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八十三
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
魯仲連者,齊人也。好奇偉俶儻之畫策,[一]而不肯仕宦任職,好持高節。游於趙。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이다. 기발하고 빼어나며 뛰어난 일을 도모하기를 좋아하고(잘하고), 벼슬하여 직책을 맡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높은 절개를 지였다. 조나라에서 유세하였다.
[一] 索隱按:廣雅云「俶儻,卓異也」。正義俶,天歷反。魯仲連子云:「齊辯士田巴,服狙丘,議稷下,毀五帝,罪三王,服五伯,離堅白,合同異,一日服千人。有徐劫者,其弟子曰魯仲連,年十二,號『千里駒』,往請田巴曰:『臣聞堂上不奮,郊草不芸,白刃交前,不救流矢,急不暇緩也。今楚軍南陽,趙伐高唐,燕人十萬,聊城不去,國亡在旦夕,先生柰之何?若不能者,先生之言有似梟鳴,出城而人惡之,願先生勿復言。』田巴曰:『謹聞命矣。』巴謂徐劫曰:『先生乃飛兔也,豈直千里駒!』巴終身不談。」
[一] 【索隱】 살펴보니 『광아』에 “俶儻은 빼어나다.”했다. 【正義】 ‘俶’은 ‘天’과 ‘歷’의 反이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제나라의 변사(말 잘하는 이) 전파는 저구를 복종시키고 직하를 의론하며 오제를 비방하고 삼왕의 죄를 묻고 오백을 복종시키며 견백을 떠나며(견백의 논의를 흩어지게 하며) 같고 다른 것을 합하여 하루에 천명을 복종시켰다. 서겁이란 자가 있는데 그 제자를 노중련이라 하며 나이 12세에 ‘천리구’라 불리었으며, 전파에게 가서 청하여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당상(대청마루)을 떨어내지 못하면 가까운 들의 풀을 김매지 못하고 흰 칼날이 앞에서 교차하면 흐르는 화살을 구원하지 못하며(신경 쓰지 못한다.), 다급하면 천천히 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지금 초나라는 남양에 주둔하였고, 조나라는 고당을 치며, 연나라 사람 10만이 성을 떠나지 않아 나라의 망함이 아침저녁에 달려있는데, 선생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 할 수 없다면 선생의 말은 올빼미의 울음소리와 같아 성을 나서도 사람들이 미워할 것이니 선생께서는 다시 말하지 말기를 원합니다. 했다. 전파가 말하기를 “삼가 명을 듣고자 합니다.” 하였다. 전파가 서겁에 대하여(평하여) 말하기를 “선생은 곧 나는 토끼이니 어찌 천리구를 감당할까!” 했다. 전파가 죽을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趙孝成王時,而秦王使白起破趙長平之軍前後四十餘萬,秦兵遂東圍邯鄲。趙王恐,諸侯之救兵莫敢擊秦軍。魏安釐王使將軍晉鄙救趙,畏秦,止於蕩陰不進。[一]魏王使客將軍新垣衍[二]閒入邯鄲,因平原君謂趙王曰:「秦所為急圍趙者,前與齊湣王爭彊為帝,已而復歸帝;今齊(湣王)已益弱,方今唯秦雄天下,此非必貪邯鄲,其意欲復求為帝。趙誠發使尊秦昭王為帝,秦必喜,罷兵去。」平原君猶預未有所決。
조나라 효성왕 때 진나라 왕이 백기를 시켜 조나라 장평의 군대를 전후 40여만 명을 깨트리고 진나라 군대가 마침내 한단을 포위하였다. 조나라 왕이 두려워하였는데 제후의 구원군이 감히 진나라 군대를 치지 못하였다. 위나라 안리왕이 장군 진비로 하여금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으나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탕음 당에서 그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위나라 왕이 객장군 신원연으로 하여금 몰래 한단에 들어가게 하여 평원군을 통하여 조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진나라가 급히 조나라를 포위한 것은 앞서 제나라 민왕과 강함을 다투어 皇帝라 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皇帝를 돌려 王이라 호칭을 회복하였는데 지금 제나라가(민왕이) 이미 더욱 약해지고 바야흐로 이제는 오직 진나라만이 천하에 으뜸이 되었으니 이는 반드시 한단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다시 皇帝가 되를 구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조나라가 진실로 사신을 내어 진나라 소왕을 높여 皇帝라 한다면 진나라가 반드시 기뻐하여 군대를 흩고 떠날 것입니다.” 했다. 평원군이 오히려 미리(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一] 集解地理志河內有蕩陰縣。正義蕩,天郎反,相州縣。
[一] 【集解】 『地理志』에 “하내에 탕음현이 있다.” 했다. 【正義】 ‘湯’은 ‘天’과 ‘郞’의 反이니 상주현이다.
[二] 索隱新垣,姓;衍,名也。為梁將。故漢有新垣平。
[二] 【索隱】 ‘新垣’은 성이고, ‘衍’은 이름인데 양(위나라)의 장군이 되었다. 옛 한나라에 신원평이 있다.
此時魯仲連適游趙,會秦圍趙,聞魏將欲令趙尊秦為帝,乃見平原君曰:「事將柰何?」平原君曰:「勝也何敢言事!前亡四十萬之眾於外,今又內圍邯鄲而不能去。魏王使客將軍新垣衍令趙帝秦[一],今其人在是。勝也何敢言事!」魯仲連曰:「吾始以君為天下之賢公子也,吾乃今然後知君非天下之賢公子也。梁客新垣衍安在?吾請為君責而歸之。」平原君曰:「勝請為紹介[二]而見之於先生。」平原君遂見新垣衍曰:「東國有魯仲連先生者,今其人在此,勝請為紹介,交之於將軍。」新垣衍曰:「吾聞魯仲連先生,齊國之高士也。衍人臣也,使事有職,吾不願見魯仲連先生。」平原君曰:「勝既已泄之矣。」新垣衍許諾。
이 때 노중련이 조나라에 가서 유세하였는데 진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는 것을 만났는데 위나라 장군이 조나라로 하여금 진나라를 높여 황제로 하고자 한다는 것을 듣고 이에 평원군을 만나 말하기를 “일을 장차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했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앞서 40만의 무리를 밖에서 잃었고, 지금 또한 안으로 한단이 포위되어 제거하지 못합니다. 위나라 왕이 객장군 신원연으로 하여금 조나라가 진나라를 皇帝라 하게하는데 지금 그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어찌 감히 일을 말할 수 있을까!” 했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그대(평원군)를 천하의 현명한 공자라 여겼는데 나는 지금 이후로 그대(평원군)가 천하의 현명한 공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위나라의 객 신원연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그대(평원군)을 위하여 꾸짖어서 돌아가게 할 것을 청합니다.” 했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내가 소개하여 선생이 만날 수 있기를 청하겠습니다.“ 했다. 평원군이 드디어 신원연을 만나 말하기를 “동쪽 나라에 노중련 선생이라는 자가 있는데 지금 그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내개 소개하여 장군과 사귈 것을 청합니다.” 했다. 신원연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노중련 선생은 제나라의 뜻이 크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선비라고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하로 사신의 일로 맡은 일이 있으니 내가 노중련 선생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했다. 평원군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그것(신원연이 있는 곳)을 누설하였습니다.”하니 신원연이 허락하였다.
[一] 索隱新垣衍欲令趙尊秦為帝也。
【索隱】 신원연이 조나라로 하여금 진나라를 높여 황제라 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二] 集解郭璞曰:「紹介,相佑助者。」 索隱按:紹介猶媒介也。且禮,賓至必因介以傳辭。紹者,繼也。介不一人,故禮云「介紹而傳命」是也。
[二] 【集解】 곽복이 말하기를 “‘소개’는 서로 돕는 자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소개’는 ‘매개’와 같다. 또한 『예기』에 “손님이 이르면 반드시 소개하는 이가 말을 전한다.” 했다. ‘紹’는 잇는 것이다. ‘개’는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기』에 “소개하여 명을 전한다.”한 것이 이것이다.
魯連見新垣衍而無言。新垣衍曰:「吾視居此圍城之中者,皆有求於平原君者也;今吾觀先生之玉貌,非有求於平原君者也,曷為久居此圍城之中而不去?」魯仲連曰:「世以鮑焦為無從頌而死者,皆非也。[一]眾人不知,則為一身。[二]彼秦者,棄禮義而上首功之國也,[三]權使其士,虜使其民。[四]彼即肆然而為帝,[五]過[六]而為政於天下,[七]則連有蹈東海而死耳,吾不忍為之民也。[八]所為見將軍者,欲以助趙也。」
노중련이 신원련을 만났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 신원연이 말하기를 “내가 이 포위된 성안에 있는 자들을 보니 모두 평원군에게 구하는 것이 있는데 지금 내가 선생의 옥 같은 모습을 보니 평원군에게 구하는 것이 있지 않은데 어찌하여 오래 동안 이 포위된 성안에 머무는 것입니까?” 했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포초가 스스로 너그럽지 않아 죽음을 취한 자라 하는데 모두 잘못입니다. 여러 사람이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합니다. 저 진나라는 예와 의를 버리고 공을 높이는 나라이니 권세와 속임수로 그 선비를 부리고 종으로 그 백성을 부립니다. 저리도 함부로 함에 나아가 황제가 되어 잘못 천하에 정사를 하면 곧 저는(노중련) 동해에 빠져 죽음이 있을 뿐이니 제가(노중련) 차마 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장군을 뵙는 것은 조나라를 돕고자 해서입니다.” 했다.
[一] 集解鮑焦,周之介士也。見莊子。索隱從頌者,從容也。世人見鮑焦之死,皆以為不能自寬容而取死,此言非也。正義韓詩外傳云:「姓鮑,名焦,周時隱者也。飾行非世,廉潔而守,荷擔採樵,拾橡充食,故無子胤,不臣天子,不友諸侯。子貢遇之,謂之曰:『吾聞非其政者不履其地,汙其君者不受其利。今子履其地,食其利,其可乎?』鮑焦曰:『吾聞廉士重進而輕退,賢人易愧而輕死。』遂抱木立枯焉。」按:魯仲連留趙不去者,非為一身。
[一] 【集解】 포초는 주나라의 절개 있는 선비인데 장자에 보인다. 【索隱】 ‘종송’은 조용함이다. 세상 사람들이 포초의 죽음을 보고 모두 는히 스스로에게 너그럽지 못하여 죽음을 취하였다. 하는데 이 말은 잘못이다. 【正義】 『한시외전』에 “성은 포이고, 이름은 초이니 주나라 때의 은자이다. 행실을 경계하고 세상을 비난하며 청렴하고 깨끗함을 지켜서 짐을 지고 땔감을 채취하며, 도토리를 주워 배를 채웠다. 그러므로 자식이 없고, 천자에 신하노릇 하지 않았으며 제후를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자공이 그를 만나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그 정사를 하지 않는 자는 그 땅을 밟지 않고, 그 임금을 더럽힌 자는 그 이익을 받지 않는다. 합니다. 지금 그대는 그 땅을 밟고 그 이익을 먹는 것이 옳은가?’ 하니 포초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청렴한 선비는 나아가는 것을 신중히 하고, 물러남을 가벼이 여기고, 어진 사람은 쉽게 부끄러워하고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나무를 끌어안고 서서 죽었다.” 했다. 살펴보니 노중련이 조나라에 머물고 떠나지 않은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二] 索隱言眾人不識鮑焦之意,焦以恥居濁世而避之,非是自為一身而憂死。事見莊子也。
[二] 【索隱】 여러 사람들이 포초의 뜻을 알지 못하고 포초가 어지러운 세상에 살게됨을 부끄럽게 여겨 숨은 것이고, 이것이 자신을 위하여 근심하다 죽은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일이 『장자』에 보인다.
