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七十三
白起 王翦列傳 第十三
白起者,郿人也。[一]善用兵,事秦昭王。昭王十三年,而白起為左庶長,將而擊韓之新城。[二]是歲,穰侯相秦,舉任鄙以為漢中守。其明年,白起為左更,攻韓、魏於伊闕,[三]斬首二十四萬,又虜其將公孫喜,拔五城。起遷為國尉。[四]涉河取韓安邑以東,到乾[五]河。[六]明年,白起為大良造。攻魏,拔之,取城小大六十一。明年,起與客卿錯攻垣城,[七]拔之。後五年,白起攻趙,拔光狼城。[八]後七年,白起攻楚,拔鄢、鄧五城。[九]其明年,攻楚,拔郢,燒夷陵,[一0]遂東至竟陵。[一一]楚王亡去郢,東走徙陳。秦以郢為南郡。白起遷為武安君。武安君因取楚,定巫、黔中郡。昭王三十四年,白起攻魏,拔華陽,走芒卯,而虜三晉將,斬首十三萬。與趙將賈偃戰,沈其卒二萬人於河中。昭王四十三年,白起攻韓陘城,[一二]拔五城,斬首五萬。四十四年,白起攻南陽太行道,絕之。[一三]
백기는 ‘미’ 당 사람이다. 군대를 잘 운용하여 진나라 소왕을 섬겼다. 소왕 13년 백기가 죄서장이 되고 장군으로 한나라의 신성을 공격하였다. 이 해 양후가 진나라 재상이 되자 ‘임비’를 천거하여 한중의 관리로 삼았다. 그 다음해(소왕 14년) 백기가 좌경이 되어 한나라, 위나라를 이궐에서 공격하여 24만명의 머리를 베고, 도 그 장군 송손희를 포로로 하며, 5개성을 점령하였다. 백기가 관직을 옮겨 국위가 되었다. 섭하가 한나라 안읍 이동지역을 취하여 건하에 이르렀다. 다음해(소왕 15년) 백기가 대량조가 되었다. 위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작고 큰 성 61개를 취하였다. 다음해(소왕 16년) 백기와 객경 착과 ‘원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5년 후에 백기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광랑성’을 점령하였다. 7년 후 백기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과 ‘등’ 지역의 5개성을 점령하였다. 그 다음해 초나라를 공격하여 ‘영’을 점령하고 ‘이릉’을 불사르며 마침내 동쪽 ‘경릉’에 이르렀다. 초나라 왕이 도망하여 ‘영’을 떠나 동족으로 달아나 진나라에 옮겨갔다. 진나라가 ‘영’을 ‘남군’이라 했다. 백기가 자리를 옮겨 ‘무안군’이 되었다. 무안군이 초나라를 취함으로 인하여 ‘무’와 ‘검중’이 평정되었다. 소왕 34년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을 점령하고 망묘를 도망가게 하고 삼진의 장군을 포로로 하고 13만을 목베었다. 조나라 장군 가언과 싸워서 그 병졸 2만명을 강물 속에 가라앉혔다(던져 죽였다). 소왕 43년 백기가 한나라 ‘형성’을 공격하여 5개성을 점령하고 5만명을 목베었다. (소왕)44년 백기가 남양의 태행도를 공격하여 끊었다.
[一] 正義郿音眉,岐州縣。
[一] 【正義】 ‘郿’는 음이 ‘眉’로 기주현이다.
[二] 索隱在河南也。正義今洛州伊闕。
[二] 【索隱】 하남에 있다. 【正義】 지금의 ‘낙주’ ‘이궐’이다.
[三] 正義今洛州南十九里伊闕山,號曰龍門是也。
[三] 【正義】 지금의 낙주 남쪽 19리의 이궐산으로 용문이라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四] 正義言太尉。
[四 【正義】 태위를 말한다.
[五] 集解徐廣曰:「音干。」
[五] 【集解】 서관이 말하기를 “음은 ‘干’”이라 했다.
[六] 集解郭璞曰:「今河東聞喜縣東北有乾河口,因名乾河里,但有故溝處,無復水也。」 索隱魏以安邑入秦,然安邑以東至乾河皆韓故地,故云取韓安邑。
[六] 【集解】 곽복이 말하기를 “지금의 문희현 동북쪽에 건하의 입구가 있기 때문에 건하리라 이름 하였는데 다만 옛 도랑만 있을 뿐 다시 물이 흐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索隱】 위나라는 안읍에서 진나라에 들어간다. 그러나 안읍 동쪽으로부터 건하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한나라의 옛 땅이다. 그러므로 한나라 안읍을 취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七] 集解徐廣曰:「河東垣縣。」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하동 원현이다.” 했다.
[八] 索隱地理志不載光狼城,蓋屬趙國。正義光狼故城在澤州高平縣西二十五里也。
[八] 【索隱】 『地理志』에 광랑성이 살려있지 않다. 아마도 조나라에 속했을 것이다. 【正義】 광랑성의 옛 성은 택주 고평현 서쪽 25리에 있다.
[九] 集解徐廣曰:「昭王二十八年。」 正義鄢鄧二邑在襄州。
[九]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소왕 28년이다.” 했다. 【正義】 언과 등 두 읍은 양주에 있다.
[一0] 正義夷陵,今峽州郭下縣。
[一0] 【正義】 이릉은 지금의 협주 곽하현이다.
[一一] 正義故城在郢州長壽縣南百五十里,今復州亦是其地也。
[一一] 【正義】 옛 성은 영주 장수현 남쪽 50리에 있는데 지금의 복주가 또한 그 땅이다.
[一二] 正義陘庭故城在曲沃縣西北二十里,在絳州東北三十五里也。
[一二] 【正義】 형정 옛 성은 곡옥현 서북 20리에 있으니 강주 동북쪽 35리에 있다.
[一三]集解徐廣曰:「此南陽,河內脩武是也。」 正義案:南陽屬韓,秦攻之,則韓太行羊腸道絕矣。
[一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여기의 남양은 하내 수무가 이것이다.” 했다. 【正義】 살펴보니 남양은 한나라에 속는데 진나라가 공격하였으니 곧 한나라 태행의 양창자(太行 羊腸道) 같은 길이 끊어진 것이다.
