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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7

by 최인표 2024. 1. 3.

三國史記 卷七 新羅本紀 第七 文武王 下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拜伊湌禮元爲中侍 發兵侵百濟 戰於熊津南 幢主夫果死之 靺鞨兵來圍舌口城 不克 將退出兵擊之 斬殺三百餘人 聞唐兵欲來救百濟 遣大阿湌眞功·阿湌△△△△兵守甕浦 白魚躍入△△△△△△△△△△一寸 夏四月 震興輪寺南門 六月 遣將軍竹旨等 領兵踐百濟加林城禾 遂與唐兵戰於石城 斬首五千三百級 獲百濟將軍二人 唐果毅六人

11(671) 봄 정월 이찬 예원에게 벼슬을 주어 중시로 삼고, 군대를 일으켜 백제를 침범하여 웅진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 부과가 죽었다. 말갈 군대가 와서 설구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려 할 때 군대를 내어 쳐서 300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대가 와서 백제를 구원하려한다는 것을 듣고 대아찬 진공, 아찬○○○○을 보내 군대로 옹포를 지키게 했다.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 ○○○○○○○○○○ 한 치였다. 여름 4월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쳤다. 6월 장군 죽지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가림성 벼를 짓밟았다. 마침내 당나라 군대와 석성에서 싸워 53백 명을 목 베어 죽이고, 백제 장군 2명과 당나라 과의 6명을 잡았다.

 

秋七月二十六日 大唐摠管薛仁貴 使琳潤法師寄書曰 行軍摠管薛仁貴 致書新羅王 淸風萬里 大海三千 天命有期 行遵此境 奉承機心稍動 窮武邊城 去由也之片言 失侯生之一諾 兄爲逆首 弟作忠臣 遠分花萼之陰 空照相思之月 興言彼此 良增歎詠 先王開府 謀猷一國 展轉百城 西畏百濟之侵 北警高麗之寇 地方千里 數處爭鋒 蠶女不及桑時 耘人失其疇序 年將耳順 楡景日侵 不懼船海之危 遠涉陽侯之險 瀝心華境 頓顙天門 具陳孤弱 明論侵擾 情之所露 聽不勝悲

가을 7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임윤법사로 하여금 글을 맡겨 보냈다. 그 글에 말하기를 행군총관 설인귀는 신라왕께 글을 보냅니다. 맑은 바람 만리 길, 큰 바다 3천리를 황제의 명을 받아 기약할(정할)것이 있어서 이 경계를 따라 왔습니다. 뜻을 이어받아 기회를 보아 점점 움직여 변경의 성들에 무력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중유, 자로)의 한마디 말을 저버리고 후생의 한 번 허락을 잃었습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동생은 충신이 되어 꽃과 꽃받침의 그늘이 멀리 나누어졌습니다. 서로 생각함의 달이 공연히 비추었습니다. 피차에 말을 일으키면 실로 한숨과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돌아가신 왕 개부께서는 한 나라를 다스릴 것을 꾀하시고 100개성을 전전 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입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노략질을 경계하였습니다. 4방 천리 여러 곳에서 다툼이 있어서 누에치는 여인은 뽕잎 따는 때에 미치지 못하였고, 김매는 사람은 그 밭두둑의 차례를 잃었습니다. (선왕은) 나이가 이순(60)으로 죽을 때가 가까워지는 때임에도 배로 바다를 항해하는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멀리 양후(바다의 신)의 험함을 건너 중국 땅에 한 마음을 다하여 천자의 문에 이마를 조아리며 외롭고 약함을 모두 말하여 침범과 소란스러움을 밝게 논하시니 드러낸 실정을 듣는 이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太宗文皇帝 氣雄天下 神王宇宙 若盤古之九變 同巨靈之一掌 扶傾救弱 日不暇給 哀納先君 矜收所請 輕車駿馬 美衣上藥 一日之內 頻遇殊私 亦旣承恩 對揚軍事 契同魚水 明於金石 鳳鑰千重 鶴關萬戶 留連酒德 讌笑金除 參論兵馬 分期聲援 一朝大擧 水陸交鋒 于時 塞草分花 楡星上莢 駐驆之戰 文帝親行 弔人恤隱 義之深也 旣而山海異形 日月廻薄 聖人下武 王亦承家 巖葛因依 聲塵共擧 洗兵刷馬 咸遵先志 數十年外 中國疲勞 帑藏時開 飛蒭日給 以蒼島之地 起黃圖之兵 貴於有益 貪於無用 豈不知止 恐失先君之信也

태종문황제는 기개가 천하에 으뜸이고 정신은 우주에 왕성하여 반고의 아홉 번 변함과 같고, 거령의 한 손바닥과 같았습니다. 기울어진 것은 부축하고, 약한 것은 구원하여 날로 쉼이 없었습니다. 선왕을 애처롭게 여겨 받아들이고, 가엾게 여겨 청한 바를 거두어 들이시고 가벼운 수레와 좋은 말, 좋은 옷과 약으로 하루 안에도 자주 만나 특별한 대우를 하였습니다. 또한 (선왕께서도)은혜를 받들고 마주쳐 군사를 드날리시니 그 부합함이 물고기와 물 같아 쇠와 돌에 새긴 것보다 분명하였습니다. 봉황 자물쇠(황궁의 자물쇠)를 천겹과 학대문 만호되는 궁권에서 연이어 머물며 술을 마시고 금빛으로 빛나는 대궐의 계단에서 웃고 이야기하면서 군사 문제를 함께 의논하여 기일을 정해 응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바다와 육지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떨쳤습니다. 그 때 변방의 풀에 꽃이 피고, 느릅나무에 새 열매가 맺혔습니다. 주필의 싸움에 문제께서 직접 가서 사름들을 위로하고 숨겨진 사람을 구휼하였으니 의리가 깊은 것입니다. 이윽고 산과 바다가 모양을 달리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후에야 성인께서 계승하셨고, 왕이 또한 가문을 이었습니다. 바위와 칡처럼 의지하여 토벌하는 군사를 함께 일으켜 병기를 깨끗이 하고, 말을 훈련시킨 것은 모두 선왕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수십 년이 지나 중국이 피로해졌으나 천자의 곳간은 때로 열려 꼴(먹을 것)을 날라 매일 지급하였습니다. 창도(신라)의 땅 때문에 황도(중국)의 군대를 일으켜 유익함은 적고, 무용을 탐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침을 알지 못하였으리오마는 돌아가신 임금의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今强寇已淸 讎人喪國 士馬玉帛 王亦有之 當應心膂不移 中外相輔 銷鏑而化虛室 爲情自然 貽厥孫謀 以燕翼子 良史之讚 豈不休哉 今王去安然之基 厭守常之策 遠乖天命 近棄 父言 侮暴天時 侵欺鄰好 一隅之地 僻左之陬 率戶徵兵 連年擧斧 孀姬輓粟 稚子屯田 守無所支 進不能拒 以得裨喪 以存補亡 大小不侔 逆順乖敍 亦由持彈而往 暗於枯井之危 捕蟬而前 不知黃雀之難 此王之不知量也

지금 강한 도적이 이미 맑아졌고 원수진 사람은 나라를 잃고,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그것을 소유하였습니다.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른 데로 옮기지 말고 안과 밖에서 서로 도와 병기를 녹이고 허술한 곳을 변화시켜 실정을 자연스럽게 하여 그 후손에게 미치게할 것을 도모하는 것으로서 자손을 현명하게 도와주면 역사의 칭찬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편안한 터를 떠나 떳떳함을 지키는 계책을 싫어하시어 멀리는 천명에 어긋나고, 가까이는 아버지의 말을 버리시고, 천시를 마음대로 버리셨습니다. 이웃나라와 우호를 침범하고 버리시고 한 모퉁이의 땅 구석진 곳에서 집집마다 군대를 징발하여 해를 이어 도끼를 드시니 과부들이 군량 수레를 끌고 어린아이가 둔전을 경작하니 지키려하여도 지탱할 수 없고, 나아가려 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얻은 것을 가지고 잃은 것을 보충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잃은 것을 채우려하였으나 크고 작은 것이 짝이 맞지 않아 순함을 거스르고, 차례를 어겼으니 또한 활을 당겨 나아가면서 마른 우물의 위태로움에 어둡고, (사마귀가)매미를 잡으러 나아가면서 참새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니 이는 왕이 헤아림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先王在日 早蒙天睠 審懷險詖之心 假以披誠之禮 從己私欲 貪天至功 苟希前惠 圖爲後逆 此先君之不長者也 必其誓河若帶 義分如霜 違君之命不忠 背父之心非孝 一身二名 何以自寧 王之父子 一朝振立 此並天情遠及 威力相持 方州連郡 遂爲盤錯 從此 遞蒙冊命 拜以稱臣 坐治經書 備詳詩禮 聞義不從 見善而輕 聽縱橫之說 煩耳目之神 忽高門之基 延鬼瞰之責 先君盛業 奉而異圖 內潰疑臣 外招强陣 豈爲智也

