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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본은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한국고대사료집성'에 실린 것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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續高僧傳 卷第八 義解篇 四, 齊大統合水寺 釋法上傳六
속고승전 권제8, 의해편 4, 제 대통합수사 석법상전6
釋法上, 姓劉氏, 朝歌人也. 五歲入學, 七日通章. 六歲隨叔, 寺中觀戱, 情無鼓舞, 但禮佛讀經, 而聲氣爽拔, 衆人奔遶, 傾渴觀聽. 年登八歲, 略覽經誥薄盡其理. 九歲得涅槃經披而誦之, 卽生厭世. 至于十二, 投禪師道藥而出家焉. …… 致有高句麗國大丞相王高德, 乃深懷正法, 崇重大乘, 欲播此釋風被于海曲. 然莫測法敎始末緣由西徂東壤年世帝代, 故具錄事條, 遣僧向鄴, 啓所未聞事.
석 법상은 성이 유씨이니 조가 사람이다. 5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7일 만에 문장에 통하였다. 6세 때 숙부를 따라 절 안에서 놀이를 보았으나, 실제 정은 북치고 춤추는데 있지 않아 다만 예불과 불경을 읽을 뿐이었다. 음성과 기색을 시원하게 뽑으니 여러 사람들이 분주히 둘러싸고 머리를 기우려 보고 들었다. 나이가 8세가 되자 대략적으로 經誥를 보면 그 이치를 모두 알았다. 9세 때 《열반경》을 얻어 펴서 외우고, 곧 세속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었다. 12세에 이르러 선사 도약에게 들어 가 출가했다.(중략) 고구려국 대승상 왕고덕이 이르렀는데 곧 깊이 정법을 품어 대승을 높이고 소중하게 여겨 이 석풍(불교)을 펼쳐 해곡(고구려?)에 입히려 하였다. 그러나 불법의 시작과 끝, 서쪽에서 동쪽 땅으로 간 연유, 연대와 황제의 대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일의 조항을 갖추어 기록하도록 스님을 보내 鄴(북제의 서울)을 향하게 하고, 듣지 못하였던 일을 열게(알아오게) 하였다.
敘略云, 釋迦文佛入涅槃來, 至今幾年. 又於天竺, 幾年方到漢地. 初到何帝, 年號是何. 又齊·陳佛法, 誰先傳告. 從爾至今, 歷幾年帝. 遠請具注, 幷問十地智論等人法所傳. 上答略云, 佛以姬周昭王二十四年甲寅歲生, 十九出家, 三十成道. 當穆王二十四年癸未之歲, 穆王聞西方有化人出, 便卽西入而竟不還, 以此爲驗. 四十九年在世, 滅度已來至今齊代武平七年丙申, 凡經一千四百六十五年. 後漢明帝永平十年, 經法初來, 魏·晉相傳, 至今流布. 上廣答緣緖, 文極指訂. 今略擧梗槩, 以示所傳.(하략)
대략을 서술하면 “석가문불(부처님)이 열반에 든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몇 년이고, 또 천축에서 몇 년에 비로소 한 나라 땅에 이르렀는지, 처음 어느 황제 때 이르렀는지, 연호는 어떠한 지이다. 또 제나라, 진나라 佛法은 누가 먼저 전해 알렸는지, 지금으로부터 몇 년과 황제를 지났는지 이다. 멀리서 모두 기록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십지론》 등과 사람이 전한 바를 물었다.” 위의 것을 대략 답하여 말하면 “부처님은 희씨 주나라 소왕 24년 갑인년에 태어났다. 19세에 출가하여 30세에 도를 이루었다. 목왕 24년 계미년을 당하여 목왕이 서방에 사람을 교화하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을 듣고 곧 서쪽으로 들어 갔는데 마침내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로서 징험된다. 49년간 세상에 있다가 멸도(입적)한 이래로 자금 (북)제 대 무평 7년 병신년에 이르기까지 무릇 1465년이다. 후한 명제 영평 10년 경법이 처음 오고, 魏나라, 晉나라가 서로 전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포되었다. 위로는 널리 실마리에 답하고, 문장을 가리키고 바로잡음을 지극히 하였다. 지금 개략적으로 대략을 드는 것으로서 전하는 바를 보였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三 義解篇 九, 唐終南山玉泉寺 釋靜藏傳 四
속고승전 권제13, 의해편 9, 당 종남산 옥천사 석정장전 4
釋靜藏 , 俗姓張, 澤州高都人. 九歲出家, 投淸化寺詮禪師而爲師主. (중략)大業九年, 召入鴻臚敎授東蕃, 三國僧義, 九夷狼戾. 初染規猷賴藉乘機, 接誘並從法訓.(하략)
석 정장은 속성이 장씨이니 택주 고도 사람이다. 9세에 출가하여 청화사 전 선사에게 들어 가 사주(스님이)가 되었다.(중략) 대업 9년 홍로시에 불려 들어 가 동번을 가르치니 삼국의 스님들이 구이에 흩어졌다. 처음 규율과 꾀(계책)에 물들고 기회를 탐에 의지하여 사물을 접하고 꾀어 함께 법의 가르침을 따랐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三 義解篇 九, 唐新羅國皇隆寺 釋圓光傳 五(圓安)
속고승전 권제13, 의해편9, 당 신라국 황륭사 석원광전5(원안)
釋圓光 , 俗姓朴, 本住三韓, 卞韓·馬韓·辰韓. 光卽辰韓新羅人也. 家世海東祖習綿遠, 而神器恢廓愛染篇章, 挍獵玄儒討讎子史, 文華騰翥於韓服, 博贍猶愧於中原, 遂割略親朋發憤溟渤. 年二十五, 乘舶造于金陵, 有陳之世號稱文國, 故得諮考先疑詢猷了義. 初聽莊嚴旻公弟子講, 素霑世典謂理窮神, 及聞釋宗反同腐芥, 虛尋名敎實懼生涯. 乃上啓陳主請歸道法, 有敕許焉. 旣爰初落采卽稟具戒, 遊歷講肆具盡嘉謀, 領牒微言不謝光景, 故得成實·涅槃薀括心府. 三藏數論偏所披尋.
석 원광은 속성이 박씨로 본래 삼한에서 살았으니 변한, 마한, 진한이다. 원광은 곧 진한 신라 사람이다. 가문이 대대로 해동에서 이어져 조상의 전통을 이어 면면히 멀리까지 이어졌고, 신 같은 기량이 매우 넓고 문장을 사랑함이 왕성하였으며, 유학을 깊게 하고, 제자와 역사를 검토하여 바로잡았다. 문장은 화려하고 삼한에서 떠올랐으나 넓게 보는 것은 오히려 중원(중국)에 부끄러웠다. 마침내 어버이와 벗을 떠나 바다를 건너기로 결심하였다. 나니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으로 나아가니 진나라의 세상으로 문의 나라로 불려졌다. 그러므로 먼저 의심스러운 것을 묻고 상고하여 불교 이치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처음 장엄사 민공 제자의 강론을 들었는데, 본래 세속의 전적에 무젖어 이치를 말하기를 신 같음을 다하였으나 석종을(불교를) 들음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썩은 겨자씨와 같이 여겼으며, 헛되이 이름과 가르침을 찾아 실로 생애를 두렵게 하였다. 이에 진나라 임금에게 아뢰어 도법에 돌아갈 것을 청하니 명으로 허락함이 있었다. 이에 처음 머리카락을 깍고(떨어뜨리고) 곧 계를 받고, 강사를 돌아다니며 모든 아름다운 꾀를 모두 다 갖추고, 미묘한 말을 터득하여 알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에 쌓아두고, 삼장과 석론이 찾아 낸 바를 얻었다.
