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五 新羅本紀 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 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태보 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부식이 명을 받들어 찬술함
善德王·眞德王·太宗武烈王
善德王 立 諱德曼 眞平王長女也 母金氏摩耶夫人 德曼性寬仁明敏 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聖祖皇姑 前王時 得自唐來牡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雖絶艶 必是無香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對曰 “畵花而無蝶 故知之 大抵女有國色 男隨之 花有香氣 蜂蝶隨之故也 此花絶艶 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
선덕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덕만이니 진평왕의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의 성품이 밝고 민첩하였다. 진평왕이 돌아가시자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즉위시키고 성조황고라는 호를 올렸다. 전왕(진평왕) 때 목단화(모란) 그림과 꽃씨를 당나라로부터 얻어 와 덕만에게 보였다.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은 비록 매우 아름다우나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아는가?”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꽃을 그리고 나비가 없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대개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가 그를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뛰어나게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또한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 없는 꽃이 틀림없습니다.”했다. 씨를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그 먼저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元年 二月 以大臣乙祭摠持國政 夏五月 旱 至六月 乃雨 冬十月 遣使撫問國內鰥寡孤獨不能自存者 賑恤之 十二月 遣使入唐朝貢
1년(632) 2월 대신 일제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여름 5월 가뭄이 들고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사자를 보내 나라 안의 홀애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 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이를 위문하고 구휼하게 했다.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大赦 復諸州郡一年租調 二月 京都地震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八月 百濟侵西邊
2년(633) 봄 정월 직접 신궁에 제사하고, 크게 풀어주며, 여러 주군의 1년 토지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2월 경도(서울)에 땅이 흔들렸다.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三年 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 三月 雹 大如栗
3년(634) 봄 정월 연호를 고쳐 인평이라 했다. 분황사가 완성되었다. 3월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밤만 하였다.
四年 唐遣使持節 冊命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以襲父封 靈廟寺成 冬十月 遣伊湌水品·龍樹 一云龍春 巡撫州縣
4년(635) 당나라가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고,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하였다. 영묘사가 완성되었다. 겨울 10월 이찬 수품, 용수(용춘이라고도 쓴다.)를 보내 주와 현을 돌아다니며 위문하게 했다.
五年 春正月 拜伊湌水品爲上大等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設百高座 集僧講仁王經 許度僧一百人 夏五月 蝦蟆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蟆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 西南邊亦有地名玉門谷者 意或有隣國兵 潛入其中乎” 乃命將軍閼川·弼呑 率兵 往搜之 果百濟將軍于召 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 來伏其處 閼川掩擊盡殺之 慈藏法師 入唐求法
5년(636) 봄 정월 이찬 수품에게 벼슬을 주어 산대등으로 삼았다. 3월 왕이 병이 들었는데 치료와 기도를 하여도 효험이 없었다. 이에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중을 모아 《인왕경》을 강설하고, 11백명이 증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가 궁 서쪽 옥문지에 많이 모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죄우에게 일러 말하기를 “개구리는 노한 눈을 하고 있으니 군대의 상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두리에 옥문곡이라는 땅이름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혹 이웃 나라의 군대가 있어 그 안에 숨어들어 가 있지 않을까 한다.”하고는 이에 장군 알천, 필탄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통솔하여 가서 찾게 했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가 독산성을 습격하려하여 갑옷 입은 군사 5백명을 통솔하고 와서 그 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모두 죽였다.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들어 가 법을 구하였다.
六年 春正月 拜伊湌思眞爲舒弗邯 秋七月 拜閼川爲大將軍
6년(637) 봄 정월 이찬 사진에게 벼슬으 주어 서물함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알천에게 벼슬을 주어 대장군으로 삼았다.
七年 春三月 七重城南大石 自移三十五步 秋九月 雨黃花 冬十月 高句麗侵北邊七重城 百姓驚擾入山谷 王命大將軍閼川 安集之 十一月 閼川與高句麗兵 戰於七重城外 克之 殺虜甚衆
7년(638) 봄 3월 칠중성 남쪽 큰 돌이 저절로 35보를 옮겨갔다. 가을 9월 누런 꽃이 비처럼 내렸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 칠중성을 침범하니 백성들이 놀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왕이 대장군 알천에게 명하여 그들을 안정시켜 모았다. 11월 알천이 고구려 군대가 칠중성 밖에서 싸워 이겨 죽이거나 사로잡은 이가 매우 많았다.
八年 春二月 以何瑟羅州爲北小京 命沙湌眞珠鎭之 秋七月 東海水赤且熱 魚鼈死
8년(639) 봄 2월 하슬라주를 북소경으로 하고, 사찬 진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가을 7월 동해 물이 붉고 또한 뜨거워지니 물고기와 자라가 죽었다.
九年 夏五月 王遣子弟於唐 請入國學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 學生能明一大經已上 皆得補官 增築學舍千二百間 增學生滿三千二百六十員 於是 四方學者 雲集京師 於是 高句麗·百濟·高昌·吐蕃 亦遣子弟入學
9년(640) 여름 5월 왕이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국학에 들어갈 것을 청하였다. 이 때 (당)태종이 천하의 이름있는 유학자를 불러 학관으로 삼고 여러차례 국자감에 거둥하여 강론하게 하고, 학생들로 대경 중에 하나 이상 밝으면 모두 관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학사 1천2백간을 더해 짓고 학생을 더해 3천2백6십 명을 가득 채우니 이에 사바에서 배우려는 자들이 경사에 구름같이 모였다. 이에 고구려, 백제, 고창, 토번이 또한 자제를 보내 국학에 들게 하였다. 이에 고구려, 백제, 광, 토번이 또한 자제를 보내 입학하게 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 又與高句麗謀 欲取党項城 以絶歸唐之路 王遣使 告急於太宗 是月 百濟將軍允忠 領兵攻拔大耶城 都督伊湌品釋 舍知竹竹·龍石等死之 冬 王將伐百濟 以報大耶之役 乃遣伊湌金春秋於高句麗 以請師 初大耶之敗也 都督品釋之妻死焉 是春秋之女也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11년(642) 봄 정월 사신을 대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 백제 왕 의자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 성을 빼앗았다. 8월 또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끊으려하자 태종에 위급함을 알렸다. 이 달 백제 장군 윤충이 군대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니 도독 이찬 품석,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죽었다. 겨울 왕이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의 전투를 보복하려하여 이에 이찬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성의 패배 때 도독 품석의 처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다. 춘추가 그것을 듣고 기둥에 기대서서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과 물건이 앞을 지나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윽고 말하기를 “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하였다.
