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文聖王·憲安王·景文王·憲康王·定康王·眞聖王
문성왕·헌안왕·경문왕·헌강왕·정강왕·진성왕
文聖王 立 諱慶膺 神武王太子 母貞繼夫人(一云定宗太后) 八月 大赦 敎曰 “淸海鎭大使弓福 嘗以兵助神考 滅先朝之巨賊 其功烈可忘耶” 乃拜爲鎭海將軍 兼賜章服
문성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경응이니 신무왕의 태자로 어머니는 정계부인(또는 정종태후)이다. 8월 죄수를 크게 풀어주었다. 교서로 말하기를 “청해진대사 궁복은 일찍이 군대로서 아버지 신무왕을 도와 선조의 큰 적을 없애 그 공이 크니 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이에 벼슬을 주어 진해장군을 삼고 겸하여 장복을 내렸다.
二年 春正月 以禮徵爲上大等 義琮爲侍中 良順爲伊湌 自夏四月至六月 不雨 唐文宗勑鴻臚寺 放還質子及年滿合歸國學生 共一百五人 冬 饑
2년(840) 봄 정월 예징을 상대등, 의종을 시중, 양순을 이찬으로 삼았다. 여름 4월부터 6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 나라 문종이 홍려시에 명하여 볼모와 연한을 채워 귀국해야 할 국학생 등 모두 105명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겨울 주렸다.
三年 春 京都疾疫 一吉湌弘弼謀叛 事發逃入海島 捕之不獲 秋七月 唐武宗勑 歸國新羅官 前入新羅 宣慰副使 充兗州都督府司馬 賜緋魚袋金雲卿 可淄州長史 仍爲使 冊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上柱國新羅王 妻朴氏爲王妃
3년(841) 봄 경도(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일길찬 홍필이 반란을 모의하다 이이 발각괴자 도망하여 섬으로 들어갔는데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 무종이 칙명으로 신라에 귀국할 신라 관리로서 앞서 신라에 들어갔던 선위부사 충연주도독부사마로 비어대를 받은 김운경을 치주장사로 임명하고 그대로 사신으로 삼아 왕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사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겸지절충녕해군사 상주국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四年 春三月 納伊湌魏昕之女爲妃
4년(842) 봄 3월 이찬 위흔의 딸을 받아들여 비로 삼았다.
五年 春正月 侍中義琮病免 伊湌良順爲侍中 秋七月 五虎入神宮園
5년(843) 봄 정월 시중 의종이 병으로 면직하고 이찬 양순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호랑이가 신궁의 정원에 들어왔다.
六年 春二月甲寅朔 日有食之 太白犯鎭星 三月 京都雨雹 侍中良順退 大阿湌金茹爲侍中 秋八月 置穴口鎭 以阿湌啓弘爲鎭頭
6년(844) 봄 2월 갑인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태백이 진성을 범하였다. 3월 경도(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시중 양순이 물러나고 대아찬 김여가 시중이 되었다. 가을 8월 혈구진을 두고 아찬 계홍을 진두로 삼았다.
七年 春三月 欲娶淸海鎭大使弓福女爲次妃 朝臣諫曰 “夫婦之道 人之大倫也 故夏以塗山興 殷以㜪氏昌 周以褒姒滅 晉以驪姬亂 則國之存亡 於是乎在 其可不愼乎 今弓福海島人也 其女 豈可以配王室乎” 王從之 冬十一月 雷 無雪 十二月朔 三日並出
7년(845) 봄 3월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아내로 맞아 둘째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도산씨 때문에 흥하였고, 은나라는 신씨 때문에 번창하였습니다. 주나라는 포사 때문에 망하였고, 진나라는 여희 때문에 어지러워졌습니다. 곧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해도인(섬사람)인데 그 딸이 어찌 왕실의 짝이 될 수 있겠습니까?”했다. 왕이 그것을 따랐다. 겨울 11월 우레가 울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 12월 초하루 세 개 해가 나란히 나왔다.
八年 春 淸海弓福 怨王不納女 據鎭叛 朝廷將討之 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 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 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 投淸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8년(846) 봄 정해진의 궁복이 왕이 딸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진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이 장차 토벌하려다 헤아리지 못한 근심이 있을 것을 두렵고, 그대로 두자니 죄를 용서할 수 없어 근심하면서도 도모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무주 사람 염장은 그 때에 용기와 굳셈으로 알려져 있었다. (염장이)와서 고하여 말하기를 “조정에서 다행히 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면 신은 한 사람의 병졸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했다. 왕이 따랐다. 염장이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 하며 청해진에 들어갔다 궁복은 장사를 아꼈으므로 꺼리고 의심하지 않고 인도하여 상객으로 삼아 함께 술을 마시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궁복이) 취함에 이르자 궁복의 검을 빼앗아 머리를 벤 후 그 무리를 불러 달래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九年 春二月 重修平議·臨海二殿 夏五月 伊湌良順 波珍湌興宗等叛 伏誅 秋八月 封王子爲王太子 侍中金茹卒 伊湌魏昕爲侍中
9년(847) 봄 2월 평의, 임해 두 전각을 수리하였다. 여름 5월 이찬 양순, 파진찬 흥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가을 8월 왕자를 봉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시중 김여가 죽으니 이찬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다.
