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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고승전

by 최인표 2024. 2. 12.

1. 이 번역물은 완벽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읽을 때 원문과 비교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 저본은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한국고대사료집성'에 실린 것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3. 전문이 아니라 우니나라 역사와 관련된 부분만 번역하였습니다

 

海東高僧傳卷第一

京北五冠山靈通寺住持敎學賜紫沙門 臣覺訓奉 宣撰

서울 북쪽 오관산 영통사 주지 교학 사자사문 신 각훈이 (왕명을)받들어 지음

 

流通一之一

유통 11

 

論曰. 夫佛陀之爲敎也, 性相常住, 悲願洪深窮三際遍十方, 雨露以潤之, 雷霆以鼓之. 不行而至不疾而速. 五目不能覩其容, 四辯莫能談其狀. 其體也無去無來, 其用也有生有滅. 故我釋迦如來從兜率天乘栴檀樓閣入摩耶胎, 以周昭王甲寅四月初八日遂開右脇生於淨飯王宮. 其夜五色光氣入貫大微通於西方.

논하여 말한다. 대저 불타의 가르침은 본성과 현상이 항상 머무르고, 비원이 넓고 깊어 과거, 미래, 현재의 삼제가 통하고, 열 방향에 두루하고, 비와 이슬로 윤택 하게하고, 우레와 번개가 북을 치는 듯했다. 가지 않아도 이르고, 달리지 않아도 빨랐다. 五目으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四辯으로도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다. 그 본체는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나, 그 작용은 나는 것도 있고, 사라지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석가여래께서 도솔천에서 전단나무 누각을 타고 마야부인의 속으로 들어 가 주나라 소왕 갑인년(BC1027) 사월 초팔일에 마침내 정반왕 궁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열고 태어났다. 그날 밤 오색의 빛나는 기운이 태미성을 꿰뚫고 서방에까지 통하였다.

 

昭王問太史蘇由, 有大聖人生於西方.” 問利害, 此時無他, 一千年後聲敎被此土焉.”始處宮中亦同世俗. 四十二年甲申四月八日, 佛年三十, 踰城出家遂坐樹成道, 轉法利生如優曇花時一現耳. 初說華嚴次說小乘, 或船若深密, 或法華涅槃隨機普被, 任器方圓其猶一風而萬竅齊號, 孤月而千江皆現. 四十九年度脫群品. 列子所謂 西方有聖人者.” 是也.

소왕이 태사 소유에게 물으니 (소유가)말하기를 대성이니 서방에 때어났습니다.”하니 (소왕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물었다. (소유가)말하기를 이 때는 다름이 없고, 일천년 후에는 교화(聲敎)가 이 땅에 입혀질 것입니다.”했다. 처음에는 궁중에 있으면서 또한 세속과 같이하였다. (소왕) 42년 갑신(BC997) 48일 부처님 나이 30세 때 성을 넘어 출가하여 마침내 (보리)수 아래 앉아 도를 이루고, 법을 전하여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 우담발화가 한 번에 피는 것과 같았다. 처음 화엄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 소승을 말씀하셨고, 혹은 반야경해심밀경, 혹은 법화경, 열반경을 말하고 근기에 따라 말하여 널리 (교화를)입혔고, 기량의 방원에 맡기니 한 번 바람이 불어 만 가지 구멍이 일제히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았고, 외로운 달이 천개의 강에 모두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49년 동안 중생을 제도하셨다. 열자가 이른 바 서방에 성인이 있다.”한 것이 이것이다.

 

是時文殊與目連爲化人()震旦. 佛年七十九, 以穆王壬申二月十五日入滅於瓊林. 白虹十二道連夜不滅. 王問太史扈多, 西方大聖人方滅度耳.”於是阿難等結集金言具載具牒, ·····慧爰方啓行. 然雜華恒常之說隱入于虬, 邪宗蚢肆異部蛙鳴. 旣而馬鳴屹起挺, 及陳那·護法唱之和之推邪現正, 演義申宗. 廣大悉備乎西域將有待而東驅矣.

이 때 문수와 목련이 사람을 교화하기 위하여 진단(동쪽, 중국)에 자취를 남겼다. 부처님 79세 때인 목왕 임신년 215일 경림(쌍림)에서 입멸하셨다. 12줄의 흰 무지개가 떠 밤을 이어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태사 호다에게 물으니 (호다가)말하기를 서방의 대성인이 막 멸도하였습니다.(열반에 드셨습니다.)”했다. 이에 아난 등이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여 모두 패첩에 실으니 경, , , , , 혜가 이에 바야흐로 열려 행해졌다. 그러나 잡화(화엄경)의 항상하는 말씀은 규궁(용궁)에 숨어들어 가니 사종이 독사처럼 독을 쏘아대고, 이부가 개구리처럼 울어댔다. 이윽고 마명이 우뚝 솟아 일어나고, 뛰어나게 나오니 진나, 호법이 부르고 화답함에 이르러 간사함을 밀어내고, 바름을 나타내어 뜻(교리를)을 펴고 종지를 펼쳤다. 서역에서 넓고 크게 갖추어져 장차 동쪽으로 치달릴 것을 기다림이 있었다.

 

自佛滅一百十六年, 東天竺國阿育王收佛舍利役使鬼兵散起八萬四千寶塔遍閻浮提, 時當周敬王二十六年丁未也. 塔興周世經二十二王至秦始皇三十四年焚燒典籍, 育王寶塔由是隱亡. 當是時沙門利方十八賢者賚持佛經來化咸陽, 秦始皇不從而囚之. 夜有金剛丈人破獄出之而去, 蓋機緣未熟故也. 及後漢永平十二年, 摩騰 · 竺法蘭來儀漢庭慈雲布於九州, 法雨灑於四海. 然按霍去病傳云, “得休屠王祭天金人.” 則像設似先入於沙漠矣. 又前漢哀帝時秦景使月氏國來傳浮屠經敎, 乃知前漢已行, 六十三年而後明帝方感金人夢耳.

부처님께서 열반한 지 116년 후 동천축국 아육왕이 불사리를 거두고 귀병을 시켜 팔만사천 보탑을 두루 염부제에 흩어 일으켰는데 이 때는 주나라 경왕 26년 정미(BC 494)에 해당한다. 탑은 주나라 시대에 일으켜 22왕을 지난 진시황 34(BC213)에 이르러 전적을 불살라 버리니 아육왕의 보탑도 이로 말미암아 숨겨져 없어졌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사문 이방 등 18현이 불경을 가지고 와 함양을 교화하였는데, 진시황은 따르지 않고 그들을 가두었다. 밤에 금강장인이 나타나 옥을 깨트리고 그들을 꺼내어 갔는데 대개 교화를 받을 만한 인연의 기틀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후한 영평 12(70)에 이르러 마등, 축법란이 한나라 조정에 와 자비의 구름을 9주에 펴고, 법의 비가 4해에 뿌려졌다. 그러나 곽거병의 전기를 살펴보면 휴도왕이 제천금인을 얻었다.”하니 곧 불상은 먼저 사막에 들어온 듯하다. 또 전한 애제 때 진경이 월씨()국에 사신 갔다가 와서 불교의 경전과 가르침을 전했다하니 곧 전한시대에 이미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고, 63년 후 명제가 바야흐로 금인의 꿈을 꾸었다.

 

若我海東, 則高句麗解留王時順道至平壤城, 繼有摩羅難陀從晋來千百濟國則枕流王代也. 後於新羅第二十三法興王踐祚, 梁大通元年丁未三月十一日阿道來止一善縣, 因信士毛禮隱焉. 屬有吳使者香 道指其焚點之儀, 由是延致王宮. 然其敎未闡. 舍人厭髑赤心面內勇決國人之疑.

우리 해동 같은 경우는 곧 고구려 해류왕 때(372) 순도가 평양성에 이르렀고, 이어서 마라난타가 있어 나라에서 백제국에 왔으니 곧 침류왕대(384)이다. 후에 신라 23대 법흥왕이 임금의 자리를 이었는데 양 대통 1년 정미(527) 311일 아도가 와 일선현에 머무니 이로 인하여 신사(신자) 모례가 숨겨주었다. 이어서 오나라 사자()가 향을 가지고 왔으므로 아도가 그 불사르는 의식을 가르쳤다. 이로 말미암아 왕궁에까지 번졌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아직 천명되지 못하였다.(드러나지 못하였다.) 사인 염촉이 정성스럽고 참된 마음을 드러내어 안으로 나라 사람의 의심을 용맹하게 결단하였다.(터 주었다.)

 

, 微夫子吾當從何敎也 自爾圓光· 慈藏之徒西入傳法上下信敎, 內外奉行先呼而後應, 日益而月增. 遂使於三韓 及我聖祖葦舊鼎, 尤尊佛敎 凡制度多用佛敎. 守文繼體之君傳而不失. 惟大祖四代孫大覺國師於宣王三年乙丑四月航海求法東至于洋 導其百派,大小·始終·頓圓之五敎各得其所復歸于正.