선왕이 살아 계실 때 일찍이 천자의 돌아봄을 입었습니다. 바르지 못한 마음을 품고, 거짓으로 정성스러운 예절을 나타내면서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따라 천자의 지극한 공적을 탐하여 구차히 앞에서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서는 거스름을 도모한다면 이는 죽은 임금의 장점이 아닙니다. 반드시 황하가 띠처럼 될 때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서를 지키고 의리와 분수를 서릿발처럼 지켜야 하는데 임금의 명을 어겼으니 불충이요, 아버지를 저버렸으니 효도가 아닙니다. 한 몸에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무엇으로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부자가 하루아침에 떨쳐 일어난 것은 이는 모두 천자의 마음이 멀리 비치고, 위엄과 힘이 서로 도와서 된 것입니다. 무릇 주와 군이 마침내 연이어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따라 대번에 책명을 입고 절하는 것으로서 신하를 칭하고는 앉아서 경서를 읽고, 시와 에를 자세하게 익혔습니다. 의리를 듣고도 따르지 않고, 착함을 보고도 가볍게 여기고 종횡의 말(권모술수의 말)을 듣고서 귀와 눈의 혼을 번거롭게 하면 높은 가문의 기틀을 소홀히 하게 되고 귀신들이 엿보는 꾸짖음을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성대한 위엄을 받들어 계승한다 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고, 안으로는 의심스러운 신하를 없애고, 밖으로는 강한 군대를 불러들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又高麗安勝 年尙幼冲 遺壑殘郛 生人減半 自懷去就之疑 匪堪襟帶之重 仁貴樓船 竟翼風帆 連旗巡於北岸 矜其舊日傷弓之羽 未忍加兵 恃爲外援 斯何謬也 皇帝德澤無涯 仁風遠洎 愛同日景 炤若春華 遠聞消息 悄然不信 爰命下臣 來觀由委 而王不能行人相問 牛酒犒師 遂便隱甲雀陂 藏兵江口 蚑行林薄 喘息萊丘 潛生自噬之鋒 而無相持之氣 大軍未出 游兵具行 望海浮江 魚驚鳥竄 以此形況 人事可求 沈迷猖惑 幸而知止

또한 고구려 안승은 나이가 아직 어리고 남아있는 골자기와 성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반으로 줄어 스스로 떠나고 나아감의 의심을 품고서 옷깃과 요대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귀는 누선에 돛을 활짝 펴서 달고 깃발을 연인은 채 북쪽 해안을 순찰할 때 그가 옛날 활에 상한 깃이 된 것을 불쌍히 여겨 차마 공격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밖의 구원이 된다고 믿었으니 이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황제의 덕과 은택은 끝이 없고, 어진 풍모는 멀리 미쳐 사랑은 햇빛과 같고, 빛남은 봄꽃과 같습니다. (황제가) 멀리서 소식을 들으시고 쉽게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신에게 명하여 가서 이유를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왕께서는 사람을 보내 물어보지 않으시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군사에게 먹이지 않고 마침내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어귀에 무기를 감추어 벌레처럼 숲 사이에서 다니고 무성한 언덕에서 숨차게 기어올라 몰래 후회할 칼날을 내었지만 서로 도와 지닐 기세가 없었습니다. 대군이 아직 출발하기 전에 작고 날쌘 군대가 행열을 갖추어 바다를 바라보고 강에 뜨자 물고기가 놀라고 새가 달아나 숨듯이 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상과 상황으로 보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혹에 빠져 날뛰는 것을 그침을 알면 다행이겠습니다.

 

擧大事者 不貪小利 杖高節者 寄以英奇 必其鸞鳳不馴 豺狼有顧 高將軍之漢騎 李謹行之蕃兵 吳楚棹歌 幽幷惡少 四面雲合 方舟而下 依險築戍 闢地耕田 此王之膏肓也 王若勞者歌 事屈而頓申 具論所由 明陳彼此 仁貴夙陪大駕 親承委寄 錄狀聞奏 事必昭蘇 何苦怱怱 自相縈擾 嗚呼 昔爲忠義 今乃逆臣 恨始吉而終凶 怨本同而末異 風高氣切 葉落年悲 憑山遠望 有傷懷抱 王以機晤淸明 風神爽秀 歸以流謙之義 存於順迪之心 血食依時 茅苴不易 占休納祐 王之策也 嚴鋒之間 行人來往 今遣王所部僧琳潤䝴書 佇布一二

큰일을 일으키는 자는 작은 이익을 욕심내지 않고, 높은 절개를 지키려는 사람은 뛰어난 행실에 기대니 반드시 그 난새와 봉황도 길들이지 않으면 승냥이의 돌아봄이 있습니다. 고 장군의 죽국 기병, 이근행의 번방의 군사, , 초 지방의 수군, 유주와 병주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이고,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 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의 가슴에 남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ㄲ께서 만약 피로한 자에게 노래 부르게 하고, 일이 굽혀진 것을 단번에 바로 잡으려면 말미암은 바를 모두 논하고 이런저런 점을 분명하게 펼쳐야 합니다. ()인귀가 일찍이 황제의 가마를 수행하며 직접 맡은 것을 받들었으니 이런 일을 기록하여 보고한다면 일이 반드시 밝게 풀릴 터인데 어찌하여 괴로워하고 초조해하며 머뭇거리십니까? ! 옛날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곧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 처음에는 길하다가 끝에는 흉하게 된 것이 한스럽고 근본은 같은데 지엽이 달라진 것을 원망합니다. 바람은 높고 기온이 추워져 잎은 떨어지고 세월은 슬퍼 산에 기대 멀리 바라보니 상처만 품고 있습니다. 왕께서는 지혜가 깨끗하고 밝으시고, 위풍과 정신이 맑고 빼어나시니 겸손한 뜻으로 돌아 가 도를 따르는 마음을 보존하다면 제사를 제 때에 받으실 것이요 사직이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점 쳐 복을 받는 것이 왕의 계책입니다. 삼엄한 싸움 중에도 사신은 오고가니 지금 왕의 승려인 임윤을 보내 편지를 가져가게 하면서 한두 가지 생각을 폅니다.” 했다.

 

大王報書云 先王貞觀二十二年 入朝 面奉太宗文皇帝 恩勅 朕今伐高麗 非有他故 憐你新羅 攝乎兩國 每被侵陵 靡有寧歲 山川土地 非我所貪 玉帛子女 是我所有 我平定兩國 平壤已南百濟土地 並乞你新羅 永爲安逸垂以計會 賜以軍期 新羅百姓 具聞恩勅 人人畜力 家家待用 大事未終 文帝先崩 今帝踐祚 復繼前恩 頻蒙慈造 有踰往日 兄弟及兒 懷金拖紫 榮寵之極 敻古未有 粉身碎骨 望盡驅馳之用 肝腦塗原 仰報萬分之一

(문무)대왕의 답장에 선왕이 정관 22(648) 입조하여 태종문황제를 면전에서 받들고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짐(당 태종)이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서 끌림을 당하여 매번 침범과 업신여김을 당하여 편안한 해가 있지 않음을 불쌍하게 여겨서였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이니고, 옥과 비단, 자녀는 내가 있는 바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한 뒤 평양이남과 백제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한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대의 기일을 내려 주셨습니다. 신라의 백성들이 은혜로운 칙명을 모두 듣고 사람들마다 힘을 쌓고, 집집마다 쓰임을 기다렸습니다. 큰일을 마치기도 전에 문제(당 태종)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가 즉위하시여 앞의 은혜를 이으시니 자주 사랑을 입어 지난날을 넘었습니다. 형제와 아이들이 금인을 품고 자줏빛 인끈을 달아 영예와 총애가 지극함이 예전에 있지 않았습니다. 몸을 부수고 뼈를 잘게 부수어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을 바라고, 간과 뇌가 길에 칠해져도 우러러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했습니다.

