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二
管晏列傳第二
管仲夷吾者,潁上人也。[一]少時常與鮑叔牙游,鮑叔知其賢。管仲貧困,常欺鮑叔,[二]鮑叔終善遇之,不以為言。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管仲事公子糾。及小白立為桓公,公子糾死,管仲囚焉。鮑叔遂進管仲。[三]管仲既用,任政於齊,[四]齊桓公以霸,九合諸侯,一匡天下,管仲之謀也。
관중 이오는 영상인이다. 어렸을 때 항상 포숙아와 함께 놀았는데 포숙아가 그 어짐을 알았다. 관중이 빈곤하여 항상 포숙아를 속였는데 포숙아는 끝내 그를 잘 대우하여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포숙아는 제나라 공자 소백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자규를 섬겼다. 소백이 즉위하여 환공이 되고 공자 자규는 죽었는데 관중이 이에 가두어졌다. 포숙아가 마침내 관중을 나아가게(천거) 하였다. 관중이 등용된 뒤 제나라에서 정사를 맡아 제나라 환공이 패자(제후의 우두머리)로써 9번 제후를 회합하고 한번 천하를 바로잡았는데 관중의 꾀였다.
[一] 索隱潁,水名。地理志潁水出陽城。漢有潁陽、臨潁二縣,今亦有潁上縣。 正義韋昭云:「夷吾,姬姓之後,管嚴之子敬仲也。」
[一] 【索隱】 潁은 물 이름이다. 했고, 「地理志」에 영수는 양성에서 나온다. 했다. 한 나라에 영양과 임영 두 현이 있었는데 지금 또한 영상현이 있다. 【正義】 위소가 말하였다. “이오는 姬姓의 후예라 하는데 관엄의 아들 경중이다.” 했다.
[二] 索隱呂氏春秋:「管仲與鮑叔同賈南陽,及分財利,而管仲嘗欺鮑叔,多自取。鮑叔知其有母而貧,不以為貪也。」
[二] 【索隱】 『呂氏春秋』에 “관중과 포숙아가 같이 남양에서 장사하여 재물과 이익을 나눔에 이르러 관중이 일찍이 포숙아를 속이고 자기가 많이 가졌다. 포숙아는 그가 어머니가 있음을 알고 탐(욕심)한다 여기지 않았다.
[三] 正義齊世家云:「鮑叔牙曰:『君將治齊,則高傒與叔牙足矣。君且欲霸王,非管夷吾不可。夷吾所居國國重,不可失也。』於是桓公從之。」韋昭云:「鮑叔,齊大夫,姒姓之後,鮑叔之子叔牙也。」
[三] 【正義】 齊 世家에서 말하였다. “포숙아가 말하기를 ‘임금이 장차 제나라를 다스리려 한다면 곧 고혜와 포숙아이면 충분합니다. 임금이 또한 霸王이 되고자 한다면 관이오가 아니면 안됩니다. 관이오가 사는 나라는 나라가 중해지니 잃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이에 환공이 그를 따랐다.” 위소가 말하였다. “포숙은 제나라 대부로 姒姓의 후예이니 포숙의 아들이 숙아이다.” 했다.
[四] 正義管子云:「相齊以九惠之教,一曰老,二曰慈,三曰孤,四曰疾,五曰獨,六曰病,七曰通,八曰賑,九曰絕也。」
[四] 【正義】 『管子』에 말하였다. “9가지 은혜의 가르침으로써 제나라를 도우니 하나는 ‘老’, 둘 ‘慈’, 셋 ‘孤’ 넷째 ‘疾’, 다섯째 ‘獨’, 여섯째 ‘病’, 일곱째 ‘通’, 여덟째 ‘賑’ 아홉째 ‘絶’” 이라 했다.