十年 春夏旱 侍中魏昕退 波珍湌金啓明爲侍中 冬十月 天有聲如雷
10년(848)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시중 위흔이 물러나니 파진찬 김계명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하늘에 소리가 있었는데 우레와 같았다.
十一年 春正月 上大等禮徵卒 伊湌義正爲上大等 秋九月 伊湌金式·大昕等叛 伏誅 大阿湌昕鄰緣坐罪
11년(849) 봄 정월 상대등 예징이 죽었다. 이찬 의정을 상대등으로 삼앗다. 가을 9월 이찬 김식, 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어 죽음을 당하였다. 대아찬 흔린이 죄에 연좌되었다.
十二年 春正月 土星入月 京都雨土 大風拔木 赦獄囚殊死已下
12년(850) 봄 정월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경도(서울)에 흙비가 내렸다.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감옥의 죄수들 중 죽을 죄 이하는 풀어주었다.
十三年 春二月 罷淸海鎭 徙其人於碧骨郡 夏四月 隕霜 入唐使阿湌元弘 䝴佛經幷佛牙來 王出郊迎之
13년(851) 봄 2월 청해진을 없애고, 그 사람들은 벽골군으로 옮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렷다. 당 나라에 사신갔던 아찬 원홍이 불경과 불아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이 교외에 나가 맞았다.
十四年 春二月 波珍湌眞亮爲熊川都督 調府火 秋七月 重修鳴鶴樓 冬十一月 王太子卒
14년(852) 봄 2월 파진찬 진양을 웅천주 도독으로 삼았다. 조부에 불이 났다. 가을 7월 명학루를 수리했다. 겨울 11월 왕태자가 죽었다.
十五年 夏六月 大水 秋八月 西南州郡 蝗
15년(853) 여름 6월 큰물이 졌다. 가을 8월 서남쪽 주와 군에 누리 떼가 일었다.
十七年 春正月 發使撫問西南百姓 冬十二月 珍閣省災 土星入月
17년(855) 봄 정월 사자를 내어 서남쪽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위로하였다. 겨울 12월 진각성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十九年 秋九月 王不豫 降遺詔曰 『寡人以眇末之資 處崇高之位 上恐獲罪於天鑑 下慮失望於人心 夙夜兢兢 若涉淵氷 賴三事大夫 百辟卿士 左右挾維 不墜重器 今者 忽染疾疹 至于旬日 怳惚之際 恐先朝露 惟祖宗之大業 不可以無主 軍國之萬機 不可以暫廢 顧惟舒弗邯誼靖 先皇之令孫 寡人之叔父 孝友明敏 寬厚仁慈 久處台衡 挾贊王政 上可以祗奉宗廟 下可以撫育蒼生 爰釋重負 委之賢德 付託得人 夫復何恨 况生死始終 物之大期 壽夭脩短 命之常分 逝者可以達理 存者不必過哀 伊爾多士 竭力盡忠 送往事居 罔或違禮 布告國內 明知朕懷』 越七日 王薨 諡曰文聖 葬于孔雀趾
19년(857) 가을 9월 왕이 병들어 낫지 않았다. 유조를 내려 말하기를 “과인은 보잘 것 없는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얻을까 두렵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에 신망을 잃을까 염려스러워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깊은 연못과 얇은 얼음을 건너는 것과 같았다. 세 가지 일의 대부와 많은 신하가 좌우에서 도와준데 힘입어 왕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금 갑자기 병이 들어 열흘에 이르렀으니 정신없는 사이에 아침 이슬보다 먼저 사라질까 두렵다. 생각건대 조상으로부터 전해져 온 큰 사업에 입금이 없어서는 안 되고, 군사와 정치의 중요한 일들은 잠시도 폐할 수 없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서불한 의정은 선황의 손자이고, 과인의 숙부로 효성과 우애가 있고, 총명하고 민첩하며 너그럽고 인자하다. 오래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를 공경히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돌보아 기를만하다. 이에 무거운 짐을 풀어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맡긴다. 부탁할 사람을 얻었으니 대저 다시 무슨 한이 있으리오. 하물며 나면 죽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음은 만물의 큰 법칙이다. 수명의 길고 짧음은 천명의 떳떳한 분수이니 죽는 것은 이치에 따라 이르는 것이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너희 많은 선비들은 힘을 다하고 충성을 지극히 하고, 죽은 사람을 보내고 산 사람을 섬기는데 혹 예에 어긋나지 말도록 하라. 나라 안에 널리 알려 짐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하라.”했다. 7일을 지나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문성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
憲安王 立 諱誼靖(一云祐靖) 神武王之異母弟也 母照明夫人 宣康王之女 以文聖顧命卽位 大赦 拜伊湌金安爲上大等
헌안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誼靖(또는 祐靖)이다. 신무왕의 이모제이다. 어머니는 조명부인으로 선강왕의 딸이다. 문성왕의 고명으로 즉위하였다. (죄수를)크게 풀어주었다. 이찬 김안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을 삼았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夏四月 降霜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唐城郡南河岸 有大魚出 長四十步 高六丈
2년(858) 봄 정월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 남하 가에 큰 물고기가 나왔는데 길이는 10보이고, 높이는 6장이었다.
