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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변한,백제~탈해왕

by 최인표 2022. 4. 15.

卞韓 百濟(亦云 南扶餘 卽泗泚城也)

新羅始祖赫居世卽位十九年壬午 卞韓人以國來降 新舊唐書云卞韓苗裔在樂浪之地 後漢書云卞韓在南 馬韓在西 辰韓在東 致遠云卞韓 百濟也 按本紀 溫祚之起 在鴻嘉四年甲辰 卽後於赫居世東明之世四十餘年 而唐書云卞韓苗裔在樂浪之地云者 謂溫祚之系 出自東明故云耳 或有人出樂浪之地 立國於卞韓 與馬韓等並峙者 在溫祚之前爾 非所都在樂浪之北也 或者濫九龍山亦名卞那山 故以高句麗爲卞韓者 盖謬 當以古賢之說爲是 百濟地自有卞山 故云卞韓 百濟全盛之時 十五萬二千三百戶

변한 백제(또 남부여라 하는데 곧 사비성이다.)

신라시조 혁거세 즉위 19년 임오에 변한 사람들이 나라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신당서, 구당서에 변한의 후손들이 낙랑 땅에 있었다.”했고, 후한서에는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다.”했다. 최치원은 변한은 백제이다.”했다. 삼국사기 본기를 살펴보니 온조가 일어난 것은 홍가 4년 갑진이니 곧 혁거세, 동명의 세대에서 40여년 후이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손이 낙랑 땅에 있다고 한 것은 온조 계열이 동명으로부터 나온 때문에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혹은 어떤 사람들이 낙랑 땅을 나와 변한에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 등과 나란히 대치했던 일이 온조의 전에 있었던 듯하고, 도읍한 곳이 낙랑 북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구룡산을 잘못 알아 변나산이라 이름 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를 변한이라 한 것은 대개 그릇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의 말로서 옳은 것을 삼는다. 백제 땅에 변산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는 전성기에 1523백호였다.

 

辰韓(亦作秦韓)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戶 稱國 又崔致遠云 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漸涿等(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 南宅 北宅 亐比所宅 本彼宅 梁宅 池上宅(本彼部) 財買井宅(庾信公祖宗) 北維宅 南維宅(反香寺下坊) 隊宅 賓支宅(反香寺北) 長沙宅 上櫻宅 下櫻宅 水望宅 泉宅 楊上宅(梁南) 漢歧宅(法流寺南) 鼻穴宅(上同) 板積宅(芬皇寺上坊) 別敎宅(川北) 衙南宅 金楊宗宅(梁官寺南) 曲水宅(川北) 柳也宅 寺下宅 沙梁宅 非上宅 里南宅(亐所宅) 思內曲宅 池宅 寺上宅(大宿宅) 林上宅(靑龍之寺東方有池) 橋南宅 巷叱宅(本彼部) 樓上宅 里上宅 椧南宅 井下宅

진한(秦韓이라고도 쓴다)

후한서에 진한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라에서 도망한 사람들이 한국에 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었다. 서로 라고 불렀으며, 마치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혹 진한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12개의 소국이 있는데 각각 만호이고, 국이라고 말한다.”했다. 또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 피해 온 자들인데 탁수의 이름을 따서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 점탁 등이라 말했다.”했다.(신라 사람의 방언에 涿의 음을 라 하였기 때문에 지금 혹 사량이라 쓰는데 을 또한 라고 읽는다.) 신라가 전성하였을 때 서울 안에 78936호이고, 136십방, 55, 35금입택(부유한 큰 집을 말한다.)이 있었다. 35금입택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본피부), 재매정택(유신공의 조종), 북유택, 남유택(반향사 하방), 대택, 빈지택(반향사 북).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양부 남쪽), 한기택(법류사 남쪽), 비혈택(상동), 판적택(분황사 상방), 별교택(내의 북쪽), 아남택, 김양종택(양관사 남쪽), 곡수택(내의 북쪽), 류야택, 사하택, 사량택, 비상택, 이남택(오소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대숙택), 임상택(청룡사 동쪽에 못이 있다.), 교남택, 항질택(본피부),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이다.