四十五年,伐韓之野王。[一]野王降秦,上黨道絕。其守馮亭與民謀曰:「鄭道已絕,[二]韓必不可得為民。秦兵日進,韓不能應,不如以上黨歸趙。趙若受我,秦怒,必攻趙。趙被兵,必親韓。韓趙為一,則可以當秦。」因使人報趙。趙孝成王與平陽君、[三]平原君計之。平陽君曰:「不如勿受。受之,禍大於所得。」平原君曰:「無故得一郡,受之便。」趙受之,因封馮亭為華陽君。[四]
(소왕)45년 한나라의 야왕을 쳤다. 야왕이 진나라에 항복하니 상당으로 가는 길(上黨道)이 끊어졌다. 그 관리 빙정과 백성들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정으로 가는 길이(鄭道) 이미 끊어졌으니 한나라 백성이 될 수 없음이 틀림없다. 진나라의 군대는 날로 나아가는데 한나라는 대응하지 못하니 상당군을 가지고 조나라로 귀의 하는 것만 못하다.(귀의하는 것이 낫다.) 조나라가 만약 우리를 받는다면 진나라가 노하여 반드시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조나라가 군대의 침입을 받으면 반드시 한나라와 친할 것이다. 한나라와 조나라가 하나가 되면 곧 진나라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사람을 시켜 조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조나라 효성왕과 평양군, 평원군이 그것을 헤아렸다.(의논하였다.) 펴양군이 말하기를 “받지 않는 것만 못하다.(받지 않는 것이 낫다.) 그것을 받으면 배앙이 얻는 것보다 크다.” 했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이유 없이 한 개 군을 받는 것이니 받는 것이 유리한 방법입니다.” 했다. 조나라가 그것을 받고는 (이로) 인하여 빙정을 봉하여 화양군이라 했다.
[一] 索隱地理志野王縣屬河內,在太行東南。孟康曰「古邢國也」。
[一] 【索隱】 『地理志』에 “야왕현은 하내에 속하니 태행의 남쪽에 있다.” 했다. 맹강이 말하기를 “옛날의 ‘형국’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河南新鄭,韓之國都是也。」 索隱鄭國即韓之都,在河南。秦伐野王,是上黨歸韓之道絕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하남의 ‘신정’은 한나라의 국도(수도)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했다. 【索隱】 ‘정국’은 곧 한나라의 도읍이니 하남에 있다. 진나라가 야왕을 치면 이는 상당에서 한나라에 돌아가는 길이 끊어진 것이다.
[三] 索隱平陽君未詳何人。
[三] 【索隱】 평원군은 어떤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四] 正義常山一名華陽,解在趙世家。
[四] 【正義】 상산은 한편으로 화양이라 하는데 풀이가 趙世家에 있다.
四十六年,秦攻韓緱氏、藺,[一]拔之。
(소왕)46년 진나라가 한나라 후씨, 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屬潁川。」 索隱今其地闕。西河別有藺縣也。正義按:檢諸地記,潁川無藺。括地志云:「洛州嵩縣本夏之綸國也,在緱氏東南六十里。」地埋志云:「綸氏屬潁川郡。」按:既攻緱氏、藺,二邑合相近,恐綸藺聲相似,字隨音而轉作「藺」。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영천에 속한다.”했다. 【索隱】 지금 그 땅이 빠졌다. 서하에 따로 린현이 있다. 【正義】 살펴보니 여러 땅에 대한 기록을 검토해 보니 영천에는 린이 없다. 『括地志』에 “낙주 숭현은 본래 하나라의 윤에 있던 나라인데 후씨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했다. 『地理志』에 “윤씨는 영천군에 속한다.” 했다. 살펴보니 이미 후씨와 린을 공격하고, 두 읍이 서로 가깝움에 합하고, 윤과 린의 음이 서로 비슷하니 글자가 음을 따라 돌려 린이라 쓴 듯하다.
四十七年,秦使左庶長王齕[一]攻韓,取上黨。上黨民走趙。趙軍長平,[二]以按據上黨民。[三]四月,齕因攻趙。趙使廉頗將。趙軍士卒犯秦斥兵,[四]秦斥兵斬趙裨將茄。[五]六月,陷趙軍,取二鄣四尉。[六]七月,趙軍築壘壁而守之。秦又攻其壘,取二尉,敗其陣,[七]奪西壘壁。[八]廉頗堅壁以待秦,秦數挑戰,[九]趙兵不出。趙王數以為讓。而秦相應侯又使人行千金於趙為反閒,[一0]曰:「秦之所惡,獨畏馬服子趙括將耳,廉頗易與,且降矣。」
(소왕)47년 진나라가 좌서장 왕흘로 하여금 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상당을 취하였다. 상당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 군이 장평에서 상당의 백성을 보살폈다. 4월에 왕흘이 인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니 조나라가 염파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다. 조나라 군대의 사졸이 진나라의 척후(정찰)병을 범하였는데(싸움을 걸었는데) 진나라 정찰병이 조나라의 비장 가를 죽였다. 6월에 조나라 군대를 궤멸시키고, 두 障(장:둑)과 四尉(를 취하였다. 7월에 조나라 군대가 보루와 벽을 쌓고(다지고) 지켰다. 진나라가 또 그 보루를 공격하여 二尉를 취하고 그 진을 무너뜨리고 서쪽 보루의 벽을 빼앗았다. 염파가 벽을 굳게 하는 것으로써 진나라를 기다렸으므로 진나가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조나라 군대는 나오지 않았다. 조나라 왕이 여러 번 꾸짖었다. 진나라 재상 응후가 또 사람을 시켜 千金을 가지고 조나라에 가서 이간시켜 말하기를 “진나라가 미워하는 것은 오직 마복자 조괄이 군대를 거느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뿐으로 염파는 (대적하기)쉬우니 또한 항복할 것이다.” 했다.
