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出師表
諸葛亮
臣亮言: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今天下三分,益州疲弊,此誠危急存亡之秋也。然侍衛之臣不懈於內,忠志之士忘身於外者,蓋追先帝之殊遇,欲報之於陛下也。誠宜開張聖聽,以光先帝遺德,恢弘志士之氣,不宜妄自菲薄,引喻失義,以塞忠諫之路也。
신하인 (諸葛)亮이 말합니다. 돌아가신 황제(劉備)께서 창업하여 반이 안된 중간에 돌아가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益州(지금의 사천성 일대, 당시의 蜀)는 피폐합니다. 이는 진실로 위태롭고 급한 존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모시고 지키는 신하들은 안(조정)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士(군사)들은 밖에서 자신을 잊은 자들로 돌아가신 황제의 특수한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後主, 유비의 아들)에게 그것을 갚고자 합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덕을 열고 펴는 것으로서 돌아가신 황제가 남긴 덕을 빛나게 하고 志士의 기개를 넓히고 스스로를 낮추며, 비유를 이끌어 의를 잃는 것으로써 충성스러운 諫言의 길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宮中府中俱為一體,陟罰臧否,不宜異同。若有作姦犯科及為忠善者,宜付有司論其刑賞,以昭陛下平明之理,不宜偏私,使內外異法也。侍中、侍郎郭攸之、費禕、董允等,此皆良實,志慮忠純,是以先帝簡拔以遺陛下。愚以為宮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然後施行,必能裨補闕漏,有所廣益。
宮中과 府中(조정, 정부)이 모두 일체가 되고, 선한 이는 (관직을)올리고, 과 잘못하는 이는 벌을 주어 마땅히 (벌과 상을)다르고 같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간사함을 짓고, 법을 범하는 이와 충성하고 선을 하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담당관청에 청하여 그 형벌과 상을 논평하고,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밝혀서 마땅히 치우치거나 사사롭지 않게 하시고 內外로 하여금(內外에 적용하는)법을 다르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侍中, 시랑인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은 모두 선하고 진실되며 뜻과 생각이 충성스럽고 순수합니다. 이 때문에 돌아가신 황제께서 가려 뽑아 폐하께 남겼습니다. 제가 궁중의 일을 하면서 일에 작고 큼이 없이 모두 그들에게 자문한 후에 시행하면 반드시 빠지고 새는 것을 도울(보충할) 수 있어서 이로움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將軍向寵,性行淑均,曉暢軍事,試用於昔日,先帝稱之曰能,是以眾議舉寵為督。愚以為營中之事,悉以咨之,必能使行陳和睦,優劣得所。親賢臣,遠小人,此先漢所以興隆也;親小人,遠賢臣,此後漢所以傾頹也。先帝在時,每與臣論此事,未嘗不歎息痛恨於桓、靈也。侍中、尚書、長史、參軍,此悉貞良死節之臣,願陛下親之信之,則漢室之隆,可計日而待也。
장군 향총은 성품과 행실이 착하고 골라서 군대의 일을 환히 꿰뚫어 지난날에 시험삼아 등용하였더니 돌아가신 황제께서 그를 칭찬하여 “잘 한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으로써 향총을 督(감독)으로 삼았습니다. 어리석은 제가 생각하기로 군영 중의 일을 하면서 모두 그에게 자문 하면 반드시 陳(중의 사람)을 화목하게 하고, (재능의)우열로 (적재적소애)자리를 얻게 할 것입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이것은 先漢(前漢)이 흥륭한 까닭이고, 소인과 친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하는 이것은 後漢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존해 있을 때 매번 신과 한께 이 일을 논의하였는데 일찍이 桓帝와 靈帝를 탄식하고 가슴 아프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은 모두 바르고 선하며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는 신하이니 원하건데 폐하께서 그들을 가까이 하고 신뢰하면 곧 한나라 황실이 융성해 짐을 날을 헤아려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臣本布衣,躬耕於南陽,苟全性命於亂世,不求聞達於諸侯。先帝不以臣卑鄙,猥自枉屈,三顧臣於草廬之中,諮臣以當世之事,由是感激,遂許先帝以驅馳。後值傾覆,受任於敗軍之際,奉命於危難之間,爾來二十有一年矣。
신(제갈량)은 본시 포의를 입고 몸소 남양에서 농사지으면서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천성과 생명을 보전하여 제후에게 소문(명성)이 들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 신의 낮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굽혀 세 번 신을 초가집 안에서 돌아보시고, 신에게 지금 세상의 일을 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허여하여 (나라를 위해)분주히 돌아다녔습니다. 후에 기울고 엎어짐을 만나서 군대가 패할 때 쯤 임무를 받아 위태롭고 어려운 사이에 명령을 받든 이래로 21년이었습니다.
