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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채부인은 형주를 (조조에게)바칠 것을 의논하고, 제갈공명은 신야를 불태우다

by 최인표 2020. 6. 29.

第四十回蔡夫人議獻荊州諸葛亮火燒新野

40회 채부인은 형주를 (조조에게)바칠 것을 의논하고, 제갈공명은 신야를 불태우다

 

卻說玄德問孔明求拒曹兵之計孔明曰:「新野小縣不可久居近聞劉景升病在危篤可乘此機會取彼荊州為安身之地庶可拒曹操也。」玄德曰:「公言甚善但備受景升之恩安忍圖之?」孔明曰:「今若不取後悔何及?」玄德曰:「吾寧死不忍作負義之事。」孔明曰:「且再作商議。」

각설하고 유현덕이 제갈공명에게 물어 조조의 군대를 막을 계책을 청하였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신야는 작은 현으로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유표의 병이 위독하다하니 이 기회를 타고 그의 형주를 취하면 몸을 편안히 하고, 조조를 막을 수 있습니다.”했다. 유현덕이 말하기를 공의 말이 매우 좋습니다. 다만 저는 유표의 은혜를 받았으니 어찌 차마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취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했다. 유현덕이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차마 의리를 배반하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또한 다시 상의하겠습니다.” 했다.

 

卻說夏侯惇敗回許昌自縛見曹操伏地請死操釋之惇曰:「惇遭諸葛亮詭計用火攻破我軍。」操曰:「汝自幼用兵豈不知狹處須防火攻?」惇曰:「李典于禁曾言及此悔之不及!」操乃賞二人惇曰:「劉備如此猖獗真腹心之患也不可不急除。」操曰:「吾所慮者劉備孫權耳餘皆不足介意今當乘此時掃平江南。」便傳令起大兵五十萬令曹仁曹洪為第一隊張遼張郃為第二隊夏侯淵夏侯惇為第三隊于禁李典為第四隊操自領諸將為第五隊每隊各引兵十萬又令許褚為折衝將軍引兵三千為先鋒選定建安十三年秋七月丙午日出師大中大夫孔融諫曰:「劉備劉表皆漢室宗親不可輕伐孫權虎踞六郡且有大江之險亦不易取今丞相興此無義之師恐失天下之望。」操怒曰:「劉備劉表孫權皆逆命之臣豈容不討?」遂叱退孔融下令如有再諫者必斬孔融出府仰天歎曰:「以至不仁伐至仁安得不敗乎!」

각설하고 하후돈이 패하고 허창에 돌아가 스스로 묶고, 조조를 만나 땅에 엎드려 죽음을 청하였다. 조조가 그를 풀어주었다. 하후돈이 말하기를 제가 제갈공명의 속이는 계책을 만나자 화공을 써서 우리의 군대를 깨트렸습니다.”했다. 조조가 말하기를 너는 어려서부터 군대를 운용하였는데 어찌 좁은 곳에서는 모름지기 화공을 방비해야 함을 알지 못하였는가?”하니 하후돈이 말하기를 이전, 우금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뉘우쳐도 미치지 못합니다.”했다. 조조가 이에 두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하후돈이 말하기를 유비가 이같이 사납게 날뛰니 참으로 복심의 근심이니 급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했다. 조조가 말하기를 내가 우려하는 자는 유현덕과 손권뿐이다.” 했다. 나머지는 모두 생각할 것이 없다. 지금 마땅히 이런 때를 타서 강남을 쓸어 평정시켜야 한다.“ 했다. 곧 명령을 내려 크게 군대 오십만을 일으키게 하고, 조인, 조홍을 제 일대로 삼고, 장요, 장합을 제 이 대로 삼고, 하후연, 하후돈을 제 삼대로 삼고, 우금, 이전을 제 사 대로 삼았다. 조조 자신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제 오대가 되었다. 매 대마다 각각 군대 십만을 이끌게 했다. 또 허저를 절충장군으로 삼아 군대 삼천을 이끌고 선봉이 되게 하였다. 건안 십삼년 가을 칠월 병오일에 출정하기로 날짜를 선정하였다. 대중대부 공융이 간하여 말하기를 유현덕과 유표는 모두 한 황실의 종친이니 가벼이 정벌해서는 안 됩니다. 손권이 육군에 범처럼 웅크리고 있고, 또한 대강의 험함이 있으니 또한 쉽게 취할 수 없습니다. 지금 승상께서 이 의리없는 군사를 일으키면 천하의 신망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조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유현덕과 유표, 손권은 모두 황제의 명을 거스른 신하이니 어찌 토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공융을 질책하여 물러가게 하고, 명령을 내려 만일 다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목을 뵐 것이다. 했다. 공융이 승상부를 나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지극히 인하지 않는 이가 지극히 인함을 토벌함이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했다.

