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閼智 脫解王代
永平三年庚申(一云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雞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 故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蹌蹌 王擇吉日 冊位太子 後讓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김알지 탈해왕대
영평 3년 경신(중원 6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중원은 2년에 다할 뿐이다.) 8월 4일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을 가고 있을 때 시림(鳩林이라 쓰기도 한다.) 안에서 크게 밝은 빛을 보았는데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워져 있고,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빛은 궤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아래서 울고 있었다. 형상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그 직접 숲에 가 궤를 열었더니 남자 아이가 누웠다가 곧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 말로 인하여 알지라 이름 하였다. 알지는 곧 신라 말로 작은 아이(小兒)를 부르는 말이다. 싸서 궁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서로 따라 기뻐 뛰며 춤을 추었다. 왕이 좋은 날을 가려 태자로 책봉하였다. 후에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왕위에 즉위하지는 못하였다.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을 낳고, 열한은 아도를 낳았고, 아도는 수유를 낳았고, 수유는 욱부를 낳았고, 욱부는 구도(仇刀라 쓰기도 한다.)를 낳았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신라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延烏郎 細烏女
第八阿達羅王卽位四年丁酉 東海濱有延烏郎細烏女 夫婦而居 一日 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邊邑小王而非眞王也) 細烏怪夫不來 歸尋之 見夫脫鞋 亦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獻於王 夫婦相會 立爲貴妃 是時 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연오랑 세오녀
제8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 동해 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 해초를 뜯고 있는데 홀연히 한 바위(한 물고기라 하기도 한다.)가 있어 업고(태우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나라(일본)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통 사람이 아니다.”하고는 곧 세워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를 살펴보니 전후로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자가없으니 이는 곧 변경 읍의 작은 왕이고, 참된 왕은 아닐 것이다.) 세오는 지아비가 우지 않는 것을 괴상하게 여겨 가서 찾다가 지아비가 벗어놓은 신발을 또한 그 바위에서 보았다. 바위가 또 (세오를) 없고 (일본으로)가기를 전(연오가 일본에 간 일)과 같이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놀라 왕에게 아뢰고 바치니 부부가 서로 만나 (세오를)세워 귀비로 삼았다. 이 때 신라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졌다. 일관(점쟁이)이 아뢰어 말하기를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괴이함에 이르렀습니다.”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청하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짐의 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했다.“하고는 그 비단을 내려주었다. 사신이 (신라에)와서 아뢰니 그 말에 의하여 제사하였다. 그렇게 한 후 해와 달이 옛날과 같아졌다. 그 비단을 어고에 넣어두고 국보로 삼았는데 그 창고 이름을 귀비고라 하였다. 하늘에 제사한 곳의 이름은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한다.
未鄒王 竹葉軍
第十三未鄒尼叱今(一作未祖 又未古) 金閼智七世孫 赫世紫纓 仍有聖德 受禪于理解 始登王位(今俗稱王之陵爲始祖堂 盖以金氏始登王位故 後代金氏諸王皆以未鄒爲始祖宜矣) 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來攻金城 我大擧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幷力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 乃知先王陰隲有功 因呼竹現陵
미추왕 죽엽군
제 13 미추니질금(미조, 또는 미고라 쓰기도 한다.) 김알지 7대 손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 자주빛 갓끈을 하렸고, 성스러운 덕이 있어 이해에게 선양을 받아 (김씨로)처음 왕위에 올랐다.(지금 세상에서는 왕의 능을 시조당이라 말하였으니 대가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후대의 김씨 여러 왕들이 모두 미추로서 시조로 삼은 것은 마땅하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에 죽었다. 능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 제 14 유리왕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와 금성을 공격하니 우리가 크게 일으켜 방어하였으나 오래 대항할 수 없었는데 홀연히 이상한 군대가 와 도왔다.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꼿고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쳐서 깨트렸다. (이서국)군대가 물러난 후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릉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선왕(미추왕)의 음덕으로 공을 세웠음을 알았다. 이 때문에 죽현릉이라 불렀다.
