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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연의

제110회 문앙은 필마단기로 웅병을 물리치고, 강유는 배수진을 치고 크게 적병을 깨트리다.

by 최인표 2022. 3. 8.

第一一文鴦單騎退雄兵姜維背水破大敵

110회 문앙은 필마단기로 웅병을 물리치고, 강유는 배수진을 치고 크게 적병을 깨트리다.

 

卻說魏正元二年正月揚州刺史鎮東將軍領淮南軍馬毋丘儉字仲聞河南聞喜人也聞司馬師擅行廢立之事心中憤怒長子毋丘甸:「父親官居方面司馬師專權廢主國家有累卵之危安可晏然自守?」儉曰:「吾兒之言是也。」

각설하고 위나라 정원 이년 정월 양주자사 진동장군 령회남군마 무구검(관구검)은 자가 중문으로 하남 문희 사람이다. 사마사가 멋대로 폐립의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분노하였다. 장자 무()구전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는 관직이 방면(한 지역)에 자리(담당)하고 있으면서도 사마사가 권력을 오로지 하여 임금을 폐하여 국가가 누란의 위태로움에 처하였는데 어찌하여 편안히 스스로를 지키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하니 무구검(관구검)이 말하기를 내 아들의 말이 옳다.”했다.

 

遂請刺史文欽商議欽乃曹爽門下客當日聞儉相請即來拜謁儉邀入後堂禮畢說話間儉流淚不止欽問其故儉曰:「司馬師專權廢主天地反覆安得不傷心乎?」欽曰:「都督鎮守方面若肯仗義討賊欽願捨死相助欽中子文淑小字阿鴦有萬夫不當之勇常欲殺司馬師兄弟與曹爽報讎今可令為先鋒。」儉大喜其時酧為誓

마침내 자사 문흠을 청하여 상의하였다. 문흠은 곧 조상의 문객으로 그날 무구검(관구검)이 청하는 것을 듣고 곧 가서 배알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이 맞이하여 후당에 들어 가 예를 마치고 대화하는 사이에 무구검(관구검)이 눈물을 흘려 그치지 않았다. 문흠이 그 이유를 물었다. 무구검(관구건)이 말하기를 사마사가 권력을 오로지하여 임금을 폐하여 천지가 뒤집어졌으니 어찌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했다. 문흠이 말하기를 도독께서는 한 지역을 지키고 있으니 만약 기꺼이 의로움을 세워 적을 토벌한다면 저(문흠)는 목숨을 걸고 돕겠습니다. 문흠의 둘째 아들 문숙은 어렸을 때의 자가 아앙으로 만 명의 장정을 감당할 수 있는 용맹이 있어 항상 사마사 형제를 죽여 조상의 원수를 갚으려 하였는데 지금 선봉을 삼으십시오.”했다. 무구검(관구검)이 크게 기뻐하며 술잔을 들고 맹세하였다.

 

二人詐稱太后有密詔令淮南大小官兵將士皆入壽春城立一壇於西宰白馬歃血為盟宣言司馬師大逆不道今奉太后密詔令盡起淮南軍馬仗義討賊眾皆悅服儉提六萬兵屯於項城文欽領兵二萬在外為遊兵往來接應儉移檄諸郡今各起兵相助

두 사람이 태후의 비밀 명령이 있음을 핑계로 회남의 대소 관병과 장수들로 하여금 모두 수춘성에 들어 가 서쪽에 하나의 단을 세우고, 백마를 죽여 삽혈하고 맹세하면서 사마사가 크게 거슬러 도리로 하지 않아 지금 태후의 비밀 명령을 받들어 모든 회남의 군마를 일으켜 의리를 세우고 적을 토벌할 것을 선언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기뻐하며 인정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은 육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성에 주둔하였다. 문흠은 군대 이만을 이끌고 밖에 있으면서 유병(유격병)이 되어 왕래하며 상황에 맞게 대응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은 여러 군에 격문을 돌리니 이제 각각 군대를 일으켜 서로 도왔다.

 

卻說司馬師左眼肉瘤不時痛癢乃命醫官割之以藥封閉連日在府養病()聞淮南告急乃請太尉王肅商議肅曰:「昔關雲長威震華夏孫權令呂蒙襲取荊州撫恤將士家屬因此關公軍勢瓦解今淮南將士家屬皆在中原可急撫恤更以兵斷其歸路必有土崩之勢矣。」師曰:「公言極是但吾新割目瘤不能自往若使他人心又不穩。」

각설하고 사마사는 왼쪽 눈에 혹이 생겨 수시로 아프고 가려워 의관으로 하여금 그것을 째게 하고 약을 바르고 봉합한 뒤 연일 부에 있으면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회남에서 위급함을 알리는 것을 듣고 태위 왕숙을 청해 상의하였다. 왕숙이 말하기를 옛날 관운장의 위엄(무예)이 화하(중국)을 진동하였으나 손권이 여몽으로 하여금 형주를 습격하여 취하게 하였을 때 (여몽이)군사와 가족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는데 이 때문에 관공(관운장)의 군사가 와해되었습니다. 지금 회남의 군사와 가족들이 모두 중원에 있으니 급히 위로하고 구휼하고, 다시 군대로 그 돌아가는 길을 끊으면 반드시 흙이 무너지는 형세가 있을 것입니다.(흙이 무너지듯 군사들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했다. 사마사가 말하기를 (왕숙)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다만 내가 새로 눈의 살덩이를 갈라 직접 갈 수 없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을 시키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할 것입니다.”했다.