 

時御史大夫郗慮家客聞此言報知郗慮慮常被孔融侮慢心正恨之乃以此言入告曹操且曰:「融平日每每狎侮丞相又與禰衡相善衡贊融曰:「仲尼不死。」融贊衡曰:「顏回復生。」向者禰衡之辱丞相乃融使之也。」操大怒遂命廷尉捕捉孔融融有二子年尚少時方在家對坐奕棋左右急報曰:「尊君被廷尉執去將斬矣二公子何不急避?」二子曰:「覆巢之下安有完卵乎?」

시어사대부 치려 가의 객이 이 말을 듣고 치려에게 보고하였다. 치려가 항상 공융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였는데 마음으로 그것을 원망하여 이에 이 말로서 들어가 조조에게 말하고, 또 말하기를 공융이 평소에 매일 승상을 경멸하고, 또한 미형과 함께 서로 좋게 지냅니다. 예형이 공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중니(공자)는 죽지 않았다.’하고, 공융이 예형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안회가 다시 살아났다.’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예형이 승상을 욕하였는데 곧 공융이 그에게 시킨 것입니다.”했다. 조조가 크게 노하여 마침내 정위에게 명하여 공융을 잡아오게 하였다. 공윤은 아들 셋이 있었고, 나이가 어렸다. 그 때 집에 있으면서 마주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좌우가 급히 알려 말하기를 존군(공융)이 정위에게 잡혀갔으니 장차 머리가 베어질 것입니다. 두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급히 피하지 않으십니까?”하자 두 사람이 말하기를 둥지가 엎어져 떨어지는데 어찌 알이 완전할 수 있겠는가?” 했다.

 

言未已廷尉又至盡收融家小并二子皆斬之號令融屍於市京兆脂習伏屍而哭操聞之大怒欲殺之荀彧曰:「彧聞脂習常諫融曰:『公剛直太過乃取禍之道。』今融死而來哭乃義人也不可殺。」操乃止習收融父子屍首皆葬之後人有詩讚孔融曰

말을 마치지 않았는데 정위가 또 이르러 공융 집안의 가솔과 두 아들을 모두 거두어 모두 목을 베고, 공융의 시신을 저자에 두게 하였다. 경조 사람 지습이 시신에 엎드려 곡하였다. 조조가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순욱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지습이 항상 공융에게 간하여 말하기를 공은 강직함이 너무 지나치니 곧 화를 취하는 길입니다.’했다 합니다. 지금 공융이 죽으니 와서 곡하는 것은 곧 의리가 있는 사람이니 죽여서는 안 됩니다.” 했다. 조조가 이에 그만두었다. 지습이 공융 부자의 시신과 머리를 거두어 모두 장례하였다. 후세 사람이 공융을 기리는 시를 지었는데 시에

 

孔融居北海豪氣貫長虹坐上客長滿樽中酒不空文章驚世俗談笑侮王公史筆褒忠直存宜紀大中

공융이 북해에 살아 씩씩한 기상이 긴 무지개를 꿰뚫었다./ 자리에 손님이 늘 가득하니 술동이 안의 술은 비지 않는다./ 문장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하는 얘기들은 왕공을 업신여겼다./ 사관이 충직함을 기록하니 치우침 없이 기록하여 보존함이 마땅하리라/

 

曹操既殺孔融傳令五隊軍馬次第起行只留荀彧等守許昌

조조가 공융을 죽인 후 오대의 군마에게 명하여 차례로 일어나 행군하게 하고, 다만 순욱 등을 머물게 하여 허창을 지키게 하였다.

 

卻說荊州劉表病重使人請玄德來託孤玄德引關張至荊州見劉表表曰:「我病已入膏肓不久便死矣特託孤於賢弟我子無才恐不能承父業我死之後賢弟可自領荊州。」玄德泣拜曰:「備當竭力以輔賢姪安敢有他意乎?」

각설하고 형주의 유표는 병이 중해지자 사람을 시켜 유현덕을 청해 오자 아들을 부탁하려 하였다. 유현덕이 관운장과 장비를 이끌고 형주에 가 유표를 만났다. 유표가 말하기를 내 병이 이미 고황에 들어서 오래지않아 죽을 것이니 동생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내 아들은 재능이 없어 아비의 업을 계승하지 못할까 두렵다. 내가 죽은 후 동생이 형주를 거느리라.” 했다. 유현덕이 울며 절하고 말하기를 제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조카를 도울 것인데 어찌 감히 다른 뜻을 가지겠습니까?” 했다.

 

正說間人報曹操自統大兵至玄德急辭劉表星夜回新野劉表病中聞此信吃驚不小商議寫遺囑令玄德輔佐長子劉琦為荊州之主蔡夫人聞之大怒關上內門使蔡瑁張允二人把住外門時劉琦在江夏知父病危來至荊州探病方到外門蔡瑁當住曰:「公子奉父命鎮守江夏其任至重今擅難職守倘東吳兵至如之奈何若入見主公主公必生嗔怒病將轉增非孝也宜速回。」

말하는 사이에 어떤 사람이 조조가 스스로 큰 군대를 이끌고 오고있다고 보고하였다. 유현덕이 급히 유표를 하직하고 밤새워 신야에 돌아왔다. 유표가 병 중에 이 소식을 듣고 적잖이 크게 놀라 상의하여 유언을 쓰게 하였는데 유현덕으로 하여금 장자 유기를 보좌하여 형주의 주인이 되게 하라하였다. 채부인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내문을 닫고, 채모, 장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외문을 막게 하였다. 그 때 유기는 강하에 있었는데 아비의 병이 위태로움을 알고 병문안을 하러 형주에 왔다. 바야흐로 외문에 이르니 채모가 막으며 말하기를 공자께서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강하를 지켜 그 임무가 지극히 중요합니다. 지금 마음대로 직무수행을 어렵게 하시니 혹 동오의 군대가 이르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만약 들어가 주공을 뵈면 주공께서는 반드시 진노함이 생겨나 병이 장차 심해질 것이니 효도가 아닙니다. 속히 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했다.

