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九十八
傅靳蒯成列傳第三十八
陽陵侯[一]傅寬,以魏五大夫騎將從,為舍人,起橫陽。[二]從攻安陽、[三]杠里,擊趙賁軍於開封,及擊楊熊曲遇、[四]陽武,[五]斬首十二級,賜爵卿。從至霸上。沛公立為漢王,漢王賜寬封號共德君。[六]從入漢中,遷為右騎將。從定三秦,賜食邑雕陰。[七]從擊項籍,待懷,[八]賜爵通德侯。從擊項冠、周蘭、龍且,所將卒斬騎將一人敖下,[九]益食邑。
양릉후 부관은 위의 오대부의 기병 장군을 따라 사인이 되고 황양에서 일어났다. 패공을 따라가 한양, 강리를 공격하고 조비의 군대를 개봉에서 치고, 양웅을 곡우, 양무에서 쳐서 머리 12개를 베었으므로 경의 작을 내렸다. 패공을 따라 패상에 이르렀다. 패공이 서서 한왕이 되었는데 한왕이 관의 封號 공덕군을 내렸다. 한왕을 따라가서 한중에 들어가니 옮겨서 우기장이 되었다. 한왕을 따라가 삼진을 평정하고, 조음을 식읍으로 내렸다. 한왕을 따라가 항적을 치고 회에서 기다려 통덕후의 작을 내렸다. 한왕을 따라가 항관, 주란, 용저를 치고 거느린 군사가 말 탄 장군 1명을 오창 아래서 베어 식읍을 더하였다.
[一] 集解地理志云馮翊陽陵縣。
[一] 【集解】 『지리지』에 “풍익은 양릉현이다.” 했다.
[二] 索隱按:橫陽,邑名,在韓。韓公子成初封橫陽君,張良立為韓王也。正義括地志云:「故橫城在宋州宋城縣西南三十里,按蓋橫陽也。」
[二] 【索隱】 살펴보니 ‘횡양’은 읍명으로 한에 있다. 한 공자 성이 처음 횡양군에 봉해지고, 장량이 세워 한왕이 되었다. 【正義】 『괄지지』에 “옛 횡성은 송주 송성현 서남족 30리에 있는데 살펴보면 대개 횡양이다.
[三] 正義後魏地形志云:「己氏有安陽城,隋改己氏為楚丘。」今宋州楚丘縣西十里安陽故城是也。
[三] 【正義】 『후위지형지』에 “기씨가 안양성을 소유하였는데 수가 기씨를 고쳐 초구라 했다.” 하는데 지금의 송주 초구현 서쪽 10리 안양 옛 성이 이것이다.
[四] 正義曲,丘羽反。遇,牛恭反。司馬彪郡國志云「中牟有曲遇聚」。按:鄭州中牟縣也。
[四] 【正義】 ‘曲’은 ‘丘’와 ‘羽’의 反이다. ‘遇’는 ‘牛’와 ‘恭’의 反이다. 사마표의 『군국지』에 “중모는 곡우취에 있다.”했다. 살펴보니 정주 중모현이다.
[五] 正義鄭州縣。
[五] 【正義】 정주현이다.
[六] 索隱謂美號耳,非地邑。共音恭。
[六] 【索隱】 이름을 아름답게 했을 뿐으로 당과 읍이 아니다. ‘共’의 음은 ‘恭’이다.
[七] 集解徐廣曰:「屬上郡。」 索隱案:孟康、徐廣云縣名,屬上郡。正義鄜州洛交縣三十里雕陰故城是也。
[七]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상군에 속한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맹강은 서광이 현 이름으로 상군에 속한다. 했다. 【正義】 부주 낙교현 30리의 조음 옛 성이 이것이다.
[八] 集解服虔曰:「待高帝於懷。」 索隱按:服虔云「待高祖於懷縣」。小顏案地理志,懷屬河內,今懷州也。
[八]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회에서 고제를 기다린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복건이 “회현에서 고제를 기다린 것이다.” 했다. 소안이 『지리지』를 살펴보니 회현은 하내에 속하는데 지금의 회주이다.
[九] 集解徐廣曰:「敖倉之下。」
[九]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오창의 아래이다.” 했다.
