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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by 최인표 2024. 1. 3.

三國史記 卷第十二 新羅本紀 第十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孝恭王·神德王·景明王·景哀王·敬順王

효공왕·신덕왕·경명왕·경애왕·경순왕

 

孝恭王 立 諱嶢 憲康王之庶子 母金氏 大赦 增文武百官爵一級

효공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요이고, 헌강왕의 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이다. (죄수를)크게 풀어주었다. 문무박관의 벼슬을 1급씩 더하였다.

 

二年 春正月 尊母金氏爲義明王太后 以舒弗邯俊興爲上大等 阿湌繼康爲侍中 秋七月 弓裔取浿西道 及漢山州管內三十餘城 遂都於松岳郡

2(898) 봄 정월 어머니 김씨를 높여 의명왕태후라 하고, 서불한 준흥을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계강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성을 빼앗고, 마침내 송악군에 도읍하였다.

 

三年 春三月 納伊湌乂謙之女爲妃 秋七月 北原賊帥梁吉 忌弓裔貳己 與國原等十餘城主 謀攻之 進軍於非惱城下 梁吉兵潰走

3(899) 3월 이찬 예겸의 딸을 받아들여 비로 삼았다. 가을 7월 북원의 도적 우두머리 양길이 궁예가 자기를 배반하는 것을 꺼려하여 국원 등 10여 성주와 함께 공격을 도모하고 진군하여 비뇌성 아래에서 양길의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四年 冬十月 國原·靑州·槐壤賊帥淸吉·莘萱等 擧城投於弓裔

4(900) 겨울 10월 국원, 청주, 괴양의 도적 우두머리 청길, 신훤 등이 성을 들어 궁예에게 들어 갔다.

 

五年 弓裔稱王 秋八月 後百濟王甄萱 攻大耶城 不下 移軍錦城之南 奪掠沿邊部落而歸

5(901) 궁예가 왕을 일컬었다. 가을 8월 후백제 왕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느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대를 금성의 남쪽으로 옮겼는데 연변의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六年 春三月 降霜 以大阿湌孝宗爲侍中

6(902) 3월 서리가 내렸다.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七年 弓裔欲移都 到鐵圓·斧壤 周覽山水

7(902) 궁예가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 철원, 부양에 이르러 산수를 두루 살펴보았다.

 

八年 弓裔設百官 依新羅制(所制官號 雖因羅制殿 有異者)國號摩震 年號武泰元年 浿江道十餘州縣 降於弓裔

8(903) 궁예가 백관을 설치하였는데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였다.(제정한 관직의 이름은 비록 신라의 제도를 따랐으나 다른 것도 있었다.) 나라 이름을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 1년이라 하였다. 패강도 10여주와 현이 궁예에게 항복하였다.

 

九年 春二月 星隕如雨 夏四月 降霜 秋七月 弓裔移都於鐵圓 八月 弓裔行兵 侵奪我邊邑 以至竹嶺東北 王聞疆埸日削 甚患 然力不能禦 命諸城主 愼勿出戰 堅壁固守

9(904) 2월 별이 비처럼 떨어졌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궁예가 도읍을 철원으로 옯겼다. 8월 궁예가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의 변경 읍을 침범하고 빼앗았다. 죽령 동북쪽에 이르렀다. 왕은 나라의 강역이 날로 깍이는 것을 듣고 매우 근심하였으나 힘으로 막을 수 없어 여러 성주에게 삼가고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굳건히 하여 지키게 혀였다

 

十年 春正月 以波珍湌金成爲上大等 三月 前入唐及第金文蔚 官至工部員外郞沂王府諮議叅軍 充冊命使而還 自夏四月至五月 不雨

10(905) 봄 정월 파진찬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앞서 당 나라에 들어 가 급제한 김문울은 관직이 공부원외랑 근왕부자의참군에 이르렀는데 책명사에 충당되어 돌아왔다. 여름 4월부터 5월에 이르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十一年 春夏 無雨 一善郡以南十餘城 盡爲甄萱所取

11(906) ,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일선군 이남 10여 성이 모두 견훤에게 빼앗겼다.