 

至顯慶五年 聖上感先志之未終 成曩日之遺緖 泛舟命將 大發船兵 先王年衰力弱 不堪行軍 追感前恩 勉强至於界首 遣某領兵 應接大軍 東西唱和 水陸俱進 船兵纔入江口 陸軍已破大賊 兩軍俱到王都 共平一國 平定已後 先王遂共蘇大摠管平章 留漢兵一萬 新羅亦遣弟仁泰 領兵七千 同鎭熊津 大軍廻後 賊臣福信 起於江西 取集餘燼 圍逼府城 先破外柵 摠奪軍資 復攻府城 幾將陷沒

현경 5(660)에 이르러 성상께서 선조의 뜻이 아직 이루어지 않았음을 느끼시고, 지나간 날의 남겨진 단서를 이루려하여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하여 크게 수군을 징발하였습니다. 선왕은 나이가 많아 쇠퇴하고 힘이 약해 행군을 감당하지 못하나 이전의 은혜를 좇아 생각하셔서 힘써 국경에 이르러 저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에서 부르고 화답하여 물과 뭍에서 함께 전진하고, 수군이 겨우 강 입구로 들어 올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트렸습니다. 두 군대가 모두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한 후에 선왕께서 마침내 소대총관(소정방)과 함께 논의하시어 중국 군대 1만을 남기고, 신라 또한 동생 인태를 보내 군대 7천을 거느리고 함께 웅진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뒤 적신 복신이 강서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를 모아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싸 핍박하였는데 먼저 외책을 깨트리고 군수품을 모두 빼앗고 다시 부성을 쳐서 거의 함락되려 하였습니다.

 

又於府城側近四處 作城圍守 於此 府城不得出入 某領兵往赴解圍 四面賊城 並皆打破 先救其危 復運粮食 遂使一萬漢兵 免虎吻之危難 留鎭餓軍 無易子而相食 至六年 福信徒黨漸多 侵取江東之地 熊津漢兵一千 往打賊徒 被賊摧破 一人不歸 自敗已來 熊津請兵 日夕相繼 新羅多有疫病 不可徵發兵馬 苦請難違 遂發兵衆 往圍周留城 賊知兵小 遂卽來打 大損兵馬 失利而歸 南方諸城 一時摠叛 並屬福信 福信乘勝 復圍府城 因卽熊津道斷 絶於鹽豉 卽募健兒 偸道送鹽 救其乏困 至六月 先王薨 送葬纔訖

또한 부성 옆 가까이 4곳에 성을 만들어 에워싸고 지켰습니다. 이에 (웅진도독)부성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에워싼 싼 것을 풀고, 사방의 적성을 모두 쳐서 깨트려 먼저 그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다시 양식을 운반하여 마침내 1만의 중국군대로 하여금 호랑이에게 깨물림의 위태로움과 어려움, 머물러 지키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바꾸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6(661)에 이르러 복신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져 강동의 땅을 침범하고 빼앗으니 웅진의 중국 군대 1천이 가서 적의 무리를 쳤으나 적에게 깨트림을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고, 패한 이래로 웅진이 군대를 청하는 것이 낮과 저녁으로 서로 이어졌습니다. 신라는 많이 역병이 있어 군대를 징발할 수 없음에도 어렵게 요청함은 어기기 어려워 마침내 군대를 내어 가서 주류성을 에워쌌습니다. 적이 군대가 적음을 알고 마침내 와서 쳤는데 크게 군대를 덜고 이로움을 잃자 돌아갔습니다. 남쪽 지방의 여러 성들이 한꺼번에 배반하여 모두 복신에게 속하니 복신이 이김을 타고 다시 (웅진도독)부성을 에워쌌습니다. 인하여 곧 웅진도가 끊어져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곧 건장한 아이들을 모아 길을 훔쳐(몰래) 소금을 보내 그 곤궁함을 구원하였습니다.

 

至六月 先王薨 送葬纔訖 喪服未除 不能應赴 勅旨發兵北歸 含資道摠管劉德敏等至 奉勅遣新羅供運平壤軍粮 此時 熊津使人來 具陳府城孤危 劉摠管與某平章自云 若先送平壤軍粮 卽恐熊津道斷 熊津若其道斷 留鎭漢兵 卽入賊手劉摠管遂共某相隨 先打甕山城 旣拔甕山 仍於熊津造城 開通熊津道路 至十二月 熊津粮盡 先運熊津 恐違勅旨 若送平壤 卽恐熊津絶粮 所以差遣老弱 運送熊津 强健精兵 擬向平壤 熊津送粮 路上逢雪 人馬死盡 百不一歸

6월에 이르러 선왕(태종무열왕)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겨우 마쳐 상복을 아직 벗지 않아 마땅히 나아가지 못함에도 칙명을 내려 북쪽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 총관 유덕민 등이 이르러 칙명을 받드니 신라로 하여금 평양으로 군량을 운반하여 공급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웅진의 사자가 와서 (웅진도독)부성이 외롭고 위태롭다고 모두 말하였습니다. 유총관과 내가 의논하여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지는 것이 두렵다. 웅진이 만약 그 길이 끊어진다면 지키는 중국 군대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까 두렵습니다.”했습니다. 유총관이 마침내 나와 함께 서로 따라 먼저 옹산성을 치고, 옹산을 빼앗은 뒤에는 웅진에 성을 만들어 웅진도로를 개통하였습니다. 12원에 이르러 웅진에 식량이 다하였습니다. 먼저 웅진으로 운반하면 칙명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보낸다면 곧 웅진에 식량이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그 때문에 노약자를 보내 웅진에 식량을 운반하게 하고, 강건하고 날랜 군대는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웅진으로 식량을 보낸 사람은 길 위에서 눈을 만나 사람과 말리 모두 죽어 100명 중에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至龍朔二年正月 劉摠管共新羅兩河道摠管金庾信等 同送平壤軍粮 當時陰雨連月 風雪極寒 人馬凍死 所將兵粮 不能勝致 平壤大軍 又欲歸還 新羅兵馬 粮盡亦廻 兵士饑寒 手足凍瘃 路上死者 不可勝數 行至瓠瀘河 高麗兵馬 尋後來趂 岸上列陣 新羅兵士 疲乏日久 恐賊遠趂 賊未渡河 先渡交刃

용삭 2(662) 정월에 이르러 유총관이 신라 양하도 총관 김유신 등과 함께 같이 평양에 군량을 보냈다. 당시에 장마 비가 달을 잇고, 풍설이 지극히 차가워 사람과 말이 얼어 죽으니 식량을 운반하는 군사들이 이를 수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한 돌아가고, 신라의 군대가 식량이 다하여 또한 돌아갔습니다, 군사들이 주림과 추위로 손관 발에 동상이 걸려 길 위에서 얼어 죽은 자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행군하여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대가 막 뒤를 쫓아 와 언덕 위에 진을 쳤다. 신라의 군사들이 피로가 날로 오래하여 적이 멀리 쫒아 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적이 강을 던너기 전에 먼저 건너 싸웠습니다.