아 부자(염촉)가 아니었다면 나는 마땅히 어떤 가르침을 따라야 했을까? 이로부터 원광, 자장의 무리들이 서쪽으로 들어 가 법을 전하여 상하가 가르침을 믿고, 내외가 받들어 행하고,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응대하니 날로 더하고 달로 늘어났다. 마침내 삼한과 우리 聖祖로 하여금 옛 것을 바꿈에(옛 솥을 변화시킴에) 이르러 더욱 불교를 높이고, 모든 제도가 불교를 많이 사용하였다. 문물을 지키고 자리를 이은 임금이 전하여 잃지 않았다. 태조의 4대손인 대각국사는 선왕 3년 을축(1085) 4월 항해하여 법(불법)을 구하려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러 그 백파를 인도하니 대소, 시종, 원돈의 5교가 각기 다시 바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終源乎周派乎漢, 汪洋於晋·魏 汗漫於隋·, 波之於宋而淵沄於海東也. 都算佛入滅至今乙亥二千一百六十四年, 滅後第一千一十四年入後漢 至今一千一百五十一年, 自順道入句高麗至今八百四十四年矣. 且道不自弘 弘之由人. 故著流通篇以示于後. , 古梁· · 宋三高僧傳皆有譯經, 以我本朝無翻譯之事故不存此科也.

마침내 주나라에 근원하고 한나라에서 갈라졌으며, 진나라 · 위나라에서 헤아리기 어렵게 광대해지며, 수나라 · 당나라에서 질펀해지고, 송나라에서 물결이 치고, 해동에서 모이고 소용돌이쳤다. 모두 헤아리면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 지금 을해(1215)에 이르기까지 2164년이고,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 1014년을 지난 후 한나라에 들어 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1151년이며, 순도가 고구려에 들어 온 지 지금에 이르기까지 844년이다. 또한 도는 스스로 넓어지지 않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넓어진다. 그러므로 유통편을 짓는 것으로서 후세에 보인다. 살펴보니 고양, , 송 세 고승전은 모두 역경편이 있으나 우리 본조는 번역의 일이 없기 때문에 이 과를 두지 않는다.

 

順道 · 亡名 · 義淵 · 曇始 · 摩羅難陀 · 阿道 · 黑胡子 · 元表 · 玄彰 · 法空 · 法雲

순도   망명   의연   담시   마라난타   아도   묵호자    원표    현창   법공   법운

 

釋順道 不知何許人也. 德高標, 慈忍濟物. 誓志弘宣, 周流震旦移家就機, 誨人不倦. 句高麗第十七解味留王(或云小獸林王)二年壬申夏六月, 秦符堅發使及浮屠順道送佛像經文. 於是君臣以會遇之禮奉迎于省門, 投誠敬信感慶流行. 尋遣使廻謝以貢方物. 或說順道從東晋來始傳佛法, 則秦 · 晋莫辨何是何非. 師旣來異國 傳西域之慈燈 懸東暆之慧日, 示以因果 誘以禍福 蘭薰霧潤, 漸漬成習. 然世質民淳不知所以裁之, 師雖蘊深解廣 未多宣暢.

석순도는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덕이 뛰어나고 인품이 고상하고, 자비와 인욕이 사물(중생)을 제도하였다. (불교를)널리 베푸는데(전파하는데) 뜻을 품고 진단에 두루 흘러 다니며(돌아다니며) 집을 옮겨가며 근기에 맞게 사람들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고려(고구려) 17대 해미류왕(혹은 소수림왕)2년 임신(372) 여름 진(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부도(승려) 순도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보냈다. 이에 임금과 신하들이 예의를 갖추어 성문에서 받들어 맞이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고 믿으니 감격과 경사가 널리 퍼졌다. 왕이 사신을 보내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어떤 사람의 말에 순도는 동진에서 와 처음 불법(불교)를 전했다 하는데, (前秦)은 무엇이 옳은 지, 무엇이 그른 지 판별할 수 없다. 스님이 일찍이 다른 나라에 와 서역의 자비의 등불을 전해 동이에 지혜의 해를 매달아 인과로서 보이고, 화복으로 유인하고, 난초처럼 향기를 피우고, 안개처럼 적시니 점차 무젖어 습속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상은 질박하고 백성은 순후하여 마름질하는 까닭(교화하는 까닭)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스님이 비록 간직한 것이 깊고 풀이가 넓어도 아직 많이 펴지 못하였다.

 

自摩騰入後漢至此二百餘年, 後四年神僧阿道至自魏 存古文 始創省門寺以置順道. 記云 以省門爲寺.” 今興國寺是也, 後訛寫爲肖門. 又剏伊弗蘭寺以置阿道, 古記云興福寺是也. 此海東佛敎之始. 惜乎, 之人也之德也宜書竹帛以宣懿績, 其文辭不少槪見何哉. 然世之使於西方 不辱君命 必侍賢者而能之. 則特至他邦肇行未曾有之大事, 非其有大智慧大謀猷得不思議通力, 其何以行之哉. 以此知其爲異人, 斯亦法蘭·僧會之流乎.

마등이 후한에 들어옴으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200여년이고, 4년 뒤(374) 신 같은 스님인 아도가 위나라에서 이르렀고(옛글에 있다.) 처음으로 성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했다. 기록에 이르기를 省門을 절로 했다.”하였는데 지금의 흥국사로 후에 잘못 베껴서 肖門(초문)이라 하였다. 또 아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를 머무르게 하였다. 옛 기록에 흥복사라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이 해동 불교의 시작이다. 애석하구나! 그 사람과 덕은 마땅히 죽백(죽간과 비단)에 써서 아름다운 공적을 선양해야 하거늘 그 글과 말이 조금의 개략도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인가? 그러나 세상 사람이 서()방에 사신 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어진 자를 기다려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곧 특히 다른 나라에 이르러 일찍이 있지 않았던 큰일을 처음 행하는 것은 큰 지혜와 큰 꾀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능력을 얻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행할 수 있겠는가? 이로서 그의 사람됨이 기이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에 또한 법란, 승회의 류인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釋亡名 句高麗人也. 志道依仁, 守眞據德. 人不知而不慍, 考鍾于內. 在邦必聞霈然有餘厥聞旁馳. 晋支遁法師貽書云. “上座竺法深中州劉公之弟子體性貞峙道俗綸綜, 往在京邑雖持法綱內外具瞻, 弘道之匠也.” 遁公中朝重望, 其所與寄聲交好必宏材巨擘, 而況外國之士非其勝人寧有若斯之報耶.

석망명은 고고려(고구려) 사람이다. 도에 뜻을 두고 인에 의지하여 참을 지키고 덕에 근거하였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안으로는(마음속으로는) 상고하기를 거듭하였다. 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비가 세차게 내리는 듯한(성대한)명성이 있고, 남음이 있는 그 명성이 사방으로 치달림(퍼짐)이 있었다. 진나라 지둔법사가 준 글에 말하기를 상좌(제자) 축법심은 중주 유공의 제자로 몸과 성품이 바르고 우뚝하여 도속을 모두 통솔하였고, 지난날 서울에 있을 때는 법의 벼리를 굳게 지켜 내외가 모두 우러렀으며, 도를 높이는 장인이었습니다.” 했다. 지둔 공이 중국에서 매우 두터운 명망이 있고, 더불어 인편에 말을 전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자들은 반드시 뛰어난 인재이면서 능력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일 것인데, 하물며 외국의 선비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정녕 이 같음의 답장이 있었겠는가?

 

且佛敎旣從晋行乎海東, 則宋 · 齊之間應有豪傑之軰與時則奮, 而無載籍悲夫. 然彼宋人朱靈期(或作虛) 使自高麗還, 失濟於洲上, 得杯渡之鉢. 又齊時高麗未達佛生之事, 問高僧法上以周昭之瑞爲答. 則高人烈士西笑於中國, 取綱要者 固不少矣. 時無良史羅縷厥緖爲恨耳.

또한 불교가 이미 나라로부터 해동에 (들어 와)행해졌고(유행하였고) 곧 송나라(420~479), 제의 사이에도 마땅히 호걸들이 있어 때를 같이하여 떨쳤을 것이나 실린 기록이 없으니 슬프다. 그러나 저 송나라 사람 주령기(라 썼다.)는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 배를 잃고 모래톱에 올라 배도의 발우를 얻었다. 또 제나라 때(479~502)에는 고려가 아직 부처가 난 일을 통달치 못하여 고승 법상에게 물으니 주나라 소왕의 상서를 가지고 답을 하였다. 곧 고인과 열사들이 서쪽으로 중국에 가 다투어 벼리와 요점을 취한 자가 진실로 적지 않았다. 그 때에 좋은 역사(역사가)의 편집이 없고, 실마리를 빠트린 것이 일뿐이다.

 

賛曰. 古者三韓鼎峙開國稱王, 彼佛聲光蔑有其兆. 及感應道交, 賢德聿來以赴機叩. 易曰, “感而遂通天下之故.” 順道有之矣. 始予躬詣所謂興國·興福, 因有綴文記事之志無緣以發之, 今謬承景命乃以順道爲傳首云.(此賛當在順道傳下.)

기려 말한다. 옛날에 삼한이 솥발처럼 대치하여 나라를 열고 왕을 일컬었을 때, 저 부처님의 소리와 빛은 그 조짐이 없었다. 도의상 교제에 감응에 이르러 어진 사람과 덕이 있는 사람이 함께 와서 기틀(기연)에 나아가(따라) 두드렸다.(교화하였다.) 주역에 말하기를 감응함으써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한다.”했는데 순도를 이른 말이다. 처음 내가 몸소 이른 바 흥국사, 흥복사에 나아갔을 때, 인하여 글을 짓고, 일을 기록할 뜻이 있었지만, 으로서 발표하지 못하였다. 이제 외람되이 경명(왕명)을 받들어 순도로서 전의 처음을 삼는다.(이 찬은 마땅히 순도 전 다음에 있어야 한다.)

