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七十四
孟子荀卿列傳第十四
索隱按:序傳孟嘗君第十四,而此傳為第十五,蓋後人差降之矣。
【索隱】 살펴보니 서전에는 맹상군을 제14라 하였는데 이 전에서는 제15로 하였으니 아마도 후신들이 잘못 그것을 내린 것일 것이다.
太史公曰:余讀孟子書,至梁惠王問「何以利吾國」,未嘗不廢書而歎也。曰:嗟乎,利誠亂之始也!夫子罕言利者,常防其原也。故曰「放於利而行,多怨」。自天子至於庶人,好利之獘何以異哉!
태사공이 말하기를 “내가 맹자의 글을 읽는데 양혜왕이 물은 ‘무엇으로써 내 나라를 이롭게 하는가?’에 이르러 일찍이 글을 덮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하기를 아! 利(이익, 이로움)야 말로 진실로 어지러움의 시작이구나! 부자(공자)께서 이익을 말한 것이 드물었던 것은 항상 그 근원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익을 내걸고 행동하면 원한이 많다.’하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이익을 좋아함의 폐단이 어찌 다를까!” 했다.
孟軻,騶人也。[一]受業子思之門人。[二]道既通,游事齊宣王,宣王不能用。適梁,梁惠王不果所言,則見以為迂遠而闊於事情。當是之時,秦用商君,富國彊兵;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三]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
맹가는 추 땅 사람이다. 자사의 문인(제자)에게 학업을 받았다. 도가 이미 통달하고서는 제나라 선왕에게 가서 섬겼는데 선왕이 등용하지 않았다. 양나라에 갔는데 양나라 혜왕이 말한 바를 해내지 못하였으니 곧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세상물정에 어둡다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나라는 상군을 등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였으며, 초나라와 위나라는 오기를 등용하여
楚、魏用吳起,戰勝弱敵;齊威王、宣王用孫子、田忌之徒,而諸侯東面朝齊。天下方務於合從連衡,以攻伐為賢,而孟軻乃述唐、虞、三代之德,是以所如者不合。退而與萬章之徒[三]序詩書,述仲尼之意,作孟子七篇。其後有騶子之屬。
싸움에 이기고 적을 약하게 하였으며, 제나라 위왕과 선왕은 소자와 전기의 무리를 등용하여 제후들이 동쪽을 향하여 제나라에 조공하였다. 천하가 바야흐로 합종과 연횡에 힘써서 공격하고 정벌하는 것을 현명하다 하니 맹가는 이에 당, 우(요순시대)와 삼대(하, 은, 주 시대)의 덕을 서술하였다. 이 때문에 같이 하는 자와 부합하지 않았다. 물러나 만장의 무리와 함께 『詩經』과 『書經』을 차례로 정리하고 중니(공자)의 뜻을 서술하여 『孟子』 7편을 지었다. 그 후에 騶子에 속하는 자들이 있었다.
[一] 索隱軻音苦何反,又苦賀反。鄒,魯地名。又云「邾」,邾人徙鄒故也。正義軻字子輿,為齊卿。鄒,兗州縣。
[一] 【索隱】 ‘軻’의 음은 ‘苦’와 ‘何’의 反인데 또 ‘苦’와 ‘賀’의 反이다. ‘鄒’는 노나라의 땅이름이다. 또 ‘邾’라 하는데 ‘邾’ 땅 사람들이 ‘鄒’ 땅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正義】 ‘가’의 자는 ‘자여’이니 제나라의 경이 되었다. ‘鄒’는 연주현이다.
[二] 索隱王劭以「人」為衍字,則以軻親受業孔伋之門也。今言「門人」者,乃受業於子思之弟子也。
[二] 【索隱】 왕소는 ‘人’이 연자(덧붙은 글자)라 하였는데 곧 가(맹자)는 자사의 문하에서 직접 학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 ‘문인’이라는 말은 곧 자사의 제자에게서 학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三] 索隱孟子有萬章、公明高等,蓋並軻之門人也。萬,姓;章,名。
[三] 맹자에게는 만장, 공명고 등이 있는데 나란히 ᅟᅢᆼ자의 문인이다. ‘만’은 성이요, ‘장’은 이름이다.
