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四十一
《삼국사기》권41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列傳 第一 金庾信 上
《삼국사기》권41, 열전 제1, 김유신 상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김유신은 왕경인(서울 사람)이다. 12세 조상은 수로인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후한 건무18년(42) 임인에 귀봉에 올라 가락 9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가야라 이름하였다. 후에 고쳐 금관국이라 했다. 그 자손이 서로 이어 9세 구해(혹은 구차휴라 한다.)에 이르니 김유신에게 증조부가 된다.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 말하였다. 그러므로 성을 김이라 했다. 김유신의 비에 또한 “헌원의 후예이고, 소호의 자손이다.”했으니 곧 남가야 시조 수로와 신라는 성을 같이 한다.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할아버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찍이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왕과 그 장수 4명을 잡고, 1만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아버지 서현은 관직이 소판, 대량주도독안무대량주제군사에 이르렀다. 김유신의 비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소판 김서연”이라 하였다. 서현은 혹 고친 이름인지 혹은 서연이 자인지 알지 못하겠다. 의심스럽기 때문에 둘 다 적어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妁而合 舒玄爲萬弩郡太 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 赴萬弩郡 舒玄 庚辰之夜 夢熒惑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況古之賢人有名庾信 盍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처음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 술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여 눈짓하여(추파를 던져) 중매를 기다리지 않고 합하였다.(관계를 맺었다.) 서현이 만노군태수가 괴어 장차 함께 가려하자 숙흘종이 비로서 딸과 서현이 야합한 것을 알고는 그것을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갑자기 우레가 집의 문을 울리자 지키던 자들이 놀라고 어지러워졌다. 만명이 구명으로 나와 마침내 만노군으로 달려갔다. 서현이 경진일 밤 꿈에 형혹과 진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이 또한 신축일 밤에 동자가 금빛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바로 임신하여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 때가 진평왕 건복12년(595), 수나라 문제 개황15년 을묘년이다. 이름을 정학자 하면서 부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에 좋은 꿈을 꾸고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름을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에 일과 월을 따서 이름을 삼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庚과 庾자가 서로 비슷하고, 辰은 신과 소리가 서로 비슷하고, 하물며 옛 사람 가운데 현인으로 유신이란 이름이 있으니 어찌 그것으로서 이름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했다. 마침내 유신이라 이름하였다.(만노군은 지금의 진주이다. 처음 유신의 태를 고산에 감추었기 때문에 지금에도 태령산이라 부른다.)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眞平王建福二十八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侵軼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中嶽石崛 齊戒告天盟誓曰 “敵國無道 爲豺虎 以擾我封埸 略無寧歲 僕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此處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爰來獨處 何也”
공(김유신)은 나이 15세 때 화랑이 되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매우 흡족하게 복종하고 용화향도라 불렀다.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 공의 나이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이 나라를 침범하는 것을 보고 강개하여 구적(도적)을 평정할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 석굴에 들어 가 제계하고 하늘에 맹세하여 말하기를 “적국의 무도하여 승냥이와 범이 되어 우리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니 대략 편안한 해가 없습니다. 제가 일개 미미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재앙과 어지러움을 맑게 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어 나에게 손을 빌려주십시오.”했다. 4일을 머물렀을 때 갑자기 한 노인이 있어 갈옷을 입고 와 말하기를 “이 곳은 독충과 사나운 짐승이 많아 두려워할만한 땅인데 귀한 소년이 이곳에 와 홀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했다.
答曰 “長者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 老人曰 “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憫我精誠 授之方術” 老人默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 乃授以秘法曰 “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김유신이) 답하여 말하기를 “장자(어른)께서는 어디에서 오셨으며 높으신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했다.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머무는 곳 없이 가고 머무는 것이 인연을 따르며, 이름은 곧 난승이라 합니다.”했다. 공이 그것을 듣고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두 번 절하며 나아가 말하기를 “나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아파 여기에 와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엎드려 어르신께 청하오니 나의 정성을 불쌍하게 여기시어 방법을 주십시오.”했다. 노인이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6, 7번에 이르렀다. 노인이 이에 말하기를 “그대는 어린데도 삼국을 합할 마음이 있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닌가?”했다. 이에 비법을 주며 말하기를 “삼가하여 망녕되이 전하지 말라. 만약 의롭지 않은 곳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하는 말을 마치고 작별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 가 바라보았는데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있을 뿐인데 오색처럼 찬란하였다.
