에 나아가 위태로움을 피하지 않음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는 자는 저지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도입니다. 모든 앞의 일을 버리고 짐이 흉노를 도망하여 잡힌 백성을 풀어주니 선우도 장니 등에을 탓하지 마십시오. 짐이 들으니 ‘옛날의 제왕은 약속은 분명하게 하고 말을 번복하거나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우께서는 유념하시어 천하가 크게 편안하고 화친한 후에는 한이 허물을 먼저 하지 않을 것입니다.(약속을 먼저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선우께서는 그것을 살피소서.” 했다.
[一] 索隱漢書作「且渠」,匈奴官號。
[一] 【索隱】 『한서』에는 ‘且渠’라 썼는데 흉노의 관직 이름이다.
[二] 索隱按:樂彥云「當戶、且渠各自一官。雕渠難為此官也」。正義雕渠難者,其姓名也。且,子余反。
[二] 【索隱】 살펴보니 낙언이 말하기를 “‘당호’, ‘且渠’는 각각 스스로 한 관직이다. ‘雕渠難’이 관직을 하였다.” 했다. 【正義】 ‘조거난’은 그 성명이다. ‘且’는 ‘子’와 ‘余’의 反이다.
[三] 集解徐廣曰:「闟音■,安定意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闟’의 음은 ■인데 안정의 뜻이다.” 했다.
[四] 索隱案:跂音岐,又音企。言蟲豸之類,或企踵而行,或以喙而息,皆得其安也。
[四] 【索隱】 살펴보니 ‘跂(육발이 기)’의 음은 ‘岐(갈림길 기)’이고, 또 음은 ‘企’이다. 벌레와 발 없는 벌레 종류인데 혹 기어서 가거나 혹은 부리로 숨쉬는 모든 것이 그 편안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五] 索隱案:三蒼云「蠕蠕,動貌,音軟」。淮南子云「昆蟲蠕動」。
[五] 【索隱】 살펴보니 삼창에 “‘蠕蠕’은 움직이는 모양이니 음은 ‘軟(연할 연)’이다.” 했다. 『회남자』에 “곤충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다.” 했다.
[六] 索隱案:文帝云我今日並釋放彼國逃亡虜,遣之歸本國,汝單于無得更以言詞訴於章尼等,責其逃也。
[六] 【索隱】 살펴보니 문제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그 나라의 도망한 포로를 모두 풀어주어 본국에 돌려보내니 너 선우는 다시 장니 등에게 쟁송하여 그 도망한 것을 책임지우지 말라.” 한 것이다.
單于既約和親,於是制詔御史曰:「匈奴大單于遺朕書,言和親已定,亡人不足以益眾廣地,匈奴無入塞,漢無出塞,犯(令)[今]約者殺之,可以久親,後無咎,俱便。朕已許之。其布告天下,使明知之。」
선우가 화친을 약속하니 이에 어사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흉노 대선우가 짐에게 글을 보내 화친이 이미 정해졌음을 말하였다. 도망한 사람들은 무리를 더하고 땅을 넓히지도 못하니 흉노는 요새를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한은 요새를 나가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약속을 범하는 자를 죽이면 오래도록 친할 수 있어 후에 허물이 없고 모두 편할 것이다. 짐이 이미 그것을 허락하였으니 천하에 펴 알려서 분명하게 알게 하라.” 했다.
後四歲,老上稽粥單于死,子軍臣立為單于。既立,[一]孝文皇帝復與匈奴和親。而中行說復事之。
4년 후 노상계육 선우가 죽고 아들 군신이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즉위하고 나서 효문황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하였다. 중항열이 다시 그를 섬겼다.
[一] 集解徐廣曰:「後元三年立。」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후원 3년에 즉위했다.” 했다.
軍臣單于立四歲,[一]匈奴復絕和親,大入上郡、雲中各三萬騎,所殺略甚眾而去。於是漢使三將軍軍屯北地,代屯句注,趙屯飛狐口,緣邊亦各堅守以備胡寇。又置三將軍,軍長安西細柳、渭北棘門、霸上以備胡。胡騎入代句注邊,烽火通於甘泉、長安。數月,漢兵至邊,匈奴亦去遠塞,漢兵亦罷。後歲餘,孝文帝崩,孝景帝立,而趙王遂乃陰使人於匈奴。吳楚反,欲與趙合謀入邊。漢圍破趙,匈奴亦止。自是之後,孝景帝復與匈奴和親,通關市,給遺匈奴,遣公主,如故約。終孝景時,時小入盜邊,無大寇。
군신선우가 즉위한 4년 후 흉노가 다시 화친을 끊고 크게 상군, 운중에 각각 3만 기병으로 들어왔는데 죽이고 약탈하기를 매우 많이 하고 돌아갔다. 이에 한이 세 장군으로 하여금 북지 대땅의 구주, 조의 비호구에 주둔하게 하고, 변경을 또한 각각 굳게 지키는 것으로써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또 세 장군을 두어 장안 서쪽 세류, 위수 북쪽 극문, 패상에 주둔시키는 것으로써 오랑캐를 대비하였다. 오랑캐 기병이 대땅 구주 변경에 들어오니 봉화가 감천, 장안에 통하였다. 몇 개월 후 반의 군대가 변경에 이르자 흉노가 또한 요새를 떠나 멀리 갔으므로 한의 군대 또한 그쳤다. 1년 후 효문제가 죽고 효경제가 즉위하였는데 조왕 유수가 몰래 흉노에 사신을 보냈다. 오와 초가 배반하자 흉노가 조와 합하여 변경에 들어 갈 것을 꾀하였다. 한이 포위하고 조를 깨트리자 흉노가 또한 그만두었다. 이 후로부터 효경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하여 관시를 통하여 흉노에게 물품을 주어 보내고 공주를 보내 옛 약속과 같이 하였다. 효경제가 죽을 때까지 때때로 소소하게 변경에 들어와 훔쳤으나 큰 침략은 없었다.
[一] 集解徐廣曰:「孝文後元七年崩,而二年答單于書,其閒五年。而此云『後四年』,又『立四歲』,數不容爾也。孝文後六年冬,匈奴入上郡、雲中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효문제가 후원 7년에 죽고, 2년 후에 선우의 글에 답하였는데 그 사이가 5년이었다. 여기서 말한 ‘후원 4년’, 또 ‘즉위 4년’이라 한 것은 수가 용납되지 않는다. 효문제 후훤 6년 겨울에 흉노가 상군과 운중에 들어왔다.” 했다.
今帝即位,明和親約束,厚遇,通關市,饒給之。匈奴自單于以下皆親漢,往來長城下。
지금 황제(무제)가 즉위하여 화친의 약속을 분명히 하고 대우를 두터이 하며 관시를 통하고 넉넉히 주었다. 흉노가 선우로부터 이하가 모두 한과 친하여 장성아래를 왕래하였다.
漢使馬邑下人聶翁壹[一]奸蘭[二]出物[三]與匈奴交[四],詳為賣馬邑城以誘單于。單于信之,而貪馬邑財物,乃以十萬騎入武州塞。[五]漢伏兵三十餘萬馬邑旁,御史大夫韓安國為護軍,護四將軍以伏單于。單于既入漢塞,未至馬邑百餘里,見畜布野而無人牧者,怪之,乃攻亭。是時鴈門尉史[六]行徼,見寇,葆此亭,知漢兵謀,單于得,欲殺之,[七]尉史乃告單于漢兵所居。單于大驚曰:「吾固疑之。」乃引兵還。出曰:「吾得尉史,天也,天使若言。」以尉史為「天王」。漢兵約單于入馬邑而縱,單于不至,以故漢兵無所得。漢將軍王恢部出代擊胡輜重,聞單于還,兵多,不敢出。漢以恢本造兵謀而不進,斬恢。[八]自是之後,匈奴絕和親,攻當路塞,[九]往往入盜於漢邊,不可勝數。然匈奴貪,尚樂關市,嗜漢財物,漢亦尚關市不絕以中之。[一0]
한이 마읍 아래 사람인 노인 섭일로 하여금 금령을 범하고 사사로이 물건을 내어 흉노와 교역하게 하고 거짓으로 마읍성을 파는 것처럼 선우를 유인하게 했다. 선우가 그것을 믿고 마읍의 재물을 탐하여 10만의 기병을 동원하여 무주 요새에 들어왔다. 한이 30여만 기병을 마읍 옆에 매복시키고 어사대부 한안국을 호군으로 삼고 네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매복하여 선우를 기다리게 했다. 선우가 한의 요새에 들어 온 후 마읍에 미처 100여리정도 이르지 않은 곳에서 가축이 들에 펴진 것을 보았으되 사람이 기르는 자가 없음을 괴이하게 여겨 이에 정을 공격하였다. 이 때 안문 위사가 순찰하다 도적을 보고 이 정을 지켰는데 한의 군대가 꾀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우가 잡아 그를 죽이려 하니 위사가 이에 선우에게 한의 군대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선우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그것을 의심하였다.”하고는 곧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요새를)나와서 말하기를 “내가 위사를 잡은 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이 너에게 말하게 시켰다.”하고는 위사를 ‘천왕’이라 했다. 한의 군대가 선우가 마음에 들어오면 군대를 풀어서 치기로 약속하였는데 선우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한의 군대가 얻은 바가 없었다. 한의 장군 왕회 부는 대를 나가 오랑캐의 수송부대를 치려하였는데 선우가 돌아갔고, 군대가 많다는 것을 듣고는 감히 나가지 못하였다. 한이 왕회가 본래 군대로 나아가기로 꾀하고서도 나아가지 않았다 하여 왕회의 머리를 베었다. 이 이후로부터 흉노가 화친을 끊고 길과 맞닿아 있는 요새를 공격하면서 한의 변경을 자주 도적질 한 것이 이루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흉노는 탐욕스러워 오히려 관시를 좋아하였고, 한의 재물을 즐기고, 한이 또한 오히려 관시를 끊지 않고 그들에게 맞추어 주었다.
