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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by 최인표 2024. 1. 3.

三國史記卷 第四 新羅本紀 第四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전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수태보 문하시중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 치사 신 김부식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함

 

新羅本紀 第四 智證麻立干·法興王·眞興王·眞智王·眞平王

신라본기 제4, 지증마립간, 법흥왕, 진흥완, 진지왕, 진평왕

 

智證麻立干 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炤知王之再從弟也 母金氏鳥生夫人 訥祇王之女 妃朴氏延帝夫人 登欣伊湌女 王體鴻大 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論曰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曰左·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菟 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지증마립간이 즉위하였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혹은 지도로, 혹은 지철로라 한다.) 내물왕의 증손자로 습보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제(6촌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시로 오생부인이니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으로 등흔 이찬의 딸이다. 왕은 신체가 크고 담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전왕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를 이었다. 그때 나이는 64세였다.(논하여 말한다. 신라왕은 거서간을 칭한 것이 1, 차차웅이 1, 니사금이 16, 마립간이 4명이다. 시라 말 이름 있는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이라 말하고 거서간 등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혹 그 말이 촌스러워 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겨서일까? 좌전한서는 중국의 역사서인데도 오히려 초나라 말인 곡어도, 흉노 말인 탱리고도 등을 보존하였다.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면서 그 방언을 보존하는 것이 또한 마땅할 것이다.)

 

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3(502) 2월 명령을 내려 순장을 금지하였다. 전 국왕이 돌아가시자 남녀 각 5명을 순장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금지한 것이다.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3월 주주와 군주에게 나누어 명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소를 밭 가는데 사용하게 하였다.

 

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王從之

4(503)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말을 올리기를 시조가 나라를 세운 이래 나라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 말하였습니다. 신들은 신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곧 국호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도 옛날에 나라를 소유한 자는 모두 제를 칭하고, 왕을 칭하였습니다. 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운 이래로 지금 20세에 이르렀는데도 다만 방언을 칭할뿐 높이는 이름이 정해지 않았습니다. ;금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국 왕이라는 호를 올립니다.”했다. 왕이 그것을 따랐다.

 

五年 夏四月 制喪服法頒行 秋九月 徵役夫築波里·彌實·珍德·骨火等十二城

5(504) 여름 4월 상복의 법을 제정하여 행하게 하였다. 9월 역부(일꾼)를 뽑아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 12개 성을 쌓았다.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 又制舟楫之利

6(505) 2월 왕이 직접 나라 안의 주, , 현을 정하고 실직주를 두어 이사부를 군주로 삼았다. 군주의 이름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겨울 11월 처음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또 배와 노의 이용에 대한 법을 제정하였다.

 

七年 春夏旱 民饑 發倉賑之

7(506) 봄과 여름에 가물어 백성이 주리자 참고를 열어 구휼하였다.

 

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 三月 設檻穽 以除猛獸之害 秋七月 隕霜殺菽

10(509) 봄 정월 경도(서울)에 동시를 두었다. 3월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의 해를 없앴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十一年 夏五月 地震壞人屋 有死者 冬十月 雷

11(510) 여름 5월 땅이 흔들리고 사람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이가 있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울렸다.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 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國人恐懼 則降

13(512) 여름 6월 우산국이 항복하여 매년 그 지방에서 나는 물건으로서 공물을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 정 동쪽에 있는 바다 섬으로 혹 울릉도라 이름한다. 땅은 사방 1백리로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위력으로서 오게 하기는 어렵고 계책으로 복종시킬 수 있다.”하고는 곧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나누어 싸움배에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알려 말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곧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놓아 밟아 죽이게 하겠다.”했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秋七月 徙六部及南地人戶 充實之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15(514) 봄 정월 소경을 아시촌에 두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땅의 백성들을 옮겨 체웠다. 왕이 돌아가시자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는데 신라의 시호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法興王 立 諱原宗 (冊府元龜 姓募名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保刀夫人 王身長七尺 寬厚愛人

법흥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원종이다.(책부원구에 성은 모이고,이름은 진이라 했다.) 지증왕의 원자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다.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왕은 키가 일곱 자이고 성품이 너그럽고 사람을 사랑하였다.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龍見楊山井中

3(516) 봄 정월 직접 신궁에 제사하였다. 용이 양산의 우물에 나타났다.