屬淮陰,[一]擊破齊歷下軍,擊田解。屬相國參,殘博,[二]益食邑。因定齊地,剖符世世勿絕,封為陽陵侯,二千六百戶,除前所食。為齊右丞相,備齊。[三]五歲為齊相國。[四]
회음후 한신에게 속하여 제의 역하군을 쳐서 깨트리고 전해를 쳤다. 상국 조참과 잔박에 속하고 식읍을 더하였다. 제의 땅을 평정한 이유로 부절을 쪼개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고, 양릉후에 봉하여, 식읍 2천6백호로 하고 앞에 받은 식읍은 모두 없앴다. 제의 우승상이 되어 제를 대비하였다. 5년에 제의 상국이 되었다.
[一] 索隱張晏云:「信時為相國,云『淮陰』者,終言之也。」
[一] 【索隱】 장안이 말하기를 “한신 때 상국이 되었는데 ‘회음’이라 한 것을 말을 마친 것이다.
[二] 索隱博,太山縣也。顧祕監云:「屬曹參,以殘破博縣也。」
[二] 【索隱】 ‘博’은 태산현이다. 고비감이 말하기를 “조참에게 속하여 박현을 전멸시켰다.
[三] 集解張晏曰:「時田橫未降,故設屯備。」 正義按:為齊王韓信相。
[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이 때 전횡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둔하여 대비한 것이다.” 했다. 【正義】 살펴보니 제왕 한신을 위하여 재상이 된 것이다.
[四] 正義為齊悼惠王劉肥相五歲也。
[四] 【正義】 제 도혜왕 유비의 재상이 되니 5년이다.
四月,擊陳豨,屬太尉勃,以相國代丞相噲擊豨。一月,徙為代相國,將屯。[一]二歲,為代丞相,將屯。
4월 진희를 치고, 태위 주발에게 속하였는데 상국으로서 승상 번쾌를 대신하여 진희를 쳤다. 한 달 만에 옮겨서 대의 상국이 되어 주둔군을 거느렸다. 2년에 대의 승상이 되어 주둔군을 거느렸다.
[一] 集解如淳曰:「既為相國,有警則將卒而屯守也。」案:律謂勒兵而守曰屯。 索隱如淳云:「漢初諸王官屬如漢朝,故代有丞相。」案:孔文祥云「邊郡有屯兵,寬為代相國兼領屯兵,後因置將屯將軍也」。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상국이 되고 나서 경고함이 있으면 곧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하여 지켰다.” 했다. 살펴보니 律에 군대를 훈련시켜 지키는 것을 ‘屯’이라 한다. 【索隱】 여순이 말하기를 “한 초에 여러 왕의 관속은 한의 조정과 같았기 때문에 대에 승상이 있었다.” 했다. 살펴보니 공문상이 말하기를 “변경에는 둔병이 있었는데 부관이 대의 상국이 되고 겸하여 둔병을 거느렸다. 후에 인하여 주둔한 장군과 병졸을 거느렸다.” 했다.
孝惠五年卒,謚為景侯。子頃侯精立,二十四年卒。子共侯則立,十二年卒。子侯偃立,三十一年,坐與淮南王謀反,死,國除。
효혜제 5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후라 했다. 아들 경후 정을 세웠다. 24년에 죽었다. 아들 공후 칙을 세웠다. 12년에 죽었다. 아들 후 언을 세웠고, 32년에 회남왕의 모반에 연루되어 죽자 나라를 없앴다.
信武侯靳歙,[一]以中涓從,起宛朐。[二]攻濟陽。[三]破李由軍。擊秦軍亳南、開封東北,斬騎千人將一人,[四]首五十七級,捕虜七十三人,賜爵封號臨平君。又戰藍田北,斬車司馬二人,[五]騎長一人,[六]首二十八級,捕虜五十七人。至霸上。沛公立為漢王,賜歙爵建武侯,遷為騎都尉。
신무후 근흡은 중연으로 패공을 따라 완구에서 일어나 제양을 공격하고, 이유늬 군대를 깨트렸다. 진나라 군대를 박 남쪽과 개봉 동북쪽에서 쳐서 기병 천명, 장군 1명, 머리 57개를 베고, 포로 73명을 잡으니 작을 내리고 봉하여 임평군이라 했다. 또 남전 북쪽에서 거사마 2명, 기장 1명과 머리 28개를 베고, 포로 57명을 잡았다. 패상에 이르러 패공을 세워 한왕이 되자 근흡에게 작을 내려 건무후라 하고, 옮겨 기도위를 삼았다.