[一] 索隱按:衛青傳唯稱「聶壹」。顧氏云「壹,名也。老,故稱翁」,義或然也。
[一] 【索隱】 살펴보니 「위청전」에는 오직 ‘섭일’이라 말하였을 뿐이다. 고씨가 말하기를 “‘壹’은 이름이다. ‘老’는 옛날에 노인을 일컬음이다.” 했다. 뜻이 혹 그러하다.
[二] 集解奸音干。干蘭,犯禁私出物也。
[二]【集解】 ‘奸’의 음은 ‘干’이다. ‘干蘭’은 사사로이 물건 내는 것을 금한 법을 범하는 것이다.
[三] 索隱上音干。干蘭謂犯禁私出物也。
[三] 【索隱】 위의 음은 ‘干’이다. ‘干蘭’은 사사로이 물건 내는 것을 금한 법을 범하는 것이다.
[四] 集解漢書音義曰:「私出塞與匈奴交市。」
[四] 【集解】 「한서음의」에 “사사로이 요새를 나가 흉노와 시장에서 교역하는 것이다.” 했다.
[五] 索隱蘇林云在鴈門也。
[五] 【索隱】 소림이 “안문에 있다.” 했다.
[六] 索隱如淳云:「律,近塞郡皆置尉,百里一人,士史、尉史各二人也。」
[六]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律에는 요새에서 가까운 군에는 모두 위를 두는데 100리에 1명, 사사와 위사 각각 두 명이다.” 했다.
[七] 集解徐廣曰:「一云『乃下,具告單于』。」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항복하여 모두 선우에게 말하였다.’하기도 한다.” 했다.
[八] 集解韓長孺傳曰:「恢自殺。」
[八] 【集解】 「한장유전」에 “왕회가 자살했다.” 했다.
[九] 索隱蘇林云:「直當道之塞。」
[九] 【索隱】 소림이 “곧 바로 길 가운데 있는 요새이다.” 했다.
[一0] 正義如淳云:「得具以利中傷之。」
[一0] 【正義】 여순이 말하기를 “갖추어서 이익에 맞추어 주어 그들을 상하게 할 수 있다.” 했다.
自馬邑軍後五年之秋,漢使四將軍各萬騎擊胡關市下。將軍衛青出上谷,至蘢城,得胡首虜七百人。公孫賀出雲中,無所得。公孫敖出代郡,為胡所敗七千餘人。李廣出鴈門,為胡所敗,而匈奴生得廣,廣後得亡歸。漢囚敖、廣,敖、廣贖為庶人。其冬,匈奴數入盜邊,漁陽尤甚。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其明年秋,匈奴二萬騎入漢,殺遼西太守,略二千餘人。胡又入敗漁陽太守軍千餘人,圍漢將軍安國,安國時千餘騎亦且盡,會燕救至,匈奴乃去。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於是漢使將軍衛青將三萬騎出鴈門,李息出代郡,擊胡。得首虜數千人。其明年,衛青復出雲中以西至隴西,擊胡之樓煩、白羊王於河南,得胡首虜數千,牛羊百餘萬。於是漢遂取河南地,築朔方,復繕故秦時蒙恬所為塞,因河為固。漢亦棄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一]是歲,漢之元朔二年也。
마읍의 군대로부터 5년 후 가을 한이 네 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각각 만 명의 기병으로 오랑캐의 관시아래를 치게 하였다. 장군 위청이 상곡을 나가 농성에 이르러 오랑캐 머리와 포로 700명을 얻었다. 공손하는 운중을 나갔으나 얻은 것이 없었다. 공손오는 대군을 나갔다가 오랑캐에게 7천여 명이 무너졌다. 이광은 안문을 나갔으나 오랑캐에게 패하였고, 흉노는 이광을 산채로 잡았는데 후에 도망하여 돌아왔다. 한이 공손오, 이광을 가두었는데 이광과 공손오는 재물로 죄를 갚고 서인이 되었다. 그 해 겨울 흉노가 여러 번 변경에 들어와 도적질하였는데 어양이 더욱 심하였다. 한이 장군 한안국으로 하여금 어양에 주둔하면서 오랑캐를 대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해 가을 흉노 2만기병이 한에 들어와 요서태수를 죽이고 2천여 명을 약탈하였다. 오랑캐가 또 들어와 어양태수의 군대 천여 명을 무너뜨리고 한의 장군 한안국을 포위하였는데 한안국은 그 때 천여 명의 기병이 또한 다하였으나 연의 구원군이 이르자 흉노가 이에 돌아갔다. 흉노가 또한 안문에 들어와 천여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에 한이 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안문을 나가게 하고, 이식은 대군을 나가 오랑캐를 치게 하여 머리와 포로 수천 명을 얻었다. 그 다음해 위청이 다시 운중을 나가 서쪽으로 농서에 이르러 오랑캐의 누번, 백양왕을 하남에서 쳐서 오랑캐 머리와 포로 수천과 소, 양 백여만마리를 얻었다. 이에 한이 마침내 하남의 땅을 취하고 삭방에 성을 쌓으며 옛 진나라 때 몽렴이 요새로 삼았던 것을 다시 수선하니 황하가 견고해 졌다. 한이 또한 상곡군의 벽현과 조양의 땅을 버려서 오랑캐에게 주었다. 이 해는 한의 원삭 2년이다.
[一] 集解什音斗。漢書音義曰:「言縣斗辟,(西)[曲]近胡。」 索隱按:孟康云「縣斗辟,(西)[曲]近胡」也。什音斗。辟音僻。造陽即斗辟縣中地。正義按:曲幽辟縣入匈奴界者造陽地棄與胡也。
[一] 【集解】 ‘什’의 음은 ‘斗’이다. 「한서음의」에 “현이 궁벽하고 외진 것을 말함이니 오랑캐와 가깝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맹강은 “현이 궁벽지고 외진 곳으로 오랑캐와 가깝다. ‘什’의 음은 ‘斗’이다. ‘辟’의 음은 ‘僻’이다. 조양은 곧 두벽현 가운데의 땅이다.” 했다. 【正義】 살펴보니 깊고 궁벽한 현으로 흉노 의 경계에 들었다는 것은 조양의 땅을 버려 오랑캐에게 준 것이다.
其後冬,匈奴軍臣單于死。軍臣單于弟左谷蠡王伊稚斜[一]自立為單于,攻破軍臣單于太子於單。[二]於單亡降漢,漢封於單為涉安侯,數月而死。
그 후 겨울에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었다. 군신선우의 동생 좌곡려왕 이치사사 스스로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는데 군신선우의 태자 어단을 공격하여 깨트렸다. 어단이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니 한이 어단을 섭안후에 봉하였는데 몇 개월 후 죽었다.
[一] 索隱伊稚斜。稚音持利反。斜音士嗟反,鄒誕生音直牙反。蓋稚斜,胡人語,近得其實。
[一] 【索隱】 이치사이다. ‘稚’의 음은 ‘持’와 ‘利’의 反이다. ‘斜’의 음은 ‘士’와 ‘嗟’의 反이다. 추탄생은 음이 “‘直’과 ‘牙’의 反이다.” 했다. 대개 ‘稚斜’는 오랑캐 사람들의 말이니 가까이하여 그 실질을 얻음이다.
[二] 索隱音丹。
[二] 【索隱】 음은 ‘丹’이다.
伊稚斜單于既立,其夏,匈奴數萬騎入殺代郡太守恭友,略千餘人。其秋,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其明年,匈奴又復復入代郡、定襄、[一]上郡,各三萬騎,殺略數千人。匈奴右賢王怨漢奪之河南地而築朔方,數為寇,盜邊,及入河南,侵擾朔方,殺略吏民其眾。
이치사 선우가 즉위하고 나서 그 해 여름 흉노가 수만의 기병으로 대군에 들어와 태수 공우를 죽이고 천여 명을 약탈했다. 그 해 가을 흉노가 또 안문에 들어와 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 했다. 그 다음 해 흉노가 또 다시 대군, 정양, 상군에 각각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들어와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흉노 우현왕이 한이 하남의 땅을 빼앗고, 삭방에 성을 쌓은 것을 원망하여 여러 번 침입하고 변경을 도적질 하며 하남에 들어가 삭방을 침입하여 소란스럽게 하고 관리와 백성을 많이 죽이고 약탈하였다.
[一] 正義括地志云:「定襄故城在朔州善陽縣北三百八十里。地理志定襄郡,高帝置也。」
[一] 【正義】 『괄지지』에 “정양 옛 성은 삭주 선양현 북쪽 380리에 있다. ” 했다. 「지리지」에 “정양군은 고제가 두었다.” 했다.