齊有三騶子。其前騶忌,以鼓琴干威王,因及國政,封為成侯而受相印,先孟子。其次騶衍,後孟子。騶衍睹有國者益淫侈,不能尚德,若大雅整之於身,施及黎庶矣。乃深觀陰陽消息而作怪迂之變,終始、大聖之篇十餘萬言。其語閎大不經,必先驗小物,推而大之,至於無垠。先序今以上至黃帝,學者所共術,大並世盛衰,[一]因載其禨祥度制,推而遠之,至天地未生,窈冥不可考而原也。先列中國名山大川,通谷禽獸,水土所殖,物類所珍,因而推之,及海外人之所不能睹。稱引天地剖判以來,五德轉移,治各有宜,而符應若茲。以為儒者所謂中國者,於天下乃八十一分居其一分耳。[二]中國名曰赤縣神州。赤縣神州內自有九州,禹之序九州是也,不得為州數。中國外如赤縣神州者九,乃所謂九州也。於是有裨海環之,[三]人民禽獸莫能相通者,如一區中者,乃為一州。如此者九,乃有大瀛海環其外,天地之際焉。其術皆此類也。然要其歸,必止乎仁義節儉,君臣上下六親之施,始也濫耳。[四]王公大人初見其術,懼然顧化,[五]其後不能行之。
제나라에는 세 추자가 있었다. 그 앞은 추기인데 거문고를 연주하여 위왕에게 구하여 나라의 정사에 미치고, 봉하여 성후가 되어 재상의 인을 받았는데 맹자보다 앞선다.(선배이다.) 그 다음은 추연인데 맹자보다 뒤이다.(후배이다.) 추연은 나라를 소유한 자들(제후)이 더욱 음란하고 사치함을 보고 덕을 숭상할 수 없다 여겨 『시경』 대아편에 있는 말을 자신에게 정리하듯이 하여야 베품이 서인에게 미친다고 여겼다. 이에 깊이 음양의 사라지고 쉼을 관찰하여 「괴우지변」, 「종시」, 「대성」 편 10여만 말을 지었다. 그 말이 넓고 커서 법에서 벗어났으면 반드시 먼저 작은 물건을 경험하고 미루어 키워 끝이 없음에 이르렀다. 먼저 지금을 차례하여 위로는 황제에 이르고, 배우는 자가 함께 말한 바를 서술하고 크게는 세대의 성쇠를 아우르고, 인하여 나쁜 조짐과 상서로움과 제도를 싣고, 미루어 멀리하여 천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아 고요하고 그윽하여 상고할 수 없는 근원에 이르렀다. 먼저 중국의 명산대천과 골자기와 짐승, 물과 땅의 번식하는 것과 사물의 종류와 진기하게 여기는 바를 통하고 이로 인하여 미루어서 바다 밖과 사람의 볼 수 없는 바에 미쳤다. 천지가 나누어진 이래로 5덕이 구르고 옮겨지는 것을 이끌어내어 다스림(정치)에 각기 (그 시대에)마땅함(마땅한 정치제도가)이 있으며, 이 같음에(이 같은 길흉의 조짐에)부합되고 상응함을 말하였다. 儒者(儒家)들의 이른 바 중국은 천하를 81개로 나누었을 때 그 하나를 차지한 것일 뿐이라 여겼다. 중국의 이름을 ‘적현신주’라 불렀는데 적현신주 안에 9개의 주가 있으니 우 임금이 차례한 9주가 이것이나 주의 수로 할 수는 없다. 중국의 밖에도 적현신주와 같은 것이 9개가 있는데 이른바 9주이다. 여기에는 작은 바다가 그것을 둘러치고 있고, 사람과 짐승이 서로 통할 수 없으며, 하나의 구역과 같은데 이것이 하나의 주가 된다. 이 같은 것이 9개이고 곧 큰 바다가 그 밖을 고리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천지의 만나는 곳이다. 그 학문이 모두 이러한 류이다. 그러나 그 요점에 돌아가면 반드시 仁義와 節儉, 君臣, 上下, 六親의 베품에서 그치는데 시작이 넘칠 뿐이다. 왕공과 대인이 처음 그 학문을 보고는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 변화를 보이나 그 후에는 행하지 못하였다.
[一] 集解並,蒲浪反。索隱言其大體隨代盛衰,觀時而說事。
[一] 【集解】 ‘並’은 ‘蒲’와 ‘浪’의 反이다. 【索隱】 그 대체는(요점을 말하면) 세대의 성쇠를 따라서 때를 관찰하고 일을 설명하였다.
[二] 索隱桓寬、王充並以衍之所言迂怪虛妄,干惑六國之君,因納其異說,所謂「匹夫而營惑諸侯」者是也。
[二] 【索隱】 환관, 왕충은 나란히 추연의 말한 바를 물정에 어둡고, 괴이하며, 빈 것이고 망녕되다. 하고, 6국의 임금을 미혹시켜서 그 괴인한 말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니 이른 바 “필부이면서 제후를 경영하고 의혹시켰다.”는 것이 이것이다.
[三] 索隱裨音脾。裨海,小海也。九州之外,更有大瀛海,故知此裨是小海也。且將有裨將,裨是小義也。
[三] 【索隱】 ‘裨’의 음은 ‘脾’이다. ‘裨海’는 작은 바다이다. 9주의 밖에 다시 큰 바다가 있다하기 때문에 이 ‘裨’는 작은 바다라 하는 것이 옳다. 또 장수 중에도 ‘裨將’이 있으니 ‘裨’가 작다는 뜻임이 옳다.
[四] 索隱濫即濫觴,是江源之初始,故此文意以濫為初也。謂衍之術言君臣上下六親之際,行事之所施所始,皆可為後代之宗本,故云濫耳。
[四] 【索隱】 ‘濫’은 곧 ‘濫觴(사물의 시작이나 처음)’이니 이는 강의 근원이 처음 시작함 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뜻은 ‘濫(넘침)’으로써 처음을 삼은 것이다. 추연의 학문과 말이 군신과 상하, 육친의 교제(사이)를 말하고 일을 행하고 베푸는 바와 시작되는 바가 모두 후대의 종(근)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濫 ’이라 했을 뿐이다.
