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一百二十三
大宛列傳第六十三
大宛[一]之跡,[二]見自張騫。張騫,漢中人。[三]建元中為郎。是時天子問匈奴降者,皆言匈奴破月氏王,[四]以其頭為飲器,[五]月氏遁逃而常怨仇匈奴,無與共擊之。漢方欲事滅胡,聞此言,因欲通使。道必更匈奴中,[六]乃募能使者。騫以郎應募,使月氏,與堂邑氏(故)胡奴甘父[七]俱出隴西。經匈奴,[八]匈奴得之,傳詣單于。單于留之,曰:「月氏在吾北,漢何以得往使?吾欲使越,漢肯聽我乎?」留騫十餘歲,與妻,有子,然騫持漢節不失。
대원의 자취는 장건으로부터 보인다. 장건은 한중 사람이다. 건원 중에 낭이 된다. 이 때 천자가 흉노의 항복한 자에게 물으니 ‘모두 흉노가 월지 왕을 깨트리고, 그 머리로 술 마시는 그릇을 만드니 월지가 도망하여 항상 흉노를 원수로 여겼지만 함께 흉노를 공격할 이가 없었다.’ 했다. 한이 바야흐로 정벌의 일로 오랑캐(흉노)를 멸하고자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통하고자 하였다. 길이 반드시 흉노 안을 지나야 하므로 사신으로 갈만 한 자를 모집하였다. 장건이 낭으로서 응모하여 월지로 사신을 가면서 당읍씨의 흉노 종 감부와 함께 농서를 나가게 하였다. 흉노를 지나는데 흉노가 그것을 잡아 전하여 선우에게 나아가게 하였다. 선우가 억류하고 말하기를 “월지가 우리 북쪽에 있는데 한이 어찌하여 사신이 갈 수 있는가? 내가 월에 사신을 보내고자 한다면 한이 흔쾌히 나의 청을 들어 줄 수 있는가?” 했다. 장건이 10여년을 머물면서 아내와 함께 하게 하여 자식을 두었으나 장건은 한의 부절을 지니고 잃지 않았다.
[一] 索隱音菀,又於袁反。
[一] 【索隱】 음은 ‘菀’이고, 또 ‘於’와 ‘袁’의 反이다.
[二] 正義漢書云:「大宛國去長安萬二千五百五十里,東至都護治,西南至大月氏,南亦至大月氏,北至康居。」括地志云:「率都沙郍國亦名蘇對沙郍國,本漢大宛國。」
[二] 【正義】 『한서』에 “대완국은 장안에서 2550리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도호치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대월지에 이르며, 남쪽으로 대월지에 이르고, 북쪽으로 강거에 이른다.” 했다. 『괄지지』에 “솔도사나국 또는 소대사나국이라 이름하는데 본래 한의 대완국이다.” 했다.
[三] 索隱陳壽益部耆舊傳云:「騫,漢中成固人。」
[三] 【索隱】 진수의 「익부기구전」에 “장건은 한중 성고 사람이다.” 했다.
[四] 正義氏音支。涼、甘、肅、瓜、沙等州,本月氏國之地。漢書云「本居敦煌、祈連閒」是也。
[四] 【正義】 ‘氏’의 음은 ‘支’이다. ‘양’, ‘감’, ‘숙’, ‘과’ ‘사’등의 주는 본래 월지국의 땅이다. 『한서』에 “본래 ‘돈황’과 ‘기련’ 사이에 살았다.” 한 것이 이것이다.
[五] 集解韋昭曰:「飲器,椑榼也。單于以月氏王頭為飲器。」晉灼曰:「飲器,虎子之屬也。或曰飲酒器也。」索隱椑音白迷反。榼音苦盍反。案:謂今之偏榼也。 正義漢書匈奴傳云:「元帝遣車騎都尉韓昌、光祿大夫張猛與匈奴盟,以老上單于所破月氏王頭為飲器者,共飲血盟。」
[五]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飮器’는 술통이다. 선우가 월지왕의 머리를 가지고 술통을 만든 것이다.” 했다. 진작이 말하기를 “‘飮器’는 변기의 따위이다. 어떤 이는 술 마시는 그릇이다.” 했다. 【索隱】 ‘椑’의 음은 ‘白’과 ‘迷’의 反이다. ‘榼(통합)’은 음이 ‘苦’와 ‘盍’의 反이다. 살펴보니 지금의 ‘편합’이다. 【正義】 『한서』 흉노전에 “원제가 거기도위 한창, 광록대부 장맹과 흉노가 동맹을 맺었는데 노상선우가 월지를 깨트리고 (월지)왕의 머리로 飮器를 만든 것으로 함께 피를 마시고 맹약한 것이다.
[六] 索隱更,經也。音羹。
[六] 【索隱】 ‘更’은 지나다. 이다. 음은 ‘羹(국 갱)’이다.
[七] 集解漢書音義曰:「堂邑氏,姓;胡奴甘父,字。」 索隱案:謂堂邑縣人家胡奴名甘父也。下云「堂邑父」者,蓋後史家從省,唯稱「堂邑父」而略「甘」字。甘,或其姓號。
[七] 【集解】 「한서음의」에 “당읍씨는 성이고, 호노감부는 자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당읍현 사람 집의 흉노 종의 이름이 감부이다. 아래에 ‘堂邑父’라 한 것은 대개 후대의 史家가 생략함을 따라 다만 “堂邑父”라고만 하고 ‘甘’자를 생략한 것이다. ‘甘’은 혹 그 姓號이다.
[八] 索隱謂道經匈奴也。
[八] 【索隱】 길이 흉노를 지남을 말한 것이다.
居匈奴中,益寬,騫因與其屬亡鄉月氏,西走數十日至大宛。大宛聞漢之饒財,欲通不得,見騫,喜,問曰:「若欲何之?」騫曰:「為漢使月氏,而為匈奴所閉道。今亡,唯王使人導送我。誠得至,反漢,漢之賂遺王財物不可勝言。」大宛以為然,遣騫,[一]為發導繹,抵康居,[二]康居傳致大月氏。[三]大月氏王已為胡所殺,立其太子為王。[四]既臣大夏而居,[五]地肥饒,少寇,志安樂,又自以遠漢,殊無報胡之心。騫從月氏至大夏,竟不能得月氏要領。[六]
흉노에 살면서 더욱 느슨해지자 장건이 인하여 그 속하는 이와 함께 도망하여 월지를 향하여 서쪽으로 달아난 지 수십 일에 대완에 이르렀다. 대완이 한나라의 풍요로운 재물이 있다는 것을 듣고 통하려하였으나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장건을 만나니 기뻐하면서 물어 말하기를 “너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하니 장건이 말하기를 “한 나라를 위하여 월지에 사신으로 가는데 흉노에게 길이 막힌 바 되었다. 지금 도망하니 오직 왕께서는 사람을 시켜 나를 인도하여 보내주시오. 진실로 이를 수 있어 한나라에 돌아가면 한이 재물을 왕에게 주는 재물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대완이 그렇다 여겨 장건을 보내고 인도하는 이와 통역인을 징발하여 강거에 이르고, 강거가 전하여 대월지이 이르렀다. 대월지의 왕이 이미 흉노에게 죽임을 당하여 그 태자를 세워 왕이 되었다, 대하를 차지하여 살았는데 땅이 기름지고 도적이 없어 안락한 마음으로 살았고, 또한 스스로 한 나라가 멀다 생각하고, 달리 흉노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장건이 월지로부터 대하에 이르고, 마침내 월지의 한나라에 대한 태도를 알지 못하였다.
[一] 索隱謂大宛發遣騫西也。
[一] 【索隱】 대완이 장건을 서쪽으로 출발시켜 보낸 것을 말 한다.
[二] 索隱為發道驛抵康居。發道,謂發驛令人導引而至康居也。導音道。抵,至也。居音渠也。正義抵,至也。居,其居反。括地志云:「康居國在京西一萬六百里。其西北可二千里有奄蔡,酒國也。」
[二] 【索隱】 ‘發道驛抵康居’라는 것은 ‘發道’는 역의 사람을 출발시키고 인도하여 강거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導’의 음은 ‘道’이다. ‘抵’는 이름이다. ‘居’으 음은 ‘渠’이다. 【正義】 ‘抵’는 이름이다. ‘居’는 ‘其’와 ‘居’의 反이다. 『괄지지』에 “강거국은 서경에서 10600리에 있고, 그 서북쪽 2천여리 정도에 엄채가 있으니 주국이다.” 했다.
[三] 正義此大月氏在大宛西南,於媯水北為王庭。漢書云去長安萬一千六百里。
[三] 【正義】 대월지는 대완 서남쪽에 있는데 규수 북쪽에 왕정이 있다. 『한서』에 “장안에서 11600리 떨어져 있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一云『夫人為王』,夷狄亦或女主。」 索隱案:漢書張騫傳云「立其夫人為王」也。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부인이 왕이 된다.’ 하였고, 오랑캐는 혹 여왕이 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한서』 장건전에 “그 부인을 세워 왕으로 삼는다.” 했다.
[五] 索隱既臣大夏而君之。謂月氏以大夏為臣,而為之作君也。正義既,盡也。大夏國在媯水南。
[五] 【索隱】 이미 대하를 신하로 삼아 임금 노릇 하는 것이다. 월지가 대하로서 신하를 삼고, 그들을 위하여 임금을 세운 것이다. 【正義】 ‘旣’는 다함이다. 대학국은 규수 남쪽에 있다.
[六] 集解漢書音義曰:「要領,要契。」 索隱李奇云「要領,要契也」。小顏以為衣有要領。劉氏云「不得其要害」,然頗是其意,於文字為疏者也。
[六] 【集解】 「한서음의」에 “‘要領은 맹약하는 것이다.” 했다. 【索隱】 이기가 말하기를 “’要領‘은 ’要契‘이다.” 했다. 소안은 옷에 요령이 있다. 여겼고, 유씨는 “그 요해를 얻지 못하였다.”그러나 그 뜻이 자목 옳은 듯 한데 문자로는 조금 어긋난다.
留歲餘,還,並南山,[一]欲從羌中歸,[二]復為匈奴所得。留歲餘,單于死,[三]左谷蠡王攻其太子自立,國內亂,騫與胡妻及堂邑父俱亡歸漢。漢拜騫為太中大夫,堂邑父為奉使君。[四]
1년 정도를 머물다 돌아오는데 남산을 나란히 하고 강족의 영역가운데를 다라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다시 흉노에게 잡혔다. 1년 정도 억류되었다가 선우가 죽자 좌곡려왕이 태자를 치고 스스로 즉위하자 나라 안이 어지러워졌다. 장건이 흉노의 아내와 당읍부와 함께 도망하여 한에 돌아왔다. 한이 장건에게 벼슬을 주어 태중대부로 삼고, 당읍부는 봉사군을 삼았다.
[一] 正義並,白浪反。南山即連終南山,從京南東至華山過河,東北連延至海,即中條山也。從京南連接至蔥嶺萬餘里,故云「並南山」也。西域傳云「其南山東出金城,與漢南山屬焉」。
[一] 【正義】 ‘並’은 ‘白’과 ‘浪’의 反이다. 남산은 곧 종남산과 이어져 서울 남동쪽으로부터 화산에 이르러 河를 지나고, 동북으로 이어져 바다에 이르니 곧 중조산이다. 서울 남쪽으로부터 이어져 총령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이다. 그러므로 ‘並南’이라 한 것이다. 「서역전」에 “그 남산은 동으로 금성에서 나오는데 한의 남산과 함께 여기에 속한다.” 했다.
[二] 正義說文云:「羌,西方牧羊人也。南方蠻閩從虫,北方狄從犬,東方貊從豸,西方羌從羊。」
[二] 【正義】 『설문』에 “‘羌’은 서쪽 지방의 양을 목축하는 사람이다. 남쪽의 蠻閩은 벌레를 따르고, 북방의 ‘狄’은 개를 따라다니고, 동방의 ‘貊’은 돼지를 따르고, 서방의 ‘羌’은 양을 따른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元朔三年。」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삭 3년이다.” 했다.
[四] 索隱堂邑父之官號。
[四] 【索隱】 당읍부의 관직 이름이다.
騫為人彊力,寬大信人,蠻夷愛之。堂邑父故胡人,善射,窮急射禽獸給食。初,騫行時百餘人,去十三歲,唯二人得還。騫身所至者大宛、大月氏、大夏、康居,而傳聞其旁大國五六,具為天子言之。曰:
장건의 사람됨이 강건하고 관대하며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어 오랑캐가 그를 좋아하였다. 당읍부는 원래 흉노 사람이어서 활을 잘 쏘아 궁하고 급박하면 새와 짐승을 쏘아 먹었다. 처음 장건이 갈 때 100여 명이었는데 13년이 지나 오직 두 사람만 돌아올 수 있었다. 장건은 자신이 이른 곳인 대완, 대월지, 대하, 강거이며, 전해들은 그 옆의 큰 나라 5, 6개를 모두 천자에게 갖추어 말하였다. 말하기를
大宛在匈奴西南,在漢正西,去漢可萬里。其俗土著,耕田,田稻麥。有蒲陶酒。多善馬,[一]馬汗血,其先天馬子也。[二]有城郭屋室。其屬邑大小七十餘城,眾可數十萬。其兵弓矛騎射。其北則康居,西則大月氏,西南則大夏,東北則烏孫,東則扜冞[三]、于窴。[四]于窴之西,則水皆西流,注西海;其東水東流,注鹽澤。[五]鹽澤潛行地下,其南則河源出焉。[六]多玉石,河注中國。而樓蘭、姑師[七]邑有城郭,臨鹽澤。鹽澤去長安可五千里。匈奴右方居鹽澤以東,至隴西長城,南接羌,鬲漢道焉。
대완은 흉노의 서남쪽 한의 정 서쪽에 있는데 한으로부터 만리 정도 절어져 있습니다. 그 풍속은 땅에 붙어살고 농사를 지으며 밭에 벼와 보리를 심습니다. 포도주가 잇습니다.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은 피땀을 흘리는데 그 종자는 천마의 자손입니다. 성곽과 집이 있습니다. 그 속한 읍은 크고 작은 70여개의 성이고, 무리들은 수십만이 됩니다. 그 무기로는 활, 창이 있고,말을 타고 활을 쏩니다. 그 북쪽은 곧 강거이고, 서쪽은 대월지이며, 서남쪽은 대하, 동북족은 오손이고, 동쪽은 우미, 우전입니다. 우전의 서쪽은 곧 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로 들어가고, 그 동쪽은 물이 동쪽으로 흘러 염택에 들어갑니다. 염택은 지하를 숨어 가서 그 남쪽은 곧 河의 근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옥석이 많고 河가 중국에 들어갑니다. 누란과 고사의 읍에는 성곽이 있고, 염택을 맞대고 있습니다. 염택은 장안으로부터 5천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흉노의 右方이 염택 동쪽에 사는데 농서장성에 이르러 남쪽으로 강족을 접하여 한나라와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一] 索隱案:外國傳云「外國稱天下有三眾:中國人眾,大秦寶眾,月氏馬眾」。
[一] 【索隱】 살펴보니 「외국전」에 “외국은 천하에 세 무리가 있는데 중국인 무리, 대진보 무리, 월지마 무리이다.” 했다.