其明年春,漢以衛青為大將軍,將六將軍,十餘萬人,出朔方、高闕擊胡。右賢王以為漢兵不能至,飲酒醉,漢兵出塞六七百里,夜圍右賢王。右賢王大驚,脫身逃走,諸精騎往往隨後去。漢得右賢王眾男女萬五千人,裨小王十餘人。其秋,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略千餘人。
그 다음해 봄에 한이 위청을 대장군으로 삼고, 여섯 장군과 10여만을 거느리고 삭방, 고궐을 나가 흉노를 공격하였다. 우현왕이 한의 군대가 이를 수 없을 것으로 여겨 술을 마시고 취하였는데 한의 군대가 요새로부터 6, 7백리를 나가 반에 우현왕을 포위하였다. 우현왕이 크게 놀라 몸을 배어 달아나니 여러 정예 기병들이 계속하여 뒤를 따라 갔다. 한이 우현왕의 무리 남녀 1만5천여명과 비소왕 10여명을 잡았다. 그 해 가을 흉노의 기병 만여 명이 대군에 들어와 도위 주영을 죽이고 천여 명을 약탈하였다.
其明年春,漢復遣大將軍衛青將六將軍,兵十餘萬騎,乃再出定襄數百里擊匈奴,得首虜前後凡萬九千餘級,而漢亦亡兩將軍,軍三千餘騎。[一]右將軍建得以身脫,[二]而前將軍翕侯趙信兵不利,降匈奴。趙信者,故胡小王,降漢,漢封為翕侯,以前將軍與右將軍并軍分行,[三]獨遇單于兵,故盡沒。單于既得翕侯,以為自次王,[四]用其姊妻之,與謀漢。信教單于益北絕幕,[五]以誘罷漢兵,徼極而取之,[六]無近塞。單于從其計。其明年,胡騎萬人入上谷,殺數百人。
그 다음해 봄에 한이 다시 대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6명의 장군과 군대 10여만 명을 거느리게 하고 두 번째로 정양 수 백리를 나가게 하여 흉노를 쳐서 머리와 포로를 얻은 것이 모두 9천여 급이었고, 한이 또한 두 명의 장군과 군대 3천여 기병을 잃었다. 우장군 건은 몸을 빼었고, 전장군 흡후 조신은 군대가 이롭지 못하자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조신은 옛날에 오랑캐 소왕으로 한에 항복하였을 때 한이 봉하여 흡후를 삼았다. 전장군으로서 우장군과 함께 군대를 나누어 가다가 홀로 선우의 군대를 만나 모두 죽었다. 선우가 흡후를 잡고는 자기의 다음 왕이라 여기고 그 누이를 써서 아내로 삼게 하고, 함께 한을 도모하려 했다. 조신이 선우로 하여금 더욱 북쪽으로 사막을 곧바로 건너가 한의 군대를 유인하는 것으로서 피로하게 하고, 그 피로가 지극해지면 그것을 취하고 요새 가까이 가지 말게 하였다. 선우가 그 계책을 따랐다. 그 다음해 오랑캐 기병 만 여명이 상곡에 들어와 수백명을 죽였다.
[一] 集解徐廣曰:「合有三千耳。」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합하여 3천이었을 뿐이다.” 했다.
[二] 正義建,蘇武父也。
[二] 【正義】 ‘建’은 소무의 아버지이다.
[三] 正義與大軍別行也。
[三] 【正義】 대군과는 따로 행군하였다.
[四] 正義自次者,尊重次於單于。
[四] 【正義】 ‘自次’는 존중하기를 선우 다음으로 하는 것이다.
[五] 集解應劭曰:「幕,沙幕,匈奴之南界。」瓚曰:「沙土曰幕,直度曰絕。」
[五]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幕’은 사막으로 흉노의 남쪽 경계이다.” 했다. 신찬이 말하기를 “모래땅을 ‘幕’이라 하고, 곧바로 건너는 것을 ‘絶’이라 한다.” 했다.
[六] 索隱按:徼,要也。謂要其疲極而取之。正義徼音古堯反。徼,要也。要漢兵疲極則取之,無近塞居止。
[六] 【索隱】 살펴보니 ‘徼(구할 요, 순찰하다)’는 구함이다. 그 피로가 지극함을 구하여 취함을 말한다. 【正義】 ‘徼’의 음은 ‘古’와 ‘堯’의 反이다. ‘徼’는 구함이다. 한의 군대가 극도로 피로하기를 구하여 취하고, 요새 가까이 머묾이 없게 하는 것이다.
其明年春,漢使驃騎將軍去病將萬騎出隴西,過焉支山[一]千餘里,擊匈奴,得胡首虜(騎)萬八千餘級,破得休屠王祭天金人。[二]其夏,驃騎將軍復與合騎侯數萬騎出隴西、北地二千里,擊匈奴。過居延,[三]攻祁連山,[四]得胡首虜三萬餘人,裨小王以下七十餘人。是時匈奴亦來入代郡、鴈門,殺略數百人。漢使博望侯及李將軍廣出右北平,擊匈奴左賢王。左賢王圍李將軍,卒可四千人,且盡,殺虜亦過當。會博望侯軍救至,李將軍得脫。漢失亡數千人,合騎侯後驃騎將軍期,及與博望侯皆當死,贖為庶人。
그 다음해 봄 한이 표기장군 곽거병으로 하여금 기병 일만 기를 가느리고 농서를 나가 언지산 천여리를 지나 흉노랄 치게 하여 오랑캐 머리와 포로 1만 8천여 급을 얻었고, 휴도왕을 깨트리고 제천금인을 얻었다. 그 해 여름 표기장군이 다시 합기후(공손오)와 함께 일만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와 북지를 나와 이천 리를 행군하여 흉노를 쳤다. 거연을 지나 기련산을 공격하여 오랑캐 머리와 포로 3만 명과 비소왕 이하 70여명을 얻었다. 이 때 흉노가 와서 또한 대군과 안문에 들어가 수백 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한이 박망후와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우북평을 나가 흉노의 좌현왕을 치게 하였다. 좌현왕이 이 장군을 포위하였는데 병졸 사천 명 가량이 또한 다 죽었으나 한이 죽이고 포로로 한 것이 또한 더 많았다. 박망후의 군대가 구원함에 이름을 만나 이 장군이 탈출할 수 있었다. 한이 수천 명을 잃고 도망하였다. 합기후는 표기장군과의 약속에 늦어 박망후와 함께 죽을죄에 해당하였으나 재물을 내고 용서받아 서인이 되었다.
[一] 正義焉音煙。括地志云:「焉支山一名刪丹山,在甘州刪丹縣東南五十里。西河故事云『匈奴失祁連、焉支二山,乃歌曰:「亡我祁連山,使我六畜不蕃息;失我焉支山,使我婦女無顏色。」其慜惜乃如此』。」
[一] 【正義】 ‘焉’의 음은 ‘煙’이다. 『괄지지』에 “언지산은 일명 산단산이니 감주 刪(깍을 산)丹縣 동남쪽 50리에 있다. 「서하 고사에」에 ‘흉노가 기련, 언지 두 산을 잃고 이에 노래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기련산을 잃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6가지 가축을 번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우리가 언지산을 잃어서 우리 부녀의 얼굴색이 없게 하였다.’ 하니 그 애석해 함이 이와 같았다.” 했다.
[二] 集解漢書音義曰:「匈奴祭天處本在雲陽甘泉山下,秦奪其地,後徙之休屠王右地,故休屠有祭天金人,象祭天人也。」 索隱韋昭云:「作金人以為祭天主。」崔浩云:「胡祭以金人為主,今浮圖金人是也。」又漢書音義稱「金人祭天,本在雲陽甘泉山下,秦奪其地,徙之於休屠王右地,故休屠有祭天金人,象祭天人也」。事恐不然。案:得休屠金人,後置之於甘泉也。正義括地志云:「徑路神祠在雍州、雲陽縣西北九十里甘泉山下,本匈奴祭天處,秦奪其地,後徙休屠右地。」按:金人即今佛像,是其遺法,立以為祭天主也。
[二] 【集解】 「한서음의」에 “흉노가 하늘에 제사하는 곳은 본래 운양 감천산 아래에 있었는데 진나라가 그 땅을 빼앗은 후에는 휴도왕 우의 땅으로 옮겨갔다. 그러므로 휴도왕에게 제천금인이 있었는데 하늘에 제사하는 사람을 형상한 것이다.” 했다.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금인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는 신주로삼은 것이다.” 했다. 최호가 말하기를 “오랑캐의 제사는 금인으로써 신주를 삼았으니 지금 불교의 금인이 이것이다.” 했다. 또 「한서음의」에 “금인과하늘에 제사하는 곳은 본래 운양 감천산 아래 있었는데 진나라가 그 땅을 빼앗자 휴도왕 우의 땅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휴도왕에게 하늘에 제사하는 금인이 있으니 하늘에 제사하는 사람을 형상한 것이다.” 했다. 일은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하다. 살펴보니 휴도왕의 금인을 얻고 난 후 감천에 그것을 두었다. 【正義】 『괄지지』에 “경로신사는 옹주 운양현 서북쪽 90리 감천산 아래에 있는데 본래 흉노가 하늘에 제사하던 곳으로 진나라가 그 땅을 빼앗자 후에 휴도왕 우의 땅으로 옮겨 갔다.” 했다. 살펴보니 금인은 곧 불상으로 이는 그 전해진 법으로 세워서 하늘에 제사하는 신주로 삼았다.
