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八十九
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
張耳者,大梁人也。[一]其少時,及魏公子毋忌為客。張耳嘗亡命[二]游外黃。[三]外黃富人女甚美,嫁庸奴,亡其夫,[四]去抵父客。[五]父客素知張耳,乃謂女曰:「必欲求賢夫,從張耳。」女聽,乃卒為請決,嫁之張耳。[六]張耳是時脫身游,女家厚奉給張耳,張耳以故致千里客。乃宦魏為外黃令。名由此益賢。陳餘者,亦大梁人也,好儒術,數游趙苦陘。[七]富人公乘氏以其女妻之,亦知陳餘非庸人也。餘年少,父事張耳,兩人相與為刎頸交。[八]
장이는 대량 사람이다. 어렸을 때 위나라 공자 무기의 객이 되었다. 장이가 일찍이 이름을 호적에서 없애고 외황에 돌아다녔다. 외황 부자의 달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하찮은 자에게 시집갔다가 그 지아비에게서 도망하여 아버지의 객에게 가서 이르렀다. 아버지의 객이 평소에 장이을 알아 이에 여자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현명한 지아비를 구한다면 장이를 따르라.” 했다. 여자가 받아들이자 이에 마침내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하여 장이에게 시집갔다. 장이가 이때 몸을 빼어 놀고 있었는데 여자의 집에서 장이에게 후하게 받들고 공급하여 주었으므로 장이는 이 때문에 천리의 객을 이르게 할 수 있었다. 이에 위나라에서 벼슬하여 외황의 령이 되었다. 명성이 이로부터 더욱 현명하다 하였다. 진여는 또한 대량사람인데 유술(유학)을 좋아 하고, 여러 번 조나라 고형에서 노닐었다. 부자인 공승씨가 그 딸을 시집보냈는데 도한 진여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진여의 나이다 어려서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겨서 두 사람이 서로 죽음을 함께하는 사귐을 맺었다.
[一] 索隱臣瓚云:「今陳留大梁城是也。」
[一] 【索隱】 신찬이 “지금의 진류 대량성이 이것이다.” 했다.
[二] 索隱晉灼曰:「命者,名也。謂脫名籍而逃。」崔浩曰:「亡,無也。命,名也。逃匿則削除名籍,故以逃為亡命。」
[二] 【索隱】 진작이 말하기를 “‘命’은 이름이다. 호적에서 이름을 빼고 도망하였다.” 했다. 최호가 말하기를 “‘亡’은 없다. 이며 ‘命’은 이름이다. 도망하여 숨으면 곧 이름을 호적에서 없애기 때문에 도망하는 것으로써 이름을 없앤 것이다.” 했다.
[三] 索隱地理志屬陳留。
[三] 【索隱】 『지리지』에 “진류에 속한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一云『其夫亡』也。」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그 지아비가 도망하였다.” 했다.
[五] 集解如淳曰:「父時故賓客。」 索隱如淳曰:「抵,歸也,音丁禮反。」
[五]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아버지 때의 옛 빈객이다.” 했다.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抵’는 돌아감인데 음은 ‘丁’과 ‘禮’의 反이다.
[六] 索隱謂女請父客為決絕其夫,而嫁之張耳。
[六] 【索隱】 여자가 아버지의 빈객에게 그 지아비와 관계를 끊고 장이에게 시집갈 것을 청한 것을 말한다.
[七] 集解張晏曰:「苦陘,漢章帝改曰漢昌。」 索隱地理志屬中山。張晏曰:「章帝醜其名,改曰漢昌。」 正義音邢。邢州唐昌縣。
[七]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고형은 한나라 장제가 한창으로 고쳐 불렀다.” 했다. 【索隱】 『지리지』에 “중산에 속한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장제가 그 이름이 추하다 여겨 고쳐서 한창이라 불렀다.” 했다. 【正義】 음은 ‘邢 ’이니 형주 당창현이다.
[八] 索隱崔浩云:「言要齊生死,斷頸無悔。」
[八] 【索隱】 최호가 말하기를 “생사를 같이할 것을 요구하여 목을 잘라도 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한다.” 했다.
秦之滅大梁也,張耳家外黃。高祖為布衣時,嘗數從張耳游,客數月。秦滅魏數歲,已聞此兩人魏之名士也,購求有得張耳千金,陳餘五百金。張耳、陳餘乃變名姓,俱之陳,為里監門[一]以自食。兩人相對。里吏嘗有過笞陳餘,陳餘欲起,張耳躡之,[二]使受笞。吏去,張耳乃引陳餘之桑下而數之曰 :「始吾與公言何如?今見小辱而欲死一吏乎?」陳餘然之。秦詔書購求兩人,兩人亦反用門者以令里中。[三]
진나라가 대량을 멸망시킬 때 장이의 집이 외항에 있었다. (한나라)고조가 벼슬이 없을 때(베옷을 입고 있을 때) 일찍이 장이를 따라 노닐며 수 개월간 객이 되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여러 해가 지나서 이 두 사람(장이와 진여)이 위나라의 이름 있는 선비라 알려져 장이에게는 1000금, 진여에게는 500금을 얻을 수 있는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장이와 진여가 이에 이름과 성을 바꾸고 같이 진나라에 가 마을의 문지기가 되어 스스로 먹으면서 두 사람이 대하였다. 마을의 관리가 일찍이 허물이 있다 하여 진여를 매질하려하였는데 진여가 일어나려 하니 장이가 밟고는 매질을 받게 하였다. 관리가 가자 장이가 이에 진여를 끌고 뽕나무 아래에 가서 그것을 세며 말하기를 “처음에 공과 내가 무엇을 말하였는가? 지금 작은 욕을 당하고 일개 관리에게 죽으려 하는가?”했다. 진여가 그렇다 여겼다. 진나라가 조서로 두 사람에게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두 사람은 도리어 문지기로서 마을 안에 명령을 내걸고 있었다.
[一] 集解張晏曰:「監門,里正衛也。」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監門’은 마을의 正衛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一作『攝』。」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攝’으로 썼다.” 했다.
[三] 索隱案:門者即餘、耳也。自以其名而號令里中,詐更別求也。
[三] 【索隱】 살펴보니 문지기는 진여와 장이이다. 스스로 그 이름으로 마을 안에서 호령하여 거짓으로 다시 따로 사람을 찾은 것이다.
陳涉起蘄,至入陳,兵數萬。張耳、陳餘上謁陳涉。涉及左右生平數聞張耳、陳餘賢,未嘗見,見即大喜。陳中豪傑父老乃說陳涉曰:「將軍身被堅執銳,率士卒以誅暴秦,復立楚社稷,存亡繼絕,功德宜為王。且夫監臨天下諸將,不為王不可,願將軍立為楚王也。」陳涉問此兩人,兩人對曰:「夫秦為無道,破人國家,滅人社稷,絕人後世,罷百姓之力,盡百姓之財。將軍瞋目張膽,出萬死不顧一生之計,為天下除殘也。今始至陳而王之,示天下私。願將軍毋王,急引兵而西,遣人立六國後,自為樹黨,為秦益敵也。敵多則力分,與眾則兵彊。如此野無交兵,縣無守城,誅暴秦,據咸陽以令諸侯。諸侯亡而得立,以德服之,如此則帝業成矣。今獨王陳,恐天下解也。」[一]陳涉不聽,遂立為王。
진섭이 기 땅에서 일어나 진나라에 들어왔는데 군대가 수만이었다. 장이와 진여가 진섭을 알현하였다. 진섭과 측근들이 평소에 여러 번 장이와 진여의 현명함을 들었으나 일찍이 보지 못하였는데 보게 되자 크게 기뻐하였다. 陳나라 땅 안의 호걸과 원로들이 진섭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몸에 견고한 갑옷을 입고, 잡은 것을 날카롭게 하며, 사졸을 거느리고 사나운 진나라를 죽이고 다시 초나라의 사직을 세워 망한 것을 보존하고, 끊어진 것을 이었으니 공덕이 왕이 되기에 마땅합니다. 또 저 천하의 제후들을 감독하고 마주하니 왕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군께서는 즉위하여 초나라 왕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했다. 진섭이 이 두 사람에게 물으니 두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저 진나라는 무도하여 다른 사람의 국가를 깨트리고 다른 사람의 사직을 없애며, 다른 사람의 후세를 끊었으며, 백성의 힘을 그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다하게 하였습니다. 장군은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어 만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을 일생의 계책을 내어 천하를 위해 잔인함을 없애야 합니다. 지금 처음 진나라에 이르러 왕 노릇한다면 천하에 사사로움을 보이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왕이 되지 말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사람을 보내 6국의 후예를 세워 스스로 당(무리)을 세워 진나라가 적을 더하도록(적이 많아지게 됩니다.) 할 것을 원합니다. 적이 많으면 곧 힘이 나누어지고 무리와 함께하면 군대가 강해집니다. 이 같이하면 군대는 들에서 싸우지 않고, 현에는 성을 지키는 이가 없어 사나운 진나라를 죽이고 함양을 근거하여 제후에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제후는 멸망하였다가 즉위하였으니 덕으로 복종시킵니다. 이 같이 하면 곧 제업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홀로 진나라에서 왕이 되면 천하가 풀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했다. 진섭이 듣지 않고 마침내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一] 正義解,紀賣反。言天下諸侯見陳勝稱王王陳,皆解墮不相從也。
[一] 【正義】 ‘解’는 ‘紀’와 ‘賣’의 反이다. 천하의 제후들이 진승이 왕을 일컬어 진나라에서 왕 노릇하자 모두 늘어져 서로 따르지 않았다.
