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韓
魏志云 魏滿擊朝鮮 王準率宮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 開國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遠云 馬韓 麗也 辰韓 羅也(據本紀 則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幷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 以馬韓爲百濟者 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 故名馬韓也) 四夷 九夷九韓穢貊周禮職方氏掌四夷九貊者 東夷之種卽九夷也三國史云 溟州 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 獻之 又春州古牛首州 古貊國 又或云 今朔州是貊國 或平壤城爲貊國淮南子注云 東方之夷九種論語正義云 九夷者 一玄菟 二樂浪 三高麗 四滿飾 五鳧臾 六素家 七東屠 八倭人 九天鄙海東安弘記云 九韓者 一日本 二中華 三吳越 四乇羅 五鷹遊 六靺鞨 七丹國 八女眞 九穢貊
마한
삼국지 위지에 말하기를 “위만이 조선을 쳤을 때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를 통솔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 불렀다.”했다. 견훤이 태조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세(혁거세)가 왕성하게 일어나 번창하였고,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열었다.”했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려(고구려)이고, 진한은 라(신라)이다.”했다. (삼국사기 본기에 근거하면 곧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가 후에 갑신년에 일어났다. 했는데 여기서 말한 것은 (조선)왕 준으로서 말했을 뿐이다. 이로서 동명(주몽)이 먼저 일어나 마한을 차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 한 것이니 지금 사람들이 혹 금마산을 알고, 마한을 백제라 하는 것은 대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 본래 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 한 것이다.) 사이, 구이, 구한, 예맥이 있는데 주례 직방씨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고 하는 것은 동이의 종족 곧 구이이다. 삼국사에 말하기를 “명주는 옛 예국인데 야인(농민)이 밭을 갈다가 예왕 인을 얻어 바쳤다 했고, 또 춘주는 옛 우수주인데 옛 맥국이다. 또 혹은 지금의 삭주는 맥국이다. 혹은 평양성은 맥국이다.” 했다. 회남자 주석에 말하기를 “동방의 구이는 아홉 종족인이다.”했고, 논어정의에 “구이는 첫째 현토,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 다섯째 부유, 여섯째 소가, 일곱째 동도, 여덟째 왜인, 아홉째 천비이다.”했다. 해동안홍기에 말하기를 “구한은 첫째 일본, 둘째 중화, 셋째 오월, 넷째 탁라(탐라), 다섯째 응유, 여섯째 말갈, 일곱째 말갈, 여덟째 여진, 아홉째 예맥이다.”했다.
二府
前漢書 昭帝始元五年己亥 置二外府 謂朝鮮舊地平那及玄菟郡等 爲平州都督府 臨屯樂浪等兩郡之地 置東部都尉府(私曰朝鮮傳則眞番玄菟臨屯樂浪等四 今有平那無眞番 盖一地二名也)
이부
전한서에 소제 시원 5년(BC82) 기해에 두 개의 외부를 두었다고 한다. 조선의 옛 땅인 평나와 현토군 등을 평주도독부라 하고, 임둔, 낙랑 등 두 군의 땅에는 동부도위부를 둔 것을 말한다.(내가(일연) 생각하기로 사기 조선전에는 곧 진번, 임둔, 현토, 낙랑 등 네 개로 되어 있는데 지금 평나는 있고, 진번이 없으니 대개 한 땅을 두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다.)
七十二國
通典云 朝鮮之遺民 分爲七十餘國 皆地方百里後漢書云 西漢以朝鮮舊地 初置爲四郡 後置二府 法令漸煩 分爲七十八國 各萬戶(馬韓在西 有五十四小邑 皆稱國 辰韓在東 有十二小邑稱國 卞韓在南 有十二小邑 各稱國)
72국
통전에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72국이 되었는데 모두 땅이 사방 백리이다.”했다. 후한서에는 “서한 때 조선의 옛 땅에 처음 4군을 두었고, 후에 2부를 두었는데 법령이 점차 번잡하게 되자 나뉘어 72국이 되었다. 각각 만호(마한은 서쪽에 있고, 54소읍이 있는데 모두 국이라 일컬었다.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개의 소읍이 있는데 국이라 일컬었다. 변한은 남쪽에 있고, 12개의 소읍이 있는데 각각 국이라 일컬었다.
