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국사기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4

by 최인표 2024. 1. 4.

三國史記 卷第十六 高句麗本紀第四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新大王·故國川王·山上王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

 

新大王 諱伯固(固一作句) 太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初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菸支留與羣公議 遣人迎致 及至 菸支留跪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신대왕은 이름이 백고(라고도 쓴다.) 태조대왕의 막내동생이다. 몸가짐이 영특하고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처음 차대왕이 도가 없어 신하와 백성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재앙과 어지러움이 있어 해침이 자기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산골짜기에 숨었다. 차대왕이 죽음을 당함에 이르러 좌보 어지유가 여러 공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이하게 했는데 (백고가) 이르자 어지유가 무릎을 꿇고 국새를 바치며 말하기를 돌아가신 임금께서 불행히도 나라를 버리셨는데 비록 아들이 있으나 국가를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임금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대저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어진 이에게 돌아가니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높은 자리(임금의 자리)에 오를 것을 청합니다.”했다. 이에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후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가 77세였다.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忝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羣遠遯 洎聞凶訃 但極哀摧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眇末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淵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抃大哉 新大王之德澤也初明臨荅夫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告曰 嚮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非敢望也王卽賜狗山瀨·婁豆谷二所 仍封爲讓國君 拜荅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2(166) 봄 정월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과인이 욕되게도 왕의 친척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형제의 우애로 정사를 부탁하였으나 끼쳐진 그 대업을 자못 어그러지게 하였다. (과인은) 해침과 편안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무리를 떠나 멀리 숨었다가 흉한 부음을 듣고 어찌 백성들이 즐거이 추대하고 여러 공들이 나아갈 것을 생각하였겠는가! 잘못 보잘 것 없는 내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고, 마치 깊은 못과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은혜를 베풀어 멀리 미치게 하고, 무리들과 더불어 스스로 새롭게 하고,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풀어 줄 것이다.”했다. 나라 사람들이 풀어주는 명령을 듣고 환호하고, 축하하며 손뼉을 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크도다! 신대왕의 덕택이여!”했다. 처음 명임답부의 난이 있었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도망하였었는데 계승한 왕이 (죄수를)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듣고 곧 왕궁 문에 나아가 고하여 말하기를 지난 번 나라에 재앙이 있었는데도 신이 죽지 않고 산골짜기에 숨었습니다. 지금 정사를 새롭게 한다는 것을 듣고, 감히 죄를 고합니다.(죄를) 청합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이 정한 죄에 근거하여 시장에 버릴 지라도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만약 죽지 않음을 내려 먼 지방에 놓아주신다면 곧 죽을 것을 살린 골육의 은혜입니다. 신이 원하는 바를 감히 바라지 못하겠습니다.”했다. 왕이 곧 구산뢰와 루두곡 두 곳을 내리고, 양국군으로 봉하였다. 명임답부에게 벼슬을 주어 국상이라 하고, 벼슬을 더하여 패자로 삼았으며, 내외 병마를 맡기고, 겸하여 양맥 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 우부를 고쳐 국상이라 한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3(167)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졸본에서 이르렀다.

 

四年 漢玄菟郡太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菟

4(168)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임이 와서 침입하여 우리 군대 수백 명을 죽이니 왕이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속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

5(169) 왕이 대가 우거, 주부 연인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토벌하게 했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羣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荅夫坐原及質山 爲食邑

8(172) 겨울 11월 한 나라가 대규모 군대로 우리를 향하니 왕이 여러 신하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편한 지를 물었다. 무리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나라 군대는 무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가벼이 여기니 만약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가 겁을 낸다고 여겨 자주 올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습니다. 이는 이른 바 한 사람이 관을 지키면 만 명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 군대가 비록 많으나 우리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군대를 내어 막기를 청합니다.”했다. 명임답부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니 지금 강한 군대로 멀리서 와 싸우기 때문에 그 예봉 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군대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우려 하고, 군대가 적은 자가 마땅히 지키려 하는 것은 군대의 떳떳한 법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은 천리에 식량을 운반하니 오래 지탱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해자)을 깊게 하고 보루를 높이 하고 들을 깨끗하게 한 후 기다리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이나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주리고 곤궁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날랜 병졸로서 그들을 다그치면 뜻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그렇다 여기고 성을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다 이기지 못하고 사졸이 주리자 이끌고 돌아갔다. 명임답부가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조원에서 싸워 한나라 군대를 크게 무너뜨려 말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명임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내려 식읍으로 삼았다.