[三] 集解譙周曰:「秦用衛鞅計,制爵二十等,以戰獲首級者計而受爵。是以秦人每戰勝,老弱婦人皆死,計功賞至萬數。天下謂之『上首功之國』,皆以惡之也。」 索隱秦法,斬首多為上功。謂斬一人首賜爵一級,故謂秦為「首功之國」也。
[三] 【集解】 초주가 말하기를 “진나라는 상앙의 계책을 써서 작의 등급을 12개로 제정하여 전투에서 얻은(벤) 수급(머리)을 헤아려 작을 주었다. 이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은 매번 전투에서 이겼지만 노약자와 부인들은 모두 죽었고, 공을 헤아려 상을 준 것이 만 명에 이르렀다. 천하가 그것을 일러 ‘머리를 올리는(바치는) 것으로 공을 삼는 나라’라 하여 모두 미워하였다.” 했다. 【索隱】 진나라 법에 “머리를 벤 것이 많은 것을 최고의 공으로 한다.”하였다. 한 사람의 머리를 베면 작 1급을 내리기 때문에 진나라를 ‘머리를 공으로 삼는 나라.’라 한 것이다.
[四] 索隱言秦人以權詐使其戰士,以奴虜使其人。言無恩以恤下。
[四] 【索隱】 진나라 사람들은 권세와 속임으로써 그 전사를 부리고, 그 사람을 부리기를 노예와 종처럼 하는 것을 말하니 은혜로서 아랫사람을 구휼함이 없다는 말이다.
[五] 索隱肆然猶肆志也。
[五] 【索隱】 ‘사연’은 ‘사지(뜻을 함부로 함)와 같다.
[六] 正義至「過」字為絕句。肆然其志意也。言秦得肆志為帝,恐有烹醢納筦,遍行天子之禮。過,失也。
[六] 【正義】 ‘과’자는 문구를 끊기 위함이다. ‘그 뜻을 함부로 하는 것’인데 진나라가 뜻을 함부로 하여 황제가 되고, 삶고, 젓 담그고, 옥에 들어가고 두루 천자의 예가 행해지는 것을 두려워함을 말한다. ‘과’는 잘못이다.
[七] 索隱謂以過惡而為政也。
[七] 【索隱】 잘못된 악으로써 정사를 함을 말한다.
[八] 正義若趙、魏帝秦,得行政教於天下,魯連蹈東海而溺死,不忍為秦百姓。
[八] 【正義】 만약 조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를 황제로 섬겨서 천하에 정사와 교화가 행해진다면 노연중이 동해를 밟아 빠져 죽고 차마 진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新垣衍曰:「先生助之將柰何?」魯連曰:「吾將使梁及燕助之,齊、楚則固助之矣。」新垣衍曰:「燕則吾請以從矣;若乃梁者,則吾乃梁人也,先生惡能使梁助之?」魯連曰:「梁未睹秦稱帝之害故耳。使梁睹秦稱帝之害,則必助趙矣。」
신원연이 말하기를 “선생은 장차 어떻게 도울 것입니까?” 하니 노중연이 말하기를 “나는 장차 양(위나라)와 연나라로 하여금 돕게 할 것이며, 제나라와 초나라는 본래 돕고 있습니다.” 했다. 신원연이 말하기를 “연나라는 곧 내가 다르기를 청합니만 양(위나라) 같은 경우에는 곧 내가 위나라 사람인데 선생은 어떻게 돕도록 할 것입니까?” 했다. 노중연이 말하기를 “양(위나라)은 아지 진나라가 황제를 일컬음의 폐해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양(위나라)으로 하여금 진나라가 황제를 일컬음의 폐해를 보게 한다면 곧 반드시 조나라를 도울 것입니다.” 했다.
新垣衍曰:「秦稱帝之害何如?」魯連曰:「昔者齊威王嘗為仁義矣,率天下諸侯而朝周。周貧且微,諸侯莫朝,而齊獨朝之。居歲餘,周烈王崩,[一]齊後往,周怒,赴於齊[二]曰:『天崩地坼,天子下席。[三]東藩之臣因齊後至,則斮。』[四]齊威王勃然怒曰:『叱嗟,而母婢也!』[五]卒為天下笑。故生則朝周,死則叱之,誠不忍其求也。彼天子固然,其無足怪。」
신원연이 말하기를 “진나라가 황제를 일컳는 폐해는 어떤 것입니까?” 노중연이 말하기를 “옛날 제나라 위왕이 일찍이 仁義를 행하여 천하 제후를 거느리고 주나라에 조회하였습니다. 주나라가 가난하고 또 미약해지자 제후들이 조회하지 않았으나 제나라만은 홀로 조회하였습니다. 1년 후 주나라 열왕이 죽었는데 제나라가 늦게 가니 주나라가 노하여 제나라에 알려 말하기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져 천자가 자리를 내려왔습니다. 동쪽 번병의 신하인 인제(제나라 위왕의 이름)가 늦게 이르니 곧 벨 것이다.’ 했다. 제나라 위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꾸짖으면서 (너의)어미는 종 이었다!”하니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는 곧 주나라에 조회 했지만 죽고 나서는 곧 아들을 꾸짖었으니 진실로 요구를 참지 못한 것입니다. 저 천자가 진실로 그러하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烈王十年崩,威王之七年。」 正義周本紀及年表云烈王七年崩,齊威王十年也,與徐不同。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열왕은 재위 16년에 죽었으니 위왕 7년이다.” 했다. 【正義】 주 본기와 연표에 “열왕은 재위 7년에 죽었는데 제나라 위왕 10년이다.”하니 서광과는 같지 않다.
[二] 正義鄭玄云:「赴,告也。」今文「赴」作「訃」。
[二] 【正義】 정현이 말하기를 “‘赴’는 ‘告(알리다)’”라 했다. 지금 글에는 ‘赴’를 ‘訃’라 썼다.
[三] 索隱按:謂烈王太子安王驕也。下席,言其寢苫居廬。
[三] 【索隱】 살펴보니 열왕의 태자 안왕 교를 말한다. ‘下席’은 거적자리에서 자고 여막에서 사는 것이다.
[四] 集解公羊傳曰:「欺三軍者其法斮。」何休曰:「斮,斬也。」
[四] 【集解】 「공양전」에 “三軍을 속인 자는 그 법에 머리를 벤다.” 했고, 하휴는 “‘斮’은 ‘斬(베다)’이다.” 했다.
[五] 正義罵烈王后也。
[五] 【正義】 열왕의 후(왕비)를 욕한 것이다.
新垣衍曰:「先生獨不見夫僕乎?十人而從一人者,寧力不勝而智不若邪?畏之也。」[一]魯仲連曰:「嗚呼!梁之比於秦若僕邪?」新垣衍曰:「然。」魯仲連曰:「吾將使秦王烹醢梁王。」新垣衍怏然不悅,曰:[二]「噫嘻,[三]亦太甚矣先生之言也!先生又惡能使秦王烹醢梁王?」魯仲魯曰:「固也,吾將言之。昔者九侯、鄂侯、[四]文王,紂之三公也。九侯有子而好,獻之於紂,紂以為惡,醢九侯。鄂侯爭之彊,辯之疾,故脯鄂侯。文王聞之,喟然而歎,故拘之牖里之庫百日,[五]欲令之死。曷為與人俱稱王,卒就脯醢之地?齊湣王之魯,夷維子[六]為執策而從,謂魯人曰:『子將何以待吾君?』魯人曰:『吾將以十太牢待子之君。』夷維子曰:『子安取禮而來[待]吾君?彼吾君者,天子也。天子巡狩,諸侯辟舍,[七]納筦籥,[八]攝衽抱机,[九]視膳於堂下,天子已食,乃退而聽朝也。』魯人投其籥,不果納。[一0]不得入於魯,將之薛,[一一]假途於鄒。當是時,鄒君死,湣王欲入弔,夷維子謂鄒之孤曰:『天子弔,主人必將倍殯棺,設北面於南方,然后天子南面弔也。』[一二]鄒之群臣曰:『必若此,吾將伏劍而死。』固不敢入於鄒。鄒、魯之臣,生則不得事養,死則不得賻襚,[一三]然且欲行天子之禮於鄒、魯,鄒、魯之臣不果納。[一四]今秦萬乘之國也,梁亦萬乘之國也。俱據萬乘之國,各有稱王之名,睹其一戰而勝,欲從而帝之,是使三晉之大臣不如鄒、魯之僕妾也。且秦無已而帝,則且變易諸侯之大臣。彼將奪其所不肖而與其所賢,奪其所憎而與其所愛。彼又將使其子女讒妾為諸侯妃姬。處梁之宮。梁王安得晏然而已乎?而將軍又何以得故寵乎?」
신원연이 말하기를 “선생은 어지 저 종들을 보지 못합니까? 10사람으로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이 어찌 힘이 낫지 않고 지혜가 같지 않아서이겠습니까?(어찌 힘이 부족하고 지혜가 모자라서 이겠습니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아! 위나라를 진나라에 비교하는 것이 종과 같습니까?” 하니 신원연이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했다. 노중련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진나라 왕으로 하여금 위나라 왕을 삶고 젓갈을 담그게(소금에 절이게) 할 것입니다.”하니 신원연이 불만스러워하며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아아 또한 너무 심합니다. 선생의 말이여! 선생이 또한 어찌 진나라 왕으로 하여금 위나라 왕을 삶고, 젓갈 담그게(소금에 절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노중노(연)이 말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장군께 말하겠습니다. 옛날 구후, 악후, 문왕은 은나라 주 임금의 삼공이었습니다. 구후는 자식이 있었는데 아름다워서 주 임금에게 바쳤으나 주 임금은 못 생겼다 여겨서 구후로 젓갈을 담았습니다.(소금에 절였습니다.) 악후는 강하게 간언하고 말을 급하게 하였기 때문에 악후를 포 떠 죽였습니다. 문왕이 그것을 듣고 서글프게 탄식하였기 때문에 잡아서 유리의 감옥에 100일간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어찌 다름 사람과 함께 같이 왕을 칭하다가 끝내 포를 뜨고 소금에 절여지는 자리에 나아가려 하십니까? 했다. 제나라 민왕이 노나라에 갔을 때 이유자가 채찍을 잡고 따르면서 노나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장차 무엇을 가지고 우리 임금을 대접하려는가?’하니 노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장차 十太牢를 가지고 그대의 임금을 대접하려합니다.’ 했다. 이유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어떤 예를 취하여(어느 등급의 예로) 와서 우리 임금을 대접하려 하는가? 저 우리 임금은 천자이다. 천자가 순수하면 제후는 집을 피하고(내 주고) 창고와 성문의 열쇠를 바치며 옷깃을 거두어 책상을 둘러싸며 대청 아래서 음식을 보다가 천자가 밥 먹기를 마치면 이에 물러나 조정에서 정사를 듣는다.’ 했다. 노나라 사람들이 그 열쇠를 던지고(문을 닫아걸고)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노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차 설 땅에 가는데 추나라에서 길을 발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추나라의 임금이 죽자 민왕이 조문하러 들어가고자 하니 이유자가 추나라의 고(추나라 군주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천자가 조문하는데 주인은 반드시 빈소와 관을 등지고 남쪽 방향에서 북쪽을 향하며 그런 후에 천자가 남쪽을 향하여 조문한다. 했다. 추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이 같이 해야 한다면 나는 장차 검에 엎드려 죽을 것이다.’하니 감히 추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추나라와 노나라의 신하들이 살아서는 곧 섬기고 기름을 얻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제물과 수의를 얻지 못하였으면서도 또한 천자의 예를 추나라와 노나라에서 행하고자 하니 추나라와 노나라의 신하들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는 1만 대의 수레를 낼 수 있는 나라이고, 양(위나라)이 또한 1만대의 수레를 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모두 1만대의 수레에 근거하는 나라로 각기 왕을 칭하는 이름이 있는데, 한 번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따라서 황제라 하고자 한다면 이는 三晉의 대신들로 하여금 추나라와 노나라의 종과 첩보다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가 그침 없이 황제라 하면 곧 또한제후의 대신들을 바꿀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현명하지 못한 이에게 지위를 빼앗아 그 현명한 이에게 주고, 그 미워하는 이에게 지위를 빼앗아 그 사랑하는 이에게 줄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장차 그 자녀와 간사한 첩을 제후의 비빈으로 삼아 위나라의 궁에 있게 할 것입니다. 위나라의 왕이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장군이 또한 어찌 옛날의 총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一] 索隱言僕夫十人而從一人者,寧是力不勝,亦非智不如,正是畏懼其主耳。
[一] 【索隱】 종 10명이 한 사람을 따르는 것이 어찌 이 힘이 낫지 않아서이며, 도한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바로 이 주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뿐임을 말한 것이다.
