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卷第四十二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상서이예부사 집현전대학사 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퇴직한 신하 김부식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傳 第二 金庾信 中
열전 제 2 김유신 중
(太和)二年 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爲五道 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僵屍滿野 流血浮杵 於是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決戰”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庾信等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태화)2년(648)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와서 석토 등 7개 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김유신과 죽지, 진춘, 천존 등의 잔군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니 3군(전군)을 나누어 5도(다섯개 방향)로 하여 백제군을 쳤는데 서로의 승부가 10여 일이 지나도 나지 않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들이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에 절구공이가 떠다닐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먹이는 것으로서 다시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 때 물새가 있어 동쪽으로 날아가면서 김유신의 장막을 지나갔다. 장수와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상서롭지 않게 여겼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이는 괴이한 것이 아니다.”하고는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반드시 백제인이 첩자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알지 못한 척 하고 검문하지 말라.”하고, 또 전령을 시켜 군중을 돌아다니며 “벽을 굳게 하고 움직이지 말고 날이 밝아 원군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결전할 것이다.”하게 했다. 첩자가 그것을 듣고 돌아 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를 더함이 있다 여겨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한꺼번에 덜쳐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장군 달솔 정중과 사졸 100명을 사로잡고, 좌평 은상, 달솔 자경 등 10명과 병졸 8980명을 목 베어 죽이고, 말 1만필, 투구 1800벌을 얻었고, 기타 이와 비슷한 기계를 얻었다. 돌아오는 길에 와서 항복하는 백제 좌편 정복과 병졸 1천명을 만나자 모두 풀어주어 그 가는 곳을 맡겨두었다. 서울(경성)에 이르자 대왕이 문에 맞이하여 수고를 위로함이 매우 두터웠다.
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湌謀 迎春秋伊湌 卽位 是爲太宗大王
永徽六年乙卯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先是 租未𡊠級湌爲夫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知租未𡊠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末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영휘5년(654) 진덕대왕이 돌아가시고 후사가 없었다. 김유신과 재상 알천 이찬이 논의하여 춘추 이찬을 맞아 즉위하게 하니 이가 태종대왕이 된다. 영휘6년 을묘(655) 가을 9월 김유신이 백제에 들어 가 도비천성을 쳐서 이겼다. 이 때 백제으 임금과 신하가 크게 사치하고 깊이 편안함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난과 괴이한 일이 여러 번 나타났다. 김유신이 왕(태종)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그 죄가 걸과 주왕보다 지나칩니다. 이는 진실로 하늘에 순응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정벌해야 할 때입니다.”했다. 이에 앞서 조미곤 급찬이 부산현령이 되었는데 백제에게 포로로 잡혀 죄평 임자의 집 종이 되었다. 일을 하는 것이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써 일찍이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자가 그것을 불쌍히 여기고 의심하지 않아 그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도망쳐 돌아가 백제의 일을 김유신에게 알렸다. 김유신이 조미곤의 충성스럽고 바르다는 것을 알라 쓸만하다 여기고, 이에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임자가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한다하니 더불어 모의하려 생각하였으나 길이 없었다. 그대는 나를 위해 다시 돌아 가 말하라.”했다.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謂 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出遊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𡊠伺間報曰 “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 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 任子聞之 嘿然無言 租未𡊠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何” 租未𡊠驚恐而對 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 我已悉知 可歸告之” 遂來說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愈急幷呑之謀
답하여 말하기를 “공이 저를 현명하지 못하다 하지 않고, 지목하여 시키시니 비록 죽을지라도 후회가 없습니다.”하고는 마침내 다시 백제에 들어 가 임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가 수십 일을 놀면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만 개와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여기에 왔을 뿐입니다.”했다. 임자가 그것을 믿고 질책하지 않았다. 조미곤이 틈을 엿보고 보고해 말하기를 “앞서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였는데 그 실제는 신라에 갔다가 왔습니다. 김유신이 저를 타일러 그대에게 가서 고하여 말하게 하기를 ‘나라가 일어나고 망하는 것을 먼저 알 수는 없다.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한다면 곧 그대는 우리나라에 의지하고, 우리나라가 망한다면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다.’”하게 했습니다. 임자가 그것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물러나 수개월 간 죄를 기다리는데 임자가 불러 물어 말하기를 “네가 앞서 말한 김유신의 말이 어던 것인가?”했다. 조미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대답하기를 앞서 맣한 바와 같이 하였다. 임자가 말하기를 “네가 전하는 바는 내가 이미 모두 알았으니 돌아가 고하라.”했다. 마침내 와서 말하고 겸하여 중외의 일에 미쳤는데 정녕 상세함을 다하였다. 이에 더욱 급하게 병탄할 것을 도모하였다.