三年 春 穀貴人饑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隄防勸農
3년(859)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이 주리니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여름 4월 제방을 수리하여 농사를 권하게 했다.
四年 秋九月 王會羣臣於臨海殿 王族膺廉年十五歲 預坐焉 王欲觀其志 忽問曰 “汝游學有日矣 得無見善人者乎” 答曰 “臣嘗見三人 竊以爲有善行也” 王曰 “何如” 曰 “一高門子弟 其與人也 不自先而處於下 一家富於財 可以侈衣服 而常以麻紵自喜 一有勢榮 而未嘗以其勢加人 臣所見如此” 王聞之默然 與王后耳語曰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意以女妻之 顧謂膺廉曰 “願郞自愛 朕有息女 使之薦枕” 更置酒同飮 從容言曰 “吾有二女 兄今年二十歲 弟十九歲 惟郞所娶” 膺廉辭不獲起拜謝 便歸家告父母 父母言 “聞王二女容色 兄不如弟 若不得已 宜娶其弟” 然尙疑未決 乃問興輪寺僧 僧曰 “娶兄則有三益 弟則反是有三損” 膺廉乃奏 “臣不敢自決 惟王命是從” 於是 王長女出降焉
4년(860) 강을 9월 왕이 여러 신하를 임해전에 모았는데, 왕족 응렴은 15세로 여기에 참여하여 앉아 있었다. 왕이 그 뜻을 보고자하여 갑자기 물어 말하기를 “너는 한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배웠는데 선한 사람을 본 일이 없는가?”했다. (응렴이) 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세 사람을 보았는데 선한 행실이 있다고 여깁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어떤 것인가?”하니 말하기를 “한 사람은 귀한 집안의 자제인데 다른 사람과 함께하면서 스스로를 우선하지 않고, 아래에 처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집안의 재물이 부유하여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수 있음에도 항상 삼베와 모시옷으로도 스스로 기뻐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권세와 영화를 누리고 있음에도 일찍이 그 권세를 다른 사람에게 가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본 바가 이와 같습니다.”했다. 왕이 듣고 묵묵히 말이 없다가 왕후에게 귓속말을 하기를 “짐이 사름을 본 것이 많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하고는 딸을 그의 아내로 삼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응렴을 돌아보며 일러 말하기를 “낭은 스스로를 아끼라. 짐에게는 딸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잠자리를 모시게 할 것이다.”했다. 다시 술을 두고 같이 마시며 조용히 말하기를 “나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언니는 지금 20세이고, 동생은 19세이다. 낭은 오직 장가들고자 하는대로 하라.”했다. 응렴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 일어나 절하여 감사하고는 곧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가 말하기를 “들으니 왕의 두 딸의 용모는 언니가 동생만 못하다 한다. 만약 부득이하면 마땅이 그 동생에게 장가들라.”했다. 그러나 여전히 주저하여 결단하지 못하였다. 이에 흥륜사 중에게 물었더니 중이 말하기를 “언니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고, 동생은 곧 이와 반대로 세 가지 손해가 있습니다.”했다. 응렴이 이에 아뢰기를 “신은 감히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오직 왕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했다. 이에 왕이 장녀(맏딸)를 (응렴애게)시집보냈다.
五年 春正月 王寢疾彌留 謂左右曰 “寡人不幸 無男子有女 吾邦故事 雖有善德·眞德二女主 然近於牝雞之晨 不可法也 甥膺廉 年雖幼少 有老成之德 卿等立而事之 必不墜祖宗之令緖 則寡人死且不朽矣”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5년(861) 봄 정월 왕이 병들어 낫지 않으니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 옛 일로 비록 선덕, 진덕 두 여왕이 있으나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에 가까워 본받을 수 없다. 사위 응렴은 나이가 비록 적으나 노성의 덕이 있으니 경들이 세워 섬기면 반드시 조종의 아름다운 전통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곧 과인이 죽어도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다.”했다. 이달 29일 돌아가시니 시호를 ㅎㄴ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례하였다.
景文王 立 諱膺廉(膺一作疑)
僖康王子啓明阿湌之子也 母曰光和(一云光義)夫人 妃金氏寧花夫人
경문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膺廉(膺은 혹 疑라 쓰기도 한다.) 희강왕의 아들 계명 아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光和(혹은 光義)부인이다. 비는 김씨 영화부인이다.
