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七十二
穰侯列傳第十二
穰侯魏冉者,秦昭王母宣太后弟也。[一]其先楚人,姓羋氏。[二]
양후위염은 진나라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의 동생이다. 그 선조는 초나라 사람이니 성은 미씨이다.
[一] 索隱宣太后之異父長弟也,姓魏,名冉,封之穰。地理志穰縣在南陽。宣太后者,惠王之妃,姓羋氏,曰羋八子者是也。
[一] 【索隱】 선태후의 아버지를 달리하는 큰 동생이다. 성은 ‘魏’이고 이름은 ‘冉’인데 ‘穰’에 봉해졌다. 『地理志』에 양현은 남양에 있다. 선태후는 혜왕의 왕비인데 성는 미씨이니 ‘羋八子라 불리는 자’라 한 것이 이것이다.
[二] 正義羋,亡爾反。
[二] 【正義】 ‘羋’는 ‘亡’과 ‘爾’의 反이다.
秦武王卒,無子,立其弟為昭王。昭王母故號為羋八子,及昭王即位,羋八子號為宣太后。宣太后非武王母。武王母號曰惠文后,先武王死。[一]宣太后二弟:其異父長弟曰穰侯,姓魏氏,名冉;同父弟曰羋戎,為華陽君。[二]而昭王同母弟曰高陵君、[三]涇陽君。[四]而魏冉最賢,自惠王、武王時任職用事。武王卒,諸弟爭立,唯魏冉力為能立昭王。昭王即位,以冉為將軍,衛咸陽。誅季君之亂,[五]而逐武王后出之魏,昭王諸兄弟不善者皆滅之,威振秦國。昭王少,宣太后自治,任魏冉為政。
진나라 무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을 세워 소왕이라 했다. 소왕의 어머니는 그러므로 호칭을 ‘미팔자’라 했다. 소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미팔자’를 부르기를 ‘선태후’라 했다. 선태후는 무왕의 어머니가 아니다. 무왕의 어머니는 ‘혜문후’라 불렀는데 무왕보다 먼저 죽었다. 선태후는 동생이 둘인데 그 아버지를 달리하는 큰 동생은 양후라 불렀으니 성은 위씨이고, 이름은 ‘염’이다. 아버지를 같이하는 동생은 ‘미융’이라 부르고 화양군이 되었다. 소왕과 그 어머니를 같이 하는 동생으로는 ‘고릉군’, ‘경양군’이라 불렀다. (여러 형제 중)위염이 가장 어질어서 혜왕, 무왕 때부터 관직을 맡아 정사를 시행하였다. 무왕이 죽자 여러 동생들이 즉위를 다투었는데 오직 위염만이 힘을 써서 소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 소왕이 즉위하여 위염을 장군으로 삼고 함양을 지키게 했다. 계군의 난을 진압하고 무왕의 왕후를 축출하여 위나라로 가게하고, 소왕의 여러 형제들로 선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니 위엄이 진나라를 떨쳤다. 소왕이 어려서 선태후가 스스로 다스렸는데 위염에게 맡겨서 정사를 하였다.
[一] 索隱秦本紀云:「昭王二年,庶長壯與大臣公子為逆,皆誅,及惠文后皆不得良死。」又按:紀年云「秦內亂,殺其太后及公子雍、公子壯」是也。
[一] 【索隱】 진 본기에 “소왕 2년 뭇 서자로 맏이인 장과 대신, 공자들이 거스르자(반역을 하자) 모두 죽였는데 혜문후에 이르기까지 모두 좋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다.(좋게 죽지 못하였다.)” 했다. 또 살펴보니 『紀年』에 “진나라에 내란으로 그 태후와 공자 옹, 공자 장을 죽였다.” 한 것이 이것이다.
[二] 索隱華陽,韓地,後屬秦。羋戎後又號新城君。正義司馬彪云:「華陽,亭名,在洛州密縣。」又故華城在鄭州管城縣南三十里,即此。
[二] 【索隱】 ‘화양’은 한나라 땅이었는데 후에 진나라에 속하였다. 미융은 후에 또한 ‘신성군’이라 불렀다. 【正義】 사마표가 이르기를 “화양은 정의 이름인데 낙주 밀현에 있다.” 했다. 또 옛 화성은 정주 관성현 남쪽 30리에 있다 한 것이 곧 이것이다.