管仲曰:「吾始困時,嘗與鮑叔賈,[一]分財利多自與,鮑叔不以我為貪,知我貧也。吾嘗為鮑叔謀事而更窮困,鮑叔不以我為愚,知時有利不利也。吾嘗三仕三見逐於君,鮑叔不以我為不肖,知我不遭時也。吾嘗三戰三走,鮑叔不以我怯,知我有老母也。公子糾敗,召忽死之,吾幽囚受辱,鮑叔不以我為無恥,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관중이 말하였다. “내가 처음 어려울 때 일찍이 포숙과 함께 장사하였는데 재물과 이익을 나눌 때 스스로에게 많이 주었으나 포숙이 내가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과 일을 도모하여 문득 궁핍하였으나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 하지 않았다. 때로 이로움과 이롭지 않음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벼슬하여 세 번 임금에게 쫒겨 났을 때 포숙은 내가 현명하지 못하다(不肖) 알지 않았다. 내가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애가 일찍이 세 번 싸워 세 번 달아났는데 포숙은 내가 겁낸다 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고 소홀이 죽자 내가 옥에 가두어져 욕을 받았는데 포숙은 내가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지 않았다. 애가 작은 절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이 천하에 드러나지 않음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자는 부모이고, 나를 아는 자는 포자(포숙)이다.” 했다.
[一] 正義音古。
[一] 【正義】 (賈)는 음이 古이다.
鮑叔既進管仲,以身下之。子孫世祿於齊,有封邑者十餘世[一],常為名大夫。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포숙이 이미 관중을 천거하고는 자신은 아래에 있었다. 자손이 대대로 제나라에서 녹을 받고, 봉읍을 소유한자가 10여 세대였는데 항상 이름있는 대부가 되었다. 천하가 관중의 어짐을 많이 (말)하지 않고, 포숙이 사람을 잘 알아봄을 (말함이) 많았다.
[一] 索隱按:系本云「莊仲山產敬仲夷吾,夷吾產武子鳴,鳴產桓子啟方,啟方產成子孺,孺產莊子盧,盧產悼子其夷,其夷產襄子武,武產景子耐涉,耐涉產微,凡十代」。系譜同。
【索隱】 살펴보니 『系本』에 말하였다. “장중산이 경중이오를 낳고 이오가 무자명을 낳고 무자명이 환자계방을 낳고 계방이 성자유를 낳고, 성자유가 장사로를 낳고 장자로가 도자기이를 낳고, 도자기이가 양자무를 낳고, 양자무가 경자내섭을 낳고, 경자내섭이 산미를 낳아 무릇 10대”라 하니 系譜와 같다.
管仲既任政相齊,[一]以區區之齊在海濱,[二]通貨積財,富國彊兵,與俗同好惡。故其稱曰:[三]「倉廩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上服度則六親固。[四]四維不張,國乃滅亡。[五]下令如流水之原,令順民心。」故論卑而易行。[六]俗之所欲,因而予之;俗之所否,因而去之。
관중이 이미 제나라를 도와(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사를 맡으니 작고 구차한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어 물자를 통하고 재물을 쌓아 나라를 부유하게하고 군대를 강성하게 하여 세속과 함께 좋아하고 미워함을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였다. “창고가 차면 예절을 알고, 의식이 충분하면 영예와 욕됨을 안다. 위로 법도에 복종하면 곧 六親이 견고하고, 4벼리가 펴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멸망한다. 아래로 명령이 마치 흐르는 물의 근원과 같이하면 명령을 백성이 마음으로 따른다. 그러므로 낮추어 쉽게 행함을 논하였다. 세속의 바라는 바로 인하여 그것을 주고, 세속의 막히는 바로 인하여 그것을 제거하였다.
[一] 正義國語云:「齊桓公使鮑叔為相,辭曰:『臣之不若夷吾者五:寬和惠民,不若也;治國家不失其柄,不若也;忠惠可結於百姓,不若也;制禮義可法於四方,不若也;執枹鼓立於軍門,使百姓皆加勇,不若也。』」
[一] 【正義】 『國語』에 말하였다. “제나라 환공이 포숙으로 하여금 재상으로 삼으려 하니 사양하여 말하였다. ‘신이 이오와 같지 못한 것이 5가지입니다. 너그럽고 화하여 백성에게 은혜로운 것이 같지 않고, 나라를 다스림에 그 자루를 잃지 않음이 같지 않으며, 충성과 은혜로 백성을 맺을 수 있는 것이 같지 않으며, 예의를 지어 사방에 본받을 만함이 같지 않으며, 북과 북채를 잡고 군문에 서서 백성으로 하여금 용맹을 더하게 함이 같지 않습니다.’” 했다.