越三十七世惠恭王代 大曆十四年己未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 中有一人乘駿馬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四十許人 隨從而來 入於竹現陵 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有輔時救難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 攘災救患之心 暫無渝改 往者庚戌年 臣之子孫無罪被誅 君臣不念我之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勤 願王允之 王答曰 惟我與公不護此邦 其如民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王聞之懼 乃遣工臣金敬信 就金公陵謝過焉 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 以資冥福 寺乃金公討平壤後 植福所置故也 非未鄒之靈 無以遏金公之怒 王之護國 不爲不大矣 是以 邦人懷德 與三山同祀而不墜 躋秩于五陵之上 稱大廟云
37대를 지나 혜공왕대 대력 14년 기미 4월 홀연히 회오리바람이 유신공(김유신)의 묘에서 일어났다. 그 안에 한 사람이 좋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장군의 형상과 같고, 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자 40여 명이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능 안에서 곡하고 우는 소리가 진동하는 듯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있었다. 그 말에 “신이 평생 동안 때를 돕고 어려움을 구제하고 바로잡아 바로잡고 규합함의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지켜 재앙을 없애고 근심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고침이 없었습니다. 지난 번 경술년에 신(김유신)의 자손이 죄도 없는데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나의 공을 생각하지 않으니 신(김유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는 힘을 들여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려 합니다. 왕(미추왕)께서는 허락하기기를 청합니다.”했다. 왕(미추왕)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미추왕)와 공(기유신)이 이 나라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공은 다시 전과 같이 노력하여 주시오.”했다. 세 번 청하고, 세 번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이 이에 돌아갔다. 왕(혜공왕)이 두려워하여 이에 공신 김경신을 보내 김공(김유신)의 능에 가 사과하게 하고, 공(김유신)을 위해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에 세우는 것으로서 명복을 빌게 하였다. 절은 김공(김유신)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심기(빌기) 위해 둔 곳이다. 미추의 령이 아니었다면 김공(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 모하였을 것이니 왕의 나라를 지킴이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덕을 생각하여 3산과 같이 제사하여 떨어뜨리지(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고 대묘라 불렀다.
奈勿王(一作那密王) 金堤上
第十七那密王卽位三十六年庚寅 倭王遣使來朝曰 寡君聞大王之神聖 使臣等以告百濟之罪於大王也 願大王遣一王子 表誠心於寡君也 於是 王使第三子美海(一作未吐喜)以聘於倭 美海年十歲 言辭動止猶未備具 故以內臣朴娑覽爲副使而遣之 倭王留而不送三十年 至訥祗王卽位三年己未 句麗長壽王遣使來朝云 寡君聞大王之弟寶海秀智才藝 願與相親 特遣小臣懇請 王聞之幸甚 因此和通 命其弟寶海 道於句麗 以內臣金武謁爲輔而送之
내물왕(나밀왕이라 쓰기도 한다.) 김제상
제 17 나밀왕 즉위 36년 경인에 왜왕이 사자를 보내 조회하여 말하기를 “저희 임금께서 대왕의 신성함을 듣고 신들로 하여금 백제의 죄상을 대왕께 알리라 하였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한 왕자를 보내시어 진실된 마음을 우리 임금에게 표시해 주십시오.”했다. 이에 왕(내물왕)이 제 3왕자 미해(미토희라 쓰기도 한다.)로서 왜에 가게 하였다. 미해의 나이 10세로 말과 행동이 갖추어지지(익숙하지)못하였다. 그러므로 내신 박사람으로 부사를 삼아 보냈는데 왜왕이 억류하고 보내지 않은 것이 13년이었다. 눌지왕 즉위 3년 기미에 이르러 구려(고구려) 장수왕이 사신을 보내와 조회하고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의 동생 보해가 지혜와 재능이 빼어나다는 것을 듣고 함께 서로 친하기를 원하여 특히 소신을 보내 간청하게 하였습니다.”했다. 왕(눌지왕)이 그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고 이로 인하여 회친하기로 하고, 그 동생 보해로 하여금 구려(고구려)에 가게 하면서 내신 김무알을 보좌로 삼아 보냈다.
