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六十七
仲尼弟子列傳第七
孔子曰「受業身通者七十有七人」,[一]皆異能之士也。德行:顏淵,閔子騫,冉伯牛,仲弓。政事:冉有,季路。言語:宰我,子貢。[二]文學:子游,子夏。師也辟,[三]參也魯,[四]柴也愚,[五]由也喭,[六]回也屢空。賜不受命而貨殖焉,億則屢中。[七]
공자가 말하기를 “업을 받고 몸으로 통한 이가 77인이다.” 했는데 모두 능력이 뛰어난 선비이다.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고, 정사로는 염유, 계로이다. 언어로는 재아, 자공이고, 문학으로는 자유, 자하이고, 師(자장)는 편벽되고, 參(증자)은 노둔하며, 柴(고시)는 우직하고, 由(붕유)는 거칠고, 回(안회)는 여러 번 식량이 떨어졌다. 賜(자공)는 명을 받지 않았으되 재물을 늘리고 억측하여 여러 번 적중하였다.
[一] 索隱孔子家語亦有七十七人,唯文翁孔廟圖作七十二人。
[一] 【索隱】 『공자가어』에 또한 77인이 있는데, 오직 문옹의 『孔廟圖』에만 72인이라 했다.
[二] 索隱論語一曰德行,二曰言語,三曰政事,四曰文學。今此文政事在言語上,是其記有異也。
[二] 【索隱】 『논어』에 첫재는 덕행, 두 번째는 언어, 셋째는 정사, 넷째는 문학이라 했다. 지금 이 글에서는 문학과 정사가 언어 위에 있으니 이는 그 기록과는 다름이 있다.
[三] 集解馬融曰:「子張才過人,失於邪辟文過。」 正義音癖。
[三]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자장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나지만 편벽되고 글을 지나치게 꾸미는 잘못이 있다.”고 했다. 【正義】 음은 癖이다.
[四] 集解孔安國曰:「魯,鈍也。曾子遲鈍。」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魯는 鈍함이다. 증자는 느리고 둔하였다.”고 했다.
[五] 集解何晏曰:「愚直之愚。」
[五]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愚直의 愚이다.”고 했다.
[六] 集解鄭玄曰:「子路之行,失於蹓喭。」 索隱論語先言柴,次參,次師,次由。今此傳序之亦與論語不同,不得輒言其誤也。正義蹓音畔。喭音岸。
[六]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자로의 행실은 저속함에 잘못되었다.” 했다. 【索隱】 『論語』에 먼저 柴를 말하고 다음으로 參, 다음으로 師, 다음으로 由를 말하였으니 지금 이 전에 차례한 것은 또한 『논어』와 같지 않아 쉽게 그 잘 못을 말할 수 없다. 【正義】 蹓의 음은 畔이다. 喭의 음은 岸이다.
[七] 集解何晏曰:「言回庶幾於聖道,雖數空匱而樂在其中。賜不受教命,唯財貨是殖,億度是非。蓋美回所以勵賜也。一曰屢猶每也,空猶虛中也。以聖人之善道,教數子之庶幾,猶不至於知道者,各內有此害也。其於庶幾每能虛中者唯回,懷道深遠。不虛心不能知道。子貢無數子之病,然亦不知道者,雖不窮理而幸中,雖非天命而偶富,亦所以不虛心也。」
[七]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안회는 성인의 도에 가까워 비록 여러 번 (곳간이 비었으나(굶주렸으나) 즐거움이 그 안에 있었다. 賜는 성인의 가르침과 천명을 받지 못하였고, 단지 재물을 늘리고 억측하여 시비를 가렸다. 대개 안회를 찬미하여 賜를 면려(힘쓰게) 하였다. 한편 屢는 每 와 같고, 空은 虛中(마음속이 비었다.)과 같다. 성인이 善道로써 여러 제자의 가까움(장점)을 가르쳤으되 오히려 도를 앎에 이르지 못한 것은 각기 안으로 이러한 병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매번 마음을 비울 수 있은 자는 오직 안회일뿐이니 도를 생각함이 깊고 원대하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는 도를 알 수 없다. 자공은 여러 제자의 병폐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도를 알지는 못한 것은 비록 이치를 궁구하지 않았으되 요행히 (이치에)알맞았고, 비록 천명이 아니면서도 우연히 부유하였으나 또한 마음을 비우지는 못하였다.” 했다.
孔子之所嚴事:於周則老子;於衛,蘧伯玉;[一]於齊,晏平仲;[二]於楚,老萊子;[三]於鄭,子產;於魯,孟公綽。數稱臧文仲、柳下惠、[四]銅鞮[五]伯華、介山子然,孔子皆後之,不並世。[六]
공자가 (스승으로) 섬긴 것은 주나라에는 곧 노자, 위나라에서 거백옥, 제나라에서는 안평중, 초나라에서는 노래자, 정나라에서는 자산, 노나라에서는 맹공작이었다. 여러 번 장문중, 류하혜, 동제의 백화, 개산의 자연을 칭찬하였는데 공자는 모두 그들보다 후대여서 세상을 함께하지는 않았다.
[一] 集解外寬而內直,自設於隱括之中,直己而不直人,汲汲於仁,以善自終,蓋蘧伯玉之行。索隱按:大戴禮又云「外寬而內直,自娛於隱括之中,直己而不直人,汲汲于仁,以善存亡,蓋蘧伯玉之行也」。
[一] 【集解】 밖은 너그럽고, 안은 곧아 스스로 (마음)속에 갈무리함을 베풀어 자기를 곧게 하되 다른 사람을 곧게 하지 않으며, 인을 급한 듯이 하며, 선으로 스스로 마치는 것이 거백옥의 행실이었다. 【索隱】 살펴보니 『大戴禮』에 도 말하기를 “밖을 너그럽게 하고 안을 곧게 하며 스스로 (마음)속에 갈무리하여 자기를 곧게 하고 다른 사람을 곧게 하지 않으며, 인을 급한 듯이 하고 선으로써 보존하고 없애는 것이 거백옥의 행실이었다.” 했다.
[二] 集解君擇臣而使之,臣擇君而事之,有道順命,無道衡命,蓋晏平仲之行也。索隱大戴記曰:「君擇臣而使之,臣擇君而事之,有道順命,無道衡命,蓋晏平仲之行也。」
[二] 【集解】 임금은 신하를 가려서 그를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가려서 그를 섬긴다. 도아 있으면 命에 순종하고, 도가 없으면 명을 저울질하는 것은 안평중의 행실이다. 【索隱】 『大戴記』에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가려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가려서 섬긴다. 도가 있으면 命에 순종하고, 도가 없으면 명을 저울질 하는 것은 안평중의 행실이다.” 했다.
[三] 索隱大戴記又云:「德恭而行信,終日言不在悔尤之內,貧而樂也,蓋老萊子之行也。」
[三] 【索隱】 『大戴記』에 또 말하기를 “덕으로 공손히 하고 행실은 믿음직하게 하며, 하루 종일 말하여도 뉘우침과 허물의 안에 있지 않으며, 가난하면서도 즐기는 것은 노래자의 행실이다.” 했다.
[四] 集解孝恭慈仁,允德圖義,約貨去怨,蓋柳下惠之行。 索隱大戴記又云:「孝恭慈仁,允德圖義,約貨亡怨,蓋柳下惠之行也。」
[四] 【集解】 효도하고 공손하며 자애롭고 인자하며, 덕을 진실되게 하고 의를 도모하며 재물을 절약하고 원한을 없이한 것은 류하혜의 행실이다. 【索隱】 『大戴記』에 이르기를 “효도하고 공손하며, 자애롭고 인자하며, 덕을 진실되게 하고 의를 도모하며 재물을 절약하고 원한을 없게 하는 것은 류하혜의 행실다,” 했다.
[五] 索隱地理志縣名,屬上黨。 正義鞮,丁奚反。按:銅鞮,潞州縣。
[五] 【索隱】 「地理志」에 현의 이름이니 上黨에 속한다. 【正義】 鞮는 丁과 奚의 反이다. 살펴보니 銅鞮는 潞州縣이이다.
[六] 集解大戴禮曰:「孔子云『國家有道,其言足以興,國家無道,其默足以容,蓋銅鞮伯華之所行。觀於四方,不忘其親,苟思其親,不盡其樂,蓋介山子然之行也』。」說苑曰:「孔子歎曰『銅鞮伯華無死,天下有定矣』。」晉太康地記云:「銅鞮,晉大夫羊舌赤之邑,世號赤曰銅鞮伯華。」 索隱按:自臧文仲已下,孔子皆後之,不並代。其所嚴事,自老子及公綽已上,皆孔子同時人也。按:戴德撰禮,號曰大戴禮,合八十五篇,其四十七篇亡,見今存者有三十八篇。今裴氏所引在衛將軍篇。孔子稱祁奚對晉平公之辭,唯舉銅鞮、介山二人行耳。家語又云:「不克不忌,不念舊怨,蓋伯夷、叔齊之行。思天而敬人,服義而行信,蓋趙文子之行。事君不愛其死,謀身不遺其友,蓋隨武子之行。」
[六] 【集解】 『大戴禮』에 말하기를 “공자가 이르기를 ‘국가에 도가 있으면 그 말이 일으킬 수 있고, 국가에 도가 없으면 침묵함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 대개 동제 백화가 행한 바이다. 사방을 보아 그 어버이를 잊지 않고, 진실로 어버이를 생각하여 그 즐거움을 다하지 않은 것은 개산자연의 행실이다’” 했다. 『說苑』에 말하기를 “공자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동제백화가 죽지 않았다면 천하가 안정됨이 있었을 것이다.’” 했다. 晉나라 『太康地記』 말하기를 “동제는 진나라 대부 양설적의 읍이니 赤을 동제백화라 부른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장문중으로 부터 이하는 공자가 모두 그들을 뒤로 하니 대를 같이 하지 않았다. 그 존경하여 섬긴 바는 노자와 공작으로부터 이상은 모두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살펴보니 대덕이 예를 편찬하고 『大戴禮』라 이름 하였는데 모두 85편이다. 그 중 47편은 잃어버려서 지금 보존되어 볼 수 있는 것은 38편이다. 지금 배씨가 인용한 것은 衛 將軍篇에 있다. 공자는 기해가 晉 나라 평공에게 대답한 말을 칭찬하면서 오직 동제와 개산 두 사람의 행실을 들었을 뿐이다. 『家語』에 또 말하기를 “이기지 못함을 꺼리지 않고, 예 원한을 생각지 않는 것은 백이와 숙제의 행실이다. 하늘을 생각하고 사람을 공경하며 의에 복종하고 믿음을 행하는 것은 조문자의 행실이다. 임금을 섬겨서 죽음을 사랑하며 자신을 도모하여 그 벗을 버리지 않는 것은 무자의 행실을 따르는 것이다.” 했다.
顏回者,魯人也,字子淵。少孔子三十歲。[一]
안회는 노아라 사람이다. 자는 자연이니 공자보다 30세 적다.
[一] 正義少,戍妙反。
[一] 【正義】 少는 戌과 妙의 反이다.
顏淵問仁,孔子曰:「克己復禮,天下歸仁焉。」[一]
안연이 仁을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를 이기고 예를 회복하면 천하가 仁에 돌아갈 것이다.” 했다.
[一] 集解馬融曰:「克己,約身也。」孔安國曰:「復,反也。身能反禮,則為仁矣。」
[一]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克己는 자기를 이기고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다.” 했다. 공안구이 말하기를 “復 은 돌이키는 것이다. 자신을 예로 돌이킬 수 있으면 곧 仁이 된다.” 했다.
孔子曰:「賢哉回也![一]一簞食,一瓢飲,[二]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三]「回也如愚;[四]退而省其私,亦足以發,回也不愚。」[五]「用之則行,捨之則藏,唯我與爾有是夫!」[六]
공자가 말하기를 “ 어질도다 안회여! 한 대바구니의 밥(거친 음식)과 한 바가지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거리에 있으면 사람들이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다”하고, “안회는 어리석은 듯하더니 물러가서 그 사적인 것을 살펴보니 또한 충분히 發明하니 안회는 어리석지 않다.”하였으며, “쓰여지면(등용되면) 곧 행하고 버리면 곧 감추니(숨으니)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이(앞의 행동과 같음이) 있을 것이다.”
[一] 集解衛瓘曰:「非大賢樂道,不能若此,故以稱之。」 索隱衛瓘字伯玉,晉太保,亦注論語,故裴引之。
[一] 【集解】 위관이 말하기를 “大賢으로 도를 즐기는 이가 아니면 이 같을 수 없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했다. 【索隱】 위관의 자는 백옥이니 晉나라 태보이며, 도한 『論語』를 주석하였기 때문에 裵氏가 이를 인용하였다.
[二] 集解孔安國曰:「簞,笥也。」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簞는 笥(상자)이다.” 했다.
[三] 集解孔安國曰:「顏回樂道,雖簞食在陋巷,不改其所樂也。」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였다. “안회가 도를 즐겨서 비록 한 대광주리의 밥을 먹고 누추한 거리에 있어도 그 즐거워하는 바를 고치지 않았다.
[四] 集解孔安國曰:「於孔子之言,默而識之,如愚也。」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공자의 말에 말이 없엇으되 그것을 알았으므로 어리석은 듯하다 한 것이다.” 했다.
[五] 集解孔安國曰:「察其退還與二三子說釋道義,發明大體,知其不愚。」
[五]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안회가)물러나 몇 명의 동료들과 도의를 말하고 풀이하고, 大體를 발명하는 것을 살펴보니 그가 어리석지 않음을 알았다.” 한 것이다.
[六] 集解孔安國曰:「言可行則行,可止則止,唯我與顏回同也。」欒肇曰:「用己而後行,不假隱以自高,不屈道以要名,時人無知其實者,唯我與爾有是行。」 正義肇字永初,高平人,晉尚書郎,作論語疑釋十卷,論語駮二卷。
[六]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말을 행할만하면 곧 행하고 그칠만 하면 그치는 것은 나와 안회만이 같이할 뿐이다.” 했다. 난조가 말하기를 “자기가 등용된 후에 행하고 거짓으로 숨기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높이려 하지 않으며, 도를 굽혀서 명예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때 사람들이 그 실제를 아는 자가 없어 오직 나와 너만이 이 행함이 있다.” 했다. 【正義】 난조의 자는 영초이고, 고평인이니 晉나라 상서랑이다. 『論語疑釋』 10권, 『論語駮』 2권이 있다.
回年二十九,髮盡白,蚤死。[一]孔子哭之慟,曰:「自吾有回,門人益親。」[二]魯哀公問:「弟子孰為好學?」孔子對曰:「有顏回者好學,不遷怒,不貳過。不幸短命死矣,今也則亡[三]。」
안회의 나이 29세에 머리카락이 모두 희어지고 일찍 죽었다. 공자가 곡하기를 애통해 하고, 말하기를 “나에게 안회가 있음으로부터 문인들과 더욱 친하여졌다.” 했다. 노나라 애공이 묻기를 “제자 중에 누가 배우기를 좋아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있어 베우기를 좋아하고, 노함을 (다른 사람에게)옮기지 않으며, 잘못을 두 번 하지 않았는데 불행하게도 목숨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곧 없습니다.” 했다.
[一] 索隱按:家語亦云「年二十九而髮白,三十二而死」。王肅云「此久遠之書,年數錯誤,未可詳也。校其年,則顏回死時,孔子年六十一。然則伯魚年五十先孔子卒時,孔子且七十也。今此為顏回先伯魚死,而論語曰顏回死,顏路請子之車,孔子曰『鯉也死,有棺而無槨』,或為設事之辭」。按:顏回死在伯魚之前,故以論語為設詞。
[一] 【索隱】 살펴보니 『家語』에 또한 말하기를 “나이 29세로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32세에 죽었다.”하였다. 왕숙이 말하기를 “이는 오래된 책이어서 햇수가 잘못되어 자세하지 않다. 그 나이를 헤아리면 곧 안회가 죽었을 때 공자의 나이 61세였다. 그러한 즉 백어가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을 때 공자가 또한 70세였다. 지금 여기서는 안회가 백어보다 먼저 죽었다. 하는데 『論語』에 말하기를 ‘안회가 죽자 안로가 공자의 수레를 청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鯉(리)가 죽었을 때 관은 있었으되 곽은 없었다.’ 하니 혹 일을 베풂의 말이 된다.” 했다. 살펴보니 안회의 죽음은 백어의 앞에 있었다. 그러므로 『論語』로써 말을 가설한 것이다.
[二] 集解王肅曰:「顏回為孔子胥附之友,能使門人日親孔子。」
[二] 【集解】 왕숙이 말하기를 “안회는 공자와 서로 따르는 벗이 되어 문인들로 하여금 날로 공자를 친하게 할 수 있었다.”
[三] 集解何晏曰:「凡人任情,喜怒違理。顏回任道,怒不過分。遷者移也,怒當其理,不移易也。不貳過者,有不善未嘗復行。」
[三]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보통 사람은 정을 맡아 기뻐함과 노함이 이치에 어긋난다. 안회는 도를 맡아서 노함이 지나치지 않았다. 遷은 옮김이다. 노함은 그 이치에 마땅하게 하여 옮기고 바꾸지 말아야 한다. 잘못을 두 번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하지 않음이 일찍이 다시 행해지지 않음을 말한다.”
閔損字子騫。[一]少孔子十五歲。
민손의 자는 건이다. 공자보다 15세 어리다.
[一] 集解鄭玄曰:「孔子弟子目錄云魯人。」 索隱家語亦云「魯人。少孔子十五歲」。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공자의 제자 목록에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또 말하기를 “노마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15세 어리다.” 했다.
孔子曰:「孝哉閔子騫!人不閒於其父母昆弟之言。」[一]不仕大夫,不食汙君之祿。[二]「如有復我者,[三]必在汶上矣。」[四]
공자가 말하기를 “‘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사람들이 그 부모와 형제의 말을 이간하지(부정하지) 않았다.’ 했다. ‘대부에게 벼슬하지 않았고, 더러운 임금의 록을 먹지 않았다.’ ‘만약 다시 나를 (부르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문수 가에 있을 것이다.’” 했다.
[一] 集解陳群曰:「言子騫上事父母,下順兄弟,動靜盡善,故人不得有非閒之言。」
[一] 【集解】 진군이 말하기를 “민자건이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형제들에게 순히 하며, 동정에 선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이간(비난)하는 말이 있지 않았음을 말한다.”고 했다.
