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九十三
韓信盧綰列傳第三十三
韓王信者,[一]故韓襄王孽孫也,[二]長八尺五寸。及項梁之立楚後懷王也,燕、齊、趙、魏皆已前王,唯韓無有後,故立韓諸公子橫陽君成[三]為韓王,[四]欲以撫定韓故地。項梁敗死定陶,成奔懷王。沛公引兵擊陽城,[五]使張良以韓司徒[六]降下韓故地,得信,以為韓將,將其兵從沛公入武關。
한왕 신은 옛 한나라 양왕의 얼손으로 키가 8척 5촌이다. 항량이 초의 후예인 회왕을 세움에 이르러 연, 제, 조, 위가 모두 이미 앞서 왕이라 하였으나 오직 한 만 후예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의 여러 공자 중 횡양군 성을 세워 한왕으로 삼고, 한의 옛 땅을 어루만지고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항량이 정도에서 패하여 죽자 성이 회왕에게 달아났다. 패공이 군대를 이끌고 양성을 치자 장량으로 하여금 한 사도로 삼고 한의 옛 땅을 항복시키게 하고 한신을 얻어 한의 장군으로 삼고, 그 군대를 거느리고 패공을 따라 무관에 들어갔다.
[一] 集解徐廣曰:「一云『信都』。」 索隱楚漢春秋云韓王信都,恐謬也。諸書不言有韓信都。案:韓王信初為韓司徒,後訛云「申徒」,因誤以為韓王名耳。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信都’라 한다.”했다. 【索隱】 『초한춘추』에 “한왕 신도라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 여러 글에 한신도가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살펴보니 한왕 신이 처음에 한의 사도가 되었는데 후에 잘못 ‘申都’라 말해지니 잘못 한왕의 이름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二] 集解張晏曰:「孺子為孽。」 索隱張晏云「庶子為孽子」。何休注公羊以為「孽,賤子,猶之伐木有孽生也」。漢書晁錯云「孽子悼惠王」是也。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어린 아이를 ‘孼’이라 한다.” 했다. 【索隱】 장안이 말하기를 “‘庶子’를 ‘蘖子’라 한다.” 했다. 하휴가 주석한 『춘추공양전』에는 “‘蘖’을 천한 자식이라 했는데 나무를 베고 움이 나는 것과 같다.” 『한서』 조착 전에 “孽子 悼惠王”이라 한 것이 이것이다.
[三] 正義故橫城在宋州宋城縣西南三十里。
[三] 【正義】 옛 황성은 송주 송성현 서남쪽 30리에 있다.
[四] 集解徐廣曰:「二年六月也。都陽翟。」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2년 6월이다. 양적에 도읍하였다.” 했다.
[五] 正義河南縣也。
[五] 【索隱】 하남현이다.
[六] 集解徐廣曰:「他本多作『申徒』,申與司聲相近,字由此錯亂耳。今有申徒,云是司徒之後,言司聲轉為申。」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다른 본에는 ‘申徒’라 많이 썼고, ‘申’은 ‘司’와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 글자가 여기서 유래하여 뒤섞였을 뿐이다. 지금 ‘申徒’가 있는데 이를 사도의 후예라 말하는데 ‘司’의 소리가 바뀌어 ‘申’이 되었다.
沛公立為漢王,韓信從入漢中,迺說漢王曰:「項王王諸將近地,而王獨遠居此,此左遷也。士卒皆山東人,跂而望歸,[一]及其鋒東鄉,[二]可以爭天下。」漢王還定三秦,迺許信為韓王,先拜信為韓太尉,將兵略韓地。
패공이 즉위하여 漢왕이 되자 한신이 따라서 한중에 들어갔는데 漢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항왕이 여러 장군들을 가까이서 왕 노릇하게 하는데, 회왕은 유독 멀리 여기에 머물라 하는 이는 좌천입니다. 사졸이 모두 산동 사람이어서 힘써 돌아가길 바라니 그 칼날을 동쪽으로 향하게 하면 천하를 다툴 수 있습니다.” 했다. 漢왕이 돌아가 삼진을 안정시키자 이에 신이 韓왕이 되는 것을 허락하고 먼저 신을 제수하여 韓 태위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韓의 땅을 공략하게 했다.
[一] 索隱跂音企,起踵也。 正義跂音岐。
[一] 【索隱】 ‘跂’의 음은 ‘企’이니 발굼치를 일으키는 것이다. 【正義】 ‘跂’의 음은 ‘岐’이다.
[二] 集解文穎曰:「鋒銳欲東向。」 索隱按:姚氏云「軍中將士氣鋒」。韋昭曰「其氣鋒銳欲東也」。
[二]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날카로운 칼날을 동쪽으로 향하고자 한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요씨가 말하기를 “군대 내 장사의 기운이 날카로운 것이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그 기운과 날카로운 칼날이 공쪽을 향하고자 한 것이다.” 했다.
項籍之封諸王皆就國,韓王成以不從無功,不遣就國,更以為列侯。[一]及聞漢遣韓信略韓地,迺令故項籍游吳時吳令鄭昌[二]為韓王以距漢。漢二年,韓信略定韓十餘城。漢王至河南,韓信急擊韓王昌陽城。昌降,漢王迺立韓信為韓王,[三]常將韓兵從。三年,漢王出滎陽,韓王信、周苛等守滎陽。及楚敗滎陽,信降楚,已而得亡,復歸漢,漢復立以為韓王,竟從擊破項籍,天下定。五年春,遂與剖符為韓王,王潁川。
항적이 봉한 제후가 모두 나라에 나아가는데 韓왕 성은 따르지 않아 공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에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열후가 되었다. 漢왕이 한신을 보내 韓의 땅을 침략한다는 것을 듣고 이에 옛날 항적이 吳에서 노닐 때 알던 오령 정창을 韓왕으로 삼아 漢을 막게 했다. 漢 2년 한신이 韓의 10여성을 침략하여 평정하였다. 漢왕이 하남에 이르자 한신이 급히 韓왕 창의 양성을 급히 쳤다. 韓왕 창이 항복하자 이에 한신을 세워 韓왕이라 하고, 항상 韓의 군대를 거느리고 따르게 했다, 3년에 漢왕이 형양을 나왔는데 韓왕 신과 주가 등에게 형양을 지키게 했다. 초가 형양을 무너뜨리니 신이 초에 항복하였다가 이윽고 도망쳐 다시 漢에 돌아갔는데 漢이 다시 세워 韓왕을 삼았다. 마침내 항적을 쳐서 깨트리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5년 봄에 드디어 부절을 쪼개 韓왕으로 삼고 영천에서 왕 노릇 하게 했다.
