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百濟本紀 第四 文周王·三斤王·東城王·武寧王·聖王
백제본기 제4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년왕·성왕
文周王(或作汶洲) 蓋鹵王之子也 初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圍漢城 蓋鹵嬰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都於熊津
문주왕(혹은 문주라고 쓴다.)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이 돌아가시고, 개로가 왕위를 잇고, 문주가 보좌하였는데 지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 고구려가 와서 한성을 침입하여 에워싸니 개로가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며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청하게 했다. (문주가) 군대 1만을 얻어 돌아오자 고구려 군대가 비로소 물러났는데 성을 깨트리고 왕이 죽자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성품이 부드럽고 결단력이 없으나 또한 백성을 아끼니 백성이 그를 아꼈다. 겨울 10월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 夏四月 耽 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秋八月 拜解仇爲兵官佐平
2년(476) 봄 2월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백성을 옮겼다. 3월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로 삼았다. 가을 8월 해구에게 벼슬을 주어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夏四月 拜王弟昆支爲內臣佐平 封長子三斤爲太子 五月 黑龍見熊津 秋七月 內臣佐平昆支卒
3년(477) 봄 2월 궁전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동생 곤지에게 벼슬을 주어 내신좌평을 삼았다. 맏아들 삼근을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좌평 곤지가 죽었다.
四年 秋八月 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 九月 王出獵 宿於外 解仇使盜害之 遂薨
4년(478) 가을 8월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함부로 하고 법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을 나가 밖에서 잠잤는데 해구가 도적을 시켜 해치게 하였더니 결국 돌아가셨다.
三斤王(或云壬乞)文周王之長子 王薨 繼位 年十三歲 軍國政事一切委於佐平解仇
삼근왕(혹은 임걸)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나이가 13세로 군국의 정사 모두를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 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津市【論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 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立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漸矣 唐憲宗之弑 三世而後 僅能殺其賊 況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 又烏足道哉 三月己酉朔 日有食之
2년(478) 봄 좌평 해구와 은솔 연신이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차지하고 배반하였다. 왕이 좌평 진남에게 명하여 군대 2천으로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덕솔 진노에게 명하여 정예 군대 5백을 거느리고 해구를 습격하여 죽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니 그 처자를 거두어(잡아) 웅진의 저자에서 베어 죽였다. 논하여 말한다. 춘추의 법에 임금을 시해 당하였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곧 깊이 책망하여 신하된 자가 없다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를 해치고 그 아들 삼근이 이어 즉위하였는데도 그를 죽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나라의 정사를 맡겨 한 성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킴에 이른 후에야 두 번 큰 군대를 일으켜 이겼으니 이른 바 “서리를 밟고도 경계하지 않으면 굳은 얼음을 만들고, 반짝이는 불꽃을 없애지 않으면 활활 불탐에 이른다.”하니 그 말미암아 오는 바는 점진적인 것이다. 당나라 헌종이 시해되고 3세대가 지난 후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일 수 있었다. 하물며 바다 모퉁이 궁벽한 곳에 있는 삼근과 같은 어린 아이임에 있어서야 또한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으랴! 3월 기유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夏 大旱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冬十一月 王薨
3년(479) 봄, 여름 크게 가물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왕이 돌아가셨다.
東城王 諱牟大(或作摩牟)文周王弟昆支之子 膽力過人 善射百發百中 三斤王薨 卽位
동성왕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라 쓴다)로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하였다. 삼근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四年 春正月 拜眞老爲兵官佐平 兼知內外兵馬事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冬十月 大雪丈餘
4년(482) 봄 정월 진노에게 벼슬을 주어 병관좌평을 삼고, 겸하여 내외 병마(군대)의 일을 맡겼다.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깨트리고 300여호를 포로로 잡아갔다. 겨울 10월 큰 눈이 한길이나 내렸다.