 

四年 夏四月 始置兵部

4(517) 여름 4월 처음 병부를 설치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株山城

5(518) 2월 주산성을 쌓았다.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7(519) 봄 정월 율령을 반포하였다. 처음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여 붉은 빛과 자주 빛의 위계를 정하였다.

 

八年 遣使於梁貢方物

8(520)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湌比助夫之妹送之

9(521) 봄 정월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냈다.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11(523) 가을 9월 왕이 나가 남쪽 경계의 땅을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는ㄷ 가야국 왕이 와서 만났다.

 

十二年 春二月 以大阿湌伊登爲沙伐州軍主

12(524) 2월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 군주로 삼았다.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祇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 賜衣着香物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䝴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陁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時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俄而不知所歸

15(528) 처음 불법(불교)이 행해졌다. 처음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이르러 군 사람 모례가 집 안에 굴실을 만들고 안치하였다. 그 때 양나라가 사신을 보내 옷과 향을 보냈는데 임금과 산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그 쓰는 바를 알지 못하였다.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두루 물으니 묵호자 그것을 보고 그 이름을 말하고 지목해 말하기를 이것을 불사르면 곧 향기가 진하게 나니 신성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으로는 삼보보다 나음이 있지 않으니 첫째는 불타요, 둘째는 달마이고, 셋째는 승가입니다. 만약 이를 사르며 발원하면 곧 반드시 신령스러운 응함이 있을 것입니다.”했다. 그 때 왕의 딸이 병들었는데 왕이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사르며 축원하게 하였더니 왕의 딸의 병이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밥을 먹이고 선물 주기를 매우 많이 하였다. 묵호자가 모례를 보고 얻었던 물건을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지금 돌아갈 곳이 있다. 하직을 청한다.”하고는 홀연히(갑자기) 돌아간 바를 알지 못하였다.

 

至毗處王時 有阿道 一作我道 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羣臣不信 喋喋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 或云處道 奏曰 請斬小臣 以定衆議王曰 本欲興道 而殺不辜非也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無憾王於是 召羣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비처왕(소지왕) 때 이르러 아도(아도라고 쓰기도 한다.)화상이 모시는 세 사람과 또 모례의 집에 왔는데 태도와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머문 지 몇 년 만에 병 없이 죽고 그 모시던 세 사람이 머물면서 경률을 강독하니 자주 믿고 받드는 자가 있었다. 이에 이르러 왕이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믿지 않고 재잘재잘 비난하는 말을 하니 왕이 곤란하게 여겼다. 근신 이차돈(혹은 처도)이 아뢰어 말하기를 소신을 참하는 것으로서 여러 사람의 의론을 정하십시오.”했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 도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죄없는 이를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했다. (이차돈이) 답해 말하기를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했다. 왕이 이에 여러 신하를 불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지금 승도(승려무리)를 보니 아이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기괴함을 의론하는데 떳떳한 도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그들을 따른다면 뒤에 뉘우침이 있을 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무거운 죄를 받을 지라도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했다.

 

異次頓獨曰 今羣臣之言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 此據金大問鷄林雜傳所記書之與 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 所錄殊異

이차돈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록 비상한 사람이 있은 후에 비상의 일이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불교는 심오하다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이 견고하니 깨트릴 수 없는데 네가 유독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따를 수 없다.”하고는 마침내 하급 관리로 하여금 죽이게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가 법(불교)을 위하여 형벌을 받으니 부처에게 만일 신이함이 있다면 내가 죽고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했다. 목을 베니 피가 잘린 곳에서 솟아오르는데 색이 희고 우유와 같았다. 무리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비방하지 않았다. 이는 김대문의 계림잡전에 기록된 바의 글과 한나마 김용행이 찬술한 아도화상비에 기록된 것이 다르다.

 

十六年 下令禁殺生

16(529)년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지하였다.

 

十八年 春三月 命有司修理隄防 夏四月 拜伊湌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 始於此 如今之宰相

18(531) 3월 담당관청에 명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이찬 철부에게 벼슬을 주어 상대등으로 삼고 국사를 총괄하여 맡게 하였다. 상대등의 관직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의 재상과 같다.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19(532) 금관국 임금 구해와 왕비, 세 아들 맏이 노종, 가운데 무덕, 셋째 무력이 나라와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 대접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에 이르렀다.