 

十二年 春二月 星孛于東 三月 隕霜 夏四月 雨雹

12(907) 2월 성패가 동쪽에 나타났다. 3월 서리가 내렸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十三年 夏六月 弓裔命將領兵舡 降珍島郡 又破皐夷島城

13(908) 여름 6월 궁예가 병선을 거느리고 가 진도군을 항복시키고, 또 고이도성을 깨트렸다.

 

十四年 甄萱躬率步騎三千 圍羅州城 經旬不解 弓裔發水軍 襲擊之 萱引軍而退

14(909)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천을 통솔하고 나주성을 에워쌌는데 10일이 지나도 풀지 않았다. 궁예가 수군을 동원하여 습격하니 견훤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十五年 春正月丙戌朔 日有食之 王嬖於賤妾 不恤政事 大臣殷影諫 不從 影執其妾殺之 弓裔改國號泰封 年號水德萬歲

15(910) 봄 정월 병술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왕이 천첩을 사랑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으니 대신 은영이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은영이 그 첩을 잡아 죽였다. 궁예가 나라 이름을 고쳐 태봉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였다.

 

十六年 夏四月 王薨 諡曰孝恭 葬于師子寺北

16(911) 여름 4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효공이라 하고, 사자사 북쪽에 장례하였다.

 

神德王 立 姓朴氏 諱景暉 阿達羅王遠孫 父乂兼(一云銳謙) 事定康大王 爲大阿湌 母貞和夫人 妃金氏 憲康大王之女 孝恭王薨 無子 爲國人推戴卽位

신덕왕이 즉위하였다. 성은 박씨이니 이름은 경휘로 아달라왕의 먼 자손으로 아버지는 乂兼(또는 銳謙이라 한다.)이다. 정강대왕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다. 어머니는 정화부인이고, 비는 김씨로 헌강대왕의 딸이다. 효공왕이 돌아가신 후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元年 五月 追尊考爲宣聖大王 母爲貞和太后 妃爲義成王后 立子昇英爲王太子 拜伊湌繼康爲上大等

1(912) 5월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여 선성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는 정화태후라 하고, 비는 의성왕후이다. 아들 승영을 세워 왕태자로 세웠다. 이찬 계강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았다.

 

二年 夏四月 隕霜 地震

2(913) 여름 4월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있었다.

 

三年 春三月 隕霜 弓裔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3(914) 3월 서리가 내렸다. 궁예가 수덕만세를 고쳐 정개 1년이라 햇다.

 

四年 夏六月 槧浦水與東海水相擊 浪高二十丈許 三日而止

4(915) 여름 6월 참포의 물과 동해의 물이 서로 쳤는데 물결의 높이가 20장 정도였는데 3일 만에 그쳤다.

 

五年 秋八月 甄萱攻大耶城 不克 冬十月 地震 聲如雷

5(916) 가을 8월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레 같았다.

 

六年 春正月 太白犯月 秋七月 王薨 諡曰神德 葬于竹城

6(917) 봄 정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죽성에 장례하였다.

 

景明王 立 諱昇英 神德王之太子 母義成王后

경명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승영이고, 신덕왕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의성왕후이다.

 

元年 八月 拜王弟伊湌魏膺爲上大等 大阿湌裕廉爲侍中

1(917) 8월 왕의 동생 이찬 위응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유겸을 사중으로 삼았다.

