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庾信
虎力伊干之子舒玄角干金氏之長子曰庾信 弟曰欽純 姊姝曰寶姬小名阿海 妹曰文姬小名阿之 庾信公以眞平王十七年乙卯生 禀精七曜 故背有七星文 又多神異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時有白石者 不知其所自來 屬於徒中有年 郞以伐麗濟之事 日夜深謀 白石知其謀 告於郞曰 僕請與公密先探於彼 然後圖之何如? 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김유신
호력(김무력)이간(이찬)의 아들 서현 각간의 맏아들이 유신이다. 동생은 흠순이고, 맏누이는 보희로 어렸을 때 이름은 아해이다. 그 아래 누이는 문희로 어렸을 때 이름은 아지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에 태어났는데 일곱 개 별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에 등에 일곱 개 별 무늬가 있었고, 또 신이한 점이 많았다. 나이 18세인 임신년에 이르러 검술을 수렴하여 국선이 되었다. 이 때 백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어디서 온지를 알지 못하나 무리(낭도) 중에 속한 지 여러 해였다. 낭(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일 때문에 밤낮으로 깊이 계획하였다. 백성이 그 계획을 알고 낭(김유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는 공(김유신)과 더불어 몰래 먼저 그들을 정탐할 것을 청합니다. 그렇게 한 후 도모하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낭(김유신)이 기뻐하며 직접 백석을 데리고 밤에 나갔다. 바야흐로 고개 위에서 쉬고 있는데 두 여자가 낭(김유신)을 따라 왔다.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至 公與三娘子喜話之時 娘等以美菓餽之 郞受而啖之 心諾相許 乃說其情 娘等告云 公之所言已聞命矣 願公謝白石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奈林穴禮骨火等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仆 再拜而出 宿於骨火館 謂白石曰 今歸他國 忘其要文 請與爾還家取來
골화천에 이르러 잠을 자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이르렀다. 공과 세 처자가 기쁘게 말을 나누고 있을 때 처자들이 맛있는 과자를 주었다. 낭(김유신)이 받아먹으면서 마음으로 서로 허락하고 그 실정을 말하였다. 처자들이 알려 말하기를 “공(김유신)이 말한 바를 이미 들었습니다. 공(김유신)이 백석을 떼어놓고 함께 숲속에 들어가시면 다시 실정을 말하겠습니다.”했다. 이에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니 처자들이 곧 신의 형상을 드러내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입니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김유신)을 유인하여 이끌고 있는데도 낭(김유신)이 알지 못하고 길을 가고 있어서 우리들이 낭(김유신)을 만류하고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는 말을 마치고 숨었다.(사라졌다.) 공(김유신)이 그것을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나와 골화관에서 묵으면서 백석에게 일러 말하기를 “자금 다른 나라에 들어가는데 중요한 문서를 잊어버렸으니 너와 함께 집에 돌아 가 가져올 것을 청한다.”했다.
遂與還至家 拷縛白石而問其情 曰 我本高麗人(古本云百濟 誤矣 楸南乃高麗之士 又逆行陰陽亦寶藏王事) 我國群臣曰 新羅庾信是我國卜筮之士楸南也(古本作春南 誤矣) 國界有逆流之水(或云雄雌 尤反覆之事) 使其卜之 奏曰 ?大王夫人逆行陰陽之道 其瑞如此? 大王驚怪 而王妃大怒 謂是妖狐之語 告於王 更以他事驗問之 失言則加重刑 乃以一鼠藏於合中 問是何物
마침내 돌아가 집에 이르러 백석을 묶어 고문하며 그 실정을 물었다. 백석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인데(옛 책에 백제라 한 것은 잘못이다. 추남은 곧 고구려의 선비이고, 또 음양을 거슬러 행한 것은 보장왕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신라의 김유신은 우리나라의 점쟁이 추남이다.(옛 책에 춘남이라 쓴 것은 잘못이다.) 나라의 경계에 거슬러 흐르는 물이 있어(혹은 웅자라 하는데 더욱 뒤집히는 일이다.) 그것을 점치게 하였습니다.’ 점쟁이가 아뢰어 말하기를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리를 거슬러 그 조짐이 이와 같습니다.’했다.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왕비가 크게 노하여 이를 요사한 여우의 말이라 이르고, 왕에게 고하여 다시 다른 일을 가지고 시험 삼아 묻고 말을 잘못하면 곧 중한 형벌을 가하자고 했습니다. 이에 한 마리 쥐를 함에 감추어 두고 이 이것이 무슨 물건인지 물었다.