 

劉琦立於門外大哭一場上馬仍回江夏劉表病勢危篤望劉琦不來至八月戊申日大叫數聲而死後人有詩歎劉表曰

유기가 문 밖에 서서 크게 한바탕 울고는 그대로 말에 올라 강하로 돌아갔다. 유표는 병세가 위독해지자 유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팔월 술신일에 이르러 크게 외치는 소리를 몇 번 내고는 죽었다. 후세 사람들이 유표를 기리는 시가 있는데 시에

 

昔聞袁氏居河朔又見劉君霸漢陽總為牝晨致家累可憐不久盡消亡

예전에 듣기로 원씨는 북쪽에서 살았고, 또 유표는 한양에서 군림했다. 모두 암컷이 새벽에 울어 집에 누가 되었으니 불상하다. 오래지 않아 모두 사라져 없어졌다.” 했다.

 

劉表既死蔡夫人與蔡瑁張允商議假寫遺囑令次子劉琮為荊州之主然後舉哀報喪時劉琮年方十四歲頗聰明乃聚眾言曰:「吾父棄世吾兄現在江夏更有叔父玄德在新野汝等立我為主倘兄與叔父興兵問罪如何解釋?」

유표가 죽은 후 채부인과 채모, 장윤이 상의하여 거짓으로 유언을 써서 둘째 아들 유종으로 하여금 형주의 주인이 되게 한 후 상복을 입고 상을 발표하였다. 이때 유종의 나이는 막 십사 세였는데 자못 총명하였다. 이에 무리를 모아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버렸는데 내 형이 지금 강하에 있고, 다시 숙부 유현덕은 신야에 있다. 너희들이 나를 세워 주인으로 하였는데 혹 형님과 숙부가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했다.

 

眾官未及對幕官李珪答曰:「公子之言甚善今可急發哀書至江夏請大公子為荊州之主就命玄德一同理事北可以敵曹操南可以拒孫權此萬全之策也。」蔡瑁叱曰:「汝何人敢亂言以逆主公遺命!」李珪大罵曰:「汝內外朋謀假稱遺命廢長立幼眼見荊襄九郡送於蔡氏之手故主有靈必當殛!」

여러 관리들이 미쳐 대답하기 전에 막관(참모)이 규가 답하여 말하기를 공자의 말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 급히 죽음을 알리는 글을 써서 강하에 이르게 하여 대공자가 형주의 주인이 될 것을 청하고, 유현덕과 함께 일을 다스리게 하면, 북쪽으로 조조를 대적하고, 남쪽으로 손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했다. 채모가 질책하여 말하기를 너는 누구인데 감히 어지러운 말로 주공의 유명을 거스르려 하는가!” 했다. 이규가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내외가 무리를 지어 거짓으로 유명을 핑계하여 나이 많은 이를 폐하고 어린 사람을 세워 형주와 양양 아홉 개 군을 채씨의 손에 보내려 하는 것이 보이는구나! 돌아가신 주인이 혼령이 있다면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했다.

 

蔡瑁大怒喝令左右推出斬之李珪至死大罵不絕於是蔡瑁遂立劉琮為主蔡氏宗族分領荊州之兵命治中鄧義別駕劉先守荊州蔡夫人自與劉琮前赴襄陽駐紮以防劉琦劉備就葬劉表之棺於襄陽城東漢陽之原竟不訃告劉琦與玄德

채모가 크게 노하여 좌우에 크게 명령을 내려 끌고 나가 목을 베게 하니 이규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채모가 마침내 유종을 세워 주인으로 삼았다. 채씨 종족이 형주의 군대를 나누어 거느리고 치중 등의, 별가 유선으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하였다. 채부인은 스스로 유종과 앞으로 나아가 양양에 주둔하여 유기, 유현덕을 방비하면서 유표의 관을 양양성 동쪽 한양의 언덕에 장례하였는데 끝내 유기와 유현덕에게 부고하지 않았다.