 

釋義淵句高麗人也. 世系緣致咸莫聞也. 自隷剃染善守律儀. 慧解淵深見聞泓博兼得儒玄爲一時道俗所歸. 性愛傳法意在宣通, 以無上法寶光顯實難, 未辨所因. 前齊定國寺沙門法上戒山慧海肅物範人歷跨齊世, 爲都統所部僧尼不減二百萬, 而上綱紀將四十年. 當文宣時盛弘釋典內外闡揚黑白咸允, 景行旣彰逸響遐被. 是時句高麗大聖相王高德乃深懷正信, 崇重大乘欲以釋風被之海曲. 然莫測其始末緣由, 自西徂東年世帝代.

승려 의연은 구고려(고구려) 사람이다. 세계와 연고는 모두 들음이 없다.(알지 못한다.) 스스로 머리를 깍고 물들인 옷을 입음(출가하고부터)으로부터 계율을 잘 지켰다. 지혜가 못처럼 깊고, 견문이 깊고 넓으며, 겸하여 유학과 도교를 얻어 한 때 도속이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성품이 법을 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뜻을 잘 풀어서 통하게 하는데 두었고, 위없는 법보로서 빛나게 드러내는 것이 실로 어려웠으며, 연유하는 바도 판별하지 못하였다. 앞의 제나라 정국사 승려 법상은 계는 산 같이 높고, 지혜는 바다 같이 넓으며 사물을 인도하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 차례로 넘어 세상을 제도하였다. 도통이 되어서는 거느린 바의 승니(스님)2백만에서 줄이지 않았다. 법상이 강기(기율)를 잡은 것이 40여년이었다. 문선제 때를 당하여 성대하게 석전(불경)을 넓히니 내외에 널리 퍼트려져 도속이 모두 믿었다. 아름다운 행실이 이미 드러나고 메아리가 멀리 입혀졌다.(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이 때 구고려(고구려) 대성()상 왕고덕이 이에 깊이 바른 믿음을 품고, 대승을 높이고 소중하게 여겨 석풍(불교)을 가지고 바다 모퉁이에 입히려 하였다. 그러나 그 시말과 연유,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온 연대, 황제의 대(이름을)를 헤아릴 수 없었다.

 

故件錄事條, 遣淵乘帆向鄴啓發未聞. 其略曰. “釋迦文佛入涅槃來至今幾年, 又在天竺經歷幾年方到漢地, 初到何帝, 年號是何. 又齊 · 陳佛法誰先, 從爾至今歷幾年帝. 請乞具注. 其十地·智度·地持·金剛般若等諸論本誰述作, 著論緣起靈瑞所由有傳記不, 謹錄諮審請垂釋疑.”

그러므로 건 별로 일의 조항을 기록하여 의연을 배에 태워 업을 향해 보내 듣지 못한 것을 열어 깨우치게 하였다. 그 대략을 말한다. “석가문불(석가무니불)이 열반에 든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년인가. 또 천축에 몇 년을 있다가 바야흐로 한나라 땅에 이르렀으며, 어느 황제 때 처음 이르렀는지, 연호는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나라 나라이 누가 먼저인지, 이를 따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년, 몇 왕을 지났는가? 모두 알려주실 것을 청합니다. 십지, 지도, 지지, 극강반야등의 여러 논들은 본래 누가 서술하고 지은 것입니까? 저론의 연기와 신령스러운 상서가 연유한 바는 전하고 기록함이 있는지, 아닌지 삼가 기록하여 자문하기를 자세히 하니 의심을 풀어주실 것을 청합니다.”했다.

 

上答云. “佛以姬周昭王二十四年甲寅歲生, 十九出家三十成道. 當穆王二十四年癸未王聞西方有化人出, 便卽西入至竟不還, 以此爲驗. 四十九年在世, 滅度至今齊世武平七年丙申凡一千四百六十五年. 後漢明帝永平經法初來, · 晋相傳. 吳孫權赤烏年康僧會適吳方弘敎法. 地持阿僧伽比丘從彌勒菩薩受得其本, 至晋安帝隆安年曇摩讖於姑臧爲河西王沮渠蒙遜譯. 摩訶衍論是龍樹菩薩造, 晋隆安年鳩摩什波至長安爲姚興譯, 十地論 · 金剛般若論竝是僧佉弟波藪槃豆造, 至魏宣武帝時菩提留支始翻.” 上答指證由緣甚廣, 今略擧要.

법상이 답하여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희씨 주나라 소왕 24년 갑인년(BC1027)에 태어났다. 19세에 출가하여 30세에 도를 이루었다. 목왕 24년 계미(BC977)에 왕이 서방에서 교화하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듣고, 문득 서쪽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나 끝내 돌아오지 못함에 이르렀으니 이로서 징험된다. 49년 세상에 있다가 멸도한 후 지금 제나라 세대 무평 7년 병신(576)에 이르기까지 1465년이다. 후한 명제 영평 연간에 경법이 처음 오고, 위나라와 나라가 서로 전하였다. 오나라 손권 적오 연간(238~251)에 강승회가 오나라에 가 비로소 교법을 넓혔다. 지지론은 아승가 비구가 미륵보살로부터 그 책을 받았는데 東晋나라 안제 융안(397~401)연간에 고장에서 담마참이 하서왕 저거몽손을 위해 번역하였습니다. 마하연론은 용수보살이 지었고, 東晋나라 융안 연간에 구마라집파가 장안에 이르러 요흥을 위하여 번역하였고, 십지론, 금강반야론은 모두 아승거의 동생 피수반두가 지었고, 위나라 선무제 때에 이르러 보리유지가 처음 번역하였다.”했다. 법상의 대답은 증거와 연유가 매우 넓으나 지금 대략적으로 요점을 든다.

 

淵服膺善誘博通幽奧. 辯高灸輠理究連環, 曩日舊疑煥然氷釋, 今玆妙義朗若霞開. 西承慧日東注法源, 望懸金不刊, 傳群玉而無朽, 所謂 苦海津濟, 法門梁棟者其吾師乎. 旣返國揄揚大慧導誘群迷, 義貫古今英聲藉甚. 自非天質火拔世道相資何以致如斯之極哉. 史不叙所終故不書.

의연이 늘 마음에 두어 잊지 않고 그대로 지키며 널리 통하고 오묘한 진리를 잘 유인하였다. 말은 유창하고 이치를 궁구하여 얽힌 고리를 풀 수 있게 되었으며, 말하는 때 이전의 오래된 의심이 얼음처럼 풀리고, 지금 이 현묘한 뜻과 맑음이 안개가 걷히듯 빛났다.(환하였다.) 서쪽에서 계승한 지혜의 해를 동쪽에주입하여 법의 근원이 되었으니 달아 놓은 금을 바라보고도 간()하지 않았으며, 여러 옥을 전해 썩지 않게 하였으니 이른 바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나루요 법문의 대들보와 같다.’ 한 것이 오직 우리 스님을 일컳는 것일 것이다. 나라에 돌아 온 후에는 (부처님의)큰 지혜를 찬양하고, 여러 미혹한 이를 인도하고 유인하니 뜻은 고금을 꿰뚫고 아름다운 명성은 사방에 퍼졌다. 타고남 자질이 크게 뛰어나고, 세상의 도리가 서로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같은 지극함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했다. 사서에 마친 바를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賛曰. 佛生年月日傳記互出, 理難一定. 然淵親承法上口授而來, 乃與唐法琳辨正論所據若合符節, 當以此爲指南. 然鉅儒吳世文援引古文特啓異論致有問對, 雖辭旨煩麗亦不足憑也.

기려 말한다. 부처님의 난 해, , 일은 전기에 여기저기 나오나 이치를 한 번으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의연은 직접 법상의 가르침을 받아 왔기에 당나라 법림의 변정론에 근거한 것이 부절이 합한 듯 하였으니 마땅히 이로서 지남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유학자 오세문이 옛글을 인용하여 특히 다른 논의를 열어 묻고, 대답함이 있음에 이르렀으니 비록 말과 가르침이 번잡하고, 아름다우나 또한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된다.

 

釋曇始關中人也, 自出家多有異跡. 足白於面, 雖涉泥水未甞沾濕. 天下咸稱白足和尙. 以晋大元末年賚持經·律數十部往化遼東, 乘機宣化顯授三乘立以歸戒. 梁僧傳以此爲高句麗開法之始. 時當開土王五年, 新羅奈勿王四十一年, 百濟阿莘王五年而秦符堅送經像後二十五年也. 是後四年法顯西入天竺, 又二年羅什生來, 玄高法師生焉. 晋義熙初師復還關中唱道三輔.

석 담시는 관중 사람이다. 출가로부터 이상한 자취가 많이 있었다. 발이 얼굴보다 희어서 비록 흙탕물을 건너도 일찍이 젖지 않았다. 천하가 모두 백족화상이라 일컬었다. 東晋나라 태원 말년(396) , 율 수십 부를 가지고 와 용동에서 교화하였는데, 기틀을 타고 교화를 펴고 분명히 삼승을 주어 세우는 것으로서 불계에 귀의하게 했다. 양고승전은 이로서 고구려 불법을 연 처음으로 삼았다. 이때는 광개토왕 5(396)이고, 신라 내물왕 41, 백제 아신왕 5년으로 전진의 부견이 경전과 불상을 보낸 25년 뒤이다. 4년 뒤에 볍현이 서쪽으로 천축에 들어갔다. 2년 뒤(402) 구마라집이 중국에 왔고, 현고법사가 태어났다. 東晋 의희 초년(405)(담시)스님이 다시 관중으로 돌아 와 삼보에서 도를(법을) 외쳤다.