 

前鋒暫交 賊徒瓦解 遂收兵歸來 此兵到家 未經一月 熊津府城 頻索種子 前後所送 數萬餘斛 南運熊津 北供平壤 蕞小新羅 分供兩所 人力疲極 牛馬死盡 田作失時 年穀不熟 所貯倉粮 漕運並盡 新羅百姓 草根猶自不足 熊津漢兵 粮食有餘 又留鎭漢兵 離家日久 衣裳破壞 身無全褐 新羅勸課百姓 送給時服 都護劉仁願 遠鎭孤城 四面皆賊 恒被百濟侵圍 常蒙新羅解救 一萬漢兵 四年衣食新羅 仁願已下 兵士已上 皮骨雖生漢地 血肉俱是新羅 國家恩澤 雖復無涯 新羅效忠 亦足矜憫

앞의 군대가 잠시 싸우니 적의 무리가 와해되었습니다.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대가 집에 이르러 한 달이 되지 않아 웅진부성이 자주 종자를 찾았는데(구하였는데) 앞뒤로 보낸 바가 수만 여 곡이었습니다. 남쪽으로 웅진에 운반하고, 북쪽으로 평양에 공급하였습니다. 조그만 신라가 나누어 두 곳에 공급하니 인력의 피로가 지극하고 소와 말이 모두 죽었습니다. 곡식이 익지 않아 쌓아 둔 창고의 식량과 조운이 모두 다하니 신라의 백성들은 풀과 뿌리로도 오히려 부족한데 웅진의 중국 군사들은 양식에 남음이 있었습니다. 또 남아 지키던 중국군대가 집을 떠난 날이 오래되어 의상이 헤져 몸에 걸칠만 한 온전한 옷이 없으므로 신라가 백성들에게 일을 맡겨 계절에 맞는 옷을 보내 지급하였습니다. 도호 유인원이 멀리 외로운 성을 지키는데 사방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범과 에워쌈을 당하였을 때 항상 신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至龍朔三年 摠管孫仁師 領兵來救府城 新羅兵馬 亦發同征 行至周留城下 此時 倭國船兵 來助百濟 倭船千艘 停在白江 百濟精騎 岸上守船 新羅驍騎 爲漢前鋒 先破岸陣 周留失膽 遂卽降下 南方已定 廻軍北伐 任存一城 執迷不降 兩軍倂力 共打一城 固守拒捍 不能打得 新羅卽欲廻還

용삭3(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 (웅진도독)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군대가 또한 함께 정벌하여 행군하여 주류성 아래 이르렀습니다. 이 때 왜국의 병선이 와서 백제를 도왔습니다. 왜국의 배 천 척이 백강에 정박하고, 백제의 날랜 기병이 강언덕 위에서 배를 지켰습니다. 신라의 날랜 기병이 중국을 위하여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을 깨트리니 주류()가 담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나아가 항복시키고, 남쪽이 평정된 뒤 군대를 돌려 북쪽을 쳤는데 임존 한 성만은 미혹함을 잡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한 성을 쳤지만 굳게 지키고 사납게 막아서 쳐서 얻지 못하자 신라는 곧 돌아오려 하였습니다.

 

杜大夫云 準勅 旣平已後 共相盟會 任存一城 雖未降下 卽可共相盟誓新羅以爲準勅 旣平已後 共相盟會 任存未降 不可以爲旣平 又且百濟 姦詐百端 反覆不恒 今雖共相盟會 於後恐有噬臍之患 奏請停盟 至麟德元年 復降嚴勅 責不盟誓 卽遣人於熊嶺 築壇共相盟會 仍於盟處 遂爲兩界 盟會之事 雖非所願 不敢違勅 又於就利山築壇 對勅使劉仁願 歃血相盟 山河爲誓 畫界立封 永爲疆界 百姓居住 各營産業

두 대부(두상)가 말하기를 칙명에 의하여 평정한 후 함께 서로 맹서하는 모임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임존 한 성이 비록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나 곧 함께 서로 맹서해야 합니다.”했습니다. 신라는 칙명에 따르면 평정한 후에 함께 서로 맹서하는 모임을 가지라 하였는데 임존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은 것을 이미 항복하였다고 여길 수 없었습니다. 또 백제는 간사함과 속임수가 여러 갈래여서 항상하지 않음을 반복합니다. 지금 비록 함께 서로 맹서하는 모임을 가진다하여도 후에 배꼽을 깨물리는 근심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맹서를 정지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습니다. 인덕 1(664)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서하지 않음을 꾸짖으시므로 곧 웅령에 사람을 보내 함께 서로 맹서하는 단을 쌓게 하고 맹서한 곳 그대로를 마침내 둘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맹서하는 모임을 비록 원한 것은 아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또 취리산에 단을 쌓고 칙사 유인원을 맞아 삽혈하고 서로 맹서하였는데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그리고 푯말을 세워 길이 국경으로 삼아 백성들이 살게 하고 생업을 영위하게 하였습니다.

 

至乾封二年 聞大摠管英國公征遼 某往漢城州 遣兵集於界首 新羅兵馬 不可獨入 先遣細作三度 船相次發遣 覘候大軍 細作廻來 並云 大軍未到平壤且打高麗七重城 開通道路 佇待大軍來至 其城垂垂欲破 英公使人江深來云 奉大摠管處分 新羅兵馬 不須打城 早赴平壤 卽給兵粮 遣令赴會行至水谷城 聞大軍已廻 新羅兵馬 遂卽抽來

건봉 2(667)에 이르러 대총관 영국공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제가 한성주에 가 군대를 보내 국경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의 군대가 홀로 들어 갈 수 없어 먼저 세작(첩자)을 세 번 보냈는데 배를 서로 차례로 보내 대군을 엿보게 하였습니다. 세작(첩자) 졸아 와 모두 말하기를 대군이 아직 평양에 이르지 않았습니다.”했습니다. 또 고구려 칠중성을 쳐서 도로를 열어 통하게 하고, 한 곳에 머물며 대군이 와 이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성을 막 깨트리려 할 때 영국공이 강심으로 하여금 와서 말하게 하기를 대총관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의 군대는 성을 칠 것 없이 빨리 평양으로 나아가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 하였습니다. 행군하여 수곡성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것을 듣고 신라의 군대를 마침내 곧 거두어 왔습니다.

 

至乾封三年 遣大監金寶嘉入海 取英公進止 奉處分 新羅兵馬 赴集平壤 至五月 劉右相來 發新羅兵馬 同赴平壤 某亦往漢城州 檢校兵馬 此時 蕃漢諸軍摠集蛇水 男建出兵 欲決一戰 新羅兵馬 獨爲前鋒 先破大陣 平壤城中 挫鋒縮氣 於後 英公更取新羅驍騎五百人 先入城門 遂破平壤 克成大功

건봉 3(668) 대감 김보가를 보내 바다에 들어 가 영공에게 나아갔더니 처분을 받들기를 신라의 군대는 평양으로 나아가 모이라했습니다. 5월에 이르러 유우상(유인궤)이 와서 신라의 군대를 출발시켜 함께 평양으로 나아갔습니다. 내가 또한 한성주에 가 군대를 검열하였습니다. 이 때 번방과 중국의 여러 군대가 모두 사수에 모였습니다. 남건이 군대를 내어 일전을 결단하려 하였는데 신라의 군대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을 깨트리니 평양성 안의 예봉을 꺽고, 기세를 위축시켰습니다. 후에 영공이 다시 신라의 날랜 군대 500명을 데려다 먼저 성문을 들어가게 하여 마침내 평양을 깨트려 큰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於此新羅兵士並云 自征伐已經九年 人力殫盡 終始平兩國 累代長望 今日乃成 必當國蒙盡忠之恩 人受效力之賞英公漏云 新羅前失軍期 亦須計定新羅兵士 得聞此語 更增怕懼 又立功軍將 並錄入朝 已到京下 卽云 今新羅並無功夫軍將歸來 百姓更加怕懼

이에 신라 군대가 모두 말하기를 정벌한 지 이미 9년이 지나 사람의 힘이 다하였지만 끝내 비로소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길이 희망하였던 것을 오늘 마로 이루었습니다. 반드시 나라는 충성을 다한 은혜를 입고, 사람들은 힘을 다한 상을 입을 것입니다.”했습니다. 영공이 몰래 말하기를 신라는 앞서 군대의 기일을 잃었으니 또한 반드시 헤아려 정할 것이다.”했습니다. 신라의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다시 더욱 두려워하고, 또 공을 세운 장수들은 모두 기록되어 당나라 조정에 들어 가 이미 수도(장안)에 이르러 곧 말하기를 지금 신라는 모두 공이 없습니다.”하여, 대저 군대 장수들이 돌아오니 백성들은 다시 더욱 두려워하였습니다.