先帝知臣謹慎,故臨崩寄臣以大事也。受命以來,夙夜憂歎,恐託付不效,以傷先帝之明,故五月渡瀘,深入不毛。今南方已定,兵甲已足,當獎率三軍,北定中原,庶竭駑鈍,攘除姦凶,興復漢室,還于舊都。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至於斟酌損益,進盡忠言,則攸之、禕、允之任也。
선제께서 신의 삼감을 알았다. 그러므로 죽음에 임하여 신에게 大事를 맡겼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고, 부탁을 본받지 못하여 선제의 밝음을 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5월에 濾水를 건너 깊이 황무지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남방이 이미 안정되고 군대가 이미 충분하니 마땅히 군대를 장려하여 거느리고 북쪽의 중원을 평정함에 어리석고 (저의)둔함을 거의 다하여 간사함과 흉함을 없애고 한나라 황실을 부흥하여 옛 도읍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臣이 선제에게 보답하고 폐하에게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덜고 더함을 짐작하고, 지극히 충성스러운 말을 올리는 것은 곧 유지와 위, 윤의 임무입니다.
願陛下託臣以討賊興復之效;不效,則治臣之罪,以告先帝之靈。若無興德之言,則責攸之、禕、允等之慢,以彰其咎。陛下亦宜自課,以諮諏善道,察納雅言,深追先帝遺詔。臣不勝受恩感激。今當遠離,臨表涕零,不知所言。
원하건데 폐하께서는 신이 적을 토벌하고 일으키고 회복함의 일을 맡기시고 공이 없으면 곧 신의 죄를 다스리는 것으로써 선제의 신령스러움(영혼)에 말말하십시오. 만약 덕을 일으키는 말이 없으면 곧 유지, 위, 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는 것으로써 그 허물을 드러내십시오. 폐하 또한 마땅히 스스로 평가하여 선도를 신하들에게 물어 아름다운 말을 살펴 받아들이고 깊이 선제의 남긴 가르침을 따르소서 신은 받은 은혜가 감격스러워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제 멀리 떠나면서 표문을 대하니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後出師表
諸葛亮
先帝慮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 故 託臣以討賊也 以先帝之明 量臣之才 固知臣伐賊 才弱敵强也 然不伐賊 王業亦亡 惟坐而待亡 孰與伐之 是故 託臣而弗疑也
선제께서 漢과 도적이 양립할 수 없고, 王業이 치우쳐 편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신에게 도적을 토벌하라 부탁하셨습니다. 선제의 밝음으로써 신의 재주를 헤아리셔서 진실로 신이 도적을 토벌하는데 재주는 약하고 적은 강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도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이 또한 망할 것이니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며 누구와 토벌할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신에게 부탁하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臣受命之日 寢不安席 食不甘味 思惟北征 宜先入南 故 五月渡瀘 深入不毛 幷日而食 臣非不自惜也 顧王業不可得偏安於蜀都 故 冒危難 以奉先帝之遺意 而議者謂爲非計 今賊 適疲於西 又務於東 兵法 乘勞 此進趨之時也 謹陳其事如左
신이 명을 받은 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았고, 밥을 먹어도 맛이 달지 않았습니다. 북쪽을 정벌할 것을 생각하면 마땅히 먼저 남쪽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5월에 瀘水를 건너 깊이 황무지에 들어 가 날을 아울러 밥을 먹었습니다.(하루 식량을 나누어 이틀을 먹음: 힘든 전쟁 상황) 신이 스스로 애석해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왕업을 돌아보니 蜀都에 치우쳐서는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제의 남긴 뜻을 받들었는데 논의하는 자가 잘못된 계책이라 말합니다. 지금 도적이 마침 서쪽에서 지치고, 또한 동쪽에 힘을 씁니다. 兵法에 수고로움을 타라 하니 이는 달려나갈 때입니다. 삼가 그 일을 진술하니 아래와 같습니다.
高帝明竝日月 謀臣淵深 然涉險被創 危然後安 今陛下未及高帝 謀臣不如良平 而欲以長策取勝 坐定天下 此 臣之未解一也 劉繇, 王朗 各據州郡 論安言計 動引聖人 群疑滿腹 衆難塞胸 今歲不戰 明年不征 使孫策坐大 遂幷江東 此 臣之未解二也
高帝는 밝기가 해와 달을 나란히 한 것 같고, 謀臣(보좌하는 신하)은 깊은 못과 같음에도 험함을 건너고 부상을 입는 위태로움이 있은 후 편안해졌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아직 고제에 미치지 못하고, 謀臣(제갈량 자신)은 장량과 진평 같지 못함에도 좋은 방책으로써 승리하여 앉아서 천하를 안정시키고자 합니다. 이는 신이 풀지 못하는 첫 번째입니다. 유요와 왕랑이 각기 주군에 의지하여 편안함을 논하고 계책을 말함에는 성인(의 말)을 움직이고 이끌었으나 여러 의심들이 배에 가득 차고, 여러 어려움은 가슴을 막았습니다. 금년에 싸우지 못하고, 내년에도 정벌하지 못하여 손책이 앉아서 크게 하여 마침내 강동을 아우르게 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풀지 못한 두 번째 입니다.