元年 三月 王御武平門 大赦
1년(861) 3월 왕이 무평문에 거둥하고, (죄수를) 크게 풀어주었다.
二年 春正月 以伊湌金正爲上大等 阿湌魏珍爲侍中 二月 王親祀神宮 秋七月 遣使如唐貢方物 八月 入唐使阿湌富良等一行人 溺沒
2년(862) 봄 정월 이찬 김정을 상대등, 아찬 위진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 당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던 부량 등 일행이 물에 빠져 죽었다.
三年 春二月 王幸國學 令博士已下 講論經義 賜物有差 冬十月 桃李華 十一月 無雪 納寧花夫人弟爲次妃 異日王問興輪寺僧曰 “師前所謂三益者何也” 對曰 “當時 王及王妃喜其如意 寵愛浸深一也 因此 得繼大位二也 卒得娶嚮所求季女三也” 王大笑
3년(863) 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 이하로 하여금 경의를 강론하게 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렸다. 겨울 10월 복숭아, 오얏꽃이 피었다. 11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의 동생을 들여 차비로 삼았다. 다른 날 왕이 흥륜사 중에게 물어 말하기를 “스님이 앞에서 이른 바 세 가지 이익은 무엇이니까?”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당시에 왕과 왕비가 뜻과 같음을 기뻐하여 총애가 점점 깊어짐이 하나이고, 이 때문에 대위(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 둘이고, 마침내 구하던 바 둘째 딸을 아내로 얻은 것이 세 번 째입니다.”했다. 왕이 크게 웃었다.
四年 春二月 王幸感恩寺望海 夏四月 日本國使至
4년(864) 봄 2월 왕이 감은사에 거둥하여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름 4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다.
五年 夏四月 唐懿宗降使太子右諭德御史中丞胡歸厚 使副光祿主簿兼監察御史裴光等 弔祭先王 兼賻贈一千匹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上柱國新羅王 仍賜王官誥一道·旌節一副·錦綵五百匹·衣二副·金銀器七事 賜王妃錦綵五十匹·衣一副·銀器二事 賜王太子錦綵四十匹·衣一副·銀器一事 賜大宰相錦綵三十匹·衣一副·銀器一事 賜次宰相錦綵二十匹·衣一副·銀器一事
5년(865) 여름 4월 당 나라 의종이 사신 태자우유덕 어사중승 호귀후, 부사 광록주부 겸감찰어사 배광 등을 보내 선왕을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고 겸하여 1천필을 부의하였으며,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지절대도독 계림주제군사 상주국신라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관고 1통, 정절 1벌, 채색 비단 500필, 옷 2벌, 금은 그릇 1개를 내려주었다. 왕비에게는 채객 비단 50필, 옷 한 벌, 은그릇 2개를 내리고, 왕태자에게는 채색 비단 40필, 오 한 벌, 은그릇 1개를 내려주고, 대재상에게는 채색비단 30필, 옷 한 벌, 은그릇 1개를 내리고, 차재상에게는 채색비단 20필, 옷 한 벌, 은그릇 1개를 내렸다.
六年 春正月 封王考爲懿恭大王 母朴氏光和夫人爲光懿王太后 夫人金氏爲文懿王妃 立王子晸爲王太子 十五日 幸皇龍寺看燈 仍賜燕百寮 冬十月 伊湌允興與弟叔興·季興謀逆 事發覺 走岱山郡 王命追捕斬之 夷一族
6년(866) 봄 정월 왕의 아버지를 봉해 의공대왕이라 하고, 어머니 박씨 관화부인은 광의왕태후라 했다. 부인 김씨는 문의왕비라 하고, 왕자 정을 세워 왕태자라 했다. 15일 황룡사에 거둥하여 등을 보고, 관료들에게 잔치를 내렸다. 겨울 10월 이찬 윤흥과 숙흥, 계흥이 역모를 꾀하다 일이 발각되자 대산군으로 달아났다. 왕이 추격하여 잡아 목 베어 죽이고, 일족을 멸하였다.
七年 春正月 重修臨海殿 夏五月 京都疫 秋八月 大水 穀不登 冬十月 發使分道撫問 十二月 客星犯太白
7년(867) 봄 정월 임해전을 거듭 수리하였다. 여름 5월 경도(서울)에 전염병이 있었다. 가을 8월 큰물이 지고 곡식이 익지 않았다. 경ㄹ 10월 사자를 내어 길을 나누어 위문하게 했다. 12월 객성이 태백을 범하였다.
八年 春正月 伊湌金銳·金鉉等謀叛 伏誅 夏六月 震皇龍寺塔 秋八月 重修朝元殿
8년(868) 봄 정월 이찬 김예, 김현 등이 모반하다 죽을을 당하였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이 흔들렸다. 가을 8월 조원전을 중수하였다.