 

又卑列之城 本是新羅 高麗打得三十餘年 新羅還得此城 移配百姓 置官守捉 又取此城 還與高麗 且新羅自平百濟 迄定高麗 盡忠效力 不負國家 未知何罪 一朝遺棄 雖有如此寃枉 終無反叛之心 至總章元年 百濟於盟會處 移封易標 侵取田地 詃我奴婢 誘我百姓 隱藏內地 頻從索取 至竟不還 又通消息云 國家修理船艘 外託征伐倭國 其實欲打新羅百姓聞之 驚懼不安

또 비열성은 본래 이는 신라 것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얻은 지 30여 년이었는데 신라가 이 성을 돌려받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지켰는데, (당나라가)또 이 성을 빼앗아 고구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또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때로부터 고구려 평정을 마칠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국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어떤 죄로 하루아침에 버려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비록 이 같은 원망이 있을 지라도 끝내 배반하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 1(668)에 이르러 백제가 회맹한 곳에 국경을 옮겨 표식을 바꾸고, 토지를 빼앗고, 우리 노비를 꾀고, 우리 백성을 유인하여 자기 나라 안에 감추고 자주 여러 번 찾아도 끝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소식을 들으니 국가(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밖으로는 외국을 정벌한다고 핑계대지만 그 실제는 신라를 치려하는 것이다.”하니 백성들이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又將百濟婦女 嫁與新羅漢城都督朴都儒 同謀合計 偸取新羅兵器 襲打一州之地 賴得事覺 卽斬都儒 所謀不成 至咸亨元年六月 高麗謀叛 摠殺漢官 新羅卽欲發兵 先報熊津云 高麗旣叛 不可不伐 彼此俱是帝臣 理須同討凶賊 發兵之事 須有平章 請遣官人來此 共相計會百濟司馬禰軍來此

또한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 한성 도독 박도유에게 시집보내 함께 계책을 도모하여 신라의 무기를 훔쳐 한 주의 땅을 습격하려 하였습니다. 다행히 일이 발각되어 곧 도유의 머리를 베어 죽여 도모한 바는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함형 1(670)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모반하여 중국의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가 곧 군대를 내고자하여 먼저 웅진에 보고하기를 고구려가 모반하여 정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차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상 반드시 함께 흉한 적을 토벌해야 합니다. 군대를 징발하는 일은 모름지기 논의가 있어야 하니 관리를 보내 여기에 와 함께 계획할 것을 청합니다.”하니 백제 사마 예군이 여기에 왔습니다.

 

遂共平章云 發兵已後 卽恐彼此相疑 宜令兩處官人 互相交質卽遣金儒敦及府城百濟主簿首彌長貴等 向府 平論交質之事 百濟雖許交質 城中仍集兵馬 到彼城下 夜卽來打 至七月 入朝使金欽純等至 將畫界地 案圖披撿 百濟舊地 摠令割還 黃河未帶 太山未礪 三四年間 一與一奪 新羅百姓 皆失本望

마침내 함께 논의하기를 군대를 징발한 이후는 곧 피차 서로 의심할 까 두려우니 마땅히 두 곳의 관리로 하여금 서로 볼모를 교환하자.”하였습니다. 곧 김유돈과 (웅진)부성 백제 주부 수미, 장귀 등을 보내 (웅진)부로 향하게 하여 볼모을 교환하는 일을 공평하게 논의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볼모을 교환하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성안에 곧 군대를 모아그 성 아래 이르면 밤에는 곡 와서 쳤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이 이르렀는데 땅을 경계 지은 것을 그린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잘라 돌려주게 한 것이었습니다. 황하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이 아직 숫돌 같이 되지 않았는데 3, 4년 사이에 한 번 주고, 한 번 빼앗으니 신라의 백성은 모두 본래 바라던 것(희망)을 잃었습니다.

 

並云 新羅·百濟累代深讎 今見百濟形況 別當自立一國 百年已後 子孫必見呑滅 新羅旣是國家之州 不可分爲兩國 願爲一家 長無後患去年九月 具錄事狀 發使奏聞 被漂却來 更發遣使 亦不能達 於後 風寒浪急 未及聞奏 百濟構架奏云 新羅反叛新羅前失貴臣之志 後被百濟之譖 進退見咎 未申忠款 似是之讒 日經聖聽 不貳之忠 曾無一達 使人琳潤至辱書 仰承摠管 犯冒風波 遠來海外 理須發使郊迎 致其牛酒 遠居異城 未獲致禮 時闕迎接 請不爲怪

아울러 이르기를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 원한이 깊습니다. 지금 백제의 현황을 보니 따로 자립하여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100년 후에 자손이 반드시 삼켜져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신라가 이미 이 국가의 주가 되었으니 두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집안이 되어 길이 근심이 없기를 원합니다.” 했습니다. 지난 해 9월 일을 모두 갖추어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려하였지만 표류하여 돌아왔습니다.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또한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후에 바람이 차고 파도가 급하여 아직 아룀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백제가 꾸며서 아뢰어 말하기를 신라가 배반하였습니다.”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당나라의) 귀한 신하의 뜻을 잃었고, 뒤에는 백제의 참소를 입어 나아가나 물러가나 허물을 당하여 아직 충성과 정성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이 같은 참소가 날마다 황제에게 들리니 변함없는 충성을 일찍이 한번도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인 임윤이 편지를 가지고 이른 후에야 종고나이 바람과 파도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 상 반드시 사신을 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고 고기와 술이 이르게 해야 하지만 멀리 다른 성에 살아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에 맞추어 영접하지 못하였으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 것을 청합니다.

 

披讀摠管來書 專以新羅已爲叛逆 旣非本心 惕然驚懼 數自功夫 恐被斯辱之譏 緘口受責 亦入不弔之數 今略陳寃枉 具錄無叛 國家不降一介之使 垂問元由 卽遣數萬之衆 傾覆巢穴 樓船滿於滄海 艫舳連於江口 數彼熊津伐此新羅

총관이 보내 온 글을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반역하였다 하는데 본심이 아니라서 두렵고 놀랄 뿐입니다. 스스로 공부를 헤아린다면 이 욕의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닫고 꾸짖음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수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대략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진술하여 배반이 없음을 갖추어 기록하였습니다. 당나라가 일개 사신을 내려 보내 일의 근본과 연유를 물어보지 않고, 곧 수만의 무리를 보내 둥지와 구멍(우리나라)을 기우려 엎으려고, 누각이 있는 배는 창해에 가득하고, 배의 고물이 강의 입구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을 헤아려 이 신라를 치십니까?

 

嗚呼 兩國未定平 蒙指蹤之驅馳 野獸今盡 反見烹宰之侵逼 賊殘百濟 反蒙雍齒之賞 殉漢新羅 已見丁公之誅 大陽之曜 雖不廻光 葵藿本心 猶懷向日 摠管禀英雄之秀氣 抱將相之高材 七德兼備 九流涉獵 恭行天罰 濫加非罪 天兵未出 先問元由 緣此來書 敢陳不叛 請摠管審自商量 具狀申奏 雞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王金法敏白置所夫里州 以阿湌眞王爲都督 九月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 侵帶方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艘 捉郞將鉗耳大侯 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湌當千功第一 授位沙湌

! 두 나라가 평정하기 전에 발자취를 따르는 부림을 입더니 들에 짐승이 지금 모두 없어지자 도리어 요리하는 이의 침범과 핍박을 당하는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도리어 옹치의 상을 받고, 중국을 위해 죽은 신라는 정공의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雖不廻光 葵藿本心 猶懷向日 摠管禀英雄之秀氣 抱將相之高材 七德兼備 九流涉獵 恭行天罰 濫加非罪 天兵未出 先問元由 緣此來書 敢陳不叛 請摠管審自商量 具狀申奏 雞林州大都督左衛大將軍開府儀同三司上柱國新羅王金法敏白置所夫里州 以阿湌眞王爲都督 九月 唐將軍高侃等 率蕃兵四萬到平壤 深溝高壘 侵帶方 冬十月六日 擊唐漕船七十餘艘 捉郞將鉗耳大侯 士卒百餘人 其淪沒死者 不可勝數 級湌當千功第一 授位沙湌

비록 빛이 비치지 않아도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오히려 태양을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은 영웅의 빼어난 기개를 받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재능을 품었으며 일곱가지 덕을 겸비하고 아홉가지 학문을 섭렵하였으니 공손히 황제의 벌을 집행함에 죄가 아닌 것에 함부로 (벌을)가하지 않겠습니다. 천자의 군대가 출동하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연유를 묻는 글을 보내왔으니 감히 배반하지 않았음을 말씀드립니다.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려 글을 갖추어 아뢰어 줄 것을 청합니다. 계림주 대도독 좌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신라왕 깁법민이 말합니다. 소부리주를 두고 아친 진왕을 도독으로 삼았다. 9월 당나라 장군 고간 등이 번방의 군대 4만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방을 침범하였다. 겨울 106일 당나라 조운선 70여척을 쳐서 낭장 겸이대후와 병졸 100여명을 사로잡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급찬 당천의 공이 제일이어서 사찬의 관등을 주었다.

