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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by 최인표 2024. 1. 4.

三國史記卷第二十五 百濟本紀 第三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百濟本紀 第三 辰斯王·阿莘王·腆支王·久尔辛王·毗有王·盖鹵王

백제본기 제3 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니신왕·비유왕·개로왕

 

辰斯王 近仇首王之仲子 枕流之弟 爲人强勇聰惠 多智略 枕流之薨也 太子少 故叔父辰斯卽位

진사왕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침류왕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기가 있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秋七月 隕霜害穀 八月 高句麗來侵

2(386) 봄 나라 안 사람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관방을 만들었는데 청목령에서 북쪽으로 팔곤성에 닿았고, 서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와서 침입하였다.

 

三年 春正月 拜眞嘉謨爲達率 豆知爲恩率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不捷

3(387) 봄 정월 진가모를 달솔로 삼고, 두지를 은솔로 삼았다. 가을 9월 말갈과 관미령에서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侵掠高句麗南鄙

5(389) 가을 9월 왕이 군대를 보내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六年 秋七月 星孛于北河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冬十月 獵於狗原 七日乃返

6(390) 가을 7월 살별이 북하에 나타났다. 9월 달솔 진가모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쳐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200명을 얻었다. 왕이 진가모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구원에서 사냥하여 7일만에 돌아왔다.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夏四月 靺鞨攻陷北鄙赤峴城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 又獵橫岳之西

7(391)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고 못을 파며 산을 만들고, 기이한 짐승과 이상한 풀을 길렀다.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을 7월 나라 서쪽 큰 섬에서 사냥하여 왕이 직접 사슴을 쏘았다. 8월 또 횡악의 서쪽에서 사냥하였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392) 여름 5월 정묘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 왕 담덕이 군대 4만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에 와 공격하여 석현 등 10여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담덕이 군대를 잘 운용한다는 것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 북쪽 부락이 많이 함락되었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여 1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구원 행궁에서 돌아가셨다.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之元子 初生於漢城別宮 神光炤夜 及壯志氣豪邁 好鷹馬 王薨時 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

침류왕(혹은 아방이다.)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처음 한성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광이 밤에 비쳤다. 자라면서 지기가 씩씩하고 떳떳하며, 말 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다. (진사왕)이 재위 8년에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2(393) 봄 정월 동명묘를 배알하였다. 또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였다. 진무를 좌장으로 삼고, 군대의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 침착하고 굳세며 큰 지략이 있어 그 때 사람이 인정하였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일러 말하기를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앞섶과 같은 요지인데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부끄러움을 씻으라.”했다. 마침내 도모하여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 북쪽 변경을 쳤다. 진무는 자신이 사졸을 솔선하여 화살과 돌을 무릅스며 석현 증 5개 성을 회복할 것을 생각하였다. 먼저 관미성을 에워싸니 고구려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진무는 양도(군량 운반 길)가 이어지질 않아 이끌고 돌아왔다.

 

三年 春二月 立元子腆支爲太子 大赦 拜庶弟洪爲內臣佐平 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 太白晝見

3(394) 2월 맏아들 전지를 세우고, 크게 용서하여 풀어주었다. 서제 홍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四年 春二月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 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勞軍士

4(395) 2월 살별(성패)이 서북쪽에 나타나 20일만에 없어졌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대 7천을 거느리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막아 싸우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의 전투를 보복하려 하여 직접 군대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로 갔으나 큰 눈을 만나 사졸들이 많이 얼어 죽었다. 군대를 돌려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를 위로하였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秋七月 大閱於漢水之南

6(397) 여름 5월 왕과 왜국이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삼았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크게 열병하였다.

 

七年 春二月 以眞武爲兵官佐平 沙豆爲左將 三月 築雙峴城 秋八月 王將伐高句麗 出師 至漢山北柵 其夜 大星落營中有聲 王深惡之 乃止 九月 集都人習射於西臺

7(398) 2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하여 군대를 내어 한산 북책에 이르렀다. 그날 밤 큰 별이 진영에 떨어져 소리가 있었다. 왕이 깊이 싫어하여 이에 중지하였다. 9월 도읍으 사람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八年 秋八月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

8(399)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침범하려하여 크게 병마(군대)를 징발하니 백성들이 전역을 괴롭게 여겨 많이 신라로 달아나니 백성이 줄어들었다.