 

時中書侍郎鍾會在側進言曰:「淮楚兵強其鋒甚銳若遣人領兵去退多是不利倘有疏虞則大事廢矣。」師蹶然起曰:「非吾自往不可破賊!」遂留弟司馬昭守洛陽總攝朝政師乘軟輿帶病東行令鎮東將軍諸葛誕總督豫州諸軍從安風津取壽春又令征東將軍胡遵領青州諸軍出譙宋之地絕其歸路又遣豫州刺史監軍王基領前部兵先取鎮南之地師領大軍屯於襄陽聚文武於帳下商議

그 때 중서시랑 종회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회와 초의 군사는 강하여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롭습니다, 만약 사람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물러가게 한다면 이롭지 않음이 많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름이 있다면 곧 대사를 폐하게 될 것입니다.”했다. 사마사가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직접 가지 않는다면 적을 깨트릴 수 없다.”하고는 마침내 동생 사마소를 남겨 낙양을 지키며 조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사마사가 덮개 있는 수레를 타고 병든 채 동쪽으로 갔다. 진동장군 제갈탄으로 하여금 연주의 여러 군사를 총 감독하게 하고, 안풍진으로부터 수춘을 취하게 하고, 또 정동장군 호준으로 하여금 청주의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초송의 땅을 나가 그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였다. 또 연주자사 감군 왕기를 보내 앞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진남의 땅을 취하게 하였다. 사마사는 대군을 거느리고 양양에 주둔하고 문무관을 군막 안에 모아 상의하였다.

 

光祿勳鄭褒:「毋丘儉好謀而無斷文欽有勇而無智今大舉出其不意淮之卒銳氣正盛不可輕敵只宜深溝高壘以挫其銳此亞夫之長策也。」監軍王基曰:「不可淮南之反非軍民思亂也皆因毋丘儉勢力所逼不得已而從之若大軍一臨必然瓦解。」師曰:「此言甚妙。」遂進兵於引濦水之上中軍屯於濦水橋基曰:「南頓極好屯兵可提兵星夜取之若遲則毋丘儉必先至矣。」師遂令王基前部兵來南頓下寨

광록훈 정포가 말하기를 무구검(관구검)은 꾀하기를 좋아하나 결단함이 없고, 문흠은 용맹은 있으나 지혜가 없습니다. 지금 크게 군사를 일으켜 생각지 못할 때 나가야 합니다. , 회의 군사들은 예기가 바로 성대하니 가벼이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도랑을 깊게 파고, 루를 높게 쌓는 것으로서 그 예기를 꺽는 것이 주아부의 장책입니다.”했다. 감군 왕기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회남이 배반한 것은 군대와 백성의 난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모두 무구검(관구검)의 세력에 핍박을 받아 부득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대군을 한 번 대하게 되면 반드시 와해될 것입니다.”했다. 사마사가 말하기를 이 말이 매우 현묘합니다.”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진군시켜 은수의 위로 이끌고 중군을 은수교에 주둔하였다. 왕기가 말하기를 남돈은 군대를 주둔시키기에 지극히 좋으니 군대를 데리고 밤중에라도 취해야 합니다. 만약 늦으면 무구검(관구검)이 반드시 먼저 이를 것입니다.”했다. 사마사가 마침내 왕기로 하여금 앞의 군대를 이끌고 남돈에 가 영채를 만들게 하였다.

 

卻說毋丘儉在項城聞知司馬師自來乃聚眾商議先鋒葛雍曰:「南頓之地依山傍水極好屯兵若魏兵先占難以驅遣可速取之。」

각설하고 무구검(관구검)은 항성에 있다가 사마사가 직접 온다는 것을 듣고 곧 무리를 모아 상의하였다. 선봉 갈옹이 말하기를 남돈의 땅은 산에 의지하고 물 옆에 있어 군대를 주둔시키기에 지극히 좋습니다. 만약 위나라 군대가 먼저 점거하면 몰아내기 어려우니 속히 취해야 합니다.”했다.

 

儉從其言起兵投南頓來正行之間前面流星馬報說南頓已有人馬下寨儉不信自到軍前視之果然旌旗遍野營寨齊整儉回到軍中無計可施忽哨馬飛報:「東吳孫峻提兵渡江襲壽春來了。」儉大驚曰:「壽春若失吾歸何處!」是夜退兵於項城

무구검(관구검)이 그 말을 따라 군대를 일으켜 남돈으로 갔다. 행군하는 사이에 앞쪽에서 정찰병이 남돈에는 이미 인마가 영채를 세우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이 믿지 않고 직접 군대 앞에 이르러 보니 과연 깃발이 들판에 가득하고 영채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무구검(관구검) 군대 안으로 돌아 왔는데 쓸 만한 계책이 없었다. 홀연히 정찰병이 보고하기를 동오의 손준이 군대를 데리고 강을 건너 수춘을 습격하러 옵니다.”했다. 무구검(고나구검)이 크게 놀라 수춘을 잃게 된다면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하고는 그날 밤 항성으로 군대를 물렸다.

