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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대사전

by 최인표 2007. 10. 6.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幷序

赫連挺撰

1. 동국대학교 간행 『불교전서』를 저본으로 하였다.

2. 경판의 구분을 해 두었다.

3. 정확한 해석을 하려 노력하였으나 자신할 수 없다. 원문을 참조하면서 읽어주기 바란다.

4. 고려초 화엄종과 광종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5. 향가는 이두를 이해할 수 없어 부득이 해석하지 못하였다. 다른 해석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만 원문만 제시하여둔다.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幷序

巘拏(名庚切)賀之十萬揭 復興於身篤(天竺亦云身篤也) 職龍樹之由 濫觴乎扶桑 職義相之由 祖洽乎聖朝 職首座之由 故瑞書院學士(唐職) 夷喆湌(新羅職) 淸河公致遠 作相師傳 獨首座之行狀闕焉 一乘行者 惜之 予亦惜之 近有殿中內給事康惟顯 集首座初終現迹 文則遒麗 事多脫略 一乘行者 憾之 予亦憾之 迨成雍十年首夏之月 神衆經注主 大師昶雲 示以實錄舊藁一卷 因托述放予 予曰諾而塵網牽惹 志未全功 乃於月下搆思 證(燈?)前綴文 搆秋涉冬 明春絶等 自爲序云 前進士赫連庭謹序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幷序

巘拏(名庚切)賀의 10만게가 신독에서 다시 일어났고(天竺을 또한 身篤이라 이른다.), 龍樹의 말미암으로 동쪽에서 근원이 되었고, 의상의 말미암으로 화합하게 하였으며, 수좌로 말미암았다. 죽은 서서원 학사(당나라 벼슬) 이약철찬(이철찬, ? 신라 관직) 청하공 최치원이 의상스님의 전기를 지었는데 유독 수좌(균여인 듯)의 행장이 여기에 빠졌으므로 일승을 행하는 자가 그것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나(혁련정) 또한 그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근자에 전중내급사 강유현이 수좌의 일생에 나타난 자취를 모았는데 문장은 아름다우나 사적이 탈락하고 간략함이 많았다. 일승을 행하는 자가 그것을 유감으로 여겼고, 나 또한 그것을 유감으로 여겼다. 함옹 10년(고려 문종28, 1074) 수하의 달(4월)에 《화엄신중경》을 주석하는 주인인 대사 창운이 실록의 옛 원고 1권을 보이고 인하여 나에게 서술할 것을 부탁하였다. 내가 허락하고 그물을 다하고 숨겨진 것을 끌었으되 생각이 공을 온전히 하지는 못하였다. 달 아래서 생각을 엮고 등 앞에서 글을 엮어 가을에 얽어 겨울을 건너 이듬해 봄에 마쳤다. 스스로 서하여 말한다. 전진사 혁련정이 삼가 서한다.

 

今將述首座行狀 分爲十門 初降誕靈驗分 二出家請益分 三姉妹齋賢分 四立義定宗分 五解釋諸章分 六感通神異分 七歌行化世分 八譯歌現德分 九感應降魔分 十變易生死分

지금 장차 수좌의 행장을 서술하면서 나누어 10문으로 하였는데 <初降誕靈驗分> <二出家請益分> <三姉妹齋賢分> <四立義定宗分> <五解釋諸章分> <六感通神異分> <七歌行化世分> <八譯歌現德分> <九感應降魔分> <十變易生死分>이다.

 

初降誕靈驗分者

首座俗姓邊氏 諱均如也 父曰性尙志亡名 母曰占命 甞於天祐十四年四月初七日夜 夢見雄雌雙鳳 皆黃色 自天而下 竝入已懷 至二十載占命年已六十 而能有身懷 滿二十一旬 以此年八月八日 誕師于黃州之北 荊岳南麓之私第(遁臺葉村) 今黃州判官前拾遺李晙 重修舊址 號曰敬天之寺 卽其所也 師始生 容貌甚醜 無可倫比 父母不悅 置諸街中 有二烏比翼連蓋兒身 行路人見其異 遂尋家而縷陳之 父悔母恨而收育焉 而諱厥狀 乃置 笥鬪穀(給乳之義) 數月而後 示於鄕黨 師枉襁褓 善讀圓滿偈 凡父口授 十無一失者也

 

初降誕靈驗分者

수좌의 속성은 변씨요 이름은 균여이다. 아버지는 성품이 고상한 뜻을 지녔으나 이름을 잃어 버렸다. 어머니는 점명으로 일찍이 천우 14년(천우는 당 애제의 연호로 4년까지만 있다. 4년인 907년이 아닌지?) 4월 초 7일 밤 꿈에 봉황 한 쌍이 보였는데 모두 황색이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함께 몸으로 들어왔다. 20년에 이르러 점명의 나이 60이 지나 임신함이 있었다. 21순(순은 10일)을 채우고, 이해 8월 8일 스님이 황주 북쪽 형악 남쪽 기슭의 집(둔대엽촌)에서 탄생하였다. 지금의 황주판관 전 습유 이준이 옛 터를 수리하고 불러 말하기를 경천사라 했는데, 바로 그 곳이다. 스님이 처음 태어났을 때 용모가 매우 추하여 비할 데가 없었다. 부모가 기뻐하지 않고 거리에 두었더니 두 까마귀가 날개를 연이어 아이 몸을 덮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그 것을 이상히 여겨 마침내 집을 찾아서 그 것(까마귀가 날개로 덮어 주는 일)을 진술하니 아버지는 후회하고, 어머니는 한탄하여 거두어 길렀다. 이름은 행장에 빠져있다. 이에 상자에 두고 젖을 먹이고 수개월 후 동네 사람에게 보였다. 스님이 강보에 쌓였을 때 원만게(화엄경)를 잘 읽어서 아버지가 입으로 주는 10가지 중에서 한 가지도 잃어버리는 것이 없었다.