 

二十一年 上大等哲夫卒

21(534) 상대등 철부가 죽었다.

 

二十三年 始稱年號 云建元元年

23(536) 처음으로 연호를 칭하여 건원 1년이라 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敎許外官携家之任

25(538) 봄 정월 외관(지방관)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峯

27(540)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법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례하였다.

 

眞興王 立 諱彡麥宗 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夫人金氏 法興王之女 妃朴氏思道夫人 王幼少 王太后攝政

진흥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삼맥종(혹은 심맥부라 쓰기도 한다.) 그 때 나이는 7세였다.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부인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왕태후가 정사를 대신하였다.

 

元年 八月 大赦 賜文武官爵一級 冬十月 地震 桃李華

1(540) 8월에 크게 풀어주고 문무관에게 관작 일급씩을 내렸다. 겨울 10월 땅이 흔들리고 복숭아, 오얏꽃이 피었다.

 

二年 春三月 雪一尺 拜異斯夫爲兵部令 掌內外兵馬事 百濟遣使請和 許之

2(541) 3월 눈이 한자나 내렸다. 이사부에게 벼슬을 주어 병부령으로 삼고, 내외 군사에 대한 일을 관장하게 했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 우호를 청하니 그것을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興輪寺成 三月 許人出家爲僧尼 奉佛

5(544) 2월 흥륜사가 완공되었다. 3월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니()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六年 秋七月 伊湌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王深然之 命大阿湌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6(545)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기를 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과 악을 기록하여 옳고 그름의 판단을 만대에 보이는 것인데 편찬이 있지 않으니 후대에 무엇을 모이겠습니까?”했다. 왕이 매우 그렇다 여기고 대아찬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널리 문사를 모아 편찬하게 하였다.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 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9(548) 2월 고려와 예인이 백제 독산성을 치니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장군 주령을 보내 날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죽이고 포로로 잡은 이가 매우 많았다.

 

十年 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送佛舍利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

10(549) 봄 양나라가 사신과 입학승 각덕을 보내 불사리를 보냈다.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11(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두 나라의 군대가 피로한 틈을 타고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치게하여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갑사 1천명이 머물며 지키게 했다.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 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12(551) 봄 정월 연호를 고쳐 개국이라 했다. 3월 왕이 순수하여 낭성에 갔을 때 우륵과 그 제자 니문이 음악을 안다는 것을 듣고 특히 그들을 물렀다. 왕이 하임궁에 머물며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더니 두 사람이 각각 지은 새로운 노래를 연주하였다. 이에 앞서 가야국 가실왕이 12현금을 만들었는데 12달의 음률을 상징한 것이었다. 곧 우륵에게 명하여 그 곡을 짓게 하였으나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다.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이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범하게 하였는데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빼앗았다.

 

十三年 王命階古·法知·萬德三人 學樂於于勒 于勒量其人之所能 敎階古以琴 敎法知以歌 敎萬德以舞 業成 王命奏之曰 與前娘城之音無異厚賞焉

13(552) 왕이 개고, 법지, 만덕 3사람에개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니 우륵이 그 사람이 능통한 바를 헤아려 계고에게는 금을 자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치고,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치니 일이 이루어졌다. 왕이 연주할 것을 명하고 말하기를 앞서 낭성의 음악과 다름이 없다.”하고는 많은 상을 주었다.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爲小妃

14(553) 2월 왕이 담당관청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을 세우게 하였는데 황룡이 그 땅에서 나타나자 왕이 의심하여(이상하게 여겨) 고쳐 절로 삼고, 이름을 내려 황룡사라 했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를 두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백제왕의 딸을 맞이하여 소비로 삼았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15(554)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왕 명농과 가량이 와서 관산성을 쳤는데 군주 각간 우덕,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이로움을 잃었다.(불리하였다.)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대로 나아가 서로 싸움에 이르러 비장 삼년산군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가 이기는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겼는데 좌평 4, 군사 296백명을 목베었고, 말 한 마리도 돌아간 자가 없었다.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 復一年租調 曲赦 除二罪 皆原之