便詣王曰 “臣願奉使高句麗 請兵以報怨於百濟” 王許之 高句麗王高臧 素聞春秋之名 嚴兵衛而後見之 春秋進言曰 “今百濟無道 爲長蛇封豕 以侵軼我封疆 寡君願得大國兵馬 以洗其恥 乃使下臣致命於下執事” 麗王謂曰 “竹嶺本是我地分 汝若還竹嶺西北之地 兵可出焉” 春秋對曰 “臣奉君命乞師 大王無意救患以善鄰 但威劫行人 以要歸地 臣有死而已 不知其他” 臧怒其言之不遜 囚之別館 春秋潛使人告本國王 王命大將軍金庾信 領死士一萬人赴之 庾信行軍過漢江 入高句麗南境 麗王聞之 放春秋以還 拜庾信爲押梁州軍主
곧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대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한을 갚고자 합니다.”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이 평소 춘추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군대로 호위를 엄중하게 한 뒤 만났다. 춘추가 말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백제가 무도하여 긴 뱀과 돼지가 되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니 우리 임금이 대군의 군대를 얻어 그 부끄러움을 씻고자 이에 신으로 하여금 대왕에게 명을 전하게 한 것입니다.”했다. 고구려 왕이 일러 말하기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었다. 너희들이 만약 죽령 서북쪽의 당을 돌려준다면 군대를 낼 수 있을 것이다.”했다. 춘추가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군대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근심을 구원하는 것으로서 좋은 이웃이 될 생각은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고 겁주는 것으로서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십니다. 신은 죽음이 있을 뿐 그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했다. 고장(보장왕)은 그 말의 공손하지 못함에 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춘추가 몰래 사람을 시켜 본국 왕에게 알렸다. 왕이 대장군 김유신에게 명하여 결사대 1만명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김유신이 행군하여 한강을 건너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그것을 듣고 춘추를 놓아 돌아가게 하였다. 김유신에게 벼스을 주어 압량주 군주로 삼았다.
十二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三月 入唐求法高僧慈藏還 秋九月 遣使大唐上言 “高句麗·百濟侵凌臣國 累遭攻襲數十城 兩國連兵 期之必取 將以今玆九月大擧 下國社稷必不獲全 謹遣陪臣歸命大國 願乞偏師 以存救援” 帝謂使人曰 “我實哀爾爲二國所侵 所以頻遣使人 和爾三國 高句麗·百濟旋踵翻悔 意在呑滅 而分爾土宇 爾國設何奇謀 以免顚越” 使人曰 “吾王事窮計盡 唯告急大國 冀以全之”
12년(643) 봄 정월 사신을 대장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월 당에 들어 가 법을 구한 고승 자장이 돌아왔다. 가을 9월 사신을 대당에 보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신의 나라를 침범하고 업신여기고, 여러 차례 수 십성을 쳐서 습격하였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군대를 합하여 반드시 빼앗을 것을 약속하고 이달 9월에 크게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저의 나라(신라)는 사직이 온전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신하인 저를 보내 대국에 명을 전하여 군대를 청하니 구원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했다. 황제가 사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너희들이 두 나라에게 침범 당하는 것을 슬프게 생각기 때문에 자주 사신을 보내 너희 세 나라가 친하게 지내라 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돌아서자 말자 생각을 뒤집어 너희 나라를 집어삼켜 나라를 나누어 가지려 한다. 너희 나라는 어떤 기이하 계책을 베푸는 것으로서 엎어지는 것을 면하려 하는가?”했다. 사신이 말하기를 “우리 왕은 계책이 일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여 오직 위급함을 대국에 알려 온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했다.
帝曰 “我少發邊兵 摠契丹·靺鞨直入遼東 爾國自解 可緩爾一年之圍 此後知無繼兵 還肆侵侮 四國俱擾 於爾未安 此爲一策 我又能給爾數千朱袍丹幟 二國兵至 建而陳之 彼見者以爲我兵 必皆奔走 此爲二策 百濟國恃海之嶮 不修機械 男女紛雜 互相燕聚 我以數十百船 載以甲卒 銜枚泛海 直襲其地 爾國以婦人爲主 爲鄰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 以爲爾國主 而自不可獨王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使人但唯而無對 帝嘆其庸鄙 非乞師告急之才也
황제가 말하기를 “우리가 변경의 군대를 조금 내고, 거란, 말갈을 거느리고 바로 요동으로 들어가면 너희 나라는 저절로 풀릴 것이니 너희는 1년의 포위가 느슨해질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군대가 없음을 알면 도리어 함부로 침범하고 모욕하여 네 나라가 모두 소란스럽게 되어 너희 나라도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 된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수천의 붉은 옷과 붉은 깃발을 줄 수 있는데 두 나라 군대가 이를 때 세워 진열하면 그것을 본 자들이 우리 군대로 여겨 반드시 모두 달아날 것이다. 이것이 두 번 째 계책이다. 백제국은 바다의 험함을 믿고 기계를 수리하지 않고, 남녀가 뒤섞여 서로 모여 잔치하니 내가 수십백 척의 배에 갑옷 입은 군사를 싣고 재갈을 물려 바다에 떠서 곧바로 그 땅을 습격하려 한다. 너희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 이웃 나라들이 가볍게 여겨 업신여김을 당하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적이 연어 해마다 편안하지 않았다. 내가 왕족 중 한 명을 보내 너희나라 임금으로 삼되 자신이 홀로 왕이 될 수 없으니 마땅히 군대를 보내 보호하면서 너희 나라가 편안해지기를 기다려 스스로 지키는 일을 너희 나라에게 맡기려 한다. 이것은 세 번 째 계책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하여 장차 무슨 일을 따르려는가?”했다. 사신들이 다만 예할 뿐 대답이 없었다. 황제가 그 용열함을 탄식하기를 군사를 청하고, 위급함을 알리는 재능이 아니라 했다.
