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一九回:假投降巧計成虛話,再受禪依樣畫葫蘆
제119회 거짓으로 항복한 공교로운 계책은 헛된 이야기가 되고, 다시 선양받음이 모양을 따라 호로를 베껴 그리는 듯하다.
卻說鍾會請姜維計議收鄧艾之策。維曰:「可先令監軍衛瓘收艾。艾欲殺瓘,反情實矣。將軍卻起兵討之,可也。」會大喜,遂令衛瓘引數十人入成都,收鄧艾父子。瓘部卒止之曰:「此是鍾司徒令鄧征西殺將軍,以正反情也。切不可行。」瓘曰:「吾自有計。」遂先發檄文二三十道。其檄曰:「奉詔收艾,其餘各無所問。若早歸來,即加爵賞;敢有不出者,滅三族。」隨備檻車兩乘,星夜望成都而來。
각설하고 종회는 강유를 청해 등애를 거둘(잡을) 계책을 의논하였다. 강유가 말하기를 “먼저 감군 위관으로 하여금 등애를 거두게(잡게) 해야 합니다. 등애가 위관을 죽이려하면 배반하려는 정실이니(징조이니) 장군께서 군대를 일으켜 토벌할 수 있습니다.”했다. 종회가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위관으로 하여금 수십 명을 이끌고 성도에 들어 가 등애 부자를 거두게(잡게) 하였다. 위관의 부졸(위관의 부하)가 막으며 말하기를 “이는 종 사도(종회)가 등 정서(등애)로 하여금 장군을 죽이게 하는 것으로서 배반의 실정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절대 가서는 안 됩니다.”했다. 위관이 말하기를 “나에게 계책이 있다.”하고는 먼저 격문 이 삼십 통을 보냈다. 그 격문에 말하기를 “조서(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등애를 잡으려는 것이고, 그 나머지는 각자 (죄를)묻는 바가 없을 것이다. 만약 빨리 항복한다면 곧 벼슬과 상을 줄 것이고, 감히 나오지 않는 자는 삼족을 없앨 것이다.”하고는 준비한 함거 두 대를 따르게 하고 밤을 새워 성도를 향해 갔다.
比及雞鳴,艾部將見檄文者,皆來投拜於衛瓘馬前。時鄧艾在府中未起。瓘引數十人突入,大呼曰:「奉詔收鄧艾父子!」艾大驚,滾下床來。瓘叱武士縛於車上。其子鄧忠出問,亦被捉下,縛於車上。府中將吏大驚,欲待動手搶奪,早望見塵頭大起,哨馬報說鍾司徒大兵到了。眾各四散奔走。
닭이 울 무렵(새벽 무렵) 등애의 부장으로 격문을 본 자는 모두 위관의 말 앞으로 들어와 절하였다. 그 때 등애는 부중(관청)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였다. 위관이 군대 수 십 명을 이끌고 치고 들어 가 크게 외쳐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등애 부자를 잡으러 왔다.”했다. 등애가 크게 놀라 침상 아래로 구르듯 내려왔다. 위관이 무사에게 (등애자를) 묶어 수레에 태우라고 소리쳤다. 그 아들 등충이 나와 묻다가 또한 잡혀 묶여 수레에 태워졌다. 부중의 장수와 관리들이 크게 놀라 손을 움직여 (등애 부자를) 빼앗으려는데 멀리 먼지가 크게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초마(정창병)가 종 사도(종회)의 대군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무리들이 각각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鍾會與姜維下馬入府,見鄧艾父子已被縛。會以鞭撻鄧艾之首而罵曰:「養犢小兒,何敢如此!」姜維亦罵曰:「匹夫行險徼倖,亦有今日耶?」艾亦大罵。會將艾父子送赴洛陽。
종회와 강유가 말에서 내려 부에 들어가니 등애 부자가 이미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종회가 채찍으로 등애의 머리를 치면서 욕해 말하기를 “송아지를 기르던 어린놈이 어찌 감히 이같이 하는가!”하고, 강유 또한 욕해 말하기를 “필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행운을 바랐는데 또한 오늘이 있구나.”하니 등애가 또한 크게 욕하였다. 종회가 등애 부자를 낙양으로 압송하였다.
會入成都,盡得鄧艾軍馬,威聲大震。乃謂姜維曰:「吾今日方趁平生之願矣。」維曰:「昔韓信不聽蒯通之說,而有未央宮之禍。大夫種不從范蠡於五湖,卒伏劍而死。斯二子者,其功名豈不赫然哉?徒以利害未明,而見機之不早也。今公大勳已就,威震其主,何不泛舟絕跡,登峨嵋之嶺,而從赤松子遊乎?
종회가 성도에 들어 가 등애의 군마를 모두 얻으니 위엄과 명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이에 강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오늘 비로소 평생의 바람을 이루었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옛날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듣지 않아 미앙궁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월나라) 대부 문종은 오호에서 범려의 말을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검으로 자결해 죽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공과 명성이 어찌 빛나지 않았겠습니까? 이해에 밝지 못하고 기회를 봄이 빠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의 큰 공적이 이미 이루어져 위엄이 그 임금을 진동시키는데 어찌하여 배를 띄워 자취를 감추고 아미의 고개에 올라 적송자를 따라 노닐지 않으십니까?”했다.
會笑曰:「君言差矣。吾年未四旬,方思進取,豈能便效此退閒之事?」維曰:「若不退閒,當早圖良策,此則明公智力所能,無煩老夫之言矣。」會撫掌大笑曰:「伯約知吾心也。」
종회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잘못되었다. 내 나이가 아직 사순(사십)이 되지 않아 비로소 진취를 생각하였는데 어찌 이처럼 물러나 한가로이 지낸 일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만약 물러나지 않으시려면 마땅히 일찍 좋은 계책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는 곧 명공(종회)의 지혜와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바이니 번거로이 노부(강유)가 말하지 않겠습니다.”했다. 종회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어 말하기를 “백약(강유)이 내 마음을 압니다.”했다.