 

劉琮至襄陽方纔歇馬忽報曹操引大軍逕望襄陽而來琮大驚遂請蒯蔡瑁等商議東曹掾傅巽進言曰:「不特曹操兵來為可憂今大公子在江夏玄德在新野我皆未往報喪若彼興兵問罪襄危矣巽有一計可使荊襄之民安如泰山又可保全主公名爵。」琮曰:「計將安出?」巽曰:「不如將荊襄九郡獻與曹操操必重待主公也。」

유종이 양양에 이르러 막 말에서 내려 쉬고 있는데 홀연히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빠르게 양양을 향하여 온다고 보고하였다. 유종이 크게 놀라 마침내 괴월, 채모 등을 청하여 상의하였다. 동조연 부손이 진언하기를 다만 조조의 군대가 오는 것을 근심할 뿐만 아니라, 지금 대공자께서 강하에 있고, 유현덕이 신야에 있음에도 우리 모두 가서 상을 알리지 않았으니 만약 그들이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묻는다면 형주와 양양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부손)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는데 형주와 양양의 백성으로 하여금 편안하기를 태산과 같게 할 수 있고, 또한 주공의 명예와 관작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했다. 유종이 말하기를 어떤 계책을 내려하는가?”하니 부손이 말하기를 형주와 양양의 아홉 군을 조조에게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조조는 반드시 주공을 중요하게 대우할 것입니다.” 했다.

 

琮叱曰:「是何言也孤受先君之基業坐尚未穩豈可便棄之他人?」蒯越曰:「傅公悌之言是也夫逆順有大體強弱有定勢今曹操南征北討以朝廷為名主公拒之其名不順且主公新立外患未寧內憂將作襄之民聞曹兵至未戰而膽先寒安能與之敵哉?」琮曰:「諸公之言非我不從但以先君之業一旦棄與他人恐貽笑於天下耳。」

유종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업을 받아 자리가 아직 편안하지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 괴월이 말하기를 부손의 말이 옳습니다. 대저 거스르고 따름에는 대체가 있고, 강하고 약함에는 정해진 형세가 있습니다. 지금 조조가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는데 조정으로서 명분을 삼으니 주공께서 그것을 막으시면 그 조정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됩니다. 또한 주공께서 신로이 지위에 올라 밖의 환란으로 편안하지 않고, 안으로는 소란이 장차 일어나려합니다. 형주와 양양의 백성이 조조의 군대가 이른다는 것을 듣고 싸우기도 전에 간담이 먼저 서늘하니 어찌 그들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유종이 말하기를 여러 공들의 말을 내가 따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군의 기업을 하루아침에 버려 다른 사람에게 주면 비웃음이 천하에 들려질 것을 두려워한다.” 했다.

 

言未已一人昂然而進曰:「傅公悌蒯異度之言甚善何不從之?」眾視之乃山陽高平人姓王名粲字仲宣粲容貌廋弱身材短小幼時往見中郎蔡邕時邕高朋滿座聞粲至倒履迎之賓客皆驚曰:「蔡中郎何獨敬此小子耶?」邕曰:「此子有異才吾不如也。」粲博聞強記人皆不及嘗觀道旁碑文一過便能記誦觀人奕棋棋局亂粲復為擺出不差一子又善算術其文詞妙絕一時年十七辟為黃門侍郎不就後因避亂至荊襄劉表以為上賓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 사람이 씩씩하게 나아가 말하기를 부손과 괴월의 말이 매우 좋은데 어찌하여 따르지 않습니까?”했다. 무리들이 그를 보니 곧 산양 고평 사람으로 성은 왕이고, 이름은 찬이며, 자는 중선이었다. 왕찬의 용모는 파리하고 약하며 체격은 작았는데 어렸을 때 중랑 채옹에게 가서 만났다. 그 때 채옹의 훌륭한 벗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왕찬이 이른 것을 보고는 (채옹이)신을 거꾸로 신고 그를 맞이하였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채 중랑은 어찌하여 유독 이 어린 아이를 공경합니까?” 했다. 채옹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이한 재능을 소유하였으나 나는 그보다 못합니다.” 했다. 왕찬이 널리 듣고, 기억을 잘하여 사람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일찍이 길옆의 비문을 한 번 지나치듯 보고는 곧 기억하고 외울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는데 바둑판이 어지럽혀진 후 왕찬이 다시 바둑돌을 늘어놓으면 한 수도 어긋나지 않았다. 또 셈을 잘 하였다. 그 문장이 한 때에 절묘하였다. 나이 십 칠세에 임금이 황문시랑으로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난을 피하여 형주 양양에 이르니 유표가 상빈으로 삼았다.

 

當日謂劉琮曰:「將軍自料比曹公何如?」琮曰:「不如也。」粲曰:「曹公兵強將勇足智多謀擒呂布於下邳摧袁紹於官渡逐劉備於隴右破烏桓於白狼梟除蕩定者不可勝計今以大軍南下荊襄勢難抵敵蒯二君之謀乃長策也將軍不可遲疑致生後悔。」琮曰:「先生見教極是但須稟告母親知道。」只見蔡夫人從屏後轉出謂琮曰:「既是仲宣公悌異度三人所見相同何必告我?」

그날 유종에게 일러 말하기를 장군께서 스스로 조조와 헤아려 비교하였을 때 어떠합니까?”하니 유종이 말하기를 못합니다.”했다. 왕찬이 말하기를 조조의 군대는 강하고, 장수는 용맹하며, 지혜는 충분하고 꾀는 많습니다. 여포를 하비에서 사로잡았고, 원소를 관도에서 꺽었고, 유현덕을 농우에서 내쫒았으며, 오환을 백랑에서 깨뜨렸다. 목 베어 죽이고 소탕하여 안정시킨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지금 대군으로 형양에 내려오니 형세가 막고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부손과 괴월 두 사람의 꾀가 곧 좋은 계책입니다. 장군께서 머뭇거리다 후회를 함에 이르러서는 안 됩니다.” 했다. 유종이 말하기를 선생의 가르침이 지극히 옳습니다. 다만 반드시 모친이 알도록 알려드려야 한다.” 했다. 채부인이 얼핏 보니 채부인이 병풍 뒤로부터 돌아 나오며 유종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미 부손, 괴월, 왕찬 세 사람이 본 바가 서로 같은데 어찌 반드시 나에게 말하는가?” 했다.