[二] 正義怏,於尚反。
[二] 【正義】 ‘怏’은 ‘於’와 ‘尙’의 反이다.
[三] 索隱上音依。噫者,不平之聲。下音僖。嘻者,驚恨之聲。
[三] 【索隱】 위의 음은 ‘依’이다. ‘噫’는 불평하는 소리이다. 아래의 음은 ‘僖’이다. ‘噫’는 놀라고 한탄하는 소리이다.
[四] 集解徐廣曰:「鄴縣有九侯城。九,一作『鬼』。鄂,一作『邢』。」 正義九侯城在相州滏陽縣西南五十里。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업현에 구후성이 있다. ‘九’는 ‘鬼’라고도 쓴다. ‘鄂’은 ‘邢’이라고도 쓴다.” 했다. 【正義】 구후성은 상주 부양현 서남쪽 50리에 있다.
[五] 正義相州蕩陰縣北九里有羑城。
[五] 【正義】 상주 탕음현 북쪽 9리에 유성이 있다.
[六] 索隱按:維,東萊之邑,其居夷也,號夷維子。故晏子為萊之夷維人是也。 正義密州高密縣,古夷安城。應劭云「故萊夷維邑也」。蓋因邑為姓。子者,男子之美號。又云子,爵也。
[六] 【索隱】 살펴보니 ‘維’는 동래의 읍인데 오랑캐가 살아서 ‘이유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안자』에 ‘萊의 이유인’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正義】 밀주 고밀현이 옛 이안성이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내이유읍’이다.” 했다. 아마도 읍으로 인하여 성으로 삼았을 것이다. ‘子’는 남자를 좋게 부르는 것이다. 또 ‘子’는 ‘爵’이다.
[七] 索隱辟音避。避正寢。案:禮「天子適諸侯,必舍(於)[其]祖廟」。
[七] 【索隱】 ‘辟’의 음은 ‘避’이다. 正寢(제사를 지내는 몸채의 방)을 피하는 것이다. 살펴보니 『예기』에 천자가 제후에게 가면 반드시 그 조상의 사당에 머문다.
[八] 索隱音管藥。
[八] 【索隱】 음은 管藥이다.
[九] 索隱音紀。正義衽音而甚反。
[九] 【索隱】 음은 ‘紀’이다. 【正義】 ‘衽’의 음은 ‘而’와 ‘甚’의 反이다.
[一0] 索隱謂闔內門不入齊君。正義籥即鑰匙也。投鑰匙於地。
[一0] 【索隱】 내문을 닫아 제나라 임금을 들이지 않은 것이다. 【正義】 ‘龠’은 곧 ‘鑰匙’이다. 약시를 땅에 던진 것이다.
[一一] 正義薛侯故城在徐州滕縣界也。
[一一] 【正義】 설땅 제후의 옛 성은 서주 등현 경계에 있다.
[一二] 索隱倍音佩。謂主人不在殯東,將背其殯棺立西階上,北面哭,是背也。天子乃於阼階上,南面而弔之也。
[一二] 【索隱】 ‘倍’의 음은 ‘佩’이다. 주인이 빈소의 동쪽에 있지 않고 장차 그 빈소의 관을 등지고 서쪽 계단 위에 서서 북쪽을 향하여 곡하는데 이것을 ‘등진다.’는 것이다. 천자가 이에 동쪽 계단 위에 올라 남쪽을 향하여 조문한다.
[一三] 正義衣服曰襚,貨財曰賻,皆助生送死之禮。
[一三] 【正義】 의복을 ‘襚’라 한다. 재물을 ‘賻’라 하는데 모두 산 자가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을 돕는 예이다.
[一四] 索隱謂時君弱臣彊,故鄒、魯君生時臣並不得盡事養,死亦不得行賻襚之禮。然齊欲行天子禮於鄒、魯,鄒、魯之臣皆不果納之,是猶秉禮而存大體。
[一四] 【索隱】 이 때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였기 때문에 추나라와 노나라의 임금이 살아있을 때 신하들이 아울러 섬기고 기름을 얻지 못하였고, 죽고 나서는 재물과 수의의 예를 행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제나라가 천자의 예를 추나라와 노나라에 행하고자 하니 추나라와 노나라의 신하들이 모두 끝내 들이지 않는 이것이 오히려 예를 잡고 대체를 보존하는 것이다.
於是新垣衍起,再拜謝曰:「始以先生為庸人,吾乃今日知先生為天下之士也。吾請出,不敢復言帝秦。」秦將聞之,為卻軍五十里。適會魏公子無忌奪晉鄙軍以救趙,擊秦軍,秦軍遂引而去。
이에 신원연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사례하며 말하기를 “처음 선생을 평범한 사람이라 여겼으나 내가 곧 오늘 선생이 천하의 선비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나가서 감히 다시는 진나라에 稱帝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진나라 장수가 그것을 듣고 군대를 50리 물렸다. 때마침 위나라 공자를 만나 진나라 비 땅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진나라 군대를 치니 진나라 군대가 드디어 이끌고 떠났다.
於是平原君欲封魯連,魯連辭讓(使)者三,終不肯受。平原君乃置酒,酒酣起前,以千金為魯連壽。魯連笑曰:「所貴於天下之士者,為人排患釋難解紛亂而無取也。即有取者,是商賈之事也,而連不忍為也。」遂辭平原君而去,終身不復見。
이에 평원군이 노중련을 봉하고자 하니 노중련이 세 번이나 사양하며 긑내 즐겨 받지 않았다. 평원군이 이에 술을 두고 술이 얼큰해지자 앞에 일어나 천금으로써 노중련을 축수하였다. 노중련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의 선비들에게 귀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근심을 밀어내고, 어려움을 풀고, 분란을 풀되 취함이 없는 것입니다. 곧 취함이 있는 자는 이는 장사꾼의 일이니 제가 차마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했다. 마침내 평원군을 하직하고 떠나서 죽을 때까지 다시 보지 않았다.
其後二十餘年,燕將攻下聊城,[一]聊城人或讒之燕,燕將懼誅,因保守聊城,不敢歸。齊田單攻聊城[二]歲餘,士卒多死而聊城不下。魯連乃為書,約之矢以射城中,遺燕將。書曰:
20년 후 연나라 장수가 요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니 요성의 사람들이 중에 어떤 이가 연나라 장수를 헐뜯으니 연나라 장수가 죽음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요성을 지키며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제나라 전단이 요성을 공격한지 1년이 지나 사졸이 많이 죽었으되 요성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노중련이 이에 글을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나라 장수에게 전했다. 글에 말하기를
[一] 正義今博州縣也。
[一] 【正義】 지금의 박주현이다.
[二] 集解徐廣曰:「案年表,田單攻聊城在長平後十餘年也。」 索隱按:徐廣據年表,以為田單攻聊城在長平後十餘年耳,言「三十餘年」,誤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연표」를 살펴보니 전단이 요성을 공격한 것은 장평 전투 10년 뒤에 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서광이 「연표」에 근거하여 전단이 요성을 공격한 것은 장평전투 10년 뒤라 하였으니 30년이라 말한 것은 잘못이다.
吾聞之,智者不倍時而棄利,勇士不卻死而滅名,[一]忠臣不先身而後君。今公行一朝之忿,不顧燕王之無臣,非忠也;殺身亡聊城,而威不信於齊,非勇也;功敗名滅,後世無稱焉,非智也。三者世主不臣,說士不載,故智者不再計,勇士不怯死。今死生榮辱,貴賤尊卑,此時不再至,願公詳計而無與俗同。
“내가 들으니 지혜로운 자는 때를 등지고 이로움을 버리지 않고, 용사는 죽음 죽음을 피해 명예를 없애지 않으며, 충신은 자신을 우선하고 임금을 뒤로하지 않는다 합니다. 지금 공이 하루아침의 분노로 행동하여 연나라 왕에게 신하가 없음을 돌아보지 않으니 충이 아닙니다. 몸은 죽고 요성을 잃어 위엄이 제나라에 펼칠 수 없으니 용기가 아닙니다. 공을 무너뜨리고 명예를 잃어 후세에 일컬어짐이 없을 것이니 지혜가 아닙니다. 세 가지는 세상의 임금이 신하 삼지 않으며 유세하는 선비가 싣지 않을 것이기(말하지 않을 것이니)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두 번 헤아리지 않고 용사는 죽음을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생사와 영욕, 귀천과 존비가 이 때 두 번 이르지 않으니 공은 계책을 자세히 하여 속됨과 같이함이 없게 할 것을 원합니다.
[一] 索隱卻死猶避死也。
[一] 【索隱】 ‘卻死’는 ‘避死’와 같다.
且楚攻齊之南陽,[一]魏攻平陸,[二]而齊無南面之心,以為亡南陽之害小,不如得濟北之利大,[三]故定計審處之。今秦人下兵,魏不敢東面;衡秦之勢成,[四]楚國之形危;齊棄南陽,[五]斷右壤,[六]定濟北,[七]計猶且為之也。且夫齊之必決於聊城,公勿再計。今楚魏交退於齊,而燕救不至。[八]以全齊之兵,無天下之規,與聊城共據期年之敝,則臣見公之不能得也。且燕國大亂,君臣失計,上下迷惑,栗腹以十萬之眾五折於外,[九]以萬乘之國被圍於趙,壤削主困,為天下僇笑。國敝而禍多,民無所歸心。今公又以敝聊之民距全齊之兵,是墨翟之守也。[一0]食人炊骨,士無反外之心,是孫臏之兵也。[一一]能見於天下。雖然,為公計者,不如全車甲以報於燕。車甲全而歸燕,燕王必喜;身全而歸於國,士民如見父母,交游攘臂而議於世,功業可明。上輔孤主以制群臣,下養百姓以資說士,[一二]矯國更俗,[一三]功名可立也。亡意亦捐燕棄世,東游於齊乎?[一四]裂地定封,富比乎陶、衛,[一五]世世稱孤,與齊久存,又一計也。此兩計者,顯名厚實也,願公詳計而審處一焉。
또 초나라가 제나라의 남양을 공격하고 위나라는 평육을 공격하고 있으나 제나라는 남쪽을 향할 마음이 없어 남양을 잃는 해침은 적고, 제수 북쪽을 얻는 이로움 크다 여겼기 때문에 계책을 정하고 자세하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내려 보내면 위나라는 감히 동쪽을 향하지 못하게 되고 진나라의 형세가 균형을 이루면 초나라의 형세는 위태로워지고 제나라가 남양을 버리고 오른 쪽 땅을 끊어서 버리고 제수 북쪽을 평정할 것이니 계책은 오히려 또한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저 제나라는 틀림없이 요성을 결단할 것이니 공께서는 거듭 헤아리지(망설이지) 마십시오. 지금 초나라와 위나라가 차례로 제나라에서 물러나는데 연나라의 구원군은 이르지 않습니다. 제나라의 병사는 온전하며 천하의 규제가 없으나 요성은 함께 지키면서 1년 동안 피폐해졌으니 곧 저는 공이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또한 연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임금과 신하는 계책을 잃고, 상하가 미혹하며 율복의 10만 무리가 밖에서 5번 꺽여 수레 1만대를 낼 수 있는 나라이면서도 조나라에 포위당하여 땅은 깍이고 임금은 곤궁하니 천하의 욕보임과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피폐해지고 재앙이 많으니 백성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지금 공이 또한 피폐해진 요성의 백성으로 온전한 제나라의 병사를 막으니 이는 묵적의 지킴입니다. 사람을 먹고 뼈를 태우면서도 병사는 밖으로 배반할 마음이 없으니 이는 손빈의 병사입니다. 능력을 천하에 보여준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공을 위한 계책은 수레와 갑옷을 온전히 하여 연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낫습니다. 수레와 갑옷을 온전히 히는 것으로써 연나라에 돌아가면 연나라 왕은 반드시 크게 기뻐할 것이며, 몸을 보존하고 나라에 돌아가면 사민이 부모를 만나는 것처럼 할 것이며, 친구들은 팔뚝을 걷어 올리며 세상에 이야기하여 공업을 밝힐 것입니다. 위로는 외로운 군주를 돕는 것으로써 여러 신하들을 제재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기르는 것으로써 유세하는 이에게 투자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풍속을 바꾸며 공과 명예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럴 뜻이 없다면 도한 연나라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동쪽으로 제나라에서 노니는 것이 어떠합니까? 땅을 갈라 봉지를 정하여 부유함으로는 도와 위에 견주고, 대대로 고를 칭하며 제나라와 함께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이 또한 한 계책입니다. 이 두 계책은 이름을 드러내고 실제를 두터이 하는 것이니 공께서는 자세히 헤아리고 살펴서 한 가지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一] 索隱即齊之淮北、泗上之地也。
[一] 【索隱】 곧 제나라의 회수 북쪽과 사수 가의 땅이다.