 

第二出家請益分者

師少而孤 及志學之歲 隨堂兄僧善均 往詣復興寺 謁識賢和尙 事之隸業 其乃能訓之

器 劣於所訓之機 雖簣塵不讓於成高 而盃水豈蠲於大渴 于時靈通寺義順云 量如洪鍾 善待問者 是以四方義學 聚成霧市 師相求之心 若塊噫之於於菟(風從虎之意) 每日黃昏之後 後識賢假寐之夕 潛詣靈通寺請益 方曉(第一張)而返 親自奉粥奉供 識賢密認其意 乃理不能遮 尋許投于順公 師去彼就此 事與願契 自爾之後 深㪺(音俱 斟也)敎海 除掞義天 于時匱粮七茵 不食者十度許 曾無一念而生厭退 以怠於學也

 

第二出家請益分者

스님은 어려서 외로웠다. 배움에 뜻을 두는 나이에 이르러(15세) 당형(4촌형)인 중 선균을 따라서 부흥사로 가서 식현화상을 뵙고는 그를 섬겨 업을 따랐다. 그는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아는 그릇으로 가르치는 바의 기틀이 모자라도 비록 삼태기의 먼지로 높음을 이루는 것을 사양치 않았으니, 작은 접시 물로 어찌 큰 목마름을 제거하겠는가? 그 때 영통사의 의순을 이르기를 “도량이 마치 넓은 종과 같아서 묻는 자를 잘 대우하였다.”하였다. 이 때문에 4방에서 義學(교리, 아마도 화엄학인 듯)하려는 자가 모여 안개와 저자를 이루었다. 스님이 자세히 찾으려는 마음이 마치 바람이 호랑이를 따르는 것과 같았다. 매일 해가 지고 식현이 잠자리에 든 저녘 후 가만히 영통사로 나아가 도움을 청하고, 바야흐로 밝아지면 돌아와서 친히 스스로 죽을 받들고 공양을 받들었다. 식현이 그 뜻을 알고 이에 바루려하나 능히 차단하지 못하고, 깊이 의순 공에게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스님은 거기를 떠나 이곳으로 나아가 섬기면서 부합하기를 원하였다. 이후로부터 깊이 敎學의 바다에 머뭇거렸다.

 

第三姊妹齊賢分者

師久居練若 係戀庭闈 遂歸覲親顔 與秀明鬪智 初秀明 先師三年而生 是歲天祐十七年也 女生而啼呼者有節 長則聰悟絶倫 甞丐僧到舍 讀法花經 女自內聽之 便生信焉 因設席迎僧 請爲了讀 僧讀八卷畢 仍請一宿 敷暢經旨 凡所耳飡 片無遺漏 僧行謂女曰 我卽菩提留支三藏也 汝是德雲比丘化身耳 及師歸覲之日 秀明請聞其業 師講普賢觀音兩知識法門 神衆千手二經文 三寸所宣 一字無失 師又於初夜 念諷華嚴六地義 約五百問答 秀明偸聽頓悟 至後五年 請書手記 己所悟一文一句 無闕疑也

 

第三姊妹齊賢分者

스님이 오래 동안 練若에 거처하고 係戀庭闈하였다. 마침내 돌아가 부모 얼굴을 보았다. 수명과는 지혜를 다투었다. 처음 수명은 스님보다 3년 먼저 태어났으니 이해가 천우 17년이다. 딸이 나면서 울음소리가 절개가 있었다. 자라면서 총오하기가 절륜하였다. 일찍이 구걸승이 집에 이르러 《법화경》을 읽자 여자가 안에서 그것을 듣고 문득 믿음을 내었다. 인하여 법석을 베풀고 스님을 맞아 읽는 것을 마치기를 청하였다. 스님이 8권 읽기를 마치자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펼쳐서 무릇 耳飡하는 바가 한 조각도 남겨 흘린 것이 없었다. 스님이 가면서 여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곧 菩提留支三藏이다. 너는 이 德雲 비구의 화신이다. 스님이 돌아와 본 날에 수명이 그 업(화엄) 듣기를 청하니 스님이 普賢보살과 觀音보살 두 지식의 법문, (화엄)신중경, 천수경 두 경문을 강의하였는데 세 마디를 베풀어 한 글자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스님이 또한 첫날밤에 화엄의 六地義 5백 문답을 외웠는데 수명이 훔쳐(숨어) 듣고 깨달았다. 5년 후 手記 쓰기를 청하니 자기가 깨달은 바의 한 문장 한 글귀도 빠트림이 없었다.

 

第四立義定宗分者

師北岳法孫也 昔新羅之季 伽耶山海印寺有二華嚴司宗 一曰觀惠公 百濟渠魁甄萱之福田 二曰希朗公 我太祖大王之福田也 二公 受信心請結香火願 願旣別矣 心何一焉 降及門徒 浸成水火 況於法味 各稟酸鹹 此弊難除 由來已久 時世之輩 號惠公法門爲南岳 號朗公法門爲北岳 師每嘆南北宗趣 矛楯未分 庶塞多歧 指歸一轍 與首座仁裕同好 遇歷名山 婆娑玄肆 振大法鼓 竪大法幢 盡使空門幼艾 靡然向風

 

第四立義定宗分者

스님은 북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화엄종의 우두머리가 있었다. 한 분은 관혜 공이니 후백제의 괴수 견훤의 복전이고, 다른 한 분은 희랑공이니 우리 태조대왕(왕건)의 복전이다. 두 분이 믿는 마음으로 향화의 서원을 맺을 것을 청함을 받았으되 서원이 이미 달랐으니 마음이 어찌 하나이겠는가? 내려와서 문도(제자)에 이르러서 젖어들어 물과 불을 이루었는데 하물며 법(사상적 경향)의 맛이 각기 시고 짠 것을 받았으니 이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웠다. 유래가 이미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 때 세상의 무리들이 관혜 공의 법문(문파)을 남악이라 이름하고, 희랑 공의 법문(문파)을 북악이라 이름하였다. 스님이 매양 남북의 (화엄)종취가 모순되어 분명치 않음을 탄식하고 여러 막히고 많은 갈래를 가리켜 한 수레바퀴(길)로 돌리고자 하였다. 수좌 인유와 더불어 같이 좋아하여 이름 있는 산을 지나다 파사 현율을 만나 대법고를 울리고, 대법당을 세우며 모든 불교의 어린 싹이 바람을 향하여 쓰러지게 하였다.

 

又華嚴敎中 有先公鈔 三十餘義記其名曰 三敎所爲同體 空有盡不盡權實 華藏說 成土海 明難歎不歎三生攝體 授職 六相 就實本實 斷障微少 兜率天子 五種成佛 解行 佛分相 流目 廻心 六地 八會 百六城淨土 菩提樹 性起 五果四句 廣修供養主伴章等也 師以爲源流則別 踳駁頗多 丈之煩者 撮要而刪之 意之徵者詳究而現之 皆引佛經菩薩 論以爲證 則一代聖敎 斟酌盡矣 洎國家木啓 選席於王輪寺 濯取空門及第 則以吾師義路爲正 餘旁焉 凡有才名之輩 何莫由斯途也 大者位取王師國師 少者階至大師大德 至於揭獨身拔獨迹 不可勝數矣

 

또한 화엄의 가르침 중에 先公이 요약한 것이 있어 30여가지 의기를 이름하였으니 <空有盡不盡權實> <華藏說> <成土海> <明難歎不歎三生攝體> <授職> <六相> <就實本實> <斷障微少> <兜率天子> <五種成佛> <解行> <佛分相> <流目> <廻心> <六地> <八會> <百六城淨土> <菩提樹> <性起> <五果四句> <廣修供養主伴章> 등 이다.

