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八十六
刺客列傳第二十六
曹沫者,魯人也,[一]以勇力事魯莊公。莊公好力。曹沫為魯將,與齊戰,三敗北。魯莊公懼,乃獻遂邑之地以和。[二]猶復以為將。
조말은 노나라 사람인데 용력으로써 노나라 장공을 섬겼다. 장공은 힘쓰기를 좋아하였다. 조말이 노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 싸움에서 세 번 패배하였다. 노나라 장공이 두려워하여 이에 수읍을 바치고 화의하였다. 오히려 다시 장군으로 삼았다.
[一] 索隱沫音亡葛反。左傳、穀梁並作「曹劌」,然則沫宜音劌,沫劌聲相近而字異耳。此作「曹沫」,事約公羊為說,然彼無其名,直云「曹子」而已。且左傳魯莊十年,戰于長勺,用曹劌謀敗齊,而無劫桓公之事。十三年盟于柯,公羊始論曹子。穀梁此年惟云「曹劌之盟,信齊侯也」,又記不具行事之時。
[一] 【索隱】 ‘沫’의 음은 ‘亡’과 ‘葛’의 反이다. 『좌전』과 『곡량전』에 모두 ‘曹劌’로 썼다. 그러한 즉 ‘沫’은 마땅히 ‘劌’되어야 하고, ‘沫’과 ‘劌’는 소리가 서로 비슷하고 글자만 다를 뿐이다. 여기서 ‘曹沫’이라 쓰고, 일은 『춘추공양전』을 요약한 것을 말하나 거기에는 그 이름이 없고 바로 ‘曹子’라 했을 뿐이다. 또 『춘추좌전』에 노나라 장공 10년 장작에서 싸웠는데 조귀의 꾀를 써서 제나라를 물리쳤으되 환공을 겁준 일은 없다.13년 가 땅에서 회맹한 것은 『춘추공양전』이 처음 조자를 논하였다.『춘추곡량전』 이 해는 오직 “曹劌之盟,信齊侯也”라 하였을 뿐이고 또한 일이 행해진 때를 갖추어 기록하지 않았다.
[二] 索隱左傳「齊人滅遂」,杜預云「遂國在濟北蛇丘縣東北也」。正義故城在兗州龔丘縣西北七十六里也。
[二] 【索隱】 『춘추좌전』에 “제나라 사람들이 수를 멸하였다.” 했다. 두예가 말하기를 “수국은 제수 북쪽 사구현 동북쪽에 있다.” 했다. 【正義】 옛 성이 연주 공구현 서북쪽 76리에 있다.
齊桓公許與魯會于柯而盟。[一]桓公與莊公既盟於壇上,曹沫執匕首劫齊桓公,[二]桓公左右莫敢動,而問曰:「子將何欲?」[三]曹沫曰:「齊強魯弱,而大國侵魯亦甚矣。今魯城壞即壓齊境,[四]君其圖之。」桓公乃許盡歸魯之侵地。既已言,曹沫投其匕首,下壇,北面就群臣之位,顏色不變,辭令如故。桓公怒,欲倍其約。[五]管仲曰:「不可。夫貪小利以自快,棄信於諸侯,失天下之援,不如與之。」於是桓公乃遂割魯侵地,曹沫三戰所亡地盡復予魯。
제나라 환공이 노나라와 가 땅에서 만나 회맹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환공과 장공이 단의 위에서 맹세한 후 조말이 비수를 잡고 제나라 환공을 겁주니 환공의 측근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묻기를 “그대는 반차 어찌하려하는가?”하니 조말이 말하기를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하며 대국이 노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또한 심합니다. 지금 노나라 성이 무너지면 곧 제나라 국경도 눌리게 될 것이니 임금께서는 살피소서.” 했다. 환공이 이에 노나라의 침략한 땅을모두 돌려 줄 것을 허락하였다. 말을 마치자 조말이 비수를 던지고 단을 내려와 북쪽을 향하여 여러 신하들의 자리에 돌아 왔는데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고, 말의 기운도 예전과 같았다. 환공이 노하여 그 양속을 배반하고자 하였다. 관중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저 작은 이익을 탐하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기뻐하는 것은 제후에게 신의를 버린 것으로 천하의 도움을 잃는 것이니 주는 것이 낫습니다.” 했다. 이에 환공이 곧 노나라를 침범하여 빼앗은 땅을 떼어 주었다. 조말이 3번 싸워 잃었던 땅을 모두 다시 노나라에 주었다.
[一] 索隱杜預云:「濟北東阿,齊之柯邑,猶祝柯今為祝阿也。」
[一] 【索隱】 두예가 말하기를 “제수 북쪽 동아는 제나라의 가읍인데 축가는 지금의 축아인 듯 하다.
[二] 索隱匕音比。劉氏云「短劍也」。鹽鐵論以為長尺八寸,其頭類匕,故云「匕首」也。
[二] 【索隱】 ‘匕’의 음은 ‘比’이다. 유씨가 말하기를 “단검이다.” 했다. 『염철론』에 “길이는 1자 8치이고, 그 머리가 숟가락과 같게 하였기 때문에 ‘匕首’라 한다.” 했다.
[三] 索隱公羊傳曰:「管子進曰:『君何求?』」何休注云:「桓公卒不能應,管仲進為言之也。」
[三] 【索隱】 『춘추공양전』에 “관자가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께서는 무엇을 구하십니까?” 했다. 하휴의 주석에 “환공이 끝내 응하지 않으므로 관중이 나아가 말한 것이다.” 했다.
[四] 索隱齊魯鄰接,今齊數侵魯,魯之城壞,即壓近齊之境也。
[四] 【索隱】 제나라와 노나라는 인접하고, 지금 제나라가 여러 번 노나라를 침범하여 노나라의 성을 무너뜨리니 곧 가까운 제나라의 국경을 누른 것이다.
[五] 索隱倍音佩也。
[五] 【索隱】 ‘倍’의 음은 ‘佩’이다.
其後百六十有七年而吳有專諸之事。[一]
그 후 167년 후 오나라에 전제의 일이 있었다.
[一] 索隱「專」字亦作「剸」,音同。左傳作「鱄設諸」。
[一] 【索隱】 ‘專’자는 또한 ‘剸’으로 쓴다. 음은 같다. 『춘추좌전』에는 “鱄設諸”라 썼다.
專諸者,吳堂邑人也。[一]伍子胥之亡楚而如吳也,知專諸之能。伍子胥既見吳王僚,說以伐楚之利。吳公子光曰:「彼伍員父兄皆死於楚而員言伐楚,欲自為報私讎也,非能為吳。」吳王乃止。伍子胥知公子光之欲殺吳王僚,乃曰:「彼光將有內志,未可說以外事。」[二]乃進專諸於公子光。
전제는 오나라 당읍 사람이다. 오자서가 초나라를 도망하여 오나라에 가면서 전제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오자서가 오나라 왕 요를 만나서 초나라를 정벌하는 것의 이로움을 설득하였다. 오나라 공자 광이 말하기를 “저 오자서는 아버지와 형이 모두 초나라에서 죽었으므로 오자서가 초나라를 칠 것을 말하는 것은 스스로 사사로운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지 오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다.” 했다. 오나라 왕이 이에 중지하였다. 오자서가 공자 광이 오나라 왕 요를 죽이고자 하는 것을 알고 이에 말하기를 “저 공자 광은 장차 안으로 뜻이 있으니 밖의 일로 설득할 수 없다.”하고는 전제를 공자 광에게 나아가게 하였다.
[一] 索隱地理志臨淮有堂邑縣。
[一] 【索隱】 『지리지』에 회수에 마주하여 당읍현이 있다.
[二] 索隱言其將有內難弒君之志,且對外事生文。吳世家曰「知光有他志」。
[二] 【索隱】 장차 안으로 임금을 시해하려는 뜻이 있어 또 대외의 일을 만들어 꾸미려 한다는 말이다. 오나라 세가에 “공자 광이 다른 뜻이 있었다.” 했다.
光之父曰吳王諸樊。諸樊弟三人:次曰餘祭,[一]次曰夷眛,[二]次曰季子札。諸樊知季子札賢而不立太子,以次傳三弟,欲卒致國于季子札。諸樊既死,傳餘祭。餘祭死,傳夷眛。夷眛死,當傳季子札;季子札逃不肯立,吳人乃立夷眛之子僚為王。公子光曰:「使以兄弟次邪,季子當立;必以子乎,則光真適嗣,當立。」故嘗陰養謀臣以求立。
공자 광의 아버지는 오나라 왕 제번이다. 제번은 동생이 세 명인데 둘째는 여제이고, 셋째는 이매이며, 넷째는 계자찰이다. 제번이 계자찰이 현명함을 알았으나 태자로 세우지 않고 다음인 셋째동생에게 전하여 마침내 나라가 계자찰에게 이르게 하고자 하였다. 제번이 죽은 후 여제에게 전해졌다. 여제가 죽자 이매에게 전해졌다. 이매가 죽으면 계자찰에게 전해지는 것이 마땅한데 계자찰이 도망하여 즐겨 즉위하려 하지 않으므로 오나라 사람들이 이매의 아들 요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형제로써 전하게 한다면 계자가 즉위하는 것이 마땅하고, 반드시 자식으로 한다면 곧 내가 참된 적사로 즉위하는 것이 마땅하다,” 했다. 그러므로 일찍이 몰래 모신을 기르면서 즉위를 구하였다.
[一] 索隱祭音側界反。
[一] 【索隱】 ‘祭’의 음은 ‘側’과 ‘界’으 反이다.
[二] 索隱亡葛反。公羊作「餘末」。
[二] 【索隱】 ‘亡’과 ‘葛’의 反이다. 『춘추공양전』에는 ‘餘末’이라 썼다.
光既得專諸,善客待之。九年而楚平王死。[一]春,吳王僚欲因楚喪,使其二弟公子蓋餘、屬庸[二]將兵圍楚之灊;[三]使延陵季子於晉,以觀諸侯之變。楚發兵絕吳將蓋餘、屬庸路,吳兵不得還。於是公子光謂專諸曰:「此時不可失,不求何獲!且光真王嗣,當立,季子雖來,不吾廢也。」專諸曰:「王僚可殺也。母老子弱,而兩弟將兵伐楚,楚絕其後。方今吳外困於楚,而內空無骨鯁之臣,是無如我何。」[四]公子光頓首曰:「光之身,子之身也。」
공자 광이 전제를 얻고는 객으로 잘 대우하였다. 9년에 초나라 평왕이 죽었다. 봄에 오나라 왕 요가 초나라의 국상으로 인하여 그 둘째 동생 공자 촉용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의 잠 땅을 포위하게 하고 연릉에 있던 계자찰을 진나라에 사신 보내서 제후의 변을 관찰하게 했다. 초나라가 군대를 내어 오나라 장군 여개와 속용의 길을 끊으니 오나라 군대가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공자 광이 전제에게 말하기를 “이 때를 잃을 없고, 구하지 않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내가 참으로 왕사로 즉위하는 것이 마땅하니 계자찰이 비록 올지라도 나를 폐하지는 못할 것이다.” 했다. 전제가 말하기를 “왕 요는 죽일 수 있으나 어머니는 늙고 자식은 약하며, 두 동생은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정벌하다 초나라에게 그 뒤를 끊겼습니다. 바야흐로 오나라는 밖으로 초나라에 곤궁하고, 안으로는 비고 강직한 신하가 없는 것은 제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했다. 공자 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의 몸이 그대의 몸이다.” 했다.
[一] 索隱春秋昭二十六年「楚子居卒」是也。吳世家云「十二年」,此云「九年」,並誤。據表乃左傳合在僚之十一年也。
[一] 【索隱】 『춘추』 소공26년 “초나라 자거가 죽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오세가에 “12년”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9년”이라 하니 모두 잘못이다. 표에 및 좌전에 의거하여 합하면 요의 11년이다.
[二] 索隱屬音燭。二子,僚之弟也。左傳作掩餘、屬庸。掩蓋義同,屬燭字相亂耳。
[二] 【索隱】 ‘屬’의 음은 ‘燭’이다. ‘二子’는 요의 동생이다. 『춘추좌전』에는 “‘엄여’, ‘촉용’”이라 썼다. ‘掩’과 ‘蓋’는 듯이 같고, ‘屬’과 ‘燭’은 글자가 서로 혼란할 뿐이다.
[三] 索隱事在魯昭二十七年。地理志廬江有灊縣,天柱山在南。音潛。杜預左傳注云「灊,楚邑,在廬江六縣西南也」。正義灊故城在壽州霍山縣東二百步 。
[三] 【索隱】 일이 노나라 소공 27년에 있다. 『지리지』에 “노강에 잠현이 있는데 천주산 남쪽에 있다.” 했다. 음은 ‘潛’이다. 두예의 『춘추좌전』 주석에 “‘灊’은 초나라 읍인데 노강 6현 서남쪽이다.” 했다. 【正義】 灊 옛 성이 수주 곽산현 동쪽 200보에 있다.
[四] 索隱左傳直云「王可殺也,母老子弱,是無若我何」。則是專設諸度僚可殺,言其少援救,故云「無柰我何」。太史公採其意,且據上文,因復加以兩弟將兵外困之辭。而服虔、杜預見左氏下文云「我爾身也」,「以其子為卿」,遂彊解「是無如我何」猶言「我無若是,謂專諸欲以老弱託光」,義非允愜。王肅之說,亦依史記也。
[四] 【索隱】 『춘추좌전』에 곧바로 “왕은 죽일 수 있으나 어머니는 늘고, 자식은 약하니 내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했다. 곧 이는 전설제가 요를 죽일 수 있음을 헤아리고, 그 구원할 이는 적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아를 어찌할 수 없다.” 한 것이다. 태사공이 그 뜻을 채록하고 또 위 글에 의거하여 다시 두 동생이 군대를 거느리고 밖에서 곤궁하다는 말을 더하였다. 복건과 두에는 좌씨의 아래 글을 보고 “나는 너의 몸이다.”, “그 아들을 경으로 삼았다.”를 보고 마침내 억지로 해석하여 “이는 나를 어찌할 수 없다.”를 오히려 “‘나는 이 같음이 없다’를 전제가 자기의 노약자를 공자 광에게 맡기고자 한 것을 이른다.” 고 말한 것은 뜻이 진실로 쾌하지 않다. 왕숙의 말은 또한 『사기』에 의거한 것이다.