[三] 索隱名顯。
[三] 【索隱】 이름은 ‘현’이다.
[四] 索隱名悝。
[四] 【索隱】 이름은 ‘이’이다.
[五] 集解徐廣曰:「年表曰季君為亂,誅。本紀曰庶長壯與大臣公子謀反。伏誅。」 索隱按:季君即公子壯,僭立而號曰季君。穰侯力能立昭王,為將軍,衛咸陽,誅季君及惠文后,故本紀言「伏誅」。又云「及惠文后皆不得良死」,蓋謂惠文后時黨公子壯,欲立之,及壯誅而太后憂死,故云「不得良死」,亦史諱之也。又逐武王后出之魏,亦事勢然也。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연표」에 ‘계군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죽였다.’ 했고, 「본기」에 ‘서자의 맏이인 장과 대신, 공자들이 모반하였으므로 죽였다.’ 하였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계군은 곧 공자 ‘장’이니 참람되게 서서 ‘계군’이라 부른 것이다. 양후가 힘을 써서 소왕이 즉위할 수 있었다. 장군이 되어 함양을 호위하면서 계군과 혜문후를 죽였기 때문에 「본기」에서 ‘伏誅’라 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혜문후에 이르기까지 좋게 죽지 못하였다.” 한 것은 대개 혜문후가 이 때 공자 장과 무리를 지어 그를 세우고자 하였기 때문에 장을 죽이고 해후가 근심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좋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다.” 한 것이다. 또한 역사에서 그것을 꺼려한 것이다. 또 무왕의 후를 축출하여 위나라로 나가게 한 것은 도한 일의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昭王七年,樗里子死,而使涇陽君質於齊。趙人樓緩來相秦,趙不利,乃使仇液[一]之秦,請以魏冉為秦相。仇液將行,其客宋公[二]謂液曰:「秦不聽公,樓緩必怨公。公不若謂樓緩曰『請為公毋急秦』。秦王見趙請相魏冉之不急,且不聽公。公言而事不成,以德樓子;事成,魏冉故德公矣。」於是仇液從之。而秦果免樓緩而魏冉相秦。
소왕 7년 저리자가 죽자 경양군을 제나라에 인질이 되게 하였다. 조나라 사람 누완이 와서 진나라 재상이 되니 조나라에 이롭지 않았다. 이에 구액을 사신으로 진나라에 가게 하여 위염을 진나라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구액이 장차 가려는데 그 객 송공이 구액에게 말하기를 “‘진나라는 공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루완은 반드시 공을 원망할 것입니다. 공은 누완에게 공을 위하여 진나라에 급하게 하지 않을 것을 청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만 못합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조나라가 위염을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는 것이 급하지 않음을 보고는 또한 공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공께서 말을 하여도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자(누완)에게는 덕을 베푸는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면 위염은 공이 덕을 베풀었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했다. 이에 구액이 따랐다. 진나라가 과연 누완을 면직시키고 위염을 진나라 재상으로 삼았다.
[一] 索隱戰國策作「仇郝」,蓋是一人而記別也。正義音亦,姓名。
[一] 【索隱】 『戰國策』에는 ‘구학’이라 썼는데, 아마도 이는 한 사람인데 별도로 기록한 것일 것이다.
[二] 索隱戰國策作「宋交」。
[二] 【索隱】 『戰國策』에는 ‘송교’라고 썼다.
欲誅呂禮,禮出奔齊。昭王十四年,魏冉舉白起,使代向壽將而攻韓、魏,敗之伊闕,斬首二十四萬,虜魏將公孫喜。明年,又取楚之宛、葉。魏冉謝病免相,以客卿壽燭為相。其明年,燭免,復相冉,乃封魏冉於穰,復益封陶,[一]號曰穰侯。
여례를 죽이고자 하자 예가 나와 제나라로 달아났다. 소왕 14년 위염이 백기를 천거하여 향수를 대신하여 장군이 되게 하고 한나라,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궐에서 (한, 위나라 군대를) 무너뜨리고 24만 명을 목 베었으며, 위나라 장군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다. 다음해 또 초나라의 완, 섭 땅을 취하였다. 위염이 병으로 재상직을 면직하므로 객경 수촉으로서 재상을 삼았다. 그 다음해 수촉이 면직되고 다시 위염을 재상으로 삼고, 위염을 양 땅에 봉하고, 다시 더하여 도 땅을 봉하고 양후라 불렀다.
