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四
司馬穰苴列傳第四
司馬穰苴者,[一]田完之苗裔也。齊景公時,晉伐阿、甄[二],而燕侵河上,[三]齊師敗績。景公患之。晏嬰乃薦田穰苴曰:「穰苴雖田氏庶孽,然其人文能附眾,武能威敵,願君試之。」
사마양저는 田完의 후예이다. 제나라 경공 때 晉나라가 阿와 甄을 정벌하는데 연나라가 황하 남쪽을 침략하여 제나라가 패하였다. 경공이 그것을 근심하였다. 안영이 이에 전양저를 추천하여 말하기를 “양저가 비록 전씨의 서얼이나 그 사람의 文은 여러 사람을 붙일 만하고 武는 적을 두렵게 할수 있으니 임금께서 그를 시험하기를 원합니다.” 했다.
[一] 索隱按:穰苴,名,田氏之族,為大司馬,故曰司馬穰苴。正義穰音若羊反。苴音子徐反。田穰苴為司馬官,主兵。
[一] 【索隱】 살펴보니 양저는 이름이고, 전씨의 족속이니 대사마가 되었다. 그러므로 사마양저라 한 것이다. 【正義】 穰의 음은 若과 羊의 反이다. 苴의 음은 子와 徐의 反이다. 전양저가 사마의 관이 되어 군대를 주관한 것이다.
[二] 索隱按:阿、甄皆齊邑。晉太康地記曰「阿即東阿也」。地理志云甄城縣屬濟陰也。
[二] 【索隱】 살펴보니 阿와 甄은 모두 제나라의 읍이다. 晉나라 『太康地記』 에 “阿 는 곧 東阿이다.” 했다. 「地理志」에 “견성현은 濟陰에 속한다.” 했다.
景公召穰苴,與語兵事,大說之,以為將軍,[四]將兵扞燕晉之師。穰苴曰:「臣素卑賤,君擢之閭伍之中,加之大夫之上,士卒未附,百姓不信,人微權輕,願得君之寵臣,國之所尊,以監軍,乃可。」
경공이 양저를 불러 함께 군대의 일을 말해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장군으로 삼으니 군대를 거느리고 연나라와 진나라의 군대를 막았다. 양저가 말하기를 “신은 평소 비천한데도 임금이 군대의 안에 발탁하여 대부의 윗자리를 더하였는데 사졸은 붙지 않고 백성은 믿지 않으니 사람들은 미미하고 권세는 가볍습니다. 원하건데 임금의 총애하는 신하를 얻고, 나라의 높은 바로써 군대를 감독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했다.
[三] 正義河上,黃河南岸地,即滄德二州北界。
[三] 【正義】 河上은 황하의 남쪽 물가이니 곧 창주, 덕주 2주의 북쪽 경계이다.
[四] 索隱謂命之為將,以將軍也。將音即匠反。遂以將軍為官名。故尸子曰「十萬之師,無將軍則亂」。六國時有其官。
[四] 【索隱】 장군으로 명하여 장군이 됨을 말한 것이다. 將의 음은 卽과 匠의 反이니 마침내 장군으로써 관명을 삼았다. 그러므로 尸子가 말하기를 “십만의 군대는 장군이 없으면 곧 어지러워진다.” 했다. 六國시대에 그 관직이 있었다.
