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九十一
黥布列傳第三十一
黥布者,六人也,[一]姓英氏。[二]秦時為布衣。少年,有客相之曰:「當刑而王。」及壯,坐法黥。布欣然笑曰;「人相我當刑而王,幾是乎?」[三]人有聞者,共俳笑之。[四]布已論輸麗山,[五]麗山之徒數十萬人,布皆與其徒長豪桀交通,迺率其曹偶,[六]亡之江中為群盜。
경포는 六 땅 사람으로 성은 영씨이다. 진나라 때는 베옷을 입었다.(벼슬이 없이 지냈다.) 어린 나이 때 어떤 객이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형벌에 마땅하나 왕 노릇할 것이다.” 했다. 장년에 이르러 법에 연좌되어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받았다. 경포가 기쁘게 웃으며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나의 상을 보고 형벌에 해당하나 왕 노릇할 것이다 하더니 이것이 가까워졌는가?” 했다. 사람들 중에 들은 자들이 광대를 함께하는 것처럼 웃었다. 경포는 형벌을 받은 후 여산에 보내졌고, 여산에는 무리가 수십만 명이었는데 경포가 모두 그 무리의 우두머리인 호걸들과 사귀고 통하였으며, 그 무리를 거느리고 강 안으로 도망하여 무리지어 도둑이 되었다.
[一] 索隱地理志廬江有六縣。蘇林曰:「今為六安也。」
[一] 【索隱】 『지리지』에 “여강은 육현에 있다.” 했다. 소림이 말하기를 “지금의 육안현이라 한다.” 했다.
[二] 索隱按:布本姓英。英,國名也,咎繇之後。布以少時有人相云「當刑而王」,故漢雜事云「布改姓黥,以厭當之」也。 正義故六城在壽州安豐縣西南百三十三里。按:黥布封淮南王,都六,即此城。又春秋傳六與蓼,咎繇之後,或封於英、六,蓋英後改為蓼也。
[二] 【索隱】 살펴보니 경포의 본래 성은 영씨이다. ‘영’은 나라이름으로 ‘구요’의 후예이다. 경포가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이 관상을 보고 ‘형벌을 당하나 왕 노릇할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한잡사』에 “경포가 성을 고쳐 ‘黥’이라 하고, 형벌을 당하는 것을 싫어해서 이다.” 했다. 【正義】 옛 ‘육성’은 수주 안풍현 서남쪽 130리에 있다. 살펴보니 경포는 회남왕에 봉해지자 육 땅에 도읍하니 곧 이 성이다. 또 『춘추전』에 ‘六’과 ‘蓼’는 구요의 후예이다. 혹은 ‘英’과 ‘六’에 봉해지니 대게 ‘英’은 후에 고쳐서 ‘蓼’라 한 것이다.
[三] 集解徐廣曰:「幾,一作『豈』。」駰謂幾,近也。 索隱裴駰曰「臣瓚音機。幾,近也」。楚漢春秋作「豈是乎」,故徐廣云一作「豈」。劉氏作「祈」,祈者語辭也,亦通。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幾’는 한편으로 ‘豈’라 쓰기도 한다.” 했다. 배인은 “‘幾’는 가까운 것이다.” 했다. 『초한춘추』에는 “豈是乎”라 썼다. 그러므로 서광이 “한편으로 ‘豈’라 쓰기도 한다.” 한 것이다. 유씨는 “‘祈’라 쓰는데 ‘祈’는 어사이다.” 했는데 또한 통한다.
[四] 索隱謂眾共以俳優輩笑之。
[四] 【索隱】 무리들이 함께 광대로 여겨 웃은 것이다.
[五] 正義言布論決受黥竟,麗山作陵也。時會稽郡輸身徒。
[五] 【正義】 경포가 죄를 논하여 결정되어 경형을 받아 마치자 여산에 가 릉을 만든 것이다. 이때 회계군에서 일꾼을 보낸 것이다.
[六] 索隱曹,輩也。偶,類也。謂徒輩之類。
[六] 【索隱】 ‘曹’는 무리이다. ‘偶’는 같은 무리이니 도배의 류를 말한다.
陳勝之起也,布迺見番君,與其眾叛秦,聚兵數千人。番君以其女妻之。章邯之滅陳勝,破呂臣軍,布乃引兵北擊秦左右校,破之清波,引兵而東。聞項梁定江東會稽,[一]涉江而西。陳嬰以項氏世為楚將,迺以兵屬項梁,渡淮南,英布、蒲將軍亦以兵屬項梁。
진승이 봉기하자 경포가 이에 번군 오예를 만나 그 무리와 함께 진나라를 배반하고, 군대 수천 명을 모았다. 번군이 그 딸을 시집보냈다. 장한이 진승을 없애고 여신의 군을 깨트리자 경포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나라 좌우 교위를 쳐서 청파에서 그들을 깨트린 후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항량이 강동 회계를 평정하였다는 것을 듣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간다는 것을 들었다. 진영은 항씨가 대대로 초나라 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이에 군대로써 항양에게 속하여 회수 남쪽을 건넜는데 영포(경포)와 포장군이 또한 군대로서 항량에게 속하였다.
[一] 正義時會稽郡所理在吳闔閭城中。
[一] 【正義】 이 때 회계군을 다스리는 곳은 오나라 합려의 성안에 있다.