四月丙子,[一]光伏甲士[二]於窟室中,[三]而具酒請王僚。王僚使兵陳自宮至光之家,門戶階陛左右,皆王僚之親戚也。夾立侍,皆持長鈹。[四]酒既酣,公子光詳為[五]足疾,入窟室中,使專諸置匕首魚炙之腹中[六]而進之。既至王前,專諸擘魚,因以匕首刺[七]王僚,王僚立死。左右亦殺專諸,王人擾亂。公子光出其伏甲以攻王僚之徒,盡滅之,遂自立為王,是為闔閭。闔閭乃封專諸之子以為上卿。
4월 병자일에 공자 광이 갑사를 굴실 안에 숨기고 술을 갖추어 왕 요를 청하였다. 왕 요는 군대로 하여금 궁으로부터 광의 집까지 진을 치게 하고, 문과 계단마다 좌우가 모두 왕 요의 친척이었다. 좌우에 세운 시위들은 모두 긴 창을 지녔다. 술이 이미 얼큰해지자 공자 광이 거짓으로 발에 병이 있다. 하고 굴실 안에 들어가 전제로 하여금 비수를 생선 구이 배 안에 넣어 올리게 하엿다. (전제가)왕의 앞에 이르자 전제가 생선을 가르고 비수로 왕 요를 찌르니 왕 요가 서서 죽었다. 측근들이 또한 전제를 죽였는데 왕의 사람들이 소란하였다. 공자 광이 나와 그 갑사로 왕 요의 무리를 공격하여 모두 없애고, 마침내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니 이가 합려가 된다. 합려는 곧 전제의 아들을 봉하여 상경으로 삼았다.
[一] 索隱注僚之十二年夏也,吳系家以為十三年,非也。左氏經傳唯言「夏四月」,公羊、穀梁無傳,經更與左氏、吳系家同。此傳稱「丙子」,當有所據,不知出何書。
[一] 【索隱】 주에 “요의 12년 여름이다.” 했다. 오나라 계가에는 13년이라 했으나 아니다. 좌시의 경전에는 오직 “하 4월”이라고만 말하였고,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에는 전이 없고, 경을 고치면서 좌씨와 오계가를 같게 햇다. 이 전에 ‘丙子’라 일컬은 것은 마땅히 근거한 것이 잇을 것이나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二] 索隱左傳曰「伏甲」,謂甲士也。下文云「出其伏甲以攻王」。
[二] 【索隱】 『춘추좌전』에 “‘伏甲’은 甲士를 이른다.” 했다. 아래 글에 “그 복갑을 내어서 왕을 공격하였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窟,一作『空』。」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窟’은 한편으로 ‘空’이라고도 쓴다.” 했다.
[四] 集解音披。索隱音披,兵器也。劉逵吳都賦注「鈹,兩刃小刀」。
[四] 【集解】 음은 ‘披(나눌 피)’ 이다. 【索隱】 음은 ‘披’인데 병기이다. 유규의 「吳都賦」 주에 “‘鈹’는 날이 두 개인 작은 칼이다.” 했다.
[五] 索隱上音陽,下如字。左傳曰「光偽足疾」,此云「詳」,詳即偽也。或讀此「為」字音偽,非也。豈詳偽重言耶?
[五] 【索隱】 위의 음은 ‘陽’이고 아래는 같은 자이다. 『춘추좌전』에 “光偽足疾(광이 거짓으로 발에 병이 있다.)” 했는데 여기서는 “詳”이라 하였는데 ‘詳’은 곧 ‘僞(거짓 위)’이다. 혹은 여기의 ‘爲’자 음을 ‘僞’로 읽은 것은 잘못이다. 어찌 ‘詳僞’라고 거듭 말하였겠는가?
[六] 集解徐廣曰:「炙,一作『炮』。」 正義炙,者夜反。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炙’은 한편으로 ‘炮(통째로 구울 포)’라고도 쓴다.” 했다. 【正義】 ‘炙’은 ‘者’와 ‘夜’의 反이다.
[七] 索隱刺音七賜反。
[七] 【索隱】 ‘刺’의 음은 ‘七’과 ‘賜’의 反이다.
其後七十餘年而晉有豫讓之事。[一]
그 후 70년 후 진나라에 예양의 일이 있었다.
[一] 集解徐廣曰:「闔閭元年至三晉滅智伯六十二年。豫讓一作『襄』。」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합려 1년에서 삼진이 지백을 멸한 때까지가 62년이다. ‘豫讓’은 한편으로 ‘讓’이라 쓴다.
豫讓者,晉人也,[一]故嘗事范氏及中行氏,而無所知名[二]。去而事智伯,[三]智伯甚尊寵之。及智伯伐趙襄子,趙襄子與韓、魏合謀滅智伯,滅智伯之後而三分其地。趙襄子最怨智伯,[四]漆其頭以為飲器。[五]豫讓遁逃山中,曰:「嗟乎!士為知己者死,女為說己者容。今智伯知我,我必為報讎而死,以報智伯,則吾魂魄不愧矣。」乃變名姓為刑人,入宮塗廁,中挾匕首,欲以刺襄子。襄子如廁,心動,執問塗廁之刑人,則豫讓,內持刀兵,曰:「欲為智伯報仇!」左右欲誅之。襄子曰:「彼義人也,吾謹避之耳。且智伯亡無後,而其臣欲為報仇,此天下之賢人也。」卒醳去之。[六]
예양은 진나라 사람인데 옛날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으나 이름이 알려진 바 없었다. 떠나서 지백을 섬겼는데 지백이 매우 높이 사랑하였다. 지백이 조나라 양자를 치니 조나라 양자가 한나라, 위나라와 합하여 지백을 멸할 것을 꾀하고 지백을 멸한 후에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조나라 양자가 가장 지백을 원망하여 그 머리를 옻칠하여 음기로 만들었다. 예양이 산 속으로 도망하여 말하기를 “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자를 위하여 얼굴을 꾸민다. 지금 지백이 나를 알아주니 나는 반드시 원수를 갚고 죽어서 지백에게 보답하면 곧 내 혼백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했다. 이에 이름과 성을 바꾸고 형벌을 받은 사람이 되어 궁에 들어가 변소를 칠하면서 품속에 비수를 끼고 양자를 찌르고자 하였다. 양자가 변소에 가면 심장이 두근거리자 변소를 칠하는 형벌 받은 사람을 잡아 물으니 곧 예양으로 안에 도병을 지니고 있었는데 말하기를 “지백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했다. 측근들이 죽이고자 하였다. 양자가 말하기를 “그는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조심하여 피할 뿐이다. 또 지백은 후사가 없어졌으니 그 신하로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은 이는 천하의 어진 사람이다.” 하고는 마침내 풀어주어 가게 했다.
[一] 索隱案:此傳所說,皆約戰國策文。
[一] 【索隱】 살펴보니 이 전에서 말한 것은 모두 『전국책』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二] 索隱案:左傳范氏謂昭子吉射也。自士會食邑於范,後因以邑為氏。中行氏,中行文子荀寅也。自荀林父將中行後,因以官為氏。
[二] 【索隱】 살펴보니 『좌전』에 범씨는 소자길사를 말한다. 사회로부터 범 땅을 식읍으로 하였는데 후에 읍으로 인하여 씨로 삼았다. 중행씨는 중행문자인 순인이다. 순림의 아버지 중행의 장군이 된 뒤부터 관직으로 인하여 氏로 하였다.
[三] 索隱案:智伯,襄子荀瑤也。襄子,林父弟荀首之後。范、中行、智伯事已具趙系家。
[三] 【索隱】 살펴보니 지백은 양자 순요이다. 양자는 임부의 동생인 순수의 후예이다. ‘범씨’, ‘중행씨’, ‘지백의 일은 이미 조계가게에 갖추어져 있다.
[四] 索隱謂初則醉以酒,後又率韓、魏水灌晉陽,城不沒者三板,故怨深也。
[四] 【索隱】 처음에는 곧 술에 취하게 하였고, 뒤에는 또한 한나라, 위나라를 거느리고 진양을 물로 공격하여 성이 빠지지 않은 것이 세 판이었기 때문에 원한이 깊었다.
[五] 索隱案:大宛傳曰「匈奴破月氐王,以其頭為飲器」。裴氏注彼引韋昭云「飲器,椑榼也」。晉灼曰「飲器,虎子也」。皆非。椑榼所以盛酒耳,非用飲者。晉氏以為褻器者,以韓子、呂氏春秋並云襄子漆智伯頭為溲杅,故云。正義劉云:「酒器也,每賓會設之,示恨深也。」按:諸先儒說恐非。
[五] 【索隱】 살펴보니 「대완전」에 “흉노가 월저왕을 깨트리고 그 머리로 음기를 만들었다.” 했다. 배씨가 그것을 주석하면서 위소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음기는 椑榼(비합: 술통)이다.” 했다. 진작이 말하기를 “음기는 요강이다.” 하나 모두 아니다. 비합은 술을 담을 뿐이니 마시는데 쓰는 것이 아니다. 진씨가 더러운 그릇이라 한 것은 『한비자』와 『여씨춘추』에 모두 양자가 지백의 머리를 옻칠하여 溲杅(오줌그릇)를 삼았다. 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正義】 유가 말하기를 “술그릇인데 매번 손님이 모일 때 진설하여 한이 깊음을 보인 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여러 선유가 말한 것이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六] 索隱卒,足律反。醳音釋,字亦作「釋」。
[六] 【索隱】 ‘卒’은 ‘足’과 ‘律’의 반이다. ‘醳’의 음은 ‘釋’인데 글자를 또한 ‘釋’이라 쓴다.
居頃之,豫讓又漆身為厲,[一]吞炭為啞,[二]使形狀不可知,行乞於市。其妻不識也。行見其友,其友識之,曰:「汝非豫讓邪?」曰:「我是也。」其友為泣曰:「以子之才,委質而臣事襄子,襄子必近幸子。近幸子,乃為所欲,[三]顧不易邪?[四]何乃殘身苦形,欲以求報襄子,不亦難乎!」豫讓曰:「既已委質臣事人,而求殺之,是懷二心以事其君也。且吾所為者[五]極難耳!然所以為此者,將以愧天下後世之為人臣懷二心以事其君者也。」[六]
얼마 지나 예양이 또한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병처럼 되게 하고, 숯을 삼켜 벙어리처럼 되게 하여 형상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시장에서 구걸하였다. 그 처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가다가 그 벗을 보았는데 그 벗이 그를 알아보고 말하기를 “너는 예양이 아닌가?” 하니 “내가 맞다.” 했다. 그 벗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로 몸을 바쳐 신하로 양자를 섬기면 양자는 반드시 그대를 가까이 하고 사랑할 것이니 바라는 바를 한다면 쉽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자신을 해치고 형상을 괴롭게 하여 양자에게 갚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가!” 예양이 말하기를 “이미 몸을 바친 신하로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죽일 것을 구하는 것은 이는 두 마음을 품고 그 임금을 섬기는 것이다. 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때문에 이를 하는 자는 장차 천하 후세에 다른 사람의 신하로 두 마음을 품고 그 임금을 섬기는 자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一] 集解音賴。索隱癘音賴。賴,惡瘡病也。凡漆有毒,近之多患瘡腫,若賴病然,故豫讓以漆塗身,令其若癩耳。然厲賴聲相近,古多假「厲」為「賴」,今之「癩」字從「疒」,故楚有賴鄉,亦作「厲」字,戰國策說此亦作「厲」字。
[一] 【集解】 음은 ‘賴’이다. 【索隱】 ‘癘’의 음은 ‘賴’이다. ‘賴’는 나쁜 부스럼 병이다. 무릇 옻칠은 독이 있어 가까이하면 많은 부스럼과 종기가 생겨서 문둥병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예양이 옻칠을 몸에 칠하여 문둥병과 같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厲’와 ‘賴’는 소리가 서로 가깝고 옛날에는 ‘厲’를 빌려 ‘賴’라 하였고, 지금의 ‘癩’자는 ‘疒’에 속한다. 그러므로 초나라에는 ‘賴鄕’이 있고, 또한 ‘厲’를 쓴 것이니 『전국책』에 이를 설명하여 또한 ‘厲’자를 썼다.
[二] 索隱啞音烏雅反。謂瘖病。戰國策云:「漆身為厲,滅鬚去眉,以變其容,為乞食人。其妻曰:『狀貌不似吾夫,何其音之甚相類也?』讓遂吞炭以變其音也。」
[二] 【索隱】 ‘啞’의 음은 ‘烏’와 ‘雅’의 反이다. ‘瘖病’이다. 『전국책』에 “몸에 옻칠하여 부스럼이 나게 하고 수염을 없애고, 눈썹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그 얼굴을 바꾸고 다른 사람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그 처가 말하기를 ‘모습은 내 지아비가 아닌데 어찌하여 그 소리가 매우 서로 비슷한가?’ 하니 마침내 예양이 숯을 삼켜서 그 소리를 바꾸었다.
[三] 索隱謂因得殺襄子。
[三] 【索隱】 인하여 양자를 죽일 수 있음을 말한다.
[四] 索隱顧,反也。耶,不定之辭。反不易耶,言其易也。
[四] 【索隱】 ‘顧’는 ‘反’이다. ‘耶’는 부정하는 말이다. 도리어 쉽지 않은가?는 쉽다는 말이다.
