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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고승전

by 최인표 2024. 1. 31.

1. 이 번역물은 완벽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읽을 때 원문과 비교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 저본은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한국고대사료집성'에 실린 것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3. 전문이 아니라 우니나라 역사와 관련된 부분만 번역하였습니다.

 

宋高僧傳 卷第四 義解篇 第二之一

송고승전 권제4 의해편 제21

 

唐京兆大慈恩寺法寶傳(勝莊)

당 경조 대자은사 법보전(승장)

 

釋法寶, 亦三藏奘師學法之神足也. 性靈敏利最所先焉. ……長安三年(703)於福先寺·京西明寺, 預義淨譯場, 寶與法藏·勝莊等證義. 于時頗露頭角, 莫之與京歟.

석법보 또한 삼장 현장스님의 법을 배운 뛰어난 제자이다. 성품이 신령스럽고 이로움에 민첩함을 가장 먼저 하였다.(……)장안 3(703) 복선사와 서울 서명사에서 의정의 (불경)번역장에 참여하였다. 법보는 법장, 승장 등과 같이 (불경을)번역하는 사람과 범문의 구성과 뜻을 검토하였는데 그 때 자못 두각을 드러내었는데 크고 높음()이 함께할 이가 없었다.

 

宋高僧傳 卷第四 義解篇 第二之一

송고승전 권제4 의해편 제21

 

唐京師西明寺圓測傳(薄塵·靈辯)

당 경사 서명사사 원측전(박진, 영변)

 

釋圓測, 未詳氏族也. 自幼明敏, 慧解縱橫. 三藏奘師爲慈恩基師, 講新翻唯識論, 測賂守門者隱聽, 歸則緝綴義章. 將欲罷講, 測於西明寺鳴鐘召衆, 稱講唯識, 基慊其有奪人之心, 遂讓測講訓. 奘講瑜伽還同前盜聽受之, 而亦不後基也. 詒高宗之末, 天后之初, 應義解之選入譯經館, 衆皆推挹. 及翻大乘顯識等經, 測充證義與薄塵·靈辯·嘉尙攸方其駕. 所著唯識疏鈔, 詳解經論, 天下分行焉.

석 원측은 씨족이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지혜로 사리를 잘 깨우쳐 알아 거침이 없었다. 삼장 현장스님이 자은사 규기의 스승이 되어 새로이 번역한 유식론을 강론할 때 원측이 문을 지키는 자(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숨어서 듣고 돌아 가 뜻과 문장을 모아 묶었다. 장차 강론을 마치려할 때 원측이 곧 서명사에서 종을 울려 무리를 모으고 유식을 설명하고 강론하였는데, 규기는 그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있음을 혐의하였다.(싫어하였다.) 마침내 원측이 강론하여 가르치는 것을 사양하였다. 현장이 유가를 강론하러 돌아오니 앞서와 같이 몰래 그것을 들었는데 또한 규기에게 뒤지지 않았다. 고종 말 측천무후 초에 義解의 선발에 응하여 역경관에 들어가니 무리들이 모두 추천하고 장려하였다. 대승, 현식(8식 아뢰야식) 등의 경전을 번역하면 원측은 완전하게 범문의 구성과 뜻을 검토하였는데 박진, 영변, 가상과 견주어 보아도 능가하는 바가 있었다. 유식소초를 저술하여 경론을 자세히 해설하였는데 천하에 나뉘어져 유행하였다.

 

宋高僧傳 卷第四 義解篇 第二之一

송고승전 권제4 의해편 제21

 

唐新羅國順璟傳

당 신라국 순경전

 

釋順璟, 浪郡人也. 本土之氏族, 東夷之家系, 故難詳練. 其重譯學聲敎, 蓋出天然, 況乎因明之學奘師精硏付受, 華僧尙未多達. 璟之克通, 非其宿殖之力, 自何而至於是歟. 傳得奘師眞唯識量, 乃立決定相違不定量. 於乾封年中, 因使臣入貢附至,

석 순경은 낭군 사람이다. 본래 고향의 씨족은 동이의 가계이다. 그러므로 자세하게 가리기 어렵다. 거듭 통역을 거쳐 성교를 배웠으니 대개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더구나 인명의 학은 현장 스님이 정밀하게 연구한 것을 받았으나, 중국의 스님들이 오히려 많이 통달하지 못하였다. 순경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이 전세에 선근을 심은 힘이 아니면 어떻게 이에 이를 수 있었으리오! 현장스님의 진유식량을 전해 듣고, 이에 결정상위부정량을 세웠다. 건봉 연간 (666667)에 조공하러 (당나라에)들어 가는 사신에게 붙여 보냈다.

 

于時奘師長往向及二年. 其量云, 眞故極成色定離眼識 自許初三攝, 眼所不攝故猶如眼根, 良以三藏隱密周防, 非大智不明. 璟爲宗云, 不離於眼識 自許初三攝, 眼所不攝故猶如眼識也, 如此善成他義. 時大乘基覽此作, 便見璟所不知, 雖然終仰邊僧識見如此. 故歎之曰, 新羅順璟法師者, 聲振唐蕃學包大小, 業崇迦葉, 唯執行於杜多, 心務薄拘, 恒馳聲於少欲, 旣而蘊藝西夏.

이때 현장스님은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난 후였다. 그 량에 이르기를 진실이기 때문에 상호 인정하는 색과 형태는 안식에서 분리되지 않아 스스로 셋이 포섭을 허여(인정)하고, 안은 포섭되지 않는 바이기 때문에 안근과 같고, 양은 삼장으로서 은밀히 두루 막기 때문에 큰 지혜가 아니면 밝지 못하다.”하였는데 순경이 종지를 삼아 말한 것은 안식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스스로 처음 셋은 포섭함을 허여하고, 안식은 포섭하지 못하는 바이므로 오히려 안식과 같다. 이 같이 선은 다른 뜻에서 이루어진다.”하였다. 그 때 대승의 규기가 지은 것을 보았으나 문득 순경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마침내 변방 스님의 식견이 이 같음을 우러러 보았다. 그러므로 탄복하여 말하기를 신라 순경법사는 명성이 당나라에 떨치고, 번국(제후국)의 학문이 크고 작음을 포함하고, 학문이 가섭을 높였고, 오직 두타를 잡아 행하여 마음으로는 박구에 힘써 항상 욕심을 적게 하는데 명성을 떨쳐 이윽고 재주를 서하에 쌓았다.”했다.

 

傳照東夷, 名道日新緇素欽揖. 雖彼龍象不少, 海外時稱獨步. 於此量作決定相違基師念, 遠國之人有茲利慧搪突奘師, 暗中機發善成三藏之義. 惜哉. 璟在本國稍多著述, 亦有傳來中原者, 其所宗 法相大乘了義敎也. 見華嚴經中, 始從發心, 便成佛已, 乃生謗毁不信. 或云, 當啓手足, 命弟子輩, 扶掖下地, 地則徐裂, 璟身俄墜, 時現生身陷地獄焉. 于今有坑, 廣袤丈餘, 實坎窞然號順璟捺落迦也.

동이로 전해져 이름과 도가 날로 새로워지니 검은 옷 입은 스님들이 공경하여 절하며 겸손히 하였다. 비록 저 용의 상이 적지 않았으나 해외에서는 그 때 홀로 걷는다고 일컬었다. ()비량에 결정상위를 지었는데 규기 스님은 멀리 있는 나라의 사람이 이와 혜를 가져 현장스님을 거스른다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삼장의 뜻을 발사된 화살과 같이 잘 이루었다고 여겼다. 애석하구나! 순경이 본국(신라)에 있을 때 많은 저술을 하여 또한 중원(중국)에 전해진 것이 있었는데 그 주인으로 삼은 바는 법상 대승의 궁극적 교의였다. 화엄경 안의 처음 발심을 따라 문득 성불한다.’는 것을 비방하고 믿지 않는 마음을 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여 땅에 내리니 땅이 곧 천천히 갈라지고, 순경의 몸이 갑자기 떨어져 살아 있는 몸으로 지옥에 빠졌다. 지금에도 구덩이가 있는데 넓이와 길이가 1장 정도이다. 실제 움막 같은 것을 순경 나락가라 부른다.

 

系曰, 曲士不可以語道者束其敎也. 是故好白者以黑爲汚, 好黑者以白爲汚焉. 璟怒心尤重, 猛利業增, 如射箭頃墮在地獄, 列高僧品次起穢以自臭耶. 通曰, 難信之法易速謗誚, 謗誚豈唯一人乎. 俾令衆所知識者直陷三塗, 乃知順璟眞顯敎菩薩也, 況乎趙盾爲法受惡. 菩薩乃爲法亡身, 斯何足怪. 君不見尼犍外道一一謗佛, 而獨使提婆生陷. 後於法華會上, 受記作佛, 靜言思之.

논하여 말한다. 마음이 바르지 않는 자(曲士)는 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 가르침을 묶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흰색을 좋아하는 자는 검은 색으로 물들고, 검은 색을 좋아하는 자는 흰색으로 물든다. 순경의 노한 마음이 더욱 심해져 번뇌의 업이 늘어났다. 쏘아진 화살이 기울어 떨어지듯 지옥에 있어 고승을 같은 류로 나열하여 더러움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스스로 냄새를 나게 하는가? 두루() 말한다. 믿기 어려운 법은 빠르게 비방하고 꾸짖기 쉽고, 비방하고 꾸짖는 것이 어찌 한 사람뿐이겠는가. 무리들로 하여금 곧 바로 삼도에 빠지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곧 순경은 참으로 가르침을 드러낸 보살임을 알겠다. 더구나 조돈이 법을 위해 오명을 받았고, 보살은 곧 법을 위해 자신을 없이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함이 되겠는가? 임금이 자이나교의 외도가 일일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홀로 제바로 하여금 산채 빠지게 하였다가 후에 법화회상에서 수기를 주어 부처가 되게 하였으니 말을 고요히 하고 생각한다.

 

宋高僧傳 卷第四 義解篇 第二之一

송고승전 권제4 의해편 제21

 

唐淄州慧沼傳(大願塵外)

당치주혜소전(대원진 외)

 

釋慧沼 , 不知何許人也. 少而警慧, 始預靑衿, 依于庠序, 誦習該通. 入法修身, 不違戒範. 乃被時諺, 沼闍梨, 次攻堅于經論, 善達翻傳. 自奘三藏到京, 恒窺壼奧, 後親大乘基師, 更加精博, 及菩提流志於崇福寺譯大寶積經, 沼預其選充證義. 新羅勝莊法師執筆, 沙門大願·塵外, 皆一時英秀, 當代象龍.

석혜소는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 민첩하고 지혜로웠다. 처음 유학에 참여(관계)하였고, 학교에 의지하여 외우고 익혀 널리 통하였다. (불교)에 들어 몸을 닦아 계율과 규범을 어기지 않았다. 이에 당시 항간에서 혜소를 덕행을 가르치는 스님이라 하였다. 차례로 경론을 연구하고 굳게 하며, 잘 통달하고 번역하여 전했다. 현장 스님이 서울에 온 후부터 항상 심오한 이치를 엿보았다. 후에 대승 규기 스님을 가까이하여 다시 정밀함과 넓힘을 더하였는데, 보리류지가 숭복사에서 대보적경을 번역할 때 혜소가 참여하고, 번역이 적당한지를 검토하는 직에 뽑혔다. 신라 승장법사는 글을 썼는데 사문 대원과 진외는 모두 한 때의 영준하고 빼어난 이로 당대의 상룡이었다.