九年 秋七月 遣王子蘇判金胤等入唐 謝恩兼進奉馬二匹·麩金一百兩·銀二百兩·牛黃十五兩·人蔘一百斤·大花魚牙錦一十匹·小花魚牙錦一十匹·朝霞錦二十匹·四十升白疊毛布四十匹·三十升紵衫段四十匹·四尺五寸頭髮百五十兩·三尺五寸頭髮三百兩·金釵頭五色綦帶幷班胸各一十條·鷹金鏁鏇子幷紛鎝紅幍二十副·新樣鷹金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鷹銀鏁鏇子紛鎝紅幍二十副·新樣鷹銀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鷂子金鏁鏇子紛鎝紅幍二十副·新樣鷂子金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鷂子銀鏁鏇子紛鎝紅幍二十副·新樣鷂子銀鏁鏇子紛鎝五色幍三十副·金花鷹鈴子二百顆·金花鷂子鈴子二百顆·金鏤鷹尾筒五十雙·金鏤鷂子尾筒五十雙·銀鏤鷹尾筒五十雙·銀鏤鷂子尾筒五十雙·繫鷹緋纈皮一百雙·繫鷂子緋纈皮一百雙·瑟瑟鈿金針筒三十具·金花銀針筒三十具·針一千五百 又遣學生李同等三人 隨進奉使金胤入唐習業 仍賜買書銀三百兩
9년(869) 가을 8월 왕자 소판 김윤 등을 보내 당 나라에 들어 가 은혜에 감사하고, 겸하여 말 2필, 부금 100냥, 은 200냥, 우황 15냥, 인삼 100근, 대화어아금 10필, 조화금 20필, 사십승백첩모포 40필, 삼십승저삼단 40필, 4자5치 두발 510냥, 3자 5치 두발 300냥, 금차두오색기대와 반흉 각 10조, 응금쇄선자와 분삽홍도 20부, 신양응금쇄선자분삽오새도 30부, 응은쇄선자분삽홍도 20부, 신양응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부, 요자금쇄선자분삽홍도 20부, 신양요자금쇄선자분삽오색도 30부, 요자은쇄선자분삽홍도 20부, 신양요자은쇄선자분삽오색도 30부, 금화응령자 200과, 금화요자령자 200과, 금루응미통 50쌍, 금루요자미통 50쌍, 은루응미통 50쌍, 은루요자미통 50쌍, 계응비힐피 100쌍, 계요자비힐피 100쌍, 슬슬전금침통 30구, 금화은침통 30구, 침 1,500개를 바쳤다. 또 학생 이동 등 세 사람을 보냈는데 물건을 바치는 사신 김윤을 따라 당 나라에 들어 가 학업을 닦게 하고, 책 살 돈으로 은 300냥을 내렸다.
十年 春二月 遣沙湌金因入唐宿衛 夏四月 京都地震 五月 王妃卒 秋七月 大水 冬 無雪 國人多疫
10년(870) 봄 2월 사찬 김인을 보내 당 나라에 들어 가 숙위하게 했다. 여름 4월 경도(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5월 왕비가 죽었다. 가을 7월 큰물이 졌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고, 나라사람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十一年 春正月 王命有司 改造皇龍寺塔 二月 重修月上樓
11년(871) 봄 정월 왕이 담당관청에 명하여 황룡사 탑을 고쳐 지었다. 2월 월상루를 중수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夏四月 京師地震 秋八月 國內州郡 蝗害穀
12년(872) 봄 2월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여름 4월 경사(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나라 안 주와 군에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쳤다.
十三年 春 民饑且疫 王發使賑救 秋九月 皇龍寺塔成九層 高二十二丈
13년(873) 봄 백성들이 주리고, 전염병이 있었다. 왕이 사자를 내어 구휼하였다. 가을 9월 황룡사탑 9층을 완성하였는데 높이 22장이었다.
十四年 春正月 上大等金正卒 以侍中魏珍爲上大等 藺興爲侍中 夏四月 唐僖宗降使宣諭 五月 伊湌近宗謀逆犯闕 出禁軍擊破之 近宗與其黨夜出城 追獲之車裂 秋九月 重修月正堂 崔致遠在唐登科
14년(874) 봄 정월 상대등 김정이 죽었다. 시중 위진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곽흥을 시중으로 삼았다. 여름 4월 당 나라 희종이 사신을 보내 유지를 선포하였다. 5월 이찬 근종이 역모를 모의하여 궁궐을 범하니 금꾼을 내어 쳐서 깨트렸다. 근종과 그 무리들이 밤에 성을 나가니 좇아 가 잡아 거열형에 처하였다. 가을 9월 월정당을 중수하였다. 최치원이 당 나라에 있으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京都及國東 地震 星孛于東 二十日乃滅 夏五月 龍見王宮井 須臾雲霧四合飛去 秋七月八日 王薨 諡曰景文
15년(875) 봄 2월 경도(서울)와 나라 동쪽에 지진이 있었다. 성패(살별)가 동쪽에 나타났다가 20일에 사라졌다. 여름 5월 용이 왕궁 우물에 나타났는데 잠간사이에 사방에 구름과 안개가 끼면서 날아갔다. 가을 7월 8일 왕이 돌아가시고, 경문이라 시호했다.