[二] 正義齊國東濱海也。
[二] 【正義】 제나라는 동쪽의 바닷가에 있다.
[三] 索隱是夷吾著書所稱管子者,其書有此言,故略舉其要。
[三] 【索隱】 이는 이오의 저서 『管子』라 말해지는 바의 것이니 그 글에 이 말이 있다. 그러므로 그 요점을 드는 것은 생략한다.
[四] 正義上之服御物有制度,則六親堅固也。六親謂外祖父母一,父母二,姊妹三,妻兄弟之子四,從母之子五,女之子六也。王弼云「父、母、兄、弟、妻、子也」。
[四] 【正義】 윗사람의 의복과 왕실에서 쓰는 물건이 제도에 있으면 곧 六親이 견고하다. 六親은 외조부모가 하나요, 부모가 둘이요, 자매가 셋이요, 처형제의 자식이 넷이요, 從母의 자식이 다섯이요, 딸의 자식이 여섯이다. 왕필이 말하였다. “父, 母, 兄, 弟, 妻, 子이다.
[五] 集解管子曰:「四維,一曰禮,二曰義,三曰廉,四曰恥。」
[五] 【集解】 『管子』에 말하였다. “첫째는 禮, 둘째는 義, 셋째는 廉, 넷째는 恥라 한다.
[六] 正義言為政令卑下鮮少,而百姓易作行也。
[六] 【正義】 政令(정치)을 함에 아랫사람에게 내림이 적어서 백성들이 쉽게 할 수 있음을 말한다.
其為政也,善因禍而為福,轉敗而為功。貴輕重,[一]慎權衡。[二]桓公實怒少姬,[三]南襲蔡,管仲因而伐楚,責包茅不入貢於周室。桓公實北征山戎,而管仲因而令燕修召公之政。於柯之會,[四]桓公欲背曹沫之約,[五]管仲因而信之,[六]諸侯由是歸齊。故曰:「知與之為取,政之寶也。」[七]
정사를 한다는 것은 善은 재앙으로부터 복이 되고, 무너짐을 돌려 공으로 한다. 輕重(돈)을 귀하게 여기고, 權衡(저울)을 삼간다. 환공이 실제로 少姬(사랑하는 여자, 첩)에게 노하여 남쪽으로 蔡아라를 습격하였는데 관중이 인하여 초나라를 치고 包茅가 주나라 왕실에 조공하지 않음을 꾸짖었다. 환공이 실제로 북으로 山戎을 정벌하자 관중은 인하여 연나라로 하여금 소공의 정사를 닦게 하였다. 柯의 회맹에서 환공이 曹末의 약속을 배반하고자 하였는데 관중이 그것을 지키게 하니 제후들이 이로 말미암아 제나라에 귀의 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줌을 알아서 취하는 것이 정사의 보배이다.” 한 것이다.
[一] 索隱輕重謂錢也。今管子有輕重篇。
[一] 【索隱】 輕重은 돈을 말한다. 지금 『管子』에 輕重篇이 있다.
[二] 正義輕重謂恥辱也,權衡謂得失也。有恥辱甚貴重之,有得失甚戒慎之。
[二] 【正義】 輕重은 恥辱을 이름이다. 權衡은 得失을 이름이다. 치욕이 있으면 귀중하게 여기고, 득실이 있으면 매우 경계하고 조심한다.
[三] 索隱按:謂怒蕩舟之姬,歸而未絕,蔡人嫁之。
[三] 【索隱】 살펴보니 배를 움직여 노하게 함의 여자를 이르니 돌아가 끊지 않았는데 채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집보냈다.
[四] 正義今齊州東阿也。
[四] 【正義】 지금의 제주 동아이다.
[五] 索隱沫音昧,亦音末。左傳作「曹劌」。 正義沫,莫葛反。
[五] 【索隱】 沫의 음은 昧이고, 또 음이 末이다. 『左傳』에는 ‘曹劌’ 라고 썼다. 【正義】 沫은 莫과 葛의 反이다.
