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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사사위표

by 최인표 2024. 4. 5.

謝嗣位表

崔致遠

 

臣某言前權知當國王事臣坦是親叔自臣亡父贈大傅臣晸及次叔臣晃相次亡沒叔權守蕃服疾故相仍至乾寧四年六月一日懇推蕃務令臣主持官吏甿黎再三留請臣亦固辭付託未欲遵承而乃群情遙歸私第臣顧惟冲藐謬襲宗祊俯冰谷以兢魂仰雲天而跼影中謝

신하인 아무개가 말합니다. 전에 임시로 본국 왕의 일을 맡았던 신하 탄(진성여왕)은 친 고모입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증 태부와 신 정(헌강왕)과 작은 아버지인 황(정강왕)으로부터 서로 차례로 돌아가시고, 고모가 임시로 번국(신라)을 맡았다가 병과 사고로 때문에 서로 그대로 이었는데, 건녕 4(897) 61일에 이르러 간절히 번국의 일을 밀어 신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관리와 백성들이 두 번, 세 번 (왕위에)머물 것을 청하였으나, 신은 또한 굳게 부탁을 사양하여 따라 받들지 않으려 하여 이에 여러 (사람의) 바람을 막고 멀리 私第(개인 집)로 돌아갔습니다. 신이 돌아보건대 공허한 모습으로 잘못 종팽(종묘를)을 이었으니 아래로 살얼음과 깊은 골자기를 굽어보는 듯 혼이 떨고, 구름 짙은 높은 하늘(천자의 거처를)을 우러러 매우 두려워하여 삼가고, 조심하였습니다.(중사)

 

臣聞難進易退乃君子之用心徇公滅私實古人之陳力口誇者甚衆躬行者頗稀而臣叔坦志切立人言深責己以爲火生於木而火猛則木焚水泛其舟而水狂則舟覆當國大饑。▣致小盜相尋本恣豺狼之貪漸矜鴻鵠之志。▣以藏姧鼠竊始聞胠篋探囊乘勢蜂飛遽見城剽

신이 들으니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나기는 쉬운 것은 군자의 마음 씀이고, 공을 따르고 사사로움을 없애는 것은 진실로 옛 사람이 힘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입으로 자랑하는 이는 매우 많으나 몸소 행하는 이는 드뭅니다. 신의 고모 탄은 다른 사람을 세우는데 뜻이 간절하고, 말은 깊이 자신을 책망합니다. “불은 나무에서 생겨난다하나 불이 맹렬하면 곧 나무가 불타고, 물은 배를 띄우나 물이 광폭하면 곧 배가 뒤집어집니다. 우리나라가 크게 굶주려 작은 도적(좀도둑)들이 서로 찾음에 이른 것은 본래 승냥이와 이리의 탐욕을 자행하다,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자랑하게 되어 간사함을 숨기고 쥐새끼처럼 가만히 훔쳐서 처음에는 작은 상자를 열어 물건을 훔치고 주머니를 더듬더니, 형세를 타고 벌 떼처럼 일어나 대번에 성을 나누고 고을을 위협(약탈)하였습니다.

 

遂使烟塵匝風雨愆期群戎益熾於東陵餘粒莫棲於南畝加復龍虎節則去沉鳳凰使則來輟中途有辱恩榮莫伸誠欵。▣多違者恐滋焉愼思三命而恭決計一辭而退當蕃具寮墻庶族雲趨而泣請曰天災所行地分難免以斯自咎未見其宜受帝命爲期讓王爵非晚

마침내 연기와 먼지(전란)가 경내에 두루하고(가득하고) 바람과 비가 기일을 어기고(비람과 비가 때맞춰 내리지 않고), 뭇 도적이 동릉에서 더욱 치열하고, 남은 (곡식의)낱알이 남쪽 이랑에 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龍虎의 부절(사신)은 곧 가다가 구렁에 빠지고, 鳳凰使는 곧 오다가 중간에 그치게 되어 은혜와 영광을 욕되게 함이 있어 정성을 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실로 어기는 자들이 많아지면, 죄가 불어 날 것을 두렵습니다. 세 번의 명이 내지자 공손히 할 것을 삼가고, 생각하여 한 번 사양하고 물러날 것을 마음먹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번국(신라)의 관료들이 담장을 친 것처럼 나아가고 여러 왕족들이 구름처럼 달려 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하늘이 재앙을 행하는 바는 땅에서 면하기 어렵고, 이 때문에 스스로 허물로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의 명을 받는 것을 기약하였다가(기다렸다가) 왕위(王爵)를 사양해도 늦지 않습니다.”했습니다.

