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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

제111회 등사재(등애)는 지혜로 강백약(강유)을 패하게 하고, 제갈탄은 의리로 사마소를 토벌하다.

by 최인표 2022. 3. 10.

第一一一回鄧士載智敗姜伯約諸葛誕義討司馬昭

111회 등사재(등애)는 지혜로 강백약(강유)을 패하게 하고, 제갈탄은 의리로 사마소를 토벌하다.

 

卻說姜維退兵屯於鍾堤魏兵屯於狄道城外王經迎接陳泰鄧艾入城拜謝解圍之事設宴相待大賞三軍泰將鄧艾之功申奏魏主曹髦髦封艾為安西將軍假節領護東羌校尉同陳泰屯兵於雍涼等處鄧艾上表謝恩畢陳泰設宴與鄧艾拜賀曰:「姜維夜遁其力已竭不敢再出矣。」艾笑曰:「吾料蜀兵其必出有五。」泰問其故艾曰:「蜀兵雖退終有乘勝之勢吾兵終有弱敗之實其必出一也蜀兵皆是孔明教演精銳之兵容易調遣吾將不時更換軍又訓練不熟其必出二也蜀人多以船行吾軍皆是旱地勞逸不同其必出三也狄道隴西南安祁山四處皆是守戰之地蜀人或聲東擊西指南攻北吾兵必須分頭把守蜀兵合為一處而來以一分當我四分其必出四也若蜀兵自南安隴西則可取羌人之穀為食若出祁山則有麥可就食其必出五也。」

각설하고 강유는 군대를 물려 종제에 주둔하였고, 위나라 군대는 적도성 밖에 주둔하였다. 왕경이 진태, 등애를 맞아 성에 들어 가 포위를 풀어 준 일에 대해 절하며 감사하고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고 크게 삼군에 상을 주었다. 진태가 등애의 공을 위나라 임금 조모에게 아뢰었다. 조모가 등애를 봉하여 안서장군가절영호동강교위로 삼고, 진태와 함께 군대를 옹, 양 등지에 주둔하게 하였다. 등애가 표를 올려 사은하기를 마치니 진태가 연회를 열어주며 등애에게 축하하여 말하기를 강유가 밤에 도주하여 그 힘이 이미 다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등애가 웃으며 말하기를 촉의 군대는 반드시 나올 것인데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했다. 진태가 그 이유를 물었다. 등애가 말하기를 촉의 군대가 비록 물러났으나 마지막까지 승리를 탄 형세가 있고, 우리 군대는 마지막에 약해 무너진 실정이 있으니 반드시 나오게 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촉의 군대는 모두 제갈공명이 훈련시킨 정예의 군대로 군대의 배치가 쉬우나 우리는 수시로 바뀌고, 군대가 또한 훈련이 익숙하지 않으니 반드시 나오는 둘째 이유입니다. 촉 사람들은 많이 배로 다니는데 우리 군대는 모두 마른 땅이어서(육지로 다녀)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같지 않으니 반드시 나오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적도, 옹서, 남안, 기산 네 곳은 모두 지키는 땅이니 촉 사람들이 혹 동쪽에서 소리 지르고 서쪽을 치거나, 남쪽을 가리키고 북쪽을 공격할 것이니 우리 군대는 반드시 머리를 나누어 지켜야 합니다. 촉의 군대는 합하여 한 곳으로 와 하나의 나눔으로서 네 나눔을 감당할 수 있으니 반드시 나오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만약 촉의 군대가 남안, 농서에서 오면 강족 사람들의 곡식을 취하여 먹을 수 있고, 만약 기산에서 나오면 곧 보리가 있어 먹을 수 있으니 반드시 나오는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했다.

 

陳泰歎服曰:「公料敵如神蜀兵何足慮哉!」於是陳泰與鄧艾結為忘年之交艾遂將雍涼等處之兵每日操練各處隘口皆立營寨以防不測

진태가 탄복해 말하기를 공이 적을 헤아리는 것이 신과 같으니 촉의 군대를 어찌 걱정하리오!”했다. 이에 진태와 등애가 맺어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 친구가 되었다. 등애가 마침내 옹, 양 등지의 군대를 거느리고 매일 훈련하고, 각곳의 요충지에 모두 영채를 세우는 것으로서 갑작스런 일을 방비하였다.

