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七十五
孟嘗君列傳第十五
孟嘗君名文,姓田氏。文之父曰靖郭君田嬰。田嬰者,齊威王少子而齊宣王庶弟也。[一]田嬰自威王時任職用事,與成侯鄒忌及田忌將而救韓伐魏。成侯與田忌爭寵,成侯賣田忌。田忌懼,襲齊之邊邑,不勝,亡走。會威王卒,宣王立,知成侯賣田忌,乃復召田忌以為將。宣王二年,田忌與孫臏、田嬰俱伐魏,敗之馬陵,虜魏太子申而殺魏將龐涓。[二]宣王七年,田嬰使於韓、魏,韓、魏服於齊。嬰與韓昭侯、魏惠王會齊宣王東阿南,[三]盟而去。[四]明年,復與梁惠王會甄。[五]是歲,梁惠王卒。宣王九年,田嬰相齊。齊宣王與魏襄王會徐州而相王也。[六]楚威王聞之,怒田嬰。明年,楚伐敗齊師於徐州,而使人逐田嬰。田嬰使張丑說楚威王,威王乃止。田嬰相齊十一年,宣王卒,湣王即位。即位三年,而封田嬰於薛。[七]
맹상군의 이름은 문이고, 성은 전씨이다. 문의 아버지는 정곽군 전영이다. 전영은 제나라 위왕의 막내아들이고 제나라 선왕의 庶弟이다. 전영은 위왕 때부터 직책을 맡아 정사에 참여하고, 성후 추기, 전기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를 쳤다. 성후 추기와 전기가 왕의 사랑을 다투었는데 성후 추기가 전기를 배신하니 전기가 두려워하여 제나라의 변경 읍을 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하여 달아났다. 위왕이 죽고 선왕이 즉위하여 성후 추기가 전기를 배신한 것을 알고 이에 다시 전기를 불러서 장군으로 삼았다. 선왕 2년 전기와 손빈, 전영이 함께 위나라를 쳤는데 마릉에서 (위나라를)무너뜨리고 위나라 태자 신을 포로로 잡고 위나라 장군 방연을 죽였다. 선왕 7년 전영이 한나라, 위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한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에 복종하였다. 전영과 한나라 소후, 위나라 혜왕이 제나라 선왕을 동아 남쪽에서 만나 맹약하고 갔다. 다음해 다시 양아라 혜왕과 견 땅에서 만났다. 이 해 양나라 혜왕이 죽었다. 선왕 9년 전영이 제나라 재상이 되었다. 제나라 선왕과 위나라 양왕이 서주에서 만나 서로 왕 노릇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초나라 위왕이 그것을 듣고 전영에게 노하였다. 다음해 초나라가 서주에서 제나라 군대를 쳐서 무너뜨리고 사람을 시켜 전영을 쫓아내려했다. 전영이 장축으로 하여금 초나라 위왕을 설득하니 위왕이 이에 그쳤다. 전영이 제나라 재상이 된지 11년 만에 선왕이 죽고 민왕이 즉위하였다. 즉위한지 3년 만에 전영을 설 땅에 봉하였다.
[一] 索隱按:戰國策及諸書並無此言,蓋諸田之別子也,故戰國策每稱「嬰子」、「盼子」,高誘注云「田盼」、「田嬰」也。王劭又按:戰國策云「齊貌辯謂宣王曰:『王方為太子時,辯謂靖郭君,不若廢太子,更立郊師。靖郭君不忍。』宣王太息曰:『寡人少,殊不知。』」以此言之,嬰非宣王弟明也。
[一] 【索隱】 살펴보니 『戰國策』과 여러 글에 나란히 이 말이 없으니 대개 여러 전씨의 다른 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戰國策』에 매번 ‘영자’, ‘반자’라 일컬었고, 고유의 注에 ‘전방’, ‘전영’이라 했다. 왕소가 또 살펴보니 『戰國策』에 ‘제나라의 모변이 선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왕께서 막 태자가 되었을 때 모변(제가)이 정곽군에게 태자를 폐하고 다시 교사를 세우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는데 정곽군이 차마 하지 못하였습니다.’ 했다. 선왕이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과인이 어려서 달리 알지 못합니다,’ 했다. 이를 가지고 말하면 영은 선왕의 동생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二] 索隱紀年當梁惠王二十八年,至三十六年改為後元也。
[二] 【索隱】 「기년」에는 양나라 혜왕 28년에 해당하는데 36년에 이르러 연호를 고쳐서 후원이라 했다.
[三] 正義東阿,濟州縣也。
[三] 【正義】 동아는 제주현이다.
[四] 索隱紀年當惠王之後元十一年。彼文作「平阿」。又云「十三年會齊威王于鄄」,與此明年齊宣王與梁惠王會鄄文同。但齊之威宣二王,文舛互並不同。
[四] 【索隱】 「기년」에는 혜왕 11년에 해당한다. 그 글을 ‘평아’라고 썼다. 또 말하기를 ‘13년에 견에서 제나라 위왕을 만났고, 이 다음해 제나라 선왕과 양 나라 혜왕이 견에서 만나났다는 것과 글이 같다. 다만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두 왕은 글이 어긋나 같지 않다.
[五] 集解音絹。
[五] 【集解】 음은 ‘絹’이다.
[六] 正義紀年云梁惠王三十年,下邳遷于薛,改名徐州。
[六] 【正義】 「기년」에 “양나라 혜왕 30년에 하비에서 설 땅으로 옮기고 이름을 고쳐 서주라 했다.” 한다.
[七] 索隱紀年以為梁惠王後元十三年四月,齊威王封田嬰于薛。十月,齊城薛。十四年,薛子嬰來朝。十五年,齊威王薨,嬰初封彭城。皆與此文異也。正義薛故城在今徐州滕縣南四十四里也。
[七] 【索隱】 「기년」에 “양나라 혜왕 13년 4월 제나라 위왕이 전영을 설 땅에 봉하였다. 10월에 제나라가 설 땅에 성을 쌓았고, 14년에 설 땅의 자영이 와서 조회 하였다. 15년 제나라 위왕이 죽었고, 전영이 처음 팽성에 봉해졌다.”하는데 모두 이 글과는 다르다. 【正義】 ‘설’의 옛 성은 지금의 서주 등현 남쪽 44리에 있다.
初,田嬰有子四十餘人。其賤妾有子名文,文以五月五日生。嬰告其母曰:「勿舉也。」其母竊舉生之。[一]及長,其母因兄弟而見其子文於田嬰。田嬰怒其母曰:「吾令若去此子,而敢生之,何也?」文頓首,因曰:「君所以不舉五月子者,何故?」嬰曰:「五月子者,長與戶齊,將不利其父母。」[二]文曰:「人生受命於天乎?將受命於戶邪?」嬰默然。文曰:「必受命於天,君何憂焉。必受命於戶,則可高其戶耳,誰能至者!」嬰曰:「子休矣。」
처음 전영은 자식 40여명을 두었다. 그의 천첩이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을 전문이라 하였다. 전문은 5월 5일에 태어났다. 전영이 그 (아이의, 전문의)어미에게 말하기를 “기르지 말라.” 했는데 그 어미가 몰래 길러 살아났다. 자람에 이르러 그 어미가 형제를 통하여 그 아들 전문을 전영에게 보였다. 전영이 노하여 그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아이를 버리라 하였는데 감히 살린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전문이 머리를 조아리고 (물음으로)인하여 말하기를 “군께서(아버지께서) 5월에 태어난 아이를 거두어 기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니까?” 했다. 전영이 말하기를 “5월에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문(戶)과 같아지면 장차 그 부모에게 이롭지 않기 때문이다.” 했다. 전문이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하늘에서 명을 받은 것입니까? 장차 문(戶)에서 명을 받은 것입니까?” 하니 전영이 침묵하였다. 전문이 말하기를 “반드시 하늘에서 명을 받았다면 군(아버지)께서는 무엇을 근심합니까? 반드시 문(戶)에서 명을 받았다면 곧 그 문을 높일 수 있습니다. 누가 닿을 것인가!” 했다. 전영이 말하기를 “너는 그만하라.”했다.