 

又四節遊宅

春 東野宅 夏 谷良宅 秋 仇知宅 冬 加伊宅 第四十九憲康大王代 城中無一草屋 接角連墻 歌吹滿路 晝夜不絶

사절유택

봄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에는 구지택, 겨울에는 가이택이다.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성 안에 하나의 초가집도 없었고, 처마와 담장이 붙어있었고, 노래 부르는 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新羅始祖 赫居世王

辰韓之地 古有六村 一曰閼川楊山村 南今曇嚴寺 長曰謁平 初降于瓢嵓峰 是爲及梁部李氏祖(弩禮王九年置 名及梁部 本朝太祖天福五年庚子 改名中興部 波潛東山彼上東村屬焉) 二曰突山高墟村 長曰蘇伐都利 初降于兄山 是爲沙梁部(梁讀云道 或作涿 亦音道)鄭氏祖 今曰南山部 仇良伐麻等烏道北廻德等南村屬焉(稱今曰者 太祖所置也 下例知) 三曰茂山大樹村 長曰俱(一作仇)禮馬 初降于伊山(一作皆比山) 是爲漸梁(一作涿)部又牟梁部孫氏之祖 今云長福部 朴谷村等西村屬焉 四曰觜山珍支村(一作賓之 又賓子 又氷之) 長曰智伯虎 初降于花山 是爲本彼部崔氏祖 今曰通仙部 柴巴等東南村屬焉 致遠乃本彼部人也 今皇龍寺南味呑寺南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殆明矣 五曰金山加里村(今金剛山栢栗寺之北山也) 長曰祗沱(一作只他) 初降于明活山 是爲漢歧部(又作韓歧部)裵氏祖 今云加德部 上下西知乃兒等東村屬焉 六曰明活山高耶村 長曰虎珍 初降于金剛山 是爲習比部薛氏祖 今臨川部 勿伊村仍仇旀村闕谷(一作葛谷)等東北村屬焉

신라 시조 혁거세 왕

진한 땅에는 옛날에 6총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으로 남쪽은 담엄사이다. 우두머리는 알평으로 처음 표암봉에 내려왔는데 이가 급량부 이씨의 조상이다.(노례왕 9년에 두고, 이름을 급량부라 하였는데 본조(고려) 태조 천복 5년 경자에 이름을 고쳐 중흥부라 하하였다. 파잠, 동산, 피상,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으로 우두머리는 소벌도리로 처음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것이 사량부(‘라 읽고, 혹은 涿으로 쓰는데 또한 음이 이다.)이다. 정씨의 조상으로 지금은 남산부라 하는데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촌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 한 것은 태조가 둔 것이며, 아래 예도 같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으로 우두머리는 구(‘라고도 쓴다.)례마로 처음 이산(개비산이라 쓰기도 한다.)에 내려왔으니 이를 점량(‘涿이라 쓰기도 한다.), 또는 모량부라 하는데 손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장복부라 하고, 박곡촌 등 서촌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으로(‘빈지’, ‘빈자’, ‘빙지라 쓰기도 한다.)으로 우두머리는 지백호인데 처음 화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다. 지금은 통선부라하는데 시파 등 동남쪽 촌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은 곧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최후의 옛집이 분명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지금의 금강산 백율사의 북쪽 산이다.)으로 우두머리는 지타(‘只他라 쓰기도 한다.)로 처음 명활산에 내려왔는데 이가 한기부(또는 한기부라쓰기도 한다.) 배씨 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라 하는데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 동촌이 여기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으로 우두머리는 호진이다. 처음 금강산에 내려왔으니 이는 습비부 설시의 조상이다. 지금의 임천부로 물이촌, 잉구미촌, 알곡(‘葛谷이라고 쓰기도 한다.) 등 동북촌이 여기에 속한다.