[五] 索隱劉氏云:「謂今為癘啞也。」
[五] 【索隱】 유씨가 말하기를 “지금의 문둥병과 벙어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六] 索隱言寧為厲而自刑,不可求事襄子而行殺,則恐傷人臣之義而近賊,非忠也。
[六] 【索隱】 차라리 문둥병에 걸리고 스스로 형벌하더라도 양자를 섬기면서 죽임을 행할 수 없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신하된 의리를 해치면서 적을 가까이하는 것은 충이 아님을 두려워한 것이다.
既去,頃之,襄子當出,豫讓伏於所當過之橋下。[一]襄子至橋,馬驚,襄子曰:「此必是豫讓也。」使人問之,果豫讓也。於是襄子乃數豫讓曰:「子不嘗事范、中行氏乎?智伯盡滅之,而子不為報讎,而反委質臣於智伯。智伯亦已死矣,而子獨何以為之報讎之深也?」豫讓曰:「臣事范、中行氏,范、中行氏皆眾人遇我,我故眾人報之。至於智伯,國士遇我,我故國士報之。」襄子喟然歎息而泣曰:「嗟乎豫子!子之為智伯,名既成矣,而寡人赦子,亦已足矣。子其自為計,寡人不復釋子!」使兵圍之。豫讓曰:「臣聞明主不掩人之美,而忠臣有死名之義。前君已寬赦臣,天下莫不稱君之賢。今日之事,臣固伏誅,然願請君之衣而擊之,焉以致報讎之意,則雖死不恨。非所敢望也,敢布腹心!」於是襄子大義之,乃使使持衣與豫讓。豫讓拔劍三躍而擊之,[二]曰:「吾可以下報智伯矣!」遂伏劍自殺。死之日,趙國志士聞之,皆為涕泣。
떠나서 얼마 후 양자가 외출하자 예양이 마땅히 지나야 할 다리 아래 숨었다. 양자가 다리에 이르렀는데 말이 놀라자 양자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예양일 것이다.”하고 사람을 시켜 물으니 과연 예양이었다. 이에 양자가 예양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모두 없앴는데도 그대는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지백에게 몸을 바쳐 신하노릇 하였다. 지백은 이미 죽었는데 그대는 유독 어찌하여 원수를 갚기를 깊이 하는가?” 했다. 예양이 말하기를 “신이 범씨와 중행씨를 섬겼지만 범씨와 중행씨는 모두 나를 보통사람으로 대우하였으므로 내가 보통사람으로 갚았습니다. 지백에 이르러서는 국사로 나를 대우하므로 내가 국사로 보답하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위연히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아 예자여! 그대의 지백을 위하는 명성이 이미 이루어졌고, 과인은 그대를 용서하였으니 또한 충분하다. 그대는 스스로 계획하였고, 과인이 그대를 다시는 그대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군대로 하여금 둘러싸게 하였다. 예양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현명한 임금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않고, 충신은 죽을 명분의 의리가 있다. 합니다. 앞서 임금께서는 이미 너그럽게 신을 용서하였으므로 천하가 임금의 어짐을 일컬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오늘의 일로 신은 진실로 죽을 것이나 임금의 옷을 쳐서 원수를 갚는 뜻에 이른다면 곧 비록 죽어도 한하지 않을 것을 원하여 청합니다. 감히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감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을 폅니다!” 했다. 이에 양자가 그것을 대의라 여겨 곧 사람을 시켜 입은 옷을 예양에게 주게 하였다. 예양이 검을 뽑아 세 번 뛰면서 치고는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지백에게 보고할 수 있게 되었다!” 하고는 검에 엎어져서 스스로 죽었다. 죽는 날에 조나라의 뜻이 있는 선비들이 그것을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一] 正義汾橋下架水,在并州晉陽縣東一里。
[一] 【正義】 분교 아래 물을 가로지르는데 병주 진양현 동쪽 1리에 있다.
[二] 索隱戰國策曰:「衣盡出血。襄子迴車,車輪未周而亡。」此不言衣出血者,太史公恐涉怪妄,故略之耳。
[二] 【索隱】 『전국책』에 “옷이 모두 피가 나왔다. 양자가 수레를 돌리니 수레바퀴가 돌지 않고 망가졌다.” 했다. 여기서는 옷에서 피가 나온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태사공이 괴이하고 망녕된 것을 건너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생략한 것일 뿐이다.
其後四十餘年而軹有聶政之事。[一]
그 후 40년 뒤에 지 땅에서 섭정의 일이 있었다.
[一] 集解自三晉滅智伯至殺俠累,五十七年。
[一] 【集解】 삼진이 지백을 멸한 때로부터 협루를 죽인 때에 이르기까지 57년이다.
聶政者,軹深井里人也。[一]殺人避仇,與母、姊如齊,以屠為事。
섭정은 지 땅 심정리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하여 어머니, 누나와 함께 제나라에 가서 도살로서 일을 삼았다.
[一] 索隱地理志河內有軹縣。深井,軹縣之里名也。 正義在懷州濟源縣南三十里。
[一] 【索隱】 『지리지』에 하내에 지현이 있다. 심정은 지현의 마을 이름이다. 【正義】 회주 제원현 남쪽 30리에 있다.
久之,濮陽嚴仲子[一]事韓哀侯,[二]與韓相俠累[三]有卻。[四]嚴仲子恐誅,亡去,游求人可以報俠累者。至齊,齊人或言聶政勇敢士也,避仇隱於屠者之閒。嚴仲子至門請,數反,然後具酒自暢[五]聶政母前。酒酣,嚴仲子奉黃金百溢,前為聶政母壽。聶政驚怪其厚,固謝嚴仲子。嚴仲子固進,而聶政謝曰:「臣幸有老母,家貧,客游以為狗屠,可以旦夕得甘毳[六]以養親。親供養備,不敢當仲子之賜。」嚴仲子辟人,因為聶政言曰:「臣有仇,而行游諸侯眾矣;然至齊,竊聞足下義甚高,故進百金者,將用為大人麤糲之費,[七]得以交足下之驩,豈敢以有求望邪!」聶政曰:「臣所以降志辱身[八]居市井屠者,徒幸以養老母;老母在,政身未敢以許人也。」[九]嚴仲子固讓,聶政竟不肯受也。然嚴仲子卒備賓主之禮而去。
오랜 후 복양의 엄중자는 한나라 애후를 섬겼는데 한나라 재상 협루와는 사이가 나빴다. 엄중자가 죽음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가서 유세하며 협루에게 갚아줄만한 사람을 구하였다. 제나라에 이르니 제나라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섭정이 용감한 선비인데 원수를 피하여 백정들 사이에 숨었다고 말하였다. 엄중자가 문에 이르러 청하고, 돌아가기를 여러 번 한 후에 술을 갖추고 스스로 섭정의 어머니 앞에 올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엄중자가 황금 100일을 받들고 앞에서 섭정 어머니를 축수하였다. 섭정이 그 후함에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엄중자에게 굳게 사양하였다. 엄중자가 굳이 올리자 섭정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요행히도 늙은 어머니가 있고, 집이 가난하여 객이 되어 떠도는 것으로서 개잡는 백정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얻어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습니다. 어버이를 공양할 준비를 할 수 있으니 엄중자의 내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했다. 엄중자가 사람을 물리치고 섭정에게 말하기를 “신은 원수가 있어서 제후에게 유세를 행한 것이 많았으나 제나라에 이르러 그대의 의가 매우 높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백금을 올리는 것은 장차 대인을 위하여 현미 쌀의 비용에 쓰고, 사귀는 것으로써 그대의 환심을 얻으려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바람을 구함이 있을까!” 했다. 섭정이 말하기를 “신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 시장에서 백정의 일을 하는 까닭은 요행히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때문이니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어 자신을 감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지 못합니다.” 했다. 엄중자가 굳게 사양하나 섭정이 마침내 즐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엄중자가 끝내 빈주의 예를 갖추고 갔다.
[一] 索隱高誘曰:「嚴遂,字仲子。」
[一] 【索隱】 고유가 말하기를 “엄수이니 자는 중자이다.” 했다.
[二] 索隱案:表聶政殺俠累在列侯三年。列侯生文侯,文侯生哀侯,凡更三代,哀侯六年為韓嚴所殺。今言仲子事哀侯,恐非其實。且太史公聞疑傳疑,事難旳據,欲使兩存,故表、傳各異。
[二] 【索隱】 살펴보니 「표」에 섭정이 협루를 살해 한 것은 열후 3년에 있다. 열후가 문후를 낳고, 문후가 애후를 낳아 무릇 3대를 바꾸어서 애후 6년에 한엄이 살해당하였다. 지금 엄중자가 애후를 섬겼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 실제가 아닐 것이다. 또 태사공은 의심스럽게 들은 것을 의심스럽게 전하여 일의 분명한 근거를 대기 어려워서 둘 모두를 보존하게 하고자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표」와 「전」이 각각 다르다.
[三] 索隱上古夾反,下力追反。案:戰國策俠累名傀也。
[三] 【索隱】 위는 ‘古’와 ‘夾’의 反이고, 아래는 ‘力’과 ‘追’의 反이다. 살펴보니 『전국책』에 협루의 이름은 ‘傀’이다.
[四] 索隱戰國策云:「韓傀相韓,嚴遂重於君,二人相害也。嚴遂舉韓傀之過,韓傀叱之於朝,嚴遂拔劍趨之,以救解。」是有卻之由也。
[四] 【索隱】 『전국책』에 “한괴가 한나라 재상일 때 엄수가 임금에게 중용되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해쳤다. 엄수가 한괴의 허물을 거론하자 한괴는 조정에서 질책하니 엄수가 검을 뽑아 따라 가는 것으로써 해명을 구하였다.” 했다. 이것이 사이가 나빠진 이유이다.
[五] 集解徐廣曰:「一作『賜』。」 索隱徐氏云一作「賜」。案:戰國策作「觴」,近為得也。 正義數,色吏反。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賜’라 썼다.”했다. 【索隱】 서씨가 말하기를 “한편으로 ‘賜’로도 쓴다.” 했다. 살펴보니 『전국책』에는 ‘觴’이라 썼는데 ‘얻음에 가깝다.’ 【正義】 ‘數’는 ‘色’과 ‘吏’의 反이다.
[六] 集解此芮反。 索隱鄒氏音脆,二義相通也。
[六] 【集解】 ‘此’와 ‘芮’의 反이다. 【索隱】 추씨는 “음이 ‘脆’이다.” 했는데 두 뜻이 서로 통한다.
[七] 正義糲猶麤米也,脫粟也。韋昭云:「古者名男子為丈夫,尊婦嫗為大人。漢書宣元六王傳『王遇大人益解,為大人乞骸去』。按大人,憲王外祖母。古詩云『三日斷五疋,大人故言遲』是也。」
[七] 【正義】 ‘糲’는 현미와 같은데 탈곡한 곡식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옛 날에는 남자를 이름하여 丈夫라 하고, 어머니를 높여서 대인이라 한다.” 했다. 『한서』 선원 육왕전에 “왕이 대인을 대우하는 것이 더욱 해이해지자 대인을 위하여 떠날 것을 구걸하였다.” 했다. 살펴보니 대인은 헌왕의 외할머니이다. 옛 시에 “삼일동안 비단 다섯 필을 짜는데도 대인(외할머니, 시어머니)은 고의로 늦게 한다고 말합니다.” 한 것이 이것이다.
[八] 索隱言其心志與身本應高絜,今乃卑下其志,屈辱其身。論語孔子謂「柳下惠降志辱身」是也。
[八] 【索隱】 그 심지와 몸이 본래 마땅히 고결해야 함을 말하니 지금 곧 그 뜻을 낮추어 그 몸을 굽히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논어』에 공자가 말하기를 “유하혜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九] 索隱禮記曰:「父母存,不許友以死。」
[九] 【索隱】 『예기』에 “부모가 생존해 있으면 친구를 위해 죽는 것을 허여하지 않는다.” 했다.
久之,聶政母死。既已葬,除服,聶政曰:「嗟乎!政乃市井之人,[一]鼓刀以屠;而嚴仲子乃諸侯之卿相也,不遠千里,枉車騎而交臣。臣之所以待之,至淺鮮矣,未有大功可以稱者,而嚴仲子奉百金為親壽,我雖不受,然是者徒深知政也。夫賢者以感忿睚眥之意而親信窮僻之人,而政獨安得嘿然而已乎!且前日要政,政徒以老母;老母今以天年終,政將為知己者用。」乃遂西至濮陽,見嚴仲子曰:「前日所以不許仲子者,徒以親在;今不幸而母以天年終。仲子所欲報仇者為誰?請得從事焉!」嚴仲子具告曰:「臣之仇韓相俠累,俠累又韓君之季父也,宗族盛多,居處兵衛甚設,臣欲使人刺之,(眾)終莫能就。今足下幸而不棄,請益其車騎壯士可為足下輔翼者。」聶政曰:「韓之與衛,相去中閒不甚遠,[二]今殺人之相,相又國君之親,此其勢不可以多人,多人不能無生得失,[三]生得失則語泄,語泄是韓舉國而與仲子為讎,[四]豈不殆哉!」遂謝車騎人徒,聶政乃辭獨行。
오래되어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장례 후 상복을 벗자 섭정이 말하기를 “아! 나는 곧 시정의 사람으로 식칼을 잘 쓰는 것으로써 백정이 되었고, 엄중자는 곧 제후의 경상인데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수레를 몰고 와 신과 사귀었습니다. 신이 그를 대함이 지극히 얕고 적었으며, 대공이라 일컬을만한 것이 있지 않음에도 엄중자는 백금을 받들고 어버이를 축수하니 내가 비록 받지 않았다 해도 그러나 이것은 나를 깊이 알아준 것입니다. 대저 어진 자가 분노와 눈을 흘김의 뜻을 느끼고 친히 궁벽한 곳에 있는 사람을 믿어주시니 제가 어찌 홀로 묵묵히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전 날에 나를 요청하였을 때는 제게 늙은 어머니가 있었고, 늙은 어머니가 지금은 하늘이 준 목숨을 다하였으니 제가 장차 나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쓰이려 합니다.” 했다. 이에 마침내 서쪽으로 복양에 이르러 엄중자를 보고 말하기를 “전날에 엄중자를 허여하지 못한 까닭은 어버이가 생존해 있었고, 지금은 불행히도 어머니가 하늘이 준 수명을 다하였습니다. 엄중자가 원수를 갚고자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일에 종사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했다. 엄중자가 갖추어 말하기를 “신의 원수는 한나라 재상 협루인데, 협루는 한나라 임금의 계부여서 종족이 많고, 사는 곳에는 군대가 호위를 매우 잘 베풀어져 있습니다. 신이 다른 사람을 시켜 찌르려 하였는데 끝내 나아갈 수(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대가 요행히 버리지 않았으니 그 수레와 장사를 더하여 그대를 위해 도울 수 있기를 청합니다.” 했다. 섭정이 말하기를 “한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떨어진 사이가 매우 멀지 않고 지금 재상을 죽이려 하는데 제상이 또한 임금의 친척이니 이는 그 형세가 많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사람이 많으면 살아서 잡히는 잘못이 없을 수 없고, 살아서 잡히는 실수가 있으면 곧 말이 누설되고, 말이 누설되면 이는 한나라가 나라를 들어 엄중자와 원수가 될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했다. 마침내 수레와 말, 사람들을 사양하고, 섭정은 곧 하직하고 홀로 갔다.