[一] 索隱歙音「翕然」之「翕」。
[一] 【索隱】 ‘歙’의 음은 ‘歙然’의 ‘翕’이다.
[二] 正義上於元反,下求俱反。曹州縣也。
[二] 【正義】 위는 ‘於’와 ‘元의’ 反이고, 아래는 ‘求’와 ‘俱’의 反이다. 조주현이다.
[三] 正義曹州宛朐縣西南三十五里濟陽故城。
[三] 【正義】 조주 완구현 서남쪽 35리 제양 옛 성이다.
[四] 集解徐廣曰:「將,一作『候』。」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將’은 한편으로 ‘候’라 쓰기도 한다.” 했다.
[五] 集解張晏曰:「主官車。」
[五]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관의 수레를 주관한다.” 했다.
[六] 集解張晏曰:「騎之長。」
[六]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기병의 우두머리이다.” 했다.
從定三秦。別西擊章平軍於隴西,破之,定隴西六縣,所將卒斬車司馬、候各四人,騎長十二人。從東擊楚,至彭城。漢軍敗還,保雍丘,去擊反者王武等。略梁地,別將擊邢說軍[一]菑南,[二]破之,身得說都尉二人,司馬、候十二人,降吏卒四千一百八十人。破楚軍滎陽東。三年,賜食邑四千二百戶。
한왕을 따라 삼진을 평정하였다. 따로 농서에서 평장군을 쳐서 깨트려 농서 6현을 평정하며, 거느린 군대가 거사마, 후 각각 4명, 기장 12명을 베었다. 한왕을 따라 동쪽으로 초를 쳐서 팽성에 이르렀다. 한의 군대가 패하여 돌아와 옹구를 지키고, 가서 배반한 자인 왕무 등을 쳤다. 양 땅을 빼앗고 따로 군대를 거느리고 형열의 군대를 치 남쪽에서 쳐서 깨트리며, 자신은 도위 2명, 사마, 후 12명을 얻고 항복한 관리와 군대가 4천백팔십명 이었다. 초의 군대를 형양의 동쪽에서 깨트렸다. 3년에 식읍 4천2백호를 내렸다.
[一] 集解張晏曰:「特起兵者也。說音悅。」 索隱邢,姓。說,名,音悅。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특별히 군대를 일으킨 자이다. ‘說’의 음은 ‘悅’이다.” 했다. 【索隱】 ‘邢’은 성이고, ‘說’은 이름인데 음은 ‘悅’이다.
[二] 集解徐廣曰:「今曰考城。」 索隱上音災。今為考城,屬濟陰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지금 고성이라 한다.” 했다. 【索隱】 위의 음은 ‘災’인데 지금은 고성이라 한다. 제음에 속한다.
別之河內,擊趙將賁郝軍[一]朝歌,破之,所將卒得騎將二人,車馬二百五十匹。從攻安陽以東,至棘蒲,下七縣。別攻破趙軍,得其將司馬二人,候四人,降吏卒二千四百人。從攻下邯鄲。別下平陽,[二]身斬守相,所將卒斬兵守、郡守各一人,[三]降鄴。從攻朝歌、邯鄲,及別擊破趙軍,降邯鄲郡六縣。[四]還軍敖倉,破項籍軍成皋南,擊絕楚饟道,起滎陽至襄邑。破項冠軍魯下。[五]略地東至繒、郯、下邳,[六]南至蘄、竹邑。[七]擊項悍濟陽下。還擊項籍陳下,破之。別定江陵,降江陵柱國、大司馬以下八人,身得江陵王,[八]生致之雒陽,因定南郡。從至陳,取楚王信,剖符世世勿絕,定食四千六百戶,號信武侯。
따로 하내에 가서 조의 장군 비학의 군대를 조가에서 쳐서 깨트리고 거느린 군대가 기장 2명, 거마 250필을 얻었다. 한왕을 따라 안양 동쪽을 공격하여 극포에 이르러 7개현을 함락시켰다. 따로 조의 군댈르 공격하여 깨트리고 그 장군과 사마 2명, 후 4명을 얻고, 항복하 관리와 군사가 2천4백명이었다. 한왕을 따라 한단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따로 평양을 함락시키고, 자신은 수상을 베고, 거느린 군사가 수와 군수 각 1명을 베고, 업을 항복시켰다. 한왕을 따라 조가, 한단을 공격하고 따로 조 군대를 쳐서 깨트려 한단군 6개현을 항복시켰다. 군대를 거느리고 오창에 돌아와 항적의 군대를 성고의 남쪽에서 깨트리고 초의 군량 수송로를 쳐서 끊었는데 형양에서 일어나 양읍에 이르렀다. 항관의 군대를 노하에서 깨트렸다. 땅을 빼앗으며 증, 담, 하비에 이르고, 남쪽으로 기, 죽읍에 이르렀다. 항한을 제양 아래서 쳤다. 돌아와 항적을 진 아래서 쳐서 깨트렸다. 따로 강릉을 평정하고 강릉주국과 대사마 이 8명을 항복시키고, 자신은 강릉왕을 얻어 산채로 낙양에 이르게 함으로 인하여 남군을 평정하였다. 한 왕을 따라 진에 이르러 초왕 한신을 취하니 부절을 조개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고, 식읍 4천6백호를 정하고, 신무후라 했다.
