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第十七 高句麗本紀第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高句麗本紀 第五 東川王·中川王·西川王·烽上王·美川王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중천왕·서천왕·봉상왕·미천왕
東川王
(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鬣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동천왕(혹은 동양) 이름은 우위거인데 어렷을 적 이름은 교체로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 들어가 산상왕의 작은 왕후가 되었다. 역사서에서 그 친족과 성은 잃어버렸다. 전왕 17년 세워 태자가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었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하여 왕이 나가 노는 때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르게 하였다. 왕이 돌아 와 말하기를 “말이 갈기가 없으니 불쌍하다.”했다. 또한 모시는 자로 하여금 음식을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게 하였는데 또한 성내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2년(228)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 시조묘에 제사하고, 크게 (죄수를)풀어주었다. 3월 우씨를 봉하여 왕태후로 삼았다.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4년(230) 가을 7월 국상 고우루가 죽었다. 우태 명임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 見國壤於地下 若羣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8년(234)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돌아가셨다. 태후가 임종할 때 유언으로 말하기를 “첩이(내가) 올바른 행실을 잃었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차마 구렁텅이에 밀치지 못하겠다면 곧 산상왕릉의 옆에 장례하기를 청한다.”했다. 마침내 장례를 그 말과 같이 하였다. 무당이 말하기를 “국양이 나에게 내려와 말하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니 분하고 성남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싸웠다. 물러나서 생각해보니 얼굴이 두터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보지 못하겠으니 너는 조정에 고하여 나를 물건으로서 가려달라.”했습니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7겹으로 심었다.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10년(236) 봄 2월 오나라 왕 손권이 사자 호위를 보내 우호를 통하게 하였는데 왕이 그 사신을 억류하였다. 가을 7월에 이르러 목을 베어 머리를 위나라에 전하였다.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11년(237)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연호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이때는 경초 원년이다.
十二年 魏太傅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12년(238)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무리를 통솔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니 왕이 주부대가를 보내 군대 1000명을 거느리고 돕게 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깨트렸다.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 爲王太子 赦國內
17년(243) 봄 정월 왕자 연불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를 풀어주었다.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19년(245) 봄 3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왕이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군대를 내어 신라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毌丘儉 將萬人出玄菟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
20년(246)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나와 침범하니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데리고 비류서 가에서 맞아 싸워 무너뜨리고, 3천여 명을 목베었다. 또한 군대를 이끌고 양맥의 골짜기에서 다시 싸워 또 무너뜨리고, 머리를 베고, 사로잡은 이가 3천여 명이었다. 왕이 여러 장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위나라의 많은 군대가 도리어 우리의 작은 군대보다 못하고, 관구검은 위나라의 이름 있는 장수이나 오늘 (관구검의) 목숨이 나의 손아귀 안에 있다.”하고는 곧 철기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쳤다. 관구검은 네모난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대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왕이 1천여 명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죽이고, 곧 장군 왕기를 보네 왕을 추경하게 했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죽령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이 나뉘어 흩어져 거의 다하였다. 오직 동부의 밀우만이 홀로 옆에 있었다.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 지금 추격하는 군대가 매우 급박하게 하니 형세 상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이 결사적으로 막을 것이니 청합니다. 왕께서는 달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마침내 결사적으로 싸울 군사를 모집하여 함께 적에게 나아가 힘껏 싸웠다. 왕이 몰래 벗어나 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졌던 군사를 모아 스스로를 지키게 했다. (왕이) 일러 말하기를 “만약 밀우를 데려올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많은 상을 주겠다.”했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시험삼아 가겠습니다.”했다. 마침내 사우던 자리에 밀우가 땅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엎고 이르렀다. 왕이 그의 머리를 다리에 눕혔는데 오래 지나 소생했다. 왕이 몰래 이리저리 돌아서 남옥저에 이르렀다. 