末又投吳之虎丘山, 念定相沿無忘覺觀, 息心之衆雲結林泉, 並以綜涉四含功流八定明善易擬筒直難虧, 深副夙心遂有終焉之慮. 於卽頓絶人事盤遊聖蹤, 攝想靑霄緬謝終古. 時有信士宅居山下, 請光出講固辭不許, 苦事邀延, 遂從其志. 創通成論末講般若.
후에 또한 오나라의 호구산에 들어 가 참된 지혜로 바른 도를 생각하고, 받아 계승하여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일과 세밀하게 생각하는 일을 잊음이 없었고, 마음을 쉬려는 무리들(스님들)이 구름처럼 은둔하기 좋은 곳(林泉)에 모였고, 아울러 네 《아함경》을 두루 섭렵한 공이 흘러 사선정과 사무색정에 들어갔으며, 선을 밝히는 것을 쉽게 익히고 대나무 통처럼 변함이 없었다. 깊이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뜻에 맞아 마침내 종언(죽음을 맞이할)의 생각을 가졌다. 이에 곧 사람의 일을 딱 끊고 성스러운 자취에서 즐겁게 노닐며, 푸른 하늘을 골똘히 생각하고 영원히 속세를 멀리하였다. 그 때 신사(신자)의 집이 산 아래에 있었는데, 원광에게 출강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맞이하려 하므로 마침내 그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통(강의)하고, 마지막에 《반야경》을 강론하였다.
皆思解俊徹嘉問飛移, 兼糅以絢采織綜詞義, 聽者欣欣會其心府, 從此因循舊章開化成任. 每法輪一動, 輒傾注江湖, 雖是異域通傳, 而沐道頓除嫌郄. 故名望橫流播于嶺表, 披榛負橐而至者相接如鱗. 會隋后御宇威加南國, 曆窮其數軍入楊都, 遂被亂兵將加刑戮. 有大主將望見寺塔火燒, 走赴救之了無火狀, 但見光在塔前被縛將殺, 旣怪其異卽解而放之. 斯臨危達感如此也. 光學通吳·越, 便欲觀化周·秦.
모두 사상과 견해가 뛰어나고 통하니 아름답게 묻고 나는 듯이 옮겼고, 겸하여 물들인 비단으로(아름다운 수사로서) 말과 뜻을 섞으니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고, 그 마음에 알맞았다. 이로부터 인하여 옛 문장을 따라 열어 교화하는 임무를 이루었다. 매번 법륜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기울어 강과 호수에 주입하니 비록 이것이 다른 지역의 통하고 전하는 것일지라도 도에 은택을 입어 싫어하고 꺼림이 갑자기 없어졌다. 그러므로 명망이 널리 퍼져 영표(중국의 남쪽)까지 퍼졌다. 덤불을 헤치고 자루를 지고 이르는 자가 서로 붙어 물고기 비늘과 같았다. 수나라 임금이 다스리는 때를 만나 위엄이 남쪽 나라에 더해지니 (진나라의) 역수가 다하고 군대가 양도(양주)에 들어왔다. 마침내 난병들에게 잡혀 장차 죽이는 형벌을 가하려 하였다. (그때) 한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 와 그를 구하려 하였는데 불의 형상은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서 묶인 채 장차 죽임을 당하려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이미 그 특이함을 괴이하게 여겨 곧 풀어주고 놓아 주었다. 이 위태로움에 임하여 감응함에 이름이 이와 같았다. 원광이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배움이 통하고 곧 주나라와 진나라에서 교화를 보고자 하였다.
開皇九年(589)來遊帝宇, 値佛法初會攝論肇興, 奉佩文言振績徽緖, 又馳慧解宣譽京皐, 勣業旣成道東須繼. 本國遠聞上啓頻請, 有敕厚加勞問放歸桑梓. 光往還累紀老幼相欣, 新羅王金氏, 面申虔敬仰若聖人. 光性在虛閑, 情多汎愛, 言常含笑慍結不形, 而牋表啓書往還國命, 並出自胸襟, 一隅傾奉皆委以治方. 詢之道化, 事異錦衣請同觀國, 乘機敷訓垂範于今. 年齒旣高乘輿入內, 衣服藥食並王手自營不許佐助, 用希專福, 其感敬爲此類也.
개황 9년(589) 수나라 서울에 와 노닐었는데 불법(불교)의 법회가 처음 열리는 것을 맞아 섭론이 처음 흥기하니 글과 말을 받들어 차고 미묘한 실마리를 떨치고 있었다. 또 지혜의 풀이를 치달리니 명예가 서울에 펴지고, 공적이 이미 이루어지니 도가 반드시 동쪽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본국(신라)이 멀리서 듣고 (수나라에) 아뢰어 (원광을 돌려보내 줄 것을) 자주 청하니 칙명으로 두터이 수고로움을 위문하고 놓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니 늙은이에서 어린애에 이르기까지 서로 기뻐하였고, 신라 왕 김씨가 만나 정성과 공경을 펴는 것이 마치 성인을 우러르는 것처럼 하였다. 원광의 성품은(뜻은) 비우고 한가히 지내는 데 있고, 정이 많아 널리 사랑하였다. 말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표전과 아뢰는 글, 오고가는 國命이 모두 흉금에서 나와 한 모퉁이(나라)가 온통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맡겼다. 道로 교화하는 방법을 묻고, 일은 비단 옷 입는 것과는 다르나, 함께 나라 볼 것을 청하니 기회를 타 가르침을 펴 지금에 까지 가르침이 드리웠다. 나이가 많아져 가마를 타고 궁궐 안으로 들어가고, 의복과 약, 음식이 모두 왕이 손수 경영하고 도움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드물게도 복을 오로지 하니 그 감동하고 공경함이 이런 류였다.
將終之前, 王親執慰, 囑累遺法兼濟民 斯爲說徵祥被于海曲, 以彼建福五十八年, 少覺不悆, 經于七日, 遺誡淸切, 端坐終于所住皇隆寺中, 春秋九十有九, 卽唐貞觀四年(630)也. 當終之時, 寺東北虛中, 音樂滿空, 異香充院, 道俗悲慶知其靈感. 遂葬于郊外, 國給羽儀, 葬具同於王禮. 後有俗人兒胎死者, 彼土諺云, 當於有福人墓埋之, 種胤不絶, 乃私瘞於墳側, 當日震此胎屍擲于塋外 由此不懷敬者率崇仰焉.