長壽王又留而不送 至十年乙丑 王召集群臣及國中豪俠 親賜御宴 進酒三行 衆樂初作 王垂涕而謂群臣曰 昔我聖考 誠心民事 故使愛子東聘於倭 不見而崩 又朕卽位已來 隣兵甚熾 戰爭不息 句麗獨有結親之言 朕信其言 以其親弟聘於句麗 句麗亦留而不送 朕雖處富貴 而未嘗一日暫忘而不哭 若得見二弟 共謝於先主之廟 則能報恩於國人 誰能成其謀策? 時 百官咸奏曰 此事固非易也 必有智勇方可 臣等以爲歃羅郡太守堤上可也 於是 王召問焉
장수왕이 또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10년 을축에 이르러 왕(눌지왕)이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협을 모아 직접 연회를 열었다. 술이 세 순배 돌고 난 뒤 여러 음악이 처음 시작되는데 왕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나의 성스러운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의 일을 살피시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으로 왜에 가게 하시고는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또 짐(눌지왕)이 즉위한 이래로 이웃나라 군대가 매우 성대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가 화친을 맺자는 말을 하니 짐이 그 말을 믿고 친 동생을 고구려에 보냈더니 고구려가 또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짐이 비록 부귀한 곳에 처하였으되 일찍이 하루의 잠시도 잊거나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만약 두 동생을 만나 함께 선왕의 사당을 볼 수 있다면 곧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누가 그 계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했다. 그 때 백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 일은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반드시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신들은 삽라군 태수 제상이 가능하다고 여깁니ㄷ.”했다. 이에 왕이 불러 물었다.
堤上再拜對曰 臣聞 主憂臣辱 主辱臣死 若論難易而後行 謂之不忠 圖死生而後動 謂之無勇 臣雖不肖 願受命行矣 王甚嘉之 分觴而飮 握手而別 堤上簾前受命 徑趨北海之路 變服入句麗 進於寶海所 共謀逸期 先以五月十五日 歸泊於高城水口而待 期日將至 寶海稱病 數日不朝 乃夜中逃出 行到高城海濱 王知之 使數十人追之 至高城而及之 然寶海在句麗 常施恩於左右 故其軍士憫傷之 皆拔箭鏃而射之 遂免而歸 王旣見寶海 益思美海 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제상이 두 번 절하고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욕이고, 임금의 욕은 신하의 죽음이라 합니다. 만약 어렵고 쉬운 것을 논한 후에 행한다면 불충이라 하고, 죽고 사는 것을 도모한 후에 움직이는 것을 용기가 없다고 합니다.’ 신이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명을 받아 가고자 합니다.”했다.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술잔을 나누어 마시고 손을 잡은 후 헤어졌다. 제상이 발 앞에서 명을 받고 빠르게 북해의 길을 달려 옷을 바꾸어 입고 고구려에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에 나아가 함께 도망할 날을 모의하여 우선 5월 15일 고성 수구에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기로 약속하였다. 약속한 날이 이르자 보해가 병을 핑계로 며칠 간 조회하지 않다가 밤중에 도망해 나가 가서 고성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알고 수십 명으로 하여금 쫓게 하니 고성에 이르러 따라잡았다. 그러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항상 좌우에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그 군사들이 불쌍하게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아버리고 쏘았다. 마침내 (죽음을)면하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만나고 나자 더욱 미해가 생각나 한 번 기뻐하고, 한 번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마치 몸에 한쪽 팔만 있고, 얼굴에 한 눈 만 있는 것과 같으니 비록 하나는 얻었으되 하나를 잃었으니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했다.
時 堤上聞此言 再拜辭朝而騎馬 不入家而行 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行至倭國 詐言曰 雞林王以不罪殺我父兄 故逃來至此矣 倭王信之 賜室家而安之 時 堤上常陪美海遊海濱 逐捕魚鳥 以其所獲 每獻於倭王 王甚喜之而無疑焉 適曉霧濛晦 堤上曰 可行矣 美海曰 然則偕行
그 때 제상이 이 말을 듣고 두 번 절하고 조정을 하직한 후 말을 타고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가서 곧바로 율포 가에 이르렀다. 그 처(제상의 처)가 그것을 듣고 말을 달려 쫓아 율포에 이르러보니 그 남편이 이미 배 위에 있었다. 처가 그를 부르기를 간절히 했으나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멈추지 않고 가서 왜국에 이르렀다. (제상이)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 왕이 죄도 없이 나의 부형을 죽였기 때문에 도망해 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했다. 왜왕이 믿고는 집을 내려 편안히 지내게 하였다. 그 때 제상은 항상 미해를 수행하여 바닷가에서 노닐며 물고기와 새를 따라 잡고, 그 잡은 것은 매번 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이 매우 기뻐하며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 새벽에 안개가 끼어 어두웠다. 제상이 말하기를 “갈만 합니다.”했다. 미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함께 갑시다.”했다.