[三] 索隱韋昭曰:「張掖縣。」
[三]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장액현이다.” 했다.
[四] 索隱按:西河舊事云「山在張掖、酒泉二界上,東西二百餘里,南北百里,有松柏五木,美水草,冬溫夏涼,宜畜牧。匈奴失二山,乃歌云:『亡我祁連山,使我六畜不蕃息;失我燕支山,使我嫁婦無顏色』」。祁連一名天山,亦曰白山也。
[四] 【索隱】 살펴보니 「서하구사」에 “산은 장액, 주천 두 현의 경계 위에 있는데 남북 100리로 소나무와 잣나무 5그루가 있고, 물과 풀이 좋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서늘하며 가축을 기르기에 마땅하다. 흉노가 두 산을 잃고 이에 노래하여 말하기를 ‘우리 기련산을 잃었으니 우리로 하여금 여섯가지 가축을 번식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연지산을 잃었으니 우리 시집간 부인이 안색이 없다.’” 했다. 기련은 일명 천산이라하고, 또 백산이라 한다.
其秋,單于怒渾邪王、休屠王居西方為漢所殺虜數萬人,欲召誅之。渾邪王與休屠王恐,謀降漢,[一]漢使驃騎將軍往迎之。渾邪王殺休屠王,并將其眾降漢。凡四萬餘人,號十萬。於是漢已得渾邪王,則隴西、北地、河西益少胡寇,徙關東貧民處所奪匈奴河南、新秦中[二]以實之,而減北地以西戍卒半。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各數萬騎,殺略千餘人而去。
그해 가을 선우가 노혼사왕, 휴도왕이 서쪽에 살면서 한에 포로 잡혔던 수만 명이 죽음을 당하자 불러 죽이고자 하였다. 혼사왕과 휴도왕이 두려워하여 한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한이 표기장군을 시켜 가서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혼사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하여 거느리고 한에 항복하였다. 모두 4만여 명인데 10만이라 불렀다. 이에 한이 혼사왕을 얻은 후 곧 농서, 북지, 하서가 더욱 오랑캐의 침입이 적어지자 관동의 빈민을 옮겨 흉노에게 빼앗은 하남, 신진중을 채우고, 북지 이서를 지키는 군사를 반으로 줄였다. 그 다음해 흉노가 우북평, 정양에 각각 수만의 기병을 들여보내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一] 集解徐廣曰:「元狩二年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수 2년이다.” 했다.
[二] 索隱如淳云「在長安以北,朔方以南」。漢書食貨志云「徙貧人充朔方以南新秦中」是也。正義服虔云:「地名,在北地,廣六七百里,長安北,朔方南。史記以為秦始皇遣蒙恬斥逐北胡,得肥饒之地七百里,徙內郡人民皆往充實之,號曰新秦中也。」
[二]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장안 이북, 삭방 이남에 있다.” 했다. 『한서』 「식화지」에 “빈궁한 사람을 옮겨 삭방이남 신진중을 채웠다.”한 것이 이것이다. 【正義】 복건이 말하기를 “지명이니 북지에 있고, 넓이는 6,7백리인데 장안북쪽 삭방 남쪽이다. 『사기』는 진나라 시황제가 몽렴을 보내 북쪽 오랑캐를 배척하여 쫓아내고 비옥한 땅 7백리를 얻어 내군의 백성을 옮겨 모두 가서 채우고는 신진중이라 불렀다.” 했다.
其明年春,漢謀曰「翕侯信為單于計,居幕北,以為漢兵不能至」。乃粟馬發十萬騎,(負)私[負]從[一]馬凡十四萬匹,糧重不與焉。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中分軍,大將軍出定襄,驃騎將軍出代,咸約絕幕擊匈奴。單于聞之,遠其輜重,以精兵待於幕北。與漢大將軍接戰一日,會暮,大風起,漢兵縱左右翼圍單于。單于自度戰不能如漢兵,單于遂獨身與壯騎數百潰漢圍西北遁走。漢兵夜追不得。行斬捕匈奴首虜萬九千級,北至闐顏山趙信城[二]而還。
그 다음해 봄에 한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한 계책으로 사막북쪽에 살면 한의 군대가 이를 수 없다고 여긴다.” 하였다. 이에 말을 배불리 먹이고 10만의 기병을 징발하고, 사사로니 짐을 지고 따르는 말이 모두 14만필이었는데 식량의 무게는 여기에 넣지 않았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으로 하여금 군대를 반으로 나누어 이끌게 하였는데 대장군은 정양에서 출발하고, 표기장군은 대에서 출발하여 모두 사막을 건너 흉노를 치기로 약속하였다. 선우가 그것을 듣고 그 치중을 멀리하고, 정예군대로 사막 북쪽에서 기다렸다. 한의 대군과 하룻동안 접전하였는데 저녁에 큰 바람이 불자 한의 군대가 좌우의 날개를 풀어 선우를 포위하였다. 선우가 스스로 싸움으로는 한의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는 선우가 마침내 혼자 몸으로 건장한 기병 수백 명과 함께 한이 포위를 무너뜨리고 서북쪽으로 달아났다. 한의 군대가 밤새 뒤쫓았으나 잡지 못하였다. 행군하면서 흉노의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만구천 명이고, 북으로 전안산 조신성에 이르러 돌아왔다.
[一] 正義謂負擔衣糧,私募從者,凡十四萬匹。
[一] 【正義】 옷과 식량을 부담하고 사사로이 모여 따르는 자가 모두 14만필이었다.
[二] 集解如淳曰:「信前降匈奴,匈奴築城居之。」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조신이 앞서 흉노에 항복하였는데 흉노가 성을 쌓고 살게 하였다.” 했다.
單于之遁走,其兵往往與漢兵相亂而隨單于。單于久不與其大眾相得,其右谷蠡王以為單于死,乃自立為單于。真單于復得其眾,而右谷蠡王乃去其單于號,復為右谷蠡王。
선우가 달아나는데 그 군대가 자주 한의 군대와 서로 뒤섞이면서 선우를 따랐다. 선우가 오래도록 그 대중(주력 군대)과 서로 만나지 못하자 그 우곡려왕이 선우가 죽었다 여기고 이에 스스로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진자 선우가 다시 그 무리를 만나자 우곡려왕이 곧 그 선우의 호를 버리고 다시 우곡려왕이라 했다.
漢驃騎將軍之出代二千餘里,與左賢王接戰,漢兵得胡首虜凡七萬餘級,左賢王將皆遁走。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一]而還。
한 표기장군이 대를 나와 2천리를 가서 좌현왕과 접전하였는데 한의 군대가 오랑캐 머리와 포로 7만여급을 얻자 좌현왕의 장군들이 모두 달아났다. 표기장군이 낭거서산에서 봉제를 지내고, 고연에서 선제사를 올리고 한해를 마주하고 돌아왔다.
[一] 集解如淳曰:「翰海,北海名。」 正義按:翰海自一大海名,群鳥解羽伏乳於此,因名也。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한해’는 북해의 이름이다.” 했다. 【正義】 ‘한해’는 스스로 하나의 큰 바다 이름이고, 여러 새가 여기에서 깃털을 뽑아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이다.
是後匈奴遠遁,而幕南無王庭。漢度河自朔方以西至令居,[一]往往通渠置田,官吏卒五六萬人,稍蠶食,地接匈奴以北。[二]
이 후 흉노가 멀리 달아나 사막 남쪽에는 왕정이 없었다. 한이 황하를 건너 삭방이서로부터 영거에 이르기까지 자주 개천을 통하고 밭을 두며, 관리와 병졸 5, 6만 명을 두어 점점 잠식하여 땅이 흉노 이북에서 접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在金城。」 索隱徐廣云在金城。地理志云張掖令居縣。姚氏令音連。小顏云音零。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금성에 있다.” 했다. 【索隱】 서광은 “금성에 있다.” 했으나 「지리지」에는 “장액 영거현에 있다.” 했다. 요씨는 “‘令’의 음은 ‘連’이다.” 했고, 소안(안사고)은 음이 ‘零’이라 했다.
[二] 正義匈奴舊以幕為王庭。今遠徙幕北,更蠶食之,漢境連接匈奴舊地以北也。
[二] 【正義】 흉노가 옛 날에는 사막으로서 왕정을 삼았다. 지금 멀리 사막 북쪽으로 옮겼는데 다시 잠식하니 한의 경계가 흉노의 옛 땅 이북과 맞닿은 것이다.