 

九年 春二月 星孛于奎婁 夏六月庚辰朔 日有食之

9(400) 2월 성패(살별)가 규루에 나타났다. 여름 6월 경진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夏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橫岳 乃雨 五月 遣使倭國求大珠

11(402) 여름 크게 가물어 벼 싹이 말랐다. 왕이 직접 횡악에 제사하였더니 곧 비가 내렸다. 5월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게 했다.

 

十二年 春二月 倭國使者至 王迎勞之特厚 秋七月 遣兵侵新羅邊境

12(403) 2월 왜국의 사신이 이르니 왕이 맞이하여 위로하기를 특히 후하에 했다. 가을 7월 군대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입하였다.

 

十四年 春三月 白氣自王宮西起 如匹練 秋九月 王薨

14(405)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흰 비단과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돌아가셨다.

 

腆支王(或云直支 梁書名映)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 立爲太子 六年 出質於倭國 十四年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碟禮殺訓解 自立爲王 腆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旣至國界 漢城人解忠來告曰 大王棄世 王弟碟禮殺兄自王 願太子無輕入腆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國人殺碟禮 迎腆支卽位 妃八須夫人 生子久尔辛

전지왕(혹은 직지, 양서에 이름을 영이라 했다.) 아신왕의 맏아들이다. 아신왕 3년에 세워 태자로 삼고, 6년 왜국에 인질로 나갔다. (아신왕)14년 왕이 돌아가시므로 왕의 가운데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신하면서 태자가 환국하기를 기다렸다. 세 번째 동생 설레가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전지가 왜이 있다가 부음을 듣고 곡하여 울면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왜의 왕이 군사 100명으로 호위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나라의 경계에 이르니 환성 사람 해충이 와서 알려 말하기를 대왕(아신왕)이 세상을 버리시고 왕의 동생 설례가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태자께서는 가벼이 들어가지 말 것을 원합니다.”했다. 전지가 왜인을 머물게 하고, 스스로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섬에 의지하여 기다렸다. 나라 사람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즉위하게 했다. 왕비는 팔수부인으로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二年 春正月 王謁東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九月 以解忠爲達率 賜漢城租一千石

2(406) 봄 정월 왕이 동명묘를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였다. (죄수를)크게 풀어주었다. 2월 사신을 보내 진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하였다. 가을 9월 해충을 달솔로 삼아 한성의 조 1천석을 내렸다.

 

三年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須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3(407) 2월 서제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삼고, 해수를 내법좌평으로 삼고,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모두 왕의 친인척이다.

 

四年 春正月 拜餘信爲上佐平 委以軍國政事 上佐平之職 始於此 若今之冢宰

4(408) 봄 정월 여신을 상좌평으로 삼아 군국의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의 직책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지금의 총재와 같다.

 

五年 倭國遣使 送夜明珠 王優禮待之

5(409) 왜국이 사신을 보내 야명주를 보냈다. 왕이 특별한 예로 대접하였다.

 

十一年 夏五月甲申 彗星見

11(415) 여름 5월 갑신 혜성이 나타났다.

 

十二年 東晉安帝遣使 冊命王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12(416)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책명하여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이라 했다.

 

十三年 春正月甲戌朔 日有食之 夏四月 旱 民饑 秋七月 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13(417) 봄 정월 갑술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 동북쪽 2부의 사람 가운데 15살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고, 병간좌평 해구로 하여금 일을 감독하게 했다.

 

十四年 夏 遣使倭國 送白綿十匹

14(418) 여름 왜국에 사신을 보내 흰 비단 10필을 보냈다.

 

十五年 春正月戊戌 星孛于大微 冬十一月丁亥朔 日有食之

15(419) 봄 정월 무술 성패(살별)아 대미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정해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十六年 春三月 王薨

16(420) 3월 왕이 돌아가셨다.

 

久尔辛王 腆支王長子 腆支王薨 卽位

구이신왕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八年 冬十二月 王薨

8(427) 겨울 12월 왕이 돌아가셨다.

 

毗有王 久尔辛王之長子(或云 腆支王庶子 未知孰是) 美姿貌 有口辯 人所推重 久尔辛王薨 卽位

비유왕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모습이 아름답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이 중하게 여겼다. 구이신왕이 돌아가시자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王巡撫四部 賜貧乏穀有差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2(428) 2월 왕이 4부를 돌아다니며 위로하고, 가난한 자에게 곡식을 차등있ㄱ[ 내렸다. 왜국의 사신이 이르렀는데 따라 온 자가 50명이었다.