[二] 集解漢書音義曰:「大宛國有高山,其上有馬,不可得,因取五色母馬置其下,與交,生駒汗血,因號曰天馬子。」
[二] 【集解】 「한서음의」에 “대완국은 높은 산이 있고, 그 위에 말이 잇는데 잡을 수 없기 때문에 5색의 어미 말을 취하여 그 아래에 두면 교미를 하는데 피땀을 흘리는 망아지를 낳는다. 때문에 천마의 새끼라 부른 것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漢紀曰拘彌國去于窴三百里。」 索隱扜冞,國名也,音汙彌二音。漢紀謂荀悅所譔漢紀。拘音俱,彌即冞也,則拘彌與扜冞是一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기」에 구미국은 우전으로부터 300리 떨어져 있다.” 했다. 【索隱】 우전은 나라 이름인데 음은 ‘汗’과 ‘彌’ 두 음이다. 「한기」는 순열이 지은 한기를 말한다. ‘拘’의 음은 ‘俱’이고, ‘彌’는 곧 ‘冞(점점 미)이다. 곧 구미와 우미는 하나이다.
[四] 索隱音殿。
[四] 【索隱】 음은 ‘殿’이다.
[五] 索隱鹽水也。太康地記云「河北得水為河,塞外得水為海」也。正義漢書云:「鹽澤去玉門、陽關三百餘里,廣袤三四百里。其水皆潛行地下,南出於積石山為中國河。」括地志云:「蒲昌海一名泑澤,一名鹽澤,亦名輔日海,亦名穿蘭,亦名臨海,在沙州西南。玉門關在沙州壽昌縣西六里。」
[五] 【索隱】 염수이다. 『태강지기』에 “하북에서 물을 얻으면 ‘河’가 되고, 요새 밖에서 물을 얻으면 바다가 된다.” 했다. 【正義】 『한서』에 “염택은 옥문관, 양관으로부터 300여리, 광무로부터 3, 400리 떨어져 있다. 그 물은 모두 당 아래로 숨어흘러 남쪽으로 적석산에서 나와 중국의 河가 된다.” 했다. 『괄지지』에 “포창해는 일명 유택이라 하고, 일명 염택이라 하고, 또 보일해라 이름하고, 또 천난이라 이름하고, 또 임해라 이름하는데 사주의 서남쪽에 있다. 옥문관은 사주 창현 서쪽 6리에 있다.” 했다.
[六] 索隱案:漢書西域傳云「河有兩源,一出蔥嶺,一出于窴」。山海經云「河出崑崙東北隅」。郭璞云「河出崑崙,潛行地下,至蔥嶺山于窴國,復分流岐出,合而東注泑澤,已而復行積石,為中國河」。泑澤即鹽澤也,一名蒲昌海。西域傳云「一出于闐南山下」,與郭璞注山海經不同。廣志云「蒲昌海在蒲類海東」也。
[六] 【索隱】 『한서』 서역전에 “‘河’는 두 근원이 있는데 하나는 총령에서 나오고, 하나는 우전에서 나온다.” 했다. 『산해경』에 “‘河’는 곤륜산 동북 모퉁이에서 나온다.” 했다. 곽복이 말하기를 “‘河’는 곤륜산에서 나와 땅 밑으로 숨어 흘러 총령산 우전국에 이르러 다시 나뉘어 흘러 여러 갈래로 나왔다가 합하여 동쪽으로 유택에 주입되며, 이윽고 다시 적석을 지나 중국 河가 된다.” 했다. 유택은 곧 염택이니 일명 포창해이다. 「서역전」에 “하나가 우전 남쪽 산 아래에서 나온다.”했는데, 곽복이 주석한 『산해경』과는 같지 않다. 『광지』에 “포창해는 포류해 동쪽에 있다.” 했다.
[七] 正義二國名。姑師即車師也。
[七] 【正義】 두 나라 이름이다. 고사는 곧 거사이다.
烏孫在大宛東北可二千里,行國,[一]隨畜,與匈奴同俗。控弦者數萬,敢戰。故服匈奴,及盛,取其羈屬,不肯往朝會焉。
오손은 대완의 동북쪽 2천리 정도에 있는데 나라를 옮겨다니며, 가축을 따라다니니 흉노와 풍속을 같이 한다.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수만이고, 용감하게 싸운다. 옛날에는 흉노에 복종하였으나 성대해짐에 이르러 그 흉노에 보낸 인질을 거두고, 즐겨 조회가려 하지 않았다.
[一] 集解徐廣曰:「不土著。」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땅에 붙어 살지 않는다.” 했다.
康居在大宛西北可二千里,行國,與月氏大同俗。控弦者八九萬人。與大宛鄰國。國小,南羈事月氏,東羈事匈奴。
강거는 대왕의 서북쪽 2천리 정도에 있는데 나를 옮겨 다니고, 월지와 풍속을 크게 같이 한다.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8, 9만 명이다. 대완과 이웃 나라이다. 나라가 적고 남쪽으로는 월지에 메여 섬기고, 동쪽으로는 흉노에 메여 섬긴다.
奄蔡[一]在康居西北可二千里,行國,與康居大同俗。控弦者十餘萬。臨大澤,無崖,蓋乃北海云。
엄채는 강거 서북쪽 2천리 정도에 있고,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강거와 크게 풍속을 같이 한다.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10여만 명이고, 대택을 마주하고 언덕이 없으며, 곧 북해이다.
[一] 正義漢書解詁云:「奄蔡即闔蘇也。」魏略云:「西與大秦通,東南與康居接。其國多貂,畜牧水草,故時羈屬康居也。」
[一] 【正義】 「한서해고」에 “엄채는 곧 합소이다.” 했다. 「위략」에 “서쪽으로 대진과 통하고, 동남쪽으로 강거와 접한다. 그 나라는 담비가 많고, 수초로 가축을 기르며, 때로 강거에 메여 속하였다.” 했다.
大月氏[一]在大宛西可二三千里,居媯水北。其南則大夏,西則安息,北則康居。行國也,隨畜移徙,與匈奴同俗。控弦者可一二十萬。故時彊,輕匈奴,及冒頓立,攻破月氏,至匈奴老上單于,殺月氏王,以其頭為飲器。始月氏居敦煌、祁連閒,[二]及為匈奴所敗,乃遠去,過宛,西擊大夏而臣之,遂都媯水北,為王庭。其餘小眾不能去者,保南山羌,號小月氏。
대월지는 대왕 서쪽으로 2, 3천리 정도에 있는데 규수 북쪽에 산다. 그 남쪽은 곧 대하이고, 서쪽은 곧 안식이며, 북쪽은 곧 강거이다. 나라를 옮겨 다니며, 가축을 따라 이사하고 흉노와 풍속을 같이 한다. 활을 쏠 수 있는 자는 1, 2십만이다. 옛날 강성했을 때 흉노를 가벼이 여겼으나, (흉노가)모돈을 세움에 이르러서는 월지를 쳐서 깨트리고, 노상선우에 이르러서는 월지의 왕을 죽이고 그 머리로 술그릇을 만들었다. 처음 월지는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살았는데 흉노에게 무너짐에 이르러서는 멀리 가서 대완을 지나 서쪽으로 대하를 쳐서 신하로 삼고, 마침내 규수 북쪽에 도읍하고 왕정을 삼았습니다. 그 나머지 작은 무리로 떠날 수 없었던 자들은 남산의 강에게 보호를 받으며 소월지라 불렸습니다.
[一] 正義萬震南州志云:「在天竺北可七千里,地高燥而遠。國王稱『天子』,國中騎乘常數十萬匹,城郭宮殿與大秦國同。人民赤白色,便習弓馬。土地所出,及奇瑋珍物,被服鮮好,天竺不及也。」康泰外國傳云:「外國稱天下有三眾:中國為人眾,秦為寶眾,月氏為馬眾也。」
[一] 【正義】 만진의 『남주지』에 “천축 북쪽 7천리 정도에 있는데 땅이 높고 건조하며 멀다. 국왕을 ‘천자’라 부르고, 나라 안에 탈 수 있는 말이 항상 수십 만 필이고, 성곽과 궁전이 대진국과 같다. 인민들은 적백색이고 활과 말을 편하고 익숙하게 쓴다. 토지에서 나오는 것은 진기한 옥구슬과 진기한 물건이고, 선명하고 좋은 옷을 입는데 천축이 미치지 못한다.” 했다. 강태의 『외국전』에 “외국을 천하에 세 무리라 말하였는데 중국을 인중이라하고, 진을 보중이라 하고, 월지를 마중이다.” 했다.
[二] 正義初,月氏居敦煌以東,祁連山以西。敦煌郡今沙州。祁連山在甘州西南。
[二] 【正義】 처음에 월지는 돈황 동쪽과 기련산 서쪽에서 살았다. 돈황군은 지금의 사주이다. 기련산은 감주 서남쪽에 있다.
安息[一]在大月氏西可數千里。其俗土著,耕田,田稻麥,蒲陶酒。城邑如大宛。其屬小大數百城,地方數千里,最為大國。臨媯水,有市,民商賈用車及船,行旁國或數千里。以銀為錢,錢如其王面,[二]王死輒更錢,效王面焉。畫革旁行以為書記。[三]其西則條枝,北有奄蔡、黎軒。[四]
안식은 대월지서쪽으로 수천리 정도에 있다. 그 풍속은 땅에 붙어 살며 농사를 짓고, 밭에 벼와 보리를 심으며 포도주를 마신다. 성읍은 대완과 같다. 작고 큰 수 백개의 성이 속하고 땅은 사방 수천리로 가장 큰 나라이다. 규수를 맞대며 시장이 있고, 백성들이 장사할 때 수레와 배를 서서 이웃나라로 가는데 혹 수 천리를 간다.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돈은 그 왕의 얼굴과 같으며, 왕이 죽으면 문득 돈을 바꾸어 왕의 얼굴을 본뜬다. 가죽에 옆으로 문자를 기록한다. 그 서쪽은 곧 조지이고, 북쪽은 엄채와 여헌이 있다.
[一] 正義地理志云:「安息國京西萬一千二百里。自西關西行三千四百里至阿蠻國,西行三千六百里至斯賓國,從斯賓南行度河,又西南行至于羅國九百六十里,安息西界極矣。自此南乘海乃通大秦國。」漢書云:「北康居,東烏弋山離,西條枝。國臨媯水。土著。以銀為錢,如其王面,王死輒更錢,效王面焉。」
[一] 【正義】 「지리지」에 “안식국은 서울 서쪽 11200리에 있다. 서관으로부터 서쪽으로 3400리를 거면 아만국에 이르고, 서쪽으로 3600리를 가면 사빈국에 이르고, 사빈국으로부터 남쪽으로 가서 河를 건너고, 또한 서남쪽 가 우라국에 이르기까지 960리에 안식국 서쪽 경계 끝이 있다. 이로부터 남쪽으로 바다를 지나면 대진국과 통한다.” 했다. 『한서』에 “북으로 강거, 동으로 오익산리, 서로 조지국이 있다. 나라는 규수에 맞대고 있다. 땅에 붙어 산다. 은으로 돈을 만드는데 그 왕의 얼굴과 같게 하고, 왕이 죽으면 문득 돈을 바꾸는데 왕의 얼굴을 모방한다.” 했다.
[二] 索隱漢書云:「文獨為王面,幕為夫人面。」 荀悅云:「幕音漫,無文面也。」張晏云:「錢之文面作人乘馬,錢之幕作人面形。」韋昭曰:「幕,錢背也,音漫。」包愷音慢。
[二] 【索隱】 『한서』에 “글자가 있는 면에만 왕의 얼굴로만 하고, 뒤에는 부인의 얼굴로 한다.” 했다. 순열이 말하기를 “‘幕’의 음은 ‘漫’인데 글자가 없는 면이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돈의 무늬가 있는 면에는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만들고, 돈의 무늬가 없는 곳에 사람얼굴 형상을 만든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幕’은 돈의 뒷면으로 음은 ‘漫’이다.” 했다. ‘包愷’의 음은 ‘慢’이다.
[三] 集解漢書音義曰:「橫行為書記。」 索隱畫音獲。小顏云:「革,皮之不柔者。」韋昭云:「外夷書皆旁行,今扶南猶中國,直下也。」
[三] 【集解】 【集解】 「한서음의」에 “옆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했다. 【索隱】 ‘畫’의 음은 ‘獲’이다. 소안은 “‘革’은 가죽의 부드럽지 않은 것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외이가 글을 스는 것은 모두 옆으로 쓰는데 지금의 부남은 중국과 같이 바로 아래로 슨다.” 했다.