 

宋高僧傳 卷第四 義解篇 第二之一

송고승전 권제4 의해편 제21

 

唐新羅國義湘傳

당신라국의상전

 

釋義湘 , 俗姓朴, 雞林府人也. 生且英奇, 長而出離. 逍遙入道, 性分天然. 年臨弱冠, 聞唐土敎宗鼎盛, 與元曉法師, 同志西遊. 行至本國海門唐州界, 計求巨艦, 將越滄波. 於中塗, 遭其苦雨, 遂依道旁, 土龕間隱身. 所以避飄濕焉, 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 天猶霢霂, 地且泥塗, 尺寸難前, 逗留不進. 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俄有鬼物爲怪. 曉公歎曰, 前之寓宿, 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託鬼鄕而多崇, 則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 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卻携囊返國, 湘乃隻影孤征誓死無退.

석 의상은 속성이 박씨로 계림부 사람이다. 나면서 영특하고 기이하였으며 자라서 속세와 관계를 끊었다. 도에 들어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녔는데 본성이 자연스러웠다. 나이가 약관(20) 때 당나라의 교종이 매우 성대하다는 것을 듣고 원효법사와 서쪽에서 노니는 것에 뜻을 같이하였다. 가서 본국(신라) 항구인 당주 경계에 이르러 큰 배를 찾아 장차 푸른 물결을 넘을 것을 계획하였다. 중도에 문득 때 아닌 비를 만나 마침내 길옆에 있는 토감(흙구덩이)에 의지하여 그 사이에 몸을 숨기고 거기에서 센 바람과 습기를 피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서로 보니 곧 옛 무덤의 해골 옆이었다. 하늘은 아직도 가랑비가 내리고, 땅은 또한 진흙길이어서 한 자 한 치도 나가기 어려워 머물며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묘도(무덤 길) 벽 안에 의지하고 있었다. 밤이 아직 선명하지 않은데(밤이 아직 어슴프레한데) 홀연히 귀물이 있어 괴이하게 여겼다. 원효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에 잠간 묵을 때는 토감(흙구덩이)이라 여겨 또한 편안하였는데, 이 밤에는 머물면서 초저녁부터 귀신의 마을이라 많이 모인다고 말하고 있으니, 곧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종종(여러 종류)의 법(현상?)이 생겨났고,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에 감실과 무덤은 둘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또한 삼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만법(온갖 형상?)이 오직 식일 뿐입니다. 마음 밖에 법(현상?)이 없으니 어찌 따로 (도를)구함을 쓰리오.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하고는 주머니를 가지고 나라로 돌아갔다. 의상은 곧 외따로 있는 조그만 그림자로(홀로) 외로이 가서 죽어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 맹서하였다.

 

以總章二年(669)附商船達登州岸, 分衛到一信士家, 見湘容色挺拔, 留連門下旣久. 有少女麗服靚粧, 名曰善妙. 巧媚誨之, 湘之心石不可轉也. 女調不見答, 頓發道心, 於前矢大願言, 生生世世, 歸命和尙, 習學大乘, 成就大事. 弟子必爲檀越, 供給資緣. 湘乃徑趨長安終南山智儼三藏所, 綜習華嚴經, 時康藏國師, 爲同學也. 所謂知微知章, 有倫有要, 德甁云滿, 藏海嬉遊.

총장2(669)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이르러 수행자가 남의 집에 숙식을 얻는 일로 한 신사(신자)의 집에 이르렀다. (그 신자가) 의상의 용모가 빼어난 것을 보고 오래 문하(집에)에 묵게 하였다. 한 소녀가 있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분칠하고 눈썹을 그려 화장하였는데 이름을 선묘라 하였다.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으나 의상의 마음이 돌이어서 돌릴 수 없었다. 여자가 꾀어도 대답하지 않자 갑자기 도심을 나타내어 앞에서 큰 원을 말하여 맹서하기를 나고나는 세상마다 몸과 마음을 화상(스님)에게 귀의하겠습니다. 하고, 대승을 익히고 배우며 제자가 반드시 단월(신자가)이 되어 공급하고 인연을 의지하겠습니다.”했다. 의상이 곧 빠르게 장안 종남산 지엄스님이 있는 곳으로 가 화엄경을 모두 익혔는데, 그 때 강장국사가 함께 배웠다. 이른 바 은미한 것도 알아내고, 널리 드러난 것도 알아내어 차례가 있고, 요점이 있으니 덕의 병을 가득 채워 바다에 숨어 노닐었다는 것이다.

 

乃議迴程, 傳法開誘, 復至文登舊檀越家, 謝其數稔供施, 便慕商船, 逡巡解纜. 其女善妙, 預爲湘辦集, 法服幷諸什器, 可盈篋笥. 運臨海岸, 湘船已遠. 其女呪之曰, 我本實心, 供養法師. 願是衣篋, 跳入前船. 言訖投篋于駭浪, 有頃疾風吹之若鴻毛耳, 遙望徑跳入船矣. 其女復誓之, 我願是身化爲大龍, 扶翼舳艫, 到國傳法. 於是攘袂, 投身于海. 將知願力難屈, 至誠感神, 果然伸形, 夭矯或躍, 蜿蜒其舟底, 寧達于彼岸. 湘入國之後, 遍歷山川, 於駒塵百濟風馬牛不相及地, 曰此中地靈山秀, 眞轉法輪之所, 無何權宗異部聚徒可半千衆矣.

이에 돌아갈 여정과 법을 전하고 일깨울 것을 의논하여 다시 문등의 옛 단월(신자) 집에 이르러 자주 공급()을 베푼 것에 감사하고 곧 상선을 찾았다. 배가 뒤로 조금씩 밀리며 출발하였다. 그 여자 선묘가 미리 의상을 위해 법복과 여러 기물을 모았는데, 그릇에 가득 채울 만하였다. 운반하여 해안에 이르니 의상의 배가 이미 멀어졌다. 그 여자가 축원하여 말하기를 내가 본래 진실된 마음으로 법사에게 공양합니다. 이 옷상자가 뛰어서 앞의 배에 들기를 원합니다.”하는 말을 마치고 상자를 급물살에 던졌는데 잠간사이에 빠른 바람이 불면서 기러기 털같이 되어 아득히 곧바로 뛰어(날려) 배로 들어갔다. 그 여자가 다시 맹서하기를 내 이 몸이 변해 큰 용이 되어 배를 도와 나라에 이르러 법을 전하기를 원합니다.”했다. 이에 소매를 떨치고 몸을 바다에 던졌다. 장차 원력을 굽히기 어려우나 지극한 정성이 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형상을 편 모습이 구불구불 기세를 내거나 혹은 뛰고, 그 배 바닥을 구불구불하여 편안히 피안(신라)에 이르렀다. 의상이 나라에 들어 간 후 산천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구진과 백제의 (말과 소의 암수가 서로 짝하고 끌리어 유혹하는 일이 서로 미치지 않는 땅)양자 간에 아무관계가 없는 땅에서 말하기를 이 안은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빼어나 참으로 법륜을 굴릴만한 곳인데, 머지않아 권종이부의 모인 무리들이 거의 500여명이나 될 것이다.”했다.

 

湘黙作是念大華嚴敎, 非福善之地, 不可興焉. 時善妙龍恒隨作護, 潛知此念, 乃現大神變於虛空中, 化成巨石. 縱廣一里蓋于伽藍之頂, 作將墮不墮之狀, 群僧驚駭, 罔知攸趣, 四面奔散. 湘遂入寺中, 敷闡斯經, 冬陽夏陰, 不召自至者多矣. 國王欽重, 以田莊奴僕施之. 湘言於王曰, 我法平等, 高下共均, 貴賤同揆. 涅槃經八不淨財, 何莊田之有, 何奴僕之爲. 貧道以法界爲家, 以盂耕待稔, 法身慧命, 藉此而生矣. 湘講樹開花談叢結果, 登堂覩奧者, 則智通·表訓·梵體·道身等數人, 皆啄巨㲉飛出迦留羅鳥焉.

의상이 이에 대화엄교를 묵념하며 복선의 땅이 아니면 흥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 때 선묘용이 항상 따르며 호위하였는데 몰래 이 생각을 알고, 곧 허공중에 크고 신이한 변화를 나타내어 큰 돌을 이루었는데 가로 세로 1리로 절의 꼭대기를 덮고, 장차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을 듯 하는 형상을 지었다, 여러 스님들이 놀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사방으로 달아나 흩어졌다. 의상이 마침내 절 안으로 들어 가 이 경(호엄경?)을 두루 밝혔는데(강의하였는데) 겨울에는 볕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하니 부르지 않았음에도 이르는(오는)자가 많았다. 국왕이 공경하여 전장(토지)과 종을 시주하였다. 의상이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함께 고르니 귀천을 같이 헤아립니다.(생각합니다.) 열반경에 여덟 가지 깨끗하지 못한 재물이 있는데 어찌 장전(전장, 농장)을 소유할 것이며, 어찌 노복을 부리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로서 집을 삼고, 발우로서 농사지어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겠습니다. 법신과 혜명이 이를 의지하여 생겨납니다.”했다. 의상의 강수(講樹)가 꽃을 피우고 담총(談叢)이 열매를 맺어 당에 올라 심오한 깨달음을 본 자로는 지통, 표훈, 범체, 도신 등 여러 사람이었는데, 모두 큰 껍질을 쪼아(깨트리고) 날아나간 가류라조(금시조)였다.

 

湘貴如說行, 講宣之外, 精勤修練, 莊嚴刹海靡憚暄, 又常行義淨洗穢法, 不用巾帨, 立期乾燥而止. 持三法衣甁鉢之餘, 曾無他物, 凡弟子請益不敢造次, 伺其怡寂, 而後啓發. 湘乃隨疑解滯, 必無滓核, 自是已來, 雲遊不定, 稱可我心, 卓錫而居. 學侶蜂屯, 或執筆書紳, 懷鉛札葉, 抄如結集, 錄似載言. 如是義門, 隨弟子爲目, 如云道身章是也, 或以處爲名如云錐穴問答等 數章. 疏皆明華嚴, 性海毘盧遮那無邊契經義例也. 湘終于本國, 塔亦存焉. 號海東華嚴初祖也.

의상은 말과 같이 행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강론을 베푸는 외에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수련하고, 수륙을 장엄하여 따뜻하고 서늘한 것을 꺼리지 않았다. 또 항상 의정의 세예법을 행하여 수건을 쓰지 않고 서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그쳤다. 세 법의와 병, 발을 지닌 것 외에는 일찍이 다른 물건이 없었다. 무릇 제자들이 이익(가르침)을 청하면 감히 급하게 하지 않고 온화하고 고요해지기를 엿본 후에 계발하였다. 의상은 곧 의심을 따라 막힌 것을 풀어주어 반드시 찌꺼기가(미진하 것이) 없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 구름이 노닐 듯 정처 없이 떠돌아 마음에 따라 지팡이를 세워놓고 머물면 배우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무리지어 모여 어떤 이는 붓을 잡아 큰 띠에 쓰고, 어떤 이는 벼루를 잡고 조목별로 기록하였으니 베끼기를 (경전)결집하듯이 하고, (조목별로)기록하기를 (역사를)기록하듯이 하였다. 이 같이 (기록된)의문을 제자에 따라 제목을 삼으니 예를 들면 도신장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혹은 (강설한)곳에 따라 이름하니 예를 들면 추혈문답등 몇 장이다. ()소들은 모두 화엄의 성해와 비로자나의 무변함과 경전의 의례를 밝힌 것들이다. 의상이 본국(신라)에서 마쳤는데(죽었는데) 탑이 또한 여기에 있고, ‘해동화엄초조라 불려졌다.