[一] 集解徐廣曰:「元年十一月,誅成。」駰案:漢書曰「封為穰侯」。 索隱地理志穰縣屬南陽。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1년 11월에 성울 죽였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한서』에 “봉하여 양후라 하였다.” 했다. 【索隱】 『지리지』에 “양현은 남양에 속한다.” 했다.
[二] 正義項籍在吳時,昌為吳縣令。
[二] 【正義】 항적은 오 시대에 있었는데 창이 오의 현령이 되었다.
[三] 集解徐廣曰:「二年十一月。」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2년 11월이다.”했다.
明年春,[一]上以韓信材武,所王北近鞏、洛,南迫宛、葉,東有淮陽,皆天下勁兵處,迺詔徙韓王信王太原以北,備禦胡,都晉陽。信上書曰:「國被邊,[二]匈奴數入,晉陽[三]去塞遠,請治馬邑。」[四]上許之,信乃徙治馬邑。秋,匈奴冒頓[五]大圍信,信數使使胡求和解。漢發兵救之,疑信數閒使,有二心,使人責讓信。信恐誅,因與匈奴約共攻漢,反,以馬邑降胡,擊太原。
다음 해 봄에 황제가 한신이 재주와 무예를 갖추었으나 왕 노릇하는 곳이 공, 낙에 가깝고, 남쪽으로 완, 섭을 압박하며, 동쪽으로 회양을 소유하니 모두 천하의 굳센 군대가 있는 곳이므로 이에 조서로 韓왕 신을 옮겨 태원 이북에서 왕 노릇 하게 하면서 胡를 대비하고 지키게 하며 진양에 도읍하게 하였다. 한신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나라가 변경이어서 흉노가 여러 번 침입함을 당하는데 진양은 요새와 거리가 머니 마읍에서 다스릴 것을 청합니다.” 했다.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니 한신이 이에 옮겨 마읍에서 다스렸다. 가을에 흉노의 모돈이 크게 한신을 포위하니 한신이 여러 번 胡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여 포위를 풀 것을 청하였다. 한나라가 군대를 내어 구원하였는데 한신이 여러 번 은밀히 사신을 보낸 것은 두 마음이 있는 것이라 의심하여 사람을 시켜 한신을 질책하고 꾸짖었다. 한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흉노와 함께 漢을 공격할 것은 약속하고 배반하여 마읍을 가지고 胡에 항복하고 태원을 쳤다.
[一] 集解徐廣曰:「即五年之二月。」駰案:漢書曰「六年春」。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곧 5년 2월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한서』에 “6년 봄이다.”했다.
[二] 集解李奇曰:「被音『被馬』[之『被』]也。」
[二] 【集解】 이기가 말하기를 “‘被’의 음은 ‘被馬’의 ‘被’이다.
[三] 正義并州。
[三] 【正義】 병주이다.
[四] 正義朔州。
[四] 【正義】 삭주이다.
[五] 索隱上音墨,又音莫報反。
[五] 【索隱】 위의 음은 ‘墨’이고, 또 음은 ‘莫’과 ‘報’의 反이다.
七年冬,上自往擊,破信軍銅鞮,[一]斬其將王喜。信亡走匈奴。(與)其與白土人[二]曼丘臣、王黃等立趙苗裔趙利為王,復收信敗散兵,而與信及冒頓謀攻漢。匈奴仗左右賢王將萬餘騎與王黃等屯廣武以南,[三]至晉陽,與漢兵戰,漢大破之,追至于離石,[四]復破之。匈奴復聚兵樓煩[五]西北,漢令車騎擊破匈奴。匈奴常敗走,漢乘勝追北,聞冒頓居代(上)谷,[六]高皇帝居晉陽,使人視冒頓,還報曰「可擊」。上遂至平城。[七]上出白登[八],匈奴騎圍上,上乃使人厚遺閼氏。[九]閼氏乃說冒頓曰:「今得漢地,猶不能居;且兩主不相厄。」居七日,胡騎稍引去。時天大霧,漢使人往來,胡不覺。護軍中尉陳平言上曰:「胡者全兵,[一0]請令彊弩傅兩矢外嚮,[一一]徐行出圍。」入平城,漢救兵亦到,胡騎遂解去。漢亦罷兵歸。韓信為匈奴將兵往來擊邊。
7년 겨울 황제가 스스로 가서 쳐서 신의 군대를 동제에서 깨트리고 그 장군 왕희를 목 베었다. 신이 도망하여 횽노에 달아났다. 그 백토 사람인 만구신, 왕황 등이 조의 후예인 조이를 세워 왕으로 삼고, 다시 신의 패하여 흩어진 군대를 거두어 신, 모돈과 함께 漢을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다. 흉노가 좌현왕과 우현왕에 의지하고, 만 여기를 거느리고 왕황 등과 함께 광무 이남에 주둔하였으며 진양에 이르러 漢의 군대와 싸웠는데 漢이 크게 깨트리고 추격하여 이석에 이르러 다시 그들을 깨트렸다. 흉노가 다시 군대를 루번 서북쪽에서 모이니 한이 전차와 기병으로 하여금 흉노를 깨트리게 했다. 흉노가 매번 패하여 달아나면 漢이 이김을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였는데 모돈이 대의 골짜기에 있다는 것을 들었다. 고황제가 진양에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모돈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 보고하기를 “칠 수 있습니다.” 했다. 황제가 드디어 평성에 이르렀다. 황제가 백등을 나오니 흉노의 기병이 황제를 포위하였다. 황제가 이에 사람을 시켜 흉노 임금의 정실왕비에게 후한 뇌물을 주었다. 왕비가 이에 모돈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지금 한의 땅을 얻어도 오히려 살수 없는데 또한 두 임금이 서로 횡액당하지 마십시오.” 했다. 주둔한지 7일 만에 胡가 점차 기병을 이끌고 갔다. 이 때 하늘에 큰 안개가 끼었는데 한이 사람을 시켜 왕래하여도 胡가 깨닫지 못하였다. 호군중위 진평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胡는 군대를 온전히 하려 합니다. 강군에 두 개의 화살을 걸고 밖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 포위를 벗어나길 청합니다.” 했다. 평성에 들어가니 한의 구원병이 또한 이르렀으므로 胡의 기병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한이 또한 군대를 그치고 돌아갔다. 한신은 흉노를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오고가면서 변경을 공격하였다.
