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七十一
樗里子甘茂列傳第十一 樗里子者,名疾,秦惠王之弟也,[一]與惠王異母。母,韓女也。樗里子滑稽多智,[二]秦人號曰「智囊」。 저리자는 이름이 질이니 진나라 혜왕의 동생으로 혜왕과는 어머니를 달리한다. 어머니는 한나라 여자이다. 저리자는 익살스럽고 지혜가 많아 진나라 사람들이 ‘智囊(꾀주머니)’이라 불렀다. [一] 索隱按:樗,木名也,音攄。高誘曰「其里有大樗樹,故曰樗里」。然疾居渭南陰鄉之樗里,故號曰樗里子。又按:紀年則謂之「楮里疾」也。 [一] 【索隱】 살펴보니 ‘樗’는 나무 이름인데 음이 ‘攄’이다. 고유가 말하기를 “그 마을에 큰 저수(가죽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樗里’라 했다. 고 했다. 그러나 질(저리)가 위수 남쪽 음향의 저리에 살았기 때문에 ‘저리자’라 부른 것이다. 또 살펴보니 『紀年』에는 곧 그를 일러 ‘楮里疾’이라 했다. [二] 索隱滑音骨。稽音雞。鄒誕解云「滑,亂也。稽,同也。謂辨捷之人,言非若是,言是若非,謂能亂同異也」。一云滑稽,酒器,可轉注吐酒不已。以言俳優之人出口成章,詞不窮竭,如滑稽之吐酒不已也。正義滑讀為淈,水流自出。稽,計也。言其智計宣吐如泉,流出無盡,故楊雄酒賦云「鴟夷滑稽,腹大如壺」是也。顏師古云:「滑稽,轉利之稱也。滑,亂也。稽,礙也。其變無留也。」一說稽,考也,言其滑亂不可考較。 [二] 【索隱】 ‘滑’의 음은 ‘骨’이다. ‘稽’의 음은 ‘雞’이다. 추연해가 말하기를 “‘滑’은 어지러움이고, ‘稽’는 같음이니 말을 잘하고 민첩한 사람으로 잘못을 옳은 듯이 말하고, 옳은 것을 잘못인 것처럼 말하여 같고 다름을 어지럽게 할 수 있음을 말한다.” 했다. 한편 ‘滑稽’는 술그릇이니 술을 주입하고 따르는 것을 옮겨할 수 있어 그치지 않는다. 배우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입에서 나오면 문장을 이루어 말이 다하지 않아 마치 ‘滑稽가 술을 토해내는 것과 같다.’ 고 한다. 【正義】 滑은 읽기를 ‘淈’이라 하니 물이 흘러 스스로 나오는 것이다. ‘稽’는 헤아림이니 그 지혜와 헤아림을 펼치고 토해내는 것이 샘과 같아서 흘러나옴이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양웅의 주부에 말하기를 “가죽 술 주머니에서 나오는 술이 끝이 없어 배가 큰 단지와 같고”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滑稽’는 이로움을 굴리는 것을 일컬음이다. ‘滑’은 어지러움이고, ‘稽’는 막힘이니 변함이 머물지 않는 것이다.”했다. 일설에 “‘稽’는 상고함이니 그 어지러움을 상고하고 비교할 수 없음을 말한다. 고 했다.” 秦惠王八年,爵樗里子右更,[一]使將而伐曲沃,[二]盡出其人,[三]取其城,地入秦。秦惠王二十五年,使樗里子為將伐趙,虜趙將軍莊豹,拔藺。[四]明年,助魏章攻楚,敗楚將屈丐,取漢中地。秦封樗里子,號為嚴君。[五] 진나라 혜왕 8년 ‘우경’의 벼슬을 주고 장수로 삼아 곡옥을 치게 하였는데 그 사람들을 모두 나오게 하고, 성을 취하여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다. 진나라 혜왕 25년 저리자를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치게 하니 조나라 장군 장표를 포로로 잡고 ‘린’을 함락시켰다. 다음해 위나라의 장을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 장군 굴개를 무너뜨리고 한중의 땅을 취하였다. 진나라가 저리자를 봉하여 ‘엄군’이라 불렀다. [一] 索隱按:右更,秦之第十四爵名也。 [一] 【索隱】 ‘右更’은 진나라의 제 14 爵名이다. [二] 正義故城在陝州[陝]縣西南三十二里也。 [二] 【正義】 옛 성이 섬주현 서남쪽 32리에 있다. [三] 索隱按:年表云十一年拔魏曲沃,歸其人。又秦本紀惠文王後元八年,五國共圍秦,使庶長疾與戰脩魚,斬首八萬。十一年,樗里疾攻魏焦,降之。則焦與曲沃同在十一年明矣。而傳云「八年拔之」,不同。王劭按:本紀、年表及此傳,三處記秦伐國並不同,又與紀年不合,今亦殆不可考。 [三] 【索隱】 살펴보니 『연표』에 “11년에 위나라 곡옥을 함락시키고 그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한다. 또 진 본기 혜문왕 후원 8년에 “5국이 함께 진나라를 둘러싸므로 서장 질(저리자)과 수어에서 싸워 8만명을 참수 했다.” 했다 하고 “11년에 저리질이 위나라 초 땅을 공격하니 항복하였다.” 하니 곧 초와 곡옥이 같이 11년에 있음은 분명하다. 傳에 “8년에 함락시켰다.” 하니 같지 않다. 왕소가 살펴보니 본기, 연표와 이 전(열전, 저리자전) 3곳이 진나라가 나라를 친 것이 나란히 같지 않다. 또 기년과도 합치하지 않으니 지금 또한 자못 고증할 수 없다. [四] 正義藺縣在石州。 [四] 【正義】 린현은 석주에 있다. [五] 索隱按:嚴君是爵邑之號,當是封之嚴道。 [五] 【索隱】 살펴보니 ‘嚴君’은 이 작읍의 이름이니 이는 엄도에 봉하였다 하는 것이 마땅하다. 秦惠王卒,太子武王立,逐張儀、魏章,而以樗里子、甘茂為左右丞相。秦使甘茂攻韓,拔宜陽。使樗里子以車百乘入周。周以卒迎之,意甚敬。楚王怒,讓周,以其重秦客。游騰[一]為周說楚王曰:「知伯之伐仇猶,遺之廣車,[二]因隨之以兵,仇猶遂亡。何則?無備故也。齊桓公伐蔡,號曰誅楚,其實襲蔡。今秦,虎狼之國,使樗里子以車百乘入周,周以仇猶、蔡觀焉,故使長戟居前,彊弩在後,名曰衛疾,[三]而實囚之。且夫周豈能無憂其社稷哉?恐一旦亡國以憂大王。」楚王乃悅。 진나라 혜왕이 죽고 태자 무왕이 즉위하여 장의와 위장을 축출하고 저리자와 감무를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감무를 시켜 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의양을 함락시키고, 저리자로 하여금 수레백대로 주나라에 들어가게 하였다. 주나라가 마침내 맞아들였는데 매우 공경하는 뜻이 있었다. 초나라 왕이 노하여 주나라가 진나라 의 客을 중용한 것을 질책하였다. 유등이 주나라를 위하여 초나라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백이 구유를 칠 때 廣車를 보내고 병졸을 따르게 함으로 인하여 구유가 마침내 망하였습니다. 왜인가? 곧 대비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나라 환공이 채나라를 칠 때 부르짖기를 초나라를 벤다. 하였으나 실제는 채나라를 습격하였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의 나라로 저리자를 시켜 수레 백대로써 주나라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주나라를 구유와 채나라로써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긴 창을 앞에 두게 하고 강한 쇠뇌를 뒤에 있게 하여 명목상 저리자를 호위한다. 하나 실제로는 그를 가둔 것입니다. 또한 저 주나라가 어찌 그 사직을 근심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는 것으로써 대왕을 근심시킬 것을 두려워합니다.”하니 초나라 왕이 이에 기뻐하였다. [一] 索隱游,姓;騰,名也。 [一] 【索隱】 ‘游’는 성이고, ‘騰’은 이름이다. [二] 集解許慎曰:「仇猶,夷狄之國。」戰國策曰:「智伯欲伐仇猶,遺之大鍾,載以廣車。」周禮曰:「廣車之萃。」鄭玄曰:「廣車,橫陳之車。」 索隱戰國策云「智伯欲伐仇猶,遺之大鍾,載以廣車」。以「仇猶」為「厹由」。韓子作「仇由」。地理志臨淮有厹猶縣也。正義括地志云:「并州盂縣外城俗名原仇山,亦名仇猶,夷狄之國也。韓子云『智伯欲伐仇猶國,道險難不通,乃鑄大鐘遺之,載以廣車。仇猶大悅,除塗內之。赤章曼支諫曰:「不可,此小所以事大,而今大以遺小,卒必隨,不可。」不聽,遂內之。曼支因斷轂而馳。至十九日而仇猶亡也』。」 [二] 【集解】 허신이 말하기를 “구유는 이적의 나라이다.” 했다. 『戰國策』에 말하기를 “지백이 구유를 치고자 하여 큰 종을 보내면서 광거에 실어 보냈다.” 『周禮』에 “광거의 모음이다.” 했고, 정현은 “광거는 橫陣의 수레이다.” 했다. 【索隱】 『戰國策』에 “지백이 구유를 치고자 하여 큰 종을 보내면서 광거에 실어 보냈다.” 하면서 ‘仇猶’를 ‘厹由’라 했다. 한자는 ‘仇由’라 썼다. 『地理志』에 “회수에 접하여 구유현이 있다.” 했다. 【正義】 『括地志』에 “병주 우현 외성을 통속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구원산인데 또한 구유라 이름하고 오랑캐의 나라이다.”했다. 한자가 말하기를 “지백이 구유국을 치고자 하였는데 길이 험난하여 통하지 않자 이에 큰 종을 주조하여 광거에 실어 보냈다. 구유가 크게 기뻐하여 길을 닦고 받아들였다. 적장만지가 간하기를 해서는 않됩니다. 이는 작은 것이(나라가) 큰 것(나라를)을 섬기는 데 지금은 큰 것이(나라가) 작은 것(나라에)에 보내는 것이어서 병졸이 반드시 따를 것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유 왕이) 듣지 않고 마침내 받아들였다. 적장만지가 때문에 바퀴통을 잘라 버리고는 말을 몰아갔다. 19일에 이르러 구유가 망하였다.” 했다. [三] 正義防衛樗里子。 [三] 【正義】 저리자를 지켜 호위하는 것이다. 秦武王卒,昭王立,樗里子又益尊重。昭王元年,樗里子將伐蒲。[一]蒲守恐,請胡衍。[二]胡衍為蒲謂樗里子曰:「公之攻蒲,為秦乎?為魏乎?為魏則善矣,為秦則不為賴矣。[三]夫衛之所以為衛者,以蒲也。[四]今伐蒲入於魏,衛必折而從之。[五]魏亡西河之外[六]而無以取者,兵弱也。今并衛於魏,魏必彊。魏彊之日,西河之外必危矣。且秦王將觀公之事,害秦而利魏,王必罪公。」樗里子曰:「柰何?」胡衍曰:「公釋蒲勿攻,臣試為公入言之,以德衛君。」樗里子曰:「善。」胡衍入蒲,謂其守曰:「樗里子知蒲之病矣,其言曰必拔蒲。衍能令釋蒲勿攻。」蒲守恐,因再拜曰:「願以請。」因效金三百斤,曰:「秦兵苟退,請必言子於衛君,使子為南面。」故胡衍受金於蒲以自貴於衛。於是遂解蒲而去。還擊皮氏,[七]皮氏未降,又去。 진나라 무왕이 죽고 소왕이 즉위하였다. 저리자가 또한 더욱 존중되었다. 소왕 1년 저리자가 장차 ‘포’를 치려 하니 ‘포’의 ‘守’가 두려워하여 ‘호연’을 청하였다. 호연이 ‘포’를 위해 저리자에게 말하기를 “공이 ‘포’를 공격하는 것은 진나라를 위해서입니까? 위나라를 위해서 입니까? 위나라를 위해서라면 곧 좋습니다.만 진나라를 위해서라면 곧 이득이 되지 못합니다. 저 衛나라의 衛나라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포’ 때문입니다. 지금 ‘포’를 쳐서 魏나라에 들이면 衛나라는 반드시 꺽여서 (魏나라를)따를 것입니다. 魏나라가 서하의 밖을 잃어 취할 것이 없는 것은 군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衛나라를 魏나라에 병합시킨다면 魏나라가 반드시 강해질 것입니다. 魏나라가 강해지는 날 서하의 밖은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또 진나라 왕이 장차 공의 일을 보고 진나라를 해치고 魏나라를 이롭게 하였다 하여 왕은 반드시 공에게 죄를 줄 것입니다.” 했다. 저리자가 말하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호연이 말하기를 “공은 ‘포’를 풀고(의 포위를 풀고)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이 시험 삼아 공을 위해 말하면 衛나라 임금을 덕으로 대해야 합니다.” 했다. 저리자가 말하기를 “좋다”했다. 호연이 ‘포’에 들어가 그 守에게 말하기를 “저리자는 ‘포’의 병폐를 알고 반드시 ‘포’를 점령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만 호연(제가)이 (저리자로 하여금) ‘포’의 포위를 풀고 공격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했다. ‘포’의 守가 두려워하면서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간)청합니다.” 했다. 때문에 금 삼백근을 주면서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가 만약 물러간다면 반드시 그대를 衛나라 임금에게 말해서 그 대로 하여금 남면(남쪽 방향으로 앉게)하게 하겠습니다.”했다. 그러므로 호연이 ‘포’에서 금을 받은 것으로써 스스로 衛나라에서 귀하게 되었다. 이에 (진나라 군대가) 마침내 ‘포’의 포위를 풀고 갔다. (진나라 군대가)돌아가면서 피씨를 공격하였는데 피씨가 항복하지 않자 또한 떠나갔다. [一] 索隱按:紀年云「楮里疾圍蒲不克,而秦惠王薨」,事與此合。正義蒲故城在滑州匡城縣北十五里,即子路作宰地。 [一] 【索隱】 살펴보니 『紀年』에 “저리자가 ‘포’를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진나라 혜왕이 죽었다.”하였는데 일과 이것이 부합한다. 【正義】 ‘포’의 옛 성은 활주 광성현 북쪽 15리에 있으니 곧 자로가 宰가 되었던 곳이다. [二] 索隱人姓名也。 [二] 【索隱】 사람의 성명이다. [三] 集解賴,利也。 [三] 【集解】 ‘賴’는 이로움이다. [四] 正義蒲是衛國之鄣衛。 [四] 【正義】 ‘蒲’는 衛나라의 장위이다. [五] 索隱戰國策云「今蒲入於秦,衛必折而入於魏」,與此文相反。 [五] 【索隱】 『戰國策』에 “지금 ‘포’를 진나라에 들이면 衛나라는 반드시 꺽여서 魏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하니 이 글과는 서로 반대된다. [六] 正義謂同、華等州。 [六] 【正義】 동주와 화증 등의 주를 말한다. [七] 正義故城在絳州龍門縣西百四十步,魏邑。 [七] 【正義】 옛 성이 강주 용문현 서쪽 140보에 있으니 魏邑이다. 昭王七年,樗里子卒,葬于渭南章臺之東。[一]曰:「後百歲,是當有天子之宮夾我墓。」樗里子疾室在於昭王廟西渭南陰鄉樗里,故俗謂之樗里子。至漢興,長樂宮在其東,未央宮在其西,[二]武庫正直其墓。[三]秦人諺曰:「力則任鄙,智則樗里。」 소왕 7년에 저리자가 죽으니 위수 남쪽 장대의 동쪽에 장사하였다. (저리자가)말하기를 “이는 마땅히 천자의 궁이 내 묘를 끼고 있을 것이다.”했다. 저리자 의 집은 소왕의 사당 서쪽 위수 남쪽 음향 저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통속적으로 저리자라 한다. 한나라가 일어남에 이르러 장락궁이 그 동쪽에 있고, 미앙궁이 그 서쪽에 있으며 무고가 그 묘를 곧바로(마주) 하였다. 진나라 사람들의 속언에 “힘으로는 임비이고, 지혜로는 저리이다.” 했다. [一] 索隱按黃圖,在漢長安故城西。 [一] 【索隱】 黃圖를 살펴보니 한나라 장안 옛성 서쪽이다. [二] 正義漢長樂宮在長安縣西北十五里,未央在縣西北十四里,皆在長安故城中也。 [二] 【正義】 한나라 장락궁은 장안현 서북쪽 15리에 있고 미앙은 (장안)현 서북쪽 14리에 있는데 모두 장안 옛성 안에 있다. [三] 索隱直如字讀。直猶當也。 [三] 【索隱】 ‘直’은 같은 자로 읽는다. ‘直’은 ‘當’과 같다. 甘茂者,下蔡人也。[一]事下蔡史舉先生,[二]學百家之術。因張儀、樗里子而求見秦惠王。王見而說之,使將,而佐魏章略定漢中地。 감무는 (초나라)하채 사람이다. 하채 사거선생을 섬기면서 百家의 술(방법)을 배웠다. 장의, 저리자로 인하여 진나라 혜왕을 뵙기를 구하였다. 왕이 만나보고 기뻐하여 장수로 삼았는데 위장을 도와 한중의 땅을 공략하여 평정하였다. [一] 索隱地理志下蔡縣屬汝南也。正義今潁州縣,即州來國。 [一] 【索隱】 『地理志』에 “하채현은 여남에 속한다.” 했다. 【正義】 지금의 영주현이니 곧 주래국이다. [二] 索隱戰國策及韓子皆云史舉,上蔡監門。 [二] 【索隱】 『戰國策』과 韓子에 모두 ‘사거’라 했는데 채감문에 올랐다. 