[二] 索隱論語季氏使閔子騫為費宰,子騫曰「善為我辭焉」,是不仕大夫,不食汙君之祿也。
[二] 【索隱】 『論語』에 계씨가 민자건을 費지역의 읍재로 삼자 민자건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사양하는 것이 좋다.” 하였으니 이는 대부에게 벼슬하지 않은 것이며, 더러운 군주의 녹을 먹지 않은 것이다.
[三] 集解孔安國曰:「復我者,重來召我。」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復我者는 거듭와서 나를 부르는 것이다.” 했다.
[四] 集解孔安國曰:「去之汶水上,欲北如齊。」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 ‘떠나서 문수 가에 있겠다.’ 한 것은 북쪽으로 제나라에 가고자 한 것이다.” 했다.
冉耕字伯牛。[一]孔子以為有德行。
염경의 자는 백우이다. 공자는 덕행이 있다고 여겼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按:家語云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家語』에 노아라 사람이라 했다.
伯牛有惡疾,孔子往問之,自牖執其手,[一]曰:「命也夫!斯人也而有斯疾,命也夫!」[二]
염백우가 나쁜 병에 걸리자 공자가 가서 위문하는데 창문으로부터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命이로다!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命이로다!” 했다.
[一] 集解包氏曰:「牛有惡疾,不欲見人,孔子從牖執其手。」
[一] 【集解】 포씨왈 “염백우가 병이 잇어 다른 사람을 보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공자가 창으로부터 그 손을 잡은 것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再言之者,痛之甚也。」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두번 그것을 말한 것은 아픔이 심한 것이다.” 했다.
冉雍字仲弓。[一]
염옹의 자는 중궁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索隱家語云:「伯牛之宗族,少孔子二十九歲。」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염백우의 종족이니 공자보다 29세 어리다.
仲弓問政,孔子曰:「出門如見大賓,使民如承大祭。[一]在邦無怨,在家無怨。」[二]
중궁이 정사를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문을 나가서는 큰 손님을 보는 것 처럼하고, 백성을 부림에는 큰 제사를 지내는 것 처럼하여야 한다. 나라에 있어서는 원망이 없고 집에 있어서도 원망이 없는 것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莫尚乎敬。」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공경함보다 숭상함이 없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在邦為諸侯,在家為卿大夫。」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나라에 있어서는 제후가 되고, 家에 있어서는 경대부가 되는 것이다.”
孔子以仲弓為有德行,曰:「雍也可使南面。」[一]
공자가 중궁을 덕행이 있다 하고 말하기를 “옹은 南面할만하다.(제후ㅏ 될 만하다)” 했다.
[一] 集解包氏曰:「可使南面,言任諸侯之治。」
[一]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可使南面은 제후의 다스림을 맡길 수 있음을 말한다.”
仲弓父,賤人。孔子曰:「犁牛之子騂且角,雖欲勿用,山川其舍諸?」[一]
중궁의 아버지는 천인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얼룩소의 송아지가 불고 또한 뿔이 곧으면 비록 스지 않고자하나 산천이 그를 버려두겠는가?” 했다.
[一] 集解何晏曰:「犁,雜文。騂,赤色也,角者,角周正,中犧牲,雖欲以其所生犁而不用,山川寧肯舍之乎?言父雖不善,不害於子之美。」
[一]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犁는 얼룩이다. 騂은 적색이고, 角은 뿔이 곧은(단정한)아서 희생에 알맞은 것이니 비록 얼룩소에서 태어나 쓰지 않으려 하나 산천이 정녕 즐겨서 버려두겠는가? 아버지가 비록 선하지 않을 지라도 그 자식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했다.
冉求字子有,[一]少孔子二十九歲。為季氏宰。
염구의 자는 자유이니 공자보다 29세 어리다. 계씨의 宰(가신)가 되었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季康子問孔子曰:「冉求仁乎?」曰:「千室之邑,百乘之家,[一]求也可使治其賦。仁則吾不知也。」[二]復問:「子路仁乎?」孔子對曰:「如求。」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염구는 仁합니까?” (공자가)말하기를 “千室의 읍과 百乘의 家에서 염구를 그 병부를 다스리게 할 만합니다. 仁한지는 내가 알지 못합니다.” 했다. (계강자가) 다시 묻기를 “자로는 仁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염구와 같습니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千室,卿大夫之邑。卿大夫稱家。諸侯千乘,大夫故曰百乘。」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千室은 경, 대부의 읍이다. 경과 대부는 家라 말한다. 제후는 千乘이고 대부는 그러므로 100승이다.”
[二] 集解孔安國曰:「賦,兵賦也。仁道至大,不可全名也。」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賦는 병부이다. 인의 도는 지극히 커서 온전히 이름할 수 없다,”
求問曰:「聞斯行諸?」[一]子曰:「行之。」子路問:「聞斯行諸?」子曰:「有父兄在,如之何其聞斯行之!」[二]子華怪之,「敢問問同而答異?」孔子曰:「求也退,故進之。由也兼人,故退之。」[三]
염구가 말하기를 “들으면 이에 행하여야 합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행하여야 한다.” 자로가 묻기를 “들으면 행하여야 합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부형이 있는데 어떻게 들으면 행할 수 있겠는가?” 자화가 괴이하게 여겨 “감히 묻습니다. 물음은 같은데 답이 다릅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구는 물러가려 함으로 나아가게 하고, 유(자로)는 다른 사람보다 겸하고 있기 때문에 물리치는 것이다.”
[一] 集解包氏曰:「賑窮救乏之事也。」
[一]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궁곤한 이를 구휼하고, 궁핍한 이를 구하는 일이다.”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當白父兄,不可自專。」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마당히 부형에게 말하고 스스로 오로지 해서는 안된다.”
[三] 集解鄭玄曰:「言冉有性謙退,子路務在勝尚人,各因其人之失而正之。」
[三]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염유는 성품이 겸손하고 물러남이 있었고, 자로는 힘씀이 다른 사람을 이기는데 두었기 때문에 각각 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은 것이다.” 했다.
仲由字子路,卞人也。[一]少孔子九歲。
중유의 자는 자로이니 변지역 사람이다. 공자보다 9살 적다.
[一] 集解徐廣曰:「尸子曰子路,卞之野人。」 索隱家語一字季路,亦云是卞人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시자가 말하기를 자로는 변 지역 촌 사람이다.”했다. 【索隱】 『家語』에 “다른 자를 계로이니 도한 변 지역의 사람이다.” 했다.
子路性鄙,好勇力,志伉直,冠雄雞,佩豭豚,[一]陵暴孔子。孔子設禮稍誘子路,子路後儒服委質,[二]因門人請為弟子。
자로의 성품이 비루하고, 용감하고 힘쓰기를 좋아하였으며 뜻은 정직하고 곧아 수탉 깃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수퇘지 가죽 띠를 하였으며 공자를 능멸하고 사납게 하였으나 공자가 예를 베풀어(가르쳐) 자로를 조금씩 인도하자 자로가 후에 儒者의 옷을 입고 몸을 바치므로 문인들이 제자로 삼기를 청하였다.
[一] 集解冠以雄雞,佩以豭豚。二物皆勇,子路好勇,故冠帶之。
[一] 【集解】 수탉의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수퇘지의 가죽으로 만든 띠를 하였다. 두 물건은 모두 용맹함이다. 자로가 용맹함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관을 쓰고 띠를 한 것이다.
[二] 索隱按:服虔注左氏云「古者始仕,必先書其名於策,委死之質於君,然後為臣,示必死節於其君也」。
[二]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주석한 좌씨(『左傳』)에 말하기를 “옛날에 처음 벼슬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이름을 策에 쓰고 임금에게 죽음 맹세를 맡긴 후에 신하가 되고, 반드시 그 임금에게 죽음과 절개를 보여야 한다.
子路問政,孔子曰:「先之,勞之。」[一]請益。曰:「無倦。」[二]
자로가 정사를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다른 사람보다)먼저하고, (다른 사람보다)수고로운 것이다.” 하였다. (자로가)더 청하니(더 자세하게 말해줄 것을) “게으름이 없는 것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先導之以德,使民信之,然後勞之。易曰『悅以使民,民忘其勞』。」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먼저 덕으로써 이끌고, 백성으로 하여금 믿게 한 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했다. 易(주역)에 말하기를 “백성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써 부리면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잊는다.”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子路嫌其少,故請益。曰『無倦』者,行此上事無倦則可。」
[二] 【集解】 공안구이 말하기를 “자로는 그 적음을 부족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더할 것(말해 줄 것을 )을 청한 것이다. 말하기를 ‘게으름이 없이 한다는 것은 이 위의 일에 게으름이 없으면 되었다.’” 한 것이다.
子路問:「君子尚勇乎?」孔子曰:「義之為上。君子好勇而無義則亂,[一]小人好勇而無義則盜。」
자로가 묻기를 “군자도 용기를 숭상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의리를 위로 삼는다. 군자가 용기를 좋아하면서 의리가 없으면 곧 어지러워지고, 소인이 용기를 좋아하면서 의리가 없으면 곧 도적이 된다.”
[一] 集解李充曰:「既稱君子,不職為亂階也。若君親失道,國家昏亂,其於赴患致命而不知正顧義者,則亦陷乎為亂而受不義之責也。」索隱按:充字弘度,晉中書侍郎,亦作論語解。
[一] 【集解】 이충이 말하기를 “이미 군자로 일컬어졌으면 직책으로 어지러움을 하지 않는다. 만약 임금과 어버이가 도를 잃고, 국가가 어둡고 어지러워져 그 금심에 달려 나가고 목숨을 바침에 바로 의를 돌아봄을 알지 못한다면 곧 또한 어지러움을 함에 빠져 의롭지 못함의 책임을 받는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이충의 자는 홍도이고, 晉나라 중서시랑을 지냈고, 또한 ‘論語解’를 지었다.
子路有聞,未之能行,唯恐有聞。[一]
자로는 들음이 있음에도 행할 수 없을까하여 들음이 있음을 두려워하였다.
[一] 集解孔安國曰:「前所聞未及行,故恐復有聞不得並行。」
[一] 【集解】 공안구이 말하기를 “앞에서 들은 바를 아직 행함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들음이 있어 나란히(함께) 행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했다.
孔子曰:「片言可以折獄者,其由也與!」[一]「由也好勇過我,無所取材。」[二]「若由也,不得其死然。」[三]「衣敝縕袍[四]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其由也與!」「由也升堂矣,未入於室也。」[五]
공자가 말하기를 “한 마디 말로 옥사를 결단할 수 있는 이는 유(자로)일 것이다!”, “유(자로)는 용맹을 좋아함이 나(공자)보다 나으나 사리를 분별하여 의로움에 알맞게 할 줄 모른다.”, “유(자로) 같으면 그 죽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비명에 죽을 것이다.)”, “해진 솜옷을 입고 여우와 담비 갓옷을 입은 자와 서서도(마주하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는 유(자로)일 것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片猶偏也。聽訟必須兩辭以定是非,偏信一言折獄者,唯子路可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片은 偏과 같다. 쟁송을 들음은 반드시 양측의 말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정하는데 치우친 한마디 말을 듣고 옥사를 결단하는 자는 오직 자로만이 할 수 있다.” 했다.
[二] 集解欒肇曰:「適用曰材,好勇過我用,故云『無所取』。」 索隱按:肇字永初,晉尚書郎,作論語義也。
[二] 【集解】 난조가 말하기를 “쓰임에 알맞은 것을 材라 한다. 용맹을 좋아함은 내가 쓰는 것 보다 낫다. 그러므로 ‘취할 바가 없다.’ 한 것이다.” 했다. 【索隱】 난조의 자는 영초이니 晉나라 상서랑을 지내고, ‘論語義’를 지었다.
[三] 集解孔安國曰:「不得以壽終也。」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천수를 누릴 수 없음이다.” 했다.
[四] 集解孔安國曰:「縕,枲著也。」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縕은 모시풀 옷을 입는 것이다.”
[五] 集解馬融曰:「升我堂矣,未入於室耳。」
[五]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나의 당에 오를 수 있되 방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했다.
季康子問:「仲由仁乎?」孔子曰:「千乘之國可使治其賦,不知其仁。」 子路喜從游,遇長沮、桀溺、荷蓧丈人。子路為季氏宰,季孫問曰:「子路可謂大臣與?」孔子曰:「可謂具臣矣。」[一]
계강자가 묻기를 “중유(자로)는 仁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천승의 나라에 그 賦(군대)를 다스리게 할 수 있으나 仁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했다. 자로는 (공자를) 따라 돌아다니면서 장저, 걸익, 삼태기를 지고 지팡이를 든 사람을 만났다. 자로가 계씨의 宰가 되었는데 계손이 (공자에게)물어 말하기를 “자로는 大臣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신하의 수를 맞출 수 있습니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言備臣數而已。」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신하의 수를 갖추었을 뿐이다.” 했다.
子路為蒲大夫,[一]辭孔子。孔子曰:「蒲多壯士,又難治。然吾語汝:恭以敬,可以執勇;[二]寬以正,可以比眾;[三]恭正以靜,可以報上。」
자로가 포 땅의 대부가 되어 공자에게 하직 인사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포 땅에는 기개 있는 선비가 많아 또 다스리기 어렵다. 그러해서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공경으로써 공손히 하면 용맹을 잡을 수 (다스릴 수) 있고, 바른 것으로써 관용하면 무리와 친할 수 있다. 공손하고 바르게 함으로써(다스림으로써) 고요하게 하는 것이(안정시키는 것이) 윗사람에게 갚는 것이다.” 했다.
[一] 索隱蒲,衛邑,子路為之宰也。
[一] 【索隱】 蒲는 위나라의 읍이니 자로가 宰가 된 것이다.
[二] 集解言恭謹謙敬,勇猛不能害,故曰「執」也。
[二] 【集解】 말이 공손하고, 삼가며, 겸손하고, 공경하면 용맹한 이가 해칠 수 없다. 그러므로 ‘執’이라고 한 것이다.
[三] 集解音鼻。言寬大清正,眾必歸近之。
[三] 【集解】 음은 鼻이다. 말이 관대하고 맑고 바르면 무리들이 반드시 돌아와 가까이 한다.
初,衛靈公有寵姬曰南子。靈公太子蕢聵得過南子,懼誅出奔。及靈公卒而夫人欲立公子郢。郢不肯,曰:「亡人太子之子輒在。」於是衛立輒為君,是為出公。出公立十二年,其父蕢聵居外,不得入。子路為衛大夫孔悝之邑宰。[一]蕢聵乃與孔悝作亂,謀入孔悝家,遂與其徒襲攻出公。出公奔魯,而蕢聵入立,是為莊公。方孔悝作亂,[二]子路在外,聞之而馳往。遇子羔出衛城門,謂子路曰:「出公去矣,而門已閉,子可還矣,毋空受其禍。」
전에 위나라 영공에게 사랑하는 여자인 남자가 있었다. 영공의 태자 괴외가 남자에게 허물(죄)을 지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나가 (송나라로)도망하였다. 공공이 죽음에 이르자 부인(남자)이 공자 영을 (왕으로)세우고자 하였다. 영이 거절하면서(즐겨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도망한 사람인 태자의 아들 첩이 있다.” 했다. 이에 위나라가 첩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으니 이가 출공이다. 출공이 즉위한 지 12년 동안 그 아버지 괴외가 밖에서 살면서 (위나라에)들어오지 못하였다. 자로가 위나라의 대부 공리의 읍재가 되었다. 괴외가 이에 공리와 함께 난을 일으켜 공리의 집에 들어갈 것을 꾀하고는 마침내 그 무리와 함께 출공을 덮쳐 공격하였다. 출공이 노나라로 도망하자 괴외가 들어가 즉위하니 이가 장공이 된다. 처음 공리가 난을 일으킬 때에 자로는 밖에 있었는데 (난이 일어 났다는 것을) 듣고는 달려가다가 위나라 성문을 나오는 자고를 만났다. (자고가) 자로에게 말하기를 “출공은 떠났고, 성문은 이미 닫혔으니 그대가 돌아가 면 공연히 그 화를 받지 않는 것이다.” 했다.
[一] 索隱按:服虔云「為孔悝之邑宰」。
[一]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말하기를 “공리의 읍재가 되었다.”고 했다.
[二] 索隱按:左傳蒯聵入孔悝家,悝母伯姬劫悝於廁,強與之盟而立蒯聵,非悝本心自作亂也。
[二] 【索隱】 살펴보니 『左傳』에 괴외가 공리의 집에 들어가니 공리의 어머니 백희가 공리를 곁에서 겁을 주어 억지로 함께 동맹하여 괴외를 세웠고, 공리가 본심으로 스스로 난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고 했다.
子路曰:「食其食者不避其難。」子羔卒去。有使者入城,城門開,子路隨而入。造蕢聵,蕢聵與孔悝登臺。子路曰:「君焉用孔悝?請得而殺之。」蕢聵弗聽。於是子路欲燔臺,蕢聵懼,乃下石乞、壺黶攻子路,擊斷子路之纓。子路曰:「君子死而冠不免。」遂結纓而死。
자로가 말하기를 “그 밥(록)을 먹는 자는 그 (주인의)어려움을 피하지 않는다.” 하니 자고가 마침내 떠났다. 사자로 성에 들어가는 자가 있어 성문이 열리니 자로가 따라 들어갔다. 괴외에게 나아가니 괴외와 공리가 대에 올라 있었다. 자로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공리를 등용합니까? 죽이기를 청합니다.” 했다. 괴외가 듣지 않았다. 이에 자로가 대를 태우고자 하니 괴외가 두려워하여 석걸과 호염을 내려 보내 자로를 공격하게 하여 치니 자로의 갓끈이 끊어졌다. 자로가 말하기를 “군자는 죽어도 갓을 벗지 않는다.” 하고는 마침내 갓끈을 매고 죽었다.
孔子聞衛亂,曰:「嗟乎,由死矣!」已而果死。故孔子曰:「自吾得由,惡言不聞於耳。」[一]是時子貢為魯使於齊。[二]
공자가 위나라에 난이 있었음을 듣고는 말하기를 “아! 유(자로)는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과연 죽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유(자로)를 얻음으로부터 나쁜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에 자공이 노나라를 위하여 제나라에 사신 갔다.