장차 죽음을 앞두고 왕이 직접 위문하여 여러 번 법을 남기고, 겸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말하기를 자세하게 하니 해곡(나라 구석구석까지)에 입혀졌다. 저 건복 58년 조금 불편함을 깨달았고, 7일이 지나 말과 절실한 계를 남기고 단정히 앉아 살고 있던 황륭사 안에서 입적하시니 나이 99세였다. 곧 정관 4년(630)이다. 입적할 때를 당하여 절 동북쪽 허공중에 음악이 공중에 가득하고 기이한 향기가 원을 채웠다. 스님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경사로 여기고, 그 신령한 감응임을 알았다. 마침내 교외에서 장례할 때 나라에서 의식할 때 쓰는 깃털을 주고, 장사할 때 쓰는 도구는 왕의 예와 같게 하였다. 후에 어떤 세속의 사람이 胎中에서 죽은 아이를 낳은 자가 있었다. 그 땅의 속담에 말하기를 “복이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하였다. 이에 사사로이 무덤 곁에 묻었더니 그날 천둥이 치고 이 胎中의 시신이 무덤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로 말미암아 공경함을 품지 않았던 자도 모두 우러렀다.
有弟子圓安, 神志機穎性希歷覽, 慕仰幽求, 遂北趣九都, 東觀不耐又西燕·魏, 後展帝京 備通方俗, 尋諸經論跨轢大綱, 洞淸纖旨, 晩歸心學, 高軌光塵. 初住京寺, 以道素有聞, 特進蕭瑀, 奏請住於藍田所造津梁寺, 四事供給無替六時矣. 安嘗敘光云, 本國王染患, 醫治不損, 請光入宮, 別省安置. 夜別二時爲說深法, 受戒懺悔, 王大信奉. 一時初夜, 王見光首, 金色晃然有象, 日輪隨身而至. 王后宮女同共覩之, 由是重發勝心, 克留疾所, 不久遂差. 光於卞韓·馬韓之間, 盛通正法, 每歲再講匠成後學, 䞋施之資並充營寺, 餘惟衣盋而已.
제자로 원안이 있는데 정신과 뜻이 슬기롭고 영리하며 성품이 두루 살피기를 원해 그윽히 (도를)구하는 것을 사모하고 우러렀다. 마침내 북쪽으로 九都를 향하고, 동쪽으로 不耐를 관찰하고, 또 서쪽으로 연과 위로 갔다. 후에 황제의 서울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풍속을 갖추어 통하고 여러 경론을 찾아 큰 줄거리를 섭렵하고 미세한 가르침을 밝게 알았다. 늦게 심학에 돌아왔는데 중생을 제도한 자취가 높았다. 처음 서울(장안)의 절에 살 때 도로서 평소 소문이 나자 특진 소우가 아뢰어 남전에 지은 진량사에 머물게 할 것을 청하고 四事의 공급이 六時에 변함이 없게 하였다. 안상이 원광을 서술하여 말하였다. “본국(신라) 왕이 병이 들었는데 의원이 치료하여도 덜하지 않았다. 원광이 궁궐에 들어올 것을 청하여 별성에 있게 하였다. 밤을 두 때로 나누어 깊은 법을 말하고, 계를 받고 참회하게 했는데 왕이 크게 믿고 받들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가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는데 금색이 찬란하고 상이 있었는데 일륜이 몸을 따라 이르렀다. 왕후와 궁녀들이 함께 그것을 보고 이로 말미암아 거듭 뛰어난 행실을 닦는 마음을 내어 병이 있는 곳에 머물게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차도가 있었다.”했다. 원광이 변한, 마한의 사이에서 성대히 바른 법을 통하고, 매년 두 번씩 강론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시주한 재물을 보면 모두 절의 경영에 충당하여 남은 것은 옷과 발우뿐이었다.
續高僧傳 卷第十三 義解篇 九, 唐京師大莊嚴寺 釋神逈傳 八
속고승전 권제13, 의해편 9, 당 경사 대장엄사 석신형전 6
釋神逈, 姓田氏, 馮翊臨晉人. 弱齡挺悟, 辭恩出俗. 遠懷匠碩備歷艱虞, 問道海西包括幽奧, 博采三藏硏尋百氏. (중략)大業十年(614)召入禪定, 尋又應詔, 請入鴻臚, 爲敷大論. 訓開三韓諸方士也.(하략)
석 신형 성은 전씨로 풍익 임진현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특출나게 총명하였고, 은혜를 사양하고 세속을 나왔다, 멀리 장석(匠碩)을 품고 어려움과 근심을 지나왔다. 바다 서쪽에서 도를 물어 그윽하고 오며한 경지를 포괄하고, 널리 삼장을 채택하고, 백씨를 궁리하였다.(중략) 대업 10년(614) 禪定에 불려들어 가고, 얼마 안 되어 또 황제의 명에 따라 홍려시에 들 것을 청하니 《대론》을 폈다. 삼한 여러 방면의 선비에게 가르침을 열었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四 義解篇 十, 唐越州弘道寺 釋慧持傳 十三
속고승전 권제14, 의해편10, 당 월주 홍도사 석혜지 전 13
釋慧持 , 姓周, 汝南人也. 開皇初年, 父任豫章太守, 因而生焉. 少機警美姿制. 栖遊之方 欣其言晤, 履歷名邦將挹道化. 初達丹陽開善寺. 投滿法師而爲息慈, 令誦大品, 日通五紙, 斯經易誦難持, 而能文句無爽, 時共美之. 年登冠具, 身長七尺色相光偉, 執持威容不妄迴視. 故俗又目曰象王持也. 乃聽東安莊法師, 又聽高麗實法師三論, 鉤探幽極門學所高.(하략)
석 혜지는 성이 주이니 여남 사람이다. 개황 초년에 아버지가 예장태수에 부임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지가 있고 영리하며, 자태가 아름다웠다. 머물며 노니는 노닐던 지방에서는 그와 터놓고 말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이름 있는 고을을 돌아다니며, 도로 교화하는 것을 높이 받들었다. 처음 단양 개선사에 이르러 만법사에게 들어 가 사미가 되었다. (만법사가) 《대품경》을 외우게 하였더니 매일 5장에 통달하였다. 이 경(《대품경》)은 외우기는 쉬우나 지니기는 어려웠으나 문장과 구절에 능하여 잃음이 없어 그 때에 함께 아름답게 여겼다. 나이가 20세가 되어 구족계를 받을 때 신장이 일곱 자이고, 얼굴빛과 형상이 빛나고 우람찼는데 위엄 있는 모습을 잡아 지니고 망녕되이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속에서 또한 지목하여 말하기를 “상왕을 지녔다.”했다. 곧 동안사 장법사에게 (강론을)들었고, 또한 고려 실법사에게 ‘삼론’을 들었으며, 그윽히 지극함을 샅샅이 살피어 찾으니 문도와 학인들이 높였다. (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五 義解篇 十一, 唐越州靜林寺 釋法敏傳 一