趙王既怒廉頗軍多失亡,軍數敗,又反堅壁不敢戰,而又聞秦反閒之言,因使趙括代廉頗將以擊秦。秦聞馬服子將,乃陰使武安君白起為上將軍。而王齕為尉裨將,令軍中有敢泄武安君將者斬。趙括至,則出兵擊秦軍。秦軍詳敗而走,[一]張二奇兵以劫之。趙軍逐勝,追造秦壁。[一二]壁堅拒不得入,而秦奇兵二萬五千人絕趙軍後,又一軍五千騎絕趙壁閒,趙軍分而為二,糧道絕。而秦出輕兵擊之。趙戰不利,因築壁堅守,[一三]以待救至。秦王聞趙食道絕,王自之河內,[一四]賜民爵各一級,發年十五以上悉詣長平,[一五]遮絕趙救及糧食。
조나라 왕이 이미 염파가 군대를 많이 잃어버리고, 군대는 여러 번 패하였는데도 또 도리어 벽을 굳게 하고 감히 싸우지 않으며, 또 진나라가 이간하는 말을 듣고는 조괄로 하여금 염파를 대신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치게 하였다. 진나라가 마복자가 군대를 거느렸다는 것을 듣고는 이에 몰래 무안군 백기로 하여금 상장군으로 삼았다. 왕흘이 위비장이 되어 군중에서 감히 무안군이 군대를 거느렸다는 것을 누설하는 머리를 벤다고 명령하였다. 조광이 이르자 곧 군대를 내어 진나라 군대를 쳤다. 진나라 군대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니 장이기가 군대로 위협하였다. 조나라 군대가 이김을 타고 쫓아 진나라 벽에 나아 갔다. 벽이 견고하고 막아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진나라의 복병 2만 5천명이 조나라 군대의 배후를 끊고, 또 한 부대 5천명의 기병은 조나라의 벽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의 군대가 나뉘어 둘이 되면서 군량 수송로가 끊어졌다. 진나라가 가벼운 군대를 내어 쳤다. 조나라는 싸움이 이롭지 않으므로 벽을 쌓고 굳게 지키면서 구원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진나라 왕이 조나라의 식량 길(군량 수송로)이 끊어졌다는 것을 듣고 왕이 스스로 하내에 가서 각각 백성들에게 작을 한 등급씩 내리고 15세 이상을 동원하여 모두 장평에 나아가게 하고 조나라의 구원과 양식이 이르는 것을 막아 끊었다.
[一] 集解音紇。
[一] 【集解】 음은 ‘紇’이다.
[二] 集解徐廣曰:「在泫氏。」 索隱地理志泫氏今在上黨郡也。正義長平故城在澤州高平縣西二十一里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현씨에 있다.” 했다. 【索隱】 『地理志』에 “현씨는 지금의 상당군에 있다.” 했다. 【正義】 장평 옛 성은 택주 고평현 서쪽 21리에 있다.
[三] 索隱謂屯兵長平,以據援上黨。
[三] 【索隱】 장평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으로서 상당을 응원함을 말한다.
[四] 索隱謂犯秦之斥候兵也。
[四] 【索隱】 진나라의 척후병을 범한 것을 말한다.
[五] 索隱音加,裨將名也。
[五] 【索隱】 음은 ‘加’요, 비장은 이름이다.
[六] 索隱鄣,堡城。尉,官也。正義括地志云:「趙鄣故城一名都尉城,今名趙東城,在澤州高平縣西二十五里。又有故穀城。此二城即二鄣也。」
[六] 【索隱】 ‘鄣’은 보성이다. ‘尉’는 관직이다. 【正義】 『括地志』에 “조나라의 ‘장’ 옛 성은 도위성이아고도 한다. 지금 조동성이라 이름하니 택주 고평현 서쪽 25리에 있다. 또 옛 곡성이 있는데 이 두 성이 곧 二鄣이다.” 했다.
[七] 集解徐廣曰:「一作『乘』。」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乘’이라 쓰기도 한다.” 했다.
[八] 正義趙西壘在澤州高平縣北六里是也。即廉頗堅壁以待秦,王齕奪趙西壘壁者。
[八] 【正義】 조나라의 서쪽 보루가 택주 고평현 북쪽 6리에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니 곧 염파가 벽을 견고히 하고서 진나라를 기다릴 때 왕흘이 조나라 서쪽 보루의 벽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九] 正義數音朔。挑,田鳥反。
[九] 【正義】 ‘數’의 음은 ‘朔’이다. ‘挑’의 음은 ‘田’과 ‘鳥’으 反이다.
[一0] 正義紀莧反。
[一0] 【正義】 ‘紀’와 ‘莧(비름 현)’의 反이다.
[一一] 正義詳音羊。
[一一] 【正義】 ‘詳’의 음은 ‘羊’이다.
[一二] 正義秦壁一名秦壘,今亦名秦長壘。
[一二] 【正義】 秦壁은 秦壘라고도 한다. 지금 또한 秦長壘라고 한다.
[一三] 正義趙壁今名趙東壘,亦名趙東長壘,在澤州高平縣北五里,即趙括築壁敗處。
[一三] 【正義】 趙壁은 지금 趙東壘라 한다. 또 趙東長壘라고도 하니 택주 고평현 북쪽 5리에 있는데 곧 조괄이 벽을 쌓고, 패한 곳이다.
[一四] 正義時已屬秦,故發其兵。
[一四] 【正義】 이때 이미 진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군대를 동원했다 한 것이다.
[一五] 索隱時已屬秦,故發其兵。
[一五] 【索隱】 이때 이미 진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군대를 동원했다 한 것이다.
至九月,趙卒不得食四十六日,皆內陰相殺食。來攻秦壘,欲出。為四隊,四五復之,不能出。其將軍趙括出銳卒自搏戰,秦軍射殺趙括。括軍敗,卒四十萬人降武安君。武安君計曰:「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乃挾詐而盡阬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趙人大震。
9월에 이르자 조나라 병졸들이 밥을 얻지 못한 것이 46일이 되자 모두 안으로 몰래 서로 죽여서 먹었다. 이윽고 진나라 보루를 공격하고 나가고자 하였다. 4개 부대를 만들어 4, 5번 반복하였으나 나가지 못하였다. 장군 조괄이 정예 병사를 내어 스스로 치고 싸웠는데 진나라 군대가 활로 쏘아 조괄을 죽였다. 조괄의 군대가 패하고 병졸 10만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하였다. 무안군이 (항복한 군사의 처리에 대해)헤아려 말하기를 “앞서 진나라가 이미 상당을 점령하였을 때 상당의 백성들이 진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조나라에 귀의하였다. 조나라의 군사는 반복할 것이니 모두 죽이지 않는다면 어지러움을 일으키게 될까 두렵다.”하고는 이에 거짓을 끼워(속여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어린 자 240명을 남겨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앞뒤로 머리를 베어 죽인 포로가 45만명이었다. 조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 하였다.