[一] 集解徐廣曰:「一作『陰』。」 索隱陶即定陶也。徐廣云作「陰」,陶陰字本易惑也。王劭按:定陶見有魏冉冢,作「陰」,誤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음’이라 쓰기도 한다.” 했다. 【索隱】 ‘도’는 곧 ‘정도’이다. 서광이 말하기를 “‘음’이 쓴 것은 ‘도’와 ‘음’의 글자가 본래 미혹(헛갈리기)하기 쉽다. 왕소가 살펴보니 ‘정도’는 위염의 무덤에 보이는데 ‘음’이라 쓴 것은 잘못이다.
穰侯封四歲,為秦將攻魏。魏獻河東方四百里。拔魏之河內,取城大小六十餘。昭王十九年,秦稱西帝,齊稱東帝。月餘,呂禮來,而齊、秦各復歸帝為王。魏冉復相秦,六歲而免。免二歲,復相秦。四歲,而使白起拔楚之郢,秦置南郡。乃封白起為武安君。白起者,穰侯之所任舉也,相善。於是穰侯之富,富於王室。
양후에 봉해진지 4년에 진나라 장군이 되어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가 하동 지방 400리를 바쳤다. 위나라의 하내 지방을 점령하고 크고 작은 성 60여개를 취하였다. 소왕 19년 진나라가 ‘西帝(서족의 천자)’라 하자 제나라는 ‘東帝(동쪽의 천자)’ 하였다. 한 달 여 지나 여례가 오자 제나라와 진나라가 각각 다시 ‘帝’를 돌려 ‘王’이라 했다. 위염이 다시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가 6년만에 면직되었다. 면직 된지 2년에 다시 진나라 재상이 되었다. 4년 후 백기로 하여금 초나라의 영 땅을 점령하게 하였는데 진나라는 ‘남군’을 두었다. 이에 백기를 봉하여 무안군이라 하였다. 백기는 양후가 천거하고 (일을)맡겼는데 서로 좋아하였다. 이에 양후의 부유함은 왕실보다 부유하였다.
昭王三十二年,穰侯為相國,將兵攻魏,走芒卯,[一]入北宅,[二]遂圍大梁。梁大夫須賈說穰侯曰:「臣聞魏之長吏謂魏王曰:『昔梁惠王伐趙,戰勝三梁,[三]拔邯鄲;趙氏不割,而邯鄲復歸。齊人攻衛,拔故國,殺子良;[四]衛人不割,而故地復反。衛、趙之所以國全兵勁而地不并於諸侯者,以其能忍難而重出地也。宋、中山數伐割地,而國隨以亡。臣以為衛、趙可法,而宋、中山可為戒也。秦,貪戾之國也,而毋親。蠶食魏氏,又盡晉國,[五]戰勝暴子,[六]割八縣,地未畢入,兵復出矣。夫秦何厭之有哉!今又走芒卯,入北宅,此非敢攻梁也,且劫王以求多割地。
소왕 32년 양후가 상국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망묘를 달아나게 하고 북택에 들어가 마침내 대량을 포위하였다. 양의 대부 수가가 양후를 유세하여 말하기를 “신이 위나라의 장리가 위나라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 날 양나라 혜왕이 조나라를 쳐서 삼양에서 싸워 이기고 한단을 점령하였는데 조씨(조나라)가 나누지 않아 한단을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제나라 사람들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옛 나라를 점령하고 자량을 죽였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나누지 않아 옛 땅을 다시 반환하였습니다. 위나라와 조나라가 나라를 온전히 하고 군대를 가볍게 하고도 땅을 제후에게 병합당하지 않은 까닭은 어려움에도 거듭 땅을 내주는 것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나라와 중산은 여러 번 칠 대마다 땅을 나누어 주다 나라가 따라 망하였습니다. 신은 위나라와 조나라는 본받을 만하고, 송나라와 중산은 경계해야 한다. 여깁니다. 진나라는 탐욕스럽고 어그러진 나라이어서 친해서는 안됩니다. 위씨(위나라)를 잠식하고 또 晉國을 다하고, 暴子(:포연)를 싸워 이기고 8개현을 떼어 주었는데 땅이 아직 들이기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군대가 다시 나왔습니다. 저 진나라가 어찌 만족함이 있겠습니까? 지금 또한 망묘를 달아나게 하고 북택에 들어가니 이는 양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면 또한 왕을 겁주어 많이 당을 떼어받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一] 集解上莫卬反 下陌飽反。
[一] 【集解】 위는 ‘莫’과 ‘卯’의 반이고, 아래는 ‘陌’과 ‘飽’의 反이다.