 

按上文 此六部之祖 似皆從天而降 弩禮王九年始改六部名 又賜六姓 今俗中興部爲母 長福部爲父 臨川部爲子 加德部爲女 其實未詳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誤)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欲 盍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時() 乘高南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盖鄕言也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 是也 乃至雞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所現耶!)

윗글을 살펴보니 이 6부의 조상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례왕 9년 처음 6부의 이름을 고치고, 6성을 내렸다. 지금 세상에서 중흥부를 어머니라 하고, 장복부를 아버지로 하고, 임천부를 아들로 하고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제는 자세하지 않다. 전한 지절 1년 임자(옛 본에는 건호1, 또 건원 3년이라고 한 등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 6부의 조상이 각각 자제를 인솔하고 모두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해 말하기를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주관하여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제멋대로 하여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른다. 어찌 덕이 잇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하지 않겠는가!”했다.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옆에서 이상한 기운이 마치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고, 한 마리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찾아 점검해보니 하나의 자줏빛 알(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고 남자 아이를 얻었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워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 동천(동천사는 사뇌야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 춤을 추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고 밝았다. 이 때문에 이름을 혁거세왕(대개 향언(신라 말)이다. 혹은 불구내왕이라 쓰는데 빛나는 밝음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가 낳은 것이다. 옛날 중화인(중국인)이 선도성모를 기리는 말(찬양하는 말)어진 이를 임신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다. 또는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내고 알영을 낳았다.”는 것이 또한 어찌 서술성모의 나타난 바가 아님을 알겠는가!(서술성모의 현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 自稱云閼智居西干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時人爭賀曰 今天子已降 宜覓有德女君配之 是日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 有雞龍現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 姿容殊麗 然而唇似雞觜 將浴於月城北川 其觜撥落 因名其川曰撥川 營宮室於南山西麓(今昌林寺) 奉養二聖兒 男以卵生 卵如瓠 鄕人以瓠爲朴 故因姓朴 女以所出井名名之

위호를 거슬함(혹은 거서간이라 쓴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 말로 인하여 말한 것이다. 그 후로부터 왕 노릇하는 자의 존칭으로 삼았다.)이라 했다.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해 말하기를 지금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자를 찾아 임금의 짝으로 삼아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량리 알영정(아리영정이라 쓴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낳았다.(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얻었다.) 얼굴과 모습이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월성 북천에 데리고 가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다. 때문에 그 내를 이름하여 발천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이다.)에 궁전을 짓고 두 성스러운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가 알에서 나왔는데 알이 박과 같았다. 향인들은 (표주박 호)’이라하기 때문에 성을 박이라 하였고, 여자는 나온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二聖年至十三歲 以五鳳元年甲子 男立爲王 仍以女爲后 國號徐羅伐 又徐伐(今俗訓京字云徐伐 以此故也) 或云斯羅 又斯盧 初王生於雞井 故或云雞林國 以其雞龍現瑞也 一說 脫解王時得金閼智而雞鳴於林中 乃改國號爲雞林 後世遂定新羅之號 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繼位

두 성인의 나이가 13세에 이르자 오봉 1년 갑자에 남자를 세워 왕으로 삼고, 그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 서벌(지금의 풍속에 을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혹은 사라, 사로라 한다. 처음 왕이 계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혹 계림국이라 하였다.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일설에 탈해왕 때 닭이 우는 숲 속에서 김알지를 얻었으므로 이에 나라 이름을 고쳐 계림이라 했다. 한다. 후세에 마침내 신라의 이름을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고, 7일 후에 유체가 땅에 흩어져 내렸다. 왕후가 또한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합하여 장례하려하자 큰 뱀이 막으므로 오체(머리와 4)를 각각 장례하고 오릉을 만들고 또 사릉이라 이름했다. 담엄사 북쪽 릉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자리를 이었다.