16(555) 봄 정월 완산주를 비사벌에 두었다. 겨울 10월 왕이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을 넓혀 정하였다. 11월 북한산으로부터 이르러(돌아와) 지나간 주와 군의 1년치 토지세와 공물을 면제하고, 죄수를 살펴 두 가지 (죽을)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 주었다.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湌成宗爲軍主

17(556) 가을 7월 비열홀주를 두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18(557) 국원을 소경으로 하고 사벌주를 폐하였다. 감문주를 두고, 사찬 기종을 군주로 삼았다.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두었다.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奈麻身得作砲弩上之 置之城上

19(558) 2월 귀족 자제와 6부의 ㅂ유한 백성을 옮겨 국원을 채웠다.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어 바치니 성 위에 설치하였다.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 其生口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23(562) 가을 7월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니 왕이 군대를 내어 막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배반하므로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 되었다. 사다함이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 전단문에 들어 가 흰 깃발을 세우니 성 중의 두려워하여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고 다다르니 한꺼번에 모두 항복하였다. 공을 논하니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왕이 좋은 밭과 잡은 포로 200 명을 상으로 주었다. 사다함이 세 번을 사양하였으나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 그 포로는 풀어주어 양인이 되게 하고, 땅은 전사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二十五年 遣使北齊朝貢

25(564) 사신을 보내 북제에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秋八月 命阿湌春賦 出守國原 九月 廢完山州 置大耶州 陳遣使劉思與僧明觀 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26(565) 2월 북제 무성제가 조칙으로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가을 8월 아찬 춘부에게 명하여 국원으로 나가 지키게 하였다.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를 두었다. 진나라가 유사와 중 명관을 보내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게 하고 석씨경론(불경과 논) 1700여권을 보냈다.

 

二十七年 春二月 祇園·實際二寺成 立王子銅輪爲王太子 遣使於陳貢方物 皇龍寺畢功

27(566) 2월 기원, 실제 두 절을 완성하였다. 왕자 동륜을 세워 왕태자로 삼았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특산물)을 바쳤다. 황룡사 (짓는)일을 마쳤다.

 

二十八年 春三月 遣使於陳貢方物

28(567) 3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특산물)을 바쳤다.

 

二十九年 改元大昌 夏六月 遣使於陳貢方物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29(568) 연호를 고쳐 대창이라 했다. 여름 6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특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북한산주를 없애고 남천주를 두었다. 또 비열홀주를 없애고 달홀주를 두었다.

 

三十一年 夏六月 遣使於陳獻方物

31(570) 여름 6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특산물)을 바쳤다.

 

三十二年 遣使於陳貢方物

32(571)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특산물)을 바쳤다.

 

三十三年 春正月 改元鴻濟 三月 王太子銅輪卒 遣使北齊朝貢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於外寺 七日罷

33(572) 봄 정월 연호를 바꾸어 홍제라 하였다.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천자를 뵙고 공물을 바침)하였다. 겨울 1020일 싸우다 죽은 군사를 위하여 외방의 절에서 팔관연회를 열고 7일만에 마쳤다.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五千七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35(574) 3월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물로 완성하였는데 구리 357, 도금 1198푼이 들었다.

 

三十六年 春夏旱 皇龍寺丈六像 出淚至踵

36(575)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황룡사 장육존상이 눈물을 흘렸는데 발꿈치에 이르렀다.

 