 

宋高僧傳 卷第四 義解篇 第二之一

송고승전 권제4 의해편 제21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大安)

당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대안)

 

釋元曉 , 姓薛氏. 東海湘州人也. 丱䰂之年, 惠然入法. 隨師稟業, 遊處無恒, 勇擊義圍, 雄橫文陣, 仡仡然桓桓, 進無前卻, 蓋三學之淹通, 彼土謂爲萬人之敵. 精義入神, 爲若此也. 嘗與湘法師入唐, 慕奘三藏·慈恩之門, 厥緣旣差, 息心遊往, 無何發言狂悖, 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 都無定檢. 時國王置百座仁王經大會, 遍搜碩德. 本州以名望擧進之, 諸德惡其爲人, 譖王不納

석원효는 성이 설씨로 동해 상주 사람이다. 상투할 나이인 16(?)의 나이에 흔쾌히 불법에 들어갔다.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고 노니는 곳이 일정함이 없고, (불경의 뜻?)의 경계를 용맹하게 치고, 문장을(씀이) 씩씩하고 거침이 없었다. 용맹하고 굳세어 나아감에 앞에서 막음이 없었다. 대개 삼학에 정통하여 그 땅에서 만인을 대적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불경의)정밀한 뜻이 신의 경지에 들어감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의상 법사와 당에 들어가려 했는데 현장스님과 자은()의 문을 흠모해서였다. 그 인연이 어긋난 후 마음을 쉬며 노닐었으니 어찌 말하는 것이 분별없고 도리에 어긋나니 자취가 어그러지고 거침을 보이는 것이 없었겠는가? 거사와 함께 술집과 기생집에 들어가고, 지공과 같이 금 칼과 쇠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 혹은 章疏를 짓는 것으로서 잡화(화엄)을 강론하고, 혹은 거문고를 어루만지는 것으로서 사당에서 즐겼다. 혹은 거리의 임시숙소에서 묵고, 혹은 산수에서 좌선하고, 뜻을 근기에 따라 맡기니 모두 정해진 행동이 없었다. 그 때 국왕이 백좌인왕경대회를 두고, 두루 높은 덕의 스님을 찾았다. 본주(상주)에서 명망으로서 천거하였는데 여러 스님들이 그 사람됨을 미워하여 왕에게 참소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居無何. 王之夫人, 腦嬰癰腫, 醫工絶驗, 王及王子·臣屬, 禱請山川·靈祠, 無所不至. 有巫覡言曰, 苟遣人 往他國求藥, 是疾方瘳, 王乃發使, 泛海入唐, 募其醫術. 溟漲之中, 忽見一翁, 由波濤躍出登舟, 邀使人入海, 覩宮殿嚴麗. 見龍王, 王名鈐海. 謂使者曰, 汝國夫人, 是靑帝第三女也. 我宮中先有金剛三昧經, 乃二覺圓通示菩薩行也. 今託仗夫人之病爲增上緣, 欲附此經出, 彼國流布耳. 於是將三十來紙, 重沓散經, 付授使人.

얼마되지 않아 왕의 부인이 머리에 종기가 생겼다. 의원의(치료가) 효험이 없었다. 왕과 왕자, 신하들이 산천과 신령스러운 사당에 기도할 것을 청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 무당이 말하기를 만일 사람을 보내 다른 나라에 가 약을 구하여야 이 병을 비로소 낫게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왕이 이에 사신을 내어 바다에 떠 당에 들어 가 그 의술(의원)을 찾게 하였다. 어둡고 물결치는 ()속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파도를 따라 뛰어나와 배에 올라 사신을 맞아 바다에 들어갔는데 궁전을 보니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용왕을 만났는데 왕의 이름은 검해였다. 사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부인은 이 청제의 셋째 딸입니다. 우리 궁중에는 전부터 금강삼매경론이 있으니 곧 이각이 원만하게 통하고 보살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부인의 병에 의지하여 윗 인연을 더하려하여 이 경에 붙어 나오고자 하니 그 나라에 유포하려 할 뿐입니다.”했다. 이에 30장의 겹쳐지고 흩어진 경전을 사신에게 주었다.

 

復曰, 此經渡海中, 恐罹魔事, 王令持刀裂使人腨腸而內于中, 用蠟紙纏縢以藥傅之, 其腨如故. 龍王言, 可令大安聖者, 銓次綴縫, 請元曉法師, 造疏講釋之, 夫人疾愈無疑. 假使雪山 阿伽陀藥力, 亦不過是. 龍王送出海面, 遂登舟歸國, 時王聞而歡喜. 乃先召大安聖者黏次焉, 大安者不測之人也. 形服特異, 恒在市廛, 擊銅鉢唱, 言大安大安之聲, 故號之也. 王命安, 安云, 但將經來 不願入王宮閾.

다시 말하기를 이 경이 바다를 건너는 중에 마구니의 일에 걸릴까 두렵다하였다. 왕이 칼을 가지고 사신의 천장(장딴지)을 가르고 안에 넣게 하고, 밀랍종이를 써 얽어 봉하고 약을 펴 바르게 하였더니 장딴지가 전과 같아졌다. 용왕이 말하기를 가령 대안성자로 하여금 차례를 정해 꿰매게 하고, 원효법사를 청해 소를 지어 강론하여 풀게 하면 부인의 병이 나을 것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사 설산의 아가타의 약의 힘일지라도 또한 이보다 낫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용왕이 바다 위로 나와 보내니 마침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이에 먼저 대안 성자를 불러 붙이기를 차례로 하게 했다. 대안 성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 형상과 옷이 특이하고 항상 시장거리에 있으면서 구리 발을 치며 외치기를 대안, 대안의 소리를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름한 것이다. 왕이 대안에게 명하니 대안이 말하기를 단지 경만 가져오시오. 왕의 궁 안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했다.

 

安得經排來成八品, 皆合佛意. 安曰, 速將付元曉講, 餘人則否. 曉受斯經, 正在本生湘州也. 謂使人曰, 此經以本始二覺爲宗, 爲我備角乘將案几. 在兩角之間, 置其筆硯, 始終於牛車造疏成五卷. 王請剋日於黃龍寺敷演, 時有薄徒竊盜新疏. 以事白王, 延于三日, 重錄成三卷, 號爲略疏. 乎王···, 雲擁法堂, 曉乃宣吐有儀解紛可則, 稱揚彈指聲沸于空. 曉復昌言曰, 昔日採百椽時, 雖不預會, 今朝橫一棟處, 唯我獨能. 時諸名德, 俯顔慚色, 伏膺懺悔焉. 初曉示跡, 無恒化人不定, 或擲盤而救衆, 或噀水而撲焚, 或數處現形, 或六方告滅, 亦盃渡·誌公之倫歟. 其於解性覽無不明矣. 疏有廣略二本, 俱行本土, 略本流入中華. 後有翻經三藏, 改之爲論焉.

대안이 경을 얻어 늘어놓아 8품을 이루었는데 모두 부처의 뜻에 부합하였다. 대안이 말하기를 빨리 원효에게 주어 강론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했다. 원효가 이 경을 받은 것은 바로 본래 태어난 상주에 있을 때였다. 사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경은 본각, 시각 2각으로서 종지를 삼는다. 나를 위해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고, 책상을 두 뿔이 있는 사이에 놓고 붓과 벼루를 두십시오.”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가 끄는 수레에서 를 지어 다섯 권을 이루었다. 왕이 날짜를 정해 황룡사에서 쉽게 설명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때 보잘것없는 무리들이 새로 지은 소를 훔쳐갔다. 이 일을 왕에게 아뢰어 3일을 연기하고, 거듭 기록하여 세 권을 이루어 약소라 하였다. , 신하, , 속인들에 이르기까지 구름이 법당을 둘러싸듯 하였다. 원효가 이에 말함에(발언함에) 위의가 있고 어지러운 것을 푸는 것이 법칙으로 삼을 만하였다. 칭찬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공중에서 들끓었다. 원효가 다시 크게 말하기를(위덕이 있는 말로 말하기를) “지난 날 100개의 서까래를 모을 때(건축할 때)는 비록 모임에 참여치 못하였으나 오늘 아침 하나의 들보를 가로놓는 곳은 오직 나만 홀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하니 그 때 여러 이름 있는 스님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고, 가슴깊이 참회하였다. 처음 원효가 자취를 보인 것이 항상함이 없어 사람을 교화하여 일정하지 않았다. 혹 소반을 던져 무리를 구하고, 혹은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고, 혹은 몇 곳에 형상을 나타내고, 혹은 모든 곳에 사라질 것(죽을 것)을 알리기도 하였으니 또한 배도와 지공의 무리라 할 것이다. 그 본성을 해석한 것을 살펴보면 분명하지 않음이 없었다. ‘에는 광(), () 2본이 있는데 모두 본토(신라)에서 유행하였고, 약본은 중국에 흘러 들어왔다. 후에 번경스님이 그것을 고쳐 으로 하였다.

 

系曰. 海龍之宮, 自何而有經本耶. 通曰, 經云, 龍王宮殿中, 有七寶塔, 諸佛所說, 諸深義別, 有七寶篋滿中盛之. 謂十二因緣, 總持三昧等, 良以此經, 合行世間, 復顯大安·曉公神異, 乃使夫人之疾, 爲起敎之大端者也.

논하여 말한다. 해룡의 궁전은 어디에서 경본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두루 말하면 경전에 말하기를 용왕 궁전 안에는 칠보탑이 있다.” 하고, 여러 부처님이 말씀하신 여러 깊은 교의가 별도로 칠보의 상자 안에 담겨 있으니 ‘12인연’, ‘총지삼매등을 이른다. 뛰어난 이 경이 세간에 합하여 유행하고, 다시 대안 원효 공의 신이함으로 나타났으니 곧 부인의 병으로 하여금 가르침의 큰 단서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宋高僧傳 卷第十三 習禪篇 第三之六

송고승전 권제13, 습선편 제36

 

晋永興永安院善靜傳(靈照)

진 영흥 영안원 선정전(영조)

 

杭州龍華寺 釋靈照 , 本高麗國人也, 重譯而來, 學其祖法. 入乎閩越, 得心於雪峰, 苦志參陪, 以節儉勤于衆務, 號照布納焉. 千衆畏服, 而言語似涉島夷, 性介特以恬淡自持. 初住齊雲山, 次居越州鑑淸院. 嘗秖對副使皮光業, 語不相投, 被擧擯徙龍興焉. 及湖州太守錢公, 造報慈院請住, 禪徒翕然, 吳會間僧捨三衣披五納者, 不可勝計. 忠獻王錢氏造龍華寺, 迎取金華梁傅翕大士靈骨道具, 于此寺樹塔, 命照住持焉, 終于此寺, 遷塔大慈山之峯.

