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一百一十一
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
大將軍衛青者,平陽人也。[一]其父鄭季,為吏,給事平陽侯家,與侯妾衛媼通,[二]生青。青同母兄衛長子,而姊衛子夫自平陽公主家得幸天子,[三]故冒姓為衛氏。字仲卿。長子更字長君。長君母號為衛媼。媼長女衛孺,[四]次女少兒,次女即子夫。後子夫男弟步、廣[五]皆冒衛氏。
대장군 위청은 평양 사람이다. 그 아버지 정계가 하급관리가 되어 평양후 가에 서 벼슬하다 평양후의 첩 위온과 사통하여 위청을 낳았다. 위청의 어머니가 같은 형은 위장자이고, 누이는 위자부인데 평양공주 집에 있다가 천자의 총애를 얻어 남의 성인 위씨라 했다. (위청의) 자는 중경이다. 장자는 자를 고쳐 장군이라 했다. 장군의 어미는 위온이라 불렸다. 위온의 장녀는 위유이고, 차녀는 소아이며, 다음의 딸이 곧 자부이다. 자부의 뒤로 남동생은 제보와 광이 모두 남의 성인 위씨라 했다.
[一] 正義漢書云「其父鄭季,河東平陽人,以縣吏給事平陽侯之家」也。
[一] 【正義】 『한서』에 “그 아비 정계는 하동 평양 사람인데 현리로서 평양후의 집에서 일을 보았다.” 했다.
[二] 索隱衛,姓也。媼,婦人老少通稱。漢書曰與主家僮衛媼通。案:既云家僮,故非老。或者媼是老稱,後追稱媼耳。又外戚傳云「薄姬父與魏王宗女魏媼通」,則亦魏是媼姓。而小顏云「衛者,舉其夫姓也」。然案此云「侯妾衛媼」,似更無別夫也。下云「同母兄衛長子及姊子夫皆冒衛姓」,又似有夫。其所冒之姓為父與母,皆未明也。
[二] 【索隱】 ‘衛’는 성이다. ‘媼’은 부인으로 늙은이, 젊은이의 통칭이다. 『한서』에 “주인 집 종인 위온과 사통하였다.” 했다. 살펴보니 이미 ‘家僮’이라 했으니 늙은이는 아니다. 어떤 사람은 “‘媼’은 늙은이를 일컬었는데 후에 점차 할머니를 일컬었을 뿐이다.” 했다. 또 「외척전」에 “박희의 아비와 위 왕실의 여자 위온이 사통하였다.” 하였으니 또한 ‘魏’는 ‘온’의 성이다. 소안이 이르길 “‘衛’는 그 지아비의 성을 든 것이다.” 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것을 살펴보니 ‘후첩 위온’이라 하니 다시 다른 지아비가 없었던 듯하고, 아래에서 ‘같은 어머니의 형인 위장자와 누이 자부가 모두 남의 성인 衛를 성으로 했다. 하니 또한 지아비가 있었던 듯하다. 그 남의 것을 빌린 바의 성으로 아비와 어미의 성으로 삼은 것은 모두 분명하지 않다.
[三] 集解徐廣曰:「曹參曾孫平陽夷侯,時尚武帝姊平陽公主,生子襄。」 索隱案:如淳云「本陽信長公主,為平陽侯所尚,故稱平陽公主」。按徐廣云「夷侯,曹參曾孫,名襄」。又按系家及功臣表「時」或作「疇」,漢書作「壽」,並文字殘缺,故不同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조참의 증손 평양이후가 그 때 무제의 누이 평양공주에게 장가들어 아들 양을 낳았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여순이 말하기를 “본래 양신장공주는 평양후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평양공주라 일컬어졌다.” 했다. 살펴보니 서광이 말하기를 “‘이후’는 조찬의 증손인데 이름은 양이다.” 했고, 또 가계와 공신표를 살펴보니 ‘時’는 혹은 ‘疇’라 썼는데 『한서』에는 모두 문자가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같지 않다.
[四] 索隱漢書云「君孺」。
[四] 【索隱】 『한서』에 “군유”라 썼다.
[五] 集解徐廣曰:「步,一作『少』。」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步’는 한편으로 ‘少’라 썼다.” 했다.
青為侯家人,少時歸其父,其父使牧羊。先母之子[一]皆奴畜之,不以為兄弟數。[二]青嘗從入至甘泉居室,[三]有一鉗徒[四]相青曰:「貴人也,官至封侯。」青笑曰:「人奴之生,得毋笞罵即足矣,安得封侯事乎!」
위청이 평양후의 家人이 되었다가 어릴 때 그 아비에게 돌아가니 그 아비가 양을 키우게 했다. 적처의 자식들이 모두 종으로 여기고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 위청이 일찍이 사람을 따라 들어가 감천에 이르러 거실에 있었는데 목에 칼을 쓴 한 죄수가 위청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귀인이다. 관직이 봉후에 이를 것이다.” 했다. 위청이 웃으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종으로 태어나 회초리와 욕이 없을 수 있다면 충분하니 어찌 봉후의 일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一] 集解服虔曰:「先母,適妻也。青之適母。」 索隱漢書作「民母」。服虔云「母,適妻也。青之適母」。顧氏云「鄭季本妻編於民戶之閒,故曰民母」。今本亦或作「民母」也。
[一]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선모’는 적처이고, 위청의 적모이다.” 했다. 【索隱】 『한서』에 “民母”라 썼다. 복건이 말하기를 “‘母’는 적처이다. 위청의 적모이다.” 했다. 고씨가 말하기를 “정계의 본처가 民戶의 사이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民母’한 것이다, 했다. 지금 본이 또한 혹 ‘民母’라 썼다.