[一] 集解王肅曰:「子路為孔子侍衛,故侮慢之人不敢有惡言,是以惡言不聞於孔子耳。」
[一] 【集解】 왕숙이 말하기를 “자로가 공자를 위하여 모시고 지켰기 때문에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감히 나쁜 말을 함이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자의 귀에 나쁜 말이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二] 索隱按:左傳子貢為魯使齊在哀十五年,蓋此文誤也。
[二] 【索隱】 살펴보니 『左傳』에 자공이 노나라를 위하여 제나라에 사신 간 것은 애공 15년에 있으니 이 글은 잘못 된 듯하다.
宰予字子我。[一]利口辯辭。既受業,問:「三年之喪不已久乎?君子三年不為禮,禮必壞;三年不為樂,樂必崩。舊穀既沒,新穀既升,鑽燧改火,期可已矣。」[二]子曰:「於汝安乎?」曰:「安。」「汝安則為之。君子居喪,食旨不甘,聞樂不樂,故弗為也。」[三]宰我出,子曰:「予之不仁也!子生三年然後免於父母之懷。[四]夫三年之喪,天下之通義也。」[五]
재여의 자는 자아이니 말을 교묘하게 잘하고 변명하는 말을 잘하였다. 業(수업, 공부)을 받은 후 묻기를 “(부모의 상에)3년 喪은 너무 오래지(길지) 않습니까?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을 하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1년이 지나면)옛 곡식이 이미 없어지고 새 곡식이 익으며 부싯돌을 쳐서 불을 바꿉니다. (부모의 상이)期年(1년)이면 될 것입니다.” 했다. 선생이(공자가) “너는 편안한가?” 하니 재아가 “편안합니다.”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네가 편안하면 그것을 하라. 군자가 상중에 있으면 밥 맛이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 했다. 재아가 나가자 선생이(공자가) 말하기를 “여(자여, 재아)의 仁하지 않음이여! 자식이 나서 3년이 지나야 부모의 품을 면한다. 저 3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의리이다.” 했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索隱家語亦云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또한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二] 集解馬融曰:「周書月令有更火之文。春取榆柳之火,夏取棗杏之火,季夏取桑柘之火,秋取柞楢之火,冬取槐檀之火。一年之中,鑽火各異木,故曰『改火』。」
[二]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周書』 월령에 불을 바꾸는 글이 있다. 봄에는 느릅나무와 버드나무의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은행나무 불을 취하고, 늦은 여름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 불을 취하고, 가을에는 떡갈나무, 졸참나무 불을 취하고 겨울에는 회화나무 불을 취한다. 1년 가운데 불을 피우기를 각기 나무를 달리하였다, 그러므로 ‘改火’ 라고 한 것이다.” 했다.
[三] 集解孔安國曰:「旨,美也。責其無仁於親,故言『汝安則為之』。」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旨’는 아름다운(좋은) 것이다. 어버이에게 인자함이 없음을 責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편안하면 곧 하라.’ 하고 말한 것이다.”
[四] 集解馬融曰:「生未三歲,為父母所懷抱也。」
[四]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태어나서 3년이 지나지 않으면 부모가 품어준다.”
[五] 集解孔安國曰:「自天子達於庶人。」
[五]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른다.” 했다.
宰予晝寢。子曰:「朽木不可雕也,[一]糞土之牆不可圬也。」[二]
재여가 낮잠을 잤다. 선생(공자)이 말하기를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은 담장에 흙손질할 수 없다.”고 했다.
[一] 集解包氏曰:「朽,腐也。雕,雕琢刻畫。」
[一]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朽는 썩음이다. 雕는 새기고 쪼아서 그림을 새기는 것이다.” 했다.
[二] 集解王肅曰:「圬,墁也。二者喻雖施功猶不成也。」
[二] 【集解】 왕숙이 말하기를 “圬는 墁(흙손 만)이다. 두 가지는 비록 공을 베풀어도 오히려 이루지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宰我問五帝之德,子曰:「予非其人也。」[一]
재아가 “五帝의 덕”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너는 그 사람(꼭 알맞은 사람)이 나이다.” 했다.
[一] 集解王肅曰:「言不足以明五帝之德也。」
[一] 【集解】 왕숙이 말하기를 “오제의 덕을 밝히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했다.
宰我為臨菑大夫,[一]與田常作亂,以夷其族,孔子恥之[二]。
재아가 임치의 대부가 되어 전상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가 그 일족이 죽음을 당하니 공자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一] 索隱按:謂仕齊。齊都臨淄,故云「為臨淄大夫」也。
[一] 【索隱】 살펴보니 제나라에 벼슬함을 말한다. 제나라의 도읍이 임치이기 때문에 ‘임치의 대부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二] 索隱按:左氏傳無宰我與田常作亂之文,然有闞止字子我,而因爭寵,遂為陳恆所殺。恐字與宰予相涉,因誤云然。
[二] 【索隱】 살펴보니 『左傳』에 재아와 전상이 난을 일으킨 글이 없다. 그러나 감지의 자인 자아가 있는데 총애를 다투다가 마침내 진항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아마도 자와 재여가 서로 서로 관련되어 잘못 말하였을 것이다.
端沐[一]賜,衛人,字子貢。少孔子三十一歲。
단목사는 위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공이다. 공자보다 31세 적다.
[一] 索隱家語作「木」。
[一] 【索隱】 『家語』에 ‘木’이라고 썼다.
子貢利口巧辭,孔子常黜其辯。問曰:「汝與回也孰愈?」[一] 對曰:「賜也何敢望回!回也聞一以知十,賜也聞一以知二。」
자공은 말을 교묘하게 잘하였는데 공자가 항상 그 말을 내쳤다. (공자가)물어 말하기를 “너(자공)와 회(안회)는 누가 나은가?” 하니 (자공이) 대답하기를 “사(자공)가 어찌 감히 회를 바라겠습니까(비교하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아는데,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愈猶勝也。」
[一] 【集解】 공안구이 말하기를 “愈는 勝(낫다.)과 같다.
子貢既已受業,問曰:「賜何人也?」孔子曰:「汝器也[一]。」曰:「何器也?」曰:「瑚璉也。」[二]
자공이 학업을 마치고 묻기를 “저는 어떤(어느 정도의) 사람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그릇이다.” 하였다. (자공이) 묻기를 “어떤(어느 정도의) 그릇입니까?”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호련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言汝器用之人。」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너는 그릇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瑚璉,黍稷器。夏曰瑚,殷曰璉,周曰簠簋,宗廟之貴器。」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瑚璉은 기장과 피를 담는 그릇(제기)이다. 하나라에서는 蝴라하고, 은나라에서는 璉이라 하였고, 주나라에서는 簠簋라 하였으니 종묘의 귀한 그릇이다.” 했다.
陳子禽問子貢曰:「仲尼焉學?」子貢曰:「文武之道未墜於地,在人,賢者識其大者,不賢者識其小者,莫不有文武之道。夫子焉不學,[一]而亦何常師之有!」[二]又問曰:「孔子適是國必聞其政。求之與?抑與之與?」[三]子貢曰:「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夫子之求之也,其諸異乎人之求之也。」[四]
진나라 자금이 자공에게 묻기를 “중니(공자)에게 누구에게 배웠는가?” 하였다. 자공이 말하기를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에게 있을 때 현명한 사람은 그 큰 것을 알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작은 것을 알아서 문왕과 무왕의 도가 있지 않음이 없다. 부자(선생)은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았으니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 했다. (진자금이)또 묻기를 “공자가 이 나라에 가면 반드시 정사를 듣는 것은 그것(정사를)을 구하여 듣는 것인가? 아니면 (정사가)주어져서 듣는 것인가?”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온화하고 선하시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양(溫良恭儉讓)함으로써 그것을 얻었으니 선생이 (정사를 듣는 것을) 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文武之道未墜落於地,賢與不賢各有所識,夫子無所不從學。」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현명한 이와 현명하지 못한 이가 각기 아는 바가 있으니 선생은 따라 배우지 않는 바가 없었다.” 고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無所不從學,故無常師。」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따라 배우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항상된(일정한) 스승이 없는 것이다.
[三] 集解鄭玄曰:「怪孔子所至之邦必與聞國政,求而得之邪?抑人君自願與之為治者?」
[三]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공자가 이르는 나라는 반드시 함께 국정을 들음에 참여한 것은 구하여서 얻은 것인지, 아니면 임금이 스스로 원하여 함께 다스림을 행하였는지를 의심한 것이다.” 했다.
[四] 集解鄭玄曰:「言夫子行此五德而得之,與人求之異,明人君自與之。」
[四]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부자(선생)는 이 다섯 가지 덕을 행하여서 얻엇으니 다른 사람이 구하는 것과는 달라서 임금이 스스로 그것을 주었음을 밝힌 것이다.” 했다.
子貢問曰:「富而無驕,貧而無諂,何如?」孔子曰:「可也;[一]不如貧而樂道,富而好禮。」[二]
자공이 묻기를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가난하여도 아첨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可(옳다)하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하다(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未足多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충분히 많지 않다.” 했다.
[二] 集解鄭玄曰:「樂謂志於道,不以貧為憂苦也。」
[二]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즐거워 한다는 것은 도에 뜻을 두어서 가난을 근심과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음을 말한다.” 고 했다.
田常欲作亂於齊,憚高、國、鮑、晏,故移其兵欲以伐魯。孔子聞之,謂門弟子曰:「夫魯,墳墓所處,父母之國,國危如此,二三子何為莫出?」子路請出,孔子止之。子張、子石[一]請行,孔子弗許。子貢請行,孔子許之。
전상이 제나라에서 난을 일으키고자하되 고, 국, 포, 안씨를 꺼려하였다. 그러므로 군대를 옮겨 노나라를 치고자 했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노나라는 (조상의)분묘가 있는 부모의 나라인데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 같으니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가지 않는가?” 했다. 자로가 나가기를 청하니 공자가 그를 저지하였다. 장장과 자석이 나가리를 청하니 공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자공이 가기를 청하니 공자가 허락하였다.
[一] 索隱公孫龍也。
[一] 【索隱】 공손룡이다.
遂行,至齊,說田常曰:「君之伐魯過矣。夫魯,難伐之國,其城薄以卑,其地狹以泄,[一]其君愚而不仁,大臣偽而無用,其士民又惡甲兵之事,此不可與戰。君不如伐吳。夫吳,城高以厚,地廣以深,甲堅以新,士選以飽,重器精兵盡在其中,又使明大夫守之,此易伐也。」田常忿然作色曰:「子之所難,人之所易;子之所易,人之所難:而以教常,何也?」
마침내 가서 제나라에 이르러 전상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노아라를 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저 노나라는 정벌하기 어려운 나라로 그 성벽은 얇고 낮으며, 그 땅은 좁고, (해자)는 새고(얕으며), 그 임금은 어리석고 어질지 못하며, 대신은 거짓되고 쓸 곳이 없으며, 그 사민은 또한 군대의 일을 미워하니 니는 함께 싸울ㄹ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만 못합니다. 저 오나라는 성벽이 높고 두터우며 땅은 넓고 (해자)는 깊으며, 무기는 굳고 새로우며 士는 선발하여 배불리 먹었으니 중요한 기물과 정예 군대가 그 안에 있습니다. 또 현명한 대부가 그것을 지키니 이는 정벌하기 쉬운 것입니다.” 했다. 전상이 분노하여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어렵다 한 것은 다른 사람이 쉬워하는 바이고 그대가 쉬워하는 바는 다른 사람이 어려워 하는 바이니 나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인가?” 했다.
[一] 索隱按:越絕書其「泄」字作「淺」。
[一] 【索隱】 살펴보니 『월절서』는 ‘泄’자를 ‘淺’으로 썼다.
子貢曰:「臣聞之,憂在內者攻彊,憂在外者攻弱。今君憂在內。吾聞君三封而三不成者,大臣有不聽者也。今君破魯以廣齊,戰勝以驕主,破國以尊臣,[二]而君之功不與焉,則交日疏於主。是君上驕主心,下恣群臣,求以成大事,難矣。夫上驕則恣,臣驕則爭,是君上與主有卻,下與大臣交爭也。如此,則君之立於齊危矣。
자공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근심이 안에 있는 자는 강함을 공격하고, 근심이 밖에 있는 자는 약함을 공격한다 합니다. 지금 군은(그대는) 근심이 밖에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제나라 왕이 그대를) 세 번 봉하되 세 번 다 이루지 못한 것은 대신으로 듣지 않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노나라를 깨트리는 것으로써 제나라를 넓히는 것은 싸워 이기는 것으로써 주군을 교만하게 하고 나라를 깨트리는 것으로써 신하를 높이는 것이니 그대의 공이 주어지지 않으며, 날로 주군에 소원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는 임금께서 위로는 주군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를 방자하게 함이니 대사를 이루기를 구하되 (이루기) 어려운 것입니다. 대개 윗사람이 교만하면 곧 방자하고, 신하가 교만하면 곧 다툽니다. 이는 그대가 위로는 주군과 더불어 틈이 있고, 아래로는 대신들이 서로 다툽니다. 이 같으면 곧 그대는 제나라에서 설 곳이 위태롭습니다.” 했다.
[二] 集解王肅曰:「鮑、晏等帥師,若破國則臣尊矣。」
[二] 【集解】 포와 안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만약 나라를 깨트리면 곧 신하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故曰不如伐吳。伐吳不勝,民人外死,大臣內空,是君上無彊臣之敵,下無民人之過,孤主制齊者唯君也。」田常曰:「善。雖然,吾兵業已加魯矣,去而之吳,大臣疑我,柰何?」子貢曰:「君按兵無伐,臣請往使吳王,令之救魯而伐齊,君因以兵迎之。」田常許之,使子貢南見吳王。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나라를 치는 것만 못하다. 한 것입니다. 오나라를 정벌하다 이기지 못하면 백성은 밖에서 죽고, 대신은 안에 비게 되니 이는 그대가 위로 강한 신하를 대적함이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잘못함이 없으니 홀로 제나라를 주관하여 제제할 자는 오직 그대일 뿐입니다.” 했다. 전상이 말하기를 “좋다. 비록 그러하나 우리 군대가 이미 노나라를 치는데 떠나서 오나라로 가면 대신들이 나를 의심할 것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군대를 살피되 치지 않으면 신이 오나라 왕에게 사신가서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칠 것을 명령하게 하면 그대가 군대로써 맞이하십시오.” 했다. 전상이 허락하고 자공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가서 오나라 왕을 뵈었다.
說曰:「臣聞之,王者不絕世,霸者無彊敵,千鈞之重加銖兩而移。今以萬乘之齊而私千乘之魯,與吳爭彊,竊為王危之。且夫救魯,顯名也;伐齊,大利也。以撫泗上諸侯,誅暴齊以服彊晉,利莫大焉。名存亡魯,實困彊齊。智者不疑也。」吳王曰:「善。雖然,吾嘗與越戰,棲之會稽。越王苦身養士,有報我心。子待我伐越而聽子。」
설득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왕노릇하는 자는 세대를 끊지 않고 패자는 강한 적이 없으며, 천균의 무게도 미세한 무게를 더하면 (저울추가)움직입니다. 지금 만승의 제나라가 천승의 노나라를 사사로이(소유하는 것) 하는 것으로써 오나라와 강함을 다툰다면 아마도 왕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저 노나라를 구원하여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니 제나라를 치는 것은 큰 이익입니다. 사수 가의 제후를 어루만지고 사나운 제나라를 베는 것으로써 강한 진나라를 복종시키는 것은 이로움이 이보다 큼이 없습니다. 명분으로는 망하는 노나라를 보존하고 실제적으로는 강한 제나라를 어렵게 하니 지혜로운 자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했다. 오나라 왕이 말하기를 “좋다. 그러하나 일찍이 월나라와 싸워서 회계에 머물고 있다. 월나라 왕이 자신을 괴롭게 하고 군사를 길러 나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이 있다. 그대는 내가 월나라를 치는 것을 기다리면 그대를 따르겠다.” 했다.
子貢曰:「越之勁不過魯,吳之彊不過齊,王置齊而伐越,則齊已平魯矣。且王方以存亡繼絕為名,夫伐小越而畏彊齊,非勇也。夫勇者不避難,仁者不窮約,智者不失時,王者不絕世,以立其義。今存越示諸侯以仁,救魯伐齊,威加晉國,諸侯必相率而朝吳,霸業成矣。且王必惡越,[一]臣請東見越王,令出兵以從,此實空越,名從諸侯以伐也。」吳王大說,乃使子貢之越。
자공이 말하기를 “월나라의 굳셈은 노나라보다 낫지 않고, 오나라의 굳셈은 제나라보다 낫지 않습니다. 왕이 제나라를 두고서 월나라를 친다면 제나라는 노나라를 평정할 것입니다. 또한 왕은 바야흐로 망한 것을 보존하고, 끊어진 것을 잇는 것으로 명분을 삼으니 저 작은 월나라를 치고 강한 제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대개 용기 있는 자는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어진 자는 궁약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자는 때를 잃지 않으며 왕 노릇 하는 자는 세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그 의를 세웁니다. 지금 월나라를 보존하는 것으로써 제후에게 仁을 보여주시고 노나라를 구원하고 제나라를 쳐서 위엄을 진나라에 더한다면 제후들은 반드시 서로 이끌고 오나라에 조회할 것이니 패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왕께서 반드시 월나라를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면 신이 동쪽으로 가서 월나라 왕을 뵙고 군대를 내어 따르게 할 것을 청하여 따른다면 이는 실제로 월나라를 비게하는 것이고, 명분으로는 제후로써 정벌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했다. 오나라 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에 자공으로 하여금 오나라에 가게 하였다.
[一] 索隱惡猶畏惡也。
[一] 【索隱】 惡은 畏惡(악을 미워함)과 같다.
越王除道郊迎,身御至舍而問曰:「此蠻夷之國,大夫何以儼然辱而臨之?」子貢曰:「今者吾說吳王以救魯伐齊,其志欲之而畏越,曰『待我伐越乃可』。如此,破越必矣。且夫無報人之志而令人疑之,拙也;有報人之志,使人知之,殆也;事未發而先聞,危也。三者舉事之大患。」
월나라 왕이 길을 청소하고 교외에서 맞아 자신이 수레를 몰아 집에 이르러 묻기를 “여기는 만이(오랑캐)의 나라인데 대부는 무엇 때문에 욕을 무릅쓰고서 왔습니까?”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오나라 왕에게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토벌할 것을 설득하였는데 그 뜻은 그것을 바라되 월나라를 두려워하여 ‘내가 월나라를 정벌함을 기다려야 이에 가능하다’ 합니다. 이 같이 월나라를 깨트리려 함이 틀림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갚을 뜻이 없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는 것은 졸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갚으려는 뜻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은 위태롭습니다.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이)먼저 듣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세 가지는 일의 큰 근심을 든(열거한) 것입니다.