 

長安人王胡之叔父某死已數年矣, 一日夢中忽來現形接引王胡遊遍地獄示諸果報. 胡辭還釋謂胡曰, “旣已知其因果, 要當奉事白足阿練用修白業.” 胡敬諾窹已. 遍詢衆僧, 惟見始足白曰面因卽事之. 晋末匈奴赫連勃勃襲取關中斬戮無數, 師亦遇害刀不能傷. 普赦沙門悉皆不殺. 而潜遁山中修頭陀密行.

장안사람 왕호의 숙부 아무개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후 하루는 꿈속에 갑자기 와서 형상을 드러내고, 왕호를 인도하여 두루 지옥을 돌면서 여러 과보를 보여주었다. 왕호가 하직하고 돌아가려할 때 (숙부가)왕호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미 인과를 알았으니 마땅히 백족아련을 받들고 섬겨 백업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왕호가 공경히 예하고 답하고, 잠에서 깨었다. 두루 여러 스님에게 물어 오직 담시가 발이 얼굴보다 흰 것을 보고는 곧 그를 섬겼다. 東晋 말엽에 흉노 혁련발발이 관중을 습격하여 뻬앗고 베어 죽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스님이 또한 해침을 만났으나 칼이 상하게 하지 못하였다. 널리 사문(스님)을 풀어주어 모두 죽지 않았다. 몰래 산중으로 도망하여 두타의 밀행을 닦았다.

 

未幾拓跋燾復剋長安, 擅威關洛. 時傳陵崔浩少習左道猜疾釋敎, 位居僞輔爲燾所深信, 乃與天師寇氏說燾以謂 佛敎無益於世民利有傷.” 勸令廢之. 燾惑其言以僞太平七年遂毁滅佛法分遣軍士燒掠寺社, 統內僧尼悉令罷道. 其有竄逸者追捕梟斬之, 四境之內無復沙門. 時玄高等被害, 語在本傳.

오래지 않아 척발도가 다시 장안을 점령하고 그 위세가 관(서안), (하남)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 때 전()릉의 최호는 어려서 좌도(도가)를 익혀 석교(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다. 그는 위보의 자리에 있으면서 척발도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에 천사 구씨와 함께 척발도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불교는 이익이 없고, 세상의 백성들의 이익을 해침이 잇습니다.”하고, 없앨 것을 권하였다. 척발도가 그 말에 미혹되어 태평 7(446) 마침내 불법(불교)을 비방하고 폐하고, 군대를 나누어보내 를불태우고 약탈하게 하고, 통치하는 구역 내의 스님들을 모두 도(불법)을 그만두게 하였다. 달아나 숨은 자는 쫓아 잡아 베어 죽이니 나라 안에 다시 사문(스님)이 없었다. 그때 현고 등이 해를 입었는데 말이 본전에 있다.

 

師閉絕於兵革所不至處依隱閱世, 及太平末師算知燾化之將至, 乃於元會日手策金錫卽到宮門. 有司奏云, “有白足道人從官門徑入儀形可怪.”燾聞已卽令猛卒斬之不傷. 燾大怒自以所佩利劍斫, 惟劍所著處 有痕如紅綿, 體無餘異. 時有北園養虎子檻, 燾驅令貽之, 虎皆潜伏終不敢近. 燾試遣天師近檻, 猛虎輒鳴吼直欲搏噬. 於是燾乃知佛敎威神非黃老所及, 卽奉師上殿頂禮其足, 悔責諐. 師爲說因果報應不差, 指掌開示略現神異.

스님이 병혁(전란)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서 문을 닫아 끊고, 숨은 곳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폈다. 태평 말년(450)에 이르러 스님이 척발도를 교화할 때가 장차 이를 것임을 헤아려 알았다. 이에 원회일에 손에 금으로 된 지팡이를 잡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유사가 아뢰어 말하기를 백족도인이 관문에 막 들어 왔는데 형상과 거동이 매우 괴이할 만합니다.”했다. 척발도가 듣고 곧 사나운 병졸로 하여금 베어 죽이게 하였으나 해치지 못하였다. 척발도가 크게 노하여 스스로 차고 있던 날카로운 검으로 베었으나, 검이 닿은 곳에 붉은 솜() 같은 흔적만 있을 뿐 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 때 북쪽 정원에서 범을 기르던 범이 우리 안에 있었는데, 척발도가 몰아서 호랑이에게 주게 하였지만 호랑이가 깊이 엎드려 끝내 감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척발도가 시험 삼아 천사를 우리 가까이 보내니 사납게 호랑이가 번번이 울부짖고 곧바로 쳐서 물려고 했다. 이에 척발도가 곧 불교의 위세와 신이함은 황제와 노자의 가르침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아 곧 스님을 받들어 전각에 올라 그 발에 이마를 대어 절하는 예를 하고,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를 꾸짖었다. 스님이 그를 위해 인과와 보응이 차이가 없음을 설명하고 손가락과 손바닥을 펴 대략적인 신이함을 나타내었다.

 

燾生大慚惧改往修來. 然禍惡已稔遂感厲疾, 而崔寇亦發惡病將入死門. 燾以謂禍由彼作罪不可赦因族滅二家, 宣令國內光復竺敎鍾梵相聞. 旣而孫濬襲位, 深懲殷鑑洪闡眞風寶㲲制度其興也勃焉. 師不知所往.

척발도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미래의 선을 닦으려 하였다. 그러나 재앙과 악이 이미 쌓여 마침내 역병에 걸렸고, 초호와 구씨가 또한 나쁜 병에 걸려 장차 죽음의 문에 들어가려 했다. 척발도는 재앙은 그들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하여 두 가문을 죽여 없앴다. 나라 안에 명령을 내려 축교(불교)를 빛나게 회복하고, 종소리와 범패 소리가 서로 들리게 하였다. 이윽고 손자 예가 지위(황제 자리)를 잇고, 깊이 지난 일을 거울삼아 경계하며 널리 불교의 바람을 일으키니 귀중한 제도들이 활발하게 흥기하게 되었다. 스님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

 

賛曰. 火炎崑岡玉石俱焚, 霜嚴草野蕭蘭共悴. 師之艱難險阻誠曰殆哉, 雖伐樹削跡不足比也. 然隨時隱現若靑山白雲之開遮, 遇害虧盈如碧潭明月之橯樚. 捐軀濟溺, 道之以興. 菩薩法護正當如此. 其適來桑域決膜生盲, 亦乘夙願而至者耶.

기려 말한다. 불이 곤강에 일어나니 옥석이 모두 불타고, 서리가 차가우니 들판의 쑥과 난초가 함께 시든다. 스님의 어려움과 험하여 막힘은 진실로 위태로웠으니 비록 나무를 베고 자취를 깍아 낼지라도 비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때에 따라 숨었다 나타나는 것이 마치 푸른 산이 흰구름이 걷히고 덮히는 것과 같았고, 해침을 만나 기울고 차는 것이 마치 푸른 물속에서 밝은 달을 건져내는 것과 같다. 내 몸을 던져 빠진 것을 건져내니 도가 흥기하게 되었다. 보살의 불법(불교)보호가 바르고 마땅하기가 이 같으리라. 그가 마침 상역(동쪽나라)에 와 장님들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또한 숙원을 타고 이르는 자일 것이다.

 

釋摩羅難陀 胡僧也. 神異感通莫測階位, 約志遊方不滯一隅. 按古記, 本從竺乾入于中國附材傳身徵烟召侶, 乘危駕險任歷艱辛有緣則隨, 無遠不履. 當百濟第十四 枕流王卽位九年九月, 從晋乃來王出郊迎之, 邀宮中敬奉供養禀受其說. 上好下化, 大弘佛事共賛奉行, 如置郵而傳命.

석 마라난타는 호승(이민족 스님이다.) 신이와 감통은 단계를 헤아릴 수 없고, 사방을 노니는 데 뜻을 두어 한 모퉁이에 머물지 않았다. 고기를 살펴보니 본래 축건(천축)에서 중국에 들어 와 인재에 따라 몸을 의지하고, 남모르게 벗을 불렀으며, 위태로움을 겪고, 험난함을 겪었지만 어려움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인연이 있으면 곧 따라 멀다고 밟지 않음이 없었다. 백제 제 14대 침류왕 즉위 9(1)(384) 東晋에서 오니 왕이 교외에 나와 맞이하고, 궁중에 맞아 공경하고 받들어 공양하면서 그 말을 받았다.(그의 설법을 들었다.) 윗사람이 좋아하니 아랫사람들이 교화되어 크게 불사를 넓히고 함께 찬양하여 받들어 행하니 마치 역참을 두고 명을 전하는 것과 같았다.

 

二年春剏寺於漢山度僧十人, 尊法師故也. 由是百濟次高麗而興佛敎焉, 逆數至摩騰入後漢二百八十有年矣. 耆老記云, “句高麗始祖朱蒙娶高麗女生二子, 曰避流· 恩祖. 二人同志南走至漢山開國.” 今廣州是也. 本以百家渡河故名百濟. 後於公州扶餘郡前後相次而立都. 三韓東南隅海內有倭國, 卽日本國也, 倭之東北有毛人國, 其國東北有文身國, 其國東二千餘里有大漢國, 其國東二萬里有扶桑國.