항주 용화사 석 영조는 본래 고려국 사람이다. 거듭 통역을 거쳐 와서 그 조법을 배웠다. 민월 지방에 들어 가 설봉에게서 마음을 얻고, 그 심지를 굳게 하고 참여하였다. 절약하고 검소함으로써 여러 일들에 부지런하여 조포납이라 불렸다. 많은 무리(千衆)들이 두려워하고 인정하였다. 언어는 오랑캐(도이)와 비슷하나 성품이 고고하여 시속을 따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함으로서 제자리를 지켰다. 처음 제운산에서 살다 월주 감청원에서 살았다. 일찍이 부사 피광업과 마주하였는데(피광업을 만났는데) 말이 서로 부합하지 않아 죄 없이 배척당하여 용흥()로 옮겼다. 호주 태수 전공이 이르자 나아가 보자원에 주석할 것을 청하니 선종의 승려들이 흡족하게 여겼다. 오나라 서울에서(형주와 양주 사이에서) 세 가지 가사를 바치고, 다섯 가지 누더기 옷을 헤친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충헌왕 전씨가 용화사를 짓고 김화의 양나라 부흡대사의 신령스러운 뼈(靈骨)와 도구를 가져다 이 절에 탑을 세워 안치하고 영조로 하여금 주지하게 하였으며, 이절에서 마치니(돌아 가셨다. 입적하였다.) 탑을 대자산 봉우리로 옮겼다.

 

宋高僧傳 卷第十四 明律篇 第四之一

송고승전 권제14, 명률펀 제41

 

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

당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

 

釋眞表 , 百濟人也. 家在金山, 世爲弋獵, 表多蹻捷, 弓矢最便. 當開元中, 逐獸之餘, 憩於田畎間 折柳條貫蝦蟆, 成串置於水中, 擬爲食調. 遂入山網捕, 因逐鹿 由山北路歸家, 全忘取貫蟆歟. 至明年春, 獵次聞蟆鳴, 就水見去, 載所貫三十許蝦蟆猶活. 表於時歎惋, 自責曰, 苦哉, 何爲口腹, 令彼經年受苦. 乃絶柳條, 徐輕放縱, 因發意出家. 自思惟曰, 我若堂下辭, 親室中割愛, 難離慾海, 莫揭愚籠. 由是逃入深山, 以刀截髮, 苦到懺悔, 擧身撲地, 志求戒法, 誓願要期彌勒菩薩, 授我戒法也.

석 진표는 백제 사람으로 집은 금산에 있었다. 대대로 사냥을 하였는데 진표는 발이 빠르고 민첩하며 활을 잘 쏘았다. 개원 연간에 짐승을 쫒다가 밭이랑 사이에서 쉬면서 버들가지를 꺽어 청개구리를 꿰어 궤미를 만들어 물 안에 두고는 반찬을 만들려 생각하였다. 마침내 산에 들어 가 그물로 짐승을 잡았는데 사슴을 쫓다가 산 북쪽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면서 잡아서 꿰어두었던 청개구리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다음해 봄이 되어 사냥을 가자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물에 나아가 보러 가니 꿰어진 30여 마리의 청개구리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진표가 이에 탄식하며 스스로를 꾸짖어 말하기를 괴롭구나! 어찌 입과 배를 위하여 그들(개구리)로 하여금 해가 지나도록 괴로움을 받게 하였는가!”하고는 곧 버드나무 가지를 잘랐더니 천천히 (발을)가볍게 놀려서 거리낌 없이 갔다. 이로 인하여 출가할 뜻을 내었다.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대청 아래서 (부모에게)하직한다면 어버이가 아쉬움을 무릅쓰고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이니 慾海를 떠나기 어려울 것이므로 어리석음의 조롱(새장)을 걷을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 때문에 도망하여 깊은 산에 들어 가 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괴로움으로 참회를 지극히 하고, 몸을 들어 땅을 치며 계법을 구하는데 뜻을 두고, 미륵보살을 만나 나에게 계법을 줄 것을 서원하였다.

 

夜倍日功, 遶旋叩搕, 心心無間, 念念翹勤. 經於七宵, 詰旦見地藏菩薩, 手搖金錫爲表策發敎發戒, 緣作受前方便. 感斯瑞應, 歎喜遍身, 勇猛過前, 二七日滿, 有大鬼現可怖相, 而推表墜於巖下, 身無所傷. 匍匐就登石壇上, 加復魔相未休, 百端千緖. 至第三七日質明, 有吉祥鳥鳴曰, 菩薩來也, 乃見白雲, 若浸粉然, 更無高下, 山川平滿, 成銀色世界. 兜率天主, 逶迤自在, 儀衛陸離, 圍遶石壇, 香風華雨, 且非凡世之景物焉.

밤에는 낮의 일을 배로 하여 돌면서 단단한 것에 (몸을) 부딪치며, 마음마다 틈이 없게 하고, 생각마다 부지런히 하였다. 7일 밤이 지난 이른 아침에 지장보살이 나타났는데 손으로 쇠 지팡이를 흔들며, 진표를 경계(?)하기 위해 가르침을 일으키고, 계를 받는 계체(戒體)를 발하여 얻게 하고 인하여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수단(前方便)을 지어 받게 하였다. 이 상서로운 징조에 감동하여 탄식하고 기뻐하며 온 몸으로 용맹하게 하기를 전보다 더하게 했다. 21일을 채우자 큰 귀신이 두려워할 만한 모습으로 나타나 진표를 밀어 바위 아래로 떨어뜨렸으나 몸을 다친 바가 없었다. (진표가)기어서 석단 위로 올라갔는데 다시 마귀의 형상이 그치지 않아 일일이 가려내지 못하였다.(여러 가지 형상으로 나타났다.) 21일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길상조가 울며 말하기를 보살이 온다.”하였다. 곧 흰 구름을 보았는데 색이 스며들듯하고, 다시 높고 낮음이 없어 산천에 고르게 가득하여 은색의 세계를 이루었다. 도솔천의 주인이 멀리(逶迤?) 자연스럽게 있었는데, 위엄 있고 엄숙하며, 여러 빛이 뒤섞여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석단을 돌았는데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꽃비가 내리니 또한 평범한 세상의 경치와 물건이 아니었다,

 

爾時慈氏, 徐步而行, 至於壇所, 垂手摩表頂曰, 善哉大丈夫, 求戒如是, 至於再至於三. 蘇迷盧可, 手攘而卻, 爾心終不退, 乃爲授法. 表身心和悅, 猶如三禪, 意識與樂, 根相應也, 四萬二千福河常流, 一切功德, 尋發天眼焉. 慈氏躬授三法衣瓦鉢, 復賜名曰眞表. 又於膝下出二物, 非牙非玉 乃籤檢之制也, 一題曰九者, 一題曰八者, 各二字. 付度表云, 若人求戒, 當先悔罪, 罪福則持犯性也.

이 때 자씨(미륵불)가 천천히 걸어 와 단이 있는 곳에 이르러 손을 드리워 진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대장부가 계를 구하는 것이 이 같이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렀다. 수미산은 손으로 밀칠 수 있을 것이나 너의 마음은 끝내 물리치지 못하니 곧 법을 준다.”하였다. 진표가 몸과 마음으로 기뻐함이 마치 삼선(三禪)과 같아지고, 의식이 함께 즐거워하여 근에 상응하는 것(根 相應) 같았다. 42천 복의 강이 항상 흐르고, 일체 공덕과 마음으로 사유하는() 天眼이 여기에서 열렸다. 자씨(미륵불)가 직접 3법의와 질그릇 발을 주고 다시 이름을 내려 진표라 했다. 또 무릎 아래에서 두 가지 물건을 내었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도 아니니 곧 제비()를 뽑는 제도였는데 하나에는 9라 썼고, 하나에는 8이라 쓰여 있었다. 진표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만약 사람들이 계를 구하거든 마땅히 먼저 죄를 뉘우치게 하라. 죄와 복은 곧 본성을 지니는 것과 본성을 범하는 것이다.” 했다.

 

更加一百八籤, 籤上署百八煩惱名目. 如來戒人, 或九十日, 或四十日, 或三七日, 行懺苦到精進, 期滿限終, 將九八二籤參, 合百八者, 佛前望空, 而擲其籤, 墮地以驗罪滅不滅之相. 若百八籤, 飛逗四畔, 唯八九二籤卓然壇心而立者, 卽得上上品戒焉. 若衆籤雖遠, 或一二來, 觸九八籤, 觀是何煩惱名. 抑令前人重覆懺悔已.

다시 108의 제비()를 더하고, 제비() 위에 108번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여래가 사람에 계를 줄 때는 혹 90, 혹은 40, 혹은 21일 참회의 괴로움을 행하여 정진에 이르고, 기일을 채우면 마치고, 9, 8 두 제비()에다 108개 번뇌 제비()을 더해 부처님 앞에서 공중을 바라보고 그 제비()를 던져 땅에 떨어진 것으로서 죄의 없어짐과 없어지지 않음의 상을 시험한다. 만약 108 제비()가 사방으로 날아 오직 8, 9 제비()만 우뚝하게 단의 가운데 서면 곧 상상품계를 얻는다. 만약 여러 제비들이 비록 멀리 있고, 1, 2개가 8, 9 제비()에 부딪치면 집어 이것이 어떤 번뇌의 이름인지를 관찰하고, 다시 거듭 엎어(엎드려) 참회하게 한다.

 

正將重悔煩惱, 籤和九八者, 擲其煩惱籤, 去者名中品戒焉. 若衆籤埋, 覆九八者, 則罪不滅, 不得戒也. 設加懺悔過九十日得下品戒焉. 慈氏重告誨云, 八者新熏也, 九者本有焉, 囑累已 天仗旣迴山川雲霽. 於是持天衣執天鉢, 猶如五夏比丘. 徇道下山, 草木爲其低垂覆路, 殊無溪谷高下之別. 飛禽鷙獸, 馴伏步前, 又聞空中唱告村落聚邑, 言菩薩出山來, 何不迎接.

바로 거듭 번뇌를 뉘우치게 하고, 제비()9, 8과 함께 그 번뇌 제비()를 던져 (제비가) 떠나게 되면 중품계이다. 만약 여러 제비()98을 묻고 덮으면 곧 죄가 사라지지 않아 계를 얻지 못한다. 가령 참회가 90일을 지나면 하품계를 얻는다. 자씨(미륵불)가 거듭 가르쳐 말하기를 “8신훈이고, 9본유이다.”했다 부탁을 마치고 천장이 산천을 돌아 사라졌다.(雲霽?) 이에 천의를 지니고 천발을 잡고도 오히려 다섯 여름을 비구와 같이 (수행)하였다.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는데 초목이 그를 위해 낮게 드리우고 길을 덮어 골짜기의 높고 낮음의 다른 구별이 없었다. , 짐승, 맹금이 걸음 앞에 순하게 엎드렸다. 또 공중에서 촌락과 고을에 알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보살이 산을 나와 오는데 어찌하여 영접하지 않는가?”하였다.

 

時則人民男女布髮掩泥者, 脫衣覆路者, 氈罽氍毹承足者, 華絪美褥塡坑者, 表咸曲副人情一一迪踐. 有女子提半端白㲲覆於途中. 表似驚忙之色, 迴避別行, 女子怪其不平等. 表曰, 吾非無慈不均也, 適觀氎縷間皆是狶, 吾慮傷生 避其誤犯耳. 原其女子本屠家, 販買得此布也. 自爾常有二虎, 左右隨行. 表語之曰, 吾不入郛郭, 汝可導引, 至可修行處, 則乃緩步, 而行三十來里, 就一山坡蹲跽於前. 時則挂錫樹枝, 敷草端坐, 四望信士, 不勸自來, 同造伽藍, 號金山寺焉. 後人求戒, 年年懺, 罪者絶多, 今影堂中, 道具存焉.