項梁涉淮而西,擊景駒、秦嘉等,布常冠軍。項梁至薛,[一]聞陳王定死,迺立楚懷王。項梁號為武信君,英布為當陽君。[二]項梁敗死定陶,懷王徙都彭城,諸將英布亦皆保聚彭城。當是時,秦急圍趙,趙數使人請救。懷王使宋義為上將,范曾為末將,項籍為次將,英在、蒲將軍皆為將軍,悉屬宋義,北救趙。及項籍殺宋義於河上,懷王因立籍為上將軍,諸將皆屬項籍。項籍使布先渡河擊秦,布數有利,籍迺悉引兵涉河從之,遂破秦軍,降章邯等。楚兵常勝,功冠諸侯。諸侯兵皆以服屬楚者,以布數以少敗眾也。
항량이 회수를 건너 서쪽으로 가면서 경구, 진가 등을 쳤는데 경포가 항상 군대의 앞에 섰다. 항량이 설 땅에 이르러 진왕 정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이에 초 회왕을 세웠다. 항량의 호를 무신군, 경포를 당양군이라 했다. 항양이 정도에서 패하여 죽자 회왕이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니 여러 장군들과 영포가 또한 모두 팽성을 지키러 모였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나라가 급히 조를 포위하자 조가 여러 번 사람을 시켜 구원을 청하였다. 회왕이 송의로 하여금 상장으로 삼고, 범증을 말장으로 삼고, 항적을 차장으로 삼고, 영재, 포장군을 장군으로 삼아 모두 송의에게 속하게 하여 북으로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항적이 하상에서 송의를 죽이자 회왕이 항적을 세워 상장군으로 삼고, 여러 장군들을 모두 항적에게 속하게 했다. 항적이 경포로 하여금 먼저 하를 건너 진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경포가 여러 번 이로움이 있자 항적이 이에 모든 군대를 이끌고 하를 건너 따라서 마침내 진나라 군대를 깨트리니 장한 등이 항복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항상 이겼는데 공이 제후들 중에서 으뜸이었다. 제후의 군대가 모두 초나라에 복종하고 속한 것은 여러 번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一] 正義薛古城在徐州滕縣界也。
[一] 【正義】 ‘薛’의 옛 성은 서주 등현 경계에 있다.
[二] 正義南郡當陽縣也。
[二] 【正義】 남군 당양현이다.
項籍之引兵西至新安,[一]又使布等夜擊阬章邯秦卒二十餘萬人。至關,不得入,又使布等先從閒道[二]破關下軍,遂得入,至咸陽。布常為軍鋒。[三]項王封諸將,立布為九江王,都六。
항적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신안에 이르고, 또 경포 등으로 하여금 밤에 장한의 진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쳐서 구덩이에 묻어 죽이게 하였다. 함곡관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자 또 경포 등으로 하여금 먼저 사이 길을 따라 함곡관 아래의 군대를 깨트리고 마침내 (함곡관에)들어가 함양에 이르렀다. 경포는 항상 군대의 선봉이 되었다. 항왕이 여러 장군을 봉하였는데 경포를 세워 구강왕이라 하고 육 땅에 도음하였다.
[一] 正義新安故城在河南府澠池縣東二十二里。
[一] 【正義】 신안 옛성은 하남부 민지현 동쪽 22리에 있다.
[二] 索隱鄒氏云「閒猶閑也,謂私也」。今以閒音紀莧反。閒道即他道,猶若反閒之義。
[二] 【索隱】 추씨가 말하기를 “‘閒’은 ‘閑’과 같은데 사사로움을 말한다.” 했다. 지금 ‘閒’의 음을 ‘紀’와 ‘莧’의 反이다. ‘閒道’는 곧 다른 길이니 ‘反閒’의 뜻과 같다.
[三] 索隱案:漢書作「楚軍前簿」,簿者鹵簿。
[三]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楚軍前簿(초나라 군대 앞의 의장을 갖춘 행렬) ” 라고 썼는데 ‘簿’는 ‘鹵簿’이다.
漢元年四月,諸侯皆罷戲下,各就國。項氏立懷王為義帝,徙都長沙,迺陰令九江王布等行擊之。其八月,布使將擊義帝,追殺之郴縣。[一]
한 원년 4월 제후가 모두 대장 깃발 아래 있는 것을 그만두고 각기 나라로 돌아갔다. 항씨가 회왕을 세워 의제라 하고 도읍을 장사로 옮기고, 이에 몰래 구강왕 경포 등으로 하여금 가서 치게 했다. 8월에 경포가 장군을 시켜 의제를 치게 하니 쫓아 침현에 가서 죽였다.
[一] 正義郴,丑林反。今郴州有義帝冢及祠。
[一] 【正義】 ‘郴’은 ‘丑’과 ‘林’의 反이다. 지금의 침주에 의제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漢二年,齊王田榮畔楚,項王往擊齊,徵兵九江,九江王布稱病不往,遣將將數千人行。漢之敗楚彭城,布又稱病不佐楚。項王由此怨布,數使使者誚讓[一]召布,布愈恐,不敢往。項王方北憂齊、趙,西患漢,所與者獨九江王,又多布材,欲親用之,以故未擊。
한 2년 제왕 전영이 초나라를 배반하므로 항왕이 가서 제를 치고, 구강에서 군대를 징발하였는데 구강왕 경포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장군으로 하여금 수천인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한이 초나라 팽성을 무너뜨리는데 경포가 또한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항왕이 이 때문에 경포를 원망하여 여러 번 사자를 시켜 경포를 꾸짖고 부르니 경포가 더욱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다. 항왕이 북쪽으로 제와 조를 우려하고, 서쪽으로 한을 근심하였는데 함께하는 자로는 오직 구강왕 뿐이고, 또 경포가 재주가 많아 가까이하여 등용하였기 때문에 치지 못하였다.
[一] 集解漢書音義曰:「誚,責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誚(꾸짖을 초)’는 질책함이다.”