[二] 集解徐廣曰:「魏惠王五年,與韓會宅陽。」 正義竹書云:「宅陽,一名北宅。」括地志云:「宅陽故城在鄭州滎陽縣西南十七里。」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위나라 혜왕 5년 한나라와 택양에서 회합했다.” 했다. 【正義】 『竹書』에 “‘택양’은 ‘북택’이라 하기도 한다.” 했다. 『括地志』에 “‘택양 옛 성은 정주 형양현 서남쪽 17리에 있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田完世家云魏伐趙,趙不利,戰於南梁。」 索隱三梁即南梁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전원세가」에 위나라가 조나라를 치니 조나라가 이롭지 않아 ‘남양’에서 싸웠다.” 했다. 【索隱】 ‘삼양’은 곧 ‘남양’이다.
[四] 索隱衛之故國,蓋楚丘也 下文「故地」,亦同謂楚丘也。戰國策「衛」字皆作「燕」,「子良」作「子之」,恐非也。
[四] 【索隱】 위나라의 옛 나라는 ‘초구’일 것이다. 아래 글의 ‘고지’는 또한 같이 ‘초구’를 말한다. 『戰國策』에 ‘衛’자는 모두 ‘燕’이라 썼고, ‘子良’은 ‘子之’라 썼는데 아마도 잘못인 듯 하다.
[五] 索隱河東、河西、河內並是魏地,即故晉國。今言秦蠶食魏氏,盡晉國之地也。
[五] 【索隱】 하동, 하서, 하내는 모두 위나라 땅이니 곧 옛 晉國이다. 지금 진나라가 위씨(위나라)를 잠식하니 진국의 땅을 다하였다고 말하였다.
[六] 集解徐廣曰:「韓將暴鳶。」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나라 장군 ‘暴鳶(포연)’이다.” 했다.
王必勿聽也。今王背楚、趙而講秦,[七]楚、趙怒而去王,與王爭事秦,秦必受之。秦挾楚、趙之兵以復攻梁,則國求無亡不可得也。願王之必無講也。王若欲講,少割而有質;不然,必見欺。』[八]此臣之所聞於魏也,[九]願君(王)之以是慮事也。周書曰『惟命不于常』,此言幸之不可數也。夫戰勝暴子,割八縣,此非兵力之精也,又非計之工也,天幸為多矣。
왕은 반드시 듣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초나라와 조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와 강화한다면 초나라와 조나라가 노하여 왕을 떠나 진나라 섬기기를 왕과 다툴 것이며, 진나라는 반드시 (섬김을) 받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초나라와 조나라의 군대를 끼고서 다시 양을 공격하면 곧 나라가 망하지 않음을 구하여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데 왕께서는 반드시 강화하지 마소서. 왕이 만약 강화하고자 한다면 조금 나누고 인질을 두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속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는 위나라에서 들은 바이니 원하건데 왕께서는 이로서 일을 생각하십시오. 『주서』에 “천명은 항상하지(일정하지) 않다.”하니 이는 요행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 포연을 싸워 이기고 8개현을 뗀 것은 병력의 우수함 때문이 아니며, 또 계책이 공교로워서도 아니고 하늘이 준 쿤 행운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七] 索隱講,和也。
[七] 【索隱】 ‘講’은 ‘和’이다.