樂浪國
前漢時始置樂浪郡 應邵曰故朝鮮國也新唐書注云 平壤城 古漢之樂浪郡也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投于羅 又無恤王二十七年 光虎帝遣使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據上諸文 樂浪卽平壤城 宜矣 或云樂浪 中頭山下靺鞨之界 薩水今大同江也 未詳孰是) 又百濟溫祚之言 曰東有樂浪 北有靺鞨 則殆古漢時樂浪郡之屬縣之地也 新羅人亦以稱樂浪 故今本朝亦因之而稱樂浪郡夫人 又太祖降女於金傅 亦曰樂浪公主
낙랑국
전한 때 처음 낙랑군을 두었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조선국이다.”했다. 신당서 주에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다.”했고, 국사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들어왔고(항복하였고), 또 제 3대 노례왕 4년, 고구려 제 3대 무휼왕(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없애니 그 나라 사람들과 대방(북대방)이 신라에 들어왔다. 또 무휼왕(대무신왕) 27년 광호제(광무제)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치게 하여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였다.(위의 여러 글에 근거하면 낙랑은 곧 평양성이 마땅하다. 혹은 낙랑은 중두산 아래 말갈의 경계라 하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또 백제 온조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하였다. 곧 옛 한나라 때 낙랑군의 속현의 땅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또한 낙랑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지금 본 조(고려)에서도 또한 그 때문에 낙랑군부인이라 일컬었다. 또 태조(왕건)가 딸을 김부(경순왕)에게 시집보냈는데 또한 낙랑공주라 말했다.)
北帶方
北帶方 本竹覃城 新羅弩禮王四年 帶方人與樂浪人投于羅(此皆前漢所置二郡名 其後僣稱國 今來降)
북대방
북대방은 본래 죽담성이다. 신라 노례왕 4년(BC27) 대방 사람과 낙랑 사람이 신라에 들어왔다.(항복하였다.)(이는 모두 전한이 설치한 두 군의 이름인데 후에 나라를 참칭하였다가 지금 와서 항복한 것이다.)
南帶方
曹魏時始置南帶方郡(今南原府)故云 帶方之南海水千里 曰瀚海(後漢建安中 以馬韓南荒地爲帶方郡 倭韓遂屬 是也)
남대방
조조의 위나라 때 처음 남대방군(지금의 남원부이다.)을 두었다. 그러므로 대방의 남쪽은 바닷물이 천리인데 한해라 말하고(후한 건안 중 마한 남쪽 황무지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는데 왜와 한이 마침내 속하였다는 것이 이것이다.)
靺鞨(一作勿吉) 渤海
通典云 渤海 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王子)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立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伯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大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有泉井郡 今湧州)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據此 則渤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連靺鞨(或云今東眞) 羅第六祇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南沃沮二十餘家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三年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물길’이라 쓰기도 한다.) 발해
통전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인데 그 우두머리 조영(대조영)이 나라를 세움에 이르러 스스로 진단이라 불렀다. 선천 중에(현종의 왕자이다.) 처음 말갈의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라고 불렀다. 개원 7년(719, 기미년) 대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이라 하고 세자가 이어 죽위하였다. 명황(당 현종)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땅은 5경, 15부, 62주가 있었는데 후당 천성 초에 계단(거란)이 공격하여 깨트렸다. 그 후 거란에게 제재(지배)를 받았다.”했다.(삼국사에 말하기를 의봉 3년(618) 고종 무인년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나라 이름을 발해라 했다. 개원 20년 사이에 명황(고종)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 신라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년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니 현종이 토벌하였다. 또 신라 고기에 “고구려의 옛 장수 조영은 성이 대씨이니 남은 군대를 모아 대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이다.” 했다. 위의 옛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곧 말갈의 별종인데 다만 갈라지고 합하는 것이 같지 않았을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 동북 모퉁이 밖에 있다.”했다.) 가탐의 군국지에 “발해국의 압록, 남해, 부여, 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으로 신라 천정군에서(삼국사기 지리지에 삭주의 영현에 천정군이 있는데 지금의 용주이다. 했다.)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역이다. 또 삼국사에 ”백제(고구려?) 말년에 발해, 말갈과 신라가 백제(고구려?) 땅을 나누었다.(이에 근거하면 곧 발해가 또한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이 말하기를 “북쪽에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는데 이것이 나라의 해가 된다.”고 말했다. 또 말갈 땅은 하슬라주에 접해 있다. 또 동명기에 “졸본성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한다.)과 이어 있다. 신라 제 6대 지마왕 14년(을축) 말갈의 군대가 크게 북쪽 경계로 들어와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건넜다.” 했다. 후위(한?)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썼다. 지장도에 “읍루와 물길은 모두 숙신이다. 흑수와 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살펴보니 진한의 북쪽에 남북 흑수가 있다. 살펴보니 동명제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에 북옥저를 없앴고, 온조왕 42년 20여집이 신라에 와 항복하였고, 또 혁거세 53년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하니 곧 또한 동옥저가 있었다. 지장도에 ”흑수는 장성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했다.