[六] 正義以劫許之,歸魯侵地。
[六] 【正義】 겁을 주는 것으로써 노나라의 침탈당한 땅을 돌려주기를 허락하였다.
[七] 索隱老子曰「將欲取之,必固與之」,是知此為政之所寶也。
[七] 【索隱】 『老子』에 말하였다. “장차 그것을 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준다.”하니 이것이 정사를 하는 보배로운 바임을 아는 것이다.
管仲富擬於公室,有三歸、反坫,[一]齊人不以為侈。管仲卒,[二]齊國遵其政,常彊於諸侯。後百餘年而有晏子焉。
관중의 부가 公室에 견줄 만하고, 세 번 결혼하고 反坫(제 후가 사용하는 대)이 있었으되 제나라 사람들이 사치하다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죽자 제나라가 그 정사를 따르고 제후들 중에 강성하였다. 100여년이 지난 후에 晏子가 있었다.
[一] 正義三歸,三姓女也。婦人謂嫁曰歸。
[一] 【正義】 三歸는 세 성의 여자이다. 부인이 시집가는 것을 歸라 한다.
[二] 正義括地志云:「管仲冢在青州臨淄縣南二十一里牛山之阿。說苑云『齊桓公使管仲治國,管仲對曰:「賤不能臨貴。」桓公以為上卿,而國不治,曰:「何故?」管仲對曰:「貧不能使富。」桓公賜之齊巿租,而國不治。桓公曰:「何故?」對曰:「疏不能制近。」桓公立以為仲父,齊國大安,而遂霸天下。』孔子曰:『管仲之賢而不得此三權者,亦不能使其君南面而稱伯。』」
[二] 【正義】 『括地志』에 “관중의 무덤이 청주 임치현 남쪽 21리 우산의 언덕에 있다.” 하고, 『說苑』에 “제나라 환공이 관중으로 하여금 나라를 다스리게 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비천한 이가 귀한 이에게 임할 수 없습니다.’ 하니 환공이 上卿으로 삼음에도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다. (환공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인가?’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소원한 이가 가까운 이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했다. 환공이 세워 仲父로 삼으니 제나라가 크게 편안해지고 마침내 천하에 霸者가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관중의 현명함으로 이 三權(입법, 사법, 행정의 권력)을 얻지 못한 자는 또한 그 임금을 남면하게 하여 우두머리를 일컫게 할 수 없다.” 했다.
晏平仲嬰者,萊之夷維人也。[一]事齊靈公、莊公、景公[二],以節儉力行重於齊。既相齊,食不重肉,妾不衣帛。其在朝,君語及之,即危言;[三]語不及之,即危行。[四]國有道,即順命;無道,即衡命。[五]以此三世顯名於諸侯。
晏平仲 嬰은 萊의 이유인이다. 제나라 영공, 장공, 경공을 섬겼는데 절약과 검소함, 힘써 행함으로써 중용되었다.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서 먹는 것은 고기를 중히하지 않았고, 첩은 비단 옷을 입지 않았다. 조정에 있어서는 임금의 말이 미치면 곧 위태로운 듯이 말하고, 말이 미치지 않으면 곧 위태로운 듯이 행동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곧 명을 순히(따르고)하고, 도가 없으면 곧 명을 저울질 하였으니 이로써 3세대를 제후들 중에 이름을 드러내었다.
[一] 集解劉向別錄曰:「萊者,今東萊地也。」 索隱名嬰,平謚,仲字。父桓子名弱也。正義晏氏齊記云齊城三百里有夷安,即晏平仲之邑。漢為夷安縣,屬高密國。應劭云故萊夷維邑。
[一] 【集解】 『劉向別錄』에 말하기를 “萊는 지금의 東萊 땅이다.” 했다. 【索隱】 이름은 嬰이고, 平은 시호이며 仲은 자이다. 아버지는 桓子이니 이름은 弱이다. 【正義】 『安氏齊記』에 “제나라 성 300백리에 夷安이 있으니 곧 찬평중의 읍이다. 한 나라가 이안현으로 하고 고밀국에 속한다.”고 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날의 萊는 이유읍이다.” 했다.