 

司馬師見毋丘儉軍退聚多官商議尚書傅嘏曰:「今儉兵退者憂吳人襲壽春也必回項城分兵拒守將軍可令一軍取樂嘉城一軍取項城一軍取壽春則淮南之卒必退矣兗州刺史鄧艾足智多謀若領兵逕取樂嘉更以重兵應之破賊不難也。」師從之急遣使持檄文教鄧艾起兗州之兵破樂嘉城師隨後引兵到彼會合

사마사는 무구검(관구검)의 군대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 많은 관리를 모아 상의하였다. 상서 부하가 말하기를 지금 무구검(관구검)의 군대가 물러나는 것은 오나라 사람이 수춘을 습격할 것을 걱정해서이니 반드시 항성으로 돌아 가 군대를 나누어 지킬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일 군으로 하여금 낙가성을 취하게 하고 일 군은 수춘을 취하게 하시면 곧 회남의 군사는 반드시 물러날 것입니다. 연주자사 등애는 지혜가 충분하고, 꾀가 많으니 만약 군대를 거느리고 빠르게 낙가를 취하게 하고 다시 많은 군대로서 대응하게 하시면 적을 깨트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사마사가 그것을 따라 급히 사자를 보내 격문을 가지고 등애로 하여금 연주의 군대를 일으켜 낙가성을 깨트리게 하고, 사마사 자신은 뒤를 따라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러 만나기로 하였다.

 

卻說毋兵儉在項城不時差人去樂嘉城哨探只恐有兵來請文欽到營共議欽曰:「都督勿憂我與拙子文鴦只消五千兵敢保樂嘉城。」儉大喜欽父子引五千兵投樂嘉來前軍報說:「樂嘉城西皆是魏兵約有萬餘遙望中軍白旄黃鉞皂蓋朱旛簇擁虎帳內豎立一面錦鏽帥字旗此必司馬師也安立營寨尚未完備。」

각설하고 무구검(관구검)은 항성에 있으면서 수시로 사람을 낙가성에 보내 정찰하게 하였는데, 군대가 올까 두려워하여 문흠을 청해 진영에 이르자 함께 의논하였다. 문흠이 말하기를 도독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문흠) 부족한 아들 문앙과 함께 단지 오천의 군대로 낙가성을 지키겠습니다.”했다. 무구검(관구검)이 크게 기뻐하였다. 문흠 부자가 오천의 군대를 이끌고 낙가성에 들어 들어갔다. 앞의 군대가 보고해 말하기를 낙가성 서쪽이 모두 위나라 군대로 대략 만여 명입니다. 멀리 중군을 바라보니 백모, 황월, 고관의 수레, 호장(군막)을 둘러싸고 지키고 있었다. 안에는 한쪽에 비단에 자를 수놓은 깃발이 서있으니 이는 반드시 사마사일 것입니다. 영채를 세웠는데 아직 완비되지는 않았습니다.”했다.

 

時文鴦懸鞭立於父側聞知此語乃告父曰:「彼營寨未成可分兵兩路左右擊之可全勝也。」欽曰:「何時可去?」鴦曰今夜黃昏父引二千五百兵從城南殺來兒引二千五百兵從城北殺來三更時分要在魏寨會合。」欽從之當晚分兵兩路且說文鴦年方十八歲身長八尺全裝貫甲腰懸鋼鞭綽槍上馬遙望魏寨而進是夜司馬師兵到樂嘉立下營寨等鄧艾未至師為眼下新割肉瘤瘡口疼痛臥於帳中令數百甲士環立護衛三更時分忽然寨內喊聲大震人馬大亂師急問之人報曰:「一軍從寨北斬圍直入為首一將勇不可當。」師大驚心如火烈眼珠從肉瘤瘡口內迸出血流遍地疼痛難當又恐有亂軍心只咬被頭而忍被皆咬爛

그 때 문앙이 채찍을 걸고 아버지 옆에 서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이에 아버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영채를 아직 완성시키지 못한 틈을 타고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좌우로 그들을 공격하면 완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니 문흠이 말하기를 언제 갈 수 있는가?”했다. 문앙이 말하기를 오늘 밤 황혼에 아버지께서 이천오백 명을 이끌고 성 남쪽으로부터 쇄도해 가고, 아이(문앙)는 이천오백 명을 이끌고 성 북쪽으로부터 쇄도하겠습니다. 삼경 쯤 위나라 영채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했다. 문흠이 그것을 따라 저녁쯤 군대를 두 길로 나누었다. 각설하고 문앙의 나이는 막 십팔 세로 키는 여덟 자인데 전신에 갑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강철 채찍을 걸었으며, 창을 잡고 말에 올라 멀리 위나라 영채를 향해 진군했다. 이날 밤 사마사의 군대가 낙가성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고 등애가 이르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사는 눈 아래 살덩이를 짼 곳의 상처가 아파 군막 안에 누운 채 수백 명의 갑사로 하여금 빙 둘러서서 호위하게 하였다. 삼경쯤 홀연히 영채 안에서 함성이 크게 진동하며 인마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사마사가 급히 물으니 사람이 보고하여 말하기를 일 군이 영채 북쪽으로부터 점점 포위해 들어오는데 우두머리 되는 장수의 용맹을 당할 수 없습니다.”했다. 사마사가 크게 놀라 마음이 불타는 것과 같아 눈동자가 살덩이를 짼 상처로부터 나오니 피가 흘러 땅에 뿌려지고, 통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또 군대의 마음이 어지러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이불깃을 물고 참는데 모두 (이불깃이)씹혀 문드러졌다.