 

第五解釋諸章分者

師之在世(第二張) 以洪法利人 爲己任 若有諸家文書 未易消詳者 必爲之著記釋故 有搜玄方軌記十卷 孔目章記八卷 五十要問答記四卷 探玄記釋二十八卷 敎分記釋七卷 旨歸章記二卷 三寶章記二卷 法界圖記二卷 十句章記一卷 入法界品抄記一卷 竝行於代

 

第五解釋諸章分者

스님이 살아있을 때 널리 법(불교)으로써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했다. 제가의 문서로 쉽지 않고, 소상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기록을 해석하고 드러냄이 있었는데 <搜玄方軌記>十卷 <孔目章記>八卷 <五十要問答記>四卷 <探玄記釋>二十八卷 <敎分記釋>七卷 <旨歸章記>二卷 <三寶章記>二卷 <法界圖記>二卷 <十句章記>一卷 <入法界品抄記>一卷이 있어 아울러 당대에 행해 졌다.

 

第六感通神異分者

乾祐二年四月晦 大成大王大穆皇后 玉門生瘡 不可以示之於毉 召師之師順公 請以法藥救之 順公因能代苦 使皇后立差 順公代病其病 病革七日 不自免焉 師奉香爐呪願 瘡自移著於槐樹之西柯 槐在師房東隅 因爾而枯 至淸寧中 株机尙存

 

第六感通神異分者

건우 2년(949) 4월 그믐에 대성대왕(광종)의 대목황후(광종의 비, 황보씨)옥문(성기)에 종기가

났으나 의사에게 그것을 보일 수 없어 스님(균여)의 스승인 순공(의순)을 불러 법약으로 그것을 치료할 것을 청하였다. 의순이 인하여 고통을 대신하여 황후가 차도가 있었다. 의순공이 대신 그 병을 앓은지 7일이 지나도 스스로 면하지 못하였다.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주문으로 기원을 하니 종기가 스스로 회화나무의 서쪽 가지로 옮겨 붙었다. 회화나무는 스님의 방 동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인하여 말랐다. 청녕 중(1055-1064)에 이르기까지 그루터기가 있었다.

 

廣順三年宋朝使至 將封大成大王 王命有司 各揚厥職 三月蕆事 方臨受策 會愁霖不止 禮命阻行 西使謂東國必有聖人者在 何不使之祈晴 天若晴明 吾以爲聖賢之驗 光宗聞之 愁坐輟寢 有空聲唱言 大王且莫秋惱 明日必聞海幢說法 上卽出庭仰睇 溟濛無迹 詰旦欲索聖賢僧 以邀法席 緇班彦碩 悉辭避焉 時國師謙信秦薦師 師時年少 受國請 象步安詳 升師子座 圓音一演 雷電灒藏 須臾之間 雲卷風怗 天明日出 是時 萬乘珍敬禮 加九拜 因問師之誕所 黃州北鄙遁臺葉村 是比丘桑梓也 上以爲龍之生 非大釋忠信 寧無十室 尋封師爲大德 兼俗眷十有餘人 人賜田二十五頃 藏獲各五人 俾徙居于黃州城內

 

광순 3년(953) 송나라 사신이 이르러 장차 대성대왕을 책봉하려 하니 왕이 관청에 명하여 각기 그 직분을 드날리게 하고, 3개월 간 일을 경계하게 하였다. 바야흐로 책을 받으려 임하였는데 장마비를 만나 그치지 않아 예명을 거행하는 것을 막았다. 송나라 사신이 이르기를 “동국에는 반드시 성인이 있을 것이니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날이 개이도록 기도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늘이 만약에 맑아진다면 우리가 성현의 징험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광종이 그것을 듣고 근심스러이 침상에 앉았는데 공중에서 소리치는 말이 있었다. “대왕께서는 또한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일 반드시 해당이 설법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하였다. 광종이 곧 뜰에 나가 흘낏 우러러 보니 흐릿하니 가랑비가 내려 자취가 없었다. 아침에 성스럽고 현명한 스님을 찾아 법석에 맞이하였는데 스님들이 가득 찼으나 모두 사양하고 피하였다. 그 때 국사 겸신이 아뢰어 스님을 추천하였다. 스님이 그 때 나이가 어렸으나, 나라의 청을 받고 코끼리 걸음으로 편안히 갖추어 사자좌에 올라 원음을 한 번 연설하니 번개와 천둥이 물 뿌리듯이 사라지고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고요해지고 해가 나와 하늘이 밝아졌다. 이대 만승(왕?)이 공경하여 예를 표하고 9배를 더하였다. 인하여 스님이 탄생한 곳을 물으니 황주 북쪽 교외 둔대엽촌이니 이는 비구의 상재라고 하였다. 광종이 용이 났다 하고, 대석 충신이 정녕 10실이 없음이 아니라 하였다. 스님을 봉하여 대덕이라 하고 겸하여 속인 10여인을 거느리게 하였다. 사람들에게는 토지 25경과 노비 5인을 내려 황주 성내에 옮겨 살게 하였다.

 

現德五年 佛曰寺內 有霹靂 所欲禳怪 須憑大法 請師講演 晝貫夜 約三七日 於其問對 以當仁不讓爲意 會中有悟賢徹達(徹達現今之僧統) 作如是念 講主雖敏 猶是後生 餘雖不才 尙爲先輩 何於問話之間 不顧謙辭之禮 旣是生慊 殆欲興謗無何 有居士至止 謂曰

 

현덕 5년 불일사 내에 벼락이 있었다. 괴이함을 물리치는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다. 모름지기 대법에 의지하여 스님을 청하여 강연하기를 밤낮으로 하였다. 약 7일을 그 묻고, 대답하였는데 마땅히 인으로써 생각하여 사양하지 않았다. 재회 중에 오현승통이 이 같은 생각을 지었으니 강주가 비록 민첩하나 오히려 후에 났음이라. 나머지는 비록 재주 없음이나 오히려 선배라 하였으니 어찌 묻고 대화하는 사이에 겸사의 예를 돌아보았겠는가? 이미 이 싫어함이 생겼으니 거의 비방함이 일어남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떤 거사가 이르러 머물면서 일러 말하기를

 

你不須嫉恨 今日講師 是你先祖義相第七身也 爲欲弘宣大敎 故復來人間耳 悟賢聞已 驚愕乃傳言於衆 悔懺之曰 吾知過矣 師赴內道場 夜半有逸光 自房內射外 如流虹之未滅者 上望其光 命侍人往尋之 報云 師之眼光也 上幸師所 問曰 修行底法 獲致如此 答曰 貧道無勝行 于時經几上 有數珠一索 自然騰空 遶師三匝而止(第三張) 上乃敬重龍 絶古今