[一] 正義古者相聚汲水,有物便賣,因成市,故云「市井」。
[一] 【正義】 옛 날에 서로 모여 물을 긷고, 물건이 있으면 편하게 팔았으니 인하여 시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市井’이라 한 것이다.
[二] 索隱高誘曰:「韓都潁川陽翟,衛都東郡濮陽,故曰『閒不遠』也。」
[二] 【索隱】 고유가 말하기를 “한나라 도읍 영천 양적과 위나라 도읍인 동군 복양이었기 때문에 ‘閒不遠(사이가 멀지 않다.)’이라 한 것이다.
[三] 索隱無生得。戰國策作「無生情」,言所將人多,或生異情,故語泄。此云「生得」,言將多人往殺俠累後,又被生擒而事泄,亦兩俱通也。
[三] 【索隱】 ‘無生得’은 『전국책』애 ‘無生情’이라 썼는데 장차 사람이 많으면 혹 다른 정이 생겨나면서 말이 누설된다. 여기서 말한 ‘生得’은 장차 많은 사람이 가서 협루를 죽인 후에 또한 살아서 사로잡히면 일이 누설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또한 둘 모두 통한다.
[四] 集解徐廣曰:「一作『難』。」 索隱徐注云一作「難」。戰國策譙周亦同。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難’으로 쓴다.” 했다. 【索隱】 서광의 주에 “한편으로 ‘難’이라 쓴다.” 했다. 『전국책』 초주에도 또한 같다.
杖劍至韓,韓相俠累方坐府上,持兵戟而衛侍者甚眾。聶政直入,上階刺殺俠累,[一]左右大亂。聶政大呼,所擊殺者數十人,因自皮面決眼,[二]自屠出腸,遂以死。
검을 차고 한나라에 이르렀는데 한나라 재상 협루가 바야흐로 관청 위에 앉아 있는데 창을 들고 호위하며 모시는 자가 매우 많았다. 섭정이 곧바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협루를 찔러 죽이니 좌우가 크게 어지러워 졌다. 섭정이 크게 소리 지르며 쳐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다. 인하여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뽑고 스스로 찔러 창자가 나오게 하고는 마침내 죽었다.
[一] 集解徐廣曰:「韓烈侯三年三月,盜殺韓相俠累。俠累名傀。戰國策曰『有東孟之會』,又云『聶政刺韓傀,兼中哀侯』。」 索隱戰國策曰:「政直入,上階刺韓傀,傀走而抱哀侯,聶政刺之,兼中哀侯。」高誘曰:「東孟,地名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 열후 3년 3월 도적이 한나라 재상 협루를 죽였다. 협루의 이름은 傀이다.” 했다. 『전국책』에 “‘동맹 땅에서 會盟이 있었다.’ 하고 또 ‘섭정이 한괴를 찌르고 겸하여 애후를 맞추었다.” 했다. 【索隱】 『전국책』에 “섭정이 곧바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한괴를 찌르니 한괴가 달아나 애후를 안았는데 섭정이 그를 찌르면서 겸하여 애후를 맞추었다.” 했다. 고유가 말하기를 “동맹은 땅 이름이다.” 했다.
[二] 索隱皮面謂以刀割其面皮,欲令人不識。決眼謂出其眼睛。戰國策作「抉眼」,此「決」亦通,音烏穴反。
[二] 【索隱】 ‘皮面’은 칼로 그 얼굴 가죽을 벗겨서 다른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決眼’은 그 눈동자를 뽑아내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에 ‘抉眼’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抉’이라 하니 또한 통한다. 음은 ‘烏’와 ‘穴’의 ‘反’이다.
韓取聶政屍暴於市,[一]購問莫知誰子。於是韓(購)縣[購]之,有能言殺相俠累者予千金。久之莫知也。
한나라가 섭정의 시체를 취하여 시장에 드러내고 물었는데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였다. 이에 한나라 현상금을 내걸었는데 재상 협루를 죽인 자를 말할 수 있는 자에게는 천금을 준다고 하였다. 오래되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一] 正義暴,蒲酷反。
[一] 【正義】 ‘暴’은 ‘蒲’와 ‘酷’의 反이다.
政姊榮[一]聞人有刺殺韓相者,賊不得,國不知其名姓,暴其尸而縣之千金,乃於邑[二]曰:「其是吾弟與?嗟乎,嚴仲子知吾弟!」立起,如韓,之市,而死者果政也,伏尸哭極哀,曰:「是軹深井里所謂聶政者也。」市行者諸眾人皆曰:「此人暴虐吾國相,王縣購其名姓千金,夫人不聞與?何敢來識之也?」榮應之曰:「聞之。然政所以蒙污辱自棄於市販之閒者,為老母幸無恙,[三]妾未嫁也。親既以天年下世,妾已嫁夫,嚴仲子乃察舉吾弟困污之中[四]而交之,澤厚矣,可柰何!士固為知己者死,今乃以妾尚在之故,重自刑以絕從,[五]妾其柰何畏歿身之誅,終滅賢弟之名!」大驚韓市人。乃大呼天者三,卒於邑悲哀而死政之旁。
섭정의 누나 영이 사람들에게서 한나라 재상을 찔러 죽인 자가 있었는데, 적을 잡지 못하고, 나라도 그 이름과 성을 알지 못하여 그 시체를 드러내고 천금을 현상금으로 걸었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 울면서 말하기를 “이는 내 동생일까? 아! 엄중자가 내 동생을 알아주었는가!” 하고는 일어나 한나라 시장에 갔는데 죽은 자가 과연 섭정이었다. 시체에 엎드려 소리 내어 울기면서 지극히 슬퍼하고 말하기를 “이는 지 당 심정 마을의 이른 바 섭정이라는 자이다.” 하니 시장을 통행하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나라 재상을 사납고 잔인하게 해친 자로 왕이 그 이름과 성을 알고자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는데 부인은 듣지 못하였소? 어찌 감히 와서 그를 안다 하시오?” 했다. 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섭정이 더러운 욕을 무릅쓰고 시장 사이에 자신을 버렸던 것은 늙은 어머니가 요행히 병이 없기를 위하고, 내가 아직 시집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버이가 이미 하늘이 준 수명을 다하고 세상을 하직하였고, 내가 이미 시집갔는데 엄중자가 곧 내 동생이 곤궁하고 더러움의 가운데 있는 것을 거론하며 사귀면서 은택을 두터이 하였으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선비는 진실로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여 죽는데 지금 내가 오히려 살아 있기 때문에 스스로 형벌을 심하게 하는 것으로써 따름(흔적)을 끊었으니(없앴으니) 내가 어떻게 내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끝내 어진 동생의 이름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한나라 시장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크게 하늘을 세 번 부르고는 마침내 매우 슬퍼하다 섭정의 옆에서 죽었다.
[一] 集解一作「嫈」。 索隱榮,其姊名也。戰國策無「榮」字。
[一] 【集解】 한편으로 ‘嫈’으로도 쓴다. 【索隱】 ‘榮’은 그 누나의 이름이다. 『전국책』에는 ‘榮’자가 없다.
[二] 索隱劉氏云:「煩冤愁苦。」
[二] 【索隱】 유씨가 말하기를 “번거롭게 원망하고, 금심 걱정으로 괴로워 함”이라 했다.
[三] 索隱爾雅云「恙,憂也」。楚詞云「還及君之無恙」。風俗通云「恙,病也。凡人相見及通書,皆云『無恙』。」又易傳云,上古之時,草居露宿。恙,齧蟲也,善食人心,俗悉患之,故相勞云「無恙」。恙非病也。
[三] 【索隱】 『이아』에 “‘恙’은 근심이다.” 했다. 「초사」에 “돌아와 임금의 근심을 없게 한다.” 했다. 『풍속통』에 “‘恙’은 병이다. 무릇 사람이 서로 보는 것과 글을 통하는 것에서 모두 ‘無恙’이라 한다.” 또 『역』 전에 “상고의 때에 거처를 풀로 하고 이슬 맞으며 잠 잔다.” 했고, ‘恙’은 깨무는 벌레로 사람의 심장을 장 먹으므로 세상에서는 모두 그것을 근심하였다. 그러므로 서로 위로하여 말하기를 ‘無恙’이라 말한다. ‘恙’은 병이 아니다.
[四] 索隱案:察謂觀察有志行乃舉之。劉氏云察猶選也。
[四] 【索隱】 살펴보니 ‘察’은 지행이 있음을 관찰하여 이에 천거하는 것이다. 유시가 말하기를 “‘察’은 ‘選(가릴 선)’과 같다.” 했다.
[五] 集解徐廣曰:「恐其姊從坐而死。」 索隱重音持用反。重猶復也。為人報讎死,乃以妾故復自刑其身,令人不識也。從音蹤,古字少,假借無旁「足」,而徐氏以為從坐,非也。劉氏亦音足松反。正義重,直龍反。自刑作「刊」。說文云「刊,剟也」。按:重猶愛惜也。本為嚴仲子報仇訖,愛惜其事,不令漏泄,以絕其蹤跡。其姊妄云為己隱,誤矣。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그 누나가 연좌되어 죽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했다. 【索隱】 ‘重’의 음은 ‘持’와 ‘用’의 反이다. ‘重’은 ‘復(돌아올 복)’과 같다. 다른 사람을 위해 원수를 갚고 죽으면서 나 때문에 다시 스스로 그 몸에 형벌을 가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다. ‘從’의 음은 ‘蹤(자취 종)’인데 옛 글자는 적게 보이고 옆에 ‘足’이 없는 것을 빌렸으니 서광이 ‘從坐(연좌를 따른 것이다.)’라 한 것은 잘못이다. 유씨가 또한 음은 ‘足’과 ‘松’의 反이라 했다. 【正義】 ‘重’은 ‘直’과 ‘龍’의 反이다. ‘自刑’은 ‘干’이라 쓴다. 『설문』에 “‘刊’은 ‘剟(깍을 철, 찌를 철)이다’”했다. 살펴보니 ‘重’은 애석과 같다. 본래 엄중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은 후 그 일을 애석히 여기고 누설되지 않게 하여 그 자취를 끊으려는 것이었는데 그 누나가 망녕되이 자기를 위하여 숨겼다. 한 것은 잘못이다.
晉、楚、齊、衛聞之,皆曰:「非獨政能也,乃其姊亦烈女也。鄉使政誠知其姊無濡忍之志,[一]不重暴骸之難,[二]必絕險千里以列其名,姊弟俱僇於韓市者,亦未必敢以身許嚴仲子也。嚴仲子亦可謂知人能得士矣!」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위나라가 그것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유독 섭정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누나 또한 열녀이다. 예전에 가령 섭정이 그 누나가 힘이 없고 연약하여 참는 뜻이 없고, 해골이 드러나는 어려움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매우 험한 천리에 그 이름을 나열하고, 누나와 동생이 함께 한나라 시장에서 욕을 당할 것을 진실로 알았다면 또한 반드시 감히 자신으로써 엄중자를 허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중자가 또한 다른 사람을 알아보아 선비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 할만하다.
[一] 索隱濡,潤也。人性溼潤則能含忍,故云「濡忍」也。若勇躁則必輕死也。
[一] 【索隱】 ‘濡’는 윤택함이다. 사람의 성품이 윤택하면 곧 참음을 머금을 수 있다. 그러므로 ‘濡忍’이라 한 것이다. 만약 용맹스럽고 조급하면 곧 반드시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二] 索隱重難並如字。重猶惜也,言不惜暴骸之為難也。
[二] 【索隱】 ‘重’과 ‘難’은 모두 같은 글자이다. ‘重’은 ‘惜’과 같으니 해골이 드러나는 어려움이 되는 것을 애석해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其後二百二十餘年秦有荊軻之事。[一]
그 220여년 후에 진나라에 형가의 일이 있었다.
[一] 集解徐廣曰:「聶政至荊軻百七十年爾。」 索隱徐氏據六國年表,聶政去荊軻一百七十年,則謂此傳率略而言二百餘年,亦當時為不能細也。正義按:年表從始皇二十三年至韓景侯三百七十年,若至哀侯六年,六百四十三年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섭정에서 형가에 이르기까지 170년일 뿐이다.”【索隱】 서씨가 6국의 연표에 근거하여 섭정으로부터 형가까지 170년이면 곧 이 전은 총괄하여 대략적으로 200여년을 말한 것은 또한 당시에 세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荊軻者,衛人也。[一]其先乃齊人,徙於衛,衛人謂之慶卿。[二]而之燕,燕人謂之荊卿。
형가는 위나라 사람이다. 그 선조는 곧 제나라 사람이었는데 위나라로 옮겼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경경이라 말하였다. 연나라에 가면 연나라 사람들이 형경이라 말하였다.