[二] 索隱音去聲。
[二] 【索隱】 음은 거성이다.
[三] 正義按:居室,署名,武帝改曰保宮。灌夫繫居室是也。
[三] 【正義】 살펴보니 거실은 관청의 이름이었는데 무제가 고쳐서 ‘보궁’이라 했다. 관부가 거실에서 묶였다 한 것이 이것이다.
[四] 集解張晏曰:「甘泉中徒所居也。」
[四]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감천 안의 무리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했다.
青壯,為侯家騎,從平陽主。建元二年春,青姊子夫得入宮幸上。皇后,堂邑大長公主女也,[一]無子,妒。大長公主聞衛子夫幸,有身,妒之,乃使人捕青。青時給事建章,[二]未知名。大長公主執囚青,欲殺之。其友騎郎公孫敖與壯士往篡取之,[三]以故得不死。上聞,乃召青為建章監,侍中,及同母昆弟貴,賞賜數日閒累千金。孺為太僕公孫賀妻。少兒故與陳掌通,[四]上召貴掌。公孫敖由此益貴。子夫為夫人。青為大中大夫。
위청이 장성하여 평양후 집의 기병이 되어 평양공주를 따랐다. 건원 2년 봄 위청의 누이 자부가 천자의 총애를 받아 궁에 들어갔다. 황후는 당읍의 대장공주의 딸인데 자식이 없고, 투기하였다. 대장공주가 위자부가 총애를 받아 임신함을 듣고는 그것을 질투하여 이에 사람을 시켜 위청을 체포하게 하였다. 위청이 그 때 건장궁의 급사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대장공주가 위청을 잡아 가두고는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 벗인 기랑 공손오가 장사들과 함께 가서 빼앗아 취하였기 때문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천자가 듣고 이에 위청을 불러 건장감, 시중으로 삼고 어미를 같이하는 형제들을 귀하게 여기고 상으로 내린 것이 여러 달 사이에 천근이 쌓였다. 위유를 태복 공손하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위소아는 옛 날에 진장과 사통하였는데 천자가 불러 진장을 귀하게 여겼다. 공손오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귀하게 되었다. 위자부는 夫人이 되고, 위청은 대중대부가 되었다.
[一] 集解徐廣曰:「堂邑安侯陳嬰之孫夷侯午,尚景帝姊長公主,子季須。元鼎元年,季須坐姦自殺。」 正義文穎云:「陳皇后,武帝姑女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당읍 안후 진영의 손자인 이후 오는 경제의 누이 장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계수이다. 원정 1년 계수가 간통의 죄를 지어 자살하였다.” 했다. 【正義】 문영이 말하기를 “진황후는 무제 고모의 딸이다.” 했다.
[二] 索隱案:晉灼云「上林中宮名也」。
[二] 【索隱】 살펴보니 진작이 말하기를 “상림 안의 궁궐 이름이다.” 했다.
[三] 索隱篡猶劫也,奪也。
[三] 【索隱】 ‘簒’은 ‘劫(위협할 겁, 빼앗다.)’과 같다.
[四] 集解徐廣曰:「陳平曾孫,名掌也。」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진평의 증손으로 이름은 ‘장’이다.” 했다.
元光五年,青為車騎將軍,擊匈奴,出上谷;太僕公孫賀為輕車將軍,出雲中;大中大夫公孫敖為騎將軍,出代郡;衛尉李廣為驍騎將軍,出雁門:軍各萬騎。青至蘢城,斬首虜數百。騎將軍敖亡七千騎;衛尉李廣為虜所得,得脫歸:皆當斬,贖為庶人。賀亦無功。
원광 5년 위청이 거기장군이 되어 흉노를 치기위해 상곡을 나가고, 태복 공손하는 경거장군이 되어 운중을 나가고, 대중대부 공손오는 기장군이 되어 대군을 나가고, 위위 이광은 효기장군이 되어 안문을 나갔는데 군대가 각각 기병 만명 이었다. 위청이 용성에 이르러 수 백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잡았다. 기장군 공손오는 7천의 기병을 잃었고, 위위 이광은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돌아왔으니 모두 머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에 해당하나 재물로 속죄하여 서인이 되었다. 공손하 또한 공이 없었다.