十三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 齎璽書 賜高句麗曰 “新羅委命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卽戢兵 若更攻之 明年當出師 擊爾國矣” 蓋蘇文謂玄奬曰 “高句麗·新羅 怨隙已久 往者隋室相侵 新羅乘釁 奪高句麗五百里之地 城邑皆據有之 非返地還城 此兵恐未能已” 玄奬曰 “已往之事 焉可追論” 蘇文竟不從 秋九月 王命庾信爲大 ※將軍 領兵伐百濟 大克之 取城七
13년(644) 봄 정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태종이 사농승상 이현장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고구려에 내려 말하기를 “신라는 국가의 운명을 (우리에게) 맡기고 조공을 빠트리지 않았다. 너와 백제는 마땅히 곧 군대를 거두라. 만약 다시 친다면 내년에 마땅히 군대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했다. (연)개소문이 이현장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구려와 신라는 원한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과거 수나라가 서로 침범하였을 때 신라가 틈을 타 고구려의 500리 땅을 빼앗아 성읍을 모두 차지하고 땅과 성을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군대를 그만두지 못합니다.”했다. 이현장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미루어 논할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가을 9월 왕이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더니 크게 이기고 7개 성을 빼앗았다.
十四年 春正月 遣使大唐貢獻方物 庾信自伐百濟還 未見王 百濟大軍復來寇邊 王命拒之 遂不至家 往伐破之 斬首二千級 △△△還命於王 未得歸家 又急報百濟復來侵 王以事急 乃曰 “國之存亡 繫公一身 庶不憚勞 往其圖之” 庾信又不歸家 晝夜鍊兵 西行道 過宅門 一家男女 瞻望涕泣 公不顧而歸 三月 創造皇龍寺塔 從慈藏之請也 夏五月 太宗親征高句麗 王發兵三萬以助之 百濟乘虛 襲取國西七城 冬十一月 拜伊湌毗曇爲上大等
14년(645) 봄 정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김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다시 와 변경을 노략질하니 왕이 막게 하였다.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고 가서 쳐서 깨트리고 2천여 명을 목 베었다. 돌아 와 왕에게 복명하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였는데 또 백제가 다시 와 침범하였다고 급히 보고하였다. 왕이 일이 위급하여 이에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이 공의 한 몸에 결려 있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도모해 주시오.”했다. 김유신이 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밤낮으로 군대를 훈련시켜 서쪽으로 가는 길에 집의 문을 지나니 한 잡안의 남녀가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공이 돌아보지 않고 갔다. 3월 황룡사 탑을 창건하였는데 자장의 청을 따른 것이다. 여름 5월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니 왕이 군대 3만을 동원하여 도왔다. 백제가 빈틈을 타고 나라 서쪽 7개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1월 이찬 비담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았다.
十六年 春正月 毗曇·廉宗等謂 “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日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 唐書云 『貞觀二十一年卒』 通鑑云 『二十二年卒』 以本史考之 通鑑誤也
16년(647)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이르기를 “여주(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하고는 모의하여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8일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례하였다. (《당서》에 “정관 21년에 돌아가셨다.”했고, 《통감》에는 “22년에 돌아가셨다.”했는데 본사를 가지고 상고해보면 《통감》이 잘못된 것이다.)
【論曰】 臣聞之 古有女媧氏 非正是天子 佐伏羲理九州耳 至若呂雉·武曌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皇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姥嫗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幸也 書云 『牝鷄之晨』 易云 『羸豕孚蹢躅』 其可不爲之戒哉
논하여 말한다. 신이 들으니 옛날 여와씨가 있었는데 바로 이는 천자가 아니라 복희씨가 구주를 다스리는 것을 도왔을 뿐이었다. 여치와 무조 같은 이에 이르러서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나 조정에 임하여 천자처럼 정치를 하였으나 역사서에서는 공공연이 왕이라 일컫지 못하고 단지 고황후 여씨, 측천황후 무씨라 쓴 것은 하늘로서 말하면 곧 양은 굳세고, 음은 부드럽고, 사람으로서 말하면 곧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어찌 늙은 할머니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결단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일으켜 왕의 자리레 처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혼란한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음이 다행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했고, 《역경》에 “파리한 돼지가 껑충껑충 띈다. 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眞德王 立 名勝曼 眞平王母弟國飯 一云國芬 葛文王之女也 母朴氏月明夫人 勝曼姿質豊麗 長七尺 垂手過膝
진덕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승만이니 진평왕의 동생 국반(국분이라 하기도 한다.)갈문왕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와 자질이 풍성하고 아름다눴다. 키가 일곱 자이고 손을 내리면 무릎을 지났다.
元年 正月十七日 誅毗曇 坐死者三十人 二月 拜伊湌閼川爲上大等 大阿湌守勝爲牛頭州軍主 唐太宗遣使持節 追贈前王爲光祿大夫 仍冊命王爲柱國封樂浪郡王 秋七月 遣使入唐謝恩 改元太和 八月 彗星出於南方 又衆星北流 冬十月 百濟兵圍茂山·甘勿·桐岑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以拒之 苦戰氣竭 庾信麾下丕寧子及其子擧眞 入敵陣急格死之 衆皆奮擊 斬首三千餘級 十一月 王親祀神宮
1년(647) 정월 17일 비담을 죽였다. 연좌되어 죽은 이가 30명 이었다. 2월 이찬 알천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았다.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 군주로 삼았다. 댕 태종이 부절을 지닌 사신을 보내 전왕(선덕왕)을 추증하여 광록대부라 하고, 그대로 왕(진덕왕)을 책봉하여 주국 낙랑군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책봉해 준)은혜에 사례하였다. 연호를 고쳐 태화라 했다. 8월 남쪽에서 혜성이 나타나고, 또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렀다. 겨울 10월 백제 군대가 무산, 감물, 동잠 세 성을 에워쌌다.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을 통솔하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으로 기운이 다하였다. 김유신의 휘하의 비령자와 그 아들 거진이 적진에 들어 가 급히 공격하다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힘을 떨쳐 쳐서 3천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11월에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二年 春正月 遣使大唐朝貢 三月 百濟將軍義直 侵西邊 陷腰車等一十餘城 王患之 命押督州都督庾信以謀之 庾信於是 訓勵士卒 將以發行 義直拒之 庾信分軍爲三道 夾擊之 百濟 兵敗走 庾信追北 殺之幾盡 王悅賞賜士卒有差 冬 使邯帙許朝唐 太宗勅御史問 “新羅臣事大朝 何以別稱年號” 帙許言 “曾是天朝未頒正朔 是故先祖法興王以來 私有紀年 若大朝有命 小國又何敢焉” 太宗然之
2년(648)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요차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키니 왕이 그것을 근심하였다. 압독주 도독 김유신에게 명하여 도모하게 하였다. 김유신이 이에 사졸들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가니 의직이 막았다. 김유신이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하니 백제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다. 김유신이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상을 사졸들에게 차등있게 내렸다. 겨울 한질허로 하여금 당나라에 조공하게 하였다. 태종이 어사를 시켜 묻기를 “신라는 신하로 대조(당나라)를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일컫는가?”했다. 한질허가 말하기를 “일찍이 천조(당 나라)가 정삭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인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운 기년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대조(당나라)의 명이 있다면 소국(신라)이 또한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했다. 태종이 그렇게 여겼다.
