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읽기

조선 초 섹스 스캔들2-유감동의 간통사건-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에서 9월

by 최인표 2020. 11. 9.

조선 초 섹스 스캔들2-유감동의 간통사건-(고전읽기9)

조선 세종 때 최중기는 무안현감으로 갈 때 처인 유감동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유감동은 병을 핑계로 먼저 한양에 돌아와 스스로 창기(관기)라 하면서 전현직 고위관료에서부터 장인(匠人) 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남자들과 통간한 사건이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와 관련되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이 크게 논란이 된 것은 유감동이 검한성윤 유귀수의 딸로 士族의 딸이었고, 재상이 포함된 고위 관료에서 장인(관노), 친인척, 공신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40여명의 남자들과 관계하였기 때문이다. 유교질서와 도덕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던 세종의 입장에서 유감동의 성추문 사건은 매우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대하는 세종의 태도가 조금 모호하다. 이 점은 이 사건과 관련된 고위 관료들을 처벌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것이나, 이는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죄를 결단하라.” 한 것이나 몇 차례의 심문이 있었으니 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추궁하지 말라.”하면서 사건을 급히 마무리 지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 의정부에서 재상들이 유감동의 처벌을 의논하면서 官妓를 만들자, 또는 官婢를 만들자 하는 정도여서 유감동에 대한 처벌도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이를 통해 세종 등이 이 사건을 속히 마무리 짓고 덮으려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하여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두고 골육간 많은 피를 흘렀고, 또 태종은 왕권의 확립을 위하여 사돈가와 처가를 거의 멸문에 이르게 한 바탕 위에 세종은 즉위하였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고 유교질서와 도덕성 확립을 과제로 안게 된 세종의 입장에서 유감동 사건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백성들 보기에 참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상황은 세종실록 37, 세종 98월에서 9월의 기사를 참고하시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