 

原來文鴦軍馬先到一擁而進在寨中左衝右突所到之處人不敢當有相拒者槍搠鞭打無不被殺鴦只望父到以為外應並不見來數番殺到中軍皆被弓弩射回鴦直殺到天明只聽得北邊鼓角喧天鴦回顧從者曰:「父親不在南面為應卻從北至何也?」鴦縱馬看時只見一軍行如猛風為首一將乃鄧艾也縱馬橫刀大呼曰:「反賊休走!」鴦大怒挺槍迎之戰有五十合不分勝敗正鬥間魏兵大進前後夾攻

알고 보니 문앙의 군마가 먼저 이르러 일제히 진군하여 영채 안에서 좌충우돌하니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막는 자가 있으면 창으로 찌르고 채찍으로 치니 죽임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문앙이 아버지가 이르러 밖에서 대응할 것을 바랐으나 오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몇 번 중군에 쇄도하였으나 모두 쏘아대는 궁노에 돌아 왔다. 문앙이 날이 밝을 때까지 싸우는데 북쪽 가에서 고각이 하늘에 울리는 것을 들었다. 문앙이 따르는 사람을 도아보며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남쪽에서 대응하지 않고 북쪽에서 이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하고는 말을 달리며 살펴보니 일 군이 마치 사나운 바람과 같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우두머리 되는 한 장수는 곧 등애로 말을 달리며 칼을 빗겨들고 크게 외쳐 말하기를 반적은 달아나지 말라!”했다. 문앙이 크게 노하여 창을 내밀어 맞이하였다. 싸운 지 오십 합이 되어도 승패가 나지 않았다. 싸우고 있는 사이에 위나라 군대가 크게 진군하여 앞뒤에서 협공하였다.

 

鴦部下兵各自逃走只文鴦單人獨馬衝開魏兵望南而走背後數百員將抖擻精神驟馬追來將至樂嘉橋邊看看趕上鴦忽然勒回馬大喝一聲直衝入魏將陣中來鋼鞭起處紛紛落馬各自退鴦復緩緩而行魏將聚在一處驚訝曰:「此人尚敢退我等之眾耶可併力追之!」於是魏將百員復來追趕鴦勃然大怒曰:「鼠輩何不惜命也!」提鞭撥馬殺入魏將叢中用鞭打死數人復回馬緩轡而行魏將連追四五番皆被文鴦一人殺退後人有詩曰

문앙의 부하 군사들은 각자 달아나고 문앙만 홀로 단기필마로 위나라 군대를 치고 (포위를)열고 남쪽을 향해 달아났다. 뒤에서 수백 명의 장수들이 정신을 차리고 말을 달려 쫓아 왔다. 악가 다리 근처에 이르러 거의 따라잡았다. 문앙이 홀연히 말고삐를 당겨 말을 돌리고 크게 소리치며 곧바로 위나라 장수들 진중으로 치고 들어 가 강철 채찍을 휘두르는 곳마다 어지럽게 말에서 떨어지니 각자 물러갔다. 문앙이 다시 천천히 갔다. 위나라 장수들이 모여 한 곳에 있으면서 놀라 말하기를 이 사람이 오히려 감히 우리를 물리치려하는가?”하고는 이에 위나라 장수 백 명이 다시 쫓아갔다. 문앙이 발끈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쥐새끼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는구나!”하고는 채찍을 가지고 말을 달려 위나라 장수 무리 안으로 쇄도해 들어 가 채찍을 써서 몇 명을 때려죽이고 다시 말을 돌려 말고삐를 느슨하게 하고 갔다. 위나라 장수들이 연이어 네 다섯 번을 쫓았으나 모두 눔앙 한사람에게 죽음을 당하고 물러났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은 것이 있다. 시에

 

長板當年獨拒曹子龍從此顯英豪樂嘉城內爭鋒處又見文鴦膽氣高

그 해 장판파에서 홀로 조조의 군대를 막아, 조자룡이 이로부터 영웅호걸임을 드러내었다. 낙가성 안에서 창칼 부딪치는 곳마다 또 문앙의 담과 기개가 높음이 드러났다.

 

原來文欽被山路崎嶇迷入谷中行了半夜此及尋路而出天色已曉文鴦人馬不知所向共見魏兵大勝欽不戰而退魏兵乘勢追殺欽引兵望壽春而走

알고 보니 문흠은 산길이 가파르고 험하여 골짜기 안으로 잘못 들어 가 한 밤중까지 돌아다니다 이에 이르러 길을 찾아 나오니 날이 이미 밝아지는데 문앙의 인마가 향한 바를 알지 못하였다. 위나라 군대가 크게 이긴 것을 같이 보고는 문흠이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위나라 군대가 형세를 타고 추격하니 문흠이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향해 달아났다.