元朔元年春,衛夫人有男,[一]立為皇后。其秋,青為車騎將軍,出雁門,三萬騎擊匈奴,斬首虜數千人。明年,匈奴入殺遼西太守,虜略漁陽二千餘人,敗韓將軍軍。漢令將軍李息擊之,出代;令車騎將軍青出雲中以西至高闕。[二]遂略河南地,至于隴西,捕首虜數千,畜數十萬,走白羊、樓煩王。遂以河南地為朔方郡。[三]以三千八百戶封青為長平侯。青校尉蘇建有功,以千一百戶封建為平陵侯。使建築朔方城。[四]青校尉張次公有功,封為岸頭侯。[五]天子曰:「匈奴逆天理,亂人倫,暴長虐老,以盜竊為務,行詐諸蠻夷,造謀藉兵,數為邊害,[六]故興師遣將,以征厥罪。詩不云乎,『薄伐玁狁,[七]至于太原』,『出車彭彭,城彼朔方』。[八]今車騎將軍青度西河[九]至高闕,獲首虜二千三百級,車輜畜產畢收為鹵,已封為列侯,遂西定河南地,按榆谿舊塞,[一0]絕梓領,梁北河,[一一]討蒲泥,破符離,[一二]斬輕銳之卒,捕伏聽者三千七十一級,[一三]執訊獲醜,[一四]驅馬牛羊百有餘萬,全甲兵而還,益封青三千戶。」其明年,匈奴入殺代郡太守友,[一五]入略鴈門千餘人。其明年,匈奴大入代、定襄、上郡,殺略漢數千人。
원삭 1년 봄 위부인이 아들을 낳자 세워 황후가 되었다. 그 해 가을 위청이 거기장군이 되어 안문을 나가 3만의 기병으로 흉노를 쳐서 수천 명을 목 베고, 포로로 잡았다. 다음 해 흉노가 들어와 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 땅의 2천여 명을 노략질하고, 한 장군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한이 장군 이식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치게 하여 대 땅을 나가게 하고, 거기장군 위청에게 명령하여 운중을 나가 서쪽으로 가게 하여 고궐에 이르렀다. 마침내 하남의 땅을 빼앗고 농서에 이르러 수천 명을 목 베거나 사로잡고, 가축 수십만을 얻었으며 백양과 누번왕을 달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하남의 땅을 삭방군으로 하였다. 봉록 3천8백호로서 위청을 봉하여 장평후로 삼았다. 위청의 교위 소건이 공이 있었으므로 봉록 1천1백호로 소건을 봉하여 평릉후로 삼았다. 소건으로 하여금 삭방성을 쌓게 하였다. 위청의 교위 장차공이 공이 있어 봉하여 안두후로 삼았다. 천자가 말하기를 “흉노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인륜을 어지럽히며 어른에게 사납게 하고 노인에게 포학하며 훔치는 것으로 힘씀을 삼는다. 여러 오랑캐에게 거짓을 행하며 도모함을 짓고 군대를 깔아 여러 번 변경에 해를 끼쳤다. 그러므로 군대를 일으키고 장군을 보내 그 죄를 정벌해야 한다. 『시경』에서 ‘험윤을 내쫓고 태원에 이르렀다.’, ‘저 수레 내기를 많이 하여 저 삭방에 성을 쌓았다.’ 하지 않았는가? 지금 거기장군 위청이 서하를 건너 고궐에 이르러 2천 3백명의 머리를 베거나 포로를 잡았고, 수레에 싫은 보급물자와 가축을 모두 거두어 빼앗으므로 이미 열후로 봉하였고, 마침내 서쪽으로 하남의 땅을 평정하고 유계의 옛 요새를 살피고 재령을 끊고 북하에 다리를 놓으며 포니를 치고 부이를 깨트리며 굳센 정예 군졸을 목 베어 죽이고, 숨어서 듣는 자(간첩)3천7십1명을 잡았으며, 잠은 추한 이를 심문하며, 말, 소, 양 100여만 마리를 몰고, 갑옷 입은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왔으니 위청에게 3천호의 봉록을 더한다.” 했다. 그 다음해 흉노가 들어와 대군 태수 공우를 죽였고, 안문에 들어와 천여 명을 약탈하였다. 그 다음해 흉노가 크게 대, 정양, 산군에 들어와 한의 수천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一] 索隱即衛太子據也。
[一] 【索隱】 곧 위 태자 거이다.
[二] 索隱按:山名也。小顏云「一曰塞名,在朔方之北」。
[二] 【索隱】 살펴보니 산 이름이다. 소안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요새으 ㅣ이름이다. 하는데 삭방에 있다.” 한다.
[三] 索隱按:謂北地郡之北,黃河之南。正義今夏州也。
[三] 【索隱】 살펴보니 북지군의 북쪽, 황하의 남쪽을 말한다. 【正義】 지금의 하주이다.
[四] 正義括地志云:「夏州朔方縣北什賁故城是。」按:蘇建築,什賁之號蓋出蕃語也。
[四] 【正義】 『괄지지』에 “하주 삭방현 북쪽 십분의 옛 성이 이것이다.” 했다. 살펴보니 소건이 쌓았는데 십분이란 이름은 대개 번어에서 나온 것이다.
[五] 索隱案:晉灼云「河東皮氏縣之亭名也」。正義服虔云:「鄉名也。」
[五] 【索隱】 살펴보니 진작이 말하기를 “하동 피씨현의 정자 이름이다.” 했다. 【正義】 복건이 말하기를 “향의 이름이다.” 했다.
[六] 集解張晏曰:「從蠻夷借兵鈔邊也。」
[六]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만이로부터 군대를 빌려 변경을 노략질 했다.” 했다.
[七] 索隱薄伐獫狁。此小雅六月詩,美宣王北伐也。薄伐者,言逐出之也。
[七] 【索隱】 험윤을 내쫓음이다. 이는 『시경』 소아 6월의 시이니 선왕의 북벌을 찬미한 것이다. ‘薄伐’은 축출을 말하는 것이다.
[八] 索隱小雅出車之詩也。
[八] 【索隱】 『시경』 소아 출거의 시이다.
[九] 正義即雲中郡之西河,今勝州東河也。
[九] 【正義】 운중군의 서하는 지금의 승주 동하이다.
[一0] 集解如淳曰:「案,行也。榆谿,舊塞名。」或曰按,尋也。索隱按榆谷舊塞。如淳云:「按,行也,尋也。榆谷,舊塞名也。」案:水經云「上郡之北有諸次水,東經榆林塞為榆谿」,是榆谷舊塞也。
[一0] 【集解】여순이 말하기를 “‘按’은 행함이다. ‘楡(느릅나무 유)谿(시내 계)’는 옛 요새 이름이다.” 어떤 이는 ‘按’을 ‘尋(찾을 심)’이라 했다. 【索隱】 살펴보니 유곡의 옛 요새이다. 여순이 말하기를 “按은 행함이고, 찾음인데 유곡의 옛 요새 이름이다.” 했다. 살펴보니 『수경』에 “상군의 북쪽에 재차수가 있는데 동쪽으로 유림의 요새를 지나는 것을 유계라 한다.” 했다. 이는 유곡의 옛 요새이다.