 

二年 春二月 一吉湌玄昇叛 伏誅 夏六月 弓裔麾下人心忽變 推戴太祖 弓裔出奔 爲下所殺 太祖卽位 稱元 秋七月 尙州賊帥阿玆盖 遣使降於太祖

2(918) 2월 일길찬 현승이 반란을 일으키다 죽음을 당하였다. 여름 6월 궁예 휘하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를 추대하였다. 궁예가 나와 달아나다 아랫사람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1년을 일컬었다. 가을 7월 상주의 도적 우두머리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三年 四天王寺塑像所執弓弦自絶 壁畫狗子 有聲若吠者 以上大等金成爲角湌 侍中彦邕爲沙湌 我太祖移都松岳郡

3(919) 사천왕사 진흙불상이 잡고 있던 활의 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개 그림에서 소리가 났는데 짖는 것 같았다. 상대등 김성을 각찬이라 하고, 시중 언옹을 사찬으로 삼았다. 우리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四年 春正月 王與太祖交聘修好 二月 康州將軍閏雄 降於太祖 冬十月 後百濟主甄萱 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進軍於進禮 王遣阿湌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命將出師救之 萱聞乃去

4(920) 봄 정월 왕과 태조가 사신을 주고, 받으며 우호를 닦았다. 2월 강주장군 규웅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겨울 10월 후백제 임금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통솔하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로 진군하였다. 왕이 아찬 김율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구원하니 견훤이 듣고 이에 갔다.

 

五年 春正月 金律告王曰 臣往年奉使高麗 麗王問臣曰 聞新羅有三寶 所謂丈六尊像·九層塔幷聖帶也 像塔猶存 不知聖帶今猶在耶臣不能答王聞之 問羣臣曰 聖帶是何寶物耶無能知者 時有皇龍寺僧 年過九十者曰 予嘗聞之 寶帶是眞平大王所服也 歷代傳之 藏在南庫王遂令開庫 不能得見 乃以別 日齋祭 然後見之 其帶粧 以金玉甚長 非常人所可束也

5(921) 봄 정월 김율이 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지난 해 고려에 사신을 갔을 때 고려왕이 신에게 물어 말하기를 신라에는 삼보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른 바 장육종상, 구층탑과 성대라 한다. 불상과 탑은 아직 있는데 성대는 지금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하였는데 신이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 말하기를 성대는 어떤 보물인가?”하였는데 아는 자가 없었다. 그 때 황룡사의 중으로 나이가 90을 넘은 자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보배로운 띠는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입니다. 대를 지나 전해져 남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게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다른 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를 지낸 후 보게 되었다. 그 띠는 금과 옥으로 꾸몄는데 매우 길어 보통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論曰古者坐明堂 執傳國璽 列九鼎 其若帝王之盛事者也 而韓公論之曰 歸天人之心 興太平之基 決非三器之所能也 竪三器而爲重者 其誇者之詞耶若此新羅所謂三寶 亦出於人爲之侈而已 爲國家 何須此耶 孟子曰 諸侯之寶三 土地·人民·政事楚書曰 楚國無以爲寶 惟善以爲寶若此者 行之於內 足以善一國 推之於外 足以澤四海 又何外物之足云哉 太祖聞羅人之說而問之耳 非以爲可尙者也 二月 靺鞨別部達姑衆 來寇北邊 時太祖將堅權鎭朔州 率騎擊大破之 匹馬不還 王喜 遣使移書 謝於太祖 夏四月 京都大風拔樹 秋八月 蝗旱

논하여 말한다. 옛날 명당에 앉아 나라에 전해지는 인장을 잡고, 9정을 진열해 놓는 것을 마치 제왕의 성대한 일인 것처럼 하였다. 한공이 그것을 논하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고, 태평의 터전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 가지 기물을 세워놓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그 과시하려는 자의 말이 아니까?” 만약 이 신라의 이른 바 세 가지 보배라는 것 또한 인위적인 사치에서 나온 것일 뿐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어찌 이것을 필수적인 것이라 하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제후의 보배는 세 가지인데 토지, 인민, 정사이다.”했고, 초사에는 초나라는 보배로 여기는 것이 없고, 오직 선함을 보배로 삼는다.”하였다. 이 같은 것을 안에서 그것을 행한다면 충분히 한 나라를 착하게 할 수 있다. 밖에서 그것을 미루면 사해를 윤택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 그 밖에 무슨 물건을 말한 것인가? 태조는 신라 사람의 말을 듣고 물었을 뿐이지 숭상할만 하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2월 말갈 별부 달고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 노략질하였다. 그 때 태조의 장수 견권이 삭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통솔하고 쳐서 크게 깨트려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글을 전해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여름 4월 경도(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뽑았다. 가을 8월 누리 떼가 일고, 가물었다.