위나라 군사들이 추격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왕은 계책이 다하고, 형세가 꺽여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匈月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동부 사람 유유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급박하나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으니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에게 먹이고, 틈을 엿보아 그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성공할 수 있다면 곧 왕께서는 떨쳐 쳐서 승부를 결단하실 것을 청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좋다.”했다. 유유가 위나라 군중에 들어 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몸을 둘 땅이 없습니다. 장차 진 앞에서 항복을 청하여 목숨을 맡기려 하여 먼저 저를 보내 보잘 것 없는 물건을 가지고 와 부하들에게 먹이려 합니다.”했다. 위나라 장수가 그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음식 그릇에 칼을 숨기고 앞으로 나아가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대가 마침내 어지러워지니 왕이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공격하니 위나라 군대가 혼란스러워져서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였는데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여겨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을 내리고, 유옥구에게는 압록, 두눌하원을 내려 식읍으로 삼았다. 유유를 추증하여 구사자로 삼고, 또 그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이 전쟁 때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공적을 새겼으며, 또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을 새기고 돌아갔다. 처음 그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범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여러 번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가 탄식해 말하기를 “이 땅에 서서보니 장차 쑥대 나게 될 것이다.”하고는 마침내 먹지 않고(굶어) 죽었다. 관구검이 여러 군사에 명령을 내려 그 무덤을 헐지 못하게 하고, 그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며, 그 처자를 얻으면 모두 놓아 보냈다.(〈괄지지〉에 “불내성은 곧 국내성인데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했다. 이는 곧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다. 《양서》에 “사마의가 공손연을 토벌할 때 왕이 장군을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자 관구검이 와서 침범한 것이다.”했다. 《통감》에 “득래가 왕을 간한 것을 왕이 위궁 때의 일이다.”했으나 잘못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21년(247)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을 지나 다시 도읍할 수 없다 여겨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이다. 혹은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하기도 한다.)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22년(248)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장례하고 왕호를 동천왕이라 했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품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가까운 신하가 자살하는 것으로서 함께 묻히고자 하는 자들이 많았다. 계승한 왕이 예가 아니라 여겨 금하였다. 장례일에 이르자 무덤에 이르러 스스로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그 시신을 덮고 마침내 그 땅의 이름을 시원이라 했다.
中川王
(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 儀表俊爽 有智略 東川十七年 立爲王太子 二十二年 秋九月 王薨 太子卽位 冬十月 立椽氏爲王后 十一月 王弟預物·奢句等謀叛 伏誅
중천왕(홍은 중양) 이름은 연불로 동천왕의 아들이다. 모습이 총명하고 지략이 있었다. 동천왕 17년 세워 태자로 삼았고, 22년 가을 9월 왕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연씨를 세워 왕후로 삼고, 11월 왕의 동생 예물, 사구 등이 모반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三年 春二月 王命國相明臨於漱 兼知內外兵馬事
3년(250) 봄 2월 왕이 국상 명임어수에게 명하여 내외 병마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4년(251) 여름 4월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부대에 넣어 서해에 던졌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 길이가 9자로 왕이 그를 아꼈다. 장차 세워 소후로 삼으려하니 왕후 연씨가 총애를 독점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왕에게 말하기를 “첩이(제가) 들으니 서쪽 위나라에서 긴 머리카락을 찾아 천금으로 산다 합니다. 옛날 우리 선왕께서 중국에 예를 다하지 못하여 군대가 나와(침입하고) 달아나 거의 사직을 잃을 뻔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그들이 바라는 바를 따라 일개 사신을 보내 머리가 긴 미인을 바친다면 곧 그들은 반드시 기쁘게 받아들여 다시 침략하고 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그 뜻을 알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이 그것을 듣고, 해침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도리어 왕후를 참소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왕후가 항상 첩을(저를) 욕하여 말하기를 ‘농부의 딸이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는가?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했습니다. 생각하건대 대왕께서 나가는 것을 엿보아 첩을(저를) 해치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했다. 뒤에 왕이 기구에서 사냥하고 돌아오니 부인이 가죽부대를 가지고 맞이하여 크게 소리 내어 울며 말하기를 “왕후가 첩을(저를) 여기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 했습니다. 대왕께서 첩의(저의) 보잘 것 없는 목숨을 내려주시어(지켜주시어)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어찌 감히 다시 좌우에서 모시기를 바라겠습니까?”했다. 왕이 물어보고 거짓임을 알고 노하여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꼭 바다에 들어가야 하겠는가?”하고는 사람을 시켜 던지게 한 것이다.
