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百濟本紀 第五 威德王·惠王·法王·武王
백제본기 제5 위덕왕·혜왕·법왕·무왕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위덕왕은 이름이 창으로 성왕의 원자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元年 冬十月 高句麗大擧兵 來攻熊川城 敗衄而歸
1년(554) 겨울 10월 고구려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웅천성에 와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六年 夏五月丙辰朔 日有食之
6년(559) 여름 5월 병진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秋七月 遣兵侵掠新羅邊境 羅兵出擊敗之 死者一千餘人
8년(561) 가을 7월 군대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니 신라 군대가 나가 쳤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十四年 秋九月 遣使入陳朝貢
14년(567) 가을 9월 사신을 보내 진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十七年 高齊後主 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17년(570) 고씨의 제나라 후주가 왕에게 벼슬을 주어 사지절 시중 거기대장군 대방군공 백제왕이라 하였다.
十八年 高齊後主 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18(571) 고씨 제나라 후주가 또 왕을 사지절 도독 동청주 제군사 동청주 자사를 삼았다.
十九年 遣使入齊朝貢 秋九月庚子朔 日有食之
19년(572) 사신을 보내 제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가을 9월 경자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遣使入陳朝貢 冬十月 侵新羅西邊州郡 新羅伊湌世宗 帥兵擊破之 十一月 遣使入宇文周朝貢
24년(577)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진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신라 서쪽 변경의 주와 군을 침입하니 신라 이찬 세종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쳐서 깨트렸다. 11월 사신을 보내 우문씨 주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二十五年 遣使入宇文周朝貢
25년(578) 사신을 보내 우문씨 주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二十六年 冬十月 長星竟天 二十日而滅 地震
26년(579) 겨울 10월 장성이 하늘에 뻗혔다가 20일 만에 없어졌다. 지진이 있었다.
二十八年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 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28년(581) 왕이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수나라 고조가 조칙으로 왕에게 벼슬을 주어 상개부의동 삼사 대방군공이라 했다.
二十九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29년(582) 봄 정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三十一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31년(584) 겨울 11월 사신을 보내 진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三十三年 遣使入陳朝貢
33년(586) 사신을 보내 진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三十六年 隋平陳 有一戰船 漂至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國界 王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 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 來相體悉 自今已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36(589) 수나라가 진나라를 평정하였다. 한 전선이 있어 표류하여 탐모라국에 이르렀다. 그 배가 돌아가려고 나라의 경계를 지나가자 왕이 재물을 주고 보내기를 매우 후하게 하고, 아울러 시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진나라를 평정한 일을 축하하였다. 고조가 그것을 좋게 여겨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평정한 것을 듣고 멀리서 표를 받들게 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매우 어려워 만일 풍랑을 만난다면 곧 상하고 파손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함은 짐이 이미 알고 있었다. 서로 떨어짐이 비록 멀다하나 사정이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자주 사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와서 서로 상세히 알았으니 지금부터 이후로 매년 별도로 들어와 조공할 필요가 없다. 짐도 또한 사신을 보내 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니 왕도 마땅히 알라.”했다.
三十九年 秋七月壬申晦 日有食之
39년(592) 가을 7월 임신 그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一年 冬十一月癸未 星孛于角·亢
41년(594) 겨울 11월 계미 성패가 각성과 항성에 나타났다.
四十五年 秋九月 王使長史王辯那 入隋朝獻 王聞隋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道 帝下詔曰 『往歲高句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恐懼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我使者而還之 高句麗頗知其事 以兵侵掠國境 冬十二月 王薨 羣臣議諡曰威德
45년(598) 가을 9월 왕이 장사 왕변나로 하여금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왕이 수나라가 요동의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군대의 길잡이가 될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조칙으로 말하기를 “왕년에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하됨의 예가 없다. 그러므로 장차 토벌하게 하였는데 고원(영양왕)의 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죄를 청하니 짐이 이미 용서하였다. 정벌에 이를 수 없다.”하고는 우리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알고는 군대를 가지고 국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돌아가시자 여러 신하들이 시호를 의논하여 위덕이라 했다.
惠王 諱季 明王第二子 昌王薨 卽位
혜왕은 이름이 계이고, 명왕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二年 王薨 諡曰惠
2년(599) 왕이 돌아가시자 시호를 혜라 했다.
法王 諱宣(或云孝順) 惠王之長子 惠王薨 子宣繼位(隋書以宣爲昌王之子)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은 이름이 선(혹은 효순이라 한다.)으로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돌아가시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수서》에는 선을 창왕의 아들이라 했다.) 겨울 12월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던 매, 새매를 거두어 놓아주고 물고기 잡는 도구를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大旱 王幸漆岳寺祈雨 夏五月 薨 上諡曰法
2년(600) 봄 정월 왕흥사를 창건하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다. 크게 가물었다. 왕이 칠악사에 행차하여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였다. 여름 5월 돌아가셨다. 시호를 올려 법이라 했다.