 

 

六年 春正月 下枝城將軍元逢·溟州將軍順式 降於太祖 太祖念其歸順 以元逢本城爲順州 賜順式姓曰王 是月 眞寶城將軍洪述 降於太祖

6(922) 봄 정월 하지성 장군 원봉, 명주 장군 순식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이 귀순한 것을 생각하여 원봉의 본성을 순주라 하고, 순식에게 성을 내려 왕이라 했다. 이 달 진보성 장군 홍술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七年 秋七月 命旨城將軍城達·京山府將軍良文等 降於太祖 王遣倉部侍郞金樂·錄事叅軍金幼卿 朝後唐貢方物 莊宗賜物有差

7(923) 가을 7월 명지성 장군 성달, 경산부 장군 양문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왕이 창부시랑 김악과 녹사 참군 김유경을 보내 후당에 조회하니 장종이 물건내리기를 차등있게 하였다.

 

八年 春正月 遣使入後唐朝貢 泉州節度使王逢規 亦遣使貢方物 夏六月 遣朝散大夫倉部侍郞金岳 入後唐朝貢 莊宗授朝議大夫試衛尉卿 秋八月 王薨 諡曰景明 葬于黃福寺北 太祖遣使弔祭

8(924) 봄 정월 사신을 보내 후당에 들어 가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 왕봉규가 또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6월 조산대부 창부시랑 김악을 보내 후당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니 장종이 조의대부시위위경을 주었다. 가을 8월 왕이 돌아가시니 경명이라 시호하고, 황복사 북쪽에 장례하였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景哀王 立 諱魏膺 景明王同母弟也

경애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위응으로 경명왕의 동생이다.

 

元年 九月 遣使聘於太祖 冬十月 親祀神宮 大赦

원년(924) 9월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겨울 10월 직접 신궁에 제사하고 (죄수)를 크게 풀어주었다.

 

二年 冬十月 高鬱府將軍能文 投於太祖 勞諭還之 以其城迫近新羅王都故也 十一月 後百濟主甄萱 以姪眞虎 質於高麗 王聞之 使謂太祖曰 甄萱反覆多詐 不可和親太祖然之

2(925) 겨울 10월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들어가니 위로하고 깨우쳐 돌려보냈는데 그 성이 신라 왕도(서울)와 가깝기 때문이다. 11월 후백제 임금 견훤이 조카 진호를 고려에 볼모로 하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견훤이 반복하여 속임이 많으니 화친해서는 안 됩니다.”하니 태조가 그렇다 여겼다.

 

三年 夏四月 眞虎暴死 萱謂 高麗人故殺怒擧兵 進軍於熊津 太祖命諸城 堅壁不出 王遣使曰 甄萱違盟擧兵 天必不祐 若大王奮一鼓之威 甄萱必自破矣太祖謂使者曰 吾非畏萱 俟惡盈而自僵

3(926) 여름 4월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이 말하기를 고려 사람들이 일부러 죽였다.”하고는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웅진으로 진군하였다. 태조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벽을 굳게하고, 나가지 말게 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견훤이 맹을 어기고 군대를 일으켰으니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이다. 만약 대왕께서 북 한 번 침의 위엄을 휘두르면 견훤은 반드시 저절로 깨트려질 것입니다.”했다. 태조가 사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서 저절로 쓰러질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했다.