[一一] 集解如淳曰:「絕,度也。為北河作橋梁。」 正義括地志云:「梁北河在靈州界也。」
[一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絶’은 건넘이다. 북하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했다. 【正義】 『괄지지』에 “북하에 다리를 놓은 것은 영주경계에 있다.
[一二] 集解晉灼曰:「二王號。」 索隱晉灼云:「二王號。」崔浩云:「漠北塞名。」
[一二]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삼왕의 호이다.” 했다. 【索隱】 진작이 말하기를 “ 두 왕의 호이다.” 했고, 초호가 말하기를 “사막 북쪽 요새의 이름이다.” 했다.
[一三] 集解張晏曰:「伏於隱處,聽軍虛實。」
[一三]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숨는 곳에 엎드려 군대의 허실을 듣는 것이다.” 했다.
[一四] 正義訊,問也。醜,眾。言執其生口問之,知虜處,獲得眾類也。
[一四] 【正義】 ‘訊’은 물음이다. ‘醜’는 무리이다. 그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 물어서 오랑캐가 있는 곳을 알아 많은 무리를 잡았음을 말한 것이다.
[一五] 集解徐廣曰:「友者,太守名也。姓共也。」
[一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友’는 태수의 이름이다. 성은 공이다.” 했다.
其明年,元朔之五年春,漢令車騎將軍青將三萬騎,出高闕;衛尉蘇建為游擊將軍,左內史李沮[一]為彊弩將軍,太僕公孫賀為騎將軍,代相李蔡為輕車將軍,皆領屬車騎將軍,俱出朔方;大行李息、岸頭侯張次公為將軍,出右北平:咸擊匈奴。匈奴右賢王當衛青等兵,以為漢兵不能至此,飲醉。漢兵夜至,圍右賢王,右賢王驚,夜逃,獨與其愛妾一人壯騎數百馳,潰圍北去。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不及,得右賢裨王十餘人,[二]眾男女萬五千餘人,畜數千百萬,於是引兵而還。至塞,天子使使者持大將軍印,即軍中拜車騎將軍青為大將軍,諸將皆以兵屬大將軍,大將軍立號而歸。[三]天子曰:「大將軍青躬率戎士,師大捷,獲匈奴王十有餘人,益封青六千戶。」而封青子伉為宜春侯,[四]青子不疑為陰安侯,青子登為發干侯。青固謝曰:「臣幸得待罪行閒,賴陛下神靈,軍大捷,皆諸校尉力戰之功也。陛下幸已益封臣青。臣青子在襁褓中,[五]未有勤勞,上幸列地封為三侯,非臣待罪行閒所以勸士力戰之意也。伉等三人何敢受封!」天子曰:「我非忘諸校尉功也,今固且圖之。」乃詔御史曰:「護軍都尉公孫敖三從大將軍擊匈奴,常護軍,傅校獲王,[六]以千五百戶封敖為合騎侯。[七]都尉韓說從大將軍出窳渾,[八]至匈奴右賢王庭,為麾下搏戰獲王,[九]以千三百戶封說為龍額侯。騎將軍公孫賀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賀為南窌侯。[一0]輕車將軍李蔡再從大將軍獲王,以千六百戶封蔡為樂安侯。校尉李朔,校尉趙不虞,校尉公孫戎奴,各三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朔為涉軹侯,以千三百戶封不虞為隨成侯,以千三百戶封戎奴為從平侯。將軍李沮、李息及校尉豆如意有功,賜爵關內侯,食邑各三百戶。」其秋,匈奴入代,殺都尉朱英。
그 다음 해 원삭 5년 봄 한이 표기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고궐을 나가게 하고, 위위 소건은 유격장군으로 삼고, 좌내사 이저는 강노장군으로 삼고, 태복 공손하는 기장군으로 삼고, 대상 이채는 경거장군으로 삼아 모두 거기장군을 예속시켜 같이 삭방을 나가게 하고, 대행 이식과 안두후 장차공을 장군으로 삼아 우북평을 나가게 하여 모두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흉노의 우현왕이 위청 등의 군대를 막으면서 한의 군대가 이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 여겨 술을 마시고 취하였다. 한의 군대가 밤에 이르러 우현왕을 포위하니 우현왕이 놀라 밤에 도망하여 홀로 그 애첩 1명과 건장한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말을 달려 푸위를 무너뜨리고 북쪽으로 갔다. 한의 경기교위 곽성 등이 수백 리를 쫓아갔으나 미치지 못하고 우현비왕 10여 명과 남녀 무리 1만 5천여명, 가축 수천백만을 얻고는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요새에 이르자 천자가 사신을 시켜 대장군 인을 가지고 군대 안에 가서 거기장군 위청에게 벼슬을 주어 대장군을 삼고 여러 장군들이 모두 군대로 대장군에게 속하게 했다. 대장군의 호를 세우고 돌아왔다. 