그 때 곧 인민의 남녀가 머리를 펴 진흙을 가리는 자, 옷을 벗어 길을 덮는 자 천과 담요로 발을 덮는 자, 빛나는 깔개와 아름다운 요로 구덩이를 메우는 자가 있었다. 진표가 모두 곡진히 인정에 부응하여 일일이 밟고 나아갔다. 어떤 여자가 반단의 흰 모포로 길 가운데를 덮자 진표가 놀라고 조급한 듯한 기색으로 피해 따로 가니 여자가 그 고르지(평등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겼다. 진표가 말하기를 내가 자비가 없어 균등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직물의 실 사이가 모두 이 돼지 새끼인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해칠까 염려하여 그 잘못을 범하는 것을 피하였을 뿐입니다.”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본래 도축하는 집인데 (고기를) 팔아 이 포를 얻은() 것이었다. 이로부터 항상 두 마리 범이 있어 좌우에서 따라 갔다. 진표가 말하기를 나는 성곽(도시)에 들어가지 않으니 너희들이 인도하라.”하였다. 수행할 만한 곳에 이르면 곧 천천히 걸었다. 30리쯤 가서 한 산언덕으로 나아가(올라) 앞에 쭈그리고 꿇어앉았다. 이에 지팡이를 나뭇가지에 걸고 풀을 펴고 단정히 앉으니 사방에서 신자들이 바라보고 권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와 함께 가람을 짓고 금산사라 불렀다. 후세 사람들이 계를 구하여 해마다 참회하여 죄지은 자들이 (죄를)많이 끊었는데 지금도 영당 안에 도구가 보존되어 있다.

 

系曰, 表公革心變行, 一日千里, 果得慈氏, 爲授戒法, 此五十受中何受邪. 通曰, 近上法見, 諦自誓也, 發天眼通, 是證初二果也, 非諦理現觀而何. 專據石壇, 與多子塔前, 自誓同也. 或曰, 所授籤檢, 以驗罪滅之相, 諸聖敎無文, 莫同諸天傳授, 或魔鬼所爲不可爲後法乎. 通曰, 若彰善惡利益不殊, 彌勒天主, 是天傳授, 非魔必矣. 諸聖敎中有懺罪求徵祥證其罪滅不滅. 然其佛滅度, 彌勒降閻浮說瑜伽, 豈可不爲後世法耶. 十誦律云, 雖非佛制諸方爲淸淨者不得不行也.

논하여 말한다. 진표 공이 마음과 행동을 고쳐 새롭게 바꾸고 하루에 천리를 달리니 과연 자씨(미륵불)가 계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5계와 10계를 받은 가운데 무엇을 받았는가? 통틀어 말한다. 위를 가까이 하여 법을 보고, 스스로 맹서한 것을 살펴 천안통을 연 것은 초2과를 증명한 것이다. 이치를 살피고 지혜로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명료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오직 석단을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과 탑 앞에서 스스로 맹서를 같이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주어진 첨검(籤檢)으로 죄가 없어지는 상을 징험하나,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은 글이 없어 여러 하늘이 전해 준 것과는 같지 않다. 어떤 사람이 마귀가 하는 바를 후법으로 삼을 수 없는가.”했다. 통틀어 말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착한 행실을 드러내어 칭찬하고, 악을 괴로워하며 이익을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미륵천주는 하늘이 전해 준 것이니 마구니가 아님이 틀림없다. 여러 성스러운 가르침 가운데 죄를 참회하고, 징계를 구함은 조짐으로 죄가 없어지거나 없어지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멸도 후에 미륵이 염부제에 내려와 유가를 설한 것이 어찌 후세의 법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송률에 비록 부처님이 지은 것이 아닐지라도 여러 방면을 청정하게 하는 자가 부득이 행하는 것이다.”했다.

 

宋高僧傳 卷第十八 感通篇 第六之一

송고승전 권재18, 감통편 제61

 

陳新羅國玄光傳

진신라국현광전

 

釋玄光者, 海東熊州人也. 少而穎悟, 頓厭俗塵, 決求名師, 專修梵行. 夫成長, 願越滄溟, 求中土禪法. 於是觀光陳國利往衡山, 見思大和尙開物成化, 神解相參. 思師察其所由, 密授法華安樂行門, 光利若神錐無堅不犯, 新猶劫貝有染皆鮮, 稟而奉行, 勤而罔忒, 俄證法華三昧, 請求印可, 思爲證之. 汝之所證, 眞實不虛, 善護念之, 令法增長. 汝還本土施設善權, 好負螟蛉皆成蜾蠃.

석 현광은 해동 웅주사람이다. 어려서 총명하였는데 갑자기 속진(세속의 먼지를)을 싫어하여 이름 있는 스승을 찾아 오로지 범행을 닦을 것을 구하였다. 성장함에 이르러 넓고 큰 바다를 건너 중토(중국)에서 선법 구할 것을 원하였다. 이에 진나라를 관광하고 빨리 형산에 가 ()사 대화상이 사물을 열고 교화를 이루는 신 같은 풀이를 서로 참고하는 것을 보았다. 혜사 스님이 그 말미암는 바를 살피고 비밀히 법화경안락행문을 주었는데 현광스님은 날카롭기가 신의 송곳 같아서 단단하여도 뚫지 못함(不犯)이 없었다.(이해하지 못함이 없었다.) 새로워야 오히려 옷의 물듦이 모두 선명하다. ()받아 받들어 행하는데 부지런히 하여 의심함이 없었는데 갑자기 법화삼매를 깨닫고는 인정을 청하였다. 혜사가 증명하였다.(인정하였다.) (혜사가) 네가 깨달은 바는 진실로 헛되지 않으니 잘 보호하고 생각하여 법이 더욱 발전하게 하라. 너는 본토(신라)로 돌아 가 훌륭한 수단을 베풀어 명령(배추벌레?) 업기를 좋아하는 (나나니벌이) 모두 나나니벌을 이루게 하라.(모두 깨달음을 이루게 하라.)했다.

 

光禮而垂泣, 自爾返錫江南. 屬本國舟艦, 附載離岸, 時則綵雲亂目雅樂沸空, 絳節霓旌, 傳呼而至, 空中聲云. 天帝召海東玄光禪師. 光拱手避讓, 唯見靑衣前導. 少選入宮城, 且非人間官府. 羽衛之設也, 無非鱗介, 參雜鬼神. 或曰, 今日天帝, 降龍王宮, 請師說親證法門, 吾曹水府, 蒙師利益. 旣登寶殿, 次陟高臺, 如問而談, 略經七日, 然後王躬送別.

현광이 예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며 이로부터 돌아 가 강남에 머물렀다. 본국(신라)에 속하는 배를 얻어 타고 바닷가를 떠났다. 그때 비단 같은 구름이 눈을 어지럽히고 좋은 음악이 공중에 분분히 일었다. 신선이 지닌 붉은 부절과 오색의 깃발이 전해져 이르고 공중에 소리가 있어 천제가 해동의 현광 선사를 부른다.”했다. 현광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피하고 사양하였는데 오직 (현관에게 만)청의를 입은 이가 앞에서 인도하는 것이 보였다. 잠간 사이에 궁성에 들어갔는데 인간의 궁궐이 아니었다. 둘러싸 보호를 베푸는 것은 물고기와 조개가 아님이 없고, 여러 귀신들이 참여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오늘 천제가 용왕궁에 내려 와 스님이 직접 깨달은 법문을 설할 것을 청하여 우리 조수부가 스님의 이익을 입습니다.”했다. 보전에 오른 뒤 차례로 높은 대에 올라 물음에 따라 말하여 대략 7일이 지난 후 ()왕이 직접 송별하였다.

 

其船泛洋不進, 光復登船, 船人謂經半日而已. 光歸熊州翁山, 卓錫結茅, 乃成梵刹, 同聲相應得法者蟄戶爰開, 樂小迴心慕羶者螘連倏. 其如升堂受莂者一人, 入火光三昧一人, 入水光三昧二人. 互得其二種法門, 從發者彰三昧名耳. 其諸門生, 譬如衆鳥, 附須彌山, 皆同一色也. 光末之滅, 罔知攸往. 南嶽祖構影堂, 內圖二十八人, 光居一焉. 天台國淸寺祖堂亦然.

그 배는 바다에 뜬 채 나아가지 못하다가 현광이 배에 오르자 뱃사람들이 반일이 지났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현광이 웅주 옹산에 돌아 가 석장을 세우고 띠 집을 엮으니 곧 범찰()이 이루어졌다.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니(같은 무리끼리 서로 통하여 자연히 모여들어) 법을 얻으려 자가 집에 숨어 있다가 이에 (문을) 열었고, 조금 마음을 돌리고 양고기에 개미가 달려드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이 개미처럼 연이어 갑자기 이르렀다. 당에 올라 부절을 받은 자가 1, 화광삼매에 든 이가 1, 수광삼매에 든 이가 2인이었다. 함께 2종 법문을 얻어 따라 발한 자가 삼매 이름을 밝게 드러냈을 뿐이다. 그 제 문생들은 비유하면 수미산에 붙은 뭇 새들이 모두 같은 색인 것과 같다. 현광 말년의 죽음은 간 바를 알지 못한다. 남악의 조(회희)가 영당을 엮고 안에 28인을 그렸는데 현광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천태산 국청사 조당(祖堂)에도 또한 그러하다.

 

系曰, 夫約佛滅後, 驗入道之人, 以敎理行果, 四法明之, 則無逃隱矣. 去聖彌近者, 修行成果位證也, 去聖稍遙者, 學敎易見理親也, 其更綿邈, 學敎不精見理非諦. 夫一念不生, 前後際斷, 斯頓心成佛也, 理佛具足, 行布施行, 曾未嘗述行佛, 具體而微. 東夏自六祖已來, 多談禪理, 少談禪行焉, 非南能不說行, 且令見道如救頭然. 之故南岳 思師切在兼修乘戒俱急. 是以學者, 驗諸行果, 其如入火光三昧者. 處胎經中, 以禪定攝意, 入火界三昧, 刹土洞然, 愚夫謂是遭焚, 若入水界三昧, 愚夫見謂爲水投物于中. 菩薩心如虛空不覺觸嬈, 此非二乘所能究盡也. 斯乃急於行果焉, 無令口說, 而身意不修, 何由助道耶.

논하여 말한다. 대략 부처님 입적 후 도에 들어가는 사람을 징험하고, , , 수행과 과보로서 4법을 밝혀 곧 도망하여 숨음이 없었다. 성인으로부터 더욱 가까운 자는 수행으로 진리를 깨달아 얻은 자리를 이룬 것을 증명하였다. 성인에서 점점 떨어지는 자는 배우고 가르침에 이치와 친함을 쉽게 보고, 그 고침이 매우 멀고 아득한 자는 배움과 가르침이 정밀하지 못해 이치가 진리가 아님을 본다. 대저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앞뒤가 끊어지니 이 마음을 가지런히 하는 것이 성불이다. 이치는 부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행함을 펴고, 시행하는 것이 일찍이 부처를 행함을 전하지 않고, 몸에 갖추어졌으되 미미하였다. 동하가 6조 이래로 선리를 많이 말하였고, 선행을 말한 것은 적다. 남능이 행함을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또한 도를 보기를 머리 구하는 것과 같이하게 한 것이다. 돌아가신 남악에게 가서 스승을 절실히 생각한 것은 계 지키기를 엄중히 하고 교법 듣기를 좋아하는 것을 겸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는 모든 행과 과를 증명하기를 화광삼매에 든 것처럼 해야 한다. (보살)처태경안에 선정으로서 뜻을 거두고, ‘화계삼매에 들면 부처가 있는 나라(刹土)가 환해진다.(명확해진다) 어리석은 이는 이를 불타는 것을 만났다. 하고, 만약 수계삼매에 들어가면 어리석은 이가 보고 물 안에 물건을 던진다. 한다. 보살심은 허공과 같아 닿고, 번거로운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이승법이 능히 다 궁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는 곧 행과를 급하게 하여 말이 없게 할지라도 몸과 뜻이 닦여지지 않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도를 도울 수 있겠는가?