 

十二年 春正月 羣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 爲王太子

12(176) 봄 정월 여러 신하들이 태자 세우기를 청하였다. 3월 왕자 무남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十四年 冬十月 丙子晦 日有食之

14(178) 겨울 10월 병자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九月 國相荅夫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15(179) 강ㄹ 9월 국상 명임답부가 죽었는데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울며 슬퍼하고, 조정을 7일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예로서 질산에 장례하고 수묘가 20여가를 두었다. 겨울 12월 왕이 돌아가시니 고국곡에 장례하고 왕호를 신대왕이라 하였다.

 

故國川王(或云國襄) 諱男武(或云伊夷謨)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 各將下戶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 王身長九尺 姿表雄偉 力能扛鼎 蒞事聽斷 寬猛得中

고국천왕(혹은 국양)은 이름이 남무(혹은 이이모)로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장자 발기가 불초(현명하지 못하여)하다하여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헌제 건안초에 발기가 형으로 왕위를 얻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하호 3만여 명을 데리고 공손강에게 나아가 항복하고, 돌아 가 비류수 가에서 살았다. 왕의 키가 9자로 모습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힘은 솥을 메었고, 일에 임해서는 남의 말을 잘 듣고 결단하였으며, 너그러움과 용맹함이 중도를 얻었다.

 

二年 春二月 立妃于氏爲王后 后提那部于素之女也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2(180) 2월 왕비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앗다. 왕후는 제나부 우소의 딸이다.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四年 春三月 甲寅夜 赤氣貫於太微如蛇 秋七月 星孛于太微

4(182) 3월 갑인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를 꿰뚫었는데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성패가 태미에 나타났다.

 

六年 漢遼東太守興師伐我 王遣王子罽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6(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치니 왕이 왕자 계두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 무너뜨렸는데 벤 머리가 산 같이 쌓였다.

 

八年 夏四月 乙卯 熒惑守心 五月 壬辰晦 日有食之

8(185) 여름 4우러 응묘 형혹이 심성을 지켰다. 5월 임진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十二年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畀·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12(190) 가을 9월 경도(서울)에 눈이 6자나 쌓였다. 중외대부 패자 비유, 평자 좌가려가 모두 왕후의 친척이기 때문에 나라의 권력을 잡았고, 그 자제는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며, 다른 사람의 자녀를 약탈하고 다른 사람의 토지와 집을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성내었다.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죽이려 하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반란을 꾀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左可慮等聚衆 攻王都 王徵畿內兵馬平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淥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13(191) 여름 4월 좌가려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서울)를 공격하였다. 왕이 기내의 군대를 징발하여 평정하였다.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최근에 관직은 총애로서 주고, 지위는 덕이 아니어도 나아가 독이 백성에게 흐르고, 우리 왕가를 움직이게 하였다. 이는 과인이 밝음에 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너희 4부는 각기 아래에 있는 자 중에 어질고 착한 자를 천거하라.”했다. 이에 4부가 함께 동부 안유를 천거하였다. 왕이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유가 왕에게 말하기를 보잘 것 없는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진실로 큰 정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합니다. 서압록곡 좌물촌 을파소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의 손자입니다. 성질이 굳세고 지혜와 생각이 깊은 못과 같으나 세상에 쓰여지지 못하고, 힘써 농사지어 스스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시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면 곧 불가합니다.”했다.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叨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族之

왕이 사자를 보내 자신을 낮추는 말과 두터운 예로 모시게 하고, 중외대부에 임명하고, 벼슬을 더하여 우태로 삼고 일러 말하기를 신하와 백성의 위에 있으나 덕과 재능이 적어 다스림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능력을 감추고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궁색하게 초야에서 지낸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오셨으니 비단 나의 기쁨과 행운일 뿐만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복입니다. 편안히 가르침을 받들기를 청하니 공은 그 마음을 다해주십시오.”했다. 을파소가 비록 뜻을 나라에는 허여하였으나 이른 바 관직을 받고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에 대답해 말하기를 신의 둔하고 느린 것으로는 감히 엄한 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원하건대 대왕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선발하여 높은 관직을 주는 것으로서 대업을 이루십시오.”했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이에 (벼슬을 주어)국상을 삼고 정사를 맡게 하였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의 인척들은 을파소가 신진으로서 구신들을 이간한다 말하고 미워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귀천이 없이 만일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멸족하겠다.”했다.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凝 子之功也乃拜爲大使者

을파소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때를 만나지 못하면 곧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함이다. 지금 임금께서 나를 두터운 뜻으로 대하시니 이전에 숨어 살던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겠는가?”했다. 이에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사와 교화를 밝게하고, 상과 벌을 신중히 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하니 내외가 일이 없어졌다. 겨울 10월 왕이 안유에게 일러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나는 을파소를 얻어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많은 공적이 쌓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하고는 이에 벼슬을 주어 대사자로 삼았다.