[一] 索隱按:上「舉」謂初誕而舉之,下「舉」謂浴而乳之。生謂長養之也。
[一] 【索隱】 살펴보니 위의 ‘擧’는 처음 태어나서 그를 거두는 것이고, 아래의 ‘擧’는 목욕시키고 젖 먹이는 것을 말한다. ‘생’은 자라게 하고 기르는 것이다.
[二] 索隱按:風俗通云「俗說五月五日生子,男害父,女害母」。
[二] 【索隱】 살펴보니 『風俗通』에 “속설에 5월 5일에 자식을 낳으면 남자는 아비를 해치고, 딸은 어미를 해친다.” 했다.
久之,文承閒問其父嬰曰:「子之子為何?」曰:「為孫。」「孫之孫為何?」曰:「為玄孫。」「玄孫之孫為何?」曰:「不能知也。」[一]文曰:「君用事相齊,至今三王矣,齊不加廣而君私家富累萬金,門下不見一賢者。文聞將門必有將,相門必有相。今君後宮蹈綺縠而士不得(短)[裋]褐,[二]僕妾餘粱肉而士不厭糟糠。今君又尚厚積餘藏,欲以遺所不知何人,[三]而忘公家之事日損,文竊怪之。」於是嬰迺禮文,使主家待賓客。賓客日進,名聲聞於諸侯。諸侯皆使人請薛公田嬰以文為太子,嬰許之。嬰卒,謚為靖郭君。[四]而文果代立於薛,是為孟嘗君。
오래 후 전문이 한가한 때에 그 아버지 전영에게 묻기를 “아들의 아들을 무엇이라 합니까?” 하니 전영이 “손자”라 한다. 했다. 전문이 “손자의 손자를 무엇이라 합니까?” 하니 전영이 “현손이라 한다.” 했다. 전문이 “현손의 손자를 무엇이라 합니까?”하니 전영이 “알지 못한다.” 했다. 전문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정사에 등용되어 제나라 재상이 된지 지금 세 명의 왕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제나라는 더하거나 넓혀지지 않았고, 아버지의 私家에서 富는 萬金을 쌓았으며, 문하에는 하명의 현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전문)가 들으니 장수의 가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가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 합니다. 지금 아버지의 후궁은 비단을 밟고 다니지만 선비는 짧은 바지와 베옷도 얻지 못하고 있으며, 종과 첩들은 정제된 곡식과 고기를 남기지만 선비들은 지게미와 쌀겨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지금 아버지께서는 또한 아직 두터이 쌓고 남은 것을 저장하여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남겨 주고자 하면서도 공가의 일이 날로 덜어지는 것을 잊으니 제가(전문) 괴이하게 여깁니다.” 했다. 이에 전영이 비로소 전문을 예로 대우하고 집의 빈객을 대접하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빈객은 날로 나아가고 명성이 제후에게 들렸다. 제후가 모두 사람을 시켜 설공 전영에게 전문을 태자로 삼을 것을 청하니 전영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전영이 죽자 시호를 정곽군이라 했다. 전문이 과연 (아버지를)대신하여 설 땅에서 자리에 오르니 이가 맹상군이 된다.
[一] 索隱按:爾雅云「玄孫之子為來孫,來孫之子為昆孫,昆孫之子為仍孫,仍孫之子為雲孫」。又有耳孫,亦是玄孫之子,不同也。
[一] 【索隱】 살펴보니 『詩經』 이아 편에 “현손의 아들을 내손이라 하고, 내손의 아들을 곤손이라 하고, 곤손의 아들을 잉손이라 하고, 잉손의 아들을 운손이라 한다.” 하고, 또 ‘이손’이 있는데 또한 현손의 아들이라 하니 같지 않다.
[二] 索隱(短)[裋]亦音豎。豎褐,謂褐衣而豎裁之,以其省而便事也。
[二] 【索隱】 ‘裋’가 또 음이 수이다. ‘수갈’은 갈옷을 천하게 마름질 한 것이니 그 살피는 것으로써 일을 편하게 한 것이다.
[三] 索隱遺音唯季反。猶言不知欲遺與何人也。
[三] 【索隱】 ‘遺’의 음은 “‘唯’와 ‘季’의 反이다. 남겨 주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四] 集解皇覽曰:「靖郭君冢在魯國薛城中東南陬。」 索隱按:謂死後別號之曰「靖郭」耳,則「靖郭」或封邑號,故漢齊王舅父駟鈞封靖郭侯是也。陬音鄒,亦音緅。陬者,城隅也。
[四] 【集解】 『황람』에 “정곽군의 무덤은 노나라 설성 안 동남쪽 귀퉁이에 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죽은 후에 별호를 ‘정곽’이라 했을 뿐이니 곧 ‘정곽’은 혹 봉읍호일 것이다. 그러므로 漢나라 제왕의 장인 사균을 정곽후에 봉했다. 한 것이 이것이다. ‘陬’의 음은 ‘鄒’이고, 또 음이 ‘緅’이다. ‘陬’는 성의 귀퉁이 이다.
孟嘗君在薛,招致諸侯賓客及亡人有罪者,皆歸孟嘗君。孟嘗君舍業厚遇之,[一]以故傾天下之士。食客數千人,無貴賤一與文等。孟嘗君待客坐語,而屏風後常有侍史,主記君所與客語,問親戚居處。客去,孟嘗君已使使存問,獻遺其親戚。孟嘗君曾待客夜食,有一人蔽火光。客怒,以飯不等,輟食辭去。孟嘗君起,自持其飯比之。客慚,自剄。士以此多歸孟嘗君。孟嘗君客無所擇,皆善遇之。人人各自以為孟嘗君親己。
맹상군이 설 땅에 있을 때 제후, 빈객과 죄 짓고 도망한 자 등을 불렀는데 모두 맹상군에게 왔다. 맹상군이 그 재물을 써서 그들을 잘 대우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식객이 수천 명이었는데 귀천 없이 자신과 등급을 한가지로 하였다. 맹상군이 객을 모시고 앉아 얘기할 때는 병풍 뒤에 항상 侍史가 있어서 주인이 객과 말한 바와 친척이 살고 있는 곳을 물어 기록하게 하였다. 객이 돌아가고 나면 맹상군은 사신을 보내 안부를 묻고 그 친척에게 선물을 주었다. 맹상군이 일찍이 객을 모시고 밤에 밥을 먹는데 한 사람이 있어 불빛을 가렸다. 객이 밥이 균등하지 않다하여 크게 노하여 밥을 거두고 하직하고는 떠났다. 맹상군이 일어나 스스로 그 밥을 가지고 비교하였다. 객이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목메었다. 선비들이 이로써 많이 맹상군에게 돌아갔다. 맹상군은 객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잘 대우하였다. 사람들은 각각 스스로 맹상군이 자기와 친하다(가깝다)고 여겼다.
[一] 索隱按:舍業者,拾棄其家產而厚事賓客也。劉氏云「舍音赦。謂為之築舍立居業也」。
[一] 【索隱】 살펴보니 ‘舍業’은 그 집안의 産物을(재물을)거두어 써서 빈객을 두터이 섬기는 것이다. 유씨가 말하기를 “‘舍’의 음은 ‘赦’이다. 그들을 위해 집을 짓고 (각자의) 業(학문 등 하는 일?)에 있게 하였다.