 

三年 秋 遣使入宋朝貢 冬十月 上佐平餘信卒 以解須爲上佐平 十一月 地震 大風飛瓦 十二月 無氷

3(429) 가을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했다. 겨울 10월 상좌평 여신이 죽었다. 해수를 상좌평으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있었다.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렸다. 12월 어음이 얼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宋文皇帝 以王復修職貢 降使冊授先王映爵號(腆支王十二年 東晋冊命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4(430) 여름 4월 송 문황제가 왕이 다시 직공(조공)하므로 사신을 보내 선왕 영의 작호로 책봉해 주었다.(전지왕 12년 동진이 책명하여 사지절 도독 백제 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

 

七年 春夏 不雨 秋七月 遣使入新羅請和

7(433) 봄 여름 비가 내리지 않았다. 가을 7월 사신을 보내 신라에 들어 가 우호를 청하게 했다.

 

八年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

8(434) 2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또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가 좋은 금과 명주로 방문에 답례하였다.

 

十四年 夏四月戊午朔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宋朝貢

14(440) 여름 4월 무오 초하루 일식이 잇었다. 겨울 10월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들어 가 조공하게 햇다.

 

二十一年 夏五月 宮南池中有火 焰如車輪 終夜而滅 秋七月 旱 穀不熟 民饑 流入新羅者多

21(447) 여름 5월 왕궁 남쪽 못에 불이 있었는데 화염이 수레바퀴 같았으며 밤을 새고 없어졌다. 가을 7월 곡식이 익지 않아 백성이 굶주려 신라로 흘러들어 간 자가 많았다.

 

二十八年 星隕如雨 星孛于西北 長二丈許 秋八月 蝗害穀 年饑

28(454) 별이 비 내리듯 떨어지고 성패(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길 정도였다. 가을 8월 누리 떼가 곡식을 해치고, 흉년이 들었다.

 

二十九年 春三月 王獵於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29(455)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깐 사이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며 날아갔다. 왕이 돌아가셨다.

 

蓋鹵王(或云近蓋婁) 諱慶司 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薨 嗣

개로왕(혹은 근개루라 한다.) 이름은 경사이고,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돌아가시자 (왕위를) 이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14(468) 겨울 10월 계유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戍之

15(469)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범하게 했다. 겨울 10월 쌍현성을 수리하게 하고, 청목령에 대책을 설치하게 하며 북한산성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恊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運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18(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게 하고,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의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이리와 승냥이가 길을 막았기 때문에 비록 대대로 신령스러운 교화를 받들고도 말미암아 번병을 받들지 못하였습니다. 천자의 대궐을 우러러 보면서 치닫는 정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이는 때에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폐하께서는 하늘의 명에 화합하시니 우러르는 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무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며 만에 하나의 정성을 올립니다. 바라건대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감동을 드리우고 황제의 ㅅㄴ령스러움이 널리 덮이고, 천자의 궁정에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펼 수 있다면, 비록 (이 소식을)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길이 남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했다.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鄙女 執箒後宮 幷遣子弟 牧圉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또한 신과 고구려는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선대의 때에는 옛 정성을 돈독히 하고 높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고국원왕)가 이웃과의 우호를 가벼이 폐하고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신의 경계를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신의 할아버지 수(근구수왕)가 군대를 정돈하여 번개처럼 달려 가 기회에 따라 치달아(빠르게) 치니 화살과 돌이 잠시 오가고 쇠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습니다. 이로부터 이래로 (고구려가)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의 운수가 다함으로부터 패잔병들이 도망쳐 숨자(고구려에 들어오자) 추한 무리들이 점점 성대해져 마침내 침범하고 핍박하여 원한을 맺고 재앙을 연이은 지 30여년이 되자 재물이 다하고, 힘이 고갈하여 점점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만약 천자의 인자함과 간절한 긍률함이 멀리 가없는데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보내 와서 신의 나라를 구해주십시오. 마땅히 천한 딸을 받들어 보내 후궁에서 빗자루를 들게 하겠습니다.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마구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고, 한자의 땅과 필부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했다.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之期 假手之秋也 且馮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效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隗囂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蠕蠕 共相脣齒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詈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句麗之物 後聞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恚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鷂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況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竪 跨塞天逵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또 말하기를 지금 연(장수왕)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물고기 살이 되고(으깨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을 죽이고 살해하기를 그치지 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이 무너지고 떠났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시기요 손을 쓸 때입니다. 풍족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이 있고, 낙랑의 여러 군들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을 한 번 들면 정벌은 있어도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민첨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거느린 바의 군사를 통솔하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않아 거스르고 속인 것이 하나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가 번신으로서 낮추는 말을 사모하고,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돼지가 달려드는 행실을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유송)와 통하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유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이 되고 이가 되어 왕법(왕략)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에서 전투를 벌여 묘를 벌줌에 이르렀고, 맹상군은 어질다는 평이 있었지만 길에서 욕하는 것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작은 흐름의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약 빼앗지 않는다면 장차 후회가 미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 신의 나라 서쪽 경계 소석산북국 바다 안에 시체 10여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옷과 그릇, 말안장 굴레 등을 얻어 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곧 이는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에 내려오다 긴 뱀(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마땅한지 자세하지 않으나 깊이 분개하고 성내게 됩니다. 옛날 송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나라 장왕이 맨발로 뛰어나갔고, 새매가 놓아 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이 먹지 않았다 합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 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기운이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입니다. 어찌 더벅머리 아이(고구려 왕)으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 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얻은 바의 안장을 올리니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해 보십시오.”했다.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甚善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戢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讐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현조(북위 헌문제)가 그 궁벽하고 먼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하였기 때문에 예로 대우하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신 소안을 보내 그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조서에 말하기를 표를 얻어 보고 근심이 없다(무고하다)하니 매우 좋다. 경은 동쪽 모퉁이에 있으면서 먼 오복의 밖에 처하였으면서도 산과 바다를 멀다하지 않고, 정성을 위나라 궁궐이 돌리니 지극한 뜻을 흔쾌하고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다. 짐이 만세대의 기업을 이어 4(천하)에 군림하여 백성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이 맑아 하나로 되고 팔방에서 귀순하는 의리를 나타내어 업고 이르는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아름답고 군사와 말의 성대함을 모두 여례 등이 직접 보고 들은 바이다. 경과 고구려가 하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명하고 범함에 이르렀다. 만약 의리에 따르고 인으로서 지킨다면 또한 어찌 원수를 근심하리오. 앞서 보냈던 사신이 바다에 떠 황복 밖의 나라를 위무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는데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하였는지 여부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 경이 보낸 바의 안장을 옛날에 타던 것과 비교해보니 중구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애매모호한) 일을 가지고 반드시 그렇다 하는 잘못을 생겨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경영하고 공략하는 요점은 별도의 가르침에 갖춘다.”했다.