 

又以慈踰十起禮過三辭叔坦謂臣涕隨言下曰顧玆一境異彼三方何則改服章奉正朔仰遵帝國俯緝侯蕃故昔玉皇賜詩先祖曰禮義國爲最詩書家所藏

또 자애로운 마음이 10번 일어남을 뛰어넘고, (겸양하는)예의가 세 번 사양하는 것을 지나 고모 탄이 울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돌아보건대 이 한 나라는 다른 저 三方과는 다르다. 어째서 그러하냐하면 의복제도를 고치고 정삭을 받들며 우러러 황제의 나라를 따르고 굽어 제후의 나라를 모았기(안정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날 옥황이 선조에게 시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예의는 나라 가운데 최고이고, 詩書를 집집마다 간직하고 있다.’하셨고,

 

又頃皇華元季方來紀雞林政事詩云但美詩書敎曾無鼙鼓喧古哲候靜理斯在而今也郡邑遍爲賊窟山川皆是戰塲豈謂天殃偏流海曲都因懵致此寇戎罪不容誅理宜辭職令一國興讓唯在二人同心引而進之勿効踈臣以叔坦少私寡欲多病愛閑

또 얼마 전에 황화 원계방이란 자가 와 계림의 정사를 기록하여 시에 말하기를 다만 詩書의 가르침이 아름다울 뿐 일찍이 전쟁의 북소리는 없었으니 옛 날 밝은 임금이 고요한 다스림이 여기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군과 읍이 두루 적굴이 되었었고, 산천이 모두 전쟁터가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재앙이 (우리)바닷가에만 두루 흘러들어 왔다고 말하겠는가? 모두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이 도적과 군대가 이른 것으로 죄는 죽음을 당하여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 이치 상 사직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라건대 한 나라로 하여금 사양을(사양하는 기풍을) 흥기하는 것은 오직 (우리)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에 달려 있으니, 이끌어 나아갈 것이요 소수를 본받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신의 고모 탄은 사사로움이 적고 욕심이 적으며, 병이 많고 한가함을 사랑하였습니다.

 

時然後言志不可奪顯拒擁轅之請終追脫屣之蹤臣也作室資功倚門承念宋穆能賢之擧存歿懸殊謝安相任機始終加愼而且董戎猶近諸盜多乖磨鉛而盤錯未除漏網而兇狂益甚至使水無芥艇陸絶蓬輪不獲早遣下僚仰陳忠懇齊橫島外馳魂餘慍之風秦帝橋邊瀝膽朝宗之浪臣伏限權叨蕃寄莫能奔詣行朝無任望恩兢懼之至(동문선33, 表箋)

 

때가 그러한 후에 말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으니 수레 끌채의 청(절박한 요청)을 드러나게 거절한다 하더라도 끝내 신발을 벗어버리는 자취를 따랐을 것입니다. 신은 집을 짓 일에 도움을 받기로 하고 문에 기대는 생각을 공경히 하였습니다만 송목이 유능하고 어진 이를 천거했음은 存歿의 경우가 다르니 사안이 재상의 임무를 하고 있을 때의 기틀을 생각하여 처음과 끝에 삼감을 더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군대를 움직임이 오히려 가까우나 여러 도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그러짐이 많아 (칼을) 갈아도 뒤엉킨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고, 그물이 새어(법의 그물을 빠져나간 자들은 兇狂이 더욱 심하여 물에는 배가 없고, 육지에는 수레가 끊어져 일찍이 지위가 낮은 관리(下僚)를 보내 우러러 충성과 간절함을 말하지 못하니 제 횡도 밖에서 아직 풀리지 않는 분노의 바람결에 혼을 날리거나, 진 제교 주변에서 조회하러 가는 물결에 쓸개를 씻어 충성을 맹세하고, 돌아오게 할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신이 삼가 번방의 직무를 임시로 맡게 된 처지라서 行朝에 달려가 뵐 수 없기에 성은을 우러러 바라며 겁나고 떨리는 마음을 나누지 못하겠습니다. (동문선33, 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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