秦昭王聞其賢,乃先使涇陽君為質於齊,以求見孟嘗君。孟嘗君將入秦,賓客莫欲其行,諫,不聽。蘇代謂曰:「今旦代從外來,見木禺人與土禺人相與語。[一]木禺人曰:『天雨,子將敗矣。』土禺人曰:『我生於土,敗則歸土。今天雨,流子而行,未知所止息也。』今秦,虎狼之國也,而君欲往,如有不得還,君得無為土禺人所笑乎?」孟嘗君乃止。
진나라 소왕이 그 현명함(어짐)을 듣고 이에 먼저 경양군으로 하여금 제나라에 인질이 되게 하고 맹상군을 만나기를 구하였다. 맹상군이 장차 진나라에 들어가려는데 빈객들은 (맹상군이 진나라에)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아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소대가 (맹산군에게) 말하기를 “오늘 아침에 대가(제가, 내가) 밖으로부터 오다가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와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서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대는 무너질 것이다.’ 하니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가 말하기를 ‘나는 흙에서 태어났으니 무너지면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하늘에서 비가 내려 그대를 흘러가게 하면 그쳐 머무는 곳을 알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지금(오늘의) 진나라는 호랑이와 승냥이의 나라입니다. 맹상군께서 가고자 하다가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상군께서는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의 비웃음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했다. 맹상군이 이에 그만두었다.(그쳤다.)
[一] 索隱音偶,又音寓。謂以土木為之偶,類於人也。蘇代以土偶比涇陽君,木偶比孟嘗君也。
[一] 【索隱】 음은 ‘偶’이며, 또 ‘寓’이다. 흙과 나무로 허수아비를 만드는데 사람과 비슷함을 말한다. 소대는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경양군에 비하고,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맹상군에 비하였다.
齊湣王二十五年,復卒使孟嘗君入秦,昭王即以孟嘗君為秦相。人或說秦昭王曰:「孟嘗君賢,而又齊族也,今相秦,必先齊而後秦,秦其危矣。」於是秦昭王乃止。囚孟嘗君,謀欲殺之。孟嘗君使人抵昭王幸姬求解。[一]幸姬曰:「妾願得君狐白裘。」[二]此時孟嘗君有一狐白裘,直千金,天下無雙,入秦獻之昭王,更無他裘。孟嘗君患之,遍問客,莫能對。最下坐有能為狗盜者,曰:「臣能得狐白裘。」乃夜為狗,以入秦宮臧中,[三]取所獻狐白裘至,以獻秦王幸姬。幸姬為言昭王,昭王釋孟嘗君。孟嘗君得出,即馳去,更封傳,變名姓以出關。[四]夜半至函谷關。[五]秦昭王後悔出孟嘗君,求之已去,即使人馳傳逐之。孟嘗君至關,關法雞鳴而出客,孟嘗君恐追至,客之居下坐者有能為雞鳴,而雞齊鳴,遂發傳出。出如食頃,秦追果至關,已後孟嘗君出,乃還。始孟嘗君列此二人於賓客,賓客盡羞之,及孟嘗君有秦難,卒此二人拔之。自是之後,客皆服。
제나라 민왕 25년에 다시 마침내 맹상군으로 하여금 진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소왕이 곧 맹상군으로써 진나라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사람들이 혹 진나라 소왕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맹상군은 현명하고 또 제나라의 왕족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재상이 된다면 반드시 제나라를 우선하고 진나라를 뒤로 할 것이니 진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했다. 이에 진나라 소왕이 이에 그만두었다. 맹상군을 가두고는 죽이려 도모하였다. 맹상군이 사람을 시켜 소왕이 총애하는 애첩(幸姬)에게 풀어줄 것을 구하였다. 幸姬가 말하기를 “첩은 그대의 狐白裘를 얻고자 합니다.” 했다. 이 때 맹상군은 하나의 狐白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값은 千金이고 천하에 짝이 없는 것(천하에 하나 뿐인 것)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갈 때 소왕에게 바쳤기 때문에 다른 갓옷이 없었다. 맹상군이 그것을 근심하여 주루 객에게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하였다. 가자 아래 자리에 개가 되어(개 흉내를 내어) 훔칠 수 있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신이 호백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했다. 이에 밤에 개 흉내를 내면서 진나라 궁 창고 안에 들어가 바친 바의 호백구를 취하여 이르니 진나라 왕의 幸姬에게 바쳤다. 행희가 소왕에게 말하니 소왕이 맹상군을 풀어주었다. 맹상군이 나올 수 있자 곧 말을 타고 떠나서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통행증을 바꾸고(위조하고), 이름과 성을 변조하여 關門을 나갔다. 한 밤 중에 함곡관에 이르렀다. 진 나라 소왕이 맹상군을 내 보낸 것을 후회하여 그를 찾았으나 이미 떠났으므로 곧 사람을 시켜 말을 타고 달려 뒤쫓게 하였다. 맹상군이 함곡관에 이르렀는데 관의 법에 닭이 울어야 객이 나갈 수 있었다. 맹상군이 추격이 이를 것을 두려워하자 객의 아래 자리에 있던 자로 닭 울음 소리를 낼 수 있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닭 울음소리를 내자) 닭들이 일제히 울자 마침내 통행증을 내고 (관)나갔다. 관을 나가고 나서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진나라 추격대가 과연 관에 이르렀으나 이미 맹상군이 관을 나간 후였으므로 이에 돌아갔다. 처음 맹상군이 이 두 사람을 빈객에 반열하였을 때 빈객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겼는데 맹상군에게 진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 마침내 이 두 사람이 그것을 벗어나게 하였다. 이로부터 객이 모두 복종하였다.
[一] 索隱抵音丁禮反。按:抵謂觸冒而求之也。
[一] 【索隱】 ‘抵’의 음은 ‘丁’과 ‘禮’의 反이다. 살펴보니 ‘抵’는 부닺치고 무릅써서 구하는 것을 말한다.
[二] 集解韋昭曰;「以狐之白毛為裘。謂集狐腋之毛,言美而難得者。」
[二]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여우의 흰 털을 가지고 갓옷을 만든 것이다. 여우 겨드랑이 털을 모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아름답고 얻기 어려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했다.
[三] 正義臧,在浪反。
[三] 【正義】 ‘臧’은 ‘在’와 ‘浪’의 反이다.
[四] 索隱更者,改也。改前封傳而易姓名,不言是孟嘗之名。封傳猶今之驛券。
[四] 【索隱】 ‘更’은 고침이다. 앞의 봉전을 고쳐서 성명을 바꾼 것이니 이는 맹상군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封傳’은 지금의 ‘驛券’과 같은 것이다.
[五] 正義關在陝州桃林縣西南十三里。
[五] 【正義】 關은 섬주 도림현 서남쪽 13리에 있다.