於是景公許之,使莊賈往。穰苴既辭,與莊賈約曰:「旦日日中會於軍門。」[五]穰苴先馳至軍,立表下漏[六]待賈。賈素驕貴,以為將己之軍而己為監,不甚急;[七]親戚左右送之,留飲。日中而賈不至。穰苴則仆表決漏,[八]入,行軍勒兵,申明約束。約束既定,夕時,莊賈乃至。
이에 경공이 허락하니 장가로 하여금 가게 했다. 양저가 이미 말을 하고는 장가와 함께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일 정오 때 때 군문에서 만나자.”고 했다. 양저가 먼저 말을 달려 군대에 이르러 (시각을 재는)나무를 세우고, 물로 시각을 재어 표시하고는 장가를 기다렸다. 장가가 평소에 교만하고 귀하게 여겨 자기의 군대를 거느리고 자기가 감독한다. 여겨서 매우 급히 하지 않고, 친척과 좌우가 그를 송별하는 자리에 머물러 술을 마셨다. 정오임에도 장가가 이르지 않았다. 양저가 곧 표시한 나무와 물로 시각을 재는 기구를 눕히고 들어가 군대를 움직이고, 병사를 다스려 약속을 거듭 밝혔다. 약속이 이미 정해지고 저녁 때 장가가 이르렀다.
[五] 索隱按:旦日謂明日。日中時期會於軍門也。
[五] 【索隱】 살펴보니 旦日은 다음 날을 말한다. 정오에 군문에서 만나기를 기약한 것이다.
[六] 索隱按:立表謂立木為表以視日景,下漏謂下漏水以知刻數也。
[六] 【索隱】 살펴보니 立表는 나무를 세워 표시하는 것으로써 햇빛을 보는 것이다. 下漏는 물을 아래로 새 나오게 하여 그 시각의 수를 아는 것이다.
[七] 正義己音紀。監,甲暫反。
[七] 【正義】 己의 음은 紀이다. 監은 甲과 暫의 反이다.
[八] 索隱仆音赴。按:仆者,臥其表也。決漏謂決去壼中漏水。以賈失期,過日中故也。
[八] 【索隱】 仆의 음은 赴이다. 살피건데 仆는 그 표시를 눕히는 것이다. 決漏는 단지 안의 물을 새게하는 것이다. 장가가 약속을 어겨 정오가 지났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穰苴曰:「何後期為?」賈謝曰:「不佞大夫親戚送之,故留。」穰苴曰:「將受命之日則忘其家,臨軍約束則忘其親,援枹[九]鼓之急則忘其身。今敵國深侵,邦內騷動,士卒暴露於境,君寢不安席,食不甘味,百姓之命皆懸於君,何謂相送乎!」召軍正問曰:「軍法期而後至者云何?」
양저가 “어찌하여 기약함에 늦었습니까?” 하니 장가가 사과하며 말하기를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와 친척이 송별하였기 때문에 늦었습니다.” 했다. 양저가 말하기를 “장수가 명을 받은 날은 곧 그 집을 잊습니다. 군대에 임하여 약속은 곧 그 어버이를 잊고, 북채를 당겨 북믈 침이 급하면 그 몸을 잊습니다. 지금 적국이 깊이 침략하여 나라 안이 소란스럽게 움직이고, 사졸이 경계에 드러났고, 임금은 잠을 펴안한 자리에서 자지 않으며, 밥은 맛이 달지 않고, 백성의 목숨이 모두 그대에게 달려있는데 어찌 서로 송별함을 말하는가!” 하고는 군정을 불러 묻기를 “군법에 기약하여 늦게 이르는 자는 어떻게 하는가?” 했다.
[九] 索隱上音袁,下音孚。 正義援,作「操」。枹音孚,謂鼓挺也。
[九] 【索隱】 위의 음은 袁이고, 아래의 음은 孚이다. 【正義】 援은 ‘操’라 썼다. 枹는 음이 孚이니 북채를 말한다.