五年 春 王以獵出 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夏四月 獵於熊津北 獲神鹿
5년(483) 왕이 사냥을 나가 한산성에 이르러 군대와 백성을 위문하고 1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여 신록을 잡았다.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祖道成 冊高句麗巨璉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請內屬 許之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6년(484) 봄 2월 왕이 남제의 태조 소도성이 고구려 거련(장수왕)을 책봉하여 표기대장군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내속(복속)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가을 7월 내법좌평 사약사를 보내 남제에 가 조공하게 했다. 사약사가 서해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 군대를 만나 나아가지 못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聘新羅
7년(485) 여름 5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방문하게 했다.
八年 春二月 拜苩加爲衛士佐平 三月 遣使南齊朝貢 秋七月 重修宮室 築牛頭城 冬十月 大閱於宮南
8년(486) 봄 2월 백가에게 벼슬을 주어 위사좌평을 삼았다. 3월 사신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게 했다.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궁 남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488) 위나라가 군대를 보내 와서 정벌하였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十一年 秋 大有年 國南海村人 獻合穎禾 冬十月 王設壇祭天地 十一月 宴羣臣於南堂
11년(489) 가을 큰 풍년이 들었다. 나라 남쪽 바닷가 사람이 이삭이 합쳐 있는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 왕이 단을 만들고 천지에 제사하였다. 11월 남당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十二年 秋七月 徵北部人年十五歲已上 築沙峴·耳山二城 九月 王田於國西泗沘原 拜燕突爲達率 冬十一月 無氷
12년(490) 가을 7월 북부 사람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현, 이산 두 성을 쌓았다. 9월 왕이 나라 서쪽 사비원에서 사냥하였다. 연돌을 달솔로 삼았다. 겨울 11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十三年 夏六月 熊川水漲 漂沒王都二百餘家 秋七月 民饑 亡入新羅者 六百餘家
13년(491) 여름 6월 웅천의 물이 넘쳐 왕도의 2백여 집이 떠내려가거나 잠겼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에 도망해 들어 간자가 600여 집이었다.
十四年 春三月 雪 夏四月 大風拔木 冬十月 王獵牛鳴谷 親射鹿
14년(492) 봄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여 직접 사슴을 쏘았다.
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飡比智女 歸之
15년(493) 봄 3월 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네 혼인을 청하니 신라 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16년(494)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의 들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을 지켰다. 고구려가 에워싸니 왕이 군대 3천을 보내 구원하니 에워싼 것을 풀었다.
十七年 夏五月甲戌朔 日有食之 秋八月 高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請救 羅王命將軍德智 帥兵救之 麗兵退歸
17년(495) 여름 5월 갑술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와 치양성을 에워싸니 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대가 물러나 도아갔다.
十九年 夏五月 兵官佐平眞老卒 拜達率燕突爲兵官佐平 夏六月 大雨 漂毁民屋
19년(496) 여름 5월 병관좌평 진노가 죽었다. 달솔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여름 6월 큰 비가 내려 백성의 집이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二十年 設熊津橋 秋七月 築沙井城 以狠率毗陁鎭之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耽羅 卽耽牟羅
20년(497) 웅진교를 설치하였다. 가을 7월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가 지키게 했다. 8월 왕이 탐라가 공부(조공)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정벌하여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청하니 이에 그쳤다. 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二十一年 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多起 臣寮請發倉賑救 王不聽 漢山人亡入高句麗者二千 冬十月 大疫
21년(498)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서로 먹었다. 도적이 많이 일어나니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진휼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이 도망하여 고구려에 들어 간 자가 2천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 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論曰】 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是以古之明君 虛己問政 和顔受諫 猶恐人之不言 懸敢諫之鼓 立誹謗之木而不已 今牟大王諫書上而不省 復閉門以拒之 莊子曰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狠』 其牟大王之謂乎 夏四月 田於牛頭城 遇雨雹乃止 五月 旱 王與左右宴臨流閣 終夜極歡
22년(499) 봄 궁 동쪽에 임류각을 지었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 못을 파고 기이한 새를 길렀다. 간하는 신하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궁궐 문을 닫았다.