 

卻說姜維在鍾堤大設筵宴會集諸將商議伐魏之事令史樊建諫曰:「將軍屢出未獲全勝今日洮西之戰魏人既服威名何故又欲出也萬一不利前功盡棄。」維曰:「汝等只知魏國地寬人廣急不可得卻不知攻魏者有五可勝。」眾問之維答曰:「彼洮西一敗挫盡銳氣吾兵雖退不曾損折今若進兵一可勝也吾兵船載而進不致勞困彼兵從旱地來迎二可勝也吾兵久經訓練之眾彼皆鳥合之徒不曾有法度三可勝也吾兵自出祁山抄掠秋穀為食四可勝也彼兵雖各守備軍刀分開吾兵一處而去彼安能救五可勝也不在此時伐魏更待何時耶?」夏侯霸曰:「艾年雖幼而機謀深遠近封為安西將軍之職必於各處準備非同往日矣。」維厲聲曰:「吾何畏彼哉公等休長他人銳氣滅自己威風吾意已決必先取隴西。」眾不敢諫維自領前部令眾將隨後而進於是蜀兵盡離鍾提殺奔祁山來

각설하고 강유는 종제에서 크게 잔치를 열고 여러 장수를 모아 위나라를 정벌하는 일을 상의하였다. 영사 번건이 간하여 말하기를 장군께서 여러 번 나갔으나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오는 조서의 싸움으로 위나라 사람들이 이미 위엄과 명성을 인정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또 나가려 하십니까? 만일 하나라도 이롭지 않음이 있으면 앞의 공을 모두 버리게 됩니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만 위나라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급히 얻을 수 없다는 것만 알지만 위나라를 공격하면 다섯 가지 이길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했다. 무리들이 그것을 물었다. 강유가 답하기를 그들은 조서에서 한 번 패하여 예기가 모두 꺽여 우리 군대가 비록 물러나도 일찍이 덜거나 꺽이지 않았으니 지금 만약 군대를 진군시킨다면 한 번에 이길 수 있다. 우리군대는 배를 타고 진군하여 수고롭고 곤액 함에 이르지 않았으나 그들의 군대는 육지로 왔으니 두 번 째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군대는 오래 동안 훈련한 무리이고, 그들은 모두 오합지졸로 일찍이 법도가 있지 않으니 세 번째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 군대는 기산에서 나와 가을 곡식을 거두어 먹을 수 있으니 네 번째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각자 지키고 있으나 군대가 나뉘어져 있고, 우리 군대는 한 곳에서 가니 그들이 어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다섯 번째 이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 때 위나라를 정벌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했다. 하후패가 말하기를 등애는 나이가 비록 어리나 꾀가 깊고 원대하고, 최근 안서장군의 관직에 봉해졌으니 반드시 각 곳에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니 지난날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강유가 성난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를 두려워하리오! 공들은 다른 사람의 예기를 높이고 자기의 위풍을 없애려 하시오!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반드시 먼저 농서를 취할 것입니다.”했다. 무리들이 감히 간하지 못하였다. 강유는 스스로 부를 거느리고 여러 장수로 하여금 뒤를 따르게 하여 진군하였다. 이에 촉의 군대가 모두 종제를 떠나 기산으로 쇄도해 갔다.

 

哨馬報說魏兵已先在祁山立下九個寨棚維不信引數騎憑高望之果見祁山九寨勢如長蛇首尾相顧維回顧左右曰:「夏侯霸之言信不誣矣此寨形勢絕妙止吾師諸葛丞相能之今觀鄧艾所為不在吾師之下。」遂回本寨喚諸將曰:「魏人既有準備必知吾來矣吾料鄧艾必在此間汝等可虛張吾旗號據此谷口下寨每日令百餘騎出哨每出哨一回換一番衣甲旗號按青黑五方旗幟更換吾卻提大兵偷出董亭逕襲南安去也。」遂令鮑素屯於祁山谷口維盡率大兵望南安進發

정찰병이 위나라 군대가 먼저 기산에 아홉 개의 영채를 세웠다고 보고하였다. 강유가 믿지 않고 몇 기를 이끌고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과연 기산에 아홉 개의 영채가 보이는데 형세가 긴 뱀과 같아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아보고 있었다. 강유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하후패의 말이 진실로 속임이 없구나. 니 영채의 형세가 절묘하여 나의 스승 제갈공명 승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등애가 한 것을 보니 나의 스승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했다. 마침내 본 영채로 돌아 가 여러 장수를 불러 말하기를 위나라 사람들이 이미 준비가 있으니 반드시 내가 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등애가 이 사이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너희들은 가짜로 나를 상징하는 깃발을 달고 이 골짜기 입구에 영채를 세우고, 매일 백여 기로 하여금 보초를 서게 하라. 매 보초가 한번 나갈 때마다 한 번 갑옷을 갈아입으라. 깃발은 청, , , , 흑색의 오방색으로 깃발을 바꾸라. 나는 대군을 데리고 몰래 동정으로 나가 빠르게 남안을 습격하러 갈 것이다.”했다. 마침내 포소로 하여금 가산의 골짜에게 주둔하게 하였다. 강유는 모든 대군을 거느리고 남안을 향해 출발하였다.