其人奏曰 ?是必鼠 其命有八? 乃以謂失言 將加斬罪 其人誓曰 ?吾死之後 願爲大將 必滅高麗矣? 卽斬之 剖鼠腹視之 其命有七 於是知前言有中 其日夜大王夢 楸南入于新羅舒玄公夫人之懷 以告於群臣 皆曰 ?楸南誓心而死 是其果然? 故遣我至此謀之爾 公乃刑白石 備百味祀三神 皆現身受奠 金氏宗財買夫人死 葬於靑淵上谷 因名財買谷 每年春月 一宗士女會宴於其谷之南澗 于時百卉敷榮 松花滿洞府林 谷口架築爲庵 因名松花房 傳爲願刹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虎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 東向走峯
그 사람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쥐일 것이고, 그 수가 여덟마리입니다.’했다. 이에 잘못 말하였다하여 베어 죽이는 죄의 형벌을 가하여 하였다 그 사람이 맹서해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없앨 것이다.’했습니다. 곧 베어 죽이고 쥐의 배를 갈라보니 그 수가 일곱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말한 것이 맞았음을 알았습니다. 그 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배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여러 신하들에게 알렸더니 모두 말하기를 ‘추남이 맹서하고 죽더니 이는 그 결과일 것입니다.’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보내 이곳에 이르러 당신을 도모하게 한 것입니다. 했다. 공(김유신)이 이에 백석을 죽이고 온갖 맛의 음식으로 세 신에게 제사하였더니 모두 몸을 드러내어 제사를 받았다. 김씨 댁 재매부인이 죽자 청연 위 골짜기에 장레하고 이로 인하여 재매곡이라 이름하였다. 해마다 봄에 그 종중의 남자와 여자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내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이 때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 속에 가득하였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송화방이라 이름 하였는데 전하여(후대에) 원찰로 삼았다. 54대 경명왕에 이르러 공(김유신)을 추봉하여 흥호대왕(흥무대왕)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 모지사 북쪽 동쪽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
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 妣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初文姬之姊寶姬 夢登西岳捨溺 瀰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我買此夢 姊曰與何物乎? 曰鬻錦裙可乎? 姊曰諾 妹開襟受之 姊曰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제 29대 태종대왕은 이름이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니 용수(용춘이라 쓰기도 한다.)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이고, 비는 문명왕후 문희이니 곧 유신공의 둘째 누이이다. 처음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었더니 경성(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동생에게 꿈을 말하였다. 문희가 그것을 듣고 일러 말하기를 “나에게 이 꿈을 파시오.”하니 언니가 말하기를 “무슨 물건을 주겠느냐?”했다.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 치마를 주면 되겠지요?”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좋다”하고 승낙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열고 받았다. 언니가 말하기를 “어제의 꿈을 너에게 전해 준다.”했다. 동생이 비단치마로 대가를 치렀다.
後旬日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戱)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 請曰入吾家縫之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 輕近貴公子乎? 因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嘖之曰 爾不告父母而有娠何也?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10여일 후 김유신과 춘추공이 정월 오기일(위 거문고를 쏜 일에 보인다. 곧 최치원의 설명이다.)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였다.(신라인들은 축국을 일러 농주의 희(구슬을 희롱하는 놀이)라 말한다.) 고의로(일부러) 김춘추의 옷(치마?)을 밟아 그 옷깃 끈을 찢어지게 했다. 김유신이 청해 말하기를 “우리 집에 들어 가 꿰매십시오.”하니 김춘추가 그 말을 따랐다. 김유신이 아해(보희)로 하여금 바느질을 하게 하였다. 아해(보희)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을 가지고 가벼이 귀공자를 가까이하겠습니까?”하고 사양하였다.(옛 책에는 병으로 인하여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아지(문희)에게 바느질 하게 했다. 공(김춘추)가 김유신의 뜻을 알고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 하였다. 이로부터 자루 왕래하였다. 김유신이 (아지:문희가)임신한 것을 알고 이에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임신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는 곧 나라 안에 그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고 선언하였다.