[二] 索隱平陸,邑名,在西界。正義兗州縣也。
[二] 【索隱】 ‘평육’은 읍 이름인데 서쪽 경계에 있다. 【正義】 연주현이다.
[三] 索隱即聊城之地也。正義言齊無南面攻楚、魏之心,以為南陽、平陸之害小,不如聊城之利大,言必攻之也。
[三] 【索隱】 곧 요성의 땅이다. 【正義】 제나라가 남쪽을 향하여 초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할 마음이 없고, 남양과 평륙의 해침이 적어서 요성의 이로움이 큰 것보다 못하다. 한 말이니 반드시 공격할 것이라는 말이다.
[四] 索隱此時秦與齊和,故云「衡秦之勢成」也。
[四] 【索隱】 이 때 진나라와 제나라가 화의하였기 때문에 진나라의 영세가 규형을 이루었다. 한 것이다.
[五] 索隱棄楚所攻之泗上也。
[五] 【索隱】 초나라가 공격하는 사수 가를 버리는 것이다.
[六] 索隱又斷絕魏之所攻齊右壤之地平陸是也。言右壤斷棄而不救也。
[六] 【索隱】 또한 위나라가 공격하는 제나라 오른 쪽 땅의 지역을 단절시켰으니 평육이 이것이다. 오른 쪽 땅을 끊어 버리고 구원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七] 索隱志在攻聊城而定濟北也。
[七] 【索隱】 뜻이 요성을 공격하여 제수 북쪽을 평정하는데 있었다.
[八] 索隱按:交者,俱也。前時楚攻南陽,魏攻平陸,今二國之兵俱退,而燕救又不至,是勢危也。
[八] 【索隱】 ‘交’는 ‘俱(함께 하다)’이다. 이에 앞서 초나라가 남양을 공격하고, 위나라가 평육을 공격하다 지금 두 나라의 군대가 함께 물러났으나 연나라의 구원군이 또한 이르지 않으니 이는 형세가 위태로운 것이다.
[九] 集解徐廣曰:「此事去長平十年。」
[九]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이 일은 장평전투로부터 10년 후이다.” 했다.
[一0] 正義如墨翟守宋,卻楚軍。
[一0] 【正義】 묵적이 송나라를 지킨 것처럼 초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이다.
[一一] 正義言孫臏能撫士卒,士卒無二心也。
[一一] 【正義】 손빈이 사졸을 잘 어루만져 사졸들이 두 마음이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一二] 索隱言既養百姓,又資說士,終擬強國也。劉氏云讀「說士」為「銳士」,意雖亦便,不如依字。
[一二] 【索隱】 이미 백성을 기르고 나서 또한 유세하는 선비에게 의지하여 마침내 강한 나라에 비긴다고 말한 것이다. 유씨가 말하기를 “‘說士’는 ‘銳士’”라 하였는데 뜻이 비록 또한 편하지만 본래 글자에 의지하는 것이 낫다.
[一三] 索隱欲令燕將歸燕,矯正國事,改更獘俗也。
[一三] 【索隱】 연나라 장수로 하여금 연나라에 돌아가 나라 일을 바로잡고 피폐해진 풍속을 바꾸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一四] 索隱亡音無。言若必無還燕意,則捐燕而東游於齊乎。
[一四] 【索隱】 ‘亡’의 음은 ‘無’이다. 만약 반드시 연나라에 돌아갈 뜻이 없다면 곧 연나라를 버리고 동쪽으로 제나라에서 노니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말한 것이다.
[一五] 索隱按:延篤注戰國策云「陶,陶朱公也;衛,衛公子荊」,非也。王劭云「魏冉封陶,商君姓衛」。富比陶、衛,謂此也。
[一五] 【索隱】 살펴보니 연독이 『戰國策』에 주석하기를 “‘도’는 도주공이고, ‘위’는 위나라공자 형이다.” 했는데 아니다. 왕소가 말하기를 “위염이 도에 봉해졌고, 상군의 성이 ‘위’이다.” 하였다. 부유하기로는 도와 위에 견줄 수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且吾聞之,規小節者不能成榮名,惡小恥者不能立大功。昔者管夷吾射桓公中其鉤,篡也;遺公子糾不能死,怯也;[一]束縛桎梏,辱也。若此三行者,世主不臣而鄉里不通。鄉使管子幽囚而不出,身死而不反於齊,則亦名不免為辱人賤行矣。臧獲且羞與之同名矣,[二]況世俗乎!故管子不恥身在縲紲之中而恥天下之不治,不恥不死公子糾而恥威之不信於諸侯,故兼三行之過而為五霸首,[三]名高天下而光燭鄰國。曹子[四]為魯將,三戰三北,而亡地五百里。鄉使曹子計不反顧,議不還踵,刎頸而死,則亦名不免為敗軍禽將矣。名高天下而光燭鄰國。曹子[四]為魯將,三戰三北,而亡地五百里。鄉使曹子計不反顧,議不還踵,刎頸而死,則亦名不免為敗軍禽將矣。曹子棄三北之恥,而退與魯君計。桓公朝天下,會諸侯,曹子以一劍之任,枝桓公之心[五]於壇坫之上,顏色不變,辭氣不悖,三戰之所亡一朝而復之,天下震動,諸侯驚駭,威加吳、越。若此二士者,非不能成小廉而行小節也,以為殺身亡軀,絕世滅後,功名不立,非智也。故去感忿之怨,立終身之名;棄忿悁之節,[六]定累世之功。是以業與三王爭流,而名與天壤相獘也。願公擇一而行之。
또 내개 들으니 작은 절개(예절)에 규제되는 자는 영예와 명성을 이룰 수 없고, 작은 부끄러움을 싫어하는 자는 큰 공을 세울 수 없다. 합니다. 옛날에 관이오가 활로 환공을 쏘아 그 허리띠의 갈고리를 맞춘 것은 찬탈이며, 공자 규를 버리고 죽지 않은 것은 비겁함이며, 몸이 얽매이고 차꼬와 수갑을 찬 것은 치욕입니다. 만약 이 세 가지를 행하는 자라면 세상의 임금이 신하로 삼지 않고 향리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고향사람이 사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전에 관자가 갇혔다가 나오지 못하였거나 몸이 죽어 제나라에 돌아가지 못하였다면 곧 또한 다른 사람에게 욕을 당하고 행실이 천하다는 이름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노비가 또한 함께 이름을 같이하는 것을(관이오처럼 취급되는 것) 부끄럽게 여겼을 것인데 하물며 세속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관자는 포승에 묶여 감옥 안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처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부끄러워하고 공자 규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위엄이 제후에게 펴지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였기 때문에 세 가지 행위의 허물을 겸하였으되 (제나라 환공을)오패의 우두머리로 만들어 이름은 천하에 높고 이웃나라에 빛나게 하였습니다. 조자(조말)는 노나라 장수가 되어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하여 땅을 잃은 것이 5백리였습니다. 만약 조자(조말)가 계책을 돌아보지 않고 발꿈치를 돌리지 않음을 의논하여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면 곧 또한 이름이 군대를 무너뜨리고 사로잡힌 장수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조자(조말)가 세 번 패배한 부끄러움을 버리고 물러나 노나라 임금과 계책을 세웠습니다. 환공은 천하에 조공 받으며 제후와 회동하였을 때 조자(조말)는 한 자루 검을 지니고 단상 위에서 환공의 심장을 겨누었는데 얼굴색이 변하지 않고 말의 기운이 어긋나지 않아 세 번 싸움에서 도망한 것을 하루아침에 회복하니 천하가 진동하고 제후들이 놀라며 위엄이 오나라와 월나라에 가해졌습니다. 이 두 선비 같은 자는 작은 청렴을 이루고 작은 예절을 행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신체를 망쳐서 세대를 끊기며 후손을 없게 하면서도 공염을 세우지 못한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분노의 원한을 느끼는 것을 제거하고 죽을 때까지 이름을 세웠고, 분노와 성냄의 절개를 버리고 여러 세대의 공을 정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업적은 三王과 흐름을 다투고, 명성은 하늘과 땅이 서로 없어질 때까지 함께할 것입니다. 공께서는 한 가지를 선택하여 행할 것을 원합니다.
[一] 索隱遺,棄也。謂棄子糾而事小白也。正義管仲傅子糾而魯殺之,不能隨子糾死,是怯懦畏死。
[一] 【索隱】 ‘遺’는 버림이다. 공자 규를 버리고 소백을 섬긴 것을 말한다. 【正義】 관중이 자규의 보좌하였으나 노나라가 자규를 죽일 때 자규를 따라 죽지 못한 것은 이는 겁내고 나약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二] 集解方言曰:「荊、淮、海、岱、燕、齊之閒罵奴曰臧,罵婢曰獲。」
[二] 【集解】 방언에 “‘荊’, ‘淮’, ‘海’, ‘垈’, ‘燕’, ‘齊’의 사이에서는 奴를 업신여겨 ‘臧’, ‘婢’를 업신여겨 ‘獲’이라 한다.” 했다.
[三] 正義按:齊桓最初得周襄王賜文武胙、彤弓矢、大輅,故為五伯首也。
[三] 【正義】 살펴보니 제나라 환공이 가장 처음에 주나라 양왕이 내린 문왕과 무왕을 제사지낸 고기와 붉은 칠한 활과 화살, 대로를 얻었기 때문에 五伯의 우두머리라 한 것이다.
[四] 索隱魯將曹昧是也。
[四] 【索隱】 노나라 장군 조말이 이 사람이다.
[五] 索隱按:枝猶擬也。
[五] 【索隱】 살펴보니 ‘枝’는 ‘擬(헤아리다, 비교하다)’와 같다.
[六] 正義忿,敷粉反。悁,於緣反。
[六] 【正義】 ‘忿’은 ‘敷’와 ‘粉’의 反이다. ‘悁’은 ‘於’와 ‘緣’의 反이다.
燕將見魯連書,泣三日,猶豫不能自決。欲歸燕,已有隙,恐誅;欲降齊,所殺虜於齊甚眾,恐已降而後見辱。喟然歎曰:「與人刃我,寧自刃。」乃自殺。聊城亂,田單遂屠聊城。歸而言魯連,欲爵之。魯連逃隱於海上,曰:「吾與富貴而詘於人,寧貧賤而輕世肆志焉。」[一]
연나라 장군이 노중련의 글을 보고 3일을 울고도 오히려 망설이며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였다. 연나라에 돌아가고자 하나 이미 틈이 있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제나라에 항복하고자 하나 제나라의 매우 많은 무리를 죽이고 포로로 잡았기 때문에 항복한 후 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위연히 탄식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베이느니 차라리 내가 베겠다.” 하고는 곧 스스로 죽었다. 요성이 어지러워지자 전단이 마침내 요성을 도륙하였다. 돌아와 노중련에게 말하고 벼슬을 주려 하였다. 노중련이 도망하여 바닷가에 숨고 말하기를 “나는 부귀와 함께하여 다른 사람에게 굽히느니 차라리 빈천하여도 세상을 가볍게 하고 뜻을 내 마음대로 하겠다.” 했다.
[一] 索隱肆猶放也。
[一] 【索隱】 ‘肆’는 ‘放(놓을 방)’과 같다.