句踐頓首再拜曰:「孤嘗不料力,乃與吳戰,困於會稽,痛入於骨髓,日夜焦脣乾舌,徒欲與吳王接踵而死,孤之願也。」遂問子貢。子貢曰:「吳王為人猛暴,群臣不堪;國家敝以數戰,士卒弗忍;百姓怨上,大臣內變;子胥以諫死,[一]太宰嚭用事,順君之過以安其私:是殘國之治也。今王誠發士卒佐之徼[二]其志,[三]重寶以說其心,卑辭以尊其禮,其伐齊必也。彼戰不勝,王之福矣。戰勝,必以兵臨晉,臣請北見晉君,令共攻之,弱吳必矣。其銳兵盡於齊,重甲困於晉,而王制其敝,此滅吳必矣。」越王大說,許諾。送子貢金百鎰,劍一,良矛二。子貢不受,遂行。
구천이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힘을 헤아리지 않고 오나라와 싸워 회계에서 어려움으로 고통이 골수에 들어와 낮과 밤으로 입술이 타고 혀가 마릅니다. 오나라 왕과 발뒤꿈치를 접하고 죽고자 하는 것이 내의 워하는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이 말하기를 “오나라 왕은 사람됨이 사나워서 여러 신하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국가는 여러 번의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사졸은 참지 못하고, 백성을 윗사람을 원망하며, 대신은 안에서 변하였으며, 오자서가 간하다 죽음을 당하고 태재 백비가 일을 써서 임금의 잘못을 순종하는 것으로써 그 사사로움을 편안히 여기니 이는 나라를 해치는 정치입니다. 지금 왕께서 정성으로 사졸을 내어 그들을 돕고 그 뜻을 살피고 많은 보배로써 그 마음을 기쁘게 하며 (자신을 낮추는) 말로써 그 예우를 높이면 그는 제나라를 정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왕에게 복이고, 전쟁에 이기면 반드시 군대로써 晉나라에 임할 것입니다. 신이 북쪽으로 가서 진나라 임금을 뵙고 함께 공격할 것을 청하면 오나라가 약해 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정예의 군대가 제나라에서 다하고 거듭 군사가 진나라에게 곤경에 처하고 왕이 그 해짐을 제재한다면 이는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월나라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허락하였다. 자공에게 금 10일과 검 한 자루, 좋은 창 두 개를 주어 보냈다. 자공이 받지 않고 마침내 떠났다.
[一] 索隱王劭按:家語、越絕並無此五字。是時子胥未死。
[一] 【索隱】 왕소가 살펴보니 『家語』와 越竊에 나란히 이 다섯 글자가 없다. 이때는 아직 오자서가 죽지 않았다.
[二] 集解結堯反。
[二] 【集解】 結과 堯의 反이다.
[三] 集解王肅曰:「激射其志。」
[三] 【集解】 왕숙이 말하기를 “그 뜻을 따르는 것이다.” 했다.
報吳王曰:「臣敬以大王之言告越王,越王大恐,曰:『孤不幸,少失先人,內不自量,抵罪於吳,軍敗身辱,棲于會稽,國為虛莽,[一]賴大王之賜,使得奉俎豆而修祭祀,死不敢忘,何謀之敢慮!』」後五日,越使大夫種頓首言於吳王曰:「東海役臣孤句踐使者臣種,敢修下吏問於左右。今竊聞大王將興大義,誅彊救弱,困暴齊而撫周室,請悉起境內士卒三千人,孤請自被堅執銳,以先受矢石。因越賤臣種奉先人藏器,甲二十領,鈇屈盧之矛,[二]步光之劍,以賀軍吏。」
吳王大說,以告子貢曰:「越王欲身從寡人伐齊,可乎?」子貢曰:「不可。夫空人之國,悉人之眾,又從其君,不義。君受其幣,許其師,而辭其君。」吳王許諾,乃謝越王。於是吳王乃遂發九郡兵伐齊。
오나라 왕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신이 공경히 대왕의 말로써 월나라 왕에게 알렸더니 월나라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내가 불행히도 어려서 先人(先親)을 잃고 안으로는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여 오나라에는 죄를 짓고, 군대는 무너지고 몸은 욕을 받았으며, 회계에 머물면서 나라를 황폐하게 하였는데 대왕의 내림에 의지하여 제기를 받들고 제사를 닦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감히 잊을 수 없는데 어찌 감히 도모함을 생각하랴!’” 하였습니다. 5일 후 월나라가 대부 종이 사신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오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동해의 役臣(부려지는 신하)인 저 구천의 사신인 신 種이 감히 下吏(하급관리)의 (예)를 닦고 좌우에 문안합니다. 지금 대왕이 장차 大義를 일으켜 강함을 죽이고 약함을 구원하려 하여 사나운 제나라를 곤궁하게 하고 주나라 왕실을 어루만지려 한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라 안의 사졸 3천명을 모두 일으켜서 제가 스스로 갑옷을 입고 날카로움(무기)을 잡는 것으로써 먼저 화살과 돌을 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다.(그렇기 때문에) “월나라의 천한 신하인 종이 선인의 감추어두었던 기물인 갑옷 20벌, 도끼와 굴노라 불리는 창, 보광이라 불리는 검을 받들어 軍吏를 축하드립니다.” 했다. 오나라 왕이 크게 기뻐하여 자공에게 말하기를 “월나라 왕이 몸소 과인의 제나라 정벌을 따르고자 하니 할 수 있겠는가?” 했다. 자공이 말하기를 “안됩니다. 대저 다른 사람의 나라를 비우고 다른 사람의 무리를 모두 거두고 또한 그 임금을 따르게 하는 것은 의롭지 않은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그 폐백(선물)을 거두고 그 군대를 허락하되 그 임금은 사양하십시오” 했다. 오나라 왕이 허락하고 이에 월나라 왕에게 사례하였다. 이에 오나라 왕이 마침내 9군의 군대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一] 集解虛音墟。莽,莫朗反。 索隱有本作「棘」,恐誤也。
[一] 【集解】 虛의의 음은 墟 이다. 莽은 莫과 朗의 反이다. 【索隱】 ‘棘’이라 쓴 본이 있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二] 索隱鈇音膚,斧也。劉氏云一本無此字。屈盧,矛名。
[二] 【索隱】 鈇의 음은 膚이니 도끼이다. 유씨가 말하기를 “어떤 본에는 이 글자가 없다.”고 했다. 屈盧는 창 이름이다.
子貢因去之晉,謂晉君曰:「臣聞之,慮不先定不可以應卒[一],兵不先辨不可以勝敵。今夫齊與吳將戰,彼戰而不勝,越亂之必矣;與齊戰而勝,必以其兵臨晉。」晉君大恐,曰:「為之柰何?」子貢曰:「修兵休卒以待之。」晉君許諾。
자공이 떠나 晉나라에 가서 진 나라 임금에게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생각함이 먼저 정해지지 않으면 갑작스러움에 대응하지 못하고, 군대를 먼저 판별하지 않으면 적에게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저 제나라와 오나라가 장차 싸워서 저들이(제나라가) 싸워 이기지 못하면 월나라가 반드시 어지럽힐 것이고, 제나라가 싸워서 이긴다면 반드시 그 군대가 晉 나라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진나라 임금이 크게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자공이 말하기를 “군대를 훈련시키고 병졸을 쉬게 하는 것으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했다. 진나라 임금이 허락하였다.
[一] 索隱按:卒謂急卒也。言計慮不先定,不可以應卒有非常之事。
[一] 【索隱】 살펴보니 卒은 급함이다. 생각이 먼저 정해지지 않으면 급한 비상의 일이 있을 때 대응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子貢去而之魯。吳王果與齊人戰於艾陵,[一]大破齊師,獲七將軍之兵而不歸,果以兵臨晉,與晉人相遇黃池[二]之上。吳晉爭彊。晉人擊之,大敗吳師。越王聞之,涉江襲吳,去城七里而軍。吳王聞之,去晉而歸,與越戰於五湖。三戰不勝,城門不守,越遂圍王宮,殺夫差而戮其相。[三]破吳三年,東向而霸。
자공이 떠나서 노나라에 갔다. 오나라 왕이 과연 제나라 사람과 애릉에서 싸워 제나라군대를 크게 깨트리고 일곱 장군의 군대를 잡고도 돌아가지 않고 과연 군대로서 晉나라에 임하여 진나라 사람들과 서로 황지 가에서 만났다. 오나라와 진나라가 강함을 다투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쳐서 크게 오나라 군대를 무너뜨렸다. 월나라 왕이 그것을 듣고 강을 건너 오나라를 습격하여 성으로부터 7리 떨어진 곳에 군을 주둔하였다. 오나라 왕이 그것을 듣고 진나라를 떠나 돌아가 월나라와 오릉에서 싸웠다. 3번 싸워 이기지 못하고 성문을 지키지 못하자 월나라가 마침내 왕궁을 둘러싸 부차를 죽이고 그 재상을 죽였다. 오나라를 깨트린지 3년에 동쪽을 향하고 패업을 이루었다.
[一] 索隱按:左傳在哀十一年。
[一] 【索隱】 살펴보니 『左傳』 애공 11년에 있다.
[二] 索隱左傳黃池之會在哀十三年。越入吳,吳與越平也。
[二] 【索隱】 『左傳』에 황지의 만남은 애공 13년에 있다. 월나라가 오나라에 들어갔으니 오나라와 월나라는 평지이다.
[三] 索隱按:左傳越滅吳在哀二十二年,則事並懸隔數年。蓋此文欲終說其事,故其辭相連。
[三] 【索隱】 살펴보니 『左傳』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애공 22년에 있으니 곧 일이 아울러 여러 해 떨어져 있다. 대개 이는 글이 그 일을 말함을 마치고자 (마저 말하고자)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서로 이어진 것일 것이다.
故子貢一出,存魯,亂齊,破吳,彊晉而霸越。子貢一使,使勢相破,十年之中,五國各有變。[一]
그러므로 자공이 한 번 나가서 노나라를 보존하고, 제나라를 어지럽혔으며, 오나라를 깨트리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월나라는 패업을 이루었다. 자공이 한 번 사신가서 형세로 서로 깨트리게 하니 10년 동안 다섯 나라에 변화가 있었다.
[一] 索隱按:左傳謂魯、齊、晉、吳、越也,故云「子貢出,存魯,亂齊,破吳,彊晉而霸越」。
[一] 【索隱】 살펴보니 『左傳』에 노나라, 제나라, 진나라, 오나라, 월나라를 말하였기 때문에 ‘자공이 나가 노나라를 보존하고, 제나라를 어지럽히고, 오나라를 깨트렸으며,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월나라는 패업을 이루었다.’고 한 것이다.
子貢好廢舉,與時轉貨貲。[一]喜揚人之美,不能匿人之過。常相魯衛,家累千金,卒終于齊。
자공은 (물자) 저장하였다가 때에 따라 재물을 굴리기를 좋아하였다.(잘하였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드러내기를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숨기지 못하였다. 일찍이 노나라와 위나라에서 재상을 지냈고, 집에는 천금을 쌓았으며, 제나라에서 죽었다.
[一] 集解廢舉謂停貯也。與時謂逐時也。夫物賤則買而停貯,值貴即逐時轉易,貨賣取資利也。索隱按:家語「貨」作「化」。王肅云:「廢舉謂買賤賣貴也,轉化謂隨時轉貨以殖其資也。」劉氏云:「廢謂物貴而賣之,舉謂物賤而收買之,轉貨謂轉貴收賤也。」
[一] 【集解】 廢擧는 머물러 쌓아둠을 말한다. 與時는 때를 따름을 말한다. 대저 물건이 천하면 곧 사서 머물러 쌓아두었다가 가치가 귀하면 곧 때에 따라 굴리고 바꾸고, 재물을 팔아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索隱】 살펴보니 『家語』에 ‘貨’를 ‘化’로 썼다. 왕숙이 말하기를 “廢擧는 천한 것은 사고 귀한 것은 파는 것이다. 轉化는 때에 따라 재물을 구리는 것으로써 그 재물을 이식하는 것이다.” 했다. 유씨가 말하기를 “廢는 물건이 귀하면 그것을 파는 것이고, 물건이 천하면 거두어서 사는 것이다. 轉貨는 귀한 것은 굴리고 천한 것은 거두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言偃,吳人,[一]字子游。少孔子四十五歲。
言偃은 오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유이다. 공자보다 45세 적다.
[一] 索隱家語云魯人。按:偃仕魯為武城宰耳。今吳郡有言偃冢,蓋吳郡人為是也。
[一] 【索隱】 『家語』에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살펴보니 언(자유)은 노나라에서 벼슬하여 무성의 읍재가 되었을 뿐이다. 지금 吳郡에 언언의 무덤이 있으니 오군 사람이라 한 것이 옳음이 된다.
子游既已受業,為武城宰。[一]孔子過,聞弦歌之聲。孔子莞爾而笑[二]曰:「割雞焉用牛刀?」[三]子游曰:「昔者偃聞諸夫子曰,君子學道則愛人,小人學道則易使。」[四]孔子曰:「二三子,[五]偃之言是也。前言戲之耳。」[六]孔子以為子游習於文學。
자유가 이미 학업을 받고 무성의 읍재가 되었다. 공자가 지나다 絃歌(현악기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소리 없이 빙그레 웃고는 웃음지으며 말하기를 “닭을 가르는데(잡는데) 어찌 소 칼(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했다. 자유가 말하기를 “옛 날에 (언이)제가 선생님께 들으니 말씀하시기를 ‘군자가 도를 배우면 곧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곧 부리기 쉽다.’ 하였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얘들아 언(자유)의 말이 옳다. 앞에 말한 것은 그 것을 희롱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공자는 자유가 문학을 익혔다고 여겼다.
[一] 正義括地志云:「在兗州,即南城也。輿地志云南武城縣,魯武城邑,子游為宰者也,在泰山郡。」
[一] 【正義】 『括地志』에 “‘연주에 있으니 곧 南城이다.’ 하고, 『輿地志』에 ‘남무성현은 노나라 무성읍인데 자유는 읍재가 된 자로 태산군에 있다.’ 고 했다.”
[二] 集解何晏曰:「莞爾,小笑貌。」
[二]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莞爾는 빙그레 웃는 모양이다.” 했다.
[三] 集解孔安國曰:「言治小何須用大道。」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작은 것을 다스리는데 어찌 큰 도를 쓸 필요가 있는가?” 한 것이라 했다.
[四] 集解孔安國曰:「道謂禮樂也。樂以和人,人和則易使。」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도는 예악을 말한다. 악으로서 사람을 和하게 하고, 사람이 和하면 곧 부리기 쉽다.” 고 했다.
[五] 集解孔安國曰:「從行者。」
[五]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따라 다니는 자들”이라 했다.
[六] 集解孔安國曰:「戲以治小而用大。」
[六]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작은 것을 다스리는데 큰 것을 쓰느냐고 희롱한 것이다.” 했다.
卜商[一]字子夏。少孔子四十四歲。
복상은 자가 자하이니 공자보다 44세 적다.
[一] 集解家語云衛人。鄭玄曰溫國卜商。索隱按:家語云衛人,鄭玄云溫國人,不同者,溫國今河內溫縣,元屬衛故。
[一] 【集解】 『家語』에는 “위나라 사람”이라 했다. 정현이 말하기를 “온나라 복상”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는 “위나라 사람”이라 하고, 정현은 “온나라 사람”이라 하여 같지 않은 것은 온나라는 지금의 하내 온현으로 원래 위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子夏問:「『巧笑倩兮,美目盼兮,素以為絢兮』,何謂也?」[一]子曰:「繪事後素。」[二]曰:「禮後乎?」[三]孔子曰:「商始可與言詩已矣。」[四]
자하가 묻기를 “공교로이 웃는 입모습 예쁘고, 아름다운 눈의 눈매가 예쁘구나! 흰 바탕에 채색한다.” 하니 무엇을 말함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바탕이 희게 된 후에 한다.” 하였다. 자하가 말하기를 “예를 갖춘 뒤에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상(자하)이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만하다.” 하였다.
[一] 集解馬融曰:「倩,笑貌。盼,動目貌。絢,文貌。此上二句在衛風碩人之二章,其下一句逸詩。」
[一]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倩은 웃는 모양이다. 눈을 움직이는 모양이다. 絢은 문채 있는 모양이다. 이상의 두 구절은 (『詩經』) 위풍 碩人의 시 2장이고, 그 아래의 한 구절은 逸詩이다.
[二] 集解鄭玄曰:「繪,畫文也。凡晝繪先布眾色,然後以素分布其閒以成其文,喻美女雖有倩盼美質,亦須禮以成也。」
[二]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繪는 그림에 채색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는 먼저 여러 색을 펼쳐놓은 후에 흰색으로써 그 사이를 나누어 편 후 채색을 이룬다. 미녀가 비록 예쁘게 웃고, 눈웃음치고 바탕이 아름다워도 또한 반드시 예로써 완성됨을 비유한 것이다.
[三] 集解何晏曰:「孔言繢事後素,子夏聞而解知以素喻禮,故曰『禮後乎』。」
[三]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공자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색을 마련한 후’ 라 하자 자하가 듣고 素(흰색)를 예에 비유하여 풀어 알았다. 그러므로 ‘예가 행해진 뒤입니까?’고 한 것이다.” 했다.
[四] 集解包氏曰:「能發明我意,可與言詩矣。」
[四]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내 뜻을 펼쳐 밝힐 수 있으니 함께 시를 말할만하다.” 했다.
子貢問:「師與商孰賢?」子曰:「師也過,商也不及。」[一]「然則師愈與?」曰:「過猶不及。」
자공이 묻기를 “사(자장)와 상(자하)은 누가 어집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했다. (자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가 나은 것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言俱不得中。」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모두 中을 얻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했다.
子謂子夏曰:「汝為君子儒,無為小人儒。」[一]
공자가 자하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의 儒가 되고, 소인의 儒가 됨이 없게 하라(되지 말라)” 했다.
[一] 集解何晏曰:「君子之儒將以明道,小人為儒則矜其名。」
[一]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군자의 儒는 장차 도를 밝히고, 소인의 儒는 곧 그 명예를 자랑한다.” 했다.
孔子既沒,子夏居西河[一]教授,為魏文侯師。[二]其子死,哭之失明。
공자가 죽고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가르침을 주었는데, 魏나라 文侯의 스승이 되었다. 그 아들이 죽자 곡을 하여 눈(시력)을 잃었다.