 

十二年 春正月 王遣將攻百濟古省城 克之 二月 攻百濟加林城 不克 秋七月 唐將高侃 率兵一萬 李謹行率兵三萬 一時至平壤 作八營留屯 八月 攻韓始城·馬邑城 克之 進兵距白水城五百許步 作營 我兵與高句麗兵逆戰 斬首數千級 高侃等退 追至石門戰之 我兵敗績 大阿湌曉川·沙湌義文·山世·阿湌能申·豆善·一吉湌安那含·良臣等死之 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九月 彗星七出北方 王以向者百濟往訴於唐 請兵侵我 事勢急迫 不獲申奏 出兵討之

12(672) 봄 정월 왕이 장수를 보내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 2월 백제가림성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대 1만을 통솔하고, 이근행이 군대 3만을 통솔하고 한꺼번에 평양에 이르러 여덟 개의 진영을 만들고 주둔하였다. 8월 한시성, 마음성을 쳐서 이겼다.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에서 500보 떨어진 곳에 진영을 만들었다. 우리 군대와 고구려 군대가 맞아 싸워 머리를 벤 것이 수천 개였다. 고간 등이 물러나므로 추격하여 석문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대가 패하여 대아찬 효천, 사찬 의문, 산세, 아찬 능신, 두선, 일길찬 안나함, 양신 등이 죽었다.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 9월 혜성 일곱 개가 북쪽에 나타났다.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호소하는 것으로서 군대를 청해 우리를 침범하였을 때 일의 형세가 급박해지자 아뢰지 못하고 군대를 내어 토벌하였다.

 

由是 獲罪大朝 遂遣級湌原川 奈麻邊山 及所留兵船郞將鉗耳大侯 萊州司馬王藝 本烈州長史王益 熊州都督府司馬禰軍 曾山司馬法聰 軍士一百七十人 上表乞罪曰 臣某死罪謹言 昔臣危急 事若倒懸 遠蒙拯救 得免屠滅 粉身糜骨 未足上報鴻恩 碎首灰塵 何能仰酬慈造 然深讎百濟 逼近臣蕃 告引天兵 滅臣雪恥 臣忙破滅 自欲求存 枉被凶逆之名 遂入難赦之罪 臣恐事意未申 先從刑戮 生爲逆命之臣 死爲背恩之鬼 謹錄事狀 冒死奏聞 伏願 少垂神聽 炤審元由

이로 말미암아 대조(당나라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 원천, 나마 변산과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당 나라)병선 낭장 겸이대후, 내주 사마 왕예, 본열주 장사 왕익, 웅주도독부 사마 예군, 증슨 사마 법총, 군사 170명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청해 말하기를 신 아무개(문무왕)는 죽을죄를 짓고 삼가 아룁니다. 옛날에 신이 위급하여 일이 마치 매달린 것과 같은데 멀리 구함을 입어 도륙 당하여 없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부순다하여도 넓은 은혜를 갚기에 부족하였습니다. 머리를 깨트리고 재와 먼지가 될지라도 어찌 우러러 자애로운 도움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원한이 있는 백제는 신의 번방에 매우 가까이 와 천자의 군대를 인도하여 신을 없애 복수하려 하였습니다. 신이 황망히 깨트려 없애 스스로 보존을 구하고자하다 잘못 흉역의 이름을 입고 마침내 용서하기 어려운 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실과 뜻을 미처 펴지 못한 채 먼저 형벌을 따른다면 살아서는 명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등진 귀신이 될 것이니 삼가 일을 기록한 문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잠시라도 귀 기우려 들어주시고 밝게 근본 이유를 살펴주십시오.

 

臣前代已來 朝貢不絶 近爲百濟 再虧職貢 遂使聖朝出言命將 討臣之罪 死有餘刑 南山之竹 不足書臣之罪 褒斜之林 未足作臣之械 瀦池宗社 屠裂臣身 事聽勅裁 甘心受戮 臣櫬轝在側 泥首未乾 泣血待朝 伏聽刑命 伏惟 皇帝陛下 明同日月 容光並蒙曲炤 德合乾坤 動植咸被亭毒 好生之德 遠被昆蟲 惡殺之仁 爰流翔泳 儻降服捨之宥 賜全腰領之恩 雖死之年 猶生之日 非所希冀 敢陳所懷 不勝伏劒之志

신은 전대 이래로 조공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는데 근래에 백제가 두 번이나 직공(조공)을 이지러뜨리게 되어 마침내 성조(당나라)로 하여금 말을 내고 장수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꾸짖게 하였습니다. 죽음에도 남은 형벌이 있고, 남산의 대나무는 신의 죄를 쓰기에 부족하고, 포야의 숲은 신의 차코를 만들기에 부족하고, 종묘와 사직을 늪과 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지라도 일을 들으시고 결정하신다면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신은 수레에 관을 실은 수레를 옆에 두고, 진흙 묻힌 머리가 마르기전에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삼가 형벌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밝음이 해와 달 같고, 용서의 빛이 모두 굴곡진 곳까지 밝게 비추고, 덕은 하늘과 땅이 합하였고, 동물과 식물이 모두 양육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까지 입혀졌고, 죽이기를 미워하는 인은 이에 흘 날짐승과 물고기에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만일 항복하면 용서를 내리시어 허리와 머리를 보전함의 은혜를 내려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그 해가 오히려 사는 날일 것입니다. 바라고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감히 품은 바를 진술하니 검에 엎드리는(자결하는) 뜻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謹遣原川等 拜表謝罪 伏聽勑旨 某頓首頓首 死罪死罪兼進貢銀三萬三千五百分 銅三萬三千分 針四百枚 牛黃百二十分 金百二十分 四十升 布六匹 三十升 布六十匹 是歲 穀貴人飢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엎드려 칙명을 따르겠습니다. 아무개가 머리를 조아리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죽을죄이고, 죽을죄입니다.”했다. 겸하여 은 335백푼, 33천푼, 바늘 400, 우황 120, 금백 2040, 630, 64필을 공물로 바쳤다. 이해 곡식이 귀하여 사람이 주렸다.

 

十三年 春正月 大星隕皇龍寺在城中間 拜强首爲沙湌 歲賜租二百石 二月 增築西兄山城 夏六月 虎入大宮庭 殺之 秋七月一日 庾信卒 阿湌大吐謀叛付唐 事泄伏誅 妻孥充賤 八月 以波珍湌天光爲中侍 增築沙熱山城 九月 築國原城古薍長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 一名迭巖城 達含郡主岑城·居烈州萬興寺山城·歃良州骨爭峴城 王遣大阿湌徹川等 領兵船一百艘 鎭西海 唐兵與靺鞨·契丹兵來侵北邊 凡九戰 我兵克之 斬首二千餘級 唐兵溺瓠瀘·王逢二河 死者不可勝計 冬 唐兵攻高句麗牛岑城 降之 契丹·靺鞨兵攻大楊城·童子城 滅之 始置外司正 州二人 郡一人 初太宗王滅百濟 罷戍兵 至是復置

13(673) 봄 정월 큰 별이 황룡사와 재성 중간에 떨어졌다. 강수를 사찬으로 삼고 세조 200석을 내렸다. 2월 서형산성을 증축하였다. 여름 6월 호랑이가 대궁의 뜰에 들어왔으므로 죽였다. 가을 71일 김유신이 죽었다. 아찬 대토가 모반하여 당나라에 붙으려하다 일이 누설되어 목 베어 죽이고, 처와 자식들을 천민에 충당하였다. 8월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고 사열산성을 늘여 쌓았다. 9월 국원성, 고란장성, 북형산성, 소문성, 이산성, 수약주 주양성(일명 질암성), 달함군 주잠성, 거열주 만흥산사산성, 삽량주 골쟁현성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당나라 군대와 말갈, 글안 군대가 와서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모두 아홉 번 싸워 우리 군대가 이기고, 3천여 개의 머리를 베었다. 당나라 군대가 호로, 왕봉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겨울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 우잠성을 치니 항복하였다. 글안, 말갈 군대가 대양성, 동자성을 쳐서 없앴다. 처음 외사정으로 주에 두 사람, 군에 한 사람을 두었다. 처음 태종왕이 백제를 없애고, 지키는 군대를 거두었다가 이에 이르러 다시 둔 것이다.