太宗大王七年庚申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而營 時入唐請師波珍湌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艘 載兵士會之 太子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沘之城” 太子來告大王 率將士 行至沙羅之停
태종대왕7년 경신(660) 여름 6월 대왕과 태자 법민이 백제를 정벌하려하여 크게 운대를 일으켜 남천에 이르러 진영을 세웠다. 그 때 당나라에 들어 가 군대를 청한 파진찬 김인문과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 유백영이 군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지나 덕물도에 이르러 먼저 종자 문천을 보내 알리게 하였다. 왕이 태자와 장군 김유신, 진주, 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군대를 싣고 만나게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났는데 소정방이 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해로를 따르고, 태자는 육지에 올라 행군하여 7월 10일 백제 왕도(서울) 사비의 성(사비성)에서 만나자.”했다. 태자가 와서 대왕에게 고하고, 장군과 병졸을 통솔하고 행군하여 사라의 정(사라정)에 이르렀다.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伎伐浦 海岸泥濘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唐皇帝聞之 遣使褒嘉之 將軍定方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爲食邑 以酬厥功 如何” 庾信對曰 “大將軍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抃之不暇 而吾等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 遂不受
장군 소정방, 김인문 등이 바다를 따라 기벌포에 들어갔는데 해안이 진흙탕이라 빠져서 갈 수 없었다. 이에 버드나무 자리를 펴서 군대를 내었다. 당나라와 신라가 (군대를)합하여 백제를 쳐 없앴다. 이 전쟁에서 김유신의 공이 많았다. 이에 당나라 황제가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포상하고 칭찬하였다. 장군 소정방이 김유신, 김인문, 양도 세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명을 받아 편의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지금 얻은 백제의 땅을 공들에게 나누어 내려 식읍을 삼아 그 공에 보답하려한다. 어떠한가?”했다. 김유신이 대답해 말하기를 “대장군이 천병(중국의 군대)을 데리고 와 우리 임금의 바람을 따라 작은 나라의 원수를 갚으니 우리 임금과 한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기뻐하며 박수치기 바쁜데 우리들이 홀로 내림을 받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면 의리가 어떻겠습니까?”하고는 마침내 받지 않았다.
唐人旣滅百濟 營於泗沘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羣臣問策 多美公進曰 “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 庾信曰 “斯言可取 請從之” 王曰 “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 庾信曰 “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沘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旣獻俘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謀也”
당나라 사람들이 백제를 없앤 후 사비의 언덕에 진영을 세우고 몰래 신라를 칩범할 것을 논의 하였다. 우리 왕이 그것을 알고 여러 신하에게 계책을 물었다. 다미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이 되게 하여 그 옷을 입게 하고 해치는 자게 되려 한다면 당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칠 것입니다. 인하여 싸운다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했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이 말은 취할만하니 따를 것을 청합니다.”했다.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가 우리를 위하여 적을 없앴는데 도리어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습니까?”했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개가 그 주인을 두려워하나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곧 뭅니다. 어찌 어려움을 만나 스스로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허락하시기를 청합니다.”했다. 당나라 사람들이 우리가 대비하고 있음을 염탐하여 알고는 백제왕과 신료 93명, 병졸 2만 명을 포로로 하여 9월 3일 사비에서 배를 뛰워 돌아갔는데 낭장 유인원 등을 남겨 지키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천자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찌 인하여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는가?”하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며, 아랫사람들이 그 윗사람 섬기기를 부모와 형제 같이 하기 때문에 비록 작은 나라이나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했다.