堤上曰 臣若行 恐倭人覺而追之 願臣留而止其追也 美海曰 今我與汝如父兄焉 何得棄汝而獨歸? 堤上曰 臣能救公之命 而慰大王之情則足矣 何願生乎! 取酒獻美海 時 雞林人康仇麗在倭國 以其人從而送之 堤上入美海房 至於明旦 左右欲入見之 堤上出止之曰 昨日馳走於捕獵 病甚未起 及乎日昃 左右怪之而更問焉 對曰 美海行已久矣 左右奔告於王 王使騎兵逐之 不及 於是 囚堤上問曰 汝何竊遣汝國王子耶? 對曰 臣是雞林之臣 非倭國之臣 今欲成吾君之志耳 何敢言於君乎?
제상이 말하기를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들이 깨닫고 쫓을까 두렵습니다. 신은 머물러 그 추격을 저지하기를 원합니다.”했다. 미해가 말하기를 “지금 나와 당신은 마치 부형의 사이와 같습니다. 어찌 당신을 버려두고 홀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했다. 제상이 말하기를 “신은 공(미해)의 생명을 구하여 대왕의 정을 위로할 수만 있다면 곧 충분합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하고는 술을 가져다 미해에게 올렸다. 그 때 계림 사람 강구려가 왜국에 있었는데 그 사람을 따르게 하여 보냈다. 제상이 미해 방에 들어갔다. 아침이 되자 좌우가 들어 가 뵙고자 하니 제상이 나와 그들을 저지하여 말하기를 “어제 사냥에서 달려 다니느라 병이 심해 일어나지 않았다.”했다. 저녁때에 이르러 좌우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다시 물었다. 대답해 말하기를 “미해가 간지 이미 오래되었다.”했다. 좌우가 달려 가 왕에게 알리니 왕이 기병으로 하여금 뒤쫓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에 제상을 가두고 물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몰래 너희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하니 (제상이)대답해 말하기를 “신은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고자 할 뿐 어찌 감히 그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했다.
倭王怒曰 今汝已爲我臣 而言雞林之臣 則必具五刑 若言倭國之臣者 必賞重祿 對曰 寧爲雞林之犬㹠 不爲倭國之臣子 寧受雞林之箠楚 不受倭國之爵祿 王怒 命屠剝堤上脚下之皮 刈蒹葭使趨其上(今蒹葭上有血痕 俗云堤上之血) 更問曰汝何國臣乎? 曰雞林之臣也 又使立於熱鐵上 問何國之臣乎? 曰雞林之臣也 倭王知不可屈 燒殺於木島中 美海渡海而來 使康仇麗先告於國中 王驚喜 命百官迎於屈歇驛 王與親弟寶海迎於南郊 入闕設宴 大赦國內 冊其妻爲國大夫人 以其女子爲美海公夫人
왜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지금 네가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곧 반드시 다섯 가지 형벌을 갖출(쓸) 것이고,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많은 녹으로 상 줄 것이다.”했다. (제상이)대답해 말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계림의 채찍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을 받지는 않겠다.”했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의 가죽을 벗기게 하고 갈대숲을 베어내고 그 위를 걷게 하였다.(지금 갈대 위에 혈흔이 있는데 시중에서 제상의 피라 한다.) 다시 물어 말하기를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이다.”했다. 또 달군 철 위에 서게 하고 왜왕이 묻기를 “어느 나라의 신하인가?”하니 제상이 말하기를 “계림의 신하이다.”했다. 왜왕이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 안에서 태워 죽였다. 미해가 바다를 건너 와 강구려로 하여금 먼저 나라 안에 알리게 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굴갈역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과 친 동생 보해가 남교에서 맞이하여 궁궐에 들어 가 연회를 베풀고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풀어주고, 제상의 처를 책봉하여 국대부인으로 삼고 그 딸은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議者曰 昔漢臣周苛在滎陽 爲楚兵所虜 項羽謂周苛曰?汝爲我臣 封爲萬祿侯? 周苛罵而不屈 爲楚王所殺 堤上之忠烈 無怪於周苛矣 初 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坐不起 名其地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논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신하 주가가 형양에 있다가 초나라 군대에게 포로가 되었다. 항우가 주가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나의 신하가 된다면 만록의 후로 봉할 것이다.’ 했다. 주가가 욕하며 굽히지 않다가 초나라 왕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제상의 충렬은 주가보다 기이할(주가에 다를) 것이 없다.”했다. 처음 제상이 출발해 갈 때 부인이 듣고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여 망덕사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누워 길게 부르짖었기 때문에 그 모래 이름을 장사라 했다. 친척 두 사람이 부축하여 돌아가려하는데 부인이 바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땅 이름을 벌지지라 했다. 오래 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하여 세 달을 이끌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어 그대로 치술령신모가 되었다. 지금고 사당이 여기에 있다.