[一] 索隱按:贊論稱「公孫季功、董生為余道之」,則此傳雖約戰國策而亦別記異聞。
[一] 【索隱】 살펴보니 찬론에 말하기를 “공손계공과 동생이 나를 위하여 말하였다.”했다. 곧 이 전은 비록 『전국책』을 요약하였으되 또한 별도로 달리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
[二] 索隱軻先齊人,齊有慶氏,則或本姓慶。春秋慶封,其後改姓賀。此下亦至衛而改姓荊。荊慶聲相近,故隨在國而異其號耳。卿者,時人尊重之號,猶如相尊美亦稱「子」然也。
[二] 【索隱】 형가의 선조가 제나라 사람이고, 제나라에 경씨가 있었으니 곧 혹 본래 성이 경씨인가 한다. 『춘추』에 경씨를 봉한 후에 성을 바꾸어 ‘하’라 했다. 이 아래 또한 위나라에 이르러 성을 ‘형’이라 고쳤다. ‘荊’과 ‘慶’은 소리가 비슷하다. 그러므로 있는 나라에 따라서 그 부르는 것을 달리 했을 뿐이다. ‘卿’은 그 때 사람들이 존중하는 호이니 서로 높이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과 같으니 또한 ‘子’를 일컬은 것과 같다.
荊卿好讀書擊劍,[一]以術說衛元君,衛元君不用。其後秦伐魏,置東郡,徙衛元君之支屬於野王。[二]
형경은 독서하고 검을 치기를 좋아하여 이 방법으로 위나라 원군을 유세하였으나 위나라 원군이 쓰지 않았다. 그 후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고 동군을 설치하였고, 위나라 원군의 가솔들을 야왕에 옮겼다.
[一] 集解呂氏劍技曰:「持短入長,倏忽從橫。」
[一] 【集解】 『여씨검기』에 “약점을 가지고 장점에 들어가고 갑자기 종횡으로 한다.” 했다.
[二] 正義懷州河內縣。
[二] 【正義】 회주 하내현이다.
荊軻嘗游過榆次,[一]與蓋聶論劍,[二]蓋聶怒而目之。荊軻出,人或言復召荊卿。蓋聶曰:「曩者吾與論劍有不稱者,吾目之;試往,是宜去,不敢留。」使使往之主人,荊卿則已駕而去榆次矣。使者還報,蓋聶曰:「固去也,吾曩者目攝之!」[三]
형가가 일찍이 유세하여 유차를 지나다 개섭과 검을 논하였는데 개섭이 노하여 노려보니 형가가 나갔다. 사람들이 혹 다시 형경을 부르라 하자 개섭이 말하기를 “전에 나와 더불어 검을 논하다 걸맞지 않은 것이 있어서 내가 노려보았는데 시험 삼아 가보라. 이에 마땅히 떠났을 것으로 감히 머물지 않을 것이다.” 했다. 심부름하는 자를 시켜서 주인에게 가보니 형경은 곧 이미 멍에하여 유차에 떠났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개섭이 말하기를 “진실로 떠났다. 내가 지난번에 눈으로 화를 내었다!” 했다.
[一] 正義并州縣也。
[一] 【正義】 병주현이다.
[二] 索隱蓋音古臘反。蓋,姓;聶,名。
[二] 【索隱】 ‘蓋’의 음은 ‘古’와 ‘臘’의 反이다. ‘蓋’는 성이고, ‘聶’은 이름이다.
[三] 索隱攝猶整也。謂不稱己意,因怒視以攝整之也。正義攝猶視也。
[三] 【索隱】 ‘攝’은 ‘整’과 같다. 자기의 뜻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노한 눈으로 보고 화를 낸 것이다. 【正義】 ‘攝’은 ‘視’와 같다.
荊軻游於邯鄲,魯句踐與荊軻博,爭道,[一]魯句踐怒而叱之,荊軻嘿而逃去,遂不復會。
형가가 한단에서 유세할 때 노구천과 형가가 장기를 두다 방법을 다투었는데 노구천이 노하여 질책하니 형가가 말을 않고 도망하여 가서 마침내 다시 만나지 않았다.
[一] 索隱魯,姓;句踐,名也。與越王同,或有意義。俗本「踐」作「賤」,非。
[一] 【索隱】 ‘魯’는 성이고, ‘句踐’은 이름이다. 월나라 왕과 같으니 혹 뜻이 있다. 세속 본에는 ‘踐’을 ‘賤’으로 썼는데 아니다.
荊軻既至燕,愛燕之狗屠及善擊筑者高漸離。[一]荊軻嗜酒,日與狗屠及高漸離飲於燕市,酒酣以往,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於市中,相樂也,已而相泣,旁若無人者。荊軻雖游於酒人乎,[二]然其為人沈深好書;其所游諸侯,盡與其賢豪長者相結。其之燕,燕之處士田光先生亦善待之,知其非庸人也。
형가가 연나라에 이른 후 연나라의 개잡는 백정과 축을 잘 연주하는 고점리를 사랑하였다. 형가는 술을 좋아하여 매일 개잡는 백정 및 고점리와 연나라 시장에서 술을 마시다 술이 얼큰하면 고점리는 축을 연주하고, 형가는 맞추어 시장 안에서 노래하여 서로 즐기다 마치면 서로 눈물을 흘려 옆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형가가 비록 술 마시는 사람들과 교유하였지만 그 사람됨은 침착하고 깊으며 글을 좋아하고, 교유하는 제후들은 모두 어질고, 호걸스러운 장자들과 서로 친교를 맺었다. 연나라에 갔을 때 연나라의 처사 전광선생이 또한 잘 대우하였는데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一] 索隱筑似琴,有弦,用竹擊之,取以為名。漸音如字,王義(之)音哉廉反。
[一] 【索隱】 ‘筑’은 거문고와 비슷한데 줄이 있고, 대나무를 써서 연주하기 때문에 이름을 삼았다. ‘漸’의 음은 본래 글자와 같고, 왕의의 음은 ‘哉’와 ‘廉’의 反이다.
[二] 集解徐廣曰:「飲酒之人。」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술을 마시는 사람이다.” 했다.
居頃之,會燕太子丹質秦亡歸燕。燕太子丹者,故嘗質於趙,而秦王政生於趙,其少時與丹驩。及政立為秦王,而丹質於秦。秦王之遇燕太子丹不善,故丹怨而亡歸。歸而求為報秦王者,國小,力不能。其後秦日出兵山東以伐齊、楚、三晉,稍蠶食諸侯,且至於燕,燕君臣皆恐禍之至。太子丹患之,問其傅鞠武。[一]武對曰:「秦地遍天下,威脅韓、魏、趙氏,北有甘泉、谷口之固,南有涇、渭之沃,擅巴、漢之饒,右隴、蜀之山,左關、殽之險,民眾而士厲,兵革有餘。意有所出,則長城之南,易水以北,[二]未有所定也。柰何以見陵之怨,欲批[三]其逆鱗哉!」丹曰:「然則何由?」對曰:「請入圖之。」
얼마 후 마침 연나라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도망하여 연나라에 돌아왔다. 연나라 태자 단은 일찍이 조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진나라 왕 정이 조나라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단과 잘 지냈다. 정이 즉위하여 진나라 왕이 되고, 단이 진나라에 인질이 되었다. 진나라 왕이 연나라 태자 단을 잘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이 원망하여 도망하여 돌아갔다. 돌아가 진나라 왕에게 보복할 것을 구하였으나 나라가 적고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후 진나라가 날로 군대를 내어 동쪽으로 제나라와 초나라, 삼진을 쳐서 점점 제후를 잠식하여 또 연나라에 이르니 연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재앙이 이를까 두려워하였다. 태자 단이 근심하여 그 사부 국무에게 물었다. 국무가 대답하기를 “진나라 땅은 천하를 두루하고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위협하고, 북쪽으로 감천과 곡구의 견고함을 소유하며, 남쪽으로는 경수와 위수의 비옥함과 파, 한중의 풍요로움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오른 쪽으로 농과 촉의 산이 있고, 왼쪽으로 관과 효의 험준함이 있고, 백성이 많고 군사는 사나우며 병기는 남음이 있습니다. 나올 바에 뜻을 두면 곧 장성의 남쪽과 역수의 북쪽으로 정해진 바가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업신여겨짐의 원한 때문에 그 역린을 건드리려 하는가!” 하였다. 단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들어가 도모할 것을 청합니다.” 했다.
[一] 索隱上音麴,又如字,人姓名也。
[一] 【索隱】 위의 음은 ‘麴’인데 또 글자 그대로이다. 사람의 성명이다.
[二] 正義以北謂燕國也。
[二] 【正義】 ‘以北’은 연나라를 말한다.
[三] 集解批音白結反。 索隱白結反。批謂觸擊之。
[三] 【集解】 ‘批’의 음은 ‘自’와 ‘結’의 反이다. ‘批’는 접촉하여 치는 것을 말한다.
居有閒,秦將樊於期得罪於秦王,亡之燕,太子受而舍之。鞠武諫曰:「不可。夫以秦王之暴而積怒於燕,足為寒心,[一]又況聞樊將軍之所在乎?是謂『委肉當餓虎之蹊』也,禍必不振矣![二]雖有管、晏,不能為之謀也。願太子疾遣樊將軍入匈奴以滅口。請西約三晉,南連齊、楚,北購於單于,[三]其後迺可圖也。」 太子曰:「太傅之計,曠日彌久,心惛然,[四]恐不能須臾。且非獨於此也,夫樊將軍窮困於天下,歸身於丹,丹終不以迫於彊秦而棄所哀憐之交,置之匈奴,是固丹命卒之時也。願太傅更慮之。」鞠武曰:「夫行危欲求安,造禍而求福,計淺而怨深,連結一人之後交,不顧國家之大害,此所謂『資怨而助禍』矣。夫以鴻毛燎於爐炭之上,必無事矣。且以鵰鷙之秦,行怨暴之怒,豈足道哉!燕有田光先生,其為人智深而勇沈,可與謀。」太子曰:「願因太傅而得交於田先生,可乎?」鞠武曰:「敬諾。」出見田先生,道「太子願圖國事於先生也」。田光曰:「敬奉教。」乃造焉。
태자가 말하기를 “태부의 계책은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매우 오래이니 마음에 번민하여 잠시라도 할 수 없음이 두려워집니다. 또 유독 이것뿐만 아니라 저 번장군은 천하에 궁곤하여 몸을 나에게 돌아왔는데 내가 끝내 강한 얼마 후 진나라 장군 번오기가 진나라 왕에게 죄를 짓고 도망하여 연나라에 가니 태자가 받아 머물게 했다. 국무가 간하여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저 진나라 왕의 사나움으로 노함을 연나라에 쌓으면 충분히 심장을 서늘하게 할 수 있는데 또한 하물며 번 장군이 있는 곳을 들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는 ‘고기를 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에 맡기는 것’을 말함이니 재앙이 반드시 떨치지 않겠는가! 비록 관자와 안영이 있을지라도 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빨리 번장군을 흉노로 들여보내 알려지지 않도록 할 것을 원합니다. 서쪽으로 삼진과 맹약하고 남쪽으로 제나라, 초나라와 연합하고 북쪽으로 선우와 화친한 후에야 도모할 수 있습니다.” 했다. 진나라에 압박받아 슬퍼하고 불쌍한 사귐을 버리고 흉노에 두는 것은 이는 진실로 내가 목숨이 다는 때까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태부께서 다시 생각하실 것을 원합니다.” 했다. 국무가 말하기를 “저 위태로움을 행하면서 편안함을 구하고자 하고, 재앙을 지으면서 복을 구하고 계책을 얕게 하여 원망을 깊게 하며, 한 사람의 뒤늦은 교제를 이어 맺고자 국가의 큰 해침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것이 이른 바 ‘원망을 쌓아 재앙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대저 기러기의 털을 화로 숯 위에서 태우면 반드시 일이 없을 것이다. 또한 독수리 같은 진나라가 원망과 사나움의 노여움을 행하면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연나라에 전광선생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지혜가 깊고 용맹하고 참착하니 함께 도모할 수 있습니다.” 했다. 태자가 말하기를 “태부로 인하여 전선생과 교제할 수 있을까요?” 했다. 국무가 말하기를 “공경히 수락합니다.(예 할 수 있습니다.)” 하고는 나가 전선생을 만나 ‘태자가 선생과 국사를 도모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전광이 말하기를 “공경히 가르침을 받듭니다.” 하고는 곧 나아갔다.
[一] 索隱凡人寒甚則心戰,恐懼亦戰。今以懼譬寒,言可為心戰。
[一] 【索隱】 무릇 사람들의 서늘함이 심하면 곧 마음이 싸우고, 두려워하면 또한 싸운다. 지금 두려움으로써 서늘함을 비유하여 마음을 위해 싸울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二] 索隱振,救也。言禍及天下,不可救之。
[二] 【索隱】 ‘振’은 구원함이다. 재앙이 천하에 미쳐 구원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三] 索隱戰國策「購」作「講」。講,和也。今讀購與「為燕媾」同,媾亦合也。漢、史媾講兩字常雜,今欲北與連和。陳軫傳亦曰「西購於秦」也。
[三] 【索隱】 『전국책』에 ‘購’는 ‘講’이라 썼다. ‘講’은 화친함이다. 지금 ‘購’를 읽는 것과 ‘為燕媾(연나라가 화친하다.)’는 같고 ‘媾(화친할 구)’는 또한 합함이다. 『한서』와 『사기』는 ‘媾’와 ‘講’ 두 글자는 항상 섞였고, 지금 북쪽과 연화하고자 한 것이다. 「진진전」에 또한 말하기를 “西購於秦(서쪽으로 진나라와 화친하였다.” 했다.
[四] 正義惛音昏。
[四] 【正義】 ‘惛’의 음은 ‘昏’이다.