陳餘乃復說陳王曰:「大王舉梁、楚而西,務在入關,未及收河北也。臣嘗游趙,知其豪桀及地形,願請奇兵北略趙地。」於是陳王以故所善陳人武臣為將軍,邵騷為護軍,以張耳、陳餘為左右校尉,予卒三千人,北略趙地。
진여가 이에 다시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대왕께서 양과 초나라를 일으켜 서쪽으로 가는 것은 힘씀이 관(함곡관)에 들어감에 있는데 아직 하북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긴이 일찍이 조나라에서 노닐어서 그 호걸과 지형을 알고 있으니 원컨대 군대로 기습하여 북쪽으로 조나라 땅을 점령해야 합니다.” 했다. 이에 진나라 왕이 옛 날에 잘 지냈던 진나라 사람 武臣을 장군으로 삼고, 소소를 호군으로 삼고, 장이와 진여를 좌우 교위로 삼아 병사 3000을 주어 북쪽으로 조나라 땅을 점령하게 했다.
武臣等從白馬渡河,[一]至諸縣,說其豪桀曰:[二]「秦為亂政虐刑以殘賊天下,數十年矣。北有長城之役,南有五嶺之戍[三],外內騷動,百姓罷敝,頭會箕斂,[四]以供軍費,財匱力盡,民不聊生。重之以苛法峻刑,使天下父子不相安。陳王奮臂為天下倡始,王楚之地,方二千里,莫不響應,家自為怒,人自為鬥,各報其怨而攻其讎,縣殺其令丞,郡殺其守尉。今已張大楚,王陳,使吳廣、周文將卒百萬西擊秦。於此時而不成封侯之業者,非人豪也。諸君試相與計之!夫天下同心而苦秦久矣。因天下之力而攻無道之君,報父兄之怨而成割地有土之業,此士之一時也。」豪桀皆然其言。乃行收兵,得數萬人,號武臣為武信君。下趙十城,餘皆城守,莫肯下。
무신 등이 백마로부터 하를 건너 여러 현에 이르러 그 호걸들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진나라는 정사를 어지럽히고 형벌을 포학하게 집행하는 것으로써 천하를 해친 것이 수 십년 이었습니다. 북쪽으로는 장성을 쌓는 부역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5령을 지키는 병역이 있었으며 밖과 안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백성들은 그치고 피폐해졌는데 사람의 머리수로 세금을 거두는 것을 키로 쓸어 모으듯이 하여 군대의 비용에 공급하니 재물과 힘을 다하여 백성들이 삶을 의지하지 못합니다. 가혹한 법과 엄격한 형벌을 거듭하여 천하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편안하게 하지 못합니다. 진나라 왕께서 팔을 휘둘러 천하를 위해 시작을 외치시고 초나라 땅에서 왕이 되시면 사방 2천리가 메아리처럼 답하지 않음이 없어 집에서는 스스로 노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싸워 각기 그 원한을 갚고 그 원수를 공격할 것이며, 현에서는 그 령과 승을 죽일 것이며, 군에서는 그 수와 위를 죽일 것입니다. 지금 이미 초나라를 벌려 크게 하고 진나라의 왕이 되어 오광, 주문으로 하여금 군사 100만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게 합니다. 이러한 때에 후를 봉할 업적을 이루지 못한 자는 사람들이 호걸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험 삼아 서로 함께 헤아리시오! 대저 천하가 마음을 같이하여 진나라를 괴롭게 여긴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때문에 천하의 힘이 무도한 임금을 공격하고, 부모와 형제의 원한을 갚고 땅을 갈라 땅을 소유하는 업을 이루는 것은 선비의 한 때입니다,” 했다. 호걸들이 모두 그 말을 그러하다고 여겼다. 이에 가면서 군대를 거두어 수만 명을 얻었으며 무신을 무신군이라 하였다. 조나라의 10개성을 함락하였으나 나머지 모든 성이 지키고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一] 索隱案:酈食其云「白馬之津」,白馬是津渡,其地與黎陽對岸。
[一] 【索隱】 여이기가 말하기를 “백마의 나루이다.” 했고, ‘白馬’는 나루터인데 그 땅이 여양과 언덕을 머주한다.
[二] 集解鄧展曰:「至河北縣說之。」
[二] 【集解】 등전이 말하기를 “하북현에 이르러 설명한 것이다.” 했다.
[三] 集解漢書音義曰:「嶺有五,因以為名,在交阯界中也。」 索隱裴氏廣州記云大庾、始安、臨賀、桂陽、揭陽,斯五嶺。
[三] 【集解】 『한서음의』에 “고개가 다섯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 하였는데 교지의 경계 안에 있다.” 했다. 【索隱】 배씨의 「광주기」에 “‘대유’, ‘치안’, ‘임하’, ‘계양’, ‘게양’이 五嶺이다.” 했다.
[四] 集解漢書音義曰:「家家人頭數出穀,以箕斂之。」
[四] 【集解】 『한서음의』에 “집집마다 사람의 머리수에 따라 곡식을 내는데 키를 가지고 긇어 내는 것이다.” 했다.
乃引兵東北擊范陽。范陽人蒯通說范陽令曰:[一]「竊聞公之將死,故弔。雖然,賀公得通而生。」范陽令曰:「何以弔之?」對曰:「秦法重,足下為范陽令十年矣,殺人之父,孤人之子,斷人之足,黥人之首,不可勝數。然而慈父孝子莫敢倳刃[二]公之腹中者,畏秦法耳。今天下大亂,秦法不施,然則慈父孝子且倳刃公之腹中以成其名,此臣之所以弔公也。今諸侯畔秦矣,武信君兵且至,而君堅守范陽,少年皆爭殺君,下武信君。君急遣臣見武信君,可轉禍為福,在今矣。」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범양을 쳤다. 범양 사람 괴통이 범양의 수령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가만히 공이 장차 죽을 것임을 들었기 때문에 조문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공이 나를 얻어 살아남을 축하합니다.” 하니 범양의 령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조문하는가?” 했다. 대답하기를 “진나라의 법이 무겁고, 그대가 범양의 령이 된 것이 10년인데 다른 사람의 아버지를 죽여 다른 사람의 아들을 외롭게 하였고, 다른 사람의 발을 자르고, 다른 사람의 머리에 먹줄을 넣는 경형을 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하되 자애로운 아버지와 효자인 아들이 감히 칼 날로 공의 배 안을 찌르지 못한 것은 진나라 법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진나라 법이 시행되지 못하니 그러한 즉 자애로운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아들이 또한 칼날로 공의 배 안을 찌르는 것으로 그 이름을 이룰 것이니 이것이 신이 공을 조문하는 까닭입니다. 지금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하고 무신군의 군대가 또한 이르는데 그대가 굳게 범양을 지키려할지라도 소년들은 모두 다투어 그대를 죽여 무신군에게 항복할 것입니다. 그대는 급히 신을 보내 무신군을 만나게 하는 것이 재앙을 돌려 복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에 달려있습니다.” 했다.
[一] 集解漢書曰「范陽令徐公」。
[一] 【集解】 『한서』에 “범양 령 서공”이라 했다.
[二] 集解徐廣曰:「倳音胾。」李奇曰:「東方人以物插地皆為倳。」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倳’의 음은 ‘胾(고깃점 자)’이다.” 했다. 이기가 말하기를 “동방의 사람들은 사물을 땅에 꼿는 것을 모두 ‘倳’라 한다.” 했다.