[一] 正義潞州縣。
[一] 【正義】 노주현이다.
[二] 集解張晏曰:「白土,縣名,屬上郡。」
[二]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白土’는 현의이름이니 상군에 속한다.” 했다.
[三] 正義廣武故城在代州鴈門縣界也。
[三] 【正義】 광무 옛성은 대주 안문현 경계에 있다.
[四] 正義石州縣。
[四] 【正義】 석주현이다.
[五] 正義鴈門郡樓煩縣。
[五] 【正義】 안문군 누번현이다.
[六] 正義今媯州。
[六] 【正義】 지금의 규주이다.
[七] 正義朔州定襄縣是也。
[七] 【正義】 삭주 정양현이 이것이다.
[八] 集解服虔曰:「白登,臺名,去平城七里。」如淳曰:「平城旁之高地,若丘陵也。」 索隱姚氏案:北疆記「桑乾河北有白登山,冒頓圍漢高之所,今猶有壘壁。」
[八] 【集解】 보건이 말하기를 “‘白登’은 臺의 이름이니 평성에서 7리 떨어져있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평성 옆의 높은 땅인데 언덕과 같다.” 했다. 【索隱】 요씨가 살펴보니 “『北疆記』에 상건하 북쪽에 백등산이 있고, 모돈이 한을 포위한 높은 곳인데 지금도 오히려 보루의 벽이 있다.
[九] 正義閼,於連反,又音燕。氏音支。單于嫡妻號,若皇后。
[九] 【正義】 ‘閼’은 ‘於’와 ‘連’의 反이고, 도 음은 ‘燕’이다. ‘氏’의 음은 ‘支’이다. 單于(선우)의 정실 처의 호칭인데 황후와 같다.
[一0] 集解漢書音義曰:「言唯弓矛,無雜仗也。」
[一0] 【集解】 『한서음의』에 “오직 창과 활만으로 할 뿐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했다.
[一一] 索隱傳音附。
[一一] 【索隱】 ‘傅’의 음은 ‘附’이다.
漢十年,信令王黃等說誤陳豨。十一年春,故韓王信復與胡騎入居參合,[一]距漢。漢使柴將軍擊之,[二]遺信書曰:「陛下寬仁,諸侯雖有畔亡,而復歸,輒復故位號,不誅也。大王所知。今王以敗亡走胡,非有大罪,急自歸!」韓王信報曰:「陛下擢僕起閭巷,南面稱孤,此僕之幸也。滎陽之事,僕不能死,囚於項籍,此一罪也。及寇攻馬邑,僕不能堅守,以城降之,此二罪也。今反為寇將兵,與將軍爭一旦之命,此三罪也。夫種、蠡無一罪,身死亡;[三]今僕有三罪於陛下,而欲求活於世,此伍子胥所以僨於吳也。[四]今僕亡匿山谷閒,旦暮乞貸蠻夷,僕之思歸,如痿人不忘起,[五]盲者不忘視也,勢不可耳。」遂戰。柴將軍屠參合,斬韓王信。
한 10년 신이 왕황 등으로 하여금 진희를 설득하여 그릇되게 하였다. 11년 봄에 옛 한왕 신이 다시 胡의 기병과 함께 삼합에 들어와 머물며 한에 대항하였다. 한이 시 장군으로 하여금 치게 하고 신에게 글을 주어 말하기를 “폐하께서 너그럽고 어질어 제후들이 비록 배반하여 도망함이 있었을지라도 다시 돌아오면 문득 옛 지위와 호칭을 회복하며 죽이지 않는 것은 대왕이 아는 것이다. 지금 왕이 무너져 도망하여 胡에 달아난 것은 큰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니 급히 스스로 돌아오시오!” 했다. 한왕 신이 답장하여 말하기를 “폐하께서 나를 발탁하여 거리에서 일어나게 하시고, 남쪽을 향하여 ‘孤’를 fg게 하신 것은 이는 나의 행운입니다. 형양의 일은 내가 죽을 수 없어 항적에게 갇힌 것은 첫 번째 죄이다. 도적이 이르러 마음을 공격하는데 내가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성을 가지고 항복한 것은 두 번째 죄이다. 지금 도리어 도적을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장군과 하루아침의 목숨을 다투는 것은 세 번째 죄이다. 대저 대부 종과 범려는 하나의 죄도 없는데 자신은 죽었고, 지금 나는 폐하에게 3가지 죄를 짓고 세상에서 살아날 것을 구하는 것은 이는 오자서가 오에서 넘어져 죽은 이유입니다.(넘어져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산골짜기 사이에 도망하고 숨어 아침저녁으로 오랑캐에게 구걸하고 빌리면서도 내가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것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잊어버린 것과 같고, 봉사가 보는 것을 잊어버린 것과 같으니 형세가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싸웠다. 시 장군이 삼합을 도륙하고 한왕 신의 목을 베었다.