 

卻說魏殿中校尉尹大目乃曹爽心腹之人因爽被司馬懿謀殺故事司馬師常有殺師報爽之心又素與文欽交厚今見師眼瘤突出不能動止乃入帳告曰:「文欽本無反心今被毋丘儉逼迫以致如此某去說之必然來降。」師從之大目頂盔貫甲乘馬來趕文欽看看趕上乃高聲大叫曰:「文刺史見尹大目麼?」

각설하고 위나라 전중교위 윤대목은 곧 조상의 심복인 사람이다. 조상이 사마의에게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사마사를 섬기고 있었는데 항상 사마사를 죽여 조상의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또 평소 문흠과 사귐이 두터웠는데 지금 사마사의 눈에 살덩이가 튀어 나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이에 군막에 들어 가 고하여 말하기를 문흠은 본래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 무구검(관구검)에게 핍박을 당하여 이 같음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가서 설득하면 반드시 와서 항복할 것입니다.”했다. 사마사가 그것을 따랐다. 윤대목이 머리에 쿠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후 말을 타고 문흠을 쫓아갔다. 막 따라잡아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문자사는 윤대목을 보지 않으려는가?”했다.

 

欽回頭視之大目除盔放於鞍鞽之前以鞭指曰:「文刺史何不忍耐數日也?」此是大目知師將亡故來留欽欽不解其意厲聲大罵便欲開弓射之大目大哭而回欽收聚人馬奔壽春時已被諸葛誕引兵取了卻復回項城時胡遵王基鄧艾三路兵皆到欽見勢危遂投東吳孫峻去了

문흠이 머리를 돌려 보니 윤대목이 투구를 벗어 말안장 앞에 걸고 채찍으로 가리켜 말하기를 문자사(문흠)는 어찌하여 몇일을 참지 못합니까?”했다. 이는 윤대목이 사마사가 장차 죽을 것을 알고 와서 문흠을 만류한 것이었다. 문흠이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성남 소리로 크게 꾸짖고 곧 활을 당겨 쏘려 하였다. 윤대목이 크게 소리내어 울며 돌아갔다. 문흠이 인마를 모아 수춘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제갈탄이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취한 뒤였다. (문흠이) 다시 항성으로 돌아가려 할 때 호준, 왕기, 등애 세 길의 군대가 모두 이르렀다. 문흠은 형세가 위태로움을 보고 마침내 동오 손준에게 들어갔다.

 

卻說毋丘儉在項城內聽知壽春已失文欽勢敗城外三路兵到儉遂盡撤城中之兵出戰正與鄧艾相遇儉令葛雍出馬與艾交鋒不一合被艾一刀斬之引兵殺過陣來毋丘儉死戰相拒江淮兵大亂胡遵王基引兵四面夾攻毋丘儉敵不住引十餘騎奪路而走前至慎縣城下縣令宋白開門迎入設席待之儉大醉被白令人殺了將頭獻於魏兵於是淮南平定

각설하고 무구검(관구검)은 항성 안에 있다가 수춘을 잃었고 문흠의 군세가 무너져 성 밖에 세 길의 군대가 이르렀다는 것을 들었다. 무구검(관구검)이 마침내 선 안의 군대를 거두어 나가 싸웠다. 바로 등애와 만나니 무구검(관구검)이 갈옹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나가 등애와 싸우게 하였는데 일합이 되지 않아 등애가 한칼에 갈옹을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돌진해 갔다. 무구검(관구검)이 목숨을 바쳐 막았다. 강회의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호준, 왕기가 군대를 이끌고 사방에서 협공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이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십여 기를 이끌고 길을 찾아 달아났다. 신성현 성 아래 이르니 현령 송백이 문을 열고 맞이해 들이고 연회를 열어 대접하였다. 무구검(관구검)이 크게 취하자 송백이 사람을 시켜 죽이고 머리를 가지고 위나라 군대에게 바쳤다. 이에 회남이 평정되었다.

 

司馬師臥病不起喚諸葛誕入帳賜以印綬加為征東大將軍都督揚州諸路軍馬一面班師回許昌師目痛不止每夜只見李豐張緝夏侯玄三人立於榻前師心神恍惚自料難保遂令人往洛陽取司馬昭到昭哭拜於床下師遺言曰:「吾今權重雖欲卸肩不可得也汝繼我為之大事切不可輕託他人自取滅族之禍。」言訖以印綬付之淚流滿面昭正欲問時師大叫一聲眼睛迸出而死時正元二年二月也於是司馬昭發喪申奏魏主曹髦髦遣使持詔到許昌即命暫留司馬昭屯軍許昌以防東吳昭心中猶豫未決鍾會曰:「大將軍新亡人心未定將軍若留守於此萬一朝廷有奱悔之何及?」昭從之即起兵還屯洛水之南