[一] 索隱在河東郡之西界,蓋近龍門。劉氏云:「今同州河西縣有子夏石室學堂也。」 正義西河郡,今汾州也。爾雅云:「兩河閒曰冀州。」禮記云:「自東河至於西河。」河東故號龍門河為西河,漢因為西河郡,汾州也,子夏所教處。括地志云:「謁泉山一名隱泉山,在汾州隰城縣北四十里。注水經云『其山崖壁五,崖半有一石室,去地五十丈,頂上平地十許頃。隨國集記云此為子夏石室,退老西河居此』。有卜商神祠,今見在。」
[一] 【索隱】 (서하는) 하동군의 서쪽 경계에 있는데 대개 용문과 가깝다. 유씨가 말하기를 “지금의 동주 서하현에 자하의 석실 학당이 있다.”고 했다. 【正義】 서하군은 지금의 분주이다. 『詩經』 爾雅에 “두 河(강) 사이를 기주라 말한다.” 했다. 『禮記』에 말하기를 “동하로부터 서하에 이르기까지이다.” 했다. 하동은 옛날 龍門河인데 서하가 되었고, 한나라 때는 이 때문에 서하군, 분주라 하였으니 자하가 가르친 곳이다. 『括地志』에 말하기를 “갈천산 일명 은천산은 분주 습성현 북쪽 40리에 있다.” 고 했다. 『注水經』에 말하기를 “그 산은 낭떠러지가 5군데로 낭떠러지 반쯤에 한 석실이 있고 땅으로부터 50장 떨어져 있으며, 정상에는 평지가 10경쯤 된다.” 했다. 『隨國集記』에 말하기를 “이것이 자하의 석실이 되니 서하에 은퇴하고 늙어서 여기에 살았다.” 고 했다. 복상을 제사하는 신사가 있는데 지금도 볼 수 있다.
[二] 索隱按:子夏文學著於四科,序詩,傳易。又孔子以春秋屬商。又傳禮,著在禮志。而此史並不論,空記論語小事,亦其疏也。正義文侯都安邑。孔子卒後,子夏教於西河之上,文侯師事之,咨問國政焉。
[二] 【索隱】 살펴보니 자하는 4과(덕행, 언어, 정사, 문학) 가운데 문학과 서시, 傳易에 뛰어났다. 또 공자는 『春秋』를 자하에게 부탁하였다. 또 傳禮는 ‘禮志’에 드러나 있다. 이는 사관이 나란히 논하지 않고 공연히 『論語』와 작은 일을 기록하였으니 또한 소략한 것이다. 【正義】 문후는 안읍에 도읍하였다.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서하 가에서 가르쳤는데 문후가 스승으로 섬기고 국정을 자문 받았다.
顓孫師,陳人,[一]字子張。少孔子四十八歲。
전손사는 陳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장이다. 공자보다 48세가 적다.
[一] 索隱鄭玄目錄陽城人。陽城,縣名,屬陳郡。
[一] 【索隱】 정현의 목록에는 양성인이라 했다. 양성은 현의 이름이니 진군에 속한다.
子張問干祿,[一]孔子曰:「多聞闕疑,慎言其餘,則寡尤;[二]多見闕殆,慎行其餘,則寡悔。[三]言寡尤,行寡悔,祿在其中矣。」[四]
자장이 옥을 구하는 것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많이 들고 의심나는 것은 빼두고, 그 나머지를 말함에 삼가면 곧 허물이 적다. 많이 보고 위태로움을 빼두고 그 나머지를 행함에 삼가면 곧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녹은 그 안에 있다.
[一] 集解鄭玄曰:「干,求也。祿,祿位也。」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干은 구함이다. 祿은 녹과 지위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尤,過也。疑則闕之;其餘不疑,猶慎言之,則少過。」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尤는 허물이다. 의심나는 것은 빼두면 그 나머지 의심하지 않는 것을 만약 말을 삼가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했다.
[三] 集解包氏曰:「殆,危也。所見危者,闕而不行,則少悔。」
[三]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殆는 위태로움이다. 위태로움을 본 자는 빼놓아서 가지 않으니 곧 뉘우침이 적다.” 했다.
[四] 集解鄭玄曰:「言行如此,雖不得祿,得祿之道。」
[四]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말과 행동이 이 같으면 비록 녹을 얻지 못하여도 녹을 얻은 방도이다.” 했다.
他日從在陳蔡閒,困,問行。孔子曰:「言忠信,行篤敬,雖蠻貊之國行也;言不忠信,行不篤敬,雖州里行乎哉![一]立則見其參於前也,在輿則見其倚於衡,夫然後行。」[二]子張書諸紳[三]。
다른 날에 (공자를 )따라서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있을 때 어려움을 겪고 (자기 생각을) 行함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말은 정성스럽고 믿음직하게 하고, 행실은 敬을 두터이 하면 비록 蠻貊(오랑캐)의 나라일지라도 행해진다. 말이 정성스럽고 믿음직하지 못하고, 행실이 두터이 공경하지 않으면 비록 州里(마을)인들 행해질 수 있겠는가! 서면 곧 앞에서 가지런함을 보이고, 수레에 있을 때는 가로대에 기댄 것을 보인 후에 행할 수 있다.” 하니 자장이 띠에 적었다.
[一] 集解鄭玄曰:「二千五百家為州,五家為鄰,五鄰為里。行乎哉,言不可行。」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2500가를 州라 하고, 5家를 隣이라 하고, 5隣을 里라 한다. ‘行乎哉’는 행할 수 없다는 말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衡,軶也。言思念忠信,立則常想見,參然在前;在輿則若倚於車軶。」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衡’은 멍에이다. 忠信을 생각하여, 서면 항상 (충신을)미루어 헤아리고 앞에 있을 때는 뵙는 듯이 하고, 수레에 잇어서는 곧 수레 멍에에 기댄 듯이 함을 말한다.”고 했다.
[三] 集解孔安國曰:「紳,大帶也。」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紳은 큰 띠이다.” 했다.
子張問:「士何如斯可謂之達矣?」孔子曰:「何哉,爾所謂達者?」子張對曰:「在國必聞,在家必聞。」[一]孔子曰:「是聞也,非達也。夫達者,質直而好義,察言而觀色,慮以下人,[二]在國及家必達。[三]夫聞也者,色取仁而行違,居之不疑,[四]在國及家必聞。」[五]
자장이 묻기를 “士(선비)가 어떻게 하여야 통달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네가 말한 통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자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명예가 있고, 집에 있어서도 반드시 명예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이는 명예이니 통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저 통달이라 하는 것은 바탕을 곧게 하여 의를 좋아하며 말을 살피고 (상대의)안색을 살피며, 아래에 있는 사람을 염려하는 것이 나라와 집에 있을 때 반드시 통달하는 것이다. 대저 명예는 안색(얼굴 색)으로는 仁을 취하되 행동은 어기고, 그것에 머무름을 의심하지 않으면 나라와 집에 있어서 반드시 명예가 있다.” 고 했다.
[一] 集解鄭玄曰:「言士之所在,皆能有名譽。」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士의 있는 바가 모두 명예가 있을 수 있음을 밀한다.”
[二] 集解馬融曰:「常有謙退之志,察言語,觀顏色,知其所欲,其念慮常欲下於人。」
[二]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항상 겸손하고 물러남의 뜻이 있고, 언어를 살피고, (생대의) 안색을 관찰하여 그 바라는 바를 알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낮추고자 생각하는 것이다.” 했다.
[三] 集解馬融曰:「謙尊而光,卑而不可踰。」
[三]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겸손하고 높여도 빛아고, 낮추어도 넘을 수 없다.” 고 했다.
[四] 集解馬融曰:「此言佞人也。佞人假仁者之色,行之則違;安居其偽而不自疑。」
[四]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간사하고 아첨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仁한 자의 안색을 빌리되 그것을 행하는 것은 곧 어긋나고, 그 거짓에 머무름을 편안히 여겨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다.
[五] 集解馬融曰:「佞人黨多。」
[五]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간사하고 아첨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무리가 많다.” 했다.
曾參,南武城人,[一]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
증삼은 남무성인이니 자는 자여이다. 공자보다 16세 적다.
[一] 索隱按:武城屬魯。當時魯更有北武城,故言南也。正義括地志云:「南武城在兗州,子游為宰者。地理志云定襄有武城,清河有武城,故此云南武城也。」
[一] 【索隱】 살펴보니 “무성은 노나라에 속한다. 당시에 노나라가 다시 북무성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남이라고 말한 것이다.” 했다. 【正義】 『括地志』에 이르기를 “남무성은 연주에 있는데 자유가 읍재가 되었다.” 지리지에 말하기를 “정양에 무성이 있고, 청하에도 무성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남무성이라 한 것이다.” 했다.
孔子以為能通孝道,[一]故授之業。作孝經。死於魯。
공자는 효도에 능통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학업을 주었다. 『孝經』을 짓게 하였다. 노나라에서 죽었다.
[一] 正義韓詩外傳云:「曾子曰:『吾嘗仕為吏,祿不過鍾釜,尚猶欣欣而喜者,非以為多也,樂道養親也。親沒之後,吾嘗南游於越,得尊官,堂高九仞,榱提三尺,轉轂百乘,然猶北向而泣者,非為賤也,悲不見吾親也。』」
[一] 【正義】 『한시외전』에 이르기를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벼슬하여 吏가 되어 녹이 鐘釜를 지나지(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흡족하여 기쁜 듯이 한 것은 많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도를 즐기고 어버이를 봉양하였기 때문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 내가 일찍이 남쪽으로 월나라에서 놀면서 높은 관직을 얻어 집의 높이가 아홉 길이고, 서까래의 들림이 3자였으며, 굴릴 곡식이 100수레였으나 오히려 북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 것은 천하다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내 어버이를 볼 수 없음을 슬퍼하였기 때문이다.” 했다.
澹臺滅明,[一]武城人,[二]字子羽。少孔子三十九歲。
담대멸명은 무성인이니 자는 자우이다. 공자보다 39세 적다.
[一] 集解包氏曰:「澹臺,姓;滅明,名。」 正義括地志云:「延津在滑州靈昌縣東七里。注水經云:『黃河水至此為之延津。昔澹臺子羽齎千金之璧渡河,陽侯波起,兩蛟夾舟。子羽曰:「吾可以義求,不可以威劫。」操劍斬蛟。蛟死,乃投璧於河,三投而輒躍出,乃毀璧而去,亦無怪意。』即此津也。」
[一]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담대는 성이고, 멸명은 이름이다.” 했다. 【正義】 『括地志』에 말하기를 “연진은 활주 영창현 동쪽 7리에 있다.” 했다. 『注水經』에 말하기를 “황하의 물이 이에 이른 것을 연진이라 한다. 옛날 담대자우가 천금의 구슬을 가지고 황하를 건너는데 양후(파도의 신)가 파도가 일으키고, 두 교룡이 배를 둘러쌌다. 자우가 말하기를 ‘내가 의리로써 구할 수 있으나 위엄으로 겁을 줄 수 없다.’ 하고는 검을 잡아 교룡을 베어 죽였다. 교룡이 죽자 이에 구슬을 河에 던졌는데 3번을 던져 번번이 튀어 나왔다. 이에 구슬을 부수고 갔더니 또한 괴이함이 없어졌다.” 하였는데 곧 이 나루이다.
[二] 正義括地志云亦在兗州。
[二] 【正義】 『括地志』에 말하기를 “또한 연주에 있다.” 했다.
狀貌甚惡。欲事孔子,孔子以為材薄。既已受業,退而修行,行不由徑,非公事不見卿大夫。[一]
모습이 매우 나쁘고(못 생겼다.) 공자를 섬기고자 하였으나 공자는 재질이 박하다고 여겼다. 수업을 마치고는 물러나 행을 닦았는데 감에는 지름길을 경유하지 않았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 대부를 만나지 않았다.
[一] 集解包氏曰:「言其公且方。」
[一]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그 공정하고 또 반듯함을 말한다.”고 했다.
南游至江,[一]從弟子三百人,設取予去就,名施乎諸侯。孔子聞之,曰:「吾以言取人,失之宰予;以貌取人,失之子羽[二]。」
남쪽으로 노닐면서 강(장강)에 이르렀는데 따르는 제자가 300인으로 취함과 줌, 떠남과 나아감을 베풀어 이름을 제후에게 베풀었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말로써 사람을 취하여 재여에서 잘못 되었고, 용모로써 사람을 취하여 자우에게서 잘못되었다.” 고 했다.
[一] 索隱按:今吳國東南有澹臺湖,即其遺跡所在。
[一] 【索隱】 살펴보니 지금 오나라 동남쪽에 담대호가 있으니 곧 그 남은 자취가 있는 곳이다.
[二] 索隱按:家語「子羽有君子之容,而行不勝其貌」。而上文云「滅明狀貌甚惡」,則以子羽形陋也。今此孔子云「以貌取人,失之子羽」,與家語正相反。正義按:澹子羽墓在兗州鄒城縣。
[二] 【索隱】 살펴보니 『家語』에 “자우는 군자의 용모가 있었으되 행실은 그 용모보다 못하였다.” 했다. 위글에 이르기를 “명멸의 용모가 매우 추하였다.” 했으니 곧 자우의 형상이 비루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공자가 말하기를 “용모로써 사람을 취하여 자우에서 잘못되었다.” 하니 『家語』와는 바로 반대이다. 【正義】 살펴보니 단자우의 무덤은 연주 추성현에 있다.
宓不齊字子賤。[一]少孔子三十歲。[二]
복부제는 자가 자천이니 공자보다 30세 적다.
[一] 集解孔安國曰魯人。正義顏氏家訓云:「兗州永昌郡城,舊單父縣地也。東門有子賤碑,漢世所立,乃云濟南伏生即子賤之後,是『虙』之與『伏』古來通,字誤為『宓』,較可明矣。虙字從『虍』,音呼;宓從『』。音綿。下俱為『必』,世傳寫誤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正義】 『顔氏家訓』에 말하기를 “연주 영창군성은 옛 단부현 땅이다. 동문에 자천의 비가 있는데 한나라 때 세워졌고, 여기에 말하기를 ‘제남의 복생은 곧 자천의 후손이다.’ 이는 ‘虙’와 ‘伏’이 옛날부터 통하여 글자가 잘못 ‘宓’이 되었음은 비교하면 분명하다. ‘虙’자는 ‘虍’로부터 나왔으니 음은 ‘呼’이다. 宓은 ‘要’로부터 나왔으니 음은 ‘綿’이다. 아래에 모두 ‘必’이라 한 것은 세상에 전하면서 잘못 베낀 것이다.” 했다.
[二] 索隱家語云「魯人,字子賤,少孔子四十九歲」。此云「三十」,不同。
[二]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천으로 공자보다 49세 적다.” 하고, 여기에서 30세라 하니 같지 않다.
孔子謂「子賤君子哉!魯無君子,斯焉取斯?」[一]
공자가 말하기를 “자천은 군자로다! 노나라에는 군자가 없었다면 이에어디서 이를 취하였겠는가?” 했다.
[一] 集解包氏曰:「如魯無君子,子賤安得此行而學?」
[一]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만약에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자천이 어찌 이러한 행동을 배울 수 있었겠는가?” 한 것이다.
子賤為單父宰,[一]反命於孔子,曰:「此國有賢不齊者五人,[二]教不齊所以治者。」孔子曰:「惜哉不齊所治者小,所治者大則庶幾矣。」
자천이 단부의 읍재가 되어다가 돌아와 공자에게 복명하며 말하기를 “이 나라에 저(부제)보다 어진이가 다섯이 있어 저(부제)에게 다스리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애석하다. 부제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적으니 다스림 받는 자가 크면 곧 (도)에 가까울 것이다.” 했다.
[一] 正義宋州縣也。說苑云:「宓子賤理單父,彈琴,身不下堂,單父理。巫馬期以星出,以星入,而單父亦理。巫馬期問其故。宓子賤曰:『我之謂任人,子之謂任力。任力者勞,任人者逸。』」
[一] 【正義】 송나라의 주현이다. 『說苑』에 말하기를 “복자천이 단부를 다스릴 때 거문고를 튕기고, 몸은 집을 내려가지 않아도 단부가 다스려졌다. 무마기는 별로써 나오고(새벽에 나오고), 별로써 들어가서(저녁 늦게 들어가고) 단부가 또한 다스려졌다. 무마기가 그 이유를 물으니 복자천이 말하기를 ‘나는 사람에게 맡기고 그대는 힘에 맡긴다. 힘에 맡기는 자는 수고롭고 사람에 맡기는 자는 편안하다.” 했다.
[二] 索隱按:家語云「不齊所父事者三人,所兄事者五人,所友者十一人」,不同也。
[二] 【索隱】 살펴보니 『家語』에 말하기를 “부제는 아버지로 섬긴 자가 3인이고 형으로 섬긴 자가 5인이며 벗으로 한자가 11인다.” 했으니 같지 않다.
原憲[一]字子思。
원헌은 자가 자사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鄭玄云魯人。家語云:「宋人。少孔子三十六歲。」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索隱】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家語』에 말하기를 “송나라 사람이니 공자보다 36세 적다.”고 했다.
子思問恥。孔子曰:「國有道,穀。[一]國無道,穀,恥也。」[二]
자사가 부끄러움을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여) 녹을 먹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도 (벼슬하여)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穀,祿也。邦有道,當食祿。」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穀은 녹이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여) 녹을 먹은 것이 마땅하다.”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君無道而在其朝,食其祿,是恥辱也。」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임금이 도가 없는데도 그 조정에 잇으면서 그 녹을 먹는 이것은 치욕이다.” 했다.
子思曰:「克伐怨欲不行焉,可以為仁乎?」[一]孔子曰:「可以為難矣,仁則吾弗知也。」[二]
자사가 말하기를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고, 스스로 그 공을 자랑하며, 꺼림과 탐욕을 행하지 않으면 仁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어려울 것이다. 仁한지는 곧 내가 알지 못한다.” 했다.
[一] 集解馬融曰:「克,好勝人也。伐,自伐其功。怨,忌也。欲,貪欲也。」
[一]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克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다. 伐은 스스로 그 공을 자랑함이고, 怨은 꺼림이다. 欲은 탐욕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四者行之難,未足以為仁。」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4가지를 행기 어려움으로는 仁을 삼기 부족하다.” 했다.