第十八實聖王
義熙九年癸丑 平壤州大橋成(恐南平壤也 今楊州) 王忌憚前王太子訥祗有德望 將害之 請高麗兵而詐迎訥祗 高麗人見訥祗有賢行 乃倒戈而殺王 乃立訥祗爲王而去
제 18 실성왕
의희 9년 계축 평양주 대교가 이루어졌다.(아마도 남평양알 것이다. 지금의 양주이다.) 왕이 전 왕의 태자 눌지가 덕망이 있음을 꺼려하여 장차 해치려하였다. 고구려 군사를 청하고, 눌지를 속여 맞이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눌지가 어진 행실이 있는 것을 보고 창을 거꾸로 하여 왕(실성왕)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으로 삼고 갔다.
射琴匣
第二十一毗處王(一作炤智王)卽位十年戊辰 幸於天泉亭 時有烏與鼠來鳴 鼠作人語云 此烏去處尋之(或云 神德王欲行香興輪寺 路見衆鼠含尾 怪之而還占之 明日先鳴鳥尋之云云 此說非也) 王命騎士追之 南至避村(今壤避寺村在南山東麓) 兩豬相鬪 留連見之 忽失烏所在 徘徊路傍 時有老翁自池中出奉書 外面題云開見二人死 不開一人死 使來獻之 王曰 與其二人死 莫若不開 但一人死耳 日官秦云 二人者庶民也 一人者王也 王然之開見 書中云射琴匣 王入宮見琴匣射之 乃內殿焚修僧與宮主潛通而所奸也 二人伏誅 自爾國俗每正月上亥上子上午等日 忌愼百事 不敢動作 以十五日爲烏忌之日 以糯飯祭之 至今行之 俚言怛忉 言悲愁而禁忌百事也 命其池曰書出池
사금갑(거문고 갑을 쏘라)
제 21 비처왕(소지왕이라 쓰기도 한다.) 즉위 10년 무진에 (왕이) 천천정에 행차하였다.(갔다.) 그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었는데 쥐가 사람의 말로 말하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으십시오.(혹은 신덕왕이 흥륜사에 향을 피우러(불공을 드리러) 가고자 했을 때 길에 여러 쥐들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돌아와 점을 쳤더니 (점괘에) 내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 가라...., 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잘못이다.)”했다. 왕이 말을 탄 군사로 하여금 쫓아가게 하였는데 남쪽 피촌(지금 양피사촌이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 이르러 두 마리 돼지가 서로 싸우고 있어 머물러 그것을 보고 있다가 홀연히 까마귀가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까마귀를 찾아)길옆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노인이 못에서 나와 글을 주었는데 글 겉면에 ‘(봉투를)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쓰여 있었다. 사자가 (왕게게) 와 바쳤다.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열지 않고 단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했다.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했다. 왕이 그렇게 여기고 열어 보니 글 안에 “거문고 갑을 쏘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 가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곧 내전의 분수승(분향하고 수도하는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죽였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속에 매 정월 상해 상자, 상오 등의 날에는 모든 일을 꺼리고 삼가 감히 움직이지 않았고, 15일을 오기일이라 하여 찬밥을 가지고 제사하였는데 지금에도 행해지고 있다. 이언에 달도라 하였는데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린다는 말이다. 그 못을 서출지라 부르게 했다.
智哲老王
第二十二智哲老王 姓金氏 名智大路 又智度路 諡曰智證 諡號始于此 又鄕稱王爲麻立干者 自此王始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巳則三年也)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冬老樹下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封爲皇后 群臣皆賀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不降則放此獸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지철로왕
제 23 지철로왕은 성이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 또 지도로이니 지증이라 시호하였다. 시호법이 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말로 왕을 일컬어 마립간이라 하는 것은 이 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왕은 영원 2년 경진에 즉위하였다.(혹은 신사라 하니 곧 3년이다.) 왕의 음장(성기)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로 배필을 얻기 어려워 사자를 3도에 보내 찾게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 동노수 아래에 이르러 두 마리 개가 하나의 똥 덩어리를 물고 있는데 크기가 북만하여 그 양쪽 끝을 물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을 방문하여 한 소녀가 있어 알려 말하기를 “이 부(모량부)의 상공 딸이 여기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가 숲에 숨어 남긴(눈) 것입니다.”했다. 그 집을 찾아 점검해보니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였다. 일을 갖추어 (왕에게)아뢰니 왕이 수레를 보내 궁중에 맞아들여 봉하여 황후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또 아슬라주(지금의 명주) 동해 중에 순풍을 타고(배를 타고 순풍을 맞으며 가서) 2일정도 되는 곳에 우릉도(지금은 우릉이라 쓴다.)가 있는데 둘레가 26730보였다. 섬의 오랑캐들이 그 물이 깊음을 믿고, 교만하고 오만하여 신하가 되지 않았다.(복종하지 않았다.) 왕이 이찬 박이종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더니 박이종이 나무로 사자 상을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그들을 위협해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곧 이 짐승을 풀어놓을 것이다.”하니 섬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박이종에게 상을 주어 주백을 삼았다.