一日 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昵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太子法敏角干仁問角干文王角干老且角干智鏡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하루는 선덕왕(선덕여왕)이 남산에 가는 것을 기다렸다가(가는 틈을 타서) 뜰 안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니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 무슨 연기인지를 물었다. 좌우가 아뢰어 말하기를 “김유신이 누이를 태워 죽이는가 봅니다.”했다.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좌우가) 말하기를 “그 누이가 지아비 없이 임신함이 있었다고 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누구의 소행인가?”했다. 그 때 공(김춘추)이 가까이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는 너의 소행이구나. 속히 가서 구하라!”했다.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의 명령을 전하고 막았다. 이후로 드러내어 혼례를 행하였다. 진덕왕(진덕여왕)이 죽자 영휘 5년 갑인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8년째인 용삭 1년 신유에 돌아가시니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례하였는데 비가 있다. 왕(태종무열왕)과 김유신이 신 같은 계획과 힘을 다해 삼한을 하나로 통합하여 사직(나라)에 큰 공이 있었기 때문에 묘호(시호)를 태종이라 했다. 태자 법민, 각간 인문, 각간 문왕, 각간 노차, 각간 지경, 각간 개원을 모두 문희가 낳았다. 당시 꿈을 산 징험이 여기게 나타났다.
庶子曰皆知文級干車得令公馬得阿干幷女五人 王膳一日飯米三斗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酒六斗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 民謂之聖代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時 百濟末王義慈乃虎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서자는 개지문 급간, 차득, 영공, 마득 아간이라 하는데 딸과 합하면 다섯 병이다. 왕은 하루에 밥쌀 세 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다. 경신년에 백제를 없앤 후부터는 점심을 그만두고 다만 아침과 저녁뿐이었다. 그러나 계산하면 하루에 쌀 여섯 말과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였다. 성 안의 물가가 포 한 필에 조(정미하지 않은 곡식) 30석, 또는 50석이었다. 백성들이 성대라 일렀다. 동궁에 있을 때(태자가 시절)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군대를 청하러 당에 들어가니 당의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 말하고 기어이 머물게 하여 시위로 삼으려 하였으나 힘써 돌아갈 것을 청하엿다. 그 때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는 곧 호왕(무왕)의 원자이다. 영웅스럽고 용맹하고 담력이 있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효로서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그 때 해동증자라 불렀다.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媱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極諫不聽 囚於獄中 瘐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嵓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現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烏合寺)有大赤馬 晝夜六時 遶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정관 15년 신축에 즉위하자 주색에 빠져 정치는 거칠어지고 나라는 위태로워졌다. 좌평(백제의 벼슬 이름) 성충이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감옥에 가두었다. (상충이) 몸이 여위어 죽게 되었을 때 글을 써서 올려 말하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원합니다. 신이 일찍이 때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대를 쓸 때는 그 땅을 살펴 가려야 합니다. 상류에 머물러서 적을 맞이하면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온다면 육로로는 탄현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침현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요해처이다.) 수군은 기벌포(곧 장암, 또 손량이라 하고, 지화포, 또 백강이라 쓴다.)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험하고 좁은 곳에 기대 지킨 연후에야 할 수 있습니다.”했다. 왕이 살피지 않았다. 현경 4년 기미에 백제 오회사(혹은 오합사라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진을 절 주위에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 무리가 의자의 궁중에 들어 왔는데 한 마리 흰여우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갔다.
四月 太子宮雌雞與小雀交婚 五月 泗泚(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五年庚申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邊小魚出死 百姓食之不盡 泗泚水血色 四月 蝦蟆數萬集於樹上 王都市人無故驚走 如有捕捉 驚仆死者百餘 亡失財物者無數
4월에는 태자 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부여강의 이름이다.)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다.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 궁중의 회화나무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것과 같았다. 밤에 귀신들이 궁 남쪽 길 위에서 곡하였다. 5년 경신 봄 2월에 왕도(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 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다 먹지 못하였다. 사비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 두꺼비(청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왕도(서울) 저자 사람들이 이유없이 놀라 달아나는데 마치 잡음이 있는 것 같았고, 놀라 엎어져 죽은 이가 백여 명이었으며 잃어버린 재물은 헤아릴 수 없었다.