 

論曰古先哲王之於賢者也 立之無方 用之不惑 若殷高宗之傅說 蜀先主之孔明 秦苻堅之王猛 然後賢在位 能在職 政敎修明 而國家可保 今王決然獨斷 拔巴素於海濱 不撓衆口 置之百官之上 而又賞其擧者 可謂得先王之法矣

논하여 말한다. 옛날 밝은 임금이 어진 자를 대하는 것은 그를 세움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없고, 등용하면 의혹하지 않는다. 은나라 고종이 부열에 대해서와 촉의 선주(유비)의 제갈공명에 대해서와, 전진의 부견이 왕맹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이 해야 한다. 그후 어진이가 지위에 있고, 능력 있는 이가 직분에 있어 정사와 교화가 닦이고 밝아져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 지금 왕이 결연히 홀로 결단하여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고, 무리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모든 관리의 윗자리에 두고, 또 그 전거한 자에게 상을 주니 선왕의 법도를 얻었다 할만하다.

 

十六年 秋七月 墮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畋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王曰 嗟乎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16(194)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질양에서 사냥하다 길에 앉아 소리내어 우는 자를 보았다. (왕이) 묻기를 어찌하여 소리 내어 울고 있는가?”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빈궁하여 항상 품팔이를 하여 어미를 봉양하였습니다. 금년에 곡식이 익지 않아 품 팔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먹을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소리 내어 우는 것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이다.”하고는 옷과 음식을 주고 위로하였다. 내외의 담단관청에 명하여 널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든 이, 가난하여 스스로 보존할 수 없는 자를 위문하게 하고, 구휼하게 했다. 담당관청에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에 이르기까지 관청의 곡식을 내어 백성의 식구가 많고 적음에 따라 (곡식을) 차등있게 빌려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이르면 돌여받게 하고 이를 항상한 법으로 삼게 하였다. 내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19(197)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한나라 사람들이 혼란을 피해 들어오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이 때는 한 나라 헌제 건안 2(197)이다.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천원에 장례하고, 호를 고국천왕이라 했다.

 

山上王 諱延優(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太祖 今王是太祖曾孫 亦生而視人 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初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歧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發歧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况婦人而夜行 豈禮云乎后慙 便往延優之宅 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산산왕, 이름은 연우(또는 위궁)로 고국천왕의 동생이다.(위서주몽의 후손 궁은 나면서 눈을 떠 볼 수 있었는데 이가 태조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 또한 나면서 사람을 보아 증조 궁과 비슷하였다. 고구려는 서로 비슷한 것을 불러 위라 했기 때문에 이름을 위궁이라 한 것이다.’했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연우가 이어 즉위한 것이다. 처음 고국천왕이 돌아가셨을 때 왕후 우씨가 숨기고 상을 발표하지 않고, 밤에 왕의 동생 발기의 집에 가 말하기를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잇는 것이 마땅하다.”했다. 발기는 왕이 돌아가신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해 말하기를 하늘의 운수는 돌아갈 바가 있으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이 밤에 가는 것이 어찌 예라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왕후가 부끄러워하며 곧 연우의 집에 가니 연우가 의관을 하고 일어 나 문에서 맞아 들어 가 자리에 앉아 잔치를 열고 술을 마셨다.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歧作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裹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羣臣立延優爲王 發歧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禮也 汝越次簒奪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孥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歧者 發歧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太守公孫度告曰 某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 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卽位 以廢天倫之義 是用憤恚 來投上國 伏願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돌아가셨는데 발기가 큰 아들로 잇는 것이 마땅하나 첩이 다른 마음이 있다 하면서, 사납고 오만하여 예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했다. 이에 연우가 예를 더하고, 직접 칼을 가지고 고기를 자르다가 잘못하여 그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치마끈을 풀어 그 다친 손가락을 싸 주었다. 장차 돌아가려 할 때 연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밤이 깊어 예상치 못한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그대는 나를 궁에 이를 때가지 환송해 주시오.”했다. 연우가 그것을 따라 왕후의 손을 잡고 궁에 들어갔다. 다음 날 날이 밝아 어둑어둑할 때 선왕의 명을 사칭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세워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가 그것을 듣고 크게 성내어 군대로서 왕궁을 에워싸고 외쳐 말하기를 형이 죽으면 동생이 잇는 것이 예이다. 너는 차례를 넘어 네가 왕위를 빼앗았으니 큰 죄이다. 그렇지 않으면 곧 베어 죽임이 처자에게 미칠 것이다.”했다. 연우가 3일간 궁궐 문을 닫았다. 나라 사람들 또한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가 어려움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요동으로 달아나 태수 공손도를 만나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고구려 왕 남무의 아우입니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나의 동생 연우와 형수 우씨가 모의하여 즉위하여 천륜의 의리를 없앴다. 이 때문에 분하고 성나 상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군대 3만을 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치게 하여 난을 평정하게 해 주십시오.”했다.