[八] 索隱謂與秦欲講,少割地而求秦質子;恐不然必被秦欺也。
[八] 【索隱】 진나라와 강화하고자 하면 조금 떼어주고 진나라의 인질을 구하라 한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진나라의 속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九] 索隱須賈說穰侯,言魏人謂梁王若少割地而求秦質,必是欺我,即聞魏見欺於秦也。
[九] 【索隱】 수가가 양후를 유세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양의 왕에게 말하기를 ‘만약 땅을 조금 떼 주고 진나라의 인질을 구하면 반드시 나를 속일 것이라 말하니 곧 위나라가 진나라에게 속임을 당할 것이라 들었다고 한 것이다.
今又走芒卯,入北宅,以攻大梁,是以天幸自為常也。智者不然。臣聞魏氏悉其百縣勝甲以上戍大梁,臣以為不下三十萬。以三十萬之眾守梁七仞之城,[一0]臣以為湯、武復生,不易攻也。夫輕背楚、趙之兵,陵七仞之城,戰三十萬之眾,而志必舉之,臣以為自天地始分以至于今,未嘗有者也。攻而不拔,秦兵必罷,陶邑必亡,[一一]則前功必棄矣。今魏氏方疑,可以少割收也。[一二]願君逮楚、趙之兵未至於梁,亟以少割收魏。
지금 또한 망묘를 도망하게 하고 북택에 들어가서 대량을 공격하는 이것은 하늘이 준 요행인데 스스로 일상으로 삼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렇지 않다. 신이 들으니 위씨(위나라)는 百縣이 넘는 훌륭한 군대를 모두 가지고 대량을 지킨다 하니 30만이 넘는다. 여겨집니다. 30만의 무리를 가지고 양나라의 7길의 성을 지킨다 하니 신은 탕왕과 무왕이 다시 살아나도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저 뒤에 있는 초나라와 조나라의 군대를(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고 7길의 성을 뛰어넘어 30만의 무리가 싸우면서 반드시 점거하는데 뜻을 두는 것은 신은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누어진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있지 않았다 여깁니다. 공격하여 함락하지 못하면 진나라 군대는 반드시 그만(거두게)두게 되고. 도읍은 반드시 망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곧 앞의 공은 반드시 버려지게 됩니다. 지금 위씨(위나라)가 막 의심하니 조금 떼어주는 것으로써 거둘 수 있습니다. 원하건데 군께서는 초나라와 조나라의 군대가 아직 양에 이르지 않음에 이르러 조금 위나라를 떼어 거두기를 바랍니다.
[一0] 集解爾雅曰:「四尺謂之仞,倍仞謂之尋。」
[一0] 【集解】 『시경』 이아 편에 “4자를 ‘仞’이라 하고, 仞의 두 배를 ‘尋’이라 한다.” 했다.
[一一] 索隱「陶」一作「魏」。言秦前攻得魏之城邑,秦罷則亡而還於魏也。正義定陶近大梁,穰侯攻梁兵疲,定陶必為魏伐。
[一一] 【索隱】 ‘陶’는 한편으로 ‘魏’라고 쓰기도 한다. 진나라가 앞서 공격하여 위나라의 성읍을 얻었으나, 진나라가 군대를 거두면 곧 도망하여 위나라에 돌려주게 됨을 말한 것이다.