[四] 索隱漢書作「犁靳」。續漢書一名「大秦」。按:三國並臨西海,後漢書云「西海環其國,惟西北通陸道」。然漢使自烏弋以還,莫有至條枝者。正義上力奚反。下巨言反,又巨連反。後漢書云:「大秦一名犁鞬,在西海之西,東西南北各數千里。有城四百餘所。土多金銀奇寶,有夜光璧、明月珠、駭雞犀、火浣布、珊瑚、琥珀、琉璃、瑯玕、朱丹、青碧,珍怪之物,率出大秦。」康氏外國傳云:「其國城郭皆青水精為[礎],及五色水精為壁。人民多巧,能化銀為金。國土市買皆金銀錢。」萬震南州志云:「大家屋舍,以珊瑚為柱,琉璃為牆壁,水精為礎舄。海中斯調(州)[洲]上有木,冬月往剝取其皮,績以為布,極細,手巾齊數匹,與麻焦布無異,色小青黑,若垢污欲浣之,則入火中,便更精潔,世謂之火浣布。秦云定重參問門樹皮也。」括地志云:「火山國在扶風南東大湖海中。其國中山皆火,然火中有白鼠皮及樹皮,績為火浣布。魏略云大秦在安息、條支西大海之西,故俗謂之海西。從安息界乘船直載海西,遇風利時三月到,風遲或一二歲。其公私宮室為重屋,郵驛亭置如中國。從安息繞海北陸到其國,人民相屬,十里一亭,三十里一置。無盜賊。其俗人長大平正,似中國人而胡服。宋膺異物志云秦之北附庸小邑,有羊羔自然生於土中,候其欲萌,築牆繞之,恐獸所食。其臍與地連,割絕則死。擊物驚之,乃驚鳴,臍遂絕,則逐水草為群。又大秦金二枚,皆大如瓜,植之滋息無極,觀之如用則真金也。」括地志云:「小人國在大秦南,人纔三尺。其耕稼之時,懼鶴所食,大秦衛助之。即焦僥國,其人穴居也。」
[四] 【索隱】 『한서』에 “犁靳”이라 썼다. 『독한서』에는 일명 “대진”이라 했다. 살펴보니 세 나라는 모두 나란히 서해에 맞 닫는데 『후한서』는 “서해가 그 나라를 둘러싸는데 오직 서북쪽 만 육지의 길과 통한다.” 했다. 그러나 한의 사신이 오익으로부터 돌아왔고, 조지에 이른 자는 없었다. 【正義】 위는 ‘力’과 ‘奚’의 反이다. 아래는 ‘巨’와 ‘言’의 反이고, 또 ‘巨’와 ‘連’의 反이다. 『후한서』에 “대진은 일명 ‘이건’이라 하였는데 서해의 서쪽에 있고, 동서남북 각각 수천 리이다. 성 400여 곳이 있다. 땅에는 금은 기보가 많은데 야광벽, 명월주, 해계서, 화완포, 산호, 호박, 유리, 낭간, 주단, 청벽 등의 진기하고 이상한 물건이 모두 대진에서 난다.” 했다. 강씨의 『외국전』에 “그 나라의 성곽은 모두 푸른 수정으로 주춧돌을 하고, 오색의 수정으로 벽을 만들었다. 백성들이 많이 공교로워 은을 변화시켜 금을 만들 수 있다. 나라의 시장에서는 모두 금과 은전으로 장사한다.” 했다. 『만진남주지』에 “큰 가옥은 산호로 기둥을 하고, 유리로 담장을 만들고, 수정으로 주춧돌을 삼는다. 바다 안 모래톱 위에 나무가 있고, 겨울에는 가서 그 껍질을 깍아 가져와 길쌈하여 포를 만드는데 지극히 가늘고 수건 여러 필과 같고, 마초포와 다름이 없으며 색은 조금 청흑색이다. 만약 때가 묻어 더러워져 그것을 빨고자 할 때는 곧 불 안에 넣으면 문득 다시 깨끗해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화완포라고 말한다. 진에서는 定重參問門樹의 껍질이다.” 했다. 『괄지지』에 “화산국은 부풍 남동쪽 큰 호수와 바다 안에 있다.” 했다. 그 나라안의 산에는 모두 불이 있으나 그 불 안에 흰 쥐의 가죽과 나무껍질이 있는데 길쌈하여 화완포를 만든다. 『위략』은 ‘대진은 안식, 조지 서쪽 큰 바다의 서쪽에 있으며, 풍속 때문에 해서라 말한다. 안식의 경계로부터 배를 타고 곧바로 해서로 갈 때 바람이 이로운 때를 만나면 3개월이면 이르고, 바람이 느리면 혹 1, 2년이 걸린다. 그 공사의 궁실은 여러 층으로 만들고 우역정을 둔 것은 중국과 같다. 안식국으로부터 바다 북쪽 뭍을 돌아가면 그 나라에 이르고, 인민들이 서로 속하여 10리에 1정을 두고 30리에 1치를 두었다. 도적이 없다. 그 속인들은 키가 크고 공정하고 바르기 때문에 마치 중국인으로 오랑캐의 옷을 입은 것과 같다. 송응의 『이물지』에 “진의 북쪽에 붙어있는 작은 읍이 있고, 양과 염소가 땅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게 하다 그 새끼를 낳고자 하는 징후가 있으면 담장을 쌓아 둘러싸는데 짐승에게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그 탯줄이 땅에 닿을 때 자르면 곧 죽는다. 물건을 쳐서 놀라게 하면 이에 놀라 울면서 탯줄이 마침내 끊어지는데 곧 수초를 따라 무리가 된다. 또한 대진의 금이매는 모두 크기가 외만한데 그것을 심으면 점점 불어나고 자라나 끝이 없어 살펴서 쓰면 곧 진짜금과 같다.” 했다. 『괄지지』에 “소인국은 대진의 남쪽에 있는데 사람은 겨우 세 자이다. 밭갈고 농사할 때 학에게 먹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대진이 호위하고 도와준다. 초요국에 나아가면 그 사람들은 굴에 산다.” 했다.
條枝在安息西數千里,臨西海。暑溼。耕田,田稻。有大鳥,卵如甕。[一]人眾甚多,往往有小君長,而安息役屬之,以為外國。國善眩。[二]安息長老傳聞條枝有弱水、西王母,而未嘗見。[三]
조지는 안식국 서쪽 수 천리에 있는데 서해에 맞닫아 있다. 덥고 축축하다. 농사를 지으며 벼를 재배한다. 큰 새가 있는데 알은 항아리만하다. 백성의 무리가 매우 많고, 왕왕 작은 군장이 있는데 안식국이 부리고 복속시키면서도 외국으로 여긴다. 나라는 횐술을 잘한다. 안식국 장노가 전하는 것을 들으면 조지는 약수, 서왕모가 있는데 일찍이 보지는 못하였다. 한다.
[一] 正義漢書云:「條支出師子、犀牛、孔雀、大雀,其卵如甕。和帝永元十三年,安息王滿屈獻師子、大鳥,世謂之『安息雀』。」廣志云:「鳥,鵄鷹身,蹄駱,色蒼,舉頭八九尺,張翅丈餘,食大麥,卵大如甕。」
[一] 【正義】 『한서』에 “조지에는 사자, 코뿔소, 공작, 타조가 나는데 그 알은 항아리 같다. 화제 영원 13년 안식왕 만굴이 사자, 큰 새를 바쳤는데 세상에서는 ‘안식국 공작’이라 한다.” 했다. 『광지』에 “새는 매의 몸에 발굽은 낙타이며, 색은 푸르고 머리를 들면 8, 9척이고 날개를 펴면 1장 정도되며, 대맥을 먹고, 알의 크기는 항아리만하다.” 했다.
[二] 集解應劭曰:「眩,相詐惑。」 正義顏云:「今吞刀、吐火、殖瓜、種樹、屠人、截馬之術皆是也。」
[二]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眩(아질할 현)’은 서로 속이고, 정신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했다. 【正義】 안이 말하기를 “지금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며, 외를 심고, 나무를 심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 말을 자르는 기술이 모두 이것이다.” 했다.
[三] 索隱魏略云:「弱水在大秦西。」玄中記云:「天下之弱者,有崑崙之弱水,鴻毛不能載也。」山海經云:「玉山,西王母所居。」穆天子傳云:「天子觴西王母瑤池之上。」括地圖云:「崑崙弱水乘龍不至。有三足神烏,為王母取食。」 正義此弱水、西王母既是安息長老傳聞而未曾見,後漢書云桓帝時大秦國王安敦遣使自日南徼外來獻,或云其國西有弱水、流沙,近西王母處,幾於日所入也。然先儒多引大荒西經云弱水云有二源,俱出女國北阿耨達山,南流會於女國東,去國一里,深丈餘,闊六十步,非毛舟不可濟,南流入海。阿耨達山即崑崙山也,與大荒西經合矣。然大秦國在西海中島上,從安息西界過海,好風用三月乃到,弱水又在其國之西。崑崙山弱水流在女國北,出崑崙山南。女國在于窴國南二千七百里。于窴去京凡九千六百七十里。計大秦與大崑崙山相去幾四五萬里,非所論及,而前賢誤矣。此皆據漢括地論之,猶恐未審,然弱水二所說皆有也。
[三] 【索隱】 『위략』에 “약수는 대진의 서쪽에 있다.” 했다. 『현중기』에 “천하의 약한 것으로 곤륜산의 약수에 있는데 기러기 털도 실을 수(띄울 수) 없다.” 했다. 『산해경』에 “옥산은 서왕모가 사는 곳이다.” 했다. 「목천자전」에 “천자가 요지의 위에서 서왕모에게 술잔을 올렸다.” 했다. 「괄지도」에 “곤륜산의 약수는 용을 타고도 이르지 못한다. 발이 셋인 신령한 까마귀가 있는데 서왕모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한다.” 했다. 【正義】 이 약수, 서왕모는 이미 안식국 장노가 전한 것을 들었지만 일찍이 보지는 못하였고, 『후한서』에 “환제 때 대진국 왕 안돈이 사신을 보내니 일남의 먼 밖으로부터 와서 공물을 바치면서 혹 말하기를 ‘그 나라 서쪽에 약수, 유사가 있는데 서왕모가 있는 곳에서 가까우며 해가 지는 곳에서 가깝다.’했다. 그러나 이전의 선비들이 많이 『대황서경』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약수는 두 근원이 있다하는데 모두 여국 북쪽 아욕달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 여국 동쪽에서 만나고 나라에서 1리 떨어져 있으며 깊이는 1장정도이고, 너비는 60보정도인데 털로 만든 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으며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아욕달산은 곧 곤륜산이라 한 것은 『대황서경』과 부합한다. 그러나 대진국은 서해 중의 섬 위에 있으며, 안식국 서쪽 경계로부터 바다를 건널 때 좋은 바람을 쓰면 3개월에 도달하고, 약수가 또한 그 나라의 서쪽에 있다. 곤륜산 약수의 흐름은 여국 북쪽에 있고, 곤륜산 남쪽에서 나온다. 여국은 우전국 남쪽 2700리에 있다. 우전은 서울로부터 무릇 9670리 떨어져 있다. 계산 해보면 대진과 곤륜산은 서로 떨어진 것이 거의 4, 5만리이니 논하여 미칠 것이 아니니 앞선 현인들의 잘못이다. 이는 모두 한의 『괄지지』에 근거하여 논한 것이니 오히려 자세하지 않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약수에 대해 말한 것이 모두 있다.
大夏在大宛西南二千餘里媯水南。其俗土著,有城屋,與大宛同俗。無大(王)[君]長,往往城邑置小長。其兵弱,畏戰。善賈市。及大月氏西徙,攻敗之,皆臣畜大夏。大夏民多,可百餘萬。其都曰藍市城,有市販賈諸物。其東南有身毒國。[一]
대하는 대완의 서남쪽 2천여리 규수 남쪽에 있다. 그 풍속은 땅에 붙어 살며 성과 집이 있는 것은 대왕과 풍속을 같이한다. 대(왕)(군)장은 없고, 왕왕 성읍에 소장을 둔다. 그 군대는 약하여 싸움을 두려워한다. 시장에서 장사를 잘 한다. 대월지가 서쪽으로 옮김에 이르러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모두 신하로 대하를 부린다. 대하의 백성은 많아서 100여만 명 정도된다. 그 도읍은 ‘감시성’이라 하는데 시장이 있어 여러 물건을 사고판다. 그 동남쪽에는 신독국이 있다.