 

四年 春正月 太祖親征百濟 王出兵助之 二月 遣兵部侍郞張芬等 入後唐朝貢 唐授張芬檢校工部尙書 副使兵部郞中朴術洪 兼御史中丞 判官倉部員外郞李忠式 兼侍御史 三月 皇龍寺塔搖動北傾 太祖親破近巖城 唐明宗以權知康州事王逢規爲懷化大將軍 夏四月 知康州事王逢規 遣使林彦入後唐朝貢 明宗召對中興殿 賜物 康州所管突山等四鄕 歸於太祖 秋九月 甄萱侵我軍於高鬱府 王請救於太祖 命將出勁兵一萬往救 甄萱以救兵未至 以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猝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逃竄 其爲賊所虜者 無貴賤皆駭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物略盡 入處宮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王

4(927) 봄 정월 태조가 직접 백제를 정벌하였다. 왕이 군대를 내어 도왔다. 2월 병부시랑 장분 등을 보내 후당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니 후당이 장분에게 검교공부상서를 주고 부사에게 병부낭중 박술홍에게 어사중승을 겸하게 하고, 판관 창부원외랑 이충식은 시엇를 겸하게 했다.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직접 근암성을 깨트렸다. 당 나라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으로 하여금 후당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니 명종이 중흥전에 불어 대면하고, 물건이 내렸다. 강주 관하의 동상 등 4개 향이 태조에게 돌아갔다.(귀속되었다.)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습격하였다.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니 장수에게 명하여 날랜 군대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했다. 견훤은 구원병이 이르기 전인 겨울 111일 왕경(서울)을 습격하여 들어갔다. 왕과 비빈, 욍실 친척들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적병이 이르자 창졸간에(급하여) 할 바를 알지 못하여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왕실 친척과 공경대부와 사녀들이 사방으로 달아나 숨고, 적에게 사로잡힌 자들은 귀하고 천한이 구분 없이 모두 식은땀을 흘리고 기면서 노복이 될 것을 구걸하였으나 (화를)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이 또 그 군대를 놓아 공사의 재물을 대략 모두 약탈하게 하고, 궁궐에 들어 가 있으면서 좌우에게 명하여 왕을 찾게 하였다. 왕과 왕비, 첩 몇 명이 후궁에 있다가 묶여 군중에 이르니 왕을 핍박하여 스스로 죽게하고, 강제로 왕비를 욕보였으며, 그 부하를 풀어 그 비첩들을 어지럽혔다. 이에 왕의 족제(친척 동생)를 세원 임시로 나라 일을 맡게 하니 이가 경순왕이 된다.

 

敬順王 立 諱傅 文聖大王之裔孫 孝宗伊湌之子也 母桂娥太后 爲甄萱所擧卽位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羣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경순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부이니 문성대왕의 후손으로 효종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견훤에게 천거되어 즉위하였다. 전 왕(경애왕)의 시신을 들어 서장에 빈소를 차리고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며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례하였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게 했다.

 

元年 十一月 追尊考爲神興大王 母爲王太后 十二月 甄萱侵大木郡 燒盡田野積聚

1(927) 11월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존하여 신흥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라 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을 침범하여 밭과 들에 쌓아 둔 것을 모두 불살랐다.

 

二年 春正月 高麗將金相 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 六月 地震 秋八月 甄萱命將軍官昕 築城於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率兵擊走之 甄萱進屯於大耶城下 分遣軍士 芟取大木郡禾稼 冬十月 甄萱攻陷武谷城

2(928) 봄 정월 고려 장군 김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웠는데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여름 5월 강주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에게 명하여 양산에 성을 쌓게 하였다. 태조가 명지장군 왕충에게 명하여 군대를 통솔하여 치게 하니 견훤이 대야성 아래로 진군하여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三年 夏六月 天竺國三藏摩睺羅抵高麗 秋七月 甄萱攻義城府城 高麗將洪述出戰 不克死之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功宥之 但改順州爲縣 冬十月 甄萱圍加恩縣 不克而歸

3(929) 여름 6월 천축국 삼장마후라가 고려에 이르렀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을 치니 고려 장수 홍술이 나가 싸우다 이기지못하고 죽고, 순주 장군 원봉은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원봉의 앞 공 때문에 용서하였다. 다만 순주를 고쳐 현이라 하였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尙父 初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導之 至是降也 念其有功且老 故寵褒之 太祖與甄萱 戰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 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二月 太祖遣使告捷 王報聘兼請相會 秋九月 國東沿海州郡部落 盡降於太祖