 

너희들은 모름지기 시기하고 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강론하는 스님은 이는 너희 선조 의상의 7번째 현신이다.(의상이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므로 화엄종 승인 균여를 이렇게 말한 듯하다) 대교(화엄종)를 널리 베풀고자 하였기 때문에 인간에 왔을 뿐이라. 하였다. 오현이 듣고는 크게 놀라서 무리에게 말을 전하니 후회하고 참회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의 허물을 알겠다 하였다. 스님이 내도량으로 나아가니 밤중에 빼어난 빛이 있어 방안으로부터 밖으로 비추었는데 마치 무지개가 흐르는 것 같아서 없어지지 않았다. 임금이 그 빛을 보고는 모시는 사람을 시켜서 그것을 찾게 하였다. 보고하여 말하기를 스님의 안광이라 하였다. 임금이 스님이 있는 곳에 행차하여 물어 말하기를 어떤 법을 수행하여 얻은 것이 이와 같습니까? 하였다. 답하여 말하기를 빈도(승려가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는 수승한 수행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때에 경궤 위에 여러 개의 구슬 중 한 개가 저절로 공중에 떠올라 스님을 세 번 돌고는 그치니 임금이 이에 공경하고 소중히 함이 고금에 없었다.

 

第七歌行化世分者

師之外學 尤閑於詞腦(意精於詞 故云腦也) 依普賢十種願王 著歌一十一章 其序云 夫詞腦者 世人戱樂之具 願王者 菩薩修行之樞故 得涉淺歸深 從近至遠 不憑世道 無引劣根之由 非寄陋言 莫現普因之路 今托易知之近事 還會難思之遠宗 依二五大願之文 課十一 荒歌之句 慙極於衆人之眼 冀符於諸佛之心 雖意失言□ 不合聖賢之妙趣 而傳文作句 願生凡俗之善根 欲笑誦者 則結誦願之因 欲毁念者 則獲念願之益 伏請後來君子 若誹若讚也是閑

 

第七歌行化世分者

스님의 外學으로 詞腦(말에 정치하기 때문에 腦라 이른다)에 막히지 않아 보현10종 원왕에 의거하여 노래 11장을 지었다. 그 서에 이르기를 대저 사뇌는 세상 사람들이 희롱하고 즐기는 도구이다. 원왕은 보살이 수행하는 근본이기 때문에 얕음을 건너 깊은 곳으로 돌아가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에 이름을 얻고, 세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얕은 근기의 말미암음을 이끌 수 없고, 비루한 말에 붙이지 않고서는 널리 원인의 길을 나타내 수 없다. 지금 쉽게 아는 가까운 일에 의탁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원종을 돌이켜 만나려 하여 25 大願의 글에 의거하여 11가지 거친 노래의 구절로 시험하는데 여러 사람들의 안목에는 부끄러움이 지극하나 여러 부처님의 마음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비록 생각이 말을 잃고 성현의 신묘한 취지에 합치하지는 않았으되 글을 전하여 구절을 지어 모든 세속의 善根이 생김을 원하며, 웃으며 외우는 자는 곧 誦願의 원인을 맺고자 하며 생각을 허물어뜨리는 자는 곧 염원의 이익을 획득하기를 바란다. 엎드려 청하건데 뒤에 오는 군자가 비방하거나 찬양하거나 이를 관계하지 않으리라

 

禮敬諸佛歌

心未筆留 慕呂白乎隱佛體前衣 拜內乎隱身萬隱 法界毛叱所只至去良 塵塵馬洛佛體叱刹亦 刹刹每如邀里白乎隱 法界滿賜隱佛體 九世盡良禮爲白齊 歎曰身語意業無疲厭 此良夫作沙毛叱等耶

 

稱讚如來歌

今日部伊冬衣 南無佛也白孫舌良衣 無盡辯才叱海等 一 念惡中涌出去良 塵塵虛物叱邀呂白乎隱 功德叱身乙 對爲白惡只 際于萬隱德海肹 間王冬留讚伊白制 隔句 必只 一 毛叱德置 毛等盡良白乎隱乃兮

 

廣修供養歌

火條執音馬 佛前燈乙直體良焉多衣 燈炷隱須彌也 燈油隱大海逸留去耶 手焉法界毛叱色只爲  手良每如法 叱供乙留 法界滿賜仁佛體 佛佛周物 叱供爲白制阿耶 法供沙叱多奈 伊於衣波最勝供也

 

懺悔業障歌

顚倒逸耶 菩提向焉道乙迷波 造將來臥乎隱惡寸隱法界餘音玉只出隱伊音叱如支 惡寸習落臥乎隱三業 淨戒叱主留卜以支乃遣只 今曰部頓部叱懺悔 十方叱佛體閼遣只賜立 落句 衆生界盡我懺盡 來際永良造物捨齊

 

隨喜功德歌

迷悟同體叱 緣起叱理良尋只見根 佛伊衆生毛叱所只 吾衣身不喩仁人音有叱下呂 修叱賜乙隱頓部 叱吾衣修叱孫丁(第四張) 得賜伊馬落人米無叱昆 於內人衣善陵等沙 不冬喜好尸 置乎理叱過 後句 伊羅擬可行等 嫉姤 叱心音至刀來去

 

請轉法輪歌

彼仍反隱 法界惡之叱佛會阿希 吾焉頓叱進良只 法雨乙乞白乎叱等耶 無明土深以理多 煩惱熱留煎將來出米善芽毛冬長乙隱 衆生叱田乙潤只沙音也 後言 菩提叱菓音烏乙反隱 覺月明斤秋察羅波處也

 

請佛住世歌

皆佛體 必于化緣盡動賜隱乃 手乙寶非鳴良爾 世呂中止以友白乎等耶 曉留朝于萬夜未 向屋賜尸朋知良閪尸也 伊知皆矣爲米 道尸迷反群良哀呂舌 落句 吾里心音水淸等 佛影不冬 應爲賜下呂

 

常隨佛學歌

我佛體 皆往焉世呂修將來賜留隱 難行苦行叱願乙 吾焉頓部叱逐好友伊 音叱多 身靡只碎良只塵伊去米 命乙施好尸歲史中置 然叱皆好尸 卜下里皆佛體置然叱爲賜隱伊留兮 城上人佛道向隱心下 他道不冬斜良只行齊

 

恒順衆生歌

覺樹王焉 迷火隱乙根中沙音賜焉逸良 大悲叱水留潤良只 不冬萎玉內乎留叱等耶 法界居得丘物叱 丘物叱爲乙吾置同生同死 念念相 續無間斷佛體爲尸如敬叱好叱等耶 打心衆生安爲飛等 佛體頓叱喜賜以留也