二人自此每日商議大事。維密與後主書曰:「望陛下忍數日之辱,維將使社稷危而復安,日月幽而復明,必不使漢室終滅也。」
두 사람이 이로부터 매일 대사를 논의하였다. 강유가 비밀리 후주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폐하께서 참을 수 없는 며칠의 욕을 참으시면 제가 장차 사직의 위태로움을 다시 편안하게 하고, 해와 달이 어두운 것은 다시 밝게 하여 반드시 한나라로 하여금 끝내 없어지지 않게 할 것입니다.”했다.
卻說鍾會正與姜維謀反,忽報司馬昭有書到。會接書,書中言:「吾恐司徒收艾不下,自屯兵於長安;相見在近,以此先報。」會大驚曰:「吾兵多艾數倍,若但要我擒艾,晉公知吾獨能辦之;今日自行兵來,是疑我也。」
각설하고 종회가 바로 강유와 배반을 도모하고 있을 때 홀연히 사마소의 글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종회가 글을 받아보니 글 안에 말하기를 “나는 사도(종회)가 등애를 거두려다(잡으려다) 잡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장안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서로 가까이서 보게 되었기 때문에 먼저 알려드립니다.”했다. 종회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내 군대가 등애보다 몇 배 많다. 만약 다만 나에게 등애를 잡게 할 뿐이라면 진공(사마소)은 내가 그를 (등애를 잡는 일을)주관할 수 있음을 알았을 터인데 오늘 스스로 군대를 일으켜 온 것은 아를 의심하는 것이다.”했다.
遂與姜維計議。維曰:「君疑臣則臣必死,豈不見鄧艾乎?」會曰:「吾意決矣。事成則得天下,不成則退西蜀,亦不失作劉備也。」維曰:「近聞郭太后新亡,可詐稱太后有遺詔,教討司馬昭,以正弒君之罪。據明公之才,中原可席捲而定。」會曰:「伯約當作先鋒。成事之後,同享富貴。」維曰:「願效犬馬微勞。但恐諸將不服耳。」會曰:「來日元宵佳節,故宮大張燈火,請諸將飲宴。如不從者盡斬之。」維暗喜。
마침내 강유와 계책을 논의하였다. 강유가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의심하면 신하는 반드시 죽습니다. 어찌 등애를 보지 못하십니까?”했다. 종회가 말하기를 “내 뜻은 결정되었습니다. 일이 이루어지면 천하를 얻고, 이루어지지 못하면 서촉으로 물러나 또한 유비를 실패로 여기자 않을 것입니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최근에 들으니 곽태후가 죽었으니 태후가 남긴 유조(남긴 유서)를 거짓으로 핑계대어 사마소를 토벌하는 것으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바로 잡는다고 하십시오. 명공(종회)의 재능에 기댄다면 중원은 자리를 말듯이 평정될 것입니다.”했다. 종회가 말하기를 “백약이 마땅히 선봉이 되어 주시오. 일이 이루어진 후 함께 부귀를 누립시다.”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견마의 작은 수고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다만 여러 장수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 두려울 뿐입니다.”했다. 종회가 말하기를 “내일은 정월 보름의 아름다운 절기이므로 궁에 크게 등불을 켜니 여러 장수들을 청해 연회를 열고 술을 마시겠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베어 죽일 것입니다.”하니 강유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次日,會、維二人請諸將飲宴。數巡後,執杯大哭。諸將驚問其故。會曰:「郭太后臨崩有遺詔在此,為司馬昭南闕弒君,大逆無道,早晚將篡魏,命吾討之。汝等各自簽名,共成此事。」眾皆大驚,面面相覷。會拔劍出鞘曰:「違令者斬!」眾皆恐懼,只得相從,畫字已畢,會乃困諸將於宮中,嚴兵禁守。維曰:「我見諸將不服,請坑之。」會曰:「吾已令宮中掘一坑,置大棒數千,如不從者,打死坑之。」
다음 날 종회, 강유 두 사람이 여러 장수를 청해 연회를 열고 술을 마셨다. 몇 차례 술잔이 돈 후 잔을 들고 크게 울었다. 여러 장수들이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종회가 말하기를 “곽태후가 죽음에 이르러 남긴 명이 여기에 있는데 사마소가 남궐에서 임금을 죽였으니 대역무도하여 조만간에 위나라를 찬탈하려 하니 나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 너희들 각자는 서명하여 함께 이 일을 이루자.”했다. 무리들이 크게 놀라 얼굴만 서로 쳐다보았다. 종회가 검을 칼집에서 뽑으며 말하기를 “명령을 어기는 자는 베어 죽인다.”했다. 무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다만 서로 따라 글자(서명)쓰기를 마치니 종회가 이에 여러 장수를 궁중에 가두고 엄하게 군대로 지키게 하였다. 강유가 말하기를 “내가 보니 여러 장수들이 복종하지 않으니 땅에 묻어버리기를 청합니다.”했다. 종회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궁중에 하나의 구덩이를 파게하고, 큰 봉 수천 개를 두게 하였으니 만일 따르지 않는 자는 때려 죽여 묻겠습니다.”했다.