遣伊湌金春秋及其子文王朝唐 太宗遣光祿卿柳亨郊勞之 旣至 見春秋儀表英偉 厚待之 春秋請詣國學 觀釋奠及講論 太宗許之 仍賜御製溫湯及晉祠碑幷新撰晉書 嘗召燕見 賜以金帛尤厚 問曰 “卿有所懷乎” 春秋跪奏曰 “臣之本國 僻在海隅 伏事天朝 積有歲年 而百濟强猾 屢肆侵凌 況往年大擧深入 攻陷數十城 以塞朝宗之路 若陛下不借天兵 翦除凶惡 則敝邑人民 盡爲所虜 則梯航述職 無復望矣” 太宗深然之 許以出師 春秋又請改其章服 以從中華制 於是 內出珍服 賜春秋及其從者 詔授春秋爲特進 文王爲左武衛將軍 還國詔令 三品已上燕餞之 優禮甚備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했다. 태종이 광록경 유형을 보내 교외에서 위로하고, 이른 뒤에 김춘추의 모습이 영특하고 늠름한 것을 보고는 후하에 대접하였다. 김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보기를 청하니 태종이 허락하였다. 이에 황제가 지은 온탕비문과 진사비문과 새로 편찬한 《진서》를 내렸다. 어느 날 (김춘추를) 불러 개인적으로 만나 금과 비단을 더울 후하게 내리고 물어 말하기를 “경은 푸고 있는 바가 있는가?”하니 김춘추가 꿇어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본국이 치우쳐 바다 귀퉁이에 있으면서 천자의 조정을(당나라를) 섬긴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게 여러 번 함부로 침략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지난해에는 크게 군대를 일으켜 깊이 들어 와 수 십개 성을 함락하는 것으로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천병(천자의 군대)을 빌려 흉악한 이를 베어 없애지 않으시다면 곧 저희나라 백성들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니 곧 산 넘고 바다를 건너 행하는 조회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했다. 태종이 깊이 그렇다 여기고 군대를 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김춘추가 또한 그 장복(관복)을 고쳐 중국의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안에서(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내어 김춘추와 그 종자에게 내리고 조칙을 김춘추에게 주어 특진이라 하고, 문왕을 좌무위장군으로 삼았다. 나라에 돌아갈 때 조서로 삼품이상에게 명하여 송별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매우 극진히 하였다.
春秋奏曰 “臣有七子 願使不離聖明宿衛” 乃命其子文王與大監△△ 春秋還至海上遇高句麗邏兵 春秋從者溫君解 高冠大衣 坐於船上 邏兵見以爲春秋 捉殺之 春秋乘小船至國 王聞之嗟痛 追贈君解爲大阿湌 優賞其子孫
김춘추가 아뢰어 말하기를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는데 바라건데 성스럽고 현명한 이르 떠나지 않고 숙위하게 해 주십시오.”했다. 이에 그 아들 문왕과 대감〇〇에게 (머물러 숙위할 껏을) 명하였다. 김춘추가 돌아오다 바다 위에서 고구려 순라군대를 만났다. 김춘추의 종자 온군해가 높은 관과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순라 군사들이 보고 김춘추오 여겨 잡아 죽였다. 김춘추가 작은 배를 타고 나라에 이렀다. 왕이 듣고 슬퍼하며 온군해를 추증하여 대아찬으로 삼고 그 자손들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
三年 春正月 始服中朝衣冠 秋八月 百濟將軍殷相率衆來 攻陷石吐等七城 王命大將軍庾信 將軍陳春·竹旨·天存等出拒之 轉鬪經旬不解 進屯於道薩城下 庾信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乃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明日待援軍 然後決戰” 諜者聞之 歸報殷相 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進擊大敗之 殺虜將士一百人 斬軍卒八千九百八十級 獲戰馬一萬匹 至若兵仗 不可勝數
3년(649) 봄 정월 처음으로 중조(중국)의 의관을 입었다.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무리를 통솔하여 와서 석토 등 7개 성을 쳐서 함락하니 왕이 대당군 김유신,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으로 하여금 나가 막게 하였다. 이곳저곳에서 싸웠는데 10일이 지나도 풀리지 않으므로 도살성 아래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오늘 반드시 백제사람이 있어 첩자가 올 것이니 너희들은 알지 못하는 척하고 감히 누구냐고 묻지 말라.”하고는 곧 군대 진영 안을 돌아다니며 말하기를 “벽을 굳게 하고 움직이지 말고 내일 원군을 기다렸다가 싸움을 결단하겠다.”하게 했다. 첩자가 그것을 듣고 돌아 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은 군대가 더해 질 것이라 하면서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김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무너뜨리니 장사 1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천9백8십 명을 베어 죽이고, 전마 1만 필을 얻고, 무기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四年 夏四月 下敎 以眞骨在位者 執牙笏 六月 遣使大唐 告破百濟之衆 王織錦作五言太 平頌 遣春秋子法敏 以獻唐皇帝 其辭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幡旗何赫赫 鉦何鍠鍠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高宗嘉焉 拜法敏爲太府卿以還 是歲 始行中國永徽年號
4년(650) 여름 4월 명을 내려 진골로서 지위(관직)에 있는 자는 아홀을 잡게 하였다.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 무리를 깨트린 일을 알리고, 왕이 잔 비단에 5언 태평송을 지어 김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에 “ 대당이 큰 왕업을 개창하니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이 그쳐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았도다.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시운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도다 사철이 옥촉처럼 고르고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삼황오제 한 덕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라 했다.