四十八年十月,秦復定上黨郡。[一]秦分軍為二:王齕攻皮牢,[二]拔之;司馬梗定太原。[三]韓、趙恐,使蘇代厚幣說秦相應侯曰:「武安君禽馬服子乎?」曰:「然。」又曰:「即圍邯鄲乎?」曰:「然。」「趙亡則秦王王矣,武安君為三公。武安君所為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南定鄢、郢、漢中,[四]北禽趙括之軍,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今趙亡,秦王王,則武安君必為三公,君能為之下乎?雖無欲為之下,固不得已矣。秦嘗攻韓,圍邢丘,[五]困上黨,上黨之民皆反為趙,天下不樂為秦民之日久矣。今亡趙,北地入燕,東地入齊,南地入韓、魏,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六]故不如因而割之,[七]無以為武安君功也。」 於是應侯言於秦王曰:「秦兵勞,請許韓、趙之割地以和,且休士卒。」王聽之,割韓垣雍、[八]趙六城以和。正月,皆罷兵。武安君聞之,由是與應侯有隙。
(진나라 소왕) 48년 10월 진나라가 다시 상당군을 평정하였다. 진나라가 군대를 나누어 둘로 하였는데 왕흘은 피뢰를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사마경은 태원을 평정하였다.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여 소대로 하여금 많은 폐백(선물)으로 진나라 재상 응후를 유세하여 말하기를 “무안군이 마복자를 잡았습니까?” 하니 (응후가) “그렇습니다.” (소대가) 말하기를 “곧 한당을 포위하였습니까?” 하니 (응후가) “그렇습니다.” 하니 (소대가) “조나라가 망하면 곧 진나라 왕이 왕 노릇 할 것이고, 무안군은 삼공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은 진나라를 위하여 싸워 이기고 공격하여 취한 성이 70여개였으며, 남쪽으로 ‘언’, ‘영’, ‘한중’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조괄의 군대를 잡았으니 비록 주공 (단), 소공 (석), 태공망 여상의 공이 이보다 더하지 않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이 왕 노릇 하면 곧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가 아래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아래에 있고자 하지 않을지라도 진실로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하여 형구를 포위하여 상당을 곤궁하게 하니 상당의 백성들이 모두 배반하고 조나라를 위하였으니 천하가 진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은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의 땅은 연나라에 들어가고, 동쪽의 땅은 제나라에 들어가며, 남쪽의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곧 그대가 얻을 수 있는 백성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하여 나누어서 무안군의 공을 삼음이 없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했다. 이에 응후가 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가 수고로우니 한나라와 조나라의 땅을 떼어내는 것으로써 화친하고, 또한 사졸을 쉬게 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십시오.” 했다. 진나라 왕이 허락하고는 한나라의 ‘원옹’과 조나라의 6개성을 떼어내는 것으로써 화친하였다. 정월에 군대를 모두 파하였다. 무안군이 그것을 들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응후와 틈이 생겨났다.
[一] 索隱秦前攻趙已破上黨,今迴兵復定其郡,其餘城猶屬趙也。
[一] 【索隱】 진나라가 앞서 조나라를 공격하여 이미 상당을 깨트렸는데 지금 군대를 돌려 다시 그 군을 평정한 것이다. 그 나머지 성은 아직 조나라에 속한다.
[二] 正義故城在絳州龍門縣西一里。
[二] 【正義】 옛 성이 강주 용문현 서쪽 1리에 있다.
[三] 正義太原,趙地,秦定取也。
[三] 【正義】 태원은 조나라 땅이었는데 진나라가 평정하여 취한 것이다.
[四] 正義鄢在襄州率道縣南九里。郢在荊州江陵縣東六里。漢中,今梁州之地。
[四] 【正義】 ‘언’은 양주 솔도현 남쪽 9리에 있다. ‘영’은 형주 강릉현 동쪽 6리에 있다. ‘한중’은 지금의 양주 땅이다.
[五] 集解徐廣曰:「平皋有邢丘。」 正義邢丘,今懷州武德縣東南二十里平皋縣城是也。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평고’는 ‘형구’에 있다. 【正義】 형구는 지금의 회주 무덕현 동남쪽 20리에 있는 ‘평고성현’이 이것이다.
[六] 集解徐廣曰:「亡音無也。」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亡’의 음은 ‘無’이다.” 했다.
[七] 正義因白起之攻,割取韓、趙之地。
[七] 【正義】 백기의 공격 때문에 한나라와 조나라의 땅을 떼어내 취한 것이다.
[八] 集解徐廣曰:「卷縣有垣雍城。」 正義釋地名云:「卷縣所理垣雍城。」按:今在鄭州原武縣西北七里也。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권현은 원옹성에 있다.” 했다. 【正義】 『釋地名』
에 “권현의 치소(행정의 중심지)는 원옹성이다.” 했다. 살펴보니 지금 정주 원무현 서북쪽 7리에 있다.
其九月,秦復發兵,使五大夫王陵攻趙邯鄲。是時武安君病,不任行。[一]四十九年正月,陵攻邯鄲,少利,秦益發兵佐陵。陵兵亡五校。武安君病愈,秦王欲使武安君代陵將。武安君言曰:「邯鄲實未易攻也。且諸侯救日至,彼諸侯怨秦之日久矣。今秦雖破長平軍,而秦卒死者過半,國內空。遠絕河山而爭人國都,趙應其內,諸侯攻其外,破秦軍必矣。不可。」秦王自命,不行;乃使應侯請之,武安君終辭不肯行,遂稱病。
9월에 진나라가 다시 군대를 내어 오대부 왕릉으로 하여금 조나라 한단을 공격하게 했다. 이 때 무안군은 병으로 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진나라 소왕) 49년 정월 왕릉이 한단을 공격하였는데 이로움이 적었다. 진나라가 더 군대를 동원하여 왕릉을 도왔다. 왕릉의 군대가 오교를 잃었다. 무안군의 병이 낫자 진나라 왕이 무안군으로 하여금 왕릉의 장군직을 대신하게 하고자 했다. 문안군이 말하기를 “한단은 실로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또 제후가 구원하러 날로 이르고, 저 제후들이 진나라를 원망한 것이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비록 장평의 군대를 깨트렸으나 진나라 군사로 죽은 자가 반을 넘고, 나라 안이 비었습니다. (진나라 군대는) 멀리 하와 산을 넘어가서 다른 사람의 국도를 다투니 조나라는 안에서 대응하고, 제후는 그 밖을 공격하니 진나라 군대가 깨트려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할(갈) 수 없습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스스로 명령하여도 가지 않았다. 이에 응후를 시켜 청하게 하였으나 무안군이 끝내 거절(사양)하고 즐겨 가지 않고, 마침내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댔다.