時有心腹將丘建在側。建乃護軍胡烈部下舊人也。時胡烈亦被監在宮。建乃密將鍾會所言,報知胡烈。烈大驚,泣告曰:「吾兒胡淵,領兵在外,安知會懷此心耶?汝可念向日之情,透一消息,雖死無恨。」建曰:「恩主勿憂,容某圖之。」遂出告會曰:「主公軟監諸將在內,水食不便,可令一人往來傳遞。」
그 때 심복 장수 구건이 옆에 있었다. 구건은 곧 호군 호열의 부하로 오래 있은 사람이었다. 그 때 호열이 또한 감금되어 궁에 있었다. 구건이 곧 비밀리 종회가 한 말을 호열에게 알렸다. 호열이 크게 놀라 울며 고하여 말하기를 “내 아이 호연이 군대를 거느리고 밖에 있는데 어찌 종회가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겠는가? 너는 옛날의 정을 생각하여 한 소식을 통하게 한다면 비로 죽어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했다. 구건이 말하기를 “은인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가 도모해보겠습니다.”하고는 마침내 나가 종회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주공께서 감금한 여러 장수들이 안에 있는데 물과 음식이 불편하니 한 사람을 시켜 왕래하면서 전하겠습니다.”했다.
會素聽丘建之言,遂令丘建監臨。會分付曰:「吾以重事託汝,休得洩漏。」建曰:「主公放心。某自有緊嚴之法。」建暗令胡烈親信人入內,烈以密書付其人。其人持書火速至胡淵營內,細言其事,呈上密書。淵大驚,遂遍示諸營知之。眾將大怒,急來淵營商議曰:「我等雖死,豈肯從反臣耶?」淵曰:「正月十八日中,可驟入內,如此行之。」監軍衛瓘,深喜胡淵之謀,即整頓了人馬,令丘建傳與胡烈。烈報知諸將。
종회는 평소 구건의 말을 잘 들었으므로 마침내 구건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다. 종회가 분부하여 말하기를 “내가 중요한 일을 너에게 맡겼으니 누설되지 않게 하라.”했다. 구건이 말하기를 “주공계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저에게 긴밀하고 엄격한 법이 있습니다.”했다. 구건이 몰래 호열로 하여금 직접 믿는 사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니 호열이 밀서를 그 사람에게 부탁하였다. 그 사람이 글을 가지고 불같이 빠르게 호연의 진영에 이르러 그 일을 자세히 말하고 밀서를 바쳤다. 호연이 크게 놀라 마침내 여러 진영에 두루 알려 알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크게 노하여 급히 호연의 진영에 와 상의해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기꺼이 배반한 신하를 따르겠는가?”했다. 호연이 말하기를 “정월 십팔일에 안으로 달려 들어가 이 같이 행동하자.”했다. 감군 호관이 호연의 꾀에 매우 기뻐하며 곧 인마를 정돈하여 구건으로 하여금 호열에게 전하게 했다. 호열이 여러 장들에게 알렸다.
卻說鍾會請姜維問曰:「吾夜夢大蛇數千條咬吾,主何吉凶?」維曰:「夢龍蛇者,皆吉慶之兆也。」會喜,信其言,乃謂維曰:「器仗已備,放諸將出問之,若何?」維曰:「此輩皆有不服之心,久必為害,不如乘早戮之。」
각설하고 종회가 강유를 청해 물어 말하기를 “내가 밤에 꿈을 꾸었는데 큰 뱀 수천 마리가 나를 깨물었습니다, 길흉이 어떠합니까?”하니 강유가 말하기를 “용과 뱀 꿈은 모두 길하고 경사스러운 조짐입니다.”했다. 종회가 기뻐하며 그 말을 믿고 곧 강유에게 일러 말하기를 “무기들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여러 장수들을 나오게 하여 물어보는 것이 어떠합니까?” 했다. 강유가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 오래되면 반드시 해가 될 것이니 빨리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했다.
會從之,即命姜維領武士往殺眾魏將。維領命,方欲行動,忽然一陣心疼,昏倒在地,左右扶起,半晌方甦。忽報宮外人聲沸騰。會方令人探時,喊聲大震,四面八方,無限兵到。維曰:「此必是諸將作亂,可先斬之。」
종회가 그것을 따라 곧 강유로 하여금 무사를 데리고 가서 여러 장수들을 죽이게 했다. 강유가 명을 받고 막 행동하여하는데 홀연히 한 바탕 심장이 아파 기절하여 땅에 엎어지니 좌우가 부축해 일으켜 반나절 후에 깨어났다. 홀연히 궁 밖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물 끓듯이 일어났다. 종회가 막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라 할 때 함성이 크게 진동하며 사방팔방에서 한없는 군대가 이르렀다. 강유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여러 장수들이 난을 일으킨 것이니 먼저 베어야 합니다.”했다.
忽報兵已入內。會令關上殿門,使軍士上殿屋以瓦擊之,互相殺死數十人。宮外四面火起,外兵砍開殿門殺入。會自掣劍立殺數人,卻被亂箭射倒。眾將梟其首。維拔劍上殿,往來衝突,不幸心疼轉加。維仰天大叫曰:「吾計不成,乃天命也!」遂自刎而死;時年五十九歲。宮中死者數百人。衛瓘曰:「眾軍各歸營所,以待王命。」魏兵爭欲報讎,共剖維腹,其膽大如雞卵。眾將又盡取姜維家屬殺之。鄧艾部下之人,見鍾會、姜維已死,遂連夜去追劫鄧艾。
홀연히 군대가 이미 궁 안으로 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종회가 궁궐문에 빗장을 걸게 하고(궁궐문을 닫게 하고) 군사로 하여금 궁궐 지붕에 올라 기와를 던져 서로 수십 명을 죽였다. 궁 밖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밖의 군대가 궁궐 문을 베어 열고 달려 들어왔다. 종회가 스스로 검을 잡고 그 자리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어지러운 화살에 맞아 엎어졌다. 여러 장수들이 그 머리를 베어 매 달았다. 강유가 검을 뽑아 전각에 올라 왕래하며 충돌하였으나(쳤으나)불행히도 심장병이 위독하였다. 강유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쳐 말하기를 “ 나의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곧 천명이구나!”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 때 나이 오십구 세였다. 궁 안에서 죽은 자가 수 백 명이었다. 위관이 말하기를 “여러 군사들은 각각 진영이 있는 곳으로 돌아 가 왕의 명령을 기다리라.”고 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다투어 원수를 갚고자 하여 함께 강유의 배를 가르고 보니 그 담이 계란 만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또 강유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 죽였다. 등애의 부하였던 사람이 종회와 강유가 죽은 것을 보고 마침내 밤을 이어 등애를 쫓아 가 구하려 했다.
