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

김천지지사 대장당기 비문

by 최인표 2007. 10. 21.

김천 직지사 대장당기비문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무신집권초기 왕실과 불교게의 관게를 보여주는 자료로 주목됩니다. 원문과 촤연식의 해석문을 함께 제시합니다.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하나 참고할만합니다. 이 기문은 고려 명종 20년 김천직지사에서 초조장경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금글씨로 5,048권의 사경을 하고 대장당이라는 전각을 건립 후 봉안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불사에 고려 왕실과 문신들이 경제적 기반을 제공해 주고 있어 주목됩니다.

 

 

直指寺大藏堂記碑

五百八垣二(以下缺)」

一彌勒佛右壁阿彌陁佛無▨(以下缺)」

十六加以傳燈三凾祖(以下缺)」

以螺鈿或以朱漆或以▨金而粧飾不同者以部安于十藏(以下缺)」

立祝 聖油香寶(以下缺)」

左副承宣司宰卿任濡納稻租五百石以助其築(以下缺)」

十結至丙午正月五日右承宣權節平口傳 聖旨賜東平縣藍田七結斷俗寺(缺)」

付僧錄司施行能事旣畢越庚戌三月初一日始約五十日開設法會慶其(下缺)」

兩輪以藏經五千四十八卷▨▨▨▨▨▨▨▨▨▨飾金而粧募人寫經修國(缺)」

王介甫作記華亭縣海慧院沙門奉英(以下缺)」

師門

予曰吾才非介甫舜兪加以年齒▨老舊學多忘矧惟玄言妙雖東(以下缺)」

申正月八日右副承宣柳公權奏判命臣爲記辭不獲已▨▨(以下缺)

源剃

             ▨左僕射集賢殿大學士同(以下缺)

寅年己來國家多難師願奉福於國家願寫成金字大藏經首出貯儲光成二函幷願二凾 令殿占一凾及道俗尊卑各占一 凾以得安此大寳其地不可不擇具狀奏」

按察使以順安縣令挈壺正李愈公歷覽一方山川未▨其所師詣直旨寺」

與至公慧

豈可仍舊而安之卜寺之西北隅曰此乃萬代不滅之地也▨直旨寺者」

三韓

義旗指仁同縣縣人負固不服

謀開興仇二臣曰請召得道師能

克敵

謀師言此

經了便止魏安豐王延明以香汁和墨寫經一(以下缺)」

敬衞抑又康阿祿山死而復蘇自說被冥道誤追至閻羅王前見何客師入鑊湯地獄師(以下缺)」

經師得脫地獄寫經之報如此其至▨以金字成大藏經者其功德與天地莫量夫大藏(以下缺)」

於此實脫世眞之報轍也是以聖賢賴此而得度衆生由此而離若爰有三重玄默俗姓林氏▨州人也自妙齡有脫塵之趣投師於▨山下大禪師證(以下缺)」

不服非老僧所知然今年太歲在午請以洞口田不過▨九畝賜之(以下缺)」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下(1984)〕

 

直指寺大藏堂記碑(최연식의 해석문)

1행: 5백 팔이고 담장이 둘

2행: (왼쪽 벽에는) 미륵불, 오른쪽 벽에는 아미타불이다. 무■(無■)

3행: 열 여섯에 『전등록(傳燈錄)』 세 함(函)을 더하였다. 조(祖)

4행: 나전으로 하기도 하고 혹은 붉은 칠을 하고, 혹은 금칠을 하여서 장식이 같지 않았다. 각기 부질(部秩)을 갖추어 십장(十藏)으로 안치하였다.

5행: 축성유향보(祝聖油香寶 : 임금님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름과 향을 공급하기 위한 기금)을 설립하였다.

6행: 좌부승선 사재경(左副承宣 司宰卿) 임유(任濡)가 벼 5백 석(石)을 바쳐서 그 공사를 도왔다.