[一] 正義任,入針反,堪也。
[一] 【正義】 ‘任’은 ‘入’과 ‘針’의 反이니 ‘堪’이다.
秦王使王齕代陵將,八九月圍邯鄲,不能拔。楚使春申君及魏公子將兵數十萬攻秦軍,秦軍多失亡。武安君言曰:「秦不聽臣計,今如何矣!」秦王聞之,怒,彊起武安君,[一]武安君遂稱病篤。應侯請之,不起。於是免武安君為士伍,遷之陰密。[二]武安君病,未能行。居三月,諸侯攻秦軍急,秦軍數卻,使者日至。秦王乃使人遣白起,不得留咸陽中。武安君既行,出咸陽西門十里,至杜郵[三]。秦昭王與應侯群臣議曰:「白起之遷,其意尚怏怏不服,有餘言。」秦王乃使使者賜之劍,自裁。武安君引劍將自剄,曰:「我何罪于天而至此哉?」良久,曰:「我固當死。長平之戰,趙卒降者數十萬人,我詐而盡阬之,是足以死。」遂自殺。武安君之死也,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死而非其罪,秦人憐之,鄉邑皆祭祀焉。[四]
진나라 왕이 왕흘로 하여금 왕릉의 장군직을 대신하게 하여 8, 9월에 한단을 포위하였으나 점령할 수 없었다. 초나라가 춘신군과 공자로 하여금 군대 수십만을 거느리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게 하니 진나라는 군대를 많이 잃었다. 무안군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신의 계책을 듣지 않았는데 지금 어떠한가!” 했다. 진나라 왕이 듣고 노하여 억지로 무안군을 일으키니 무안군은 마침내 병이 깊어졌다는 핑계를 댔다. 응후가 청하여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무안군을 면직하고 사오(병졸)로 삼아 음밀에 옮기게 했다. 무안군이 병이 들어 명을 행할 수 없었다. 3개월이 지나 제후들이 진나라 군대를 급하게 공격하니 진나라 군대가 여러 번 물러나며 사자가 매일 이르렀다. 진나라 왕이 이에 사람을 시켜 백기를 보내자 함양 안에 머물 수 없었다. 무안군이 떠나서 함양 서문 10리를 나와 두우에 이르렀다. 진나라 소왕과 응후, 뭇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백기가 옮겨(귀양)가면서 그 뜻이 오히려 불만을 드러내고 복종하지 않고 남긴 말(쓸데없는 말)이 있습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이에 사자(심부름 꾼)를 시켜서 검을 내리고 자살하게 했다. 무안군이 검을 잡아당겨(뽑아) 장차 자살하려다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에 이르렀는가?” 하고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한다. 장평의 전투에서 조나라 병졸로 항복한자 수십만을 내가 속이고서 모두 묻어 죽였으니 이는 죽을 이유로 충분하다.”하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무안군이 죽은 것은 진나라 소왕 50년 11월이다. (무안군이)죽었으되 그의 죄는 아니라 하여 진나라 사람들이 그를 불쌍하게 여기고 향읍이 모두 제사하였다.
[一] 正義彊,其兩反。
[一] 【正義】 ‘彊’은 ‘其’와 ‘兩’의 反이다.
[二] 集解徐廣曰:「屬安定。」 正義故城在涇州鶉觚縣,城西即古陰密國,密康公國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안정에 속한다.” 했다. 【正義】 옛 성이 경주순고현에 있는데 성 서쪽이 곧 옛 음밀국이고, 밀강공국이다.
[三] 索隱按:故咸陽城在渭北。杜郵,今在咸陽城中。正義說文云「郵,境上行舍」,道路所經過。今咸陽縣城,本秦之郵也,在雍州西北三十五里。
[三] 【索隱】 살펴보니 옛 함양성은 위수 북쪽에 있다. ‘두우’는 지금 함양성 안에 있다. 【正義】 『說文』에 “‘郵’는 경계 상의 가고 머무는(여관) 것이다.” 하니 도로의 지나가는 곳이다. 지금 함양현성은 본래 진나라의 ‘郵 ’이니 옹주 서북쪽 35리에 있다.
[四] 集解何晏曰:「白起之降趙卒,詐而阬其四十萬,豈徒酷暴之謂乎!後亦難以重得志矣。向使眾人皆豫知降之必死,則張虛捲猶可畏也,況於四十萬被堅執銳哉!天下見降秦之將頭顱似山,歸秦之眾骸積成丘,則後日之戰,死當死耳,何眾肯服,何城肯下乎?是為雖能裁四十萬之命而適足以彊天下之戰,欲以要一朝之功而乃更堅諸侯之守,故兵進而自伐其勢,軍勝而還喪其計。
[四] 何者?設使趙眾復合,馬服更生,則後日之戰必非前日之對也,況今皆使天下為後日乎!其所以終不敢復加兵於邯鄲者,非但憂平原君之補袒,患諸侯之捄至也,徒諱之而不言耳。若不悟而不諱,則毋所以遠智也,可謂善戰而拙勝。長平之事,秦民之十五以上者皆荷戟而向趙矣,秦王又親自賜民爵於河內。夫以秦之彊,而十五以上死傷過半者,此為破趙之功小,傷秦之敗大,又何以稱奇哉!若後之役戍不豫其論者,則秦眾多矣,降者可致也;必不可致者,本自當戰殺,不當受降詐也。戰殺雖難,降殺雖易,然降殺之為害,禍大於劇戰也。」 索隱捲音拳。袒音濁莧反,字亦作「綻」。捄音救。
【集解】 하안이 말하기를 “백기가 항복한 조나라 병졸을 속여서 40만명을 묻어 죽인 것이 어찌 한갓 독하고 사납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 후에 또한 거듭 뜻을 얻기 어려웠던 것이다.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항복하면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하고자 하였다면 빈 주먹을 펼쳐도 오히려 두렵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40만 명이 굳은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잡음에 있어서랴! 천하가 진나라에 항복한 장수의 두개골이 산과 같고, 진나라에 돌아간(항복한) 무리의 해골이 쌓여 언덕을 이루는 것을 보면 곧 훗날의 싸움에서 죽음에는 마땅히 죽을 뿐이요, 어느 무리가 즐겨 복종할 것이며, 어느 성이 즐겨 떨어지겠는가?(내주려 하겠는가?) 이는 비록 40만의 생명을 마름질 할 수 있어서 알맞게 천하의 싸움을 도와 하루아침의 공을 요구하려(이루려) 하였지만 다시 제후는 지킴을 견고히 하였다. 때문에 군대가 나아가지만 스스로 그 형세를 치고, 군대는 이겼으되 도리어 그 계책은 잃음이 되었다. 