사마사는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제갈탄을 불러 군막에 들어오자 인수를 내리고 정동대장군을 삼고 양주의 여러 방면 군마를 감독하게 하는 한편으로 군대를 돌려 허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사마사는 눈의 통증이 그치지 않아 매일 밤 이풍, 장집, 하후현 세 사람이 침상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사마사는 심신이 몽롱하여 스스로 버티기 어렵다 생각하고, 마침내 사람을 시켜 낙양에 가 사마소를 불러오게 하였다. 사마소가 침상 아래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사마소가 유언을 말하기를 내가 지금 권력이 중하여 비록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너는 나를 계승하고, 대사를 가벼이 다른 사람에게 맡겨 스스로 멸족의 화를 취해서는 안 된다.”했다. 말을 마치고 인수를 주면서 눈물을 흘려 얼굴에 가득하였다. 사마소가 물으려할 때 사마사가 크게 한 소리를 외치고는 눈알이 튀어나와 죽었다. 때는 전원 이년 이월이었다. 이에 사마소가 상(사마사의 죽음)을 발표하고 위나라 임금 조모에게 아뢰었다. 조모가 사자를 보내 조서를 가지고 허창에 가게하여 곧 사마소로 하여금 머물러 허창에 군대를 주둔하여 동오를 막게 하였다. 사마소는 마음속으로 주저하여 결단하지 못하였다. 종회가 말하기를 대장군이 돌아가시고 인심이 아직 정해자자 않았으니 장군께서 여기에 머물러 지키시다 만일 조정에서 병이 있으면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했다. 사마소가 그것을 따라 곧 군대를 일으켜 낙수의 남쪽으로 돌아 가 주둔하였다.

 

髦聞之大驚太尉王肅奏曰:「昭既繼其兄掌大權陛下可封爵以安之。」髦遂令王肅持詔封司馬昭為大將軍錄尚書事昭入朝謝恩畢自此中外大小事情皆歸於昭

조모가 그것을 듣고 크게 놀랐다. 태위 왕숙이 아뢰어 말하기를 사마소가 이미 그 형이 장악했던 대권을 이었으니 페하께서는 봉작하는 것으로서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했다. 조모가 마침내 왕숙으로 하여금 조서를 지니고 사마소를 봉하여 대장군록상서사로 삼게 하였다. 사마소가 조정에 들어가 사은하기를 마쳤다. 이로부터 조정안과 밖의 크고 적은 일들이 모두 사마소에게 돌아갔다.

 

卻說西蜀細作哨知此事報入成都姜維奏後主曰:「司馬師新亡司馬昭初握重權必不敢擅離洛陽臣請乘間伐魏以復中原。」後主從之遂命姜維興師伐魏維到漢中整頓人馬征西大將軍張翼曰:「蜀地淺狹錢糧淺薄不宜遠征不如據險守分恤軍愛民此乃保國之計也。」維曰:「不然昔丞相未出茅廬已定三分天下然其六出祁山以圖中原不幸半途而喪以致功業未成今吾既受丞相遺命當盡忠報國以繼其志雖死而無恨也今魏有隙可乘不就此時伐之更待何時?」夏侯霸曰:「將軍之言是也可將輕騎先出枹罕若得洮西南安則諸郡可定。」張翼曰:「向者不克而還皆因軍出甚遲也兵法云:『攻其無備出其不意。』今若火速進兵使魏人不能提防必然全勝矣。」

각설하고 서촉의 세작(첩자)가 이 일을 정탐하여 알고는 성도에 들어 가 보고하였다. 강유가 후주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사마사가 죽은 후 사마소가 처음 중대한 권력을 장악하였으니 감히 함부로 낙양을 떠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은 이 틈을 타서 위나라를 정벌하여 중원을 회복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후주가 그것을 따라 마침내 강유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위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강유가 한중에 이르러 인마를 정돈하였다. 정서대장군 장익이 말하기를 촉의 땅은 얕고 좁고(촉은 땅이 좁아), 돈과 식량이 부족하니 멀리 정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험한 곳에 기대 지키며 군대를 구휼하고 백성을 아끼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곧 나라를 지키는 계책입니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승상께서 아직 띠 풀 집을 나오지 않았을 때 이미 천하를 셋으로 나누기로 정하고 여섯 번 기산을 나와 중원을 도모하였으나 불행히도 중도에 돌아가셔서 공업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이미 승상의 유명을 받아 마땅히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서 그 뜻을 이었으니 비록 죽더라도 한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위나라에 틈을 탈만하니 이 때 그들을 정벌하러 나아가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했다. 하후패가 말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날랜 기병을 시켜 먼저 포한으로 나가야 합니다. 만약 조서, 남안을 얻는다면 곧 여러 군들이 안정될 것입니다.”했다. 장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이기지 못하고 돌아 간 것은 모두 군대가 나가는 것이 매우 늦었기 때문입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그 준비가 없을 때 공격해야 하는데 불의에 나가야 한다.’했습니다. 지금 만약 불길 같이 빠르게 진군하여 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막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완전한 승리를 이룰 수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於是姜維引兵五萬望枹罕進發兵至洮水守邊軍士報知雍州刺史王經副將軍陳泰王經先起馬步兵七萬來迎姜維吩咐張翼如此如此又吩咐夏侯霸如此如此二人領計去了維乃自引大軍背洮水列陣王經引數員牙將出而問曰:「魏與吳己成鼎足之勢 汝累次入寇何也?」維曰:「司馬師無故廢主鄰邦理宜問罪何況讎敵之國乎?」