龍朔元年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湌品日·蘇判文王·大阿湌良圖等爲將軍 往伐之 不克 又遣伊湌欽純(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濟師 高句麗·靺鞨謂 新羅銳兵皆在百濟 內虛可擣 發兵水陸並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庾信聞賊圍城曰 “人力旣竭 陰助可資”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용삭 1년(661)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가 아직 있으니 없애지 않을 수 없다.”하고는 이찬 품일, 소판 문왕, 대아찬 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아 가서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또 이찬 흠순(흠춘이라 쓰기도 한다.), 진흠, 천존, 소판 죽지 등을 보내 군사들을 구원하게 했다. 고구려, 말갈이 신라의 정예 군대가 모두 백제에 있어 안이 비어 찢을(칠 수 있다.)하고는 군대를 내어 물과 육지로 나란히 나아가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그 서쪽에 진영을 만들고,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였다. 공격한지 10일 지나니 성안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또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며 우레가 울렸다 적들이 의심하고 놀라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처음 김유신이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사람의 힘이 이미 다하였으니 신령이 도움을 의뢰할만하다.”하고는 절에 나아가 단을 만들고 기도하였는데 하늘의 변동이 있었다. 모두 지극한 정성에 감응한 바가 있다고 말하였다.
庾信嘗以中秋夜 領子弟立大門外 忽有人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而國有底事乎” 其人俯而不敢對 庾信曰 “無畏也 但以實告” 又不言 庾信告之曰 “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
김유신이 일찍이 한가위 날 밤에 자제를 데리고 문밖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왔다. 김유신이 고구려 첩자인 것으로 알고 불러 앞에 오게 하여 말하기를 “너의 나라에 이일 이루어짐이 있는가?(무슨 일이 있었는가?)”하였다. 그 사람이 엎드려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단지 사실대로 고하라.”했다. 또 말하지 않자 김유신이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 왕이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아 백성들이 기쁘게 모두 그 생업을 즐겁게 여긴다. 지금 네가 그것을 보았으니 가서 너의 나라 사람에게 알리라.”햇다. 마침내 위로하여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김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했다.
六月 唐高宗皇帝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金仁問 受命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文武大王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向高句麗 行次南川州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沘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有司報 “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遮路 不可直前” 於是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而國不龔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 賊高聲唱曰 “雖蕞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 庾信笑曰 “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 乃揮旗鳴鼓攻之 大王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6월 당나라 고종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게하였다. 당에 들어 와 숙위하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와 군대의 기일을 알리게 하고 겸하여 군대를 내어 만나 정벌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이 김유신, 김인문, 문훈 등을 인솔하여 크게 군대를 내어 고구려를 향하다 남천주에 행차하였다.(이르렀다.) (남아)지키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리고 잇던 군대를 사비에서 배를 뛰우고(배에 태우고) 혜포에 이르러 육지에 내려 또한 남천주에 진영을 만들었다. 그 때 유사(담당관청)가 보고하기를 “앞길에 백제의 잔적이 있는데 옹산성에 주둔하여 길을 끊어 곧바로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했다. 이에 김유신이 군대를 진군하여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과 말하게 하였다. “너희 나라를 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국(당나라)의 정벌을 따르는 것이다. 명을 따르는 자에게는 상이 있을 것이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다, 지금 너희들은 홀로 외로운 성(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끝내는 반드시 길에 흩어질 것이니 나와 항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항복한다면) 목숨을 보존할 뿐만 아니라 부귀를 약속할(기약할) 것이다.”했다. 적이 큰 소리로 대답해 말하기를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성이나 군대와 식량이 충분히 갖추어졌고, 사졸들이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우다 죽을지언정 맹세컨대 살아서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했다. 