漢三年,漢王擊楚,大戰彭城,不利,出梁地,至虞,[一]謂左右曰:[二]「如彼等者,無足與計天下事。」謁者隨何進曰:「不審陛下所謂。」漢王曰:「孰能為我使淮南,令之發兵倍楚,留項王於齊數月,我之取天下可以百全。」隨何曰:「臣請使之。」迺與二十人俱,使淮南。至,因太宰主之,[三]三日不得見。隨何因說太宰曰:「王之不見何,必以楚為彊,以漢為弱,此臣之所以為使。使何得見,言之而是邪,是大王所欲聞也;言之而非邪,使何等二十人伏斧質淮南市,以明王倍漢而與楚也。」太宰迺言之王,王見之。隨何曰:「漢王使臣敬進書大王御者,竊怪大王與楚何親也。」淮南王曰:「寡人北鄉而臣事之。」隨何曰:「大王與項王俱列為諸侯,北鄉而臣事之,必以楚為彊,可以託國也。項王伐齊,身負板築[四],以為士卒先,大王宜悉淮南之眾,身自將之,為楚軍前鋒,今迺發四千人以助楚。夫北面而臣事人者,固若是乎?夫漢王戰於彭城,項王未出齊也,大王宜騷[五]淮南之兵渡淮,日夜會戰彭城下,大王撫萬人之眾,無一人渡淮者,垂拱而觀其孰勝。夫託國於人者,固若是乎?大王提空名以鄉楚,而欲厚自託,臣竊為大王不取也。然而大王不背楚者,以漢為弱也。夫楚兵雖彊,天下負之以不義之名[六],以其背盟約而殺義帝也。然而楚王恃戰勝自彊,漢王收諸侯,還守成皋、滎陽,下蜀、漢之粟,深溝壁壘,分卒守徼乘塞,[七]楚人還兵,閒以梁地,深入敵國八九百里,[八]欲戰則不得,攻城則力不能,老弱轉糧千里之外;楚兵至滎陽、成皋,漢堅守而不動,進則不得攻,退則不得解。故曰楚兵不足恃也。[九]使楚勝漢,則諸侯自危懼而相救。夫楚之彊,適足以致天下之兵耳。故楚不如漢,其勢易見也。今大王不與萬全之漢而自託於危亡之楚,臣竊為大王惑之。臣非以淮南之兵足以亡楚也。夫大王發兵而倍楚,項王必留;留數月,漢之取天下可以萬全。臣請與大王提劍而歸漢,漢王必裂地而封大王,又況淮南,淮南必大王有也。故漢王敬使使臣進愚計,願大王之留意也。」淮南王曰:「請奉命。」陰許畔楚與漢,未敢泄也。
한 3년 한왕이 초나라를 쳐서 팽성에서 크게 싸우는데 이롭지 못하자 양 땅을 나와 우 땅에 이르러 측근에게 말하기를 “너희 같은 자는 함께 천하의 일을 헤아리기에 충분하지 않다.” 했다. 알자 수하가 나아가 말하기를 “폐하가 말한 것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한왕이 말하기를 “누가 나를 위해 회남에 사신으로 가서 그들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켜 초를 배반하게 하여 항왕을 제에 여러 달 머물게 할 수 있으면 내가 천하를 취하는데 모두 완전할 수 있을 것이다.” 했다. 수하가 말하기를 “신이 사신 가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20인과 함께 회남에 사신 갔다. 회남에 이르렀으나 태재가 만남을 주관하면서도 3일을 만나주지 않았다. 수하가 태재에게 말하기를 “왕이 나를 만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초가 강하고, 한이 약하다 여기기 때문이니 이는 신이 사신으로 온 까닭입니다. 나로 하여금 만날 수 있게 하면 말하는 것이 옳다면 이는 대왕이 듣고자 할 것이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들 20명이 刑具를 지고 회남의 시장에 엎드리게 하는 것으로써 왕이 한을 배반하고 초와 함께한다는 것을 밝힐 수 있습니다.” 했다. 태재가 이에 왕에게 말하니 왕이 만났다. 수하가 말하기를 “한왕이 신으로 하여금 공경히 대왕 앞에 글을 올리는 것은 가만히 대왕과 초가 어떻게 친할 수 있는지 괴이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회남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북쪽을 향하여 신하로 그를 섬기깁니다.” 하니 수하가 “대왕은 항왕과 반열을 같이하는 제후가 되었는데 북쪽을 향하여 신하로 그를 섬기는 것은 반드시 초가 강하여 나라를 맡길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왕이 제를 치면서 자신이 성을 쌓는 판자와 절구공이를 지고 사졸의 선봉이 되었으니 대왕께서도 마땅히 회남의 무리를 모두 동원하여 자신이 스스로 거느리고 초나라 군대의 선봉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4000명만 동원하여 초를 돕고 있습니다. 대저 북쪽을 향하여 신하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는 진실로 이 같습니까? 저 한왕이 팽성에서 싸울 때 항왕이 제를 나오지 않았던 것은 대왕이 마땅히 회남의 군대를 다 동원하여 회수를 건너 밤낮으로 팽성 아래서 만나 싸우라는 것인데 대왕이 만 명의 무리를 어루만지면서도 한 사람도 회수를 건너않은 것은 팔짱을 끼고 누가 이기는 지를 관찰한 것입니다. 대저 나라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이가 진실로 이 같습니까? 대왕께서 헛된 이름을 제시하는 것으로써 초를 향하면서도 스스로 맡김을 두터이 하고자 하는데 신은 가만히 대왕을 위하여 취하지 말아야 한다. 여깁니다. 그러하지만 대왕이 초를 배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한이 약하다 여겨서입니다. 저 초의 군대가 비록 강하나 천하가 의롭지 않다는 이름을 지웠고, 그 맹약을 배반하고 의제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초왕이 싸움에 이겨 스스로 강함을 믿으나 한왕이 제후를 거두어 돌아가 성고, 형양을 지키고, 촉을 함락하여 한에 곡식을 보내며,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쌓으며 군졸을 나누어 요새를 틀어막아 지키니 초의 사람들이 군대를 돌이키려 하면 (초, 한이 대치하는) 양 땅 사이의 적국 8,9백리를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싸우고자 하면 곧 싸울 수 없고, 성을 공격하면 곧 힘이 할 수 없는데 노약자가 천리의 밖에서 식량을 운반하며, 초의 군대가 형양, 성고에 이르면 한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고, 나아가도 곧 공격할 수 없고, 물러나도 곧 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의 군대는 충분히 믿을 수 없습니다. 가령 초가 한을 이기면 곧 제후들이 스스로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서로 구원합니다. 저 초의 강함은 다만 천하의 군대를 이르게 하기에 충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초는 한보다 못하여 그 형세가 쉽게 드러납니다. 지금 대왕이 만 가지 완전한 한과 함께 하지 않고 스스로 위태롭고 망하는 초에게 맡기는 것에 대해 신은 가만히 대왕이 미혹한 것이라 여깁니다. 신은 회남의 군대로 충분히 초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 대왕이 군대를 내어 초를 배반하면 항왕이 반드시 머무를 것이고, 여러 달을 머물면 한이 천하를 취하는 것을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은 대왕이 검을 가지고 함께 한에 돌아가기를 청합니다. 한왕은 반드시 땅을 나누어 대왕을 봉할 것이니 또한 하물며 회남일 것이며, 회남은 반드시 대왕이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왕이 공경히 사신으로 하여금 어리석은 계책을 올리게 하였으니 대왕은 유의하시기를 원합니다.” 했다. 회남왕이 말하기를 “명을 받들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몰래 초를 배난하고 한과 함께하기를 허락하였으나 감히 누설하지 못하였다.