眞興王
第二十四眞興王 卽位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진흥왕
제 24 진흥왕은 즉위 때 나이가 15세였다. 태후가 정사를 대신하였는데 태후는 곧 법흥왕의 딸로 입종갈문왕의 비이다. 죽을 때 머리를 깍고 법의(승복)를 입고 죽었다. 승성 3년 9월 백제 군대가 와서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9000, 말 8000필을 노략질해 갔다. 이에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대를 합해 고구려를 치려하자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곧 내가 어찌 감히 이를 바랄(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에 이 말로 고구려에 알려주니 고구려가 그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백제가 그것을 원망하였기 때문에 온(침범한) 것이다.
桃花女 鼻荊郞
第二十五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古本云 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媱 國人廢之 前此 沙梁部之庶女 姿容艶美 時號桃花娘 王聞而召致宮中 欲幸之 女曰 女之所守 不事二夫 有夫而適他 雖萬乘之威 終不奪也 王曰 殺之何? 女曰 寧斬于市 有願靡他 王戱曰 無則可乎? 曰 可 王放而遣之 是年 王見廢而崩
도화녀 비형랑
제 25 사륜왕은 시호가 진지대왕이니 성은 김씨이고, 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이다. 대건 8년 병신에 즉위(예 책에 11년 기해라 하였는데 잘못이다.)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을 폐하였다. 이에 앞서 사량부 민가 여자의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그때 도화랑이라 불려졌다.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 이르자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려 하였다. 여자가 말하기를 “여자의 지키는 바는 두 지아비 섬기지 않습니다. 지아지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비록 만승(황제)의 위엄으로도 끝내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는가?”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차라리 거리에서 목이 잘려 죽을지언정 다른 마음을 먹지 않기를 원합니다.”했다. 왕이 희롱해 말하기를 “(지아비가) 없다면 가능하겠는가?”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할 수 있습니다.”했다. 왕이 놓아 보냈다. 이 해 왕이 폐해져 죽었다.
後三年 其夫亦死 浹旬忽夜中 王如平昔 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忽然無蹤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聞諸寺曉鐘各散 郞亦歸矣 軍士以事奏
3년 후 그(도화랑)의 지아비가 또한 죽었다. 열흘 후 밤에 왕이 평소와 같이 여자의 방에 와서 말하기를 “네가 예전에 허락함이 있었다. 지금 너의 지아비가 없으니 할 수 있는가?”하니 여자가 가벼이 허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알렸다. 부모가 말하기를 “임금의 명을 어찌 피하겠는가?”하고는 그 여자를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이 머문 7일 동안 항상 오색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집에 가득하였다. 7일 후 홀연히 자취가 없어졌다. 여자가 이 때문에 임신하고 달이 차 낳으려 하는데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가운데 한 남자아이를 얻어 이름을 비형이라 했다. 진평왕이 그 다름을 듣고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나이 15세에 이르러 집사의 직을 주었다. 매일 밤 도망하여 멀리서 노닐었다. 왕이 용사 50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더니 날아서 월성을 넘어 서쪽으로 황천의 언덕 위(경성 서쪽에 있다.)로 가 귀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 속에 숨어 엿보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지고 낭(비형)이 또한 돌아갔다. 군사들이 일을 아뢰었다.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郞曰 然 王曰 然則 汝使鬼衆 成橋於神元寺北渠(一作神衆寺 誤 一云荒川東深渠) 荊奉勑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輔朝政者乎? 曰 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 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 角干林宗無子 王勅爲嗣子 林宗命吉達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 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郞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辟鬼
왕이 비형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하는데 사실인가?”했다. 비형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는 귀신의 무리로 하여금 신원사 북쪽 도랑에 다리를 만들라.(신중사라 쓰기도 하는데 잘못이다. 황천 동쪽의 깊은 도랑이라 하기도 한다.)”했다. 비형이 명을 받들어 그 무리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에 큰 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귀교하 이름하였다. 왕이 또 묻기를 “귀신의 무리 중에 인간 세상에 나와 조정을 도우만한 자가 있는가?”하니 비형이 말하기를 “길달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데리고 오라.”했다. 다음날 비형이 함께 뵈니 집사 벼슬을 내렸다. 과연 충직하기가 작이 없었다. 그 때 각간 임종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명으로 아들을 삼게 하였다. 임종이 길달로 하여금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였더니 매일 밤 문 위에 가서 잠잤다. 그러므로 이름을 길달문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달아나자 비형이 귀신으로 하여금 잡아 죽이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귀신의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을 들으면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그 때 사람들이 글을 지어 말하기를 “성제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여기가 비형랑의 집이다. 날고뛰는 여러 귀신의 무리는 이곳에 머물지 말라.”했다. 우리나라 풍속에 이 글을 붙이는 것으로서 귀신을 피한다.