(침류왕)2(385) 봄에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10명이 스님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스님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가 고려 다음으로 불교가 흥기하였다. 거슬러 계산하면 마등이 후한에 이른 지 200년 뒤였다. 기로기말하기를 구고려(고구려) 시조 주몽이 고려의 여자 아내로 맞아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피(), ()조이다. 두 사람이 뜻을 함께ㅏ여 남쪽으로 달아나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열었다.”했다. 지금의 廣州가 이것이다. 본래 100가로서 강을 건넜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가 후에 공주와 부여군에서 앞뒤로 서로 차례로 도읍을 세웠다. 삼한의 동남쪽 모퉁이 바다 안에 왜국이 있으니 곧 일본국이다. 왜의 동북쪽에 모인국이 있고, 그 나라 동북쪽에 문신국이 있고, 그 나라 동쪽 2천여리에 대한국이 있고, 그 나라 동쪽 2만리에 부상국이 있다.

 

宋時有天竺五僧遊行至此始行佛法, 此皆海中在. 惟日本國僧往往渡海而來, 餘皆未詳. 夫三韓者馬韓· 卞韓· 辰韓是也. 寶藏經云, “東北方有震旦國, 或云支那此云多思惟, 謂此國人思百端故, 卽大唐國也.” 然則三韓在閻浮提東北邊非海島矣, 佛涅槃後六百餘年乃興.

송나라 때 천축의 다섯 스님이 돌아다니다 여기에 이르러 처음 불법(불교)을 행하니 이는 모주 바다 가운데 있다. 오직 일본국 스님이 자주 바다를 건너 왔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자세하지 않다. 저 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이 이것이다. 보장경동북쪽에 진단국이 있는데 혹은 지나라 말하고, 여기서는 다사유라 하며, 이 나라 사람들은 이를 일러 생각이 백가지 실마리이기(생각을 많이 하기)때문이라 하니 곧 대당국이다.”했다. 그러한 즉 삼한은 염부제 동북쪽 변두리에 있고, 해도가 아니니 부처님께서 열반한지 600여년 후에 흥기하였다.

 

中有聖住山名室梨母怛梨(唐言三印山), 峻峯高聳, 觀世音菩薩宮殿在彼山頂卽月岳也. 此處聖住未易殫. 然百濟乃馬韓之謂矣. 宋僧傳云, “難陀得如幻三昧, 入水不濡投火無灼, 能變金石化現無窮.” 時當建中年代相拒而不同, 恐非一人之跡也.

그 나라 안에 있는 성주산은 이름이 실리모달리라하는데(당나라 말로 삼인산이라 한다.) 산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우뚝 솟았는데 관세음보살의 궁전이 그 산 꼭대기에 있으니 곧 월악이다. 이곳 성주에 대해서는 다 쓰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는 바로 마한을 이른다. 송고승전에는 마라난타가 여환삼매를 얻어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던져도 불에 타지 않았고, 금이나 돌을 변화시켜 나타냄이 무궁하였다.”했다. 이때는 건중연간(80~783)에 해당하나 연대의 서로 떨어짐이 같지 않으니 아마도 한 사람의 자취가 아닌 듯하다.

 

賛曰. 世之流民性多𢤱戾王命有所不從, 國令有所不順. 一旦聞所未聞, 見所未見, 卽皆革面遷善修眞面內, 以順機宜故也. 傳所謂, “出其言善, 則千里之外應者.” 豈非是耶. 然攝機之道要在乘時, 故事半古人功必倍之.

기려 말한다. 세상의 유민들은 성품이 많이 사나워 왕명을 따르지 않는 바가 있고, 나라가 명령하여도 몸과 마음가짐이 거친 바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듣지 못한 바를 듣고, 보지 못한 바를 보니 곧 모두 얼굴을 바꾸고, 선으로 옮기며 참된 면을 닦았으니 시기나 형편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전에 이른 바 그 말을 함이 선하면 곧 천리의 밖에서 응한다.”한 것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상대를 포섭하는 방법은 때를 타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일은 옛 사람의 반을 공은 반드시 배가 되는 것이다.

 

釋阿道或云本天竺人, 或云從吳來, 或云自高句麗入魏後歸新羅, 未知孰是. 風儀特異神變左奇. 恒以行化爲任, 每當開講天雨妙花. 始新羅訥祗王時有黑胡子者從句高麗 至一善郡宣化有緣, 郡人毛禮家中作窟室安置. 於是梁遣使賜衣著香物, 君臣不知香名及與所用. 乃遣中使賚香遍問中外. 胡子見之稱其名目曰, “焚此則香氣芬馥所以達誠於神靈. 所謂神聖不過三寶, 一曰佛陀,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必有靈應.”

석 아도는 혹은 천축 사람이라 하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 하고, 혹은 고구려에서 위나라에 들어갔다가 후에 신라로 돌아갔다 하는데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가 특이하고, 신통변화가 더욱 기이하였다. 항상 교화를 행하는 것으로서 임무를 삼아 매번 강론을 열면 하늘에서 묘한 꽃이 비처럼 내렸다. 처음 신라 눌지왕 때 흑()호자가 구고려(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이르러 교화를 펼 인연이 있었으니 일선군 사람 모례가 집 안에 굴실을 만들고 안치하였다. 이에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옷과 향물을 내렸다. 임금과 신하가 향의 이름과 쓰이는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에 중사를 보내 향을 가지고 중외에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고 그 이름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를 태우면 곧 향기가 매우 향기롭고 정성이 신령에 도달합니다. 이른 바 신성은 삼보보다 나음이 않으니 하나는 불타이고, 둘째는 달마이고, 세 번째는 승가입니다. 만약 이를 태우고 발원하면 반드시 신령스러운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했다.

 

時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厥疾尋愈. 王甚喜酬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報其德焉, 因語曰, “吾有所歸.” 請辭俄而不知所去. 及毘處王時有阿道和尙與侍者三人亦來止毛禮家, 儀表似胡子. 住數年無疾而化, 其侍者三人留住讀誦經律, 往往有信受奉行者焉.

그때 왕녀가 병이 들자 왕이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태우고 서원하게 했더니 그 병이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보답하는 물건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묵호자가 나와 모례를 만나 얻은 바의 물건을 주어 그 덕을 갚고, 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돌아갈 곳이 있다.”하는 하직을 청하고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비처왕(소지왕) 때 이르러 아도화상이 시자(모시는 사람) 3명과 또 모례의 집에 와서 머물렀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머문 지 몇 년 만에 병 없이 죽고, 그 시자 3명은 살면서 경율을 읽고 외웠는데 종종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然按古記, “梁大通元年三月十一日阿道來至一善郡天地震動. 師左執金環錫杖, 右擎玉鉢應器, 身著霞衲, 口誦花詮. 初到信士毛禮家, 禮出見驚愕而言曰, ‘者高麗僧正方來入我國, 君臣怪爲不祥議而殺之, 又有滅垢玭從彼復來殺戮如前, 汝尙何求而來耶. 宜速入門莫令隣人得見.’ 引置密室修供不怠. 適有吳使以五香獻原宗王. 王不知所用遍詢國中. 使者至問法師, 師曰 以火燒而供佛也.’ 其後偕至京師, 王令法師見使. 使禮拜曰, ‘此邊國高僧何不遠.’ 而王因此知佛僧可敬勅許斑.”

그러나 고기(옛 기록)를 살펴보니 양나라 대통 1(527) 311일 아도가 일선군에 이르렀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스님이 왼손에 금고리가 달린 지팡이를 잡고, 오른 손에는 옥 발우 밥그릇을 들었고, 몸에는 노을() (누더기 옷)을 입었으며, 입으로는 화전(불교 경전)을 외웠다. 처음 모례의 집에 이르니 모례가 나와 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지난번에 고려 스님이 정방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임금과 신하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하여 의논하여 그를 죽였고, 또 멸구비라는 이가 그를 따라 다시 왔을 때 앞과 같이 죽였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구하여 여기에 온 것입니까? 마땅히 빨리 문에 들어 와 이웃 사람으로 하여금 볼 수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하고는 인도하여 비밀 방에 두고 공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침 오나라 사신이 다섯 가지 향을 원종왕(법흥왕)에게 바쳤다. 왕이 쓰는 바를 알지 못하여 두루 나라 안에 물었다. 사자(왕의 심부름꾼, 사신)가 법사(아도)에게 이르러 물으니 스님이 말하기를 불로 태우는 것으로서 부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했다. 그 후 모두(사자와 아도스님) 경사(서울)에 이르렀는데 왕이 법사로 하여금 사(오나라 사신)을 만나게 하였다. (오나라 사신이)예배하고 말하기를 이 변방의 나라에 높은 덕의 스님께서 어찌 멀다하지 않고 오셨습니까?’하니 왕이 이로 인하여 부처님과 스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칙령으로 널리 행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했다.

 

又按高得相詩史曰, “梁氏遣使曰元表送沈檀及經像, 不知所爲咨四野, 阿道逢時指法.” 相註云, “阿道再遭斬害神通不死隱毛禮家.” 則梁吳之使莫辨其詳. 又阿道之跡多同黑胡子何哉. 然自永平至大通丁未凡四百十餘年, 句高麗興法已百五十餘年, 而百濟已行一百四十餘年矣.