 

卻說鄧艾知蜀兵出祁山早與陳泰下寨準備見蜀兵連日不來搦戰一日五番哨馬出寨或十里或十五里而回艾憑高望畢慌入帳與陳泰曰:「姜維不在此間必取董亭襲南安去了出寨哨馬只是這幾匹更換衣甲往來哨探其馬皆困乏主將必無能者陳將軍可引一軍攻之其寨可破也破了寨柵便引兵襲董亭之路先斷姜維之後吾當先引一軍救南安逕取武城山若先占此山頭姜維必取上邽上邽有一谷名曰段谷地狹山險正好埋伏彼來爭武城山時吾先伏兩軍於段谷破維必矣。」泰曰:「吾守隴西二三十年未嘗如此明察地理公之所言真神算也公可速去吾自攻此處寨柵。」

각설하고 등애는 촉의 군대가 기산을 나왔다는 것을 알고 일찍 진태와 영채를 세우고 준비하였다. 촉의 군대가 날을 이어도 와서 싸움을 걸지 않는 것을 보고 하루에 다섯 번 정찰병을 영채에서 내보내 혹은 십 리, 혹은 십오 리를 갔다가 돌아오게 하였다. 등애가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기를 마치고 황망히 군막에 들어가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가 이 사이에 있지 않으니 반드시 동정을 취하고 남정을 습격하러 갔을 것입니다. 영채를 나오는 정찰병 몇 필(몇 명)이 갑옷을 갈아입고 오가며 정탐하고 있는데 그 말이 모두 피곤하고 주된 장수는 반드시 무능한 자일 것입니다. 진 장군(진태)은 일 군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한다면 그 영채를 깨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영채를 깨트리면 곧 군대를 이끌고 동정의 길을 습격하여 먼저 강유의 뒤를 끊으십시오. 나는 마땅히 먼저 일 군을 이끌고 남안을 구원하고 빠르게 무성산을 취하겠습니다. 만약 먼저 이 산 머리(정상)을 점거한다면 강유는 반드시 상규를 취할(상규로 갈) 것입니다. 상규에는 한 골짜기가 있으니 이름을 단곡이라 하고, 땅이 좁고 산이 험하여 매복하기 좋습니다. 그들이 와서 무성산을 다툴 때 내가 먼저 두 군대를 단곡에 숨기면 반드시 강유를 깨트릴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진태가 말하기를 내가 농서를 지킨 지 이, 삼십년인데 일찍이 이 같이 지리를 밝게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등애)이 말한 바가 참으로 심 같은 계책입니다. (등애)은 속히 가십시오. 나는 이곳의 영채를 공격하겠습니다.”했다.

 

於是鄧艾引軍星夜倍道而行逕到武城山下寨已畢蜀兵未到即令子鄧忠與帳前校尉師綦各引五千兵先去段谷埋伏如此如此而行二人受計而去艾令偃旗息鼓以待蜀兵

이에 등애가 군대를 이끌고 밤새 길을 재촉하여 가 빠르게 무성산에 이르렀다. 영채 세우기를 마쳤는데도 촉의 군대가 이르지 않으니 곧 아들 등충과 장전교위 사기로 하여금 각각 오천의 군대를 이끌고 먼저 단곡에 가서 매복하여 이렇게 저렇게 행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계책을 받고 갔다. 등애는 깃발을 눕히고 북치기를 그치게 한 뒤 촉의 군대를 기다렸다.

 

卻說姜維從董亭望南安而來至武城山前謂夏侯霸曰:「近南安有一山名武城山若先得了可奪南安之勢只恐鄧艾多謀必先提防。」

각설하고 강유는 동정에서 남안을 향해 가 무성산 앞에 이르니 하후패가 일러 말하기를 남안 가까이 한 산이 있는데 이름이 무성산입니다. 만약 먼저 얻는다면 남안을 빼앗을 수 있는 형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등애는 꾀가 많으니 반드시 먼저 방비하고 있을 것입니다.”했다.