建福二十九年 鄰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祈祝 若在中嶽誓辭 仍禱 “天官垂光 降靈於寶劒” 三日夜 虛角二星 光芒赫然下垂 劒若動搖然
건복 29년(진평왕 34년: 612) 이웃 적이 점점 다가오자 공이 더욱 장한 마음을 일으켜 홀로 보검을 가지고 열박산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 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며 기도하였는데 중악에 있을 때 맹세한 말과 같이 하고, 이어서 기도하기를 “천관은 빛을 드리워 보검에 영험함을 내리십시오.”했다. 3일째 되던 날 밤에 허성과 각성 두 별 끝이 빛나게 아래로 드리우니 검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
建福四十六年 己丑秋八月 王遣伊湌任末里 波珍湌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衄 無復鬪心 庾信 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胄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迺跨馬拔劒 跳坑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 파진찬 용춘, 백룡, 소판 대인, 서현 등을 보내 군대를 통솔하고 고구려 낭비성을 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대를 내어 맞아 쳤는데 우리 사람들이 이로움을 잃고 죽은 자가 많았다 무리들의 마음이 꺽이고 오그라들어 다시 싸우려는 마음이 없었다. 김유신은 그 때 중당 당주가 되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습니다. 저는 평생 충효를 하기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들으니 ‘옷깃을 떨쳐야 갖옷이 발라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고 합니다.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하고는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뽑아들고 구덩이를 뛰어 나가 적진에 들어 가 장군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왔다. 우리 군대가 그것을 보고 이김을 타고 적을 쳐서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고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성 안에서 두려워 하여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陁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噬手指 歃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선덕대왕11년 임인(642) 백제가 대량주를 무너뜨리니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이 지아비 품석을 따라 죽었다. 김춘추가 그것을 원망하여 고구려의 군대를 청하여 백제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가려하면서 유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와 공(김유신)은 한 몸으로 나아의 고광이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만약 그 곳에 들어갔다가 해침을 당한다면 곧 공은 그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김유신이 말하기를 “공이 만일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곧 나의 말 자취가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왕의 뜰(조정)을 밟을 것입니다. 만일 이 같지 않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라 사람들을 보겠습니까?”했다. 김춘추가 감동하고 기뻐하며 공(김유신)과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삽혈하고 맹세해 말하기를 “내가 날을 헤아려 보건데 60일이 되면 돌아올 것입니다. 만일 이를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곧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하고는 마침내 서로 헤어졌다.