【論曰】 三代更正朔 後代稱年號 皆所以大一統 新百姓之視聽者也 是故苟非乘時並起 兩立而爭天下 與夫姦雄 乘間而作 覬覦神器 則偏方小國 臣屬天子之邦者 固不可以私名年 若新羅以一意事中國 使航貢篚 相望於道 而法興自稱年號 惑矣 厥後承愆襲繆 多歷年所聞太宗之誚讓 猶且因循 至是然後 奉行唐號 雖出於不得已 而抑可謂過而能改者矣
논하여 말한다. 삼대가 정삭을 고치고, 후대가 연호를 일컫는 것은 모두 크게 통일하여 백성의 보고 들음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를 타고 아울러 흥기하여 둘이 서서 천하를 다투거나 간사한 사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곧 구석진 작은 나라가 천자의 나라에 속한 자로 진실로 사사로이 해를 이름(연호)해서는 안 된다. 만약 신라가 한결 같은 뜻으로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대광주리를 받든 사신이 길에 서로 바라보였는데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일컬은 것은 알지 못할 일이다. 그 후에도 잘못을 잇고 어긋남을 이어 여러 해를 지나 태종의 꾸지람을 들었에도 오히려 또한 머뭇거리다 이에 이른 후에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니 비록 부득이함에서 나온 것이라 하나 잘못을 저지르고 허물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이라 할 만하다.
五年 春正月朔 王御朝元殿 受百官正賀 賀正之禮 始於此 二月 改稟主爲執事部 仍拜波珍湌竹旨爲執事中侍 以掌機密事務 △△△ 遣波珍湌金仁問 入唐朝貢 仍留宿衛
5년(651)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에 거둥하여 백관의 새해 축하인사를 받았다. 새해를 축하하는 예식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2월 품주를 고쳐 집사부라 하고 파진찬 죽지에게 버슬을 주어 집사중시로 삼아 기밀사무를 관장하게 했다. 〇〇〇 파진찬 김인문을 보내 당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고, 그대로 머무러 숙위하게 했다.
六年 春正月 以波珍湌天曉爲左理方府令 遣使大唐朝貢 三月 京都大雪 王宮南門 無故自毁
6년(652) 봄 정월 파진찬 천효를 좌이방부령으로 삼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했다. 3월 경도(서울)의 땅이 흔들렸다. 왕궁 남문이 이유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 獻金總布
7년(653)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를 바쳤다.
八年 春三月 王薨 諡曰眞德 葬沙梁部 唐高宗聞之 爲擧哀於永光門 使太常丞張文收持節吊祭之 贈開府儀同三司 賜綵段三百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8년(654) 봄 3월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례하였다. 당나라 고종이 듣고 영광문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 장문수로 하여금 ㅂ절을 가지고 조상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개부의동삼사를 증직하고 색 비단 3팩필을 내렸다. 나라 사람들이 시조 혁거세에서 진덕에 이르기까지 28왕을 일러 성골이라 말하고, 무열부터 말왕에 이르기까지를 진골이라 하였다. 당나랄 영호징의 《신라기》에 “그 나라 왕족은 제1골이라 하고 그 나머지 귀족은 제 2골이라 한다.”했다.
太宗武烈王 立 諱春秋 眞智王子伊湌龍春一云龍樹之子也 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天明夫人 眞平王女 妃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王儀表英偉 幼有濟世志 事眞德 位歷伊湌 唐帝授以特進 及眞德薨 羣臣請閼川伊湌攝政 閼川固讓曰 “臣老矣 無德行可稱 今之德望崇重 莫若春秋公 實可謂濟世英傑矣” 遂奉爲王 春秋三讓 不得已而就位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였다. 이른은 춘추이다. 진징왕의 아들 용춘(용수라하기도 한다.)의 아들이다. 《당서》에 진덕왕의 동생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으로 서현 각찬의 딸이다. 왕의 모습이 영특하고 빼어나 어려서부터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진덕왕을 섬겨 지위가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을 주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알천 이찬에게 정사를 대신할 것을 청하니 알천이 굳게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었고, 덕행으로 일컬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고 중하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구제할 뛰어난 인재라 할 수 있습니다.”했다. 마침내 받들어 왕을 삼았는데 춘추가 세 번 사양하다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
元年 夏四月 追封王考爲文興大王 母爲文貞太后 大赦 五月 命理方府令良首等 詳酌律令 修定理方府格六十餘條 唐遣使持節備禮 冊命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 王遣使入唐表謝
1년(627) 여름 4월 왕의 아버지를 추봉하여 문흥대왕이라 하고, 어머니는 문정태후라 했다. 크게 풀어주었다. 5월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자세하게 살피고 아벙부격 60여조를 고쳐 정하게 했다. 당나라가 부절을 지난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왕을)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신라왕이라 했다. 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감사함을 나타냈다.
二年 春正月 拜伊湌金剛爲上大等 波珍湌文忠爲中侍 高句麗與百濟·靺鞨連兵 侵軼我北境 取三十三城 王遣使入唐求援 三月 唐遣營州都督程名振 左右衛中郞將蘇定方 發兵擊高句麗 立元子法敏爲太子 庶子文王爲伊湌 老且爲海湌 仁泰爲角湌 智鏡·愷元各爲伊湌 冬十月 牛首州獻白鹿 屈弗郡進白猪 一首二身八足 王女智照 下嫁大角湌庾信 立鼓樓月城內
2년(628) 봄 정월 이찬 금강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고, 파진찬 문충을 중시로 삼았다.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군대를 합쳐 우리의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왕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3월 당나라가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낭장 소정방을 보내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원자 법민을 세워 태자로 삼고, 서자 문왕을 이찬으로 삼고, 노차를 해찬으로 삼고, 인태를 각찬으로 삼고, 지경, 개원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수주가 흰 사슴을 바쳤고, 굴불군이 흰돼지를 올렸는데 머리 하나에 몸은 둘이고, 발이 8개였다. 왕의 딸 지조를 대각찬 김유신에게 시잡보냈다. 월성 안에 고루를 세웠다.
三年 金仁問自唐歸 遂任軍主 監築獐山城 秋七月 遣子左武衛將軍文王朝唐
3년(629)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니 드디어 군주를 맡겨 장산성 쌓는 것을 감독하게 했다. 가을 7월 아들 좌무위장군 문왕을 당에 보내 조공하게 했다.
四年 秋七月 一善郡大水 溺死者三百餘人 東吐含山地燃 三年而滅 興輪寺門自壞 △△△北巖崩碎爲米 食之如陳倉米
4년(630) 가을 7월 일선군에 큰물이 져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00여 명이었다. 동쪽 토함산 땅이 불타더니 3년 만에 꺼졌다. 흥륜사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〇〇〇 북암이 무너지면서 부서져 쌀이 되었는데 먹어보니 진창(창고)의 묵은 쌀과 같았다.