[一] 集解徐廣曰:「身,或作『乾』,又作『訖』。」 索隱身音乾,毒音篤。孟康云:「即天竺也,所謂浮圖胡也。」正義一名身毒,在月氏東南數千里。俗與月氏同,而卑溼暑熱。其國臨大水,乘象以戰。其民弱於月氏。脩浮圖道,不殺伐,遂以成俗。土有象、犀、玳瑁、金、銀、鐵、錫、鉛。西與大秦通,有大秦珍物。明帝夢金人長大,頂有光明,以問群臣。或曰:「西方有神,名曰『佛』,其形長丈六尺而黃金色。」帝於是遣使天竺問佛道法,遂至中國,畫形像焉。萬震南州志云:「地方三萬里,佛道所出。其國王居城郭,殿皆彫文刻鏤。街曲市里,各有行列。左右諸大國凡十六,皆共奉之,以天地之中也。」浮屠經云:「臨兒國王生隱屠太子。父曰屠頭邪,母曰莫邪屠。身色黃,髮如青絲,乳有青色,爪赤如銅。始莫邪夢白象而孕,及生,從母右脅出。生有髮,墮地能行七步。」又云:「太子生時,有二龍王夾左右吐水,一龍水暖,一龍水冷,遂成二池,今猶一冷一暖。初行七步處,琉璃上有太子腳跡見在。生處名祗洹精舍,在舍衛國南四里,是長者須達所起。又有阿輸迦樹,是夫人所攀生太子樹也。」括地志云:「沙祗大國即舍衛國也,在月氏南萬里,即波斯匿王治處。此國共九十種。知身後事。城有祗樹給孤園。」又云:「天竺國有東、西、南、北、中央天竺國,國方三萬里,去月氏七千里。大國隸屬凡二十一。天竺在崑崙山南,大國也。治城臨恆水。」又云:「阿耨達山亦名建末達山,亦名崑崙山。水出,一名拔扈利水,一名恆伽河,即經稱[恆]河者也。自崑崙山以南,多是平地而下溼。土肥良,多種稻,歲四熟,留役駝馬,米粒亦極大。」又云:「佛上忉利天,為母說法九十日。波斯匿王思欲見佛,即刻牛頭旃檀象,置精舍內佛坐。此像是眾像之始,後人所法也。佛上天青梯,今變為石,沒入地,唯餘十二蹬,蹬閒二尺餘。彼耆老言,梯入地盡,佛法滅。」又云:「王舍國,胡語曰罪悅祗國。其國靈鷲山,胡語曰耆闍崛山。山是青石,石頭似鷲。鳥名耆闍,鷲也。崛,山石也。山周四十里,外周圍水,佛於此坐禪,及諸阿難等俱在此坐。」又云:「小孤石,石上有石室者,佛坐其中,天帝釋以四十二事問佛,佛一一以指畫石,其跡尚存。又於山上起塔,佛昔將阿難在此上山四望,見福田疆畔,因制七條衣割截之法於此,今袈裟衣是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身’은 혹 ‘乾’이라 쓰기도 하고, 또 ‘訖’이라 쓴다.” 했다. 【索隱】 ‘身’의 음은 ‘乾’이고, ‘毒’의 음은 ‘篤’이다. 맹강이 말하기를 “곧 천축이니 이른 바 부처의 오랑캐이다.” 했다. 【正義】 일명 ‘신독’이라 하는데 월지 동남쪽 수천 리에 있다. 풍속은 월지와 같은데 낮고 축축하며 덥고 뜨겁다. 그 나라는 큰물에 맞닿아 있고 코끼리를 타고 싸운다. 그 백성은 월지보다 약하다. 불교의 도를 닦아 죽이는 것과 정벌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풍곡을 이루었다. 땅에는 코끼리, 물소, 대모, 금, 은, 철, 주석, 납이 있다. 서쪽으로 대진과 통하는데 대진국의 진기한 물건이 있다. 명제가 꿈에 금으로 된 커다란 사람을 보았는데 정수리가 밝게 빛났으므로 여러 신하에게 물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쪽에 신이 있는데 부처라 이름하고, 그 형상은 키가 1장 6척이며, 황금색입니다.” 했다. 황제가 이에 사신을 천축에 보내 부처의 도를 묻게 하였는데 마침내 중국에 이르러 형상을 그렸다. 『만진남주지』에 “땅은 사방 3만리이고 부처의 도가 나온 곳이다. 그 나라의 왕은 성곽에 살고, 전각은 모두 무늬를 새기고 조각한다. 거리 구석구석 시장과 마을에 각각 행렬이 있다. 좌우의 여러 큰 나라들은 모두 16개 나라로 모두 함께 받드는데 천지의 가운데 이다.” 했다. 불경에 “임아국왕이 은도태자를 낳았는데 아버지는 도주야이고, 어머니는 막야도이다. 몸의 색은 황색이고, 머리털은 푸른 실과 같고, 젖은 청색이 있었으며, 손톱은 붉기가 구리와 같았다. 처음 먀야도의 꿈에서 흰 코끼리를 보고 잉태하였고, 낳을 때는 어머니의 오른 쪽 갈비뼈 사이에서 나왔다. 나면서 머리털이 있었고, 땅에 덜어지면서 일곱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했다. 또 말하기를 “태자가 태어날 때 두 용왕이 있어 좌우에서 끼고 물을 뿜었는데 한 용의 물은 따뜻하고, 한 용의 물은 차가웠는데 마침내 두 못을 이루었다. 하였는데 지금도 오히려 하나는 차갑고, 다른 하나는 따뜻하다. 처음 일곱 걸음을 걸은 곳은 유리 위에 태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태어난 곳을 기원정사라 하는데 사위국 남쪽 4리에 있는데 이는 수달장자가 일어난 곳이다. 또 아수가수가 있는데 이는 부인이 태자를 낳을 때 의지한 나무이다.” 했다. 『괄지지』에 “사지대국은 곧 사위국인데 월지 남쪽 만리에 있으니 곧 파사익왕이 다스리는 곳이다. 이 나라는 모두 90종족이 있다. 몸을 마친(죽은 후) 뒤의 일을 안다. 성에 기수급고원이 있다.” 했다. 또 말하기를 “천축국은 동, 서, 남, 북, 중앙의 천축국이 있고, 나라는 사방 삼만 리로 월지로부터 7000리 떨어져 있다. 큰 나라에 예속된 것이 모두 21개 이다. 천축은 곤륜산 남쪽에 있는 큰 나라이다. 다스리는 성은 항수에 맞닿는다. 또 말하기를 “아욕달산은 또한 건말달산이라 하고, 또 곤륜산이라 한다. 물이 나오는데 하나는 발호리수라 하고, 하나는 항가하라 하는데 곧 불경에서 말한 항하라는 것이다. 곤륜산으로부터 이남은 평지가 많으나 낮고 축축하다. 땅은 비옥하여 벼를 많이 심는데 1년에 4번 익으며, 모두 낙타를 부리며 살의 알이 또한 지극히 크다.” 했다. 또 말하기를 “부처가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를 위하여 90일 동안 불법을 말하였다. 파사익왕이 부처를 뵙고자 하여 곧 우두전단 나무로 형상을 깍아 정사 안 부처의 자리에 두었다. 이 불상이 여러 불상의 처음으로 후대 사람들이 그것을 본 받았다. 부처가 하늘에 오르던 푸른 사다리는 지금 변하여 돌이 되어 땅에 묻히고 오직 12걸음 정도 남아있는데 걸음 사이의 거리는 두 자 남짓이다. 그 노인들이 말하기를 사다리가 땅에 모두 들어가면 불법이 사라진다. 했다. 또 말하기를 “왕사국은 오랑캐 말로 ‘죄열기국’이라 한다. 그 나라 영축산은 오랑캐 말로 ‘기자굴산’이라 한다. 산이 청석이고, 돌의 머리는 독수리를 닮았다. 새의 이름이 ‘기사’이니 독수리이다. ‘굴’은 산돌이다. 산의 둘레는 40리이고 밖을 물이 둘러쌓는데 부처가 여기에서 좌선하였는데 아난 등이 모두 이 자라에 있었다.” 했다. 또 말하기를 “소고석 돌 위에 석실이 있는데 부처가 그 안에 앉아 있을 때 천제석이 42가지 일을 가지고 부처에게 물으니 부처가 하나하나 돌에 손가락으로 그렸는데 그 자취가 아직도 있다. 또 산 위에 탑을 일으켰는데 부처가 옛날 아난을 데리고 이 산위에 있으면서 사방을 바라보다가 복전의 밭두둑을 보고는 7조각으로 옷을 잘라 나누는 법을 만들었는데 지금 가사 옷이 이것이다.” 했다.
騫曰:「臣在大夏時,見邛竹杖、蜀布。[一]問曰:『安得此?』大夏國人曰:『吾賈人往市之身毒。身毒在大夏東南可數千里。其俗土著,大與大夏同,而卑溼暑熱云。其人民乘象以戰。其國臨大水焉。』[二]以騫度之,大夏去漢萬二千里,居漢西南。今身毒國又居大夏東南數千里,有蜀物,此其去蜀不遠矣。今使大夏,從羌中,險,羌人惡之;少北,則為匈奴所得;從蜀宜徑,[三]又無寇。」天子既聞大宛及大夏、安息之屬皆大國,多奇物,土著,頗與中國同業,而兵弱,貴漢財物;其北有大月氏、康居之屬,兵彊,可以賂遺設利朝也。且誠得而以義屬之,則廣地萬里,重九譯,[四]致殊俗,威德遍於四海。天子欣然,以騫言為然,乃令騫因蜀犍為[五]發閒使,四道並出:出駹,出冉,[六]出徙,[七]出邛、僰[八],皆各行一二千里。其北方閉氐、筰,[九]南方閉巂、昆明[一0]。昆明之屬無君長,善寇盜,輒殺略漢使,終莫得通。然聞其西可千餘里有乘象國,名曰滇越,[一一]而蜀賈姦出物者或至焉,於是漢以求大夏道始通滇國。初,漢欲通西南夷,費多,道不通,罷之。及張騫言可以通大夏,乃復事西南夷。
장건이 말하기를 “신이 대하에 있을 때 공나라의 대나무 지팡이와 촉에서 만든 베를 보았습니다. (제가) 묻기를 ‘어떻게 이것을 얻었는가?”하니 대하국 사람이 말하기를 “나의 상인이 신독에 가서 사왔습니다. 신독은 대하 동남쪽 수 천리 정도에 있습니다. 그 풍속은 땅에 붙어사는 것은 크게 보면 대하와 같고, 낮고 축축하며 덮고 뜨겁습니다. 그 백성들은 코끼리를 타고 싸웁니다. 그 나라는 큰물을 맞대고 있습니다.’ 했습니다. 제가 헤아리건데 대하는 한에서 1만2천리 떨어져 있으며 한의 서남쪽에 있습니다. 지금 신독국이 또한 대하 동남쪽 수 천리에 있는데 촉의 물건이 있는 것은 촉과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대하에 사신을 보내면서 강족의 가운데를 따르게 하면 험하고, 강족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조금 북쪽으로 하면 곧 흉노에게 잡히고, 촉으로부터 마땅한 지름길로 가면 또한 도적이 없습니다. 천자가 들어 보니 대완과 안식국 등이 모두 큰 나라이니 기이한 물건이 많고, 땅에 붙어살아 거의 중국과 산업을 같이하고, 군대가 약하고 한의 재물을 귀하게 여긴다. 그 북쪽에는 대월지, 강거의 등속이 있는데 군대가 강하니 재물을 주어 이로움을 베푸는 것으로 조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진실로 얻어 의로서 속하게 한다면 곧 넓힐 수 있는 땅이 만리이고, 아홉 번 거듭 통역하여 다른 풍속에 이르러 위엄과 덕으로 사해에 두루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천자가 기뻐하며 장건의 말이 그러하다 여겨 이에 장건으로 하여금 촉과 건위에 은밀히 사신을 내어 네 길로 나란히 나가게 하였다. 방, 염, 사, 공과 북을 나가 모두 각각 1, 2천리를 갔다. 그 북쪽의 저와 작을 막고, 남쪽으로 휴와 곤명을 막았다. 곤명의 등속은 군장이 없고 도적질을 잘하여 문득 한의 사신을 죽이고 약탈하니 끝내 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서쪽 천 여리 정도 되는 곳에 코끼리를 타는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전월이며 촉의 상인이 간사하게 물건을 내는 자가 혹 여기에 이른다는 것을 듣고 이에 한이 대하 길을 구하여 처음 전국에 통하였다. 처음 한이 서남이, 비다와 통하고자 하였으나 길이 통하지 않아 그만두었다. 장건이 대하에 통할 수 있다는 말을 하자 이에 다시 서남이에 종사하였다.
[一] 正義邛都邛山出此竹,因名「邛竹」。節高實中,或寄生,可為杖。布,土蘆布。
[一] 【正義】 공도는 공산에서 이 대나무가 나오기 때문에 ‘공죽’이라 이름 한 것이다. 마디가 높고 가운데가 채워져 있으니 혹 붙어 나면 지팡이를 만들 수 있다. ‘포’는 토로포이다.
[二] 正義大水,河也。
[二] 【正義】 대수는 河이다.
[三] 集解如淳曰:「徑,疾也。或曰徑,直。」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徑(지름길 경)’은 빨리 이다. 혹 ‘徑’은 곧음이다.” 했다.
[四] 正義言重重九遍譯語而致。
[四] 【正義】 거듭거듭 두루 통역하는 말을 하여 이르는 것을 말한다.
[五] 正義犍,其連反。犍為郡今戎州也,在益州南一千餘里。
[五] 【正義】 ‘犍(불간 소 건)’은 ‘其’와 ‘連’의 反이다. 건위군은 지금의 융주인데 익주 남쪽 1천여리에 있다.
[六] 正義茂州、向州等,冉、駹之地,在戎州西北也。
[六] 【正義】 무주와 향주는 염과 방의 땅이니 융주 서북쪽에 있다.
[七] 集解徐廣曰:「屬漢嘉。」 索隱李奇云:「徙音斯。蜀郡有徙縣也。」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가에 속한다.” 했다. 【索隱】 이기가 말하기를 “‘徙’의 음은 ‘斯’이다. 촉군에 사현이 있다.” 했다.
[八] 正義僰,蒲北反。徙在嘉州;邛,今邛州;僰,今雅州:皆在戎州西南也。
[八] 【正義】 ‘僰’은 ‘蒲(부들 포)’와 ‘北’의 反이다. ‘사는 가주에 있고, 공은 지금의 공주이고, ’북‘은 지금의 아주이니 모두 융주 서남쪽에 있다.
[九] 集解服虔曰:「皆夷名,漢使見閉於夷也。」 索隱韋昭云:「筰縣在越巂,音昨。」案:南越破後殺筰侯,以筰都為沈黎郡,又有定筰縣。正義氐,今成州及武等州也。筰,白狗羌也。皆在戎州西北也。
[九]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모두 오랑캐 이름으로 한나라 사신이 오랑캐에게 저지당한 것이다.” 했다.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작현은 월휴에 있는데 음은 ‘昨’이다.” 했다. 살펴보니 “남월을 깨트린 후 작후를 죽이고 작도를 심여군으로 삼았는데 또한 정작현이 있다. 【正義】 ‘氐’는 성주와 무 등의 주이다. ‘笮(좁을 착)’은 백구강이다. 모두 융주 서북쪽에 있다.
[一0] 正義巂州及南昆明夷也,皆在戎州西南。
[一0] 【正義】 휴주와 남곤명의 오랑캐인데 모두 융주 서남쪽에 있다.
[一一] 集解徐廣曰:「一作『城』。」 正義昆、郎等州皆滇國也。其西南滇越、越巂則通號越,細分而有巂、滇等名也。
[一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城’이라 쓴다.“ 했다. 【正義】 곤과 낭 등의 주는 모두 전국이다. 그 서남쪽은 전월과 월휴이니 곧 호월을 통칭하는데 세분하면 휴, 전 등의 이름이 있다.
騫以校尉從大將軍擊匈奴,知水草處,軍得以不乏,乃封騫為博望侯。[一]是歲元朔六年也。其明年,騫為衛尉,與李將軍俱出右北平擊匈奴。匈奴圍李將軍,軍失亡多;而騫後期當斬,贖為庶人。是歲漢遣驃騎破匈奴西(城)[域]數萬人,至祁連山。其明年,渾邪王率其民降漢,而金城、河西西並南山至鹽澤空無匈奴。匈奴時有候者到,而希矣。其後二年,漢擊走單于於幕北。
장건이 교위로서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치는데 물과 풀이있는 곳을 알아 군대가 결핍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이에 봉하여 박망후로 삼았다. 이 해는 원삭 6년이다. 그 다음 해 장건이 위위가 되어 이 장군과 함께 우북평을 나가 흉노를 쳤다. 흉노가 이 장군을 포위하여 군대가 잃고 도망함이 많았다. 장건은 약속한 기일에 늦어 머리를 베는 것에 해당하였으나 재물을 내고 죄를 용서받아 서인이 되었다. 이 해 한이 표기를 보내 흉노를 서쪽에서 깨트리고 수 만명이 기련산에 이르렀다. 그 다음 해 혼야왕이 그 백성을 거느리고 한에 항복하였는데 금성, 하서 서쪽과 남산을 아우르고 염택에 이르렀는데 비어있고 흉노는 없었다. 흉노는 때로 징후를 살피는 자가 이르렀으나 적었다. 그 2년 뒤 한이 막북(사막 북쪽)에서 선우를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一] 索隱案:張騫封號耳,非地名。小顏云「取其能博廣瞻望」也。尋武帝置博望苑,亦取斯義也。正義地理志南陽博望縣。
[一] 【索隱】 살펴보니 장건의 봉호일 뿐이며 지명이 아니다. 소안이 말하기를 “널리 살펴볼 수 있음을 잘하는 것을 취하였다.” 했다. 얼마 후 무제가 박망원을 두었는데 또한 그 뜻릏 취하였을 뿐이다. 【正義】 「지리지」에 “남양 박망현이다.” 했다.