[一] 集解蘇林曰:「代地也。」 正義故城在朔州定襄縣北。
[一] 【集解】 소림이 말하기를 “대 땅이다.” 했다. 【正義】 옛 성이 삭주 정양현 북쪽에 있다.
[二] 集解鄧展曰:「柴奇也。」 索隱應劭云柴武,鄧展云柴奇;晉灼云奇,武之子。應劭說為得,此時奇未為將。
[二] 【集解】 등전이 말하기를 “시기이다.” 했다. 【索隱】 응소가 말하기를 “시무”라 하고, 등전은 “시기”라 했으며, 진작은 “기는 무의 아들”이라 했다. 응소가 말하기를 “이 때 기는 아직 장군이 되지 못하였다.” 했다.
[三] 集解文穎曰:「大夫種、范蠡也。」
[三] 【集解】 문영이 말하길르 “대부 종과 범려이다.”했다.
[四] 索隱蘇林曰:「僨音奮。」張晏曰:「僨,僵仆也。」 正義信知歸漢必死,故引子胥以為辭。
[四 【索隱】 소림이 말하기를 “‘僨’의 음은 ‘奮’이다.”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僨’은 엎어져 넘어짐”이라 했다. 【正義】 신이 한에 돌아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자서를 인용하여 거절한 것이다.
[五] 索隱痿,耳誰反。舊音耳睡反,於義為疏。張揖云「痿不能起」,哀帝紀云「帝即位痿痺」是也。
[五] 【索隱】 ‘痿’는 ‘耳’와 ‘誰’의 反이다. 옛 음은 ‘耳’와 ‘睡’의 反인데 뜻에서 조금 다르다. 장읍이 말하기를 “‘痿’는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했다. 「애제기」에 “‘帝即位痿痺(황제가 자리에 가는 것이 마비된 듯하였다.)’한 것이 이것이다.
信之入匈奴,與太子俱;及至穨當城,[一]生子,因名曰穨當。韓太子亦生子,命曰嬰。至孝文十四年,穨當及嬰率其眾降漢。漢封穨當為弓高侯,[二]嬰為襄城侯。[三]吳楚軍時,弓高侯功冠諸將。[四]傳子至孫,孫無子,失侯。嬰孫以不敬失侯。[五]穨當孽孫韓嫣,[六]貴幸,名富顯於當世。其弟說,再封,數稱將軍,卒為案道侯。子代,[七]歲餘坐法死。後歲餘,說孫曾[八]拜為龍額侯,續說後。[九]
신이 흉노에 들어갈 때 태자와 함께하였는데 퇴당성에 이르러 아들을 낳아 이름을 퇴당이라 하였다. 한 태자 또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영이라 했다. 효문제 14년에 이르러 퇴당과 영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한에 항복하였다. 한이 퇴당을 봉하여 궁고후라 하고, 영을 양성후라 하였다. 오, 초가 난을 일으켰을 때 궁고후의 공이 여러 장군의 으뜸이었다. 아들에 전해지고 손자에 이르렀으나 손자가 아들이 없어 후를 잃었다. 영의 후손은 공경하지 못하여 후를 잃었다. 퇴당의 얼손이 한언이 귀하고 사랑받아 명성과 부유함이 당시 세상에 드러났다. 그 동생 열은 두 번 봉해져 여러 번 장군이라 일컬어지다 마침내 안도후가 되었다. 아들 대는 한해 남짓 후에 법에 연좌되어 죽었다. 일년 정도 후 열의 손자가 용액후가 되었다가 열의 후손이 이었다.
[一] 集解漢書音義曰:「縣名。」韋昭曰:「在匈奴地。」
[一] 【集解】 『한서음의』에 “현 이름이다.”했고, 위소는 “흉노의 땅에 있다.”했다.
[二] 集解地理志河閒有弓高縣也。 索隱地理志屬河閒,漢書功臣表屬營陵。 正義滄州縣。
[二] 【集解】 『지리지』에 “하간에 궁고현이 있다.”했다. 【索隱】 『지리지』에 “하간에 속한다.”했고, 『한서』 「공신표」에 “영릉에 속한다.”했다. 【正義】 창주현디.
[三] 索隱案:服虔云「縣名。功臣表屬魏郡」。
[三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현 이름이다. 공신표에는 위군에 속한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謚曰壯。」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시호를 ‘壯’이라 했다.”
[五] 集解徐廣曰:「表云嬰子澤之,元朔四年不敬國除。」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표」에 ‘영의 아들 택지가 원삭 4년 불경죄를 저질러 나라를 없앴다.’ 한다.”했다.
[六] 集解漢書音義曰:「音『鄢陵』之『鄢』。」 索隱音偃,又一言反,又休延反,並通。
[六] 【集解】 『한서음의』에 “음은 ‘鄢陵’의 ‘鄢’이다.”했다. 【索隱】 음은 ‘偃’이고, 또 ‘一’과 ‘言’의 反이겨, 또 ‘休’와 ‘延’의 反이다 하니 또한 통한다.
[七] 集解徐廣曰:「名長君。」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이름은 장군이다.”했다.
[八] 集解徐廣曰:「長君之子也。」 索隱徐廣曰「長君之子」。案博物志,字季君也。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장군의 아들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장군의 아들이다.”했다. 『박물지』를 살펴보니 “자는 계군이다,” 했다.
[九] 索隱額,五格反。又作「雒」,音洛。龍額,縣名。 正義史記表、衛青傳及漢書表云韓說,元朔五年,從大將軍有功,封龍額侯,以酎金坐免。元封元年,擊東越有功,封桉道侯。征和二年,孫子曾復封為龍額侯。漢書功臣表云武後元年,說孫曾紹封龍額侯。漢表是也。
[九] 【索隱】 ‘額’은 ‘五’와 ‘格’의 反이다. 또 ‘雒(수리부엉이 락)’이라고 쓴다. 음은 ‘落’이다. ‘龍額’은 현의 이름이다. 【正義】 『사기』 「표」와 「위청전」과 『한서』 「표」에 “한설이 원삭 5년 대장군을 따라 공이 있어서 용액후를 봉하였는데 주금 때문에 연좌되어 후에 면직되었다. 원봉 1년 동월을 쳐서 공이 있어 안도후에 봉해졌다. 정화 2년 손자 증이 봉작을 회복하여 용액후가 되었다.” 했다. 『한서』 「공신표」에 “무후 1년 열의 손자 증이 이어 용액후가 되었다.”하니 「한 표」가 옳다.