 

於是劉琮意決便寫降書令宋忠潛地往曹操軍前投獻宋忠領命直至宛城接著曹操獻上降書操大喜重賞宋忠分付教劉琮出城迎接便著他永為荊州之主宋忠拜辭曹操取路回荊襄將欲渡江忽見一枝人馬到來視之乃關雲長也宋忠迴避不及被雲長喚住細問荊州之事忠初時隱諱後被雲長盤問不過只得將前後事情一一實告雲長大驚隨捉宋忠至新野見玄德備言其事

이에 유종이 뜻을 결정하고 곧 항복하는 글을 써서 송충으로 하여금 드러나지 않는 길로 조조의 군대 앞으로 들어 가 바치게 했다. 송충이 명령을 받고 곧바로 완성에 이르러 조조에게 가까이 가 항복하는 글을 바쳤다. 조조가 크게 기뻐하며 송충에게 많은 상을 주고 유종이 성을 나와 영접하도록 분부하고, 곧 그가 영원히 형주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 송충이 절하고 조조를 하직하고 형양에 돌아오는 길을 정하였다. 장차 강을 건너려하는데 한 떼의 인마가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를 보니 곧 관운장이었다. 송충이 돌아 피하려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관운장이 불러 머물게 하고 자세하게 형주의 일을 물었다. 송충이 처음에는 숨기고 꺼렸으나 뒤에 관운장이 따져 묻자 지나치지 못하고 앞뒤의 사정을 실제대로 말하였다. 관운장이 크게 놀라 송충을 잡아 신야에 이르러 유현덕을 만나 유현덕에게 그 일을 말하였다.

 

玄德聞之大哭張飛曰:「事已如此可先斬宋忠隨起兵渡江奪了襄陽殺了蔡氏劉琮然後與曹操交戰。」玄德曰:「你且緘口我自有斟酌。」乃叱宋忠曰:「你知眾人作事何不早來報我今雖斬汝無益於事可速去。」忠拜謝抱頭鼠竄而去

유현덕이 그것을 듣고 크게 곡하였다. 장비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같으니 먼저 송충의 머리를 베고, 양양을 빼앗고, 채씨, 유종을 죽인 후 조조와 서로 싸워야 합니다.” 했다. 유현덕이 말하기를 너는 또한 입을 다물라. 내가 스스로 짐작할 것이 있다.”하고는 곧 송충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여러 사람들이 일을 만드는 것을 말면서도 어찌하여 일찍 와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너를 죽인다 한들 일에 이익이 없으니 속히 가라.” 했다. 송충이 감사하고 머리를 싸안고 쥐새끼처럼 갔다.

 

玄德正憂悶間忽報公子劉琦差伊籍到來玄德感伊籍昔日相救之恩降階迎之再三稱謝籍曰:「大公子在江夏聞荊州已故蔡夫人與蔡瑁等商議不來報喪竟立劉琮為主公子差人往襄陽探聽回說是實恐使君不知特差某齎哀書呈報並求使君盡起麾下精兵同往襄陽問罪。」

유현덕이 바로 근심하고 번민하는 사이에 홀연히 공자 유기가 보낸 이적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유현덕은 이적이 지난 날 구원해준 은해를 생각하여 계단을 내려가 그를 맞이하고 두 번 세 번 감사하였다. 이적이 말하기를 대공자께서 강하에 있었는데 형주에 이미 유표가 죽었고, 채부인과 채모 등이 상의하여 상을 알리지 않고 마침내 유종을 세워 주인으로 삼았음을 들었습니다. 공자가 사람을 보내 양양에 가서 탐지하게 하였더니 돌아와 이 실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사군(유현덕)께서 알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특히 저에게 상을 알리는 글을 가지고 가서 알리고, 아울러 사군(유현덕)께서 막하의 정예 군대를 모두 일으켜 같이 양양에 가서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했다.

 

玄德看書畢謂伊籍曰:「機伯只知劉琮僭立更不知劉琮已將荊襄九郡獻與曹操矣!」籍大驚曰:「使君何從知之?」玄德具言拿獲宋忠之事籍曰:「若如此使君不如以弔喪為名前赴襄陽誘劉琮出迎就便擒下誅其黨類則荊州屬使君矣。」

유현덕이 글을 보기를 마치고 이적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적은 다만 유종이 지위를 빼앗은 것만 알고, 다시 유종이 이미 장차 형양 아홉 개 군을 조조에게 바친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했다. 이적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사군(유현덕)께서는 어디서 그것을 알았습니까?”하니 유현덕이 송충을 사로잡았던 일을 모두 말하였다. 이적이 말하기를 만일 이 같은데도 사군(유현덕)께서는 조문하는 것으로서 명분 삼아 양양에 나아가 유종이 나와 맞이하도록 유인하여 사로잡고, 그 무리들을 죽이시면 곧 형주는 사군(유현덕)에게 속하게 될 것입니다.