천자가 말하기를 “대장군 위청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군대가 싸움에서 크게 이겨서 흉노왕 10여 명을 잡았으니 위청의 봉록 6천호를 더한다.” 하고, 위청의 아들 항을 봉하여 의춘후로 삼고, 위청의 아들 불의를 음안후로 삼고, 위청의 아들 등을 발간후로 삼았다. 위청이 굳게 사양하며 말하기를 “요행히도 행군하는 사이에 직책을 맡아 폐하의 신령스러움에 의지하여 군대가 크게 승리를 하였는데 모두 여러 교위들이 힘써 싸운 공입니다. 폐하께서 다행히도 이미 신 위청에 봉함을 더하였습니다. 신 위청의 아들은 포대기 안에 있어 아직 부지런한 수고로움이 없는데도 천자께서 요행히도 열후와 당을 봉하여 3후로 삼으시니 신이 행군 중에 직책을 맡아 사졸들이 힘써 싸우기를 권하는 뜻이 아닙니다. 위항 등 세 사람이 어찌 감히 봉을 받을 수 있으리오!” 했다. 천자가 말하기를 “내가 여러 교위들의 공을 잊은 것이 아니다. 지금 진실로 또한 그것을 도모할 것이다.” 하고는 이에 어사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호군도위 공손오는 세 번이나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칠 때 항상 군대를 지키고, 교를 거느리고 왕을 잡았으니 봉록 천오백호로서 공손오를 봉하여 합기후로 삼는다.” 했다. 도위 한열은 대장군을 따라 유혼을 나와 흉노 우현왕 조정(본진)에 이르러 휘하와 치고받는 싸움을 하여 왕을 잡았으니 봉록 1천3백호로 한열을 봉하여 용액후로 삼는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왕을 잡았으니 1천 3백호로 공손하를 봉하여 남교후에 봉한다. 경거장군 이채는 두 번 대장군을 따라 왕을 잡았으니 봉록 1천6백호로 이채를 봉하여 낙안후로 삼는다. 교위 이삭, 교위 조불우, 교위 공손융노는 각각 3번 대장군을 따라 왕을 잡았으므로 봉록 1천 3백호로 이삭을 봉하여 섭지후로 삼고, 봉록 1천3백호로 조불우를 봉하여 수성후로 삼고, 봉록 1천 3백호로 공손융노를 봉하여 종평후로 삼는다. 장군 이저, 이식과 교위 두여의도 공이 있으니 관내후의 작과 각각 3백호의 식읍을 내린다. 했다. 그 해 가을 흉노가 대에 들어와 도위 주영을 죽였다.
[一] 集解文穎曰:「音俎。」
[一]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음은 ‘俎(도마 조)’이다.” 했다.
[二] 索隱裨王十人。賈逵云:「裨,益也。」小顏云:「裨王,小王也,若裨將然。音頻移反。」
[二] 【索隱】 【索隱】 비왕은 10명이다. 가규가 말하기를 “‘裨(도울 비)’는 더함이다.”했다. 소안이 말하기를 “‘裨王’은 ‘小王’인데 장군을 돕는 것과 같다.” 했다. 음은 ‘頻(자주 빈)’과 ‘移’의 反이다.“ 했다.
[三] 索隱案:謂立大將軍之號令而歸。
[三] 【索隱】 살펴보니 대장군의 號令을 세우고 돌아감을 말한 것이다.
[四] 正義伉音口浪反。
[四] 【正義】 ‘伉(짝 항, 굳세다.)’은 음이 ‘口’와 ‘浪’의 反이다.
[五] 正義襁長尺二寸,闊八寸,以約小兒於背。褓,小兒被也。
[五] 【正義】 ‘襁(포대기 강)’은 길이가 2촌이고, 넓이가 8촌인데 작은 아이를 등에 묶는 것이다. ‘褓(포대기 보)’는 작은 아이의 이불이다.
[六] 索隱顧祕監云:「傅,領也。五百人謂之校。」小顏云:「傅音附。言敖總護諸軍,每附部校,以致克捷而獲王也。」
[六] 【索隱】 고비감이 말하기를 “‘傅’는 ‘領’이다. 500명을 ‘校’라 한다.” 했다. 소안이 말하기를 “‘傅’의 음은 ‘附’이다. 공손오가 총괄하여 군대를 호위하여 매번 부교에 붙여서(부합하여) 이겨서 왕을 잡았음을 말한다.” 했다.
[七] 索隱案:非邑地,而以戰功為號。謂以軍合驃騎,故云「合騎」,若「冠軍」、「從驃」然也。
[七] 【索隱】 살펴보니 읍의 땅이 아니라 전쟁의 공으로 호를 삼았다. 군대가 표기에 부합하기 때문에 ‘合騎’라 하고, ‘冠軍’과 ‘從驃’같은 것도 그러하다.
[八] 集解徐廣曰:「窳渾在朔方,音庾。」 索隱音庾。服虔云「塞名」。徐廣云「在朔方」。漢書作「寘渾」,寘音田也。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유혼’은 삭방에 있는데 음은 ‘庾(곳집 유)’이다.” 했다. 【索隱】 음은 ‘庾’이다. 복건이 말하기를 “요새 이름이다.” 했다. 서광이 말하기를 “삭방에 있다.” 했다. 『한서』에 ‘寘渾’이라 썼는데 ‘寘’의 음은 ‘田’이다.
[九] 索隱搏音博。搏,擊也。小顏同。今史、漢本多作「傳」,傳猶轉也。
[九] 【索隱】 ‘搏(잡을 박)’의 음은 ‘博’인데 ‘搏’은 치는 것이다 소안도 같이 말했다. ‘금사’와 ‘한본’에는 ‘傳’이라 많이 썼는데 ‘傳’은 ‘轉(구를 전)’과 같다.