對曰:「當斬。」莊賈懼,使人馳報景公,請救。既往,未及反,於是遂斬莊賈以徇三軍。三軍之士皆振慄。久之,景公遣使者持節赦賈,馳入軍中。穰苴曰:「將在軍,君令有所不受。」[一0]問軍正曰:「馳三軍法何?」正曰:「當斬。」使者大懼。穰苴曰:「君之使不可殺之。」乃斬其僕,車之左駙,馬之左驂,[一一]以徇三軍。[一二]遣使者還報,然後行。
대답하기를 “머리를 벰에 해당합니다.” 했다. 장가가 두려워하여 사람을 시켜 말을 달려 경공에게 보고하고 구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에 마침내 장가의 머리를 베어 삼군에 돌렸다. 삼군의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얼마 후 경공이 사자에게 지절을 주어 보내 장가를 용서하게 하니 말을 달려 군중에 들어갔다. 양저가 말하기를 “장수가 군대 안에 있을 때 임금의 령도 받지 않는 바가 있다.”하고는 군정에게 물어 말하기를 “삼군에서 말을 달리는 법은 어떠한가?” 군정이 말하기를 “목을 벰에 해당합니다.” 했다. 사자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양저가 말하기를 “임금의 사자를 죽일 수는 없다”하고는 그 종과 수레의 양쪽 가장자리에 덧댄 나무와 말의 왼쪽 말을 베고는 삼군을 돌아다니게 하였다. 보낸 사자는 돌아가 보고하게 한 후 갔다.
[一0] 集解魏武帝曰:「苟便於事,不拘君命。」
[一0] 【集解】 위나라 무제가 말하기를 “만일 일에 편하다면 임금의 명에 구애 받지 않는다.” 했다.
[一一] 索隱按:謂斬其使者之僕,及車之左駙。駙,當作「軵」,並音附,謂車循外立木,承重較之材。又斬其馬之左驂,以御者在左故也。正義軵音附。劉伯莊云:「駙者,箱外之立木,承重校者。」
[一一] 【索隱】 살피건데 그 사자의 종과 수레의 왼쪽에 붙인 것을 베는 것을 말한다. 駙는 마땅히 軵라고 써야 하고, 나란히 음은 附이니 수레 밖을 따라 세운 나무를 말하니 수레 옆의 가로대 무게를 받치는 재목이다. 또 그 말의 왼쪽 참마를 벤 것은 마부가 왼쪽에 있기 때문이다. 【正義】 軵의 음은 附 이다. 유백장이 말하기를 “駙는 상자 밖의 세운 나무로 수레 옆의 가로대 무게를 받치는 것이다.” 했다.
[一二] 正義徇,行示也。
[一二] 【正義】 循은 가서 보이는 것이다.
士卒次舍井灶飲食問疾醫藥,身自拊循之。悉取將軍之資糧享士卒,身與士卒平分糧食。最比[一三]其羸弱者,三日而後勒兵。病者皆求行,爭奮出為之赴戰。晉師聞之,為罷去。燕師聞之,度水而解。[一四]於是追擊之,遂取所亡封內故境而引兵歸。未至國,釋兵旅,解約束,誓盟而後入邑。景公與諸大夫郊迎,勞師成禮,然後反歸寢。既見穰苴,尊為大司馬。田氏日以益尊於齊。
막사와 부엌, 음식, 질병의 위문, 의약을 몸소 스스로 어루만지고 따랐다. 모두 장군의 비용과 식량을 취하여 士卒을 대접하고, 자신은 사졸과 양식을 고르게 나누었는데 가장 병약한 자에 견주었다. 삼일이 지난 후 군대를 다스리니 병든 자들이 모두 가기를 구하여 다투어 분발하여 나가 싸움에 달려 나갔다. 진나라 군대가 그것을 듣고 군대를 거두어 갔다. 연나라 군대가 그것을 듣고 물을 건너 풀었다. 이에 추격하여 마침내 잃었던 바의 영역 안의 옛 경계를 취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나라에 이르지 않아서 군대를 풀고(해산하고), 약속을 풀어 맹서한 후 읍에 들어갔다. 경공이 여러 대부들과 교외에서 맞이하여 군사들을 위로하는 예를 이룬 후 돌아가 쉬게 했다. 양저를 보고 높여서 대사마를 삼았다. 전씨가 날로 더욱 제나라에서 높아졌다.
[一三] 正義比音(卑)必耳反。
[一三] 【正義】 比의 음은 (卑) 必과 耳의 反이다.