是後天子數問騫大夏之屬。騫既失侯,因言曰:「臣居匈奴中,聞烏孫王號昆莫,昆莫之父,匈奴西邊小國也。匈奴攻殺其父,[一]而昆莫生棄於野。烏嗛肉蜚其上,[二]狼往乳之。單于怪以為神,而收長之。及壯,使將兵,數有功,單于復以其父之民予昆莫,令長守於西(城)[域]。昆莫收養其民,攻旁小邑,控弦數萬,習攻戰。單于死,昆莫乃率其眾遠徙,中立,不肯朝會匈奴。匈奴遣奇兵擊,不勝,以為神而遠之,因羈屬之,不大攻。今單于新困於漢,而故渾邪地空無人。蠻夷俗貪漢財物,今誠以此時而厚幣賂烏孫,招以益東,居故渾邪之地,與漢結昆弟,其勢宜聽,聽則是斷匈奴右臂也。既連烏孫,自其西大夏之屬皆可招來而為外臣。」天子以為然,拜騫為中郎將,將三百人,馬各二匹,牛羊以萬數,齎金幣帛直數千巨萬,多持節副使,道可使,使遺之他旁國。
이후 천자가 자주 장건에게 대하의 등속에 대하여 물었다. 장건은 이미 후의 지위를 잃었으므로 말하기를 “신이 흉노에 살 때 오손의 왕호는 ‘곤막’이고, 곤막의 아버지가 흉노 서쪽 변경의 작은 나라에 있었습니다. 흉노가 그 아버지를 쳐서 죽였는데 곤막은 산 채로 들에 버려졌습니다.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그 위를 날고, 이리가 가서 젖을 먹였습니다. 선우가 괴이하고 신이하다 여겨 거두어 길렀습니다. 장성하여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는데 자주 공이 있어 선우가 다시 그 아버지의 백성을 곤막에게 주어 서쪽지역을 오래 지키게 하였습니다. 곤막이 그 백성을 거두어 기르고 옆의 작은 읍들을 치고, 활 쏘는 군사 수만을 훈련시켜 공격하는 싸움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선우가 죽자 곤막이 이에 그 무리를 거느리고 멀리 옮겨 자리하고는 흉노에게 조공하지 않았습니다. 흉노가 기병을 보내 쳤으나 이기지 못하자 신령스러운 이라 여겨 멀리하고 메어 속하게 하되 크게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선우가 새롭게 한에게 곤란을 겪고, 옛 혼양왕의 땅이 비어 사람이 없습니다. 오랑캐들의 습속은 한의 재물을 탐하니 지금 진실로 이러한 때에 후한 선물과 재물을 오손에게 주면서 불러 동쪽지역을 주고, 옛 혼야의 땅에 살게 하면서 한과 형제를 의를 맺게 한다면 그 형세가 마땅히 들을 것이며, 들으면 곧 이는 흉노의 오른 팔을 끊는 것입니다. 오손에 연결된다면 그 서쪽 대하의 등속으로부터 모두 불러 오게 하여 외신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했다. 천자가 그렇다 여기고 장건에게 벼슬을 주어 중낭장으로 삼고, 300명을 거느리게 하고, 각각 말 2필, 소와 양 수만 마리, 금 폐백 수천 거만을 지니고 부사 여럿에게 부절을 주어 사신으로 할만 하다 하고 사신을 다른 옆의 다른 나라에도 가게 하였다.
[一] 索隱按漢書,父名難兜靡,為大月氏所殺。
[一] 【索隱】 『한서』를 살펴보니 “아버지의 이름은 난도미인데 대월지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讀『嗛』與『銜』同。酷吏傳『義縱不治道,上忿銜之』,史記亦作『嗛』字。」 索隱嗛音銜。蜚亦「飛」字。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嗛’과 ‘銜(재갈 함)’은 읽는 것이 같다. 「혹리전」에 ‘의종이 길을 닦지 않아 천자가 분을 품었다.’ 했고, 『사기』에서도 또한 ‘嗛 ’자를 썼다.” 했다. 【索隱】 ‘嗛’의 음은 ‘銜’이다. ‘蜚’자 또한 ‘飛’를 썼다.
騫既至烏孫,烏孫王昆莫見漢使如單于禮,騫大慚,知蠻夷貪,乃曰:「天子致賜,王不拜則還賜。」昆莫起拜賜,其他如故。騫諭使指曰:「烏孫能東居渾邪地,則漢遣翁主為昆莫夫人。」烏孫國分,王老,而遠漢,未知其大小,素服屬匈奴日久矣,且又近之,其大臣皆畏胡,不欲移徙,王不能專制。騫不得其要領。昆莫有十餘子,其中子曰大祿,彊,善將眾,將眾別居萬餘騎。大祿兄為太子,太子有子曰岑娶,而太子蚤死。臨死謂其父昆莫曰:「必以岑娶為太子,無令他人代之。」昆莫哀而許之,卒以岑娶為太子。大祿怒其不得代太子也,乃收其諸昆弟,將其眾畔,謀攻岑娶及昆莫。昆莫老,常恐大祿殺岑娶,予岑娶萬餘騎別居,而昆莫有萬餘騎自備,國眾分為三,而其大總取羈屬昆莫,昆莫亦以此不敢專約於騫。
장건이 오손에 이르렀는데 오손왕 곤막이 한의 사신을 서우의 예로 만나니 장건이 크게 부끄러워하였으나 오랑캐의 탐욕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에 말하기를 “천자의 내림이 이르렀는데 왕이 절하지 않으면 내린 것을 돌려 가져갑니다.” 하니 곤막이 일어나 내림에 절하였으나 나머지는 옛과 같이하였다. 장건이 사신의 취지를 깨우쳐 말하기를 “오손은 동쪽 혼야의 땅에 살 수 있고, 한이 옹주를 보내 곤막의 부인으로 삼게 할 것입니다.” 했다. 오손국은 나뉘었고 왕은 늙었으며 한은 멀어 그 크고 작음을 알지 못하였으나 평소 흉노에게 복속한 날이 오래 되었고 도한 가까우니 그 대신들이 모두 흉노를 두려워하여 옮기려하지 않으니 왕이 오로지 제재할 수 없었다. 장건은 그 목적을 얻을 수 없었다. 곤막에게는 10여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아들을 대록과 강이 무리들을 잘 거느렸으므로 무리를 거느리고 따로 만여기 씩을 거느리고 살았다. 대록의 형이 태자가 되었고, 태자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잠취라 하며, 태자는 일찍 죽었다. 태자가 죽음에 임하여 그 아버지 곤막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잠취로서 태자로 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하지 마십시오.” 했다. 곤막이 슬퍼하며 허락하고는 마침내 잠취를 태자로 삼았다. 대록이 태자를 대신할 수 없음에 노하여 이에 그 여러 형제들을 거둔 후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여 잠취와 곤막을 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곤막은 늙어서 항상 대록이 잠취를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잠취에게 만여 기를 주어 따로 살게 하고, 곤막은 만여기를 두고 스스로 대비하니 나라의 무리가 나뉘어 셋이 되었으되 그 대개는 곤막에게 메여 속하였다 해도 곤막이 또한 이로서 감히 마음대로 장건에게 약속하지 못하였다.
騫因分遣副使使大宛、康居、大月氏、大夏、安息、身毒、于窴、扜冞及諸旁國。烏孫發導譯送騫還,騫與烏孫遣使數十人,馬數十匹報謝,因令窺漢,知其廣大。
장건이 이에 부사를 나누어 대완, 강거, 대월지, 대하, 안식, 신독, 우전, 우미와 여러 옆의 나라에 보냈다. 오손이 향도와 통역을 내어 장건이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였는데 장건은 오손이 보내는 사신 수십 명과 사례로 보내는 말 수십 필과 함께 하여 한을 엿보아 그 넓고 큼을 알게 하였다.
騫還到,拜為大行,列於九卿。歲餘,卒。
장건이 돌아오자 벼슬을 주어 대행으로 삼아 9경에 반열되었다. 1년 정도 지나 죽었다.
烏孫使既見漢人眾富厚,歸報其國,其國乃益重漢。其後歲餘,騫所遣使通大夏之屬者皆頗與其人俱來,[一]於是西北國始通於漢矣。然張騫鑿空,[二]其後使往者皆稱博望侯,以為質於外國[三],外國由此信之。
오손의 사신들이 한의 사람이 많고, 부유함을 보고 그 나라에 돌아가 보고하니 그 나라가 이에 더욱 한을 중요하게 여겼다. 몇 년 후 장건이 보냈던 사신들이 대하의 등속과 통한 자들이 모두 자못 그 사람들과 함께 왔는데 이에 서쪽과 북쪽의 나라들이 비로소 한과 통하였다. 그런데 장건이 길을 낸 후 사신으로 가는 자들이 모두 박망후를 말하였는데 외국에 정성과 신의를 위한 것이었고, 외국이 이로 말미암아 믿었다.
[一] 集解晉灼曰:「其國人。」
[一]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그 나라 사람이다.” 했다.
[二] 集解蘇林曰:「鑿,開;空,通也。騫開通西域道。」 索隱案:謂西域險阨,本無道路,今鑿空而通之也。
[二] 【集解】 소림이 말하기를 “‘鑿’은 여는 것이다. ‘空’은 통함이다. 장건이 서역의 길을 열고 통하게 한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서역은 험하고 막혀서 본래 도로가 없었는데 지금 열어 통하게 한 것이다.
[三] 集解如淳曰:「質,誠信也。博望侯有誠信,故後使稱其意以喻外國。」李奇曰:「質,信也。」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質’은 정성과 신의이다. 박망후가 정성과 신의가 있었기 때문에 후에 사신들이 그 뜻을 말하는 것으로서 외국에 설명하였다.” 했다. 이기가 말하기를 “‘質’은 믿음이다.” 했다.
自博望侯騫死後,匈奴聞漢通烏孫,怒,欲擊之。及漢使烏孫,若[一]出其南,抵大宛、大月氏相屬,烏孫乃恐,使使獻馬,願得尚漢女翁主為昆弟。天子問群臣議計,皆曰「必先納聘,然後乃遣女」。初,天子發書易,[二]云「神馬當從西北來」。得烏孫馬好,名曰「天馬」。及得大宛汗血馬,益壯,更名烏孫馬曰「西極」,名大宛馬曰「天馬」云。而漢始築令居以西,[三]初置酒泉郡以通西北國。因益發使抵安息、奄蔡、黎軒、條枝、身毒國。而天子好宛馬,使者相望於道。諸使外國一輩大者數百,少者百餘人,人所齎操大放博望侯時。其後益習而衰少焉。漢率一歲中使多者十餘,少者五六輩,遠者八九歲,近者數歲而反。
박망후 장건이 죽은 후 흉노가 오손과 통한 다는 것을 듣고 노하여 (오손을)치려하였다. 한의 사신이 오손에 이르러 그 남쪽으로 나와 대완, 대월지에 이르러 서로 접촉하니 오손이 이에 두려워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말을 바치게 하고 한의 여자인 옹주를 얻어 형제가 되기를 원하였다. 천자가 듣고 여러 신하들과 계책을 논의하니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먼저 예물을 받은 후에 여자를 보내야 합니다.” 했다. 처음 천자가 易書를 펴 점을 보니 점괘에 “神馬가 마땅히 서북쪽으로부터 오리라.”하였는데 오손의 말을 얻얻는 데 좋은 말이서 ‘天馬’라 하였다. 대완의 한혈마를 얻었는데 더욱 강건하였으므로 이름을 바꾸어 오손의 말을 ‘西極’이라 하고, 대완의 말을 ‘天馬’라 하였다. 한이 처음 성을 쌓아 서쪽에 살게 하였고, 처음 주천군을 두어 서쪽과 북쪽의 나라에 통하였다. 인하여 더욱 사신을 내어 안식, 암채, 여헌, 조지, 신독국에 이르렀다. 천자가 대완의 말을 좋아하여 사신을 보내는데 길에서 서로 바라보았다. 여러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데 한 무리가 큰 것은 수백 명이고, 작은 것은 백여 명이며, 사람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크게 박망후 때를 모방하여 조절하였다. 그 후 더욱 익숙해지면서 조금 쇠퇴하였다 한이 보내는 사신은 1년에 많으면 10여회, 적으면 5, 6무리이고, 멀리 가면 8, 9년, 가까이 가면 몇 해만에 돌아왔다.
[一] 集解徐廣曰:「漢書作『及』,若意義亦及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서』에 ‘及’이라 썼고, ‘若’의 뜻이 또한 미침이다.
[二] 集解漢書音義曰:「發易書以卜。」
[二] 【集解】 「한서음의」에 “역서를 펼쳐 점을 침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屬金城。」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금성에 속한다.” 했다.
是時漢既滅越,而蜀、西南夷皆震,請吏入朝。於是置益州、越巂、牂柯、沈黎、汶山郡,欲地接以前通大夏。[一]乃遣使柏始昌、呂越人等歲十餘輩,出此初郡[二]抵大夏,皆復閉昆明,為所殺,奪幣財,終莫能通至大夏焉。於是漢發三輔罪人,因巴蜀士數萬人,遣兩將軍郭昌、衛廣等往擊昆明之遮漢使者,[三]斬首虜數萬人而去。其後遣使,昆明復為寇,竟莫能得通。而北道酒泉抵大夏,使者既多,而外國益厭漢幣,不貴其物。
이 때 한이 월을 없애니 촉과 서남이가 모두 진동하여 관리들로 들어가 조회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익주, 월휴, 양가, 심여, 문산군을 두어 땅의 경계를 서로 접하는 것으로서 대하에 이르고자 하였다. 이에 사신으로 백시창, 여월인 등을 1년에 10여 무리를 보냈다. 이들은 처음 둔 군을 나와 대하에 이르려 하였으나 모두 다시 곤명에서 막혀 죽음을 당하고, 폐백과 재물을 빼앗겨 끝내 대하에 통하여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한이 삼보의 죄수를 동원하여 파와 촉의 군사 수만 명과 합하고, 두 장군 곽창, 위광 등을 보내 가서 곤명의 한 사신을 막는 자를 치게 하여 머리를 베고 수만 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 그 후 사신을 보낼 때 곤명이 다시 도적질하니 마침내 통할 수 없어졌다. 북쪽 길로는 주천이 대하에 이르려는 사신이 너무 많아져 외국이 더욱 한의 폐백을 싫어 하게 되어 한나라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一] 集解李奇曰:「欲地界相接至大夏。」
[一] 【集解】 이기가 말하기를 “땅의 경계를 서로 접하게 하여 대하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했다.