속고승전 권제15, 의해편11, 당 월주정림사 석법민전1
釋法敏 , 姓孫氏, 丹陽人也. 八歲出家, 事英禪師爲弟子, 入茅山, 聽明法師三論.(중략)年二十三, 又聽高麗實公講大乘經論, 躬爲南坐結軫三周, 及實亡後, 高麗印師上蜀講論, 法席彫散.(하략)
석 법민 성은 손씨이고 단양 사람이다. 8세에 출가하여 영선사를 섬겨 제자가 되었고, 모산에 들어 가 명법사의 삼론을 들었다.(중략) 23세에 또한 고려 실공의 대승경론을 듣고, 몸소 남쪽을 향해 앉아(스승의 자리에 앉아) 수레를 멈추기를 3년을 하였다. (고려)실 스님이 돌아가시자 고려 인 스님이 촉 지방에 올라 가 강론하였는데 법석은 시들어 흩어졌다.(듣는 이가 없었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五 義解篇 十一, 唐綿州隆寂寺 釋靈睿傳 四
속고승전 권제15, 의해편11, 당 면주 융적사 석영예전4
釋靈睿 , 姓陳, 本惟穎川, 流寓蜀部, 益昌之陳鄕人也.(중략)開皇之始, 高麗印公入蜀講三論, 又爲印之弟子, 常業大乘.(하략)
석 영예는 성이 진씨이고, 본래 영천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흘러 촉부에 임시로 붙어살다가 익창 진향 사람이 되었다.(중략)개황의 연간 초엽에 고려 인 공이 촉에 들어 가 삼론을 강론하였는데 또한 인의 제자가 되었고, 항상 대승을 업으로 하였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五 義解篇 十一, 唐京師普光寺 釋法常傳 六
속고승전 권제15, 의해편11, 당 경사 보광사 석법상전6
釋法常 , 俗姓張氏, 南陽白水人也, 高祖隆仕魏, 因移于河北郡焉. 少踐儒林頗知梗槪, 而厭其諠雜情欣出家.(중략)貞觀九年, 又奉敕召, 入爲皇后戒師, 因卽敕補兼知空觀寺上座, 撫接客舊妙識物心, 弘導法化長鎭不絶, 前後預聽者數千. 東蕃西鄙難可勝述, 及學成返國, 皆爲法匠, 傳通正敎, 于今轉盛. 新羅王子 金慈藏, 輕忽貴位棄俗出家, 遠聞虔仰思覩言令, 遂架山航海遠造京師. 乃於船中夢矚顔色, 及覩形狀宛若夢中, 悲涕交流欣其會遇, 因從受菩薩戒, 盡禮事焉.(하략)
석 법상은 속성이 장씨이니 남양 백수 사람이다. 고조할아버지 융이 위 나라에서 벼슬할 때 인하여 하북군으로 옮겼다. 젊어서 유림을 밟아 자못 대강의 줄거리를 알았다. 그 떠드는 잡된 정을 싫어하여 출가하였다.(중략) 정관 9년 또 칙명으로 부르는 것을 받들어 들어가 황후의 계법을 알려주는 스님(戒師)이 되었다. 인하여 칙명으로 보임하여 공관사 상좌를 겸하여 맡고, 손님을 맞고 보살피며 묘하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 널리 법의 교화를 인도하여 길이 지켜 끊어지지 않게 하니 앞뒤로 들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동쪽 이민족과 서쪽 이민족을 이루 다 서술하기 어려웠다. 배움을 이루고 나라로 돌아 간 이들은 모두 법의 종장이 되어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통하게 하여 지금에는 더욱 성대하게 했다. 신라 왕자 김 자장이 갑자기 귀한 지위를 가볍게 여겨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멀리서 듣고 정성껏 우러러 말과 명령을 볼 것을 생각하였다. 마침내 산을 넘고 배를 타고 멀리 경사(당나라 서울)로 나아갔다. 이에 배 안에서 꿈을 꾸면서 얼굴색을 보았는데 형상을 보니 완연히 꿈속과 같았다. 슬프게 서로 눈물을 흘리며 만남을 기뻐하였다. 인하여 따라 보살계를 받고, 예를 다해 섬겼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五 義解篇 十一, 唐京師弘福寺 釋靈潤傳 十三
속고승전 권제15, 의해편 11, 당 경사 홍복사 석영윤전13
釋靈潤 , 俗姓梁, 河東虞鄕人也, 家世衣冠鄕閭望族.(중략)大業十年(614), 被召入鴻臚, 敎授三韓, 幷在本寺翻新經本, 並宗轄有承不虧風采.(하략)
석 영윤은 속성이 양씨로 하동 우향 사람이다. 가문은 대대로 관료로 마을에서 명성과 덕망이 있었다. (중략)대업 10년(614) 홍려시에 불려 들어 가 삼한에게 가르쳐주고 아울러 본사에 있으면서 새로운 불경을 번역하면서 아울러 총괄하여 (전 시대의 유풍을)계승함이 있어 풍채를 이지러뜨리지 않았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七 習禪篇 二, 隋天台山國淸寺 釋智越傳 十一(波若)
속고승전 권제17, 습선편2 수 천태산 국청사 석지월전11(파야)
釋智越 , 姓鄭氏, 南陽人也.(중략)台山又有沙門波若者, 俗姓高句麗人也. 陳世歸國, 在金陵聽講, 深解義味. 開皇倂陳, 遊方學業, 十六[六十]入天台北而智者求授禪法, 其人利根上智, 卽有所證, 謂曰, 汝於此有緣, 宜須閑居靜處成備妙行. 今天台山最高峰, 名爲華頂, 去寺將六七十里, 是吾昔頭陀之所. 彼山祇是大乘根性, 汝可往彼學道進行, 必有深益, 不須愁慮衣食. 其卽遵旨, 以開皇十八年(598)往彼山所, 曉夜行道不敢睡臥, 影不出山十有六載.
석 지월은 성이 정씨이니 남양 사람이다.(중략) 천태산에는 또한 사문(스님) 파야라는 자가 있었는데 속성은 ?씨로 고구려 사람이다. 진 나라 대에 나라로 돌아갔는데 금릉에 있으면서 강의를 듣고 깊이 의미를 풀었다. 개황(수 나라)이 진나라를 아우르자 사방으로 노닐며 업을 배웠다. 16년[60] 천태산 북쪽으로 들어갔는데 지자에게 선법을 줄 것을 청하였다. 그 사람은 기질이 영리하고 지혜가 으뜸이어서 곧 징험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 (지자가) 일러 말하기를 “네가 여기에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한가롭게 고요한 곳에 머물며 현묘한 행을 이루어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지금 천태산 가장 높은 봉우리 이름을 화정이라 하는데 절에서 6, 70리 떨어져 있다. 여기는 내가 옛날에 두타의 행을 하던 곳이라 했다. 그 산의 신이 대승의 근성을 가졌으니 네가 거기에 가서 도를 배우고 행을 나아가게 할 수 있으니 반드시 깊은 이익이 있을 것이다. 옷과 음식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했다. 곧 가르침을 따라 개황 18년(598) 그 산이 잇는 곳에 가서 밤낮 고를 해행하여 감히 누워 자지 않았다. 그림자가 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16년이었다.