初,漢兩將軍大出圍單于,所殺虜八九萬,而漢士卒物故[一]亦數萬,漢馬死者十餘萬。匈奴雖病,遠去,而漢亦馬少,無以復往。匈奴用趙信之計,遣使於漢,好辭請和親。天子下其議,或言和親,或言遂臣之。丞相長史任敞曰:「匈奴新破,困,宜可使為外臣,朝請於邊。」漢使任敞於單于。單于聞敞計,大怒,留之不遣。先是漢亦有所降匈奴使者,單于亦輒留漢使相當。漢方復收士馬,會驃騎將軍去病死,於是漢久不北擊胡。
처음에 한의 두 장군이 크게 나가 선우를 포위하고 포로 8, 9만을 죽였으나 한의 사졸로 죽은 것이 또한 수만이었고, 한의 말이 죽은 것이 10여 만이었다. 흉노가 비록 병들어 멀리 갔으나 한이 또한 발이 적고, 다시 갈 수 없었다. 흉노가 조신의 꾀흫 써서 사신을 한에 보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하였다. 천자가 조정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어떤 이는 화친을 말하고, 어떤 이는 끝내 신하로 해야 한다고 했다. 승상장사 임창이 말하기를 “흉노가 새로 깨트려져서 곤궁하니 마땅히 외신으로 삼아 변경에서 봄가을로 조회하게 해야 합니다,” 했다. 한이 임창을 선우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선우가 임창의 계책을 듣고 크게 노하여 머물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이에 앞서 한에 또한 흉노의 항복한 사신이 있으면 선우가 또한 문득 한의 사신을 머물게 하여 서로 맞게 하였다. 한이 바야흐로 다시 군졸과 말을 거두어 모으던 중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었으므로 이에 한이 오래 동안 북쪽으로 오랑캐를 치지 못하였다.
[一] 索隱漢士物故。案:釋名云「漢以來謂死為『物故』,物就朽故也」。又魏臺訪議高堂崇對曰「聞之先師:物,無也;故,事也。言無復所能於事者也。」
[一] 【索隱】 한의 군사가 죽었다. 살펴보니 「석명」에 “한 이래로 죽는 것을 일러 ‘物故’라 하였는데 물건이 썩어 옛 것에 나아가는 것이다.” 했다. 또 「위대방의」에 고당이 대답하기를 “先師에게 들으니 ‘物 ’은 없음이고, ‘故’는 일이다. 다시 일에 능하지 못한 것을 말함이다.” 했다.
數歲,伊稚斜單于立十三年死,子烏維立為單于。是歲,漢元鼎三年也。烏維單于立,而漢天子始出巡郡縣。其後漢方南誅兩越[一],不擊匈奴,匈奴亦不侵入邊。
몇 년 후 이치사선우가 즉위한지 13년만에 죽고 아들 오유가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이 해는 한 원정 3년이다. 오유가 선우에 즉위하고, 한의 천자는 처음 군현을 순수하였다. 그 후 한이 바야흐로 남쪽으로 두 월나라를 정벌하느라 흉노를 치지 못하였고, 흉노가 또한 변경을 침입하지 않았다.
[一] 正義南越、東越。
[一] 【正義】 남월과 동월이다.
烏維單于立三年,漢已滅南越,遣故太僕賀將萬五千騎出九原二千餘里,至浮苴井[一]而還,不見匈奴一人。漢又遣故從驃侯趙破奴萬餘騎出令居數千里,至匈河水[二]而還,亦不見匈奴一人。
오유선우 즉위 3년 한이 남월을 멸망한 후 옛 태복이었던 공손하를 보내 1만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구원을 나와 2천리를 가게 하여 부저정에 이르렀다 돌아왔는데 흉노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한이 또한 예전에 종표후 조파노를 보내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영거를 나와 수천리를 가서 흉하수에 이르렀다 돌아 왔는데 또한 흉노를 한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一] 索隱苴音子餘反。臣瓚云:「去九原二千里,見漢輿地圖。」
[一] 【索隱】 ‘苴(신바닥 창 저)’는 음이 ‘子’와 ‘餘’의 反이다. 신찬이 말하기를 “구원으로부터 2천리 떨어진 것이니 「한여지도」에 보인다.” 했다.
[二] 索隱臣瓚云:「水名,去令居千里。」
[三] 【索隱】 신찬이 말하기를 “물이름이니 영거에서 천리 떨어져 있다.
是時天子巡邊,至朔方,勒兵十八萬騎以見武節,而使郭吉風告單于。郭吉既至匈奴,匈奴主客[一]問所使,郭吉禮卑言好,曰:「吾見單于而口言。」單于見吉,吉曰:「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今單于(能)即[能]前與漢戰,天子自將兵待邊;單于即不能,即南面而臣於漢。何徒遠走,亡匿於幕北寒苦無水草之地,毋為也。」語卒而單于大怒,立斬主客見者,而留郭吉不歸,遷之北海上。[二]而單于終不肯為寇於漢邊,休養息士馬,習射獵,數使使於漢,好辭甘言求請和親。
이 때 천자가 변경을 순수하여 삭방에 이르러 18만 명의 기병을 정돈하는 것으로써 무절을 나타내고 곽길로 하여금 선우에게 바람결처럼(넌지시) 알리게 하였다. 곽길이 흉노에 이르자 흉노의 주객이 사신으로 온 뜻을 물으니 곽길이 예를 낮게 하고, 말을 좋게 하여 말하기를 “내가 선우를 본 후 말하겠다.” 했다. 선우가 곽길을 만나니 곽길이 말하기를 “남월왕의 머리가 이미 한의 북궐에 걸렸습니다. 지금 선우가 곧 전진하여 한과 싸울 수 있다면 천자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릴 것이고, 선우가 곧 전진하지 못한다면 곧 남쪽을 향하여 한에 신하가 되십시오. 어찌 헛되이 멀리 달아나 사막 북쪽의 춥고, 괴롭고, 물과 풀이 없는 땅에 도망하여 숨겠습니까? 하지 마십시오.” 했다. 말을 마치자 선우가 크게 노하여 접대한 주객의 머리를 베고 곽길을 억류하여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북해에 옮겼다.
[一] 集解韋昭曰:「主使來客官也。」 正義官名,若鴻臚卿。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사신이 오는 것을 주관하는 객관이다.” 했다. 【正義】 관명이니 홍로시경과 같은 것이다.
[二] 正義北海即上海也,蘇武亦遷也。
[二] 【正義】 북해는 곧 상해이니 소무를 또한 옮겼다.
漢使王烏等窺匈奴。匈奴法,漢使非去節而以墨黥其面者不得入穹廬。王烏,北地人,習胡俗,去其節,黥面,得入穹廬。單于愛之,詳許甘言,為遣其太子入漢為質,[一]以求和親。
한이 왕오 등으로 하여금 흉노를 엿보게 했다. 흉노의 법에는 한의 사신이 부절을 떼어놓고, 그 얼굴에 먹물을 들이지 않은 자는 궁려에 들어갈 수 없다. 왕오는 북지인이어서 오랑캐 풍습에 익숙하여 그 부절을 떼어놓고, 얼굴에 먹물을 들이고 궁려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선우가 그를 아껴서 좋은 말로 허락하는 것처럼 속이고 그 태자를 한에 들여보내 인질로 삼는 것으로서 화친을 구할 것이라 하였다.
[一] 正義音致。
[一] 【正義】 음은 ‘致’이다.
漢使楊信於匈奴。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為郡,[一]而西置酒泉郡[二]以鬲絕胡與羌通之路。漢又西通月氏、大夏,[三]又以公主妻烏孫王,以分匈奴西方之援國。又北益廣田至胘雷為塞[四],而匈奴終不敢以為言。是歲,翕侯信死,漢用事者以匈奴為已弱,可臣從也。楊信為人剛直屈彊,素非貴臣,單于不親。單于欲召入,不肯去節,單于乃坐穹廬外見楊信。楊信既見單于,說曰:「即欲和親,以單于太子為質於漢。」單于曰:「非故約。故約,漢常遣翁主,給繒絮食物有品,以和親,而匈奴亦不擾邊。今乃欲反古,令吾太子為質,無幾矣。」[五]匈奴俗,見漢使非中貴人,其儒先[六],以為欲說,折其辯;其少年,以為欲刺,折其氣。每漢使入匈奴,匈奴輒報償。漢留匈奴使,匈奴亦留漢使,必得當乃肯止。
한이 양신으로 하여금 흉노에 사신가게 하였다. 이 때 한이 동쪽으로 예맥, 조선을 함락시키는 것으로써 군을 삼고, 서쪽으로 주천군을 두어 오랑캐와 강족이 통하는 길을 끊었다. 한이 또한 서쪽으로 월지, 대하와 통하고, 또 공주를 오손왕의 아내로 산아 흉노 서쪽의 도움을 주는 나라를 분리 하였다. 또 북쪽으로 더욱 밭을 넓혀 현뢰에 이르러 요새로 삼았으되 흉노가 끝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이 해 흡후 조신이 죽으니 한의 집정자는 흉노가 이미 약해졌다 여기고 신하로 따르게 할 만하다 여겼다. 양신의 사람됨은 강직하고 굳건하며, 평소 존귀한 신하가 아니었으므로 선우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선우가 불러들이려 하는데 부절을 떼어 놓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니 선우가 이에 궁려 밖에 앉아 양신을 만났다. 양신이 선우를 만나고 나서 설득하여 말하기를 “곧 화친하고자 한다면 선우의 태자를 한에 인질로 삼아야 합니다.” 했다. 선우가 말하기를 “옛 약속이 아니다. 옛 약속에는 한이 항상 옹주를 보내고, 일정한 품질의 비단, 솜, 먹을거리를 주는 것으로서 화친하고, 흉노가 또한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금 곧 옛 날로 돌아가고자 하면서 나의 태자를 인질로 삼게 하는 것은 원하는 것이 아니다.” 했다. 흉노의 풍속에 한의 사신이 존귀한 사람이 아니고 그 유생인 것을 보면 유세하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 그 말 잘함을 꺽고, 젊은이는 찌르려 한다. 여겨 그 기세를 꺽었다. 매번 한이 흉노를 침입할 때마다 흉노는 문득 되갚았다. 한이 흉노의 사신을 억류하면 흉노가 또한 한의 사신을 억류하여 반드시 상응하게 한 후에 그쳤다.