[二] 索隱按:系家及系本靈公名環,莊公名光,景公名杵臼也。
[二] 【索隱】 살펴보니 “系家와 系本에 영공의 이름은 環이고, 장공의 이름은 光이며, 경공의 이름은 저구이다.”
[三] 正義謂己謙讓,非云功能。
[三] 【正義】 스스로 겸양하여 공능을 말하지 않음을 말한다.
[四] 正義行,下孟反。謂君不知己,增脩業行,畏責及也。
[四] 【正義】 行은 下와 孟의 反이다.
[五] 正義衡,秤也。謂國無道制秤量之,可行即行。
[五] 【正義】 衡은 秤(저울질)이다. 나라에 도가 없으면 제재하고 저울질하여 행할 만하면 곧 행하였다.
越石父賢,在縲紲中。[一]晏子出,遭之塗,解左驂贖之,載歸。弗謝,入閨。久之,越石父請絕。晏子戄然,[二]攝衣冠謝曰:「嬰雖不仁,免子於厄,何子求絕之速也?」石父曰:「不然。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三]方吾在縲紲中,彼不知我也。夫子既已感寤而贖我,是知己;知己而無禮,固不如在縲紲之中。」晏子於是延入為上客。
조석보는 현인이었는데 죄인으로 새끼에 묶여있었다. 안자가 나가다 길에서 그를 만나 수레 왼쪽 곁말을 풀어 속죄하고 수레에 태워 갔다. 인사하지 않고 도장방(작은 문)에 들어가 갔다. 오래 후에 월석보가 절교를 청하니 안자가 놀라 의관을 정돈하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어진 것은 아니나 그대를 횡액을 면하게 하였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절교를 구하기를 빠르게 합니까?” 했다. 조석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를 내치고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믿는다고 합니다. 막 내가 죄인으로 묶여 있을 때는 그거 나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부자(안자)는 나를 느끼고 깨달아서 나를 속죄하여 준 것은 이는 나를 알아주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되 예가 없으니 진실로 죄인으로 묶여 있는 것만 같지 않습니다.” 했다. 안자자 이에 함께 들어가 上客으로 삼았다.
[一] 正義縲音力追反。縲,黑索也。紲,繫也。晏子春秋云:「晏子之晉,至中牟,睹獘冠反裘負薪,息於途側。晏子問曰:『何者?』對曰:『我石父也。苟免飢凍,為人臣僕。』晏子解左驂贖之,載與俱歸。」按:與此文小異也。
[一] 【正義】 縲는 음이 力 과 追 의 反이다. 縲는 검은 새끼이다. 紲은 매는 것이다. 『晏子春秋』에 “안자가 진나라에 가다 중모에 이르러 해진 관을 쓰고 갓옷을 뒤집어 입고 섶을 진 사람이 길옆에서 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자가 말하기를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석보이다. 구차히 주림과 얼어 죽음을 면하고 다른 사람의 臣僕이 되었다.’ 하였다. 안자가 수레 왼쪽 말을 풀어 속죄하고는 태워 함께 돌아왔다.” 했다. 살펴보니 이것과는 글이 조금 다르다.
[二] 正義戄,床縛反。
[二] 【正義】 戄은 床과 縛의 反이다.
[三] 索隱信讀曰申,古周禮皆然也。申於知己謂以彼知我而我志獲申。
[三] 【索隱】 信은 申이라 읽는다. 옛 『周禮』 모두 그렇다. 申於知己는 그가 나를 알아줌으로써 내가 거듭 뜻을 얻음을 말한다.