惠王卒,武王立。張儀、魏章去,東之魏。蜀侯煇、相壯反[一],秦使甘茂定蜀。還,而以甘茂為左丞相,以樗里子為右丞相。 혜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였다. 장의와 위장이 떠나서 동족으로 魏나라에 갔다. 촉의 후휘, 상장이 배반하자 진나라가 감무러 하여금 촉을 평정하게 하였다. 돌아오니 감무를 좌승상으로 삼고, 저리자를 우승상으로 삼았다. [一] 索隱煇音暉,又音胡昆反。秦之公子,封蜀也。華陽國志作「暉」。壯音側狀反。姓陳也。 [一] 【索隱】 ‘煇’의 음은 ‘暉’이다. 또 음은 ‘胡’와 ‘昆’의 反이다. 진나라의 공자를 촉에 봉하였다. 『華陽國志』에 ‘暉’라고 썼다. ‘壯’의 음은 ‘側’과 ‘狀’의 反이다. 성은 진이다. 秦武王三年,謂甘茂曰:「寡人欲容車通三川,以窺周室,而寡人死不朽矣。」甘茂曰:「請之魏,約以伐韓,而令向壽[一]輔行。」甘茂至,謂向壽曰:「子歸,言之於王曰『魏聽臣矣,然願王勿伐』。事成,盡以為子功。」向壽歸,以告王,王迎甘茂於息壤[二]。甘茂至,王問其故。對曰:「宜陽,大縣也,上黨、南陽積之久矣。[三]名曰縣,其實郡也。今王倍數險,[四]行千里攻之,難。昔曾參之處費,[五]魯人有與曾參同姓名者殺人,人告其母曰『曾參殺人』,其母織自若也。頃之,一人又告之曰『曾參殺人』,其母尚織自若也。頃又一人告之曰『曾參殺人』,其母投杼下機,踰牆而走。夫以曾參之賢與其母信之也,三人疑之,其母懼焉。今臣之賢不若曾參,王之信臣又不如曾參之母信曾參也,疑臣者非特三人,臣恐大王之投杼也。始張儀西并巴蜀之地,北開西河之外,南取上庸,天下不以多張子而以賢先王。魏文侯令樂羊將而攻中山,三年而拔之。樂羊返而論功,文侯示之謗書一篋。樂羊再拜稽首曰:『此非臣之功也,主君之力也。』今臣,羈旅之臣也。樗里子、公孫奭[六]二人者挾韓而議之,王必聽之,是王欺魏王而臣受公仲侈[七]之怨也。」王曰:「寡人不聽也,請與子盟。」卒使丞相甘茂將兵伐宜陽。五月而不拔,樗里子、公孫奭果爭之。武王召甘茂,欲罷兵。甘茂曰:「息壤在彼。」[八]王曰:「有之。」因大悉起兵,使甘茂擊之。斬首六萬,遂拔宜陽。韓襄王使公仲侈入謝,與秦平。 진나라 무왕 3년에 감무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容車로 三川을 통과하여 주나라 왕실을 엿보아 과인이 죽더라도 영원하고자 합니다.” 감무가 말하기를 “魏나라에 가서 韓나라를 칠 것을 맹약할 것을 청하니 향수가 보좌로 가게 하여주십시오.” 했다. 감무가 (위나라에) 이르자 향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돌아가서 왕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魏나라가 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하니 원하건데 왕께서는 치지 말아주십시오.’ 하라 하고, 일이 이루어지면 모두가 그대의 공이 될 것이다.” 했다. 향수가 돌아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감무를 식양에서 맞이하였다. 감무가 이르자 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 (감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의양은 큰 현으로 상당과 남양의 쌓임이 오래되었습니다. 명목상 현이라 하나 실제는 군입니다. 지금 왕께서 험함을 몇 배로 하여 천리를 가서 공격하여도 어렵습니다. 옛날 증삼이 비에 있을 때 노나라 사람들이 증삼과 성명이 같은 자가 사람을 죽이자 사람들이 그 어머니에게 알려 말하기를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였는데도 그 어머니는 길쌈을 하며 태연하였습니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알려서 말하기를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어머니가 아직도 길쌈을 하며 태연하였습니다. 잠시 후 어떤 사람이 알려 말하기를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하자 그 어머니가 북을 던지고 베틀에서 내려와 담을 넘어 달아났습니다. 대저 증삼의 어짐과 그 어머니의 믿음으로도 세 사람이 그를 의심하자 그 어머니가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신의 어짐이 증삼과 같지 못하고 왕께서 신을 믿는 것이 또한 증삼의 어머니가 증삼을 믿는 것보다 못하니 신을 의심하는 자가 다만 3인 뿐만이 아닐 것이니 신은 대왕께서 북을 내던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했다. 처음 장의가 서쪽으로 파촉의 땅을 아우르고, 북쪽으로 서하의 밖을 개척하고, 남쪽으로 상용을 취하였을 때 천하가 장자(장의)의 공이 많다 하지 않고 선왕이 현명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위나라 문후는 낙양을 장수로 삼아 중산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3년이 지나 함락시켰습니다. 낙양이 돌아오자 공을 논하는데 문후가 비방하는 글 한 상자를 보였습니다. 낙양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 주군의 힘입니다.’ 했습니다. 지금 신은 오래 동안 객지에 머물던 신하입니다. 저리자, 공손석 두 사람이 한나라를 끼고 의논하면 왕께서는 반드시 듣습니다. 이는 왕께서 위나라 왕을 속이는 것이고, 신은 공중치의 원한을 받습니다.” 했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대와 맹약하기를 청하노라.” 했다. 마침내 승상 감무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의양을 치게 했다. 5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저리자와 공손석이 과연 그것을 다투었다. 무왕이 감무를 불러 군대를 파하고자 하였다. 감무가 말하기를 “식양이 거기에 있습니다.” 했다. 왕이 말하기를 “있다.‘ 하고는 인하여 크게 모두 군대를 일으켜 감무로 하여금 치게 하였다. 머리를 벤 것이 6만이고, 마침내 의양을 함락시키니 한나라 양왕이 공중치로 하여금 들어와 사죄하고 진나라와 화평하게 하였다. [一] 正義餉受二音,人姓名。 [一] 【正義】 ‘餉’과 ‘受’ 두 음이니 사람의 성명이다. [二] 索隱按:山海經、啟筮云「昔伯鯀竊帝之息壤以堙洪水」,或是此也。正義秦邑。 [二] 【索隱】 살펴보니 『山海經』 계서에 “옛날 백곤이 제의 식양을 훔쳐서 홍수를 막았다.” 한 것이 혹 이것일 것이다. 【正義】 진나라의 읍이다. [三] 索隱謂上黨、南陽並積貯日久矣。正義韓之北三郡積貯在河南宜陽縣之日久矣。 [三] 【索隱】 상당과 남양은 아울러 쌓고 저장한 날이 오래되었음을 말한다, 【正義】 한나라 북쪽 3군이 쌓고 저장한 것이 하남 의양현에 둔 날이 오래되었다. [四] 索隱數音率腴反。正義謂函谷及三崤、五谷。 [四] 【索隱】 ‘數’의 음은 ‘率’과 ‘腴’의 反이다. 【正義】 함곡과 三효, 五谷이다. [五] 集解音祕。 [五] 【集解】 음은 ‘秘’이다. [六] 索隱按:戰國策作「公孫衍」。正義音釋。 [六] 【索隱】 살펴보니 『戰國策』에 ‘공손연’이라 썼다. 【正義】 음은 석이다. [七] 集解徐廣曰:「一作『馮』。」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馮’이라고도 썼다. [八] 正義甘茂歸至息壤,與秦王盟,恐後樗里子、公孫奭伐韓,今二子果爭之。武王召茂欲罷兵,故甘茂云息壤在彼邑也。 [八] 【正義】 감무가 돌아와 식양에 이르러 진나라 왕과 맹약하였는데 후에 저리자, 공손석이 한나라를 칠 것을 두려워하였고, 지금 두 사람이 과연 다투었다. 