早有人報知衛瓘。瓘曰:「是我捉艾,今若留他,我無葬身之地矣。」護軍田續曰:「昔鄧艾取江油之時,欲殺續,得眾官告免。今日當報此恨。」瓘大喜,遂遣田續引五百兵趕至綿竹,正遇鄧艾父子放出檻車,欲還成都。艾只道是本部兵到,不作準備;欲待問時,被田續一刀斬之。鄧忠亦死於亂軍之中。後人有詩歎鄧艾曰:
재빨리 어떤 사람이 위관에게 알렸다. 위관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등애를 잡았는데 지금 만약 그를 남겨둔다면 나는 나를 장례치를 땅이 없을 것이다.”했다. 호군 전속이 말하기를 “옛날 등애가 강유를 취하였을 때 저를 죽이고자 하였는데 여러 관리들이 고하여 (죽음을)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마땅히 이 한을 갚아야겠습니다.”했다. 위관이 크게 기뻐하며 마침내 전속을 보내 군대 오백 명을 이끌고 뒤쫓아 면죽에 이르렀을 때 등애 부자가 함거에서 풀려나와 성도로 돌아가려 하고 있는 것을 만났다. 등애는 다만 본부의 군대가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여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등애가)물으려할 때 전속이 한 칼에 베어 죽였다. 등충 또한 어지러운 군대 안에서 죽었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기리기를
自幼能籌畫,多謀善用兵。凝眸知地理,仰面識天文。馬到山根斷,兵來石徑分。功成身被害,魂繞漢江雲。
“어려서부터 계획을 잘하고, 꾀가 많으며 군대를 잘 운용하였다. 눈동자를 모으면 지리를 알았고, 얼굴을 들면 천문을 알았다. 말이 이르면, 산 뿌리가 끊어지고, 군대가 오면 돌길이 나누어진다. 공을 이루었으나 자신은 해를 입고, 혼은 한강의 구름처럼 떠돈다.”했다.
又有詩歎鍾會曰:
또 종회를 기린 시도 있는데
髫年稱早慧,曾作祕書郎,妙計傾司馬,當時號子房。壽春多贊畫,劍閣顯鷹揚。不學陶朱隱,遊魂悲故鄉。
“어린 시절 지혜롭다 칭찬받아 일찍이 비서랑이 되었다. 현묘한 계책은 사마씨를 기울게 하여 당시에 장자방(장량)이라 불렸다. 수춘에서 많은 계책 칭찬 받고, 검각에서는 매처럼 용맹 드러났다. 도주공(범려)의 숨는 것을 배우지 못해 떠도는 넋이 고향을 그린다.” 했다.
又有詩歎姜維曰:
또 강유를 기리는 시에
天水誇英俊,涼州產異才。系從尚父出,術奉武侯來。大膽應無懼,雄心誓不回。成都身死日,漢將有餘哀。
천수에서 빼어남을 자랑하고 양주에서 기이한 재능을 낳았다. 상부 주공으로부터 나왔고, 방법은 우후(제갈공명)를 받들었다. 대담하여 두려워함이 없어, 웅심으로 맹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성도에서 죽은 날, 한나라 장수들이 슬퍼하였다.
卻說鍾會、姜維、鄧艾已死,張翼等亦死於亂軍之中。太子劉璿,漢壽亭侯關彝,皆被魏兵所殺。軍民大亂,互相踐踏,死者不計其數。旬日後,賈充先至,出榜安民,方始寧靖。留衛瓘守成都,乃遷後主赴洛陽。止有尚書令樊建、侍中張紹、光祿大夫譙周、秘書郎卻正等數人跟隨。廖化、董厥皆託病不起,後皆憂死。
각설하고 종회, 강유, 등애가 죽은 후 장익 등이 또한 어지러운 군대 안에서 죽었다. 태자 유선, 한수정후관이는 모두 위나라 군대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군대와 백성들이 크게 혼란스러워 서오 밟아 죽은 이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십일 후 가충이 먼저 이르러 방을 붙여 백성을 안정시키니 비로소 안정되었다. 위관을 남겨 성도를 지키게 하고 후주를 옮겨 낙양으로 갔다. 다만 상서령 번건, 시중 장소, 광록대부 초주, 비서랑 각정 등 몇 명만이 뒤를 따라갔다. 요화, 동궐은 모두 병을 핑계로 일어나지 않다가 후에 모두 근심하다 죽었다.
時魏景元五年,改為咸熙元年。春三月。吳將丁奉,見蜀已亡,遂收兵還吳。中書承華覈奏吳主孫休曰:「吳、蜀乃脣齒也。『脣亡則齒寒』。臣料司馬詔伐吳在即,乞陛下深加防禦。」休從其言,遂命陸遜子陸抗為鎮東大將軍,領荊州牧,守江口;左將軍孫異守南徐諸處隘口;又沿江一帶,屯兵數百營,老將丁奉總督之,以防魏兵。
그 때 위나라는 경원 오년을 함희 원년으로 고쳤다. 봄 삼월 오나라 장수 정봉은 촉이 망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오나라로 돌아갔다. 중서승 화핵이 오나라 임금 손휴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오나라와 촉은 곧 입술과 이빨의 관계입니다. ‘입술이 없으면 곧 이빨이 시리다.’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데 사마소가 곧 오나라를 정벌할 것이니 폐하께서는 깊이 방어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손휴가 그 말을 따라 마침내 육손의 아들 육항을 진동대장군으로 삼아 형주목을 거느리게 하여 강구를 지키게 하였다. 좌장군 손이는 남서 여러 요해를 지키게 하고, 또 강 일대를 따라 군대 수 백 진영을 주둔시켜 노장 정봉으로 하여금 총 감독하게 하여 위나라 군대를 방비하게 하였다.