天賜玉帶(淸泰四年丁酉五月 正承金傅獻鐫金粧玉排方腰帶一條 長十圍 鐫銙六十二 曰是眞平王天賜帶也 太祖受之 藏之內庫)
第二十六白淨王 諡眞平大王 金氏 大建十一年己亥八月卽位 身長十一尺 駕幸內帝釋宮(亦名天柱寺 王之所創) 踏石梯 三石並折 王謂左右曰 不動此石 以示後來 卽城中五不動石之一也 卽位元年 有天使降於殿庭 謂王曰 上皇命我傳賜玉帶 王親奉跪受 然後其使上天 凡郊廟大祀皆服之 後高麗王將謀伐羅 乃曰 新羅有三寶不可犯 何謂也? 皇龍寺丈六尊像一 其寺九層塔二 眞平王天賜玉帶三也 乃止其謀 讚曰 雲外天頒玉帶圍 辟雍龍袞雅相宜 吾君自此身彌重 准擬明朝鐵作墀
천사옥대(하늘이 옥대를 내리다. 청태 4년 정유 5월에 정승 김부(경순왕)가 금으로 새기고 옥을 배열한 허리 띠 하나를 바쳤는데 길이는 10위이고, 전과가 62개였다. 이를 진평왕의 천사옥대라 했다. 태조가 받아 내고에 간수하였다.)
제 26 백정왕은 시호가 진평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다. 대건 11년 기해 8월에 즉위하였다. 키가 열 한자이다. 내제석궁(또 천주사라 이름하는데 왕이 창건하였다.)에 갔을 때 섬돌을 밟으니 세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에 일러 말하기를 “이 돌을 움직이지 말고 후세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라.”했다. 곧 성 안에 다섯 개의 부동석 중의 하나이다. 즉위 1년 천사가 궁전 뜰에 내려와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상제께서 나에게 명하여 옥대를 내려 전하게 하셨습니다.”하니 왕이 직접 받들어 무릎을 꿇고 받은 후 그 천사가 하늘로 올라갔다. 모든 교묘의 큰 제사 때는 모두 그것을 매었다. 후에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다 “신라에는 삼보가 있어 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이르는가?”하니 “곧 황룡사 장육존상이 하나요, 그 절(황룡사)의 구층탑이 둘이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입니다.”했다. 이에 계획(신라를 정벌하는 계획)을 그만두었다. 기려 말한다. 구름 밖 하늘이 준 옥대는 임금의 곤의에 잘 들어맞네. 우리 임금 이로부터 몸이 더욱 무거우니 다음에는 쇠로 섬돌을 만들어야 겠네.