盧綰者,豐人也,與高祖同里。盧綰親與高祖太上皇相愛,[一]及生男,高祖、盧綰同日生,里中持羊酒賀兩家。及高祖、盧綰壯,俱學書,又相愛也。里中嘉兩家親相愛,生子同日,壯又相愛,復賀兩家羊酒。高祖為布衣時,有吏事辟匿,盧綰常隨出入上下。及高祖初起沛,盧綰以客從,入漢中為將軍,常侍中。從東擊項籍,以太尉常從,出入臥內,衣被飲食賞賜,群臣莫敢望,雖蕭曹等,特以事見禮,至其親幸,莫及盧綰。綰封為長安侯。長安,故咸陽也。[二]
노관은 풍 땅 사람인데 고조와 같은 마을이다. 노관의 아버지와 고조의 태상황이 서로 아꼈는데 아들을 낳음에 이르러 고조와 노관이 같은 날 태어나니 마을 안에서 양과 술을 가지고 두 집을 축하하였다. 고조와 노관이 장성함에 이르러 함께 글을 배우고 또 서로 아꼈다. 마을 안에서 두 집의 아버지가 서로 아끼고 같은 날 아들을 낳음을 축하하였는데, 장성하여 또 서로 아끼니 다시 두 집에 양과 술로 축하하였다. 고조가 포의로 지낼 때 관리의 일로 피하여 숨어 있을 때 노관이 항상 따라 들고 나며 오르내렸다. 고조가 처음 패 땅에서 일어나자 노관이 객으로 따랐고, 한중에 들어가서는 장군이 되어 항상 안에서 모셨다. 동족부터 항적을 칠 때는 태위로서 항상 따랐고, 침실에 들고 나며, 옷을 입고 음식과 상을 내리는 것이 여러 신하들이 감히 바라지 못하였으니 비록 소하와 조찬 등일지라도 다만 일로서 예를 나타내고, 그 친하고 총애함에 이르러서는 노관에 미치지 못하였다. 노관을 장안후에 봉하였다. 장안은 옛 함양이다.
[一] 集解如淳曰:「親謂父也。」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親’은 아버지이다.” 했다.
[二] 正義秦咸陽在渭北,長安在渭南,蕭何起未央宮處也。
[二] 【正義】 진나라 때 함양은 위수 북쪽에 있었는데 장안은 위수 남쪽에 있다. 소하가 미앙궁 자리에 세웠다.
漢五年冬,以破項籍,迺使盧綰別將,與劉賈擊臨江王共尉[一],破之。七月還,從擊燕王臧荼,臧荼降。高祖已定天下,諸侯非劉氏而王者七人。欲王盧綰,為群臣觖望。[二]及虜臧荼,迺下詔諸將相列侯,擇群臣有功者以為燕王。群臣知上欲王盧綰,皆言曰:「太尉長安侯盧綰常從平定天下,功最多,可王燕。」詔許之。漢五年八月,迺立虜綰為燕王。諸侯王得幸莫如燕王。
한 5년 겨울 항적을 깨트리고 이에 노관으로 하여금 별장이 되게 하고 유가와 함게 임강왕 공위를 쳐서 깨트렸다. 7월에 돌아와 (고조를)따라 연왕 장도를 치니 장도가 항복하였다. 고조가 이미 천하를 평정한 후 제후들 중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가 일곱 명이었다. 노관을 왕 노릇하게 하고자 하니 여러 신하들이 불만으로 원망하였다. 장도를 포로로 함에 이르자 이에 여러 장군과 재상, 제후에게 조칙을 내려 여러 신하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가려 연왕을 삼겠다고 했다. 여러 신하들이 황제가 노관을 왕 노릇하게 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모두 말하기를 “태위 장안후 노관이 항상 따르며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공이 가장 많아 연에서 왕 노릇 할 만합니다.” 했다. 조칙으로 허락하였다. 한 5년 8월 이에 노관을 세워 연왕을 삼았다. 제후 왕으로 총애를 얻은 것이 연왕 같음이 없었다.
[一] 集解李奇曰:「共敖子。」
[一] 【集解】 이기가 말하기를 “공오자”라 했다.
[二] 集解如淳曰:「觖音『決別』之『決』。望猶怨也。」瓚曰:「觖謂相觖而怨望也。」韋昭曰:「觖猶冀也。」 索隱服虔音決。觖望猶怨望也。又音企。韋昭音冀。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觖(서운해 할 결)’의 음은 ‘決別’의 ‘決’과 같다. ‘望’은 ‘怨(원망)’과 같다.” 찬에 말하기를 “‘觖’은 서로 서운해 하여 원망하는 것을 말한다.” 했다. 위소가 말하기를 “‘觖’은 ‘冀(바랄 기)’와 같다.” 했다. 【索隱】 복건은 “음이 ‘決’이다. ‘觖望’은 ‘怨望(원망함)’과 같다. 또 음은 ‘企(꾀할 기)’이다.” 했고, 위소는 음이 “‘冀’이다.” 했다.