大業九年(613)二月, 忽然自下, 初到佛壟上寺, 淨人見三白衣擔衣鉢從, 須臾不見, 至於國淸下寺. 仍密向善友同意云, 波若自知壽命將盡非久, 今故出與大衆別耳. 不盈數日, 無疾端坐, 正念而卒于國淸, 春秋五十有二. 送龕山所, 出寺大門迴輿示別, 眼卽便開至山仍閉. 是時也莫問官私道俗, 咸皆歎仰, 俱發道心, 外覩靈瑞若此, 餘則山中神異人所不見, 固難詳矣.(하략)
대업 9년(613) 2월 갑자기 스스로 내려와 처음 불농상사에 이르렀는데 淨人이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발우를 지고 따르는 것을 보았는데 잠깐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 있는 국청사에 이르자 가만히 뜻을 같이하는 좋은 벗을 향해 말하기를 “내가(파야) 스스로 수명이 장차 오래지 않을 것을 압니다. 지금 그러므로 나와 대중과 작별하여 할 뿐입니다.”했다. 며칠을 채우지 못하고 병 없이 단정히 앉아 생각을 바로하다 국청사에서 죽었다. 나이는 52세이다. 감실이 있는 산에 보내는데 절의 대문을 나와 가마(상여)를 돌려 작별을 하는데 눈을 떳다가 산에 이르자 감았다. 이때 관리와 백성, 스님들과 세속인이 모두 감탄하여 우러르고, 모두 도의 마음을 내었으니 밖에서 신령스러운 상서를 보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머지는 곧 산 중의 신기하고 이상한 것은 사람들이 보지 못한 바이어서 진실로 자세하게 말하기 어렵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八 習禪 三, 隋西京禪定道場 釋曇遷傳 一
속고승전 권제18, 습선3 수 서경 선정도량 석담천전1
釋曇遷 , 俗姓王氏, 博陵饒陽人, 近祖太原歷宦而後居焉. 少而俊朗爽異常倫.(중략)時與同侶談唯識義, 彼有沙門慧曉·智瓘等, 並陳朝道軸江表僧望. 曉學兼孔·釋, 妙善定門, 瓘禪慧兩深, 帝王師表. 又有高麗沙門智晃, 善薩婆多部, 名扇當塗爲法城塹, 並一見而結友于.(하략)
석 담천은 속성이 왕씨이니 박릉 요양 사람이다. 가까운 할아버지가 태원에서 벼슬을 하였고, 후에 여기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맑으며 총명하여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중략) 그 때 같은 스님들과 유식의 뜻을 말하였는데 거기에는 사문 혜효, 지관 등이 있었다. 함께 陣나라 조정에서 불도(불교)의 축이었는데 강남지방 스님들 중에 명망이 있었다. 혜효는 공과 석(유학과 불교를)을 겸하였고, 현묘한 선정의 문(분야를)을 배웠다. 지관은 선과 혜(경전) 둘 다 깊어 제왕이 스승이었다. 또 고구려 사문 지황이 있었는데 살바다부를 잘하여(능하여) 당로(그 방면에)에 이름이 알려졌고, 법의 성과 해자가 되었다. 아울러 한 번 보고 벗을 맺었다.(하략)
續高僧傳 卷第十九 習禪 四, 唐天台山國淸寺 釋灌頂傳 十
속고승전 권제19 습선4 당 천태산 국청사 석관정전10
釋灌頂, 字法雲, 俗姓吳氏, 常州義興人也.(중략)大業七年(611), 治兵涿野, 親總元戎, 將欲蕩一東夷用淸文軌, 因問左右備敘軒皇. 先壯阪泉之戮暴, 後歎峒山之問道, 追思智者感慕動容. 下敕迎頂遠至行所, 引見天扆敘以同學之歡.(하략)
석 관정은 자가 법운이다. 속성은 오씨로 상주 의흥 사람이다.(중략) 대업 7년(611) 탁야에서 군대를 다스려(훈련하여) 직접 전군을 총괄하여 장차 한 번에 동이를 쓸어버리고 문자와 수레바퀴 규격을 맑게 하는 것(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쓰려하였다. 인하여 좌우에 물으며 황제 헌황(훤원)의 일을 갖추어 폈다.(헌황(훤원)의 일을 말하였다.) 먼저 판천의 사나운 이를 죽인 것을 장하다 하고, 뒤에는 공동산에서 길을 물은 것에 대해서 탄식하였다. 지자 스님을 추념하고 느끼고 사모함이 얼굴에 나타났다. 칙명을 내려 관정을 맞이하게 하여, 멀리 임시 처소에 이르게 하고, 인도하여 황제의 병풍 앞에서 만나 같이 배운 기쁨을 보였다.(하략)
續高僧傳 卷第二十四 護法 下, 唐新羅國 大僧統 釋慈藏傳 五(圓勝)
속고승전 권제24, 호법 하 당 신라국 대승통 석자장전5(원승)
釋慈藏 , 姓金氏, 新羅國人. 其先三韓之後也. 中古之時, 辰韓·馬韓·卞韓, 率其部屬, 各有魁長. 案梁貢職圖, 其新羅國, 魏曰斯盧, 宋曰新羅, 本東夷辰韓之國矣. 藏父名武林, 官至蘇判異 以本王族(比唐一品)旣嚮高位. 籌議攸歸, 而絶無後嗣, 幽憂每積, 素仰佛理乃求加護, 廣請大捨祈心佛法. 幷造千部觀音, 希生一息, 後若成長, 願發道心, 度諸生類, 冥祥顯應, 夢星墜入懷, 因卽有娠, 以四月八日誕, 載良晨, 道俗銜慶希有瑞也.
석 자장은 성이 김씨로 신라국 사람이다. 그 선조는 삼한의 후예이다. 중고시대에 진한, 마한, 변한은 그 부의 무리들을 이끌었고, 각각 우두머리가 있었다. 〈양공직도〉를 살펴보면 그 신라국은 위나라에서는 사로, 송나라에서는 신라라 하였는데 본래는 동이 진한의 나라이다. 자장의 아버지 이름은 무림으로 관직이 소판이에 이르렀다. 본래 왕족(당나라 1품 비교된다.)으로서 높은 지위에 오르자 헤아려 의논함이 돌아가는 곳이었으나 후사가 끊어져 없어지자 남모르는 깊은 근심이 매번 쌓였다. 평소 부처님(불교)의 이치를 우러르며 가호를 구하고, (스님들에게)널리 크게 기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법을 청하였다. 아울러 천부의 관음상을 만들고 한 자식 낳기를 희망하고, 후에 만약 성장한다면 도심을 내어 여러 살아있는 종류를 제도하고, 어두움과 상서로움이 감응하기를 원하였다. 꿈에 별이 떨어져 배 속으로 들어왔는데 인하여 곧 임신함이 있어 4월 8일 낳았는데 이 날은 좋은 날이라 하여 도속이 모두 축하하는 마음을 머금었으니 희유한(있기 어려운) 상서로움이었다.