范陽令乃使蒯通見武信君曰:「足下必將戰勝然後略地,攻得然後下城,臣竊以為過矣。誠聽臣之計,可不攻而降城,不戰而略地,傳檄而千里定,可乎?」武信君曰:「何謂也?」蒯通曰:「今范陽令宜整頓其士卒以守戰者也,怯而畏死,貪而重富貴,故欲先天下降,畏君以為秦所置吏,誅殺如前十城也。然今范陽少年亦方殺其令,自以城距君。君何不齎臣侯印,拜范陽令,范陽令則以城下君,少年亦不敢殺其令。令范陽令乘朱輪華轂,使驅馳燕、趙郊。燕、趙郊見之,皆曰此范陽令,先下者也,即喜矣,燕、趙城可毋戰而降也。此臣之所謂傳檄而千里定者也。」武信君從其計,因使蒯通賜范陽令侯印。趙地聞之,不戰以城下者三十餘城。
범양의 령이 이에 괴통으로 하여금 무신군을 만나게 하고는 말하기를 “그대는 반드시 장차 싸워 이긴 후에 땅을 빼앗고, 공격하여 얻은 후에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신이 가만히 지나치다 여깁니다. 진실로 신의 계책을 들으면 공격하지 않아도 성을 항복시키고, 싸우지 않고도 땅을 빼앗고, 격문을 전하여 천리를 안정시킬 수 있는데 할 수 있습니까?” 했다. 무신군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괴통이 말하기를 “지금 범양의 령이 그 사졸을 정돈하여 지키고 싸우는 것이 마땅함에도 겁을 내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탐욕스러워 부귀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천하에 앞서 항복하고자 해도 그대가 진나라가 임명한 관리라 하여 앞의 10개성과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지금 범양의 소년들이 또한 바야흐로 그 령을 죽이고 스스로 성으로써 그대를 막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신에게 후의 인을 가지고 가게 하여 범양의 령을 제수하지 않습니까? 범양의 령을 임명한다면 성은 그대에게 함락될 것이고, 소년들은 또한 감히 그 령을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범양의 령으로 하여금 바퀴를 붉게 칠하고 바퀴통을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를 타게 하고, 연나라와 조나라의 교외를 몰아 달리게 한다면 연나라와 조나라의 교외에 있던 자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말하기를 ‘이는 범양의 령으로 먼저 항복한 자이다.’ 하면서 기뻐할 것이니 연나라와 조나라의 성은 싸움이 없어도 항복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이른바 격문을 전하여 천리를 안정시킨다는 것입니다.” 했다. 무안군이 그 계책을 따라서 괴통으로 하여금 범양 령의 후인을 내리게 하였다. 조나라 땅이 그것을 듣고 싸우지 않고 항복한 성이 30여개 였다.
至邯鄲,張耳、陳餘聞周章軍入關,至戲卻;[一]又聞諸將為陳王徇地,多以讒毀得罪誅,怨陳王不用其筴不以為將而以為校尉。乃說武臣曰:「陳王起蘄,至陳而王,非必立六國後。將軍今以三千人下趙數十城,獨介居河北,[二]不王無以填之。且陳王聽讒,還報,恐不脫於禍。又不如立其兄弟;不,即立趙後。將軍毋失時,時閒不容息。」[三]武臣乃聽之,遂立為趙王。以陳餘為大將軍,張耳為右丞相,邵騷為左丞相。
드디어 한단에 이르렀는데 장이와 진여가 주장의 군대가 관(함곡관)을 들어왔다가 희 땅에 이르러 물러났다는 것을 들었고, 또한 여러 장군들이 진나라 왕을 위하여 땅을 돌렸으나 많이 참소와 비방을 당하여 죄를 얻어 죽음을 당하고, 진나라 왕이 그 계책을 쓰지 않으며 장군으로 삼지 않고 교위로 삼는다는 것을 원망한다는 것을 들었다. 이에 무신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진나라 왕이 기 땅에서 일어나 진나라에 이르러 왕이 되고도 반드시 6국의 후예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지금 3000명으로써 조나라의 수십 개 성을 함락시키고 홀로 하북에 있으니 왕이 되지 않으면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진나라 왕이 참소를 들으니 돌아가 보고하여도 재앙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또 그 형제를 세우는 것이 낫고 아니면 곧 조나라의 후에를 세워야 합니다. 장군은 때를 잃지 마십시오. 때는 한가롭게 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했다. 무신이 이에 그 말을 받아들여 마침내 세워 조나라 왕을 삼았다. 진여를 대장군으로 삼고, 장이를 우승상으로 삼으며 소소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一] 集解蘇林曰:「戲,地名。卻,兵退也。」 正義戲音羲。出驪山。
[一] 【集解】 소림이 말하기를 “‘戱’는 지명이다. ‘却’은 군대가 물러나는 것이다.” 했다. 【正義】 ‘戱’의 음은 ‘羲’이다. 여산에서 나왔다.
[二] 集解晉灼曰:「介音戛。」瓚曰:「方言云介,特也。」
[二]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介’의 음은 ‘戛(창 알)’이다.” 했다. 찬은 “방언에 ‘介’는 ‘特’이다.
[三] 索隱以言舉事不可失時,時幾之迅速,其閒不容一喘息頃也。
[三] 【索隱】 거사(일을 일으킴)는 때를 잃을 수 없고, 시기의 신속함을 말하여 그 틈이 한 번 숨 쉬는 것도 용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使人報陳王,陳王大怒,欲盡族武臣等家,而發兵擊趙。陳王相國房君諫曰:「秦未亡而誅武臣等家,此又生一秦也。不如因而賀之,使急引兵西擊秦。」陳王然之,從其計,徙繫武臣等家宮中,封張耳子敖為成都君。陳王使使者賀趙,令趣發兵西入關。張耳、陳餘說武臣曰:「王王趙,非楚意,特以計賀王。楚已滅秦,必加兵於趙。願王毋西兵,北徇燕、代,南收河內以自廣。趙南據大河,北有燕、代,楚雖勝秦,必不敢制趙。」趙王以為然,因不西兵,而使韓廣略燕,李良略常山,張黶略上黨。
사람을 시켜 진나라 왕에게 보고하니 진나라 왕이 크게 노하여 무신 등의 집을 모두 없애고 군대를 동원하여 조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진나라 왕의 상국 방군이 간하여 말하기를 “진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았고, 무신 등의 가를 죽인다면 이는 또한 하나의 진나라를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인하여 축하하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의 진나라를 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했다. 진나라 왕이 그러하다고 여기고 그 계책을 따라 무신 등의 가족을 궁중에 옮겨 가두어 두고 장이의 아들 오를 봉하여 성도군이라 했다. 진나라 왕이 사자를 시켜 조나라를 축하하고, 군대 일으키는 것을 재촉하여 서쪽으로 함곡관에 들어가게 하였다. 장이와 진여가 무신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왕을 조나라 왕으로 하는 것은 초나라의 뜻이 아니며 다만 계책으로 왕을 축하한 것입니다. 초나라가 이미 진나라를 멸망시키면 반드시 군대를 조나라에 더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지 마시고 북쪽으로 연나라와 대 땅을 돌고, 남쪽으로 하내를 거두어 스스로를 넓히시기를 원합니다. 조나라의 남쪽은 대하에 의지하였고, 북쪽으로 연나라와 대 땅이 있으니 초나라가 비록 진나라에 이길지라도 반드시 감히 조나라를 제재할 수 없습니다.” 했다. 조나라 왕이 그렇다 여겨 서쪽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고 한광으로 하여금 연나라를 빼앗게 하고, 이량은 상산을 빼앗게 하고, 장염은 상당을 빼앗게 하였다.
韓廣至燕,燕人因立廣為燕王。[一]趙王乃與張耳、陳餘北略地燕界。趙王閒出,為燕軍所得。燕將囚之,欲與分趙地半,乃歸王。使者往,燕輒殺之以求地。張耳、陳餘患之。有廝養卒謝其舍中曰:[二]「吾為公說燕,與趙王載歸。」舍中皆笑曰:「使者往十餘輩,輒死,若何以能得王?」乃走燕壁。燕將見之,問燕將曰:「知臣何欲?」燕將曰:「若欲得趙王耳。」曰:「君知張耳、陳餘何如人也?」燕將曰:「賢人也。」曰:「知其志何欲?」曰:「欲得其王耳。」趙養卒乃笑曰:「君未知此兩人所欲也。夫武臣、張耳、陳餘杖馬箠[三]下趙數十城,此亦各欲南面而王,豈欲為卿相終己邪?夫臣與主豈可同日而道哉,顧其勢初定,未敢參分而王,且以少長先立武臣為王,以持趙心。今趙地已服,此兩人亦欲分趙而王,時未可耳。今君乃囚趙王。此兩人名為求趙王,實欲燕殺之,此兩人分趙自立。夫以一趙尚易燕,況以兩賢王左提右挈,而責殺王之罪,[四]滅燕易矣。」燕將以為然,乃歸趙王,養卒為御而歸。
한광이 연나라에 이르니 연나라 사람들이 한광을 세워 연나라 왕을 삼았다. 조나라 왕이 이에 장이와 진여와 함께 북쪽으로 땅을 침략하기를 연나라 경계로 했다. 조나라 왕이 한가하게 나갔다가 연나라 군대에게 잡혔다. 연나라 장군이 그를 가두고 조나라 땅의 반을 나누어 주면 왕을 돌아가게 하겠다고 했다. 사자가 가면 연나라가 번번이 그들을 죽이고 땅을 요구하였다. 장이와 진여가 그것을 근심하였다. 병졸을 기르는 하인이 있어 그 사중들과 헤어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공을 위하여 연나라를 설득하여 조나라 왕을 받들고 돌아오겠습니다.” 했다. 사중이 모두 웃으며 말하기를 “사자가 간 것이 10여 무리였는데 번번이 죽었는데 네가 어떻게 왕을 데리고 올 수 있는가?” 하였다. 곧 연나라 성벽에 달려갔다. 연나라 장군이 그를 만나자 연나라 장군에게 묻기를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십니까?” 했다. 연나라 장군이 말하기를 “너는 조나라 왕을 얻고자 할 뿐이다.” 하니 “그대는 장이와 진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했다. 연나라 장군이 말하기를 “현명한 사람이다.” 하니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자 생각하는지 아삽니까?” 하니 “그 왕을 얻으려 할 뿐이다.” 했다. 조나라 병졸이 이에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이 두 사람이 바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대저 무신, 장이, 진여는 지팡이를 짚고 말에게 채찍을 휘둘러서 조나라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는 또한 각기 남쪽을 향하여 왕 노릇 하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卿相에서 자기를 마치려 하겠습니까?” 했다. “대저 신하와 임금을 어찌 같은 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형세가 처음 정해진 것을 돌아보면 감히 셋으로 나누어 왕 노릇 할 수 없어서 또한 나이가 조금 많은 무신을 먼저 세워 왕을 삼아 조나라의 마음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의 땅이 이미 복종하였고, 이 두 사람이 또한 조나라를 나누어 왕 노릇하고자 하나 때가 아직 아닐 뿐입니다. 지금 그대는 곧 조나라 왕을 가두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명분상 조나라 왕을 구하고자 하나 실제는 연나라가 그를 죽이면 이 두 사람이 조나라를 나누어 스스로 왕 노릇하고자 합니다. 조나라 하나로 오히려 연나라를 쉽게 여기는데 하물며 두 현명한 왕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서 왕을 죽인 죄를 질책하면 연나라를 멸하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했다. 연나라 장군이 그렇다 여겨서 이에 조나라 왕을 돌아가게 하였는데 하인이 마부가 되어 돌아왔다.