六月 王興寺僧皆見如舡楫隨大水入寺門 有大犬如野鹿 自西至泗泚岸 向王宮吠之 俄不知所之 城中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而散 有一鬼入宮中 大呼曰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 (曰)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 問之巫者 云 圓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新月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圓月輪盛也 如新月者微也 意者國家盛而新羅寢微乎 王喜
6월 왕흥사 스님들이 배가 노를 저어 큰물을 따라 절 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들에 있는 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으로부터 사비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해 짖다가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성 안에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곡하다 잠시 후 흩어졌다. 한 귀신이 궁중에 들어 와 크게 외치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고는 곧 땅에 들어갔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곳을 파게 하였더니 깊이 석자 정도에 한 거북이 있고, 그 등에 문자가 있었는데 “백제는 온달(보름달)이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했다. (왕이) 그것을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말하기를 “온달(보름달)은 가득 찬 것인데 가득차면 곧 이지러지게 됩니다. 초승달과 같다하는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입니다. 아직 차지 않은 것은 곧 점차 차게 됩니다.”했다. 왕이 노하여 (무당을)죽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온달(보름달)은 성대한 것이고, 초승달은 미미한 것입니다. 국가(백제)는 성대해지고, 신라는 점차 미약해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했다. 왕이 기뻐하였다.
太宗聞百濟國中多怪變 五年庚申 遣使仁問請兵唐 高宗詔左虎衛大將軍荊國公蘇定方爲神丘道行策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字仁遠左虎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等 統十三萬兵來征(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人 船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以新羅王春秋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定方引兵 自城山濟海 至國西德勿島 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태종은 백제 나라 안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것을 듣고 5년 경신에 김인문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 군대를 청하게 했다.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호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행책(군)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 자는 인원, 좌호위장군 풍사귀, 좌효위장군 방효공 들을 통솔하고 13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치게 하고(향기에 “군사 122,711명, 배 1900척이라 하였는데 당사(당의 역사서)에는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그 나라 군대를 이끌고 그들(당나라 군대)과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군대 5만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義慈王聞之 會群臣問戰守之計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 羅人恃大國之援 有輕敵之心 若見唐人失利 必疑懼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師老 先使偏師擊羅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全軍而保國矣 王猶預不知所從
의자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를 모아 싸워 지킬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이 나와 말하기를 “당의 군대는 멀리서 망망한 바다를 건너왔고, 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사람들이 이로움을 잃었다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날카롭게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들과 결전하는 것이 옳습니다.”했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월리서 왔기 때문에 속히 싸우려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여러 번 우리 군대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 군대의 형세를 바라보기만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사람들의 길을 막는 것으로서 군대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의 군대로 하여금 신라를 치게 하여 그 예기를 꺽은 후에 그 편의를 엿보아 합하여 싸운다면 군사를 보존하면서도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머뭇거리며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다.
時佐平興首得罪 流竄于古馬旀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 首曰 大槪如佐平成忠之說 大臣等不信 曰 興首在縲絏之中 怨君而不愛國矣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卽伎伐浦)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並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如在籠之雞 罹網之魚也 王曰 然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偕伯 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然兵寡力盡 竟敗而偕伯死之 進軍合兵 薄津口 瀕江屯兵
그 때 좌평 흥수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에 유배되어있었는데 사람을 보내 물어 말하기를 “일이 위급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니 흥수가 말한 것이 댜갸 좌평 성충이 말한 것과 같았다. 대신들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죄를 지어 옥중에 있으니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당의 군대로 하여금 백강(곧 기벌포)을 들어오게 하여 물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대는 탄현을 올라 좁은 길을 따르게 하되 말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군사를 놓아 공격하면 조롱 안의 닭과 같고, 그물 안의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러하다.”했다. 또 당과 신라의 군대가 이미 백강을 지나고 탄현을 지났다는 것을 듣고 장군 계백을 보내 결사대 5천을 이끌고 황산에 나가 신라 군대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이 4번 전투하여 모두 이겼다. 그러나 군대가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죽었다. (신라 군대가) 진군하여 (당나라) 군대와 합하여 진구에 모여 강가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忽有鳥廻翔於定方營上 使人卜之 曰必傷元帥 定方懼欲引兵而止 庾信謂定方曰 豈可以飛鳥之怪 違天時也? 應天順人 伐至不仁 何不祥之有? 乃拔神劍擬其鳥 割裂而墜於座前 於是 定方出左涯 垂山而陣 與之戰 百濟軍大敗 王師乘潮 軸轤含尾 鼓譟而進 定方將步騎 直趨都城一舍止 城中悉軍拒之 又敗死者萬餘 唐人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홀연히 새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 돌며 날아다녔다. (소정방이)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반드시 원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했다.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군대를 이끌고서도 (싸움을)그만두려하자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함으로써 하늘의 때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운수)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을 따르고, 지극히 어질지 못함을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않음이 있겠습니까?”하고는 이에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갈라져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왼쪽 물가에서 나와 산 가장자리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싸웠다.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왕사(당나라 군사)가 조수를 타고 배와 배들이 꼬리를 물고 북을 치면서 전진하였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으로 전진하여 한 집에 머물렀다. 성 안의 모든 군사가 그들(당나라 군사)을 막았으나 또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사람들이 이긴 형세를 몰아 성에 들이닥치니 왕(의자왕)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해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쓰지 않다가 여기에 이르러 뉘우치고 있는가!”했다.