武王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翌年薨 子嗣位
법왕은 이름이 장이다. 법왕의 아들로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과 기개가 호방하고 걸출하였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 돌아가셨다.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三年 秋八月 王出兵 圍新羅阿莫山城(一名母山城) 羅王眞平遣精騎數千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陁·畏石·泉山·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 令佐平解讎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武殷帥衆拒戰 解讎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 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 ‘士當軍無退’ 豈敢奔退 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箒項 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讎僅免 單馬以歸
3년(602) 가을 8월 왕이 군대를 내어 신라 아막산성(일명 모산성)을 에워싸니 신라왕 진평이 정예 기병 수 천을 보내 막아 싸우게 하였다. 우리 군대가 이로움을 잃어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 외석, 천산, 옹잠 4개의 성을 쌓고, 우리의 국경을 침범하여 핍박하였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4개 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신란 장군 건품, 무은이 무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웠다. 해수가 해롭지 않아 군대를 이끌고 천산 서쪽 큰 늪으로 물러나 군대를 숨기고 기다렸다. 무은이 이김을 타고 갑옷 입은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대택에 이르니 숨긴 군대를 일으켜 급히 쳤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이 놀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무은의 아들 귀산이 크게 소리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말하기를 ‘군사는 마땅히 전장에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하였으니 어찌 감히 달아나 물러나는 것으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떨어뜨릴 수 있겠는가?”하고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는 곧 소장 취항이 창을 휘두르고 힘껏 싸우다 죽었다. 남은 군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니 우리군대가 패하였다. 해수가 겨우 (죽음을)면하고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6년(605) 봄 2월 각산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都雨土 晝暗 夏四月 大旱 年饑
7년(606) 봄 3월 왕도(서울)에 흙비가 내렸다. 가을 8월 크게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八年 春三月 遣扞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覘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8년(607) 봄 3월 한솔 연문진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또 좌평 왕효린을 보내 들어 가 조공하게 하고 겸하여 고구려를 토벌할 것을 청하니 양제가 허락하고는 고구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가 와서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석두성으로 옮겨 습격하고 남녀 3천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 奉使倭國 經我國南路
9년(608) 봄 3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수나라 문림랑 배청이 왜국에 사신을 가는데 우리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隋朝貢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 來與王相謀 秋八月 築赤喦城 冬十月 圍新羅椵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12년(611) 봄 2월 사신을 보내 수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수나라 양제가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니 왕이 국지모로 하여금 들어 가 군사의 기일을 청하게 하였다. 양제가 기뻐하여 후한 상을 내리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보내니 와서 왕과 서로 모의하였다. 가을 8월 적암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신라 가잠성을 에워싸고 성주 찬덕을 죽인 후 그 성을 없앴다.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13년(612) 수나라 6군이 요하를 건넜다. 왕은 국경에서 군대를 엄하게 하고, 수나라를 돕는다는 말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양단책을 썼다. 여름 4월 궁궐 남문이 흔들렸다. 5월 큰물이 져 사람들의 집이 떠다니고 가라앉았다.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苩奇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十一月 王都地震
17년(616) 겨울 10월 달솔 백기에게 명하여 군대 8천을 거느리고 신라 모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11월 왕도(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復之 奚論戰死
19년(618) 신라 장군 변품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수목하였다. 해론이 싸우다 죽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遣使入唐 獻果下馬
22년(621) 겨울 10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과하마를 바쳤다.
二十四年 秋 遣兵侵新羅勒弩縣
24년(623) 가을 군대를 보내 신라 늑노현을 침범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百濟王 秋七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攻新羅速含·櫻岑·歧岑·烽岑·旗懸·冗柵等六城取之
25년(624) 봄 정월 다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고조가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사신을 보내 책봉하여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겨울 10월 신라 속함, 영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여섯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二十六年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26년(625) 겨울 11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高句麗平其怨 秋八月 遣兵攻新羅王在城 執城主東所殺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27년(626)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명광개를 바쳤다. 인하여 고구려가 길을 막아 상국(당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호소하였다. 고조가 산기상시 주자서를 보내 와서 조칙으로 우리와 고구려가 그 원한을 풀라고 깨우쳤다. 가을 8월 군대를 보내 신라왕의 재성을 공격하게 하게하여 성주 동소를 잡아 죽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二十八年 秋七月 王命將軍沙乞 拔新羅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王欲復新羅侵奪地分 大擧兵 出屯於熊津 羅王眞平聞之 遣使告急於唐 王聞之乃止 秋八月 遣王姪福信 入唐朝貢 太宗謂與新羅世讎 數相侵伐 賜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朕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正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蕃臣 王之鄰國 每聞遣師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福信及高句麗新羅使人 具勑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鄰情 卽停兵革』 王因遣使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 如故