後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후에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김춘추와 훈신 사간이 고구려를 방문하러 가다 대매현에 이르렀다. 현 사람 두사지 사간이 청포 300보를 주었다. 고구려 국경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태대로 개금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고구려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라의 사신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와서 자못 우리의 형세를 살피고자 하는 것이니 왕께서는 그를 도모하여(죽여) 후환이 없게 하십시오.”했다. 왕이 엉뚱한 질문을 하여 그 대답하기 어려움으로 인하여 욕보이려 하였다. (고구려왕이)일러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이다. 만약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곧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했다.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 相飮酒酣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 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 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謂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分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김춘추가 답하기를 “국가의 토지는 신하가 오로지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은 감히 명을 듣지 못합니다.(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했다. 왕이 노하여 가두고 죽이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다. 김춘추가 청포 300필을 비밀리에 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선도해에게 주었다. 선도해가 음식을 갖추어 와서 서로 술을 마시다 얼큰해지자 희롱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또한 일찍이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들었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토끼의 간을 얻어 약에 합할 수 있으면 곧 고칠 수 있습니다.’했다. 그러나 바다 안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하지 못하였다. 한 거북이 있다가 용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얻을 수 (잡을 수)있습니다.’하고는 마침내 육지에 올라 토끼를 보고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한 섬이 있는데 맑은 샘과 흰돌, 무성한 숲과 맛잇는 과일이 있고, 추위와 더위가 이르지 못하고, 매와 새매가 침범하지 못합니다. 네가 만약 이를 수 있다면 편안히 살아 근심이 없을 것이다.’ 했다. 인하여 토끼를 등 위에 업고 헤엄쳐 2~3리쯤 갔을 때 거북이 돌아보며 토끼에게 말하기를 ‘지금 용왕의 딸이 병에 걸렸는데 반드시 토끼의 간을 약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고루움을 꺼리지 않고, 너를 업고 올 뿐입니다.’했다. 토끼가 말하기를 ‘아! 신명의 후예로 5장을 내어 씻어서 넣을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조금 속에 열이 있고 마음이 답답한 것을 깨닫고 마침내 간과 심장을 내어 씻어서 잠시 암석 아래 두었습니다. 너의 좋은 말을 듣고 빨리 여전히 간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찌 돌아 가 간을 취하지 않으리오. 곧 너는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요 나는 비록 간이 없어도 오히려 살 수 있으니 어찌 둘이 서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다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거북이 그것을 믿고 돌아 가 겨우 언덕에 올랐다. 토끼가 벗어나 풀 속으로 들어가면서 거북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어리석기도 하다. 어찌 간 없이 사는 자가 있겠는가?’했다. 거북이 근심하며 묵묵히 있다가 물러났습니다.(돌아갔다.)” 했다. 김춘추가 그 말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두 고개는 본래 대국의 땅이니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에게 돌려 줄 것을 청하겠습니다. 내 말을 믿지 않으시다면 밝은 해에게 맹서허갰습니다.”했다. 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 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 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 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圖逭死耳”(此與本記眞平王十二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김춘추가 고구려에 들어가고 60일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니 김유신이 나라 안의 용맹한 군사 3천 명을 가려 뽑아 서로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고, 어려움에 임하여 자신을 잊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 한다. 대저 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백 사람을 당해내고, 백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천 명을 당해내고, 천 사람이 목숨을 바치면 만 명을 당해낼 수 있어 천하를 돌아다닐 수(횡행할 수) 있다. 지금 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잡혀있는데 그것을 두려워하여 어려움을 범하지 않겠는가?”했다. 이에 무리들이 말하기를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으로 나갈지라도 감히 장군의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했다. 마침내 왕에게 청하여 가는 기일을 정하였다. 그때 고구려 첩자 중 덕창이 왕에게 고하게 했다. 왕이 앞서 김춘추가 맹서하는 말을 들었고, 또 첩자의 말을 듣고는 감히 다시 억류하지 못하고 후한 예로 대접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국경을 나가자 환송하는 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백제에게 원한을 풀고자하여 와서 군대를 청하였는데 대왕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토지를 구하셨습니다. 이는 신이 오로지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대왕에게 드린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일 뿐입니다.”했다. 이는 신라본기 진평왕 12년(590)의 글과 한 가지 일이나 조금 다르다. 모두 고기에 전하는 바이기 때문에 둘 다 남겨둔다.)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火 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13년(644) 소판이 되었다. 왕이 상장군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가혜, 성열성, 동화성 등 7개성을 치게하여 크게 이겼다. 인하여 가혜진을 열었다.