어째서인가? 가령 조나라의 무리들이 다시 합하고(모이고), 마복자가 다시 살아나면 곧 후일의 싸움은 반드시 전 날의 상대가 아닐 것인데 하물며 지금 모든 천하로 하여금 후일이라 함에 있어서랴! 그 때문에 끝내 감히 한단에 군대를 더하지 못한 것은 단지 평원군의 도움을 근심해서일 뿐만 아니라 제후의 구원이 이를 것을 근심해서이니 한갓 그것을 꺼려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깨닫지 못하여 꺼리지 않았다면 곧 원대한 지혜가 없어 싸움은 잘 하나 졸렬한 승리라 이를 수 있다. 장평의 일은 진나라 백성 가운데 15세 이상 되는 자가 창을 메고 조나라를 향하였고, 진나라 왕이 또한 하내에서 직접 스스로 백성에게 벼슬을 내렸던 것이다. 저 진나라의 강함으로도 15세 이상으로 죽고 다친 자가 반을 넘었으니 이는 조나라를 깨트린 공은 적고, 진나라를 상처나게 한 패함은 크다 할 것이니 또한 무엇으로써 기이하다 말하겠는가! 만약 뒤에 전쟁을 하면서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곧 진나라의 무리가 많아지는 것이니 항복하는 자가 이를 수 있고, 반드시 이를 수 없는 자는 본래 스스로 싸우다 죽는 것이 마땅하고, 마땅히 항복한다고 속이는 것을 받지 말아야 한다. 싸워서 죽이는 것이 비록 어렵고,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이 비록 쉽다 하나 항복한자를 죽이는 것의 해됨은 재앙이 몹시 세차고 치열하게 싸우는 것보다 크다. 【索隱】 ‘捲’의 음은 ‘拳’이다. ‘袒’의 음은 ‘濁’과 ‘莧’의 反이다. 글자는 또한 ‘綻’리라고도 쓴다. ‘捄’의 음은 ‘救’이다.
王翦者,頻陽東鄉人也。[一]少而好兵,事秦始皇。始皇十一年,翦將攻趙閼與,[二]破之,拔九城,十八年,翦將攻趙。歲餘,遂拔趙,趙王降,盡定趙地為郡。明年,燕使荊軻為賊於秦,秦王使王翦攻燕。燕王喜走遼東,翦遂定燕薊而還。[三]秦使翦子王賁擊荊,[四]荊兵敗。還擊魏,魏王降,遂定魏地。
왕전은 빈얀의 동향 사람이다. 어려서 군대를 좋아하여 진나라 시황제를 섬겼다. 시황제 11년에 왕전이 장군으로 조나라 알여를 공격하여 깨트리고 9개 성을 함락시켰다. (시황제)18년 왕전이 장수로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1년만에 마침내 조나라를 점령하니 조나라 왕이 항복하므로 조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여 군으로 삼았다. 다음해 연나라가 형가를 시켜 진나라를 해치게 했다. 진나라 왕이 왕전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연나라 왕 희가 요동으로 달아났으므로 왕전이 마침내 연나라 계 땅을 평정하고 돌아왔다. 진나라가가 왕전의 아들 왕분으로 하여금 荊을 공격하게 하니 형의 군대가 무너졌다. 돌아오면서 위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위나라 왕이 항복하므로 마침내 위나라 땅을 평정하였다.
[一] 索隱地理志頻陽縣屬左馮翊,應劭曰「在頻水之陽也」。正義故城在雍州東同官縣界也。
[一] 【索隱】 『地理志』에 “빈양현은 좌빙익에 속한다.” 한다. 응소가 말하기를 “빈수의 남쪽에 있다.”했다. 【正義】 옛 성은 옹주 동쪽 동관현 경계에 있다.
[二] 正義音預。
[二] 【正義】 음은 ‘預’이다.
[三] 正義薊音計。
[三] 【正義】 ‘薊’의 음은 ‘計’이다.
[四] 集解徐廣曰:「秦諱『楚』,故云荊也。」 索隱賁音奔。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楚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荊 ’이라 한 것이다.” 했다.
秦始皇既滅三晉,走燕王,而數破荊師。秦將李信者,年少壯勇,嘗以兵數千逐燕太子丹至於衍水中,卒破得丹,始皇以為賢勇。於是始皇問李信:「吾欲攻取荊,於將軍度用幾何人而足?」李信曰:「不過用二十萬人。」始皇問王翦,王翦曰:「非六十萬人不可。」始皇曰:「王將軍老矣,何怯也!李將軍果勢壯勇,[一]其言是也。」遂使李信及蒙恬將二十萬南伐荊。王翦言不用,因謝病,歸老於頻陽。李信攻平與,[二]蒙恬攻寢,[三]大破荊軍。信又攻鄢郢,破之,於是引兵而西,與蒙恬會城父。[四]荊人因隨之,三日三夜不頓舍,大破李信軍,入兩壁,殺七都尉,秦軍走。
진나라 시황제가 이미 삼진을 멸망시키고, 연나라 왕을 달아나게 하였으며, 여러 번 형(초나라)의 군대를 깨트렸다. 진나라 장수 이신은 나이가 젊고 용맹하여 일찍이 군대 수천 명을 거느리고 연나라 태자 단을 쫓아 연수 가운데 이르러 마침내 깨트리고 단을 얻으니(잡으니) 시황제가 현명하고 용맹하다 여겼다. 이에 시황제가 이신에게 묻기를 “나는 형을 공격하여 취하고자 하는데 장군이 헤아리기에 어느 정도의 사람을 쓰면 되겠는가?” 했다. 이신이 말하기를 “20만을 넘지 않아도 됩니다.” 했다. 시황제가 왕전에게 물으니 왕전이 대답하기를 “60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했다. 시황제가 말하기를 “왕전 장군은 늙었구려 무엇을 겁내시오! 이신 장군은 과연 형세가 용맹스러우니 그 말이 옳다.” 했다. 마침내 이심과 몽염으로 하여금 20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형을 치게 하였다. 왕전은 말이 쓰여지지 않기 때문에 병을 핑계로 빈양에 돌아가 늙었다.(노년을 보냈다.) 이신이 평여를 공격하고 몽염은 침을 공격하여 형의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이신이 또 언과 영을 공격하여 깨트리니 이에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몽염과 성보에서 만나려 했다. 형 사람들이 인하여 3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이신의 군대를) 따라가서 이신의 군대를 크게 깨트리고 두 벽(진영)에 들어가 7명의 도위를 죽이자 진나라 군대가 달아났다.