[一] 集解徐廣曰:「九月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구월이다.” 했다.
[二] 集解如淳曰:「冢,賤者也。公羊傳曰『冢役扈養』。」韋昭曰:「析薪為冢,炊烹為養。」晉灼曰:「以辭相告曰謝也。」 索隱謂其同舍中之人也。漢書作「舍人」。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冢’은 천한 자이다.” 했다. 『춘추공양전』에 “‘冢役’은 따라 기르는 것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장작을 쪼개는 일을 ‘冢’이라 하고, 불 때서 삶는 것을 ‘養’이라 한다.” 했다. 진작이 말하기를 “말을 가지고 서로 알리는 것을 ‘謝’라 한다.” 했다. 【索隱】 그 같은 집 안의 사람을 말한다. 『한서』에 “‘사인’이라 썼다.”
[三] 集解張晏曰:「言其不用兵革,驅策而已也。」 索隱杖音丈。箠音之委反。
[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그 군대와 무기를 쓰지 않고 채찍으로 몰 뿐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했다. 【索隱】 ‘杖’은 음이 ‘丈’이다. ‘箠’의 음은 ‘委’와 ‘之’의 반이다.
[四] 集解徐廣曰:「平原君傳曰『事成執右券以責』也,券契義同耳。」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평원군전」에 ‘일이 이루어지면 오른 쪽 문서를 집는 것으로서 꾸짖는다.’” 했는데 ‘券’과 ‘契’는 뜻이 같다.
李良已定常山,還報,趙王復使良略太原。至石邑,[一]秦兵塞井陘,未能前。秦將詐稱二世使人遺李良書,不封,[二]曰:「良嘗事我得顯幸。良誠能反趙為秦,赦良罪,貴良。」良得書,疑不信。乃還之邯鄲,益請兵。未至,道逢趙王姊出飲,從百餘騎。李良望見,以為王,伏謁道旁。王姊醉,不知其將,使騎謝李良。李良素貴,起,慚其從官。從官有一人曰:「天下畔秦,能者先立。且趙王素出將軍下,今女兒乃不為將軍下車,請追殺之。」李良已得秦書,固欲反趙,未決,因此怒,遣人追殺王姊道中,乃遂將其兵襲邯鄲。
이량이 이미 상산을 평정한 후 돌아와 보고하니 조나라 왕이 다시 이량으로 하여금 태원을 침략하게 했다. 석읍에 이르렀는데 진나라 군대가 정형을 막으니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진나라 장군이 거짓으로 2세를 일컬어 사람을 시켜 이량에게 글을 보내면서 밀봉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량은 일찍이 날르 섬겨 총애를 드러내었다. 이량은 진실로 조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를 위할 수 있으면 이량의 죄를 용서하고 이량을 귀하게 할 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량이 글을 받고는 의심하고 믿지 않았다. 이에 돌아가 한단에 가서 군대를 더할 것을 청하려 하였다. (한단에)이르지 않아서 조나라 왕의 누이가 나와 술을 마시는 것을 만났는데 100여기가 뒤따르고 있었다. 이량이 멀리서 보고 왕이라 여겨 길옆에 엎드려 뵈었다. 왕의 누이가 술에 취하여 그가 장군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기병으로 하여금 이량에게 답례하게 하였다. 이량이 평소 귀한 신분으로 일어나 그 따르는 관리에게 부끄러웠다. 따르는 관리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하여 능력 있는 자가 먼저 즉위합니다. 또한 조나라 왕응 평소 장군의 아래에서 나왔는데 지금 여자아이가 곧 장군을 위해 수레에서 내리지 않으니 쫓아가서 죽일 것을 청합니다.” 했다. 이량이 이미 진나라의 글을 얻어서 진실로 조나라를 배반하고자 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다가 이 노여움으로 인하여 사람을 보내 왕의 누이를 길에서 쫓아가 죽이고 마침내 그 군대를 거느리고 한단을 습격하였다.
邯鄲不知,竟殺武臣、邵騷。趙人多為張耳、陳餘耳目者,以故得脫出。收其兵,得數萬人。客有說張耳曰:「兩君羈旅,而欲附趙,難;[三]獨立趙後,[四]扶以義,可就功。」乃求得趙歇,[五]立為趙王,居信都。[六]李良進兵擊陳餘,陳餘敗李良,李良走歸章邯。
한단이 알지 못하여 마침내 무신, 소소를 살해하였다. 조나라 사람들이 많이 장이, 진여를 위해 귀와 눈이 되어 준 자들 때문에 탈출할 수 있었다. 그 군대를 거두어 수 만인을 얻었다. 장이에게 객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객지의 나그네로 조나라에 더하려 해도 어려우며 오직 조나라의 후예를 세워 의로 도와야만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했다. 이에 조헐을 찾아 세워 조나라 왕으로 삼고, 신도에 살았다. 이량이 군대를 나아가게 하여 진여를 쳤는데 진여가 이량을 무너뜨리니 이량이 달아나 장한에게 귀의했다.
[一] 索隱地理志屬常山。
[一] 【索隱】 『지리지』에 “상산에 속한다.” 했다.
[二] 集解張晏曰:「欲其漏泄,君臣相疑。」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누설시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하게 하고자 하였다.” 했다.
[三] 索隱案:羈旅勢弱,難以立功也。
[三] 【索隱】 살펴보니 객지의 나그네는 형세가 약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
[四] 索隱謂獨有立六國趙王之後。
[四] 【索隱】 오직 6국의 조나라 왕의 후예를 세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五] 集解徐廣曰:「正月也。音烏轄反。」駰案:張晏曰「趙之苗裔」。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정월이다. 음은 ‘烏’와 ‘轄’의 反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장안이 말하기를 “조나라의 후예이다.” 했다.
[六] 集解徐廣曰:「後項羽改曰襄國。」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후에 항우가 고쳐서 ‘양국’이라 말했다.”
章邯引兵至邯鄲,皆徙其民河內,夷其城郭。張耳與趙王歇走入鉅鹿城,王離圍之。陳餘北收常山兵,得數萬人,軍鉅鹿北。章邯軍鉅鹿南棘原,築甬道屬河,餉王離。王離兵食多,急攻鉅鹿。鉅鹿城中食盡兵少,張耳數使人召前陳餘,陳餘自度兵少,不敵秦,不敢前。數月,張耳大怒,怨陳餘,使張黶、陳澤[一]往讓陳餘曰:「始吾與公為刎頸交,今王與耳旦暮且死,而公擁兵數萬,不肯相救,安在其相為死!苟必信,胡不赴秦軍俱死?且有十一二相全。」陳餘曰:「吾度前終不能救趙,徒盡亡軍。且餘所以不俱死,欲為趙王、張君報秦。
장한이 군대를 이끌고 한단에 이르러 그 백성을 하내에 모두 옮기고 그 성곽을 무너뜨렸다. 장이와 조나라 왕 헐이 달아나 거록성에 들어가니 왕이 그것을 포위하였다. 진여가 북쪽의 상산 군대를 거두어 수만 명을 얻어 거록 북쪽에 주둔하였다. 장한이 거록 남쪽 극원에 주둔하여 용도를 쌓고 하를 이어 왕리에게 식량을 보냈다. 왕리가 군대와 식량이 많아지자 급히 거록을 공격하였다. 거록성 안에 식량은 다하고 군대는 적어 장이가 여러 번 사람을 시켜 진여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였는데 진여가 스스로 군대가 적어 진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몇 개월이 지나자 장이가 크게 노하여 진여를 원망하여 장염, 진택으로 하여금 가서 진여를 꾸짖어 말하기를 “처음 나와 공이 목을 베는 사귐을 하였는데 지금 왕과 내가 아침저녁으로 또한 죽는데 공이 군대 수만 명을 가지고도 즐겨 서로 구원하려하지 않으니 어찌 서로를 위해 죽는다 하겠는가! 진실로 반드시 신의가 있다면 어찌 달려가 진나라 군대와 함께 죽지 않는가? 또 열에 하나 둘은 서로 온전함이 있을 것이다.” 했다. 진여가 말하기를 “내가 헤아려 보니 앞에 나서도 끝내 조나라를 구원할 수 없고 공연히 군사만 모두 잃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함께 죽으려 하지 않는 것은 조나라 왕과 장이를 위하여 진나라에 보복하고자 합니다.