鄒陽者,齊人也。游於梁,與故吳人莊忌夫子、[一]淮陰枚生[二]之徒交。上書而介於羊勝、公孫詭之閒。[三]勝等嫉鄒陽,惡之梁孝王。孝王怒,下之吏,將欲殺之。鄒陽客游,以讒見禽,恐死而負累,[四]乃從獄中上書曰:
추양은 제나라 사람이다. 양(위나라)에서 유세하고 옛 오나라 사람인 장기부자와 회음 매생의 무리와 교류하였다. 글을 올려 양승과 공손궤의 사이에 섞였다. 양승 등이 추양을 시샘하여 위나라 효왕에게 무고하였다. 효왕이 노하여 관리를 보내 장차 죽이려 하였다. 추양이 객으로 유세하다 참소 때문에 잡혀가서 죽고 (이름이)더럽혀짐을 두려워하여 이에 옥중에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一] 索隱忌,會稽人,姓莊氏,字夫子。後避漢明帝諱,改姓曰嚴。
[一] 【索隱】 ‘忌’는 회계 사람인데 성은 장씨이며, 자는 부자이다. 후에 한나라 명제의 휘(이름)을 피하여 성을 고쳐 ‘嚴’이라 하였다.
[二] 索隱名乘,字叔,其子皋,漢書並有傳。蓋以銜枚氏而得姓也。
[二] 【索隱】 이름은 ‘乘’이고, 자는 ‘叔’이며 그 아들은 ‘皋’는 『한서』에 (열)전이 있다. 대개 함매씨로 성을 얻었을 것이다.
[三] 索隱言鄒陽上書自達,而游於二人之閒,或往彼,或往此。介者,言有隔於其閒,故杜預曰「介猶閒也」。
[三] 【索隱】 추양이 글을 올려 스스로 (이름을)도달하게 하여 두 사람의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혹은 거기에 가고, 혹은 여기에 간 것을 말한 것이다. ‘介’는 그 사이에 틈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두예가 “‘介 ’는 ‘閒’과 같다.”고 한 것이다.
[四] 正義諸不以罪為累。
[四] 【正義】 죄로써 더럽혀지지 않음이다.
臣聞忠無不報,信不見疑,臣常以為然,徒虛語耳。昔者荊軻慕燕丹之義,白虹貫日,太子畏之;[一]衛先生為秦畫長平之事,太白蝕昴,而昭王疑之。[二]夫精變天地而信不喻兩主,豈不哀哉!今臣盡忠竭誠,畢議願知,[三]左右不明,[四]卒從吏訊,為世所疑,是使荊軻、衛先生復起,而燕、秦不悟也。願大王孰察之。
“제가 들으니 충은 갚지 않음이 없고, 진실은 의심받지 않는다 하여 제가 항상 그렇다 여겼으나 한갓 빈말일 뿐입니다. 옛날에 형가는 연나라 태자 단의 의를 사모하였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태자 단이 그를 두려워(의심)하였고, 위 선생은 진나라를 위하여 장평의 일을 계획하였으나 태백성이 묘성을 잠식하자 소왕이 그를 의심하였습니다. 대저 정성이 천지를 변하게 하였지만 진실로 두 임금을 깨우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지금 제가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논의를 마치고 알아주기를 원하는데 측근들이 현명하지 못하여 마침내 관리의 심문을 받게 되어 세상의 의심받는 바가 되었으니 이는 형가와 위선생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하여도 연나라와 진나라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깊이 살펴주실 것을 원합니다.
[一] 集解應劭曰:「燕太子丹質於秦,始皇遇之無禮,丹亡去,故厚養荊軻,令西刺秦王。精誠感天,白虹為之貫日也。」如淳曰:「白虹,兵象。日為君。」烈士傳曰:「荊軻發後,太子自相氣,見虹貫日不徹,曰:『吾事不成矣。』後聞軻死,事不立,曰『吾知其然也。』」 索隱烈士傳曰:「荊軻發後,太子自相氣,見虹貫日不徹,曰『吾事不成』。後聞軻死,事不就,曰『吾知其然』。」是畏也。又王劭云「軻將入秦,待其客未發,太子丹疑其畏懼,故曰畏之」,其解不如見虹貫日不徹也。戰國策又云聶政刺韓傀,亦曰「白虹貫日」也。
[一]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이 되었는데 시황제가 무례하게 대우하니 단이 달아났기 때문에 형가를 후하게 길러 서쪽의 진나라 왕을 찌르게 하였습니다.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흰무지개는 군대의 상징이요, 해는 임금이 된다.” 했다. 「열사전」에 “형가가 출발한 후에 태자가 스스로 기운을 살펴보니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나 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구나’ 했고, 후에 형가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는 일에 나아가지 못하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였으니 이는 두려워(의심) 한 것이다.” 했다. 또 왕소가 말하기를 “형가가 장차 진나라에 들어가려다 그 객이 출발하지 않음을 기다리는데 태자 단이 그 두려워함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말한 것이다.” 했다. 그 풀이가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지만 관통하지 못함을 보았다. 한 것과는 같지 않다. 『戰國策』에 또 “섭정이 한괴를 찔렀다 하고, 또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했다.
[二] 集解蘇林曰:「白起為秦伐趙,破長平軍,欲遂滅趙,遣衛先生說昭王益兵糧,乃為應侯所害,事用不成。其精誠上達於天,故太白為之蝕昴。昴,趙地分野。將有兵,故太白食昴。食,干歷之也。」如淳曰:「太白乃天之將軍也。」 索隱服虔云:「衛先生,秦人。白起攻趙軍於長平,遣衛先生說昭王請益兵糧,為穰侯所害,事不成。精誠感天,故太白食昴。昴,趙分也。」如淳云:「太白主西方,秦在西,敗趙之兆也。食謂干歷之也。」又王充云:「夫言白虹貫日,太白食昴,實也。言荊軻之謀,衛先生之策,感動皇天而貫日食昴,是虛也。」
[二] 【集解】 소림이 말하기를 “백기가 진나라를 위하여 조나라를 쳐서 징평군을 깨트리고 마침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여 위선생을 보내 소왕에게 군대와 식량을 더할 것을 설득하게 하였는데 응후의 방해로 일의 쓰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 정성이 위로 하늘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태백성이 묘성을 잠식하였다. 묘성은 조나라 땅과 들을 나눈 것이다. 장차 병란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태백성이 묘성을 먹은 것이다. ‘식’은 어지러워짐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태백은 곧 하늘의 장군이다.” 했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위선생은 진나라 사람이다. 백기가 조나라 군대를 장평에서 공격할 때 위선생을 보내 군대와 식량을 더할 것을 설득하게 하였으나 양후의 방해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태백성이 묘성을 잠식한 것이다. 묘성은 조나라의 땅을 나누는 것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태백성은 서방을 주관하고 진나라는 서족에 있으니 조나라가 무너질 조짐이다. ‘식’은 소요를 일으킴이다.” 했다. 또 왕충이 말하기를 “대저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태백성이 묘성을 먹는 것은 실제임을 말하였고, 형가의 도모와 위선생의 계책이 황천을 감동시켜 해를 꿰뚫고 묘성을 먹었다 한 것은 이는 허구이다.” 했다.
[三] 集解張晏曰:「盡其計議,願王知之也。」
[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그 계책과 논의를 다하여 왕이 그것을 알기를 원한 것이다.” 했다.
[四] 索隱言左右之不明,不欲斥王。
[四] 【索隱】 측근들이 현명하지 못한 것이지 왕을 배척하고자 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昔卞和獻寶,楚王刖之;[一]李斯竭忠,胡亥極刑。是以箕子詳狂,[二]接輿辟世,[三]恐遭此患也。願大王孰察卞和、李斯之意,而後楚王、胡亥之聽,[四]無使臣為箕子、接輿所笑。臣聞比干剖心,子胥鴟夷,[五]臣始不信,乃今知之。願大王孰察,少加憐焉。
옛 날에 변화가 보배를 바쳤는데 초나라 왕이 그를 월형(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하였고, 이사가 충성을 다하였으나 호해는 극형에 처하였다. 이 때문에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 하였고, 접여는 세상을 피하여 이 근심을 만날까 두려워하였다. 대왕께서는 변화와 이사의 뜻을 잘 살핀 후에 초나라 왕과 호해의 일을 자세히 들으셔서 신으로 하여금 기자와 접여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길 원합니다. 신이 들으니 비간은 심장을 갈랐고, 오자서는 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 담겨 강물에 던져졌다 하는데 신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조금은 불쌍함을 더해 주시길 바랍니다.
[一] 集解應劭曰:「卞和得玉璞,獻之武王。武王示玉人,玉人曰『石也』。刖右足。武王沒,復獻文王,玉人復曰『石也』。刖其左足。至成王時,卞和抱璞哭于郊,乃使玉尹攻之,果得寶玉。」 索隱楚人卞和得玉璞事見國語及呂氏春秋。案世家,楚武王名熊通。文王名賢,武王子也。成王,文王子也,名惲。
[一]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변화가 옥 덩이를 얻어 초나라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을 다루는 장인에게 보이니 옥 장인이 말하기를 ‘돌입니다.’ 했다. 오른쪽 발을 베었다. 초나라 무왕이 죽자 다시 초나라 문왕에게 바쳤는데 옥 장인이 다시 ‘돌입니다.’하니 그 왼쪽 발을 베었다. 성왕 때에 이르러 변화가 옥 덩이를 안고 교외에서 크게 울자 이에 옥윤(옥을 감정하는 관리)으로 하여금 다듬게 하였더니 과연 보옥을 얻었다.” 했다. 【索隱】 초나라 사람인 변화가 옥 덩이를 얻은 일은 『국어』와 『여씨춘추』에 보인다. 「세가」를 살펴보니 초나라 무왕의 이름은 ‘웅통’이다. 문왕의 이름은 ‘현’이며 무왕의 아들이다. 성왕은 문왕의 아들이니 이름은 ‘운’이다.
[二] 索隱詳音陽。謂詐為狂也。司馬彪曰「箕子名胥餘」是也。
[二] 【索隱】 ‘詳’의 음은 ‘陽’이니 거짓으로 미친 척하는 것을 말한다. 사마표가 말하기를 “기자의 이름은 ‘서여’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三] 集解張晏曰:「楚賢人,詳狂避世也。」 索隱張晏曰「楚賢人」。高士傳「楚人陸通,字接輿」是也。
[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초나라의 현인이 미친 척하고 세상을 피한 것이다.” 했다. 【索隱】 장안이 말하기를 “초나라 현인이다.” 했다. 「고사전」에 “초나라 사람인 ‘육통’은 자가 ‘접여’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四] 索隱謂以楚王、胡亥之聽為謬,故後之而不用。後猶下也。
[四] 【索隱】 초나라 왕과 호해의 들음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낮추고 쓰지 않은 것이다. ‘후’는 ‘下(낮추다)’와 같다.
[五] 索隱按:韋昭云「以皮作鴟鳥形,名曰『鴟夷』。鴟夷,皮榼也」。服虔曰「用馬革作囊也,以裹尸,投之于江」。
[五] 【索隱】 살펴보니 위소가 말하기를 “가죽으로 솔개 모양을 만들고 ‘鴟夷(치이)’라 이름 하였다. ‘치이’는 가죽 통이다.” 했다. 복건이 말하기를 “말가죽을 써서 주머니를 만든 것인데 속에 시체를 넣어 강에 던진다.” 했다.
諺曰:「有白頭如新,[一]傾蓋如故。」[二]何則?知與不知也。[三]故昔樊於期逃秦之燕,藉荊軻首以奉丹之事;[四]王奢去齊之魏,臨城自剄以卻齊而存魏。[五]夫王奢、樊於期非新於齊、秦而故於燕、魏也,所以去二國死兩君者,行合於志而慕義無窮也。是以蘇秦不信於天下,而為燕尾生;[六]白圭戰亡六城,為魏取中山。[七]何則?誠有以相知也。蘇秦相燕,燕人惡之於王,王按劍而怒,食以駃騠;[八]白圭顯於中山,中山人惡之魏文侯,文侯投之以夜光之璧。何則?兩主二臣,剖心坼肝相信,豈移於浮辭哉!