논하여 말한다.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고, 충성스러운(진실된) 말은 행위에 이롭다. 이 때문에 옛날의 현명한 임금은 자기를 비우고 정사를 물었고,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간언을 받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간하는 북을 달고 비방하는 나무를 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은 간하는 글을 올려도 살피지 않고, 다시 문을 닫고 막았다. 《장자》에 말하기를 “허물을 보고 고치지 않고, 간언을 듣고도 더욱 심하게 하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했는데 모대왕을 이르는 것이다. 여름 4월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비와 우박을 만나 이에 그쳤다. 5월 가물었다. 왕이 좌우가 임류각에서 연회를 열러 밤새 환락을 다하였다.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嫗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苩加鎭之 冬十月 王獵於泗沘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王以苩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怨王 至是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冊府元龜云 南齊建元二年 百濟王牟都遣使貢獻
23년(501) 봄 정월 왕도(서울) 노구(할머니)가 여우로 변해 갔다. 두 호랑이가 남산에서 싸웠다. 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 비가 내리지 않고 가을에 이르렀다. 7월 탄현에 책을 설치하여 신라를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 동쪽 들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웅천 북쪽 들에서 사냥하고, 또 사비 서쪽 들에서 사냥하다 큰 눈에 막혀 마포촌에서 잠을 잤다. 처음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백가가 가지 않으려 하여 병을 핑계 대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을 원망하여 이에 이르자 사람을 시켜 왕을 찌르게 하였다. 12월에 이르러 곧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하였다. 《책부원구》에 “남제 건원 2년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詔曰 『寶命惟新 澤被絶域 牟都世蕃東表 守職遐外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而三韓古記 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 不言其祖牟都 則齊書所載不可不疑
조서에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워 은택이 먼 지역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의 울타리가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책을 지켰으니 곧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을 준다.”했다. 또 영명 8년(490) 백제 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자 알자복야 손부를 보내 모대를 책명하여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도를 이어 백제왕이라 하고 말하기를 “아아! 너희가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 정성이 멀리에서 드러났고, 바다 길이 조용하게 되어 조공을 바침에 변함이 없었다. 떳떳한 법전에 따라 천명을 이어가도록 하니 경계하고 조심할 지어다. 아름다운 위업을 받은 것이니 삼가지 않으랴.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을 삼는다.”했다. 삼한고기에는 모두가 왕이 된 사실이 없다. 또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로 개로의 둘째 아들 곤지의 아들로서 그 할아버지 모도를 말하지 않았으니 곧 《남제서》에 실린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武寧王 諱斯摩(或云隆)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畫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春正月 佐平苩加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論曰】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苩加之元惡大憝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무녕왕은 이름이 사마(혹은 륭)로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키가 여덟 자로 눈썹과 눈이 그림 듯하고, 인자하며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 모대가 재위 23년에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이르렀다. 왕이 한솔 해명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더니 백가가 나와 항복하였다. 왕이 그를 베어 죽여 백강에 던졌다. 논하여 말한다. 《춘추》에 “남의 신하된 자는 반역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고, 반역하면 반드시 죽인다.”했다. 백가 같은 흉악한 역적은 곧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는 바인데 바로 죄주지 않고, 이에 이르러 스스로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모반한 후에 죽였으니 늦은 것이다. 겨울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 군대 5천을 거느리고 고구려 수곡성을 습격하였다.
二年 春 民饑且疫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境
2년(502) 봄 백성이 굶주리고 또 질병이 돌았다. 겨울 11월 군대를 보내 고구려 변경을 침입하였다.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3년(503)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고목성을 공격하니 왕이 군대 5천을 보내 쳐서 물리쳤다.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 大疫 三月至五月不雨 川澤竭 民饑 發倉賑救 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6년(506) 가을 9월 크게 질병이 돌았다. 3월부터 5월에 이리기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니 내와 못이 마르고 백성이 굶주렸다. 창고를 열어 구휼하였ㄷ. 가을 7월 말갈이 와서 침입하여 고목성을 깨트리고 6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 與靺鞨謀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7년(507)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을 쌓아 말갈을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모의하여 한성을 공격하여 하여 횡악 아래 나아가 주둔하였다. 왕이 군대를 내어 싸우니 물러갔다.