 

十四年 春正月 入唐宿衛大奈麻德福 傳學曆術還 改用新曆法 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使人守之 唐高宗大怒 詔削王官爵 王弟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仁問 在京師 立以爲新羅王 使歸國 以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劉仁軌爲雞林道大摠管 衛尉卿李弼·右領軍大將軍李謹行副之 發兵來討 二月 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秋七月 大風毁皇龍寺佛殿 八月 大閱於西兄山下 九月 命義安法師爲大書省 封安勝爲報德王(十年 封安勝高句麗王 今再封 不知報德之言 若歸命等耶 或地名耶) 幸靈廟寺前路閱兵 觀阿湌薛秀眞六陣兵法

14(674) 봄 정월 당 나라에 들어 가 숙위하던 대나마 복덕이 역법을 배우고 돌아 와 전하니 새로운 역법을 고쳐 썼다.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 옛 땅을 차지하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니 당나라 고종이 크게 노하여 조칙으로 왕의 관작을 깍았다. 왕의 동생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이 경사(장안)에 있었는데 세워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 동중서문하삼품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 대장군 이근행으로서 돕게 하여 군대를 내어 토벌하게 했다. 2월에 궁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 가을 7월 큰 바람이 불어 황룡사 불전을 무너뜨렸다. 8월 서형산 아래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9월 의안법사를 대서성으로 삼고, 안승을 봉하여 보덕왕이라 했다.(10년에 안승을 봉하여 고구려왕으로 삼았는데 지금 다시 봉한 것이다. 보덕이라는 말이 명을 받아 돌아온다는 것인지, 혹은 땅 이름인지 알지 못한다.) 영묘사 앞길에 행차하여 열병하고, 아찬 설수진의 6진병법을 보았다.

 

十五年 春正月 以銅鑄百司及州郡印 頒之 二月 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 仁軌引兵還 詔以李謹行爲安東鎭撫大使 以經略之 王乃遣使 入貢且謝罪 帝赦之 復王官爵 金仁問中路而還 改封臨海郡公 然多取百濟地 遂抵高句麗南境爲州郡 聞唐兵與契丹·靺鞨兵來侵 出九軍待之 秋九月 薛仁貴以宿衛學生風訓之父金眞珠 伏誅於本國 引風訓爲鄕導 來攻泉城 我將軍文訓等 逆戰勝之 斬首一千四百級 取兵船四十艘 仁貴解圍退走 得戰馬一千匹

15(675) 봄 정월 구리로 모든 관청과 주군의 ()인을 주조하여 나누어주었다. 2월 유인궤가 우리 군대를 칠중성에서 깨트렸다. 유인궤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칙으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경략하게 하였다. 왕이 이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니 황제가 풀어주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이 중간에 돌아오니 고쳐 봉해 임해군공이라 했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여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군으로 삼았다. 당 나라 군대가 글안, 말갈 군대가 와서 침입한다는 것을 듣고 아홉 개 군을 내보내 대비하게 하였다. 가을 9월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의 아버지 김진주가 본국(신라)에서 목 베여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와서 천성을 쳤다. 우리 장군 문훈 등이 맞아 싸워 이기고 14백 명을 목 베고, 병선 40여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에워싼 것을 풀고 물러나 달아나자 전마 1천 필을 얻었다.

 

二十九日 李謹行率兵二十萬 屯買肖城 我軍擊走之 得戰馬三萬三百八十匹 其餘兵仗稱是 遣使入唐貢方物 緣安北河設關城 又築鐵關城 靺鞨入阿達城劫掠 城主素那逆戰死之 唐兵與契丹·靺鞨兵來 圍七重城 不克 小守儒冬死之 靺鞨又圍赤木城 滅之 縣令脫起率百姓拒之 力竭俱死 唐兵又圍石峴城 拔之 縣令仙伯·悉毛等 力戰死之 又我兵與唐兵大小十八戰 皆勝之 斬首六千四十七級 得戰馬二百匹

29일 이근행이 군대 2십만을 통솔하여 매소성에 주둔하였다. 우리 군대가 치니 달아났다. 전마 338십필을 얻었다. 나머지 병장기도 이에 걸맞았다.(그 정도였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안북하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을 쌓았다. 말갈이 아달성에 들어 와 약탈하니 성주 소나가 맞아 싸우다 죽었다. 당 나라 군대가 글안, 말갈 군대와 와서 칠중성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소수 유동이 죽음을 당하였다. 말갈이 또 적목성을 에워싸서 함락시켰다. 현령 탈기가 백성을 인솔하여 막았으나 힘이 다하여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당 나라 군대가 또 석현성을 에워싸서 빼앗았다. 현령 선백, 실모 등이 힘껏 싸우다 죽음을 당하였다. 또 우리 군대가 당 나라 군대와 크고 작게 열여덟 번을 싸워 모두 이겼다. 647명을 목 베어 죽이고 전마 2백 필을 얻었다.

 

十六年 春二月 高僧義相奉旨 創浮石寺 秋七月 彗星出北河積水之間 長六七許步 唐兵來攻道臨城 拔之 縣令居尸知死之 作壤宮 冬十一月 沙湌施得領船兵 與薛仁貴戰於所夫里州伎伐浦 敗績 又進大小二十二戰 克之 斬首四千餘級 宰相陳純乞致仕 不允 賜几杖

16(676) 2월 고승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 혜성이 북하와 적수 사이에 나타났는데 길이는 6~7보 쯤 되었다. 당 나라 군대가 와서 도임성을 쳐서 빼앗았다. 현령 고시지가 죽은을 당하였다. 양궁을 지었다. 겨울 11월 사찬 시득이 선병(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와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싸워 패하였다. 또 나아가 크고 작게 이십 번을 싸워 이기고 4천여명을 목 베어 죽였다. 재상 진순이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궤장(안석과 지팡이)을 내렸다.

 

十七年 春三月 觀射於講武殿南門 始置左司祿館 所夫里州獻白鷹

17(677) 3월 강무전 남문에서 활쏘는 것을 보았다. 처음 좌사록관을 두었다. 소부리주에서 흰 매를 바쳤다.

 

十八年 春正月 置船府令一員 掌船楫事 加左右理方府卿各一員 置北原小京 以大阿湌吳起守之 三月 拜大阿湌春長爲中侍 夏四月 阿湌天訓爲武珍州都督 五月 北原獻異鳥 羽翮有文 脛有毛

18(678) 봄 정월 선부령 1명을 두어 배와 노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좌우이방부 경 각 1명씩을 더하고, 북원소경을 두어 대아찬 오기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3월 대아찬 춘장에게 벼슬을 주어 중시로 삼았다. 여름 4월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았다. 5월 북원에서 이상한 새를 바쳤는데 날개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 털이 있었다.

 

十九年 春正月 中侍春長病免 舒弗邯天存爲中侍 二月 發使略耽羅國 重修宮闕 頗極壯麗 夏四月 熒惑守羽林 六月 太白入月 流星犯參大星 秋八月 太白入月 角干天存卒 創造東宮 始定內外諸門額號 四天王寺成 增築南山城

19(679) 봄 정월 중시 춘장이 병으로 물러나자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았다. 2월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둘러보게 하였다. 궁궐을 고쳤는데 자못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형혹이 우림을 지켰다. 6월 태백이 달에 들어가고,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가을 8월 태백이 달에 들어갔다. 각간 천존이 죽었다. 동궁을 처음 지었다. 처음 내와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사천왕사가 완성되었다. 남산성을 더하여 쌓았다.