이에 강유가 군대 오만을 이끌고 포한을 향해 진군하였다. 군대가 조수에 이르니 지키는 변경을 지키는 군사들이 옹주자사 왕경, 부장군 진태에게 보고하였다. 왕경이 먼저 기병과 보병 칠만으로 맞이하였다. 강유가 장익에게 이러저러하라고 분부하고, 또 하후패에게도 이러저러 하라고 분부하였다. 두 사람이 계책을 받아 간 뒤 강유는 곧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조수를 등지고 진을 벌였다. 왕경은 몇 명의 아장을 이끌고 나가며 물어 말하기를 위나라, 오나라, 촉이 이미 솥발이 형세를 이루었는데도 너희들이 여러 차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은 어째서인가?”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사마사가 이유 없이 임금을 폐하였으니 이웃나라가 죄를 묻는 것은 마땅한 도리인데 하물며 원수인 적국에 있어서이겠는가?”했다.

 

經回顧張明花永劉達朱芳四將曰:「蜀兵背水為陣敗則沒於水矣姜維驍勇汝四將可戰之彼若退動便可追擊。」四將分左右而出來戰姜維維略戰數合撥回馬望本營便走王經大驅士馬一齊趕來維引兵望洮西而走將次近水大呼將士曰:「事急矣諸將何不努力!」

왕경이 장명, 화욘, 유달, 주방 네 장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촉의 군대가 물을 등지고 진을 쳤으니 패하면 곧 물에 빠지게 됩니다. 강유는 날래고 용맹하니 너희 네 장수들이 싸우라. 그들이 만약 물러난다면 곧 추격하라.”했다. 네 장수가 좌우를 나누어 나가 강유와 싸우러 갔다. 강유가 대략 몇 합 싸우다 말을 돌려 본영을 향해 달아났다. 왕경이 크게 군사를 몰아 일제히 쫓아갔다.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조수 서쪽을 향해 달아나다 장차 물에 가까워지자 크게 장사들을 불러 말하기를 일이 위급하구나! 여러 장수들이 어찌 노력하지 않는가!” 했다.

 

眾將一齊奮力殺回魏兵大敗張翼夏侯霸抄在魏兵之後分兩路殺來把魏兵困在垓心維奮武揚威殺入魏軍之中左衝右突魏兵大亂自相踐踏死者大半逼入洮水者無數斬首萬餘壘屍數里王經引敗兵百騎奮力殺出逕往狄道城而走奔入城中閉門保守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힘을 떨쳐 돌아 쇄도하니 위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장익, 하후패는 위나라 군대의 뒤에 있다가 두 길로 나누어 쇄도하여 위나라 군대를 잡아 포위하였다. 강유가 무예를 떨쳐 위나라 군대 안으로 쇄도해 들어 가 좌충우돌하니 위나라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져 스스로 서로 밟으니 죽은 자가 태반이었고, 밀려 조수에 빠진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머리를 벤 것이 만여 개였고, 시체가 몇 리에 쌓였다. 왕경이 패한 군대를 백여 기를 이끌고 힘을 다해 달려 나가 빠르게 적도성으로 가 성안으로 달려 들어 가 성문을 닫고 지켰다.

 

姜維大獲全功犒軍己畢便欲進兵攻打狄道城張翼諫曰:「將軍功績已成威聲大震可以止矣今若前進倘不如意正如畫蛇添足也。」維曰:「不然向者兵敗尚欲進取縱橫中原今日洮水一戰魏人膽裂吾料狄道唾手可得汝勿自墮其志也。」張翼再三勸諫維不從勒兵來取狄道城

강유가 크케 완전한 공을 얻고는 군대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는 곧 군대를 진군하여 협도성을 치려하였다. 장익이 간하여 말하기를 장군의 공적이 이미 이루어져 위엄과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으니 그쳐야 합니다. 지금 만약 전진하다가 만약 뜻과 같지 않게 되면 바로 뱀에 발을 그려 넣는 것과 같습니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군대가 패하고도도 오히려 나아가 취하고 중원을 종횡하려 하였습니다. 오늘 조수에서의 한 번 싸움으로 위나라 사람들의 담을 찢어 놓아 적도성은 손에 침을 뱉는 것처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니 너희들은 스스로 그 뜻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했다. 장익이 두 번 세 번 권하고 간하였으나 강유는 따르지 않고 군대를 돌려 가 적도성을 취하려 했다.

 

卻說雍州征西將軍陳泰正欲起兵與王經報兵敗之讎忽兗州刺史鄧艾引兵到泰接著禮畢艾曰:「今奉大將軍之命特來助將軍破敵。」泰問計於鄧艾艾曰:「洮水得勝若招羌人之眾東爭關隴傳檄四郡此吾兵之大患也今彼不思如此卻圖狄道城其城垣堅固急切難攻空勞兵費力耳吾今陳兵於項嶺然後進兵擊之蜀兵必敗矣。」

각설하고 옹주 정서장군 진태는 군대를 일으켜 왕경과 군대가 패한 원수를 갚으려 하였는데 홀연히 연주자사 등애가 군대를 이끌고 이르렀다. 진태가 영접하여 예를 마쳤다. 등애가 말하기를 지금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특히 장군을 도와 적을 깨뜨리러 왔습니다.”했다. 진태가 등애에게 계책을 물었다. 등애가 말하기를 “(강유가)조수에서 승리를 얻고, 만약 강족 사람들을 불러 동쪽으로 관농을 다투고, 네 군에 격문(명령)을 전한다면 이는 우리 군대의 큰 근심이 될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이 같이 생각하지 않고 적도성을 도모합니다. 그 성(적도성)은 성벽이 견고하니 급히 공격하기 어려워 공연히 군대를 수고롭게 하고 힘을 낭비할 뿐입니다. 내가 지금 항령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진군하여 그들을 공격하면 촉의 군대는 반드시 패하게 될 것입니다.”했다.