憲康王 立 諱晸 景文王之太子 母文懿王后 妃懿明夫人 王性聰敏 愛看書 目所一覽 皆誦於口 卽位 拜伊湌魏弘爲上大等 大阿湌乂謙爲侍中 大赦內外殊死已下
헌강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정이니 경문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이고, 왕비는 의명부인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글보는 것을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본 것안 모두 입으로 외웠다. 왕위에 오르자 이찬 위홍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을 삼고, 대아찬 예겸을 시중으로 삼았다. 내외의 죄수 증 죽을죄 이하를 풀어주었다.
二年 春二月 皇龍寺齋僧 設百高座講經 王親幸聽之 秋七月 遣使入唐貢方物
2년(876) 봄 2월 황룡사에서 승려들에게 재를 베풀었다. 백고좌회를 열어 불경을 강설하였는데 왕이 직접 거둥하여 들었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당 나라에 들어 가 토산물을 바쳤다.
三年 春正月 我太祖大王 生於松岳郡
3년(877) 봄 정월 우리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四年 夏四月 唐僖宗降使 冊封王爲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大都督雞林州諸軍事新羅王 秋七月 遣使朝唐 聞黃巢賊起 乃止 八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朝元殿
4년(878) 여름 4월 당 나라 희종이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사지절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위 대도독계림주제군사 신라왕을 삼았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당 나라에 조회하하려다 황소 도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그만두었다. 8월 일본국 사신이 이르니 왕이 조원정에 불러 접견하였다.
五年 春二月 幸國學 命博士已下講論 三月 巡幸國東州郡 有不知所從來四人 詣駕前歌舞 形容可駭 衣巾詭異 時人謂之山海精靈(古記謂 王卽位元年事) 夏六月 一吉湌信弘叛 伏誅 冬十月 御遵禮門觀射 十一月 獵穴城原
5년(879) 봄 2월 국학에 거둥하여 박사 이하에게 강론을 명하였다. 3월 나라 동쪽 주와 군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는 4 사람이 있어 왕의 가마 앞에 나아가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모습이 놀랄만하고, 옷과 두건이 괴이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그들을 일러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했다.(고기에 이르기를 “왕의 즉위 1년의 일이다.”했다.) 여름 6월 일길찬 신홍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죽음을 당하였다. 겨울 10월 준례문에 거둥하여 활쏘기를 보았다. 11월 혈성의 들에서 사냥하였다.
六年 春二月 太白犯月 侍中乂謙退 伊湌敏恭爲侍中 秋八月 熊州進嘉禾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嘗聞之如此” 因奏曰 “上卽位以來 陰陽和風雨順 歲有年民足食 邊境謐靜 市井歡娛 此聖德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德焉”
6년(880) 봄 2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시중 예겸이 물러나니 이찬 민공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8월 웅주에서 낟알이 많은 벼를 올렸다. 9월 9일 왕과 좌우가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다. 경도(서울) 백성들의 집이 서로 이어지고, 노래 부르는 소리가 연이었다. 왕이 돌아보며 시중 민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지금 백성들 사이에서 집은 기와를 덮고, 띠풀로 하지 않고, 숯으로 밥을 짓고 섶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했다. 민공이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또한 일찍이 이 같이 들었습니다.”하고는 아뢰어 말하기를 “상(왕이)이 즉위한 이래로 음과 양이 조화롭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기에 충분하였다.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스러운 덕의 소치입니다.”했다. 왕이 흡족하여 말하기를 “이는 경들이 도와준 힘이지 짐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했다.
七年 春三月 燕羣臣於臨海殿 酒酣上鼓琴 左右各進歌詞 極歡而罷
7년(881) 봄 3월 여러 신하들과 임해전에서 잔치를 열고, 술이 얼큰해지자 임금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좌우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그쳤다.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 明珠一十箇 冬十二月 枯彌縣女 一産三男
8년(882) 여름 4월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 명주 10개를 올렸다. 겨울 12월 고미현의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九年 春二月 王幸三郞寺 命文臣 各賦詩一首
9년(883) 봄 2월 왕이 삼랑사에 거둥하여 문신으로 하여금 각각 시 1수를 짓게 하였다.
十一年 春二月 虎入宮庭 三月 崔致遠還 冬十月壬子 太白晝見 遣使入唐 賀破黃巢賊
11년(885) 봄 2월 호랑이가 궁궐 뜰에 들어왔다. 3월 최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사신을 보내 당 나라에 들어 가 황소 도적을 격파한 것을 축하하였다.