孔子卒,原憲遂亡在草澤中。[一]子貢相衛,而結駟連騎,排藜藿入窮閻,過謝原憲。憲攝敝衣冠見子貢。子貢恥之,曰:「夫子豈病乎?」原憲曰:「吾聞之,無財者謂之貧,學道而不能行者謂之病。若憲,貧也,非病也。」子貢慚,不懌而去,終身恥其言之過也。
공자가 죽자 원헌이 마침내 도망하여 풀과 늪 가운데 있었다. 자공이 위나라의 재상이 되어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명아주와 콩잎을 헤치고 가난한 사람이 사는 거리로 들어와 원헌에게 잘못(자주 만나지 못한 것)을 사과하였다. 원헌이 해진 옷과 관을 여미고 자공을 만났다. 자공이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궁색한가?” 하니 원헌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재물이 없는 것을 貧(가난하다)이라 하고, 도를 배웠으되 행하지 못하는 것을 病이라 한다고 한다. 憲(나는)의 경우는 가난하나 病은 아니다.” 했다. 자공이 부끄러워하고 기뻐하지 않고 가서 죽을 때까지 그 말의 잘못을 부끄러워하였다.
[一] 索隱家語云:「隱居衛。」
[一]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위나라에 은거하였다.” 했다.
公冶長,齊人,字子長。[一]
공야장은 제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장이다.
[一] 索隱家語云:「魯人,名萇,字子長。」范甯云:「字子芝。」
[一]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니 이름은 장이고, 자는 자장이다.” 했다. 범녕이 말하기를 “자는 子芝”라 했다.
孔子曰:「長可妻也,雖在累紲之中,[一]非其罪也。」以其子妻之。[二]
공자가 말하기를 “자장은 사위 삼을 만하다. 비록 감옥에 있을 지라도 그의 죄는 아니다.” 하고는 그 딸로써 (자장의) 아내로 삼았다.
[一] 集解孔安國曰:「累,黑索也。紲,攣也。所以拘罪人。」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累는 검은 새끼이다. 紲은 걸림이니 죄인을 잡는 것이다.” 했다.
[二] 集解張華曰:「公冶長墓在城陽姑幕城東南五里所,墓極高。」
[二] 【集解】 장화가 말하기를 “공야장의 무덤이 성양 고막성 동남쪽 5리에 있는데 무덤이 지극히 높다.” 했다.
南宮括字子容。[一]
남궁괄의 자는 자용이다.
[一] 集解孔安國曰:「容,魯人」。索隱家語作「南宮縚」。按:其人是孟僖子之子仲孫閱也,蓋居南宮因姓焉。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용는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는 “남궁도라고 썼다.” 했다. 살펴보니 “그 사람은 맹희자의 아들인 중손열일 것이니 남궁에 살았기 때문에 성으로 하였을 것일 것이다.” 했다.
問孔子曰:「羿善射,奡盪舟,[一]俱不得其死然;禹稷躬稼而有天下?」孔子弗答。[二]容出,孔子曰:「君子哉若人!上德哉若人!」[三]「國有道,不廢;[四]國無道,免於刑戮。」三復「白珪之玷」,[五]以其兄之子妻之。
공자에게 물어 말하기를 “예는 활을 잘 쏘았고, 오는 배를 끌었지만 모두 그 죽음을 얻지 못하였고(좋은 죽음, 본래의 수명을 다하지 못함), 우와 직은 몸소 농사지었지만 천하를 소유하였습니다.” 하니 공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남궁자용이 나가자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덕이 있구나 이 사람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폐하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형벌로 죽음을 면할 것이다.” 하고는 『詩經』 白珪之玷(백규의 흠결) 이란 시를 세 번 반복하고는 그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
[一] 集解孔安國曰:「羿,有窮之君,篡夏后位,其徒寒浞殺之,因其室而生奡。奡多力,能陸地行舟,為夏后少康所殺。」 正義羿音詣。盪,大浪反。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예는 유궁의 임금이니 하후의 자리를 찬탈하였는데 그 무리 한착이 그를 죽이고 그 집으로 인하여(혼인하여) 오를 낳았다. 오는 힘이 세어서 육지에서 배를 가게할 수 있었으되 하후 소강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했다. 【正義】 羿의 음은 詣이다. 盪은 大와 浪의 反이다.
[二] 集解馬融曰:「禹盡力於溝洫,稷播百穀,故曰『躬稼』也。禹及其身,稷及後世,皆王。括意欲以禹稷比孔子,孔子謙,故不答。」
[二]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우는 구혁(도랑)에서 힘을 다하였고, 직은 백곡을 파종하였다. 그러므로 ‘몸소 농사지었다.’ 한 것이다. 우는 자신에게 미쳤고 직은 후세에 미쳐서 모두 왕이 되었다. 남궁괄은 우와 직으로써 공자에 견주고자 하였는데 공자가 겸손히 하였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했다.
[三] 集解孔安國曰:「賤不義而貴有德,故曰君子。」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의롭지 못함을 천하게 여기고 덕을 소유함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군자라고 한 것이다.” 했다.
[四] 集解孔安國曰:「不廢,言見用。」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폐하지 않은 다는 것은 쓰여짐을 말한 것이다.” 했다.
[五] 集解孔安國曰:「詩云『白珪之玷,尚可磨也;斯言之玷,不可為也』。南容讀詩至此,三反之,是其心敬慎於言。」
[五]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시에 말하기를 ‘흰 구슬의 흠결은 오히려 갈 수 있거니와 이 말의 흠결은 할 수 없다(어쩔 수 없다).’ 하였다. 남용이 시를 읽고 여기에 이르러 세 번 반복하니 이는 그 마음에 말을 공경하고 삼가한 것이다.” 했다.
公皙哀字季次。[一]
공석애의 자는 계차이다.
[一] 集解孔子家語云齊人。索隱家語作「公皙克」。
[一] 【集解】 『孔子家語』에 “제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公晳克”이라 썼다.
孔子曰:「天下無行,多為家臣,仕於都;唯季次未嘗仕[一]。」
공자가 말하기를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아도 많이 가신이 되어 도읍에서 벼슬하는데 오직 계차 만은 일찍이 벼슬하지 않았다.” 했다.
[一] 索隱家語云:「未嘗屈節為人臣,故子特賞歎之。」亦見游俠傳也。
[一]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일찍이 절개를 굽히고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특히 가상히 여기고 탄복한 것이다. 또한 游俠傳에 보인다.
曾蒧[一]字皙。[二]
증점은 자가 석이다.
[一] 集解音點。 索隱音點,又音其炎反。
[一] 【集解】 음은 點(점)이다. 【索隱】 음은 點이다. 또 음은 其와 炎의 反이다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皙,曾參父。」 索隱家語云:「曾點字子皙,曾參之父。」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석은 증삼(증자)의 아버지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증점의 자는 증석이니 증삼(증자)의 아버지이다.” 했다.
侍孔子,孔子曰:「言爾志。」蒧曰:「春服既成,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一]孔子喟爾歎曰:「吾與蒧也!」[二]
공자를 모시고 있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너의 뜻을 말해 보라.” 하니 증점이 말하기를 “봄옷을 갖추어 입고 관을 쓴 사람 5, 6인, 동자 6, 7인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쐬다가 (시, 노래)를 읆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 했다. 공자가 한숨 쉬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나는 증점과 함께 할 것이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一作『饋』。」駰案:包氏曰「暮春者,季春三月也。春服既成,衣單袷之時,我欲得冠者五六人,童子六七人,浴於沂水之上,風涼於舞雩之下,歌詠先王之道,歸於夫子之門」。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 한편으로 ‘饋(먹일 궤)’라고 썼다.” 『인안』에 포씨가 말하기를 “暮春은 늦은 봄 3월이다. 봄옷이 이미 이루어져 홑옷과 겹옷을 입을 때 나는 관을 쓴 5,6인, 동자 6,7인과 기수 가에서 목욕하고 무으 아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선왕의 도를 노래하고 읆조리며 선생의 문하에 돌아오고자 합니다.” 했다.
[二] 集解周氏曰:「善蒧之獨知時也。」
[二] 【集解】 주씨가 말하기를 “증점의 홀로 때를 아는 것을 좋게 여긴 것이다.” 했다.
顏無繇[一]字路。路者,顏回父,[二]父子嘗各異時事孔子。
안무요는 자가 路이다. 안로는 안회의 아버지이니 부자가 각기 다른 떼에 공자를 섬겼다.
[一] 集解音遙。正義繇音由。
[一] 【集解】 음은 瑤(요)이다. 【正義】 繇의 음은 由이다.
[二] 索隱家語云「顏由字路,回之父也。孔子始教於闕里而受學焉。少孔子六歲」,故此傳云「父子異時事孔子」,故易稱「顏氏之子」者,是父子俱學孔門也。
[二] 【索隱】 『家語』에 이르기를 “안유의 자는 유이니 안회의 아버지이다. 공자가 처음 궐리에서 가르쳐 배움을 받았다. 공자보다 6세 적다. 그러므로 이 전에서 말하기를 ‘부자가 다른 때 공자를 섬겼다.’ 하고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기를 ‘안씨의 아들’이라 한 것은 이는 부자가 함께 공자의 문하에서 배운 것이다.” 했다.
顏回死,顏路貧,請孔子車以葬。[一]孔子曰:「材不材,亦各言其子也。鯉也死,有棺而無槨,吾不徒行以為之槨,以吾從大夫之後,不可以徒行。」[二]
안회가 죽었는데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 장례할 것을 청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재질이건 재질이 아니건 또한 각기 그 자식을 말한다. 이(공자의 아들)가 죽었을 때 관은 있었으되 곽은 없었던 것은 내가 대부의 말석에 있어 걸어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賣以作槨。」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賣는 槨이라 썼다.” 고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鯉,孔子子伯魚。孔子時為大夫,言從大夫之後,不可徒行,謙辭也。」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鯉는 공자의 아들 伯魚이다. 공자가 그 때 대부가 되었는데 대부의 말석으로 걸어 다닐 수 없었다고 말한 것은 겸손한 말이다.”
商瞿,[一]魯人,字子木。[二]少孔子二十九歲。
상구는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목이다. 공자보다 29세 적다.
[一] 正義具俱反。
[一] 【正義】 具와 俱의 反이다.
[二] 索隱家語云:「瞿年三十八無子,母欲更娶室。孔子曰『瞿過四十當有五丈夫子』,果然。瞿謂梁鱣勿娶,『吾恐子或晚生,非妻之過也』。」
[二] 【索隱】 『家語』에 말하기를 “구의 나이 38세에 아들이 없어 어머니가 다시 부인을 취하게(다시 장가들게) 하고자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구는 40세가 넘으면 마땅히 다섯 장부를 둘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상구가 양전에게 (다시)장가들지 말라 하면서 ‘나는 그대가 혹 늦게 낳을 것으로 아내의 허물은 아닐 것이다.’” 했다.
孔子傳易於瞿,瞿傳楚人馯[一]臂子弘,[二]弘傳江東人矯[三]子庸疵,[四]疵傳燕人周子家豎,[五]豎傳淳于人光子乘羽,[六]羽傳齊人田子莊何,[七]何傳東武人[八]王子中同,[九]同傳菑川人楊何。[一0]何元朔中以治易為漢中大夫。
공자가 상구에게 易(주역)을 전하고 상구는 초나라 사람 한비자홍에게 전하고 한비자홍은 강동 사람 교자용자에게 전하고 교자용자는 연나라사람 주자가수에게 전하고 주자가수는 순우 사람인 광자승우에게 전하고 광자승우는 광자순우는 제나라 사람인 전자장하에게 전하고 전자장하는 동무 사람인 왕자중동에게 전하고 왕자중동은 치천 사람인 양하에게 전하였다. 양하는 원삭(중국 전한 무제 때의 연호(B.C.128~B.C.123)로 세 번째 연호이다) 중에 역을 다스리(공부하여)는 것으로서 한나라 준대부가 되었다.
[一] 集解徐廣曰:「音寒。」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음은 寒” 이라 했다.
[二] 索隱馯,徐廣音韓,鄒誕生音汗。按:儒林傳、荀卿子及漢書皆云馯臂字子弓,今此獨作「弘」,蓋誤耳。應劭云子弓是子夏門人。正義馯音汗。顏師古云:「馯,姓也。」漢書及荀卿子皆云字子弓,此作「弘」,蓋誤也。應劭云:「子弓,子夏門人。」
[二] 【索隱】 ‘馯’은 서광이 음이 ‘韓’이라 했고, 추탄생은 음이 ‘汗’이라 했다. 살펴보니 『儒林傳』 순경자와 『漢書』에 모두 한비의 자는 자궁이라 했는데 지금 여기서 유독 ‘弘’ 이라 하니 대개 잘못일 것이다. 응소가 말하기를 “ 자궁은 이는 자하의 문인(제자)이라 했다.” 【正義】 馯의 음은 汗이라 했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馯은 성이다. 하고, 『漢書』와 순경자가 모두 자를 자궁이라 말하는데 여기서 홍이라고 쓴 것은 대개 잘못일 것이다.” 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자궁은 자하의 문인(제자)”라 했다.
[三] 集解音橋。
[三] 【集解】 음은 橋이다.
[四] 集解自移反。索隱儒林傳及系本皆作「蟜」。疵音自移反。疵字或作「疪」。蟜是姓,疪,名也,字子肩。然蟜姓,魯莊公族也,禮記「蟜固見季武子」。蓋魯人,史儒林傳皆云魯人,獨此云江東人,蓋亦誤耳。儒林傳云馯臂,江東人;橋疵,楚人也。正義漢書作「橋庇」,云魯人。顏師古云橋庇字子庸。
[四] 【集解】 自와 移의 反이다. 【索隱】 『儒林傳』과 系本에는 모두 蟜라 썼다. 疵는 혹은 庛라 썼다. 蟜는 이는 성이고 疪는 이름이니 자는 자견이다. 그러나 蟜성은 노나라 장공의 족속이니 『禮記』에 “교고가 계무자를 뵈었다.” 하였으니 대개 노나라 사람일 것이다. 사관과 『儒林傳』이 모두 노나라 사람이라 하는데 유독 여기서는 강동 사람이라 하니 또한 잘못일 것이다. 『儒林傳』에 이르기를 “한비는 강동사람이라 하고, 교자는 초나라 사람이라 했다.” 【正義】 『漢書』에 “橋庇라 쓰고, 노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橋庇의 자는 자용”이라 했다.
[五] 索隱周豎字子家,有本作「林」。正義豎音時與反。周豎字子家,漢書作「周醜」也。
[五] 【索隱】 주수의 자는 자가인데 林이라 쓴 본도 있다. 【正義】 豎의 음은 時와 與의 反이다. 주수의 자는 자가인데 『漢書』에는 “周醜”라 썼다.
[六] 索隱淳于,縣名,在北海。光羽字子乘。正義光乘字羽。括地志云:「淳于,國〔名〕,在密州安丘縣東三十里,古之州國,周武王封淳于國。」
[六] 【索隱】 순우는 현의 이름이니 북해에 있다. 광우의 자는 자승이다. 【正義】 광승의 자는 우이다. 『括地志』에 “순우는 나라(이름)인데 밀주 안구현 동쪽 30리에 있었던 옛날의 주국으로 주나라 무왕이 순우국을 봉하였다.
[七] 索隱田何字子莊。正義儒林傳云:「田何字子莊。」
[七] 【索隱】 전하의 자는 자장이다. 【正義】 『儒林傳』에 “전하의 자는 자장이다.” 했다.
[八] 集解徐廣曰:「屬琅邪。」
[八 ]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琅邪에 속한다.” 고 했다.
[九] 索隱王同字子中。正義括地志云:「東武縣今密州諸城縣是也。」漢〔書〕作「王同字子仲」。
[九] 【索隱】 왕동의 자는 자중이다. 【正義】 『括地志』에 “동무현은 지금의 밀주 제성현이 이것이다.” 했다. 『漢書』에 “왕동의 자는 자중이다.” 했다.
[一0] 索隱自商瞿傳易至楊何,凡八代相傳。儒林傳何字叔元。正義漢書云字叔元。按:商瞿至楊何凡八代。
[一0] 【索隱】 상구로부터 역을 전하여 양하에 이르기까지 무릇 8대가 서로 전하였다. 『儒林傳』에 “하의 자는 숙원”이라 했다. 【正義】 『漢書』에 “자는 숙원”이라 했다. 살펴보니 상구로부터 양하에 이르기까지 무릇 8대이다.
高柴字子羔。[一]少孔子三十歲。
고시의 자는 자고이다. 공자보다 30세가 적다.
[一] 集解鄭玄曰衛人。索隱鄭玄云衛人。家語「齊人,高氏之別族。長不盈六尺,狀貌甚惡」。此傳作「五尺」。誤也。正義家語云齊人。
[一] 【集解】 정현이 “위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정현이 말하기를 “위나라 사람”이라 했다. 『家語』에 “제나라 사람으로 고씨의 별족이다. 키는 6자를 채우지 못하였고, 외모가 매우 추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5자라 하니 잘못이다. 【正義】 『家語』에 “제나라 사람” 이라 했다.
子羔長不盈五尺,受業孔子,孔子以為愚。
자고는 키가 5자를 채우지 못하였는데 공자에게 학업을 받았는데 공자가 어리석다고 여겼다.
子路使子羔為費郈宰,[一]孔子曰:「賊夫人之子!」[二]子路曰:「有民人焉,有社稷焉,何必讀書然後為學!」[三]孔子曰:「是故惡夫佞者。」[四]
자로가 자고로 하여금 비후 땅의 읍재로 삼았다. 공자가 말하기를 “저 다른 사람의 아들을 해치는구나!” 하자 자로가 말하기를 “백성이 여기에 있고, 사직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반드시 글을 읽은 후 배움을 삼겠는가!”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이 때문에 저 말 잘하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했다.
[一] 正義括地志云:「鄆州宿縣二十三里郈亭。」
[一] 【正義】 『括地志』에 “운주 숙현 20리가 후정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子羔學未孰習而使為政,所以賊害人。」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자고는 배움을 익숙히 익히지 못하였는데도 정사를 하게 한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친다.”고 한 것이다.
[三] 集解孔安國曰:「言治人事神,於是而習,亦學也。」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귀신을 섬기는 것은 이에 익히고, 또한 배워야 함을 말한 것이다.” 했다.
[四] 集解孔安國曰:「疾其以給應,遂己非而不知窮也。」
[四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주어지는 것으로써 응대하여 마침내 지신의 잘못임에도 끝까지 알지 못함을 미워한 것이다.