[一] 集解徐廣曰:「勢,一作(新)『[斷]』。」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勢’는 ‘新’이라 쓰는데 ‘斷’이다.
[二] 集解音余。正義在預東北五十四里。
[二] 【集解】 음은 ‘余’이다. 【正義】 ‘預’ 의 동북 54리에 있다.
[三] 集解徐廣曰:「今固始寢丘。」 索隱徐廣云固始寢丘。固始,縣,屬淮陽。寢丘,地名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지금 ‘고시’는 ‘침구’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고시’는 ‘침구’이다. ‘고시’는 현이니 회양에 속 한다. 침구는 지명이다.
[四] 索隱在汝南,即應鄉。正義言引兵而會城父,則是汝州郟城縣東父城者也。括地志云:「汝州郟城縣東四十里有父城故城,即服虔云城父楚北境者也。又許州華縣東北四十五里亦有父城故城,即杜預云襄城城父縣者也。此二城,父城之名耳,服虔城父是誤也。左傳及注水經云『楚大城城父,使太子建居之』。十三州志云『太子建所居城父,謂今亳州城父是也』。此三家之說,是城父之名。地理志云潁川父城縣,沛郡城父縣。據縣屬郡,其名自分。古先儒多惑,故使其名錯亂。」
[四] 【索隱】 여남에 있으니 곧 응향이다. 【正義】 군대를 이끌고 성보에서 만난 것을 말하면 곧 이는 겹성현 동쪽 부성이다. 『括地志』에 “여주 겹성현 동쪽 40리에 부성 옛성이 있다.” 했다. 복건은 ‘성부는 초나라 북쪽 경계’라고 했다.” 또 허주 화현 동북쪽 45리에 또 부성의 옛 성이 있으니 곧 두예가 말한 ‘양성은 성부현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성은 부성의 이름일 뿐이다. 복건이 성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始皇聞之,大怒,自馳如頻陽,見謝王翦曰:「寡人以不用將軍計,李信果辱秦軍。今聞荊兵日進而西,將軍雖病,獨忍棄寡人乎!」王翦謝曰:「老臣罷病悖亂,[一]唯大王更擇賢將。」始皇謝曰:「已矣,將軍勿復言!」王翦曰:「大王必不得已用臣,非六十萬人不可。」始皇曰:「為聽將軍計耳。」於是王翦將兵六十萬人,始皇自送至灞上。王翦行,請美田宅園池甚眾。始皇曰:「將軍行矣,何憂貧乎?」王翦曰:「為大王將,有功終不得封侯,故及大王之嚮臣,臣亦及時以請園池為子孫業耳。」始皇大笑。王翦既至關,使使還請善田者五輩。[二]或曰:「將軍之乞貸,亦已甚矣。」王翦曰:「不然。夫秦王怚[三]而不信人。[四]今空秦國甲士而專委於我,[五]我不多請田宅為子孫業以自堅,顧令秦王坐而疑我邪?」
시황제가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여 스스로 빈양에 달려가서 왕전을 보고 사과하며 말하기를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신이 과연 진나라 군대를 욕보였다. 지금 들으니 ‘형(초나라)’의 군대가 날로 서쪽으로 나아갔으니 장군이 비록 병이 있을지라도 어찌 차마 과인을 버릴 수 있겠는가!” 했다. 왕전이 감사하며 말하기를 “노신이 병과 도리에 어긋나 내쳐지고 오직 대왕께서 어진 장수를 선택하셨을 뿐입니다.” 하니 시황제가 사과하고 말하기를 “끝난 일이다. 장군은 다시 말하지 말라!”하니 왕전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반드시 부득이 신을 등용하신다면 60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초나라를 점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시황제가 말하기를 “장군의 계책을 들을 뿐이다.” 했다. 이에 왕전이 군대 60만을 거느렸는데 시황제가 스스로 파수의 가에 이르러 보냈다. 왕전이 가는데 좋은 田宅과 園池를 청한 것이 매우 많았다. 시황제가 말하기를 “장군이 가는데 어찌 가난을 근심하겠는가?” 했다. 왕전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장군을 삼으시고, 공이 있어도 끝내 封侯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왕의 (관심이)신을 향함에 미쳤고, 신이 또 때에 미쳐서 園池를 청하는 것으로써 자손의 업을 삼기를 청할 뿐입니다.” 했다. 시황제가 크게 웃었다. 왕전이 관에 이르고 나서 사자로 하여금 돌아가게 하여 좋은 밭을 청한 것이 다섯 번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장군의 빌림을 구걸하는 것이 또한 이미 심합니다.” 했다. 왕전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저 진나라 왕은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지금 진나라를 비울정도의 군대를 오로지 나에게 맡기시니 내가 많이 전택을 청하여 자손의 업으로 삼아 스스로를 굳건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나라 왕으로 하여금 자리에서 나를 의심하게 하는 것 아닌가?
[一] 正義罷音皮。悖音背。
[一] 【正義】 ‘罷’의 음은 ‘皮’이다. ‘悖’의 음은 ‘背’이다.
[二] 集解徐廣曰:「善,一作『菑』。」 索隱謂使者五度請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善’은 ‘菑’라고도 쓴다. 【索隱】 사자가 5번을 청함을 말한다.
[三] 集解音鹿。
[三] 【集解】 음은 ‘鹿’이다.
[四] 集解徐廣曰:「怚,一作『粗』。」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怚’는 ‘粗’라고도 쓴다.
[五] 集解徐廣曰:「專亦作『摶』,又作『剸』。」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專’은 ‘摶’이라고도 쓰고, 또한 ‘剸’이라고도 쓴다.