今必俱死,如以肉委餓虎,何益?」張黶、陳澤曰:「事已急,要以俱死立信,安知後慮!」陳餘曰:「吾死顧以為無益。必如公言。」乃使五千人令張黶、陳澤先嘗秦軍,[三]至皆沒。
지금 반드시 함께 죽는 것은 마치 고기를 배고픈 호랑이에게 맡기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했다. 장염, 진택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하여 함께 죽는 것으로써 믿음을 세우려는 것인데 어찌 뒤의 고려를 알겠는가!” 했다. 진여가 말하기를 “내가 죽고 돌아보는 것이 이익이 없으나 반드시 공의 말과 같이 하겠습니다.” 했다. 이에 군사 5천명을 내어 장염, 진택으로 하여금 먼저 진나라 군대를 시험하게 하였는데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一] 正義音釋。
[一] 【正義】 은은 ‘釋’이다.
[二] 正義十中冀一兩勝秦。
[二] 【正義】 열 가운데 하나, 둘이 진나라에 이김을 바란다.
[三] 索隱崔浩云:「嘗猶試。」
[三] 【索隱】 최호가 말하기를 “‘嘗’은 시험하다.” 이다.
當是時,燕、齊、楚聞趙急,皆來救。張敖亦北收代兵,得萬餘人,來,皆壁餘旁,未敢擊秦。項羽兵數絕章邯甬道,王離軍乏食,項羽悉引兵渡河,遂破章邯。[一]章邯引兵解,諸侯軍乃敢擊圍鉅鹿秦軍,遂虜王離。涉閒自殺。卒存鉅鹿者,楚力也。
이러한 대를 당하여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가 조나라의 급함을 듣고 모두 와서 구원하였다. 장오가 또한 북쪽의 대 당 군대를 거두어 만여 명을 얻어 와서 진여의 곁에서 지켰으나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지는 못하였다. 항우의 군대가 번번이 장한의 용도를 끊자 왕리의 군대가 식량이 궁핍해졌다. 항우가 모든 군대를 이끌고 하를 건너서 마침내 장한을 깨트렸다. 장한이 군대를 이끌고 포위를 푸니 제후의 군대가 이에 진나라 군대에게 포위된 거록을 용감하게 쳐서 마침내 왕리를 포로로 하였다. 섭간은 스스로 죽었다. 끝내 거록이 보존된 것은 초나라의 힘이었다.
[一] 集解徐廣曰:「三年十二月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3년 12월이다.” 했다.
於是趙王歇、張耳乃得出鉅鹿,謝諸侯。張耳與陳餘相見,責讓陳餘以不肯救趙,及問張黶、陳澤所在。陳餘怒曰:「張黶、陳澤以必死責臣,臣使將五千人先嘗秦軍,皆沒不出。」張耳不信,以為殺之,數問陳餘。陳餘怒曰:「不意君之望臣深也![一]豈以臣為重去將哉?」[二]乃脫解印綬,推予張耳。張耳亦愕不受。陳餘起如廁。客有說張耳曰:「臣聞『天與不取,反受其咎』。[三]今陳將軍與君印,君不受,反天不祥。急取之!」張耳乃佩其印,收其麾下。而陳餘還,亦望張耳不讓,[四]遂趨出。張耳遂收其兵。陳餘獨與麾下所善數百人之河上澤中漁獵。由此陳餘、張耳遂有卻。
이에 조나라 왕 헐과 장이가 이에 거록을 나와 제후에게 사례하였다. 장이와 진여가 서로 만났는데 진여가 조나라를 즐겨 구원하지 않은 것을 꾸짖고, 장염과 진택이 있는 곳을 물었다. 진여가 노하여 말하기를 “장염과 진택이 신을 질책하며 반드시 죽자 하여 신이 5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진나라를 시험하였는데 모두 죽어 탈출하지 못하였습니다.” 했다. 장이가 믿지 않고 죽었다 여기고 여러 번 진여에게 물었다. 진여가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신을 원망하는 것이 깊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였구려! 어찌 신으로써 거듭 장군을 제거했다고 여기십니까?” 하고는 이에 인수를 벗어 풀고는 장이에게 밀어 주었다. 장이가 놀라 받지 않았다. 진여가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객으로 장이에게 유세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허물을 준다.’합니다. 지금 진장군이 그대에게 인을 주는데 그대가 받지 않는다면 도리어 하늘이 상서롭지 못할 것입니다. 급히 그것을 취하십시오!(받으십시오!)” 했다. 장이가 이에 그 인을 차고 그를 휘하에 거두었다. 진여가 돌아와 또한 장이가 양보하지 않음을 원망하여 마침내 달려 나갔다. 장이가 드디어 그 군대를 거두었다. 진여가 홀로 휘하의 아끼는 수백인과 함께 하안의 못 가운데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이로부터 진여와 장이는 마침내 사이가 멀어졌다.
[一] 索隱望,怨責也。
[一] 【索隱】 ‘望’은 원망하고 질책하는 것이다.
[二] 索隱案:重訓難也。或云重,惜也。
[二] 【索隱】 살펴보니 ‘重’의 뜻은 어려움이다. 혹은 ‘重’은 애석함이다. 한다.
[三] 索隱此辭出國語。
[三] 【索隱】 이 말은 『국어』에 나온다.
[四] 正義言陳餘如廁還,亦怨望張耳不讓其印。
[四] 【正義】 진여가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서 또한 장이가 그 인을 사양하지 않음에 대해 원망했음을 말한 것이다.
趙王歇復居信都。張耳從項羽諸侯入關。漢元年二月,項羽立諸侯王,張耳雅游,[一]人多為之言,項羽亦素數聞張耳賢,乃分趙立張耳為常山王,治信都。信都更名襄國。
조나라 왕 헐이 다시 신도에 머물렀다. 장이가 항우와 제후를 따라 함곡관을 들어왔다. 漢나라 1년 2월에 항우가 제후 왕을 세웠는데 장이가 평소 사귀었던 사람이 많아 그를 위해 말하였고, 항우가 또한 평소에 여러 번 장이가 현명하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이에 조나라를 나누고 장이를 세워 상산왕이라 하고, 신도에서 다스렸다. 신도이름을 ‘양국’으로 바꾸었다..
[一] 集解韋昭曰:「雅,素也。」 索隱鄭氏云「雅,故也」。韋昭云「雅,素也」。然素亦故也。故游,言慣游從,故多為人所稱譽。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雅’는 ‘素:평소’이다.” 했다. 【索隱】 정씨는 “‘雅’는 옛 날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雅’는 ‘素:평소이다.’” 했다. 그러나 ‘素’가 또한 옛날이다. ‘故遊’는 익숙하게 교유하여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많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다.
陳餘客多說項羽曰:「陳餘、張耳一體有功於趙。」項羽以陳餘不從入關,聞其在南皮,[一]即以南皮旁三縣以封之,而徙趙王歇王代。[二]
진여의 객이 많이 항우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진여와 장이는 한 몸으로 조나라에서 공이 있었습니다.” 했다. 항우는 진여가 함곡관을 따라 들어오지 않았고, 그가 남피에 있다는 것을 들었으므로 곧 남피와 근처의 3개현에 봉하고 조나라 왕 헐을 옮겨 대 땅에서 왕 노릇하게 했다.
[一] 索隱地理志屬勃海。 正義故城在滄州南皮縣北四里也。
[一] 【索隱】 『지리지』에 “발해에 속한다.” 했다. 【正義】 옛 성이 창주 남피현 부쪽 4리에 있다.
[二] 集解徐廣曰:「都代縣。」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대현에 도읍한 것이다.” 했다.
張耳之國,陳餘愈益怒,曰:「張耳與餘功等也,今張耳王,餘獨侯,此項羽不平。」及齊王田榮畔楚,陳餘乃使夏說說[一]田榮曰:「項羽為天下宰不平,盡王諸將善地,徙故王王惡地,今趙王乃居代!願王假臣兵,請以南皮為扞蔽。」田榮欲樹黨於趙以反楚,乃遣兵從陳餘。陳餘因悉三縣兵襲常山王張耳。
장이가 나라에 가니 진여가 더욱 노하여 “장이와 내가 공이 같은데 지금 장이는 왕 노릇하고, 나만 후라 하니 이는 항구가 공평하지 못한 것이다.” 하고는 제나라 왕 전영이 초나라를 배반하자 진여는 곧 하열로 하여금 전영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항우는 천하를 주재하는 것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여러 장군들은 좋은 땅에서 모두 왕 노릇하게 하고, 옛 왕은 옮겨 나쁜 땅에서 왕 노릇하게 합니다. 지금 조나라 왕이 곧 대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원하건대 왕께서 신에게 군대를 빌려주시면 남피 땅을 가지고 울타리가 되기를 청합니다.” 했다. 전영이 조나라에 무리를 심고 초나라를 배반하고자 하여 곧 군대를 보내 진여를 따르게 했다. 진여가 3개현의 군대를 모두 거느리고 상산왕 장이를 습격하였다.