漢十一年秋,陳豨反代地,高祖如邯鄲擊豨兵,燕王綰亦擊其東北。當是時,陳豨使王黃求救匈奴。燕王綰亦使其臣張勝於匈奴,言豨等軍破。張勝至胡,故燕王臧茶子衍出亡在胡,見張勝曰:「公所以重於燕者,以習胡事也。燕所以久存者,以諸侯數反,兵連不決也。今公為燕欲急滅豨等,豨等已盡,次亦至燕,公等亦且為虜矣。公何不令燕且緩陳豨而與胡和?事寬,得長王燕;即有漢急,可以安國。」張勝以為然,迺私令匈奴助豨等擊燕。燕王綰疑張勝與胡反,上書請族張勝。勝還,具道所以為者。燕王寤,迺詐論它人,脫勝家屬,使得為匈奴閒,而陰使范齊之陳豨所,欲令久亡,[一]連兵勿決。
한 11년 가을 진희가 대 땅에서 배반하니 고조가 한단에 가서 진희의 군대를 쳤는데 연왕 노관이 또한 그 동북쪽을 쳤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희가 왕황으로 하여금 흉노에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또한 그 신하 장승으로 하여금 흉노에서 진희 등의 군대를 깨트리도록 말하였다. 장승이 胡에 이르자 옛 연왕 도의 아들 연이 도망 나와 胡에 있다가 장승을 만나 말하기를 “공이 연에서 중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胡의 일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연이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제후가 여러 번 배반하여 군대가 연이어 결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이 연을 위하여 급히 진희들을 없애고자 하는데 진희 등이 다하면 다음은 또한 연에 이르러 공 등이 또한 포로가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하여 연으로 하여금 또한 진희를 공격하는 것을 늦추고, 胡와 화친하지 않습니까? 일을 느슨하게 하면 오래 동안 연에서 왕 노릇 할 수 있고, 곧 한이 급해짐이 있을 것이니 나라를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했다. 장승이 그렇다 여겨 이에 사사로이 흉노로 하여금 진희 등을 도와 연을 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장승과 胡가 배반하였음을 의심하여 글을 올려 장승을 멸족시킬 것을 청하였다. 장승이 돌아와 행한 까닭을(일의 경과를) 모두 말하였다. 연왕이 깨닫고 이에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논하고, 장승의 가속들은 벗어나게 하여 흉노의 첩자가 되게 하고 몰래 범제로 하여금 진희가 있는 곳으로 보내 오래도록 도망하고 군대를 연이어 결단함이 없게 하고자 하였다.
[一] 集解晉灼曰:「使陳豨久亡畔。」
[一]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진희로 하여금 오래 도망하여 배반하게 한 것ㅇ다.” 했다.
漢十二年,東擊黥布,豨常將兵居代,漢使樊噲擊斬豨。其裨將降,言燕王綰使范齊通計謀於豨所。高祖使使召盧綰,綰稱病。上又使辟陽侯審食其、御史大夫趙堯往迎燕王,因驗問左右。綰愈恐,閉匿,謂其幸臣曰:「非劉氏而王,獨我與長沙耳。往年春,漢族淮陰,夏,誅彭越,皆呂后計。今上病,屬任呂后。呂后婦人,專欲以事誅異姓王者及大功臣。」迺遂稱病不行。其左右皆亡匿。語頗泄,辟陽侯聞之,歸具報上,上益怒。又得匈奴降者,降者言張勝亡在匈奴,為燕使。於是上曰:「盧綰果反矣!」使樊噲擊燕。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侯伺,幸上病愈,自入謝。四月,高祖崩,盧綰遂將其眾亡入匈奴,匈奴以為東胡盧王。綰為蠻夷所侵奪,常思復歸。居歲餘,死胡中。高后時,盧綰妻子亡降漢,會高后病,不能見,舍燕邸,為欲置酒見之。高祖竟崩,不得見。盧綰妻亦病死。
한 12년 동쪽으로 경포를 칠 때 진희는 항상 대 땅에 있었는데 한이 번쾌로 하여금 진희를 쳐서 목을 베었다. 그 비장이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범제를 시켜 진희가 있는 곳에서 통하여 계책을 모의하였다는 것을 말하였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 노관을 불렀는데 노관이 병을 핑계 대었다. 황제가 피양후로 심식기와 어사대부 조요로 하여금 가서 연왕을 맞이하게 하고 좌우를 심문하게 하였다. 노관이 더욱 두려워하여 닫고 숨어 그 총애하는 신하에게 말하기를 “유씨가 아니면서 왕 노릇하는 것은 오직 나와 장사왕 뿐이다. 지난 해 봄에 한이 회음후를 멸족하였고, 여름에는 팽월을 죽였는데 모두 여후의 계책이었다. 지금 황제가 병중이어서 여후에게 부탁하고 맡겼다. 여후는 부인으로 오로지 異姓의 왕과 대공신을 죽이는 것을 일삼는다.” 했다. 이에 마침내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그 측근들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말한 것이 자못 누설되자 피양후가 그것을 듣고는 돌아가 갖추어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가 더욱 노하였다. 또 흉노의 항복한 자를 얻었는데 항복한 자가 장승이 도망하여 흉노에 있으면서 연의 사자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노관이 과연 배반하였구나!”하고는 번쾌로 하여금 연을 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이 그 궁인과 가속, 기병 수천을 모두 거느리고 장성 아래 머물면서 상황을 엿보았는데 요행이 황제이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들어가 사죄하려 했다. 4월에 고조가 죽으니 노관이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흉노에 들어가니 흉노가 동호로왕을 삼았다. 노관이 오랑캐에게 침탈 당하자 항상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다. 1년 정도를 머물다 胡 안에서 죽었다. 고후 때 노관의 처자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고후가 병듦을 만나 만날 수 없어 연의 저택에 머물게 하면서 술을 두고 만나고자 하였다. 고조가 마침내 죽으면서 만날 수 없었다. 노관의 처가 또한 병들어 죽었다.
孝景中六年,盧綰孫他之,[一]以東胡王降,[二]封為亞谷侯。[三]
효경제 6년 노관의 존자 타지가 동호왕으로 항복하므로 봉하여 아곡후로 삼았다.
[一] 正義他,徒何反。
[一] 【正義】 ‘他’는 ‘徒’와 ‘何’의 反이다.
[二] 集解如淳曰:「為東胡王來降也。漢紀東胡,烏丸也。」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동호왕이 와서 항복하였다. 「한기」의 동호는 오환이다.”했다.