김유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궁박한 새와 곤궁한 짐승이 오히려 스스로 구할 줄 안다하는 것이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했다. 이에 깃발을 흔들고 북을 울리며 공격하게 했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떨쳐 뛰쳐나가는데 칼날을 돌아보지 않았다.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賚將士 劉仁願亦分絹有差 於是饗士秣馬 欲往會唐兵 大王前遣大監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大王問羣臣 “如之何而可” 皆言深入敵境輸粮 勢不得達矣 大王患之咨嗟 庾信前對曰 “臣過叨恩遇 忝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是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 大王前席 執其手下淚曰 “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 庾信旣受命 至懸鼓岑之岫寺齊 ※戒 卽靈室閉戶 獨坐焚香 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吾今之行 得不死矣” 將行 王以手書告庾信 “出疆之後 賞罰專之 可也”
9월 27알 성을 함락시키고 적의 장수를 잡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놓아주었다. 공을 논하여 상을 장수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유인원이 또한 비단을 차이있게 나누어 주었다. 이에 군사와 말에게 먹이고 가서 당나라 군대와 만나려 하였다. 대왕이 앞서 대감 문천을 보내 글을 소장군(소정방)에게 보냈었는데 이에 이르러 복명하여 마침내 소정방의 말을 전하기를 “우리가 명을 받아 만리의 푸른 바다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 바닷가를 출항한지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대왕의 군대가 이르지 않아 식량 길이 끊어져 매우 위태롭습니다. 왕께서는 그것을 도모하십시오.”했다. 대왕이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했다. 모두 깊이 적의 경계에 들어 가 양식을 수송하는 것은 형세상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대왕이 그것을 근심하여 탄식하였다. 김유신이 앞에서 말하기를 “신이 지나친 은혜를 입고 중책을 더럽혔으니 국가의 일에 비록 죽을 지라도 피하지 못합니다. 오늘은 이 늙은 신하가 절개를 다하는 날입니다. 마땅히 적국을 향하는 것으로서 소 장군(소정방)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했다. 대왕이 자리 앞으로 나와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의 어진 도움을 받아 근심이 없앨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이 일이 평소처럼 어긋남이 없다면 곧 공의 공과 덕입니다. 어찌 날로 잊을 수 있겠습니까?”했다. 김유신이 명을 받고 현고잠의 수사에 이르러 제계하고, 영실(신령스러운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향을 사르기를 여러 번 의 낮과 밤을 지낸 후에 나왔다. 스스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오늘 가는 것은 죽지 않을 수 있다.”했다. 장차 가려는데 왕이 손으로 쓴 글로 김유신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경계를 나간 후에는 상과 벌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다.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粮 入高句麗之界 壬戌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諸君若怕死 豈合來此”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䔉壤 庾信與諸將士曰 “麗·濟二國 侵凌我疆埸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虜幼少 以奴使之者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
12월 10일 부장군 인문, 진복, 양도 등 9장군이 군대를 통솔하여 식량을 싣고 고구려 경계로 들어갔다. 임술년(문무왕 2년, 662) 정월 23일 칠중하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오르려 하지 않았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죽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곳에 왔는가?”하고는 먼저 스스로 배에 올라 건너니 여러 장수와 병졸들이 서로 따라 강을 건넜다. 고구려 경계에 들어갔다. 고구려 사람들이 큰 길에서 지키는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험하고 좁은 곳으로 가 산양에 이르렀다. 김유신이 여러 장수들과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해치거나 혹은 장정을 포로로 잡아 베어 죽이거나 어린아이를 사로잡아 종으로 부린 것이 오래되었다,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으로 나아가는 것은 큰 나라(당나라)에 의지하여 두 성을 없애는 것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아뢰는 것으로서 신령스러움을 기대하나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적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반드시 공을 이루고 돌아 갈 것이고, 만약 적을 두려워한다면 곧 어찌 그 짐승에게 잡힘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땅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하지 못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여러 공들에게 바라는 바이다.”했다.