七年 夏四月 國相明臨於漱卒 以沸流沛者陰友爲國相 秋七月 地震
7년(254) 여름 4월 국상 명림어수가 죽었다. 비류의 패자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진진이 있었다.
八年 立王子藥盧爲王太子 赦國內
8년(255) 왕자 약노를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를 풀어주었다.
九年 冬十一月 以椽那明臨笏覩 尙公主 爲駙馬都尉 十二月 無雪 大疫
9년(256) 겨울 11월 연나 명임홀도를 공주에게 장가들여 부마도위로 삼았다.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十二年 冬十二月 王畋于杜訥之谷 魏將尉遲楷(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12년(259) 겨울 12월 왕이 두눌의 골짜기에서 사냥하였다. 위나라 장수 위지해(이름이 장릉의 이름을 범하였다.)가 군대를 데리고 와 치니 왕이 정예 기병 5천을 뽑아 양맥의 골짜기에서 싸워 무너뜨리고,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十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13년(260)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十五年 秋七月 王獵箕丘 獲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15년(262) 가을 7월 왕이 기구에서 사냥하여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우레가 울리고, 지진이 있었다.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於中川之原 號曰中川王
23년(270)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시니 중천의 들에 장례하고, 왕호를 중천왕이라 했다.
西川王
(或云西壤)諱藥盧(一云若友) 中川王第二子 性聰悟而仁 國人愛敬之 中川王八年 立爲太子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太子卽位
서천왕(혹은 서양)은 이름이 약노(또는 약우)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품이 총명하고 어질어 나라 사람들이 아끼고 공경하였다. 중천왕 8년 세워 태자로 삼고, 23년 겨울 10월 왕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立西部大使者于漱之女爲王后 秋七月 國相陰友卒 九月 以尙婁爲國相 尙婁 陰友子也 冬十二月 地震
2년(271) 봄 정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세워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 국상 음우가 죽었다. 9월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다. 겨울 12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隕霜害麥 六月 大旱
3년(272)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6월 크게 가물었다.
四年 秋七月 丁酉朔 日有食之 民饑 發倉賑之
4년(273) 가을 7월 정유 보름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이 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 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 九月 神雀集宮庭
7년(276) 여름 4월 왕이 신성(혹은 신성은 나라 동쪽의 큰 진이라 한다.)에 가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가을 8월 왕이 신성에서 (왕궁에) 이르렀다. 9월 신작이 궁궐 뜰에 모였다.
十一年 冬十月 肅愼來侵 屠害邊民 王謂群臣曰 “寡人以眇末之軀 謬襲邦基 德不能綏 威不能震 致此鄰敵猾我疆域 思得謀臣猛將 以折遐衝 咨爾群公 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 羣臣皆曰 “王弟達賈 勇而有智略 堪爲大將” 王於是 遣達賈往伐之 達賈出奇掩擊 拔檀盧城 殺酋長 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 降部落六七所 以爲附庸 王大悅 拜達賈爲安國君 知內外兵馬事 兼統梁貊·肅愼諸部落
11년(280) 겨울 10월 숙신이 와 침범하여 변경의 백성들을 죽이고 해쳤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과인이 보잘 것 없는 몸으로 나라의 터를 잘못 이어 덕은 편안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진동시킬 수 없어 이런 이웃의 적이 우리 영토를 어지럽힘에 이르게 하였다. 꾀 많은 신하와 사나운 장수를 얻는 것으로서 멀리서 쳐서 꺽을 것을 생각하니 너희 여러 공들은 각기 기이한 꾀와 특이한 책략과 재능으로 장수를 감당할만한 자를 천거하라.”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왕의 동생 달가는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대장을 감당할 만합니다.”했다. 왕이 이에 달가를 보내 가서 치게 하였다. 달가가 기이한 꾀를 내어 엄습하여 단로성을 함락시키고, 추장을 죽이고, 600여가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겼다. 항복한 부락 6, 7곳은 속국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에게 벼슬을 주어 안국군으로 삼아 내외 군대의 일을 맡게 하고, 겸하여 양맥, 숙신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했다.