張耳敗走,念諸侯無可歸者,曰:「漢王與我有舊故,[二]而項羽又彊,立我,我欲之楚。」[三]甘公曰:[四]「漢王之入關,五星聚東井。東井者,秦分也。先至必霸。楚雖彊,後必屬漢。」故耳走漢。[五]漢王亦還定三秦,方圍章邯廢丘。張耳謁漢王,漢王厚遇之。
장이가 패하여 달아나면서 제후로 귀의할만한 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한나라 왕은 나와 오랜 연고가 있지만 항우가 또한 강하고 나를 세워 주었으니 나는 초나라로 갈 것이다.” 했다. 감공이 말하기를 “한나라 왕이 함곡관을 들어올 때 다섯별이 동정에 모였는데 동정은 진나라에 해당합니다. 먼저 패업을 이룰 것이 틀림없습니다. 초나라가 비록 강하나 뒤에는 반드시 한나라에 속할 것입니다.” 했다. 그러므로 장이가 한나라로 달아났다. 한나라 왕이 또한 돌아와 三秦을 안정시켰고 막 장함을 폐구에서 포위하였다. 장이가 한나라 왕을 알현하니 한나라 왕이 두터이 대우하였다.
[一] 正義上「說」音悅,下式銳反。
[一] 【正義】 위의 ‘說’은 음이 ‘悅’이고, 아래는 “式‘과 ’銳‘의 反이다.
[二] 集解張晏曰:「漢王為布衣時,嘗從張耳游。」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한나라 왕이 평민이었을(벼슬이 없었을) 때 일찍이 장이를 따라 노닐었다.” 했다.
[三] 集解張晏曰:「羽既彊盛,又為所立,是以狐疑莫知所往也。」
[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항우가 이미 강성하고, 또 나를 세워 준바가 있기 때문에 여우의 의심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했다.
[四] 集解文穎曰:「善說星者甘氏也。」 索隱天官書云齊甘公,藝文志云楚有甘公,齊楚不同。劉歆七略云「字逢,甘德」。志林云「甘公一名德」。
[四]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별을 잘 해설하는 감씨이다.” 했다. 【索隱】 『천관서』에 “제나라 감공”이라 하였고, 「예문지」에는 “초나라에 감공이 있다.” 하니 제나라와 초나라가 같지 않다. 유흠의 「칠략」에 “자는 봉이니 감덕을 말한다.” 했다. 『지림』에 “강공의 다른 이름은 덕이다.” 했다.
[五] 集解徐廣曰:「二年十月也。」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2년 10월이라 했다.
陳餘已敗張耳,皆復收趙地,迎趙王於代,復為趙王。趙王德陳餘,立以為代王。陳餘為趙王弱,國初定,不之國,留傅趙王,而使夏說以相國守代。
진여가 이미 장이를 무너뜨리고 조나라 땅을 모두 다시 거두고, 조나라 왕을 대 당에서 맞아 다시 조나라 왕이 되게 하였다. 조나라 왕이 진여의 덕이라 하여 세워서 대왕이라 했다. 진여가 조나라 왕이 약하고, 나라가 안정되는 초기여서 나라에 가지 못하고 머무르면서 조나라 왕을 도우면서 하열로 하여금 상국으로 삼아 대 땅을 지키게 했다.
漢二年,東擊楚,使使告趙,欲與俱。陳餘曰:「漢殺張耳乃從。」於是漢王求人類張耳者斬之,持其頭遺陳餘。陳餘乃遣兵助漢。漢之敗於彭城西,陳餘亦復覺張耳不死,即背漢。
한나라 2년 동족으로 초나라를 치고, 사자로 하여금 조나라에 함게 할 것을 알리게 하였다. 진여가 말하기를 “한나라가 장이를 죽이면 곧 따르겠다.” 했다. 이에 한나라 왕이 장이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죽이고 그 머리를 가지고 진여에게 보냈다. 진여가 이에 군대를 보내 한나라를 도왔다. 한나라가 팽성 서쪽에서 패하고 진여가 또한 다시 장이가 죽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곧 한나라를 배반하였다.
漢三年,韓信已定魏地,遣張耳與韓信擊破趙井陘,[一]斬陳餘泜水上,[二]追殺趙王歇襄國。漢立張耳為趙王。[三]漢五年,張耳薨,謚為景王。子敖嗣立為趙王。高祖長女魯元公主為趙王敖后。
한나라 3년에 한신이 이미 위나라 땅을 평정하니 장이와 한신을 보내 조나라 정형을 쳐서 깨트리고 진여를 제(지)수 가에서 죽이고, 조나라 왕 헐을 추격하여 양국에서 죽였다. 한나라가 장이를 세워 조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5년 장이가 죽으니 시호를 경왕이라 했다. 아들 오가 이어 즉위하여 조왕이 되었다. 고조의 장녀인 노원공주를 조왕 오의 후로 삼았다.
[一] 集解徐廣曰:「三年十月。」
[一] 【集解】 서광은 “3년 10월”이라 했다.
[二] 集解徐廣曰:「在常山。音遲,一音丁禮反。」 索隱徐廣音遲,蘇林音祇。晉灼音丁禮反,今俗呼此水則然。案:地理志音脂,則蘇音為得。郭景純注山海經云「泜水出常山中丘縣」。正義在趙州贊皇縣界。
[二] 【集解】 서광이 “상산에 있다. 음은 ‘遲’인데 한편 ‘丁’과 ‘禮’의 反이다.” 했다. 【索隱】 서광은 음이 ‘遲’라 했고, 소림은 임이 ‘祗’라 했다. 진작은 음이 ‘丁’과 ‘禮’의 反이라 했다. 지금 세속에서 이 물을 부르는 것 곧 그러하다. 살펴보니 『지리지』에 “음은 ‘脂’”라 했으니 곧 소림의 음이 알맞다. 곽경순이 주석한 『산해경』에 “제(지)수는 상산 중구현에서 나온다.” 했다. 【正義】 조주 찬황현 경계에 있다.
[三] 集解徐廣曰:「四年十一月。」駰案:漢書「四年夏」。
[三] 【集解】 서광이 “4년 11월”이라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한서』에 “4년 여름”이라 했다.
漢七年,高祖從平城過趙,趙王朝夕袒韝蔽,[一]自上食,禮甚卑,有子婿禮。高祖箕踞[二]詈,甚慢易之。趙相貫高、趙午等年六十餘,[三]故張耳客也。生平為氣,乃怒曰:「吾王孱王也!」[四]說王曰:「夫天下豪桀並起,能者先立。今王事高祖甚恭,而高祖無禮,請為王殺之!」
한나라 7년 고조가 평성으로부터 조나라를 지나는데 조나라 왕이 아침저녁으로 윗옷을 벗고 팔찌를 차고 스스로 밥을 올렸는데 예가 매우 낮게 하여 사위의 예를 갖추었다. 고조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거만하게 앉아 말을 함부로 하면서 매우 오만하고 쉽게 하였다. 조나라 재상 관고와 조오 등은 나이가 60여세로 옛날 장이의 객이었다. 평소에 기개가 살아있어 이에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 왕은 약한 왕이구나!”하고 왕에게 유세하여 말하기를 “저 천하의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 능력 있는 자가 먼저 즉위하였다. 지금 고조를 섬기는 것이 매우 공손한데 고조의 예가 없으니 왕을 위하여 글르 죽일 것을 청합니다!” 했다.
張敖齧其指[五]出血,曰:「君何言之誤!且先人亡國,賴高祖得復國,德流子孫,秋豪皆高祖力也。願君無復出口。」貫高、趙午等十餘人皆相謂曰:「乃吾等非也。吾王長者,不倍德。且吾等義不辱,今怨高祖辱我王,故欲殺之,何乃汙王[六]為乎?令事成歸王,事敗獨身坐耳。」
장오가 그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잘못된 말을 하십니까? 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라를 잃고 고조에게 의지하여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 덕이 자손에게 흘러 아주 작은 것도 고조의 힘입니다. 그대는 다시 말을 하지 말라” 했다. 관고와 조오 등 10여인이 모두 서로 말하기를 “곧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우리 왕은 장자이기 때문에 덕을 배반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들은 의리상 욕되게 하지 못하는데 지금 고조가 우리 왕을 욕되게 하는 것을 원망하기 때문에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왕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겠습니까? 일이 이루어지면 왕에게 돌리게 하고, 일이 실패하면 오직 혼자 몸에 연좌될 뿐입니다.” 하였다.