十二年 春 北鎭奏 狄國人入鎭 以片木掛樹而歸 遂取以獻 其木書十五字云 『寶露國與黑水國人 共向新羅國和通』 夏六月 王不豫 赦國內獄囚 又於皇龍寺 設百高座講經 秋七月五日 薨 諡曰憲康 葬菩提寺東南
12년(886) 봄 북진에서 아뢰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 와 나무 판을 나무에 걸고 돌아갔습니다.”하고는 마침내 가져다 바쳤다. 그 나무에 쓰인 글이 15자가 있었는데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이 같이 신라국과 화친을 통하겠다.”했다. 여름 6월 왕의 병이 편하지 않아 나라 안 감옥에 갖힌 죄수를 풀어주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베풀고 불경을 강설하게 했다. 가을 7월 5일 돌아가시니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 동남쪽에 장례하였다.
定康王 立 諱晃 景文王之第二子也 八月 拜伊湌俊興爲侍中 國西旱且荒
정강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황이고,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다. 8월 이찬 준흥에게 벼슬을 주어 시중을 삼았다. 나라 서쪽이 가물고 또한 흉년이 들었다.
二年 春正月 設百座於皇龍寺 親幸聽講 漢州伊湌金蕘叛 發兵誅之 夏五月 王疾病 謂侍中俊興曰 “孤之病革矣 必不復起 不幸無嗣子 然妹曼天資明銳 骨法似丈夫 卿等宜倣善德·眞德古事 立之可也” 秋七月五日 薨 諡曰定康 葬菩提寺東南
2년(887) 봄 정월 황룡사에서 백고좌회를 베풀었는데 직접 거둥하여 강론을 들었다. 한주 이찬 김요가 배반하므로 군대를 내어 죽였다. 여름 5월 왕이 병에 걸려 시중 준흥에게 이르기를 “나의 병이 위태로우니 반드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을 아들은 없으나 여동생 만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뼈대가 장부와 비슷하니 경들은 마땅히 선덕과 진덕의 옛일을 본받아 세우는 것이 좋다.”했다. 가을 7월 5일 돌아가시니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 남쪽에 장례하였다.
眞聖王 立 諱曼 憲康王之女弟也(崔致遠文集第二卷 謝追贈表云 『臣坦言 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太傅』 又納旌節表云 『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生未周晬 臣仲兄晃權統藩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 以此言之 景文王諱凝 本紀則云 『膺廉』 眞聖王諱坦 本紀則云 『曼』 又定康王晃以光啓三年薨 本紀謂 『二年薨』 皆不知孰是) 大赦 復諸州郡一年租稅 設百座皇龍寺 親幸聽法 冬無雪
진성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만이고, 헌강왕의 여동생이다. 최치원의 문집 제2권 〈사추증표〉에 “신 탄은 말씀을 올립니다. 엎드려 칙지를 받음에, 죽은 아버지 신 응을 추증하여 태사로 삼고, 죽은 형 신 정을 태부로 삼는다.”했고, 또 〈납정절표〉에 “신의 큰 형 국왕 정은 지난 광계 3년 7월 5일 갑자기 성대를 버렸고, 신의 조카 요는 난지 아직 돌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의 둘째형 황이 임시로 변방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또한 1년이 지나지 않아 밝은 세상을 떠나 멀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했다. 이로써 말하면 경문왕의 이름은 凝(응)인데 신라본기에는 “膺廉(응렴)”이라 하고, 진성왕의 이름은 坦(탄)인데 신라본기에는 “曼(만)”이라 하였다. 또 정강왕 황은 “광계 3년에 죽었다.”하였는데 신라본기에 “2년에 죽었다.”고 말하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죄수를)크게 풀어주었다. 여러 주와 군의 조세를 1년동안 면제해 주었다. 황룡사에서 백좌회를 베풀고 직접 거둥하여 불법을 들었다.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及魏弘卒 追諡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 淫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 侫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壞弛 時有無名子 欺謗時政 構辭 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2년(888) 봄 2월 사량리의 돌이 저절로 갔다. 왕이 평소 각간 위홍과 정을 통해 왔는데 이에 이르러 항상 안으로 들어 와 일을 처리하였다. 이에 명하여 대구화상과 향가를 수집하게 하고, 《삼대목》이라 블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 추시하였다. 이후 몰래 나이어린 남자 두 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는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 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말 잘하는(아첨하는)이들이 뜻을 함부로 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상벌이 공정하지 않아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 그 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이 그 때의 정치를 속이고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정에 들어가는 길에 붙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수색하게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隱者巨仁耶”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巨仁憤怨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其夕 忽雲霧震雷雨雹 王懼 出巨仁放歸 三月戊戌朔 日有食之 王不豫 錄囚徒 赦殊死已下 許度僧六十人 王疾乃瘳 夏五月 旱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문인으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한 것입니다. 나마도 이는 대야주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인 거인일 것입니다.”했다. 왕이 거인을 묶어서 서울의 감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집행하려 하였다. 거인이 분하고 원통하여 감옥 벽에 글을 써서 말하기를 “우공이 통곡하니 3년간 가물었고, 추연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다. 지금 내가 가슴 속 깊이 품은 근심은 옛날과 비슷한데 하늘은 말없이 푸르기만 하구나”했다. 그 날 저녁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우레와 우박이 내리니 왕이 두려워하여 거인을 나오게 하여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3월 무술 초하루 일식이 잇었다. 왕 이 병들어 낫지 않자 죄수를 조사하여 죽을 죄 이하는 풀어 주었다. 60명이 중이되게 허락하였더니 왕의 병이 나았다. 여름 5월 가물었다.