[一] 正義今宋州虞城也。
[一] 【正義】 지금의 송주 우성이다.
[二] 索隱案:謂隨何。
[二] 【索隱】 살펴보니 수하를 말한다.
[三] 集解漢書音義曰:「淮南太宰作內主也。」韋昭曰:「主,舍也。」 索隱太宰,掌膳食之官。韋昭曰「主,舍」。
[三] 【集解】「한서음의」에 “회남 태재를 ‘내주’라 썼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主’는 집이다.” 했다. 【索隱】 태재는 음식을 관장하는 관리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主’는 집이다.” 했다.
[四] 集解李奇曰:「板,牆板也。築,杵也。」
[四] 【集解】 이기가 말하기를 “‘版’은 장판이다. ‘築’은 절구공이이다.” 했다.
[五] 集解音埽。
[五] 【索隱】 음은 ‘埽’이다.
[六] 索隱負猶被也。以不義被其身。
[六] 【索隱】 ‘猶’는 ‘被’와 같다. 의롭니 않다는 것을 몸에 입히는 것이다.
[七] 索隱徼謂邊境亭鄣。以徼繞邊陲,常守之也。乘者,登也,登塞垣而守之。
[七] 【索隱】 ‘徼’는 변경의 정장을 말한다. 정장으로서 변방을 둘러싸서 항상 지키는 것이다. ‘乘’는 오름이다. 요새 담장에 올라 지킨다.
[八] 集解張晏曰:「羽從齊還,當經梁地八九百里,迺得羽地。」 索隱案:服虔曰「梁在楚漢之中閒」。
[八]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항우가 제로부터 돌아와 마땅히 양 땅 8, 900리를 지나야 항우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 했다. 【索隱】 복건이 “양은 초와 한의 중간에 있다.
[九] 集解徐廣曰:「恃,一作『罷』。言其已困,不足復苦也。」 索隱案:漢書作「罷」,音皮。
[九]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侍’는 한편으로 ‘罷’라 쓰기도 한다. 이미 곤궁하여 다시 괴롭게 하지 않음을 말한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罷’라 썼는데 음은 ‘皮’이다.
楚使者在,[一]方急責英布發兵,舍傳舍。隨何直入,坐楚使者上坐,曰:「九江王已歸漢,楚何以得發兵?」布愕然。楚使者起。何因說布曰:「事已搆,[二]可遂殺楚使者,無使歸,而疾走漢[三]并力。」布曰:「如使者教,因起兵而擊之耳。」於是殺使者,因起兵而攻楚。楚使項聲、龍且攻淮南,項王留而攻下邑。[四]數月,龍且擊淮南,破布軍。布欲引兵走漢,恐楚王殺之,故閒行與何俱歸漢。
초의 사자가 있어 바야흐로 영포의 군대동원을 급히 질책하고 객사에 머물렀다. 수하가 바로 들어가 초의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아 말하기를 “구강왕은 이미 한에 귀의 하였는데 초가 어떻게 군대 동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경포가 크게 놀랐다. 초의 사자가 일어났다. 수하가 경포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일이 이미 벌어졌으니 초의 사자를 죽여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빨리 한에 달려가서 힘을 합쳐야 합니다.” 했다. 경포가 말하기를 “사자의 가르침과 같이 군대를 일으켜 칠뿐이다.” 하고는 이에 사자를 죽이고 군대를 이으켜 초를 공격하였다. 초가 항성, 용차로 하여금 회남을 공격하게 하고, 항왕은 머물러 하읍을 공격하였다. 몇 개월 동안 용차가 회남을 쳐서 경포의 군대를 깨트렸다. 경포가 군대를 이끌고 한으로 달아났는데 초왕이 죽일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이 길로 수하와 함께 한으로 돌아갔다.
[一] 集解文穎曰:「在淮南王所。」
[一]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회남왕이 있는 곳이다.”
[二] 索隱按:搆訓成也。
[二] 【索隱】 살펴보니 ‘搆’는 뜻이 이루어짐이다.
[三] 索隱走音奏,向也。
[三] 【索隱】 ‘走’의 음은 ‘奏’이니 향함이다.
[四] 正義宋州碭山縣。
[四] 【正義】 송주 탕산현이다.
淮南王至,[一]上方踞床洗,召布入見,布(甚)大怒,悔來,欲自殺。出就舍,帳御飲食從官如漢王居,布又大喜過望。[二]於是迺使人入九江。楚已使項伯收九江兵,盡殺布妻子。布使者頗得故人幸臣,將眾數千人歸漢。漢益分布兵而與俱北,收兵至成皋。四年七月,立布為淮南王,與擊項籍。
회남왕이 이르자 황제(고조)가 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기면서 경포를 불러 들여 만났는데 경포가 크게 노하여 온 것을 뉘우치고 스스로 죽으려 하였다. 나와 객사에 갔는데 휘장과 음식과 딸린 관원이 한왕의 거처와 같으니 경포가 바라는 것보다 나은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사람을 시켜 구강에 들어가게 하였다. 초가 이미 항백으로 하여금 구강의 군대를 거두고 경포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경포의 사자가 자못 옛 사람과 총애하던 신하를 얻어 무리 수 천명을 거느리고 한에 돌아갔다. 한이 경포의 군대를 나누어 더하여 함께 북쪽으로 가면서 군대를 거두어 성고에 이르렀다. 4년 7월 경포를 세워 회남왕으로 삼고 함께 항적을 쳤다.