속담에 말하기를 “흰머리가 나도록 만나도 새로 만난 것과 같고, 수레를 기울여 잠시 얘기를 나누어도 오랜 친구와 같다.”하는데 무슨 말이겠습니까? (상대의 마음을)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번오기가 진나라를 도망하여 연나라에 가서 형가에게 머리를 빌려주면서 태자 단의 일을 받들게 하였고, 왕사는 제나라를 떠나 위나라에 가서 성을 마주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으로써 제나라를 물리치고 위나라를 보존하였습니다. 대저 왕사와 번오기는 제나라와 진나라에서는 새롭고 연나라와 위나라에 연고가 있어서가 아니며 두 나라를 떠나 두 임금을 위해 죽었던 까닭은 (두 임금의 행실이) 뜻에 합치하여 의를 사모함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소진은 천하에 신임 받지 못하였으나 연나라에서 미생처럼 하였고, 백규는 전쟁에서 7개성을 잃었으나 위나라를 위하여 중산을 취하였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진실로 서로 알아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연나라의 재상이 되니 연나라 사람들이 왕에게 그를 폄훼하였어도 연나라 왕은 검을 어루만지며 노하였으며, 말을 잡아먹게 하였고. 백규가 중산에서 드러나자(유명해지자) 중산 사람들이 위나라 문후에게 그를 폄훼하니 문후가 야광의 구슬을 던져 주었습니다. 왜이겠습니까? 두 임금과 두 신하가 심장을 가르고 간을 터트려 서로 믿었기 때문이니 어찌 근거 없는 말에 마음이 옮겨졌겠습니까!
[一] 索隱案:服虔云「人不相知,自初交至白頭,猶如新也」。
[一]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서로 알지 못하다가 처음 사귐으로부터 머리가 희어지기까지 사귀지만 오히려 새로 만난 것과 같은 것이다.” 했다.
[二] 索隱服虔云:「如吳札、鄭僑也。」按:家語「孔子遇程子於途,傾蓋而語」。又志林云「傾蓋者,道行相遇,軿車對語,兩蓋相切,小欹之,故曰傾也。」
[二]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오찰, 정교와 같은 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가어』에 “공자께서 길에서 정자를 만나자 수레를 멈추고 지붕을 기울이고서 말하였다.”했다. 또 『지림』에 “‘傾蓋’는 길을 가다 서로 만나 수레를 마주하고 말하는데 두 수레의 지붕을 서로 가까워져 조금 기우려지기 때문에 ‘경’이라 한 것이다.
[三] 集解桓譚新論曰:「言內有以相知與否,不在新故也。」
[三] 【集解】 『환담심론』에 “안으로 서로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에 달려있지 새로운 것이냐 옛날이냐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했다.
[四] 索隱藉音子夜反。韋昭云:「謂於期逃秦之燕,以頭與軻,使入秦以示信也。」
[四] 【索隱】 ‘藉’의 음은 ‘子’와 夜‘의 反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번오기가 진나라를 도망하여 연나라에 가서 자기의 머리를 형가에게 주고 진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써 믿음을 보인 것을 말한 것이다.” 했다.
[五] 集解漢書音義曰:「王奢,齊人也,亡至魏。其後齊伐魏,奢登城謂齊將曰:『今君之來,不過以奢之故也。夫義不苟生以為魏累。』遂自剄也。」
[五] 【集解】 『한서음의』에 “왕사는 제나라 사람인데 도망하여 위나라에 이르렀다. 그 후 제나라가 위나라를 치자 왕사가 성위에 올라 제나라 장수에게 말하기를 ‘지금 그대가 온 것은 왕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저 의리상 구차히 살아서 위나라에 연루되게 하지 않겠다.”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六] 索隱服虔云:「蘇秦於齊不出其信,於燕則出尾生之信。」韋昭云:「尾生守信而死者。」案:言蘇秦於燕獨守信如尾生,故云「為燕之尾生」也。
[六]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소진이 제나라에서 그 신임을 드러내지(받지) 못하였고, 연나라에서는 곧 미생의 믿음을 드러내었다.(받았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미생은 신뢰를 지키다 죽은 자이다.” 했다. 살펴보니 소진이 연나라에서 홀로 미생과 같이 신뢰를 지켰기 때문에 “연나라의 미생이 되었다.” 한 것이다.
[七] 集解張晏曰:「白圭為中山將,亡六城,君欲殺之,亡入魏,文侯厚遇之,還拔中山。」 索隱案:事見戰國策及呂氏春秋也。
[七]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백규가 중산의 장군이 되어 6개성을 잃자 임금이 죽이려 하니 도망하여 위나라에 들어갔는데 문후가 두터이 대우하니 돌아가 중산을 점령하였다.” 했다. 일이 『戰國策』과 『呂氏春秋』에 보인다.
[八] 集解漢書音義曰:「駃騠,駿馬也,生七日而超其母。敬重蘇秦,雖有讒謗,而更膳以珍奇之味。」 索隱案:字林云「決啼二音,北狄之良馬也,馬母」。 正義食音寺。駃騠音決蹄。北狄良馬也。
[八] 【集解】 『한서음의』에 “‘駃騠(결제)’는 나고 7일이 지나면 그 어미를 뛰어 넘는다. 소진을 공격하고 소중하게 여겨 비록 참소하고 비방함이 있어도 다시 진기한 맛(맛 좋은) 음식으로써 먹인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자림』에 “‘결’과 ‘제’ 두 음이니 북쪽 오랑캐의 좋은 말인데 말의 어미이다.” 했다. 【正義】 ‘食’의 음은 ‘寺’이다. ‘駃騠’의 음은 ‘決蹄’이다. 북쪽 오랑캐의 좋은 말이다.
故女無美惡,入宮見妒;士無賢不肖,入朝見嫉。昔者司馬喜髕腳於宋,卒相中山;[一]范睢摺脅折齒[二]於魏,卒為應侯。此二人者,皆信必然之畫,捐朋黨之私,挾孤獨之位,故不能自免於嫉妒之人也。是以申徒狄自沈於河,[三]徐衍負石入海。[四]不容於世,義不苟取,比周於朝,以移主上之心。故百里奚乞食於路,繆公委之以政;甯戚飯牛車下,而桓公任之以國。[五]此二人者,豈借宦於朝,假譽於左右,然後二主用之哉?感於心,合於行,親於膠漆,昆弟不能離,豈惑於眾口哉?故偏聽生姦,獨任成亂。昔者魯聽季孫之說而逐孔子,[六]宋信子罕之計而囚墨翟。[七]夫以孔、墨之辯,不能自免於讒諛,而二國以危。何則?眾口鑠金,[八]積毀銷骨也。[九]是以秦用戎人由余而霸中國,齊用越人蒙而彊威、宣。[一0]此二國,豈拘於俗,牽於世,繫阿偏之辭哉?公聽並觀,垂名當世。[一一]故意合則胡越為昆弟,由余、越人蒙是矣;不合,則骨肉出逐不收,朱、象、管、蔡是矣。今人主誠能用齊、秦之義,後宋、魯之聽,則五伯不足稱,三王易為也。
그러므로 여자는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구분 없이 궁에 들어가면 강한 시기를 당하였고, 선비는 현명하거나 현명하지 않음을 구분 하지 않고 조정에 들어가면 미움을 당하였습니다. 옛날 사마희는 송나라에서 발을 잘리는 형벌을 당하였으나 마침내 중산에서 재상이 되었고, 범수는 위나라에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부러졌으나 마침내 응후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반드시 그러한 계획을 믿고 붕당(무리 짓다)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외로운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스스로 질투를 면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도적은 스스로 강에 빠져 죽었고, 서연이 돌을 지고 바다에 들어가 죽었습니다. 세상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의리상 구차히 취하고 조정에서 두루 친하여 임금의 마음을 옮기려하지(바꾸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백리해는 길에서 걸식하였으나 목공이 정사를 맡겼고, 영척은 소 수레 아래서 밥 먹었으되 환공이 나라를 맡겼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찌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빌리고, 측근에게 칭찬을 빌린 후에야 두 임금이 그를 등용하였습니까? 마음에 느끼고, 행실에 부합하며, 아교와 옻칠처럼 친밀하여 형제처럼 떨어질 수 없으면 어찌 여러 사람의 입에 의혹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치우쳐 듣는 것은 간사함을 낳고, 독단적인 맡음은 어지러움을 이룹니다, 옛 날 노나라는 계손씨의 말을 듣고 공자를 축출하였고, 송나라는 자한의 계책을 믿고 묵적을 가두었습니다. 저 공자와 묵적의 말 잘하는 것으로도 스스로 참소하고 아첨하는 것을 면할 수 없었으니 두 나라가 위태롭게 된 이유입니다. 왜 이겠습니까? 여러 사람의 입(말)은 쇠를 녹이고, 비방이 쌓이면 뼈를 녹입니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오랑캐인 전여를 등용하여 중국을 제패하였고, 제나라는 월나라 사람인 몽을 등용하여 강한 위엄을 펼쳤습니다. 이 두 나라가 어찌 속됨에 굽히고, 세상에 이끌려 아첨하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말에 매었겠습니까? 공께서는 사사로움을 말하는 것을 듣지 말고, 가지런히 동등하게 관찰하여 이름을 지금 세상에 드리우소서. 그러므로 뜻을 합하면 곧 월나라가 형제가 되고, 유여와 월나라 사람인 몽이 이들이 되고, (뜻이)합하지 않으면 곧 골육이 축출되어도 거두지 않으니 주, 상, 관, 채가 이러하였습니다. 지금의 임금들은 진실로 제나라와 진나라의 의로움은 듣고, 송나라와 노나라의 (잘못된)들음을 뒤로하면 곧 五伯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부족하고, 三王이 쉽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一] 集解晉灼曰:「司馬喜三相中山。」蘇林曰:「六國時人,被此刑也。」 索隱事見戰國策及呂氏春秋。蘇林云:「六國時人,相中山也。」
[一]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사마희는 세 번 중산의 재상이 되었다.” 했고, 소림은 “6국 때의 사람으로 이 형벌을 받았다.” 했다. 【索隱】 일이 『전국책』과 『여씨춘추』에 보인다. 소림이 말하기를 “6국 때의 사람으로 중산의 재상이다.” 했다.
[二] 索隱案:應侯傳作「折脅摺齒」是也。說文「拉,摧也」,音力答及。
[二] 【索隱】 살펴보니 「응후전」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부러졌다.” 한 것이 이것이다. 『설문』에 “‘拉’은 ‘催(재촉할 최)’”라 했다. 음은 ‘力’과 ‘答’의 反이다.
[三] 集解漢書音義曰:「殷之末世人。」 索隱申屠狄。按:莊子「申屠狄諫而不用,負石自投河」。韋昭云「六國時人」。漢書云自沈於雍河,服虔曰雍州之河,又新序作「抱甕自沈於河」,不同也。
[三] 【集解】 『한서음의』에 “은나라 말기의 사람이다.” 했다. 【索隱】 신도적이다. 살펴보니 『장자』에 “신도적이 간하였으되 쓰이지 않자 돌을 지고 스스로 강에 몸을 던졌다.” 했다. 위소 말하기를 “6국시대 사람이다.” 『한서』에 “스스로 옹하에 빠졌다.” 했고, 복건이 말하기를 “옹주의 강으로 또한 새로운 서문에는 ‘단지를 안고 스스로 강에 빠졌다.” 하여 같지 않다.
[四] 集解列士傳曰:「周之末世人。」 索隱亦見莊子。張晏曰「負石欲沈」。
[四] 【集解】 『열사전』에 “주나라 말기의 사람이다.”했다. 【索隱】 또한 『장자』에 보인다. 장안이 말하기를 “돌을 지고 가라앉고자 한 것이다.” 했다.
[五] 集解應劭曰:「齊桓公夜出迎客,而甯戚疾擊其牛角商歌曰:『南山矸,白石爛,生不遭堯與舜禪。短布單衣適至骭,從昏飯牛薄夜半,長夜曼曼何時旦?』公召與語,說之,以為大夫。」 索隱事見呂氏春秋。商歌謂為商聲而歌也,或云商旅人歌也,二說並通。矸音公彈反。矸者,白淨貌也。顧野王又作岸音也。禪音膳,如字讀,協韻失之故也。埤蒼云「骭,脛也」。字林音下諫反。
[五]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제나라 환공이 밤에 나가 손님을 맞이하였는데 영척이 빠르게 그 소뿔을 치면서 ‘상가’를 노래하였는데 ‘남산의 산돌은 희고 깨끗한데 흰 돌이 문드러지도록 살아도 요와 순의 선양을 만나지 못하였네. 짧은 베옷과 홑옷은 정강이에 이르고 어두울 때부터 소를 먹여 한 밤이 으스름 해지는데 긴긴 밤 길고 기니 어느 때 아침이 오려나?’ 했다. 공이 불러 함께 말을 나누고는 그를 설득하여 대부로 삼았다.” 했다. 【索隱】 일이 『여씨춘추』에 보인다. ‘상가’는 商聲으로 노래하는 것을 말하는데 어떤 이는 장사하는 나그네의 노래라 한다. 두 말이 모두 통한다. ‘矸’의 음은 ‘公’과 ‘彈’의 反 이다. ‘矸’은 희고 깨끗한 모양이다. 고야왕이 또한 ‘안음’을 지었다. ‘禪’의 음은 ‘膳’인데 같은 자로 읽는데 협운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비창은 “‘骭’은 ‘脛(정강이 경)’”이라 했다. 『字林』에 “음은 ‘下’와 ‘諫’의 反이다.” 했다.