[一二] 索隱賈引魏人之說不許王講于秦,是言魏氏方疑,可以少割地而收魏也。
[一二] 【索隱】 수가가 위나라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여 왕이 진나라에 강화를 허락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는 위씨(위나라)가 의심하기 시작하였을 때 땅을 조금 떼어 받고 위나라를 거둘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魏方疑而得以少割為利,必欲之,則君得所欲矣。楚、趙怒於魏之先己也,必爭事秦,從以此散,[一三]而君後擇焉。且君之得地豈必以兵哉!割晉國,秦兵不攻,而魏必效絳安邑。又為陶開兩道,[一四]幾盡故宋,[一五]衛必效單父。秦兵可全,而君制之,何索而不得,何為而不成!願君熟慮之而無行危。」[一六]穰侯曰:「善。」乃罷梁圍。[一七]
위나라가 바야흐로 조금 떼어주는 것으로써 이익이 될 수 있다 의심하면 반드시 하고자 할 것이니 곧 군(그대는)께서는 하고자 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나라와 조나라가 위나라의 먼저 그침에 노하면 반드시 진나라 섬기는 것을 다투게 되면 합종이 이 때문에 흩어질 것이니 군께서는 후에 선택하면 됩니다. 또 군께서 땅을 얻는 것이 어찌 반드시 군대로써 할 것인가! 진국을 나누어 진나라 군대가 공격하지 않으면 위나라는 반드시 강읍과 안읍을 줄 것입니다. 또 도를 위하여 두 길을 열고 옛 송을 거의 다 (차지)할 것이고, 위나라는 반드시 단보를 줄 것입니다. 진나라 군대가 온전할 수 있고, 군께서 그것을 제제할 수 있으면 무엇을 찾은들 얻지 목할 것이며,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할 것인가! 원하건데 군께서는 숙고하셔서 위태로움을 행함이 없게 하십시오. 하니 양후가 “좋다.” 하고는 이에 양의 포위를 그만두었다.(거두었다.)
[一三] 索隱楚、趙怒魏之與秦講,皆爭事秦,是東方從國於是解散也,故云「從以此散」。正義從,足松反。
[一三] 【索隱】 초나라와 조나라는 위나라가 진나라와 강화하는 것에 노하여 모두 다투어 진나라를 섬기면 이는 동쪽의 합종국들이 이에 흩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합종이 이 때문에 흩어진다.” 한 것이다. 【正義】 ‘從’은 ‘足’과 ‘松’의 反이다.
[一四] 索隱穰侯封陶,魏效絳與安邑,是得河東地。言從秦適陶,開河西、河東之兩道。正義穰故封定陶,故宋及單父是陶之南道也,魏之安邑及絳是陶北道。
[一四] 【索隱】 양후를 ‘도’ 땅에 봉하고 위나라는 강읍과 안읍을 주면 이는 하동을 얻는 것이다. 진나라로부터 도 땅에 가서 하서와 하동의 두 길을 여는 것(개척하는 것)을 말한다. 【正義】 양후는 옛 날에 정도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송과 단보는 이는 도에 가는 남쪽 길이고, 위나라의 안음과 강읍은 이는 도에 가는 북쪽 길이다.
[一五] 索隱上音祈。此時宋已滅,是秦將盡得宋地也。
[一五] 【索隱】 위의 음은 ‘祈’이다. 이 대 송나라는 이미 멸망하였으니 이는 진나라가 장차 송나라 땅을 모두 얻는 것이다.
[一六] 索隱言莫行圍梁之危事。
[一六] 【索隱】 양을 포위하는 위태로운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다.
[一七] 正義表云魏安釐王二年,秦軍大梁城,韓來救,與秦溫以和也。
[一七] 【正義】 「表」에 위나라 안리왕 2년 진나라 군대가 대량성에 있고, 한나라가 와서 구원하여 진나라와 온 땅으로써 강화 하였다.
明年,魏背秦,與齊從親。秦使穰侯伐魏,斬首四萬,走魏將暴鳶,得魏三縣。穰侯益封。明年,穰侯與白起客卿胡陽復攻趙、韓、魏,破芒卯於華陽下,斬首十萬,取魏之卷、[一]蔡陽、長社,趙氏觀津。且與趙觀津,益趙以兵,伐齊。[二]齊襄王懼,使蘇代為齊陰遺穰侯書曰:「臣聞往來者言曰『秦將益趙甲四萬以伐齊』,臣竊必之[三]敝邑之王曰[四]『秦王明而熟於計,穰侯智而習於事,必不益趙甲四萬以伐齊』。是何也?夫三晉之相與也,秦之深讎也。
다음해(진나라 소왕 33년) 위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와 합종하였다. 진나라가 양후를 시켜서 위나라를 치게하여 4만의 머리를 자르고 위나라 장수 포연을 달아나게 하며, 위나라의 3개현을 얻었다. 양후의 봉지를 더하였다. 다음해 (진나라 소왕 34년) 양후와 백기, 객경 호양이 다시 조나라와 한나라, 위나라를 공격하여 망묘를 화양성 아래서 깨트리고 10만의 머리를 자르고 위나라의 ‘권’, ‘채양’, ‘장사’, 조씨(조나라)의 관진을 취하였다. 또 조나라의 관진을 주고(조나라에 돌려주고) 조나라의 군대를 더하여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양왕이 두려워하여 소대로 하여금 제나라를 위해 몰래 양후에게 글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글에) “신(소대)이 가고 오는 자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진나라가 장차 조나라의 군대 4만명을 더하여(4만명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친다.’고 합니다. 신은 분명하게 우리나라의 왕에게 말하기를 ‘진나라 왕은 현명하며 계책에 익숙하고, 양후는 지혜로우며 일에 숙달하였으니 반드시 조나라 군대 4만명을 더하는 것으로써 제나라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왜이겠습니까? 저 삼진(위, 조, 제나라)이 서로 함께 하는 것은 진나라가 깊이 원수(매우 싫어하는)로 여기는 것입니다.