[一] 集解徐廣曰:「三年十二月。」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3년 12월이다.” 했다.
[二] 正義高祖以布先分為王,恐其自尊大,故峻禮令布折服;已而美其帷帳,厚其飲食,多其從官,以悅其心;灌道也。
[二] 【正義】 고조가 경포를 우선 나누어 왕으로 삼으면 스스로 높고 크다고 여길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준엄한 예로 경포로 하여금 꺽고 복종하게 하였고, 이어 그 휘장을 아름답게 하고 그 음식을 두터이 하며, 그 따르는 관원을 많이 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관도이다.
漢五年,布使人入九江,得數縣。六年,布與劉賈入九江,誘大司馬周殷,周殷反楚,遂舉九江兵與漢擊楚,破之垓下。
한 5년 경포가 사람을 시켜 구강에 들어가게 하여 여러 현을 얻었다. 6년 경포와 유가가 구강에 들어가 대사마 주은을 회유하니 주은이 초를 배반하고 마침내 구강의 군대를 동원하여 한과 함께 초를 쳐서 해하에서 깨트렸다.
項籍死,天下定,上置酒。上折隨何之功,謂何為腐儒,為天下安用腐儒。[一]隨何跪曰:「夫陛下引兵攻彭城,楚王未去齊也,陛下發步卒五萬人,騎五千,能以取淮南乎?」上曰:「不能。」隨何曰:「陛下使何與二十人使淮南,至,如陛下之意,是何之功賢於步卒五萬人騎五千也。然而陛下謂何腐儒,為天下安用腐儒,何也?」上曰:「吾方圖子之功。」迺以隨何為護軍中尉。布遂剖符為淮南王,都六,九江、廬江、衡山、豫章郡皆屬布。
항적이 죽고 천하가 안정되니 황제가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황제가 수하의 공을 꺽으면서 수하는 썩은 유생이니 천하를 위하여 어찌 석은 유생을 등용하겠는가? 했다. 수하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대저 폐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팽성을 공격할 때 초왕이 아직 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는 보병 5만 명고, 기병 5천 명으로 회남을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할 수 없다.”하니 수하가 “폐하께서 저와 20명으로 하여금 회남에 사신가게 하였을 때 회남에 이르러 폐하의 뜻과 같이한 이것은 전의 공이 보병 5만 명, 기병 5천보다 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저를 싹은 유생이라 하면서 천하를 위해 어찌 등용하겠는가. 한 것은 왜입니까?”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그대의 공을 헤아렸다.” 하고 수하를 호군중위로 삼았다. 경포가 마침내 부절을 쪼개 회남왕이 되어 六에 도읍을 정하고, 구강, 여강, 형산 예장군이 모두 경포에게 속했다.
[一] 索隱腐音輔。謂之腐儒者,言如腐敗之物不任用。
[一] 【索隱】 ‘腐’의 음은 ‘輔’이다. ‘腐儒’라는 말은 부패한 물건과 같아서 임용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七年,朝陳。八年,朝雒陽。九年,朝長安。
7년에 진에서 조회하고, 8년에 낙양에서 조회하고, 9년에 장안에서 조회하였다.
十一年,高后誅淮陰侯,布因心恐。夏,漢誅梁王彭越,醢之,盛其醢遍賜諸侯。至淮南,淮南王方獵,見醢,因大恐,陰令人部聚兵,候伺旁郡警急。[一]
11년 고후가 회음후를 죽이니 경포가 마음으로 두려워하였다. 여름에 한이 양왕 팽월을 죽여 소금에 절여 젓을 담그고, 담근 젓을 담아 두루 제후에게 내렸다. 젓이 회남에 이르니 회남왕이 막 사냥하려다 소금에 절인 젓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몰래 사람을 모으고, 군대를 모으며, 옆 군을 엿보아 급함을 경고하게 했다.
[一] 集解張晏曰:「欲有所會。」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모임을 하고자 하였다.” 했다.
布所幸姬疾,請就醫,醫家與中大夫賁赫[一]對門,姬數如醫家,賁赫自以為侍中,迺厚餽遺,從姬飲醫家。姬侍王,從容語次,譽赫長者也。王怒曰:「汝安從知之?」具說狀。王疑其與亂。赫恐,稱病。王愈怒,欲捕赫。赫言變事,乘傳詣長安。布使人追,不及。
경포가 사랑하는 여자가 병이 들어 의원에게 가기를 청하였다. 의원의 집과 중대부 비혁이 문을 마주하였는데 여자가 자주 의원의 집에 가자 비혁이 스스로 시중이라 여겨 이에 후하게 음식을 보내고, 여자를 따라가 의원의 집에서 마시기도 하였다. 여자가 왕을 모시고 조용히 말하던 다음에 비혁이 장자를 칭찬하였다.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 따랐기에 그를 아는가?”하자 상황을 모두 말하였다. 왕이 그와 음란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비혁이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대었다. 왕이 더욱 노하여 비혁을 잡으려 하였다. 비혁이 변란의 일을 말하고는 역마를 타고 장안에 알렸다. 경포가 사람을 시켜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赫至,上變,言布謀反有端,可先未發誅也。上讀其書,語蕭相國。相國曰:「布不宜有此,恐仇怨妄誣之。請擊赫,使人微[二]驗淮南王。」淮南王布見赫以罪亡,上變,固已疑其言國陰事;漢使又來,頗有所驗,遂族赫家,發兵反。反書聞,上迺赦賁赫,以為將軍。
비혁이 장안에 이르러 변란을 아뢰고 경포가 모반하는 실마리가 있으니 먼저 발생하기 전에 죽일 수 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그 글을 읽고 소상국에게 말하였다. 상국이 말하기를 “경포는 마땅히 이러한 일이 있지 않습니다. 원수를 두려워하여 망녕되이 모함하는 것입니다. 비혁을 치고 사람을 시켜 몰래 회난왕을 시험하소서.” 했다. 회남왕 경포는 비혁이 죄를 짓고 도망하여 황제에게 변란을 상소하였다는 것을 보고는 진실로 그가 나라의 비밀스러운 일을 말하였다 의심하는데 한의 사신이 또 와서 자못 시험하는 바가 있다 마침내 비혁의 집을 멸족하고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였다. 모반한 글을 듣고 황제가 이에 비혁을 풀어주고 장군으로 삼았다.