 

 

宋高僧傳 卷第十九 感通篇 第六之二

송고승전 권제19, 감통편 제62

 

唐成都淨衆寺無相傳(智詵禪師)

당성도 정중사 무상전(지선선사)

 

釋無相 , 本新羅國人也. 是彼土王第三子, 於本國正朔年月生. 於群南寺落髮登戒, 以開元十六年(728), 泛東溟至于中國到京. 玄宗召見隷於禪定寺, 後入蜀資中謁智詵禪師. 有處寂者, 異人也, 則天曾召入宮, 賜磨納九條衣, 事必懸知, 且無差跌. 相未至之前, 寂曰, 外來之賓, 明當見矣, 汝曹宜洒掃以待, 間一日果至, 寂公與號曰無相. 中夜授與摩納衣, 如是入深溪谷, 巖下坐禪, 有黑犢二交角盤礴於座下, 近身甚急毛手入其袖, 其冷如冰捫摸至腹, 相殊不傾動, 每入定多是五日爲度.

석 무상은 본래 신라 사람이다. 이는 그 땅 왕의 셋째 아들이다. 본국(신라) 정삭 년 월에 태어났다. 군남사에서 머리를 깍고 계에 올랐다. 개원 16(728) 동명에서 바다에 떠 중국에 이르고 서울에 이르렀다. 현종이 불러 보고, 선정사에 속하게 했다. 후에 촉 자중에 들어 가 지선선사를 뵈었다. 처적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기이한 사람이다. 측천무후가 불러 궁에 들어가니 마납가사 9벌을 내렸으니 일은 반드시 멀리서 알 수 있고, 또 일의 실패가 없었다. 무상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처적이 말하기를 밖에서 손님이 올 것이니 명당에서 볼 것이다. 너희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것으로서 기다리라.”했는데 과연 (손님이)하루 사이에 이르렀다. 처적 공이 호를 주어 무상이라 했다. 한 밤 중에 마납의를 주니 이와 같이 깊은 계곡에 들어 가 바위 아래 앉아 선정에 들었다. 검은 송아지 두 마리가 있어 뿔을 맞대고 꿇어 앉아 있었다. 몸에 가까이 하기는 털 손을 소매에 넣기를 매우 급하게 하였고, 차갑기는 어름을 더듬어 배에 이른 것과 같았다. 기울고 움직이지 않음이 서로 달라 매번 선정에 들면 대개 5일을 한도로 삼았다.

 

忽雪深有二猛獸來, 相自洗拭裸臥其前, 願以身施其食, 二獸從頭至足嗅匝而去. 往往夜間坐床下搦虎鬚毛, 旣而山居稍久衣破髮長, 獵者疑是異獸將射之復止. 後來入城市, 晝在冢間夜坐樹下, 眞行杜多之行也, 人漸見重, 爲構精舍於亂墓前. 長史章仇兼瓊來禮謁之. 屬明皇違難入蜀, 迎相入內殿供禮之. 時成都縣令楊翌, 疑其妖惑, 乃帖追至, 命徒二十餘人曳之, 徒近相身, 一皆戰慄, 心神俱失.

홀연히 눈이 많이 내렸는데 두 마리 맹수가 와 서로 스스로 씻겨주어 맨몸으로 그 앞에 누워 몸으로서 그 밥을 베풀어 줄 것을 원하였다. 두 짐승이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냄새 맡기를 두루하고 갔다. 자주 밤중에 상아래 앉아 범의 수염 털을 잡아 쥐었다. 이윽고 산에서 산지 오래되어 옷이 헤지고 머리털이 자라나니 사냥하는 자들이 기이한 짐승으로 의심하여 장차 활을 쏘려다 그만두었다. 후에 돌아와 성시에 들어가는데 낮에는 무덤 사이에 있고, 밤에는 나무 아래 앉아 참된 두타의 행을 행하여 사람들이 점점 중함을 받고, 어지러운 묘 앞에 정사()를 엮었다. 장사 장구겸 경이 와 예로 뵈었다. 명황(현종)이 난을 떠나(피해) 촉에 들어갔다. (현종이 무상을)맞아 내전으로 들어 가 예로 받들었다. 그 때 성도 현령 양익이 그 요사스럽고 의혹함을 의심하여 이에 붙여 쫓아 이르러무리 20여인으로 하여금 끌게 하였다. 무리들이 서로 몸을 가까이하였는데 모두 두려워하여 심신을 잃었다.

 

頃之大風卒起, 沙石飛颺, 直入廳事, 飄簾卷幕. 楊翌叩頭拜伏, 而不敢語, 畢風止, 奉送舊所. 由是遂勸檀越造淨衆·大慈·菩提·寧國等寺, 外邑蘭若鐘塔不可悉數. 先居淨衆本院, 後號松溪是歟. 相至成都也, 忽有一力士, 稱捨力伐柴, 供僧廚用. 相之弟本國新爲王矣, 懼其卻迴, 其位危殆, 將遣刺客來屠之, 相已冥知矣. 忽日供柴賢者, 暫來謂之曰, 今夜有客曰灼然, 又曰, 莫傷佛子, 至夜薪者, 持刀挾席, 坐禪座之側, 逡巡覺壁上似有物下.

얼마 후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 모래와 돌들이 날렸다. 곧 바로 들어 가 일을 들었는데 주렴이 날리고 막을 말았다. 양익이 머리를 두드리며 절하고 엎드렸는데 발을 구르며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뉘우침을 마치고 바람이 그치자 받들어 옛 장소로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단월을 권하여 정중사, 대자사, 보리사, 영국사 등의 절을 만들게 하고, 외읍의 난야()와 종, 탑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먼저 정중사 본원에서 살다가 후에 송계라 이름한 것이 이것이다. 서로 성도에 이르렀다. 홀연히 한 역사가 힘을 들여 장작을 잘라 스님에게 올려 부엌에 쓰게 했다. 무상의 동생이 본국(신라)의 새로운 왕이 되었는데 그가 돌아와 그 자리(왕의 자리)가 위태롭게 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차 자객을 보내 죽이게 하였는데 무상이 이미 깊이 알았다. 어느 날 장작을 바치는 현자가 잠간 와서 말하기를 오늘 밤 손님이 올 것이 분명하나, 또 불자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하고는 칼을 가지고 자리를 끼고 선좌의 곁에 앉아 머뭇거리는데 벽 위에서 물체가 떨어져 내리는 것을 깨달았다.

 

遂躍起以刀一揮, 巨胡身首, 分於地矣. 後門素有巨坑, 乃曳去瘞, 復以土拌滅其跡而去. 質明相令召伐柴者謝之, 已不見矣. 嘗指其浮圖前柏曰, 此樹與塔齊寺當毁矣, 至會昌廢毁, 樹正與塔等. 又言, 寺前二小池, 左羹右飯, 齋施時少則令淘浚之, 果來供設, 其神異多此類也. 以至德元年(756)建午月十九日, 無疾示滅, 春秋七十七.

마침내 뛰어 일어나 칼을 한 번 휘두르니 큰 오랑캐의 몸과 머리가 땅에서 나뉘었다. 후문에 항상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는데 끌어다 묻고, 흙을 덮어서 그 자취를 뒤섞어 없애고 갔다. 동이 틀 무렵 무상이 장작을 베는 자를 불러 사례하려하였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그 부도 앞의 잣나무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나무와 탑이 (높이가)같아지면 절이 마땅히 무너질 것이다.” 했는데, 회창 폐불 때 이르러 나무가 바로 탑과 같이 되었다. 또 말하기를 절 앞에 두 개의 작은 못이 있는데 왼쪽을 국, 오른 쪽을 밥이라 하였다. 재를 지낼 때 (공양물이)적으면 곧 이 못의 물을 뜨게 하면 과연 (누군가) 와서 진설하였다. 그 신이함이 많이 이런 류였다. 지덕 1(756) 건오월 19일 병 없이 입적하니 나이 77세였다.

 

臨終或問之曰, 何人可繼住持乎. 乃索筆書百數字, 皆隱不可知. 諧而叶韻, 記莂八九十年事, 驗無差失. 先是武宗廢敎, 成都止留大慈一寺, 淨衆例從除毁, 其寺巨鐘, 乃移入大慈矣. 洎乎宣宗, 中興釋氏, 其鐘卻還淨衆, 以其鐘大隔江, 計功兩日方到, 明日方欲爲齋辰, 去迎取巳時已至, 推挽之勢, 直若飛焉, 咸怪神速非人力之所致也. 原其相之舍利, 分塑眞形, 爾日面皆流汗, 上足李僧以巾旋拭, 有染指者, 其汗頗鹹, 乃知相之神力, 自曳鐘也. 變異如此, 一何偉哉. 後號東海大師塔焉, 乾元三年資州刺史韓汯撰碑, 至開成中李商隱作梓州四證堂碑, 推相爲一證也.

임종 때 어떤 이가 물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이어 주지로 할 만합니까?”하니 곧 붓을 찾아 백 몇 자를 썼는데 모두 숨겨진 것이어서 알 수 없었는데, 조화로워 운에 맞았다. 부처가 될 것으로 예언 된지 89년의 일이 어긋나거나 잃음이 없음을 징험하였다. 이에 앞서 무종이 불교를 폐할(회창 폐불) 때 성도에는 다만 대자사 한 절만 남았고, 정중사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 절의 큰 종을 이에 옮겨 대자사로 들어갔다. 선종에서부터 석씨(불교)가 중흥되니 그 종을 정중사로 돌리주려 하였다. 그 종이 큰 강을 사이하여 공()을 계산하니 2일이 되어야 비로소 이를 수 있었다. 다음 날 바야흐로 4재일에 하고자 하였다. 가고 맞기를 사시에 취하자 이미 이르렀는데 밀고 당기는 형세가 바로 나는 것 같아 괴이하고 신 같이 빨라 사람의 힘으로 이를 바가 아니었다. 무상의 사리에 근원하여 나누어 참된 형상을 빚었는데 이날 얼굴에 모두 땀을 흘렸다. 제자(상족) 이승이 수건으로 돌려 닦았더니 손가락에 물이 묻었는데 그 땀이 자못 짜서 무상이 신이한 힘으로 종을 끌었음을 알았다. 변이가 이 같았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후에 동해대사탑이라 이름하였다. 건원 3년 자주자사 한굉이 비문을 지었다. 개성 연간에 이르러 이상은이 재주 사증당비를 지었으니 무상을 미루어 한 가지 증명이 되었다.

 

宋高僧傳 卷第二十 感通篇 第六之三

송고승전 권재20 감통편 제63

 

唐池州九華山化城寺地藏傳

당 지주 구화산 화성사 지장전

 

釋地藏 , 姓金氏, 新羅國王之支屬也. 慈心而貌惡, 穎悟天然, 七尺成軀, 頂聳奇骨, 特高才力, 可敵十夫. 嘗自誨曰, 六籍寰中, 三淸術內, 唯第一義, 與方寸合. 于時落髮, 涉海捨舟而徒, 振錫觀方, 邂逅至池陽, 睹九子山焉, 心甚樂之. 乃逕造其峰, 得谷中之地, 面陽而寬平, 其土黑壤, 其泉滑甘, 巖棲澗汲, 爾度日. 藏嘗爲毒螫, 端坐無念, 俄有美婦人, 作禮饋藥云, 小兒無知願出泉以補過, 言訖不見.