 

正疑慮間忽然山上一聲砲響喊聲大震鼓角齊鳴旌旗遍豎皆是魏兵中央風飄起一黃旗大書鄧艾字樣蜀兵大驚山上數處精兵殺下勢不可當前軍大敗維急率中軍人馬去救時魏兵已退維直來武城山下搦鄧艾戰山上魏兵並不下來維令軍士辱罵至晚方欲退軍山上鼓角齊鳴卻又不見魏兵下來維欲上山衝殺山上砲石甚嚴不能得進守至三更欲回山上鼓角又鳴維移兵下山屯紮比及令軍搬運木石方欲豎立為寨山上鼓角又鳴魏兵驟至蜀兵大亂自相踐踏退回舊寨

의심하고 있는 사이에 홀연히 산 위에서 한 소리 포가 울리며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깃발이 두루 세워지는데 모두 위나라 군대였다. 가운데 바람에 펄럭이는 하나의 누른 깃발에는 크게 등애자가 써져 있었다. 촉의 군대가 크게 놀랐다. 산 위에 몇 곳에서 정예 군대가 쇄도해 내려는데 형세가 당할 수 없어 앞의 부대가 크게 패하였다. 강유가 급히 중군을 인솔하여 인마를 구원하러 가려하는데 위나라 군대는 이미 물러난 후였다. 강유가 바로 무성산 아래에 가 등애에게 도전하였으나 산 위의 위나라 군대는 모두 내려오지 않았다. 강유가 군사로 하여금 욕하게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군대를 물리려 하는데 산 위에서 북과 피리가 일제히 울렸다. 그러나 또한 위나라 군대가 내려오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강유가 산에 올라 쳐 죽이려 하였으나 산 위에서 포석이 심하게 쏟아지니 나아갈 수 없었다. 지키다 삼경에 이르러 돌아가려하는데 산 위에서 북과 피리가 또 울리며 위나라 군대가 달려 왔다. 촉의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져 스스로 서로 밟으며 물러나 옛 영채로 돌아갔다.

 

次日姜維令軍士運糧草車仗至武城山穿連排定欲立起寨柵以為屯兵之計是夜二更鄧艾令五百人各執火把分兩路下山放火燒車仗兩兵混殺了一夜營寨又立不成維復引兵退再與夏侯霸商議曰:「南安未得不如先取上邽上邽乃南安屯糧之所若得上邽南安自危矣。」遂留霸屯於武城山維盡引精兵猛將逕取上邽行了一宿將及天明見山勢狹峻道路崎嶇乃問鄉導官曰:「此處何名?」答曰:「段谷。」維大驚曰:「其名不美:『段谷,『斷谷倘有人斷其谷口如之奈何?」

다음날 강유가 군사로 하여금 식량과 말먹이 풀, 수레, 병기를 운반하게 하여 무성산에 이르러 연결하고 배정하고 영채와 목책을 세우는 것으로서 군대를 주둔할 계책으로 삼았다. 이날 밤 이경에 등애는 오백 명으로 하여금 각각 불을 잡게 하고 두 길로 나누어 산을 내려가 수레와 병장기에 불을 놓아 태우게 하였다. 두 군대가 섞여 밤새 싸우니 영채를 또한 세우지 못하였다. 강유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물러나 다시 하후패와 상의해 말하기를 남안을 얻지 못하였으니 먼저 상규를 얻는 것이 낫습니다. 상규는 곧 남안의 식량을 보관한 곳이니 만약 상규를 얻는다면 남안은 저절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했다. 마침내 하후패를 남겨 무성산에 주둔하게 하였다. 강유가 모든 정예군대와 용맹한 장군을 이끌고 빠르게 상규를 취하려 했다. 가다가 하루 밤을 자고 날이 밝으려 할 때 산의 형세를 보니 좁고 험준하고, 길이 험난했다. 이에 향도관에게 물어 말하기를 이 곳의 이름이 무엇인가?”하니 답하여 말하기를 단곡입니다.”했다. 강유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그 이름이 좋지 않다. ‘段谷단곡(골짜기를 끊다.)’이다. 만약 사람이 있다가 그 골짜기 입구를 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했다.