三十七年 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羣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 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37(576) 봄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처음 임금과 신하들이 사람을 알 수 없는 것을병폐로 여겨(걱정하여) 무리들을 모아 여럿이서 놀게 하고, 그 행실과 모습을 관찰한 후 추천하게 하여 그들을 등용하려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으니 하나는 남모이고, 다른 하나는 준정이라 하였는데 무리가 300여 명이 모였다. 두 여 자가 서로 아름다움을 시기하여 준정이 남모를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고 취함에 이르자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의 죄를 인정하여 죽이자 무리들이 서로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데려다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 서로 도의로 갈고, 혹은 서로 노래와 음악으로 기뻐하고, 산수를 돌아다니며 즐겨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간사함과 바름을 알아 그 선한자를 가려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말하기를 어진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했다.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安弘法師入隋求法 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말하기를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어 풍류라 하는데 가르침을 베푸는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다.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여러 생령(백성)에 접하여 교화하였다. 또한 들어가서는 곧 집에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가르침이다. 함이 없는 일에 처하여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노자)의 뜻이다. 어려 악을 짓지 않고 여러 선을 받들어 행사는 것은 축건태자(부처)의 교화이다.”했다.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말하기를 귀인(귀족)의 자제 중에 아름다운 자를 뽑아 분을 칠하여 화장하고 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높이고 섬겼다.”했다. 안홍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구하고, 호승 비마라 등 두 중과 함께 돌아와 능가승만경과 불사리를 바쳤다. 가을 8월 왕이 돌아기시니 진흥이라 시호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례하였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었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깍아 중의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부르다 죽었다. 왕비가 또한 그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살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례하였다.

 

眞智王 立 諱舍輪 或云金輪 眞興王次子 母思道夫人 妃知道夫人 太子早卒 故眞智立

진지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사륜 혹은 금륜이라 하는데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이고,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지가 죽위한 것이다.

 

元年 以伊湌居柒夫爲上大等 委以國事

1(576)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고 국사를 맡겼다.

 

二年 春二月 王親祀神宮 大赦 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湌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築內利西城

2(577)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하고 크게 풀어주엇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겨으이 주와 군을 침범하니 이찬 세종에게 명하여 군대를 내어 일선의 북쪽에서 그들을 깨트리고 37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내리서성을 쌓았다.

 

三年 秋七月 遣使於陳以獻方物 與百濟閼也山城

3(578) 가을 7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특산물)을 바치고, 백제에게 알야산성을 주었다.

 

四年 春二月 百濟築熊峴城·松述城 以梗䔉山城麻知峴城·內利西城之路 秋七月十七日 王薨 諡曰眞智 葬于永敬寺北

4(579) 2월 백제가 웅현성, 송술성을 쌓아 산산성, 마지현성, 내리서성 길을 막았다. 가을 717일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진지라 하고, 영경사 북쪽에 장례하였다.

 

眞平王 立 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 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 葛文王立宗之女 妃金氏摩耶夫人 葛文王福勝之女 王生有奇相 身體長大 志識沉毅明達

진평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백정이니 진흥왕의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만호부인(만내부인이라 하기도 한다.)이니 갈문왕 입종의 딸이다. 왕비는 김시 마야부인으로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왕은 나면서 기이한 상이 있고, 신체가 장대하며 뜻과 지식이 깊고 굳세며 이치에 밝고 통달하였다.

 

元年 八月 以伊湌弩里夫爲上大等 封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

1(579) 8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고, 동생 백반을 봉하여 진정갈문왕을 삼고, 국반을 진안갈문왕으로 삼았다.

 

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以伊湌后稷爲兵部令

2(580) 2월 직접 신궁에서 제사하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三年 春正月 始置位和府 如今吏部

3(581) 봄 정월 처음으로 위화부를 두었다. 지금의 이부와 같다.

 

五年 春正月 始置船府署 大監·弟監各一員

5(583) 봄 정월 처음으로 선부서를 두고 대감, 제감 각 1명을 두었다.

 

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三月 置調府令一員 掌貢賦 乘府令一員 掌車乘

6(584) 2월 연호를 바꾸어 건복이라 하였다. 3월에 조부령 1명을 두고, 공부(조세)를 담당하게 하고, 승부령 1명을 두어 거승(수레)을 담당하게 하였다.

 

七年 春三月 旱 王避正殿減常饍 御南堂親錄囚 秋七月 高僧智明入陳求法

7(585) 3월 가물었다. 왕이 정전을 피하고, 평소의 반찬을 줄이고, 남당에 거둥하여 죄수를 살폈다. 가을 7월 고승 지명이 진나라에 들어 가 불법을 구하였다.

 

八年 春正月 置禮部令二員 夏五月 雷震 星殞如雨

8(586) 봄 정월 예부령 두 명을 두었다. 여름 5월 우레가 울리고 벼락이 치며 별이 비내리듯이 떨어졌다.