[五] 索隱懼音劬。謂衍之術皆動人心,見者莫不懼然駐想,又內心留顧而已化之,謂欲從其術也。按:化者,是易常聞而貴異術也。
[五] 【索隱】 ‘懼’의 음은 ‘劬’이다. 추연의 학문(방법)이 모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니 보는 자가 두려워하는 모양(깜짝 놀라) 생각을 머물게 하지 않음이 없고, 또 마음속으로 머물러 돌아보아 이미 동화되고서는 그 학문(방법)을 따르고자 하였음을 말한다. 살펴보니 ‘化’라는 것은 이는 평소에 듣는 것을 쉽게 여기고, 기이한 학문(방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是以騶子重於齊。適梁,惠王郊迎,執賓主之禮。適趙,平原君側行撇席。[一]如燕,昭王擁彗先驅,[二]請列弟子之座而受業,築碣石宮,[三]身親往師之。作主運。[四]其游諸侯見尊禮如此,豈與仲尼菜色陳蔡,孟軻困於齊梁同乎哉![五]故武王以仁義伐紂而王,伯夷餓不食周粟;衛靈公問陳,而孔子不答;梁惠王謀欲攻趙,孟軻稱大王去邠。[六]此豈有意阿世俗苟合而已哉!持方枘欲內圜鑿,其能入乎?[七]或曰,伊尹負鼎而勉湯以王,百里奚飯牛車下而繆公用霸,作先合,然後引之大道。騶衍其言雖不軌,儻亦有牛鼎之意乎?[八]
이 때문에 추자(추연)이 제나라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양나라에 가니 혜왕이 교외에서 영접하고 賓主의 예를 집행하였다. 제나라에 가니 평원군이 옆에서 가고, 자리를 닦아주었다. 연나라에 갔을 때는 소왕이 빗자루를 안고, 앞서 달려갔으며, 제자의 자리를 나열하고(제자의 자리에 앉아) 업(학문)을 받을 것을 청하고 갈석궁을 쌓았으며, 자신이 직접 스승에게 갔다.(스승으로 섬겼다.) (이 때에) 「主運」을 지었다. 그 제후를 유세하여 높은 예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중니(공자)가 진나라, 채나라에서 파리해지고(나물 색, 굶주려 파리해지고)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궁하였던 것과 같음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무왕이 인의로서 주왕을 정벌하고 왕이 되자 백이가 굶주리더라도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은 일과 위나라 영공이 진나라를 치는 법을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지 않은 일, 양나라 혜왕이 모의하여 조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자 맹자가 태왕이 빈 땅을 떠난 것을 말한 이것이 어찌 세속에 아부하고 구차하게 영합하는데 뜻이 있어서 이겠는가! 각진 자루를 지니고 안으로 둥근 구멍에 넣으려 할지라도 들어갈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윤이 솥을 지고(요라서가 되어) 湯이 왕이 되도록 힘쓰게 하였고, 백리해는 수레 아래서 소를 치다가 목공에게 등용되어 패업을 이루게 하였으니 먼저 영합함을 지은 후에 대도로 이끌었다. 추연은 그 말이 비록 상도를 벗어났으나 문득 또한 백리해가 소를 먹이던 일과 이윤이 솥을 짊어졌던 뜻이 있는가?
[一] 索隱按:字林曰「襒音疋結反」。韋昭曰「敷蔑反」。張揖三蒼訓詁云「襒,拂也。謂側而行,以衣襒席為敬,不敢正坐當賓主之禮也」。
[一] 【索隱】 살펴보니 『字林』에 “‘襒’의 음은 ‘疋’과 ‘結’의 反이다.” 하였다. 위소가 말하기를 “‘敷’와 ‘蔑’의 反이다.” 했다. 장읍의 『三蒼訓詁』에 “‘襒’은 ‘拂(털다)’이다. 옆에서 걸어가고, 옷으로 자리를 터는 것으로서 공경을 삼고, 감히 바로 앉는 것은 빈주의 예에 마땅하지 않다.” 했다.
[二] 索隱按:彗,帚也。謂為之埽地,以衣袂擁帚而卻行,恐塵埃之及長者,所以為敬也。
[二] 【索隱】 살펴보니 ‘彗’는 ‘帚(추:빗자루)’이다. 그를 위해 땅을 쓰는 것을 이름이니 옷소매로 빗자루를 잡고 뒤로 물러나는 것은 먼지가 덕망이 있고 경험이 많은 윗사람에게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공경이 된다.
[三] 正義碣石宮在幽州薊縣西三十里寧臺之東。
[三] 【正義】 갈석궁은 유주 계현 서쪽 30리 영대의 동쪽에 있다.
[四] 索隱按:劉向別錄云鄒子書有主運篇。
[四] 【索隱】 살펴보니 『劉向別錄』에 추자의 글에 「主運」 편이 있다.
[五] 索隱按:仲尼、孟子法先王之道,行仁義之化,且菜色困窮;而鄒衍執詭怪營惑諸侯,其見禮重如此,可為長太息哉。
[五] 【索隱】 살펴보니 중니, 맺자는 선왕의 도를 본 받아 仁義의 교화를 행하고, 또한 얼굴색을 나물 색(파리하게)으로 하고, 곤궁함을 당하였으나 추연은 속임과 기이함을 잡고 제후를 경영하고 미혹하게 하여 그 예의 중하게 받음이 이와 같으니 길고 크게 탄식할 만하다.