 

正躊躇未決忽報前軍來報:「山後塵頭大起必有伏兵。」維急令退兵師纂鄧忠兩軍殺出維且戰且走前面喊聲大震鄧艾引兵殺到三路夾攻蜀兵大敗幸得夏侯霸引兵殺到魏兵方退救了姜維欲再往祁山霸曰:「祁山寨已被陳泰打破鮑素陣亡全寨人馬皆退回漢中去了。」維不敢取董亭急投山僻小路而回後面鄧艾急追維令諸軍前進自為斷後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고 있다가 홀연히 앞의 군대가 와서 보고해 말하기를 산 뒤에서 먼지가 크게 일어나는데 반드시 복병이 있을 것입니다.”했다. 강유가 급히 군대를 물리게 하는데 사찬, 등충의 두 군대가 쇄도해 나왔다. 강유가 싸우며 달아나는데 앞쪽에서 함성이 크게 진동하며 등애가 군대를 이끌고 쇄도해 와 세 길로 협공하니 촉의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다행히 하후패가 군대를 이끌고 쇄도하니 위나라 군대가 비로소 물러나고 강유를 구원하여 다시 기산으로 가려 하였다. 하후패가 말하기를 기산의 영채가 이미 진태의 공격으로 깨트려져 포소는 죽고, 모든 영채의 인마가 모두 물러나 한중으로 돌아갔습니다.”했다. 강유가 감히 동정을 취하지 못하고 급히 산 후미진 작은 길로 돌아갔다. 뒤 쪽에서 등애가 급히 추격하니 강유가 여러 군사로 하여금 전진하게하고, 자신은 뒤를 끊었다.

 

正行之際忽然山中一軍突出乃魏將陳泰也魏兵一聲喊起將姜維因在核心維人馬困乏左衝右突不能得出寇將軍張嶷聞姜維受困引數百騎殺入重圍維因乘勢殺出嶷被魏兵亂箭射死維得脫重圍復回漢中因感張嶷忠勇沒於王事乃表贈其子孫於是蜀中將士多有陣亡者皆歸罪於姜維維照武侯街亭舊例乃上表自貶為後將軍行大將軍事

행군하고 있을 때 홀연히 산 안에서 일 군이 튀어나왔는데 곧 위나라 장수 진태였다. 위나라 군대가 한 소리 함성을 지르며 강유를 포위하였다. 강유는 인마가 피곤한데도 좌충우돌하였으나 벗어날 수 없었다. 탕구장군 장의는 강유가 곤궁에 빠졌다는 것을 듣고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두터운 포위 안으로 들어가니 강유가 형세를 타고 벗어 날 수 있었다. 장의는 위나라 군대가 어지러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강유가 두터운 포위를 벗어나 다시 한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강유가) 장의의 충성과 용기로 왕사(왕의 일, 국가의 일)에 목숨을 바친 것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표를 올려 그 자손을 증직하였다. 이에 촉의 장수와 군사들이 진에서 죽은 자가 많이 있었는데 모두 죄를 강유에게 돌아갔다. 강유는 무후(제갈공명)의 가정 옛 예(가정 전투에서 패한 일로 스스로 관직을 낮춘 일)에 비추어 표를 올려 스스로 후장군으로 낮추어 대장군의 일을 수행하였다.

 

卻說鄧艾見蜀兵退盡乃與陳泰設宴相賀大賞三軍泰表鄧艾之功司馬昭遣使持節加艾官爵賜印綬並封其子鄧忠為亭侯時魏主曹髦改正元三年為甘露元年司馬昭自為天下兵馬大都督出入常令三千鐵甲驍將前後簇擁以為護衛一應事務不奏朝廷就於相府裁處自此常懷篡逆之心

각설하고 등애는 촉의 군대가 모두 물러난 것을 보고 곧 진태와 연회를 열어 서로 축하하고, 삼군에게 크게 상을 주었다. 진태가 표로 등애의 공을 알리니 사마소가 절을 지닌 사자를 보내 등애의 관작을 올리고 인수를 내리며 아울러 그 아들 등충을 봉하여 정후로 삼았다. 그 때 위나라 임금 조모는 정원 삼년을 고쳐 감로 원년이라 하였다. 사마소는 스스로 천하병마대도독이 되어 출입할 때 항상 삼천 명의 철갑옷을 입은 날랜 장수로 하여금 앞뒤에서 둘러싸는 것으로서 호위하게 하는 한편으로 일을 처리할 때 조정에 아뢰지도 않고, 상부(승상의 개인 관청)에서 처결하였다. 이로부터 항상 찬역(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는)의 마음을 품었다.