乙巳正月 歸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出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請公不憚勞遄行 及其未至備之”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于時 其家人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五十步許駐馬 令取漿水於宅 啜之曰 “吾家之水 尙有舊味” 於是 軍衆皆云 “大將軍猶如此 我輩豈以離別骨肉爲恨乎” 及至疆埸 百濟人望我兵衛 不敢迫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을사년(선덕여왕14년 645) 정월에 덜아와 왕을 뵙지도 못하였는데 국경을 지키던 사람이 급히 보고하여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의 매이포성을 공격한다고 했다. 왕이 또 김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임명하고 막게 하였다. 김유신이 명을 듣고 곧 (말에) 멍애를 하고 처자를 보지 않고 (백제군을) 맞아 치니 백제군이 달아났다. 머리를 베어 죽인 것이 2천여 명이었다. 3월에 돌아 와 왕궁에 복명하고, 미처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 군대가 나와 국경에 주둔하여 장타 크게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침범하려한다고 급히 고하였다. 왕이 다시 김유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빨리 가서 그들이 이르지 않았을 때 대비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김유신이 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군대를 훈련시키고 군대를 정비하여 서쪽을 향해 갔다. 그 때 그 잡안 사람들이 문 밖에 나와 오는 것을 기다렸다. 김유신은 그 문을 지나면서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 50보쯤 가다 말을 세우고 집에서 장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 말하기를 “우리 집의 물이 아직 옛 맛이 있다.”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말하기를 “대장군이 오히려 이 같은데 우리들이 어찌 골육을 이별하는 것으로서 원망하겠는가?”했다. 국경에 이르자 백제 사람들이 우리 군대를 바라보고는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대왕이 그것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벼슬과 상을 올려 주었다.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之兆也” 士卒呼吼 聲振天地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 抱火載於風鳶而颺之 若上天然
16년 정미(647)이 해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1년이다. 대신 비담과 염종이 여주(여자 임금)가 잘 다스릴 수 없다 하며 군대를 일으켜 폐하려 하였다. 왕은 대궐 안에서 막았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에 진영을 만들었는데 공격하고 지키기를 10일이 되어도 풀지 않았다.(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 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이 사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별이 떨어진 아래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 하니 이는 자못 너의 여자 임금이 패할 징조일 것이다.”했다.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니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대왕이 그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 몰랐다. 김유신이 왕을 보고 말하기를 “길흉은 항상함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바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붉은 참새가 나타났음에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잡았지만 쇠퇴하였습니다. 고종은 장끼가 울고서도 흥기하였고, 정공은 용이 싸웠으나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와 덕은 요사함을 이기니 곧 별의 변이는 두려워 할 것이 없으니 왕께서는 근심하지 말 것을 청합니다.”했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바람에 연을 날려 하늘에 올라 간 듯이 하였다.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 曰 “天道 則陽剛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
다음날 사람을 시켜 길에서 말하기를 “지난밤에 떨어진 별이 하늘로 돌아갔다.”하게 하여 적군들이 의심하게 하였다. 떠 백마를 죽여 별이 떨어진 자리에서 제사하고 기도하여 말하기를 “천도는 곧 양은 굳세고, 음은 부드럽고, 인도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다. 만약 혹 그것이 바뀌면 곧 큰 어지러움이 된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니 아래가 위를 범하는 것이니 이는 이른 바 난신적자이다. 사람과 신이 같이 미워하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한다. 지금 하늘이 여기에 뜻이 없는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에 별의 변괴를 보이니 이는 신이 의혹하고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생각하건데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 선한 이를 좋게 여기고, 악하게 여기는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 부끄러움을 짓지 마십시오.”했다. 이에 여러 장수와 군사를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였다.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니 추격하여 죽이고 9족을 해쳤다.