[一] 集解徐廣曰:「賁音肥。」 索隱賁音肥,人姓也。赫音虛格反。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賁’의 음은 ‘肥’이다.” 했다.
[二] 集解一作「徵」。
[二] 【集解】 한편 ‘徵’이라 쓰기도 한다.
上召諸將問曰:「布反,為之柰何?」皆曰;「發兵擊之,阬豎子耳。何能為乎!」汝陰侯滕公召故楚令尹問之。令尹曰:「是故當反。」滕公曰:「上裂地而王之,疏爵而貴之,[一]南面而立萬乘之主,其反何也?」令尹曰:「往年殺彭越,前年殺韓信,[二]此三人者,同功一體之人也。自疑禍及身,故反耳。」滕公言之上曰:「臣客故楚令尹薛公者,其人有籌筴之計,可問。」上迺召見問薛公。薛公對曰:「布反不足怪也。使布出於上計,山東非漢之有也;出於中計,勝敗之數未可知也;出於下計,陛下安枕而臥矣。」上曰:「何謂上計?」令尹對曰:「東取吳,[三]西取楚,[四]并齊取魯,傳檄燕、趙,固守其所,山東非漢之有也。」「何謂中計?」「東取吳,西取楚,并韓取魏,據敖庾之粟,[五]塞成皋之口,勝敗之數未可知也。」「何謂下計?」「東取吳,西取下蔡,[六]歸重於越,身歸長沙,[七]陛下安枕而臥,漢無事矣。」[八]上曰:「是計將安出?」令尹對曰:「出下計。」上曰:「何謂廢上中計而出下計?」令尹曰:「布故麗山之徒也,自致萬乘之主,此皆為身,不顧後為百姓萬世慮者也,故曰出下計。」上曰:「善。」封薛公千戶。[九]迺立皇子長為淮南王。上遂發兵自將東擊布。
황제가 여러 장군을 불러 묻기를 “경포가 모반하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군대를 내어 치면 더벅머리 애를 구덩이에 묻을 뿐이니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여음후 등공이 옛 초의 영윤을 불러 물었다. 영윤이 말하기를 “이는 마땅히 모반할 만합니다.” 했다. 등공이 말하기를 “황제가 땅을 나누어 왕 노릇하게 하고, 작을 나누어 귀하게 하고 남쪽을 향하는 만승의 주인으로 세웠는데 그가 모반하는 것은 왜인가?” 했다. 영윤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팽월을 죽였고 지난해에는 한신을 죽였는데 이 세 사람은 공을 함께한 한 몸의 사람입니다.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까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에 모반할 뿐입니다. 했다. 등공이 황제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객중에 옛 초의 영윤 설공이란 자는 계획을 헤아릴 수 있어 물을 만합니다.” 했다. 황제가 이에 설공을 불러 보고 물었다. 설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경포가 모반한 것은 괴이하지 않습니다. 가령 경포가 상책을 내면 산동은 한의 소유가 아니며, 중책을 내면 승패의 운수를 알 수 없고, 하책을 내면 폐하께서 베개를 편안히 하고 누우실 수 있습니다.”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무엇을 상책이라 하는가?” 했다. 영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동쪽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는 초를 취하며, 제를 아울러 노를 취하고 연과 조에 격문을 전하고 굳게 그 자리를 지키면 산동은 한의 소유가 아니게 됩니다.” 했다. “중책은 무엇인가?” 하니 “동쪽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를 취하며 한을 아울러 위를 취하고 오유의 곡식에 의지하여 석고의 입구를 막으면 승패의 운수를 알 수 없습니다.” 했다. “하책은 무엇인가?” 하니 “동족을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하채를 취하며 돌아가 월을 중시하고, 몸은 장사에 돌아가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편안히 하고 누워 한은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 계책 중에 장차 어디로 나올 것인가?” 하니 영윤이 대답하기를 “하책을 나올 것입니다.”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어찌 상책과 중책을 없애고 하책을 내는가?” 하니 영윤이 대답하기를 “경포는 옛 여산의 무리인데 스스로 만승의 주인에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한 것으로 뒤를 돌아보고 백성과 만세의 고려를 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책을 낸다고 말 한 것입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훌륭하다.” 하고는 설공을 식읍 천호에 봉하였다. 이에 황자 장을 세워 회남왕이라 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군대를 내어 몸소 이끌고 동쪽으로 경포를 쳤다.
[一] 集解漢書音義曰:「疏,分也。『禹決江疏河』是也。」 索隱疏,分也。漢書曰「禹決江疏河」。尚書曰「列爵惟五,分土惟三」。按;裂地是對文,故知疏即分也。
[一] 【集解】 「한서음의」에 “‘疏’는 나눔이다. ‘禹決江疏河(우가 강을 트고, 하를 나누었다.)’ 한 것이 이것이다. 【索隱】 ‘疏 ’는 나눔이다. 『한서』에 ‘禹決江疏河(우가 강을 트고, 하를 나누었다.)’”하였고, 『상서』에 “列爵惟五,分土惟三(작을 나열하는 것은 다섯으로 하고, 땅을 나누는 것은 셋으로 한다.” 하였다. 살펴보니 ‘裂地(땅을 나눈다.)’는 댓구이기 때문에 ‘疏’가 곧 나눔이라는 것을 안다.
[二] 集解張晏曰:「往年、前年同耳,使文相避也。」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 ‘往年’은 ‘前年(지난 해)’와 같으니 글이 서로 피하게 한 것이다.” 했다.
[三] 正義荊王劉賈都吳,蘇州闔廬城也。
[三] 【正義】 형왕 유가는 오에 도읍하였는데 소주 합려성이다.