 

二十年 春二月 拜伊湌金軍官爲上大等 三月 以金銀器及雜綵百段 賜報德王安勝 遂以王妹妻之(一云迊湌金義官之女也) 下敎書曰 人倫之本 夫婦攸先 王化之基 繼嗣爲主 王鵲巢位曠 雞鳴在心 不可久空內輔之儀 永闕起家之業 今良辰吉日 率順舊章 以寡人妹女爲伉儷 王宜共敦心義 式奉宗祧 克茂子孫 永豐盤石 豈不盛歟 豈不美歟

20(680) 2월 이찬 김군관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금은그릇과 여러 채색 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리고 마침내 왕의 여동생을 처로 삼게 했다.(또는 잡찬 김의관의 딸이라 한다.)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인륜의 근본은 부부가 우선이고, 왕의 교화의 시틀은 후계를 잇는 것이 으뜸이다. 왕은 까치둥지의 빈자리를 채웠고, 닭의 울음이 마음에 있으니 안에서 도와주는 법도를 오래도록 비우고, 집안 일으킬 기업을 길이 빠트려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좋은 때와 좋은 날에 옛 법도를 따라 과인(문무왕)의 누이의 딸(누이)로 짝을 삼으니 왕께서는 마땅히 마음과 뜻을 함께 도타이하여 조상의 제사를 법식에 맞게 받들고, 자손을 번성하게 하여 영원히 반석과 같이 풍성하게 한다면 어찌 성대하지 않으리오.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했다.

 

夏五月 高句麗王使大將軍延武等 上表曰 臣安勝言 大阿湌金官長至 奉宣敎旨 幷賜敎書 以外生公爲下邑內主 仍以四月十五日至此 喜懼交懷 罔知攸寘 竊以帝女降嬀 王姬適齊 本揚聖德 匪關凡才 臣本庸流 行能無筭 幸逢昌運 沐浴聖化 每荷殊澤 欲報無堦 重蒙天寵 降此姻親 遂卽穠華表慶 肅雝成德 吉月令辰 言歸弊館 億載難遇 一朝獲申 事非望始 喜出意表 豈惟一二父兄 實受其賜 其自先祖已下 寔寵喜之 臣未蒙敎旨 不敢直朝 無任悅豫之至 謹遣臣大將軍太大兄延武 奉表以聞加耶郡置金官小京

여름 5월 고구려 왕이 대장군 연무 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 아승은 말씀드립니다. 대아찬 김관장이 이르러 교지를 받들어 펴고, 아울러 외생(생질)을 하읍()의 안주인으로 삼으라는 교서를 내리셨습니다. 이어 415일 여기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을 서로 마음속에 품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요임금)가 딸을 규에게 시집보내고, (주 나라)왕의 딸을 제나라에 가게 한 것은 본래 성스러운 덕을 드날려 평범한 재능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무리로 행동과 능력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행히 앞날이 번창할 운수를 만나 성스러운 교화에 목욕하고 매번 특수한 은택을 입으니 갚으려 하여도 길이 없습니다. 거듭 대왕의 사랑을 입어 이러한 인척이 되는 기회를 내려주시니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나타내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이루어 좋은 달 아름다운 날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 말하니 억년동안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 하루아침에 펴졌습니다.(이루어졌습니다.) 일은 처음 바라지 않았던 것이니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 두 부형만이 실로 그 내림을 받겠습니까? 그 선조 이하로부터 이 은총에 기뻐할 일입니다. 신은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감히 바로 알현하지 못하지만 기쁨과 즐거움의 지극함을 맡길 데가 없어 삼가 신의 대장군 태대형 연무를 보내 표를 받들어 아룁니다.” 했다.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두었다.

 

二十一年 春正月朔 終日黑暗如夜 沙湌武仙率精兵三千 以戍比列忽 置右司祿館 夏五月 地震 流星犯參大星 六月 天狗落坤方 王欲新京城 問浮屠義相 對曰 雖在草野茅屋 行正道 則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城 亦無所益王乃止役 秋七月一日 王薨 諡曰文武 羣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 俗傳 王化爲龍 仍指其石爲大王石

21(681) 봄 정월 초하루에 하루종일 어두워 밤과 같았다. 사찬 무선이 날랜 군대 3천을 통솔하여 비열홀을 지켰다. 우사록관을 두었다. 여름 5월 땅이 흔들렸다. 유성이 삼대성을 범하였다. 6월 천구가 곤방(서남쪽)으로 떨어졌다. 왕이 서울(경성)에 새로 성을 쌓으려 하여 중 의상에게 물으니 대답해 말하기를 비록 초야에 띠 풀 지붕 집에 있어도 정도를 행하면 곧 복업이 길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성을 만들지도 또한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했다. 왕이 이에 (성 쌓는)일을 그만두게 했다. 가을 71일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문무라 했다. 여러 신하들이 유언을 따라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 장례하였다, 세속에 전하기를 왕이 변화해 용이되었으므로 그 돌을 가리켜 대왕석이라 했다.

 

遺詔曰 寡人運屬紛紜 時當爭戰 西征北討 克定疆封 伐叛招携 聿寧遐邇 上慰宗祧之遺顧 下報父子之宿寃 追賞遍於存亡 䟽爵均於內外 鑄兵戈爲農器 驅黎元於仁壽 薄賦省徭 家給人足 民間安堵 域內無虞 倉廩積於丘山 囹圄成於茂草 可謂無愧於幽顯 無負於士人 自犯冒風霜 遂成痼疾 憂勞政敎 更結沈痾 運往名存 古今一揆 奄歸大夜 何有恨焉 太子早蘊離輝 久居震位 上從羣宰 下至庶寮 送往之義勿違 事居之禮莫闕 宗廟之主 不可暫空 太子卽於柩前 嗣立王位 且山谷遷貿 人代推移 吳王北山之墳 詎見金鳧之彩 魏主西陵之望 唯聞銅雀之名 昔日萬機之英 終成一封之土 樵牧歌其上 狐兎穴其旁 徒費資財 貽譏簡牘 空勞人力 莫濟幽魂 靜而思之 傷痛無已 如此之類 非所樂焉 屬纊之後十日 便於庫門外庭 依西國之式 以火燒葬 服輕重 自有常科 喪制度 務從儉約 其邊城鎭遏 及州縣課稅 於事非要者 並宜量廢 律令格式 有不便者 卽便改張 布告遠近 令知此意 主者施行

남긴 조서는 다음과 같다. “과인의 운은 어지러움에 속하고, 전쟁의 때를 당하여 서쪽으로 정벌하고, 북쪽으로 토벌하여 국토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배반하는 이는 정벌하고, 부르고 끌어 드디어 멀고 가까운 곳을 편안히 하였다. 위로는 종묘의 고명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한을 갚았다.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추후에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이에게는 소통하여 벼슬을 고르게 주었다. 병기와 창을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몰아 어질고 오래 살게 하였다. 부세를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이고 집들은 넉넉하고 사람은 만족하니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나라 안에는 근심이 없고, 창고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이고, 감옥은 무성한 풀을 이루었으니(감옥이 비어 풀밭을 이루었다) 혼과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고, 관리들을 등짐이 없었다고 이를만하다. 스스로 바람과 서리를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정사와 교화에 근심하고 수고하여 다시 병이 더해졌다. 운명은 가고 이름은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이니 갑자기 큰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무슨 한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래 동안 태자의 자리에 위치하여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료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살아있는 임금을 섬기는 예는 빠트릴 수 없고,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 둘 수 없다. 태자는 영구 앞에 나아가 왕위를 이어 즉위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간다. 오나라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오리의 채색을 볼 것이며, 위나라 임금의 서릉 망루는 오직 동작이라는 이름을 들을 뿐이었다. 지난 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을 이루면 나뭇꾼과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구멍을 뚫으니 헛되이 재물을 쓰면 서책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공연히 사람의 힘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혼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슬프고 애통하기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 같은 류는 즐겨할 바가 아니다. 죽고 10일 후 곧 고문 밖 뜰에서 서국(인도, 불교)의 법식에 의거하여 불로서 태워 장례하고,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장례를 치르는 제도를 검소하고 간략함에 힘쓰라. 변경의 성과 진을 지키는 일과 주와 현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일이 긴요한 것이 아니면 아울러 마땅하게 헤아려 없애라. 율령격식은 편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게 하고,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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