 

又詔曰 知高句麗阻疆 侵軼卿土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雖有自昔之釁 於國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咎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戢則保境 故羈縻著於前典 楛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況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句麗卽敍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協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

또 조서에 말하기를 고구려가 국경을 맡고 경의 땅을 침범하고, 선군의 옛 원한을 갚느라 백성을 쉬게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리하여)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나라와 월나라의 위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마땅히 의를 펴고 미미함을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다. 다만 고구려는 선대 조정에 번국을 칭하면서 직공을 바친 날이 오래되었다. 그에게(고구려)는 비록 옛날부터 틈이 있었지만 나라에는 아직 명령을 범하는 허물이 있지 않았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 정벌을 청하는데 사정과 기회를 자세히 검토하니 이치가 또한 두루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난 해 예 등을 보내 평양에 이르러 그 사유와 형상을 징험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아뢰고 청하기를 자주하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행인(사신)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사법)은 그 죄책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 등에게 명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만약 지금 다시 명을 어긴다면 곧 허물이 더욱 드러났다. 후에 비록 스스로 말한다 하더라도 죄에서 도망할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런 후에 군대를 일으켜 토벌한다면 의리를 얻음이 될 것이다. 9이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가 창달된다면 곧 번국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곧 경계를 보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은 일은 앞서의 전적에 드러났으되 호시를 바치는 것은 일이 연중 때때로 비게 되었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상을 갖추어 진술하였는데 과거의 행적을 모두 나열하였으나 풍속과 사정이 달라 견주고 비기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넓은 규칙과 큰 책략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 지금 중국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가 근심이 없었으므로 매번 동족 끝에 위엄을 보여 굴복시키고 국경 밖에 깃발을 달고 먼 나라에서 백성을 구원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풍모를 펴려하였다.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말하였기 때문에 정벌을 경정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지금 만약 조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와서 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을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때로 회답하는 사신을 보내 속히 그 실정을 구명하게 하라. 군사를 동원하는 날 경은 향도의 우두머리가 되어 크게 승리한 후 또한 큰 공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아니한가? 바친 바 비단과 베, 바다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경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니 이제 여러 가지 물건을 내리는데 별도(별지)의 물건과 같다.”했다.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讎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또 연(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 등을 호송하게 하였다. 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옛날 여경과 원한이 있다하여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니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갔다. 이에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뒤에 안 등으로 하여금 동쪽으로부터 바다를 항해하여 여경에게 새서를 내리고, 그 정성과 절개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마침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니 위나라에 표를 올려 군대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왕이 그것을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끊었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 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 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21(475)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군대 3만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수도) 한성을 에워쌌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대를 나누어 네 길로(4방에서) 군대를 나누어 협공하면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우니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혹 나가 항복하려는 자가 있었다. 왕이 막혀서 도모할 바를 알지 못하여 수 십기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해쳤다. 이에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으로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그 때 중 도림이 응모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제가 도를 알지는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하건대 대왕께서는 신이 현명하지 못하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시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했다.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 好博弈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爲上客 甚親昵之 恨相見之晩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왕이 기뻐하며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이 거짓으로 죄를 도망하는 척 달아나 백제로 들어갔다. 이때 백제왕 근개루는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궁권 문에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함에 들었습니다. 좌우에서 알려 드리기를 원합니다.”했다. 왕이 불러 들여 바둑을 대하니(두어보니) 과연 국수였다. 마침내 그를 높여 상객이라 하였는데 매우 친밀하여 서로 만남이 늦었음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임금()께서 나를 멀리하지 않으시니 은혜를 매우 두터이 해 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이익도 나눔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 말을 올릴 것을 원하니 임금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시험삼아 말해 보라. 만약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스님에게 바라는 바이다.”했다.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四鄰之國 莫敢有覦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竦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攢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王曰 諾 吾將爲之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作宮 樓閣臺榭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隉杌 甚於累卵