孟嘗君過趙,趙平原君客之。趙人聞孟嘗君賢,出觀之,皆笑曰:「始以薛公為魁然也,今視之,乃眇小丈夫耳。」孟嘗君聞之,怒。客與俱者下,斫擊殺數百人,遂滅一縣以去。齊湣王不自得,[一]以其遣孟嘗君。孟嘗君至,則以為齊相,任政。
맹상군이 조나라를 지나다 조나라 평원군의 빈객이 되었다. 조나라 사람들이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 나와서 보았는데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설공으로서 훤칠한 대장부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몸이 작은 소장부일 뿐이다.” 했다. 맹상군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객과 함께 (수레를) 내려서 수백명을 베고 쳐서 죽여 마침내 한 개 현을 없애버리고는 갔다. 제나라 민왕이 맹상군을 (진나라에)보낸 것으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였다. 맹상군이 이르자 곧 제나라 재상으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一] 索隱不自德。是愍王遣孟嘗君,自言己無德也。
[一] 【索隱】 스스로 덕이 없다 하는 것이다. 이는 민왕이 맹상군을 진나라에 보낸 것을 스스로 자기에게 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孟嘗君怨秦,將以齊為韓、魏攻楚,因與韓、魏攻秦,[一]而借兵食於西周。蘇代為西周謂曰:[二]「君以齊為韓、魏攻楚九年,取宛、葉以北以彊韓、魏,[三]今復攻秦以益之。韓、魏南無楚憂,西無秦患,則齊危矣。韓、魏必輕齊畏秦,臣為君危之。君不如令敝邑深合於秦,而君無攻,又無借兵食。君臨函谷而無攻,令敝邑以君之情謂秦昭王曰『薛公必不破秦以彊韓、魏。其攻秦也,欲王之令楚王割東國以與齊,[四]而秦出楚懷王以為和』。君令敝邑以此惠秦,秦得無破而以東國自免也,秦必欲之。楚王得出,必德齊。齊得東國益彊,而薛世世無患矣。秦不大弱,而處三晉之西,三晉必重齊。」薛公曰:「善。」因令韓、魏賀秦,使三國無攻,而不借兵食於西周矣。是時,楚懷王入秦,秦留之,故欲必出之。秦不果出楚懷王。
맹상군이 진나라를 원망하여 장차 제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위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인하여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려 하여 서주에서 군량을 빌리려 하였다. 소대가 서주를 위하여 말하기를 “군(맹상군)께서는 제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위해 초나라를 공격한지 9년 동안 ‘완’, ‘섭’을 취하는 것으로써 한나라와 위나라를 강하게 하였는데 지금 다시 진나라를 공격하여 그것을 더하려 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남쪽으로 초나라의 근심이 없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의 근심이 없으면 곧 제나라가 위태롭게 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반드시 제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진나라를 두려워 할 것이니 신은 군(맹상군을)을 위하여 그것을 위태롭게 여깁니다. 군(맹상군)께서는 폐읍(서주)으로 하여금 깊이 진나라에 합하게 하고, 군(맹상군)께서는 공격함이 없게 하고 또 군량을 빌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군(맹상군)께서 함곡관에 임하여도 공격하지 말고 폐읍(서주)로 하여금 군(맹상군)의 情을 진나라 소왕에게 말하기를 ‘설공이 반드시 진나라를 깨트리는 것으로써 한나라와 위나라를 강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진나라를 공격하려 하는 것은 (진나라)왕이 초나라 왕으로 하여금 동쪽 나라의 땅을 떼어서 제나라에 주고, 진나라가 초나라 회왕을 내보내는 것으로써 화평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하십시오.’ 했다. 군께서(맹상군께서)는 폐읍(서주)으로 하여금 이로써 진나라에 은혜를 베풀게 하는 것이며, 진나라는 깨트려짐이 없이도 東國으로써 스스로 면함을 얻을 수 있으니 진나라는 반드시 하고자 할 것이요, 초나라 왕은 벗어날 수 있어서 반드시 제나라의 덕으로 여길 것입니다. 제나라가 동국을 얻어 더욱 강성해졌고, 설은 대대로 근심이 없어졌다. 진나라는 크게 약해지지 않고 三晉의 서쪽에 자리하니 삼진이 반드시 제나라를 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했다. 설공(맹상군)이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하고는 한나라와 위나라로 하여금 진나라에게 축하하고 세 나라가 공격하지 않도록 하며 서주에서 군대와 식량을 빌리지 않았다. 이 때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니 진나라가 그를 억류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벗어나고자 하였다. 진나라가 과연 초나라 회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年表曰韓、魏、齊共擊秦軍於函谷。」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年表」에 한나라, 위나라, 제나라가 함께 진나라 군대를 함곡관에서 공격하였다.” 했다.
[二] 索隱戰國策作「韓慶為西周謂薛公」。
[二] 【索隱】 『戰國策』에는 “한경이 서주를 위하여 설공에게 말하였다.”라고 썼다.
[三] 正義宛在鄧州,葉在許州。二縣以北舊屬楚,二國共沒以入韓、魏。
[三] 【正義】 ‘宛’은 등주에 있다. ‘葉’은 허주에 있다. 두 현의 이북은 옛날에 초나라에 속하였는데 두 나라가 함께 몰락하자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갔다.(편입되었다.)
[四] 正義東國,齊、徐夷。
[四] 【正義】 동국은 제나라와 서이이다.
孟嘗君相齊,其舍人魏子[一]為孟嘗君收邑入,[二]三反而不致一入。孟嘗君問之,對曰:「有賢者,竊假與之,以故不致入。」孟嘗君怒而退魏子。居數年,人或毀孟嘗君於齊湣王曰:「孟嘗君將為亂。」及田甲劫湣王,湣王意疑孟嘗君,孟嘗君迺奔。[三]魏子所與粟賢者聞之,乃上書言孟嘗君不作亂,請以身為盟,遂自剄宮門以明孟嘗君。湣王乃驚,而蹤跡驗問,孟嘗君果無反謀,乃復召孟嘗君。孟嘗君因謝病,歸老於薛。湣王許之。
맹상군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 사인 위자가 맹상군을 위하여 읍의 조세를 거두려 하였으나 세 번을 돌아오고도 한 번도 들임이(조세가) 이르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것을 물으니 (위자가)대답하여 말하기를 “현자가 있어서 몰래 빌려주었기 때문에 조세가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했다. 맹상군이 노하여 위자를 물리쳤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사람들이 혹 맹상군을 제나라 민왕에게 비방하여 말하기를 “맹상군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합니다.” 하는데 전갑이 민왕을 겁줌에 이르자 민왕의 뜻이 맹상군을 의심하는데 두니 맹상군이 이에 달아났다. 위자가 준 바의 곡식을 받은 현자가 그것을 듣고는 이에 글을 올려 맹상군은 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자신의 몸으로써 맹서를 삼을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궁궐 문에서 목을 매는 것으로써 맹상군의 결백을 밝혔다. 민왕이 이에 놀라 종적을 징험하여 물으니 맹상군이 과연 반란을 모의함이 없었다. 이에 다시 맹상군을 불렀다. 맹상군이 인하여 병을 핑계하고 설 땅에 돌아가 늙었다.
[一] 索隱舍人官微,記姓而略其名,故云魏子。
[一] 【索隱】 ‘舍人’은 관직이 미천하여 성만 기록하고 그 이름을 생략하였다. 그러므로 ‘위자’라 한 것이다.
[二] 索隱收其國之租稅也。
[二] 【索隱】 그 나라의 조세를 거두는 것이다.
[三] 集解徐廣曰:「湣王三十四年,田甲劫王,薛文走。」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민왕 34년에 전갑이 왕을 겁주니 설문(맹상군)이 달아났다.”고 했다.