 

普皆廻向歌

皆吾衣修孫 一 切善陵頓部叱廻良只 衆生叱海惡中 迷反群無史悟內去齊 佛體叱海等成留焉日尸恨 懺爲如乎 仁惡寸業置 法性叱宅阿叱寶良 舊留然叱爲事置耶 病吟 體爲白孫隱佛體刀 吾衣身伊波人有叱下呂

 

摠結無盡歌

生界盡尸等隱 吾衣願盡尸日置仁伊而也 衆生叱邊衣于音毛 際毛冬留願 海伊過 此如趣可伊羅行根 向乎仁所 留善陵道也 伊彼普賢行願 又都佛體叱事(第五張) 伊置耶 阿耶 普賢叱心音阿于波 伊留叱餘音良他事捨齊 石歌播在人口 往往書諸墻壁(傳中不載 歌詞今錄)(村之) 沙平郡那必及干(新羅 職) 痼三年 不能毉療 師往見之 憫其苦 口授此願王歌 勸令常讀 他日有空聲唱言 汝賴大聖歌力 痛必差矣 自爾立效

 

第八釋歌現德分者

有翰林學士內議丞旨知制誥淸河崔行歸者 與師同時鑽仰日久 及此歌成 以詩譯之 其序云 偈頌 讚佛陀之功果 著在經文 歌詩 揚菩薩之行因 收歸論藏 所以西從 吟妙理 往往而哲人傑出 朗詠眞風 彼漢地則有傅公將賈氏湯師 濫觴江表 賢首及澄觀宗密 修蕝關中 或皎然無可之流 爭雕麗藻 齋已貫休之 競鏤芳詞 我仁邦則有摩詞 兼文則體元 鑿空雅曲 元曉與簿凡靈爽 張本玄音 或定猷神亮之賢 閑飄玉韻 純義大居之俊 雅著瓊篇 莫不綴以碧雲 情篇可玩 傳其白雪 妙響堪聽

 

第八釋歌現德分者

한림학사 내의승지 지제고 청하 최행귀는 스님과 같은 때에 함께하여 찬앙하기를 날로 오래하여 이 노래가 이루어지자 시로써 그것을 번역하고 그 서문에 말하기를 게송으로 부처님의 성과를 찬양하는 것은 불경의 글에 드러나고, 노래와 시는 보살이 인(원인)을 행한 것을 드날려 논장으로 거두어 돌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서쪽으로부터 오묘한 이치를 음미하여 자주 걸출한 철인들이 밝게 진리의 풍을 음조렸다. 저 한나라 땅에서는 곧 부대사 장, 가도 탕혜휴가 있어 江表(江南)의 근원이 되었고 현수와 징관, 종밀은 관중 땅에서 띠풀 엮음을 닦았고, 혹 皎然 無可의 무리가 다투어 아름다운 시문을 지어 새기고 재이와 관휴가 다투어 아름다운 말을 새겼다. 우리 동쪽나라에도 곧 마사와 문칙, 體元이 있어 아름다운 곡조를 만들었다. 元曉는 簿凡, 靈爽과 더불어 현묘한 노래의 근본을 베풀었다. 혹은 定猷, 神亮의 현자들이 옥 같은 음운을 잘 읊었고, 純義, 大居의 준걸들이 옥 같은 시편을 아름답게 나타내어 푸른 구름으로써 엮지 않음이 없었으니 본성의 편은 음미할 만하고 그 백설을 전하여 오묘한 소리 울림이 들을만하였다.

 

然而詩搆唐辭 磨琢於五言七字 歌排鄕語 切磋於三句六名 論聲則隔若參商 東西易辨 據理則敵如矛楯 强弱難分 雖云對衒詞鋒 足認同歸義海 各得其所 于何不臧 而所恨者 我邦之才子名公 解吟唐什 彼土之鴻儒碩德 莫解鄕謠 矧復唐文 如帝網交羅 我邦易讀鄕扎似梵書連布 彼土難諳 使梁宋珠璣 數托東流之水 秦韓錦繡 希隨西傳之星 其在局通 亦堪嗟痛 庸詎非魯文宣 欲居於此地 未至籠頭 薛翰林 强變於斯文 煩成鼠尾之所致者歟

 

그러나 시는 당의 말로 지어서 5언7구로 갈고 쪼아야 학고, 노래는 우리나라의 말로 나열하여 3구 6명으로 자르고 갈아야 한다. 소리로 논하면 곧 삼성과 상성이 떨어진 것 같아 동쪽과 서쪽을 쉽게 판별할 수 있지만 이치에 근거하면 곧 창과 방패처럼 대적하여 강약을 나누기 어렵다. 비록 말의 수준을 서로 자랑한다고 말하나 義海로 돌아감은 같이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각기 꼭 맞음을 얻었으니 어찌 잘 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한스러운 것은 우리나라의 재주 있는 이와 이름난 이들이 당나라의 시가를 �조릴 줄 알지만 저 땅의 鴻儒와 碩德들은 우리나라의 노래를 알지 못한다. 하물며 당나라의 글은 마치 그물이 잘 짜여진 것 같아서 우리나라에서 쉽게 읽을 수 있으나 鄕扎은 서역의 글이 연이어 펼쳐진 것 같아서 당나라 땅에서 알기 어렵다. 양나라와 송나라의 구슬(같은 글)이 자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의지하였지만 진한(신라)의 비단 같은 글은 서쪽으로 전해짐을 따르는 별처럼 적으니 그 막히고, 통함에 있어 또한 매우 한탄할 일이다. 이 어찌 노나라 문선왕(공자)가 이 땅에 살고자 했어도 갇혀서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며, 설한림(설총)이 애써 사문(문장)을 바꾸려 하나 번잡하게 쥐꼬리의 이르는 바를 이룬 것일 것이다.

 

伏惟我首座 名齊玄玩 作三千受戒之師 遂亞妙光 爲八十開經之主 占位於雜華元首 衆敎知歸 沾恩於大樹本根 群生獲利 是掛之供 鐘待叩 有問皆酬 懸臺之寶鏡忘疲 無幽不照

 

삼가 우리 수좌는 명성이 玄玩과 대등하고 3천명에게 계를 주는 스승이 되어 마침내 묘광보살과 버금가서 80권본 화엄경의 주인이 되었고, 화엄의 원수의 지위를 점하였다. 여러 교리가 돌아감을 알고 은혜가 큰 나무의 뿌리를 적셔 모든 생물들이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는 북틀에 걸린 종이 치기를 기다리듯 물음이 있으면 모두 대답하였으니 경대에 걸려 있는 보배로운 거울이 (물상을 비춤에) 피로를 잊은 듯 그윽이 비추지 않음이 없었다.