또 고득상의 시사에 양씨(양 나라)가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원표가 침단과 불경, 불상을 보내왔는데, 하는(쓰는) 바를 알지 못하여 사방에 물어보다가 아도를 만났는데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주석에 아도는 두 번 베어져 죽임을 당하였으나 신통력으로 죽지 않고 모례의 집에 숨었다.’”하니 곧 양나라, 오나라 사신 중에 누구인지 그 자세한 것을 판별할 수 없다. 또 아도의 자취가 많이 흑호자와 닮은 것을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영평에서 대통 정미에 이르기까지는 무릇 410여년이고, 구고려(고구려)에 불법이 흥기한 것은 150여년이고, 백제에서 (불교가)행해진 것은 140여년이었다.

 

若按朴寅亮殊異傳云. 師父魏人崛摩, 母曰高道寧高麗人也. 崛摩奉使高麗私通還魏. 道寧因有身誕焉. 師生五稔有異相. 母謂曰, “偏𧙖之子莫若爲僧.” 師依敎卽於是日剃髮. 十六入魏覲省崛摩, 遂投玄彰和尙受業. 十九年歸寧於母, 母諭曰, “此國機緣未熟難行佛法. 惟彼新羅今雖無聲敎, 爾後三十餘月有護法明王御宇大興佛事. 又其國京師有七法住之處, 一曰金橋天鏡林 今興輪寺 , 二曰三川岐 今永興寺 , 三曰龍宮南 今皇龍寺 , 四曰龍宮北 今芬皇寺 , 六曰沙川尾 今靈妙寺, 七曰婿請田 今曇嚴寺 . 此等佛法不滅, 前劫時伽藍墟也. 汝當歸彼土初傳玄旨爲浮屠始祖不亦美乎.” 師旣承命子之聲出疆而來寓新羅王闕西里(今嚴莊寺是也.), 時當味鄒王卽位二年癸未矣. 師請天竺敎, 以前所不見爲怪至有將殺之者, 故退隱于續村毛祿家(今善州也.) 逃害三年成國宮主病疾不愈, 遣使四方求能治者. 師應募赴闕爲療其患. 王大悅問其所欲. 師請曰, “但剏寺於天鏡林吾願足矣.” 王許之. 然世質民頑不能歸向. 乃以白屋爲寺, 後七年始有欲爲僧者來依受法. 毛祿之妹名史侍亦投爲尼, 乃於三川岐立寺曰永興以依住焉. 味雛王崩後嗣王亦不敬浮屠將欲廢之, 師還續村自作墓入其內閉戶示滅. 因此聖敎不行於斯盧, 厥後二百餘年原宗果興像敎, 皆如道寧所言. 自味雛至法興凡十一王矣. 阿道出現年代前郤如是其差舛, 竝是古文不可取捨. 然若當味雛時已有弘宣之益則與順道同時明矣. 以其中廢而至梁大通乃興耳, 故竝出黑胡子元表等叙而觀焉.

박인량의 수이전스님은 위나라 사람 굴마이고, 어머니는 고도령으로 고려 사람이다. 굴마가 사신으로 고려에서 몰래 정을 통하고 위나라로 돌아갔다. 고도령이 인하여 임신하여 탄생하였다. 스님은 태어나고 5살이 되자 기이한 모습이 있었다. 어머니가 일러 말하기를 아비 없는 자식이니 스님이 되는 것이 낫다.’ 했다. 스님이 가르침에 의하여 곧 이날 머리털을 깍았다. 16세에 위나라에 들어 가 굴마를 보고, 마침내 현창화상에게 들어 가 업을 받았다. 19(19, 19년만?)에 어머니에게 돌아 뵈었더니 어머니가 깨우쳐 말하기를 이 나라는 기연이 아직 익숙하지 못하여 불법(불교)을 행하기 어렵다. 저 신라는 지금 비록 성교(불교)가 없지만 이후 30여년 이후에 불법을 지키는 밝은 왕이 있어 다스리는 나라에 크게 불사를 일으킬 것이다. 또 그 나라 서울에는 일곱 곳의 법이 머무를 곳이 있으니 첫째는 금교 천경림이라 하니 지금의 흥륜사이다. 둘째는 삼천기이니 지금의 영흥사이다. 셋째는 용궁남이니 지금의 황룡사이다. 넷째는 용궁북이니 지금의 분황사이다. (다섯번째는 신유림이니 지금의 천왕사이다.) 여섯 번째는 사천미이니 지금의 영묘사이다. 일곱째는 서청전이니 지금의 담엄사이다. 이 들은 불법이 없어지지 않을 곳이니 전겁 때의 가람() 터이다. 너는 마땅히 그 땅에 들어 가 현묘한 가르침을 처음 전하여 부도(불교)의 시조가 되는 것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했다. 스님이 아들에게 명하는 소리(말을)를 받들어 경계를 나와 신라왕궁의 서쪽 마을(지금의 담엄사가 이것이다.)에 와 머물러 살았다. 그 때는 미추왕 즉위 2년 계미(263)에 해당한다. 스님이 천축교(불교)를 청하자(불교이 시행을 청하자) 이전에 보지 못한 바였기 때문에 괴이하게여겨 장차 죽이려는 자가 있었다. 그러므로 물러나 속촌 모록의 집(지금의 선주이다.)에 숨었다. 해침에서 도망하여 3년이 지난 후 성국궁주가 병이들어 낫지 않았다. 사자를 사방으로 보내 치료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스님이 모집에 응하여 궁궐에 가 그 병을 치료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 바라는 바를 물었다. 스님이 청하여 말하기를 다만 천경림에 절을 창건하는 것이 내 바람에 충분합니다.’ 했다. 왕이 그것을 허가했다. 그러나 세상이 질박하고 백성이 완악하여 (불교에)쏠리게 할 수 없었다. 이에 허술한 초가집(白屋)을 절로 삼았다. 7년 후 처음으로 스님이 되기 위해 온 자가 있어 귀의하고 법을 받았다. 미추왕이 죽은 후 이은 왕이 또한 불교를 공경하지 않아 장차 폐하려 하였다. 스님이 속촌으로 돌아 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 가 문을 잠그고 입적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교(불교)가 사로에서 행해지지 못하고, 200여년 후 원종(벙흥왕)이 과연 상교(불교)를 일으켰으니 모두 고도령이 말한 바와 같았다. 미추왕에서 법흥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11왕이다. 아도가 출현한 연대의 전후 차이가 이 같으나 모두 옛 글이니 취하거나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미추왕 때 이미 널리 편 이익이 있음이 마땅하다면 순도와 같은 때임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없어졌다가 양나라 대통에 이르러 곧 흥기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흑호자, 원표 등이 나온 것을 서술하여 본 것이다.” 했다.

 

賛曰. 自像敎東漸信毁交騰, 權輿光闡代有其人, 若阿道·黑胡子皆以無相之法身隱現自在. 或先或後, 似同異, 若捕風搏影, 不可執跡而定也. 但其先試可而後啓行, 始逃害而終成功, 則秦之利方漢之摩騰亦無以加焉. 易曰 藏器待時.” 阿道之謂矣.

기려 말한다. 상교(불교)가 동쪽으로 점차 전해짐에서부터 믿고 비방함이 교대로 일어 처음으로 그 광명이 일어 대대로 그 사람이 있었으니 아도, 묵호자 같은 이가 모두 형상이 없는 법으로서 자신을 숨기고, 나타남을 자유롭게 하였다. 혹은 앞서고, 혹은 뒤따라 같은 듯 다른 듯하니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치는 듯하여 자취를 잡아 정할 수 없다. 다만 먼저는 시험하고 뒤에는 열어 행하였고, 처음에는 해침에서 도망하고 마지막에는 공을 이루었으니 곧 진나라의 이방이나, 한나라의 마등이 또한 이보다 더할 것이 없을 것이다. 주역에 이르기를 그릇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했으니 아도를 두고 이름일 것이다.

 

釋法空 新羅等二十三法興王也. 名原宗,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王身長七尺, 寛厚愛人, 乃神乃聖彰信兆民. 三年龍現楊井中, 四年始置兵部, 七年頒示律令始制百官朱紫之秩. 卽位已來每欲興佛法, 群臣噪噪騰口舌王難之. 然念阿道之至願乃召群臣問曰, “聖祖味雛與阿道肇宣佛敎大功未集而崩, 能仁妙化遏而不行, 朕甚痛焉. 當大立伽藍重興像設其克從先王之烈, 其如卿等何.”

석 법공은 신라 등() 23대 법흥왕이다. 이름은 원종이고, 지증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다. 왕은 키가 7척으로 너그러우면 사람을 사랑하였다. 신령스럽고 거룩하고 믿음을 드러내고 모든 백성에게 믿음을 받았다. (법흥왕)3(516) 용이 용정에 나타났고, 4(517)에 병부를 설치하였으며, 7(520) 율령을 반포하고, 처음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붉은 색과 자줏빛으로 나타내는 차례를 정하였다. 즉위한 이래로 매번 불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시끄럽게 시비하고 헐뜯으니 왕이 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도의 지극한 원함을 생각하고는 곧 여러 신하를 불러 물어 말하기를 성조 미추왕께서는 아도와 함께 처음으로 불교를 펴려는 큰 공을 이루지 못하시고 돌아가시니 능인(부처님)의 현묘한 교화가 막혀 행해지지 못하였는데 짐이 이를 매우 슬프게 생각한다. 마땅히 크게 가람()을 세우고 다시 불상을 조성하여 선왕의 공적을 따르려 하는데 경들은 어떠한가?”했다.