其後,秦亡將呂禮相齊,欲困蘇代。代乃謂孟嘗君曰:「周最於齊,至厚也,[一]而齊王逐之,而聽親弗[二]相呂禮者,欲取秦也。齊、秦合,則親弗與呂禮重矣。有用,齊、秦必輕君。君不如急北兵,趨趙以和秦、魏,收周最以厚行,且反齊王之信,[三]又禁天下之變。[四]齊無秦,則天下集齊,親弗必走,則齊王孰與為其國也!」於是孟嘗君從其計,而呂禮嫉害於孟嘗君。
그 후 진나라의 도망한 장수 여례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소대를 곤궁하게 만들고자 하였다. 소대가 이에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주최는 제나라에서 지극히 두터이 대우하였는데 제나라 왕이 그를 내치고 친불의 말을 듣고 여례를 재상으로 삼은 것은 진나라의 신임을 취하고자 한 것입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합하면 곧 친불과 여례가 중용될 것입니다. 중용됨이 있으면 제나라와 진나라는 반드시 군(맹상군)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군(맹상군)께서는 급히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 조나라를 재촉하여 진나라, 위나라와 화친하게하고, 주최를 거두어 두터이 대우하여 가게하며, 또한 제나라 왕의 신임을 돌이켜 또한 천하의 변화를 금하는 것만 못합니다. 제나라는 진나라가 없으면 곧 천하가 제나라에 모이고 친불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니 곧 제나라 왕은 누구와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했다. 맹상군이 그 계책을 따르니 여례가 맹상군을 질투하고 미워하였다.
[一] 正義周最,周之公子。
[一] 【正義】 ‘주최’는 주나라의 공자이다.
[二] 集解親弗,人姓名。索隱親,姓;弗,名也。戰國策作「祝弗」,蓋「祝」為得之。
[二] 【集解】 ‘親弗’은 사람의 성명이다. 【索隱】 ‘親’은 성이요, ‘弗’은 이름이다. 『戰國策』에는 ‘祝弗’이라 썼으니 대개 ‘祝’은 얻음이 된다.
[三] 索隱周最本厚於齊,今欲逐之而相秦之亡將。蘇代謂孟嘗君,令齊收周最以自厚其行,又且得反齊王之有信,以不逐周最也。
[三] 【索隱】 주최는 본래 제나라에서 두터이 대우받았는데 이제 그를 내쫓고 진나라의 도망한 장군을 재상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소대가 맹상군에게 말하기를 제나라로 하여금 주최를 거두는 것으로써 스스로 그 행을 두터이 하고 또한 제나라 왕의 믿음을 돌이키는 것으로써 주최를 내치지 않음을 얻고자 한 것이다.
[四] 索隱變謂齊、秦合則親弗、呂禮用,用則秦、齊輕孟嘗也。
[四] 【索隱】 ‘變’은 제나라와 진나라가 합하면 곧 친불과 여례가 등용되고, 등용되면 곧 진나라와 제나라가 맹상군을 가볍게 여김을 말한다.
孟嘗君懼,乃遺秦相穰侯魏冉書曰:「吾聞秦欲以呂禮收齊,齊,天下之彊國也,子必輕矣。齊秦相取以臨三晉,呂禮必并相矣,是子通齊以重呂禮也。若齊免於天下之兵,其讎子必深矣。子不如勸秦王伐齊。齊破,吾請以所得封子。齊破,秦畏晉之彊,秦必重子以取晉。晉國敝於齊而畏秦,晉必重子以取秦。是子破齊以為功,挾晉以為重;是子破齊定封,秦、晉交重子。若齊不破,呂禮復用,子必大窮。」於是穰侯言於秦昭王伐齊,而呂禮亡。
맹상군이 두려워하여 이에 진나라 재상 양후 위염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진나라가 여례로서 제나라를 거두게(제나라의 관심을 받고자) 하고자 한다. 합니다. 제나라는 천하의 강한 나라인데 (여례가 제나라의 관심을받게 되면: 제나라의 환심을 사게 되면) 그대는 반드시 가벼이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도움을)취하는 것으로 三晉에 임하면(대항하면) 여례는 반드시 재상을 아우를(겸직할) 것이니 이는 그대가 제나라를 통하여 여례를 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나라가 천하의 군대를 면하게 되면 그대를 원수로 여김이 반드시 깊을 것입니다. 그대는 진나라 왕을 권유하여 제나라를 정벌하는 것만 못합니다. 제나라를 깨트리면 나는 그대가 봉해질 수 있도록 청할 것입니다. 제나라를 깨트리면 秦나라는 晉나라의 강해짐을 두려워할 것이니 진나라는 반드시 그대를 중용하는 것으로써 晉나라를 (진나라의 관심을)취할 것입니다. 晉나라가 제나라에게 피폐해져서 秦나라를 두려워하게 되면 晉나라는 반드시 그대를 중용하는 것으로써 진나라를 (진나라의 관심을)취할 것입니다. 이는 그대가 제나라를 깨트리는 것으로써 공을 삼는 것이며 晉나라를 끼고서 중용되는 것이니 이는 그대가 제나라를 깨트리고 봉함을 안정시키는 것이니 진나라와 晉나라가 서로 그대를 중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나라를 깨트리지 않고 여례를 다시 등용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크게 막히게 될 것입니다.(크게 곤경에 빠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양후가 진나라 소왕에게 말하여 제나라를 정벌하자 여례가 도망하였다.
後齊湣王滅宋,益驕,欲去孟嘗君。孟嘗君恐,迺如魏。魏昭王以為相,西合於秦、趙,與燕共伐破齊。齊湣王亡在莒,遂死焉。齊襄王立,而孟嘗君中立於諸侯,無所屬。齊襄王新立,畏孟嘗君,與連和,復親薛公。文卒,謚為孟嘗君。[一]諸子爭立,而齊魏共滅薛。孟嘗絕嗣無後也。
후에 민왕이 송나라를 멸하고는 더욱 교만하여 맹상군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맹상군이 두려워하여 이에 위나라로 갔다. 위나라 소왕이 재상으로 삼고 서쪽으로 진나라, 조나라와 연합하여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서 개트렸다. 제나라 민왕이 도망하여 거 땅에 있다가 마침내 여기서 죽었다. 제나라 양왕이 즉위하니 맹상군은 제후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속하는 바가 없었다. 제나라 양왕은 새로 즉위한 후 맹상군을 두려워하여(제후들과) 화친하고 다시 설공과 친하였다. 전문이 죽자 시호를 맹상군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지위를 다투자 제나라와 위나라가 함께 ‘설’을 멸망시켰다. 맹상군은 후사가 끊어졌다.
[一] 集解皇覽曰:「孟嘗君冢在魯國薛城中向門東。向門,出北邊門也。」詩云「居常與許」,鄭玄曰「『常』或作『嘗』,在薛之南」。孟嘗邑于薛城也。索隱按:孟嘗襲父封薛,而號曰孟嘗君,此云謚,非也。孟,字也;嘗,邑名。詩云「居常與許」,鄭箋云「『常』或作『嘗』,嘗邑在薛之旁」是也。正義括地志云:「孟嘗君墓在徐州滕縣五十二里。卒在齊襄王之時也。」
[一] 【集解】 황람이 말하기를 “맹상군의 무덤은 노나라 설성 안 향문 동쪽에 있다. 향문은 북쪽 변경으로 나가는 문이다.” 했다. 『詩經』에 “‘상’과 ‘허’를 차지하였다.” 했는데 정현은 “‘常’은 혹 ‘嘗’이라고도 쓰는데 ‘설’ 땅의 남쪽에 있다.” 했다. 맹상은 설성에 도읍하였다. 【索隱】 살펴보니 맹상이 아버지를 이어 설 땅에 봉해져서 맹상군이라 불려 졌으니 이것을 시호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孟’은 자이고, ‘嘗’은 읍의 이름이다, 『詩經』에 “‘常’과 ‘許’를 차지하였다.”하였는데 정전이 말하기를 “‘常’은 혹 ‘嘗’이라고도 쓰며, 嘗邑은 설 땅의 옆에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正義】 『括地志』에 “맹상군의 묘가 서주 등현 52리에 있다. 죽은 것은 제나라 양왕의 때이다.” 했다.