[六] 索隱今按:孟子「太王去邠」是軻對滕文公語,今云梁惠王謀攻趙,與孟子不同。
[六] 【索隱】 지금 살펴보니 『맹자』의 “태왕이 빈 땅을 떠났다.” 한 것은 이는 맹자가 등나라 문공에게 대답한 말이니 지금 “양나라 혜왕이 모의하여 조나라를 공격한다.” 한 것은 『맹자』와 같지 않다.
[七] 索隱按:方枘是筍也,圜鑿是孔也。謂工人斲木,以方筍而內之圜孔,不可入也。故楚詞云「以方枘而內圜鑿,吾固知其齟齬而不入」是也。謂戰國之時,仲尼、孟軻以仁義干世主,猶方枘圜鑿然。
[七] 【索隱】 살펴보니 ‘방예’는 ‘순(한 쪽 끝을 다른 쪽 구명에 꼿는 부분)’이다. ‘圜鑿’은 ‘공(구멍)이다. 장인이 나무를 깍아 네모난 장부를 만들고 둥근 구멍에 그것을 넣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楚詞」에 “네모난 장부로써 둥근 구멍에 넣으니 내가 진실로 어긋나서 들어가지 않음을 알았다.” 한 것이 이것이다. 전국시대에는 중니(공자)와 맹가(맹자)가 인의로써 세상의 임금에게 (등용할 것을)구하였는데 오히려 네모난 장부를 둥근 구멍에 넣는 것과 같았다는 말이다.
[八] 索隱按:呂氏春秋云「函牛之鼎不可以烹雞」,是牛鼎言衍之術迂大,儻若大用之,是有牛鼎之意。而譙周亦云「觀太史公此論,是其愛奇之甚」。
[八] 【索隱】 살펴보니 『呂氏春秋』에 “소를 담는 솥은 닭을 삶을 수 없다.”하였는데 이 소를 담는 솥은 추연의 학문(방법)이 크고 우활함을 말한 것인데 만약 그를 크게 쓴다면 이는 소를 담는 솥의 뜻이 있는 것이다. 초주가 또한 말하기를 “태사공의 이 논평을 관찰하면 이는 그 기이함을 사랑함이 심한 것이다.” 했다.
自騶衍與齊之稷下先生,[一]如淳于髡、慎到、環淵、[二]接子、[三]田駢、[四]騶奭之徒,[五]各著書言治亂之事,以干世主,豈可勝道哉!
추연으로부터 제나라의 직하선생(직하 땅의 학관에 모인 학자들)인 순우곤, 신도, 환연, 접자, 전병, 추석의 무리 같은 이들이 각기 저서로 다스려짐과 어지러워짐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임금에게 (등용될 것을) 구하였으나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一] 索隱稷下,齊之城門也。或云稷下,山名。謂齊之學士集於稷門之下。
[一] 【索隱】 ‘稷下’는 제나라의 성문이다, 어떤 사람은 “稷下는 산 이름인데 제나라의 학사들이 직문의 아래에 모였던 것을 말한다.” 했다.
[二] 索隱按:劉向別錄「環」作姓也。
[二] 【索隱】 살펴보니 「劉向別錄」에 ‘環’은 ‘姓’이라고 썼다.
[三] 索隱古著書人之稱號。
[三] 【索隱】 옛날 글을 저술한 사람의 칭호이다.
[四] 索隱步堅、步經反二音。
[四] 【索隱】 ‘步’, ‘堅’, ‘步’, ‘經’의 反으로 두 음이다.
[五] 正義慎子十卷,在法家,則戰國時處士。接子二篇。田子二十五篇,齊人,游稷下,號「天口」。接、田二人,道家。騶奭十二篇,陰陽家。
[五] 【正義】 「愼子」 10권은 법가에 있으니 곧 전국시대의 처사이다. 「接子」 2편, 「田子」 는 25편인데 제나라 사람으로 직하에서 노닐었으며, 호를 ‘天口’라 했다. 접, 전 두 사람은 도가이다. 추석 12편은 음양가이다.