 

公孫度從之 延優遣弟罽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罽須自爲先鋒追北 發歧告罽須曰 汝今忍害老兄乎罽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發歧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罽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王悲喜 引罽須內中宴 見以家人之禮 且曰 發歧請兵異國 以侵國家 罪莫大焉 今子克之 縱而不殺足矣 及其自死 哭甚哀 反謂寡人無道乎罽須愀然銜淚而對曰 臣今請一言而死

공손도가 그것을 따랐다. 연우가 동생 계수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막게 하여 한나라 군대를 크게 무너뜨렸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추격하니 발기가 계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지금 차마 늙은 형을 해칠 수 있겠는가?”하니 계수가 형제간에 무정할 수 없어 감히 해지치 못하였다. (계수가)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비록 의롭지 않은 것이나, 너는 한 때의 분함 때문에 조종의 나라를 없애고자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인(조상)을 만나려 하는가?”했다. 발기가 그것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 나 배천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계수가 슬프게 크게 소리 내어 울면서 그 시신을 거두어 풀로 싸서 임시로 장례를 마치고 돌아갔다. 왕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계수를 이끌어 안으로 들어 가 잔치를 열고, 가인의 예로서 만났다. 또 말하기를 발기가 다른 나라 군대를 청하여 국가를 침입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큼이 없다. 지금 그대가 그를 이기고도 놓아주고 죽이지 않은 것은 족한 일이나,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소리 내어 울며 매우 슬퍼한 것은 도리어 과인이 무도함을 말한 것인가?”했다. 계수가 슬픈 소리없이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지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청합니다.”했다.

 

王曰 何也罽須曰 王后雖以先王遺命立大王 大王不以禮讓之 曾無兄弟友恭之義 臣欲成大王之美 故收屍殯之 豈圖緣此逢大王之怒乎 大王若以仁忘惡 以兄喪禮葬之 孰謂大王不義乎 臣旣以言之 雖死猶生 請出受誅有司王聞其言 前席而坐 溫顔慰諭曰 寡人不肖 不能無惑 今聞子之言 誠知過矣 願子無責王子拜之 王亦拜之 盡歡而罷 秋九月 命有司 奉迎發歧之喪 以王禮葬於裴嶺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왕이 말하기를 왜인가?” 계수가 말하기를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이 예로서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가 우애하고, 공경함의 의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대왕의 아름다움을 이루고자 해서 시신을 거두어 장례한 것입니다. 어찌 대왕의 노여움을 만날 것을 헤아렸겠습니가? 대왕께서 만약 어짐으로서 악을 잊고 형의 상으로서 장례한다면 누가 대왕이 의롭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이 미미 말을 하였으니 비록 죽더라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담당 관청에 나가 죽음을 받겠습니다.”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자리 앞으로 나와 앉아 온화한 얼굴로 위로하고 깨우쳐 말하기를 과인이 현명하지 못하여 미혹함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대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허물을 알겠다. 그대는 책함이 없기를 바란다.”했다. 왕자가 절하니 왕이 또한 절하고 기쁨을 다한 후 그쳤다. 가을 9월 담당 관청에 명하여 발기의 상을 받들어 맞아 왕의 에를 가지고 배령에 장례하였다. 왕이 본래 우씨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장가들지 못하고, 우씨를 세워 왕후를 삼았다.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夏四月 赦國內二罪已下

2(198) 2월 환도성을 쌓았다. 여름 4월 나라 안에 두 가지 죄 이하(죄수를) 풀어주었다.