冬十月 百濟兵來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겨울 10월 백제 군대가 와서 무산, 감물, 동 잠 등 세 성을 둘러쌌다. 왕이 김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고전하여 기운이 다하였다. 김유신이 비령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오늘 일이 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무리들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했다. 비령자가 절하고 말하기를 “어찌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비령자가 적에게 나아가는데 아들 거진과 가노 합절이 그를 따라 검과 창을 내밀고 힘껏 싸우다 죽었다. 군사들이 바라보고 감동하고 격려하며 다투어 나아가 크게 적병을 무너뜨리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眞德王太和元年申 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 對曰 “庾信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鄰患” 帝曰 “誠君子之國也” 乃詔許 勑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徂征百濟 時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慵惰 如之何”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 王曰 “以小觸大 危將奈何” 對曰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同心同德 今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 王乃許之
진덕왕 태화1년 무신(648) 김춘추가 고구려에서 (군사를)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 나라에 들어 가 군대를 청하였다. 태종황제가 말하기를 “너의 나라 유신의 이름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했다. 대답해 말하기를 “김유신이 비록 조그마한 재능과 지혜가 있으나 만약 천위(당나라의 위엄)의 위엄을 빌맂 않는다면 어찌 이웃나라의 근심을 쉽게 없앨 수 있겠습니까?”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진실로 군자의 나라이다.”하고는 곧 조칙으로 허락하고 장군 소정방으로 하여금 군대 2십만으로 가서 백제를 정벌하게 했다. 그 때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가 되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여러 달이 지나자 압량주 사람들이 김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비방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편안히 산 것이 오래되어 힘이 남음이 있어 한번 싸울만한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떻게 해야 할까?”했다. 김유신이 그것을 듣고 백성들이 쓸 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대왕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진금 민심을 살펴보니 일을 할 만하니 백제를 정벌하는 것으로서 대량주 전투의 복수를 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작은 것으로서(작은 나라가) 큰 것을(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태로움을 장차 어떻게 하려는 것이오?”했다. 김유신이 대답하기를 “군대의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돌아 돌아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왕에게 억조의 사람이 있었으나 마음이 떠나고 덕이 떠나니 주나라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함께하는 것보다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 뜻으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같이하고 있으니 저 백제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했다. 이에 왕이 허락하였다.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 爾裨將八人 見捉於我匍匐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 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 可乎”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言於王曰 “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 乃掘品釋夫妻之骨 櫝而送之 庾信曰 “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許八人生還
마침내 주(압량주)의 군대를 뽑아 훈련시켜 적에게 나아가 대량성(경남 합천) 밖에 이르니 백제의 군대가 맞아 막았다. (김유신이) 거짓으로 이기지 못한척 달아나 옥문곡에 이르렀다. 백제가 그들을 가벼이 여기고 크게 무리를 인솔하여 오니 복병을 일으켜 그 앞과 뒤를 쳐 크게 무너뜨리고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천여 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이에 사자를 백제장군에게 보내 말하기를 “우리의 군주 품석과 그 처 김씨의 뼈를 너희나라 옥 안에 묻혀있고, 지금 너의 비장(부장) 8명이 나에게 잡혀 기면서 살려줄 것을 청하고 있다. 내가 여우와 표범이 죽을 때 고개를 돌린다는(고향을 그리는) 뜻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지금 너희들이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살아있는 8명을 바꿀 수 있겠는가?”했다. 백제 중상(충상이라고도 쓴다.) 좌평이 백제왕에게 말하기를 “신라인의 해골을 머물러 두어도 이익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만약 신라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배반한다면) 우리 8명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곧 굽음(잘못) 그들에게 있고, 곧음(옳음)이 우리에게 이르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했다. 이에 품석 부처의 뼈를 파내어 상자에 담아 보냈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이파리 하나가 떨어진들 무성한 숲에는 덜어내는 것이 없고, 하나의 먼지가 모여도 큰 산에는 더하는 바가 없다.”하고 8명이 살아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遂乘勝入百濟之境 攻拔嶽城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論功增秩伊湌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 庾信對曰 “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其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
마침내 이김을 타고 백제 국경에 들어 가 악성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명을 죽이고, 9천명을 사로잡았다. 공을 논하여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행상주행군대총관으로 삼았다. 또 적의 국경으로 들어 가 진례 등 9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목베고, 포로 600명을 잡았다.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 가 군대 20만을 청해 얻어 와서 김유신을 만나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돌아와 다시 공과 서로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했다. 김유신이 대답해 말하기를 “신이 국가의 위엄과 신령스러움에 의지하여 두 번 백제와 크게 싸워 성 20개를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 베거나 사로잡고,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뼈가 고향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는 모두 하늘의 도움(천행)으로 이루게 된 것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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