 

九年 秋七月 大世·仇柒二人適海 大世 奈勿王七世孫 伊湌冬臺之子也 資俊逸 少有方外志 與交遊僧淡水曰 在此新羅山谷之間 以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 不知滄海之浩大 山林之寬閑乎 吾將乘桴泛海 以至吳越 侵尋追師 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神仙可學 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 此天下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9(587) 가을 7월 대세, 구칠 두 사람이 바다로 갔다. 대세는 내물왕의 7세 손으로 이찬 동대의 아들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중 담수와 사귀어 놀던 중에 말하기를 이 신라의 산골짜기 사이에 있다가 일생을 마친다면 곧 못의 물고기, 조롱 속의 새가 푸른 바다의 넓고 큼과 산림의 너그럽고 한가함을 알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가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서 오월에 이르러 차차 스승을 찾아 이름 있는 산을 방문하여 도를 물으려 한다. 만약 평범한 사람을 바꾸어 신선을 배울 수 있다면 곧 표연히 넓고 깨끗한 하늘에서 바람을 타고 훨훨 날 터이다. 이것은 천하의 기이한 놀이이고,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르겠는가?”했다.

 

淡水不肯 大世退而求友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忽風雨落葉 泛於庭潦 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 今各取一葉 爲之舟 以觀其行之先後俄而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吾其行乎仇柒勃然曰 予亦男兒也 豈獨不能乎大世知其可與 密言其志 仇柒曰 此吾願也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담수가 기꺼워하지 않자 대세가 물러나 벗을 구하다 마침 구칠이라 자를 만났는데 그는 절개가 밝고 기이한 절조가 있었다. 마침내 그와 함께 남산의 절에서 노니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일고 나뭇잎이 떨어져 뜰의 고인 물에 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대와 서쪽에서 노닐 뜻이 있다. 지금 각각 하나의 나뭇잎을 가져가 배로 삼아 그 누구의 것이 먼저가고, 뒤에 가는지를 보자.”했다. 갑자기 대세의 잎이 앞에 있으니 대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로 갈 것이다.”하니 구칠이 발끈하여 말하기를 내가 또한 남자인데 어찌 홀로 하지 못하겠는가했다. 대세가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고 몰래 그 뜻을 말하니 구칠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바라던 것이다.”했다. 마침내 서로 벗이 되어 남해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후에 그들이 간곳은 알지 못한다.

 

十年 冬十二月 上大等弩里夫卒 以伊湌首乙夫爲上大等

10(588) 겨울 12월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 이찬 수를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十一年 春三月 圓光法師 入陳求法 秋七月 國西大水 漂沒人戶 三萬三百六十 死者二百餘人 王發使賑恤之

11(589) 3월 원광법사가 진나라에 들어 가 불법을 구하였다. 가을 7월 나라 서쪽에 큰물이 져 사람들의 집이 떠내려 가고 부서진 것이 336십 채였고, 죽은 자가 200여명이었다. 왕이 사자를 내어 진휼하게 했다.

 

十三年 春二月 置領客府令二員 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13(591) 2월 영객부령 두 명을 두었다. 가을 7월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4보였다.

 

十五年 秋七月 改築明活城 周三千步 西兄山城 周二千步

15(593) 가을 7월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보였다. 서형산성을 둘레가 2천보이다.

 

十六年 隋帝詔 拜王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16(594) 수나라 황제가 조서로 왕에게 벼슬을 주어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

 

十八年 春三月 高僧曇育 入隋求法 遣使如隋貢方物 冬十月 永興寺火 延燒三百五十家 王親臨救之

18(596) 3월 고승 담육이 수나라에 들어가 법을 구하였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 영흥사에 불이 나 350집을 연이어 태웠다. 왕이 직접가서 진휼하였다.

十九年 三郞寺成

19(597) 삼랑사가 완성되었다.

 

二十二年 高僧圓光 隨朝聘使奈麻諸文·大舍橫川還

22(600) 고승 원광이 조빙사를 내마 제문, 대사 횡천을 따라 돌아왔다.