도림이 말하기를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준함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사방 이웃의 나라들이 감히 넘겨다보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즉 왕께서는 마땅히 높은 형세와 부유한 업적을 다른 사람의 보고 듣고 두려워하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성곽은 수리되지 않고, 궁실이 수선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임시로 무덤을 쌓아 땅에서 드러나 있습니다. 백성의 집은 여러 번 강의 흐름에 무너지니 신은 대왕을 위하여 취할 수(찬성할 수) 없습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할 것이다.”했다. 이에 모든 나라 사람들을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나아가 그 안에 궁전, 누각과 대사를 지었는데 장엄하고 아름답지 않음이 없었다. 또 큰 돌을 욱리하에서 가져다 곽(외관)을 만들고 아버지의 뼈를 장례하고, 강을 따라 둑을 세워 사성의 동쪽에서 숭산의 북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창고가 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 나라의 위태로움이 알을 쌓은 것보다 심하였다.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盍避難以續國系焉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至是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尔萬年(再曾·古尔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 桀婁·萬年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 와 (장수왕에게) 알리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장차 정벌하려 하여 이에 군대를 장수에게 주었다. 근개루(개로왕)가 그거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기 때문에 여기에 이르렀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여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한들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에서 죽을 것이다. 네가 여기에 있으면 같이 죽을 것이니 이익이 없다. 어찌하여 안을 피해 나라의 계보를 이으려 하지 않는가?”했다. 문주가 이에 목협만치, 조미걸취(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이다. 수서는 목과 협을 두 성이라 하였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와 남쪽으로 갔다. ()에 이르러 고구려 대로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재증과 고이는 복성이다.)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 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 안에서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성을)나와 도망하였다. 고구려 장수 재증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마치고,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이에 그 죄를 헤아리며 묶어 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였다.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국 사람(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하여 숨었다.

 

論曰楚明王之亡也 鄖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辛曰 君討臣 誰敢讐之 君命天也 若死天命 將誰讐桀婁等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郢鞭尸何也楊子法言評此 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 則子胥之狠 不如鄖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논하여 말한다. 초나라 명왕이 도망하였을 때 운공신의 동생 회다 장차 왕을 죽이려하며 말하기를 평왕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했다. 운공신이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성토하는 것을 누가 감히 원수라 하겠는가? 임금의 명은 하늘이다. 만약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하겠는가?”했다. 재증걸루 등이 스스로 죄를 지어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았는데도 적의 군대를 인도하여 이전의 임금을 묶어 해쳤으니 의롭지 않음이 심한 것이다.“했다. 그러한 즉 오자서가 영 땅에 들어 가 시신에 채찍질 하는 것은 어떠한가?”하니 말하기를 양자법언에 이를 비평하여 덕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른 바 덕은 인과 의일 뿐이니 자서의 사나움은 운공의 어짋만 못한 것이다.” 했다.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재증걸루 등이 의롭지 않음을 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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