무왕이 감무를 불러 군대를 파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감무가 식양이 그 읍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武王竟至周,而卒於周。其弟立,為昭王。[一]王母宣太后,楚女也。楚懷王怨前秦敗楚於丹陽而韓不救,乃以兵圍韓雍氏。[二]韓使公仲侈告急於秦。秦昭王新立,太后楚人,不肯救。公仲因甘茂,茂為韓言於秦昭王曰:「公仲方有得秦救,故敢扞楚也。今雍氏圍,秦師不下殽,公仲且仰首而不朝,公叔且以國南合於楚。楚、韓為一,魏氏不敢不聽,然則伐秦之形成矣。不識坐而待伐孰與伐人之利?」秦王曰:「善。」乃下師於殽以救韓。楚兵去。 무왕이 마침내 주나라에 이르렀고, 주나라에서 죽었다. 그 동생이 즉위하여 소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는 선태후이니 초나라 여자이다. 초나라 회왕이 앞서 진나라가 초나라를 단양에서 패퇴시키고 한나라가 구원하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이에 군대로 한나라 옹씨를 포위하였다. 한나라가 공중치로 하여금 진나라에 급함을 알리게 하였다. 진나라 소왕이 새로 즉위하고, 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어서 즐겨 구원하지 않았다. 공중치가 감무를 인하니 감무가 한나라를 위해 진나라 소왕에게 말하기를 “공중치가 바야흐로 진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감히 초나라를 막은 것입니다. 지금 옹씨가 포위되었는데 진나라 군대가 효산으로 내려 보내지 않으면 공중치가 또한 머리를 치켜들고 조회하지 않을 것이고, 공숙이 또한 나라 남쪽으로써 초나라에 합할 것입니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하나가 되면 위씨(위나라)가 감히 (말을)듣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하면 곧 진나라를 치는 형세가 이루어집니다. 앉아서 누가 치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른 사람을 치는 것의 이익을(이익이 어느 쪽이 나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좋다.” 하고는 이에 군대를 효산에 내려 보내 한나라를 구원하게 하니 초나라 군대가 (물러)갔다. [一] 索隱按:趙系家昭王名稷。系本云名側也。 [一] 【索隱】 살펴보니 조나라 「系家」에 소왕의 이름은 ‘직’이라 했다. 「系本」에는 이름을 ‘側’이라 했다. [二] 索隱按:趙惠王二十六年,楚圍雍氏,至昭王七年,又圍雍氏,韓求救於秦,是再圍也。劉氏云「此是前圍雍氏,當赧王之三年」。戰國策及紀年與此並不同。正義故城在洛州洛陽縣東北二十里。 [二] 【索隱】 살펴보니 조나라 혜왕 26년에 초나라가 옹씨를 포위하고, 소왕 7년에 이르러 또 옹씨를 포위하니 한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구하였으니 이는 두 번 포위한 것이다. 유씨가 말하기를 “이는 앞에 옹씨를 포위한 것이니 난왕 3년에 해당한다.”고 했다. 『戰國策』과 『紀年』에는 이와 나란히 같지 않다. 【正義】 옛 성이 낙주 낙양현 동북쪽 20리에 있다. 秦使向壽平宜陽,而使樗里子、甘茂伐魏皮氏。向壽者,宣太后外族也,而與昭王少相長,故任用。向壽如楚,[一]楚聞秦之貴向壽,而厚事向壽。向壽為秦守宜陽,將以伐韓。韓公仲使蘇代謂向壽曰:「禽困覆車。[二]公破韓,辱公仲,公仲收國復事秦,自以為必可以封。[三]今公與楚解口地,[四]封小令尹以杜陽。[五]秦楚合,復攻韓,韓必亡。韓亡,公仲且躬率其私徒以閼[六]於秦。[七]願公孰慮之也。」向壽曰:「吾合秦楚非以當韓也,子為壽謁之公仲,[八]曰秦韓之交可合也。」蘇代對曰:「願有謁於公。[九]人曰貴其所以貴者貴。王之愛習公也,不如公孫奭;其智能公也,不如甘茂。今二人者皆不得親於秦事,而公獨與王主斷於國者何?彼有以失之也。[一0] 公孫奭黨於韓,而甘茂黨於魏,故王不信也。今秦楚爭彊而公黨於楚,是與公孫奭、甘茂同道也,公何以異之?[一一]人皆言楚之善變也,而公必亡之,是自為責也。[一二]公不如與王謀其變也,善韓以備楚,[一三]如此則無患矣。韓氏必先以國從公孫奭而後委國於甘茂。韓,公之讎也。[一四]今公言善韓以備楚,是外舉不僻讎也。」向壽曰:「然,吾甚欲韓合。」對曰:「甘茂許公仲以武遂,[一五]反宜陽之民,[一六]今公徒收之,甚難。」[一七]向壽曰:「然則奈何?武遂終不可得也?」對曰:「公奚不以秦為韓求潁川於楚?[一八]此韓之寄地也。公求而得之,是令行於楚而以其地德韓也。公求而不得,是韓楚之怨不解[一九]而交走秦也。[二0]秦楚爭彊,而公徐過楚[二一]以收韓,此利於秦。」[二二]向壽曰:「柰何?」對曰:「此善事也。甘茂欲以魏取齊,公孫奭欲以韓取齊。今公取宜陽以為功,收楚韓以安之,而誅齊魏之罪,[二三]是以公孫奭、甘茂無事也。」 진나라가 향수로 하여금 의양을 평정하게 하고, 저리자, 감무를 시켜서 위나라 피씨를 치게 하였다. 향수는 선태후의 외족으로 소왕과 어려서부터 같이 성장하였기 때문에 임용되었다. 향수가 초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는 향수가 진나라의 귀족임을 듣고는 두터이 섬겼다.(잘 대우하였다.) 향수가 진나라 의양의 관리가 되어 장차 한나라를 치려하였다. 한나라 공중치가 소대로 하여금 향수에게 말하게 하기를 “짐승도 곤궁하면 수레를 뒤엎는데 공이 한나라를 깨트리고 공중치를 욕보이면 공중치가 나라를 거두어 다시 진나라를 섬겨서 스스로 봉함을 받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지금 공은 초나라 해구의 땅을 주고 소영윤을 두양에 봉하였습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연합하여 다시 한나라를 공격하면 한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한나라가 망하면 공중치가 또한 직접 그 사사로운 무리를 이끌고 진나라를 막을 것입니다. 원하건데 공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했다. 향수가 말하기를 “내가 진나라와 초나라를 합하는 것은 한나라를 감당하려는 것이 아니니 그대는 향수를 위하여 공중치를 뵙고 ‘진나라와 한나라는 교류하여 합할 수 있다.’고 말해 주시오.” 했다. 소대가 대답하기를 “원하건데 공을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귀하게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도)귀하게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공을 아끼는 것은 공손석만 못하고 그 지혜와 능력은 감무만 못합니다. 지금 두 사람은 모두 진나라 정사(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를 (진나라 왕을) 가까이 할 수 없음에도 공만이 유독 왕과 함께 나라(정사)를 주관하고 결단하는 것은 왜입니까? 그것은 (진나라 왕의 사랑을)잃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손석은 한나라에서 무리를 짓고, 감무는 위나라에서 무리 지었기 때문에 왕이 신임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가 강함을 다투는데 공이 초나라에서 무리 지으면 이는 공손석, 감무와 길을 같이 하는 것이니 공이 (두 사람과)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초나라가 잘 변한다고 말하는데 공은 반드시 없을 것(초나라가 변하는 것)이라 하니 이는 스스로 책임지우는 것입니다. 공은 왕과 함께 그 변화에 대응하고, 한나라와 잘 지내는 것으로써 초나라를 대비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같이 하면 곧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한씨는 반드시 먼저 나라로써(정사로) 공손석을 따른 후에 감무에게 나라(정사)를 맡길 것입니다. 