[一] 集解上音肥,下音釋。 索隱漢書作「趙賁軍」。案:此在河北,非曹參、樊噲之所擊也。
[一] 【集解】 위의 음은 ‘肥’이고, 아래의 음은 ‘釋’이다. 【索隱】 『한서』에는 “趙賁軍”이라 썼다. 살펴보니 이는 하북에 있으니 조참, 번쾌가 공격한 것이 아니다.
[二] 集解徐廣曰:「鄴有平陽城。」 正義括地志云:「平陽故城在相州臨漳縣西二十五里。」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鄴’은 평양성에 있다.”했다. 【正義】 『괄지지』에 “평양 옛 성은 상주 임장현 서족 25리에 있다.” 했다.
[三] 集解孟康曰:「將兵郡守。」
[三] 【集解】 맹강이 말하기를 “군대를 거느리고 군을 지켰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邯鄲,高帝改曰趙國。」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단은 고제가 고쳐서 ‘조국’이라 했다.”
[五] 正義魯城之下,今兗州曲阜縣也。
[五] 【正義】 노성의 아래로 지금의 연주 곡부현이다.
[六] 索隱案地理志,繒屬東海。正義今繒城在沂州丞縣。下邳,泗水縣。郯縣屬海州。
[六] 【索隱】 살펴보니 『지리지』에 “‘증’은 동해에 속한다.” 했다. 【正義】 지금의 증성은 기주 승현에 있다. ‘하비’는 사수현이다. 담현은 해주에 속한다.
[七] 索隱蘄,竹,二邑名。上音機。竹即竹邑。
[七] 【索隱】 ‘기’와 ‘죽’은 두 읍명이다. 위의 음은 ‘機’이다. ‘竹’은 곧 죽읍이다.
[八] 索隱案:孔文祥云「共敖子共尉」。
[八] 【索隱】 살펴보니 공문상이 말하기를 “공오의 아들 공위이다.” 했다.
以騎都尉從擊代,攻韓信平城下,還軍東垣。有功,遷為車騎將軍,并將梁、趙、齊、燕、楚車騎,別擊陳豨丞相敞,破之,[一]因降曲逆。從擊黥布有功,益封定食五千三百戶。凡斬首九十級,虜百三十二人;別破軍十四,降城五十九,定郡、國各一,縣二十三;得王、柱國各一人,二千石以下至五百石[二]三十九人。
기도위로서 한왕을 따라가 대를 치고, 한신을 평성의 아래서 공격하고 군대를 돌려 동원에 돌아왔다. 공이 있어 옮겨 거기장군이 되고, 아울러 양, 조, 제, 연, 초의 수레와 기병을 거느리고 따로 진희의 승상 창을 쳐서 깨트리고 인하여 곡역을 항복시켰다. 한왕을 따라가 경포를 쳐서 공이 있어 식읍 5천3백호를 더하여 봉해졌다. 무릇 머리 90개를 베고, 132명을 포로로 하고, 다로 14개 군대를 깨트리고 59개 성을 항복시켜 군, 국 각각 1개, 현 23개를 평정하고 왕, 주국 각각 1명을 얻고, 2천석이하 오백석의 녹에 해당하는 관리 39명을 얻었다.
[一] 索隱小顏云侯敞。
[一] 【索隱】 소안이 이르기를 “후창”이라 했다.
[二] 集解徐廣曰:「一本無此五字。」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 어 떤 본에는 이 다섯 글자가 없다.” 했다.