 

有一心腹人姓賈名充字公閭及故建威將軍賈逵之子為昭府下長史充語昭曰:「今主公掌握大柄四方人心必然未安且當暗訪然後徐圖大事。」昭曰:「吾正欲如此汝可為我東行只推尉勞出征軍士為名以探消息。」

한 심복의 사람이 있었는데 성은 가이고, 이름은 충이며 자는 공여로 죽은 건위장군 가규의 아들로 사마소 개인 관청 장사가 되었다. 가충이 사마소에게 말하기를 지금 주공이 대병(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사방의 인심이 반드시 안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마땅히 몰래 발핀 후에 천천히 대사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했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내가 바로 이 같이 하고자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동쪽으로 가서 출정했던 군사를 위로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아 소식을 탐지해보시오했다.

 

賈充領命逕到淮南入見鎮東大將軍諸葛誕誕字公休乃瑯琊南陽人即武侯之族弟也向侍於魏因武侯在蜀為相因此不得重用後武侯身亡誕在魏歷重職封高平侯總攝兩淮軍馬當日賈充託名勞軍至淮南見諸葛誕誕設宴待之

가충이 명을 받아 재빨리 회남에 이르러 들어 가 진동대장군 제갈탄을 만났다. 제갈탄의 자는 공휴이니 곧 낭야 남양 사람으로 곧 무후(제갈공명)의 친족 동생이다. 옛날부터 위나라를 섬겼으나 무후(제갈공명)가 촉의 승상이 되었기 때문에 중용되지 못하였다. 후에 무후(제갈공명)가 죽자 제갈탄이 위나라에서 중요한 직책을 거치고 고평후에 봉해져 양회의 군마를 총괄하였다. 그날 가충이 군사를 위로한다는 명분을 핑계로 회남에 이르러 제갈탄을 만난 거시다. 제갈탄이 연회를 열어 대접하였다.

 

酒玉半酣充以言挑誕曰:「近來洛陽諸賢皆以主上懦弱不堪為君司馬大將軍三世輔國功德彌天可以禪代魏統未審鈞意若何?」誕大怒曰:「汝乃賈豫州之子世食魏祿安敢出此亂言!」充謝曰:「某以他人之言告公耳。」誕曰:「朝廷有難吾當以死報之。」

술이 반쯤 취하자 가충이 말로서 제갈탄을 도발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낙양의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주상(임금:조모)이 유약하기 때문에 임금 노릇을 감당하지 못한다. 사마대장군(사마소)은 삼 대에 걸쳐 나라를 도와 공덕이 하늘에 가득하니 선양으로서 위나라의 정통을 대신할만하다. 합니다, 알지 못하지만 공(제갈탄, : 존경을 나타내는 접두어)의 뜻은 어떠합니까?”하니 제갈탄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곧 가예주(가규)의 아들로 대대로 위나라의 녹을 먹었는데 어찌 감히 이런 어지러운 말을 하는가!”했다. 가충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제가 다른 사람의 말을 공에게 알렸을 뿐입니다.”했다. 제갈탄이 말하기를 조정에 어려움이 있다면 나는 마땅히 죽음으로서 갚을 것이다.”했다.

 

充默然次日辭歸見司馬昭細言其事昭大怒曰:「鼠輩安敢如此!」充曰:「誕在淮南深得人心久必為患可速除之。」昭遂暗發密書與揚州刺史樂綝一面遣使齎詔徵誕為司空誕得了詔書己知是賈充告變遂捉來使拷問使者曰:「此事樂綝知之。」誕曰:「他如何得知?」使者曰:「司馬將軍已令人到揚州送密書與樂綝矣。」

가충이 묵묵히 말이 없었다. 다음 날 하직하고 돌아 가 사마소를 만나 그 일을 자세히 말하였다. 사마소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쥐새끼 무리가 어찌 감히 이 같이 하는가!”하니 가충이 말하기를 제갈탄은 회남에 있으면서 깊이 인심을 얻었으니 오래되면 반드시 근심이 될 것이니 속히 제거해야 합니다.”했다. 사마소가 마침내 몰래 밀서를 양주자사 악침에게 주게 하는 한편으로 사신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제갈탄을 불러 사공으로 삼았다. 제갈탄이 조서를 받고는 이미 가충이 변을 고발하였음을 알고는 마침내 온 사신을 잡아 고문하니 사자가 말하기를 이일은 악침이 알고 있습니다.”했다. 제갈탄이 말하기를 그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니 사자가 말하기를 사마장군(사마소)이 이미 사름으로 하여금 밀서를 가지고 양주에 이르러 악침에게 주게 하였습니다.”했다.