五年 春正月 中侍文忠改爲伊湌 文王爲中侍 三月 王以何瑟羅地連靺鞨 人不能安 罷京爲州 置都督以鎭之 又以悉直爲北鎭
5년(631) 봄 정월 중시 문충의 (벼슬을)고쳐 이찬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3월 왕이 하슬라 땅이 말갈과 연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자 경을 없애고 주로 삼아 도독을 두어 지키게 했다. 또 실직을 북진으로 삼았다.
六年 夏四月 百濟頻犯境 王將伐之 遣使入唐乞師 秋八月 以阿湌眞珠爲兵部令 九月 何瑟羅州進白鳥 公州基郡江中 大魚出死 長百尺 食者死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忽有人於王前 若先臣長春·罷郞者 言曰 “臣雖枯骨 猶有報國之心 昨到大唐 認得皇帝命大將軍蘇定方等 領兵以來年五月 來伐百濟 以大王勤佇如此 故玆控告” 言畢而滅 王大驚異之 厚賞兩家子孫 仍命所司 創漢山州莊義寺 以資冥福
6년(632) 여름 4월 백제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왕이 장차 치려하여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군대를 청하였다. 가을 8월 아찬 진주를 병부령으로 삼았다. 9월 하슬라주가 흰새를 바쳤다. 공주 기군의 강 안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100자였고, 먹은 자가 죽었다. 겨울 10월 왕이 조정에 앉아 당나라에 군대를 청한 것이 회보가 없어 근심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갑자기 어떤 왕 앞에 있었는데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과 같았다. 말하기를 “신이 비록 해골이 되었으나 오히려 나라에 보답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지난번에 당나라에 이르렀는데 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와서 백제를 치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애타게 기다리시기를 이 같이 하시기 때문에 이에 알려드립니다.” 했다. 말을 마치고 사라졌다. 왕이 크게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두 집안의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주고 담당관청에 명하여 한산주에 장의사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七年 春正月 上大等金剛卒 拜伊湌金庾信爲上大等 三月 唐高宗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金仁問爲副大摠管 帥左驍衛將軍劉伯英等水陸十三萬 △△ 伐百濟 勅王爲嵎夷道行軍摠管 使將兵 爲之聲援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 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百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與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7년(633) 봄 정월 상대등 금강이 죽었다. 이찬 김유신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을 삼았다. 3월 당나라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고,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〇〇백제를 치게 하고, 칙명으로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을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위해 성원하게 했다. 여름 5월 26일 왕과 김유신, 진주, 천존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을 나왔다. 6월 18일 남천정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여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군함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법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7월 10일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왕의 도성을 깨트리려 한다.” 했다.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 言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 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應之 王次今突城 秋七月九日 庾信等進軍於黃山之原
법민이 말하기를 “대군을 서서 기다리십니다. 만일 대장군이 온ㄷ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잠자리에서 아침을 먹고 이를 것입니다.”했다. 소정방이 기뻐하면서 법민을 돌려보내 신라의 군대를 징발하게 했다. 법민이 이르러 소정방 군대의 기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 했다. 왕이 기뻐하여마지 않았다. 또 태자와 대장군 김유신, 징군 품일, 흠춘(혹은 흠순이라 쓴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대 5만을 통솔하고 응하게 하였다. 왕이 금돌성에 갔다. 가을 7월 9일 김유신 등이 황산의 들로 진군하였다.
百濟將軍堦伯 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庾信等 分軍爲三道 四戰不利 士卒力竭 將軍欽純謂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謹聞命矣” 乃入陣 力戰死 左將軍品日 喚子官狀 一云官昌 立於馬前 指諸將曰 “吾兒年纔十六 志氣頗勇 今日之役 能爲三軍標的乎” △△官狀曰 “唯” 以甲馬單槍 徑赴敵陣 爲賊所擒 生致堦伯 堦伯俾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不可敵也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백제 장군 계백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르러 우선 함준한 곳에 의지하여 3개의 영채를 세우고 기다렸다. 김유신 등이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불리하여 사졸들의 힘이 다하였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에게 일러 말하기를 “신하된 자는 충성보다 나은 것이 없고, 자식된 자는 효하는 것보다 나음이 없고,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는 것은 충과 효 둘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했다. 반굴이 말하기를 “삼사 명을 따르겠습니다.”하고는 곧 진에 들어 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상(관창이라 하기도 한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아이의 나이가 겨우 16세이나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맹하니 오늘의 전투에서 삼군의 목표가 될 수 있겠는가?”했다. 〇〇관상이 말하기를 “예”하고는 갑옷을 입힌 말을 타고 창 하나를 들고 빠르게 적진으로 나아갔으나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계백에게 이르렀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 어리고 또한 용맹 한 것을 아껴 차마 해들 입히지 못하였다. 이에 탄식해 말하기를 “ 신라는 대적할 수 없다.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한 군사들에 있어서랴.”하고는 곧 살ㅏ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官狀告父曰 “吾入敵中 不能斬將搴旗者 非畏死也” 言訖 以手掬井水飮之 更向敵陣疾鬪 堦伯擒斬首 繫馬鞍以送之 品日執其首 流血濕袂 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幸矣” 三軍見之 慷慨有死志 鼓噪進擊 百濟衆大敗 堦伯死之 虜佐平忠常·常永等二十餘人 是日 定方與副摠管金仁問等 到伎伐浦 遇百濟兵 逆擊大敗之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관상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적진에 들어 가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아오지 못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했다. 말을 마치고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을 향해 빠르게 가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묶어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잡으니 흐르는 피가 옷깃을 적셨다. (품일이)말하기를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과 같고, 왕의 일에 죽었으니 다행이다.”했다. 삼군이 그것을 보고 강개하여 죽을 뜻이 있어 북을 치며 나아가 치니 백제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지고, 계백도 죽었다.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을 포로로 하였다. 이 날 소정방과 부총관 김인문 등이 기벌포에 이르러 백제 군대를 만나자 맞아 싸워 그게 무너뜨렸다. 김유신 등이 당나라 진영에 이르니 소정방이 김유신 등이 기일에 늦었다하여 장차 신라 독군 김문영을 (永이라 쓰기도 한다.) 군문에서 죽이려 하였다.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鞘 定方右將董寶亮 躡足曰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百濟王子 使佐平覺伽 移書於唐將軍 哀乞退兵 十二日 唐羅軍△△△圍義慈都城 進於所夫里之原 定方有所忌不能前 庾信說之 二軍勇敢 四道齊振 百濟王子 又使上佐平致𩟀餼豊腆 定方却之 王庶子躬與佐平六人 詣前乞罪 又揮之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장군이 황산의 전투를 보지 못하고 기일에 늦은 것으로 죄를 삼으려 하는데 내가 죄 없이 욕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대와 결전한 후 백제를 깨트릴 것입니다.”하고는 곧 군문(진영)에서 큰 도끼를 짚으니 노한 머리털은 곧추서고, 그 허리의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 나왔다. 소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대가 장차 변란을 일으키려 합니다.”했다. 소정방이 이에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로 하여금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전해 군대를 물려줄 것을 애걸하였다. 12일 당나라와 신라 군대가 〇〇〇 의장왕의 도성을 에워싸려 하여 소부리의 들판으로 진군하는데 소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려 했다. 김유신이 그를 설득하니 두 군대가 용감하게 네 기로 일제히 진군하였다. 백제 왕자가 또 상좌평을 시켜 제사에 쓸 희생물과 많은 음식을 보냈으나 소정방이 물리치니 왕의 여러 아들이 몸소 좌평 6명과 앞에 나와 죄를 청하였으나 물리쳤다.