建寧太守霍戈聞成都不守,素服望西大哭三日。諸將皆曰:「既漢主失位,何不速降?」戈泣謂曰:「道路隔絕,未知吾主安危若何?若魏主以禮待之,則舉城而降,未為晚矣;萬一危辱吾主,則主辱臣死,何可降乎?」眾然其言,乃使人到洛陽,探聽後主消息去了。
건영태수 곽과가 성도를 지키지못하였다는 것을 듣고 흰 옷을 입고 삼일 간 크게 곡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한나라 임금이 지위를 잃었는데 어찌하여 속히 항복하지 않습니까?”하니 곽가가 울며 말하기를 “도로가 끊어져 우리 임금의 안위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위나라 임금이 예로서 대우한다면 곧 성을 들어 항복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 임금을 위태롭게 하고 욕을 준다면 곧 임금의 욕은 신하의 죽음이니 어떻게 항복할 수 있겠는가?”했다. 무리들이 그 말을 그렇다 여기고 곧 사람을 시켜 낙양에 이르러 후주의 소식을 탐지하러 가게 하였다.
且說後主至洛陽時,司馬昭已自回朝。昭責後主曰:「公荒淫無道,廢賢失政,理宜誅戮。」後主面如土色,不知所為。文武皆奏曰:「蜀主既失國紀。幸早歸降,宜赦之。」昭乃封禪為安樂公,賜住宅,月給用度,賜絹萬疋,僮婢百人。子劉瑤及群臣─樊建、譙周、卻正等,─皆封侯爵。後主謝恩出內。昭因黃皓蠹國害民,令武士押出市曹,凌遲處死。
각설하고 후주가 낙양에 이르렀을 때 사마소는 이미 조정에 돌아와 있었다. 사마소가 후주를 꾸짖어 말하기를 “공(후주)은 황음무도하여 어진이를 없애고 정사를 잘못하였으니 이치상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하니 후주의 얼굴이 흙색(누렇게)으로 변하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문무관이 모두 아뢰어 말하기를 “촉의 임금이 이미 나라를 잃었고, 다행히 일찍 항복하였으니 풀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했다. 사마소가 이에 선(후주)를 봉하여 안락공으로 삼고, 주택을 내리고 매월 생활비를 주며 비단 만필과 종 백 명을 내려주었다. 아들 유요와 여러 신하들 중 번건, 초주, 각정 등은 모두 후작에 봉하였다. 후주가 은혜에 감사하며 조정안에서 나갔다. 사마소는 황호가 나라를 좀 먹고, 백성을 해쳤기 때문에 무사로 하여금 압송해 거리에 나가 능지처사(사지를 짖어죽이게)하게 하였다.
時霍戈探聽得後主受封,遂率部下軍士來降。次日,後主親詣司馬昭府下拜謝。昭設宴款待,先以魏樂舞戲於前,蜀官感傷,獨後主有喜色。昭令蜀人扮蜀樂於前,蜀官盡皆墮淚,後主嬉笑自若。酒至半酣,昭謂賈充曰:「人之無情,乃至於此!雖使諸葛孔明在,亦不能輔之久全,何況姜維乎?」乃問後主曰:「頗思蜀否?」後主曰:「此間樂,不思蜀也。」
그 때 곽과는 후주가 봉함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마침내 부하군사를 인솔해 와 항복하였다. 다음날 후주가 직접 사마소 부에 나아가 절하며 사례하였다. 사마소가 연회를 베풀고 정성껏 대접하면서 먼저 위나라 음악과 춤을 추어 앞에서 희롱하니 촉의 관리들이 서글퍼 하였으나 촉의 후주만은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 사마소가 촉 사람들로 하여금 앞에서 촉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촉의 관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데 후주만은 낄낄 웃으며 태연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 사마소가 가충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람이 무정하기가 이에 이르렀구나! 비록 제갈공명이 살아 있었다 할지라도 또 보좌하기를 오래하지 못하였을 터인데 하물며 강유이겠는가?”했다. 곧 후주에게 물어 말하기를 “자못 촉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하니 후주가 말하기를 “이 사이(요즘) 즐거우니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다.”했다.
須臾,後主起身更衣,卻正跟至廂下曰:「陛下如何答應不思蜀也?」倘彼再問,可泣而答曰:『先人墳墓,遠在蜀地,乃心西悲,無日不思。』晉公必放陛下歸蜀矣。」後主牢記入席。酒將微醉,昭又問曰:「頗思蜀否?」後主如卻正之言以對,欲哭無淚,遂閉其目。昭曰:「何乃似卻正語耶?」後主開目驚視曰:「誠如尊命。」昭及左右皆笑之。昭因此深喜後主誠實,並不疑慮。後人有詩歎曰:
잠시 후 후주가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을 때 각정이 뒤를 따라 곁방에 이르러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촉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습니까? 만약 그들이 다시 묻는다면 눈물을 흘리시며 답하기를 ‘선조의 무덤이 멀리 촉 땅에 있으니 곧 마음이 서쪽으로 서글퍼 하루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하십시오. 진공(사마소)은 반드시 폐하를 놓아주어 촉으로 돌아가시게 할 것입니다.” 했다. 후주가 잘 기억하고 자리에 들어왔다. 술이 약간 취하려할 때 사마소가 또 물어 말하기를 “자못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까?”하니 후주가 각정의 말로서 대답하며 곡하고자 하나 눈물이 나지 않아 마침내 눈을 감아버렸다. 사마소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각정의 말과 비슷합니까?”하니 후주가 눈을 뜨고 놀라 바라보며 말하기를 “진실로 말을 하신대로입니다.”하니 사마소와 좌우가 모두 웃었다. 사마소가 이 때문에 매우 기뻐하며 후주가 매우 성실하다 여겨 의심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追歡作樂笑顏開,不念危亡半點哀。快樂異鄉忘故國,方知後主是庸才。
즐거움을 따라 음악 연주에 얼굴 가득 웃음 띠니 위태롭고 망한 일에 반점의 슬픔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쾌락에 빠져 옛 나라를 잊으니 비로소 후주가 용렬한 재능임을 알았다.
