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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사은표

by 최인표 2024. 4. 17.

謝恩表

崔致遠

 

臣某言臣叔坦權守蕃務日具表陳請追贈去乾寧四年七月五日先入朝慶賀判官檢校尙書祠部郞中賜紫金魚袋臣崔元還國伏奉制旨亡祖故鷄林州大都督檢校大尉臣凝大師亡父故持節充寧海軍事檢校大保臣晸大傅仍各賜官告一通者寵降天家光融日宅擧瀛區而增感告泉隊而倘因知喜是悲端益驗榮爲懼本(中謝)

신 아무개가 아룁니다. 신의 고모 탄(진성여왕)이 임시로 번국의 일을 맡아 날로 표문을 갖추어 추증을 청하는 것을 표현하였습니다. 지난 건녕 4(897, 효공왕1) 75, 앞서 입조하였던 경하판관 검교상서 사부랑중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원이 환국하여 엎드려 제지(황제의 명령, 勅旨)를 받들었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亡祖) 고 계림주 대도독 겸교 대()위 신 응(경문왕), 돌아가신 아버지(亡父) 고 지절 충녕해군사 검교대()보 정(헌강왕) ()부를 추증하시고 그대로 각각 관고(官告) 1통씩을 내려주셨습니다. 은총이 천자(天家)에게서 내려져 빛이 일택(日宅 동방)에 광대하니 모든 동방(瀛區)이 더욱 감동하고, 황천의 선조들도 혹 듣는다면 기쁨이 이에 슬픔의 실마리임을 알 것이며, 더하여 영예로움이 두려움의 근본이 됨을 징험하게 될 것입니다. (중사)

 

臣伏以當蕃家崇地義國仰天慈故昔遠祖政明仰求禮記玄宗聖帝別賜孝經見化成著於實錄臣謹案記曰子孫之守宗廟社稷者其先祖有善而弗知不昭也知而不傳不仁也又據經曰立身揚名以顯父母孝之終也臣以亡祖贈大師凝頃遇咸通中化行而天下同風德被於海隅出日東暆跼跡北極馳心守遐蕃而莫遂觀周奉儒道而唯期至魯雖在公無暇而耆學自娛中和宣布之歌欽承往哲大平織錦之作景仰前修

신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번국(신라)은 집집마다 地義를 숭상하고, 나라는 하늘의 자애로움을 우러렀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먼 조상(遠祖) 정명(신문왕)이 우러러 예기를 구하였을 때 현종 성제께서 따로 효경을 내려주셔서 교화가 이루어짐이 분명하게 실록에 나타났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니 예기자손으로 종묘와 사직을 지키는 자가 그 선조에게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한다면 밝지 못한 것이요, 알면서도 전하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한 것이다.”하였고, 효경에 근거하여 말하면 몸을 세우고 이름을 드날리는 것으로서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하였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돌아가신 할아버지 증대()사 응(경문왕)은 지난 함통 연간에 교화가 행해져 천하가 풍속을 같이하여 덕이 바다 모퉁이 해 뜨는 곳에 입혀지니 몸은 해 뜨는 곳에 얽매여 있어도 마음은 북극으로 치달렸는데, 멀리 번국을 지키느라 마침내 주나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유도(유학)를 받들고 오직 노나라에 이를 것을 기약하였습니다. 비록 공무를 살피느라 겨를이 없어 배우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즐겼습니다. 中和宣布의 노래를 부르며 옛 철인을 공경히 계승하고, 太平과 직금의 글을 지어 옛 현인의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습니다.

 

遂著求賢才賦一篇美皇化詩六韻蓋乃餐和柔遠之德秀登高之才示之鄕人爲家寶敢謂歿而不朽粗亦粲然可觀

마침내 어질고 재능 있는 이를 찾는 부 1, 황제의 교화를 찬미하는 시 6을 지었는데, 대개 화합을 다지고, 먼 곳의 백성을 화목하게 하여 붙좋게 하는 덕과 특출하게 빼어나 높은 곳에 오르는 인재를 찬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나라 사람에게 보여주고 감상하며 가보로 삼았으니 감히 죽어서도 썩지 않을 일이라 이를 수 있지만, 대강은 또한 찬연히 볼만하다 할 것입니다.

 

以亡父贈大傅臣晸近屬乾符末寰海之風波稍起關河之祲沴旋興寇逼咸秦駕廵庸先臣爰投楚袂請終纓齊徵下瀨之師决徇太朝之難故東面都統淮南節度使高騈非因綆短欲假鞭長但審先聲將觀後効上陳蕃欵外振軍威是躡前規無虧遠慮而屬本道故靑州節度使安師儒謂彼越庖阻玆叩楫言雖顧後意或忘前專馳使人來約兵士以此遠俗之忠誠莫展先臣之遺恨斯多則臣大父之仰遵文德也旣如彼先考之願助武功也又如此