 

孔明曰:「機伯之言是也主公可從之。」玄德垂淚曰:「吾兄臨危託孤於我今若執其子而奪其地異日死於九泉之下何面目復見吾兄乎?」孔明曰:「如不行此事今曹兵已至宛城何以拒敵?」玄德曰:「不如走樊城以避之。」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이적의 말이 옳습니다. 주공께서는 따라야 합니다.” 했다. 유현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 형님(유표)이 위태로움에 임하여 아들을 나에게 부탁하였는데 지금 만약 그 아들을 잡고 그 땅을 빼앗는다면, 다른 날 죽어 구천의 아래에서 무슨 면목으로 다기 내 형님을 보겠는가?”했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만일 이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지금 조조의 군대가 이미 완성에 이르렀는데 어떻게 적을 막을 것입니까?” 했다. 유현덕이 말하기를 번성에 달아나는 것으로서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했다.

 

正商議間探馬飛報曹兵已到博望了玄德慌忙發付伊籍回江夏整頓軍馬一面與孔明商議拒敵之計孔明曰:「主公且寬心前番一把火燒了夏侯惇大半人馬今番曹軍又來必教他中這條計我等在新野住不得了不如早到樊城去。」便差人四門張榜曉諭居民:「無論老幼男女願從者即於今日皆跟我往樊城暫避不可自誤。」差孫乾往河邊調撥船隻救濟百姓差糜竺護送各官家眷到樊城一面聚諸將聽令先教雲長引一千軍去白河上流頭埋伏:「各帶布袋多裝沙土遏住白河之水至來日三更後只聽下流頭人喊馬嘶急取起布袋放水淹卻順水殺將下來接應。」

바로 상의하는 사이에 정찰하는 사람이 조조의 군대가 이미 박망에 이르렀음을 날듯이 보고하였다. 유현덕이 황망히 이적을 출발시켜 강하에 돌려보내고 군마를 정돈하는 한편으로 제갈공명과 적을 막을 계책을 상의하였다. 제갈공명이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또한 마음을 너그럽게 하십시오. 지난번에 한 자루 불로 하후돈의 군대 태반을 불살랐는데 지금 조조의 군대가 또 오니 반드시 그들이 계책에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신야에 머물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찍 번성에 이르는 것이 낫습니다.”했다. 곧 사람을 보내 사문에 방을 붙이고, 살고 있는 백성들을 깨우치기를 남자, 여자, 늙은이, 어린이를 따지지 않고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곧 오늘 모두 나를 따라 번성에 가 잠시 피하여 스스로 잘못해서는 안 된다.”하고는 손건을 보내 강가에 가 배를 징발하여 백성을 구하게 하고, 미축을 보내 각 관청 소속 관리들을 호송하여 번성에 이르게 하였다. 한편으로 여러 장수를 모아 명령을 듣게 하였다. 먼저 관운장은 일천의 군대를 이끌고 백하의 상류로가 매복하게 하면서 각각 포대를 휴대하고 모래흙을 많이 담아 백하의 물을 막았다가 내일 삼경에 이른 후 하루에서 사람의 함성과 말이 우는 소리가 들리면 급히 포대를 일으켜 세워 물을 터트려 그들을 물에 잠기게 하고 물을 따라 쳐 내려오면서 호응하여 행동하라.” 했다.

 

又喚張飛引一千軍去博陵渡口埋伏:「此處水勢最慢曹軍被淹必從此逃難可便乘勢殺來接應。」又喚趙雲引軍三千分為四隊自領一隊伏於東門外其三隊分伏西北三門卻先於城內人家屋上多藏硫黃燄硝引火之物曹軍入城必安歇民房來日黃昏後必有大風但看風起便令西北三門伏軍盡將火箭射入城去待城中火勢大作卻於城外吶喊助威只留東門放他出走汝卻於東門外從後擊之天明會合關張二將收軍回樊城。」

또 장비를 불러 일천의 군대를 이끌고 박릉의 나루에 가 매복하라. “이 곳은 물의 형세가 가장 느리다. 조조의 군대가 물에 잠겨 지면 반드시 이를 따라 어려움에서 도망할 것이니 형세를 타고 쇄도해 와 호응하여 행동해야 한다.” 했다. 또 조자룡을 불러 군대 삼천을 이끌고 나누어 네 개의 부대를 만들고 스스로 한 부대를 거느리고 동문 밖에 숨어 있고, 그 세 개 부대는 나누어 서, , 북 세 곳의 문에 숨겨두고 먼저 성 안 인가의 지붕에 유황과 염초 등의 불을 일으키는 물건을 많이 감추어 두라. 조조의 군대가 성에 들어가면 반드시 백성의 방에서 편안히 쉴 것이다. 내일 날이 저문 후에 반드시 큰 바람이 불 것이다. 다만 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곧 서, , 북 쪽의 세문에 숨겨두었던 군대가 모두 불 붙은 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 보내라. 성 안에서 불의 형세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성 밖에서 함성을 질러 위세를 도우라. 다만 동문은 머물고 있다가 그들이 나와 달아나는 것을 놓아두었다가 너는 동문 밖에서 뒤를 따라가며 공격하라. 날이 밝아지면 관운장, 장비 두 장군을 만나 군대를 거두어 번성에 돌아오라.” 했다.