 

誕大怒叱左右斬了來使遂起部下兵千人殺奔揚州來將至南門城門已閉吊橋拽起誕在城下叫門城上並無一人回答誕大怒曰:「樂綝匹夫安敢如此!」遂令將士打城手下十餘驍騎下馬渡河飛身上城殺散軍士大開城門於是諸葛誕引兵入城乘風放火殺至綝家綝慌上樓避之誕提劍上樓大喝曰:「汝父樂進昔日受魏國大恩不思報本反欲順司馬昭耶!」

제갈탄이 크게 노하여 좌우에게 소리쳐 온 사신을 베어 죽이게 하고 마침내 부하 군대 천 명을 일으켜 양주로 달려갔다. (양주성)남문에 이르리 성문은 이미 닫혀있고, 조교는 끌어 올려 있었다. 제갈탄이 성 아래서 문을 열라 소리쳤으나 성위에서는 한 사람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탄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악침 필부야 어찌 감히 이 같이 하는가!”하니 마침내 장사들로 하여금 성을 치게 하였다. 부하 십여 명의 날랜 기병이 말에서 내려 강을 건넌 후 몸을 날려 군사를 흩어버리고 성문을 크게 열었다. 이에 제갈탄이 군대를 이끌고 성에 들어 가 바람을 타고 불을 지르고 악침의 집에 이르렀다. 악침이 항망히 누각에 올라 피하였다. 제갈탄이 검을 가지고 누각에 올라 크게 외쳐 말하기를 너희 아버지 악진은 옛날 위나라의 큰 은혜를 받았다.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 갚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마소를 따르려 하는구나!”했다.

 

綝未及回言為誕所殺一面具表數司馬昭之罪使人申奏洛陽一面大聚兩淮屯田戶口十餘萬並揚州新降兵四萬餘人積草屯糧準備進兵又令長史吳綱送子諸葛靚入吳為質求援務要合兵誅討司馬昭

악침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갈탄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사마소의 죄를 표로 갖추어 사람을 시켜 낙양에 아뢰고, 한편으로 크게 양회지역의 둔전호구 십여 만과 양주에서 새로 항복한 군대 사만여 명을 모아 말먹이 풀을 쌓고 식량을 모아 진군을 준비하였다. 또 장사 오강으로 하여금 아들 제갈정을 보내 오나라에 들어 가 인질이 되게 하고 구원을 청하여 반드시 군대를 합해 사마소를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此時東吳丞相孫峻病亡從弟孫綝輔政綝字子通為人強暴殺大司馬滕亂將軍呂據王惇等因此權柄皆歸於綝吳主孫亮雖然聰明無可奈何於是吳綱將諸葛靚至石頭城入拜孫綝綝問其故綱曰:「諸葛誕乃蜀漢諸葛武侯之族弟也向事魏國今見司馬昭欺君罔上廢主弄權欲興師討之而力不及故特來歸降誠恐無憑專送親子諸葛靚為質伏望發兵相助。」

이 때 동오의 승상 손준은 병으로 죽고 종제(사촌 동생) 손침이 정사를 돕고 있었다. 손침의 자는 자통이니 사람됨이 강포하여 대사마 등란, 장군 여거, 왕순 등을 죽였다. 이 때문에 권병(권력)이 악침에데 돌아갔다. 오나라 임금 손량은 비록 총명하나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오강이 제갈정을 데리고 석두성에 이르러 들어 가 손침에게 절하였다. 손침이 그 이유를 물었다. 오강이 말하기를 제갈탄은 곧 촉한 제갈무후(제갈공명)의 족제(친척 동생)인데 지난날 위나라를 섬겼습니다. 지금 사마소가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없이하여 임금을 폐하고 권력을 농단하는 것을 보고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특히 와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의뢰(증빙)가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직 친 아들을 제갈정을 보내 인질로 삼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군대를 일으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綝從其請便遣大將全懌全端為主將于詮為合後朱異唐咨為先鋒文欽為鄉導起兵七萬分三隊而進吳綱回壽春報知諸葛誕誕大喜遂陳兵準備

손침이 그 청을 따라 곧 대장 전역, 전단을 보내 주 장수로 삼고 우전을 합후로 삼고, 주이, 당자를 선봉으로 삼고, 문흠을 향도로 삼아 군대 칠만을 일으켜 세 개 부대로 나누어 진군하게 했다. 오강이 수춘에 돌아 와 제갈탄에게 보고하였다. 제갈탄이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군대 진 치는 것에 대해 준비하였다.