[三] 集解徐廣曰:「亞,一作『惡』。」 正義漢表在河內。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亞’는 ‘惡’이라고도 쓴다.”했다. 【正義】 「한표」에 “하내에 있다.” 했다.
陳豨者,宛朐人也,[一]不知始所以得從。及高祖七年冬,韓王信反,入匈奴,上至平城還,迺封豨為列侯,[二]以趙相國將監趙、代邊兵,邊兵皆屬焉。
진희는 완구 당 사람이다. 처음 따를 수 있었던 까닭은 알지 못한다. 고조 7년 겨울에 이르러 한왕 신이 배반하자 흉노에 들어가니 황제가 평성에 이르렀다 돌아갔는데 이에 진희를 봉하여 열후로 삼아 조의 상국으로서 조와 대 땅, 변경의 군대를 거느리고 감독하게 하였는데 변경의 군대가 모두 여기 에 속하였다.
[一] 索隱地理志屬濟陰。下又云「梁人」,是褚先生之說異也。 正義宛朐,曹州縣也。太史公云「陳豨,梁人」。按:宛朐,六國時屬梁。
[一] 【索隱】 『지리지』에 “제음에 속한다. 아래서 또한 梁人이라.” 하였는데 이는 저선생의 말과 다르다. 【正義】 ‘완구’는 조주의 현이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진희는 양 땅 사람이다.”했다. 살펴보니 완구는 6국시대에 양나라에 속하였다.
[二] 集解徐廣曰:「功臣表曰陳豨以特將將卒五百人,前元年從起宛朐,至霸上,為侯,以游擊將軍別定代,已破臧荼,封豨為陽夏侯。」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공신표」에 ‘진희가 다만 장군과 병졸 500명을 거느리고 전원년 완구에서 일어나 패상에 이르러 후가 되었고, 유격장군이 되어 따로 대 땅을 평정하고 장도를 깨트렸기 때문에 진희를 봉하여 양하후라 하였다.
豨常告歸過趙,趙相周昌見豨賓客隨之者千餘乘,邯鄲官舍皆滿。豨所以待賓客布衣交,皆出客下。[一]豨還之代,周昌迺求入見。見上,具言豨賓客盛甚,擅兵於外數歲,恐有變。上乃令人覆案豨客居代者財物諸不法事,多連引豨。豨恐,陰令客通使王黃、曼丘臣所。[二]及高祖十年七月,太上皇崩,使人召豨,豨稱病甚。九月,遂與王黃等反,自立為代王,劫略趙、代。
진희가 평소 휴가 갈 때 조를 지나는데 조의 재상 주창이 진희를 보니 빈객으로 그를 따르는 자가 수레로 천여 대여서 한단의 관사가 모두 가득 찼다. 진희가 빈객을 대하는 것은 포의의 사귐으로 하여 모두 객의 아래로 나섰다. 진희가 대 땅으로 돌아가자 주창이 이에 뵙기를 구하였다. 황제를 뵙고는 진희의 빈객이 매우 성대하고 군대를 밖에서 마음대로 한 것이 여러 해여서 변란이 있을까 두렵다고 갖추어 말하였다. 황제가 이에 사람을 시켜 진희의 객으로 대에 머물고 있는 자로 재물과 여러 불법적인 일을 조사하니 많이 진희와 연관되어 있었다. 진희가 두려워하여 몰래 객으로 하여금 왕황과 만구신이 있는 곳과 통하게 하였다. 고조 10년 7월 태상황이 죽으므로 사람을 시켜 진희를 부르니 진희가 병이 심하다고 팡계 되었다. 9월에 마침내 왕황 등과 함께 배반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대 땅의 왕이 되고 조와 대 지역을 겁주며 공략하였다.
[一] 正義言屈己禮之,不用富貴自尊大。
[一] 【正義】 자기를 굽히고 예로 대하며, 부귀로 스스로를 존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二] 正義二人韓王信將。
[二] 【正義】 두 사람은 한왕 신의 장군이다.
上聞,迺赦趙、代吏人為豨所詿誤劫略者,皆赦之。上自往,至邯鄲,喜曰:「豨不南據漳水,北守邯鄲,知其無能為也。」趙相奏斬常山守、尉,曰:「常山二十五城,豨反,亡其二十城。」上問曰:「守、尉反乎?」對曰:「不反。」上曰:「是力不足也。」赦之,復以為常山守、尉。
황제가 듣고 이에 조와 대의 관리로 진희에게 속거나 협박을 받은 자들을 모두 용서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가서 한단에 이르러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진희가 남쪽으로 장수에 의지하여 북쪽으로 한단을 지키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겠다.” 했다. 조의 재상 이 상산의 守와 尉를 죽일 것을 아뢰고 말하기를 “상산의 25개 성 중에 진희가 배반하여 그 20개성을 잃었습니다.” 했다. 황제가 묻기를 “수와 위가 배반하였는가?”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이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하고는 용서하고 다시 상산의 수와 위를 삼았다.
上問周昌曰:「趙亦有壯士可令將者乎?」對曰:「有四人。」四人謁,上謾罵曰:「豎子能為將乎?」四人慚伏。上封之各千戶,以為將。左右諫曰:「從入蜀、漢,伐楚,功未遍行,今此何功而封?」上曰:「非若所知!陳豨反,邯鄲以北皆豨有,吾以羽檄徵天下兵,[一]未有至者,今唯獨邯鄲中兵耳。吾胡愛四千戶封四人,不以慰趙子弟!」皆曰:「善。」於是上曰:「陳豨將誰?」曰:「王黃、曼丘臣,皆故賈人。」上曰:「吾知之矣。」迺各以千金購黃、臣等。
황제가 주창에게 묻기를 “조에 또한 장사로 장군으로 삼을 만한 자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네 사람이 있습니다.” 했다. 네 사람이 뵈니 황제가 거짓으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더벅머리 아이들이 장군이 될 수 있겠는가?”하니 네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엎드렸다. 황제가 그들을 각각 천호에 봉하고 장군으로 삼았다. 측근들이 간하기를 “촉과 한에 (황제를) 따라 들어가고 초를 친 자도 고을 아직 두루 행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들이 무슨 공으로 봉합니까?”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진희가 배반하고 한단 이북을 모두 진희가 소유하여 내가 깃털 격문으로 천하의 군대를 징발하였는데 이르는 자가 있지 않은데 지금 오직 한단 안의 군대뿐이다. 내가 어찌 4천호로 네 사람을 봉하는 것을 아껴서 조의 자제들을 위로하지 않겠는가!”했다. 모두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했다.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진희의 장군은 누구인가?”하니 말하기를 “왕황, 만구신으로 모두 옛날에 장사하던 사람입니다.”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알았다.”하고는 이에 왕황과 만구신에 대해 각기 천금의 상금을 걸었다.