[六] 索隱論語「齊人歸女樂,季桓子受之,三日不朝,孔子行」也。
[六] 【索隱】 『논어』에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을 보내오니 계환자가 받고, 3일간을 조회하지 않으니 공자가 떠났다.” 했다.
[七] 索隱案左氏,司城子罕姓樂名喜,乃宋之賢臣也。漢書作「子冉」。不知子冉是何人。文穎曰「子冉,子罕也」。又按:荀卿傳云「墨翟,孔子時人,或云在孔子後」。又襄二十九年左傳「宋饑,子罕請出粟」。按:時孔子適八歲,則墨翟與子罕不得相輩,或以子冉為是也。
[七] 【索隱】 『춘추좌씨전』을 살펴보니 “사성자한은 성이 樂이고 이름은 희인데 곧 송나라의 현명한 신하이다.” 했다. 『한서』에 “子冉”이라 썼다. 자염은 어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문영은 “자염은 자한이다.”했다. 또 살펴보니 「순경전」에 “묵적과 공자 때 사람인데 혹은 공자보다 뒤에 있었다.” 한다. 또 양왕 29년 『춘추좌씨전』에 “송나라가 주리니 자한이 곡식을 낼 것을 청하였다.” 했다. 살펴보니 “이 때 공자가 8세이니 곧 묵적과 자한은 서로 무리가 될 수 없다. 혹 자염이 이가 된다.
[八] 索隱案:國語云「眾心成城,眾口鑠金」。賈逵云「鑠,消也。眾口所惡,雖金亦為之消亡」。又風俗通云「或說有美金於此,眾人或共詆訿,言其不純金,賣者欲其必售,因取鍛燒以見其真,是為眾口鑠金也 」。
[八] 【索隱】 살펴보니 『국어』에 “여러 사람의 마음은 성을 이루고, 여러 사람의 입(말)은 쇠를 녹인다.”했다. 가규는 “‘鑠(녹일 삭)’은 消(사라질 소)이다. 여러 사람의 입(말)이 미워하는 것은 비록 쇠라 할지라도 사라져 없어지게 된다.” 했다. 또 『풍속통』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아름다운 쇠가 여기에 있는데 여러 사람이 혹 함께 비방하여 순금이 아니다 말하면 파는 자가 반드시 팔고자하기 때문에 취하여 두드리고 불살라서 그 진실(순금임)을 보이려하는데 이것을 ‘眾口鑠金’이라 한다.
[九] 索隱大顏云:「讒人積久譖毀,則父兄伯叔自相誅戮,骨肉為之消滅也。」
[九] 【索隱】 『대안』에 “참소하는 사람이 오래 동안 참소하고 비방하면 곧 부형과 백숙이 스스로 서로 죽여서 골육이 사라지게 된다.” 했다.
[一0] 索隱越人蒙未見所出。漢書作「子臧」。又張晏云「子臧,越人」。或蒙之字也。
[一0] 【索隱】 월나라 사람들이 몽이 아직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한서』에 “자장”이라 썼다. 도 장안은 “자장은 월나라 사람이다.” 했다. 혹은 ‘몽’의 자이다. 한다.
[一一] 索隱小顏云:「公聽,言不私;並觀,所見齊同也。」
[一一] 【索隱】 『소안』에 “‘공청’은 사사로움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병관’은 가지런하고 같은 것을 보는 것이다.” 했다.
是以聖王覺寤,捐子之之心,[一]而能不說於田常之賢;[二]封比干之後,修孕婦之墓,[三]故功業復就於天下。何則?欲善無厭也。夫晉文公親其讎,彊霸諸侯;齊桓公用其仇,而一匡天下。[四]何則,慈仁慇勤,誠加於心,不可以虛辭借也。
이로써 성스러운 왕이 깨달아서 자지의 마음을 버리면 전상의 현명함을 기뻐하지 말고, 비간의 후예를 봉하며, 임신한 부인의 묘를 수리한다면 때문에 공업이 다시 천하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진나라 문공은 그 원수를 가까이하여 제후의 강한 패자가 되었고, 제나라 환공은 그 원수를 등용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았습니다. 어떻게 한 것입니까 자애롭고 어짊을 은근히 행하고 정성을 마음에 더하며, 빈 말을 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一] 集解徐廣曰:「燕王讓國於其大臣子之也。」
[一] 【集解】 서광은 “연나라 왕이 나라를 그 대신인 자지에게 양보하였다.” 했다.
[二] 集解應劭曰:「田常事齊簡公,簡公說之,而殺簡公。使人君去此心,則國家安全也。」
[二]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전상이 제나라 간공을 섬겼는데 간공이 그것을 기뻐하였으나 간공을 죽였다. 임금으로 하여금 이 마음을 떠나게 한다면 곧 나국과 가가 편안하고 보존될 것이다.
[三] 集解應劭曰:「紂刳姙者,觀其胎產也。」 索隱案:比干之後,後謂子也,不見其文。尚書封比干之墓,又惟云刳剔孕婦,則武王雖反商政,亦未必修孕婦之墓也。
[三] 【集解】 응소는 “주 임금이 임신부의 배를 갈라 그 태아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比干之後’”의 後는 자식을 말하나 그 글이 보이지 않는다. 『상서』에 “비간의 무덤을 봉하였다. 하고, 또 단지 ‘임신한 부인의 배를 베어 갈랐다.’”하니 곧 무왕이 비록 상나라의 정사를 반대하였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임신한 부인의 묘를 수선하지는 않았다.
[四] 集解謂晉寺人勃鞮、齊管仲也。
[四] 【集解】 진나라 사인 발제와 제나라 관중이다.
至夫秦用商鞅之法,東弱韓、魏,兵彊天下,而卒車裂之;越用大夫種之謀,禽勁吳,霸中國,而卒誅其身。是以孫叔敖三去相而不悔,[一]於陵子仲辭三公為人灌園。[二]今人主誠能去驕傲之心,懷可報之意,披心腹,見情素,墮肝膽,施德厚,終與之窮達,無愛於士,則桀之狗可使吠堯,[三]而蹠之客可使刺由;[四]況因萬乘之權,假聖王之資乎?然則荊軻之湛七族,[五]要離之燒妻子,[六]豈足道哉!
저 진나라는 상앙의 법을 써서 동쪽으로 한나라와 위나라를 약하게 하고, 천하에 군대가 강함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거열형을 받았고, 원나라는 대부 종의 지모를 써서 굳센 오나라를 잡고 중국에 패자가 되었으나 마침내 그 자신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손숙오는 세 번 재상의 지위를 떠났으나 뉘우치지 않았고, 오릉자중은 삼공의 지위를 사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채전 밭에 물을 주었습니다. 지금 임금들이 진실로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버리고 갚을 수 있는 뜻을 품고, 심장과 배(마음에 품은 것을)를 파헤쳐 본래의 마음을 보이며 간과 담을 떨어뜨리고 덕을 두터이 베풀며, 끝까지 곤궁함과 영달을 함께 하며, 선비를 사랑함을 인색함이 없게 하면 곧 걸왕의 개가 요를 보고 짖게 할 수 있고, 도척의 객이 유를 찌르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만대의 수레를 가진 권세와 성스러운 왕의 자질을 빌림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그러한 즉 형가가 7족을 물에 빠트려 죽인 것과 요리가 처자를 불태워 죽이는 일을 어찌 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一] 索隱案:三得相不喜,知其才之自得也;三去相不悔,知非己之罪也。
[一] 【索隱】 살펴보니 세 번 재상의 지위를 얻어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재질을 스스로 얻은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세 번 쫒겨나도 뉘우치지 않은 것은 자기의 죄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二] 集解列士傳曰:「楚於陵子仲,楚王欲以為相,而不許,為人灌園。」 索隱案:孟子云陳仲子,齊陳氏之族。兄為齊卿,仲子以為不義,乃適楚,居于於陵,自謂於陵子仲。楚王騁以為相,子仲遂夫妻相與逃,為人灌園。烈士傳云字子終。
[二] 【集解】 『열사전』에 “초나라 오릉자중은 초나라 왕이 재상으로 삼고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채전 밭에 물을 주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맹자가 “진중자는 제나라 진씨의 족속이다. 형은 제나라 경이 되었으나 중자가 의롭지 않자 여겨 이에 초나라에 가서 오릉에 머물면서 스스로 오릉자중이라 했다. 초나라 왕이 초빙하여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자중이 마침내 저 처와 서로 함께 도망하여 다른 사름을 위해 채전 밭에 물을 주었다.” 했다. 『열사전』에 자는 자종“이라 했다.
[三] 集解韋昭曰:「言恩厚無不使也。」 索隱及下「跖之客可使刺由」,此並見戰國策。服虔云仲由也。應劭云許由也。
[三]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은혜를 두터이 하고 부리지 않음이 없었다.” 했다. 【索隱】 아래 “跖之客可使刺由(도척의 객이 유를 찌르게 할 수 있다.)”까지는 같이 『전국책』에 보인다. 복건은 “중유”라 했고, 응소는 “허유”라 했다.
[四] 集解應劭曰:「跖之客為其人使刺由。由,許由也。跖,盜跖也。」
[四]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도척의 객이 그 사람을 위하여 유을 찌르게 한다.의 ‘유’는 ‘허유’이다. ‘척’은 도척이다.” 했다.
[五] 集解應劭曰:「荊軻為燕刺秦始皇,不成而死,其族坐之湛沒。吳王闔閭欲殺王子慶忌,要離詐以罪亡,令吳王燔其妻子,要離走見慶忌,以劍刺之。」張晏曰:「七族,上至曾祖,下至曾孫。」 索隱湛音沈。張晏云「七族,上至曾祖,下至元孫」。又一說云,父之族,一也;姑之子,二也;姊妹之子,三也;女子之子,四也;母之族,五也;從子,六也;及妻父母凡七。
[五]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형가가 연나라를 위하여 진나라 시황제를 찔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족속을 연좌하여 물에 빠트려 죽였다. 오나라 왕 합려가 왕자 경기를 죽이려 하였는데 요리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면서 오나라 왕으로 하여금 그 처자를 태워 죽이게 하였고, 요리가 도망하다 경기를 만나자 검으로 그를 찔러 죽였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七族은 위로 증조에 이르고 아래로는 원손에 이른다.” 했다. 또 일설에는 “아비의 일족이 하나요, 고모의 자식이 둘이요, 누이의 자식이 셋이요, 딸의 자식이 넷이요, 어미의 일족이 다섯이요, 사촌이 여섯이요, 처부모에 이르러 일곱이다.” 했다.
[六] 索隱事見呂氏春秋。
[六] 【索隱】 일이 『여씨춘추』에 보인다.