伊西國
弩禮王十四年 伊西國人來攻金城 按雲門寺古傳諸寺納田記云貞觀六年壬辰 伊西郡今郚村零味寺納田 則今郚村今淸道地 卽淸道郡古伊西郡
이서국
신라 노례왕 14년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공격하였다. 운문사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제사납전기에 “정관 6년 임진년에 이서군 금오촌 영미사가 밭을 바쳤다고 했으니 곧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이다. 곧 청도군은 예 이서군이다.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茲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當矣 而本朝史略 並數金官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耶)伽耶(今咸安) 古寧伽耶(今咸寧) 大伽耶(今高靈) 星山伽耶(今京山 一云碧珍) 小伽耶(今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伽耶)
5가야(가락국기 찬을 살펴보면 한 자주색 빛이 드리우고 6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다섯은 각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있었다. 곧 하나는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각각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금관가야는 다섯 수에 넣지 않는 것이 마땅하나 본조사략에는 아울러 금관까지 수에 넣어 창녕을 더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아라(야 라고도 쓴다.)가야(지금의 함안), 고령가야(지금의 금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한편 벽진이라 한다.), 소가야(지금의 고성)이다. 또 본조사략에는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쳐 첫째 금관(김해부가 된다.), 둘째 고령(가리현이 된다.), 셋째 비화(지금의 창녕이라 하는데 아마도 고령의 잘못일 것이다.) 나머지 둘은 아라, 성산(앞의 성산과 같고, 혹은 벽(진)가야라고 쓰기도 한다)
北扶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見下)
북부여
옛 기록에 “전한서 선제 신작 3년 임술 4월 8일 천제가 흘승골성(대요 의주 경계에 있다.)에 오룡거를 타고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말하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 했다. 스스로 해모수라 이름하는 이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부루라 했는데 해로서 씨를 삼았다. 왕이 된 후 상제의 명으로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도읍을 졸본주에 세우고 졸본부여라 하니 곧 고구려의 시작이다.(아래에 보인다.)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 夢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腴 宜立王都 阿蘭弗勸王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夫婁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 見大石相對淚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爲太子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 至地皇三年壬午 高麗王無恤伐之 殺王帶素 國除
동부여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천제가 내려와 일러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너는 피해 가라.(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가에 땅 이름이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우기에 마땅하다.”했다. 아란불이 왕을 권해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했다. 부루는 늙어도 아들이 없었다. 하루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면서 후사를 구하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한 채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작은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빛이 나고 개구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주는 것이로다!”하고는 이에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자라나자 태자로 삼았다. 부주가 죽자 금와가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다음으로 왕위를 태자 대소에게 전하였다. 지황 3년 임오년에 고려(고구려)왕 무휼이 정벌하여 왕 대소를 죽이고 나라를 없앴다.