석 지장은 성이 김씨이니 신라 국왕의 친척(支屬)이다. 마음은 자애롭되 모습은 못생겼다. 나면서 총명하고 7자의 몸을 이루었으며, 정수리에 기이한 뼈가 튀어나왔다, 특히 재주와 능력이 높아 열 명의 장정을 대적할 만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가르쳐 말하기를 “6(유가의 6)은 우주 안이고, 삼청(도교의)의 방법(도술)은 안이니 오직 제 일 의(불교)만이 사방 한 치에 합한다.”하였다. 그 때 머리를 깍고 바다를 건넌 후 배를 버리고 걸어서 지팡이를 흔들어 사방을 돌아보다 우연히 지양에 이르러 구자산을 보고는 마음으로 매우 즐거워하였다. 곧 지름길로 그 봉우리에 나아가 골짜기 안의 땅을 얻었는데, 남쪽을 향해보니 넓고 평평하며, 그 땅은 검은 흙이고, 그 샘은 윤택하고 달았다. 바위 사이에서 물을 긷고 목적지를 향해 빨리 달려가기를 날을 헤아렸다. 지장이 일찍이 독벌레에 쏘였는데 단정히 앉아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아름다운 부인이 있어 예를 짓고, 약을 주며 말하기를 작은 아이가 알아보지 못하고(스님을 물었습니다.), 샘을 나오게 하는 것으로서 허물을 고치려 합니다.”하는 말을 마치고는 보이지 않았다.

 

視坐左右間潗淆, 時謂爲九子山神爲湧泉資用也, 其山天寶中李白遊此, 號爲九華焉. 俗傳山神婦女也, 其峰多冒雲霧罕曾露頂歟. 藏素願持四大部經, 遂下山至南陵, 有信士爲繕寫, 得以歸山. 至德年初有諸葛節, 率村父自麓登高, 深極無人, 雲日鮮明, 居唯藏孤, 然閉目石室, 其房有折足鼎, 鼎中白土和少米烹而食之.

앉은 좌우 사이에서 물이 세차게 일어 흐리게 하는 모양을 보았다. 그 때에 구자산 산신이 물이 솟아나오는 샘을 만들어 필요한 쓰임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 산은 천보 연간에 이백이 여기서 놀았고, 구화산이라 불렀는데 세속에서는 산신의 부인과 딸이라 전한다. 그 봉우리는 많이 운무가 덮여 일찍이 꼭대기를 드러낸 것이 드물었다. 스님이 평소 4대 부경을 지니려 하다가 마침내 산을 내려가 남릉에 이르러, 신사(신자)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다시 고쳐 베껴 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덕 초에 제갈절이 촌부들을 인솔하여 산기슭으로부터 높은 곳에 올랐는데 깊음이 지극하여 사람이 없고, 구름이 끼었다 해가 선명해지며, 스님이 오직 외롭게 거처하고 있을 뿐으로 석실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방에는 발이 부러진 솥이 있었고, 솥 안에 흰 흙에 적은 쌀을 더하여 끓여서 먹었다.

 

郡老驚歎曰, 和尙如斯苦行, 我曹山下列居之咎耳, 相與同構禪宇, 不累載而成大伽藍. 建中初張公嚴典是邦, 仰藏之高風因移舊額, 奏置寺焉. 本國聞之率以渡海相尋, 其徒且多無以資歲, 藏乃發石得土, 其色靑白不磣如麵而供衆食, 其衆請法以資神, 不以食而養命. 南方號爲枯槁衆, 莫不宗仰. 龍潭之側有白墡硎, 取之無盡.

군의 늙은이들이 놀라고 탄식해 말하기를 화상이 이 같이 고행하시는 것은 산 아래 늘어 사는 우리 마을에 책임이 있다.”하고는 서로 함께 선우(선종의 절)를 엮었는데 해를 지나지 않고 큰 절을 이루었다. 건중 초에 장공 엄이 이 지방(是邦)을 관장하자(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스님의 높은 풍모를 우러러 옛 액(절 이름을 적은 현판)을 옮기고 절에 둔 것을 (황제에게)아뢰었다. 본국(신라)에서 그것을 듣고 (사람을)이끌고 바다를 건너 찾았는데 그 무리들이 또한 해마다 너무 많았다. 스님이 이에 돌을 들추고 흙을 얻었는데 그 색은 청백색으로 모래가 섞이지 않고, 국수와 같아 무리들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그 무리들이 법으로 정신의 자양분 삼기를 청하였는데 먹는 것으로서 목숨을 기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남쪽 지방에서 고고중(삐쩍마른 대중)’이라 부르며 숭상하여 우러르지 않음이 없었다. 용담의 곁에 흰색의 숫돌이 있었는데 그 것을 취하여도 다함이 없었다.

 

以貞元十九年(803), 忽召衆告別, 罔知攸往. 但聞山嗚石隕扣鐘嘶嗄, 如趺而滅, 春秋九十九. 其屍坐於函中, 洎三稔開將入塔, 顔貌如生, 擧舁之動骨節, 若撼金鎖焉. 乃立小浮圖于南臺, 是藏宴坐之地也. 時徵士右拾遺費冠卿序事存焉. 大中中僧應物亦紀其德哉.

정원 19(803) 여름 갑자기 무리를 불러 이별을 알렸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산이 울리고, 돌이 떨어지며, 종을 치는 큰 소리가 들리고 가부좌한 채 입적하니 춘추 99세였다. 그 시신을 함안에 앉히고 3년이 지난 후 (함을)열고 탑에 봉안하였는데 얼굴 모습이 살아 있는 듯하고, 들 때 뼈의 마디(관절이)가 움직여 마치 쇠사슬을 흔드는 것 같았다. 이에 곧 작은 부도를 남대에 세웠는데 이는 지장 스님이 조용하게 앉아 참ㅅㄴ하던 땅이었다. 그 때 징사 우습유 비관경 서사가 여기에 있었다. 대중 연간에 스님인 응물이 또한 그 덕을 기록하였다.

 

宋高僧傳 卷第二十一 感通篇 第六之四

송고승전 권제21 감통편 제64

 

唐朔方靈武下院無漏傳

당 삭방 영무하원 무루전

 

釋無漏 , 姓金氏, 新羅國王第三子也. 本土以其地居嫡長將立儲副, 而漏幼慕延陵之讓, 故願爲釋迦法王子耳. 遂挑附海艦達于華土, 欲遊五竺禮佛八塔. 旣渡沙漠涉于闐, 已西至葱嶺之墟入大伽藍, 其中比丘皆不測之僧也. 問漏攸往之意, 未有奇節, 而詣天竺. 僧曰, 舊記無名未可輒, 此有毒龍池可往敎化, 如其有驗方利涉也. 漏依請登池岸, 唯見一胡床, 乃據而坐. 至夜將艾, 霆雷交作, 其怪物吐氣, 蓬勃種種變現眩曜無恒, 漏瞑目不搖, 譬如建木挺拔, 豈微風可能傾動邪, 持久乃有巨蛇驤首于膝上, 漏悲憫之極爲受三歸而去.

석무루는 성씨가 김씨이니 신라국왕의 셋째 아들이다. 본토(신라)가 그 땅에 사는 적장자(맏아들)를 태자로 세우려하였다. 무루는 어려서 연릉의 사양(왕위 계승을 거절)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석가법왕의 아들이 될 것을 원하였다. 마침내 배를 얻어 타고 화토(중국)에 도달하여 오천축에 가 8탑에서 예불하려하였다. 사막을 건너 우전국을 지난 후 서쪽으로 총령의 빈터에 이르러 큰 절로 들어갔다. ()안의 비구는 모두 헤아릴(예측할) 수 없는 스님들이었다. (스님들이)무루가 가는 바의 뜻을 묻고는 남달리 뛰어난 절조가 있지 않으면서 천축에 나아간다고 여겼다. 스님이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름이 없는 이는 쉽게 가지 못한다합니다. 여기 독룡이 있는 못에 가서 교화할 수 있고, 만일 징험함이 있으면 비로소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했다. 무루가 (스님들의)청에 의해 못 가에 올랐는데 오직 하나의 가죽을 입힌 긴 의자가 보였으므로 이에 차지하고 앉았다. 밤이 새려고 할 때에 이르러 우레와 천둥이 번갈아 일어나며 그 괴물이 기운을 토하니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 눈부시게 빛나기도 하여 일정함이 없었다. 무루가 눈을 감고 흔들리지 않았다. 비유하면 세운 나무가 우뚝한 것과 같았으니 어찌 작은 바람이 기울이고 움직이게 할 수 있었겠는가? 오래 지난 후 커다란 뱀이 무릅 위에서 머리를 들었다. 무루가 지극히 불쌍하게 여겨 삼귀를 주니 갔다.

 

復作老人形來致謝曰, 蒙師度脫義無久居, 吾三日後捨鱗介苦依, 得生勝處, 此去南有磐石, 是弟子捨形之所, 亦望閑預相尋遺骸可矣. 後見長偉而夭矯僵于石上歟. 寺僧咸黙許之, 又曰, 必須願往天竺者, 此有觀音聖像, 禱無虛應可祈告之, 得吉祥兆可去勿疑. 漏乃立于像前入於禪定, 如是度四十九日, 身嬰虛腫略無傾倚.

다시 노인의 형상을 만들어 와서 지극히 감사해하며 말하기를 스님이 생사의 바다를 건너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주신 뜻을 입어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나는 3일 후 비늘껍질과 괴로움의 근거를 버리고 승처(가장 살기 좋은 곳)에 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반석이 있는데 이는 제자가 형상을 버린 곳입니다. 또한 한가할 때 유해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후에 웅장하게 돌 위에 구불구불 쓰러져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했다. 절의 스님들이 모두 묵묵히 허락하였다. 또 말하기를 반드시 천축에 가기를 원하는 자는 여기에 있는 관음성상에 기도하면 헛된 응함이 없어 기도하고 고유할 수 있으니 길상의 조짐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했다. 무루가 이에 관음성상 앞에 서서 선정에 들었다. 이 같이 하고서 49일을 지나니 약한 몸이 붓고, 대략 엎어지고 기울었다.

 

旋有鼠兒猶彈丸許, 咋左脛潰, 黃色可累斗而愈, 漏限滿獲應. 群僧語之曰, 觀師化緣合在唐土, 心存化物所利滋多, 足倦遊方空加聞見不可强化, 師所知乎. 漏意其賢聖之言必無唐發. 如是却迴, 臨行謂漏曰, 逢蘭卽住, 所還之路山名賀蘭. 乃馮前記遂入其中, 得白草谷結茅栖止.

돌아다니던 생쥐가 있었는데 탄환같이 빨랐다. 왼쪽 정강이를 깨물어 터트리니 누런색 묽은 고름이 여러 말이나 되어 나을 수 있었다. 무루가 정한 기일을 채우고 응함을 얻자 여러 스님들이 말하기를 스님을 보니 대중을 교화하는 관세음보살의 인연이 당나라에 있으니 마음과 사물을 교화하는데 두면 이로운 바가 늘어남이 많을 것입니다. 발은 사방에 노니는 것을 게을리 하면서 공연히 듣고 보는 것을 더하여 억지로 교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스님은 압니까?”했다. 무루는 그 현성의 말이 반드시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 같이 되돌아가라 하고, 갈 때에 무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난초를 만나면 곧 머무십시오. 돌아가는 길의 산 이름이 하란입니다.”했다. 이에 앞서 기억에 의지하여 마침내 그 안으로 들어 가 백초곡에 띠풀 집을 짓고 머물렀다.