[一] 正義即玄菟、樂浪二郡。
[一] 【正義】 곧 현토, 낙랑 두 군이다.
[二] 正義今肅州。
[二] 【正義】 지금의 숙주이다.
[三] 正義漢書西域傳云:「大月氏國去長安城萬一千六百里,本居燉煌、祁連閒,冒頓單于破月氏,而老上單于殺月氏王,以頭為飲器,月氏乃遠去,過大宛西,擊大夏而臣之,都媯水北,為王庭也。」
[三] 【正義】 『한서』 「서역전」에 “대월지국은 장안에서 1천6백리 떨어져 있다. 본래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있었으나 모돈선우가 월지를 깨트리고 노상선우가 월지왕을 죽여 머리를 술 마시는 기구로 삼았는데 월지가 멀리 떠나 대원의 서쪽을 지나 대하를 쳐서 그들을 신하로 하고, 규수 북쪽에 도읍하고 왕정으로 삼았다.” 했다.
[四] 集解漢書音義曰:「胘雷,地名,在烏孫北。」
[四] 【集解】 「한서음의」에 “현뢰는 지명이니 오손 북쪽에 있다.” 했다.
[五] 正義幾音記。言反古無所冀望也。
[五] 【正義】 ‘幾’의 음은 ‘記’이다. 예전 약속을 뒤집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六] 集解先,先生也。漢書作「儒生」也。
[六] 【集解】 ‘先’은 선생이다. 『한서』에는 “유생”이라 썼다.
楊信既歸,漢使王烏,而單于復讇以甘言,欲多得漢財物,紿謂王烏曰:「吾欲入漢見天子,面相約為兄弟。」王烏歸報漢,漢為單于築邸于長安。匈奴曰:「非得漢貴人使,吾不與誠語。」匈奴使其貴人至漢,病,漢予藥,欲愈之,不幸而死。而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往使,因送其喪,厚葬直數千金,曰「此漢貴人也」。單于以為漢殺吾貴使者,乃留路充國不歸。諸所言者,單于特空紿王烏,殊無意入漢及遣太子來質。於是匈奴數使奇兵侵犯邊。漢乃拜郭昌為拔胡將軍,及浞野侯[一]屯朔方以東,備胡。路充國留匈奴三歲,單于死。
양신이 돌아 온 후 한이 왕오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선우가 다시 아첨하는 좋은 말로 한의 재물을 많이 얻고자 하여 속여서 왕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에 들어가 천자를 뵙고 얼굴을 맞대고 서로 형제가 될 것을 약속하고자 한다.” 했다. 왕오가 돌아가 한에 보고하니 한이 선우를 위하여 장안에 저택을 지었다. 흉노가 말하기를 “한의 존귀한 사람을 사신으로 하지 않으면 내가 참된 말을 나누지 못한다.” 했다. 흉노의 존귀한 사람이 사신으로 한에 이르렀는데 병이 들자 한이 약을 주어 낫게 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히도 죽었다. 한이 로충국으로 하여금 2천석 관원의 인수 차게하여 사신으로 가게 하면서 그 영구를 호송하고, 수천 금으로 후히 장례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이가 한의 존귀한 사람이다.” 했다. 선우가 한이 우리의 존귀한 사신을 죽였다 하고 이에 노중국을 억류하여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선우가 한)여러 말들은 선우가 다만 헛되이 왕오을 속인 것이고, 특히 (선우가)한에 들어오는 것과 태자를 인질로 할 뜻은 없었다. 이에 흉노가 여러 번 기습하는 부대로 하여금 변경을 침범하게 하였다. 한이 이에 곽창에게 벼슬을 주어 발호장군으로 삼아 착야후와 함께 삭방이동에 주둔하여 오랑캐를 대비하게 했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지 3년만에 선우가 죽었다.
[一] 集解徐廣曰趙破奴。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조파노이다.” 했다.
烏維單于立十歲而死,子烏師廬立為單于。[一]年少,號為兒單于。是歲元封六年也。自此之後,單于益西北,左方兵直雲中,右方直酒泉、燉煌郡。[二]
오유선우가 즉위한지 10년만에 죽고 아들 사려가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나이가 어려서 아선우라 불렀다. 이 해는 원봉 6년이다. 이 뒤로부터는 선우가 더욱 서북쪽으로 가서 좌방병은 운중을 마주하고, 우방은 주천과 돈황군을 마주하였다.
[一] 集解徐廣曰:「烏,一作『詹』。」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烏’는 한편으로 ‘詹’이라 쓴다.” 했다.
[二] 正義括地志云:「鐵勒國,匈奴冒頓之後,在突厥國北。樂勝州經秦長城、太羹長路正北,經沙磧,十三日行至其國。」
[二] 【正義】 『괄지지』에 “철륵국은 흉노 모돈의 후예로 돌궐국 북쪽에 있다. 악주와 승주에서 진나라 장성과 태갱장로를 지나 정 북쪽으로 가서 사적(사막)을 지나 13일을 가면 그 나라에 이른다.” 했다.
兒單于立,漢使兩使者,一弔單于,一弔右賢王,欲以乖其國。使者入匈奴,匈奴悉將致單于。單于怒而盡留漢使。漢使留匈奴者前後十餘輩,而匈奴使來,漢亦輒留相當。
아선우가 즉위하니 한이 두 사신으로 하여금 하나는 선우를 조문하고, 하나는 우현왕을 조문하게 하여 그 나라를 이간하게 하였다. 사신이 흉노에 들어가니 흉노가 사신 모두 데리고 선우에게 이르렀다. 선우가 노하여 한의 사신을 모두 억류하였다. 한의 사신이 흉노에게 억류된 것이 앞뒤로 10여 무리에 이르렀고, 흉노의 사신이 왔을 때 한이 또한 문득 억류한 것이 상당하였다.
是歲,漢使貳師將軍廣利西伐大宛,而令因杅[一]將軍敖築受降城。其冬,匈奴大雨雪,畜多飢寒死。兒單于年少,好殺伐,國人多不安。左大都尉欲殺單于,使人閒告漢曰:「我欲殺單于降漢,漢遠,即兵來迎我,我即發。」初,漢聞此言,故築受降城,猶以為遠。
이해 한이 이사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서쪽의 대원을 치게하고, 인우장군 공손오에게 명령하여 수항성을 쌓게 했다. 그 해 겨울 큰 비와 눈으로 가축이 많이 굶주리고 얼어 죽었다. 아선우가 나이가 어려 죽이고 정벌하기를 좋아하니 나라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좌대도위가 선우를 죽이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한나라에 은밀히 알려 말하기를 “나는 선우를 죽이고 한에 항복하고자 하는데 한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곧 군대로 와서 나를 맞이하면 내가 곧 출발할 것이다.” 했다. 처음에 한이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 수항성을 쌓았는데 여전히 멀다 여겼다.
[一] 正義音于。
[一] 【正義】 음은 ‘于’이다.
其明年春,漢使浞野侯破奴將二萬餘騎出朔方西北二千餘里,期至浚稽山[一]而還。浞野侯既至期而還,左大都尉欲發而覺,單于誅之,發左方兵擊浞野。浞野侯行捕首虜得數千人。還,未至受降城四百里,匈奴兵八萬騎圍之。浞野侯夜自出求水,匈奴閒捕,生得浞野侯,因急擊其軍。軍中郭縱為護,維王為渠,[二]相與謀曰:「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莫相勸歸。」軍遂沒於匈奴。匈奴兒單于大喜,遂遣奇兵攻受降城。不能下,乃寇入邊而去。其明年,單于欲自攻受降城,未至,病死。
그 다음해 봄에 한이 착야후 조파노로 하여금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삭방 서북쪽 2천여리를 나가 준계산에 이르러 돌아올 것을 약속하였다. 착야후가 약속한 일자에 이르러 돌아오자 좌대도위가 출발하려다 발각되어 선우가 그를 죽이고, 좌방의 군대를 징발하여 착야후를 쳤다. 착야후가 행군하면서 수천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돌아와 수항성에서 400리 떨어진 곳에서 흉노의 군대 8만의 기병이 그들을 포위하였다. 착야후가 밤에 스스로 물을 구하러 나오자 흉노가 조용히 잡아 산채로 착야후를 얻고서는 급히 그 군대를 공격하였다. 군중에는 곽종이 호가 되었고, 유왕이 거가 되었는데 서로 함께 모의하여 말하기를 “여러 교위들이 장군을 잃어 그 죄로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서로 돌아갈 것을 권하는 이가 없다.”하였다. 군대가 마침내 흉노에게 전멸하였다. 흉노 아선우가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기습하는 군대를 보내 수항성을 공격하였다. 수항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에 변경에 들어가 도적질하고 갔다. 그 다음해 선우가 스스로 수항성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一] 索隱應劭云:「在武威縣北。」
[一] 【索隱】 응소가 말하기를 “무위현 북쪽에 있다.” 했다.