晏子為齊相,出,其御之妻從門閒而闚其夫。其夫為相御,擁大蓋,策駟馬,意氣揚揚甚自得也。既而歸,其妻請去。夫問其故。妻曰:「晏子長不滿六尺,身相齊國,名顯諸侯。今者妾觀其出,志念深矣,常有以自下者。今子長八尺,乃為人僕御,然子之意自以為足,妾是以求去也。」其後夫自抑損。晏子怪而問之,御以實對。晏子薦以為大夫。[一]
안자가 제나라 재상이 되어 나가는데 그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그 남편을 엿보았다. 그 남편이 재상의 마부가 되어 큰 덮개를 안고 수레 말을 채직질 하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해했다. 이윽고 돌아오자 그 처가 떠말 것을 청하였다. 그 남편이 그 이유를 묻자 처가 말하기를 “안자의 키는 6자를 채우지 못하였으되 제나라 재상으로 미름이 제후들 가운데 드러났다. 지금 내가 그 나가는 것을 보니 뜻과 생각이 깊고, 항상 스스로 맞춤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대는 키가 8자인데 다른 사람을 위한 마부가 되었음에도 그대의 뜻이 스스로 만족해 합니다. 나는 이 때문에 떠날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했다.” 그 후에 남편이 스스로 자만심을 누르고 겸양하였다. 안자가 괴상하게 여겨 그것을 물으니 마부가 실제대로 대답하였다. 안자가 그를 천거하여 대부로 삼았다.
[一] 集解皇覽曰:「晏子冢在臨菑城南淄水南桓公冢西北。」 正義注皇覽云:「晏子冢在臨淄城南菑水南桓公冢西北。」括地志云:「齊桓公墓在青州臨淄縣東南二十三里鼎足上。」又云:「齊晏嬰冢在齊子城北門外。晏子云『吾生近市,死豈易吾志』。乃葬故宅後,人名曰清節里。」按:恐皇覽誤,乃管仲冢也。
[一] 【集解】 『皇覽』에 “안자의 무덤은 임치성 남쪽 환공의 무덤 북쪽에 있다.” 【正義】 注 『皇覽』에 “안자의 무덤은 임치성 남쪽 치수 남쪽 환공의 무덤 서북쪽에 있다.” 『括地志』에 “제나라 환공의 묘는 청주 임치현 동남쪽 23리 정족 위에 있다.” 하고 또 “제나라 안영의 무덤이 제자성 북문 밖에 있다.” 안자가 말하기를 “내가 도시 가까이서 살았는데 죽음이 어찌 내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하므로 옛 집 뒤에 장례하였다. 사람들이 청절리라 불렀다. 살펴보니 아마도 『皇覽』의 잘못일 것이니 곧 관중의 무덤이다.
太史公曰:吾讀管氏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一]及晏子春秋,[二]詳哉其言之也。既見其著書,欲觀其行事,故次其傳。至其書,世多有之,是以不論,論其軼事。[三]
태사공이 말하였다. “내가 관씨의 牧民. 山高, 輕重, 九府와 『晏子春秋』를 읽어보니 자세하게 그것을 말하였다. 이미 그 저서를 보고 그 일을 행함을 관찰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 전을 차례 하였다. 그 글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많이 있기 때문에 논하지 않고, 그 알려지지 않은 숨은 사실을 논하였다.
[一] 集解劉向別錄曰:「九府書民閒無有。山高一名形勢。」 索隱皆管氏所著書篇名也。按:九府,蓋錢之府藏,其書論鑄錢之輕重,故云輕重九府。餘如別錄之說。正義七略云管子十八篇,在法家。
[一] 【集解】 『劉向別錄』에 “「九府」의 글은 민간에 있지 않다. 『山高』는 일명 形勢라 한다.” 【索隱】 모두 관씨(관자)가 지은 바의 책의 편명이다. 살피건데 「九府」는 대개 돈을 창고에 감추는 것이니 그 글이 논한 돈을 주조하는 경중을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輕重九府’라 한 것이다. 나머지는 별록의 설과 같다. 【正義】 『七略』에 『管子』 18편은 法家에 있다.
[二] 索隱按:嬰所著書名晏子春秋。今其書有七篇, 故下云「其書世多有」也。正義七略云晏子春秋七篇,在儒家。
[二] 【索隱】 안영이 지은 서명은 『晏子春秋』이다. 지금 그 글 7편이 있다. 그러므로 ‘그 글이 세상에 많이 있다.’ 한 것이다. 【正義】 『七略』에 『晏子春秋』 7편은 儒家에 있다고 한다.
[三] 正義軼音逸。
[三] 【正義】 軼은 음이 逸이다.