7행: 10결(結)이었다. 병오년(명종 16, 1186) 정월 5일에 이르러 우승선(右承宣) 권절평(權節平)이 입으로 임금님의 명령을 전하여 동평현(東平縣)의 쪽을 재배하는 7결(結)을 내렸다. 단속사(斷俗寺)

8행: 승록사(僧錄司)에 내려 시행하게 하였다. 일이 모두 마쳐졌으므로 경술년(명종 20, 1190) 3월 초하루부터 50일을 기약하는 법회를 개설하여 그 (완성을) 축하하였다.

9행: 두 수레에 경전 5,048권을 두었다. (결락) 좋은 금으로 장식하고 사람들을 모아 경전을 베끼게 하였다. 수국(修國)

10행: 왕개보(王介甫)가 기문을 짓고, 화정현(華亭縣 : 중국 江蘇省의 지명) 해혜원(海慧院)의 승려인 봉영(奉英)이

11행: 스님의 문하에

12행: 내가 말하기를 나의 재주는 왕개보(王介甫)에 비길 수 없고, 더하여 나이가 들어 전에 배운 것을 많이 잊었다. 더욱이 그윽한 말과 오묘한 이치는 아직

13행: ■신(■申)년 정월 8일에 우부승선(右副承宣) 유공권(柳公權)이 아뢰어 신(臣)으로 하여금 기문을 짓게 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14행: ■원(■源) (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15행: 좌복야 집현전대학사 동(左僕射 集賢殿大學士 同)

16행: 선사(禪師) 석(釋) 탄연(坦然)의 글씨와 왕우■(王右■)

17행: ■인(■寅)년 이래로 나라에 어려움이 많자 스님은 나라의 행복을 빌기 위하여 금자(金字)의 대장경을 베껴 완성할 것을 발원하고서 먼저 재산을 내어 광(光)과 성(成)의 두 함(函)을 완성하고 또 두 함(函)을 (완성할 것을) 발원하였다. 영전(令殿)이 한 함(函)을 맡았고, 승려와 재가신자들이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각기 한 함(函)씩을 맡아 완성하였다. 이 귀한 보물을 안치하려 함에 땅을 고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상황을 갖추어 임금님께 아뢰니

18행: 안찰사가 순안현령(順安縣令)인 설호정(挈壺正) 이유공(李愈公)으로 하여금 지역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게 하였지만 적당한 곳을 얻지 못하였다. 스님이 직지사(直旨寺)에 나아가

19행: 지공(至公) 혜■(慧■: 慧安, 사적비에 능여의 제자로 신홍과 함께 보인다.)과 함께

20행: ‘어찌 그대로 두고서 안치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절 서북쪽 모퉁이를 점쳐 ‘이곳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곳이다’라고 하였다. 직지사는

21행: 삼한(三韓)

22행: 정의의 기치를 (들고서) 인동현(仁同縣)으로 나아갔지만 현의 사람들이 저항하며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23행: 모개(謀開)와 흥구(興仇) 두 신하가 말하기를 ‘청컨데 도를 얻은 스님 능■(能■)을 불러

24행: 적을 이길

25행: 도모하소서. 스님이 이와 같이 말하니

26행: 완성하자 곧 그치었다. 위(魏 : 北魏를 가리킴)나라 때의 안풍왕(安豊王) 연명(延明)이 향물을 묵에 섞어 경전 1(백 부)를 썼고

27행: 공경하며 지키고 우러렀다. 또한 강아록산(康阿祿山)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스스로 말하기를 ‘저승에 잘못 잡혀가서 염라대왕 앞에 이르렀는데, 아용(阿容) 스님이 확탕지옥(鑊湯地獄 : 중생들이 끓는 물속에 들어가 있는 지옥)에 있는 것을 보았다. 스님이

28행: 경전을 (써서) 스님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전을 쓰는 보답이 이와 같이 지극하다. 금자(金字)로 대장경을 만든 사람은 그 공덕이 하늘과 땅으로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무릇 대장경