高后五年,歙卒,謚為肅侯。子亭代侯。二十一年,坐事國人過律,[一]孝文後三年,奪侯,國除。
고후 5년 근흡이 죽으니 시호를 숙후라 했다. 아들 정이 후를 대신하였다. 21년에 국인을 부리는 일이 율을 어긴 것이 많은 죄에 연좌되어 효문제 뒤 3년에 후를 빼앗기고 나라가 없어졌다.
[一] 索隱案:劉氏云「事,役使也。謂使人違律數多也。」
[一] 【索隱】 살펴보니 유씨가 말하기를 “‘事’는 부림이다. 사람을 부림에 율을 어김이 많았음을 말한다.”했다.
蒯成侯緤者,[一]沛人也,姓周氏。常為高祖參乘,以舍人從起沛。至霸上,西入蜀、漢,還定三秦,食邑池陽。[二]東絕甬道,從出度平陰,遇淮陰侯兵襄國,軍乍利乍不利,終無離上心。[三]以緤為信武侯,食邑三千三百戶。高祖十二年,以緤為蒯成侯,除前所食邑。
괴성후 설은 패 사람이니 성은 주씨이다. 평소 고조를 위해 참승이 되어 사인으로서 패공을 따라 패에서 일어났다. 패상에 이르고, 서쪽으로 촉, 한중에 들어가고 돌아와 삼진을 평정하고 지양을 식읍으로 했다. 동쪽으로 용도를 끊고, 패공을 따라 도평읍을 나와 회음후의 군대를 양국에서 만났는데 군대가 잠시는 이롭고, 잠시는 이롭지 않아 끝내 임금의 마음을 떠날 수 없었다. 주설을 신무후라 하고 3천3백호를 식읍으로 하였다. 고조 12년 주설을 괴성후라 하고 앞에 받았던 식읍을 없앴다.
[一] 集解服虔曰:「蒯音『菅蒯』之『蒯』。」 索隱姓周;名緤,音薛。蒯者,鄉名。案:三蒼云「蒯鄉在城父縣,音裴」。漢書作「蒯」,從崩,從邑。今書本並作「蒯」,音「菅蒯」之「蒯」,非也。蘇林音簿催反。晉灼案功臣表,屬長沙。崔浩音簿壞反。楚漢春秋作「憑成侯」,則裴憑聲相近,此得其實也。正義括地志云:「蒯亭在河南西十四里苑中。輿地志云蒯成縣故陳倉縣之故鄉聚名也,周所封也。晉武帝咸寧四年,分陳倉立蒯成縣,屬始平郡也。」
[一]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蒯’의 음은 ‘菅蒯’의 ‘蒯’이다.” 했다. 【索隱】 성은 ‘周’이고 이름은 ‘緤’인데 음은 ‘薛’이다. ‘蒯’는 향의 이름이다. 살펴보니 삼창이 말하기를 “괴향은 성배현에 있는데 음은 ‘裵’이다.” 했다. 『한서』에 ‘蒯’라 썼으니 ‘終崩’, ‘從邑’이다. 지금 글은 본래 모두 ‘蒯’라 썼는데, 음을 ‘菅蒯’의 ‘蒯’라 하니 아니다. 소림은 음을 “‘簿’, 와 ‘催’의 反이다.” 했고, 진작은 「공신표」를 살펴 “장사에 속한다.” 했고, 최호는 “음은 ‘簿’와 ‘壞’의 反이다.” 했다. 『초한춘추』에 ‘풍성후’라 썼으니 곧 ‘裵’와 ‘馮’의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 하니 그 실제를 얻은 것이다. 【正義】 『괄지지』에 “‘괴정’은 하남 서쪽 14리 원 안에 있다.” 했다. 『여지지』에 “괴성현은 옛 진창현의 옛 향취의 이름인데 주설이 봉해진 곳이다. 진 무제 함녕 4년 진창을 나누어 괴성현을 세웠는데 시평군에 속한다.” 했다.
[二] 正義雍州涇陽縣西北三里池陽故城是也。
[二] 【正義】 옹주 경양현 서북쪽 3리 지양 옛 성이 이것이다.
[三] 集解徐廣曰:「蒯成侯,表云遇淮陰侯軍襄國,楚漢約分鴻溝,以緤為信武侯。戰不利,不敢離上。」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괴성후는 「표」에 ‘회음후의 군대를 양국에서 만나고, 초와 한이 홍구를 나누기로 약속하고 주설을 신무후로 하였다. 싸워서 이롭지 않아도 감히 임금을 떠나지 못한다.’ 했다.