돌아가신 아버지(亡父) 증 대()부 신 정(헌강왕)은 얼마 전 건부 말년에 천하의 풍파가 점점 일어나 관화의 요사스러운 기운이 연이어 일어나 도적이 함진을 핍박하자 황제의 수레가 용촉(사천지역)으로 순행하였습니다. 先臣은 이에 楚子의 소매를 떨치고 終軍이 밧줄을 자청하면서 하뢰의 군대를 불러 태조(당나라)의 난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면도통 회남절도 고병()이 두레박줄이 짧기 때문에 긴 채찍을 빌리려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진실로 먼저 겁을 주고, 뒤에 효과를 보려 한 것으로 번국의 정성을 위에 펴 밖으로 군대의 위엄을 떨치려한 것입니다. 이는 이전의 법을 따른 것이어서 멀리 우려함에 어그러짐이 없었으나, 本道에 속한 고 청주절도사 안사유가 그것은 월권이라 하여 돛대를 두드리는 충성을 막았으니 말로는 비록 뒤를 돌아보는 것이라 하나 뜻은 혹 앞서의 일을 잊었기 때문이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로지 使人을 달려 보내 병사들을 묶어두었기 때문에 먼 나라의 충성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先臣의 남은 한이 이에 많았습니다. 곧 신의 할아버지(大父)文德을 우러르고 따른 것이 이미 그와 같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군대의 일(武功)을 돕기를 원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當國顧自武德至于開元每見告終皆蒙飾往而乃追寵偶爲中絶遐方實所大羞臣亡父晸願竭孝思懇遺悲囑臣叔坦以初凋韡萼益痛蓼莪深仰澤於雲天追榮於岡岵不匱之情雖可恕無厭之罪實難逃豈料伏蒙睿慈俯允丹請特假上公之貴爵分霑外裔之冥魂大孝尊親一方多幸小人懷惠萬死何酬

우리나라(當國)는 돌아보건대 무덕 연간으로부터 개원에 이르기까지 매번 초상(告終)을 당하면 모두 지난 것을 꾸미는 (은혜를)입었는데, 추증하는 은총이 우연히 중간에 끊어졌습니다. 먼 지방에서 실로 크게 부끄러운 바였습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정(헌강왕)孝思를 다하기를 원하여 간절히 슬픈 부탁을 남겼고, 신의 고모 탄(진성왕)은 처음 위악(형제, 헌강왕과 정강왕)이 시들었기 때문에(돌아가셨기 때문에) 요아(蓼莪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함)를 더욱 슬퍼하여 은택을 운천에서 깊이 우러르며, 부친과 형을 추증하는 영예를 바랐던 것입니다. 효심의 정은 비록 헤아려 줄만하나 싫어함의 죄사 없음에는 실로 도망하기 어렵습니다. 어찌 황송스럽게도 천자의 사랑을 내려 간절한 청을 굽어 허락하시어 특히 上公의 귀한 爵位를 허용하여 외방 후예의 죽은 혼령에게 나누어 주실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큰 효도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이니 한 지방이 다행입니다. 소인이 은혜를 생각하면 만 번 죽더라도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且如大師也遠則文皇贈殷比干近則德宗贈郭尙父又如太傅也王陵少贛甞屬具瞻胡廣中庸始階眞拜雖復存沒難比華夷有殊而寵渥波浸遠惟祖惟考非勳非勞節彼南山益媿三師之秩放諸東海唯欽百行之先所兾諸侯章則永作國章孝子傳則少裨家傳希驥於以親九族叔坦庶幾刻鵠於有懷二人臣嶢仰止伏限卑棲四郡追慟九原不獲奔詣天庭泣謝雲陛(東文選33, 表箋)

또한 대사(태사)는 멀리는 곧 주나라 문황(문왕)이 은나라 비간에게 주었고, 가까이는 곧 당나라 덕종이 곽상보에게 주었던 것이며, 또한 태부는 약간 고지식한 왕릉이 구첨의 자리에 있다가 임명된 벼슬이고, 중용으로 이름난 호광이 처음부터 진배의 관직을 거쳐 임명된 것입니다. 비록 다시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비교하기 어렵고, 중국과 이민족이 다름이 있을 것이나 두터운 사랑이 유명(저승)에까지 무젖고, 황제 은혜의 물결이 멀리까지 번졌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하면 공훈을 세운 것도 아니고, 수고를 한 것도 아니어서 節彼南山의 시아 같을까하여 三師의 벼슬에 더욱 부끄럽습니다. 放諸東海의 글에 보이는 것처럼 百行의 근본이 되는 만은 오직 흠모하는 바입니다.바라는 바는 제후장은 곧 길이 나라의 법도가 되게 하고, 효자전은 곧 집안의 전통에 조금이라도 보탬에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구족을 화목하게 한 일을 우러러 고모 탄이 거의 가깝게 하였다면 두 사람을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게 닮고 싶은 것이 신 요(효공왕)가 우러러 바라는 바입니다. 엎드려 사군에 비루하게 거처하면서 구원의 슬픔에 뒤따라 북받쳐 천정(당나라 조정)에 급히 달려 가 섬돌 아래에 시립하여 눈물을 흘리며, 감사드리지는 못합니다

《동문선33, 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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