 

無何安史兵亂兩京版蕩, 玄宗幸蜀, 肅宗訓兵靈武. 帝屢夢有金色人念寶勝佛於御前. 翌日以夢中事問左右, 或對曰, 有沙門行迹不群居于北山, 兼恒誦此佛號. 肅宗乃宣徵不起 命朔方副元帥中書令郭子儀親往諭之, 漏乃爰來. 帝視之曰, 眞夢中人也. 乎羯虜盪平翠華旋復, 置之內寺供養. 乎猴輕金鎖鳥厭雕籠, 累上表章願還舊隱, 帝心眷重答詔遲留, 未遂歸山, 俄云示滅焉.

오래지 않아 안록산과 사사명의 병란으로 두 서울(장안과 낙양)이 어려운 일을 당하니 현종이 촉으로 행차하고, 숙종는 영무에서 군대를 훈련하였다. 황제(숙종)가 여러 차례 굼을 꾸었는데 금색의 사람이 어전에서 보승불을 염불하였다. 다음날 꿈속의 일은 좌우에 물으니 어떤 사람이 대답해 말하기를 어떤 사문(스님)의 행적이 있는데 무리 짓지 않고(홀로) 북산에 살고 있으면서 겸하여 항상 이 부처님의 이름을 외웁니다.”했다. 숙종이 이에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으니(거절하니) 삭방부원수 중서령 곽자의에게 명하여 직접 가서 회유하게 하니 무루가 이에 왔다. 황제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참으로 꿈속의 사람이로다.”하였다. 갈로(오랑캐)를 모조리 무찔러 없애 평정하여 황제의 깃발(翠華)을 다시 회복함에 이르러 내사(궁궐 안의 절)에 두고 공양하였다. 원숭이는 쇠사슬을 가볍게 여기고, 새는 조롱을 싫어한다는 믿음을 가져 여러 차례 표장을 올려 예전에 숨었던 곳으로 돌아가길 원하였으나 황제가 마음으로 돌아보고(사모하여) 다시 답하는 조서를 늦추어 머물게 하니 마침내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갑자기 입적함을 보일 것이다.”했다.

 

一日忽於內門右闔之上化成雙足, 形不及地者數尺, 閽吏上奏, 帝乘步輦親臨其所, 得遺表乞歸葬舊隱山之下, 卽時依可, 葬務官供, 乃宣御門扇置之設奠, 遣中使監. 護鹵簿送導. 先是漏行化多由懷遠縣, 因置廨署. 謂之下院, 喪至此神座不可輒擧, 衆議移入構別堂宇安之. 則上元三年也(762). 至今眞軆端然曾無變壞, 所臥中禁戶扇, 乃當時之現瑞者存焉.

하루는 홀연히 내문 오른 쪽 문짝의 위가 변해 두 발을 이루었는데, 형상이 땅에서 떨어진 것이 몇 자나 되었다. 궁궐문의 문지기가 아뢰니 황제가 보련(사람이 드는 가마를)을 타고 그 곳에 임하여 남긴 표를 얻었는데 예전에 숨었던 산 아래에 돌아 가 장례해 줄 것을 청한 것이었다. 즉시 가하다 하고, 장례의 일은 관이 비용을 공급하게 하였다. 이에 황제가 출입하는 문에 문짝을 두고 제물을 진설할 것을 베풀게 하고 중사를 보내 감독하게 했다. 보호하는 의장으로 보내는 것을 인도하게 했다. 이에 앞서 무루가 교화를 행하여 회원현을 많이 경유하였기 때문에 해서를 두었는데 그것을 일러 하원이라 했다. 상례 때 이 신좌에 이르러 문득 들 수 없어 무리들이 의논하여 옮겨 별당을 엮고 안치하니 곧 상원 3(762)이다. 지금도 진체가 단정하여 일찍이 변하거나 무너지지 않았고, 누워있는 문은 곧 당시의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을 보존한 것이다.

 

宋高僧傳 卷二十三 遺身篇 第七

송고승전 권22, 유신편 제7

 

晉天台山平田寺道育傳

진 천태산 평전사 도육전

 

釋道育 , 新羅國人也. 本國姓氏未所詳練. 自唐景福壬子歲(892)來遊于天台. 遲迴而挂錫於平田寺衆堂中. 慈愛接物, 然終不捨島夷言音 恒持一鉢受食. 食訖略經行. 而常坐脇不著席. 日中灑掃殿廊料理 常住得殘羨之食, 雖色惡氣變收貯于器, 齋時自食與僧供湢浴煎茶. 遇薪木中蠢蠢乃置之遠地, 護生偏切, 所服皆大布納, 其重難荷.

석 도육은 신라국 사람이다. 본국의 성씨는 자세하지 않다. 당 경복 임자년(892)으로부터 천천히 돌아다니다 평전사 여러 당 안에 지팡이를 걸었다.(머물러 살았다.) 자비와 아낌으로 남을 대하였으나 끝내 도이(오랑캐, 신라)의 말을 버리지 않았다. 항상 하나의 발을 가지고 밥을 받았다. 먹기를 마치면 불도를 닦았는데 항상 앉아 겨드랑이에 자리를 붙이지 않았다. 낮에는 전각과 복도에 물 뿌리고 비질하며 요리하여 항상 머물러 남은 것을 얻었다. 비록 색이 나쁘고, 기운이 변하여도 그릇에 거두어 저장하였다. 재를 지낼 때는 스스로 밥을 먹고, 스님들과 함께 공양, 욕실, 차를 끓였다. 우연히 장작 안에서 벌레가 움직이면 곧 먼 땅에 그것을 두었으니 살아 있는 것을 지킴이 두루 간절하여 입는 바는 모두 커다란 포납이었으니 무거워 메기(입기) 어려웠다.

 

每至夏首秋末, 日昳乃裸露胸背䏶腨云, 飼蚊蚋虻蛭雜色蟲, 螫齧至於血流于地, 如是行之四十餘載, 未嘗少廢. 凡對晤賓客, 止云伊伊二字, 殊不通華語, 然其會認人意且無差脫, 頂髮垂白眉亦尨. 身出紺赤色舍利, 有如珠顆, 人或求之隨意皆獲. 至晋天福三年(938)戊戌歲十月十日, 終于僧堂中, 其年八十餘耳. 寺僧舁上山後焚之. 灰中得舍利不可勝數, 或有得巨骨者. 後唐淸泰二年(935)曾遊石梁. 迴與育同宿堂內, 時春煦, 亦燒榾柮柴以自熏灼. 口中嘮嘮通夜不輟, 或云, 凡供養羅漢大齋日, 育則不食. 人或見迎羅漢, 時問何不去殿內受供, 口云伊伊去, 或云飼蟲. 時見群虎嗅之盤桓而去矣.

매번 여름의 초입과 가을의 끝에 이르기까지 해가 기울면 곧 맨몸으로 가슴과 등, 허벅지, 장딴지 등을 드러내니 모기, 등애, 거머리 등 온갖 벌레가 소고 깨물어 피가 흘러 땅에 이르렀다. 이 같이 하기를 40여년 하여 일찍이 조금도 폐하지 않았다. 무릇 빈객(손님)을 대하는 것을 밝게 하여 다만 伊伊 두 글자만 말할 뿐이었고, 조금도 중국어로 통하지 못하였으나 그 만남에는 사람의 뜻을 알아 어긋나거나 벗어남이 없었으며, 정수리의 머리털이 드리웠고, 흰 눈썹이 또한 많았다. 몸에서는 감적색의 사리가 나왔는데 곡식의 알갱이 같아 사람들이 혹 그것을 구하여 뜻에 따라 모두 얻었다. 나라 천복 3(938) 무술면 1010일 승당 안에서 마쳤다.(입적하였다.) 그 나이를 헤아려 보면 80여세였다. 절의 스님들이 마주 들고 산 뒤로 올라 불살랐다.(화장하였다.) 재 안에서 사리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얻었는데 혹 큰 뼈를 얻기도 했다. 後唐 청태 2(935) ()회 스님이 석량에서 노닐다 돌아와 도육과 같이 집 안에서 자는데 그 때는 봄철의 따뜻한 때여서 또한 등걸과 가지 없는 나무를 불사르는 것으로서 스스로 불에 태웠다. 입으로는 이런 저런 말을 하여 밤새 그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무릇 공양과 나한 대재날에 도육은 곧 먹지 않았다.”했다. 사람들이 혹 나한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그 때 묻기를 어찌하여 전각 안으로 가서 공양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하니 입으로 伊伊라 하고 가고, 혹은 벌레를 먹인다고 말하였다. 그 때 많은 범들이 냄새를 맡고는 머뭇거리다 떠났다.

 

宋高僧傳 卷第三十 雜科聲德篇 第十之二

송고승전 권제30, 잡과성덕편 제102

 

唐高麗國元表傳

당고려국 원표전

 

釋元表 , 本三韓人也, 天寶中來遊華土, 仍往西域瞻禮聖跡. 遇心王菩薩指示支提山靈府, 遂負華嚴經八十卷, 尋訪霍童禮天冠菩薩, 至支提石室而宅焉. 先是此山不容人居. 居之必多霆震猛獸毒蟲, 不然鬼魅惑亂於人, 曾有未得道僧輒居一宿, 爲山神驅斥, 明旦止見身投山下數里間. 表齎經棲泊澗飮木食, 後不知出處之蹤矣. 于時屬會昌搜. 表將經, 以華櫚木函盛深藏石室中. 殆宣宗大中元年(847)丙寅. 保福慧評禪師素聞往事, 躬率信士迎出甘露都尉院. 其紙墨如新繕寫. 今貯在福州僧寺焉.

석 원표는 본래 삼한 사람이다. 천보 연간에 화토(중국)에 와서 노닐다 서역으로 가 성스러운 자취를 보았다. 신왕보살이 제산영부를 가리켜 보임을 만나 마침내 화엄경 80권을 지고 곽동산을 찾아 방문하여 천관보살에게 예를 다하고, 복덕이 쌓여 있는 석실에 이르러 집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이 산은 사람이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곳에 살면 반드시 천둥과 맹수, 독충이 많았고, 그렇지 않으면 도깨비와 두억시들이 사람을 의혹하고 어지럽게 한다. 일찍이 도를 닦는 스님이 문득 살려하다 하룻밤이 지나지 않아 산신들에게 몰아 배척함을 당하여 다음날 아침 단지 몸이 산 아래 몇 리 사이에 던져짐을 당하였을 뿐이었다. 원표가 경전을 가지고 머물며 골짜기의 물을 마시고 나무 열매를 먹었다. 후에 출처의 발자취를 알지 못한다. 때는 회창의 어지럽게 부수는 것에 속하였다. 원표가 경전을 가지고 자단 목재(화려한 목재)의 나무함에 담아 깊이 석실 안에 감추었으니 선종 대중 1(847) 병인이다. 보복원의 혜평 선사가 평소에 일을 듣고 가서, 몸소 신사(신자)를 이끌고 감로도위원에 맞이하였다. 그 종이와 먹이 새로 베껴 쓴 것과 같았다. 지금 복주 승사()에 쌓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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