漆彫開字子開。[一]
칠조개는 자가 자개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也。索隱鄭玄云魯人。家語云:「蔡人,字子若,少孔子十一歲。」又曰:「習尚書,不樂仕。孔子曰:『可以仕矣。』對曰:『吾斯之未能信。』」王肅云:「未得用斯書之意,故曰『未能信』也。」 正義家語云:「蔡人,字子若,少孔子十一歲。習尚書,不樂仕。」
[一] 【集解】 정현은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정현은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家語』에 “채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약이고, 공자보다 11세 적다.” 하고 또 “『尙書』를 익히고,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벼슬 할만하다.” 하니 칠조개가 대답하기를 “저는 이것(벼슬하는 것)이 능한지 자신하지 못합니다.” 했다. 왕숙이 이르기를 “이글의 뜻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未能信’ 이라 한 것이다.” 했다. 【正義】 『家語』에 “채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약이니 공자보다 11세 적다. 『尙書』를 익히고,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孔子使開仕,對曰:「吾斯之未能信。」[一]孔子說。[二]
공자가 칠조개로 하여금 벼슬하게 하자, 대답하기를 “저는 이것에(벼슬하는 것에) 능(잘)함을 자신하지 못합니다.” 하니 공자가 기뻐하였다.
[一] 集解孔安國曰:「仕進之道。未能信者,未能究習。」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벼슬에 나아가는 도이다. 未能信은 궁구하고 익히지 못함이다.” 했다.
[二] 集解鄭玄曰:「善其志道深。」
[二]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그 뜻과 도가 깊음을 좋게 여긴 것이다.” 했다.
公伯繚字子周。[一]
공백료의 자는 자주이다.
[一] 集解馬融曰魯人。索隱馬融云魯人。家語無公伯繚而有申繚子周。而譙周云「疑公伯繚是讒愬之人,孔子不責,而云『其如命何』,非弟子之流也」。今亦列比在七十二賢之數,蓋太史公誤。且「繚」亦作「遼」也。正義家語有申繚子周。古史考云:「疑公伯僚是讒愬之人,孔子不責,而云命,非弟子之流也。」
[一] 【集解】 마융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마융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家語』에 공백료는 없고 신료자주가 있다. 초주가 말하기를 “아마도 공백료는 참소한 사람일 것이다. 공자가 질책하지 않고 말하기를 ‘(天)命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제자의 무리가 아닐 것이다. 지금 또한 72현의 수를 차례로 나열함이 있는 것은 태사공의 잘못이다. 또 ‘繚’ 또한 ‘遼’라고 썼다”고 했다. 【正義】 『家語』에 신료자주가 있다. 옛 역사를 상고해 보니 공백료는 참소한 사람인데 공자가 질책하지 않고, 命이라 말하니 제자의 류가 아니다.
周愬子路於季孫,子服景伯以告孔子,曰:「夫子固有惑志[一],繚也,吾力猶能肆諸市朝。」[二]孔子曰:「道之將行,命也;道之將廢,命也。公伯繚其如命何!」
자주가 자로를 계손에게 헐뜯으니 자복경백이 공자에게 알려 말하기를 “계손이 료를 의혹하는 뜻이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 (자주를 죽여서) 시장에 둘 수 있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장차 행해지는 것도 命 이고, 도가 장차 폐해지는 것도 命이다. 공백료가 命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季孫信譖,恚子路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계손이 참소를 믿고 자로에게 성낸 것이다.” 했다.
[二] 集解鄭玄曰:「吾勢猶能辨子路之無罪於季孫,使人誅僚而肆之也。有罪既刑,陳其尸曰肆。」
[二]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나의 세력이 오히려 자로의 죄 없음을 계손에게 분변할 수 있고, 사람을 시켜 공백료를 죽이고 그것을 시장에 버릴 수 있다. 죄가 있어서 형벌한 후에 그 시체를 진열하는 것이 肆이다.” 했다.
司馬耕字子牛。[一]
사마경의 자는 자우이다.
[一] 集解孔安國曰宋人。索隱家語云「宋人,字子牛」,孔安國亦云「宋人,弟安子曰司馬犁」也。牛是桓魋之弟,以魋為宋司馬,故牛遂以司馬為氏也。
[一] 【集解】 공안국이 “송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송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우이다.” 했다. 공안국이 또 말하기를 “송나라 사람이고, 동생 안자를 사마려라 한다. 자우는 환퇴의 동생인데 환퇴가 송나라 사마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사마로써 씨를 삼은 것이다.” 했다.
牛多言而躁。問仁於孔子,孔子曰:「仁者其言也訒。」[一]曰:「其言也訒,斯可謂之仁乎?」子曰:「為之難,言之得無訒乎!」[二]
자우는 말이 많고 조급하였다. 공자에게 仁을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仁한 자는 그 (仁을)말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어눌하게 하는,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 (자우가) 말하기를 “그 (仁을)말하는 것을 어렵게(어눌하게 하는, 함부로 하지 않는)하는 것을 이에 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것(仁)을 (행)하기 어려운데 (仁을)말하는 것을 어려움 없이(함부로 할 수) 할 수 있겠는가!”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訒,難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訒은 어려움이다.”
[二] 集解孔安國曰:「行仁難,言仁亦不得不訒也。」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仁을 행하기 어려운데 仁을 말하는 것을 또한 어렵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했다.
問君子,子曰:「君子不憂不懼。」[一]曰:「不憂不懼,斯可謂之君子乎?」子曰:「內省不疚,夫何憂何懼!」[二]
(자우가)군자를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군자는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하였다. (자우가) 말하기를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에 군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안을 살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데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牛兄桓魋將為亂,牛自宋來學,常憂懼,故孔子解之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자우의 형 환퇴가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하자 자우가 송나라로부터 와서 배우면서 한상 근심하고 두려워 하엿다. 그러므로 공자가 그것을 풀어준 것이다.” 했다.
[二] 集解包氏曰:「疚,病。自省無罪惡,無可憂懼。」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疚는 병이다. 스스로 살펴서 좌악이 없으면 근심하고 두려워 할 것이 없다.”고 했다.
樊須字子遲。[一]少孔子三十六歲。
번수는 자가 자지이다. 공자보다 36세 적다.
[一] 集解鄭玄曰齊人。索隱家語云魯人也。正義家語云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제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노아라 사람”이라 했다. 【正義】 『家語』에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樊遲請學稼,孔子曰:「吾不如老農。」請學圃,曰:「吾不如老圃。」[一]樊遲出,孔子曰:「小人哉樊須也!上好禮,則民莫敢不敬;上好義,則民莫敢不服;上好信,則民莫敢不用情。[二]夫如是,則四方之民襁負其子而至矣,焉用稼!」[三]
번지가 농사짓는 법 배우기를 청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농사짓는 방법을 아는 것이)늙은 농부보다 못하다.” 하였다. (번지가) 농사짓는 법(채전 밭) 가구는 법을 배울 것을 청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채전 밭 가꾸는 방법을 아는 것은)늙은 정원사 보다 못하다.”고 했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말하기를 “소인이로다 번지여!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곧 백성들이 감히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윗사람이 의를 좋아하면 곧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윗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곧 백성들이 감히 실정을 쓰지 않음이 없다. 이 같으면 곧 사방의 백성들이 그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이를 것이다. 어찌 농사를 지을 것인가!” 했다.
[一] 集解馬融曰:「樹五穀曰稼,樹菜蔬曰圃。」
[一]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오곡을 심는 것을 稼라 하고 채소를 심는 것을 圃라고 한다.”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情,實也。言民化上各以實應。」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情은 실정이다. 백성들이 윗사람에게 교화되어 각기 실정으로써 반응함을 말한다.” 했다.
[三] 集解包氏曰:「禮義與信足以成德,何用學稼以教民乎!負子之器曰襁。」
[三]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예, 의와 신은 덕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어찌하여 오곡을 심는 것을 배우는 것을 써서 백성을 가르치겠는가! 자식을 업는 기구를 襁이라 한다.”했다.
樊遲問仁,子曰:「愛人。」問智,曰:「知人。」
번지가 仁을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였다. (번지가) 智(지혜)를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아는 것이다.” 했다.
有若[一]少孔子四十三歲。[二]有若曰:「禮之用,和為貴,先王之道斯為美。小大由之,有所不行;知和而和,不以禮節之,亦不可行也。」[三]「信近於義,言可復也;[四]恭近於禮,遠恥辱也;[五]因不失其親,亦可宗也。」[六]
유약은 공자보다 43세 적다. 유약이 말하기를 “예의 씀은 和를 귀하게 여기니 선왕의 도가 이를 아름다움으로 삼았다. 적고 큼이 그것에 말미암는다. 행해지지 않는 바도 있으니 和만을 알아서 和를 하여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또한 행할 수 없다. 信은 義에 가까워야 말이 행해질 수 있다. 공경은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다. 인하여 그 친함을 잃지 않아야 또한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二] 索隱家語云:「魯人,字子有,少孔子三十三歲。」今此傳云「四十二歲」,不知傳誤,又所見不同也? 正義家語云「魯人,字有,少孔子三十三歲」,不同。
[二] 【集解】 『家語』에 “노나라 사람이니 자는 자유이며, 공자보다 33세 적다.” 하는데 지금 이 傳에서는 “42세”라 하니 전이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보는 바가 같지 않은 것인가? 【正義】 『家語』에 “노나라 사람이니 자는 유이고, 공자보다 33세 적다.”하여 같지 않다.
[三] 集解馬融曰:「人知禮貴和,而每事從和,不以禮為節,亦不可以行也。」
[三]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예가 和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알아 모든 일에 和를 따르나 예로써 절제하지 않으면 또한 행할 수 없다.
[四] 集解何晏曰:「復猶覆也。義不必信,信非義也。以其言可覆,故曰近義。」
[四]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復은 覆(뒤집어지다, 전복되다.)과 같다. 義가 반드시 信하지 않으며, 信이 義는 아니다. 그 말로써 뒤집을 수 있기 때문에 義를 가까이 한다.(近義)” 했다.
[五] 集解何晏曰:「恭不合禮,非禮也。以其能遠恥辱,故曰近禮。」
[五]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恭은 예에 합당하지 않으면 예가 아니다. (공경으로써) 치욕을 멀리 할 수 있기 때문에 예를 가까이한다.(近禮)” 한 것이다.
[六] 集解孔安國曰:「因,親也。言所親不失其親,亦可宗敬。」
[六]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因은 친함이다. 친해야 할 바에 그 친함을 잃지 않으면 또한 높이고 공경할 만하다.” 했다.
孔子既沒,弟子思慕,有若狀似孔子,弟子相與共立為師,師之如夫子時也。他日,弟子進問曰:「昔夫子當行,使弟子持雨具,已而果雨。弟子問曰:『夫子何以知之?』夫子曰:『詩不云乎?「月離于畢,俾滂沱矣。」[一]昨暮月不宿畢乎?』他日,月宿畢,竟不雨。商瞿年長無子,其母為取室。[二]孔子使之齊,瞿母請之。孔子曰:『無憂,瞿年四十後當有五丈夫子。』已而果然。問夫子何以知此?」有若默然無以應。弟子起曰:「有子避之,此非子之座也!」
공자가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사모하여 유약의 모습이 공자와 비슷하다 하여 제자들이 서로 함께 세워 스승으로 삼고 그를 본받기를 부자(선생, 공자) 때와 같이 하였다. 다른 날 제자들이 나아가 물어 말하기를 “옛날에 부자(선생, 공자)께서 나갈 때 제자로 하여금 우산을 지니게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비가 내렸습니다.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詩經』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달이 필성에 걸리면 비가 세차게 내리게 한다.’하였다. 지난 저녁에 달이 필성에 머물던가?” 했다. 다른 날에는 달이 필성에 머물렀으되 끝내 비가 내리지 않았다. 상구가 나이가 오래도록 자식이 없자 어미가 室(첩)을 취하려 했다. 공자가 (상구를) 제나라에 보내자 상구의 어미가 그것을 (미룰 것을)청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근심하지 말라 상구의 나이 40이후에 마땅히 다섯의 장부를 둘 것이다.”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이를 알았습니까?”하고 물으니 유약이 묵묵히 응대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이 일어나며 말하기를 “유자는 (자리를)피하라 이는 그대의 자리가 아니구나!” 했다.
[一] 集解毛傳曰:「畢,噣也。月離陰星則雨。」
[一] 【集解】 (시경)모전에 말하기를 “畢은 별이름이라 했다. 달이 陰星에 걸리면 곧 비가 내린다.” 했다.
[二] 正義家語云:「瞿年三十八無子,母欲更娶室。孔子曰:『瞿年過四十當有五丈夫子。』果然。」中備云:「魯人商瞿使向齊國,瞿年四十,今後使行遠路,畏慮,恐絕無子。夫子正月與瞿母筮,告曰:『後有五丈夫子。』子貢曰:『何以知?』子曰:『卦遇大畜,艮之二世。九二甲寅木為世,六五景子水為應。世生外象生象來爻生互內象,艮別子,應有五子,一子短命。』顏回云:『何以知之?』『內象是本子,一艮變為二醜三陽爻五,於是五子,一子短命。』『何以知短命?』『他以故也。』」
[二] 【正義】 『家語』에 “상구의 나이 38세에 자식이 없자 어미가 다시 장가들게 하고자 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상구의 나이 40세를 지나면 마땅히 다섯 장부를 둘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中備』에 “노나라 사람 상구를 제나라에 사신가게 하자 상구의 나이 40세로 지금 먼 길을 사신가는 것이 두렵고 염려되며, 자식이 없어 (후대가)끊어짐을 두려워합니다.” 했다. 선생이 정월에 상구의 어미와 함께 점을 치고는 말하기를 “뒤에 다섯 장부의 아들을 둘 것 이다.” 했다. 자공이 “어떻게 알았습니까?”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점괘에 大畜을 만났는데 艮의 二世이다. 九二는 甲寅의 木으로 世가 되고, 六五는 景子의 水로 應이 된다. 世는 밖의 象을 내고, 象이 와서 효를 내어 서로 內象이 되고, 艮은 아들을 이별함이고, 應은 다섯 아들을 두는데 한 아들은 단명하다.” 하였다. 안회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하니 (공자가)“內象은 본래 아들이고, 한 一艮이 변하여 두 醜가 셋이 되고, 양의 효가 다섯이니 이에 다섯 아들이고, 한 아들은 단명한 것이다.” 했다. (안회가)“어떻게 단명할 것을 압니까?” 하니 (공자가)“다른 사고 때문이다.” 했다.
[三] 集解五男也。索隱謂五男也。
[三] 【集解】 다섯 남자이다. 【索隱】 다섯 남자를 말한다.
公西赤字子華。[一]少孔子四十二歲。
고서적의 자는 자화이다. 공자보다 42세 적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子華使於齊,冉有為其母請粟。孔子曰:「與之釜。」[一]請益,曰:「與之庾。」[二]冉子與之粟五秉。[三]孔子曰:「赤之適齊也,乘肥馬,衣輕裘。吾聞君子周急不繼富。」[四]
공자화가 제나라에 사신 가는데 염유가 그 어미를 위하여 공식을 청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釜를 주라” 하니 (염유가) 더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庾를 주라”하였다. 염자(염유)가 곡식 五秉을 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공서적이 제나라에 가는 것은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갓옷을 입었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급함을 구휼하고 부유함을 잇지 않는다.” 하였다.
[一] 集解馬融曰:「六斗四升曰釜。」
[一]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6두 4승을 釜라 한다.”했다.
[二] 集解包氏曰:「十六斗曰庾。」
[二] 【集解】 포씨가 말하기를 “16두를 庾라 한다.” 했다.
[三] 集解馬融曰:「十六斛曰秉,五秉合八十斛。」
[三] 【集解】 마융이 말하기를 “16斛을 秉이라 하고, 5秉을 합하면 80斛이 된다.” 했다.
[四] 集解鄭玄曰:「非冉有與之太多。」
[四]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염유가 그에게 준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아니다.” 했다.
巫馬施字子旗。[一]少孔子三十歲。
무마시의 자는 자기이다. 공자보다 30세 적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鄭玄云魯人。家語云:「陳人,字子期。」正義音其。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家語』에 “진나라 사람이고, 자는 자기이다.” 했다. 【正義】 음은 其이다.
陳司敗[一]問孔子曰:「魯昭公知禮乎?」孔子曰:「知禮。」退而揖巫馬旗曰:「吾聞君子不黨,君子亦黨乎?魯君娶吳女為夫人,命之為孟子。孟子姓姬,諱稱同姓,故謂之孟子。魯君而知禮,孰不知禮!」[二]施以告孔子,孔子曰:「丘也幸,苟有過,人必知之。臣不可言君親之惡,為諱者,禮也。」[三]
진나라 사패가 공자에게 묻기를 “노나라 소공은 예를 압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예를 안다.” 하였다. (사패가) 물러나 무마기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내가 군자는 편당하지(무리 짓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군자가 또한 편당합니까?(무리 짓습니까?) 노나라 임금이 오나라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부인을 삼고, 명하여 孟子라 하였습니다. 맹자는 성이 姬인데 같은 성을 말하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孟子라고 말한 것입니다. 노나라 임금이 에를 안다고 한다면 누가 예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무마시가) 공자에게 말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丘(나는, 공자)는 요행이다. 만약 허물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아는구나. 신하는 임금의 악을 말할 수 없어 꺼림을 삼는 것이 예이다.” 했다.
[一] 集解孔安國曰:「司敗,官名。陳大夫也。」
[一]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사패는 관직의 이름이니 진나라의 대부이다.” 했다.
[二] 集解孔安國曰:「相助匿非曰黨。禮同姓不婚,而君娶之。當稱『吳姬』,諱曰『孟子』。」
[二]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서로 도와 잘못을 숨기는 것을 黨이라 한다. 예에 같은 성은 혼인하지 않는다 하는데도 임금이 장가들었으니 마땅히 ‘吳姬’라 불러야 하는데 꺼려서 孟子라 한 것이다.” 했다.
[三] 集解孔安國曰:「以司敗之言告也。諱國惡,禮也。聖人之道弘,故受之為過也。」
[三] 【集解】 공안국이 말하기를 “사패의 말로써 알린 것이다. 나라의 악을 꺼리는 것이 예이다. 성인의 도가 넓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 허물이라 한 것이다.”