[一] 集解徐廣曰:「韝者,臂捍也。」
[一] 【集解】 서광은 “‘韝’는 팔을 걷어 부치는 것이다.” 했다.
[二] 索隱崔浩云:「屈膝坐,其形如箕。」
[二] 【索隱】 최호가 말하기를 “무릎을 꿇고 않는 그 모양이 키와 같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田叔傳云『趙相趙午等數十人皆怒』,然則或宜言六十餘人。」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전숙전」에 ‘조나라 재상 조오 등 수 십인이 모두 노하였다.’ 하는데 그렇다면 곧 혹 60여명이라고 펴 말한 것일 것이다.” 했다.
[四] 集解孟康曰:「音如『潺湲』之『潺』。冀州人謂懦弱為孱。」韋昭曰:「仁謹貌。」 索隱案:服虔音鉏閑反,弱小貌也。小顏音仕連反。
[四] 【集解】 맹강이 말하기를 “음은 ‘潺湲’의 ‘潺’과 같다. 기주 사람들은 나약한 것을 ‘孱’이라 한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어질고 삼가는 모양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복건’의 음은 ‘鉏(호미 서)’와 ‘閑’의 反인데 약하고 작은 모양이다. ‘小顔’의 음은 ‘仕’와 ‘連’의 反이다.
[五] 索隱案:小顏曰「齧指以表至誠,為其約誓」。
[五] 【索隱】 살펴보니 ‘小顔’은 가리키는 것으로써 지극한 정성을 표시하는 것인데 약속하고 맹서하는 것이다.
[六] 索隱蕭該音一故反。說文云:「汙,穢也。」
[六] 【索隱】 ‘蕭該’의 음은 ‘一’과 ‘故’의 反이다. 『설문』에 “‘汙’는 더러움이다.” 했다.
漢八年,上從東垣還,過趙,貫高等乃壁人柏人,[一]要之置廁。[二]上過欲宿,心動,問曰:「縣名為何?」曰:「柏人。」「柏人者,迫於人也!」不宿而去。
한나라 8년 고조가 동원으로부터 돌아오다 조나라를 지나는데 관고 등이 곧 백인 땅에서 사람을 벽에 숨겨 화장실에 두기를 원하였다. 황제가 지나가다 묵으려는데 심장이 뛰자 묻기를 “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자 “‘백인’이라 합니다.” 했다. “‘柏人’은 사람을 다그치는 것이라!” 하고는 북지 않고 갔다.
[一] 索隱謂於柏人縣館舍壁中著人,欲為變也。正義柏人故城在邢州柏人縣西北十二里,即高祖宿處也。
[一] 【索隱】 백인현 관사 벽 안에 사람을 붙여두고 변란을 일으키고자 했다는 말이다. 【正義】 백인 옛 성은 형주 백인현 서북쪽 12리에 있는데 곧 고조가 묵은 곳이다.
[二] 集解韋昭曰:「為供置也。」 索隱文穎云:「置人廁壁中,以伺高祖也。」張晏云:「鑿壁空之,令人止中也。」今按:云「置廁」者,置人於複壁中,謂之置廁,廁者隱側之處,因以為言也。亦音側。
[二]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모시기 위해 두는 것이다.” 했다. 【索隱】 문영이 말하기를 “사람을 화장실 벽 안에 두어서 고조를 엿 본 것이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벽을 파서 비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안에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했다. 지금 살펴보니 ‘置厠’은 사람을 두 겹의 벽 안에 두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을 ‘치측’이라 하는 것은 화장실은 은밀한 곳이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또 음은 ‘側 ’이다.
漢九年,貫高怨家知其謀,乃上變告之。於是上皆并逮捕趙王、貫高等。十餘人皆爭自剄,貫高獨怒罵曰:「誰令公為之?今王實無謀,而并捕王;公等皆死,誰白王不反者!」乃轞車膠致,[一]與王詣長安。治張敖之罪。上乃詔趙群臣賓客有敢從王皆族。貫高與客孟舒等十餘人,皆自髡鉗,為王家奴,從來。貫高至,對獄,曰:「獨吾屬為之,王實不知。」吏治榜笞數千,刺剟,[二]身無可擊者,終不復言。呂后數言張王以魯元公主故,不宜有此。上怒曰:「使張敖據天下,豈少而女乎!」不聽。
한날 9년 관고에게 원한이 있는 집에서 그 꾀함을 알고는 이에 황제에게 변란을 알려주었다. 이에 황제가 모두 아울러 조나라 왕, 관고 등을 체포하였다. 10여 명 모두가 다투어 스스로 목을 찔렀는데 관고만이 홀로 노하여 욕하며 말하기를 “누가 공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하였는가? 지금 왕은 실로 도모함이 없었는데도 아울러 왕을 잡았고, 공들이 모두 죽으면 누가 왕이 배반하지 않았다고 밝히겠는가!” 했다. 이에 함거에 가두어져 왕과 장안에 나아갔다. 장오의 죄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황제가 조칙으로 곧 조나라 여러 신하와 빈객들로 감히 왕을 따르는 자는 모두 멸족하라 했다. 관고와 객 맹서 등 10여명이 모두 스스로 머리털을 깍고, 형구를 차고 왕의 가노가 되어 따라 왔다. 관고가 이르러 옥리를 마주하고 말하기를 “단지 우리들이 하였을 뿐 왕은 실로 알지 못한다.” 했다. 옥리가 다스리면서 관장과 매질하기를 수천 번 하고, 칼로 찔러서 몸에 칠만 한 곳이 없어도 끝내 다시 말하지 않았다. 여후가 여러 번 “장왕은 노원공주 때문에 마땅히 이런 일이 있지 않을 것이라.” 말하다. 황제가 노하여 “장오로 하여금 천하에 기대게 하였는데 어찌 너의 딸 같은 이가 적겠는가?” 하고는 들어주지 않았다.
廷尉以貫高事辭聞,上曰:「壯士!誰知者,以私問之。」[三]中大夫泄公曰:「臣之邑子,素知之。此固趙國立名義不侵為然諾者也。」上使泄公持節問之箯輿前。[五]仰視曰:「泄公邪?」泄公勞苦如生平驩,與語,問張王果有計謀不。高曰:「人情寧不各愛其父母妻子乎?今吾三族皆以論死,豈以王易吾親哉!顧為王實不反,獨吾等為之。」具道本指所以為者王不知狀。於是泄公入,具以報,上乃赦趙王。
정위가 들은 것을 아뢰자 황제가 말하기를 “장사로다! 누가 아는 자는 사사로이 물으라.” 했다. 중대부 설공이 말하기를 “신의 고향사람이라 평소에 그를 압니다. 이는 진실로 조나라의 이름과 의리를 세우고 서로 그렇다고 하는 자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했다. 황제가 설공으로 하여금 부절을 지니고 가마 앞에서 묻게 하였다. (관고가)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설공인가?” 하였다. 설공이 살면서 평소에 기뻐하던 것처럼 과로움을 위로하고 말을 나누면서 장왕이 과연 계책과 도모함이 있었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관고가 말하기를 “사람의 정으로 각기 그 부모와 처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의 삼족이 모두 죽을 죄로 논의하고 있지만 어찌 왕을 내 부모와 바꾸리오! 돌아보아도 왕은 실로배반하지 않고, 다만 우리들이 그것을 하였을 뿐이오.” 했다. 행위를 한 본래 취지와 왕이 알지 못하였던 정황을 모두 갖추어 말하였다. 이에 설공이 들어가 보고하니 황제가 곧 조왕을 용서하였다.
[一] 正義謂其車上著板,四周如檻形,膠密不得開,送致京師也。
[一] 【正義】 그 수레 위에 판을 붙여서 네 둘레를 우리의 형태로 하여 아교로 밀봉하여 열수 없도록 하여 서울에 보내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二] 集解徐廣曰:「丁劣反。」 索隱徐廣音丁劣反。案:掇亦刺也,漢書作「刺爇」,張晏云「爇,灼也」。說文云「燒也」。應劭云「以鐵刺之」。
[二] 【集解】 서광은 “‘丁’과 ‘劣’의 反이다.” 했다. 【索隱】 서광은 “음은‘ 丁’과 ‘劣’의 反이다.” 했다. 살펴보니 『한서』에는 ‘刺爇’이라 썼다. 장안이 말하기를 “‘爇’은 불사르는 것이다.” 했다. 『설문』에 “燒(불사르다.)이다.”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쇠를 가지고 그것을 찌르는 것이다.” 했다.
[三] 集解瓚曰:「以私情相問。」
[三] 【集解】 해찬이 “사라로운 정으로써 서로 묻는 것이다.” 했다.
[四] 正義泄,姓也。史有泄私。
[四] 【正義】 ‘泄’은 성이다. 역사에 설사가 있다.