卻說朝中大臣因昭收川有功,遂尊之為王,表奏魏主曹奐。時奐名為天子,實不能主張,政皆由司馬氏,不敢不從,遂封晉公司馬昭為晉王,諡父司馬懿為宣王,兄司馬師為景王。昭妻乃王肅之女,生二子:長曰司馬炎,人物魁偉,立髮垂地,兩手過膝,聰明英武,膽量過人;次曰司馬攸,性情溫和,恭儉孝悌,昭甚愛之,因司馬師無子,嗣攸以繼其後。昭常曰:「天下者,乃吾兄之天下也。」
각설하고 조정의 대신들이 사마소가 천(촉)을 거두는데(정벌하는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를 높여 왕으로 삼을 것을 표로 조환에게 아뢰었다. 그 때 조환은 명목상 천자가 되었으나 실제는 주장하지 못하고, 정사가 모두 사마씨에게서 나왔으나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진공 사마소를 봉하여 진왕이라 하였다. 아버지 사마의는 시호를 선왕이라하고, 형 사마사는 경왕이라 했다. 사마소의 처는 곧 왕숙의 딸로 두 아들을 낳았으니 장자는 사마염인데 인물이 크고 훤칠하고, 서면 머리카락이 땅에 드리우고, 두 손은 무릎을 지나며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났으며 담과 도량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둘째는 사마유로 성격이 온화하고 공경하고 겸손하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사마소가 매우 아꼈다. 사마사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유를 후사로 삼아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사마소가 항상 말하기를 “천하는 곧 우리 형의 천하이다.”했다.
於是司馬昭受封晉王,欲立攸為世子。山濤諫曰:「廢長立幼,違禮不祥。」賈充、何曾、裴秀亦諫曰:「長子聰明神武,有超世之才;人望既茂,天表如此,非人臣之相也。」昭猶豫未決,太尉王祥、司空荀顗諫曰:「前代立少,多致亂國。願殿下思之。」
이에 사마소가 진왕의 봉함을 받자 사마유를 세워 세자로 삼으려 했다. 산도가 간하여 말하기를 “장자를 폐하고 어린 아이를 세우는 것은 예에 어긋나고 상서롭지 못합니다.”했다. 가충, 하증, 배수가 또 간하여 말하기를 “맏아들이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나고, 세상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 사람들의 바람이 이미 성대하고, 하늘의 뜻도 이 같으니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상이 아닙니다.”했다. 사마소가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태위 왕상, 사공 순의가 간하여 말하기를 “전대(앞 왕조)에 어린 이를 세웠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생각하십시오.”했다.
昭遂立長子司馬炎為世子。大臣奏稱:「當年襄武縣,天降一人,身長二丈餘,腳跡長三尺二寸,白髮蒼髯,著黃單衣,裹黃巾,拄藜頭杖,自稱曰:『吾乃民王也。今來報汝:天下換王,立見太平。』如此在市遊行三日,忽然不見。此乃殿下之瑞也。殿下可戴二十旒冠冕,建天子旌旗,出警入蹕,乘金根車,備六馬,進王妃為王后,立世子為太子。」
사마소가 마침내 맏아들 사마염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대신들이 칭찬을 아뢰어 말하기를 “올해 양무현에서 한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키가 이장이 넘었고, 발자국 길이가 세자 세치이고, 흰 머리카락에 푸름 수염이었습니다. 누른색의 한 겹 옷을 입고 누른 건을 쓰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었는데 스스로 ‘나는 곧 민왕이다. 지금 와서 너에게 알리는 것은 왕을 바꾸어 세우면 태평을 보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같이 하면서 삼일 간 거리를 돌아다니다 홀연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곧 전하의 상서로움입니다. 전하께서는 이십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깃발을 세우며, 나갈 때 경계하고, 들어올 때 길을 치우며 금근거를 타는데 여섯 마리 말을 갖추어 끌게 하십시오. 왕비를 올려 왕후라 하고, 세자를 세워 태자라 하십시오.”했다.
昭心中暗喜;回到宮中,正欲飲酒,忽中風不語。次日病危,太尉王祥、司徒何曾、司馬荀顗及諸大臣入宮問安,昭不能言,以手指太子司馬炎而死。時八月辛卯日也。何曾曰:「天下大事,皆在晉王;可立太子為晉王,然後祭葬。」是日司馬炎即晉王位,封何曾為晉丞相,司馬望為司徒,石苞為驃騎將軍,陳騫為車騎將軍,諡父為文王。
사마소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돌아가 궁중에 이르러 술을 마시고자 하는데 홀연히 풍에 맞아(중풍)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병이 위급해지자 태위 왕상, 사도 사증, 사마순의와 여러 대신들이 궁에 들어 와 문안하였다. 사마소는 말을 하지 못하여 손으로 태자 사마염을 가리키며 죽었다. 때는 팔월 신묘일이다. 하증이 말하기를 “천하 대사가 모두 진왕에게 있었으니 태자를 세워 진왕으로 삼음 후 장례해야 합니다.”했다. 이날 사마염이 진왕 자리에 올랐다. 하증을 봉해 진 승상이라 하고, 사마망은 사도로 삼고, 석포는 표기 장군으로 삼고, 진건은 거기장군으로 삼고 부왕(사마소)의 시호를 문왕이라 했다.