初,馮驩[一]聞孟嘗君好客,躡蹻而見之。[二]孟嘗君曰;「先生遠辱,何以教文也?」馮驩曰:「聞君好士,以貧身歸於君。」孟嘗君置傳舍十日,[三]孟嘗君問傳舍長曰:「客何所為?」答曰:「馮先生甚貧,猶有一劍耳,又蒯緱。[四]彈其劍而歌曰『長鋏歸來乎,食無魚』。」孟嘗君遷之幸舍,食有魚矣。五日,又問傳舍長。答曰:「客復彈劍而歌曰『長鋏歸來乎,出無輿』。」孟嘗君遷之代舍,出入乘輿車矣。五日,孟嘗君復問傳舍長。舍長答曰:「先生又嘗彈劍而歌曰『長鋏歸來乎,無以為家』。」孟嘗君不悅。
처음에 풍(빙)환이 맹상군이 객을 좋아한다는 것을 듣고는 짚신을 신고 만났다. 맹상군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먼길 오시느라 힘드셨는데 무엇으로써 문을(나를) 가르치려 합니까?” 했다. 풍환이 말하기를 “군(맹상군)께서 선비를 좋아한다는 것을 듣고 빈약한 몸으로써 그대(맹상군)에게 맡기려 합니다.” 했다. 맹상군이 (풍(빙)환을)傳舍에 둔지 10일 만에 맹상군이 전사장에게 물어 말하기를 “객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했다. (전사장이) 답하기를 “풍(빙0 선생은 매우 가난하여 하나의 검을 소유하였을 뿐인데 또한 새끼줄로 칼자루를 감았습니다. 그 검을 튕기면서 노래하기를 ‘긴 칼아 돌아가지 않겠느냐 밥에 생선이 없구나.’ 했습니다. 맹상군이 幸舍로 옮기고 밥에 생선을 주었다. 5일 후 또 전사장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객이 다시 검을 튕기면서 노래하기를 ‘긴 칼아 돌아가지 않겠느냐? 나가는데 가마가 없구나.’” 했습니다. 맹상군이 그를 代舍로 옮기고 출입할 때 가마와 수레를 타게 했다. 5일 후 맹상군이 다시 전사장에게 물으니 전사장이 대답하기를 “선생이 또 검을 튕기면서 노래하기를 ‘긴 칼아 돌아가지 않겠느냐? 집을 삼을 만한 것이 없구나.’ 했습니다. 맹상군이 기뻐하지 않았다.
[一] 集解音歡。復作「煖」,音許袁反。索隱音歡。或作「諼」,音況遠反。
[一] 【集解】 음은 ‘歡’이다. 다시 ‘煖’이라 쓰기도 하는데 음은 ‘許’와 ‘袁’의 反이다. 【索隱】 음은 ‘歡’이다. 혹은 ‘諼’이라고도 쓰는데 음은 ‘況’과 ‘遠’의 反이다.
[二] 索隱蹻音腳。字亦作「繑」,又作「屩」,亦作「 」。
[二] 【索隱】 ‘蹻’의 음은 ‘腳’이다. 글자 또한 ‘繑’라 쓰고, 또 ‘屩’, 또 ‘ ’라고도 쓴다.
[三] 索隱傳音逐緣反。按:傳舍、幸舍及代舍,並當上、中、下三等之客所舍之名耳。
[三] 【索隱】 ‘傳’의 음은 ‘逐’과 ‘緣’의 反이다. 살펴보니 ‘전사’, ‘행사’와 ‘대사’는 나란히 상, 중, 하 3등급의 객이 머무는 집의 이름일 뿐이다.
[四] 集解蒯音苦怪反。茅之類,可為繩。言其劍把無物可裝,以小繩纏之也。緱音侯,亦作「候」,謂把劍之處。索隱蒯,草名,音「蒯聵」之「蒯」。緱音侯,字亦作「候」,謂把劍之物。言其劍無物可裝,但以蒯繩纏之,故云「蒯緱」。
[四] 【集解】 ‘蒯’의 음은 ‘苦’와 ‘怪’의 反이다. 띠풀의 종류이니 노끈을 만들 수 있다. 그 검자루를 장식할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작은 노끈으로써 그것을 얽어매었음을 말한 것이다. ‘緱’는 음이 ‘侯’이니 검을 잡는 곳을 말한다. 【索隱】 ‘蒯’는 풀이름인데 음은 ‘蒯聵(괴외)’의 ‘蒯’이다. ‘緱’의 음은 ‘侯’인데 글자는 또한 ‘候’라고도 쓰는데 검을 잡는 물건을 이른다. 그 물건을 장식할만한 것이 없어 다만 띠풀로 꼰 노끈으로 칼자루를 묶었을 뿐임을 이른다. 그러므로 ‘蒯緱’라 한 것이다.
居期年,馮驩無所言。孟嘗君時相齊,封萬戶於薛。其食客三千人。邑入不足以奉客,[一]使人出錢於薛。歲餘不入,貸錢者多不能與其息,[二]客奉將不給。孟嘗君憂之,問左右:「何人可使收債於薛者?」傳舍長曰:「代舍客馮公形容狀貌甚辯,長者,無他伎[三]能,宜可令收債。」 孟嘗君乃進馮驩而請之曰:「賓客不知文不肖,幸臨文者三千餘人,邑入不足以奉賓客,故出息錢於薛。薛歲不入,民頗不與其息。今客食恐不給,願先生責之。」馮驩曰;「諾。」辭行,至薛,召取孟嘗君錢者皆會,得息錢十萬。迺多釀酒,買肥牛,召諸取錢者,能與息者皆來,不能與息者亦來,皆持取錢之券書合之。齊為會,日殺牛置酒。酒酣,乃持券如前合之,能與息者,與為期;貧不能與息者,取其券而燒之。曰:「孟嘗君所以貸錢者,為民之無者以為本業也;所以求息者,為無以奉客也。今富給者以要期,貧窮者燔券書以捐之。諸君彊飲食。有君如此,豈可負哉!」坐者皆起,再拜。
1년이 지나도록 풍환(빙환)은 말한 바가 없었다. 맹상군이 이 때 제나라 재상으로 설 땅의 萬戶에 봉해졌다. 그 식객이 3천명이었다. 읍의 수입(세금)이 객을 받들기에(봉양하기에) 부족하자 사람을 시켜 설 땅에서 돈을 내게(돈 놀이를) 하였다. 해가 지나도 (돈이) 들어오지 않고, 돈을 빌린 자는 많이 그 이자를 내지 못하자 객을 봉양하는데 부족하게 되었다. 맹상군이 그것을 근심하여 좌우에게 묻기를 “누가 설 땅에서 빚을 거두게 할 만한가?” 했다. 전사장이 “대사의 객 풍(빙)공이 형상과 외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하며 나이 많은 자로 다른 기술과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마땅히 부채를 거두게 할 만합니다.” 했다. 맹상군이 이에 풍(빙)환에게 나아가 청하기를 “빈객이 나의 현명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요행히도 나에게 몸을 맡긴 자가 3000여명인데 읍의 수입이 빈객을 받들기에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설 땅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기로 하였습니다. 설 땅에서 해가 지나도 들어옴이 없고, 백성들은 자못 그 이자를 주지 않습니다. 지금 객이 먹는 것이 부족할까 두렵습니다. 선생이 그것을 받아오기를 원합니다. 했다. 풍(빙)환이 “예”하고는 하직하고 가서 설 땅에 이르러 맹상군의 돈을 취한 자를 불러 모두 모이게 하고는 그 이자로 10만을 얻었다. 이에 많이 술을 빚고, 살찐 소를 사서 여러 돈을 취한 자를 부르니 이자를 낼 수 있는 자가 모두 왔으며, 이자를 낼 수 없는 자도 또한 왔는데 모두 돈을 취한 문서(빚문서)를 지니게 하여 그것을 합하였다. 다 같이 모이자 그날에 소를 잡고 술을 두었다. 술판이 무르익어 얼큰해지자 지닌 증서를 앞과 같이 합하여 이자를 낼 수 있는 자는 내는 기일을 삼고, 가난하여 이자를 낼 수 없는 자는 그 증서를 취하여 불살랐다. (풍(빙)환이)말하기를 “맹상군이 돈을 빌려준 이유는 백성들의 없는 자가 본업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이자를 구한 이유는 객을 봉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부유한 자들은 갚을 날을 정하고, 가난한 자들은 증서를 불태우는 것으로서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마음껏 먹으시오. 군(맹상군)이 이 같음이 있는데 어찌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앉아 있던 자들이 모두 일어나 두 번 절하였다.