4(930) 봄 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태조가 두터운 예로 대우하고, 상부라 불렀다. 처음 태조가 장차 신라와 우호를 통하려할 때 선필이 인도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항복한 것이다. 그가 공이 있고, 또한 늙었음을 생각하고 총애하여 포상한 것이다. 태조와 견훤이 고창군 병산 아래서 싸웠는데 크게 이기고, 죽이고 사로잡은 이가 매우 많았다. 그 영안, 하곡, 직명, 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승전을 알리니 왕이 방문을 갚고, 겸하여 서로 만날 것을 청하였다. 가을 9월 나라 동쪽 바다에 접한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通謁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臨海殿 酒酣 王言曰 吾以不天 寖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因泫然涕泣 左右無不鳴咽 太祖亦流涕慰藉 因留數旬廻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 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秋八月 太祖遣使 遺王以錦彩·鞍馬 幷賜羣僚將士布帛 有差

5(931) 2월 태조가 50여기를 데리고 경기에 이르러 뵙기를 요청했다. 왕과 백관이 교외에서 맞아 궁에 들어 가 서로 대면하였는데 인정과 예를 곡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열고 술이 얼큰해지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화란이 점점 이르고, 견훤이 불의를 마음대로 행하여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하고 있으니 원통함이 어떠하겠습니까?”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니 좌우가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조가 또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수 십일을 머물다 돌아갔다. 왕이 환송하여 혈성에 이르러 당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 휘하 군사들이 엄하고 바로잡혀 터럭 끝만큼도 범하지 않으니 도읍의 사녀들이 서로 축하해 말하기를 옛날 견씨가 왔을 때는 마치 승냥이와 범을 만난 듯 하였는 데 지금 왕공이 이름에는 마치 부모를 본 듯하다.”했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니 왕이 물들인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보내주고, 여러 관리와 장사들에게는 베와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

 

六年 春正月 地震 夏四月 遣使執事侍郞金昢 副使司賓卿李儒 入唐朝貢

6(932)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시랑 김불, 부사 시빈경 이유를 보내 후당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七年 唐明宗遣使高麗 錫命

7(933) 후당 명종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 책명을 내려 주었다.

 

八年 秋九月 老人星見 運州界三十餘郡縣 降於太祖

8(934) 가을 9월 노인성이 나타났다. 운주 땅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羣下謀 擧土降太祖 羣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乃使侍郞金封休 賷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十一月 太祖受王書 送大相王鐵等 迎之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丞公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 新羅之降也 太祖甚喜 旣待之以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昏於宗室 以永甥舅之好答曰 我伯父億廉匝干 知大耶郡事 其女子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太祖遂取之生子 是顯宗之考 追封爲安宗 至景宗獻和大王 聘正承公女納爲王妃 仍封正承公爲尙父令 公至大宋興國四年戊寅 薨 諡曰敬順(一云孝哀) 國人自始祖至此 分爲三代 自初至眞德二十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9(935) 겨울 10월 왕이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워 스스로 편안할 수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논의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 항복하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어떤 이는 가하다 하고, 어떤 이는 불가하다고 하였다. 왕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이 있습니다. 단지 충신 의사들과 (마음을)합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수합하여 스스로를 굳게 지키고, 힘이 다한 후에야 그칠 뿐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아서 형세가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할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칠함에 이르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하고는 이에 시랑 김휴로 하여금 글을 가지고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했다. 왕자가 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왕을 하직하고 곧바로 개골산으로 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글을 받고 대상 왕철 등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인솔하고 왕도(서울)를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했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이 30여리를 이어져 뻗혀 길을 꽉 메우고 보는 자들이 담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 동쪽에 좋은 집 한 채를 내리고, 맏딸 낙랑공주를 시집보냈다. 12(경순왕을) 봉해 정승공이라 하고 태자의 윗자리에 있게 하고, 1천석을 주었다. 시종한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살펴 등용하였다.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했다. 처음 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대우하기를 두터운 예로써하고 사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지금 왕이 나라를 과인(태조)에게 주시니 큰 것을 내림이 됩니다. 종실과 결혼하는 것으로서 길이 사위와 장인의 우호를 원합니다.” 했다.(경순왕이)답하여 말하기를 나의 큰 아버지 억렴 잡간은 지대야군사인데 그 딸이 덕과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가 아니면 내정(집안 일)을 갖출 이가 없습니다.”했다. 태조가 마침내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의 아버지로 안종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그대로 정승공을 봉하여 상보령이라 하였다. 공은 대송 태평흥국 4(979) 무인(기묘?)에 돌아가시니 경순(또는 효애라 한다.) 나라 사람들이 시조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삼대로 나누었는데 처음부터 진덕에 이르기까지 28왕을 상대라하고, 무열왕에서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으로부처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20왕을 하대라고 말했다.