安葬已畢,炎召賈充、裴秀入宮問曰:「曹操曾云:『若天命在吾,吾其為周文王乎?』果有此事否?」充曰:「操世受漢祿,恐人議論篡逆之名,故出此言;乃明教曹丕為天子也。」炎曰:「孤父王比曹操何如?」充曰:「操雖功蓋華夏,下民畏其威而不懷其德。子丕繼業,差役甚重,東西驅馳,未有寧歲。後我宣王、景王,累建大功,布恩施德,天下歸心久矣。文王併吞西蜀,功蓋寰宇,又豈操之可比乎?」炎曰:「曹丕尚紹漢統,孤豈不可紹魏統耶?」賈充、裴秀二人再拜而奏曰:「殿下正當法曹丕紹漢故事,復築受禪臺,布告天下,以即大位。」
장례를 마치고 사마염이 가충, 배수를 불러 궁에 들어오자 물어 말하기를 “조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천명이 나에게 있다면 나는 주나라 문왕이 될 수 있겠는가?’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했다. 가충이 말하기를 “조조는 대대로 한나라의 녹을 받아 사람들이 찬역(나라를 빼앗은 일)의 이름을 의논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에 조비로 하여금 천자가 되라고 분명히 한 것입니다.”했다. 사마염이 말하기를 “나의 부왕(사마소)은 조조에 비하여 어떠합니까?”하니 가충이 말하기를 “조조가 비록 공이 화하(중국)을 덮었으나 백성들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그 덕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아들 조비가 업을 이어 부역을 매우 심하게 시키고, 동서로 치달아(전쟁을 일으켜) 편안한 해가 없었습니다. 후에 우리 선왕, 경왕, 여러 번 큰 공을 세우고 은혜를 펴고 덕을 베풀어 천하의 마음이 귀의 한지 오래되었습니다. 문왕은 서촉을 병탄하였으니 공이 환우(우주)를 덮었으니 또 어ㅉ 조조에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사마염이 말하기를 “조비는 한나라의 전통을 이었는데 나는 어찌 위나라의 전통을 이을 수 없겠는가?”했다. 가충, 배수 두 사람이 두 번 절하고 아뢰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마땅히 조비가 한나라를 이은 옛 일을 본 받아 다시 선양을 받는 대를 쌓고, 천하에 펴 알리는 것으로서 대위(천자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했다.
炎大喜,次日帶劍入內。此時魏主曹奐,連日不曾設朝,心神恍惚,舉止失措。炎直入後宮,奐慌下御榻而迎。炎坐定問曰:「魏之天下,誰之力也?」奐曰:「皆晉王父祖之賜耳。」炎笑曰:「吾觀陛下,文不能論道,武不能經邦,何不讓有才德者主之?」
사마염이 크게 기뻐하며 다음 날 검을 차고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위나라 임금 조환은 연일 조회를 열지 못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어지러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사마염이 바로 후궁에 들어가니 조환이 황망히 어탑에서 내려와 맞이하였다. 사마염이 자리에 앉아 물어 말하기를 “위나라의 천하는 누구의 힘입니까?”하니 조환이 말하기를 “모두 진왕 부조의 내림일 뿐입니다.”했다. 사마염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폐하를 관찰해 보니 학문은 도를 논할 수 없고, 무예는 나라를 경영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재능과 덕이 있는 자에게 양보해 맡기지 않으십니까?”했다.
奐大驚,口噤不能言。傍有黃門侍郎張節大喝曰:「晉王之言差矣!昔日魏武祖皇帝,東蕩西除,南征北討,非容易得此天下;今天子有德無罪,何故讓與人耶?」炎大怒曰:「此社稷乃大漢之社稷也。曹操挾天子以令諸侯,自立魏王,篡奪漢室,吾祖父三世輔魏,得天下者,非曹氏之能,實司馬氏之力也。四海咸知,吾今日豈不堪紹魏之天下乎?」節又曰:「欲行此事,是篡國之賊也!」炎大怒曰:「吾與漢家報讎,有何不可!」
조환이 크게 놀라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옆에 황문시랑 장절이 있다가 크게 외쳐 말하기를 “진왕의 말이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 위나라 무조황제(조조)가 동쪽을 쓸어 없애고, 서쪽을 제거하고, 남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쉽게 이 천하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천자께서는 덕이 있고, 죄가 없는데 무슨 이유로 양보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까?”했다. 사마염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사직은 곧 대 한나라의 사직이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여 스스로 위왕에 올랐으니 한나라를 찬탈한 것이다. 나, 할아버지, 아버지 삼대가 위나라를 도와 천하를 얻은 것은 조씨의 능력이 아니라 실로 사마씨의 힘이었다는 것은 사해가 모두 안다. 내가 오늘 어찌하여 위나라의 천하를 잇지 못하겠는가?”했다. 장절이 또 말하기를 “이런 일을 행하려 하는 것은 나라를 빼앗는 도적이다.”했다. 사마염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는 한나라의 원수를 갚아주려는데 무슨 못할 것이 있겠는가!” 했다.