年過小學, 神叡澄蘭, 獨拔恒心, 而於世數史籍, 略皆周覽, 情意漠漠, 無心染趣. 會二親俱喪, 轉厭世華, 深體無常, 終歸空寂, 乃捐捨妻子第宅田園. 隨須便給, 行悲敬業, 子爾隻身, 投於林壑, 麤服草屩用卒餘報, 遂登陗隒獨靜行禪, 不避虎兕當思難施. 時或弊睡心行將徵, 遂居小室, 周障棘刺露身直坐. 動便刺肉, 懸髮在梁, 用袪昏漠, 修白骨觀 轉向明利, 而冥行顯被物望所歸, 位當宰相 頻徵不就, 王大怒, 敕往山所, 將加手刃. 藏曰, 吾寧持戒, 一日而死, 不願一生, 破戒而生. 使者見之, 不敢加刃, 以事上聞. 王愧服焉, 放令出家, 任修道業, 卽又深隱, 外絶來往.
나이가 10살이 지나니 뛰어나게 슬기롭고 맑은 향기를 지녀, 홀로 빼어난 떳떳한 마음을 지녔다. 세상의 역사와 전적을 대략 두루 살폈으나 실정과 뜻이 고요하고 쓸쓸하여 마음과 뜻을 물들임이 없었다. 두 부모를 모두 잃음을 마나 세상의 화려함에 싫증을 느끼고, 무상하여 끝내는 공적함에 돌아간다는 것을 깊이 체득하였다. 이에 처자, 집, 밭과 동산을 버려 필요에 따라 주어 자비를 행하고 업을 공경히 한 후 홀로 숲과 골짜기에 들어 가 거친 옷과 짚신을 죽을 때까지 남은 보응에 쓰려하였다.(남은 생을 보내려 하였다.) 마침내 높은 낭떠러지에 올라 홀로 고요히 선을 행하였는데 범과 외뿔소를 피하지 않고 마땅히 어려움과 베품을 생각하였다. 때로 지치고 졸음이 와 마음으로 행함이 장차 미미해지려하면 마침내 작은 방에 있으면서 둘레에 가시로 막고 몸을 드러내어 바로 앉았다. 움직이면 곧 가시가 살을 찌르게 하였고, 머리털을 대들보에 걸어 어두워지고 멀어지는 것을 여는데 써 백골관을 닦아 방향을 돌리고 이로움을 밝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몰래 하는 행동(冥行)이 드러나 사물이 우러러 귀의하는 바가 되었다. 지위가 재상에 해당하는 자리로 자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크게 노하여 칙명으로 산으로 가서 장차 칼로 쳐 죽이려 하였다. 자장이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계를 지니고 하루를 살다 죽을 지언정 일생을 계를 깨트리고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했다. 사자가(심부름꾼이) 그것을 보고 감히 칼을 대지 못하고 일을 윗사람에게 아뢰었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인정하여 놓아 출가하게 하여 도업을 닦게 했다. 곧 또 깊이 숨어 밖과는(세속과는) 오고가는 것을 끊었다.
糧粒固窮, 以死爲命. 便感異鳥, 各銜諸果, 就手送與, 鳥於藏手, 就而共食. 時至必爾, 初無乖候, 斯行感玄徵, 罕有聯者, 而常懷慼慼慈哀含識, 作何方便令免生死, 遂於眠寐見二丈夫曰, 卿在幽隱欲爲何利. 藏曰, 惟爲利益衆生. 乃授藏五戒訖曰, 可將此五戒利益衆生. 又告藏曰. 吾從忉利天來, 故授汝戒, 因騰空滅. 於是出山, 一月之間, 國中士女咸受五戒. 又深惟曰, 生在邊壤佛法未弘, 自非目驗無由承奉, 乃啓本王西觀大化. 以貞觀十二年(638), 將領門人僧實等十有餘人, 東辭至京, 蒙敕慰撫.
식량이 다하자 죽음을 운명으로 여겼다. 문득 감응을 느꼈는데 이상한 새가 각각 여러 과실을 물고 손으로 와 주었고, 새가 자장의 손에 나아가 함께 먹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하였는데 애초에 어그러진 징후가 없었다. 이 행은 현묘한 징조를 느낀 것으로 나란함이 있는 것이 드물었다(그 같은 일은 드물었다.). 항상 근심을 품고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하게 여기다 어떤 방편으로 생사를 면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잠을 자다 두 장부가 나타나 말하기를 “경은 그윽하고 은밀한 곳에 있으면서 무슨 이익을 얻고자 하는가?”했다. 자장이 말하기를 “오직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입니다.”했다. 이에 자장에게 5계를 주고 말하기를 “장차 이 5계로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또 자장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도리천에서 왔다. 그러므로 너에게 계를 준다.”하고는 공중으로 올라 사라졌다. 이에 산을 나와 한 달의 사이에 나라 안의 남자, 여자 모두에게 5계를 주었다. 또 깊이 생각하고 말하기를 “태어나 변두리 땅에 있으면서 불법(불교)이 아직 넓혀지지 않아 스스로 눈으로 경험하지 않으면 말미암아 공경하고 받들 수 없다.” 하고는 이에 본국의 왕에게 서쪽(당나라)의 큰 교화를 볼 것을 아뢰었다.
以貞觀十二年(638), 將領門人僧實等十有餘人, 東辭至京, 蒙敕慰撫. 勝光別院厚禮殊供, 人物繁擁財事旣積. 便來外盜, 賊者將取心戰自驚, 返來露過, 便授其戒. 有患生盲, 詣藏陳懺後還得眼, 由斯祥應, 從受戒者日有千計, 性樂栖靜, 啓敕入山, 於終南雲際寺東懸崿之上, 架室居焉, 旦夕人神歸戒又集. 時染少疹, 見受戒神爲摩所苦, 尋卽除愈.
정관 12년(638) 문인 승실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동쪽(신라)을 떠나 (당나라)서울에 이르니 (당나라 황제의)칙명으로 위로와 보살핌을 받고, 승광사의 별원에서 예를 두터이 하고 특별한 공양을 받았다. 사람이 번성하고 많은 재물이 쌓였다. 곧 밖에서 도적이 왔는데 도적이 장차 취한 것을 가지고 가다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스스로 놀라 도아와 허물을 드러내니 곧 그들에게 계를 주었다. 날 때부터 눈이 먼 소경이 자장에게 나아가 참회를 말한 후 다시 눈을 얻었다.(볼 수 있었다.) 상서로운 대응으로 말미암아 따라 계를 받은 자들이 매일 천을 헤아림이 있었다. 성품이 깃들어 조용히 깃드는 것을 좋아하였다. 황제에게 아뢰고, 산에 들어가 종남산 운제사 동쪽 낭떠러지 위에 걸어 집을 만들고 거기에 살았다. 아침저녁으로 사람과 신이 귀의하는 계를 받고, 또한 모였다. 그 때 홍역에 걸린 사람이 계를 받고 괴로운 곳을 어루만져주자 얼마 되지 않아 나았다.
往還三夏常在此山. 將事東蕃. 辭下雲際. 見大鬼神其衆無數, 帶甲持仗云, 將此金輿迎取慈藏, 復見大神與之共鬪拒不許迎, 藏聞臭氣塞谷蓬勃, 卽就繩床, 通告訣別. 其一弟子又被鬼打躄死乃蘇, 藏卽捨諸衣財, 行僧德施, 又聞香氣遍滿身心. 神語藏曰, 今者不死, 八十餘矣, 旣而入京, 蒙敕慰問, 賜絹二百匹, 用充衣服.