十七年 春二月 王弟逸友·素勃等二人 謀叛 詐稱病往溫湯 與黨類戱樂無節 出言悖逆 王召之僞許拜相 及其至 令力士執而誅之
17년(286) 봄 왕의 동생 일우와 소발 등 두 사람이 모반하여 거짓 병을 핑계로 온탕(온천)에 가 무리들과 함께 놀고 즐기는데 절제함이 없었고, 패역의 말을 하였다. 왕이 거짓으로 재상의 벼슬을 준다하고, 그가 이르자 힘있는 군사로 하여금 잡아 죽이게 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 目夜有光 秋八月 王東狩 獲白鹿 九月 地震 冬十一月 王至自新城
19년(288) 여름 4월 왕이 신성에 갔는데 해곡태수가 경어(고래)를 바쳤는데 눈에는 밤에 빛이 났다. 가을 8월 왕이 동쪽에서 사냥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9월 진진이 있었다. 겨울 11월 왕이 신성에서 이르렀다.
二十三年 王薨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23년(292) 왕이 돌아가시니 서천의 들에 장례하고 왕호를 서천왕이라 했다.
烽上王
(一云雉葛) 諱相夫(或云歃矢婁) 西川王之太子也 幼驕逸多疑忌 西川王 二十三年 薨 太子卽位
봉상왕(또는 치갈이라 한다.) 이름은 상부(혹은 삽실루)로 서천왕의 태자이다. 어려서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23년에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다.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1년(292) 봄 3월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이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으면서 큰 공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 의심하여 음모로 죽인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그가 죽었으니 장차 어디에 의탁할 것인가?”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二年 秋八月 慕容廆來侵 王欲往新城避賊 行至鵠林 慕容廆知王出 引兵追之 將及 王懼 時 新城宰北部小兄高奴子 領五百騎迎王 逢賊奮擊之 廆軍敗退 王喜 加高奴子爵爲大兄 兼賜鵠林爲食邑 九月 王謂其弟咄固有異心 賜死 國人以咄固無罪哀慟之 咄固子乙弗出遯於野
2년(293) 가을 8월 모용외가 와서 침입하니 왕이 신성에 가 적을 피하려 하여 가다 곡림에 이르렀다. 모용외는 왕이 나온 것을 알고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장차 이르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 할 때 신성의 지방관(新城宰)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고, 적을 만나자 떨쳐 치니 모용외의 군대가 패하여 물러났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벼슬을 더하여 대형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을 내려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9월 왕이 그 동생 돌고가 다른 마음이 있다 말하고, 죽음을 내렸다.(자살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돌고가 죄가 없었으므로 슬피 우루짖었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나가서 들에 숨었다.
三年 秋九月 國相尙婁卒 以南部大使者倉助利爲國相 進爵爲大主簿
3년(294) 가을 9월 국상 상루가 죽었다. 암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고, 벼슬을 올려 대주부로 삼았다.
五年 秋八月 慕容廆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羣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埸 爲之奈何” 國相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太守 善政有威聲 慕容廆不復來寇
5년(296) 가을 8월 모용외가 와서 침범하여 국구원에 이르러 선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는데 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은 자가 있고, 또한 무덤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있었다. 신이 있음을 두려워하여 (군대를)이끌고 물러갔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모용씨는 군대가 정예롭고 굳세고, 여러 번 우리 영토를 침범하니 어떻게 햐야 하는가?”했다. 국상 창조리가 대답해 말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한 용맹하니 대왕께서 만약 도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히 하시려 한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더니 정사를 잘 하여 위엄과 명성이 있었다. 모용외가 다시 도적질하러 오지 못하였다.
七年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 冬十月 王增營宮室 頗極侈麗 民饑且困 羣臣驟諫 不從 十一月 王使人索乙弗殺之 不得
7년(298) 가을 9월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이니 백성이 주렸다. 겨울 10월 왕이 궁궐을 더하여 지었는데 자못 지극히 사치하고 아름다웠다. 백성들이 주리고 곤궁해지니 여러 신하들이 여러 번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게 하였으나 (죽이지)못하였다.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 冬十二月 雷 地震
8년(299) 가을 9월 귀신이 봉산에서 소리내어 울고, 객성이 잘을 멈하였다. 겨울 10월 우레가 울리고, 지진이 있었다.