上欲自擊陳豨,蒯成侯泣曰:「始秦攻破天下,未嘗自行。今上常自行,是為無人可使者乎?」上以為「愛我」,賜入殿門不趨,殺人不死。
고조가 스스로 진희를 치고자 하니 괴성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처음 진나라 천하를 공격하여 깨트릴 때도 일찍이 스스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환제께서 항상 스스로 가시니 이는 사람으로 부릴만한 자가 없어서 입니까?” 했다. 한왕이 “나를 사랑한다.” 하고는 전 문에 들어갈 때도 종종걸음하지 않고, 사람을 죽여도 죽이지 않음을 내였다.
至孝文五年,緤以壽終,謚為貞侯。[一]子昌代侯,有罪,國除。至孝景中二年,封紲子居代侯。[二]至元鼎三年,居為太常,有罪,國除。
효문제 5년 주설이 죽자 시호를 정후라 했다. 아들 창이 후를 대신하였으나 죄를 지어 나라가 없어졌다. 효경제 2년에 이르러 주설의 아들 거를 봉하여 후를 대신하였다. 원정 3년에 거를 태상으로 삼았으나 죄를 지어 나라를 없앴다.
[一] 正義謚為尊侯。一作「卓」。
[一] 【正義】 시호는 후를 높임이다. 한편으로 ‘卓’으로도 쓴다.
[二] 集解徐廣曰:「表云『孝景中元年,封紲子應為鄲侯,謚康。中二年,侯居立』。沛郡有鄆縣。鄆,一作『鄲』。」索隱鄲,蘇林音多,屬陳國。地理志云沛郡有鄲縣。案:此文云「子居」,表云「子應」,不同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표」에 ‘효경중 1년 주설의 아들 을을 봉하여 단후로 삼고 시호를 강이라 했다.’” 효경중 2년 거를 세워 후로 했다. 패군에 운현이 있다. ‘鄆’은 한편으로 ‘鄲’이라 쓴다. 【索隱】 ‘鄲’은 소림은 “음이 ‘多 ’라 하고, 진국에 속한다.” 했다. 『지리지』에 “패군에 단현이 있다.” 했다. 살펴보니 이 글에 ‘아들 거’라 했고, 「표」에 ‘아들 응’이라 하여 같지 않다.
太史公曰:陽陵侯傅寬、信武侯靳歙皆高爵,[一]從高祖起山東,攻項籍,誅殺名將,破軍降城以十數,未嘗困辱,此亦天授也。蒯成侯周緤操心堅正,[二]身不見疑,上欲有所之,未嘗不垂涕,此有傷心者[三]然,可謂篤厚君子矣。
태사공이 말하기를 “양릉후 부관, 신무후 근흡은 모두 높은 작인데 고조를 따라 산동에서 일어나 항적을 공격하고 이름 있는 장군을 죽이며, 군대를 깨트리고 10여개의 성을 항복시키면서도 일찍이 곤욕을 당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하늘이 준 것이다. 괴성후 주설은 조심하고 굳게 바로잡아 자신은 의심받지 않았고, 황제가 가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마음에 안타깝게 여김이 있는 자가 그러하니 돈독하고 도타운 군자라 말할 만하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一無『高』字。又一本『皆從高祖』。」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 ‘高’자가 없다. 도 어떤 본에는 ‘모두 고조를 따랐다.” 했다.
[二] 索隱操音倉高反。
[二] 【索隱】 ‘操’의 음은 ‘倉’과 ‘高’의 反이다.
[三] 集解徐廣曰:「此,一作『比』。」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이는 한편으로 ‘比’라 쓴다.” 했다.
【索隱述贊】 陽陵、信武,結髮從漢。動協人謀,功實天贊。定齊破項,我軍常冠,蒯成委質,夷險不亂。主上稱忠,人臣扼腕。
【索隱述贊】 양릉, 신무가 머리를 묶고 한을 따랐다. 움직이고, 합하는 것은 사람이 도모하나 공을 이룸은 실로 하늘의 도움이다. 제를 평정하고 항적을 깨트리는데 우리 군대가 항상 앞에 하고 괴성이 몸을 바쳐 험함을 평탄하게 하여 어지럽히지 않았다. 임금은 충성을 일컳고, 인신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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