 

卻說諸葛誕表文到洛陽司馬昭見了大怒欲自往討之賈充諫曰:「主公乘父兄之基業恩德未及四海今棄天子而去若一朝有變後悔何及不如奏請太后及天子一同出征可保無虞。」昭喜曰:「此言正合吾意。」遂入奏太后曰:「諸葛誕謀反臣興()文武官僚計議停當請太后同天子御駕親征以繼先帝之遺意。」太后畏懼只得從之次日昭請魏主曹髦起程髦曰:「大將軍都督天下軍馬任從調遣何必朕自行也?」昭曰:「不然昔日武祖縱橫四海文帝明帝有包括字宙之志併吞八荒之心凡遇大敵必須自行陛下正宜追配先君掃清故孽何自畏也?」

각설하고 제갈탄의 표문(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이 낙양에 이르자 사마소가 보고 크게 노하여 직접 가서 토벌하려 하였다. 가충이 간하여 말하기를 주공께서는 부형의 기업을 이어 은혜와 덕망이 사해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지금 천자를 버리고 갔다가 만약 할 아침에 변이 있으면 후회한들 미칠 수 있겠습니까? 태후와 천자에게 아뢰어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는 것이 지킴에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했다. 사마소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말이 바로 나의 뜻에 부합한다.”하고는 마침내 들어 가 태후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제갈탄이 모반하여 신이 문무관료와 계책 의논을 마쳤습니다. 태후께서 천자와 함께 어가(천자의 수레)를 타고 친정하는 것으로서 선제(돌아가신 천자)께서 남긴 뜻을 잇기를 청합니다.”했다. 태후가 두려워하여 다만 따를 뿐이었다. 다음 날 사마소가 위나라 임금 조모에게 출발할 것을 청하였다. 조모가 말하기를 대장군은 천하의 군마를 모두 감독하고, 필요한 인원을 조달하고 파견하는 일을 맡았는데 하필 짐이 직접 가야 합니까?”했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무조(조조)께서는 사해를 종횡하셨고, 문제(조비)와 명제(조예)께서는 우주를 포괄하려는 뜻과 팔황(천하)을 병탄할 뜻을 품어 무릇 큰 적을 만나면 반드시 직접 가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바로 마땅히 돌아가신 임금을 본 받아 옛 재앙을 쓸어 맑게 하셔야지 어찌 스스로 두려워하십니까?”했다.

 

髦畏威權只得從之昭遂下詔盡起兩都之兵二十六萬命鎮南將軍王基為正先鋒安東將軍陳騫為副先鋒監軍石苞為左軍兗州刺史周泰為右軍保護車駕浩浩蕩蕩殺奔淮南而來東吳先鋒朱異引兵迎敵兩軍對圓魏軍中王基出馬朱異來迎戰不三合朱異敗走唐咨出馬戰不三合亦大敗而走王基驅兵掩殺吳兵大敗退五十里下寨報入壽春城中諸葛誕自引本部銳兵會合文欽並二子一文鴦一文虎雄兵數萬來敵司馬昭

조모가 (사마소의)위엄과 권세를 두려워하여 다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사마소가 마침내 조서를 내려 양도(낙양과 허도)의 군사 이십 육만을 일으켜 진남장군 왕기로 하여금 선봉이 되게 하고, 안동장군 진건을 부선봉으로 삼고, 감군 왕포를 좌군으로 삼고, 연주자사 주태를 우군으로 삼아 거가(천자와 태후가 탄 수레)를 호위하게 하여 호호탕탕 회남으로 달려갔다. 동오의 선봉 주이가 군대를 이끌고 적을 맞이하였다. 두 군대가 둥글게 대치하자 위나라 군 안에서 왕기가 말을 타고 나오니 주이가 와서 맞이하였다. 싸운 지 삼합이 되지 않아 주이가 패주하였다. 당자가 말을 타고 나왔는데 씨운 지 삼합이 되지 않아 또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왕기가 군대를 몰라 습격하여 죽이니 오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오십 리를 물러나 영채를 세우고 수춘성 안으로 알리러 들어갔다. 제갈탄이 스스로 본부의 정예 군대를 이끌고 문흠과 두 아들 문앙과 문호를 만나 정예군대 수만을 이끌고 사마소를 대적하러 갔다.

 

正是方見吳兵銳氣墮又看魏將勁兵來

바로 이러하다. 막 오나라 군대의 예기가 떨어졌는데, 또 위나라의 굳센 군대가 오는 것을 보는구나.

 

未知勝負如何且看下文分解

승부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구나. 또한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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