 

論曰新羅朴氏·昔氏 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樻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行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 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也 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衎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韓擒虎 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昔錢氏 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 遠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之報者歟

논하여 말한다. 신라는 박씨, 석씨가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짝에 든 채 하늘에서 내려왔다. 어떤 이는 금수레를 탔다고 한다. 이는 매우 기궤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 서로 전하여 실제의 일로 삼았다. 정화 중(1111~1118) 우리 조정이 상서 이자량을 보내 송 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는데 신 김부식이 문한을 맡아 보좌하여 따라 갔다가 우신관에 나아갔을 때 한 집에 여 신선의 상을 모신 것을 보았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그것을 아십니까?”하고는 마침내 말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여자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바다를 떠서(항해하여)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황실의 여자는 신선이 되어 오래 동안 선도산에 있었는데 이는 그 상입니다.”했습니다. 신이 또한 송 나라 사신 왕양의 동신성모제문을 보니 娠賢肇邦(어진 이를 잉태하여 나라를 세웠다.)의 구가 있었으므로 동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에 왕 노릇하였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지금 다만 그 처음을 근원하면, 위에 있는 자는 자기를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너그러웠으며, 그 관직을 설치함에는 간략히 하고, 그 일을 행함에는 간소하게 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조회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항상 자제를 보내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고, 학교에 들어 가 배우고 익혔다. 이에 성현의 풍습과 교화를 이어 거친 습속을 바꾸어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 또 황제 군사의 위엄에 의지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과 현으로 하였으니 번성하다고 이를 만하다. 부도의 법(불교)을 받들어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다. 마을마다 그 탑과 사당이 즐비하게 함에 이르렀고, 백성들은 도망하여 승려가 되어 군사와 농부가 점점 줄어들어 국가가 날로 쇠퇴해 갔으니 곧 어지러워지고 또한 망하지 않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이러한 때에 경애왕은 더욱이 노는 데만 빠져 궁인과 좌우가 포석정에 나가 놀며, 술을 두고 잔치하여 즐기다가 견훤이 이르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대저 문밖의 한금호와 다락 위의 장려화와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이 비록 부득이 한 것이긴 하나 또한 아름답다할 만하다. 지난번에 만약 힘껏 싸우고 죽음으로 지키는 것으로서 왕의 군대에 대항하였다면 힘이 굽혀지고 형세가 궁박하여 곧 반드시 그 종족을 뒤엎어 해가 죄없는 백성에게 미쳤을 것이다. 이에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봉하고 군과 현을 기록하여 귀순하였으니 그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에게 덕이 있음이 매우 크다. 옛날 전씨가 오월을 가지고 송에 들어 간 것에 대해 소자첨은 충신이라 일렀다. 지금 신라의 공덕이 그것보다 훨씬 낫다. 우리 태조는 비와 빈이 매우 많고, 그 자손이 또한 번성하고,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라 이 후 전통을(임금의 자리를) 이은 자들은 모두 그 자손들이니 어찌 음덕의 갚음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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