 

凡云志學 孰怠觀光 師乃勸誘伊人 瞻依彼佛 要以邪魔之北 令佩惠刀 指其益友之南 許開慈室 謂曰貞元別本 行願終篇 入長男妙界之玄門 遊童子香城之淨路 故得淸凉疏主 修 一軸以宣揚 申毒行人 限百齡而持課 初來震旦 自烏邦聖帝手書 後至尸羅 因兎(第六張)郡高德血字 四句偈 一經於耳 頓滅罪根 十種文 再記于心 能生覺果 良緣大厚 謄福何深 得不詠此願王 代其詩客 使男女共聞而發願 永結殊因 自他兼濟以成功 終歸妙果者乎

 

무릇 배움에 뜻을 둔자는 누가 관광이기를 게을리 하겠는가 스님은 이에 그들을 권유하여 저 부처님을 우러러 의지하게 하여 사악한 마귀의 패배케 하려하여 지혜의 칼을 차게 하고, 그 벗들의 지남이 되게 가르치도록 자비로운 방 열기를 허락하였다. 일러 말하기를 『정원본화엄경』별본 보현행원품 마지막편은 장남 보현보살의 묘한 경계로 들어가는 현묘한 문이요, 선재동자의 향성에 노닐 수 있는 청정한 길이다. 때문에 청량스님(징관)이 疏主(행원품소)를 닦아 한 권으로 펼쳐 드날리니 신독(인도)의 수행하는 사람이 백년을 기한으로 지니고 시험하였던 것이다. 처음 우리나라에 온 것은 烏 나라 임금이 손으로 씀으로 부터이고, 후에 신라에 이른 것은 토군(우리나라)의 고덕이 피로 글자를 쓴 때문이었다. 4구의 게는 한 번 귀를 지나(들어)도 갑자기 죄의 근원이 소멸하고, 10가지 글을 다시 마음에 새기면 능히 깨달음의 과보를 낳을 수 있다. 좋은 인연을 크게 두터이 하니 복은 얼마나 깊은가 이 원왕을 �어 시인을 대신하여 남녀로 하여금 함께 같이 듣고 발원하여 길이 수승한 인연을 맺어 나와 타인이 제도하여 공을 이루게 함으로써 마침내 현묘한 과보로 귀의해야 할 것이다.

 

夫如是則八九行之唐序 義廣文豊 十一首之鄕歌 詞淸句麗 其爲作也 號稱詞腦 可欺貞觀之詞 精若賦頭 堪比惠明之賦 而唐人見處 於序外以難詳 鄕士聞時 就歌中而易誦 皆沾半利 各漏全功 由是 約吟於遼浿之間 翻如惜法 減詠於吳秦之際 孰謂同文

 

대저 이와 같다면 8· 9행의 당(한문)의 서문은 뜻이 넓고, 문장이 풍성하고, 11수의 향가는 말이 맑고 아름답다. 그 지어진 것을 사뇌라 부르니 정관(당나라 태종의 연호) 시대 말을 비길만하다. 정치한 부의 머리는 혜제와 명제의 부에 비길만 하다. 당 나라 사람들이 보는 것은 서문 외에는 상세하기 어렵고 우리나라 선비들이 들을 때는 노래 속으로 나아가 외우기 쉬우니 모두 반쪽의 이익에 물들어 각기 온전한 공이 누락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략적으로 요하와 패수의 사이에서 �조리는 것은 법(불교)를 아끼는 이가 번역할 듯하나 오와 진의 사이에는 �는이가 줄어들 것이니 누가 같은 글이라 이르겠는가

 

況屬師心 本齊佛境 雖要期近俗 沿淺入深 而寧阻遠人 捨邪歸正 昔金氏譯碎珠全瓦 播美天朝 崔公 翻朗月淸風 勝芳海域 俗猶若是 眞固宜然 伏念行歸 志傀何充 筆慚靈運 杳想閹官之冥祐 莫効前修 追思相國之密傳 徒欽行烈 一昨因逢道友 幸覽玄言 縱隨妙唱以無端 潜恐高情之有待 憑托之 一源兩派 詩歌之同體異名 逐首各翻 間牋連寫 所冀遍東西而無碍 眞草竝行 向僧俗以有緣 見聞不絶 心心續念 先瞻象駕於普賢 呂連吟 後 値龍華於慈氏 今則 聊將鄙序 輒冠休譚 希蒙點鐵以成金 不避塼而引玉 儻逢慱識 須整庸音 宋曆八年周正月日謹序

 

하물며 스님의 마음이 속한 곳이 본래 부처님의 경계와 가지런하니 비록 가까운 풍속을 기약하여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어찌 멀리 있는 사람들이 삿됨을 버리고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옛날 김씨는 동글동글한 구슬과 온전한 도자기로 번역하여 중국에 아름다움을 떨쳤고, 최공은 밝은 달과 맑은 바람 같은 번역으로 천하에 아름다움을 드날렸다. 세속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眞(불교)이 진실로 그러함은 마땅하다. 삼가 행귀가 생각하건대 뜻은 何充에게 부끄럽고 글 솜씨는 靈運에 부끄러웠다. 깊이 閹官의 그윽한 도움을 생각하니 앞 선 닦음을 본받지 못하였다. 미루어 相國의 비밀한 전함을 생각하니 한갓 행렬을 흠모할 뿐이었다. 얼마 전에 도의 벗을 만남으로 인하여 요행히 현묘한 말을 살피게 되어 묘한 노래를 따라 부르기를 단서 없이 하였는데 아마도 바꿈을 기다리는 높은 정이 있는 듯 하였다. 그것에 의지하나 하나의 근원이 두 물줄기요 시가는 본체를 같이하나 이름을 달리하니 축차적으로 각기 번역하여 종이에 연이어 썼다. 두루 동서로 걸림이 없을 것을 바라는 바이다. 진서와 초서로 함께 써서 승· 속이 인연을 두어서 보고 들음이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생각을 이어서 먼저 보현보살이 코끼리가 끄는 수레를 우러러 음률을 연이어 �조리고 뒤에는 용화회상에서 자씨(미륵불)를 만나는 것이다. 지금은 곧 애오라지 변변치 못한 서문을 써서 문득 아름다운 말의 앞머리로 하고 쇠를 변화시켜 금으로 이루기를 희망하고, 벽돌로 옥을 이끌어 냄을 피하지 않겠다. 널리 아는 이를 만난다면 모름지기 용렬한 소리를 바로잡힐 것이다.

송력 8년 11원에 일에 삼가 서한다.