遂與太子隆(或作孝 誤也)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之子文思謂王泰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率左右縋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起堞立唐旗幟 泰窘迫 乃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隆王子泰大臣貞福 與諸城皆降 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王子演 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送京師
마침내 태자 융(혹은 효라 쓴다하나 잘못이다.)과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그 성을 둘러쌌다. 왕의 둘째 아들 태는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태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과 태자가 나간 뒤 숙부가 마음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 당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가면 우리들이 어찌 온전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를 인솔하여 밧줄을 늘어뜨리고 (성을)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따랐다. 태가 저지하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로 하여금 성가퀴를 일으키게 하고 당의 깃발을 세웠다. 태가 궁박하여 이에 성문을 열고 명(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과 대신, 장사 88명, 백성 12807명을 경사(당의 서울 장안)으로 보냈다.
其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擢渠長爲都督刺史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俘見 上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寶墓側 竝爲竪碑
그 나라에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이네 이르러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두고 거장을 발탁하여 도독자사로 삼아 그들을 다스리게 하고, 낭장 유인원으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 좌위낭장 왕문도로 하여금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백성을 위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를 데리고 (당 황제를)뵈니 황제가 꾸짖고 용서하였다. 왕(의자왕)이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가서 임하는(조문) 것을 허락하고, 조서로 손호,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례하게 하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했다.
七年壬戌 命定方爲遼東道行軍大摠管 俄改平壤道 破高麗之衆於浿江 奪馬邑山爲營 遂圍平壤城 會大雪解圍還 拜凉州安集大使 以定吐蕃 乾封二年卒 唐帝悼之 贈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 諡曰莊(已上唐史文) 新羅別記云 文虎王卽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作壇 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歃血爲文而盟曰
(용삭)7년 임술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가 잠시 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고쳤다. 고구려의 무리를 패강에서 깨트리고 마읍산을 빼앗아 진영을 삼았다. 마침내 평양성을 둘러쌌으나 큰 눈을 만나 둘러싸고 돌아갔다. (소정방을) 양주 안집대사 벼슬을 주어 토번을 평정하게 하였다. 건봉 2년에 죽으니 당나라 황제가 슬퍼하며 좌효기대장군유주도독을 증직하고 시호를 장이라 하였다.(이상은 당사의 글이다.) 신라 별기에는 이르기를 “문호왕(문무왕) 즉위 5년 을축 가을 8월 경자에 왕이 직접 대군을 통솔하고 웅진성에 가 가왕(임시왕) 부여융을 만나 단을 만들고 백마를 죽여 맹세할 때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 제사한 후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글을 지어 맹세해 말하기를
?往者 百濟先王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畧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被毒 頻命行人 諭其和好 負險恃遠 侮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吊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瀦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懷柔伐叛 先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曩冊 故立前百濟王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歃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兄弟 祗奉綸言 不敢墜失 旣盟之後 共保歲寒 若有乖背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陲 神明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宗 禋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享是福?