十年 春正月 下令完固隄防 驅內外游食者歸農
10년(510) 봄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굳게 하고 안팎에서 놀며 먹는 자들을 귀농하게 하였다.
十二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秋九月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 殺掠甚衆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少 易之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12년(512) 여름 4월 사신을 보내 양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가을 9우ᅟᅯᆯ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군대를 옮겨 원산성을 깨트리고 매우 많은 무리를 죽이거나 약탈하였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위천의 북쪽에서 싸웠다. 고구려 사람들이 왕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여겨 진을 치지 않았다. 왕이 기병을 내어 급히 쳐서 크게 깨트렸다.
十六年 春三月戊辰朔 日有食之
16년(516) 봄 3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穀 民饑 亡入新羅者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迺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21년(521) 여름 5월 큰물이 졌다. 가을 8월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리자 도망해 신라에 들어 간 자들이 900집이었다. 겨울 11월 사신을 보내 양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깨트려져 쇠약해진지 여러 해였다. 이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깨트리고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12월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신의 직을 지키고, 멀리서 공물을 보내니 이에 정성이 이르렀으니 짐은 가상하게 여긴다. 마땅히 옛 법을 따라 이 영예로운 명을 주니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이 가하다”
二十二年 秋九月 王獵于狐山之原 冬十月 地震
22년(522) 가을 9월 왕이 호산의 들에서 사냥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月 王薨 諡曰武寧
23년(523) 봄 2월 왕에 한성에 행차하여 좌평 인우, 달솔 사오 등에게 명하여 한강 북쪽 주와 군민 중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3월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무녕이라 했다.
聖王 諱明襛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성왕은 이름이 명농으로 무녕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결단할 수 있었다. 무녕왕이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으니 나라 사람들이 일컬어 성왕이라 했다.
二年 梁高祖詔 冊王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2년(524) 양나라 고조가 조칙으로 왕을 책봉하여 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이라 했다.
三年 春二月 與新羅交聘
3년(525) 봄 2월 신라와 서로 방문하였다.
四年 冬十月 修葺熊津城 立沙井柵
4년(526) 겨울 10월 웅진성을 수리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키니 좌평 연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거느리고 오곡의 들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2천여 명이었다.
十年 秋七月甲辰 星隕如雨
10년(532) 가을 7월 갑진 별이 비같이 떨어져 내렸다.
十二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四月丁卯 熒惑犯南斗
12년(534) 봄 3월 사신을 보내 양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정묘 형혹이 남두를 범하였다.
十六年 春 移都於泗沘(一名所夫里)國號南扶餘
16년(538) 봄 도읍을 사비(일명 소부리)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했다.
十八年 秋九月 王命將軍燕會 攻高句麗牛山城 不克
18년(540)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하여 고구려 우산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幷工匠·畵師等 從之
19년(541) 왕이 사신을 보내 양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고, 겸하여 표로 모시박사, 열반 등의 경의와 장인, 화가 등을 청하니 따랐다.
二十五 春正月己亥朔 日有食之
25년(547) 봄 정월 기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548) 봄 정월 고구려 왕 평성이 예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신라에 구원을 청하게 했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에게 명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가서 독산성 아래 이르러 고구려군대와 한 번의 싸움을 하여 크게 깨트렸다.
二十七年 春正月庚申 白虹貫日 冬十月 王不知梁京師有寇賊 遣使朝貢 使人旣至 見城闕荒毁 竝號泣於端門外 行路見者 莫不灑淚 侯景聞之大怒 執囚之 及景平 方得還國
27년(549) 봄 정월 경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겨울 10월 왕이 양나라 경사(서울)에 도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성과 궁궐이 무너진 것을 보고 단문 밖에 나란히 서서 소리 내어 울며 눈물을 흘렸다. 행인으로 본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후경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잡아 가두었다. 경평에 이르러 비로소 나라에 돌아갈 수 있었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550)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대 1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군대가 금현성을 에워쌌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31년(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두었다. 겨울 10월 왕의 딸을 신라에 시집보냈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32년(554)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려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므로 싸웠으나 난병에게 해힘을 당하여 돌아가셨다. 시호를 성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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