諸將卒皆曰 “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 乃鼓行向平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甚多 至障塞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僵仆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 出汗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 乃喚步騎監裂起曰 “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 裂起曰 “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使令 雖死之日 猶生之年”
여러 장수와 병졸이 모두 말하기를 “장군의 명을 받들어 감히 구차하게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했다. 이에 북을 울리며 평양으로 향하였는데 길에서 적병을 만나면 맞아 쳐 이겼다. 얻은 바의 갑옷과 병기가 매우 많았다. 장새의 험함에 이르렀을 때 맹렬한 추위를 만나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자주 엎어지고 넘어졌다. 김유신 어깨를 드러내고 채찍을 잡아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달렸다. 무리들이 그것을 보고 노력하여 달려나가니 땀이 나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험함을 지나 평양과 거리가 멀지 않았을 때 김유신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의 식량이 부족하여 맹 곤란할 것이니 마땅히 먼저 알려야 할 것이다.”했다. 이에 보기감 열기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 너와 놀아 너의 뜻과 절개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소장군(소정방)에게 뜻을 이르게 하고자 하는데 적당한 사람을 얻기 어렵습니다. 네가 가는 것이 어떠한가?”했다. 열기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현명하지 못하나 외람되이 중군의 직을 맡았으니 하물며 장군의 사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비록 죽는 날일지라도 오히려 살아있는 해와 같이 여기겠습니다.”했다.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庾信等領兵致資粮 已達近境 ” 定方喜以書謝之 庾信等行抵楊隩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營楊隩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餽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粮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마침내 장사 구근 등 15명과 평양으로 나아가 소장군(소정방)을 만나 말하기를 “김유신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식량을 운반하여 이미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했다. 소정방이 기뻐하며 글로 사례하였다. 김유신 등이 양오에 이르러 한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적국의 소식을 모두 말하였다. 삼베와 비단을 내리니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갔다. 김유신이 양오에 진영을 설치하고 한어(중국어)를 이해하는 인문, 양도와 아들 군승 등을 보내 당나라 진영에 도달하여 왕의 명령으로 군량을 보냈음을 알렸다. 소정방은 식량이 다하고, 군대가 피로하여 힘껏 싸울 수 없었는데 식량을 얻자 바로 당나라로 돌아갔다. 양도가 군대 800명을 데리고 바다에 떠 나라로 돌아갔다.
時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以鼓及桴 繫羣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潛行至䕯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分發 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賞賜封邑爵位有差
그 때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군대를 돌아오는 길에 맞아 치려 하였다. 김유신이 북과 북채를 여러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휘둘러 쳐서 소리를 내게하고, 또 풀과 섶을 쌓아 태우게 하여 연기와 불이 끊기지 않게 하고, 한 밤중에 몰래 가서 표하에 이르러 급히 강을 건너 언덕에서 군대를 쉬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쫓아 왔다. 김유신이 만노를 모두 발사하게 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또한 물러났다. 여러 당의 장사들을 이끌고 격려하며 나누어 출발시키고 막아 쳐서 무너뜨렸다.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어 죽였다. 왕이 그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위로하고 이르자 상으로 식읍을 봉해주고 작위를 차이있게 내렸다.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厭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용삭 3년 계해(문무왕 3년 663)에 백제의 여러 성들이 부흥을 도모하여 그 우두머리가 두율(솔)성을 차지하고 왜에 군대를 청해 도움을 삼았다. 대왕이 직접 김유신, 김인문, 천존, 죽지, 등의 장군을 이끌고 7월 17일 정벌하여 웅천주에 가 지키던 유인원과 군대를 합하였다. 8월 13일 두율(솔)성에 이르니 백제 사람과 왜인들이 나와 진을 쳤다. 우리 군대가 힘껏 싸워 그들을 무너뜨리니 백제와 왜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와 너희 나라는 바다를 사이하고 나라가 나뉘어 일찍이 사귐을 맺지 않고 다만 우호를 맺고 서로 방문하여 통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오늘 백제와 악을 함께하여 우리나라를 도모하려 하는가? 지금 너의 군졸들이 우리의 손바닥 안에 있지만 차마 죽일 수 없다. 너는 돌아 가 너의 왕에게 아뢰고, 가고 싶은 대로 가라.”했다. 군대를 나누어 치니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오직 임존성만은 지형이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또한 식량이 많았기 때문에 공격한지 30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사졸들이 피곤해하여 싸우기를 싫어하였다. 대왕이 말하기를 “하나의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나머지 성이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 말할 수 없다.”하고는 곧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 서울에 이르렀다. 김유신에게 밭 500결을 내리고 그 나머지 장수와 군졸들에게도 상을 차등있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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