 

三年 秋九月 王畋于質陽

3(199) 가을 9월 왕이 질양에서 사냥했다.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 夢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勿憂王覺語羣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奈何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秋八月 國相乙巴素卒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7(203) 3월 왕이 아들이 없어 산천에 기도했다. 이달 15일 밤 꿈에 하늘이 일러 말하기를 내가 너의 작은 왕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했다. 왕이 깨어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나에게 말한 것이 간곡하기가 이와 같은데 작은 왕후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했다. 을파소가 대답해 말하기를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기다려보십시오.”했다. 가을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었다. 나라 사람들이 소리내어 울려 슬퍼하였다. 왕이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十二年 冬十一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躑躅不能捉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 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王諾 之 至丙夜 王起還宮

12(208) 겨울 11월 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니 관장하는 자가 좇아갔다. 주통촌에 이르러 머뭇거리다 잡지 못하였다. 20세 정도의 한 여자가 있어 얼굴이 아름답고, 요염하였는데 웃으며 앞으로 나와 잡은 후에 쫒는 자가 얻을 수 있었다. 왕이 듣고 기이하게 여기고, 그 딸을 만나려 몰래 가서 그 여자 집이 이르러 모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였다. 그 집에서는 왕이 온 것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이 방에 들어 가 그 여자를 불러 관계하려 하였다. 여자가 고하여 말하기를 대왕의 명을 감히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관계 후 아들이 있으면 버리지 말 것을 원합니다.”했다. 왕이 수락하였다. 병야(한밤중)에 왕이 일어나 궁으로 돌아왔다.

 

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而未果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况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王慰藉贈與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彘 立其母爲小后 初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母喜 及生名曰 后女 冬十月 王移都於丸都

13(209) 3월 왕후가 왕이 주통촌 여자에게 거둥한 것을 알고 질투하여 몰래 병사를 보내 죽이게 하였다. 그 여자가 들어 알고, 남자의 옷을 입고, 도망하였다. 쫓는 자들이 이르러 해치려하니 그 여자가 물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금 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 왕의 명령인가? 왕후의 명령인가? 지금 나의 배에 아들이 있으니 진실로 왕이 남긴 몸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만 또한 왕자를 죽이는 것이다.”했다. 병사들이 감히 해치지 못하고, 가서 여자가 말한 것을 고하였다. 왕후가 노하여 반드시 죽이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다시 여자의 집에 거둥하여 물어 말하기를 네가 지금 임신하였는데 이는 누구의 아이인가?”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저는 평생 형제와 같이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감히 성이 다른 남자를 가까이 했겠습니까? 지금 배에 있는 아이는 진실로 대왕이 남신 몸입니다.”했다. 왕이 위로하고 선물을 매우 많이 주었다. 곧 돌아 와 왕후에게 말하니 마침내 해치지 못하였다. 가을 9월 주통촌의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를 이을 아들을 준 것이다.”했다. 처음 교제에 쓸 돼지의 일로부터 시작되어 그 어머니와 관계할 수 있었으므로 그 아이를 이름하여 교체라 했다. 그 어머니를 세워 소후라 했다. 처음 소후의 어머니가 임신하여 낳지 않았을 때 무당이 그것을 점쳐 말하기를 낳으면 반드시 왕후가 될 것이다.”했다. 어머니가 기뻐하며 낳자 이름을 후녀라 이름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

 

 

十七年 春正月 立郊彘王太子

17(213) 봄 정월 교체를 왕태자로 세웠다.

 

二十一年 秋八月 漢平州人夏瑤 以百姓一千餘家來投 王納之 安置柵城 冬十月 雷 地震 星孛于東北

21(217) 가을 8얼 한나라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가를 데리고 와서 들어오니 왕이 받아들여 책성에 두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울리고 지진이 있었으며 동북쪽에 성패가 있었다.

 

二十三年 春二月 壬子晦 日有食之

23(219) 2월 임자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24(220) 여름 4월 이상한 새가 왕정에 모였다.

 

二十八年 王孫然弗生

28(224) 왕의 손자 연불이 태어났다.

 

三十一年 夏五月 王薨 葬於山上陵 號爲山上王

31(227)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시니 산상릉에 장례하고 왕호를 산상왕이라 햇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