[一0] 集解徐廣曰:「窌宜作『奅』,音匹孝反。」 索隱徐音匹教反。韋昭云縣名。或作「窖」,音干校反。字林云「大」下「卯」與「穴」下「卯」並音匹孝反。
[一0]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窌’는 마땅히 ‘奅(돌 쇠뇌포)’라 써야 하며, 음은 ‘匹’과 ‘孝’의 反이다.” 했다. 【索隱】 서광은 음이 ‘匹’과 ‘敎’의 反이다. 위소가 말하기를 “현의 이름이다.” 했다. 혹은 ‘窖(움 교)’ 음은 ‘干’과 ‘校’의 反이다. 『자림』에 말하기를 “‘大’ 아래 ‘卯’와 ‘穴’아래 ‘卯’는 모두 음이 ‘匹’과 ‘孝’의 反이다.” 했다.
其明年春,大將軍青出定襄,合騎侯敖為中將軍,太僕賀為左將軍,翕侯趙信為前將軍,衛尉蘇建為右將軍,郎中令李廣為後將軍,右內史李沮為彊弩將軍,咸屬大將軍,斬首數千級而還。月餘,悉復出定襄擊匈奴,斬首虜萬餘人。右將軍建、前將軍信并軍三千餘騎,獨逢單于兵,與戰一日餘,漢兵且盡。前將軍故胡人,降為翕侯,見急,匈奴誘之,遂將其餘騎可八百,奔降單于。右將軍蘇建盡亡其軍,獨以身得亡去,自歸大將軍。大將軍問其罪正閎、[一]長史安、[二]議郎周霸等:[三]「建當云何?」霸曰:「自大將軍出,未嘗斬裨將。今建棄軍,可斬以明將軍之威。」閎、安曰:「不然。兵法『小敵之堅,大敵之禽也』。今建以數千當單于數萬,力戰一日餘,士盡,不敢有二心,自歸。自歸而斬之,是示後無反意也。不當斬。」大將軍曰:「青幸得以肺腑待罪行閒,不患無威,而霸說我以明威,甚失臣意。且使臣職雖當斬將,以臣之尊寵而不敢自擅專誅於境外,而具歸天子,天子自裁之,於是以見為人臣不敢專權,不亦可乎?」軍吏皆曰「善」。遂囚建詣行在所。[四]入塞罷兵。
그 다음해 봄에 대장군 위청이 정양을 나가면서 합기후 공손오를 중장군으로 산고, 태복 공손하를 좌장군으로 삼으며 흡기후 조신을 전장군으로 삼고, 위위 소건을 우장군으로 삼고, 낭중령 이광을 후장군으로 삼고, 우내사 이저를 강노장군으로 삼아 모두 대장군에게 예속시켜 수천 명을 목 베고 돌아왔다. 한 달 정도 지나 모두 다시 정양을 나가 흉노를 쳐서 만여 명을 목 베고 포로로 잡았다.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의 합한 군대 3천여기가 홀로 선우의 군대를 만나 하루 동안을 싸웠는데 한의 군대가 또한 힘이 다하였다. 전장군은 예 오랑캐 사람으로 항복하여 합후가 되었는데, 급함을 당하자 흉노가 그를 유인하자 마침내 그 나머지 기병 8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달아나 선우에게 항복하였다. 우장군 소건이 그 군대를 모두 잃고 홀로 자신만 도망하여 가서 스스로 대장군에게 돌아갔다. 대장군이 그 죄를 군정 굉, 장사 안, 의랑 주패 등에게 물었다. “소건의 죄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하니 주패가 말하기를 “대장군이 출정한 이래 일찍이 비장의 목을 베지 않았습니다. 지금 소건이 군대를 버렸으니 목을 베는 것으로써 장군의 위엄을 밝혀야 합니다.” 하니 광과 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 ‘작은 대적함이 견고하여도 큰 적에게 사로잡힌다.’ 하였습니다, 지금 소건이 수천 명으로서 선우의 수만 명을 감당하여 힘써 싸우기를 하루 동안 하였으니 군사들의 힘이 다하여도 감히 두 마음을 두지 않고 스스로 돌아왔습니다. 스스로 돌아왔음에도 목을 벤다면 이는 후에 돌아오지 말하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목을 베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장군이 말하기를 “내가 요행히도 황제와 친밀하여 행군 중에 직책을 맡아 위엄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았는데 주패가 나에게 위엄을 밝힐 것을 설득하니 신하된 자의 뜻을 잃음이 심한 것이다. 또한 가령 신하로 직책이 비록 장군을 목 베는 것이 마땅하다하나 신하로서 높이고 총애 받는 사람을 감히 스스로 국경 밖에서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 모두 천자에게 돌려서 천자가 결단하게 하는 것이 이에 다른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 감히 권세를 오로지 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또한 옳지 않겠는가?” 했다. 군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했다. 마침내 소건을 가두고 행재소에 나아갔다. 요새를 들어와 군대를 파하였다.
[一] 集解張晏曰:「正,軍正也。閎,名也。」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正’은 군정이다. ‘閎’은 이름이다.” 했다.
[二] 正義律,都軍官長史一人也。
[二] 【正義】 ‘律’에 都의 군관은 장사 1명이다.
[三] 集解徐廣曰:「儒生。」 索隱徐廣云儒生也。案:郊祀志議封禪有周霸,故知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유생이다.” 했다. 【索隱】 서광이 말하기를 “유생이다.” 했다. 살펴보니 「교사지」에 봉선을 의논하는데 주패가 있었기 때문에 안다.