淳于髡,齊人也。博聞彊記,學無所主。其諫說,慕晏嬰之為人也,然而承意觀色為務。客有見髡於梁惠王,惠王屏左右,獨坐而再見之,終無言也。惠王怪之,以讓客曰:「子之稱淳于先生,管、晏不及,及見寡人,寡人未有得也。豈寡人不足為言邪?何故哉?」客以謂髡。髡曰:「固也。吾前見王,王志在驅逐;後復見王,王志在音聲:吾是以默然。」客具以報王,王大駭,曰:「嗟乎,淳于先生誠聖人也!前淳于先生之來,人有獻善馬者,寡人未及視,會先生至。後先生之來,人有獻謳者,未及試,亦會先生來。寡人雖屏人,然私心在彼,有之。」[一]後淳于髡見,壹語連三日三夜無倦。惠王欲以卿相位待之,髡因謝去。於是送以安車駕駟,束帛加璧,黃金百鎰。終身不仕。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널리 듣고(학문이 넓고) 잘 기억하였는데 배움에 주된 바가 없었다. 그 군주를 간하고, 유세하는 것은 안영의 사람됨을 본받았는데 (군주의) 뜻을 계승하고 안색을 관찰하는 것에 힘썼다. 객이(어떤 손님이) 양나라 혜왕을 뵙게 함이 있었는데 혜왕이 좌우 측근을 물리치고 홀로 앉아 두 번 보았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다. 혜왕이 괴이하게 여겨 객(손님)을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는 순우(곤)선생의 인물됨이 관중과 안영이 미치지 못할 것이라 칭찬하였는데 과인을 만남에 이르러도 과인이 아직 얻음이 있지 않았다. 과인이 말하기에 부족해서인가? 무슨 이유 때문인가?” 했다. 객이 순우곤에게 말하였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진실입니다. 내가 전에 왕을 뵈었는데 왕의 뜻이 달리는 말에 있었고, 뒤에 다시 왕을 뵈었을 때는 왕의 뜻이 음성(음악)에 있었다. 내가 이 때문에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했다. 객이 갖추어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아 순우선생은 진실로 성인이구나! 앞서 순우선생이 왔을 때 사람 중에 좋은 말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과인이 아직 보지 못한 때에 선생이 이르러 만났다. 뒤에 선생이 왔을 때는 사람들 중에 노래하는 자를 바친 자가 있었는데 시험하지 않은 때에 선생이 와서 만났다. 과인이 비록 바람을 물리쳤으나 사사로운 마음이 거기에 있어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했다. 후에 순우곤이 뵙고 한 번 말하기를 3일 낮 밤을 말하여도 싫어함이 없었다. 혜왕이 경상의 지위로써 대우하고자 하였으나 순우곤은 사양하고 떠났다. 이에 편안한 수레에 네 마리 말을 멍에지우고, 비단과 구슬(옥), 황금 백일을 주어 보냈다. (순우곤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
[一] 索隱謂私心實在彼馬與謳也。有之,謂我實有此二事也。
[一] 【索隱】 사사로운(나의) 마음은 실제 저 말과 노래에 있다는 말이다. ‘有之 ’는 나에게 실제로 이 두 가지 일이 있었다.는 말이다.
慎到,趙人。田駢、接子,齊人。環淵,楚人。皆學黃老道德之術,因發明序其指意。故慎到著十二論,[一]環淵著上下篇,而田駢、接子皆有所論焉。
신도는 조나라 사람이다. 전병, 접자는 제나라 사람이다.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다. 모두 황노와 도덕의 학문(방법)을 배워 취지를 깨달아서 밝히고 서술하였다. 그러므로 신도는 12론을 저술하였고, 환연은 상하편을 저술하고, 전병과 접자도 모두 논한 것이 있다.
[一] 集解徐廣曰:「今慎子,劉向所定,有四十一篇。」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지금 「신자」는 유향이 정한 것인데 41편이 있다.” 했다.
騶奭者,齊諸騶子,亦頗采騶衍之術以紀文。於是齊王嘉之,自如淳于髡以下,皆命曰列大夫,為開第康莊之衢,[一]高門大屋,尊寵之。覽天下諸侯賓客,言齊能致天下賢士也。
추석은 제나라 여러 추자 가운데 한 명인데 또한 자못 추연의 학문(방법)을 터득하여 글로 기록하였다. 이에 제나라 왕이 좋게 여겨서 순우곤 이하로부터 모두 명하여 대부에 반열하고 대로가 있는 거리에 집을 열게(짓게) 하고 높은 문과 큰 집에 살게 하고 높이고 총애하였다. 천하 제후들에게 빈객을 보여주면서 제나라에 천하의 어진 선비들이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었다.(자랑하였다.)
[一] 集解爾雅曰:「四達謂之衢,五達謂之康,六達謂之莊。」
[一] 【集解】 『詩經』 이아편에 “사방으로 도달(통)하는 것은 ‘衢’라 하고, 다섯 방향으로 도달(통)하는 것을 ‘康’이라 하며, 6방향으로 도달(통)하는 곳을 ‘莊’이라 한다, 했다.”
荀卿,趙人。[一]年五十始來游學於齊。騶衍之術迂大而閎辯;奭也文具難施;淳于髡久與處,時有得善言。故齊人頌曰:「談天衍,雕龍奭,炙轂[二]過髡。」[三]田駢之屬皆已死齊襄王時,[四]而荀卿最為老師。齊尚脩列大夫之缺,而荀卿三為祭酒焉[五]。齊人或讒荀卿,荀卿乃適楚,而春申君以為蘭陵令。[六]春申君死而荀卿廢,因家蘭陵。李斯嘗為弟子,已而相秦。荀卿嫉濁世之政,亡國亂君相屬,不遂大道而營於巫祝,信禨祥,鄙儒小拘,如莊周等又猾稽亂俗,於是推儒、墨、道德之行事興壞,序列著數萬言而卒。因葬蘭陵
순경은 조나라 사람이다. 나이 50세에 처음으로 제나라에 와서 노닐며 배웠다. 추연의 학문(방법)은 우활하고 크고, 말을 넓게 하였으며, 추석은 글이 모두 갖추어졌으나 시행하기 어려웠다. 순우관과 오래도록 함께 살아 때로 좋은 말을 얻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제나라 사람들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하늘을 말한 것은 추연이요, 용을 새긴 것은 추석이요, 지혜가 다하지 않는 자는 순우곤이다.” 했다. 전병의 등속이 모두 죽고 난 후인 제나라 양왕 때는 순경이 가장 늙은 스승이었다. 제나라가 여전히 열대부의 빠짐을 채워 넣었는데 순경은 3번이나 제주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순경을 참소하자 순경은 이에 초나라에 가니 춘신군이 난릉의 령을 삼았다. 춘신군이 죽자 순경이 면직되었는데 계속 난릉에 살았다. 이사가 일찍이 제자가 되었는데 이윽고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더러운 세상의 정사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어지러운 군주가 서로 이어 마침내 대도를 따르지 않고 무당의 축원을 경영하고, 조짐을 믿고, 비루한 儒者가 작은 것에 구애되는 것과 장주 등속이 또한 상고함을 매끄럽게 하고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였다, 이에 유, 묵, 도덕의 행사와 일어나고 무너짐을 차례로 나열하여 수만의 말을 드러내고 죽었다. 그대로 난릉에서 장사하였다.