[一] 正義奉,符用反。
[一] 【正義】 ‘奉’은 ‘符’와 ‘用’의 反이다.
[二] 索隱按:與猶還也。息猶利也。
[二] 【索隱】 살펴보니 ‘與’는 ‘還’과 같다. ‘息’은 ‘利’와 같다.
[三] 集解亦作「技」。
[三] 【集解】 또한 ‘技’라고도 쓴다.
孟嘗君聞馮驩燒券書,怒而使使召驩。驩至,孟嘗君曰:「文食客三千人,故貸錢於薛。文奉邑少,[一]而民尚多不以時與其息,客食恐不足,故請先生收責之。聞先生得錢,即以多具牛酒而燒券書,何?」馮驩曰:「然。不多具牛酒即不能畢會,無以知其有餘不足。有餘者,為要期。不足者,雖守而責之十年,息愈多,急,即以逃亡自捐之。若急,終無以償,上則為君好利不愛士民,下則有離上抵負之名,非所以厲士民彰君聲也。焚無用虛債之券,捐不可得之虛計,令薛民親君而彰君之善聲也,君有何疑焉!」孟嘗君乃拊手而謝之。
맹상군이 풍(빙)환이 그 빚 문서를 불살랐다는 것을 듣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풍(빙)환을 불렀다. 풍(빙)환이 이르자 맹상군이 묻기를 “나의 식객이 3000명이어서 설 땅에서 돈을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봉읍이 적고, 백성들은 오히려 많이 그 대에 맞게 이식을 내지 않으니 객의 먹을 것이 부족할까 두려워 합니다. 그러므로 선생께 빚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선생이 돈을 얻는 것을 들이니 곧 많이 소와 술을 갖추고, 증서를 불사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했다. 풍(빙)환이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많이 소와 술을 갖추지 않고서는 모두 모이게 할 수 없고, 남음이 있는 자와 부족한 자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음이 있는 자는 갚을 기일을 요청하고, 부족한 자는 비록 지켜서 10년을 기다려도 이자는 더욱 많아지고 급하게 하면 곧 도망하여 스스로 그것을 버립니다. 만약 급박하게 하면 끝내 갚지 않을 것이고, 위로는 곧 군(맹상군)이 이익을 좋아하여 士民을 사랑하지 않고, 아래로는 윗사람을 떠나 거스르고 등진다는 이름이 있을 것이니 백성을 격려하고 군(맹상군)의 명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헛된 빚 문서를 불태우고 얻을 것 없는 헛된 계책을 버려서 설 땅의 백성으로 하여금 군(맹상군)을 가까이하고 군(맹상군)의 좋은 명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인데 군(맹상군)께서는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했다. 맹상군이 이에 손을 어루만지며 사례하였다.
[一] 索隱言文之奉邑少,故令出息於薛。
[一] 【索隱】 전문(맹상군)의 봉읍이 적기 때문에 설 땅에서 이식을 내게 한 것을 말한다.
齊王惑於秦、楚之毀,以為孟嘗君名高其主而擅齊國之權,遂廢孟嘗君。諸客見孟嘗君廢,皆去。馮驩曰:「借臣車一乘,可以入秦者,必令君重於國而奉邑益廣,可乎?」孟嘗君乃約車幣而遣之。
제나라 왕이 진나라와 초나라의 비방에 현혹되어 맹상군이 명성이 그 임금보다 높고 제나라의 권세를 함부로 한다. 여겨 마침내 맹상군을 폐하였다. 여러 객들이 맹상군이 폐해지는 것을 보고 모두 떠나갔다. 풍(빙)환이 말하기를 “신에게 수레 1대를 빌려주시어 진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면 반드시 군(맹상군)으로 하여금 나라에 중용되게 하고 봉읍을 더욱 넓히게 할 수 있으니 어떻습니까?” 했다. 맹상군이 이에 수레와 폐백을 묶어 보냈다.
馮驩乃西說秦王曰:「天下之游士馮軾結靷西入秦者,無不欲彊秦而弱齊;馮軾結靷東入齊者,無不欲彊齊而弱秦。此雄雌之國也,勢不兩立為雄,雄者得天下矣。」秦王跽而問之曰:「何以使秦無為雌而可?」馮驩曰:「王亦知齊之廢孟嘗君乎?」秦王曰:「聞之。」馮驩曰:「使齊重於天下者,孟嘗君也。今齊王以毀廢之,其心怨,必背齊;背齊入秦,則齊國之情,人事之誠,盡委之秦,齊地可得也,豈直為雄也!君急使使載幣陰迎孟嘗君,不可失時也。如有齊覺悟,復用孟嘗君,則雌雄之所在未可知也。」秦王大悅,迺遣車十乘黃金百鎰以迎孟嘗君。馮驩辭以先行,至齊,說齊王曰:「天下之游士馮軾結靷東入齊者,無不欲彊齊而弱秦者;馮軾結靷西入秦者,無不欲彊秦而弱齊者。夫秦齊雄雌之國,秦彊則齊弱矣,此勢不兩雄。今臣竊聞秦遣使車十乘載黃金百鎰以迎孟嘗君。孟嘗君不西則已,西入相秦則天下歸之,秦為雄而齊為雌,雌則臨淄、即墨危矣。王何不先秦使之未到,復孟嘗君,而益與之邑以謝之?孟嘗君必喜而受之。秦雖彊國,豈可以請人相而迎之哉!折秦之謀,而絕其霸彊之略。」齊王曰:「善。」乃使人至境候秦使。秦使車適入齊境,使還馳告之,王召孟嘗君而復其相位,而與其故邑之地,又益以千戶。秦之使者聞孟嘗君復相齊,還車而去矣。
풍(빙)환이 이에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 왕을 유세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로 수레에 의지하여 서쪽으로 진나라에 들어온 자들 중에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하려 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수레에 의지하여 동쪽으로 제나라에 들어간 자들 중에 제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하려 하지 않은 자는 없었습니다. 이는 雄雌을 겨루는 나라여서 형세가 둘이 나란히 서서 雄이 될 수 없고, 雄이 되는 자가 천하를 얻을 것입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꿇어 앉아 묻기를 “어떻게 하면 진나라가 雌가 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풍(빙)환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또한 제나라가 맹상군을 폐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하니 진나라 왕이 “그것을 들었습니다.” 했다. 풍(빙)환이 말하기를 “제나라가 천하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게 한 자는 맹상군입니다. 지금 제나라 왕이 비방 때문에 그를 폐하였기 때문에 마음은 반드시 원망할 것이니 반드시 제나라를 배반할 것이고, 제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에 들어오면 곧 제나라의 사정과 인사의 진실을 모두 진나라에 맡겨서 제나라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다만 雄이 될 뿐이겠습니까? 임금께서는 급히 사신을 시켜 폐백을 싣고 몰래 맹상군을 맞이하게 하여 때를 잃지 않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제나라가 깨달음이 있어서 다시 맹상군을 쓰게 되면 곧 자웅의 있는 바를 알 수 없습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에 수레 10대에 황금 100일을 가지고 맹상군을 맞으러 보냈다. 풍(빙)환이 먼저 가서 제나라에 이르자 제나라 왕을 유세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들로 수레에 의지하여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에 들어가는 자들 중에 제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나라를 약하게 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없고, 수레에 의지하여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에 들어간 자들 둥에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하려하지 않는 자는 없었습니다. 대저 진나라와 제나라는 자웅을 다투는 나라여서 진나라가 강해지면 제나라는 약해집니다. 이는 형세가 둘이 모두 雄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이 가만히 들으니 진나라가 사신을 보내 10대의 수레에 황금 100일을 싣고서 맹상군을 맞이하러 보냈다고 합니다. 맹상군이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서쪽으로 들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면 곧 천하가 돌아가 진나라는 雄이되고 제나라는 雌가 될 것이고, 雌가 되면 곧 임치와 즉묵이 위태로워집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진나라 사신이 이르기 전에 맹상군을 회복하고 읍을 더해 주는 것으로써 사과하지 않으십니까? 맹상군은 반드시 기뻐하며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비록 강국이나 어찌 다른 사람의 재상을 청하여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진나라의 꾀를 꺽고 그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려하는 책략을 끊어야 합니다.” 했다. 제나라 왕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경계에 이른 진나라 사신을 엿보았다. 진나라 사신과 수레가 마침 제나라 경계에 들어섰으므로 말을 달려 돌아가 알리게 하니 제나라 왕이 맹상군을 불러서 그 재상의 지위를 회복하고 옛 읍의 땅을 주며 또한 千戶를 더하였다. 진나라의 사신은 맹상군이 다시 제나라 재상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 수레를 돌려 돌아갔다.