太子逢迎,卻行為導,跪而蔽席。[一]田光坐定,左右無人,太子避席而請曰:「燕秦不兩立,願先生留意也。」田光曰:「臣聞騏驥盛壯之時,一日而馳千里;至其衰老,駑馬先之。今太子聞光盛壯之時,不知臣精已消亡矣。雖然,光不敢以圖國事,所善荊卿可使也。」[二]太子曰:「願因先生得結交於荊卿,可乎?」田光曰:「敬諾。」即起,趨出。
태자가 만나 맞이하는데 물러나며 인도하고, 무릎을 꿇고 자리를 털었다. 전광이 자리에 앉으니 좌우에 사람이 없었으며 태자가 자리를 피하며 청하여 말하기를 “연나라와 진나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 유의해 주실 것을 원합니다.”했다. 전광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천리마는 가장 건장하였을 때 하루에 천리를 치달리고, 그 쇠퇴하고 늙음에 이르러서는 둔한 말이 앞섭니다. 지금 태자께서는 제가 매우 건장하였을 때는 들었지만 신의 정기가 이미 사라져 없어진 것을 알지 못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제가 감히 국사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잘 지내는 형경은 사신으로 할 만합니다.” 했다. 태자가 말하기를 “ 때문에 선생께서 형경과 사귐을 맺을 수 있습니까?” 했다. 전광이 말하기를 “삼가 허락합니다.”하고는 곧 일어나 달려 나갔다.
太子送至門,戒曰:「丹所報,先生所言者,國之大事也,願先生勿泄也!」田光俛而笑曰:「諾。」[三]僂行見荊卿,曰:「光與子相善,燕國莫不知。今太子聞光壯盛之時,不知吾形已不逮也,幸而教之曰『燕秦不兩立,願先生留意也』。光竊不自外,言足下於太子也,願足下過太子於宮。」
태자가 환송하러 문에 이르러 경계하여 말하기를 “제가 갚아야 하는 것과 선생이 말한 것은 나라의 큰일입니다. 선생께서는 누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했다. 전광이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말하기를 “예” 하고는 구부리고 가다 형경을 만나 말하기를 “내가 그대와 서로 잘 지내는 것을 연나라에서 알지 못하는 이가 없다. 지금 태자가 제가 장성했을 때를 들었지만 내 형상이 이미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요행히도 하교하기를 ‘연나라와 진나라는 양일할 수 없으니 선생께서 유의해 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제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자에게 그대를 말하였으니 그대가 궁에서 태자를 뵙기를 원합니다.” 했다.
荊軻曰:「謹奉教。」田光曰:「吾聞之,長者為行,不使人疑之。今太子告光曰:『所言者,國之大事也,願先生勿泄』,是太子疑光也。夫為行而使人疑之,非節俠也。」欲自殺以激荊卿,曰:「願足下急過太子,言光已死,明不言也。」因遂自刎而死。
형가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듭니다.” 했다. 전광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장자는 행을 하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게 한다. 합니다. 지금 나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말한 것은 나라의 큰일이어서 선생께서는 누설하지 말기를 원합니다.’하시니 이는 태자가 저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대저 행함에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면 절개 있는 협이 아닙니다.” 하고는 스스로 죽는 것으로써 형경을 격려하고자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급히 태자를 만나서 제가 이미 죽었다 말하고, 말하지 않았음을 밝혀주시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고 죽었다.
[一] 集解徐廣曰:「蔽,一作『撥』,一作『拔』。」 索隱蔽音疋結反。蔽猶拂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蔽’는 한편으로 ‘撥(다스릴 발)’, ‘拔(뺄 발)’로 쓰기도 한다.” 【索隱】 ‘蔽’의 음은 ‘疋’과 ‘結’의 反이다. ‘蔽’는 ‘拂(떨 불)’과 같다.
[二] 正義燕丹子云:「田光答曰:『竊觀太子客無可用者:夏扶血勇之人,怒而面赤;宋意脈勇之人,怒而面青;武陽骨勇之人,怒而面白。光所知荊軻,神勇之人,怒而色不變。』」
[二] 【正義】 연단자가 말하기를 “전광이 답하여 말하기를 ‘태자의 객을 관찰하니 쓸만한 자가 없고, 하부혈용의 사람은 성내면 얼굴이 붉어지고, 송의맥용의 사람은 노하면 얼굴이 파랗게 되고, 무양골용의 사람은 노하면 얼굴이 희게된다. 내가 아는 형가는 신용의 사람으로 노하여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다.
[三] 正義挽音俯。
[三] 【正義】 ‘俛’의 음은 ‘俯(구부릴 부)이다.
荊軻遂見太子,言田光已死,致光之言。太子再拜而跪,膝行流涕,有頃而后言曰:「丹所以誡田先生毋言者,欲以成大事之謀也。今田先生以死明不言,豈丹之心哉!」荊軻坐定,太子避席頓首曰:「田先生不知丹之不肖,使得至前,敢有所道,此天之所以哀燕而不棄其孤也。[一]
형가가 드디어 태자를 뵙고 전광이 이미 죽었다 말하고, 전광의 말을 전하였다. 태자가 두 번 절하고 무릎을 꿇고 무릎으로 가면서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말하기를 “제가 전선생에게 말하지 말라 경계한 까닭은 큰일의 도모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선생이 죽음으로서 말하지 않았음을 밝힌 것이 어찌 저의 마음이리오!” 했다.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가 자리를 피하며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전선생이 나의 현명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앞에 이르게 하여 감히 말할 수 있게 하시니 이는 하늘이 연나라를 불쌍하게 여겨 외롭게 버려두지 않은 것입니다.
今秦有貪利之心,而欲不可足也。非盡天下之地,臣海內之王者,其意不厭。今秦已虜韓王,盡納其地。又舉兵南伐楚,北臨趙;王翦將數十萬之眾距漳、鄴,而李信出太原、雲中。趙不能支秦,必入臣,入臣則禍至燕。燕小弱,數困於兵,今計舉國不足以當秦。諸侯服秦,莫敢合從。丹之私計愚,以為誠得天下之勇士使於秦,闚以重利;[二]秦王貪,[三]其勢必得所願矣。誠得劫秦王,使悉反諸侯侵地,若曹沫之與齊桓公,則大善矣;則不可,因而刺殺之。彼秦大將擅兵於外而內有亂,則君臣相疑,以其閒諸侯得合從,其破秦必矣。此丹之上願,而不知所委命,唯荊卿留意焉。」久之,荊軻曰:「此國之大事也,臣駑下,恐不足任使。」太子前頓首,固請毋讓,然後許諾。於是尊荊卿為上卿,舍上舍。太子日造門下,供太牢具,異物閒進,車騎美女恣荊軻所欲,以順適其意。[四]
지금 진나라는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있으나 바라는 것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천하의 땅을 다 차지하고 해내의 왕들을 신하로 하지 않으면 뜻이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이미 한나라 왕을 포로로 하고, 그 땅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또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초나라를 정벌하고, 북쪽으로는 조나라를 마주하였습니다. 왕전은 수십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장 땅과 업 땅을 막고, 이신은 태원, 운중을 나옵니다. 조나라는 진나라에 버티지 못하고 반드시 들어가 신하노릇 할 것이고, 들어가 신하노릇 하면 곧 재앙이 연나라에 이릅니다. 연나라는 작고 약하여 여러 번 군대에 곤궁하였는데 지금 계책을 세우고 나라를 들어도 진나라를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후들은 진나라에 복종하여 감히 합종하지 못합니다. 나의 사사로운 계책이 어리석지만 진실로 천하의 용사를 얻어 진나라에 사신가게 하여 많은 이익으로서 유인하게 한다면 진나라 왕은 탐욕스러우니 그 형세가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진나라 왕을 겁주어 제후의 빼앗긴 땅을 모두 돌려주기를 마치 조말이 제나라 환공에게 주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곧 크게 좋은 일이 될 수 있고, 할 수 없다면 그를 찔러 죽이는 것입니다. 저 진나라의 대장이 밖에서 군대를 함부로 하고 있는데 안이 어지러우면 곧 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의심하고, 그 틈을 타서 제후들을 합종할 수 있으면 진나라를 깨트리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는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나 목숨을 맡길 이를 알지 못하니 오직 형경만은 이를 유의하십시오. 했다. 오래 후 형가가 말하기를 “이는 나라의 큰일인데 신은 노둔하고 낮아서 사신의 일을 맡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했다. 태자가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굳이 사양하지 말라 청한 후에야 허락하였다. 이에 형경을 높여 상경으로 삼고 좋은 집에 머물게 했다. 태자가 매일 문아래 나아가 태뢰를 갖추어 바치고 기이한 물건을 틈틈이 올리며, 수레와 미녀로 형가가 바라는 바를 마음대로 하게하는 것으로 그 뜻을 따르고 맞게 하였다.
[一] 索隱案:無父稱孤。時燕王尚在,而丹稱孤者,或記者失辭,或諸侯嫡子時亦僭稱孤也。又劉向云「丹,燕王喜之太子」。
[一] 【索隱】 살펴보니 아비가 없는 것을 ‘孤’라 한다. 이 때 연나라 왕이 오ㄹ히려 생존해 있었는데도 단이 ‘孤’라 말한 것은 혹 기록한자가 잘못 말한 것이거나 혹은 제후의 적자 때 또한 ‘孤’를 참칭한 때문일 것이다. 또 유향이 말하기를 “‘丹’은 연왕 희의 태자이다.”
[二] 索隱闚,示也。言以利誘之。
[二] 【索隱】 ‘窺’는 보는 것이니 이익으로써 유인하는 것이다.
[三] 索隱絕句。
[三] 【索隱】 절구이다.
[四] 索隱燕丹子曰「軻與太子遊東宮池,軻拾瓦投,太子捧金丸進之。又共乘千里馬,軻曰『千里馬肝美』,即殺馬進肝。太子與樊將軍置酒於華陽臺,出美人能鼓琴,軻曰『好手也』,斷以玉盤盛之。軻曰『太子遇軻甚厚』」是也。
[四] 【索隱】 연단자가 말하기를 “형가와 태자가 동궁지에서 노는데 형가가 기와를 거두어 던지자 태자가 금환을 받들어 올렸다. 또 함께 천리마를 탔는데 형가가 말하기를 ‘천리마의 간이 맛있다.’하자 곧 말을 잡아 간을 올렸다. 태자와 번 장군이 화양대에 술을 마시는데 미인이 나와 거문고를 잘 연주하였다. 형가가 말하기를 ‘좋은 손이다.’하자 잘라서 옥으로 만든 쟁반에 담았다. 형가가 말하기를 ‘태자께서 형가를 대우하는 것이 매우 후합니다.’”했다. 한 것이 이것이다.
久之,荊軻未有行意。秦將王翦破趙,虜趙王,盡收入其地,進兵北略地至燕南界。太子丹恐懼,乃請荊軻曰:「秦兵旦暮渡易水,則雖欲長侍足下,豈可得哉!」荊軻曰:「微太子言,臣願謁之。今行而毋信,則秦未可親也。夫樊將軍,秦王購之金千斤,邑萬家。誠得樊將軍首與燕督亢之地圖,[一]奉獻秦王,秦王必說見臣,臣乃得有以報。」太子曰:「樊將軍窮困來歸丹,丹不忍以己之私而傷長者之意,願足下更慮之!」
오래 지나도 형가는 행할 뜻이 있지 않았다. 진나라 장군 왕전이 조나라를 깨트리고 조나라 왕을 포로로 잡고 그 땅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북쪽으로 땅을 빼앗아 연나라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태자 단이 두려워하여 이에 형가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진나라 군대가 아침저녁으로(조만간) 역수를 건너니 곧 비록 오래 동안 그대를 모시고자 하나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형가가 말하기를 “태자가 말하지 않아도 신이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지금 가도 믿음이 없으면 곧 진나라와 친할 수 없습니다. 저 번장군은 진나라 왕이 금 천근과 읍 만가에 삽니다.(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진실로 번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독항 땅의 지도를 얻어 진나라 왕에게 받들어 바치면 진나라 왕은 반드시 신을 기쁘게 만날 것이니 신이 곧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다.” 했다. 태자가 말하기를 “번장군은 궁곤으로 나에게 왔는데 내가 차마 나의 사사로움 때문에 장자의 뜻을 해칠 수 없으니 그대는 다시 생각하시기를 원합니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方城縣有督亢亭。」駰案:劉向別錄曰「督亢,膏腴之地」。 索隱地理志廣陽國有薊縣。司馬彪郡國志曰「方城有督亢亭」。正義督亢坡在幽州范陽縣東南十里。今固安縣南有督亢陌,幽州南界。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방성현에 독항전이 있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유향별록』에 “‘督亢’은 비옥한 땅이다.” 했다. 【索隱】 『지리지』에 광양국에 계현이 있다. 사마표의 『군국지』에 “방성에 독항정이 있다.” 했다. 【正義】 독항파는 유쥬 범양현 동남쪽 10리에 있다. 지금 고안현 남쪽에 독항백이 있는데 유주 남쪽 경계이다.