[二] 正義為渠帥也。
[二] 【正義】 거수가 된 것이다.
兒單于立三歲而死。子年少,匈奴乃立其季父烏維單于弟右賢王呴[一]犁湖為單于。是歲太初三年也。
아선우가 즉위한지 3년에 죽었다. 아들이 어렸으므로 흉노가 이에 그 막내 삼촌인 오유선우의 동생 우현왕 구리호를 세워 선우로 삼았다. 이해는 태초 3년이다.
[一] 集解音鉤,又音吁。 索隱音鉤,又音吁。
[一] 【集解】 음은 ‘鉤(갈고리 구)’이며, 또 음이 ‘吁(탄식할 우)’이다.
呴犁湖單于立,漢使光祿徐自為出五原塞[一]數百里,遠者千餘里,築城鄣列亭[二]至廬朐,[三]而使游擊將軍韓說、長平侯衛伉屯其旁,使彊弩都尉路博德築居延澤上。[四]
구리호 선우가 즉위하자 한이 광록 서자위로 하여금 오원새를 나가 가까이는 수백리, 멀게는 천여리에 성과 장을 쌓고 정을 배열하여 여구에 이르게 하고, 유격장군 한열, 장평후 위항으로 하여금 그 옆에 주둔하게 하며, 강노도위 노박덕으로 하여금 거연택 가에 성을 쌓고 머물게 하였다.
[一] 正義即五原郡榆林塞也。在勝州榆林縣四十里也。
[一] 【正義】 곧 오원군 유림새이다. 승주 유림현 40리에 있다.
[二] 正義顧胤云:「鄣,山中小城。亭,候望所居也。」
[二] 【正義】 고윤이 말하기를 “‘障(가로막을 장)’은 산중의 작은 성이다. ‘亭(정자 정)’은 살펴보며 거처하는 곳이다.(망루이다.)” 했다.
[三] 集解音衢,匈奴地名,又山名。索隱服虔云:「匈奴地名。」張晏云:「山名。」 正義地理志云五原郡稒陽縣北出石門鄣,得光祿城,又西北得支就城,又西北得頭曼城,又西北得虖河城,又西北得宿虜城。按:即築城鄣列亭至廬朐也。服虔云:「廬朐,匈奴地名也。」張晏云:「山名也。」
[三] 【集解】 음은 ‘衢(네거리 구)’이니 흉노의 지명, 또 산 이름이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흉노의 지명이다.”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산 이름이다.” 했다. 【正義】 「지리지」에 “오원군 고양현 북쪽 석문장을 나오면 광록성이 있고, 또 서북쪽으로 지취성이 있고, 또 서북쪽으로 두만성이 있으며, 또 서북쪽으로 호하성이 있고, 또 서북쪽으로 숙노성이 있다. 살펴보니 곧 성과 장을 쌓고, 정을 배열하여 려구에 이르렀다. 복건이 말하기를 ”‘廬朐’는 흉노의 지명이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 산 이름이다.“ 했다.
[四] 正義括地志云:「漢居延縣故城在甘州張掖縣東北一千五百三十里,有漢遮虜鄣,彊弩都尉路博德之所築。李陵敗,與士眾期至遮虜鄣,即此也。長老傳云鄣北百八十里,直居延之西北,是李陵戰地也。」
[四] 【正義】 『괄지지』에 “한 거연현 옛 성은 감주 장액현 동북쪽 1530리에 있으며 한의 차로장이 있는데 강노도위 노박덕이 쌓았다. 이릉이 패하고 군사와 함께 차로장에 이르기로 약속한 곳이 곧 이곳이다. 늙은이들이 전하기를 ‘장 북쪽 180리’라 하니 거연의 서북쪽에 해당하며, 이곳은 이릉이 싸운 땅이다.” 했다.
其秋,匈奴大入定襄、雲中,殺略數千人,敗數二千石而去,行破壞光祿所築城列亭鄣。又使右賢王入酒泉、張掖,略數千人。會任文[一]擊救,盡復失所得而去。是歲,貳師將軍破大宛,斬其王而還。匈奴欲遮之,不能至。其冬,欲攻受降城,會單于病死。
그 해 가을 흉노가 크게 정양, 운중에 들어와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하고, 여러 2천석 녹봉의 관리를 무너뜨리고 갔으며, 행군 중에 광록이 쌓은 성과, 배열한 정과 장을 파괴했다. 또 우현왕을 시켜서 주천, 장액에 들어가 수천 명을 약탈했다. 한의 장군 임문이 구원하여 흉노를 치니 얻었던 것을 모두 다시 잃고 갔다. 이 해 이사장군이 대원을 깨트리고, 그 왕을 죽이고 돌아왔다. 흉노가 그것을 차단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수 없었다. 그해 겨울 수항성을 공격하고
자 하였으나 선우가 병들어 죽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漢將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한의 장군이다.” 했다.
呴犁湖單于立一歲死。匈奴乃立其弟左大都尉且鞮[一]侯為單于。
구리호 선우가 즉위하였다가 1년만에 죽었다. 흉노가 이에 그 동생 좌대도위 차제후를 세워 선우로 삼았다.
[一] 索隱上音子餘反,下音低。
[一] 【索隱】 위의 음은 ‘子’와 ‘餘’의 反이고, 아래의 음은 ‘低 ’이다.
漢既誅大宛,威震外國。天子意欲遂困胡,乃下詔曰:「高皇帝遺朕平城之憂,高后時單于書絕悖逆。昔齊襄公復九世之讎,春秋大之。」[一]是歲太初四年也。
한이 대원을 죽인 후 위엄이 외국에 떨쳤다. 천자가 끝내 오랑캐를 곤궁하게 하고자 생각하여 이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고황제는 나에게 평성의 근심을 남겼고, 고후 때는 선우의 글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글을 보냈다. 옛날 제 나라 양공이 9대의 원수를 되갚았으니 『춘추』에서는 크게 여겼다. ” 했다. 이 해는 태초 4년이다.
[一] 集解公羊傳曰:「九世猶可以復讎乎?曰雖百世可也。」
[一] 【集解】 『춘추공양전』에 “9세의 원수 갚음이 가능한가? 말하기를 비록 100대일지라도 가능하다.” 했다.
且鞮侯單于既立,盡歸漢使之不降者。路充國等得歸。單于初立,恐漢襲之,乃自謂「我兒子,安敢望漢天子!漢天子,我丈人行[一]也」。漢遣中郎將蘇武厚幣賂遺單于。單于益驕,禮甚倨,非漢所望也。其明年,浞野侯破奴得亡歸漢。
차제후 선우가 즉위하고 나서 한의 사신으로 항복하지 않은 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노충국 등이 돌아갈 수 있었다. 선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한이 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아이인데 어찌 감히 한의 천자를 바라보겠는가! 한의 천자는 내 장인의 항렬이다.” 했다. 한이 중낭장 소무를 보내 후한 폐백과 뇌물을 선우에게 주었다. 선우가 더욱 교만하고, 예는 매우 거만하여 한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 다음 해 착야후 조파노가 도망하여 한에 돌아 올 수 있었다.
[一] 正義胡朗反。
[一] 【正義】 ‘胡’와 ‘朗’의 反이다.
其明年,漢使貳師將軍廣利以三萬騎出酒泉,擊右賢王於天山,[一]得胡首虜萬餘級而還。匈奴大圍貳師將軍,幾不脫。漢兵物故什六七。漢復使因杅將軍敖出西河,與彊弩都尉會涿涂山,[二]毋所得。又使騎都尉李陵將步騎五千人,出居延北千餘里,與單于會,合戰,陵所殺傷萬餘人,兵及食盡,欲解歸,匈奴圍陵,陵降匈奴,其兵遂沒,得還者四百人。單于乃貴陵,以其女妻之。
그 다음해 한이 이사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주천을 나가 우현왕을 천산에서 치게하였는데 오랑캐 머리와 포로 만여급을 얻어 돌아왔다. 흉노가 크게 이사장군을 포위하하니 거의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의 군대로 죽은 이가 10에 6, 7명이었다. 한이 우장군 공손오로 하여금 서하를 나가 강노도위와 탁도산에서 만나게 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었다. 또 기도위 이릉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5천명을 거느리고 거연산 북쪽 천 여리를 나가게 하였다. 선우와 만나 전투하여 이릉이 만여 명을 죽이고 상처 입혔으나 병기와 식량이 다하여 풀고 돌아가고자 하는데 흉노가 이릉을 포위하니 이릉은 흉노에게 항복하고 그 군대는 거의 전멸하여 돌아온 자가 4백 명이었다. 선우가 이에 이릉을 귀하게 여겨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一] 正義在伊州。
[一] 【正義】 이주에 있다.
[二] 集解徐廣曰:「涂音邪。」 索隱涿音卓。涂音以奢反。正義匈奴中山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涂(도랑 도)’의 음은 ‘邪’이다.” 【索隱】 ‘涿(들을 탁)’의 음은 ‘卓’이다. ‘涂’의 음은 ‘以’와 ‘奢’의 反이다. 【正義】 흉노의 중산이다.