[一] 索隱名況。卿者,時人相尊而號為卿也。仕齊為祭酒,仕楚為蘭陵令。後亦謂之孫卿子者,避漢宣帝諱改也。
[一] 【索隱】 이름은 ‘況’이다. ‘卿’은 그 때 사람들이 서로 높여서 ‘卿’이라 불렀다. 제나라에서 벼슬하여 제주가 되었고, 초나라에서 벼슬하여 난릉 령이 되었다. 뒤에 또한 그를 일러 손경자라고 한 것은 한나라 선제의 이름을 피하여 고친 것이다.
[二] 集解徐廣曰:「一作『亂諣』。」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亂諣’라고도 쓴다.
[三] 集解劉向別錄曰:「騶衍之所言五德終始,天地廣大,盡言天事,故曰『談天』。騶奭脩衍之文,飾若雕鏤龍文,故曰『雕龍』。」別錄曰「過」字作「輠」。輠者,車之盛膏器也。炙之雖盡,猶有餘流者。言淳于髡智不盡如炙輠也。左思齊都賦注曰「言其多智難盡,如炙膏過之有潤澤也」。索隱按:劉向別錄「過」字作「輠」。輠,車之盛膏器也。炙之雖盡,猶有餘津,言髡智不盡如炙輠也。按:劉氏云「轂,衍字也」。今按:文稱「炙轂過」,則過是器名,音如字讀,謂盛脂之器名過。「過」與「鍋」字相近,蓋即脂器也。轂即車轂,過為潤轂之物,則「轂」非衍字矣。
[三] 【集解】 『劉向別錄』에 “추연이 말한 바 5덕의 끝과 시작은 하늘과 당이 광대하며, 天事를 모두 말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을 말하였다.’ 한 것이다. 추석이 추연의 글을 익혀서 마치 용 무늬를 새기고 누르는 것처럼 꾸몄으므로 ‘용을 새겼다.’ 한 것이다.” 『劉向別錄』에 “‘過 ’자는 ‘輠(기름통 과)’라 썼다. ‘輠’는 수레에 기름을 담는 그릇이다. 그것을 굽기를 비록 다하였으나 오히려 남은 흐름이 있는 것이니 순우곤의 지혜가 마치 기름통을 굽는 것처럼 다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좌사의 「제도부」 주에 ‘말로 그 많은 지혜를 다하기 어려우니 마치 기름통을 구움의 매끄러움이 있네’ 하였다. 【索隱】 살펴보니 『劉向別錄』에 ‘過’자는 ‘輠’라 썼다. ‘輠’는 수레의 기름을 담는 그릇이다. 그것을 굽기를 비록 다하여도 오히려 남은 진액이 있으니 순우곤의 지혜가 다하지 않음이 마치 수레 기름통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살펴보니 유씨가 말하기를 “轂은 衍字이다.” 지금 살펴보니 글에 ‘炙轂過’라고 일컬은 것에서 ‘過’는 그릇 이름이고, 음은 본래 글자와 같으며, 기름을 담는 그릇의 이름을 ‘過’라 한다. ‘過’와 ‘鐹’는 글자가 서로 비슷하고 기름을 담는 그릇이다. ‘轂’은 곧 수레바퀴 통이고, ‘過’는 바퀴통을 매끄럽게 하는 물건이니 곧 ‘轂’는 연자가 아니다. 곡
[四] 索隱按襄王名法章,湣王子,莒人所立者。
[四] 【索隱】 살펴보니 양왕의 이름은 법장이니 湣(혼)王의 아들로 莒 땅 사람들이 세운 자이다.
[五] 索隱按:禮食必祭先,飲酒亦然,必以席中之尊者一人當祭耳,後因以為官名,故吳王濞為劉氏祭酒是也。而卿三為祭酒者,謂荀卿出入前後三度處列大夫康莊之位,而皆為其所尊,故云「三為祭酒」也。
[五] 【索隱】 살펴보니 예식에는 반드시 제사를 우선하는데 술 마시는 것이 또한 그러해서 반드시 자리 가운데의 존경 받는 자 한 사람이 제사를 담당하였는데 후에 이로 인하여 관직의 이름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오나라 왕 비가 유씨를 제주로 삼았다 한 것이 이것이다. 순경이 세 번 제주를 하였다는 것은 순경이 나고 드는 것이 전 후 3번에 걸쳐 열대부와 강장의 지위에 있었고, 모두 그 존경받는 바가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번 제주가 되었다.’ 한 것이다.