 

再令糜芳劉封二人帶二千軍一半紅旗一半青旗去新野城外三十里鵲尾坡前屯住:「一見曹軍到紅旗軍走在左青旗軍走在右他心疑必不敢追汝二人卻去分頭埋伏只望城中火起便可追殺敗兵然後卻來白河上流頭接應。」

다시 미방과 유봉 두 사람은 이천의 군대를 데리고, 반은 홍기를, 반은 청기를 들고 신야성 밖 삼 십리에 있는 작미파 앞으로 가서 주둔하되 조조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보면 홍기를 든 군대는 달려서 왼쪽에 있고, 청기를 든 군사는 오른 쪽에 있게 하라. 그들은 마음에 의심하여 반드시 감히 뒤쫓지 못할 것이니 너희 두 사람은 떨어져 사람을 나누어 매복하라. 성 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곧 패한 군대를 쫓아 죽인 후 백하 상류에 와 호응하여 행동하라.” 했다.

 

孔明分撥已定乃與玄德登高瞭望只候捷音

제갈공명이 조를 나누어 정한 후 곧 유현덕과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승리의 소식을 기다렸다.

 

卻說曹仁曹洪引軍十萬為前隊前面已有許褚引三千鐵甲軍開路浩浩蕩蕩殺奔新野來是日午牌時分來到鵲尾坡望見坡前一簇人馬盡打青紅旗號許褚催軍向前劉封糜芳分為四隊紅旗各歸左右許褚勒馬:「且休進前面必有伏兵我兵只在此處住下。」許褚一騎馬飛報前隊曹仁曹仁曰:「此是疑兵必無埋伏可速進兵我當催軍繼至。」

각설하고 조인, 조홍이 군대 십만을 앞의 부대로 삼아 이끌고, 앞에는 이미 허저가 삼천의 철갑을 입은 군대를 이끌고 길을 열며, 물이 넓게 거침없이 흐르듯 신야에 쇄도해 왔다. 정오 무렵 작미파에 이르러 작미파 앞에 있는 한 떼의 인마를 바라보니 모두 청기와 홍기를 치며 신호하고 있었다. 허저가 군대를 재촉하여 앞으로 향하는데 유봉, 미봉이 군대를 나누어 네 개의 부대를 만들고 청기와 홍기가 각각 죄우로 돌아갔다. 허저가 말고삐를 당겨 명령하기를 또한 전진하지 말라. 앞에 반드시 복병이 있을 것이니 우리 군대는 다만 이곳에 머물러 있으라.” 했다. 허저가 전령을 보내 앞의 부대인 조인에게 보고하였다. 조인이 말하기를 이는 군대를 의심나게 하려는 것으로 반드시 매복은 없을 것이다. 속히 진군할만하다. 내가 마땅히 군대를 재촉하여 이어 이를 것이다.” 했다.

 

許褚復回坡前提兵殺入至林下追尋時不見一人時日已墜西許褚方欲前進只聽得山上大吹大擂頭看時只見山頂上一簇旗旗叢中兩把傘蓋左玄德右孔明二人對坐飲酒許褚大怒引軍尋路上山山上擂木砲石打將下來不能前進又聞山後喊聲大震欲尋路廝殺天色已晚

허저가 다시 작미파 앞으로 돌아가 군대를 데리고 쇄도해 들어갔다. 숲 속에 이르러 찾아보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해는 이미 서쪽으로 떨어졌는데 허저가 바야흐로 전진하고자 할 때 산 위에서 대뢰를 부는 소리를 들었다. 머리를 들어 볼 때 산 정상에 한 떼의 깃발이 보이고, 깃발의 무리 안에 두 개의 일산이 있는데 왼쪽에는 유현덕이 있고, 오른 쪽에는 제갈공명이 있는데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허저가 크게 노하여 군대를 이끌고 길을 찾아 산에 올랐다. 산 위에서 통나무와 돌들이 굴러 내려오니 전진할 수 없었다. 또 산 뒤에서 함성이 크게 울리는 것을 듣고 길을 찾아 싸워 죽이려하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曹仁領兵到教且奪新野城歇馬軍士至城下時只見四門大開曹兵突入並無阻當城中亦不見一人竟是一座空城了

조인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르러 신야성을 빼앗아 말을 쉬게 하였다. 군사들이 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네 개의 문이 크게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조조의 군대가 치고 들어갔으나 막는 이가 없었다. 성 안에서 또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으니 뜻밖에도 한 자리 빈 성이었다.