28년(627) 가을 7월 왕이 장군 사걸에게 명하여 신라 서쪽 변경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포로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신라가 침입하여 빼앗은 땅을 회복하고자 하여 크게 군대를 일으켜 웅진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왕이 그것을 듣고 이에 그쳤다. 가을 8월 왕의 조카 복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태종이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여러 번 침범하고 친다고 말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왕이 대대로 군장이 되어 동쪽 번병을 위무하고 있다. 바다 귀퉁이가 멀고멀며, 바람과 파도가 험하고 막지만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서로 잇따르며 더욱이 아름다운 꾀를 생각하니 매우 기쁘고 위로가 되도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강토에 군림하고 정도를 넓히려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풍우가 미치는 곳마다 천성과 천명을 이루어 모두로 하여금 또한 평안하게 하고 있다. 모두로 하여금 또한 편안하게 하고 있다. 신라왕 김진평은 짐의 번신이고, 왕의 이웃나라인데 매번 군대를 보내 정벌하고 토벌함이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대를 믿고 잔인한 일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바라는 것을 크게 어그러뜨리는 것입니다. 짐이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 신라 사신을 대하여 모두 통하여 화합하도록 하여 모두 화목하게끔 하였다. 왕은 반드시 저 앞의 원한을 모름지기 잊고 짐의 본뜻을 알아서 같이 이웃의 정을 돈독히 하면 전쟁이 그칠 것이다.”했다. 왕이 때문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감사를 진술하였는데 비록 겉으로는 명을 따른다고 말했으나 실제로 서로 원수인 것은 옛과 같았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椵峯城 不克而還
29년(628) 봄 2월 군대를 보내 신라 가봉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ㅇ왔다.
三十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30년(629) 가을 9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三十一年 春二月 重修泗沘之宮 王幸熊津城 夏旱 停泗沘之役 秋七月 王至自熊津
31년(630) 봄 2월 사비의 궁을 수리하였다. 왕이 웅진성에 거둥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의 부역(사비의 궁을 중수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웅진성에서 돌아 왔다.
三十二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32년(631) 가을 9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不利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33년(632) 봄 정월 원자(맏아들) 의자를 봉하여 태자를 삼았다. 2월 마천성을 고쳐 쌓았다. 가을 7월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쳤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왕이 생초의 들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三十四年 秋八月 遣將攻新羅西谷城 十三日拔之
34년(633)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 서곡성을 치게 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35년(634) 봄 2월 왕흥사가 완성되었다. 기절은 물에 임하여 있고, 채색으로 꾸밈이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 가 향을 피웠다. 3월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 오고,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안에 섬을 쌓았는데 방장선산을 모방하였다.
三十七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沘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如畫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爲大王浦 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 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 日暮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 掩至鏖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爲所擒 六月 旱 秋八月 燕羣臣於望海樓
37년(636) 봄 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3월 왕이 좌우 신하를 거느리고 사비하 북쪽 물가에서 잔치하였는데 양쪽 언덕에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교대로 서있고, 그 사이에 기화이초가 마치 그림을 그림 것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며 지극히 즐겁게 놀아 거문고를 연주하며 스스로 노래하니 따르는 자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때 사람들이 그 땅을 대왕포라고 불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우소에게 명하여 갑사 500명을 이끌고 신라 독산성에 가 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말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이 군대를 거느리고 엄습하여 무찔러 쳤다. 우소가 큰 돌 위에 올라 활을 당겨 쏘며 막아 싸웠으나 화살이 다하여 사로잡혔다. 6월 가물었다. 가을 8월 여러 신하들과 망해루에서 잔치를 열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都地震 三月 又震 冬十二月 遣使入唐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錦袍幷彩帛三千段
38년(637) 봄 2월 왕도(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3월 또 흔들렸다. 가을 12월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 가 쇠로 만든 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치니 태종이 후하게 위로하고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 필을 내렸다.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39년(638) 봄 3월 왕과 빈이 큰 배를 큰 못에 뛰우고 놀았다.
四十年 冬十月 又遣使於唐 獻金甲雕斧
40년(639) 겨울 10월 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갑과 새긴 도끼를 바쳤다.
四十一年 春正月 星孛于西北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41년(640) 봄 정월 성패가 서북쪽에 나타났다. 2월 당나라에 자제를 보내 국학에 입학하기를 청하였다.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慜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42년(641) 봄 3월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무라 했다. 사자가 당에 들어 가 흰 옷을 입고 말하기를 “임금의 외신(번신) 부여장이 죽었습니다.”했다. 황제가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먼 나라를 위무하는 도는 총애하여 내리는 칙명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마침(죽음)을 꾸미는 의리는 먼 지방이라도 막힘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국대방군왕 백제왕 부여장은 산을 넘고 바다를 항해하여 멀리서 정삭(연호)을 받고, 보배를 바치고 글월을 올려 처음과 끝이 한결 같았는데 문득 죽으니 깊이 슬퍼하고 추도한다. 마땅히 떳떳한(일상의) 예에 더하여 애도의 영예를 표한다.”하고, 광록대부를 증직하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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