[四] 集解蔡邕曰:「天子自謂所居曰『行在所』,言今雖在京師,行所至耳。巡狩天下,所奏事處皆為宮。在長安則曰奏長安宮,在泰山,則曰奉高宮,唯當時所在。」
[四] 【集解】 채옹이 말하기를 “천자는 스스로 거처하는 곳을 말할 때 ‘행재소’라 하는데 지금 비록 경사에 있지만 가서 이를 뿐임을 말한 것이다. 천하를 순수하고 있으면 일을 아뢰는 곳이 모두 궁이 된다. 장안에 있으면 곧 장안궁에서 아뢰고, 태산에 있으면 곧 봉고궁이라 하니 오직 당시에 있는 곳일 뿐이다.
是歲也,大將軍姊子霍去病[一]年十八,幸,為天子侍中。善騎射,再從大將軍,受詔與壯士,為剽姚[二]校尉,與輕勇騎八百直棄大軍數百里赴利,斬捕首虜過當。[三]於是天子曰:「剽姚校尉去病斬首虜二千二十八級,及相國、當戶,斬單于大父行[四]籍若侯產,[五]生捕季父羅姑比,[六]再冠軍,以千六百戶封去病為冠軍侯。上谷太守郝賢四從大將軍,捕斬首虜二千餘人,以千一百戶封賢為眾利侯。」是歲,失兩將軍軍,亡翕侯,軍功不多,故大將軍不益封。右將軍建至,天子不誅,赦其罪,贖為庶人。
이해는 대장군 누이의 아들 곽거병이 18세로 천자의 총애를 받아 천자 시중이 되었다. 말 타기와 활을 잘 쏘고, 두 번 대장군을 따랐으며 조칙으로 장사를 허여 받고 표요교위가 되어 가볍고 용맹한 기병 8백병과 함께 곧 바로 대군을 버리고 수백 리를 달려가 승리하여 오랑캐를 머리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의 수보다 많았다.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표요교위 곽거병이 오랑캐의 머리를 벤 것이 2천2십8급이었는데 상국과 당호가 포함되었고, 선우의 조부 항렬인 적약후 산을 목 베었으며, 삼촌인 나고비를 생포하고 두 번 승리를 이끌었으므로 1천일백호로서 곽거병을 봉하여 관군후로 삼는다. 상곡태수학현은 네 번 대장군을 따라 오랑캐를 사로잡고 머리를 벤 것이 2천여 명이므로 1천일백호로 학년을 봉하여 중리후로 삼는다.” 했다. 이 해 두 장군이 군대를 잃고 흡후 조신이 도망하였고, 군공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장군의 봉록을 더하지 않았다. 우장군 소건이 이르자 천자가 죽이지 않고 그 죄를 용서하자 재물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
[一] 集解徐廣曰:「姊即少兒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누이는 곧 소아이다.” 했다.
[二] 索隱上音匹遙反,下音遙。大顏案荀悅漢紀作「票鷂」。票鷂,勁疾之貌也。上音頻妙反,下音弋召反。
[二] 【索隱】 위의 음은 ‘匹’과 ‘遙(멀 요)’의 反이고, 아래의 음은 ‘遙’이다. 대안은 순열의 「한기」를 살펴보고 “票鷂(익더귀 요, 새매의 암컷)”라 썼다. ‘표요’는 굳세고 빠른 모양이다. 위의 음은 ‘頻’과 ‘妙’의 反이고, 아래의 음은 ‘戈’와 ‘召’의 反이다.
[三] 索隱案:小顏云「計其所將之人數,則捕首虜為多,過於所當也。一云漢軍亡失者少,而殺獲匈奴數多,故曰過當也」。
[三] 【索隱】 살펴보니 소안은 “그 거느린 사람의 수를 헤아리면 곧 오랑캐를 잡고, 목 벤 사람이 많으므로 감당할 바를 넘어선다. 한편으로 한의 군대로 도망하고 잃은 자가 적고, 죽이고 잡은 흉노의 수가 많기 때문에 ‘過堂’이라 한 것이다.” 했다.
[四] 索隱行音胡浪反。謂藉若侯是匈奴祖之行也。漢書云「藉若侯產,產即大父之名」。
[四] 【索隱】 ‘行’의 음은 ‘胡’와 ‘浪’의 反이다. 적약후는 흉노 할아버지의 항렬을 말한다. 『한서』에 “적약후는 산인데 산은 곧 대부의 이름이다.” 했다.
[五] 集解張晏曰:「籍若,胡侯。」
[五]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적약은 오랑캐의 후이다.” 했다.
[六] 索隱案:顏氏云「羅姑比,單于季父名也」。小顏云「比,頻也」。案:下文既云「再冠軍」,無容更言頻也。
[六] 【索隱】 살펴보니 안씨는 “나고비는 선우의 계부 이름이다.” 했다. 소안은 “‘比’는 자주이다.” 했다. 살펴보니 아래 글에 이미 “再冠軍(두 번 승리를 이끌었다.)”이라 하고, 다시 ‘頻’을 말하지 않았다.