三年 國內諸州郡 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 所在盜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 據沙伐州叛 王命奈麻令奇捕捉 令奇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 力戰死之 王下勑斬令奇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3년(889) 나라 안 여러 주와 군이 조세를 운반하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다.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자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원종, 애노 등이 사벌주를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나마 영기에게 잡게 하였는데 영기가 적의 보루를 바라보고는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못하였다. 촌주 우련이 힘써 싸우다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목 베어 죽이고, 우련의 아들은 나이가 10여세였는데 계승하여 촌주가 되게 했다.
四年 春正月 日暈五重 十五日 幸皇龍寺看燈
4년(890)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겹으로 둘러졌다. 15일 황룡사에 거둥하여 등을 보았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 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5년(891) 겨울 10월 북원의 적수 양길이 그 보좌 궁예를 보내 100여기를 거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 주천 등 10여 군과 현을 습격하게 했다.
六年 完山賊甄萱據州 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
6년(892) 완산의 적 견훤이 주를 차지하고, 스스로 후백제라 일컬었는데 무주 동남의 군현이 항복하여 소속되었다.
七年 遣兵部侍郞金處誨 如唐納旌節 沒於海
7년(893) 병부시랑 김처회를 보내 당 나라에 들어 가 정절을 바치게 하였는데 바다에 빠져 죽었다.
八年 春二月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 王嘉納之 拜致遠爲阿湌 冬十月 弓裔自北原 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 自稱將軍
8년(894) 봄 2월 최치원이 시무 10여조를 올리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최치원에게 벼슬을 주어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에 들어갔는데 무리가 600여명에 이르렀으며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九年 秋八月 弓裔擊取猪足·狌川二郡 又破漢州管內夫若·鐵圓等十餘郡縣 冬十月 立憲康王庶子嶢爲太子 初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 姿質佳麗 王心愛之 命後車載 到帷宮野合 卽有娠而生子 及長體貌魁傑 名曰嶢 眞聖聞之 喚入內 以手撫其背曰 “孤之兄弟姉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仍命有司 備禮封崇
9년(895) 가을 8월 궁예가 저족, 생천 두 군을 쳐서 빼앗고, 또 한주 관내 부약, 철원 등 10여 군현을 깨트렸다.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처음 놀며 사냥을 가는 길옆의 한 여자를 보았는데 자태와 재능이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으로 아껴서 뒷 수레에 태우게 하고 임시 궁궐에 이르러 야합하였다. 곧 임신함이 있어서 아들을 낳았다. 자라면서 몸의 모습이 뛰어나 이름을 요라 했다. 진성왕이 듣고 안으로 불러들여 손으로 그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나의 형제·자매들은 골법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이 아이는 등 위 우뚝 일어났으니 참으로 헌강왕의 아들이다.”하고는 담당관청에 명하여 예를 갖추어 봉하고 높이라. 했다.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10년(896) 도적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 바지를 붉게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과 다르게 했다. 사람들이 적고적이라 일렀다. 주와 현을 무찔러 해치고, 서울 서부 모량리에 이르기까지 민가를 약탈하고 갔다.
十一年 夏六月 王謂左右曰 “近年以來 百姓困窮 盜賊蜂起 此孤之不德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禪位於太子嶢 於是 遣使入唐表奏曰 『臣某言 居羲仲之官 非臣素分 守延陵之節 是臣良圖 以臣姪男嶢 是臣亡兄晸息 年將志學 器可興宗 不假外求 爰從內擧 近已俾權藩寄 用靖國災』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11년(897) 여름 6월 왕이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어진 이에게 자리를 피하여 왕위를 양보하려는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하고는 태자 요에게 왕의 자리 물려주었다. 이에 사신을 보내 당 나라에 들어 가 표를 올려 아뢰어 말하기를 “신 아무개는 말합니다. 희중의 관직은 신의 직분이 아닙니다. 연릉의 절조를 지키는 이것이 신의 좋은 방책입니다. 신의 조카 요는 신의 죽의 형 정의 자식으로 나이는 거의 15세가 되었고, 자질이 종사를 일으킬만하므로 밖에서 구하여 데려오지 않고, 이에 안으로부터 천거하였습니다. 근래에 이미 임시로 정사를 하게 하여 나라의 재앙을 진정시켰습니다.”했다. 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진성이라 시호하고, 황산에 장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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