十三日 義慈率左右 夜遁走 保熊津城 義慈子隆與大佐平千福等 出降 法敏跪隆於馬前 唾 面罵曰 “向者 汝父枉殺我妹 埋之獄中 使我二十年間 痛心疾首 今日汝命在吾手中” 隆伏地無言 十八日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 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13일 의자왕이 좌우를 통솔하여 밤에 달아나 웅진성을 지키고, 의자왕의 아들 융과 대좌평 천복 등이 나와 항복하였다. 법민이 말 앞에서 융을 꿇게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지난번에 너의 아버지가 사특(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감옥 안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이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머리를 아프게 하였다. 오늘 너의 목숨이 나의 손 안에 있다.”했다. 융이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다.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 방령의 군대 등을 통솔하고 웅진성에서 와 항복하였다. 왕이 의자왕이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29일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 천복을 보내 당나라에 승리한 소식을 알렸다.
八月二日 大置酒勞將士 王與定方及諸將 坐於堂上 坐義慈及子隆於堂下 或使義慈行酒 百濟佐平等羣臣 莫不鳴咽流涕 是日 捕斬毛尺 毛尺本新羅人 亡入百濟 與大耶城黔日 同謀陷城 故斬之 又捉黔日 數曰 “汝在大耶城 與毛尺謀 引百濟之兵 燒亡倉庫 令一城乏食致敗 罪一也 逼殺品釋夫妻 罪二也 與百濟來攻本國 罪三也” 以四支解 投其尸於江水 百濟餘賊 據南岑·貞峴 △△△城 又佐平正武聚衆 屯豆尸原嶽 抄掠唐·羅人 二十六日 攻任存大柵 兵多地嶮 不能克 但攻破小柵
8월 2일 크게 술을 내어 장사를 위로하였다. 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 위에 앉고, 의자왕과 아들은 당 아래 앉았다. 혹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돌리게 하니 백제 좌평 등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울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 모척을 잡아 목을 베어 죽였다. 모척은 본래 신라 사람인데 도망하여 백제로 들어 가 대야성 검일과 함께 도모하여 성을 함락시키게 하였기 때문에 목을 ㅁ베어 죽인 것이다. 또 검일을 잡아 (죄를)헤아리며 말하기를 “너는 대야성에 있으면서 모척과 도모하여 백제의 군대를 인도하고, 창고를 불태워 없애 한 성으로 하여금 식량을 궁핌하게 하여 무너짐에 이르게 하였으니 첫 번 째 죄이다.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게 하였으니 두 번째 죄이다. 백제와 와서 본국을 쳤으니 세 번째 죄이다.” 하고는 4지를 찢어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남잠, 정현, 〇〇〇성에 웅거하고, 또 좌평 정무가 무리를 모아 두시원악에 주둔하고 당나라와 시람 사람을 약탈하였다. 26일 임존성의 대책을 쳤으나 군대가 많고 땅이 험하여 이기지 못하고 다만 소책을 쳐서 깨트렷을 뿐이다.
九月三日 郞將劉仁願 以兵一萬人 留鎭泗沘城 王子仁泰與沙湌日原·級湌吉那 以兵七千副之 定方以百濟王及王族臣寮九十三人 百姓一萬二千人 自泗沘乘舡 廻唐 金仁問與沙湌儒敦·大奈麻中知等偕行 二十三日 百濟餘賊 入泗沘 謀掠生降人 留守仁願出唐·羅人 擊走之 賊退上泗沘南嶺 竪四五柵 屯聚伺隙 抄掠城邑 百濟人叛而應者二十餘城 唐皇帝遣左衛中郞將王文度 爲熊津都督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군대 1만 명으로서 사비성에 남아 지켰는데 왕자 인태와 사찬 일원, 급찬 길나가 군대 7천으로서 보좌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백제 왕과 왕족, 신료 93명, 백성 1만 2천명을 사비에서 배에 태워 당나라에 돌아갔다. 김인문과 사찬 유돈, 대나마 중지 등이 함께 갔다. 23일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에 들어 가 살아 항복한 사람들을 노략질하려(붙잡아 가려) 하자 남아 지키던 유인원이 당나라와 신라 사람과 나와 쳐 쫒았다. 적이 물러나 사비 남쪽 산마루에 올라 4, 5개의 목책을 세우고 군대를 모아 지키며 틈을 엿보아 성읍을 노략질 하니 백제 사람이 배반하고 부응한 자들이 20여 성이었다. 당나라 황제가 죄위중낭장 왕문도를 보내 웅진도독으로 삼았다.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度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度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畢事 十月九日 王率太子及諸軍攻尒禮城 十八日 取其城置官守 百濟二十餘城 震懼皆降 三十日 攻泗沘南嶺軍柵 斬首一千五百人 十一月一日 高句麗侵攻七重城 軍主 匹夫死之 五日 王行渡雞灘 攻王興寺岑城 七日乃克 斬首七百人
28일 (왕문도가)삼년산성에 이르러 조서를 전하고, 왕문도가 동쪽을 향해 서고 대왕이 서쪽을 향해 서서 명을 받은 뒤 왕문도가 물건을 베풀어 왕에게 주려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곧 죽었다. 따르는 자들이 지위를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10월 9일 왕이 태자와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이례성을 쳤다. 18일 그 성을 빼앗고 지키는 관리를 두었다. 백제의 20여 성이 두려워하여 모두 항복하였다. 30일 사비 남쪽 산마루에 있던 목책을 쳐서 1천5백명의 머리를 베어 죽였다. 11월 1일 고구려가 칠중성을 침략하여 치니 군주 필부가 죽었다. 5일 왕이 계탄을 건너가 왕흥사잠성을 쳐서 7일 ㅁ만에 이기고 7백명을 머리를 베어 죽였다.