後二歲,復使貳師將軍將六萬騎,步兵十萬,出朔方。彊弩都尉路博德將萬餘人,與貳師會。游擊將軍說將步騎三萬人,出五原。因杅將軍敖將萬騎步兵三萬人,出鴈門。匈奴聞,悉遠其累重於余吾水北,[一]而單于以十萬騎待水南,與貳師將軍接戰。貳師乃解而引歸,與單于連戰十餘日。貳師聞其家以巫蠱族滅,因并眾降匈奴,[二]得來還千人一兩人耳。游擊說無所得。因杅敖與左賢王戰,不利,引歸。是歲[三]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功不得御。[四]有詔捕太醫令隨但,言貳師將軍家室族滅,使廣利得降匈奴。[五]
2년 후 다시 이사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기병 6만 명, 보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삭방을 나가게 하고, 강노도위 노박덕은 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사장군과 함께 하게 하였다. 유격장군 한열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원을 나갔다. 우장군 공손오는 기병 만 명과 보명 3만을 거느리고 안문을 나갔다. 흉노가 듣고 처자식과 재물을 여오수 북쪽으로 모두 멀리 옮기고 선우는 10만의 기병으로서 여오수 남쪽에서 기다려 이사장군 이광리와 접전하였다.
貳師乃解而引歸,與單于連戰十餘日。貳師聞其家以巫蠱族滅,因并眾降匈奴,[二]得來還千人一兩人耳。游擊說無所得。因杅敖與左賢王戰,不利,引歸。是歲[三]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功不得御。[四]有詔捕太醫令隨但,言貳師將軍家室族滅,使廣利得降匈奴。[五]
이사장군 이광리가 이에 풀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다 선우와 연이어 10여일을 싸웠다. 이사장군 이광리는 그 가문이 죄 없이 멸족된었다는 것을 듣고는 무리를 합하여 흉노에 항복하니 돌아 올 수 있었던 이는 천명에 한 두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유격장군 한열도 얻은 바가 없었다. 우장군 공손오와 죄현왕이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해에 한의 군대가 나가 흉노를 친 자들은 공의 많고 적음을 말할 수 없고, 공이 있어도 맞먹지 못하였다.(손실에) 조칙으로 태의령 수단을 체포하였는데, 이사장군 이광리 가문이 멸족당한 것을 말하여 이광리로 하여금 흉노에 항복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一] 集解徐廣曰;「余,一作『斜』,音邪。」 索隱徐廣云:「一作『斜』,音邪。」山海經云:「北鮮之山,鮮水出焉,北流注余吾。」 正義累,力為反。重,丈用反。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余’는 한편으로 ‘斜’라 쓰기도 하는데 음은 ‘邪’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斜’라고도 쓰는데 음은 ‘邪’이다.” 햇다. 『산해경』에 “북선의 산은 선수가 여기서 나오는데 북으로 흘러 여오에 주입된다.” 했다. 【正義】 ‘累’는 ‘力’과 ‘爲’의 反이다. ‘重’은 ‘丈’과 ‘用’의 反이다.
[二] 集解徐廣曰:「案史記將相年表及漢書,征和二年,巫蠱始起。三年,廣利與商丘成出擊胡軍,敗,乃降。」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사기』 장상연표와 『한서』를 살펴보니 정화 2년 무고가 처음 일어났다. 3년에 이광리와 상구성이 나가 오랑캐 군을 쳤으나 패하여 항복하였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天漢四年。」 正義自此以下,上至貳師聞其家,非天漢四年事,似錯誤,人所知。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천한 4년이다.” 했다. 【正義】 이로부터 이하와 위로는 이사장군 이광리가 그 집안의 멸족을 들었다는 곳에 이르기까지는 천한 4년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착오를 일으킨 듯하다.
[四] 正義御音語。其功不得相御當也。
[四] 【正義】 ‘御’의 음은 ‘語’이다. 그 공이 서로 어당하지 못하였다.(손실에 비해서)
[五] 索隱漢書云:「明年,且鞮死,長子狐鹿姑單于立」。張晏云:「自狐鹿姑單于已下,皆劉向、褚先生所錄,班彪又撰而次之,所以漢書匈奴傳有上下兩卷。」
[五] 【索隱】 『漢書』에 “다음해 차제가 죽고 장자 호록고선우가 즉위하였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호록고선우로부터 이하는 모두 유향, 저선생이 기록하고, 반표가 또 찬하여 차례를 이으니 『한서』 흉노전이 상하 두 권이 있다.” 했다.
太史公曰:孔氏著春秋,隱桓之閒則章,至定哀之際則微,[一]為其切當世之文而罔褒,忌諱之辭也。[二]世俗之言匈奴者,患其徼一時之權,[三]而務諂納其說,[四]以便偏指,不參[五]彼己;將率[六]席中國廣大,氣奮,人主因以決策,是以建功不深。堯雖賢,興事業不成,得禹而九州寧。[七]且欲興聖統,唯在擇任將相哉!唯在擇任將相哉!
태사공이 말하기를 “공씨(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은공과 환공의 사이는 곧 드러내고, 정공과 애공의 즈음에 이르러서는 숨겼으니 그 당세(자신이 살던 당시)의 글은 찬미하지 않은 것은 꺼리고 피하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흉노를 말하는 자는 한 때의 권세를 구하고, 힘써 아첨하고 그 유세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편벽한 의견으로 저와 우리를 자세히 하지 않음을 근심한다. 장수들은 중국이 광대함을 믿고 기세를 떨치고, 임금은 이것에 기초여 계책을 결단하니 이 때문에 공을 세움이 깊지 못하다. 요임금이 비록 어질다 하나 사업을 일으켜 이루지 못하다 우를 얻어 9주가 편안하게 되었다. 또한 성스러운 전통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오직 장상을 가려 맡김에 달렸을 뿐이구나! 오직 장상을 가려 맡김에 달렸을 뿐이구나!
[一] 索隱案:諱國惡,禮也。仲尼仕於定哀,故其著春秋,不切論當世而微其詞也。
[一] 【索隱】 나라의 나쁜 점을 (적기를)꺼리는 것은 예이다. 중니(공자)가 정공과 애공에게 벼슬하였기 때문에 『춘추』에 드러내면서 당시를 간절히 논하지 않고 그 말을 흐린것이다.
[二] 索隱案:罔著,無也。謂其無實而褒之是也,忌諱當代故也。
[二] 【索隱】 살펴보니 ‘罔著’는 없음이다. 그 실제로는 그것을 칭찬하지 않음이 옳으니 당대를 꺼리고 피하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三] 集解徐廣曰:「徼音皎。」 索隱按:徐音皎,劉伯莊音叫,皆非也。按其字宜音僥。徼者,求也,言求一時權寵。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徼(구할 요)’의 음은 ‘皎(달 빛 교)’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서광은 “음이 ‘皎’이다.” 했고, 유백장은 “음이 ‘叫(부르짖을 규)’”라 하였는데 모두 아니다. 그 글자를 살펴보니 마땅히 음은 ‘僥(바랄 요)’가 되어야 한다. ‘徼’는 구함이다. 한 때의 권세와 총애를 구함을 말한다.
[四] 索隱音稅。
[四] 【索隱】 음은 ‘稅’이다.
[五] 索隱案:謂說者謀匈奴,皆患其直徼求一時權幸,但務諂進其說,以自便其偏指,不參詳終始利害也。
[五] 【索隱】 살펴보니 흉노를 도모하기를 유세하는 자들이 모두 한 때의 권세와 총애를 구하여 다만 아첨하는 그 말을 올리는데 힘쓰고 스스로 그 편벽된 뜻에 치우쳐 끝과 시작, 이로움과 해로움을 참고하고 자세히 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六] 集解詩云:「彼己之子。」 索隱彼己者,猶詩人譏詞云「彼己之子」是也。將率則指樊噲、衛、霍等也。
[六] 【集解】 『시경』에 “그와 우리의 자손이다.” 했다. 【索隱】 ‘彼己’는 시인이 풍자하여 말한 ‘彼己之子’라는 것이 이것이다. ‘將率’은 곧 ‘번쾌’, ‘위청’, ‘곽거병’ 등이다.
[七] 正義言堯雖賢聖,不能獨理,得禹而九州安寧。以刺武帝不能擇賢將相,而務諂納小人浮說,多伐匈奴,故壞齊民。故太史公引禹聖成其太平,以攻當代之罪。
[七] 【正義】 요임금이 비록 현성이라 할지라도 홀로 다스릴 수 없었고, 우를 얻어 9주를 편안하게 할 수 있었음을 말하였다. 무제가 어진 장군과 재상을 잘 가리지 못하고 아첨에 힘쓰는 소인의 유세를 받아들여 흉노를 많이 정벌하였기 때문에 백설들을 피페하게 한 것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므로 태사공이 우의 성스러움으로 그 태평을 이루었음을 인용하여 당대의 허물을 공격한 것이다.
【索隱述贊】獫狁、薰粥,居于北邊。既稱夏裔,式憬周篇。頗隨畜牧,屢擾塵煙。爰自冒頓,尤聚控弦。雖空帑藏,未盡中權。
【索隱述贊】 험윤, 훈육은 북쪽 변경에 산다. 이미 하의 후예를 일컳으니 법식을 주편에서 깨닿는다. 가축의 기름을 따라 옮겨 여러 번 먼지를 일으키고 소란케하였다. 이에 모돈으로 부터 더욱 활 쏘는 군대를 모았다. 비록 국고를 비게 하였으되 권도에 알맞음은 다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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