‘지난 번 백제 선왕이 거스르고 순함에 어두워 아웃과 좋게 지내지 않고 친인(친척과 인척)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사납게 신라를 침범하여 깍아 음을 깨트리고 성을 함락시켜 대략 편안한 해가 없었다. (당)천자께서 한 물건이라도 (살)자리를 잃음을 민망하게 여기고, 백성이 해를 입음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자주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낼 것을 깨우쳤다. (그러나)험함을 지고 멀리 있는 것을 믿어 하늘의 법도를 업신여기고 깔보았다. 이에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공경히 정벌행하시니 깃발이 가리키는 곳마다 한 번 정벌로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궁과 더럽혀진 집이 있던 자리에 못을 파 후세를 경계하여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자손에게 가르침을 드리웠다. (오는 자는)회유하고 배반하는 자는 정벌하는 것이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고, 나라를 흥하게 하고 망한 나라의 끊어진 제사를 잇게 하는 것은 과거 현인의 공통된 법이었다.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이 여러 책에 전하여 온다. 그러므로 전 백제왕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세워 그 제사를 지키게 하고, 그 옛 땅을 보존하게 하니 신라에 기대어 길이 친선하는 나라가 되라. 각각 묵은 감정을 없애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고 공경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길이 번복(제후국)이 되라. 이에 사신을 보내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 직접 임하여 깨우침을 권하여 나의 명령을 갖추어 모두 선포하는 것이다. 혼인을 약속하고 맹세를 거듭하여 희생을 죽여 삽혈하고 함께 끝과 시작을 돈독히 하여 재앙은 나누고 근심을 구제하여 은혜를 형제처럼 해야 할 것이다. 삼가 (당 황제가)내리는 말을 받들어 감히 실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맹서한 후에는 함께 언제나 함께 지키라. 만약 어긋나고 배신하여 그 덕을 바꾸어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함이 있다면 신명이 살펴 백가지 재앙이 이에 내리고 자손이 길러지지 못할 것이며 사직에 근본이 없을 것이며 제사가 사라져 남은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를 만들어 종묘에 감추어 자손 만 대까지 감히 범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신은 이를 들으시고 이에 흠향하시고, 복을 주십시오.’ 했다.
歃訖埋幣帛於壇之壬地 藏盟文於大廟 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 今云會扶餘王隆 則知唐帝宥隆而遣之 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 以此爲驗)
삽혈을 마치고 폐백을 단의 북쪽 땅에 묻고 맹서한 글을 대묘(종묘)에 감추었다. 맹서하는 글은 곧 대방도독 유인궤가 짓은 것이다.(위 당사의 글을 살펴보니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경사(당의 서울 장안)에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 부여왕 융과 만났다고 말하였으니 곧 당의 황제가 융을 용서하고 보내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맹세한 글에서 분명하게 말하였으니 이로서 징험이 된다.)
又古記云 總章元年戊辰(若總章戊辰則李勣之事 而下文蘇定方 誤矣 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 來圍平壤之時也) 國人之所請唐兵 屯于平壤郊而通書曰?急輸軍資? 王會群臣問曰 ?入於敵國至唐兵屯所 其勢危矣 所請王師粮匱而不輸其料 亦不宜也 如何?? 庾信奏曰 ?臣等能輸其軍資 請大王無慮?
또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1년 무진(만약 총장 무진년이라면 곧 이적의 일이니 아래 글에 소정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만약 소정방이라면 곧 연호가 용삭 2년 임술이니 평양에 와 둘러싼 때이다.)에 나라 사람이 청한 당나라 군대가 평양 교외에 주둔하고 글을 통해(보내) 말하기를 ‘급히 군량을 수송하라.’ 했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물어 말하기를 ‘적국에 들어 가 당나라 군대가 주둔한 곳에 이르는 것은 그 형세가 위태롭다. 왕사(당의 군대)가 양식이 다하여 청한 바인데 그 식량을 수송하지 않는 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했다. 김유신이 아뢰어 말하기를 “신들이 그 군량을 수송할 수 있으니 대왕께서는 근심하지 말 것을 청합니다.”했다.