高句麗
高句麗卽卒本扶餘也 或云今和州又成州等 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先是 北扶餘王解夫婁 旣避地于東扶餘 及夫婁薨 金蛙嗣位 于時 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淥邊室中 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于此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光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五升許 王弃之與犬猪 皆不食 又弃之路 牛馬避之 弃之野 鳥獸覆之 王欲剖之 而不能破 乃還其母 母以物裹之 置於暖處 有一兒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岐嶷異常 自作弓矢 百發百中 國俗謂善射爲朱蒙 故以名焉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技能莫及 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若不早圖 恐有後患
고구려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혹은 지금의 화주, 또 정주 등이라 하는데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다. 국사 고려본기에 “시조 동명성제는 성이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땅을 피한 후에 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그 때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얻어(만나)물으니 (그 여자가)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로 이름은 유화인데 여러 동생들과 놀러 나왔습니다. 그 때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말하고, 나를 웅신산 아래 압록 가 집안으로 유인하여 사통(관계)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단군기에 ‘군(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곧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한 후 주몽을 낳았다했고,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 하니 부루와 주몽은 어머니를 달리하는 형제이다. 부모가 내가 매파 없이 다른 사람을 따랐다고 질책하고 마침내 여기에 귀양을 보냈습니다. 했다. 금와가 기이하게 여겨 (유화를)방 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비치자 몸을 끌어 피하니 해 그림자가 또한 따라와 비추었다. 그 일 때문에 잉태하여 하나의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 정도였다. 금와왕이 그것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에 버렸더니 소와 말이 피하였고, 들에 버렸더니 새와 짐승이 덮어(품어)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트릴 수 없어 이에 그 어머니(유화)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얼굴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겨우 일곱 살에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었는데 백발을 쏘면 백발이 모두 적중하였다. 나라 풍속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 때문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금와왕은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으나 재주가 (주몽에게)미치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가 금와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바가 아닙니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减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自乘肥 瘦者給蒙 王之諸子與諸臣將謀害之 蒙母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畧 何往不可? 宜速圖之 於時 蒙與烏伊等三人爲友 行至淹水(今未詳) 告水曰 我是天帝子河伯孫 今日逃遁 追者垂及 奈何? 於是 魚鼈成橋 得渡而橋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州(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근와왕이 듣지 않고 그(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좋은 말을 알아보고 먹을 것을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하고 느린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금와왕 자신은 살찐 말을 타고, 비루먹은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금와왕의 여러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주몽을 해치려 모의하니 주몽의 어머니가 알고 (주몽에게) 알려 말하기를 “나라 사라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하니 너의 재능과 지략으로 어디에 간들 살 수 없겠는가? 마땅히 빨리 떠날 것을 도모하라.”했다. 이 때 주몽은 오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가다가 함께 가다가 엄수(지금은 자세하지 않다.)에 이르러 물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 하백의 손자이다. 오늘 도망하여 숨으려는데 뒤 쫓는 자들이 거의 이르렀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이에 물고기,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건널 수 있게 한 후 다리가 흩어져 뒤쫓던 기병은 건널 수 없었다. 졸본주(현토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을 삼았다. 미쳐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다만 비류수 가에 띠풀 집을 엮어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
因以高爲氏(本姓解也 今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時年十二歲 漢孝元帝建昭二年甲申歲 卽位稱王 高麗全盛之日 二十一萬五百八戶 珠琳傳第二十一卷載 昔寧禀離王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捐圈則猪噓 棄欄則馬乳而得不死 卒爲扶餘之王(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禀離乃夫婁王之異稱也)
때문에 고로서 씨를 삼았다.(본래 성은 해씨이다. 지금 이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낳았기 때문에 스스로 고로서 씨를 삼은 것이다.) 나이 그 때 나이 12세로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 갑신년에 즉위하여 왕을 일컬었다. 고려(고구려)가 전성했을 때 21만 5백 8호였다. 주림전 제 21권에 실려 있기를 “옛날 영품리왕의 시비가 잉태하였다. 관상을 보는 이가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귀하게 되어 마땅히 왕이 될 것입니다.’ 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이겠다.’했다. 시비가 말하기를 ‘기운이 하늘에서 온 후 내가 잉태함이 있었습니다.’했다. 아들을 낳자 (왕이)상서롭지 못하다하여 (돼지)우리에 버리게 하였더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굿간에 버리게 하였더니 말이 젖을 먹여 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 했다. (곧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다. 그러므로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 영품리는 곧 부루왕의 다른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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