荊軻知太子不忍,乃遂私見樊於期曰:「秦之遇將軍可謂深矣,父母宗族皆為戮沒。今聞購將軍首金千斤,邑萬家,將柰何?」於期仰天太息流涕曰:「於期每念之,常痛於骨髓,顧計不知所出耳!」荊軻曰:「今有一言可以解燕國之患,報將軍之仇者,何如?」於期乃前曰:「為之柰何?」荊軻曰:「願得將軍之首以獻秦王,秦王必喜而見臣,臣左手把其袖,右手揕其匈,[一]然則將軍之仇報而燕見陵之愧除矣。將軍豈有意乎?」樊於期偏袒搤捥[二]而進曰:「此臣之日夜切齒腐心也,[三]乃今得聞教!」遂自剄。太子聞之,馳往,伏屍而哭,極哀。既已不可柰何,乃遂盛樊於期首函封之。
형가가 태자는 차마 하지 못함을 알았다. 이에 마침내 사사로이 번오기를 만나 말하기를 “진나라의 장군을 대우함이 깊다고 말할 만한데 부모 종족은 모두 죽게 되었다. 지금 들으니 장군의 머리에 금 천근, 읍 만가를 걸었다 하는데 장군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니 번오기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번오기가 매번 그것을 생각하니 항상 골수에 사무치니 돌아보아도 계책이 나올 바를 알지 못할 뿐이다!” 했다. 형가가 말하기를 “지금 한 마디 말로 연나라의 근심을 풀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어떠합니까?” 했다. 번오기가 이에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어떻게 합니까?” 했다. 형가가 말하기를 “장군의 머리를 얻어 진나라 왕에게 올리면 진나라 왕이 반드시 기뻐하여 신을 볼 것이니 신이 왼 손으로는 그 소매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그 가슴을 찌르면 곧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는 업신여김을 당하는 부끄러움을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은 어디에 뜻이 있습니까?” 했다. 번오기가 한 쪽 어깨를 드러내고 팔을 잡고 나아가 말하기를 “이는 신이 밤낮으로 이를 끊고, 마음을 썩게 합니다. 이에 지금 가르침을 듣고자 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었다. 태자가 그것을 듣고는 말을 달려가서 시신에 엎드려 곡을 하면서 지극히 슬퍼하였다. 이윽고 어찌할 수 없어 이에 마침내 번오기의 머리를 함에 담아 봉하였다.
[一] 集解徐廣曰:「揕音張鴆切。一作『抗』。」 索隱徐氏音丁鴆反。揕謂以劍刺其胸也。又云一作「抗」。抗音苦浪反,言抗拒也,其義非。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揕’의 음은 ‘張’과 ‘鴆’의 切이다. 한편으로 ‘抗’이라고도 쓴다.” 했다. 【索隱】 서씨는 “음이 ‘丁’과 ‘鴆’의 反이다.” 했다. ‘揕’은 검으로 그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抗’이라고도 쓴다. ‘抗’의 음은 ‘苦’와 ‘浪’의 反인데 항거라 말하나 그 뜻이 아니다.
[二] 集解徐廣曰:「一作『□』。」 索隱搤音烏革反。捥音烏亂反。勇者奮厲,必先以左手扼右捥也。捥,古「腕」字。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한편으로 ‘□’라고도 쓴다.” 했다. 【索隱】 ‘搤’의 음은 ‘烏’와 ‘革’의 反이다. ‘捥’의 음은 ‘烏’와 ‘亂’의 反이다. 용맹한 자가 덜쳐 나설 때는 반드시 먼저 왼손으로 오른 쪽 팔을 누른다. ‘捥’은 옛 ‘腕’자이다.
[三] 索隱切齒,齒相磨切也。爾雅曰:「治骨曰切」。腐音輔,亦爛也。猶今人事不可忍云「腐爛」然,皆奮怒之意也。
[三] 【索隱】 ‘切齒’는 이가 서로 갈려 끊어지는 것이다. 『이아』에 “뼈를 다듬는 것을 ‘切’이라 한다.” 했다. ‘腐’의 음은 ‘輔’이니 또한 ‘爛(문드러질 란)’이다. 지금 사람이 일을 참을 수 없을 때 ‘腐爛’이라 하는데 모두 분노의 뜻이다.
於是太子豫求天下之利匕首,得趙人徐夫人匕首,[一]取之百金,使工以藥焠之,[二]以試人,血濡縷,人無不立死者。[三]乃裝為遣荊卿。燕國有勇士秦舞陽,年十三,殺人,人不敢忤視[四]。乃令秦舞陽為副。荊軻有所待,欲與俱;其人居遠未來,而為治行。頃之,未發,太子遲之,疑其改悔,乃復請曰:「日已盡矣,荊卿豈有意哉?丹請得先遣秦舞陽。」荊軻怒,叱太子曰:「何太子之遣?往而不返者,豎子也!且提一匕首入不測之彊秦,僕所以留者,待吾客與俱。今太子遲之,請辭決矣!」遂發。
이에 태자가 미리 천하의 날카로운 비수를 구하였는데 조나라 사람 서부인의 비수를 얻어 백금을 주고 취하여 장인으로 하여금 약으로 담금질하고 사람에게 시험하니 피가 실오리에 무젖어서 사람이 선 채 죽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행장을 꾸려 형경을 보냈다. 연나라에 용사 진무양이 있었는데 13세에 사람을 죽였고, 사람들이 감히 거역하여 보지 못하였다.(흘겨보지 못하였다.) 이에 진무양을 부장으로 삼았다. 형가는 기다리는 바가 있어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그 사람이 사는 곳이 멀어 아직 오지 않음에도 길 떠날 채비를 하였다. 얼마 후에도 출발하지 않자 태자는 출발이 늦어지는 것이 마음을 바꾸고 뉘우치다고 의심하여 이에 다시 청하여 말하기를 “날이 이미 다하였습니다. 형경은 다는 뜻이 있습니까? 제가 먼저 진무양을 보낼 것을 청합니다.” 했다. 형가가 노하여 태자를 질책하여 말하기를 “태자는 누구를 보내려 하시오?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데 더벅머리 아이인가! 또한 하나의 비수를 가지고 헤아릴 수 없는 강한 진나라에 들어가는데 내가 머물고 있는 까닭은 나의 객을 기다려 함께 가려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자가 늦어진다 하니 하직하고 결단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출발하였다.
[一] 集解徐廣曰:「徐,一作『陳』。」 索隱徐,姓;夫人,名。謂男子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徐’는 한편으로 ‘陳’이라 쓴다.” 했다. 【索隱】 ‘서’는 성이고, ‘부인’은 이름이니 남자를 말한다.
[二] 索隱焠,染也,音□潰反。謂以毒藥染劍鍔也。
[二] 【索隱】 ‘焠’는 물들이는 것이다. 음은 □와 ‘潰’의 反이다. 독약으로 칼날을 물들이는 것이다.
[三] 集解言以匕首試人,人血出,足以沾濡絲縷,便立死也。
[三] 【集解】 비수를 사람에게 시험하여 사람의 피가 나와 실을 무젖게 하기에 충분하면 바로 죽게 됨을 말한 것이다.
[四] 索隱忤者,逆也,五故反。不敢逆視,言人畏之甚也。
[四] 【索隱】 ‘忤’는 거스름인데 ‘五’와 ‘故’의 反이다. 감히 거슬러 보지 못하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두려워함이 심함을 말한 것이다.
太子及賓客知其事者,皆白衣冠以送之。至易水之上,既祖,取道,[一]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為變徵之聲,[二]士皆垂淚涕泣。又前而為歌曰:「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復為羽聲慷慨,士皆瞋目,髮盡上指冠。於是荊軻就車而去,終已不顧。
태자와 빈객 중 그 일을 아는 자가 모두 흰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전송하였다. 역수의 상류에 이르러 제사를 마치고 길을 취하는데 ㅗ점리가 축을 치고, 형가가 화답하여 노래하는데 변치의 성으로 하니 선비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또 앞으로 나와 노래하여 말하기를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가운데 장사는 한번 떠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네!”하고, 다시 우성으로 강개로 변하니 선비들이 모두 눈을 부릅뜨고 머리카락이 치솟아 관을 올렸다. 이에 형가가 수레에 올라 떠나가는데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一] 正義易州在幽州歸義縣界。
[一] 【正義】 역주는 유주 귀의현 경계에 있다.
[二] 正義徵,知雉反。
[二] 【正義】 ‘徵(부를 징)’은 ‘知’와 ‘雉’의 反이다.
遂至秦,持千金之資幣物,厚遺秦王寵臣中庶子蒙嘉。嘉為先言於秦王曰:「燕王誠振怖大王之威,不敢舉兵以逆軍吏,願舉國為內臣,比諸侯之列,給貢職如郡縣,而得奉守先王之宗廟。恐懼不敢自陳,謹斬樊於期之頭,及獻燕督亢之地圖,函封,燕王拜送于庭,使使以聞大王,唯大王命之。」
드디어 진나라에 이르자 천금의 재물과 선물을 가지고 진나라 왕의 총신인 중서자 몽가에게 후하게 주었다. 몽가가 우선 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연나라 왕이 진실로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군대를 들어 군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내신이 되어 제후의 반열에 나란히 하여 공물 바치기를 군현과 같이하고 선왕의 종묘를 받들어 지키기를 원하는데 두려워하여 감히 스스로 진열하지 못하고 삼가 번오기의 머를 베고, 연나라 독항 당의 지도를 바치려 함에 봉하여 연나라 왕이 뜰에서 절하고 보냈으니 사신으로 하여금 대왕께 아뢰게 하니 대왕께서는 명하십시오.” 했다.
秦王聞之,大喜,乃朝服,設九賓[一],見燕使者咸陽宮。[二]荊軻奉樊於期頭函,而秦舞陽奉地圖柙,[三]以次進。至陛,秦舞陽色變振恐,群臣怪之。荊軻顧笑舞陽,前謝曰:「北蕃蠻夷之鄙人,未嘗見天子,故振慴。願大王少假借之,使得畢使於前。」秦王謂軻曰:「取舞陽所持地圖。」軻既取圖奏之,秦王發圖,圖窮而匕首見。因左手把秦王之袖,而右手持匕首揕之, 未至身。秦王驚,自引而起,袖絕。拔劍,劍長,操其室[四]。時惶急,劍堅,故不可立拔。荊軻逐秦王,秦王環柱而走。群臣皆愕,卒起不意,盡失其度。而秦法,群臣侍殿上者不得持尺寸之兵;諸郎中[五]執兵皆陳殿下,非有詔召不得上。方急時,不及召下兵,以故荊軻乃逐秦王。而卒惶急,無以擊軻,而以手共搏之。是時侍醫夏無且[六]以其所奉藥囊提荊軻也。[七]秦王方環柱走,卒惶急,不知所為,左右乃曰:「王負劍!」[八]負劍,遂拔以擊荊軻,斷其左股。荊軻廢,乃引其匕首以擿秦王,[九]不中,中桐柱。[一0]秦王復擊軻,軻被八創。軻自知事不就,倚柱而笑,箕踞以罵曰:「事所以不成者,以欲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一一]。」於是左右既前殺軻,秦王不怡者良久。已而論功,賞群臣及當坐者各有差,而賜夏無且黃金二百溢,曰:「無且愛我,乃以藥囊提荊軻也。」
진나라 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며 조복을 입고, 구빈의 예를 갖추어 연나라 사신을 함양궁에서 보았다. 형가는 번오기의 머리가 든 함을 받들고, 진무양은 지도가 든 궤를 받들고 차례로 나아갔다. 계단에 이르러 진무양의 얼굴색이 변하며 벌벌 떨자 여러 신하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형가가 진무양을 돌아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 사과하며 말하기를 “북쪽 번병 오랑캐의 비루한 사람이라 일찍이 천자를 뵌적이 없기 때문에 벌벌 떠는 것입니다. 대왕께서 조금 용서하시어 앞에서 사신의 일을 마칠 수 있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형가에게 말하기를 “진무양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취하라.” 하니 형가가 지도를 취한 뒤 올리니 진나라 왕이 지도를 펼치는데 지도를 다 펼치니 비수가 드러났다. 왼손으로 진나라 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 손으로 비수를 잡아 찔렀는데 몸이 닿지 않았다. 진나라 왕이 놀라 스스로 당기고 일어나는데 소매가 끊어졌다. 검을 뽑으려는데 검이 길어 그 칼집을 잡았다. 때는 황급하고 검이 꽉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바로 뽑을 수 없었다. 형가가 진나라 왕을 쫓으니 진날 왕이 기둥을 돌며 달아났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갑자기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모두 그 할 바를 몰랐다. 진나라 법에 여러 신하들이 전각 위에 올라 모시는 자들은 한 자 한 치의 병기도 지닐 수 없었고, 여러 낭중들로 병기를 지난 자들은 전각 아래에 벌려 서 있는데 명령으로 부름이 있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었다. 바야흐로 다급한 때여서 아래의 군사를 부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형가가 진나라 왕을 쫓아도 갑작스럽고 황망하여 형가를 칠 것이 없어 맨손으로 쳤다. 이 때 시의 하무저가 받들고 있던 약 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다. 진나라 왕이 막 기둥을 돌며 달아나는데 갑작스럽고 급하여 할 바를 알지 못하자 측근들이 이에 말하기를 “왕께서는 검을 등에 지십시오!” 했다. 검을 등에 지고는 드디어 검을 뽑아 형가를 쳐서 왼쪽 다리를 잘랐다. 형가는 쓰러지자 이에 그 비수를 당겨서 진나라 왕을 쳤으나 맞추지 못하고 오동나무 기둥을 맞추었다. 진나라 왕이 다시 형가를 치자 형가는 8군데 상처를 입혔다. 형가가 스스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는 기둥에 기대어 웃으며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꾸짖어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살려서 겁주어 반드시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하는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했다. 이에 측근들이 앞으로 나와 형가를 죽였는데 진나라 왕은 오래 동안 언짢았다. 이윽고 공을 논하여 여러 신하에게 상을 주고 연좌하기에 마땅한 자들은 각기 차등 있게 하고, 하무저에게는 황금 200일을 내리고 말하기를 “하무저는 나를 사랑하여 이에 약 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다.” 했다.
[一] 正義劉云:「設文物大備,即謂九賓,不得以周禮九賓義為釋。」
[一] 【正義】 유가 말하기를 “문물을 크게 갖추어 벌여놓는 것을 곧 ‘九賓’이라 하는데 『주례』 九賓의 뜻으로 해석할 수 없다.” 했다.
[二] 正義三輔黃圖云:「秦始兼天下,都咸陽,因北陵營宮殿,則紫宮象帝宮,渭水貫都以象天漢,橫橋南度以法牽牛也。」
[二] 【正義】 『삼보황도』에 “진나라가 처음으로 천하를 겸하여 함야에 도읍하고, 북족 언덕에 궁전을 경영하니 곧 ‘자궁’은 ‘제궁’을 상징하고, 위수가 도읍을 관통하는 것으로 ‘천한(은하수)’을 상징하고, 가로지르는 다리와 남도는 견우성을 본받았다.