 

第二南解王

南解居西干 亦云次次雄 是尊長之稱 唯此王稱之 父赫居世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作雲梯 今迎日縣西有雲梯山聖母 祈旱有應) 前漢平帝元始四年甲子卽位 御理二十一年 以地皇四年甲申崩 此王乃三皇之弟一云 按三國史云 新羅稱王曰居西干 辰言王也 或云 呼貴人之稱 或曰次次雄 或作慈充 金大問云 ?次次雄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或云尼師今 言謂齒理也? 初 南解王薨 子弩禮讓位於脫解 解云 吾聞聖智人多齒 乃試以餅噬之 古傳如此 或曰麻立干(立一作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之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亦宜矣 羅人凡追封者稱葛文王 未詳 此王代樂浪國人來侵金城 不克而還 又天鳳五年戊寅 高麗之裨屬七國來投

2 남해왕

남해거서간 또는 차차웅이라 하는데 존장의 칭호로 오직 이 왕만의 칭호이다. 아버지는 혁거세이고, 어머니는 알영부인, 왕비는 운제부인이다.(‘雲梯라고도 쓴다. 지금의 영일현 서쪽에 운제산 성모가 있는데 가뭄에 기도하면 응함이 있다.) 전한 평제 원시 4년 갑자년에 즉위하여 21년을 다스리다 지황 4년 갑신년에 죽었다. 이 왕은 곧 3황의 첫째라고 말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니 신라의 왕 칭호는 거서간이라 하였는데 진한 말로 왕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이다 하고, 혹은 차차웅이라 하는데 자충이라 쓰기도 한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차차웅은 방언에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마침내 존장자를 일컬어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니사금이라 하였는데 잇금을 말한다.’”했다. 처음 남해왕이 죽자 아들 노례가 왕위를 탈해에게 양보하니 탈해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성스러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니 곧 떡을 깨물어 시험해보자.”했다. 옛날부터 전하는 것이 이와 같다. 혹은 마립간(‘라 쓴다.)이라 한다. 김대문이 말하기를 마립은 방언에 말뚝을 말한다. ‘은 기준 자리를 표시하는데 곧 왕의 궐이 주가 되고, 신하의 궐이 아래에 나열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사론에 신라는 거서간, 차차웅을 말한 것이 하나이고, 니사금이 16, 마립간이 4개이다.”했다. 신라 말 이름있는 유학자 최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는 모두 모 왕이라 하고 거서간 등을 말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 말이 촌스러워 부르기에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신라 일을 기록하면서 방언을 갖추어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다. 신라 사람들은 무릇 죽은 후에 왕을 봉한 자(追封者)를 갈문왕이라 불렀는데 자세하지 않다. 이 왕대에 낙랑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침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 천봉 5년 무인에 고려(고구려)에 속해있던 일곱 나라 사람들이 와서 항복했다.

 

第三弩禮王

朴弩禮尼叱今(一作儒禮王) 初 王與妹夫脫解讓位 脫解云 凡有德者多齒 宜以齒理試之 乃咬餅驗之 王齒多故先立 因名尼叱今 尼叱今之稱 自此王始 劉聖公更始元年癸未卽位(年表云 甲申卽位) 改定六部號 仍賜六姓 始作兜率歌 有嗟辭詞腦格 製犂耜及藏氷庫 作車乘 建虎十八年 伐伊西國滅之 是年高麗兵來侵

3 노례왕

박노례니질금(유례왕이라 쓰기도 한다.) 처음 왕과 매부 탈해가 임금 자리를 양보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이가 많다하니 마땅히 잇금으로서 시험하자.”했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하니 왕의 이가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하였다. 이 때문에 니질금이라 이름한 것이다. 니질금의 칭호는 이 왕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유성공 경시 1년 계미에 즉위하였다.(연표에는 갑신에 즉위하였다. 했다.) 6부의 이름을 정하고 6개 성을 내리고 처음 도솔가를 지었는데 차사와 사뇌격이 있었다. 쟁기,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만들고, 수레를 만들었다. 건호() 18년 이서국을 쳐서 없앴다. 이해 고려(고구려)군대가 와서 침범하였다.