[四] 正義楚王劉交都徐州下邳。
[四] 【正義】 초왕 뉴교가 도읍한 곳은 서주 하비이다.
[五] 索隱案:太康地記云「秦建敖倉於成皋」。又云「庾」,故云「敖庾」也。
[五] 【索隱】 살펴보니 『태강지기』에 “진나라가 성고에 오창을 세웠다.” 했다. 또 ‘庾’라 하였기 때문에 ‘敖庾’라 했다.
[六] 正義古州來國。
[六] 【正義】 옛 주래국이다.
[七] 正義今潭州。
[七] 【正義】 지금의 담주이다.
[八] 集解桓譚新論曰:「世有圍碁之戲,或言是兵法之類也。及為之上者,遠碁疏張,置以會圍,因而成多,得道之勝。中者,則務相絕遮要,以爭便求利,故勝負狐疑,須計數而定。下者,則守邊隅,趨作罫,以自生於小地,然亦必不如。」察薛公之言上計,云取吳、楚,并齊、魯及燕、趙者,此廣道地之謂。中計云取吳、楚,并韓、魏,塞成皋,據敖倉,此趨遮要爭利者也。下計云取吳、下蔡,據長沙以臨越,此守邊隅,趨作罫者也。索隱罫音烏卦反。
[八] 【集解】 『환담신론』에 “세상에는 둘러싸는 바둑의 놀이가 있는데 혹은 이것이 병법의 종류라 말한다. 가장 잘 하는 자는 멀리 바둑을 나누어 벌이고 만나고 둘러싸게 놓아 이룸이 많아서 바둑 두는 방법의 이김을 얻는다. 중급자는 곧 서로 요점을 끊고 차단하는데 힘써 편함을 다투고 이로움을 찾기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을 의심하게 되어 반드시 수를 헤아려 정한다. 하급자는 곧 모퉁이를 지키고 종종거리며 줄을 긋는 것으로 스스로 작은 땅에서 살아가는데 그러나 또 반드시 같지는 않다.” 채설공이 말한 상책은 오와 초를 취하고 제, 노 및 연, 조를 아우른다는 것은 이는 길과 땅을 넓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책은 오와 초를 취하고 한, 위를 아우르고 성고를 막으며 오창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는 요지를 부지런히 차단하여 이익을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책은 오와 하채를 취하고 장사에 의지하여 월을 마주함이니 이는 귀퉁이를 지키고 부지런히 바둑판의 줄을 긋는 것을 말한 것이다. 【索隱】 ‘罫’의 음은 ‘烏’와 ‘卦’의 反이다.
[九] 索隱劉氏云:「薛公得封千戶,蓋關內侯也。」
[九] 【索隱】 유씨가 말하기를 “설공이 천호에 봉해진 것이니 대개 관내후이다.” 했다.
布之初反,謂其將曰:「上老矣,厭兵,必不能來。使諸將,諸將獨患淮陰、彭越,今皆已死,餘不足畏也。」故遂反。果如薛公籌之,東擊荊,荊王劉賈走死富陵。[一]盡劫其兵,渡淮擊楚。楚發兵與戰徐、僮閒,[二]為三軍,欲以相救為奇。或說楚將曰:「布善用兵,民素畏之。且兵法,諸侯戰其地為散地。[三]今別為三,彼敗吾一軍,餘皆走,安能相救!」不聽。布果破其一軍,其二軍散走。
경포가 처음 모반하였을 때 그 장군에게 말하기를 “황제는 늙어서 군대를 싫어하니 반드시 오지 못하고 여러 장군을 시킬 것이다. 여러 장군들이 근심하는 것은 오직 회음, 팽월인데 지금 모두 이미 죽었으니 나머지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모반하였다. 과연 설공이 헤아린 것과 같이 동쪽으로 형을 치니 형왕 유가가 달아나다 부릉에서 죽었다. 그 군대를 모두 겁주어 회수를 건너 초를 쳤다. 초다 군대를 내어 서와 동한에서 싸우고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구원하는 것으로서 기이한 계책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이 초의 장군에게 말하기를 “경포는 군대를 잘 운용하여 백성들이 평소에 그를 두려워합니다. 또 병법에 제후가 그 땅에서 싸우는 것을 땅을 흩는다(散地) 하는데 지금 따로 셋으로 하니 그들이 우리 일군을 무너뜨리면 나머지는 모두 달아날 것인데 어찌 서로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했으나 듣지 않았다. 경포가 과연 그 일군을 깨트리자 그 2군이 흩어져 달아났다.
[一] 正義故城在楚州盱眙縣東北六十里。
[一] 【正義】 옛 성이 초주 우이현 동북쪽 60리에 있다.
[二] 集解如淳曰:「地名也。」 索隱案:地理志臨淮有徐縣、僮縣。 正義杜預云:「徐在下邳僮縣東。」括地志云:「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四十里,古徐國也。」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지명이다.” 했다. 【索隱】 『지리지』에 “臨淮(회수를 마주하다)는 서현, 동현에 있다.” 했다. 【正義】 두예가 말하기를 “서는 하비 동현 동쪽에 있다.” 했고, 『괄지지』에 “대서성은 서주 서성현 북쪽 40리에 있는데 옛 서국이다.” 했다.
[三] 集解漢書音義曰:「謂散滅之地。」 正義魏武帝注孫子曰:「卒戀土地,道近而易敗散。」
[三] 【集解】 「한서음의」에 “흩어져 없어지는 땅”이라 했다. 【正義】 위 무제가 주석한 『손자』에 “군졸은 토지를 그리워하여 길이 가가우면 쉽게 무너져 흩어진다.” 했다.