29행: 이것에서 …하였다. 실로 세속의 티끌을 벗어나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성현들은 이에 의거하여 깨달음을 얻고, 중생들은 이로 말미암아 고통을 벗어난다. 그리고 삼중대사 현묵(玄黙)이 있었으니 속성은 임(林)씨이고 ■주(■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세속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산(■山)의 대선사(大禪師) 증■(證■)에게 의탁하여

30행: 복종하지 않으니 노승의 알 바가 아니다. 그런데 금년은 간지가 오(午)에 해당한다. 청컨대 골짜기 입구의 밭 불과 ■9(■九) 무(畝)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하 결락)

 

해석문을 읽으면서 참고하십시오

 

임유(任濡)는 의종과 명종의 어머니인 공예태후와 남매간이다. 처음에는 극인(克仁)이란 이름을 가졌으며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참지정사까지 지냈다. 신종 초년에 중서시랑 평장사로 임명되고 수 태부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되었다. 강종(康宗) 원년(1212년)에 64세로 죽었는데 시호를 양숙(良淑)이라 하였다. 임유는 성질이 담박하고 인자하며 문벌과 권세를 믿고 남을 깔보는 일이 없으며 하인이나 종들에 대해서도 욕설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5대의 왕조를 섬기면서 근실하게 복무하였고 직무상 처결이 공명정대하였다. 제고(制誥)를 맡아 본 지 16년 동안에 당시 유명한 조칙들이 모두 그의 손에 의하여 기초되었으며 네 차례나 과거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그가 선출한 인재들은 모두 다 당시의 명사로 되었다. 예하면 조충(趙沖), 이규보(李奎報), 김창(金敞), 유승단(兪升旦) 같은 인사들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늘그막에 가서 불교를 독신하여 대장경을 거의 절반이나 금자로 필사하였으므로 식자들은 이것을 비난하였다. 그가 죽은 후 희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임유의 아들은 임경숙(景肅), 임경겸(景謙), 임효순(孝順), 임경순(景恂) 등이다.

 

동평현(東平縣)은 원래 신라의 대증현(大甑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동래군(東萊郡)의 관할하에 현으로 만들었으며 현종 9년에 본 주에 소속시켰다. 여기에 절영도(絶影島)가 있다.

 

순안현(順安縣)은 원래 고구려의 내기군(柰己郡)인데 신라 파사왕(婆娑王)이 탈취하였으며 경덕왕이 내령군(柰靈郡)으로 고쳤다. 성종 14년에 강주도단련사(剛州都團練使)라고 불렀고 현종 9년에 본부에 소속시켰으며 인종 21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령관으로 하였다. 고종 46년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는바 구성(龜城)〔성종이 정한 명칭이다〕이라고도 부른다. 이 현에 마아령(馬兒嶺)이라는 험준한 지대가 있다.(고려사 권57 지11 지리2 안동부,순안현)

 

능여대사는 고려 때 인동(仁同, 경상북도 구미시의 옛 이름)의 전투에서 신통력으로 구제하고 또 적을 이길 시기를 예고하여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대가람을 이곳에 지어 대사에게 보답하고 토지와 재물과 보배를 많이 하사하여 왕실의 복을 비는 절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부터 혜종(惠宗, 944~945년) 정종(定宗, 946~949년) 광종(光宗, 950~975년)조에 하사가 계속 이어져 이 절을 받들어 모심이 학사 임민비에게 사적비를 찬술하게 했다

 

임민비(林民庇)는 성품이 침착하고 말이 적으며 확실하고 허식이 없으며, 급박한 사정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무부(武夫)ㆍ한졸(悍卒) 또한 그의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볼 줄 알았다. 그러나 불교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상시 불경을 필사하였다.(고려사절요13, 명종23년, 3월)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강  (0) 2014.08.25
역사강의자료  (0) 2011.08.17
균여대사전  (0) 2007.10.06
탁본과 목판 인쇄법  (0) 2007.09.13
하회마을 답사자료입니다.  (0) 2007.09.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