 

大臣恭謁等諫曰, “近者年不登民不安加以隣兵犯境師旅未息, 奚暇勞民作役作無用之屋哉.” 王㦖左右無信歎曰, “寡人以不德叨承大寶, 陰陽不序黎民未安. 故臣下逆而不從, 誰能以妙法之術曉諭迷人者乎.” 久無應者. 至十六年奧有內史舍人朴厭髑(或云異次頓, 或云居次頓)年二十六匪直也人. 秉心塞淵奮義見之勇欲.

대신들이 공알 등이 간하여 말하기를 최근에 농사가 흉년으로 백성들이 편안하지 않고, 더하여 이웃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어느 여가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공사를 일으켜 쓸데없는 집을 지으려 하십니까?”했다. 왕이 좌우가 믿음이 없음을 답답해하며 탄식해 말하기를 과인이 부덕한데도 대보(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으니 음양이 차례하지 않고(순조롭지 못해)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신하가 거스르고 따르지 않으니 누가 현묘한 법의 방법으로서 미혹한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겠는가?”하니 오래 동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법흥왕)16(529) 에 이르러 내사 사인 박염촉(혹은 이차돈, 혹은 거차돈)26세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마음이 떳떳하고 성실하고 생각이 깊어서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떨쳤다.

 

助洪願密奏曰. “陛下若欲興佛敎, 臣請僞傳王命於有司曰, ‘王欲剏佛事.’ 如此則群臣必諫, 當卽下勅曰, ‘朕無此令誰矯命耶.’ 彼等當劾臣罪. 若可其秦彼當服矣.” 王曰 彼旣頑傲雖殺卿何服.” 大聖之敎天神所奉, 若斬小臣當有天地之異. 若果有變誰敢違傲.” 王曰 本欲興利除害反賊忠臣可無傷乎.” 殺身成仁人臣大節, 況佛日恒明皇圖愈永. 死之日猶生之年也.”

(왕의) 넓은 서원을 도우려 비밀히 아뢰어 말하기를 폐하가 만약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신이 거짓으로 왕명을 유사에게 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불사(절을)를 짓고자 하십니다.’할 것을 청합니다. 이 같이하면 곧 여러 신하들이 반드시 간할 것이니 마땅히 곧 명을 내려 말씀하기를 짐이 이런 영이 없었는데 누가 왕명을 속였는가?’하시면 그들은 마땅히 신의 죄를 캐물을 것입니다. 만약 그 (신하들이)아뢰는 것이 옳다고 하신다면 그들은 마땅히 인정할 것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들이 이미 왕고하고 오만하니 비록 경을 죽일자라도 어찌 인정하겠는가?”했다. (염촉이)말하기를 대성의 가르침은 천신이 받드는 바이니 만일 소신을 베어 죽이신다면 마땅히 천지의 이변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과연 이변이 있다면 누가 감히 어기고 오만히 하겠습니까?”했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침을 없애고자 하는 것인데, 도리어 충신을 해치는 것이 슬픔이 없을 수 있겠는가?”했다. (염촉이) 말하기를 자신을 죽이고 인을 이루는 것은 신하된 자의 큰 절개인데, 하물며 佛日이 항상 밝고, 황제의 계획을 더욱 길게 하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죽는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해입니다.”했다.

 

王大加嗟賞曰, “汝是布衣意懷錦繡.” 乃與厭髑深結洪誓. 遂傳宣, “剏寺於天鏡林執事者奉勅興功.” 延臣果面折逆諍. 王曰 朕不出令.” 髑乃昌言, “臣固爲之. 若行此法擧國泰安. 苟有益於經濟, 雖矯國令何罪.” 於是大會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童頭毁服議論奇詭而非常道. 若忽從之恐有後悔. 臣等雖死罪不敢奉詔.” 髑奮曰, “今群臣之言非也. 夫有非常之人而後有非常之事. 吾聞, 佛敎淵奧不可不行. 且燕雀焉知鴻鵠之志哉.”

왕이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너는 베옷을 입었으나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하고는 곧 염촉과 깊이 넓은 서원을 맺었다. (염촉이)마침내 임금의 명령을 전해 널리 알려 말하기를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하니 일을 맡은 자는 명을 받들어 일을 일으키라.”했다. 조정의 신하들이 과연 얼굴을 맞대고 거스르고 간쟁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명령을 내지 않았다.”했다. 염촉이 곧 소리내어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만일 이 법을 행하면 온 나라가 편안해 질 것입니다. 만일 경제(경세제민)에 유익함이 있다면 비록 나라(임금)의 명령을 속인 것이 무슨 죄이겠습니까?”했다. 이에 크게 여러 신하들을 모아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지금 스님 무리를 보니 아이 머리랄 하고, 헤진 옷을 입고 의논이 기궤하여 상도가 아닙니다. 만약 갑자기 그것을 따랐다가 뉘우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죽을죄에 해당될지라도 감히 조(명령을)를 받들지 못합니다.”했다. 염촉이 떨쳐 발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저 비상의 사람이 있은 후에 비상의 일이 있습니다. 제가 들으니 불교는 연원이 깊어 행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제비와 참새가 어찌 홍곡(기러기)의 뜻을 알겠습니까?”했다.

 

王曰 衆人之言牢不可破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 髑吿天誓曰, “我爲法就刑庶興義利. 佛若有神吾死當有異事.” 及斬其頭飛至金剛山頂落焉, 白乳從斷處湧出高數十丈. 日色昏黑天雨妙花地大震動. 君臣士庶咸皆上畏天變, 下慟舍人重法隕命 相向擧哀而哭. 遂奉遺體營葬金剛山禮也. 于時君臣盟曰, “自今而後奉佛歸僧. 有渝此盟明神殛.” 君子曰, “大聖應千百年之運. 仁發於祥義動於瑞. 莫不應乎天地亙乎日月動乎鬼神而況於人乎. 夫其自信於道則天地不得爲不應. 然功貴成而業貴廣也, 故苟有大賴則輕泰山於鴻毛. 壯哉, 得其死所矣.” 是年下令禁殺生. (按國史及古諸傳商量而述.)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이 단단하여 깨트릴 수 없고, 네가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따를 수는 없다.”하고는 마침내 형리에게 내려 베어 죽이게 하였다. 염촉이 하늘에 맹서를 고하며 말하기를 내가 ()(불교를)을 위해 형벌에 나아가는 것은 거의 의와 이로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만일 신이함이 있다면 내가 죽었을 때 마땅히 기이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했다. 목을 베자 그 머리가 날아 금강산 꼭대기에 이르러 떨어졌고, 흰 젖이(흰 젖 같은 피가) 잘린 곳에서 솟아 나왔는데 높이가 수 십장이었다. 해의 색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 아름다운 꽃이 비처럼 내리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임금과 신하, 백성들이 모두 위로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사인(염촉)이 법을 존중하여 목숨을 버린 것을 슬퍼하고 서로 향하여(바라보며) 모두 슬퍼하며 곡하였다. 마침내 유체를 받들어 금강산에 장례하고, 예를 표하였다. 그 때 임금과 신하들이 맹세해 말하기를 지금부터 이후로 부처님을 받들고 스님에게 귀의하겠습니다. 이 맹서가 변함이 있으면(어김이 있으면) 밝은 신이 죽일 것입니다.”했다. 군자는 말하기를 대성은 천백 년의 운행에 응한다. 인은 상서로움을 발하고, 의는 상서를 움직인다. (그것은)천지에 응하지 않음이 없고, 일월에 뻗히고, 귀신에 감동시켰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이겠는가? 그 스스로 도를 믿으면 곧 천지가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룸을 귀하게 여기고, 업은 넓힘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진실된 큰 서원이 있다면 태산이 기러기 깃털보다 가벼워지는 것이다. 장하다. 그가 죽을 장소를 얻었구나.”했다. 이 해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였다. 국사와 옛날의 여러 전을 살펴보고 헤아려 서술하였다.

 

二十一年伐木天鏡林欲立精舍掃地得柱礎石龕及階陛, 果是往昔招提舊基. 梁棟之用皆出此林. 工旣吿畢, 王遜位爲僧改名法空念三衣瓦鉢. 志行高遠慧悲一切. 因名其寺曰大王興輪寺, 以大王所住故也. 此新羅剏寺之始. 王妃亦奉佛爲比丘尼住永興寺焉. 自此啓興大事, 故王之諡曰法興非虛美也.

(법흥왕)21(534) 천경림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정사(절을)를 세우고자 하여 땅을 청소하다(터를 닦다가) 기둥의 주춧돌, 석감, 계단을 얻었는데 과연 이곳은 옛날에 초제사의 옛터였다. 대들보 재목으로 쓰인 것은 모두 이 숲에서 나왔다. 공사를 모두 마치자 왕이 왕위를 양보하고 스님이 되어 이름을 고쳐 법공이라 하고, 삼의와 와발만을 생각하였다.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고, 모두에게 지혜롭고 자비로웠다. 인하여 그 절을 이름하여 대왕흥륜사라 하였는데 대왕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라가 절을 지은 시작이다. 왕비가 또한 부처님을 받들고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살았다. 이로부터 대사를 열고 일으켰기 때문에 왕의 시호를 법흥이라 하였으니 헛된 찬미가 아니다.