가고 돌아오기를 3년 동안 이 산에 있었다. 장차 동번(신라)을 섬기려하여 운제사를 하직하고 내려왔다. 큰 귀신이 나타났는데 그 무리들을 헤아릴 수 없었고, 갑옷을 입고 몽둥이를 지니고 있으면서 말하기를 “장차 이 금 가마를 가지고 자장을 맞이하려 합니다.”했다. 다시 큰 신이 나타나 함께 싸우며 막아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장이 좋지 못한 냄새가 골짜기를 막고, 성대하게 일어나는 것을 맡고, 곧 노끈으로 만든 의자에 나아가 헤어짐을 통보하였다. 그 제자 한 명이 또 귀신에게 맞아 다리가 부러졌다가 곧 살아났다. 자장이 곧 옷과 재물을 희사하여 스님들에게 덕과 보시를 행하였다. 또 향기가 두루 몸과 마음을 채웠다. 신이 자장에게 말하기를 “지금 죽지 않았으니 80살까지는 살 것입니다.”했다. 이윽고 서울에 들어가니 칙명으로 위문하게하고, 비단 200필을 내려, 의복을 채우는데 쓰게 했다.
貞觀十七年(643), 本國請還, 啓敕蒙許, 引藏入宮, 賜納一領雜綵五百段, 東宮賜二百段. 仍於弘福寺爲國設大齋, 大德法集, 幷度八人, 又敕太常九部供養. 藏以本朝經像彫落未全. 遂得藏經一部幷諸妙像幡花蓋具堪爲福利者, 齎還本國. 旣達鄕壞, 傾國來迎, 一代佛法於斯興顯. 王以藏景仰大國, 弘持正敎, 非夫綱理, 無以肅淸乃敕藏爲大國統.
정관 17년(643) 본국이 돌아올 것을 청하니 황제에게 글을 올려 허락을 받았다. 자장을 인도하여 궁에 들어 가 납의 한 벌과 채색 비단 500단을 내렸고, 동궁(태자 궁)이 200단을 내렸다. 곧 홍복사에서 나라를 위해 대재(큰 제사)를 베풀고, 대덕으로 법회를 열고, 아울러 8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또 태상과 9부에게 칙명을 내려 공양하게 하였다. 자장이 본조(신라가)가 경전과 불상조각이 뒤떨어지고, 완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대)장경 1부와 여러 뛰어난 기술로 만든 불상, 당기, 번기, 일산 등을 얻었는데, 복과 이익이 되는 것이어서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나라를 기우려 와서 맞이하여 1대의 불법(불교)리 이에 흥기하고 드러났다. 왕은 자장이 큰 나라에서 크게 우러르고, 바른 가르침을 넓혀 지녔다고 여겼다. 대저 (자장이)천하를 다스리지 않으면 맑게 할 수 없다 여겨 칙명으로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았다.
住王芬寺, 寺卽王之所造. 又別築精院. 別度十人恒充給侍, 又請入宮. 一夏講攝大乘論, 晩又於皇龍寺講菩薩戒本, 七日七夜天降甘露, 雲霧奄藹覆所講堂, 四部興嗟聲望彌遠, 及散席日, 從受戒者其量雲從, 因之革厲十室而九.
왕분사에 살게 하였다. 절은 곧 왕이 지은 곳이다. 또 따로 정원을 쌓았다. 따로 10명에게 도첩을 주어 항상 공급하고 모시게 하고, 또 궁에 들 것을 청하였다. 한 여름 동안 《섭대승론》을 강론하게 하고, 나중에는(만년에는) 또한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는데, 7일 낮과 밤에 하늘에서 감로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문득 강의하고 있는 집을 덮으니 사부대중이 찬탄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멀리까지 미쳤다. 법석이 끝나고 흩어지는 날에 따라 계를 받으려는 자들이 구름과 같이 모였다. 인하여 바꾸고 힘쓴 집이 10 가운데 9였다.
藏屬斯嘉運, 勇銳由來, 所有衣資並充檀捨, 惟事頭陀, 蘭若綜業, 正以靑丘佛法東漸百齡. 至於住持修奉蓋闕, 乃與諸宰伯祥評紀正, 時王臣上下, 僉議攸歸, 一切佛法須有規猷, 並委僧統藏 令僧尼五部各增舊習, 更置綱管, 監察維持, 半月說戒依律懺除. 春冬總試令知持犯, 又置巡使, 遍歷諸寺誡勵說法, 嚴飾佛像營理衆業, 鎭以爲常, 據斯以言, 護法菩薩卽斯人矣. 又別造寺塔十有餘所, 每一興建合國俱崇. 藏乃發願曰, 若所造有靈, 希現異相. 便感舍利在諸巾鉢, 大衆悲慶積施如山, 便爲受戒, 行善遂廣.
자장이 이 아름다운 운에 속함으로 말미암아 용맹과 날카로움으로 소유한 바의 옷과 재물을 모두 보시에 충당하고 오직 두타에 종사하고 고요한 곳에서 업을 모았으니, 청구에 불법(불교)이 동쪽에 무젖은 지 백년이었지만 주지함에 이르러서는 닦고 받듦이 대개 빠짐이 있었다. 이에 여러 재상, 귀족과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자세하게 논의하였다. 그 때 왕과 신하 상, 하가 모두 돌아갈 바를 논의하고, 일체의 불법(불교)은 반드시 규율과 꾀함이 있으면 아울러 승통 자장에게 맡겼다. 승니와 5부중으로 하여금 각각 옛날에 익힌 것을 더하게 하였다. 다시 綱管을 두어 감찰하고 유지하게 하였으며, 보름에는 계를 설하고, 율에 의하여 참회하고 (죄업을)없애게 하였다. 봄과 겨울에는 총괄적으로 시험하여 계율을 지킨 것과 범한 것을 알게 하고, 또 巡使를 두어 두루 여러 절을 지나면서 경계하고, 면려하며 설법하기도 하며, 장엄하게 불상을 꾸미고 여러 승려의 업을 경영하고 다스리는 것을 지켜 항상 되게 하며 이에 근거해서 말한다면 법(불법)을 지킨 보살이 곧 이 사람이다. 또 절과 탑 10여개를 지었는데 매 하나를 일으켜 지를 때마다 온 나라가 모두 숭앙하였다. 자장이 이에 발원하여 말하기를 “만약 지은 바가 신령함이 있다면 드문 기이한 형상이 있을 지어다.”하자 문득 감응하여 사리가 두건과 발우에 있었다. 대중이 자비를 베풀고 축하하여 시주를 쌓음이 산과 같았다. 곧 계를 받아 선을 행함이 마침내 넓어졌다.
又以習俗服章中華有革, 藏惟歸崇正朔義豈貳心, 以事商量擧國咸遂, 通改邊服一准唐儀, 所以每年朝集位在上蕃, 任官遊踐並同華夏. 據事以量通古難例, 撰諸經戒疏十餘卷. 出觀行法一卷, 盛流彼國. 有沙門圓勝者, 本族辰韓淸愼僧也, 以貞觀初年, 來儀京輦遍陶法肆, 聞持鏡曉志存定攝, 護法爲心, 與藏齊襟秉維城塹.