 

第四脫解王

脫解齒叱今(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古本云壬寅年至者 謬矣 近則 後於弩禮卽位之 初無爭讓之事 前則 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 駕洛國海中有船來泊 其國首露王 與臣民鼓譟而迎 將欲留之 而舡乃飛走 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珍浦(今有上西知下西知村名) 時 浦邊有一嫗 名阿珍義先 乃赫居王之海尺之母 望之謂曰 此海中元無石嵓 何因鵲集而鳴? 拏舡尋之 鵲集一舡上 舡中有一櫃子 長二十尺 廣十三尺 曳其船 置於一樹林下 而未知凶乎吉乎 向天而誓爾 俄而乃開見 有端正男子 幷七寶奴婢滿載其中 供給七日 迺言曰 我本龍城國人(亦云正明國 或云琓夏國 琓夏或作花厦國 龍城在倭東北一千里)

4 탈해왕

탈해 치()질금(토해 니사금으로도 쓴다.) 남해왕 때(엣 본에 임인년에 이르렀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임인년에) 가까이하면 곧 노례왕 즉위 뒤가 되어 애초에 (왕위)양보를 다툰 일이 없고, 앞이라면(앞의 임인년) 곧 혁거세 시대에 있다. 그러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 바다에 배가 와서 정박하니 그 나라 수로왕과 신하, 백성들이 북을 치고 떠들며 맞이하여 머물게 하고자 하니 배가 곧 나는 듯이 달아났다. 계림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지금의 상서지, 하서지는 촌의 이름이다.)에 이르렀다. 포구 가에 한 노파가 있었는데 이름을 아진의선이라 하였으니 곧 혁거세 왕 해척의 어머니였다. (배를) 바라보고는 말하기를 이 바다 안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이유로 까치가 모여 우는가?”하고는 배의 노를 저어 찾아 갔다. 한 배 위에 까지가 모여 있고, 배 위에는 하나의 상자가 있었는데 길이는 20(), 넓이 13()이었다. 그 배를 끌어 한 숲 아래 두었는데 흉한지 길한지를 알지 못하였다. 하늘을 향하여 맹서하고 잠시 후 상자를 열고 보니 단정한 남자가 있는데 칠보, 노비가 그 안에 가득 실려 있었다. 7일 동안 물자를 주었더니 이에 말하기를 나는 본애 용성국 사람(또 정명국이라 하고, 혹은 완하국이라 한다. 완화는 화하국이라 쓴다. 용성은 왜 동북쪽 1천리에 있다.

 

我國嘗有二十八龍王 從人胎而生 自五歲六歲繼登王位 敎萬民修正性命 而有八品姓骨 然無揀擇 皆登大位 時 我父王含達婆 娉積女國王女爲妃 久無子胤 禱祀求息 七年後産一大卵 於是 大王會問群臣 ?人而生卵 古今未有 殆非吉祥? 乃造櫃置我 幷七寶奴婢載於舡中 浮海而祝曰 ?任到有緣之地 立國成家? 便有赤龍 護舡而至此矣 言訖 其童子曳杖率二奴 登吐含山上作石塚 留七日 望城中可居之地 見一峰如三日月 勢可久之地 乃下尋之 卽瓠公宅也 乃設詭計 潛埋礪炭於其側 詰朝至門云 此是吾祖代家屋 瓠公云否 爭訟不決 乃告于官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28용왕이 있었는데 사람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5, 6세에 왕위를 이어 올라 모든 백성을 가르쳐 인성과 천명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선택함이 없이 모두 대위(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때 나의 부왕 함달파는 적녀국 왕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오래도록 자식이 없어 기도와 제사로 자식을 구하여 7년 후 하나의 큰 알을 낳았습니다. 이에 대왕께서 여러 신하를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 알을 낳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있지 않았으니 자못 길하고 상서로운 것이 아니다.’하고는 궤를 만들어 나를 넣은 뒤 칠보, 노비와 함께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여 말하기를 인연이 있는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있어(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 어린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남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에 올라 돌집을 만들어 7일을 머물면서 성안에 살만한 땅을 바라보니 한 봉우리가 3일의 달(초승달)과 같음을 보니 형세(지세)가 오래 살만한 땅이었다. 이에 내려가 찾아가니 곧 호공의 집이었다. 이에 속이는 계책을 베풀어 그 (호공의 집)옆에 숫돌과 숯을 묻어두고 아침에 문에 이르러 따져 말하기를 이곳은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다.”했다. 호공이 아니라고 말했다. 송사를 다투어도 결정하지 못하자 이에 관리에게 고하였다.