[二] 索隱按:謂越巂、汶山等郡。謂之「初」者,後背叛而併廢之也。
[二] 【索隱】 살펴보니 월휴, 문산 등의 군을 말한다. 그것을 일러 ‘初’라고 한 것은 후에 배반하여 합쳐 폐하였기 때문이다.
[三] 集解徐廣曰:「元封二年。」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봉 2년이다.” 했다.
自博望侯開外國道以尊貴,其後從吏卒皆爭上書言外國奇怪利害,求使。天子為其絕遠,非人所樂往,聽其言,予節,募吏民毋問所從來,為具備人眾遣之,以廣其道。來還不能毋侵盜幣物,及使失指,天子為其習之,輒覆案致重罪,以激怒令贖,復求使。使端無窮,而輕犯法。其吏卒亦輒復盛推外國所有,言大者予節,言小者為副,故妄言無行之徒皆爭效之。其使皆貧人子,私縣官齎物,欲賤市以私其利外國。外國亦厭漢使人人有言輕重,[一]度漢兵遠不能至,而禁其食物以苦漢使。漢使乏絕積怨,至相攻擊。而樓蘭、姑師小國耳,[二]當空道,攻劫漢使王恢等尤甚。[三]而匈奴奇兵時時遮擊使西國者。使者爭遍言外國災害,皆有城邑,兵弱易擊。於是天子以故遣從驃侯破奴將屬國騎及郡兵數萬,至匈河水,欲以擊胡,胡皆去。其明年,擊姑師,破奴與輕騎七百餘先至,虜樓蘭王,遂破姑師。因舉兵威以困烏孫、大宛之屬。還,封破奴為浞野侯。[四]王恢[五]數使,為樓蘭所苦,言天子,天子發兵令恢佐破奴擊破之,封恢為浩侯。[六]於是酒泉列亭鄣至玉門矣。[七]
박망후가 외국과의 길을 연 것으로 존귀하게 됨으로부터 그 후로 이졸들이 쫓아서 모두 다투어 글을 올려 외국의 기이하고 괴이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말하면서 사신가기를 구하였다. 천자가 매우 멀고 사람이 즐겨 갈 바가 아니라 하면서도 그 말을 들으면 부절을 주고, 관리와 백성을 모집하는데 온 곳을 묻지 않고 장비와 사람의 무리를 갖추게 하여 보내는 것으로서 그 길을 넓히려 하였다. 돌아오면 재물을 침범하고 훔치지 않게 할 수 없고, 사신이 뜻을 잃음에 이르니 천자는 그들이 익숙해졌다 여겨 번번이 죄를 따져 무거운 죄에 이르렀고, 격노하여 속죄하게 하였으나 다시 사신이 되기를 구하게 하였다. 사신을 보내는 일이 끝이 없었으되 법을 범하는 것을 가볍게 여겼다. 그 이졸들이 또한 매번 외국에 있는 바를 미루어 반복적으로 성대하다. 했으며 말을 크게 부풀려 하는 자는 부절을 주고, 말을 소극적으로 하는 자는 부사를 삼았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고 행실이 단정치 못한 무리들이 모두 다투어 본 받았다. 그 사신은 모두 가난한 사람의 아들로 관에서 준 물건을 사사로이 하거나 헐값에 시장에서 파는 것으로서 외국에서 그 이익을 사사로이 하고자 하였다. 외국이 또한 한의 사신들마다 말에 경중이 있음을 싫어하고, 한의 군대가 멀어서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는 그 음식과 물건을 금하는 것으로서 한의 사신을 괴롭혔다. 한의 사신이 결핍으로서 원망을 쌓아 서로 공격함에 이르렀다. 누란과 고사는 작은 나라일 뿐인데 길의 요지에 해당하여 한의 사신 왕회 등을 공격하고 겁줌이 더욱 심하였다. 흉노의 기병이 때때로 서쪽의 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가는 자를 막고 쳤다. 사신이 다투어 두루 외국의 재해를 말하면서 모두 성읍은 있으나 군대는 약하여 치기 쉽다. 했다. 이에 천자가 이 때문에 종표후 조파노를 보내 속국의 기병과 군의 군대 수만 명을 보내 흉하수에 이르러 흉노를 치려하였으나 흉노가 모두 떠났다. 그 다음해 고사를 치는데 조파노가 가벼운 무장을 한 기병 700여명으로 먼저 이르게 하여 누란왕을 포로로 잡고, 마침내 고사를 깨트렸다. 군대를 일으킨 위세로 오손과 대완의 등속을 곤란하게 하였다. 돌아오니 조파노를 봉하여 착야후라 했다. 왕회가 여러 번 사신으로 가서 누란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을 천자에게 말하니 천자가 군대를 징발하여 왕회로 하여금 조파노를 도와 쳐서 깨트리게 하고, 왕회를 봉하여 호후라 하였다. 이에 주천에서 옥문관까지 요새가 열지어 서게 되었다.
[一] 集解服虔曰:「漢使言於外國,人人輕重不實。」如淳曰:「外國人人自言數為漢使所侵易。」
[一]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한의 사신이 외국에서 말하는 것이 사람마다 경중이 있어 실제가 아니었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외국 사람들이 스스로 한의 사신들을 침범하는 것이 쉬움을 말하였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即車師。」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곧 車師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恢,一作『怪』。」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恢(넓을 회)’는 한편으로 ‘怪’라 쓴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元封三年。」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봉 3년이다.” 했다.
[五] 集解徐廣曰:「為中郎將。」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중낭장이 되었다.” 했다.
[六] 集解徐廣曰:「捕得車師王,元封四年封浩侯。」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거사왕을 잡아 원봉 4년 호후에 봉해졌다.
[七] 集解韋昭曰:「玉門關在龍勒界。」 索隱韋昭云:「玉門,縣名,在酒泉。又有玉關,在龍勒也。」 正義括地志云:「沙州龍勒山在縣南百六十五里。玉門關在縣西北百一十八里。」
[七]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옥문관은 용륵 경계에 있다.” 했다.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玉門은 현의 이름이니 주천에 있다. 또 玉關이 있는데 용륵에 있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사주 용륵산은 현의 남쪽 165리에 있다. 옥문관은 현의 서북쪽 118리에 있다.” 했다.
烏孫以千匹馬聘漢女,漢遣宗室女江都翁主[一]往妻烏孫,烏孫王昆莫以為右夫人。匈奴亦遣女妻昆莫,昆莫以為左夫人。昆莫曰「我老」,乃令其孫岑娶妻翁主。烏孫多馬,其富人至有四五千匹馬。
오손이 천필의 말로서 한의 여자를 맞이하려 하니 한이 종실의 딸인 강도옹주를 보내 오손에서 아내를 삼게 하자 오손의 왕 곤막이 우부인이라 하였다. 흉노가 또한 여자를 보내 곤막의 아내로 삼게하니 곤막이 좌부인이라 하였다. 곤막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다.”하고는 그 손자 잠취로 하여금 옹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오손은 말이 많아 그 부자는 4, 5천 필을 소유함에 이르렀다.
[一] 集解漢書曰:「江都王建女。」
[一] 【集解】 『한서』에 “강도왕 건의 딸이다.” 했다.
初,漢使至安息,安息王令將二萬騎迎於東界。東界去王都數千里。行比至,過數十城,人民相屬甚多。漢使還,而後發使隨漢使來觀漢廣大,以大鳥卵及黎軒善眩人[一]獻于漢。及宛西小國驩潛、大益,宛東姑師、扞冞、蘇薤之屬,皆隨漢使獻見天子。天子大悅。
처음 하의 사신이 안식에 이르니 안식왕이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동쪽 경계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동쪽 경계는 왕도에서 수 천리 떨어져 있다. 가서 가까이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성을 지났는데 백성들이 서로 이어져 매우 많았다. 한의 사신이 돌아 간 후 사신을 내어 한의 사신을 따라 와 한의 넓고 큼을 보고는 큰 새의 알과 여헌의 환술을 잘 하는 사람을 한에 바쳤다. 대완의 서쪽 은 작은 나라인 환잠, 대익이고, 대완의 동쪽은 고사, 한(우)미, 소비의 등속인데 모두 한의 사신을 따라 공물을 바치고 천자를 뵈었다. 천자가 크게 기뻐하였다.
[一] 索隱韋昭云:「變化惑人也。」按:魏略云「犁靳多奇幻,口中吹火,自縛自解」。小顏亦以為植瓜等也。
[一]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변화시켜 사람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위략』에 말하기를 “‘리근’에 기이한 환술이 많으니 잎 안에서 불을 뿜고, 스스로 묶고 스스로 푸는 것 등이다.” 했다. 소안이 또한 오이 등을 심는다고 말하였다.
而漢使窮河源,河源出于窴,其山多玉石,采來,[一]天子案古圖書,名河所出山曰崑崙云。
그리고 한은 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河의 근원은 우전에서 나오며, 그 산은 옥석이 많아 캐 왔다. 천자가 옛 지도와 글을 살펴보고 河 가 나오는 산을 곤륜이라 이름하였다.
[一] 集解瓚曰:「漢使采取,將持來至漢。」
[一] 【集解】 찬이 말하기를 “한의 사신이 채취하여 가지고 와 한에 이르렀다.” 했다.
是時上方數巡狩海上,乃悉從外國客,大都多人則過之,散財帛以賞賜,厚具以饒給之,以覽示漢富厚焉。於是大觳抵,出奇戲諸怪物,多聚觀者,行賞賜,酒池肉林,令外國客遍觀(名)[各]倉庫府藏之積,見漢之廣大,傾駭之。及加其眩者之工,而觳抵奇戲歲增變,甚盛益興,自此始。
이 때 천자가 바야흐로 자주 바다 위를 순수하면서 이에 외국의 객을 모두 따르게 하였는데 큰 도시에 사람이 많으면 곧 지나가면서 재물과 비단을 흩는 것으로서 상을 내리는데 두터이 갖추어 넉넉하게 주어 한이 부유하다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에 크게 씨름을 하고, 기이한 놀이와 괴물을 내어 보는 자가 많이 모이면 상을 내리고, 술의 못과 고기의 숲을 주었다. 외국의 객으로 하여금 두루 창고와 무기고에 저앙하여 쌓은 것을 주루 보게하여 한의 넓고 큼을 나타내니 크게 놀라워하였다. 환술을 하는 자의 재주에 더하여 씨름, 기이한 놀이를 해마다 더하고 변화시겨 매우 성대함을 더욱 일으킴이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西北外國使,更來更去。宛以西,皆自以遠,尚驕恣晏然,未可詘以禮羈縻而使也。自烏孫以西至安息,以近匈奴,匈奴困月氏也,匈奴使持單于一信,則國國傳送食,不敢留苦;及至漢使,非出幣帛不得食,不市畜不得騎用。所以然者,遠漢,而漢多財物,故必市乃得所欲,然以畏匈奴於漢使焉。宛左右以蒲陶為酒,富人藏酒至萬餘石,久者數十歲不敗。
서북쪽의 외국 사신이 다시 오고 다시 갔다. 대완 서쪽은 모두 저마다 멀다 여기고 아직 교만하고 함부로 하며, 편안하여 아직 복종시켜 예로서 얽어 묶어 부릴 수 없었다. 오손 서쪽으로부터 안식에 이르기 까지는 흉노에 가깝기 때문에 흉노가 월지를 힘들게 하였으므로 흉노의 사신이 선우의 편지를 지니고 가면 곧 나라마다 전하여 음식을 보내고, 감히 머물게 하고 괴롭히지 못하였다. 한의 사신이 이르면 폐백을 내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지 못하였고, 가축을 사지 않으면 타는데 쓸 수 없었다. 그러한 까닭은 한은 멀고, 한은 재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시장에서 사야 하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그러한 까닭은 흉노를 한의 사신보다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완의 좌우에는 포도를 가지고 술을 만드는데 부자들은 술을 저장하여 둔 것이 만여 석에 이르며, 오랜 것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썩지 않는다.
俗嗜酒,馬嗜苜蓿。漢使取其實來,於是天子始種苜蓿、蒲陶肥饒地。及天馬多,外國使來眾,則離宮別觀旁盡種蒲萄、苜蓿極望。自大宛以西至安息,國雖頗異言,然大同俗,相知言。其人皆深眼,多鬚髯,善市賈,爭分銖。俗貴女子,女子所言而丈夫乃決正。其地皆無絲漆,不知鑄錢器。[一]及漢使亡卒降,教鑄作他兵器。得漢黃白金,輒以為器,不用為幣。
풍속에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말은 목숙을 좋아하였다. 한의 사신이 그 씨를 취해 오니 이에 천자 처음으로 목숙과 포도를 비옥한 당에 심었다. 천마가 많이 들어오고 외국의 사신이 많이 오면서 이궁의 별관 옆에 모두 포도와 목숙을 심어 끝이 없었다. 대완 서쪽으로부터 안식에 이르기까지는 나라마다 비록 말이 조금 달랐으나 풍속은 크게 같고 서로 말을 알았다. 그 사람들은 모두 눈이 깊고 수염이 많으며 장사를 잘하고 아주 작은 무게를 나누는 것으로 다투었다. 풍속에 여자를 귀하게 여기고 여자가 말한 대로 남자가 이에 결정하였다. 그 땅은 모두 비단과 옻칠이 없으며 주전기를 알지 못하였다. 한의 사신을 따라갔다가 도망한 군졸이 항복하여 무기와 그릇을 주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의 황금과 은을 얻으면 문득 그릇을 만들고 돈으로 쓰지는 않았다.
[一] 集解徐廣曰:「多作『錢』字,又或作『鐵』字。」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많이 ‘錢’를 쓰고 또는 혹 ‘鐵’자를 쓴다.” 했다.