 

厥後每丁厭髑忌旦設會於興輪寺以追其遠. 及大王宗時宰輔金良圖信向西方捨二女. 曰花寶曰蓮寶爲此寺婢. 又以逆臣毛尺族類充賤, 故二種銅錫至今執役. 予遊東都, 登金剛嶺見孤墳短碑慨然不能自止. 是日山人會食問其故, 卽吾舍人諱日也. 亦可謂去滋久思滋深矣. 按阿道碑, 法興王出法名法雲字法空, 今按國史及殊異異傳分立二傳, 諸好古者請詳撿焉.

그 후 먀 염촉의 기일을 맞이할 때마다 흥륜사에서 법회를 열고 그의 지난날을 추모하였다. 태종왕 때는 재보(재상) 김양도가 서방을 믿어서 두 쌀을 희사하였는데, 화보라 하고, 연보라 하였는데 이 절의 종으로 삼았다. 또 역신 모척의 혈족들을 천역으로 채웠다. 그러므로 구리와 주석 두 종류의 사람은 지금도 천역을 맡고 있다. 내가 동도(경주)에 노닐 때 금강령에 올라 외로운 무덤과 짧은 비석을 보고, 슬퍼함을 스스로 그칠 수 없었다. 이날 산 사람들이 모여 먹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으니 곧 우리 사인이 돌아가신 날이라 하였다. 또한 떠남이 더욱 오래하면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이를 수 있다. 아도비를 살펴보니 법흥왕 출가하여 법명을 법운이라 하고, 자를 법공이라 하였다.”하였는데 국사수이전이 다르게 전하므로 나누어 두 전을 세웠다. 여러 옛 것을 좋아하는 이는 자세하게 검토할 것을 청한다.

 

賛曰. 大抵國君與下擧事可與守成, 未可與慮始. 加有時之利不利, 信無信繫焉. 則原宗雖欲剏興佛法固難朝令而夕行. 然承本願力位據崇高, 又賴賢臣啓沃, 能以美利利天下, 卒與漢明齊驅竝駕. 偉矣哉, 夫何間言. 以梁武比之非也. 彼以人主爲大同寺奴帝業墜地, 法空旣遜讓以固其嗣自引爲沙門, 何有於我哉. 髑經所謂王比丘殊身同體矣. 若乎掃迷雲放性空之慧日 挾之以飛者, 惟厭髑之力乎.

대개 나라의 임금이 아래 사람과 일을 일으킬 때는 수성할 수 있는 이와 함께 할 것이요, 시작을 걱정하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말아야 한다. 더하여 때의 이롭고, 이롭지 않음이 있고, 믿음과 믿지 않음이 여기에 달려있다. 곧 원종이 비록 (절을)창건하고, 불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진실로 아침에 명령하고 저녁에 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본원력을 받들고, 지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고, 또한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에 힘입어 능히 미리로서 세상을 이롭게하여 마침내 한나라 명제와 멍애를 나란히 달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위대하구나. 대저 무슨 이간하는 말이 있겠는가? 양나라 무제에게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임금으로서 대동사의 종이 되어 임금의 일을 땅에 떨어뜨렸고, 법공(법흥왕)은 나라를 사양하는 것으로서 그 후사를 견고하게 한 후 인도하여 사문이 된 것이니 어찌 우리 법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염촉은 경에 이른 바 왕과 비구는 다르지만 몸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만일 미혹의 구름을 쓸고 본성이 한 지혜의 해를 놓아(발해) 그것을 끼고서(타고) 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염촉의 힘일 것이다.

 

釋法雲俗名公夌, 諡曰眞興. 而法興王弟, 葛文王之子也, 母金氏. 生七歲卽位克寛克仁. 敬事而信聞善若驚除惡務本. 七年興輪寺成, 許人出家爲僧尼. 八年命大阿餐柒夫等廣集文士修撰國史. 十年梁遣使與入學僧覺德送佛舍利. 王使群臣奉迎興輪寺前路. 十四年命有司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改爲佛寺, 號曰黃龍. 二十六年陳遣使劉思及僧明觀送釋氏經論七百餘卷.

석 법운은 속세 이름이 공릉종(삼맥종)이니 시호는 진흥이다. 법흥왕의 동생으로 갈문왕의 아들이니 어머니는 김씨이다. 7세에 즉위하였고, 매우 관대하고 어질었다. 政事를 공경히 하여 (백성의) 믿음을 받았고, 착한 일을 들으면 놀란 듯이 악을 없애고 근본을 힘썼다. 7(546)에 흥륜사가 완성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니(스님이)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8(547) 대아찬 ()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10(549) 양나라 가 사신과 입학승 각덕을 보내면서 불사리를 보냈다. 왕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영흥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였다. 14(553) 유사(담당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을 지었는데 그 땅에서 황룡이 나타났다. 왕이 그것을 의심하여 고쳐 불사()로 하고, 절 이름을 황룡()이라 했다. 26(565) 나라가 사신 유사와 스님 명관을 보내며 석씨경론(불경) 700여 권을 보냈다.

 

二十七年祇園實際二寺成, 而黃龍亦畢功. 三十三年十月爲戰死士卒設入關齋會於外寺七日乃罷. 三十五年鑄黃龍寺丈六像. 或傳阿育王所泛船載黃金至絲浦輸入而鑄焉. 語在慈藏傳. 三十六年丈六出淚至踵. 三十七年始奉原花爲仙郞.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儀擧而用之.

27(566) 기원사, 실제사 두 절을 완성하였고, 황룡사가 또한 일을 마쳤다. 33(572) 10월 싸우다 죽은 사졸들을 위해 절 밖에 팔관재회를 베풀고 7일만에 그쳤다. 35(574) 황룡사 장육상을 주조하였다. 혹 전하기를 아육왕이 띄운 배가 황금을 싣고 사포에 이르렀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와서 주조하였다고 한다. 말이 자장전에 있다. 36(575) 장육종상에서 눈물이 나와 발꿈치에 이르렀다. 37(576) 처음 원화를 받들어 선랑이라 했다. 처음 임금과 신하가 사람을 알지 못함을 병폐로 여겨 같은 무리로 하여금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과 모양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등용하고자 하였다.

 

遂簡美女二人, 曰南無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妍, 貞引南無强勸酒醉而投河殺之. 徒人失和而罷. 其後選取美貌男子傳粉粧飾之奉爲花郞,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或相悅以歌樂, 娛遊山水無遠不至. 因此知人之邪正, 擇其善者薦之於朝. 故金大問世記云, “賢佐忠臣從此而秀, 良將猛卒由是而生.”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曰風流. 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았으니 남무()와 준정이라 하였는데 모인 무리가 300여 명이었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었는데 준정이 남무()를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자 강에 던져 죽였다. 무리들이 화목을 잃고 흩어졌다. 그 후에 미모의 남자를 선택하여 분을 펴 발라 화장하고 꾸민(곱게 분단장하여 꾸민) 후 받들고 화랑이라 했다. 무리들이 구름 같이 모여 혹은 서로 도의로서 갈고,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기뻐하며, 산수에서 노닐어 멀다고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간사함과 바름을 알아 그 선한 자를 가려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어진 보좌와 충신이 여기에서 빼어났고(빠져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왓다.”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중생을 교화하였다. 또한 들어가서는 곧 효도하고, ()에서 나가면 곧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뜻이었고, 무위의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 것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종지이니 여러 악은 짓지 않고, 여러 선을 받들어 행한 것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이다.”했다.

 

又唐令狐澄新羅國記云, “擇貴人子弟之美者傳粉粧飾而奉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 此蓋王化之方便也. 自原郞至羅末凡二百餘人, 其中四仙最賢, 且如世記中. 王幼年卽祚, 一心奉佛至末年祝髮爲浮屠被法服自號法雲. 受持禁戒, 三業淸淨, 遂以終焉.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于哀公寺之北峯. 是歲安含法師至自隋, 至安含傳辨之.

 

또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귀인의 자제 중에 아름다운 자를 가려 곱게 분단장 하고 받드는데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높여 섬긴다.”했다. 이는 대개 왕이 교화하는 방편이다. 원랑으로부터 신라 말에 이르기까지 200여명이고, 그 가운데 4선이 가장 어질었는데 또한 화랑세기의 내용과 같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 머리털을 깍고 부도(스님이)가 되어 법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이름했다.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고 삼업을 청정하게 하다 마침내 돌아가셨다.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가지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례하였다. 이해 안함법사가 수나라에서 이르렀다. 안함전에서 그것을 말하겠다.

 

賛曰. 風俗之於人大矣哉. 王者欲移易於當世 如水之就下, 沛然孰禦哉. 始眞興旣崇像敎設花郞之遊, 國人樂從倣效如趍寶肆如登春臺. 要其歸, 在乎遷善徙義, 鴻漸於大道而已. 彼漢哀帝徒以色是愛, 故班固曰 柔曼之傾人意非特女徒, 蓋亦有男色焉.” 評之不可同日而語矣.

기려 말한다. 풍속이 사람에 관계함이 크다. 왕이 세상에 (풍속을)바꾸고자 한다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 패연함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처음 진흥왕이 이미 상교(불교)를 높이고, 화랑의 놀이를 베푸시니 나라 사람들이 즐거이 따라 본받기를 마치 보물의 집으로 달려가고, 봄의 누각에 오르듯 하였다. 그 돌아옴을 요약하면 선에 옮기고, 의에 옮겨서 점차 대도를 넓히는데 있을 뿐이다. 저 한나라 애제는 한갓 여색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반고가 말하기를 보드랍고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기울게 하는 뜻은 비단 여자뿐만 아니라 남색도 그러하다.”했다. 이를 평하여 같은 날에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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