善德王知幾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万)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 唐太宗送畵牧丹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畫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 果如其言 二 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 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來藏於彼 並取殺之 百濟將軍亐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殪 又有後兵一千三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 王無恙時 謂羣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忉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文虎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 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畫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耦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 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眞德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傳 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贍星臺
선덕왕 지기삼사(선덕왕이 미리 기미를 알았던 세 가지 일)
제 27 덕만(万이라 쓰기도 한다.) 시호는 선덕여대왕이니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에 즉위하여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무릇 기미를 미리 안 세 일이 있다. 처음 당 태종이 홍, 자, 백색으로 그림 목단 그림과 그 세 대를 보냈다. 왕이 꽃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는 뜰에 심게 하였다. 그 꽃이 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는데 관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겨울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 3, 4일을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으니 왕이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에게 명하여 정예 군대 2천을 뽑아 빠르게 서쪽 교외로 가 여근곡을 물으면(찾아보면) 반드시 적의 군대가 있을 것이니 그들을 습격하여 죽이라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은 후 각각 천 명씩을 이끌고 서교에서 찾으니 부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 군대 오백여명이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모두 죽였다. 백제 장군 오소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있는 것을 또 둘러싸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오는 군대 1300명을 또한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건강할 때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짐이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안에 장사지내라.”했다. 여러 신하들이 그 곳을 알지 못하여 아뢰어 말하기를 “어느 곳입니까?”하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이다.”했다. 그 달 그 날에 이르러 왕이 과연 죽었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 남쪽에 장례하였다. 10여년 후 문호대왕(문무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하였다. 불경에 “사천왕천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하였으니 이에 대왕의 신령스러운 성스러움을 알 수 있다. 당시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여쭈어 말하기를 “어떻게 꽃과 개구리 두 가지 일을 알아 그리하였습니까?”했다.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그 향기가 없을 것을 알았다. 이는 곧 당황제가 과인이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개구리는 노한 형상이 있으니 군대의 상이다. 옥문은 여근이고, 여자는 음이 되고, 그 색은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이다. 그러므로 군대가 서쪽에 있을 것을 알았다. 남근(남자의 성기)이 여근(여자의 성기)에 들어가면 곧 반드시 죽는다. 이 때문에 쉽게 잡을 것을 알았다.”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그 성스러운 지혜를 인정하였다. 삼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명의 여왕이 있을 것을 알아서 그리하였는가? 선덕, 진덕, 진성을 이르는 것이 이것이니 당나라 황제도 거꾸로 매달린 것을 푸는 밝음(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한 일은 양지사 전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다릉 기록에는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卽位 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許 蘇定方云云者 皆謬矣 現慶前 春秋已登位 現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 在現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 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雞林國王
진덕왕
제 28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송을 만들어 비단을 짜고 수를 놓아 사신으로 하여금 당에 가 바치게 하였다.(어떤 책에는 김춘추가 사신이 되어 가서 군대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가상히 여겨 허락하고, 소정방 운운하였는데 모두 잘못이다. 현경에 앞서 김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심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의 시대이다.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심에 있었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고 수를 놓은 것은 군대를 청할 때가 아니라 진덕왕의 시대에 있었던 것이 마땅하다.(옳다.) 대개 김흠순을 놓아줄 것을 청하던 때이다.) 다나라 황제가 아름답게 여겨 (왕을)고쳐 봉해 계림국왕이라 하였다.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亐知巖 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畧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撲於地而殺之 閼川公膂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東曰靑松山 二曰南亐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그 글은
“큰 당나라가 널리 왕업을 여시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책이 융성하리라. 천하를 평정하여 전쟁을 그치고 문을 닦아 모든 왕들이 뒤를 이었다. 하늘을 통솔하여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빛남을 머금었다. 깊은 인은 해와 달처럼 조화롭다. 운수를 어루만져 요순을 만났으니 깃발은 어찌도 그리 성대하고 징소리 북소리는 어찌도 그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로 명을 어기는 자는 베고 엎어 하늘의 재앙을 입고, 순후한 풍속이 그윽이 엉겨 드러나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로움을 바친다. 4시가 조화로워 태평성대를 이루고, 일곱 개 별은 만방을 돈다. 산악의 신령스러운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내리고, 황제는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에게 일을 맡긴다. 삼황오제의 덕이 하나를 이루니 우리 당나라 황제의 덕이 밝다.”했다.
왕의 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자장의 아버지), 염장공, 유신공이 있었는데 남산 오지암에 모여 국사를 논의하였다. 그 때 큰 호랑이가 있어 좌석 사이로 달려드니 어려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에 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 같아 윗자리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을 인정하였다. 신라에 4령지가 있는데 큰일을 논의할 때는 곧 대신들이 반드시 그 땅에 모여 논의하면 곧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일은 동쪽의 청송산, 이는 남쪽의 오지산, 삼은 서쪽의 피전, 사는 북쪽의 금강산이라 한다. 이 왕대에 처음 설날 아침 조례를 행하였고, 처음 시랑의 칭호가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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