[五] 集解徐廣曰:「箯音鞭。」駰案:韋昭曰「輿如今輿床,人輿以行」。索隱服虔云:「音編,編竹木如今峻,可以糞除也。」何休注公羊:「筍音峻。筍者,竹箯,一名編,齊、魯已北名為筍。」郭璞三倉注云:「箯輿,土器。」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箯’의 음은 ‘鞭’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위소가 말하기를 ‘輿’는 지금의 ‘輿床’과 같은데 사람이 가마를 타고 다닌다.”한다. 【索隱】 복건이 말하기를 “음은 ‘編’인데 대나무와 나무를 엮어서 만드는데 지금의 ‘峻’과 같고, 똥을 없앨 수 있다.” 했다. 하휴가 주석한 『춘추공양전』에 “‘筍’의 음은 ‘峻’이다. ‘筍’은 대나무 가마인데 다른 이름으로 ‘編’이라 하는데 제나라와 노나라 이북에서는 이름을 ‘筍’이라 한다.” 했다. 곽박이 『삼창』을 주석하면서 말하기를 “‘箯輿’는 흙 그릇이다.” 했다.
上賢貫高為人能立然諾,使泄公具告之,曰:「張王已出。」因赦貫高。貫高喜曰:「吾王審出乎?」泄公曰:「然。」泄公曰:「上多足下,故赦足下。」貫高曰:「所以不死一身無餘者,白張王不反也。今王已出,吾責已塞,死不恨矣。且人臣有篡殺之名,何面目復事上哉!縱上不殺我,我不愧於心乎?」乃仰絕肮,遂死。[一]當此之時,名聞天下。
황제가 관고의 사람됨이 어질고 서로 그렇다고 허락하는 것을 세울 수 있다 하여 설공으로 하여금 갖추어 아뢰게 하고는 “장왕을 이미 내보내라.”하고 관고를 용서하였다. 관고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왕이 풀려 나왔는가?” 하니 설공이 “그러하다.” 했다. 설공이 말하기를 “그대를 많이 높였기 때문에 그댈르 용서한 것이오.” 했다. 관고가 말하기를 “한 몸이 죽지 않고 남음이 없는 까닭은 장왕이 배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려 했기 때문이다. 지금 왕이 이미 나왔으니 나의 책임을 이미 다한 것이오. 죽어도 한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신하로 찬탈하고 죽였다는 이름이 있었는데 무슨 얼굴로 다시 임금을 섬기겠는가! 임금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곧 쳐다보고 목구멍을 잘라 마침내 죽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름이 천하에 들려졌다.
[一] 集解韋昭曰:「肮,咽也。」 索隱蘇林云:「肮,頸大脈也,俗所謂胡脈,下郎反。」蕭該或音下浪反。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肮’은 목구멍이다.”했다. 【索隱】 소림이 말하기를 “‘貥’은 목의 큰 맥이다. 세속의 이른바 ‘호맥’인데 ‘下’와 ‘郞’의 反이다. 했다. ‘蕭該’는 혹 음이 ‘下’와 ‘浪’의 反이다.” 했다.
張敖已出,以尚魯元公主故,封為宣平侯。[一]於是上賢張王諸客,以鉗奴從張王入關,無不為諸侯相、郡守者。及孝惠、高后、文帝、孝景時,張王客子孫皆得為二千石。
장오가 나온 뒤 노원공주를 받든 일로(노원공주에게 장가 든 일로) 봉하여 선평후라 하였다. 이에 황제가 장왕의 여러 빈객이 어질고, 겸노로 장왕을 따라 관에 들어왔다 하여 제후의 재상과 군수가 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효혜, 고후, 문제, 효경에 이르러 장왕의 빈객의 자손들이 모두 2천석의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
[一] 索隱韋昭曰:「尚,奉也。不敢言取。」崔浩云:「奉事公主。」小顏云:「尚,配也。易曰『得尚于中行』,王弼亦以尚為配。恐非其義也。
[一]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尙’은 받듦이다. 감히 취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했다. 최호가 말하기를 “공주를 받들고 섬기는 것이다.” 했다. 소안이 말하기를 “‘尙’은 짝이다.” 했다. 『역경』에 ‘가운데로 가서 짝을 얻는다.’하니 왕필이 또한 ‘尙’을 짝이라 하였다. 그 뜻이 잘못된 것일까 두렵다.
張敖,高后六年薨。[一]子偃為魯元王。以母呂后女故,呂后封為魯元王。[二]元王弱,兄弟少,乃封張敖他姬子二人:壽為樂昌侯,[三]侈為信都侯。高后崩,諸呂無道,大臣誅之,而廢魯元王及樂昌侯、信諸侯。孝文帝即位,復封故魯元王偃為南宮侯,續張氏。[四]
장오는 고후 6년에 죽었다. 아들 언이 노원왕이 되었다. 어머니가 여후의 딸이기 때문에 여후가 봉하여 노원왕이라 했다. 원래 왕은 약하고 형제가 적어서 장오의 다른 여자의 아들 두 명을 봉하여 수는 낙창후를 삼고, 치는 신도후를 삼았다. 고후가 죽고 여러 여씨들이 무도하자 대신들이 죽이고 노원왕과 낙창후, 신도후를 없앴다. 효문제가 즉위하여 다시 옛 노원왕 언을 봉하여 남궁후로 삼아 장씨를 잇게 하였다.
[一] 集解關中記曰:「張敖冢在安陵東。」 正義魯元公主墓在咸陽縣西北二十五里,次東有張敖冢,與公主同域。又張耳墓在咸陽縣東三十三里。
[一] 【集解】 『관중기』에 “장오의 무덤이 안릉 동족에 있다.” 했다. 【正義】 노원공주의 묘는 함양현 서북쪽 25리에 있고, 다음 동쪽에 장오의 무덤이 있는데 공주와 묘역을 같이 한다. 또 장이의 묘는 함양현 동쪽 33리에 있다.
[二] 索隱案:謂偃以其母號而封也。
[二] 【索隱】 살펴보니 언이 그 어미의 호로써 봉해진 것을 말한다.
[三] 集解徐廣曰:「漢紀張酺傳曰張敖之子壽封樂昌侯,食細陽之池陽鄉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기」 장포전에 ‘장오의 아들 수는 낙창후에 봉해졌는데 세양의 지양향을 식읍으로 받았다.” 했다.
[四] 集解張敖謚武侯。張偃之孫有罪絕。信都侯名侈,樂昌侯名壽。
[四] 【集解】 장오의 시호는 무후이다. 장언의 손은 죄를 지어 끊어졌다. 신도후의 이름은 치이고, 낙창후의 이름은 수이다.
太史公曰:張耳、陳餘,世傳所稱賢者;其賓客廝役,莫非天下俊桀,所居國無不取卿相者。然張耳、陳餘始居約時,[一]相然信以死,豈顧問哉。[二]及據國爭權,卒相滅亡,何鄉者相慕用之誠,後相倍之戾也!豈非以勢利交哉?[三]名譽雖高,賓客雖盛,所由殆與大伯、延陵季子異矣。
태사공이 말하기를 “장이, 진여는 세상에 전해지는 어진 자들인데 그 빈객과 하인 중에 천하의 준걸이 아닌 자가 없고, 사는 나라에서 경상을 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가 처음 어려웠을 때는 서로 죽음으로써 신뢰하였으니 어찌 돌아보고 물었겠는가? 나라에 의지하고 권력을 다툼에 이르러 마침내 서로 멸망하였으니 전에 서로 사모하던 정성이 후에 서로 배반하는 어그러짐이 되었는가! 어찌 권세와 이익으로 사귀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명성이 비록 높고, 빈객이 성대하나 말미암는 바가 자못 태백, 연릉계자와는 다를 것이다.”
[一] 集解漢書音義曰:「在貧賤時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가난하고 천하였을 때 있었다.” 했다.
[二] 索隱按:葛洪要用字苑云「然猶爾也」。謂相和同諾者何也。謂然諾相信,雖死不顧也。
[二] 【索隱】 살펴보니 갈홍의 「요용자원」에 “‘然’은 ‘爾’와 같다.” 했다. 서로 화합하고 같이 허락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네가 수락하여 서로 믿어서 비록 죽어도 돌아보지 않음을 말한다.
[三] 索隱有本作「私利交」,漢書作「勢利」,故廉頗傳云「天下以市道交,君有勢則從君,無勢則去,此固其理」是也。
[三] 【索隱】 ‘私利交(사사로운 이익으로 사귐)’이라 쓴 본도 있고, 『한서』에는 “勢利(권세와 이익)”이라 썼다. 그러므로 「염파전」에 “천하가 시장의 도리로 사귀니 그대는 권세가 있으면 곧 임금을 따르고, 권세가 없으면 곧 떠나니 이것이 진실로 그 이치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 했다.
【索隱述贊】張耳、陳餘,天下豪俊。忘年羈旅,刎頸相信。耳圍鉅鹿,餘兵不進。張既望深,陳乃去印。勢利傾奪,隙末成釁。
【索隱述贊】 장이와 진여는 천하의 빼어난 호걸이다. 나이를 잊고 객지를 떠돌아도 죽음을 함께하는 믿음을 가졌다. 장이는 거록을 포위하고 진여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장이의 원망이 이미 깊은데 진여는 관을 버렸다. 권세와 이익을 다투어 빼앗아도 틈이 아직 흠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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