한나라는 공의 원수입니다. 지금 공이 한나라에 친선하는 것으로써 초나라를 대비한다고 말하면 이는 (인재를)밖에서 천거하여 원수를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했다. 향수가 말하기를 “그러하다. 내가 매우 한나라를 합하고자 한다.” 했다. (소대가)대답하기를 “감무는 공중치가 무수로써 의양의 백성을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지금 공의 무리가 그것을 거두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했다. 향수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무수는 끝내 얻을 수 없습니까?” 하니 (소대가) 대답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진나라로서 한나라를 위해 초나라에서 영천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이는 한나라가 기증한 땅입니다. 공이 요구하여 얻으면 이는 (진나라의 령이)초나라에 행해지고 그 땅으로서 한나라에 덕을 베푸는 것입니다. 공이 요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이는 한나라와 초나라의 원한이 풀리지 않아 서로 진나라를 향해 달릴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강함을 다툴 때 공이 천천히 초나라를 허물하는 것으로서 한나라를 거두면 이것은 진나라에 이이 될 것입니다.” 했다. 향수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소대가) 대답하기를 “이는 좋은 일입니다. 감무는 위나라로서 제나라를 취하고자 하고, 공손석은 한나라로서 제나라를 취하고자 합니다. 지금 공은 의양을 취하는 것으로서 공을 삼기 때문에 초나라와 한나라를 거두어서 편안하게 하고, 제나라와 위나라의 죄를 물으면 이는 공손석과 감무는 일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如,一作『和』。」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如’는 ‘和’라 쓰기도 한다. [二] 集解譬禽獸得困急,猶能抵觸傾覆人車。 [二] 【集解】 금수(날짐승, 길짐승) 도 곤궁하고 급하면 오히려 거스르고 떠받아 사람과 수레를 기울고, 뒤집어지게 함을 비유한 것이다. [三] 正義公仲自以為必可得秦封。 [三] 【正義】 공중치가 스스로 반드시 진나라의 봉함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四] 索隱解口,秦地名,近韓,今將與楚也。正義上紀買反。公,向壽也。解口猶開口得言。向壽於秦開口,則楚人必得封地也。 [四] 【索隱】 ‘해구’는 진나라의 지명으로 한나라에 가까운데 지금 장차 초나라에 주려 한 것이다. 【正義】 위는 ‘紀’와 ‘買’의 反이다. 공은 향수이다. ‘解口’는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향수가 진나라에 말할 수 있었다면 곧 초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당에 봉해짐을 얻게 된다. [五] 索隱又封楚之小令尹以杜陽。杜陽亦秦地,今以封楚今尹,是秦楚合也。 [五] 【索隱】 또 초나라의 소영윤을 두양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두양이 또한 진나라의 땅인데 지금 초나라 영윤을 봉하였으니 이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합하는 것이다. [六] 集解音烏曷反。 [六] 【集解】 음은 ‘烏’와 ‘曷’의 反이다. [七] 正義公仲恐韓亡,欲將私徒往宜陽閼向壽也。 [七] 【正義】 공중은 한나라가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차 사사로운 무리와 의양에 가서 향수를 막고자 한 것이다. [八] 正義子,蘇代也。向壽恐,今蘇代謁報公仲,云「秦韓交可合」。 [八]【正義】 ‘子’는 소대이다. 향수가 두려워 하니 지금 소대가 공중치를 뵙고 보고하여 말하기를 “진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합할 수 있다.” 한 것이다. [九] 正義公,向壽也。言向壽亦黨於楚,與公孫奭、甘茂黨韓、魏同也。 [九] 【正義】 ‘公’은 향수이다. 향수가 또한 초나라에서 무리 짓는 것은 공손석과 감무가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무리 짓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一0] 索隱彼,公孫奭及甘茂也。有以失之,謂不見委任,情有所失。正義言秦王雖愛習公孫奭、甘茂,秦事不親委者,為黨韓、魏也。今國事獨與向壽主斷者,不知壽黨於楚以事秦王者,以失之也。 [一0] 【索隱】 ‘彼’는 공손석과 감무이다. ‘有以失之(잃음이 있다.)’는 위임받지 못하고 실정을 잃는 바가 있음을 말한다. 【正義】 진나라 왕이 비록 공손석과 감무를 사랑할지라도 진나라 정사를 가까이 하고 위임하지 않는 것은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무리를 지었기 때문이다. 지금 국사를 유독 향수가 주관하고 결단하는 것을 허여한 것은 향수가 초나라에서 무리지은 것으로서 진나라를 섬기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그것을 잃게 됨을 말한다. [一一] 正義蘇氏云:「向壽與公孫奭、甘茂皆有黨,言無異也。」又一云改異黨楚之意。 [一一] 【正義】 소씨가 말하기를 “향수와 공손석, 감무는 모두 무리를 지은이 있었으므로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했다. 또 한편으로 초나라와 다르게 무리지음의 뜻이다. [一二] 正義楚善變改,不可信。若變改,向壽必亡敗,是自為責。 [一二] 【正義】 초나라는 변하고 고침을 잘하니 믿을 수 없다. 만약 변하고 고치면 향수는 반드시 망하고 무너질 것이니 이는 스스로 책임을 삼는 것이다. [一三] 正義令秦親韓而備楚之變改,則向壽無患矣。 [一三] 【正義】 진나라로 하여금 한나라와 친하게 하여 초나라의 변하고 고침을 대비하면 향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다. [一四] 正義韓氏必先委二人,故韓為向壽之讎。 [一四] 【正義】 한시가 반드시 먼저 두 사람에게 맡겼기 때문에 한나라가 향수의 원수가 된 것이다. [一五] 集解徐廣曰:「秦昭王元年予韓武遂。」 [一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진나라 소왕 1년에 한나라 무수를 주었다. [一六] 正義武遂,宜陽,本韓邑也,秦伐取之。今欲還韓,令其民得反歸居之。 [一六] 【正義】 무수, 의양은 본래 한나라 읍이었으나 진나라가 쳐서 취하였다. 지금 한나라에 돌려주고자 하여 그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가 살수있게 한 것이다. [一七] 正義蘇代言甘茂許公仲以武遂,又歸宜陽之民,今向壽徒擬收之,甚難事也。 [一七] 【正義】 소대는 감무가 공중치에게 무수를 주고, 또 의양의 백성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니 지금 향수의 무리가 거두어들임을 의심할 것이니 매우 어려운 일임을 말한 것이다. [一八] 正義潁川,許州也。楚侵韓潁川,蘇代令向壽以秦威重為韓就楚求索潁川,是親向壽。 [一八] 【正義】 ‘영천’은 ‘허주’이다. 