[一] 集解魏武帝奏事曰:「今邊有小警,輒露檄插羽,飛羽檄之意也。」駰案:推其言,則以鳥羽插檄書,謂之羽檄,取其急速若飛鳥也。
[一] 【集解】 「위무제주사」에 “지금 변경에 작은 경계가 있으면 문득 격문에 깃을 꼿아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급한 격문을 새처럼 날린다는 뜻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그 말을 미루어보면 곧 새의 깃을 격문에 꼿는 것은 그 급하고 빨리 해야 함이 마치 나는 새와 같음을 취한 것이다.” 했다.
十一年冬,漢兵擊斬陳豨將侯敞、王黃於曲逆下,[一]破豨將張春於聊城,[二]斬首萬餘。太尉勃入定太原、代地。十二月,上自擊東垣,東垣不下,卒罵上;東垣降,卒罵者斬之,不罵者黥之。更命東垣為真定。王黃、曼丘臣其麾下受購賞之,皆生得,以故陳豨軍遂敗。
11년 겨울 한의 군대가 진희의 장군 후창과 왕황을 곡역의 아래에서 쳐서 목을 베고 진희의 장군 장춘을 요성에서 깨트리고 만여 명을 목 베었다. 태위가 갑자기 태원과 대 땅에 들어가 안정시켰다. 12월 황제가 스스로 동원을 쳤으나 동원을 함락시키지 못하니 병졸이 황제를 욕하였는데 동원이 항복한 후 욕을 한 군졸은 목을 베고, 욕하지 않은 자는 黥刑에 처하였다. 동원을 바꾸어 진정으로 하라 명하였다. 왕황, 만구신의 휘하가 상금을 받으려 하여 모두 산채 잡았기 때문에 진희의 군대가 드디어 무너졌다.
[一] 正義定州北平縣東南十五里蒲陰故城是也。
[一] 【正義】 정주 북평현 동남쪽 15리의 포음고성이 이것이다.
[二] 正義博州縣。
[二] 【正義】 박주현이다.
上還至洛陽。上曰:「代居常山北,趙迺從山南有之,遠。」迺立子恆為代王,[一]都中都,[二]代、鴈門皆屬代。
황제가 돌아가 낙양에 이르렀다. 황제가 말하기를 “대는 상산 북쪽에 있고, 조는 산남을 따라 그것을 소유하였는데 멀다.” 하고는 이에 아들 항을 세워 대왕이라 하고, 중랑에 도읍하였다. 대와 안문이 모두 대에 속한다.
[一] 集解徐廣曰:「十一年正月。」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11년 정월이다.” 했다.
[二] 正義中都故城在汾州平遙縣西南十二里。
[二] 【正義】 중도 옛 성은 분주 평요현 서남쪽 12리에 있다.
高祖十二年冬,樊噲軍卒追斬豨於靈丘。[一]
고조 12년 겨울 번쾌의 군대가 추격하여 영구에서 진희를 목베었다.
[一] 正義蔚州是。
[一] 【正義】 울주가 이것이다.
太史公曰:韓信、盧綰非素積德累善之世,徼一時權變,以詐力成功,遭漢初定,故得列地,南面稱孤。內見疑彊大,外倚蠻貊以為援,是以日疏自危,事窮智困,卒赴匈奴,豈不哀哉!陳豨,梁人,其少時數稱慕魏公子;及將軍守邊,招致賓客而下士,名聲過實。周昌疑之,疵瑕頗起,懼禍及身,邪人進說,遂陷無道。於戲悲夫!夫計之生孰成敗於人也深矣!
태사공이 말하기를 “한신과 노관은 평소에 덕을 쌓고 선을 쌓은 세대가 아니라 한 때의 임기응변으로 구하고, 거짓으로 힘써 공을 이루고, 한이 처음 평정함을 만났기 때문에 땅을 나누어 얻어 남쪽을 향하여 ‘孤’를 일컬을 수 있었다. 안으로는 강하고 커짐을 의심받았고, 밖으로는 오랑캐에 기대어 도움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날로 멀어져 스스로 위태롭게 되어 일은 막히고 지혜는 곤궁해져 마침내 흉노에게 달려갔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진희는 양 땅 사람으로 어렸을 때는 여러 번 위 공자를 사모한다. 잃컬었고, 장군이 되어 변경을 지킴에 이르러서는 빈객을 부르고 선비에게 낮추었으나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쳤다. 주창이 그것을 의심하니 흠결이 자못 일어나 재앙이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간사한 사람이 올린 말로 마침내 무도함에 빠졌다. 아 슬프다! 저 계책의 설익음에 따라 사람이 이루고 무너짐이 이토록 깊구나!” 했다.
【索隱述贊】 韓襄遺孽,始從漢中。剖符南面,徙邑北通。穨當歸國,龍雒有功。盧綰親愛,群臣莫同。舊燕是王,東胡計窮。
【索隱述贊】 韓 나라 양왕이 얼손을 남겨 비로소 한중을 따랐다. 부절을 가르고 남쪽을 향하며, 읍을 옮기고 북쪽으로 통하였다. 퇴당이 나라에 돌아와 용, 낙에 공이 있다. 노관은 임금이 아껴 여러 신하와 같지 않았다. 옛 연에서 왕 노릇하고, 동호의 계책은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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