於是 庾信仁問等率數萬人入句麗境 輸料二萬斛乃還 王大喜 又欲興師會唐兵 庾信先遣然起兵川等二人 問其會期 唐帥蘇定方紙畫鸞犢二物廻之 國人未解其意 使問於元曉法師 解之曰 ?速還其兵 謂畫犢畫鸞二切也? 於是 庾信廻軍欲渡浿江 令曰後渡者斬之 軍士爭先半渡 句麗兵來掠 殺其未渡者 翌日信返追句麗兵 捕殺數萬級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이에 김유신, 김인문 등이 수만의 사람을 통솔하여 고구려 경계를 들어 가 군량 2만곡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대를 일으켜 당의 군대와 만나고자 하였다. 김유신이 먼저 연기, 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 그 만날 날을 물었다. 당의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와 송아지 두 물건을 그려 돌려주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풀지 못하여 원효법사에게 묻게 하였더니 (원효가) 그것을 풀어 말하기를 “속히 그 군대를 돌리라는 말입니다. 송아지를 그리고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반절을 이른 것이다.” 했다. 이에 김유시이 군대를 돌려 패강을 건너려 하면서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뒤에 건너는 자는 베어 죽인다.”하니 군사들이 선두를 다투었는데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 군대가 와서 공격하여 미처 건저지 못한 자들을 죽였다. 다음 날 김유신이 돌아 고구려 군대를 쫓아 잡고 죽인 것이 수만 급이었다. 백제 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닿아 있었다.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의장왕과 여러 후궁들이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러 말하기를 ‘차라리 스스로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러므로 세속에 이르기를 ‘타사암’이라 하였다. 이는 곧 세상의 말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인들만 떨어져 죽었을 뿐 의자왕이 당에서 죽은 것은 당사에 글이 있다.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 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또 신라 고전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뒤 또 신라를 칠 것을 도모하여 머물고 있었다. 이에 김유신이 그 계획을 알고 당나라 군대에게 짐독을 먹여 모두 죽인 후 구덩이에 묻었다.”했다. 지금 상주 경계에 당교가 있는데 이곳이 구덩이에 묻은 땅이다.(당사를 살펴보니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했으니 어찌된 것인가? 감추기 위한 것인가? 신라의 속설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약 임술년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신라 사람들이 소정방의 군대를 죽였다면 곧 뒤인 총장 무진년에 어찌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없앤 일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신라에서 전하는 것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없앤 후 (당나라에) 신하 노릇하지 않고 마음대로 그 땅을 소유함이 있었을 뿐이다. 소정방, 이적 두 공을 죽임에는 이르지 않았다.)
王師定百濟 旣還之後 羅王命諸將 追捕百濟殘賊 屯次于漢山城 高麗靺鞨二國兵來圍之 相擊未解 自五月十一日至六月二十二日 我兵危甚 王聞之 議群臣曰 計將何出? 猶豫未決 庾信馳奏曰 事急矣 人力不可及 唯神術可救 乃於星浮山設壇修神術 忽有光耀如大瓮 從壇上而出 乃星飛而北去(因此名星浮山 山名或有別說云 山在都林之南 秀出一峯是也 京城有一人謀求官 命其子作高炬 夜登此山擧之 其夜京師人望火 人皆謂怪星現於其地 王聞之憂懼 募人禳之 其父將應之 日官奏曰 此非大怪也 但一家子死父泣之兆耳 遂不行禳法 是夜 其子下山 虎傷而死)
당의 군대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간 뒤 신라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잔적을 쫓아 잡게 하고, 한산성에 주둔하게 하였다. 고구려 말갈 두 나라 군대가 와서 둘러쌌다. 서로 쳤으나 풀지 못하였다. 5월 11일부터 6월 20일에 이르기까지 우리 군대가 매우 위태로웠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벗어날 계책이 있는가?”하고는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김유신이 달려와 아뢰어 말하기를 “일이 위급하여 인력으로는 미칠 수 없고, 오직 신술로만 구할 수 있습니다.”하고는 곧 성부산에 단을 설치하고 신술을 쓰자 홀연히 큰 독만한 광채가 단위로부터 나옴이 있어 곧 별이 날아 북쪽으로 갔다.(이 때문에 성부산이라 이름하였다. 산 이름에는 혹 다른 설명이 있는데 말하기를 “산은 도림의 남쪽에 있는데 빼어나게 나온 한 봉우리가 이것이다. 경성(서울)에 한 사람이 관직을 구할 것을 꾀하여 그 아들로 하여금 큰 햇불을 만들어 밤에 이 산에 올라 횃불을 들게 하다. 그날 밤 경사(서울) 사람들이 물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 땅에 괴상한 별이 나타났다고 말하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사람을 모아 기도하였다. 그 아버지가 거기에 응모하려 하였다. 일관이 아뢰어 말하기를 ‘이는 크게 괴상한 것이 아니고 다만 한 잡 안의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릴 징조일 뿐입니다.’했다. 마침내 기도하는 법을 행하지 않았다. 이날 밤 그 아들이 산에서 내려오다 호랑이에게 다쳐(물려) 죽었다.”했다.)