九年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 不雨 年饑民相食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荐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駈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况比鄰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慍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國相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言” 助利知王之不悛 且畏及害 退與羣臣同謀 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經 二子亦從而死 葬於烽山之原 號曰烽上王
9년(300)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주리니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8월 왕이 나라 안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궁궐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도망하여 흩어졌다. 창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고, 흉년으로 고식이 익지 않아 백성들이 자리를 잃어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늙은이와 어린아이들은 골짜기에 구릅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두려워하고 닦으며, 살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지 않고, 굶주린 사람을 몰아 나무와 돌의 일로 곤궁하게 하시니 백성의 부모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물며 가까운 이웃에 완강한 적이 있는데, 만약 우리의 폐단을 타고 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하건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십시오.”했다. 왕이 성내어 말하기를 “임금은 백성이 우러르는 바이다. 궁궐이 장엄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위엄있는 태도가 없을 것이다. 지금 국상이 대개 과인을 비방하는 것으로서 백성의 칭찬을 구하려 하는가?”했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이고,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않는 것은 충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마땅한 인재가 없어 재능이 없음에도 국상에 있으니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하는가? 뒤에 말이 없기를 바란다.”했다. 창조리가 왕이 고치지 않는 것을 보고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음모를 꾸며 (봉상왕을)폐하고, 을불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왕(봉상왕)이 (죽음을)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두 아들도 또한 따라서 죽었다. 봉산의 들에 장례하고 왕의 호를 봉상이라 했다.
美川王
(一云好壤王) 諱乙弗(或云憂弗) 西川王之子古鄒加咄固之子 初 烽上王疑弟咄固有異心 殺之 子乙弗畏害出遁 始就水室村人陰牟家 傭作 陰牟不知其何許人 使之甚苦 其家側草澤蛙鳴 使乙弗 夜投瓦石禁其聲 晝日督之樵採 不許暫息 不勝艱苦 周年乃去 與東村人再牟販鹽 乘舟抵鴨淥 將鹽下寄江東思收村人家 其家老嫗請鹽 許之斗許 再請不與 其嫗恨恚 潛以屨置之鹽中 乙弗不知 負而上道 嫗追索之 誣以廋屨 告鴨淥宰 宰以屨直 取鹽與嫗 決笞放之 於是 形容枯槁 衣裳藍縷 人見之 不知其爲王孫也
미천왕(또는 호양왕이라 한다.)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 한다.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처음 봉상왕이 동생 돌고가 다른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죽였다. 아들 을불이 해침을 두려워하여 나가 달아났다. 처음 수실촌 음모의 집에 가 고용살이 하였다. 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그를 매우 괴롭게 부렸다. 그 집 풀과 늪에서 개구리가 우니 을불을 시켜 밤에 기와와 돌을 던져 그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고, 낮에는 땔감을 채취하게 하여 잠시도 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어렵고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였다. 1년이 되자 이에 떠나 동촌 사람 재모와 소금을 팔았다. 배를 타고 압록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고, 강 동쪽 사수촌 사람 집에서 묵었다. 그 집의 늙은 할머니가 소금을 청하므로 두되 정도를 주었는데 다시 청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그 노파가 원망하고 성내어 몰래 신발을 소금 속에 넣어두었다. 을불이 알지 못하고 (소금을)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따라와 찾아내고는 신발을 숨겼다고 무고하여 압록 재에게 알렸다. 압록 재가 신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태형을 때리고 놓아주었다. 이에 모습은 마르고 옷은 남루하여 사람들이 그를 보아도 왕손인지 알지 못하였다.