또 습속과 의복, 문장이 중화(중국으)로 바꾸어야 한다하였다. 자장이 오직 정삭을 숭상하였으니 의리상 어찌 두 마음이 있었겠는가? 일로서 논의하고서 나라를 들어 모두 이루어 변방의 복식을 한결같이 당나라의 의식에 기준하여 모두 고쳤다. 그런 까닭에 매년 (당 나라)조정에 모이면 지위가 상번의 자리에 있었고, 관직을 맡거나 노닐 때 모두 화하(중국)와 같이하였다. 일에 근거하여 헤아리고 통해보면 옛날에 보기 어려웠던 예였다. 여러 경전과 계소 10여권을 지었으며, 《관행법》 1권을 내었는데 그 나라(신라)에 성대히 유포되었다. 사문 원승이란 자가 있었는데 본래 씨족은 진한으로 맑고 삼가는 스님이다. 정관 1년(初年)에 서울에 와 절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행하여 듣고 지닌 것을 거울같이 환하게 깨닫고, 뜻을 선정의 섭심을 보존하고 법을 지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자장과 함께 옷깃을 가지런히 하여 성과 해자를 잡아 지탱하였다.(자장과 함께 나란히 불법을 수행하고 지키는 일을 유지하였다.)
及同返國大敞行途講開律部, 惟其光肇 自昔東蕃有來西學, 經術雖聞無行戒檢, 緣搆旣重. 今則三學備焉, 是知通法護法代有斯人, 中濁邊淸於斯驗矣.
함께 나라로 돌아가서는 가는 길을 크게 열고 율부의 강론을 열었으니, 이 일은 오직 그가 처음으로 빛낸 일이었다. 예전부터 東蕃에는 서쪽으로부터 온 학문이 있었는데, 비록 經術은 들었으나 불교의 계율이 행해진 적은 없었고, 인연이 거듭되자 지금은 삼학(三學:戒學ㆍ定學ㆍ慧學)이 모두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불법을 통하고, 불법을 지키는 것에 대대로 이 사람이 있었고, 중국이 혼탁하였을 때도 변방이 맑은 것을 여기에서 증명됨을 알 수 있다.
續高僧傳 卷第二十五 感通篇 中(補遺), 唐幽州北狄帝示階沙門傳 三十一(補遺)
속고승전 권제25, 감통 중 당 유주 북적 제시계사문전31
貞觀年中, 遼西柳城靺鞨 名帝示階者, 年十八時逃入高麗, 拾得二寸許銅像, 不知何神明. 安皮袋中, 每有飮噉酒肉, 拔出祭之. 逢高麗捉獲, 具說我是北邊靺鞨, 不信謂是細作, 斫之三 刀不傷皮肉, 疑是神人, 問有何道術. 答曰無也, 唯供養神明而已. 乃出示之, 曰此我國中佛也, 因說本末, 看像背上有三刀痕. 遂放之令往唐國, 彼大有佛事, 可諮問也, 其人得信在懷深厭俗網. 今在幽州出家, 大聰明有儀止, 巡講採聽, 隨聞便解, 有疑錄出, 以問者皆深隱, 遠思者難之.
정관 연간에 요서 유성 말갈인 이름이제시계는 나이 18세 때 도망하여 고려에 들어가 두 치 정도의 동상을 얻었는데 어떤 신명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가죽 부대 안에 넣어두었다가 매번 술과 고기를 마시고 먹을 때 꺼내어 제사하였다. 고려에 잡히자 나는 북쪽 변경의 말갈이라 갖추어 말하였다. 그러나 믿지 않고 세작(첩자)이라 말하고 그를 세 번 베었으나 칼이 피부와 근육을 상하게 하지 못하자 이가 신인으로 의심하여 무슨 도술이 있는 지를 물었다. 답하여 말하기를 “없습니다. 오직 신명을 공양할 뿐입니다.”하고는 곧 내 보였다. (고구려 사람이)말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의 불상이다.”하니 인하여 본말(경위)을 말하였다. 불상을 보니 등 위에 세 번의 칼 흔적이 있었다. 마침내 놓아주어 당나라로 가게하면서 그곳에 큰 불사가 있으니 자문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이 마음속에 믿음을 얻어 깊이 세속의 그물을 싫어함을 품었다. 지금의 유주에서 출가하였다. 크게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있었다. 강론하는 곳을 돌아다며 들었는데 들음을 따라 문득 이해하였고, 의심나는 것은 기록하였다가 물었는데 묻는 것이 모두 깊고, 은미하여 생각을 멀리하는 자는 어려워하였다.
續高僧傳 卷第二十八 讀誦篇 第八 伯濟國達拏山寺 釋慧顯傳 六
속고승전 권제28, 독송편 제8, 백제국 달노산사 석혜현전 6
釋慧顯, 伯濟國人也. 少出家, 苦心精專, 以誦法華爲業. 祈福請願, 所遂者多, 聞講三論便從聽受, 法一染神, 彌增其緖. 初住本國北部修德寺 有衆則講無便淸誦, 四遠聞風造山諠接. 便往南方達拏山, 山極深險重隒巖固, 縱有往展登陟艱危. 顯靜坐其中, 專業如故, 遂終于彼. 同學輿屍置石窟中, 虎噉身骨並盡, 惟餘髏舌存焉, 經于三周其舌彌紅赤, 柔軟勝常, 過後方變紫鞭如石, 道俗怪而敬焉, 俱緘閉于石塔, 時年五十有八, 卽貞觀之初年也.
석 혜현은 백제국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마음을 다해 한 가지에만 전념하여 《법화경》 외우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복을 기원하고 원하는 것을 청하면 이루어지는 바가 많았았다. 삼론에 대한 강론을 듣고 곧 받아들였는데 법이 한 번 정신을 물들이자, 그 단서를 더욱 늘어나게 하였다. 처음 본국 북부 수덕사에 살면서 무리가 있으면 곧 강론하고, 없으면 곧 맑게 경을 외우니 사방 멀리에서 풍문을 듣고 산을 만들 정도로 많이 찾아왔다. 곧 남쪽 달노산에 가니 산이 매우 깊고 험하며 깊은 낭떠러지, 바위가 견고하여 따라 가 펴고 오르는데 어렵고 위태로움이 있었다. 법현이 그 가운데 고요히 앉아 업을 오로지 하기를 옛과 같이하였다. 마침내 거기에서 죽었다. 동학들이 시신을 운반하여 석굴 안에 두었는데 범이 몸과 뼈를 모두 먹고, 오직 남은 해골과 혀만 남겼다. 3년이 지났는데도 그 혀는 더욱 붉고, 부드러워 평상보다 나았다. 그 후에는 바야흐로 자색의 채찍처럼 변했다가 돌과 같이 되니 도속이 괴이하게 여겨 공경하고, 함께 석탑을 봉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로 곧 정관 1년(초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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