王翦果代李信擊荊。荊聞王翦益軍而來,乃悉國中兵以拒秦。王翦至,堅壁而守之,不肯戰。荊兵數出挑戰,終不出。王翦日休士洗沐,而善飲食撫循之,親與士卒同食。久之,王翦使人問軍中戲乎?對曰:「方投石超距。」[一]於是王翦曰:「士卒可用矣。」荊數挑戰而秦不出,乃引而東。翦因舉兵追之,令壯士擊,大破荊軍。至蘄南,[二]殺其將軍項燕,荊兵遂敗走。秦因乘勝略定荊地城邑。歲餘,虜荊王負芻,竟平荊地為郡縣。因南征百越之君。而王翦子王賁,與李信破定燕、齊地。
왕전이 과연 이신을 대신하여 형(초나라)을 쳤다. 형(초나라)이 왕전이 군대를 더하여 온다는 것을 듣고 이에 모든 나라 안의 군대로 진나라를 막았다. 왕전이 이르러 벽을 굳게 하고 지키면서 즐겨 싸우려하지 않았다. 형(초나라)의 군대가 여러번 나와 도전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왕전이 매일 병사를 쉬게 하고 목욕하게 하면서 좋은 음식으로 위로하고, 직접 사졸과 함께 같이 먹었다. 오래 지난 후 왕전이 심부름꾼에게 “군대 안에서 무슨 놀이하던가?” 하고 물었다. (심부름꾼이) 대답하기를 “돌 던지기와 멀리 뛰기를 합니다.” 했다. 이에 왕전이 말하기를 “사졸들을 쓸 만하다.” 하였다. 형(초나라)이 여러 번 도전하여도 진나라 군대가 나가지 않자 이에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왕전이 (초나라 군대의 이동) 인하여 군대를 일으켜 뒤쫓으며 장사로 하여금 치게 하여 형(초나라)의 군대를 크게 깨트렸다. 기의 남쪽에 이르러 그 장군 항연을 죽이니 형(초나라)의 군대가 무너져 달아났다. 진나라가 이김을 타고 형(초나라)의 땅인 성과 읍을 공략하여 평정하였다. 1년 만에 형(초나라 왕)왕 부추를 포로로 하고, 마침내 형(초나라) 땅을 평정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인하여 남쪽으로 백월의 임금을 정벌하였다. 왕전의 아들 왕분이 이신과 함께 연나라와 제나라 땅을 깨트리고 평정하였다.
[一] 集解徐廣曰:「超,一作『拔』。漢書云『甘延壽投石拔距,絕於等倫』。張晏曰『范蠡兵法飛石重十二斤,為機發行三百步。延壽有力,能以手投之。拔距,超距也』。」 索隱超距猶跳躍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超’는 ‘拔’이라 쓰기도 한다.” 했다. 『漢書』에 “감연수가 돌을 던지면 거리를 빼어나게(멀리 던져서) 하여 동료(동배)들보다 빼어났다.” 고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범려병법’에는 나는 돌의 무게가 10근인데 기계를 만들어 발사하면 300보를 간다. 연수는 힘이 있어 손으로 던질 수 있었다. ‘拔距’는 ‘超距’이다.” 했다. 【索隱】 ‘超距 ’는 ‘跳躍’과 같다.
[二] 正義徐州縣也。
[二] 【正義】 서주현이다.
秦始皇二十六年,盡并天下,王氏、蒙氏功為多,名施於後世。秦二世之時,王翦及其子賁皆已死,而又滅蒙氏。陳勝之反秦,秦使王翦之孫王離擊趙,圍趙王及張耳鉅鹿城。[一]或曰:「王離,秦之名將也。今將彊秦之兵,攻新造之趙,舉之必矣。」客曰:「不然。夫為將三世者必敗。必敗者何也?必其所殺伐多矣,其後受其不祥。今王離已三世將矣。」居無何,項羽救趙,擊秦軍,果虜王離,王離軍遂降諸侯。
진나라 시황제 26년 천하를 모두 합쳤는데 왕씨와 몽씨의 공이 많다하여 이름이 후세에 퍼졌다.(떨쳤다.)진나라 2세 황제 때 왕전과 그 아들 왕분은 이미 죽었고, 또 몽씨는 멸족 당하였다. 진승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진나라가 왕전의 손자 왕리로 하여금 조나라를 치게 하니 조나라 왕과 장이를 거록성에서 포위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리는 진나라의 이름있는 장수이다. 지금 강한 진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새로 세운 조나라를 공격하니 쳐서 멸망시킬 것이 틀림없다.” 했다. 객(손님)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저 3대에 걸쳐 장군이 되는 자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반드시 패하는 것은 왜인가? 반드시 죽이고 치는 바가 많아서 그 후세가 상서롭지 못함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왕리가 이미 3대째 장군이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우가 조나라를 구원하여 진나라 군대를 치니 과연 왕리는 포로로 잡히고, 왕리의 군대가 마침내 제후들에게 항복하였다.
[一] 正義今邢州平鄉縣城本秦鉅鹿郡城也。
[一] 【正義】 지금의 형주 평향현 성은 본리 진나라 거록군 성이다.
太史公曰:鄙語云「尺有所短,寸有所長」。白起料敵合變,出奇無窮,聲震天下,然不能救患於應侯。王翦為秦將,夷六國,當是時,翦為宿將,始皇師之,然不能輔秦建德,固其根本,偷合取容,以至圽身。[一]及孫王離為項羽所虜,不亦宜乎!彼各有所短也。
태사공이 말하기를 “세상에서 하는 말에 ‘한 자가 짧을 때가 있고, 한 치가 길 때도 있다. 고 한다.’ 백기는 적을 헤아리고 변화에 부합하여 기이한 계교를 내는 것이 다함이 없어 명성이 천하에 울렸으나 응후의 근심에서 (자신을)구할 수 없었다. 왕전은 진나라 장수가 되어 6국을 평정하는 이러한 때를 당하여 왕전이 노련한 장수가 되어 시황제가 스승으로 섬겼으나 진나라의 덕을 세움을 세우고, 그(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지 못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사려다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손자 왕리에 이르러 항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그들 각각은 단점이 있었다.
[一] 集解徐廣曰:「圽音沒。」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圽’의 음은 ‘沒 ’이다.” 했다.
【索隱述贊】白起、王翦,俱善用兵。遞為秦將,拔齊破荊。趙任馬服,長平遂阬。楚陷李信,霸上卒行。賁、離繼出,三代無名。
【索隱述贊】 백기와 왕전은 모두 군대를 잘 운용하였다. 번갈아 진나라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쳐서 점령하고 형(초나라)을 깨트렸다. 조나라가 마복자에게 맡겨서 장평의 싸움에서 땅에 묻혀 죽었다. 초나라 이신을 무너뜨리고 기 땅에서 행군을 멈추었다. 왕분과 왕리가 이어 나와 3대에서 명성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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