 

陳泰曰:「真妙論也!」遂先撥二十隊兵每隊五十人盡帶旌旗鼓角烽火之類日伏夜行去狄道城東南高山深谷之中埋伏只待兵來一齊鳴鼓吹角為應夜則舉火放砲以驚之調度已畢專候蜀兵到來於是陳泰鄧艾各引二萬兵相繼而進

진태가 말하기를 참으로 신묘한 계책입니다.”하고는 마침내 먼저 이십 부대의 군대 뽑고, 매 부대는 다섯 명으로 모두 깃발, 고각, 봉화 따위를 휴대하고,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적도성 동남쪽 깊은 골짜기 안에 매복하고 (강유의)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며 대응하게 하고, 밤에는 곧 불을 들고 포를 놓아 그들(촉의 군대)을 놀라게 하였다. 임무 배정을 마친 후에는 오로지 촉의 군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진태, 등애가 각각 이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로 이어 전진하였다.

 

卻說姜維圍住狄道城令兵八面攻之連攻數日不下心中鬱悶無計可施. 是日黃昏時分忽三五次流星馬報說:「有兩路兵來旗上明書大字一路是征西將軍陳泰一路是兗州刺史鄧艾。」維大驚遂請夏侯霸商議霸曰:「吾向嘗為將軍言鄧艾自幼深明兵法善曉地理今領兵到頗為勁敵。」維曰:「彼軍遠來我休容他住腳便可擊之。」及留張翼攻城命夏侯霸引兵迎陳泰維自引兵來迎鄧艾

각설하고 강유는 적도성을 포위하고 군대로 하여금 여덟 방향에서 공격하게 하였는데 연이어 몇일을 공격하여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니 마음속으로 고민하였으나 베풀만한 계책이 없었다. 이 날 저녁 때 쯤 홀연히 여러 차례 정찰병이 보고하기를 두 길로 군대가 오고 있는데 깃발에 큰 글자가 써져 있었는데 한 길은 곧 정서장군 진태이고, 한 길은 연주자사 등애였습니다.”하니 강유가 크게 놀라 마침내 하후패를 청해 상의하였다. 하후패가 말하기를 내가 지난 번에 장군을 위해 말하기를 등애는 어려서부터 병법에 깊이가 있고 밝으며 지리를 잘 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군대를 이끌고 이르렀으니 자못 날랜 적일 것입니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그의 군대는 멀리서 왔으니 우리는 그들이 쉴 틈을 주지 말고 곧 공격해야 합니다.”하고는 장익을 남겨 성을 공격하게 하고, 하후패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진태를 맞이하게 하였다. 강유 스스로는 군대를 이끌고 가 등애를 맞이하였다.

 

行不到五里忽然東南一聲砲響鼓角震地火光沖天維縱馬看時只見周圍皆是魏兵旗號維大驚曰:「中鄧艾之計矣!」遂傳令教夏侯霸張翼各棄狄道而退於是蜀兵皆退歸漢中維自斷後只聽得背後鼓聲不絕維退入劍閣之時方知火鼓二十餘處皆虛設也維收兵退屯於鍾提

오리를 행군하지 않아 홀연히 동남쪽에서 한소리 포가 울리고 북과 피리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화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강유가 말을 달리며 보니 주위가 모두 위나라 군대의 깃발이었다. 강유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등애의 게채게 빠졌구나!‘하고는 마침내 명령을 내려 하후패, 장익으로 하여금 각각 적도성을 버리고 물러나게 하였다. 이에 촉의 군대가 모두 물러나 한중으로 돌아갔다. 강유는 스스로 뒤를 끊었는데 뒤에서 북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들었다. 강유가 물러나 검각에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불과 북이 이십여 곳인데 모두 가설된 것임을 알았다. 강유가 군대를 거두어 물러나 종제에 주둔하였다.

 

且說後主因姜維有洮西之功降詔封維為大將軍維受了職上表謝恩畢再議出師伐魏之策

각설하고 후주는 강유가 조수 서쪽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조서를 내려 강유를 봉해 대장군으로 삼았다. 강유가 관직을 받고 표를 올려 은혜에 감사한 뒤 다시 군대를 내어 위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正是成功不必添蛇足討賊猶思奮虎威

바로 이러하다. 공을 이루는데 반드시 뱀의 발을 더할 필요는 없고, 적을 토벌하여 호랑이 같은 위엄을 떨치려 하는구나,

 

未知此番北伐如何且看下文分解

알지 못하겠다. 이번의 북벌이 어떠할지. 또한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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