초나라가 한나라의 영천을 침범하니 소대가 향수로 하여금 진나라의 위엄의 중대함으로써 한나라를 위해 초나라에 나아가 영천을 요구하도록 한 것이니 이는 향수를 가까이 한 것이다. [一九] 集解已買反。 [一九] 【集解】 ‘已’와 ‘買’의 反이다. [二0] 索隱韓楚怨不解,二國交走向秦也。 [二0] 【索隱】 한나라와 초나라가 원한을 풀지 않아 두 나라가 서로 진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二一] 集解徐廣曰:「過,一作『適』。」 [二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過’는 ‘適’이라 쓰기도 한다. [二二] 正義若二國皆事秦,公則漸說楚之過失以收韓,此利於秦也。 [二二] 【正義】 만약 두 나라가 모두 진나라를 섬긴다면 공은 곧 점차적으로 초나라의 잘못을 유세하는 것으로써 한나라를 거두는 이것이 진나라에 이익이 될 것이다. 한 것이다. [二三] 正義言公孫奭、甘茂皆欲以秦挾韓魏而取齊,今向壽取宜陽為功,收楚韓安以事秦,而責齊魏之罪,是公孫奭、甘茂不得同合韓魏於秦以伐齊也。 [二三] 【正義】 공손석과 감무는 모두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끼고서 제나라를 취하려 하는데, 지금 향수는 의양을 취하는 것으로 공을 삼아 초나라와 한나라를 거두어 안정시키는 것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하고, 제나라와 위나라의 죄를 질책 하려 하였다. 이는 공손석과 감무가 한나라와 진나라를 같이 합하는 것으로써 제나라를 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甘茂竟言秦昭王,以武遂復歸之韓。[一]向壽、公孫奭爭之,不能得。向壽、公孫奭由此怨,讒甘茂。茂懼,輟伐魏蒲阪,亡去。[二]樗里子與魏講,罷兵。[三] 감무가 마침내 진나라 소왕에게 말하여 무수로서(무수를 주고) 다시 한나라에 돌아갔다. 향수와 공손석이 그것을 다투었으나 할 수 없었다. 향수는 공손석이 이 원한으로 말미암아 감무를 참소하였다. 감무가 두려워하여 위나라의 포판을 치는 것을 거두고(그만두고) 도망갔다. 저리자와 위강이 군대를 거두었다. [一] 正義年表云秦昭王元年予韓武遂也。 [一] 【正義】 「年表」에 소왕 1년 한나라 무수를 주었다. [二] 集解徐廣曰:「昭王元年,擊魏皮氏,未拔,去。」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소왕 1년 위나라 피씨를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갔다. [三] 索隱鄒氏云:「講讀曰媾。媾猶和也。」 [三] 【索隱】 추씨가 말하기를 “‘講’의 독음은 ‘媾’인데 ‘媾’는 ‘和(화하다. 합치다. 서로 응하다.)이다. 甘茂之亡秦奔齊,逢蘇代。代為齊使於秦。甘茂曰:「臣得罪於秦,懼而遯逃,無所容跡。臣聞貧人女與富人女會績,貧人女曰:『我無以買燭,而子之燭光幸有餘,子可分我餘光,無損子明而得一斯便焉。』今臣困而君方使秦而當路矣。茂之妻子在焉,願君以餘光振之。」 감무가 진나라를 도망하여 제나라로 달아나 소대를 만났다. 소대가 제나라를 위하여 진나라에 사신 갔다. 감무가 말하기를 “신은 진나라에 죄를 얻어 두려워하여 도망하였는데 자취를 받아 주는 곳이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가난한 여자와 부자인 여자가 만나 길쌈을 하는데 가난한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촛불을 살 수 없는데 그대의 촛불의 빛이 요행히 남음이 있다. 그대가 나에게 남은 빛을 나누어 주면 그대의 밝음을 덜지 않아도 하나의 편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지금 신이 곤궁하고 그대는 바야흐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주요 직책을 맡았습니다. 감무의(저의) 처자가 여기(진나라)에 있으니 원하건데 그대는 남은 빛으로써 떨쳐(구휼 해) 주십시오.” 했다. 蘇代許諾。遂致使於秦。已,因說秦王曰:「甘茂,非常士也。其居於秦,累世重矣。自殽塞[一]及至鬼谷,[二]其地形險易皆明知之。彼以齊約韓魏反以圖秦,非秦之利也。」秦王曰:「然則柰何?」蘇代曰:「王不若重其贄,厚其祿以迎之,使彼來則置之鬼谷,[三]終身勿出。」 소대가 허락하였다. 마침내 사신이 진나라에 이르렀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인하여 진나라 왕을 유세하여 말하기를 “감무는 평범한 선비가 아닙니다. 그는 진나라에서 살아 여러 세대를 중용되었습니다. 효의 보루에서부터 귀곡에 이르기까지 그 지형의 험함과 쉬움을 모두 밝게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제나라로 한나라와 위나라와 (진나라와의)약속(맹약)을 뒤집는 것으로서 진나라를 도모하는 것은 진나라에 이로운 것이 아닙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할까?” 했다. 소대가 말하기를 “왕께서 그 폐백을 많이 하고 그 봉록을 후하게 하여 그가 오면 곧 귀곡에 두어 죽을 때가지 나오지(벗어나지) 모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것이 좋습니다.)” 했다. 秦王曰:「善。」即賜之上卿,以相印迎之於齊。甘茂不往。蘇代謂齊湣王曰:「夫甘茂,賢人也。今秦賜之上卿,以相印迎之。甘茂德王之賜,好為王臣,故辭而不往。今王何以禮之?」齊王曰:「善。」即位之上卿而處之。[四]秦因復甘茂之家[五]以市於齊。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고는 곧 상경의 벼슬을 내리고 재상의 인을 가지고 제나라에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감무가 가지 않으려하였다. 소대가 제나라 민왕에게 말하기를 “저 감무는 현명한 사람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상경의 벼슬을 내리고 재상의 인으로서 맞이하려 합니다. 감무는 왕(제나라 민왕)의 내림을 덕을 베푸는 것으로 여겨 왕의 신하가 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거절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찌하여 예로써 대우하지 않으십니까?” 했다. 제나라 왕이 말하기를 “좋습니다.”하고는 상경의 지위를 주어 있게 하였다. 진나라가 이 때문에 감무의 가를 회복하는 것으로서 제나라와 경쟁하였다. [一] 正義三殽在洛州永寧縣西北。 [一] 【正義】 ‘三殽’는 영녕현 서북쪽에 있다. [二] 集解徐廣曰:「在陽城。」 [二] 【集解】 서광은 “양성에 있다.” 했다. [三] 索隱案:徐廣云在陽城。劉氏云此鬼谷在關內雲陽,是矣。正義劉伯莊云:「此鬼谷,關內雲陽,非陽城者也。」案:陽城鬼谷時屬韓,秦不得言置之。 [三] 【索隱】 살펴보니 서광은 “양성에 있다.” 했고, 유씨는 “이 귀곡은 관내 운양에 있다.”하였는데 옳다. 【正義】 유백장은 “이 귀곡은 관내 운양이지 양성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살펴보니 양성이 귀곡인 때는 한나라에 속했을 때로 진나라가 설치했다고 말할 수 없다. [四] 索隱案:處猶留也。 [四] 【索隱】 살펴보니 ‘處’는 ‘留(머물다)’이다. [五] 正義復音福。 [五] 【正義】 ‘復’의 음은 ‘福’이다. 齊使甘茂於楚,楚懷王新與秦合婚而驩。[一]而秦聞甘茂在楚,使人謂楚王曰:「願送甘茂於秦。」楚王問於范蜎[二]曰:「寡人欲置相於秦,孰可?」對曰:「臣不足以識之。」楚王曰:「寡人欲相甘茂,可乎?」對曰:「不可。夫史舉,下蔡之監門也,大不為事君,小不為家室,以苟賤不廉聞於世,甘茂事之順焉。故惠王之明,武王之察,張儀之辯,而甘茂事之,取十官而無罪。茂誠賢者也,然不可相於秦。夫秦之有賢相,非楚國之利也。且王前嘗用召滑於越,[三]而內行章義之難,[四]越國亂,故楚南塞厲門[五]而郡江東。