臣聞明月之珠,夜光之璧,以闇投人於道路,人無不按劍相眄者。何則?無因而至前也。蟠木根柢,輪囷[一]離詭,[二]而為萬乘器者。何則?以左右先為之容也。[三]故無因至前,雖出隨侯之珠,夜光之璧,猶結怨而不見德。故有人先談,則以枯木朽株樹功而不忘。今夫天下布衣窮居之士,身在貧賤,雖蒙堯、舜之術[四],挾伊、管之辯,懷龍逢、比干之意,欲盡忠當世之君,而素無根柢之容,雖竭精思,欲開忠信,輔人主之治,則人主必有按劍相眄之跡,是使布衣不得為枯木朽株之資也。
신이 들으니 명월의 구슬과 야광의 구슬을 몰래 길에 던지면 사람들이 검을 어루만지고 서로 노려보지 않는 자가 없다 합니다. 왜이겠습니까? 이유 없이 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빙 감은 나무뿌리가 서리고 굽고, 뒤틀어졌는데도 수레 만대를 낼 수 있는 나라의 기물을 만드는 것 왜 이겠습니까? 측근들이 먼저 조각하고 꾸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앞에 이르면 비록 수후의 구슬과 야광의 구슬을 내밀지라도 오히려 원한을 맺고 덕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면 곧 마른 나무와 썩은 그루터기에 공을 세울지라도 잊지 않습니다. 지금 저 천하에 베옷을 입고, 곤궁하게 사는 선비는 몸이 가난하고 천함에 있어 비록 요와 순의 도를 익히고, 이윤과 관중의 변설을 끼고, 용봉과 비간의 뜻을 품고, 당시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데 평소 뿌리의 받아들여짐도 없으니 비록 정성스러운 생각을 다하여 충성과 신의를 열고, 임금의 다스림을 돕고자 하여도 곧 임금이 반드시 검을 어루만지고 서로 노려보는 자취가 있으니 이는 베옷 입은 이로 하여금 마른 나무와 썩은 그루터기의 바탕도 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一] 索隱孟康云:「蟠結之木也。」晉灼云:「槃柢,木根也。」
[一] 【索隱】 맹강이 “서린 나무이다.” 했다. 진작은 “‘반저’는 나무뿌리이다.” 했다.
[二] 集解張晏曰:「根柢,下本也。輪囷離詭,委曲槃戾也。」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根柢’는 아래의 근본이다. ‘輪囷離詭’는 구불구불하고 쟁반처럼 빙 두르는 것이다.” 했다.
[三] 索隱謂左右先加雕刻,是為之容飾也。
[三] 【索隱】 측근이 먼저 조각을 가한다는 것은 이는 꾸미는 것을 말한다.
[四] 索隱案:言雖蒙被堯、舜之道。
[四] 【索隱】 살펴보니 반드시 요와 순의 도를 입었음(지녔음)을 말한다.
是以聖王制世御俗,獨化於陶鈞之上,[一]而不牽於卑亂之語,不奪於眾多之口。故秦皇帝任中庶子蒙嘉之言,以信荊軻之說,而匕首竊發;[二]周文王獵涇、渭,載呂尚而歸,以王天下。故秦信左右而殺,周用烏集而王。[三]何則?以其能越攣拘之語,馳域外之議,獨觀於昭曠之道也。
이 때문에 성스러운 왕이 세상을 제재하고 풍속을 다스려 오직 질그릇 만드는 사람이 굴리는 굴림틀 위에서처럼 교화하여(조화롭게 하여) 낮고 어지러운 말에 끌리지 않고, 많은 사람의 말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 황제는 중서자인 몽가의 말을 듣고 형가의 말을 믿었다가 비수가 몰래 드러났고, 주나라 문왕은 경수와 위수에 사냥 나갔다가 여상을 태우고 돌아와 천하에 왕노릇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측근을 믿었다가 죽임을 당할 뻔하였고, 주나라는 여상을 등용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왜이겠습니까? 걸리고 잡히는 말을 넘고 영역 밖의 논의를 치달려 오직 발고 넓은 도를 관찰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陶家名模下圓轉者為鈞,以其能制器為大小,比之於天。」 索隱張晏云:「陶,冶;鈞,範也。作器,下所轉者名鈞。」韋昭曰:「陶,燒瓦之灶。鈞,木長七尺,有絃,所以調為器具也。」崔浩云:「以鈞制器萬殊,故如造化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도공의 집의 외형을 본뜨는 기구로 아래가 둥글고 돌아가는 것을 ‘鈞’이라 하고, (균)으로 그릇을 만들 때 크고 작게 할 수 있어 하늘에 비유한다.” 했다.
二] 索隱案:通俗文云「其頭類匕,故曰匕首,短而便用也」。
[二] 【索隱】 살펴보니 『통속문』에 “그 머리가 숟가락과 같기 때문에 ‘비수’라 하고, 짧아서 쓰기 편하다.” 했다.
[三] 集解漢書音義曰:「太公望塗覯卒遇,共成王功,若烏鳥之暴集也。」 索隱韋昭云:「呂尚適周,如烏之集。」
[三] 【集解】 『한서음의』에 “태공망이 길에서 갑자기 만나서 함께 왕의 공을 이룬 것이 마치 까마귀 떼가 갑자기 모인 것과 같다.” 하였다. 【索隱】 위소는 “여상이 주나라에 가는 것이 마치 까마귀 떼와 같았다.”했다.
今人主沈於諂諛之辭,牽於帷裳之制,[一]使不羈之士與牛驥同皁,[二]此鮑焦所以忿於世而不留富貴之樂也。[三]
지금의 임금은 아첨하는 말에 빠지고 휘장과 치마(휘장 안의 처첩)의 제재에 끌려 뛰어난 선비로 하여금 소와 말, 하인과 같이 취급하니 이는 포초가 세상에 분노하여 부귀의 즐거움에 머물지 않은 이유입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言為左右便辟侍帷裳臣妾所見牽制。」
[一] 【集解】 『한서음의』에 “측근들이 편벽되고 모시는 휘장 안의 치마 입은 신첩들에게 끌리고 제재 당함을 말한 것이다.” 했다.
[二] 集解漢書音義曰:「食牛馬器,以木作,如槽也。」 索隱案:言駿足不可羈絆,以比逸才之人。應劭云「皁,櫪也」。韋昭云「皁,養馬之官,下士也」。案:養馬之官,其衣皁也。又郭璞云「皁,養馬器也」。正義顏云:「不羈,言才識高遠,不可羈係。皁,在早反。方言云『梁、宋、齊、楚、燕之閒謂櫪曰皁』。」
[二] 【集解】 『한서음의』에 “소와 말이 여물을 먹는 그릇이니 나무로 만드는데 구유와 같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발이 빠른 훌륭한 말은 굴레와 줄로 묶을 수 없다는 말로서 뛰어난 인재를 비유한 것이다. 응소는 “‘조’는 말구유이다.” 했다. 위소는 “‘조’는 말을 기르는 관리인데 하급 관리이다.” 했다. 살펴보니 말을 기르는 관리는 검은 옷을 입는다. 또 곽복은 “‘조’는 말을 기르는 그릇이다.”했다. 【正義】 안은 “‘불기’는 재주와 식견이 높고 원대하여 굴레로 얽맬 수 없다. ‘조’는 ‘在’와 ‘早’의 反이다. 방언에 ‘양나라, 송나라,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의 사이에서는 말구유를 ’조‘라 한다.” 했다.
[三] 集解如淳曰:「莊子云鮑焦飾行非世,抱木而死。」 索隱晉灼云:「列士傳鮑焦怨世不用己,採蔬於道。子貢難曰:『非其代而採其蔬,此焦之有哉?』棄其蔬,乃立枯洛水之上。」案:此事見莊子及說苑、韓詩外傳,小有不同耳。
[三] 【集解】 여순은 “『장자』에 ‘포초는 행실을 삼가고 세상을 비난하여(행실을 꾸미는 세상을 비난하여) 나무를 끌어안고 죽었다.’” 했다. 【索隱】 진작은 “「열사전」에 포초가 세상이 자기를 쓰지 않음을 원망하여 길에서 나물을 캤는데 자공이 비난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시대가 아닌데 그 나물을 캐는 이것이 포초의 것일 수 있는가?’하니 그 나물을 버리고 이에 낙수 가에 서서 말라 죽었다.” 했다. 살펴보니 이 일은 『장자』와 설원, 『한시외전』에 보이는데 조금 같지 않음 점이 있을 뿐이다.
臣聞盛飾入朝者不以利汙義,砥厲名號者不以欲傷行,故縣名勝母[一]而曾子不入,[二]邑號朝歌而墨子回車。[三]今欲使天下寥廓之士,攝於威重之權,主於位勢之貴,故回面[四]汙行以事諂諛之人而求親近於左右,則士伏死堀穴巖(巖)[藪]之中耳,[五]安肯有盡忠信而趨闕下者哉!
신이 들으니 성대하게 꾸미고 조정에 들어가는 자는 이익 때문에 의를 더럽히지 않고, 명예를 숫돌에 가는 자(명예를 갈고 닦는 자)는 욕심 때문에 행실을 해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러므로 현의 이름이 ‘勝母’라 하여 증자는 들어가지 않았고, 읍의 이름이 ‘朝歌’라 하여 묵자는 수레를 돌렸습니다. 지금 천하의 끝없이 넓은 선비로 하여금 위엄과 무거운 권세를 대신하게 하고 지위와 형세의 귀함을 주관하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간사한 얼굴색과 더러운 행실로 아첨하는 사람을 섬겨서 측근에 가까이 하기를 구하면 곧 선비는 바위와 숲 안에 구멍을 파고 엎드려 죽을 뿐이니 어찌 즐겨 충성과 믿음을 다하여 대궐(임금)아래 달려가는 자가 있을 것인가!
[一] 集解漢書云里名勝母也。 正義鹽鐵論皆云里名,尸子及此傳云縣名,未詳也。
[一] 【集解】 『한서』에 “마을 이름이 ‘승모’이다.” 했다. 【正義】 「염철론」에 “모두 마을 이름이다.” 했고, 시자와 이전(열전)에는 현의 이름이라 하니 자세하지 않다.
[二] 索隱按:淮南子及鹽鐵論並云里名勝母,曾子不入,蓋以名不順故也。尸子以為孔子至勝母縣,暮而不宿,則不同也。
[二] 【索隱】 살펴보니 “『회남자』와 「염철론」이 모두 마을 이름이 ‘勝母(어머니를 이긴다.)’라 하였는데 증자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대개 이름이 불순하기 때문이다. 시자는 ‘공자가 승모현에 이르렀는데 저녁이었으되 묵지 않았다.’ 하니 고 같지 않다.
[三] 集解晉灼曰:「朝歌者,不時也。」 正義朝歌,今衛州縣也。
[三] 【集解】 진작은 “‘조가(아침에 노래한다.)’는 때가 아니다.” 했다. 【正義】 ‘조가’는 지금의 위주현이다.
[四] 索隱杜預云:「回,邪也。」
[四] 【索隱】 두예가 “‘회’는 간사함이다.” 했다.
[五] 集解詩云:「節彼南山,維石巖巖。」
[五] 【集解】 『시경』에 “저 깍아 지른 남산에 바위가 웅장하구나.” 했다.
書奏梁孝王,孝王使人出之,卒為上客。
글을 양(위나라) 효왕에게 아뢰니 효왕이 사람을 시켜 나가게 하고 마침내 상객으로 삼았다.
太史公曰:魯連其指意雖不合大義,然余多其在布衣之位,蕩然肆志,不詘於諸侯,談說於當世,折卿相之權。鄒陽辭雖不遜,然其比物連類,有足悲者,亦可謂抗直不橈矣,吾是以附之列傳焉。
태사공이 말하기를 “노중련은 그 뜻이 비록 대의에 합치하지는 않지만 포의의 지위(관직이 없는)에 있었고, 뜻을 펼침이 호탕하여 제후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당시의 세상을 말하여 경상의 권세를 꺽은 것이 많았다. 추양은 말이 비록 겸손하지 않으나 사물을 비유하여 종류에 따라 연이은 것은 충분히 슬퍼할만 함이 있고, 또 맞서서 굽히지 않았다 말할 수 있어서 내가 이 때문에 열전에 붙인 것이다.” 했다.
【索隱述贊】魯連達士,高才遠致。釋難解紛,辭祿肆志。齊將挫辯,燕軍沮氣。鄒子遇讒,見詆獄吏。慷慨獻說,時王所器。
【索隱述贊】 노중련은 달사로 재주가 높고 원대하였다. 어려운 것을 해석하고 어지러운 것을 풀었지만 봉록을 사양하고 뜻을 펼쳤다. 제나라 장수는 말을 잘하여 꺽고, 연나라 군대는 기세로 막았다. 추양은 참소를 만나 옥리에게 꾸짖음을 당하였다. 강개하여 말을 올렸는데 당시의 왕이 중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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