[六] 正義蘭陵,縣,屬東海郡,今沂州承縣有蘭陵山。
[六] 【正義】 난릉은 현이니 동해군에 속하니 지금의 주승현에 난릉산이 있다.
而趙亦有公孫龍[一]為堅白同異之辯,[二]劇子之言;[三]魏有李悝,盡地力之教;[四]楚有尸子、長盧;[五]阿之吁子焉。[六]自如孟子至于吁子,世多有其書,故不論其傳云。
조나라가 또한 공손룡이 있어 ‘堅白同異’의 辯을 하였고, 극자의 말이 있었고, 위나라에는 이리가 地力을 다하는 가르침이 있었고, 초나라에는 시자, 장노가 있었으며 아 땅에는 우자라는 자가 있었다. 세상에 그 글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전함을 논하지 않는다.
[一] 索隱按:即仲尼弟子名也。此云趙人,弟子傳作衛人,鄭玄云楚人,各不能知其真也。又下文云「並孔子同時,或曰在其後」,所以知非別人也。
[一] 【索隱】 살펴보니 곧 중니(공자) 제자의 이름이다. 여기서는 조나라 사람이라 하지만 제자 전에서는 “위나라 사람”이 썼고, 정현은 “초나라 사람”이라 하여 각기 그 찬된 것을 알 수 없다. 또 아래 글에 “나란히 공자와 같은 시대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 후에 있었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二] 集解晉太康地記云:「汝南西平縣有龍淵水可用淬刀劍,特堅利,故有堅白之論,云『黃,所以為堅也;白,所以為利也』。或辯之曰『白,所以為不堅;黃,所以為不利』。」 正義藝文志公孫龍子十四篇,顏師古云即為堅白之辯。按平原君傳,騶衍同時。括地志云「西平縣,豫州西北百四十里,有龍淵水」也。
[二] 【集解】 진나라 『太康地記』에 “여남 서쪽 평현에 용연수가 있는데 칼과 검을 담금질하는데 사용하면 특히 굳고 예리해지기 때문에 견백의 논이 있었다.” 했다. 말하기를 “‘黃’은 굳게 되는 이유이고, ‘白’은 예리하게 되는 까닭이다.” 했다. 어떤 사람이 변호하여 말하기를 “‘白’은 견고하지 못함을 위한 까닭이고, ‘黃’은 날카롭지 못함을 위한 까닭”이라 하였다. 【正義】 「藝文志」에 공손룡자는 14편인데 안사고는 “곧 견백지 변이라 한다.” 했다. 살펴보니 평원군전에서는 추연과 같은 때라 했다. 『括地志』에 “서평현은 예주 서북쪽 140리에 용연수가 있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按應劭氏姓注直云『處子』也。」 索隱按:著書之人姓劇氏而稱子也,前史不記其名也,故趙有劇孟及劇辛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응소의 씨성주를 살펴보니 단지 ‘處子’라고 하였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글을 쓴 사람의 성이 극씨이고, ‘자’를 일컬었으며, 앞의 역사서에서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나라에는 극맹과 극신이 있다. 한 것이다.
[四] 正義藝文志:「李子三十二篇。李悝相魏文侯,富國彊兵。」
[四] 【正義】 「藝文志」에 “이자는 32편이다. 이리는 위나라 문후를 도와 부국강병을 하였다.”고 했다.
[五] 集解劉向別錄曰:「楚有尸子,疑謂其在蜀。今按尸子書,晉人也,名佼,秦相衛鞅客也。衛鞅商君謀事畫計,立法理民,未嘗不與佼規之也。商君被刑,佼恐并誅,乃亡逃入蜀。自為造此二十篇書,凡六萬餘言。卒,因葬蜀。」 索隱按:尸子名佼,音絞,晉人,事具別錄。長盧,未詳。正義長盧九篇,楚人。
[五] 【集解】 『劉向別錄』에 “초나라에는 시자가 있다.” 하니 아마도 촉에 있음을 이른 듯하다. 지금 시자의 글을 살펴보니 진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교’이고, 진나라 재상 위앙의 객이다. 위앙 상군이 일을 도모하여 계획을 세우고 법을 만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일을 일찍이 교와 함께 살피지 않음이 없었다. 상군이 형벌을 받자 교가 함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도망하여 촉에 들어갔다. 스스로 이 20편의 글을 지었는데 모두 6만여언 이었다. 죽자 촉에 장례하였다. 【索隱】 살펴보니 시자의 이름은 교인데 음은 ‘絞’이다. 진나라 사람으로 일은 별록에 갖추어져 있다. ‘長盧’는 자세하지 않다. 【正義】 장노는 9편이니 초나라 사람이다.
[六] 集解徐廣曰:「阿者,今之東阿。」 索隱阿,齊之東阿也。吁音羋。別錄作「羋子」,今「吁」亦如字也。正義按:東齊州也。藝文志云「吁子十八篇,名嬰,齊人,七十子之後」。顏師古云音弭。按:是齊人,阿又屬齊,恐顏公誤也。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阿’는 지금의 동아이다. 【索隱】 ‘아’는 제나라의 동쪽 ‘아’이다. ‘吁’의 음은 ‘羋(미)’이다. 별록에는 ‘羋(미)子’라고 썼다. 지금 ‘吁’는 또한 같은 자이다. 【正義】 살펴보니 동쪽의 제주이다. 「예문지」에 우자는 18편이니” 우자는 18편인데 이름은 영으로 제나라 사람이니 70자의 후예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음은 弭’이다. 살펴보니 이는 제나라 사람으로 ‘阿’가 또한 제나라에 속하니 아마도 안공(안사고)이 잘못 안듯하다.