 

禮敬諸佛頌

以心爲筆畵空王 瞻拜唯應遍十方 一一塵塵諸佛國 重重刹刹衆尊堂

見聞自覺多生遠 禮敬寧辭浩劫長 身體語言兼意業 總無疲厭此爲常

 

稱讚如來頌

遍於佛界罄丹衷 一 唱南無讚梵雄 辯海庶生三寸抄 □泉希涌兩唇中

稱揚覺帝塵沙化 頌詠毉王刹土風 縱未談窮一毛德 此心直待盡虛空

 

廣修供養頌

至誠明照佛前燈 願此香籠法界興 香似妙峯雲靉靆 油如大海水洪澄

攝生代苦心常切 利物修行力漸增 餘共取齊斯法供 直饒千萬摠難勝

 

懺海業障頌(第七張)

自從無始劫初中 三毒成來罪幾重 若此惡緣元有相 盡諸空界不能容

思量業障堪惆悵 罄竭丹誠豈墯慵 今願懺除持淨戒 永離塵染似靑松

 

隨喜功德頌

聖凡眞妄莫相分 同體元來普法門 生外本無餘佛義 我邊寧有別人論

三明積集多功德 六趣修成少善根 他造盡皆爲自造 摠堪隨喜摠堪尊

 

請轉法輪頌

佛陁成道數難陳 我願皆趨正覺因 甘露洒消煩惱熱 戒香熏滅罪愆塵

陪隨善友瞻慈室 勸請能人轉法輪 雨寶遍沾沙界後 更於何處有迷人

 

請佛住世頌

極微塵數聖兼賢 於此浮生畢化緣 欲示泥洹歸寂滅 請經沙劫利人天

談眞盛會猶堪變 滯俗群迷實可潾 若見惠燈將隱沒 盍傾丹懇乞淹延

 

常隨佛學頌

此娑婆界舍那心 不退修來迹可尋 皮紙骨毫兼血墨 國城宮殿及圓林

菩提樹下成三點 衆會場中演一音 如上妙因摠隨學 永令身出苦河深 

 

恒順衆生頌

樹王偏向野中榮 欲利千般萬種生 花果本爲賢聖體 幹根元是俗凡精

慈波若洽靈根潤 覺路宜從行業成 恒順遍敎群品悅 可知議佛喜非輕

 

普皆廻向頌

從初至末所成功 廻與含靈一切中 咸覬得安離苦海 摠斯消罪仰眞風

同時共出煩塵域 異體成歸法性宮 我此至心廻向願 盡於來際不應終

 

摠結無盡頌

盡衆生界以爲期 生界無窮志豈移 師意要驚迷子夢 法歌能代願王詞

將除妄境須吟誦 欲返眞源莫厭疲 相續一心無間斷 大堪隨學普賢慈

 

右歌詩成 彼人爭寫 一本乃傳於西國 宋朝君臣見之曰(第八張) 此詞腦歌 主眞一佛出世 遂使禮師 師容貌異常 非世人之敬信 故我君臣恐彼西使輕之 又未委客人之所懷 將不許見 客認此意 潜服往詣摠持院(院是師常居處在歸法寺也) 先遣象胥 釋淸求謁 師整三衣將迎 先觀我君臣心念 忽然遁去 客人聞之曰 何處得見佛 因泣下數行

 

위의 노래와 시가 이루어지자 그 사람(송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베껴서 1본을 곧 중국에 전하니 송 나라 조정의 임금과 신하들이 보고 말하기를 이 사뇌가는 진실로 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 것이라 했다. 마침내 사신으로 스님에게 예를 하게 하였다. 스님은 용모가 이상하여 세상 사람들의 공격과 믿음을 받지 못였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임금(광종)과 신하들은 저 송나라의 사신들이 그를 경홀히 할 것을 두려워하고, 또한 손님의 품은 바를 위임하지 못하고 만나는 것을 허락지 않으려 했다. 사신이 이 뜻을 알고 옷을 바꿔 입고 총지원(총지원은 스님이 평소 거처하던 곳인데 귀법사에 있다.)으로 나아가 먼저 통역을 보내 맑음을 내버리고 뵙기를 구하였다. 스님이 三衣를 정돈하고 맞으려 하다가 먼저 우리 인금과 신하의 마음과 뜻을 보고는 홀연히 숨어버렸다. 사신이 그 것을 듣고는 말하기를 어느 곳에서 부처님을 볼 수 있을까 하고는 눈물 흘리기를 거듭하고는 갔다.

 

第九惑應降魔分者

開寶中 歸法寺僧正秀 詣法官 讒搆曰如師有異情修行 官奏其事 光宗聞之 怒促召師 入欲害之 師及御所 惶懼仆地 上見其狀以爲直 翻勑毉者二人 護送之 尋差降承宣薛光 到寺慰撫

 

第九惑應降魔分者

개보 중에 귀법사 스님 정수가 법관을 뵙고는 참소하여 말하기를 스님이 異情을 修行함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관리가 그 일을 아뢰니 광종이 그것을 듣고는 노하여 스님을 재촉하여 부르면서 들어오면 해치려 하였다. 스님이 임금이 있는 곳에 이르러 황망하고 두려워하여 땅에 엎드리니 임금이 그 모양을 보고는 일어나게 하고 칙(임금의 명령)을 바꾸어 의사 2사람으로 호위하여 보내고, 승선 설관을 내려보내 절에 가서 위로하게 했다.

 

此日夜 上夢見神人 身長一丈許 壓寢殿而立 乃言口大王信膚訴之事 凌辱法王故 必有不祥大起 夢覺已 流汗遍身 召傍臣說夢 至明日 松岳北畔松樹無風自倒者 不知其幾千有株 上聞此怪 命卜之 云辱斥法王所由生也

 

이날 밤 임금의 꿈에 키가 1장이 넘는 신인이 나타나서 침전을 가로막고 서서는 곧 입으로 말하기를 대왕이 문사가 천박한 참소의 일을 믿고 법왕을 능욕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상서롭지 않은 일이 크게 일어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꿈에서 깨어나니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옆의 신하를 불러 꿈을 설명하였다. 이튿날에 이르니 송악의 북쪽 반쪽의 소나무가 바람이 없는데도 저절로 넘어졌는데 그것이 몇 천그루인지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 괴이를 듣고 그것을 점치게 하니 이르기를 법왕을 욕보이고 배척함으로 말미암아 생긴 일이라 했다.