[六] 計王之功所以能如此者,越國亂而楚治也。今王知用諸越而忘用諸秦,臣以王為鉅過矣。然則王若欲置相於秦,則莫若向壽者可。夫向壽之於秦王,親也,少與之同衣,長與之同車,以聽事。王必相向壽於秦,則楚國之利也。」於是使使請秦相向壽於秦。秦卒相向壽。而甘茂竟不得復入秦,卒於魏。 제나라가 감무를 초나라에 사신가게 하니 초나라 회왕이 새롭게 진나라와 혼인하여 기뻐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감무가 초나라에 있다는 것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초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감무를 진나라에 보내 줄 것을 원합니다.” 했다. 초나라 왕이 범연에게 묻기를 “과인은 재상(감무)을 진나라에 두고자 하는데 누구로 하면 옳겠는가?” 하니 범연이 대답하기를 “신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했다. 초나라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감무를 재상으로 하고자 하는데 옳겠는가?” 했다. 범연이 대답하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 사거는 하채의 문지기인데 크게는 임금을 섬기려 하지 않고, 작게는 가실을 이루려 하지 않으니 구차하고 천하기 때문에 청렴하지 않다고 세상에 알려졌는데도 감무가 그를 섬기고 여기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혜왕의 현명함과 무왕의 살핌, 장의의 변설도 감무가 섬겼으며, 十官(온갖 관직)을 취하고도 죄를 입지 않았습니다. 감무는 진실로 현명한 자입니다. 그러나 진나라에 재상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진나라에 현명한 재상이 있는 것은 초나라에 이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앙의 앞에는 일직이 월나라에서 소활을 등용하여 안으로 장의의 난을 행하여 월나라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에 초나라가 남쪽으로 여문을 막아서 강동을 군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왕의 공이 이 같을 수 있는 까닭은 월나라는 어지럽고 초나라는 다스려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저 월나라를 쓰는 것만 알고, 저 진나라를 쓰는 것을 잊은 것이니 신은 왕께서 큰 잘못을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한 즉 왕께서 만약 진나라에 재상을 두고자 한다면 곧 형수와 같지 않은 자가 옳을 것입니다. 저 향수와 진나라 왕과의 관계는 친하여 어려서는 함께 같은 옷을 입었고, 자라서는 그와 함께 같은 수레를 타고 정사를 들었습니다. 왕께서 반드시 향수를 진나라 재상으로 한다면 곧 조나라에 이로울 것입니다. 했다. 이에 사신을 시켜서 진나라에서 향수를 진나라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게 했다. 진나락 마침내 향수를 재상으로 삼았다. 감무가 끝내 다시 진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위나라에서 죽었다. [一] 集解徐廣曰:「昭王二年時迎婦於楚。」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소왕 2년 때 초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하였다. [二] 集解徐廣曰:「一作『蠉』。」 索隱音休緣反,又休軟反。蠉,休緣反。戰國策云作「蝝」也。正義許緣反。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蠉’이라 쓰기도 한다.”고 했다. 【索隱】 음은 ‘休’와 ‘緣’의 反이다. 또 ‘休’와 ‘軟’의 反이다. ‘蠉’은 ‘休’와 ‘軟’의 反이다. 『戰國策』에는 ‘蜎’이라고 썼다. 【正義】 ‘許’와 ‘緣’의 反이다. [三] 集解徐廣曰:「滑,一作『涓』。」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滑’은 ‘涓’이라 쓰기도 한다.”고 했다. [四] 集解徐廣曰:「一云『內句章昧之難』。」 索隱謂召滑內心猜詐,外則佯章恩義,而卒包藏禍心,搆難於楚也。注「一云內句章、昧之難」。案:戰國策云「納章句之難」。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內句章昧之難’이라고도 한다.” 고 했다. 【索隱】 소활은 마음속으로는 시기하고 속이고, 밖으로는 거짓된 은혜와 의리를 나타내어 마침내는 재앙의 마음을 숨겨서 초나라에서 難을 이끌었다. 注에 “한편으로 ‘內句章、昧之難’”이라 하였다. 살펴보니 『戰國策』에 “장구의 난을 받아들였다.”라고 했다. [五] 集解徐廣曰:「一作『瀨湖』。」 正義劉伯莊云:「厲門,度嶺南之要路。」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瀨湖’라 쓴다.” 했다. 【正義】 유백장이 말하기를 “‘厲門’은 영남을 넘는 요로이다.” 했다. [六] 正義吳越之城皆為楚之都邑。 [六] 【正義】 오나라와 월나라의 성이 모두 초나라의 도음이 되었다. 甘茂有孫曰甘羅。甘羅者,甘茂孫也。茂既死後,甘羅年十二,事秦相文信侯呂不韋。[一] 감무에게 손자가 있는데 ‘감라’라고 한다. 감라는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가 죽은 후 감라의 나이 12세에 진나라 재상 문신후 여불위를 섬겼다. [一] 索隱戰國策云甘羅事呂不韋為庶子。 [一] 【索隱】 『戰國策』에 이르기를 “감라는 여불위를 섬겨서 庶子가 되었다.” 했다. 秦始皇帝使剛成君蔡澤於燕,三年而燕王喜使太子丹入質於秦。秦使張唐往相燕,欲與燕共伐趙以廣河閒之地。張唐謂文信侯曰:「臣嘗為秦昭王伐趙,趙怨臣,曰:『得唐者與百里之地。』今之燕必經趙,臣不可以行。」文信侯不快,未有以彊也。甘羅曰:「君侯何不快之甚也?」文信侯曰:「吾令剛成君蔡澤事燕三年,燕太子丹已入質矣,吾自請張卿[一]相燕而不肯行。」甘羅曰:「臣請行之。」文信侯叱曰:「去!我身自請之而不肯,女焉能行之?」[二]甘羅曰:「大項橐[三]生七歲為孔子師。今臣生十二歲於茲矣,君其試臣,何遽叱乎?」 於是甘羅見張卿曰:「卿之功孰與武安君?」卿曰:「武安君南挫彊楚,北威燕、趙,戰勝攻取,破城墮邑,不知其數,臣之功不如也。」甘羅曰:「應侯[四]之用於秦也,孰與文信侯專?」張卿曰:「應侯不如文信侯專。」甘羅曰:「卿明知其不如文信侯專與?」曰:「知之。」甘羅曰:「應侯欲攻趙,武安君難之,去咸陽七里而立死於杜郵。今文信侯自請卿相燕而不肯行,臣不知卿所死處矣。」張唐曰:「請因孺子行。」令裝治行。 진나라 시황제가 강성군 채택을 연나라에 사신 보낸지 3년 만에 연나라 왕이 기뻐하면서 태자 ‘단’을 진나라에 인질로 삼게 하였다. 진나라가 장당으로 하여금 연나라에 가서 재상이 되게 하고, 연나라와 함께 조나라를 치는 것으로써 하간(황하 사이)의 땅을 넓히고자 하였다. 장당이 문신후에게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진나라 소왕을 위해 조나라를 쳤기 때문에 조나라가 신을 원망하여 말하기를 ‘장당을 얻는(잡는) 자에게는 백리의 땅을 주겠다.’ 하니 지금 연나라에 가려면 반드시 조나라를 지나야 하는데 신은 갈 수 없습니다.” 했다. 문신후가 불쾌하게 여겨 억지로 하지 않았다. 감라가 말하기를 “군후(여불위)께서는 어찌하여 불쾌함이 심합니까?” 했다. 문신후(여불위)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 강성군 채택으로 하여금 연나라를 섬기게 한지 3년만에 연나라 태자 단이 이미 인질로 들어왔고, 내가 스스로 장경(장당)에게 연나라 재상이 될 것을 청하였는데 즐겨 가려하지 않는다.” 