[三] 索隱戶甲反。柙亦函也。
[三] 【索隱】 ‘戶’와 ‘甲’의 反이다. ‘柙’이 또한 ‘函(함 함)’이다.
[四] 索隱室謂鞘也。正義燕丹子云:「左手揕其胸。秦王曰:『今日之事,從子計耳。乞聽瑟而死。』召姬人鼓琴,琴聲曰『羅縠單衣,可裂而絕;八尺屏風,可超而越;鹿盧之劍,可負而拔』。王於是奮袖超屏風走之。」
[四] 【索隱】 ‘室’은 겁집을 말한다. 【正義】 연단자가 말하기를 “왼손으로 그 가슴을 찌른다.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그대의 계책을 따를 뿐이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죽기를 바란다.’하고는 여인을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였는데 거문고 소리에 말하기를 ‘비단 홑옷 찢어 끊을 수 있고, 여덟 자 병풍을 넘을 수 있다. 녹로의 검은 지고 뽑을 수 있다.” 하였다. 왕이 이에 소매를 털고 병풍을 넘어 바람처럼 달아났다.
[五] 索隱若今宿衛之官。
[五] 【索隱】 지금의 숙위의 관직과 같은 것이다.
[六] 索隱且音即餘反。
[六] 【索隱】 ‘且’의 음은 ‘卽’과 ‘餘’으 反이다.
[七] 正義提,姪帝反。
[七] 【正義】 ‘提’의 음은 ‘姪’과 ‘帝’의 反이다.
[八] 索隱王劭曰:「古者帶劍上長,拔之不出室,欲王推之於背,令前短易拔,故云『王負劍』。」又燕丹子稱琴聲曰「鹿盧之劍,可負而拔」是也。
[八] 【索隱】 왕소가 말하기를 “옛날에 검을 차면 위가 길어서 뽑을 때 칼집에서 뽑히지 않고, 왕에게 등에서 뽑게 하면 앞이 짧아져서 쉽게 뽑힌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검을 등에 메시라.’ 한 것이다.” 했다. 또 연단자가 거문고 소리를 일컬어 말하기를 ‘녹로의 검은 등에 지면 뽑을 수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九] 隱擿與「擲」同,古字耳,音持益反。
[九] 【索隱】 ‘擿’과 ‘擲’은 옛 글자일 뿐이고, 음은 ‘持’와 ‘益’의 反이다.
[一0] 正義燕丹子云:「荊軻拔匕首擲秦王,決耳入銅柱,火出。」
[一0] 【正義】 연단자가 말하기를 “형가가 비수를 뽑아 진나라 왕에게 던졌는데 귀를 뚫고 구리 기둥에 들어가 불이 튀었다.” 했다.
[一一] 集解漢鹽鐵論曰:「荊軻懷數年之謀而事不就者,尺八匕首不足恃也。秦王操於不意,列斷賁、育者,介七尺之利也。」
[一一] 【集解】 한나라 「염철론」에 “형가가 여러 해의 도모함을 품었으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한 자 여덟 치 비수를 충분히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진나라 왕이 뜻하지 않게 잡아서 맹분과 하육을 처형하였던 것은 일곱 자의 날카로움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於是秦王大怒,益發兵詣趙,詔王翦軍以伐燕。十月而拔薊城。燕王喜、太子丹等盡率其精兵東保於遼東。秦將李信追擊燕王急,代王嘉乃遺燕王喜書曰:「秦所以尤追燕急者,以太子丹故也。今王誠殺丹獻之秦王,秦王必解,而社稷幸得血食。」其後李信追丹,丹匿衍水中,[一]燕王乃使使斬太子丹,欲獻之秦。秦復進兵攻之。後五年,秦卒滅燕,虜燕王喜。
이에 진나라 왕이 크게 노하여 더욱 군대를 내고, 왕전의 군대에 명령하여 연나를 쳤다. 10월에 계성을 함락시켰다. 연나라왕 희와 태자 단 등이 그 정예군대를 모두 거느리고 동쪽의 요동에서 지켰다. 진나라 장군 이신이 연나라 왕을 급하게 추격하니 대왕 가가 이에 연나라 왕 희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진나라가 연나라를 더욱 급하게 추격하는 것은 태자 단의 일 때문입니다. 지금 왕게서 단을 죽여 진나라 왕에게 바치면 진나라 왕이 반드시 풀어서 사직이 요행히 제물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그 후 이신이 단을 추격하였는데 단이 연수 안에 숨으니 연나라 왕이 이에 사신을 시켜 태자 단을 죽여 진나라에 가서 바치고자 하였다. 진나라가 다시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공격하였다. 그 5년 후 진나라가 마침내 연나를 없애고 연나라 왕 희를 포로로 잡았다.
[一] 索隱水名,在遼東。
[一] 【索隱】 물 이름이니 요동에 있다.
其明年,秦并天下,立號為皇帝。於是秦逐太子丹、荊軻之客,皆亡。高漸離變名姓為人庸保,[一]匿作於宋子。[二]久之,作苦,聞其家堂上客擊筑,傍偟不能去。每出言曰:「彼有善有不善。」從者[三]以告其主,曰:「彼庸乃知音,竊言是非。」家丈人召使前擊筑,[四]一坐稱善,賜酒。
그 다음 해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고 호를 세워 황제라 하였다. 이에 진나라가 태자 단과 형가의 객을 쫓으니 모두 도망하였다. 고점리가 이름과 성을 바꾸고 다른 사람을 위한 고용인이 되어 송자에게 숨어 일하였다. 오래 되자 일이 괴롭고, 그 집의 마루 위에서 객이 축을 치는 것을 듣고 방황하여 떠날 수 없었다. 매번 말을 하기를 “그는 잘 하는 것도 있고, 잘 못하는 것도 있다.”하니 종자가 그 주인에게 알려 말하기를 “저 고용인이 곧 소리를 알아 몰래 옳고, 그릇됨을 말합니다.” 했다. 집의 어른이 불러 앞에서 축을 치게 하니 한 자리에 앉은 이들이 잘 한다고 칭찬하고 술을 내렸다.
而高漸離念久隱畏約無窮時[五],乃退,出其裝匣中筑與其善衣,更容貌而前。舉坐客皆驚,下與抗禮,以為上客。使擊筑而歌,客無不流涕而去者。宋子傳客之[六],聞於秦始皇。秦始皇召見,人有識者,乃曰:「高漸離也。」秦皇帝惜其善擊筑,重赦之,乃矐其目。[七]使擊筑,未嘗不稱善。稍益近之,高漸離乃以鉛置筑中,[八]復進得近,舉筑朴[九]秦皇帝,不中。於是遂誅高漸離,終身不復近諸侯之人。
고점리가 오래도록 숨어 두려워하고, 위축되어도 다하는 때가 없다 여기고 물러나 그 장식된 갑 안에서 축과 좋은 옷을 내고, 용모를 바꾸어 앞에 나아갔다. 모든 앉아 있던 객들이 모두 놀라 내려와 대등한 예로써 상객을 하였다. 축을 치고 노래하게 하니 객들이 눈물을 흘리고 떠나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송자가 돌려가면서 객으로 하니 진시황에게 알려졌다. 진날 시황제가 불러 보았는데 사람 중에 알아보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고점리이다.” 하였다. 진나라 시황제가 축을 잘 치는 것을 아껴서 거듭 사면하고 그 눈을 멀게 하여 축을 치게 하니 일찍이 잘하는 것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업었다. 접점 더욱 가까이하자 고점리가 이에 납을 축 안에 두고 다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아갈 수 있어 축을 들어 진나라 황제를 쳤으나 적중하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고점리를 죽이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제후의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一] 索隱欒布傳曰「賣庸於齊,為酒家人」,漢書作「酒家保」。案:謂庸作於酒家,言可保信,故云「庸保」。鶡冠子曰「伊尹保酒」。
[一] 【索隱】 「난포전」에 “제나라에서 품을 팔았는데 술 만드는 집의 사람이 되었다.” 했다. 『한서』에 “酒家保” 라 썼다. 살펴보니 술 만드는 집에서 품을 파는 것을 말하는데, 몸을 지킬만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庸保’라 했다. 할관자가 말하기를 “伊尹保酒(이윤이 술을 팔았다.)”라 했다.
[二] 集解徐廣曰:「縣名也,今屬鉅鹿。」 索隱徐注云「縣名,屬鉅鹿」者,據地理志而知也。正義宋子故城在趙州平棘縣北三十里。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현의 이름이다. 지금의 거록에 속한다.” 했다. 【索隱】 서의 주에 “현 이름인데 거록에 속한다.” 한 것은 『지리지』에 근거하여 알 수 있다. 【正義】 송자의 옛 성이 조주 평극현 북쪽 30리에 있다.
[三] 索隱謂主人家之左右也。
[三] 【索隱】 주인집의 측근을 말한다.
[四] 索隱劉氏云:「謂主人翁也。」又韋昭云:「古者名男子為丈夫,尊婦嫗為丈人。故漢書宣元六王傳所云丈人,謂淮陽憲王外王母,即張博母也。故古詩曰『三日斷五疋,丈人故言遲』是也。」
[四] 【索隱】 유시가 말하기를 “주인옹을 말한다.” 했다. 또 위소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남자를 이름하여 장부라 하고, 할머니를 높여서 장인이라 했다. 그러므로 『한서』 「선원육왕전」에 장인아라고 말한 것은 회양헌왕의 외왕모이니 곧 장박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옛 시에 ‘삼일동안 다섯 필을 잘랐는데도 장인은 느리다고 말한다.’ 한 것이 이것이다.
[五] 索隱約謂貧賤儉約。既為庸保,常畏人,故云「畏約」。所以論語云「不可以久處約」。
[五] 【索隱】 ‘約’은 빈천하여 검약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용보가 되어 항상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畏約’이라 하였다. 대문에 『논어』에 말하기를 “오래동안 빈천하고 검약한 곳에 있을 수 없다.” 하였다.
[六] 集解徐廣曰:「互以為客。」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서로 객이라 여겼다.” 했다.
[七] 集解矐音海各反。索隱海各反,一音角。說者云以馬屎燻令失明。
[七] 【集解】 ‘矐’은 음이 ‘海’와 ‘各’의 反이다. 【集解】 ‘海’와 ‘各’의 反이다. 한 음은 ‘角’이다. 해설하는 가마 말하기를 “말똥을 불에 태우는 것으로써 눈을 멀게 한다.” 했다.
[八] 索隱案:劉氏云「鉛為挺著筑中,令重,以擊人」。
[八] 【索隱】 살펴보니 유씨가 말하기를 “납을 축 안에 뽑아 붙여 무겁게 하여 사람을 치는 것이다.” 했다.
[九] 索隱普十反。朴,擊也。
[九] 【索隱】 ‘普’와 ‘十’의 反이다. ‘朴’은 치는 것이다.
魯句踐已聞荊軻之刺秦王,私曰:「嗟乎,惜哉其不講於刺劍之術也![一]甚矣吾不知人也!曩者吾叱之,彼乃以我為非人也!」
노구천이 이미 형가가 진나라 왕을 찔렀다는 것을 듣고 혼자 말하기를 “아! 애석하다. 검으로 찌르는 방법을 논하고 연습하지 못함이여! 심하다 내 다른 사름을 알아보지 못함이여! 예전에 내가 그를 질책하였는데 그가 곧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였을 것이다!” 했다.
[一] 索隱案:不講謂不論習之。
[一] 【索隱】 살펴보니 ‘不講’은 논하여 연습하지 않음이다.
太史公曰:世言荊軻,其稱太子丹之命,「天雨粟,馬生角」也,[一]太過。又言荊軻傷秦王,皆非也。始公孫季功、董生與夏無且游,具知其事,為余道之如是。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然其立意較然,[二]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태사공이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형가를 평하여 그가 태자 단의 목숨을 말하니 ‘하늘에서 곡식 비가 내리고 말에 뿔이 났다.’하는데 너무 지나치다. 또 말하기를 ‘형가가 진나라 왕을 다치게 하였다.’ 하는데 모두 아니다. 처음에 공손계공과 동생이 하무저와 교유하여 그 일을 모두 알아서 나를 위해 이 같이 말했다. 조말로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사람은 이는 그 의가 혹은 이루어지고, 혹은 이루어지 못하였으나 그 뜻을 세우는 것이 명백하고, 그 뜻을 속이지 않아 이름이 후세에 드리워지게 하는 것이 어찌 망녕 되다 하겠는가!
[一] 索隱燕丹子曰:「丹求歸,秦王曰『烏頭白,馬生角,乃許耳』。丹乃仰天歎,烏頭即白,馬亦生角。」風俗通及論衡皆有此說,仍云「廄門木烏生肉足」。
[一] 【索隱】 연단자가 말하기를 “내가 돌아감을 구하자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까마귀 머리가 희게 되고, 말에 뿔이 나면 곧 허락할 것이다.’ 했다. 내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니 까마귀 머리가 휘어지고 말에 또한 뿔이 났다.’” 했다. 『풍속통』과 『논형』에 모두 이 말이 있으니 그대로 “마구간 나무 까마귀에게 살로 된 발이 났다.”
[二] 索隱較,明也。
[二] 【索隱】 ‘較’는 분명함이다.
【索隱述贊】曹沫盟柯,返魯侵地。專諸進炙,定吳篡位。彰弟哭市,報主塗廁。刎頸申冤,操袖行事。暴秦奪魄,懦夫增氣。
【索隱述贊】 조말은 나뭇가지에 맹세하고 노나라의 빼앗긴 땅을 되찾았네. 진저는 생선 구이를 올려 오나라를 안정시키고 왕위를 빼앗았다. 동생을 드러내고 시장에서 곡하고, 주인에게 보답하려 화장실 벽을 칠하였다. 스스로 목을 베어 원한을 펴고 소매를 잡아 일을 행하였다. 사나운 진나라 혼백을 빼앗고 나약한 사내 기운을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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