 

二十四年 遣使大奈麻上軍 入隋進方物 秋八月 百濟來攻阿莫城 王使將士逆戰 大敗之 貴山·箒項死之 九月 高僧智明 隨入朝使上軍還 王尊敬明公戒行爲大德

24(602) 대나마 상군을 사신으로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토산물을 올리게 하엿다. 가을 8월 백제가 와서 아막성을 치니 왕이 장수와 병사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귀산과 취항이 죽었다. 9월 고승 지명이 입조사 상군을 따라 돌아오니 왕이 지명의 계행을 높이고 공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二十五年 秋八月 高句麗侵北漢山城 王親率兵一萬以拒之

25(603)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입하므로 왕이 직접 군대 1만을 통솔하여 막았다.

 

二十六年 秋七月 遣使大奈麻萬世·惠文等朝隋 廢南川州 還置北漢山州

26(604) 가을 7월 대나마 만세, 혜문 등을 수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였다. 남천주를 없애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다.

 

二十七年 春三月 高僧曇育 隨入朝使惠文還 秋八月 發兵侵百濟

27(605) 3월 고승 담육이 입조사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월 군대를 내어 백제를 쳤다.

 

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埸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句麗拔牛鳴山城

30(608) 왕이 고구려가 여러 번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근심하여 수나라 군대를 펑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였다. 원광이 말하기를 스스로의 보존을 위해 다른 이를 없애는 것은 사문의 행실이 아닙니다. 빈도가(제가) 대왕의 토지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으면서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하고는 곧 지어 바쳤다. 2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에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三十一年 春正月 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31(609) 봄 정월 모지악 아래 땅이 불탔는데 넓이 4, 깊이 5지였다. 1015일에 이르러 거졌다.

 

三十三年 王遣使隋 奉表請師 隋煬帝許之 行兵事在高句麗紀 冬十月 百濟兵來圍椵岑城百日 縣令讚德固守 力竭死之 城沒

33(611)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고 군대를 청하니 수나라 양제가 허락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이 고구려기에 있다. 겨울 10월 백제 군대가 와서 가잠성을 100일이나 에워쌌다. 현령 찬덕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성이 함락되었다.

 

三十五年 春旱 夏四月 降霜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

35(613) 봄에 가물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렷다. 가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이르자 백고좌를 베풀고 원광 등의 법사들을 맞아 경전을 말하였다.

 

三十六年 春二月 廢沙伐州 置一善州 以一吉湌日夫爲軍主 永興寺塑佛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死

36(614) 2월 사벌주를 없애고 일선주를 두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고 얼마되지 않아 진흥왕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

 

三十七年 春二月 賜大酺三日 冬十月 地震

37(615) 2월 대포 3(왕이 3일간 큰 잔치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는 일)을 내렸다. 겨울 10월에 땅이 흔들렸다.

 

三十八年 冬十月 百濟來攻母山城

38(616) 겨울 10월 백제가 와서 모산성을 쳤다.

 

四十年 北漢山州軍主邊品 謀復椵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 赴敵力戰死之 論讚德之子也

40(618)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할 것을 도모하여 군대를 내어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종군하여 적에게 달려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四十三年 秋七月 王遣使大唐朝貢方物 高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畫屛風·錦綵三百段

43(621) 가을 7월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고조가 직접 위문하고 통직산기상시 유문소를 보내 예방하고 조서와 그림병풍, 수놓은 비단 300단을 내렸다.

 

四十四年 春正月 王親幸皇龍寺 二月 以伊湌龍樹爲內省私臣 初王七年 大宮·梁宮·沙梁宮三所 各置私臣 至是置內省私臣一人 兼掌三宮

44(622) 봄 정월 왕이 직접 황룡사에 거둥하였다. 2월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으로 삼았다. 처음 (진평)7년에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고, 이에 이르러 내성사신을 1명을 두어 3궁을 겸해 관장하게 한 것이다.