했다. 감라가 말하기를 “신이 가기를(가서 설득하기를) 청합니다.” 했다. 문신후(여불위)가 꾸짖어 말하기를 “가라! 내 자신이 스스로 청하였는데도 즐겨하지 않았는데 네가 어찌 가게 할 수 있겠는가?” 했다. 감라가 말하기를 “대항탁은 난지 7년에 공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지금 신은 여기에서 태어난지 12년인데 군(여불위)께서는 신을 시험하지 않고 어찌하여 대번에 꾸짖습니까?” 했다. 이에 감라가 장경(장당)을 뵙고 말하기를 “경의 공은 무안군과 비교하여 누가 더 낫습니까?” 하니 장당이 말하기를 “무안군은 남쪽으로 강한 초나라를 좌절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와 조나라에 위엄을 나타내었고,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며 성을 깨트리고 읍을 떨어뜨린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으니 신의 공은 (무안군과) 같지 못하다.(무안군보다 못하다.)” 했다. 했다. 감라가 말하기를 “응후(범수)의 진나라에서 쓰임과 문신후 중에 누가 전횡합니까?” 장당이 말하기를 “응후(범수)가 문신후의 전횡보다 못하다.” 했다. 감라가 말하기를 “경(장당)은 (응후:범수의 전횡이)문신후의 전횡보다 못함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까?” (장당이) 말하기를 “안다.” 하니 감라가 말하기를 “응후(범수)가 조나라를 공격하고자 할 때 무안군은 그것을 어렵다 여겼는데 함양에서 7리 떨어진 두우에서 선채로 죽었습니다. 지금 문신후(여불위)가 스스로 경(장당)에게 연나라 재상이 될 것을 청하였는데도 즐겨 가려하지 않으니 신은 경(장당)이 죽음을 당할 자리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장당이 말하기를 “어린아이 때문에 가기를 청한다.”하고는 짐을 꾸리게 하여 갔다. [一] 索隱即張唐也。卿,字也。 [一] 【索隱】 곧 장당이다. ‘卿’은 자이다. [二] 正義女音汝。焉,乙連反。 [二] 【正義】 ‘女’의 음은 ‘汝’이니 ‘焉’과 ‘乙’의 反이다. [三] 索隱音託。尊其道德,故云「大項橐」。 [三] 【索隱】 음은 ‘橐’이다. 그 도덕을 높였기 때문에 ‘대항탁’이라 한 것이다. [四] 索隱范睢。 [四] 【索隱】 범수이다. 行有日,甘羅謂文信侯曰:「借臣車五乘,請為張唐先報趙。」文信侯乃入言之於始皇曰:「昔甘茂之孫甘羅,年少耳,然名家之子孫,諸侯皆聞之。今者張唐欲稱疾不肯行,甘羅說而行之。今願先報趙,請許遣之。」始皇召見,使甘羅於趙。趙襄王郊迎甘羅。甘羅說趙王曰:「王聞燕太子丹入質秦歟?」曰:「聞之。」曰:「聞張唐相燕歟?」曰:「聞之。」「燕太子丹入秦者,燕不欺秦也。張唐相燕者,秦不欺燕也。燕、秦不相欺者,伐趙,危矣。燕、秦不相欺無異故,欲攻趙而廣河閒。王不如齎臣五城[一]以廣河閒,請歸燕太子,與彊趙攻弱燕。」趙王立自割五城以廣河閒。秦歸燕太子。趙攻燕,得上谷三十城,[二]令秦有十一。[三] 甘羅還報秦,乃封甘羅以為上卿,復以始甘茂田宅賜之。 며칠 후 감라가 문신후(여불위)에게 말하기를 “신에게 수레 5대를 빌려주시면 장당을 위하여 먼저 조나라에 보고하기를 청합니다.” 했다. 문신후(여불위)가 이에 시황제에게 말하기를 “옛날 감무의 손자 감라가 나이는 어리나 명가의 자손으로 제후가 모두 그것(이름)을 들었습니다. 지금 장당이 병을 핑계로 즐겨 가려하지 않는데 감라가 설득하여 가게 하였습니다. 지금 먼저 조나라에 보고하기를 원하니 파견을 허락할 것을 청합니다.”했다. 시황제가 불러 보고는 감라로 하여금 조나라에 가게 했다. 조나라 양왕이 교외에서 감라를 맞았다. 감라가 조나라 왕을 유세하여 말하기를 “왕께서는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들어간 것을 들었습니까?” 하니 (연나라 왕이) 말하기를 “들었습니다.” 했다. (감라가 말하기를 )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들어간 것은 연나라가 진나라를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장당을 연나라 재상으로 삼는 것은 진나라가 연나라를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연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으면서 조나라를 치면 위태롭습니다. 연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고 조나라를 공격하여 하간의 땅을 넓히려 해서입니다. 왕께서는 신에게 5개성을 주는 것으로써 하간의 땅을 넓히게 하면, 연나라 태자가 돌아가게 하고, 강한 조나라와 함께 약한 연나라를 공격할 것을 청합니다.” 했다. 조나라 왕이 선채로(그 자리서) 스스로 5개 성을 떼어 주는 것으로써 하간의 땅을 넓혀 주었다. 진나라는 연나라 태자를 돌려보냈다. 조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상곡의 30개 성을 얻어서 진나라로 하여금 11개 성을 소유하게 하였다. 감라가 진나라에 돌아가 보고하였다. 이에 감라를 봉하여 상경으로 삼고, 다시 처음 감무의 田宅을 내려주었다. [一] 索隱齎音側奚反,一音■。並謂割五城與臣也。 [一] 【索隱】 ‘齎’의 음은 ‘側’과 ‘奚’의 反이다. 다른 음은 ■이다. 나란히 5개 성을 떼어 신에게 주는 것이다. [二] 索隱戰國策云得三十六縣。正義上谷,今媯州也,在幽州西北。 [二] 【索隱】 『戰國策』에 “36현을 얻었다. 했다.” 【正義】 ‘상곡’은 지금의 ‘규주’이니 ‘유주’ 서북쪽에 있다. [三] 索隱謂以十一城與秦也。 [三] 【索隱】 11개 성을 진나라에 준 것을 말한다. 太史公曰:樗里子以骨肉重,固其理,而秦人稱其智,故頗采焉。甘茂起下蔡閭閻,顯名諸侯,重彊齊楚。[一]甘羅年少,然出一奇計,聲稱後世。雖非篤行之君子,然亦戰國之策士也。方秦之彊時,天下尤趨謀詐哉 태사공이 말하기를 저리자는 골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써 그 이치(다스림)을 견고하게 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그 지혜를 칭찬하였다. 그러므로 문채가 퍼졌다. 감무는 하채의 여염(평범한 가정)에서 일어나 이름을 제후에게 드러내었고,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를 중시하였다. 감라는 나아가 어렸으나 하나의 기이한 계책을 내어 명성이 후세에 일컬어졌다. 비록 돈독한 행위의 군자는 아니지만 또한 전국시대의 책사였다. 바야흐로 진나라가 강성할 때 천하는 더욱 계략에 달려 나갔다. [一] 集解徐廣曰:「恐或疑此當云『見重彊齊』,誤脫一字。」 正義甘茂為彊齊楚所重。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아마도 혹 의심하건데 이는 마땅히 ‘見重彊齊(굳센 제나라를 중시함을 나타내었다.)’해야 하는데 잘못 한 글자가 탈락(빠졌다.) 되었을 것이다.” 했다. 【正義】 감무는 굳센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시되었다. 【索隱述贊】嚴君名疾,厥號「智囊」。既親且重,稱兵外攘。甘茂並相,初佐魏章。始推向壽,乃攻宜陽。甘羅妙歲,卒起張唐。 【索隱述贊】 엄군의 이름은 질이요, 그 호는 꾀주머니라. 이미 친하고 또 중시되어 군대를 걸맞게 하여 밖으로 물리쳤다. 감무는 재상을 아울러 처음 위나라 장을 도왔다. 비로소 향수를 밀어내고 선양을 공격하였다. 감라는 묘령의 나이로 끝내 장당을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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