 

官曰 以何驗是汝家? 童曰 我本冶匠 乍出隣鄕 而人取居之 請掘地撿看 從之 果得礪炭 乃取而居爲 時 南解王知脫解是智人 以長公主妻之 是爲阿尼夫人 一日 吐解登東岳 廻程次 令白衣索水飮之 白衣汲水 中路先嘗而進 其角盃貼於口不解 因而嘖之 白衣誓曰 爾後若近遙 不敢先嘗 然後乃解 自此白衣讋服 不敢欺罔 今東岳中有一井 俗云遙乃井是也 及弩禮王崩 以光虎帝中元二年丁巳六月 乃登王位

관리가 말하기를 무슨 증거를 가지고 이것이 너의 집이라 하는가?”하니 아이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야장이었는데 잠간 이웃 고을에 나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취해 살았습니다. 땅을 파서 검사하여 보기를 청합니다.”했다. 그 말에 따랐더니 과연 숫돌과 숯을 얻었다. 이에 (호공의 집을) 취해(빼앗아) 살았다. 그 때 남해왕이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고 맏공주를 처로 삼게 하였는데 이를 아니부인이라 한다. 하루는 토해(탈해)가 동악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로 하여금 마실 물을 구하게 하였다. 백의가 물을 길어오던 도중에 먼저 맛을 보고(마시고) 올리려 하니 그 뿔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탈해가)그를 꾸짖으니 백의가 맹서해 말하기를 이후부터는 가까운 곳이던, 먼 곳이던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한 후에야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에 한 우물이 있는데 세상에서 요내정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노례왕이 죽음에 이르러(죽자) 광호제(광무제) 중원 2년 정사 6월에 왕위에 올랐다.

 

以昔是吾家取他人家故 因姓昔氏 或云 因鵲開櫃 故去鳥字 姓昔氏 解櫃脫卵而生 故因名脫解 在位二十三年 建初四年己卯崩 葬䟽川丘中 後有神詔愼埋葬我骨 其髑髏周三尺二寸 身骨長九尺七寸 齒凝如一 骨節皆連瑣 所謂天下無敵力士之骨 碎爲塑像 安闕內 神又報云我骨置於東岳 故令安之(一云 崩後二十七世文虎王代 調露二年庚辰三月十五日辛酉 夜見夢於太宗 有老人貌甚威猛 曰 我是脫解也 拔我骨於䟽川丘 塑像安於土含山 王從其言 故至今國祀不絶 卽東岳神也云)

옛날 자기 집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던 일로인하여 성을 석씨라 했다. 혹은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었기 때문에 (에서) ‘자를 떼고 성을 석씨로 했다. 한다. 궤를 열고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탈해라 했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인 건초 4년 기묘에 죽었다. 소천구 안에 장사하였다. 후에 신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고 명령했다. 그 해골(두골)의 둘레가 32치이고, 몸 뼈의 길이는 97치였다. 이빨은 엉겨 하나인 것 같고, 뼈마디가 모두 이어져 있었는데 이른 바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는 역사의 뼈였다. 부수어(빻아)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였다. 신이 또 알려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두라.”했기 때문에 그곳에 안치하게 하였다.(한편 말하기를 죽은 후 27대 문호왕(문무왕)대인 조로 2년 경진 315일 신유일 밤 태종의 꿈에 한 노인이 있있었는데 모습이 매우 위맹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탈해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고 했다. (태종)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러므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곧 동악신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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