遂西,與上兵遇蘄西,會甀。[一]布兵精甚,上迺壁庸城[二],望布軍置陳如項籍軍,上惡之。與布相望見,遙謂布曰:「何苦而反?」布曰:「欲為帝耳。」上怒罵之,遂大戰。布軍敗走,渡淮,數止戰,不利,與百餘人走江南。布故與番君婚,以故長沙哀王[三]使人紿布,偽與亡,誘走越,故信而隨之番陽。番陽人殺布茲鄉[四]民田舍,遂滅黥布。[五]
마침내 황제의 군대와 기의 서족 회추에서 만났다. 경포의 군대는 매우 정예였으므로 황제가 이에 용성에 벽을 세워 지키고, 경포의 군대가 진을 친 것을 바라보니 항적의 군대와 같았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미워하였다. 경포와 서로 바라보며 멀리서 경포에게 말하기를 “어떤 괴로움으로 모반하였는가?” 하니 경포가 말하기를 “황제가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했다. 황제가 노하여 욕하고 마침내 크게 싸웠다. 경포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나는데 회수를 건너 여러 번 멈추어 싸웠으나 이롭지 못하자 100여명과 함께 강남으로 달아났다. 경포가 옛 날에 번군과 혼인하였는데 장사 애왕이 사람을 시켜 경포를 속이고 거짓으로 함께 도망하자 유인하여 월로 달아났다. 그러므로 믿고 따라서 번양으로 갔다. 번양 사람들이 경포를 자향 백성의 농가에서 죽이니 마침내 경포를 없앴다.
[一] 索隱上古外反,下持瑞反。韋昭云「蘄之鄉名」。漢書作「■」,應劭音保,(鉦)[銍]下亭名。正義蘄音機。沛郡蘄城也。甀,逐瑞反。
[一] 【索隱】 위는 ‘古’와 ‘外’의 反이고, 아래는 ‘持’와 ‘瑞’의 反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기의 향명이다.” 했다. 『한서』에는 “■”라 썼다. 응소는 “음이 ‘保’인데 하정의 이름이다.” 했다. 【正義】 ‘蘄’의 음은 ‘機’이다. 패군 기성현이다. ‘甀’는 ‘逐’과 ‘瑞’의 反이다.
[二] 集解鄧展曰:「地名也。」
[二] 【索隱】 등전이 말하기를 “지명이다.” 햇다.
[三] 集解徐廣曰:「表云成王臣,吳芮之子也。」駰案;晉灼曰「芮之孫固」。或曰是成王,非哀王也,傳誤也。索隱「哀」字誤也。是成王臣,吳芮之子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표」에 성왕의 신하이며 오예의 아들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진작이 말하기를 “예의 손자 고”라 했다. 어떤 사람은 “이는 성왕이고, 애왕이 아니며 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했다. 【索隱】 ‘哀’자는 잘못이다. 이는 성왕의 신하이고, 오예의 아들이다.
[四] 索隱番陽縣之鄉。
[四] 【索隱】 번양 ■현의 향이다.
[五] 正義英布冢在饒州鄱陽縣北百五十二里十三步。
[五] 【正義】 경포의 무덤은 요주 번양현 북쪽 152리 10보에 있다.
立皇子長為淮南王,封賁赫為期思侯,[一]諸將率多以功封者。[二]
황자 장을 세워 회남왕이라 하고 분혁을 봉하여 기사후라 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인솔한 공으로 봉해졌다.
[一] 正義期思故城在光州固始縣界。
[一] 【正義】 기사 옛 성이 광주 고시현 경계에 있다.
[二] 集解漢書曰:「將率封者六人。」
[二] 【集解】 『한서』에 “장수로 인솔하여 봉해진 자가 6인이었다.” 했다.
太史公曰:英布者,其先豈春秋所見楚滅英、六,皋陶之後哉?身被刑法,何其拔興[一]之暴也!項氏之所阬殺人以千萬數,而布常為首虐。功冠諸侯,用此得王,亦不免於身為世大僇。禍之興自愛姬殖,妒媢[二]生患,竟以滅國!
태사공이 말하기를 “영포는 그 선조가 어찌 『춘추』에 보이는 ‘초가 영과 육을 멸하였다.’할 때의 영씨로 고요의 후예이겠는가? 몸은 형벌을 받고도 어찌 일어남이 빠른가! 항씨가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람이 천이고 만을 헤아리는데 영포가 항상 가장 포학 하였다. 공은 제후의 으뜸이니 이에 등용되어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또한 몸은 세상에 큰 욕을 먹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재앙의 일어남이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자라나고, 질투가 근심을 낳아 마침내 나라를 잃었구나!” 했다.
[一] 索隱拔,白曷反,疾也。
[一] 【索隱】 ‘拔’은 ‘自’와 ‘曷’의 反이니 병이다.
[二] 集解音冒。媢亦妒也。 索隱案:王劭音冒,媢亦妒也。漢書外戚傳亦云「或結寵妾妒媢之誅」。又論衡云「妒夫媢婦」,則媢是妒之別名。今原英布之誅為疑賁赫與其妃有亂,故至滅國,所以不得言妒媢是媚也。一云男妒曰媢。
[二]【集解】 음은 ‘冒’이고, ‘媚’ 또한 질투함이다. 【索隱】 살펴보니 왕소는 음을 ‘冒’라 했고, ‘媚’ 또한 질투라 했다. 『한서』 「외척전」에 “혹 사랑하는 첩들이 투기를 맺으면 죽인다.” 했고, 또 『논형』에 “지아비를 질투하고, 지어미를 질투한다.” 한 것은 곧 ‘媢’는 질투의 다른 이름이다. 지금 원래 영포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비혁과 그 비의 음란함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잃음에 이르고, 때문에 ‘妒媢’가 ‘媚’로 쓰이지 않은 것이다. 한편 남자가 질투하는 것을 ‘媢 ’라 하기도 한다.
【索隱述贊】九江初筮,當刑而王。既免徒中,聚盜江上。再雄楚卒,頻破秦將。病為羽疑,歸受漢杖。賁赫見毀,卒致無妄。
【索隱述贊】 구강에서 처음 점을 쳐 형벌을 받은 후 왕 노릇한다. 했다. 이미 형벌을 면한 무리가 강가에 모여 도적질 하였다. 재웅의 초 병졸이 자주 진나라 장군을 깨트렸다. 병든 날개를 의심하다 돌아가 한의 杖刑을 받았다. 분혁의 모함을 받고, 뜻하지 않은 죽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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