 

上乃悔懼便於大內持置消災道場 命法官 斬正秀於市 仍池其正秀房 俗兄浪造文書令弟誣告及正秀 同日被誅 又靈通寺白雲房 年遠浸壞 師重修之 因此地神所責 災變日起 師略著歌一首 以 禳之帖其歌于壁 自爾之後 精怪卽滅也

 

임금이 이에 후회하고 두려워하여 다시 궁궐 안에 소재도량을 두고 법관으로 하여금 거리에서 정수를 참수하고 그 정수 방을 그대로 못으로 하고, 속세의 형인 낭조와 문서령의 동생이 무고함이 정수에 미쳤으므로 같은 날에 베어졌다. 또한 영통사 백운방이 해가 멀어 점점 무너져서 스님이 그것을 중수하려 하니 이로 인하여 지신이 꾸짖는 바 되어 재변이 날로 일어나니 스님이 대략 노래 1수를 짓고는 그 노래를 벽에 붙이고 그것으로써 제사하니 이후로부터 괴변은 곧 없어졌다.

 

第十變易生死分者

開寶六年中 金海府使 秦云 今年月日 有異僧 頂戴椶笠子 到海邊 問其名居 自稱毗婆尸 曰曾於五百劫前 會經此國締緣焉 今見三韓一統 而佛敎未興故 爲酬宿因 暫至松岳之下 以如字洪法 今欲指日本 言訖卽隱 上奇之 命推其日 是師順世之日也 變易分竟

 

第十變易生死分者

개보 6년 중에 김해부사가 아뢰어 이르기를 금년 월일에 이상한 스님이 있어 머리에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바닷가에 이르렀으므로 그 이름과 사는 곳을 물으니 스스로 毗婆尸라 하고는 말하기를 일찍이 500겁 전에 이 나라를 지나다가 인연을 맺었습니다. 지금 삼한이 하나로 통일됨을 보았으나, 불교가 아직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옛 인연에 보답하려 하여 잠시 송악의 아래에 이르렀는데, 洪法이라는 글자와 같아 지금 일본을 가리키고자 한다. 말을 마치고는 곧 사라졌습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것을 기이하게 여기고는 그 날을 미루게 하였는데 이는 스님이 세상을 따르던 날이었으니 바뀜이 분명함을 다 하였다.

 

師之在世 厚綠於大成大王 王發大願 於松岳之下 新刱歸法寺 寺成詔請師住持之 師祗命香火 領衆洪法 甞於講法之前日 使大德全業述經序 業述十許張 將詣講軒畔 秦於師 師奉香爐 象步次一覽演暢 有如宿習 其聰悟率如此也 鳴呼 化有緣 有緣盡死於此 生於彼 菩薩之事也 以開寶六年六月十七日 時示滅于歸法寺 葬於八德山

山在歸法之東南 去寺百許步 豊且秀者 是也 報年僧臘 其神足曰曇琳曰肇 皆一時龍象 位至首座 自下之輩 寔繁有徒(第九張) 及至于今 稻麻浸盛 或散在於外 或守之本房 後有門下侍郞平章事金廷俟 見鳳飛而穴在 因思主而敬房 遂乃重修 名甘露院 故給事中高挻 爲之述記 其略曰哲萎游天 輪奐掃地 寶閣珠柱 善財散而蕪平 靑山白雲 支遁去而色慘(云云)

 

스님이 세상에 있을 때 대성대왕(광종)에 인연을 두터이 하여 왕이 대원을 내어 송악의 아래에 새로이 귀법사를 개창하고 절이 이루어지자 스님을 초청하여 주지하여 스님으로 하여금 향화를 받들고 무리를 거느리고 법을 넓히게 했다. 일찍이 법을 강설하는 전날에 대덕 전업으로 하여금 경전의 서문을 서술하게 하였는데 전업이 10여장을 서술하여 강설하는 집으로 나아가 스님에게 아뢰었다. 스님이 향로를 받들어 코끼리 걸음으로 차례로 1번씩 보이며 演暢하니 묵은 습관이 있는 것과 같았으니 그 聰悟하기가 이와 같았다. 아 인연 있음을 변화하고 인연이 있음이 다하여 여기에서 죽어 거기에서 나니 보살의 일이다. 개보 6년 6월 17일 귀법사에서 입적하니 팔덕산에 장례하였다. 산은 귀법사의 동남쪽에 있는데 절로부터 백여보 거리이다. 풍성하고 또한 빼어나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세속의 나이는 ?이며, 승려로서의 나이는 ? 이다. 그 제자로는 曇琳, 肇이니 모두 한 때의 용상이요 지위가 수좌에 이르니 아래의 무리가 참으로 번성함에 있음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침에 벼와 삼처럼 점차 무성하여 혹 밖에서 흩어져 있기도 하고 혹 본 방을 지키기도 하였다. 후에 문하시랑 평장사 김정사는 봉새가 날아 구멍에 있음을 보았다. 때문에 주인을 생각하고 방을 공경하여 마침내 중수하고 감로원이라 이름하였다. 고로 급사중 고정이 그를 위하여 記를 서술하였으니 그 대략을 말하면 현철은 하늘에서 노닐고, 수레를 성대히 하고 땅을 청소하며 보배로운 전각의 구슬 기둥이라. 좋은 재물을 흩어서 고르게 하였네, 청산의 흰 구름이 숨어가니 기색이 슬프도다(云云)

 

後序

聖人之所以異於人者 以其導惑敎愚 作大利益故也 挻伏審吾師之行狀 其聖人也歟 楊雄曰登泰山然後 知衆山之迤邐 予見古碩德碑銘 驚嘆移晷者十數矣 見吾師行狀然後 知衆碑之迤邐矣 於噓 前佛已說 後佛未興 世眼漸昏 法輪中轍 師能傑出 助揚玄化 神通瑞應 隨緣遍示於塵沙 少見寡聞 撮要僅存於萬一 庶逢博識 潤色斯文而已(第一○張)

大華嚴歸法寺主圓通首座均如博

後序

성인이 보통사람에 다른 까닭은 그 미혹함을 인도하고 어리석음을 가르쳐서 큰 이익을 짓기 때문이다. 挻이 삼가 우리 스님의 행장을 살펴보니 그는 성인일 것이다. 양웅이 말하기를 태산에 오른 연후에야 여러 산들의 비스듬히 연이은 것을 안다고 했다. 내가 옛날 碩德의 碑銘을 보니 놀라고 경탄한 것을 잠깐 동안 한 것이 수 십여개였는데, 내가 우리 스님의 행장을 본 연후에야 여러 비문의 늘어섬을 알겠다. 아! 전세 부처님은 이미 말하였고, 후세 부처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아 세속의 안목이 점차 어두워지고, 佛法의 수레바퀴는 바퀴자국의 가운데였다. 스님이 능히 걸출하게 현묘한 교화를 도와 드날리니 신명에 통하고 상서로움이 반응하여 인연을 따라 티끌 속에서 두루 보였다. 본 것이 적고, 들은 것이 부족하여 요점을 취한 것이 거의 만에 하나를 보존하였다. 여러 박식한 이를 만나 이 글이 윤색되기를 바랄 뿐이라.

大華嚴歸法寺主圓通首座均如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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