 

曹洪曰:「此是勢孤計窮故盡帶百姓逃竄去了我軍權且在城安歇來日平明進兵。」此時各軍走乏都已饑餓皆去尋房造飯曹仁曹洪就在衙內安歇初更已後狂風大作守門軍士飛報火起曹仁曰:「此必軍士造飯不小心遺漏之火不可自驚。」

조홍은 말하기를 이는 형세가 외롭고, 계책이 다하였기 때문에 모든 백성을 데리고, 쥐새끼처럼 도망하였다. 우리 군대는 임시로 성에 있으면서 편안히 쉬다가 내일 날이 밝으면 진군할 것이다.”했다. 이 때 각 군이 걸어서 지쳤고, 모두 이미 굶주려 모두 방을 찾아가 밥을 지었다. 조인과 조홍은 관아 안에서 편안히 쉬고 있었다. 초경이 지나고 광풍이 크게 일었다. 문지기 군사가 불이 났다고 보고하였다. 조인이 말하기를 이는 필시 군사가 밥을 짓다가 조심하지 않아 낸 불일 것이니 놀랄 것 없다.” 했다.

 

說猶未了接連幾次飛報西北三門皆火起曹仁急令眾將上馬時滿縣火起上下通紅是夜之火更勝前日博望燒屯之火後人有詩歎曰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이어서 차례로 서, , 북 세문에 모두 불이 났다고 보고했다. 조인이 급히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말에 오를 때 현에 가득 불이 일어나 상하가 온통 붉었다. 이 날 밤의 불은 전 날 박망의 주둔지를 불태운 것보다 더 하였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기린 것이 있는데 시에

 

奸雄曹操守中原九月南征到漢川風伯怒臨新野縣祝融飛下燄摩天

간웅 조조가 중원을 지키다 구월에 남쪽을 정벌하여 한천에 이르렀다. 바람의 신이 노하여 신야현에 임하고, 불의 신이 날아 내리니 불꽃이 하늘에 치솟는다.” 했다.

 

曹仁引眾將突煙冒火尋路奔走聞說東門無火急急奔出東門軍士自相踐踏死者無數曹仁等方纔脫得火厄背後一聲喊起趙雲引軍趕來混戰敗軍各逃性命誰肯回身廝殺

조인이 장수들을 이끌고 연기를 뚫고 불을 무릅쓰며 길을 찾아 달아나다 동문에 불이 없다는 것을 듣고는 급히 달려 동문을 나갔다. 군사들이 스스로 서로 밟아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조인 등이 겨우 불의 재앙에서 벗어나는데 뒤에서 한 소리 함성이 일어나고 조자룡이 군대를 이끌고 쫓아 와 섞여 싸우니 패한 군대가 각각 목숨을 걸고 도망치니 누가 즐겨 몸을 돌려 싸우려하겠는가?

 

正奔走間糜芳引一軍至又衝殺一陣曹仁大敗奪路而走劉封又引一軍截殺一陣到四更時分人困馬乏軍士大半焦頭爛額奔至白河邊喜得河水不甚深人馬都下河吃人相喧嚷馬盡嘶鳴

도망하는 사이에 미방이 군대를 이끌고 이르렀다. 또 일진을 쳐서 죽이니 조인이 크게 패하여 좁은 길로 도망하는데 유봉이 또한 일군을 이끌고 일진을 막고 죽였다. 사경 때쯤에 이르자 사람과 말이 모두 지치고, 군사들의 태반이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그슬렸다. 달려가 백하 가에 이르니 기쁘게도 강물이 깊지 않아 사람과 말이 모두 강에 내려가 물을 마셨다. 사람은 서로 떠들어대고, 말이 모두 울었다.

 

卻說雲長在上流用布袋遏住河水黃昏時分望見新野火起至四更忽聽得下流頭人喊馬嘶急令軍士一齊掣起布袋水勢滔天望下流衝去曹軍人馬俱溺於水中死者極多曹仁引眾將望水勢慢處奪路而走行到博陵渡口只聽喊聲大起一軍攔路當先大將乃張飛也大叫:「曹賊快來納命!」曹軍大驚正是城內纔看紅燄吐水邊又遇黑風來未知曹仁性命如何且看下文分解

각설하고 관운장은 상류에서 포대를 써서 강물을 막고 있었다. 저물 때쯤 신야에 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사경에 이르러 홀연히 하류에서 사람이 더드는 소리와 말이 우는 소리를 듣고 금히 군사에게 명령하여 일제히 포대를 치우게 하니 물의 형세가 하늘에 흘러넘치며 하류를 향해 치고 가니 조조의 군의 인마가 모두 물속에 빠졌는데 죽은 자가 지극히 많았다. 조인이 여러 장수를 이끌고 물의 형세가 느린 곳을 향하여 길을 잡고 달렸다. 행군하여 박릉나루에 이르러 함성이 크게 일어나는 것을 들었는데 한 군대가 길을 막았다. 앞선 대장은 곧 장비로 고게 고함치기를 조조 도적은 오서와 명을 받으라!”하니 조조의 군대가 크게 놀랐다. 바로 이러하다. 성 안에서는 붉은 화염 토하는 것을 보았고, 물가에서는 또 검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조인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으니 또한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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