叱武士將張節亂棍打死於殿下。奐泣淚跪告。炎起身下殿而去。奐謂賈充、裴秀曰:「事已急矣,如之奈何?」充曰:「天數盡矣,陛下不可逆天,當照漢獻帝故事,重修受禪臺,具大禮,禪位與晉王。上合天心,下順民情,陛下可保無虞矣。」
(사마염이)무사를 질책하여 장절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 전강 아래서 죽이게 했다. 조환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빌었다.) 사마염이 몸을 일으켜 전각을 내려갔다. 조환이 가충, 배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가충이 말하기를 “하늘의 운수가 다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하늘을 거슬러서는 안 되니 마땅히 한나라 헌제의 옛 일에 비추어 수선대(선양의 예를 행하는 대)를 고치고 큰 예를 갖추어 천자의 자리를 양보하여 진왕에게 주어야 합니다.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합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정을 따르는 것이니 폐하께서는 목숨을 보존하고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했다.
奐從之,遂令賈充築受禪臺。以十二月甲子日,奐親捧傳國璽,立於臺上,大會文武。後人有詩歎曰:
조환이 그것을 따라 마침내 가충으로 하여금 수선대를 쌓게 하였다. 십이월 갑자일 조환이 직접 국새를 받들고 수선대 위에 올라 크게 문무관리를 모이게 했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해 말하기를
魏吞漢室晉吞曹,天運循環不可逃。張節可憐忠國死,一拳怎障泰山高?
“위나라는 한나라를 삼키고, 진나라는 조씨를 삼키니 하늘의 운수는 돌고돌아 달아날 수 없다. 장절은 불쌍하게도 나라에 충성하다 죽지만 한 주먹으로 어찌 태산의 높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했다.
請晉王司馬炎登壇,授與大禮。奐下壇,具公服立於班首。炎端坐於臺上。賈充、裴秀列於左右,執劍,令曹奐再拜伏地聽命。充曰:「自漢建安二十五年,魏受漢禪,已經四十五年矣。今天祿永終,天命在晉,司馬氏功德彌隆,極天際地,可即皇帝正位,以紹魏統。封汝為陳留王,出就金墉城居止。當時起程,非宣詔不許入京。」
진왕 사마염에게 단에 오르기를 청하여 대례(황제의 자리를 양보하는 예)를 베풀었다. 조환이 단을 내려가 공복을 갖춰 입고 신하들 반열 앞에 섰다, 사마염이 대 위에 단정히 앉았다. 가충, 배수가 좌우에 서서 검을 잡고 조환으로 하여금 두 번 절하고 땅에 엎드려 명을 받게 하였다. 가충이 말하기를 “한나라 건안 이십 오년 위나라가 한나라의 선양을 받음으로부터 사십 오년이 지났다. 지금 하늘의 녹이 영원히 끝나고 천명이 진에 있고, 사마씨의 공과 덕이 융성하여 하늘을 다하고 땅에 닿았으니 황제의 바른 자리에 올라 위나라의 전통을 이었다. 너를 봉하여 진류왕으로 삼으니 나가 금용성에 머물라. 즉시 길을 떠나 왕제의 명이 아니면 수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했다.
奐泣謝而去。太傳司馬孚哭拜於奐前曰:「臣身為魏臣,終不背魏也。」炎見孚如此,封孚為安平王。孚不受而退。是日文武百官,再拜於臺下,三呼萬歲。炎紹魏統,國號大晉,改元為太始元年,大赦天下。魏遂亡。後人有詩歎曰:
조환이 울며 감사한 후 갔다. 태부 사마부가 곡하며 조환 앞에서 절하고 말하기를 “신의 몸이 위나라 신하가 되었으니 끝내 위나라를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했다. 사마염이 사마부의 이 같음을 보고 사마부를 봉해 안평왕으로 삼았다. 사마부가 받지 않고 물러났다. 이날 문무백관이 대 아래서 두 번 절하고 세 번 만세를 불렀다. 사마염이 위나라 전통을 잇고 나라 이름을 대진이라 부르고 연호를 고쳐 태시 원년이라 하고 크게 천하의 죄수를 풀어주었다. 위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후세 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하기를
晉國規模如魏王,陳留蹤跡似山陽。重行受禪臺前事,回首當年止自傷。
“진나라는 위나라 왕을 모방하였을 뿐이고, 진류왕의 자취도 산양왕(헌제)와 같다. 거듭 수선대에서 앞의 일을 행하니 머리를 돌려 그해를 스스로 서글퍼 할 뿐이다.”
晉帝司馬炎,追諡司馬懿為宣帝,伯父司馬師為景帝,父司馬昭為文帝,立七廟以光祖宗。那七廟?漢征西將軍司馬鈞,鈞生豫章太守司馬亮,亮生潁川太守司馬雋,雋生京兆尹司馬防,防生宣帝司馬懿,懿生景帝司馬師,文帝司馬昭;是為七廟也。大事已定,每日設朝計議伐吳之策。正是:漢家城郭已非舊,吳國江山將復更。未知怎生伐吳,且看下文分解。
진나라 황제 사마염은 사마의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선제라 하고, 백부 사마사를 경제라 하고, 아버지 사마소를 문제라 하고 일곱 개 사당을 세우는 것으로서 조종을 빛나게 하였다. 어떻게 일곱 개 사당인가? 한나라 정서장군 사마균은 예장태수 사마량을 낳고, 사마량은 영천태수 사마전을 낳고, 사마전은 경조윤 사마방을 낳고, 사마방은 선제 사마의를 낳고, 사마의는 경제 사마사, 문제 사마소를 낳았으니 이것이 칠묘가 된다. 대사가 이미 정해지니 매일 조회를 열러 오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논의하였다. 바로 이러하다. 한 나라의 성곽은 이미 옛날과 같지 않고, 오나라의 강산도 장차 바뀌겠구나. 어떻게 오나라를 정벌할지 알지 못하겠구나. 또 아래 글에서 나누어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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