梁鱣[一]字叔魚。[二]少孔子二十九歲。
양전의 자는 어숙이다. 공자보다 29세 적다,
[一] 集解一作「鯉」。
[一] 【集解】 한편 ‘鯉’라 썼다.
[二] 集解孔子家語曰齊人。索隱家語云齊人,字叔魚也。
[二] 【集解】 『孔子家語』에 “제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제나라 사람이니 자는 숙어이다.” 했다.
顏幸字子柳。[一]少孔子四十六歲。[二]
안행의 자는 자류이다. 공자보다 46세 적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云:「顏幸,字柳。」按:禮記有顏柳,或此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안행은 자는 류이다.” 했다. 살펴보니 『禮記』에 안류가 있는데 혹 이 사람일 것이다.
[二] 索隱家語云「少三十六歲」,與鄭玄同。
[二] 【索隱】 『家語』에 “36세 적다.”한 것은 정현과 같다.
冉孺字子魯,[一]少孔子五十歲。
염유의 자는 공자보다 50세 적다.
[一] 集解一作「曾」。索隱家語字子魯,魯人。作「冉儒」。
[一] 【集解】 ‘曾’이라 쓰기도 한다. 【索隱】 『家語』에 “자는 자로이고 노나라 사람이다. 하고 ‘冉儒’라 썼다.
曹卹字子循。少孔子五十歲。[一]
조휼은 자가 자순이니 공자보다 50세 적다.
[一] 索隱曹卹少孔子五十歲。家語同。
[一] 【索隱】 조휼이 공자보다 50세 적다 한 것은 『家語』와 같다.
伯虔字子析,[一]少孔子五十歲。
백건의 자는 자석이니 공자보다 50세 적다.
[一] 索隱伯虔字子折。家語作「伯處字子晳」,皆轉寫字誤,未知適從。正義家語云「子哲」。
[一] 【索隱】 백건의 자는 자절이다. 『家語』에 “백건의 자는 자석”이라 썼다. 모두 글자를 옮겨 적음이 잘못된 것인데 따름을 알지 못한다. 【正義】 『家語』에 “자철”이라 했다.
公孫龍字子石。[一]少孔子五十三歲。
공손룡은 자가 자석이다. 공자보다 53세 적다.
[一] 集解鄭玄曰楚人。索隱家語或作「寵」,又云「礱」,七十子圖非「礱」也。按:字子石,則「礱」或非謬。鄭玄云楚人,家語衛人。然莊子所云「堅白之談」,則其人也。正義家語云衛人,孟子云趙人,莊子云「堅白之談」也。
[一] 【集解】 정현이 “초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혹은 “총”이라 쓰거나 또한 “롱”이라 하는데 70제자 도상에는 “롱”이 아니다. 살펴보니 자를자석이라 한 것이 곧 “롱”이 혹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정현은 “초나라 사람”이라 했고, 『家語』에는 “위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그러나 장자가 말한 바의 “堅白之談”이 곧 그 사람이다. 【正義】 『家語』에 “위나라 사람”이라 했고, 맹자는 “조나라 사람”이라 하고 장자는 “堅白之談”이라 했다.
自子石已右三十五人,顯有年名及受業見于書傳。其四十有二人,無年及不見書傳者紀于左:[一]
자석까지 이상 25인은 나이와 이름이 드러나고, 수업에 이른 것은 글과 전에 보인다. 42인은 나이가 없어 글과 전에 보이지 않는 자는 아래에 기록한다.
[一] 索隱按:家語此例唯有三十七人。其公良孺、秦商、顏亥、叔仲會四人,家語有事跡,史記闕。然自公伯遼、秦冉、鄡單三人,家語不載,而別有琴牢、陳亢、縣亶當此三人數,皆互有也。如文翁圖所記,又有林放、蘧伯玉、申棖、申堂,俱是後人所以見增益,於今殆不可考。
[一] 【索隱】 살펴보니 『家語』에 이렇게 보인 것이 오직 37인뿐이다. 공양유, 진상, 안해, 숙중회 4사람은 『家語』에 사적이 있으나 사기에는 빠졌다. 그러나 공백료부터 진염, 교단 3사람은 『家語』에 실리지 않고 별도로 금뢰, 진항, 현단당 이 세 사람을 헤아리니 모두 서로 있다. 『文翁圖』에 기록한 바의 경우에는 또한 임방, 거백옥, 신정, 신당이 있다. 모두 이는 후대의 사람이 더하여 나타내었기 때문이니 지금에 자못 상고할 수 없다.
冉季字子產。[一]
염계는 자가 자산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冉季字產。正義家語云冉季字子產。
[一] 【集解】 정현은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염계의 자는 자산”이라 했다. 【正義】 『家語』에 “염계의 자는 자산”이라 했다.
公祖句茲字子之。[一]
공조구자의 자는 자지이다.
[一] 索隱句音鉤。正義句音鉤。
[一] 【索隱】 句의 음은 鉤이다. 【正義】 句의 음은 鉤이다.
秦祖字子南。[一]
진조는 자가 자남이다.
[一] 集解鄭玄曰秦人。索隱家語字子南。
[一] 【集解】 정현은 “秦나라 사람” 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자는 자남”이라 했다.
漆雕哆[一]字子斂。[二]
칠조치는 자가 자렴이다.
[一] 集解音赤者反。索隱赤者反。家語字子斂。
[一] 【集解】 음은 赤과 者의 反이다. 【索隱】 赤과 者의 反이다. 『家語』에 “자는 자렴”이라 했다.
[二] 集解鄭玄曰魯人。
[二]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顏高字子驕。[一]
안고는 자가 자교이다.
[一] 索隱家語名產。孔子在衛,南子招夫子為次過市,時產為御也。正義孔子在衛,南子招夫子為次乘過市,顏高為御。
[一] 【索隱】 『家語』에 이름을 “산”이라 했다.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남자가 선생을 불러서 가면서 시장을 지날 때 자산이 마부가 되었다. 【正義】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남자가 선생을 불러 말을 타고 가면서 시장을 지날 때 안고는 마부가 되었다.
漆雕徒父。[一]
칠조도부
[一] 索隱家語字固也。
[一] 【索隱】 『家語』에 자는 ‘고’라 했다.
壤駟赤字子徒。[一]
양사적은 자가 자도이다.
[一] 集解鄭玄曰秦人。索隱家語字子徒者。
[一] 【集解】 정현이 “秦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자는 자도”라 했다.
商澤。[一]
상택
[一] 集解家語曰字子季。索隱家語字季。
[一] 【集解】 『家語』에 “자는 자계”라 했다. 【索隱】 『家語』에 “자는 계”라 했다.
石作蜀字子明。[一]
석작촉은 자가 자명이다.
[一] 索隱家語同。
[一] 【索隱】 『家語』와 같다.
任不齊字選。[一]
임불제는 자가 선이다.
[一] 集解鄭玄曰楚人。索隱家語字子選也。
[一] 【集解】 정현이 “초나라 사람이라 했다.
公良孺字子正。[一]
공양유는 자가 자정이다.
[一] 集解鄭玄曰:「陳人,賢而有勇。」 索隱家語作「良儒」。陳人,字子正,賢而有勇。孔子周遊,常以家車五乘從孔子遊。家語在三十五人之中。亦見系家,在三十二人不見,蓋傳之數亦誤也。鄒誕本作「公襄儒」。正義孔子周游,常以家車五乘從孔子。孔子世家亦云語在三十五人中,今在四十二人數,恐太史公誤也。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陳나라 사람으로 어질고 용기가 있었다.” 했다. 『家語』에 “良儒이니 진나라 사람이고 자는 자정인데 어질고 용기가 있었다.” 했다. 공자가 주유할 때 항상 집의 수레 다섯 대를 가지고 공자의 주유를 따랐다. 『家語』의 25인 가운데 있고, 또 『系家』를 보니 32인에 있어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개 전의 헤아림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추탄본에는 “공양유”라 했다. 【正義】 공자가 주유할 때 항상 집의 수레 다섯 대로 공자를 따랐다. 『孔子世家』에 또한 말한 35인 가운데 가운데에 있다. 지금 42인의 수는 태사공이 잘못한 것일 것이다.
后處字子里。[一]
후처는 자가 자리이다.
[一] 集解鄭玄曰齊人。索隱家語同也。
[一] 【集解】 정현이 “제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와 같다.
秦冉字開。[一]
진염은 자가 개다.
[一] 正義家語無此人。王肅家語此等惟三十七人,其公良孺、秦商、顏亥、仲叔會四人,家語有事跡,而史記闕。公伯寮、秦冉、鄡單,家語不載,而別有琴牢、陳亢、縣亶三人。
[一] 【正義】 『家語』에 이 사람이 없다. 왕숙은 “『家語』에는 이들 37인이고, 공양유, 진상, 안해, 중숙회 4시람은 『家語』에 사적이 있으나 사기에는 빠졌다. 공백료, 진염, 교선은 『家語』에 실리지 못하고 별도로 금뢰, 진항, 현단의 세 사람이 있다.
公夏首字乘。[一]
공화수는 자가 승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同也。
[一]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와 같다.
奚容箴字子皙。[一]
해용잠은 자가 자석이다.
[一] 索隱家語同也。正義衛人。
[一] 【索隱】 『家語』와 같다. 【正義】 위나라 사람이다.
公肩定字子中。[一]
공견정은 자가 자중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或曰晉人。索隱家語同也。
[一]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어떤 사람은 晉 나라 사람이라 한다. 【索隱】 『家語』와 같다.
顏祖字襄。[一]
안조는 자가 양이다.
[一] 索隱家語無此人也。正義魯人。
[一] 【索隱】 『家語』에 이러한 사람이 없다. 【正義】 노나라 사람이다.
鄡[一]單[二]字子家。[三]
교선은 자가 자가이다.
[一] 集解苦堯反。
[一] 【集解】 苦와 堯의 反이다.
[二] 集解音善。
[二] 【集解】 음은 선이다.
[三] 集解徐廣曰:「一云『鄔單』。鉅鹿有鄡縣,太原有鄔縣。」 索隱鄡音苦堯反,單音善,則單名。徐廣云「一作『鄔單』,鉅鹿有鄡縣,太原有鄔縣」。家語無此人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오선이라 하기도 한다.” 했다. 거록에 교현이 있고, 태원에 오현이 있다. 【集解】 鄡의 음은 苦와 堯의 反이고, 單의 음은 선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오선’이라 쓰기도 하고, 거록에 교현이 있고, 태원에 ㅗ현이 있다.” 했다. 『家語』에는 이러한 사람이 없다.
句井疆。[一]
구정강
[一] 集解鄭玄曰衛人。正義句作「鉤」。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위나라 사람”이라 했다. 【正義】 句는 鉤라 써야 한다.
罕父黑字子索。[一]
한부흑은 자가 자색이다.
[一] 集解家語曰:「罕父黑字索。」 索隱家語作「罕父黑字索」。
[一] 【集解】 『家語』에 말하기를 “한부흑의 자는 색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한부흑은 자가 색이다.” 했다.
秦商字子丕。[一]
진상은 자가 자비이다.
[一] 集解鄭玄曰楚人。索隱家語:「魯人,字丕慈。少孔子四歲。其父堇,與孔子父紇俱以力聞也。」正義家語云:「魯人,字丕茲。」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노나라 사람이니 자는 비자이다. 공자보다 4세 적다. 그 아비 堇과 공자의 아비 紇이 함께 힘써 들었다.” 했다. 【正義】 『家語』에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니 자는 비자이다.” 했다.
申黨字周。[一]
신당은 자가 주이다.
[一] 索隱家語有申繚,字周。論語有申棖。鄭玄云「申棖,魯人,弟子也」。蓋申堂是棖不疑,以棖堂聲相近。上又有公伯繚,亦字周。家語則無伯繚,是史記述伯繚一人者也。 正義魯人。
[一] 【索隱】 『家語』에 “신료가 있는데 자가 주이다.” 했고, 『論語』에 신정이 있다. 정현이 말하기를 “신정은 노나라 사람으로 제자이다.”했다. 대개 신당은 이 정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정과 당의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 위에 또한 공백료가 있으니 또한 자는 주이다. 『家語』에 곧 백료가 없는데 이는 『史記』가 백료 한 사람을 기술했기 때문이다.
顏之僕字叔。[一]
안지복은 자가 숙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並同。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도 같다.
榮旂字子祈。[一]
영기는 자기이다.
[一] 索隱家語榮祈字子顏也。
[一] 【索隱】 『家語』에 “영기는 자가 자안”이라 했다.
縣成字子祺。[一]
현성은 자가 자기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作「子謀」也。正義縣音玄。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 에 “자모”라 썼다. 【正義】 縣의 음은 玄이다.
左人郢字行。[一]
좌인영은 자가 행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同也。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도 같다.
燕伋字思。[一]
연급은 자가 사이다.
[一] 索隱家語同也。
[一] 【索隱】 『家語』에도 같다.
鄭國字子徒。[一]
정국은 자가 자도이다.
[一] 索隱家語薛邦字徒,史記作「國」而家語稱「邦」者,蓋避漢祖諱而改。「鄭」與「薛」,字誤也。正義家語云薛邦字徒,史記作「國」者,避高祖諱。「薛」字與「鄭」字誤耳。
[一] 【索隱】 『家語』에 “설방의 자가 도”라 했다. 『사기』에는 “국”이라 썼고, 『家語』에 “방”이라 쓴 것은 대개 한나라 시조(고조 유방)를 피휘하여 고친 것이다. ‘정’과 ‘설’은 글자가 잘못 되었다. 【正義】 『家語』에 “설방의 자는 도”라했는데 『사기』에 ‘국’이라 쓴 것은 고조의 이름을 피한 것이다. ‘설’자와 ‘정’는 잘못이다.
秦非字子之。[一]
진비는 자가 자지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一] 【集解】 정현이 말하기를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施之常字子恆。
시지상은 자가 자 긍이다.
顏噲字子聲。[一]
안쾌은 자가 자성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
[一]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步叔乘字子車。[一]
보숙승은 자가 자거이다.
[一] 集解鄭玄曰齊人。
[一] 【集解】 정현이 “제나라 사람”이라 했다.
原亢籍。[一]
원항적
[一] 集解家語曰:「名亢,字籍。」 索隱家語名亢字籍。正義亢,作「□」,仁勇反。
[一] 【集解】 『家語』에 “이름은 항이고 자는 적”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이름은 항이고, 자는 적”이다. 했다. 【正義】 항은 □이라 썼으니 仁과 勇의 反이다.
樂欬字子聲。[一]
악해는 자가 자성이다.
[一] 索隱家語同也。正義魯人。
[一] 【索隱】 『家語』와 같다. 【正義】 노나라 사람이다.
廉絜字庸。[一]
염결은 자가 용이다.
[一] 集解鄭玄曰衛人。索隱家語同也。
[一] 【集解】 정현이 “위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와 같다.
叔仲會字子期。[一]
숙중회는 자가 자기이다.
[一] 集解鄭玄曰晉人。索隱鄭玄云晉人。家語「魯人。少孔子五十四歲。與孔璇年相比,二孺子俱執筆迭侍於夫子,孟武伯見而放之」是也。
[一] 【集解】 정현이 “진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정현이 “진나라 사람”이라 했다. 『家語』에 “노나라 사람이다. 공자보다 54세 적다. 공선과 나이가 서로 비슷하다. 두 어린 아이가 함께 붓을 잡고 교대로 부자(선생, 공자)를 모셨는데 맹무백이 ‘보고 그를 놓아 주었다.’ 한 것이 이것이다.”
顏何字冉。[一
안하는 자가 염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字稱。
[一]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자를 칭이라 했다.
狄黑字皙。[一]
적흑은 자가 석이다.
[一] 索隱家語同。
[一] 【索隱】 『家語』와 같다.
邦巽字子斂。[一]
방손은 자가 렴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家語「巽」作「選」,字子斂。文翁圖作「國選」,蓋亦避漢諱改之。劉氏作「邽巽」,音圭,所見各異。
[一]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家語』에 ‘손’을 ‘선’이라 쓰고, 자는 자렴이라 했다. 『문옹도』에 ‘국선’이라 썼는데 대개 또한 한나라의 이름을 피하여 고친 것이다. 유씨는 “규손”이라 썼는데 음은 圭이니 보이는 바가 각기 다르다.
孔忠。[一]
공충
[一] 集解家語曰:「忠字子蔑,孔子兄之子。」 索隱家語云「忠字子蔑,孔子兄之子」也。
【集解】 『家語』에 말하기를 “공충의 자는 멸이니 공자 형의 아들이다” 했다. 【索隱】 『家語』에 “공충의 자는 자멸이니 공자 형의 아들이다.” 했다.
公西輿如字子上。[一]
공서여여는 자가 자상이다.
[一] 索隱家語同。
[一] 【索隱】 『家語』에도 같다.
公西葴字子上。[一]
[一] 공서침은 자가 자상이다.
[一] 集解鄭玄曰魯人。索隱公西箴字子上,家語子上作「子尚」也。
[一] 【集解】 정현이 “노나라 사람”이라 했다. 【索隱】 공서잠은 자가 자상이니 『家語』에는 자상을 “子尙”이라 썼다.
太史公曰:學者多稱七十子之徒,譽者或過其實,毀者或損其真,鈞之未睹厥容貌,則論言弟子籍,出孔氏古文近是。余以弟子名姓文字悉取論語弟子問并次為篇,疑者闕焉。
태사공이 말하기를 배우는 들이 많이 70명 제자의 무리라 말하는데 칭찬하는 자는 혹 그 실제를 지나치게 하고, 비방하는 자는 혹 그 참됨을 덜고, 그 용모를 보지 않고 고르게 하려면 곧 제자의 기록을 논하여 말하는 것인데 공씨의 고문에서 나온 것이 이에 가깝다. 내가 제자의 이름과 성의 문자를 모두 『論語』 제자의 물음에서 취하여 나란히 차례하여 편을 삼고 의심나는 것은 빼두었다.
【索隱述贊】教興闕里,道在郰鄉。異能就列,秀士升堂。依仁遊藝,合志同方。將師宮尹,俎豆琳瑯。惜哉不霸,空臣素王!
【索隱述贊】 가르침을 궐리에 일으키니 도가 추향에 있다. 달리 나아가 열을 지었는데 빼어난 선비는 당에 오른다. 인에 의지하고 예술에 노닐며 뜻을 합하고 방향을 같이한다, 장사와 궁윤이 좋은 제기로 제사한다. 우두머리 되지 못하여 왕을 자질을 갖추었으되 신하자리 비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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