漢山城中士卒 怨救兵不至 相視哭泣而已 賊欲攻急 忽有光耀 從南天際來 成霹靂擊碎砲石三十餘所 賊軍弓箭矛戟籌碎皆仆地 良久乃蘇 奔潰而歸 我軍乃還
한산성 안의 사졸들이 구원하는 군대가 이르지 않자 원망하여 서로 보며 곡할 뿐이었다. 적이 급히 공격하려 하는데 홀연히 광채가 있어 남쪽 하늘가로 부터 와 벽력(벼락)을 이루어 포석 30여 곳을 쳐서 부수었다. 적의 군대가 활과 화살, 창이 부서지자 모두 땅에 엎드렸다가 한 참 후에 깨어나 달리고 무너져(흩어져) 돌아갔다. 우리 군대가 이에 돌아왔다.
太宗初卽位 有獻猪一頭二身八足者 議者曰 是必幷呑六合瑞也 是王代始服中國衣冠牙笏 乃法師慈藏請唐帝而來傳也 神文王時 唐高宗遣使新羅曰 朕之聖考得賢臣魏徵李淳風等 協心同德 一統天下 故爲太宗皇帝 汝新羅海外小國 有太宗之號 以僭天子之名 義在不忠 速改其號 新羅王上表曰 新羅雖小國 得聖臣金庾信 一統三國 故封爲太宗 帝見表乃思儲貳時 有天唱空云三十三天之一人 降於新羅爲庾信 紀在於書 出撿視之 驚懼不已 更遣使許無改太宗之號
태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하나의 머리, 두 개의 몸, 여덟 개 발을 가진 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6합(천하:동서남북 하늘과 땅)을 병탄할 상서(조짐)입니다.”했다. 이 왕(태종무열왕)대에 처음 중국의 의관을 입고 아홀을 들었는데 곧 법사 자장이 당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돌아 와 전한 것이다. 신문왕대 당나라 고종이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말하기를 “짐의 성고(당나라 태종)이 어진 신하 위징, 이순풍 등을 얻어 마음을 합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였기 때문에 태종황제라 하였다. 너희 신라는 해외의 작은 나라로 태종의 호칭이 있는(호칭을 쓰는) 것은 천자의 명칭을 참칭한 것으로 의리상 충성되지 않음이 있다. 속히 그 칭호를 고치라.”했다. 신라왕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성스런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였기 때문에 봉하여 태종이라 한 것입니다.”했다. 황제(당나라 고종)가 표를 보고 곧 태자 때 “하늘에서 33천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와 김유신이 되었다.”는 소리가 있어 책에 기록했다는 것을 생각해 내고는 꺼내어 점검해 보고 놀라움을 그치지 못하였다.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의 호칭을 고치지 않는 것을 허락하였다.
長春郎 罷郎(一作羆)
初與百濟兵戰於黃山之役 長春郎罷郎死於陣中 後討百濟時 見夢於太宗曰 臣等昔者爲國亡身 至於白骨 庶欲完護邦國 故隨從軍行無怠而已 然迫於唐帥定方之威 逐於人後爾 願王加我以小勢 大王驚怪之 爲二魂 說經一日於牟山亭 又爲創壯義寺於漢山州 以資冥援
三國遺事卷第一(終)
장춘랑, 파랑(비라 쓰기도 한다.)
처음 백제군대와 황산에서 싸울 때 장춘랑과 파랑이 진 중에서 죽었다. 후에 백제를 토벌할 때 태종의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신들은 옛날 나라를 위해 죽어 백골에 이르렀으나 나라를 지키려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따라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엄에 눌려 다른 사람의 뒤만 쫓고 있을 뿐입니다. 원하건데 왕께서는 우리에게 작은 형세(힘을)를 더해주십시오.”했다. 대왕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혼을 위해 모산정에서 하루 동안 불경을 읽고 또 한산주에 장의사를 창건하고 명복을 빌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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