自齊王毀廢孟嘗君,諸客皆去。後召而復之,馮驩迎之。未到,孟嘗君太息歎曰:「文常好客,遇客無所敢失,食客三千有餘人,先生所知也。客見文一日廢,皆背文而去,莫顧文者。今賴先生得復其位,客亦有何面目復見文乎?如復見文者,必唾其面而大辱之。」馮驩結轡下拜。
제나라 왕이 비방으로 맹상군을 폐함으로부터 여러 객이 모두 떠나갔다. 후에 불러 (지위를) 회복하자 풍(빙)환이 그들을 맞이하려하였다. 이르지 않았는데 맹상군이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내가 평소 객을 좋아하여 객을 대우함에 감히 실수하는 바가 없어 식객이 3000명이 넘는 것은 선생이 아는 바이다, 객이 내가 하루아침에 폐해지는 것을 보고는 모두 나를 배반하고 떠나가서 나를 돌아보는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선생에게 의지하여 그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으니 객이 또한 무슨 면목으로 다시 나를 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다시 나를 보는 자는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되게 할 것이다.” 했다. 풍(빙)환이 고삐를 매고 수레에서 내려 절하였다.
孟嘗君下車接之,曰:「先生為客謝乎?」馮驩曰:「非為客謝也,為君之言失。夫物有必至,事有固然,君知之乎?」孟嘗君曰:「愚不知所謂也。」曰:「生者必有死,物之必至也;富貴多士,貧賤寡友,事之固然也。君獨不見夫(朝)趣市[朝]者乎?[一]明旦,側肩爭門而入;日暮之後,過市朝者掉臂而不顧。[二]非好朝而惡暮,所期物忘其中。[三]今君失位,賓客皆去,不足以怨士而徒絕賓客之路。願君遇客如故。」孟嘗君再拜曰:「敬從命矣。聞先生之言,敢不奉教焉。」
맹상군이 수레에서 내려 그를 영접하고 말하기를 “선생은 객을 위하여 사고하는 것입니까?” 했다. 풍(빙)환이 말하기를 “객을 위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군(맹상군)의 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저 사물은 반드시 이름이 있고(반드시 필연적인 결과가 있고), 일에는 진실로 그러한 이치가 있으니 군(맹상군)께서는 그것을 압니까?” 했다. 맹상군이 말하기를 “어리석어서 말하는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자에게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은 사물이 반드시 이르는 결과이고, 부귀한 자에게 선비가 많고, 빈천한 자에게 벗이 적은 것은 일의 진실로 그러한 이치입니다. 군(맹상군)께서 아침에 시장에 나아가는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까?(본 적이 있습니까?) 밝은 아침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문을 다투어 들어가고 해진 저녁에는 시장을 지나는 자가 팔을 흔들며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침을 좋아하고 저녁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약한 바의 물건이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맹상군)께서 지위를 잃었을 때 빈객이 모두 떠난 것이 선비를 원망하는 것으로써 한갓 빈객의 길을 끊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군9맹상군)께서는 객을 대우함을 옛 날과 같이 하십시오.” 했다. 맹상군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공경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선생의 말을 들으니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했다.
[一] 索隱趣音娶。趣,向也。
[一] 【索隱】 ‘趣’의 음은 ‘娶’이니 향함이다.
[二] 索隱過音光臥反。朝音潮。謂市之行位有如朝列,因言市朝耳。
[二] 【索隱】 ‘過’의 음은 ‘光’과 ‘臥’의 反이다. ‘朝’의 음은 ‘潮’이다. 시장의 가고 자리하는 것이 潮水 같아서 ‘市朝’라 말했을 뿐이다.
[三] 索隱按:期物謂入市心中所期之物利,故平明側肩爭門而入,今日暮,所期忘其中。忘者,無也。其中,市朝之中。言日暮物盡,故掉臂不顧也。
[三] 【索隱】 살펴보니 ‘期物’은 저자의 가운데 들어가 물건의 이로움을 기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밝아지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문을 다투어 들어가고, 해가 지면 기약하는 바가 그 안에 없어지는 것이다. ‘忘’은 ‘無’이다. ‘其中’은 저자의 안이다. 날이 저물어 물건이 다하니 팔을 흔들며 돌아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太史公曰:吾嘗過薛,其俗閭里率多暴桀子弟,與鄒、魯殊。問其故,曰:「孟嘗君招致天下任俠,姦人入薛中蓋六萬餘家矣。」世之傳孟嘗君好客自喜,名不虛矣。
태사공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설 땅을 지나가는데 그 풍속이 마을에 난폭하고 사나운 젊은이들이 많아 추나라, 노나라와는 달랐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말하기를 ‘맹상군이 천하의 협객을 초치할 때 간사한 사람들이 설 땅에 들어온 것이 6만여 가는 되었다.’ 했다. 세상에 전하기를 ‘맹상군이 객을 좋아하여 스스로 기뻐하였다.’ 하더니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다.” 했다.
【索隱述贊】靖郭之子,威王之孫。既彊其國,實高其門。好客喜士,見重平原。雞鳴狗盜,魏子、馮煖。如何承睫,薛縣徒存
【索隱述贊】 정광의 아들이며, 위왕의 손자로다. 이미 그 나라를 강하게 하고, 진실로 그 문을 높게 하였도다. 객을 좋아하고 선비를 기쁘게 하여 평원군에게 귀중하게 여겨졌도다. 닭 울음소리 잘 내고, 개 흉내 잘 내는 이는 위자와 마원이로다. 눈을 깜박이는 것이 어떠한가, 한 갓 설현을 보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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