[一] 集解丘權反。
[一] 【集解】 ‘丘’와 ‘權’의 反이다.
[二] 索隱既得觀津,仍令趙伐齊,而秦又以兵益助趙也。
[二] 【索隱】 이미 관진을 얻었으므로 그대로 조나라로 하여금 제나라를 치게 하고, 진나라가 또한 군대를 더하는 것으로써 조나라를 도운 것이다.
百相背也,百相欺也,不為不信,不為無行。今破齊以肥趙。趙,秦之深讎,不利於秦。此一也。秦之謀者,必曰『破齊,獘晉、楚,[五]而後制晉、楚之勝』。夫齊,罷國也,以天下攻齊,如以千鈞之弩決潰癰也,必死,安能獘晉、楚?此二也。秦少出兵,則晉、楚不信也;多出兵,則晉、楚為制於秦。齊恐,不走秦,必走晉、楚。此三也。
백번을 서로 배반하고, 백번을 서로 속여도 믿지 못한다 하지 않으며 행함이 없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제나라를 깨트리는 것은 조나라를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조나라와 진나라는 깊은 원수이니 진나라에 이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의 도모하는 자가 반드시 말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가 제나라를 치면)제나라를 깨트릴 수 있으나, 晉나라와 초나라도 피폐하게 질 것이니 그 후에 진나라와 초나라를 제압하면 이길 것입니다.’ 할 것입니다. 저 제나라는 흩어지는(망해 가는) 나라로 천하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마치 천균의 쇠뇌로 종기를 터서 무너뜨리는 것과 같아 반드시 죽이겠지만 어찌 진나라를 피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군대를 조금 내면 곧 진나라와 초나라는 믿지 않을 것이고, 군대를 많이 내면 곧 진나라와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제재당할 것이니 제나라는 두려워하여 진나라에 달려가지 않고 반드시 진나라, 초나라에 달려 갈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三] 索隱告齊王,言秦必定不益兵以助趙。正義臣,蘇代也。必知秦與趙甲四萬以伐齊。
[三] 【索隱】 제나라 왕에게 알려 말한 것으로 “진나라는 반드시 군대를 더하는 것으로써 조나라를 돕지 않을 것이라고 정하여 말한 것이다.”
[四] 正義謂齊王也。
[四] 【正義】 제나라 왕을 말한다.
[五] 正義今晉、楚伐齊,晉、楚之國亦獘敗。
[五] 【正義】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가 제나라를 치면 진나라와 초나라가 또한 피폐해 진다는 것이다.