 

四十五年 春正月 置兵部大監二員 冬十月 遣使大唐朝貢 百濟襲勒弩縣

45(623) 봄 정월 병부대감 2명을 두었다. 겨울 10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四十六年 春正月 置侍衛府大監六員 賞賜署大正 一員 大道署大正一員 三月 唐高祖降使 冊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冬十月 百濟兵來圍我速含·櫻岑·歧岑·烽岑·旗懸·穴柵等六城 於是 三城或沒或降 級湌訥催 合烽岑·櫻岑·旗懸三城兵堅守 不克死之

46(624) 봄 정월 시위부대감 6, 상사서 대정 1, 대도서 대정 1명을 두었다. 당나라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봉하여 주국 날강군공 신라왕이라 했다. 겨울 10월 백제 군대가 와서 우리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혈책 등 6성을 에워쌌다. 이에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고, 급찬 눌최가 봉잠, 앵잠, 기현 세 성의 군대를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四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因訟高句麗塞路 使不得朝 且數侵入

47(625) 겨울 11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하고, 고구려가 길을 막아 사신이 입조할 수 없고, 또 여러 차례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四十八年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唐高祖遣朱子奢來 詔諭與高句麗連和 八月 百濟攻主在城 城主東所 拒戰死之 築高墟城

48(626) 가을 7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고조가 주자사를 보내와 조서로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라고 타일렀다. 8월 백제가 주재성을 치니 성주 동소가 막아 싸우다 죽었다. 고허성을 쌓았다.

 

四十九年 春三月 大風雨土 過五日 夏六月 遣使大唐朝貢 秋七月 百濟將軍沙乞 拔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八月 隕霜殺穀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49(627) 3월 큰바람이 불고 흙비가 5일이 넘게 내렸다. 여름 6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두리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0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겨울 11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年 春二月 百濟圍椵岑城 王出師擊破之 夏 大旱 移市 畫龍祈雨 秋冬民飢 賣子女

50(628) 2월 백제가 가잠성을 에워싸니 왕이 군대를 내어 쳐서 깨트렸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기도하였다. 가을, 겨울에 백성들이 주려 자식을 팔았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 懼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吾其爲綱領乎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或搴旗 諸軍乘勝 鼓噪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九月 遣使大唐朝貢

51(629)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 서현,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을 침입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나와 진을 쳤는데 군의 기세가 매우 성대하였다. 우리 군대가 그것을 보고는 두려워하여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옷깃을 잡고 흔들어야 가죽 옷이 발라지고, 벼리를 당ㅣ면 그물이 펴진다.’한다.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하고는 곧 말을 타고 칼을 빼 들고는 적진을 향에 똑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갔다 세 번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군을 목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앗다.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고 북을 울리며 진격하여 5천 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으니 그 성이 곧 항복하였다.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二年 大宮庭地裂

52(630) 대궁 뜰의 땅이 갈라졌다.

 

五十三年 春二月 白狗上于宮墻 夏五月 伊湌柒宿與阿湌石品謀叛 王覺之 捕捉柒宿 斬之東市 幷夷九族 阿湌石品 亡至百濟國境 思見妻子 晝伏夜行 還至叢山 見一樵夫 脫衣換 樵夫敝衣 衣之負薪 潛至於家 被捉伏刑 秋七月 遣使大唐獻美女二人 魏徵以爲不宜受 上喜曰 彼林邑獻鸚鵡 猶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付使者歸之 白虹飮于宮井 土星犯月

53(631) 2월 흰 개가 궁궐 담장에 올라갔다. 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배반할 것을 모의하였다. 왕이 알아채고는 칠숙을 체포하여 동시에 목 베어 죽이고 아울러 9족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으나 처와 자식을 보고 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고 밤에 가서 돌아와 총산에 이르렀다.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나무꾼의 해진 옷으로 바꾸어 입은 후 섶을 지고 숨어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가을 7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2명을 바쳤다. 위징이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저 임에서 바친 앵무도 오히려 추위의 괴로움을 말하여 그 나라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데 하물며 두 여자는 멀리 친척과 이별함에 있어랴.”하고 사신에게 부쳐 함께 돌아가게 했다. 흰무지개가 궁궐 우물에 들어가고,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五十四年 春正月 王薨 諡曰眞平 葬于漢只 唐太宗詔 贈左光祿大夫 賻物段二百 (古記云 貞觀六年壬辰正月卒而新唐書·資理通鑑皆云 貞觀五年辛卯 羅王眞平卒豈其誤耶)

54(632) 봄 정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에 장례하였다. 당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물로 200단을 주었다. (고기에는 정관 6년 임진년 정월에 죽었다.”했고, 신당서, 자치통감은 모두 정관 5년 신묘에 ()라왕 진평이 죽었다.”하였으니 어찌하여 잘못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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