而漢使者往既多,其少從率多進熟於天子,[一]言曰:「宛有善馬在貳師城,匿不肯與漢使。」天子既好宛馬,聞之甘心,使壯士車令等持千金及金馬以請宛王貳師城善馬。宛國饒漢物,相與謀曰:「漢去我遠,而鹽水中數敗,[二]出其北有胡寇,出其南乏水草。又且往往而絕邑,乏食者多。漢使數百人為輩來,而常乏食,死者過半,是安能致大軍乎?無柰我何。且貳師馬,宛寶馬也。」遂不肯予漢使。漢使怒,妄言,[三]椎金馬而去。宛貴人怒曰:「漢使至輕我!」遣漢使去,令其東邊郁成遮攻殺漢使,取其財物。於是天子大怒。諸嘗使宛姚定漢等言宛兵弱,誠以漢兵不過三千人,彊弩射之,即盡虜破宛矣。天子已嘗使浞野侯攻樓蘭,以七百騎先至,虜其王,以定漢等言為然,而欲侯寵姬李氏,拜李廣利為貳師將軍,發屬國六千騎,及郡國惡少年數萬人,以往伐宛。期至貳師城取善馬,故號「貳師將軍」。趙始成為軍正,故浩侯王恢使導軍,[四]而李哆[五]為校尉,制軍事。是歲太初元年也。而關東蝗大起,蜚西至敦煌。
한의 사신을 많이 보내자 그 따르던 젊은이들이 천자에게 나아가는 것이 익숙해지자 말하기를 “대완의 좋은 말이 이사성에 있는데 숨기고서 한의 사신에게 즐겨 주지 않습니다.” 했다. 천자가 그것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장사 거령 등으로 하여금 千金과 金馬을 가지고 대완의 왕에게 이사성의 좋은 말을 청하였다. 대완국이 한의 물건이 넉넉하니 서로 함께 모의하며 말하기를 “한은 우리와 떨어짐이 멀고, 염수가 가운데 있어 여러 번 무너졌고, 그 북족을 나가면 흉노가 도적질하고, 그 남쪽으로 나가면 물과 풀이 부족하다. 또한 자주 마을이 끊어져서 식량이 부족함이 많다. 한의 사신 수 백 명이 무리가 되어 온다해도 항상 먹을 것이 부족하여 죽는 자가 반을 넘으니 이에 어찌 대군이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이사성의 말은 대완의 보내로운 말이다.” 했다. 마침내 한의 사신에게 (말을)기꺼이 주지 않았다. 한의 사신이 노하여 망녕된 말을 하고는 금마를 몽치로 치고 갔다. 대완의 귀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한의 사신이 우리를 지극히 가볍게 여기는 구나!”하고는 한의 사신을 쫓아가 그 동쪽 변경인 욱성에서 한의 사신을 막고 공격하여 죽이고 그 재물을 취하게 하였다. 이에 천자가 크게 노하였다. 일찍이 대완에 사신으로 갔던 요정한 등이 대완의 군대는 약하니 진실로 한의 군대 3천 명 정도로 강한 쇠뇌로 그들을 쏘면 곧 대완을 포로로 잡고 깨트릴 수 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천자가 이미 일찍이 착야후로 하여금 누란을 공격하게 하여 기병 700명으로 먼저 이르러 그 왕을 사로잡았었고, 정한 등의 말이 그러하였으므로 사랑하는 여자 이씨의 일족을 후로 봉하고자하여 이광에게 벼슬하여 이사장군을 삼고 속국의 기병 6천 명과 군국의 나쁜 소년 수만 명을 징발하여 가서 대완을 치게 하였다. 이사성에 이르러 좋은 말을 취할 것을 기약하였으므로 ‘이사장군’이라 불렀다. 조시성을 군정으로 삼고, 옛 호후 왕회로 군대를 인도하게 하고, 이치를 교위로 삼아 군사를 제어하게 하였다. 이 해는 태초 1년이다. 관동에 메뚜기가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날아 돈황에 이르렀다.
[一] 集解漢書音義曰:「少從,不如計也。或云從行之微者也。進熟,美語如成熟者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어린 종이니 계책을 같이 하지 않았다. 혹은 따라 가던 미천한 자이다. ‘進熟’은 말을 아름답게 함이니 성숙과 같은 것이다.” 했다.
[二] 集解服虔曰:「水名,道從外水中[行]。」如淳曰:「道絕遠,無穀草。」 正義孔文祥云:「鹽,鹽澤也。言水廣遠,或致風波,而數敗也。」裴矩西域記云:「在西州高昌縣東,東南去瓜州一千三百里,並沙磧之地,水草難行,四面危,道路不可準記,行人唯以人畜骸骨及駝馬糞為標驗。以其地道路惡,人畜即不約行,曾有人於磧內時聞人喚聲,不見形,亦有歌哭聲,數失人,瞬息之閒不知所在,由此數有死亡。蓋魑魅魍魎也。」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물 이름이니 길은 밖으로부터 물 안으로 간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길이 끊어지고 멀며, 곡식과 풀이 없음이다.” 했다. 【正義】 공문상이 말하기를 “‘鹽 ’은 소금 못이다. 물이 넓고 멀며 혹은 바람과 파도가 이르러 여러 번 무너졌다.” 했다. 배구의 「서역기」에 “서주 고창현 동쪽에 있는데 동남쪽 과주로부터 1300리 떨어져 있으며, 물속에 모래가 많이 쌓인 땅이어서 물과 풀로 가기 어렵고, 사면이 위태로워 도로를 기준하여 기록할 수 없어 행인은 오직 가축의 해골과 낙타와 말의 똥을 징표로 삼는다. 그 당은 도로가 나쁘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이 가는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모래 쌓인 땅에 들어섰을 때 사람이 부른 소리를 들었으나 형상은 보지 못하였으며 도한 노래하고 고하는 소리가 있었고, 자주 사람을 잃어버리는데 순식간에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자주 죽거나 잃어버린다. 아마도는 산속과 물속의 요괴일 것이다.
[三] 集解如淳曰:「罵詈。」
[三]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꾸짖어 욕함이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恢先受封,一年,坐使酒泉矯制,國除。」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왕회는 봉함을 받은지 1년 만에 酒泉에서 임금의 명을 꾸미게 한 죄에 연루되어 나라가 없어졌다.” 했다.
[五] 索隱音尺奢反,又尺者反。
[五] 【索隱】 음은 ‘尺’과 ‘奢’의 反이고, 도 ‘尺’과 ‘者’의 反이다.
貳師將軍軍既西過鹽水,當道小國恐,各堅城守,不肯給食。攻之不能下。下者得食,不下者數日則去。比至郁成,士至者不過數千,皆飢罷。攻郁成,郁成大破之,所殺傷甚眾。貳師將軍與哆、始成等計:「至郁成尚不能舉,況至其王都乎?」引兵而還。往來二歲。還至敦煌,士不過什一二。使使上書言:「道遠多乏食;且士卒不患戰,患飢。人少,不足以拔宛。願且罷兵,益發而復往。」天子聞之,大怒,而使使遮玉門,曰軍有敢入者輒斬之!貳師恐,因留敦煌。
이사장군의 군대가 서쪽으로 염수를 지나니 길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성을 굳게 성을 지키고, 기쁘게 음식을 공급하지 않았다.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떨어뜨리지 못하였다. 떨어뜨린 성에서는 음식을 얻고, 떨어뜨리지 못한 성에서는 여러 날이 지나면 떠났다. 욱성에 이르렀을 때 군사로 이른 자가 수천에 지나지 않았는데 모두 주리고 기진하였다. 욱성을 공격하였으나 욱성에 크게 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다친 자가 매우 많았다. 이사장군이 이치, 조시성 등과 계책을 세우기를 “욱성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왕도에 이르러서이겠는가?” 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가고 온 것이 2년이었다. 돌아와 돈황에 이르니 군사가 열중에 한 둘에 지나지 않았다. 사자를 시켜 글을 올려 말하기를 “길이 멀고 먹을 것이 많이 결핍하고, 또 사졸이 싸움을 근심하지 않고, 주림을 근심합니다. 사람이 적어 대완을 뽑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군대를 그만 두었다가 더욱 많이 징발하여 다시 가기를 원합니다.” 했다. 천자가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로 하여금 궁궐 문을 닫게 하고는 말하기를 ‘군대가 감히 들어오게 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머리를 벨 것이다!’하니 이사장군이 두려워 돈황에 머물렀다.
其夏,漢亡浞野之兵二萬餘於匈奴。[一]公卿及議者皆願罷擊宛軍,專力攻胡。天子已業誅宛,宛小國而不能下,則大夏之屬輕漢,而宛善馬絕不來,烏孫、侖頭易苦漢使矣,[二]為外國笑。乃案言伐宛尤不便者鄧光等,赦囚徒材官,益發惡少年及邊騎,歲餘而出敦煌者六萬人,負私從者不與。牛十萬,馬三萬餘匹,驢騾橐它以萬數。多齎糧,兵弩甚設,天下騷動,傳相奉伐宛,凡五十餘校尉。宛王城中無井,皆汲城外流水,於是乃遣水工徙其城下水空以空其城。[三]益發戍甲卒十八萬,酒泉、張掖北,置居延、休屠以衛酒泉,[四]而發天下七科適,[五]及載糒給貳師。轉車人徒相連屬至敦煌。而拜習馬者二人為執驅校尉,備破宛擇取其善馬云。
그 해 여름 한이 흉노에게 착야후의 군대 2만여 명을 잃었다. 공경과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대완을 치는 군대를 그만 두고 흉노를 치는데 힘을 다할 것을 원하였다. 천자가 이미 대완을 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대완처럼 작은 나라를 떨어뜨리지 못하면 곧 대하의 등속들이 한을 가벼이 여기고, 대완의 좋은 말도 끊어져 오지 않을 것이고, 오손, 윤두 등이 한의 사신을 쉽게 괴롭히게 되어 외국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여겼다. 이에 대완을 정벌하는 것이 매우 불편할 것이라 말한 등광 등과 사면한 죄수의 무리로 보병을 편성하고 사나운 소년과 변경의 기병을 더욱 징발하니 일 년여 만에 돈황을 나간 자가 6만여 명이었고, 지고 개인적으로 따르는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소 10만, 말 3만여 필, 당나귀, 노새, 낙타 만여 마리였다. 식량을 많이 싣고, 병기와 활을 매우 잘 설치하니 천하가 요동치고 대완을 치는 교지를 서로 전하여 받드니 모두 50여 교위였다. 대완의 왕성 안에는 우물이 없어 모두 성 밖의 흐르는 물을 길러 왔다. 이에 물 기술자를 보내 그 성 아래 물을 옮겨 비우는 것으로서 그 성에 물이 없게 하였다. 더욱 변방을 지키던 갑졸 18만 명을 징발하여 주천, 장액 북쪽으로 옮기고, 거연, 휴도를 두는 것으로서 주천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천하의 7가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징발하고 마른 식량을 갖추어 실어 이사장군에게 주었다. 수레를 굴리고, 사람의 무리가 연속하여 서로 연속하여 돈황에 이르렀다. 말을 익힌 자 두 명에게 벼슬을 주어 집구교위로 삼고 대완을 깨트린 뒤 그 좋은 말을 취하는 것에 대비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太初二年,趙破奴為浚稽將軍,二萬騎擊匈奴,不還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태초 2년 조파노가 준계장군이 되어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를 쳤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했다.
[二] 集解晉灼曰:「易,輕也。」
[二]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易’은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空,一作『穴』。蓋以水蕩敗其城也。言『空』者,令城中渴乏。」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空’은 한편으로 ‘穴’이라 쓴다. 대개 물을 흩트리는 것으로 그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空’이라고 말한 것은 성 안으로 하여금 물이 마르게 하는 것이다.” 했다.
[四] 集解如淳曰:「立二縣以衛邊也。或曰置二部都尉,以衛酒泉。」
[四]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두 현을 세우는 것으로서 변경을 지키는 것이다. 혹은 2부도위를 두는 것으로서 주천을 지키려 한 것이다.” 했다.
[五] 正義音謫。張晏云:「吏有罪一,亡命二,贅婿三,賈人四,故有市籍五,父母有市籍六,大父母有籍七:凡七科。武帝天漢四年,發天下七科謫出朔方也。」
[五] 【正義】 음은 ‘謫(귀양갈 적)’이다. 장안이 말하기를 “관리로 죄를 지음이 하나이고, 도망치는 것이 둘이고, 노역을 대신하는 데릴사위가 셋이고, 장사치가 넷이고, 옛 장사치로 호적된 자가 다섯이고, 부모가 시장의 명부에 있는 서이 여섯이고, 대부모가 호적 된 자가 일곱이니 모두 칠과이다. 무제 천한 4년 천하의 7과에 해당하는 자들을 징발하여 삭방을 나갔다.” 했다.