秦割齊以啖晉、楚,晉、楚案之以兵,秦反受敵。此四也。是晉、楚以秦謀齊,以齊謀秦也,何晉、楚之智而秦、齊之愚?此五也。故得安邑以善事之,亦必無患矣。秦有安邑,韓氏必無上黨矣。取天下之腸胃,與出兵而懼其不反也,孰利?臣故曰秦王明而熟於計,穰侯智而習於事,必不益趙甲四萬以代齊矣。」於是穰侯不行,引兵而歸。
진나라가 제나라를 나누는 것으로써 진나라와 초나라에게 먹게 하면 진나라와 초나라는 군대로 누를 것이니(지킬 것이니) 진나라가 도리어 적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 진나라와 초나라가 진나라로 제나라를 도모하고, 제나라로 진나라를 도모할 것이니 어찌 진나라와 초나라는 지혜롭고, 진나라와 제나라는 어리석다 하겠습니까? 이것이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안읍을 얻는 것으로써 일을 잘 처리한다면 또한 반드시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안음을 소유하면 한씨(한나라)는 반드시 상당을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천하의 腸胃(창자와 위장인 상당)을 취하는 것과 군대를 내고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이롭겠습니까? 신은 그러므로 ‘진나라 왕은 현명하며 계교에 익숙하고, 양후는 지혜롭고 일에 능숙하여 반드시 조나라 군대 4만을 더하여 제나라를 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양후가 가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昭王三十六年,相國穰侯言客卿灶,欲伐齊取剛、壽,[一]以廣其陶邑。於是魏人范睢自謂張祿先生,譏穰侯之伐齊,乃越三晉以攻齊也,以此時奸說秦昭王。昭王於是用范睢。范睢言宣太后專制,穰侯擅權於諸侯,涇陽君、高陵君之屬太侈,富於王室。於是秦昭王悟,乃免相國,令涇陽之屬皆出關,就封邑。穰侯出關,輜車千乘有餘。穰侯卒於陶,而因葬焉。秦復收陶為郡。
소왕 36년 상국 양후가 객경인 조에게 말하기를 “제나라를 쳐서 ‘강’과 ‘수’의 땅을 취하는 것으로써 그 도읍을 넓히고자 한다.”했다. 이에 위나라 사람인 범휴(수)가 스스로 장록 선생이라 말하면서 “양후가 제나라를 치는 것은 삼진(위, 제, 조나라)을 넘어 제나라를 치는 것이라 꾸짖었는데 이때로서 진나라 소왕에게 유세함을 구하였다. 소왕이 이에 범휴(수)를 등용하였다. 범휴(수)는 선태후가 권력을 멋대로 하고, 양후는 제후에게 권세를 함부로 하며, 경양군과 고릉군에 속하는 이가 크게 사치하여 왕실보다 부유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진나라 소왕이 깨닫고 이에 상국을 면직하고 경양군의 무리들이 모두 관을 나가서 봉읍에 가라고 명령하였다. 양후가 관을 나갔는데 짐을 실은 수레가 1000대가 넘었다. 양후가 ‘도’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곳에 장례하였다. 진나라가 다시 ‘도’ 땅을 거두어 군으로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濟北有剛縣。」 正義故剛城在兗州龔丘縣界。壽張,鄆州縣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제나라 북쪽에 ‘강현’이 있다.” 했다. 【正義】 옛 강성은 연주 공구현 경계에 있다. ‘수장’은 운주현이다.
太史公曰:穰侯,昭王親舅也。而秦所以東益地,弱諸侯,嘗稱帝於天下,天下皆西鄉稽首者,穰侯之功也。及其貴極富溢,一夫開說,身折勢奪而以憂死,況於羈旅之臣乎!
태사공(사마천)이 말하였다. “양후는 소왕의 외숙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땅을 더하고 제후를 약하게 하고 일찍이 천하에 황제를 칭하고, 천하가 모두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 것은 양후의 공이다. 그는 귀함이 국에 이르고 부유함이 넘쳤으나 한 남자가 말을 열자 몸은 꺽이고 세력을 빠앗겨 근심하다 죽었으니 하물며 타향에 머물던 신하에 있어서랴!
【索隱述贊】 穰侯智識,應變無方。內倚太后,外輔昭王。四登相位,再列封疆。摧齊撓楚,破魏圍梁。一夫開說,憂憤而亡。
【索隱述贊】 양후의 지혜롭고 아는 것이 많아 변화에 대응함이 방향이 없었다(전방위적 이었다). 안으로 태후에게 기대어 밖으로 소왕을 보필하였다. 네 번 재상의 지위에 오르고, 두 번 제후에 봉해져 봉지를 얻었다. 제나라를 꺽고, 초나라를 어지럽히며, 위나라를 깨트리고 양을 포위하였다. 한 남자가 말을 열자 근심하고 분해하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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