[一四] 正義度黃河水北去而解。
[一四] 【正義】 황하의 물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푼 것이다.
已而大夫鮑氏、高、國之屬害之,譖於景公。景公退穰苴,苴發疾而死。田乞、田豹之徒〔一〕由此怨高、國等。其後及田常殺簡公,盡滅高子、國子之族。至常曾孫和,因自立為齊威王,〔二〕用兵行威,大放穰苴之法,〔三〕而諸侯朝齊。
그 후 대부 포씨, 고씨, 국씨의 등속이 그를 해쳐서 경공에게 참소하였다. 경공이 양저를 물리니 양저가 병이 나서 죽었다. 전걸, 전표의무리가 이로 말미암아 고씨, 국씨 등을 원망하였다. 그 후 정상이 간공을 죽임에 이르러 고자, 국자의 족속을 모두 없앴다. 전상의 증손 화에 이르러 스스로 제 나라 위왕을 세움으로 인하여 군대를 쓰는 것과 위엄을 행하면서 크게 양저의 법을 따라서 제후들이 제나라에 조회하였다.
[一] 索隱田乞,田僖子也。豹亦僖子之族。
[一] 【索隱】 전걸은 전희의 아들이다. 표가 또한 희의 자식의 피붙이이다.
[二] 索隱按:此文誤也,當云田和自立,至其孫,因號為齊威王。故系家云田和自立,號太公,其孫因齊,號為威王。
[二] 【索隱】 살피건데 이 글은 잘못이다. 마땅히 ‘전화가 스스로 지위에 올랐는데 그 손자에 이르러 제나라 위왕이라 이름하였다.’ 해야 한다. 그러므로 系家에서 “ 전화가 자립하여 태공이라 이름하고 그 손자가 제나라로 인하여 위왕이라 이름 한 것이다.
[三] 正義放,方往反。
[三] 【正義】 放은 方과 往 의 反이다.
齊威王使大夫追論古者司馬兵法而附穰苴於其中,因號曰司馬穰苴兵法。
제나라 위왕이 대부로 하여금 옛날 사마병법을 추론하게 하여 그 안에 양저를 붙이고 “사마양저병법”이라 했다.
太史公曰:余讀司馬兵法,閎廓深遠,雖三代征伐,未能竟其義,如其文也,亦少褒矣。[一]若夫穰苴,區區為小國行師,何暇及司馬兵法之揖讓乎?世既多司馬兵法,以故不論,著穰苴之列傳焉。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司馬兵法』을 읽어보니 안팎으로 넓고 깊어 비록 삼대의 정벌로도 끝내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 그 글은 또한 조금 기릴만 한 듯하다. 만약 저 양저가 사소한 소국을 위하여 군대를 움직였으니 어찌 어느 겨를에 『사마병법』의 예를 갖추어 양보하는 삼대의 법에 미칠 수 있겠는가? 세상에 이미 『사마병법』이 많으므로 논평하지 않고, 양저의 열전에 드러내었다.
[一] 索隱按:謂司馬法說行兵,揖讓有三代之法,而齊區區小國,又當戰國之時,故云「亦少褒矣」。
[一] 【索隱】 살피건데 사마법은 군대를 움직이는 것을 설명한 것을 이른다. 揖讓은 삼대에 있었던 법이고, 제나라는 자질구레한 소국이니 또한 전국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또한 조금 기릴만하다.”고 한 것이다.
【索隱述贊】燕侵河上,齊師敗績。嬰薦穰苴,武能威敵。斬賈以徇,三軍驚惕。我卒既彊,彼寇退壁。法行司馬,實賴宗戚。
【索隱述贊】 연나라가 항하의 위쪽을 침략하고 제나라는 패하였다. 안영이 양저를 천거하니 무위가 적을 두렵게 하였다. 장가를 베어 돌리니 삼군이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 우리군대가 이미 강하니 저 도적이 벽에 물러나도다. 사마를 법대로 행하니 실로 종척이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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