於是貳師後復行,兵多,而所至小國莫不迎,出食給軍。至侖頭,侖頭不下,攻數日,屠之。自此而西,平行至宛城,漢兵到者三萬人。宛兵迎擊漢兵,漢兵射敗之,宛走入葆乘其城。貳師兵欲行攻郁成,恐留行而令宛益生詐,乃先至宛,決其水源,移之,則宛固已憂困。圍其城,攻之四十餘日,其外城壞,虜宛貴人勇將煎靡。宛大恐,走入中城。宛貴人相與謀曰:「漢所為攻宛,以王毋寡匿善馬而殺漢使。今殺王毋寡而出善馬,漢兵宜解;即不解,乃力戰而死,未晚也。」宛貴人皆以為然,共殺其王毋寡,持其頭遣貴人使貳師,約曰:「漢毋攻我。我盡出善馬,恣所取,而給漢軍食。即不聽,我盡殺善馬,而康居之救且至。至,我居內,康居居外,與漢軍戰。漢軍熟計之,何從?」是時康居候視漢兵,漢兵尚盛,不敢進。貳師與趙始成、李哆等計:「聞宛城中新得秦人,知穿井,而其內食尚多。所為來,誅首惡者毋寡。毋寡頭已至,如此而不許解兵,則堅守,而康居候漢罷而來救宛,破漢軍必矣。」軍吏皆以為然,許宛之約。宛乃出其善馬,令漢自擇之,而多出食食給漢軍。漢軍取其善馬數十匹。中馬以下牡牝三千餘匹,而立宛貴人之故待遇漢使善者名昧蔡[一]以為宛王,與盟而罷兵。終不得入中城。乃罷而引歸。初,貳師起敦煌西,以為人多,道上國不能食,乃分為數軍,從南北道。校尉王申生、故鴻臚壺充國等千餘人,別到郁成。郁成城守,不肯給食其軍。王申生去大軍二百里,(偵)[偩]而輕之,責郁成。郁成食不肯出,窺知申生軍日少,晨用三千人攻,戮殺申生等,軍破,數人脫亡,走貳師。貳師令搜粟都尉上官桀往攻破郁成。郁成王亡走康居,桀追至康居。康居聞漢已破宛,乃出郁成王予桀,桀令四騎士縛守詣大將軍。[一]四人相謂曰:「郁成王漢國所毒,今生將去,卒失大事。」欲殺,莫敢先擊。上邽騎士趙弟最少,拔劍擊之,斬郁成王,齎頭。弟、桀等逐及大將軍。
이에 이사장군이 뒤따라 다시 갔는데 군대가 많아 이르는 곳의 작은 나라들이 맞지 않음이 없었으며 식량을 내어 군대에게 주었다. 윤두에 이르렀는데 윤두가 떨어지지 않아 여러 날 공격하여 죽였다. 이로부터 서쪽으로 편안하게 가서 대완의 성에 이르렀는데 한의 군대로 이른 자가 3만 명이었다. 대완의 군대가 한의 군대를 맞아 치니 한의 군대가 활을 쏘아 무너뜨렸다. 대완이 달아나 성에 들어가 지키며 기회를 엿보았다. 이사장군의 군대가 욱성에 가 공격하고자하다가 행군이 늦어지면 대완으로 하여금 더욱 속임을 낼 것을 걱정하여 이에 먼전 대완에 이르러 그 물의 근원을 끊고 옮기자 대완이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40여일만에 그 외성이 무너지고 대왕의 귀한 사람으로 용맹한 장군인 전비를 포로로 잡았다. 대완이 크게 두려워하여 중성으로 달아나 들어갔다. 대완의 貴人들이 서로 모의하여 말하기를 “한이 대완을 공격하는 것은 왕 무과가 좋은 말을 숨기고 한의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지금 왕 무과를 죽이고 좋은 말을 내어주면 한의 군대는 마땅히 포위를 풀 것이다. 풀지 않는다면 힘서 싸워서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했다. 대완의 귀인들이 모ㅜ 그렇다 여기고 함께 그 왕 무과를 죽이고 귀인이 사신으로 그 머리를 가지고 이사장군에게 보내 약속하여 말하기를 “한은 우리를 공격하지 마시오. 내가 좋은 말을 모두 내어 멋대로 가지게 하고, 한의 군대에게 음식을 줄 것입니다. 곧 들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좋은 말을 모두 죽일 것이고, 강거가 구원하러 또한 이를 것입니다. (강거가)이르면 우리는 안에 있고, 강거는 밖에 있으면서 한의 군대와 싸울 것입니다. 한의 군대는 잘 생각하십시오. 어느 것을 따르겠습니까? 했다. 이 때 강거의 후가 한의 군대를 보니 한의 군대가 오히려 성대하니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사장군과 조시성, 이치 등이 계획하기를 “대완의 성 안에 새롭게 진의 사람을 얻어 우물을 뚫을 줄 알고 그 안의 식량이 아직 많습니다. 우리가 오게 된 것은 가장 악한 자인 무과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무과의 머리가 이미 이르렀고, 이 같음에도 군대 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곧 굳게 지킬 것이고, 강거의 후가 한이 피로해지면 와서 대완을 구원할 것이니 한의 군대가 깨트려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했다. 군리들이 모두 그러하다 여기니 대완의 약속을 허락하였다. 대완이 이에 좋은 말을 내어주고 한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택하게 하고, 음식물을 많이 내어 한의 군대가 먹게 했다. 한의 군대가 그 좋은 말 수십 필을 취하였다. 중간 말 이하는 수컷과 암컷 3천여 필로 하고, 대완의 귀인 중에 옛 날 한의 사신을 대우하기를 잘하던 매체를 세워 대완의 왕으로 삼고 함께 맹약한 후 군대를 거두었다. 마침내 중성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에 그만두고 이끌고 돌아왔다.
[一] 索隱本大宛將也。上音末,下音先葛反。
[一] 【索隱】 본래 대완의 장군이었다. 의는 음이 ‘末’이고, 아래는 음이 ‘先’과 ‘葛’의 反이다.
처음 이사장군이 돈황 서쪽에서 일어났을 때는 사람이 많아 길 위에 있는 나라들이 식량을 감당할 수 없다 여겨 이에 몇 개의 군대로 나누어 남북의 길을 따랐다. 교위 왕신생, 전 홍로 호충국 등 천여 명은 따로 욱성에 이르렀다. 욱성은 성을 지키고 즐겨 그 군대에게 식량을 주지 않았다. 왕신생은 대군과 200리 거리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그들을 가벼이 여기고 욱성을 질책하였다. 욱성은 식량을 즐겨 내지 않고 왕신생의 군대가 날로 줄어들고 있는 것을 엿보아 알고는 새벽에 삼천 명을 써서 공격하여 왕신생 등은 죽이고 군대를 깨트리니 몇 사람만이 벗어나 도망하여 이사장군에게 달아났다. 이사장군이 수율도위 상관걸로 하여금 가서 욱성을 공격하여 깨트리게 하였다. 욱성 왕이 도망하여 강거로 달아났다. 상관걸이 추격하여 강거에 이르렀다. 강거가 한이 이미 대완을 깨트렸다는 것을 듣고 이에 욱성 왕을 내어 상관걸에게 주니 상관걸이 네 명의 기마병을 시켜 (욱성 왕)을 묶고 지키며 대장군에게 나아가게 하였다. 네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욱성 왕은 한 나라에 독이 되는데 지금 살려서 데려가다가 갑자기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하고는 죽이려하였으나 감히 먼저 치지 못하였다. 상규기사 조제는 가장 어렸는데 검을 뽑아 치고는 욱성 왕의 머리를 베어 머리를 가지고 갔다. 조제, 상관걸 등이 마침내 대장군에게 이르럿다.
[一] 集解如淳曰:「時多別將,故謂貳師為大將軍。」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당시 별장이 많아 이사를 대장군이라 불렀다.” 했다.
初,貳師後行,天子使使告烏孫,大發兵并力擊宛。烏孫發二千騎往,持兩端,不肯前。貳師將軍之東,諸所過小國聞宛破,皆使其子弟從軍入獻,見天子,因以為質焉。貳師之伐宛也,而軍正趙始成力戰,功最多;及上官桀敢深入,李哆為謀計,軍入玉門者萬餘人,軍馬千餘匹。貳師後行,軍非乏食,戰死不能多,而將吏貪,多不愛士卒,侵牟之,以此物故眾。
처음 이사의 두 번째 원정에서 천자가 시신을 시켜 오손에게 크게 군대를 일으켜 힘을 합하여 대완을 치라고 알렸다. 오손이 3천의 기병을 일으켜 갔으나 두 끝을 잡고 즐겨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이사장군이 동쪽으로 가는데 지나는 곳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대완이 깨트려짐을 듣고 모두 그 자제로 하여금 군대를 따라 들어가 공물을 바치며 천자를 뵙게 하고, 인질이 되게 하였다. 이사의 대완 정벌은 군정 조시성이 힘써 싸운 공이 가장 많았다. 상관걸이 과감하게 깊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치가 꾀와 계획을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옥문관을 들어온 군대는 만여 명과 군마 천여 필이었다. 이사의 두 번째 원정은 군대의 식량이 부족하지 않아 싸우다 죽은 이가 많을 수 없었지만 장수와 관리들이 탐욕스러워 사졸을 많이 아끼지 않고 빠앗으니 이 때문에 죽은 이가 많았다.
天子為萬里而伐宛,不錄過,封廣利為海西侯。又封身斬郁成王者騎士趙弟為新畤侯。軍正趙始成為光祿大夫,上官桀為少府,李哆為上黨太守。軍官吏為九卿者三人,諸侯相、郡守、二千石者百餘人,千石以下千餘人。奮行者官過其望,[一]以適過行者皆絀其勞。[二]士卒賜直四萬金。伐宛再反,凡四歲而得罷焉。
천자가 만리에 걸쳐 대완을 정벌하였으므로 허물을 기록하지 않고 이광리를 봉하여 해서후라 하였다. 또 직접 욱성 왕의 목을 벤 기마병 조제를 신치후에 봉하엿다. 군정 조시성은 광록대부로 삼고, 상관걸은 소부로 삼으며, 이치는 상당태수로 삼았다. 軍官과 吏로 9경이 된 자가 3명이고, 제후의 재상, 군수 2천석의 녹을 받은 자가 100여 명, 천석 이하 녹을 받은 이가 천여 명이었다. 스스로 즐겁게 간자는 관직이 그 바라는 것보다 뫂았고, 허물을 짓고 간자는 모두 그 수고에 미치지 못하였다. 사족들에게는 바로 4만금을 내렸다. 대완을 정벌하고 다시 돌아오는데 모두 4년이 걸리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奮,迅。自樂入行者。」
[一] 【集解】 「한서음의」에 “‘奮’은 빠름이다. 스스로 즐겁게 들어가 간자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奮行者及以適行者,雖俱有功勞,今行賞計其前有罪而減其賜,故曰『絀其勞』也。絀,抑退也。此本以適行,故功勞不足重,所以絀降之,不得與奮行者齊賞之。」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스스로 들어 간자와 허물을 지어 간 자가 비록 모두 공로가 있었으나 지금 논공행상에 앞서 죄가 있으면 그 내림을 감하였다. 그러므로 ‘絀其勞(그 공로에 미치지 못하였다.)’ 한 것이다. ‘絀(꿰맬 출)’은 눌러 무리치는 것이다. 이는 본래 허물을 지어 간자는 공로를 무겁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리치고 낮추어 자발적으로 간자와 상을 가지런하게(같게) 줄 수 없었던 것이다.” 했다.
漢已伐宛,立昧蔡為宛王而去。歲餘,宛貴人以為昧蔡善諛,使我國遇屠,乃相與殺昧蔡,立毋寡昆弟曰蟬封為宛王,而遣其子入質於漢。漢因使使賂賜以鎮撫之。
한이 대완을 정벌한 후 매채를 세워 대완의 왕으로 삼고 갔다. 몇 년 정도 지난 후 대완의 귀인이 매채가 아첨을 잘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죽음을 만나게 하였다 여겨 이에 서로 함께 매채를 죽이고 무과의 형제인 선봉을 세워 대완의 왕으로 삼고, 그 아들을 한에 들여보내 인질이 되게 했다. 한이 사신을 시켜 재물을 내리고 그들을 진무하였다.
而漢發使十餘輩至宛西諸外國,求奇物,因風覽以伐宛之威德。而敦煌置[一]酒泉都尉;[二]西至鹽水,往往有亭。而侖頭有田卒數百人,因置使者護田積粟,以給使外國者。
한에서는 10여 무리를 사신으로 출발시켜 대완 서쪽의 여러 외국에 이르게 하고 기이한 물건을 구하게 하고, 대완을 정벌한 위엄과 덕을 소문내어 보게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一本無『置』字。」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어떤 본에는 ‘置’자가 없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一云『置都尉』。又云敦煌有淵泉縣,或者『酒』字當為『淵』字。」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도위를 두었다.’ 하고, 또 ‘돈황에 연천현이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酒’자는 마땅히 ‘淵’자가 되어야 한다.” 했다.
太史公曰:禹本紀言「河出崑崙。崑崙其高二千五百餘里,日月所相避隱為光明也。其上有醴泉、瑤池」。今自張騫使大夏之後也,窮河源,惡睹本紀所謂崑崙者乎?[一]故言九州山川,尚書近之矣。至禹本紀、山海經所有怪物,余不敢言之也。[二]
태사공이 말하기를 “「우본기에 말하기를 ‘하는 곤륜산에서 나온다. 곤륜산은 그 높이가 2천5백여 리이고, 해와 달이 서로 피하고 숨어 빛나고 밝아지는 곳이다. 그 위에 예천, 요지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 장건이 대하에 사신을 간 후에 하의 근원을 궁구하였으니 「우본기」에서 말한 곤륜산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가? 그러므로 9주의 산천을 말한 것은 『상서』가 사실에 가깝다. 「우본기」와 『산해경』에서 괴이한 물건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말할 수 없다.” 했다.
[一] 集解鄧展曰:「漢以窮河源,於何見崑崙乎?尚書曰『導河積石』,是為河源出於積石,積石在金城河關,不言出於崑崙也。」 索隱惡睹夫謂昆侖者乎。惡音烏。烏,於何也。睹,見也。言張騫窮河源,至大夏、于窴,於何而見崑崙為河所出?謂禹本紀及山海經為虛妄也。然案山海經「河出崑崙東北隅」。西域傳云「南出積石山為中國河」。積石本非河之發源,猶尚書「導洛自熊耳」,然其實出於冢嶺山,乃東經熊耳。今推此義,河亦然矣。則河源本崑崙而潛流至于闐,又東流至積石始入中國,則山海經及禹貢各互舉耳。
[一] 【集解】 등전이 말하기를 “한이 하의 근원을 하의 근원을 궁구하였는데 어디에서 곤륜을 보았는가? 『상서』에 ‘하를 적석에서 인도하였다.’하였으니 이는 하의 근원이 적석에서 나온 것이 되고, 적석은 금성 하관에 있으니 곤륜에서 나온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했다. 【索隱】 ‘惡睹夫謂昆侖者乎(대저 곤륜이라 말한 것을 어디에서 보았는가?)’는 ‘惡’의 음은 ‘烏’이다. ‘烏’는 어디에서 이다. ‘睹’는 보는 것이다. 장건이 하의 근원을 궁구하고 대하와 우전에 이르렀는데 어디에서 곤륜이 하가 나오는 곳이 됨을 보았는가? 「우본기」와 『산해경』에서 말한 것은 허망함이 된다. 그러난 『산해경』을 살펴보면 “하는 곤륜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나온다.”했다. 「서역전」에 “남쪽으로 적석산에서 나와 중국의 하가 된다.”했으니 적석은 본래 하의 발원이 아니고 오히려 『상서』의 「導洛自熊耳(낙수를 인도하기를 웅이에서 부터한다.) 라 하였으나 그 실제는 총령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웅이를 지나갔을 뿐이다. 지금 이 뜻을 미루면 하가 또한 그러하다. 곧 하의 근원은 본래 곤륜이었는데 숨어 흘러 우전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흘러 적석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에 들어가니 곧 『산해경』과 『우공』이 각각 서로 들었을 뿐이다.
[二] 索隱余敢言也。案:漢書作「所有放哉」。如淳云「放蕩迂闊,言不可信也」。余敢言也,亦謂山海經難可信耳。而荀悅作「效」,失之素矣。
[二] 【索隱】 내가 막히 말한다. 살펴보니 『한서』에는 “所有放哉”라 쓰여 있는데 여순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리에 어두워 말을 믿을 수 없다.” 했다. “余敢言”은 또한 『산해경』도 믿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순열은 ‘效’라 썼는데 그 옳음을 잃었다.
【索隱述贊】 大宛之跡,元因博望。始究河源,旋窺海上。條枝西入,天馬內向。蔥嶺無塵,鹽池息浪。曠哉絕域,往往亭障。
【索隱述贊】 대완의 자취는 원래 박망후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하의 근원을 궁구하면서 돌아 바다 위를 엿보았다. 조지 서쪽으로 들어가니 천마는 안을 향하고, 총령은 티끌 없고 염지의 물결은 고요하다. 넓구나! 멀리 떨어진 지역이여 거듭 초소를 두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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