曹操智計殊絶於人 其用兵也 髣髴孫吳 然困於南陽 險於烏巢 危於祁連 偪於黎陽 幾敗北山 殆死潼關 然後僞定一時爾 況臣才弱而欲以不危而定之 此 臣之未解三也 曹操五攻昌霸不下 四越巢湖不成 任用李服而李服圖之 委任夏侯而夏侯敗亡 先帝每稱操爲能 猶有此失 況臣駑下 何能必勝 此 臣之未解四也
조조의 지혜와 계책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그 군대를 쓰는 것은 손자와 오기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남양에서 곤궁하고 오소에서 험하며, 기련에서 위태로웠고, 여양에서 핍박받았으며 북산에서 거의 패하였고, 동관에서 거의 죽을 번한 후에 한 때를 거짓으로 안정시켰습니다. 하물며 신의 재능이 약(부족)함에도 위태롭지 않고서 안정시키고자 하니 이는 신의 풀지 못한 세 번째입니다. 조조가 다섯 번 昌霸를 공격하여 굴복시키지 못하였고, 네 번 巢湖를 넘고도 이루지 못하자 이복을 임용하였는데 이복이 도모하다 하후(연)에게 위임하였으되 하후(연)은 패망하였습니다. 선제께서 매번 조조가 능력이 있다고 말하였는데도 오히려 이런 실패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신은 재주가 없고 능력이 부족한데 어떻게 반드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이 풀지 못한 네 번째입니다.
自臣到漢中 中間朞年耳 然喪趙雲, 陽群, 馬玉, 閻芝, 丁立, 白壽, 劉郃, 鄧銅等 及曲長屯將七十餘人 突將無前, 賨叟, 靑羌, 散騎, 武騎一千餘人 此皆數十年之內 所糾合四方之精銳 非一州之所有 若復數年 則損三分之二也 當何以圖敵 此 臣之未解五也
신이 한중에 이름으로부터 1년이 지나는 사이에 조운(조자룡), 양군, 마옥, 염지, 정립, 백수, 유합, 등동과 마늘 수령과 주둔하는 장수 70여인을 잃었고, 앞이 없는 돌격하는 장수, 빈수, 청강, 산기, 무기 등 천 여인을 잃었습니다. 이는 모두 수 십년 안에 규합한 사방의 정예로 한 주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만약 다시 여러 해가 지난다면 곧 3분의 2를 덜게 될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적을 도모하여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풀지 못한 다섯 번째입니다.
今民窮兵疲 而事不可息 事不可息 則住與行 勞費正等 而不及蚤圖之 欲以一州之地 與賊持久 此 臣之未解六也
지금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사들은 피로하여도 일을 쉴 수 없고, 일을 쉴 수 없으면 곧 머물거나 행하여야 하는데 수고로움과 비용이 바로 균등하여 일찍이 도모함에 미치지 못합니다. 한 주의 땅으로써 적이 오래 하고자 하니 이는 신이 풀지 못한 여섯 번째입니다.
夫難平者 事也 昔 先帝敗軍於楚 當此時 曹操拊手 謂天下已定 然 後 先帝東連吳越 西取巴蜀 擧兵北征 夏侯授首 此操之失計 而漢事將成也
저 공평하기 어려운 것이 일입니다. 옛 날에 선제가 초 땅에서 패하는 이런 때를 당하여 조조가 손뼉을 치면서 천하가 이미 정하여졌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선제께서 동쪽으로 오와 월을 잇고, 서쪽으로 파촉을 취하고, 군대를 들어 북쪽을 정벌하여 하후의 머리를 받았습니다. 이는 조조의 잘못된 헤아림으로 한나라의 일이 장차 이루어지려는 것이었습니다.
然 後 吳更違盟 關羽毁敗 秭歸蹉跌 曹丕稱帝 凡事如是 難可逆見 臣鞠躬盡瘁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
그러나 후에 오나라가 문득 맹약을 어기고 관우를 죽여 자귀(현주 남군에 속한 땅으로 현재 호북성 자귀)에서 어긋나고 조비가 황제를 일컳었습니다. 무릇 일이 이 같아서 거슬러 보기 어렵습니다. 신은 마음과 몸을 다해 노력하고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일의)성공과 실패, 날카로움과 무딤에 이르러서는 신의 밝음이 능히 맞아 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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