二十二日 王來自百濟論功 以罽衿卒宣服爲級湌 軍師豆迭爲高干 戰死儒史知·未知活·寶弘伊·屑儒等四人 許職有差 百濟人員 並量才任用 佐平忠常·常永 達率自簡 授位一吉湌 充職摠管 恩率武守 授位大奈麻 充職大監 恩率仁守 授位大奈麻 充職弟監
22일 왕이 백제에서 돌아 와 공을 논하여 계금졸과 선복을 급찬으로 삼았다. 군사 두질을 고간으로 삼고, 전사한 유사지, 미지활, 보홍이, 설유 등 네 사람에게 관작을 차등 있게 주었다. 백제 사람으로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고, 좌평 충상, 상영, 달솔 자간에게 관위 일길찬을 주어 총관의 직책을 맡겼다. 은솔 무수는 대나마의 관위를 주어 대감의 직을 맡게 하고, 은솔 인수는 대나마의 관등을 주어 제간의 직책을 맡게 하였다.
八年 春二月 百濟殘賊 來攻泗沘城 王命伊湌品日爲大幢將軍 迊湌文王 大阿湌良圖 阿湌忠常等副之 迊湌文忠爲上州將軍 阿湌眞王副之 阿湌義服爲下州將軍 武欻·旭川等爲南川大監 文品爲誓幢將軍 義光爲郞幢將軍 往救之 三月五日 至中路 品日分麾下軍 先行 往豆良尹一作伊城南 相營地 百濟人望陣不整 猝出急擊不意 我軍驚駭潰北
8년(661) 봄 2월 백제의 남은 적들이 와서 사비성을 치니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장군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 아찬 충산 등으로 보좌하게 하였다. 잡찬 문충을 상주장군으로 삼고 아찬 진왕이 보좌하게 하였다. 아찬 의복을 하주 장군으로 삼고, 무흘, 욱천 등을 남천 대감으로 삼았다. 문품을 서당장군으로 삼고, 의광을 낭당장군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했다. 3월 5일 중간에 품일이 휘하의 군대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이라고도 쓴다.)성 남쪽에 진영을 만들 땅을 보았다. 백제 사람들이 진영이 정비되지 않았음을 보고 갑자기 나와 불의에 급히 치니 우리 군대가 놀라 무너져 달아났다.
十二日 大軍來屯古沙比城外 進攻豆良尹城 一朔有六日 不克 夏四月十九日 班師 大幢誓幢先行 下州軍殿後 至賓骨壤 遇百濟軍 相鬪敗退 死者雖小 失亡兵械輜重甚多 上州郞幢遇賊於角山 而進擊克之 遂入百濟屯堡 斬獲二千級 王聞軍敗大驚 遣將軍金純·眞欽·天存·竹旨濟師救援 至加尸兮津 聞軍退至加召川 乃還 王以諸將敗績 論罰有差
12일 대군이 와 고사비성 밖에 주둔하고 나아가 두량윤성을 쳤는데 한달 6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여름 4월 19일 군대를 돌렸는데 대당과 서당이 먼저가고 하주의 군대는 맨 뒤에 가게 하였다. 빈골양에 이르렀을 때 백제 군대를 만나 서로 싸워 패하고 물러났다. 죽은 자는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보급품을 잃은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 낭당이 각산에서 도적 만나자 나아가 쳐서 이기고, 마침내 백제가 주둔한 보에 들어 가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왕이 군대가 패함 것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 진흠,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더해 구원하였으나 가시혜진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에 이르렀단 것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가 패하자 벌을 논하여 차등있게 하였다.
五月九日 一云十一日 高句麗將軍惱音信 與靺鞨將軍生偕合軍 來攻述川城 不克 移攻北漢山城 列抛車 飛石所當 陴屋輒壞 城主大舍冬陁川 使人擲鐵蒺藜於城外 人馬不能行 又破安養寺廩廥 輸其材 隨城壞處 卽構爲樓櫓 結絙網 懸牛馬皮綿衣 內設弩砲以守 時城內只有男女二千八百人 城主冬陁川 能激勵少弱 以敵强大之賊 凡二十餘日 然糧盡力疲 至誠告天 忽有大星 落於賊營 又雷雨以震 賊疑懼解圍而去 王嘉奬冬陁川 擢位大奈麻 移押督州於大耶 以阿湌宗貞爲都督 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諡曰武烈 葬永敬寺北 上號太宗 高宗聞訃 擧哀於洛城門
5월 9일(11이라 하기도 한다.) 고구려 장군 뇌음심이 말갈장군 생해와 군대를 합하여 와서 술천성을 쳤는데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으로 옮겨 쳤다. 포차를 벌려 돌을 날리니 맞은 성 가퀴와 집이 문득 무너졌다. 성주 대사 동타천이 사람을 시켜 철질려를 성 밖에 던지게 하여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또 안양사 창고를 깨트리고 그 재목을 운반하여 성의 무너진 곳을 따라 즉시 엮어 지붕 없는 망루를 만들고, 끈으로 그물을 엮고 소와 말의 가죽, 비단 옷을 걸고 그 안에 노포를 설치하여 막았다. 그 때 성 안에는 다만 남녀 2천8백 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성주 동타천이 어리이와 노약자를 격려하며 강대한 적을 대적하기를 20여일을 하였으나 식량이 다하고 힘이 피로해지자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고하였는데 갑자기 큰 별이 있어 적의 진영에 떨어졌다. 또 우레와 비가 내리며 벼락이 떨어지니 적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에워쌌던 것을 풀고 갔다. 왕이 동타천을 칭찬하고 장려하고 대나마의 자리에 발탁하였다. 압독주를 대야로 옮기고 대아찬 종정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 대관사 우물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의 땅에 피가 흐르는데 넓이가 5보였다.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열이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례하였으며 묘호를 올려 태종이라 하였다. (당나라)고종이 죽음 소식을 듣고 낙성문 밖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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