是時 國相倉助利將廢王 先遣北部祖弗·東部蕭友等 物色訪乙弗於山野 至沸流河邊 見一丈夫在舡上 雖形貌憔悴 而動止非常 蕭友等疑是乙弗 就而拜之曰 “今國王無道 國相與羣臣陰謀廢之 以王孫操行儉約 仁慈愛人 可以嗣祖業 故遣臣等奉迎” 乙弗疑曰 “予野人 非王孫也 請更審之” 蕭友等曰 “今上失人心久矣 固不足爲國主 故羣臣望王孫甚勤 請無疑” 遂奉引以歸 助利喜 致於鳥陌南家 不令人知
이 때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 하였는데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보내 산과 들로 을불을 찾게 하였다. 비류하 가에 이르렀을 때 한 장부가 배 위에 있는데 비록 형상은 초췌하나 행동거지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우 등이 이가 을불인가 의심하여 나아가 절하며 말하기를 “지 나라의 왕이 도가 없어 국상과 여러 신하들이 그를 폐하려 몰래 모의하고 있는데 왕손은 품행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니 조상의 기업을 이을만 합니다. 그러므로 신들을 보내 받들어 맞이하게 했습니다.”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지 왕손이 아닙니다. 다시 찾기를 청합니다.”했다. 소우 등이 말하기를 “지금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임금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매우 부지런할 것을 바라니 청하건대 의심하지 마십시오.”했다. 마침내 받들고 인도하여 돌아왔다. 창조리가 기뻐하며 조맥 남쪽 집에 이르렀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다.
秋九月 王獵於侯山之陰 國相助利從之 謂衆人曰 “與我同心者 効我” 乃以蘆葉 揷冠 衆人皆揷之 助利知衆心皆同 遂共廢王 幽之別室 以兵周衛 遂迎王孫 上璽綬 卽王位 冬十月 黃霧四塞 十一月 風從西北來 飛砂走石六日 十二月 星孛于東方
가을 9월 왕이 후산의 북쪽에서 사냥하였는데 창조리가 따라갔다. 여러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본받으라.”하고는 곧 갈대 잎을 관에 꼿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꼿았다. 창조리가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음을 알고 마침내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대로 둘러싸 지켰다. 마침내 왕손을 맞아 옥새를 바치고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누른 안개가 끼어 사방이 막혔다. 11월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왔는데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다니기를 6일 동안 하였다. 12월 성패가 동방에 나타났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3년(302) 가을 9월 왕이 군대 3만을 통솔하여 현도구을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2년(311)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용동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313)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314) 봄 정월 왕자 사유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범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孛于東北
16년(315) 봄 2월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성패가 동북쪽에 나타났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廆 三國進攻棘城 廆閉門自守 獨以牛酒 犒宇文氏 二國疑宇文氏與廆有謀 各引兵歸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廆使其子皝與長史裴嶷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 詣棘城僞賀 廆臨之以兵 燾懼首服 廆迺遣燾歸 謂毖曰 “降者上策 走者下策也” 引兵隨之
20년(319) 겨울 12월 진평주 자사 최비가 도망쳐 왔다. 처음 최비가 몰래 우리와 단씨, 우문씨에게 말하여 함께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으로 나아가 공격하니 모용외가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면서 오직 소와 술을 우문씨에게만 먹이니 두 나라가 우문씨와 모용외가 모의함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 실독관이 말하기를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니 내가 마땅히 홀로 빼앗을 것이다.”했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과 장사 배외를 시켜 정예를 거느리고 전봉(선봉)이 되게 하고, 스스로는 대군을 거느리고 이었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여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최비가 듣고 그 형의 아들 도로 하여금 극성에 나아가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더니 모용외가 군대를 이끌고 대하니 최도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을 고하였다. 모용외가 이에 최도를 돌아가게 하고, 최비에게 일러 말하기를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말하고, 군대를 이끌고 따라갔다.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廆 廆以其子仁鎭遼東 官府市里案堵如故 我將如孥據于河城 廆遣將軍張統 掩擊擒之 俘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廆遣慕容翰·慕容仁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최비는 수 십기와 함께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쳐 오고, 그 무리들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인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무하게 하니 관부와 저잣거리가 옛과 같이 안정되었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을 차지하니 모용외가 장군 장통을 보내 습격하여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이 여러 번 군대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니 모용외가 모용한, 모용인을 보내 쳤다. 왕이 동맹을 청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이에 돌아갔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21년(320) 겨울 12월 군대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니 모용인이 막아 싸워 (우리를) 깨트렸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楛矢
31년(330) 사신을 후조 석륵에게 보내 그 호시를 전하였다.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32년(331) 봄 2월 왕이 돌아가셨다. 미천의 들에 장례하고, 왕호를 미천왕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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