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의 다처제 주장에 대한 여성의 반응(고전읽기 7)
박유는 충렬왕(1274~1308) 때 사람으로 대부경을 지냈다. 박유가 어느 해 상소를 올려 다처를 주장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신분이 높은 이나 낮은 이가 같이 한 명의 처를 두어 아들이 없어도 첩을 두지 못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여러 명의 처를 제한 없이 두므로 인재가 모두 북쪽으로 흘러들까 두렵습니다. 대소 신하들이 여러 명의 처를 두고, 품계에 따라 수를 줄여 서인에 이르러서는 1처1첩을 두게 하고, 여러 처들이 낳은 아이들도 적자와 동등하게 벼슬하게 하십시오. 이 같이 하면 (결혼하지 못하여)원망을 품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고, (아이를 많이 낳아) 호구도 늘어날 것입니다.” 했다. 부녀들이 이를 듣고 원망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연등회 날 저녁에 박유가 왕을 모시고 거리로 나갔는데 한 늙은 여자가 박유를 가리키며 “여러 처를 두자고 청한 놈이 저 빌어먹을 노인네이다.” 했다. 이 말을 들은 여인들이 모두 손가락질 하였는데 거리의 붉은 손가락이 한 무더기였다. 그 때의 재상 중에 부인을 무서워하는 자가 있어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고려사』권106, 열전 권19, 제신, 박유) 박유의 본뜻이야 오랜 전란과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인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이다. 명절(연등회)을 맞아 거리로 나온 여인들이 박유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고, 또 부인이 무서운 재상이 있어 의논이 중단되어 다처제는 시행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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