蓋墨翟,宋之大夫,善守禦,為節用。[一]或曰並孔子時,或曰在其後。[二]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이니 지키고 막기를 잘하고, 쓰임을 절약하였다. 어던 사람은 “공자와 같은 때”라 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시대) 이후에 있었다.”고 말한다.
[一] 集解墨子曰:「公輸般為雲梯之械成,將以攻宋。墨子聞之,至於郢,見公輸般。墨子解帶為城,以牒為械。公輸般九設攻城之機變,墨子九距之。公輸般之攻械盡,墨子之守固有餘。公輸般詘,而言曰:『吾知所以距子矣,吾不言。』墨子亦曰:『吾知子之所以距我者,吾不言。』楚王問其故。墨子曰:『公輸子之意不過欲殺臣,殺臣,宋莫能守,可攻也。然臣之弟子禽滑釐等三百人已持臣守國之器在宋城上而待楚寇矣,雖殺臣,不能絕也。』楚王曰:『善哉,吾請無攻宋城矣!』」 索隱注「為雲梯之械」者,按梯者,構木瞰高也;雲者,言其昇高入雲,故曰雲梯。械者,器也。謂攻城之樓櫓也。注「墨子解帶為城」者,謂墨子為術,解身上革帶以為城也。注「以牒為械」者,按牒者,小木札也;械者,樓櫓等也。注「公輸般之攻械盡」者,劉氏云「械謂飛梯、撞車、飛石車弩之具」。詘音丘勿反。謂般技已盡,墨守有餘。禽滑釐者,墨子弟子之姓字也。釐音里。
[一] 【集解】 묵자가 말하기를 “공수반이 운제의 기계를 만들어서 장차 송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묵자가 그것을 듣고 영 땅에 이르러 공수반을 뵈었다. 묵자가 대를 풀어 성을 삼고, 첩으로서 기계를 삼았다. 공수반이 9번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변경하여 설치하였는데 묵자가 9번 막았다. 공수반의 공격하는 기계는 다하였는데 묵자의 지킴이 견고하고 남음이 있었다. 공수반이 굽히고(복종하고)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막을 방법이 있지만 나는 말하지 않겠다.’했다. 묵자가 도한 말하기를 ‘나는 그대가 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했다. 초나라 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 묵자가 말하기를 ‘공수반의 뜻은 신을 죽이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신을 죽이면 송은 지킬 수 없으니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제자 금활이 등 300백명이 이미 신의 나라를 지키는 기구를 지니고 송나라 성위에 있으면서 초나라의 도적을 기다리고 있으니 비록 신을 죽이더라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초나라 왕이 말하기를 ‘훌륭하다. 내가 송나라 성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청할 것이다!’ 했다. 【索隱】 注 “‘為雲梯之械(운제의 기계를 만든다.)’에서 ‘梯’는 나무를 엮어 높은 곳을 멀리 보는 것이고, ‘雲’은 그 높은 곳에 올라 구름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雲梯’라 한 것이다. ‘械’는 기구이니 성을 공격하는 망루를 말한다.” 注 “‘墨子解帶為城(묵자가 대를 풀어 성을 삼았다.)’에서 묵자가 방법을 삼은 것은 자신의 위 가죽혁대를 풀어서 성을 삼았다. 는 것을 말한다. 注 ‘以牒為械(牒으로 기계를 삼았다.)’에서 ‘牒’은 작은 나무 조각이고, ‘械’는 망루 등이다. 注 ‘公輸般之攻械盡(공수반의 공격하는 기계가 다하였다.)’는 유씨가 말하기를 ‘械는 飛梯, 撞車, 飛石車, 弩 등의 기구이다.’ 했다. ‘詘’의 음은 ‘丘’와 ‘勿’의 反이다. 공손반의 기술이 이미 다하였음에도 묵자의 지킴은 남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금활리는 묵자 제자의 성과 자이다. ‘釐’의 음은 ‘里’이다.
[二] 索隱按:別錄云「今按墨子書有文子,文子即子夏之弟子,問於墨子」。如此,則墨子在七十子之後也。
[二] 【索隱】 살펴보니 『別錄』에 “지금 묵자의 글을 살펴보니 文子가 있는데 문자는 자하의 제자로 묵자에게 물었다.” 하였다. 이 같으면 곧 묵자는 70자(공자의 제자)의 후대에 있었다.
【索隱述贊】六國之末,戰勝相雄。軻游齊、魏,其說不通。退而著述,稱吾道窮。蘭陵事楚,騶衍談空。康莊雖列,莫見收功。
【索隱述贊】 6국 시대 말에 싸워 이기면 서로 7웅이 되었고 맹자는 제나라와 위나라에 노닐었으나 그 유세가 통하지 않았다. 물러나 저술하면서 나의 도가 다하였다. 고 말하였다. 난릉에 가 초나라를 섬긴 추연은 빈 것을 말하였다. 큰길에 (호화로운 저택이)비록 열을 지었으되 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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