管仲世所謂賢臣,然孔子小之。豈以為周道衰微,桓公既賢,而不勉之至王,乃稱霸哉?[一]語曰「將順其美,匡救其惡,故上下能相親也」。[二]豈管仲之謂乎?
관중은 세상에 이른바 어진(현명한) 신하라 하나 공자가 그를 소인으로 여겼던 것은 주나라의 도는 쇠퇴하여 미미하고, 환공이 어진데도 그를 권면하여 왕도에 이르지 못하고 覇道를 일컫게 하였는가? 한 것이다. 『論語』에 “장차 그 아름다움을 順히(도리를 따르다.)하여 그 악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친할 수 있었다.” 하니 어찌 관중을 이름이겠는가?
[一] 正義言管仲世所謂賢臣,孔子所以小之者,蓋以為周道衰,桓公賢主,管仲何不勸勉輔弼至於帝王,乃自稱霸主哉?故孔子小之云。蓋為前疑夫子小管仲為此。
[一] 【正義】 관중을 세상에서 이른바 賢臣이라 말하였는데 공자가 소인이라 한 까닭은 대개 주나라의 도가 쇠퇴하고 환공은 어진 군주인데 관중이 어찌하여 권면하고 보필하여 제왕에 이르게 하지 못하고 곧 스스로 霸主를 일컫게 하였는가? 그러므로 공자가 소인이라 말한 것이다. 대개 앞서 부자(공자)가 관중을 소인이라 한 것을 의심하여 이 (말을)를 한 것이다.
[二] 正義言管仲相齊,順百姓之美,匡救國家之惡, 令君臣百姓相親者,是管之能也。
[二] 【正義】 관중이 제 나라의 재상이 되어 백성의 아름다움을 순히 하고, 국가의 악을 바로잡아 구하며, 군신과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친하게 한 것은 이는 관중의 재능이다.
方晏子伏莊公尸哭之,成禮然後去,[一]豈所謂「見義不為無勇」者邪?至其諫說,犯君之顏,此所謂「進思盡忠,退思補過」者哉!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二]
바야흐로 안자가 장공의 시신에 엎드려 곡하고 예를 이룬 후에 떠났으니 어 찌 이른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한 자이겠는가? 그 간하는 말에 이르러 임금의 얼굴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나아가면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하는” 자일 것이라! 가령 안자가 살아있다면 내가 비록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더라도 기뻐하고 사모하는 바일 것이다.
[一] 索隱按:左傳崔杼弒莊公,晏嬰入,枕莊公尸股而哭之,成禮而出,崔杼欲殺之是也。
[一] 【索隱】 살펴보니 『左傳』에 “최저가 장공을 죽이니 안영이 들어가 장공의 시신 다리에 임하여 곡하여 예를 이룬 후 나가자 최저가 그를 죽이려 했다.” 는 것이 이것이다.
[二] 索隱太史公之羨慕仰企平仲之行,假令晏生在世,己雖與之為僕隸,為之執鞭,亦所忻慕。其好賢樂善如此。賢哉良史,可以示人臣之炯戒也。
[二] 【索隱】 태사공의 평중의 행실을 사모하고 우러러 바랐는데 가령 안생이 세상에 있었다면 자기가 비록 그와 더불어 마부와 종이 되어 말채찍을 잡게 될지라도 또한 기쁘게 사모할 바이다. 그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이같이 하였다. 어질도다 훌륭한 사관이여 다른 사람의 신하 된 자의 밝은 경계를 보였다.
【索隱述贊】夷吾成霸,平仲稱賢。粟乃實廩,豆不掩肩。轉禍為福,危言獲全。孔賴左衽,史忻執鞭。成禮而去,人望存焉。
【索隱述贊】 이오는 패자를 이루었고, 평중은 현인이라 일컬어졌다. 곡식은 창고에 찼으나 제기는 어깨를 가리지 못하였다.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고, 솔직한 말로 온전함을 얻었다. 공뢰는 옷깃을 좌측으로 하고, 사관은 기쁘게 채찍을 잡았다. 예를 이루고 떠나니 사람들이 생존해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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