大將軍既還,賜千金。是時王夫人方幸於上,甯乘說大將軍曰:「將軍所以功未甚多,身食萬戶,三子皆為侯者,徒以皇后故也。今王夫人幸而宗族未富貴,願將軍奉所賜千金為王夫人親壽。」大將軍乃以五百金為壽。天子聞之,問大將軍,大將軍以實言,上乃拜甯乘為東海都尉。
대장군이 돌아오자 천금을 내렸다. 이 때 왕부인이 바야흐로 천자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녕승열이 대장군에게 말하기를 “장군은 공이 아직 매우 많지 않음에도 자신은 식읍 만호를 받고, 세 아들이 모두 후가 된 것은 모두 황후의 일 때문입니다. 지금 왕부인이 총애를 받되 종족이 아직 부귀하지 않으니 장군께서는 하사받은 천금을 받들어 왕부인의 부모를 위해 축수하기를 원합니다,” 했다. 대장군이 이에 5백금으로서 축수하였다. 천자가 듣고 대장군에게 물으니 대장군이 실제로서 말하자 천자가 영승에게 벼슬을 주어 동해도위를 삼았다.
張騫從大將軍,以嘗使大夏,[一]留匈奴中久,導軍,知善水草處,軍得以無飢渴,因前使絕國功,封騫博望侯。
장건이 대장군을 따랐을 때 일찍이 대하에 사신 갔다가 흉노에 오래 동안 억류되었던 경험으로 군대를 인도하였는데 좋은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잘 알아 군대가 주리고 목마른 것을 면할 수 있었고, 앞서 길이 끊어진 나라에 사신 갔던 공으로 인하여 장건을 봉하여 박망후로 삼았다.
[一] 正義大夏國在大宛西。
[一] 【正義】 대하국은 대원국 서쪽에 있다.
冠軍侯去病既侯三歲,元狩二年春,以冠軍侯去病為驃騎將軍,[一]將萬騎出隴西,有功。天子曰:「驃騎將軍率戎士踰烏盭[二],討遫濮,[三]涉狐奴,[四]歷五王國,輜重人眾懾慴[五]者弗取,冀獲單于子。[六]轉戰六日,過焉支山千有餘里,合短兵,殺折蘭王,斬盧胡王,[七]誅全甲,[八]執渾邪王子及相國、都尉,首虜八千餘級,收休屠祭天金人,[九]益封去病二千戶。」
관군후 곽거병이 후가 된지 3년이 지난 원수 2년 봄에 관군후 곽거병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만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를 나가게 하였는데 공이 있었다. 천자가 말하기를 “표기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려를 넘어 속곡을 토벌하고, 호노를 건너 다섯 왕국을 지나면서 치중인(보급병) 무리와 두려워하는 자는 취하지 않고(그대로 두고) 선우의 아들을 잡기를 바랐다. 돌아다니며 6일을 싸우면서 언지산을 지나 천여리를 가서 창과 칼을 든 군대와 싸워서 절란왕을 죽이고 노호왕의 머리를 베며 모든 군사를 죽이며 혼사왕의 아들과 상국, 도위를 잡고,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천여 급이었으며 휴저왕이 하늘에 제사하는 금인을 거두니 곽거병의 봉록 2천호를 더하였다.
[一] 集解徐廣曰「驃,一亦作『剽』。」 正義漢書云霍去病征匈奴有絕幕之勳,始置驃騎將軍,位在三司,品秩同大將軍。說文云:「驃,黃馬鬣白色。一曰白髦尾。」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驃’는 한편으로 ‘剽(빠를 표)’로도 쓴다.” 【正義】 『한서』에 “곽거병이 흉노를 정벌할 때 사막을 넘는 공훈이 있어 처음 표기장군을 두었는데 지위는 삼사에 있고, 등급과 봉록은 대장군과 같다.” 했다. 『설문』에 “‘驃’는 누런 색 말에 갈기가 흰색이다. 한편 흰색 털의 꼬리를 말한다.” 했다.
[二] 集解漢書音義曰:「音戾,山名也。」
[二] 【集解】 「한서음의」에 말하기를 “음은 ‘戾’인데 산 이름이다.” 했다.
[三] 索隱音速卜二音。崔浩云「匈奴部落名」。案:下有「遫濮王」,是國名也。
[三] 【索隱】 음은 ‘速’과 ‘卜’의 두 음이다. 최호가 말하기를 “흉노 부락의 이름이다.” 했다. 살펴보니 아래에 ‘속복왕’이 있는데 이는 나라 이름이다.
[四] 集解晉灼曰:「水名也。」
[四]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물 이름이다.” 했다.
[五] 集解文穎曰:「恐懼也。」 索隱案:說文云「讋,失氣也」。劉氏云「上式涉反,下之涉反」。
[五]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설문』에 “‘讋’은 기세를 잃는 것이다.” 했다. 유씨가 말하기를 “위는 ‘式’과 ‘涉’의 反이고, 아래는 ‘之’와 ‘涉’의 反이다.” 했다.
[六] 集解徐廣曰:「一作『與』。」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與’로도 쓴다.” 했다.
[七] 集解張晏曰:「折蘭,盧胡,國名也。殺者,殺之而已。斬者,獲其首。」 正義顏師古云:「折蘭,匈奴中姓也。今鮮卑有是蘭姓者,即其種。」
[七]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折蘭’은 노호이니 나라 이름이다. ‘殺’은 그들을 죽일 뿐이고, ‘斬’은 그 머리를 얻는 것이다.” 했다. 【正義】 안사고가 말하기를 “‘折蘭’은 흉노 안의 성이다. 지금 선비족에게 이 蘭씨 성을 가진 자는 곧 그 종족이다.” 했다.
[八] 集解徐廣曰:「全,一作『金』。」 正義全甲謂具足不失落也。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全’은 한편으로 ‘金’이라 쓴다.” 했다. 【正義】 ‘全甲’은 모두 충분하여 잃거나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九] 集解如淳曰:「祭天為主。」 索隱案:張嬰云「佛徒祠金人也」。如淳云「祭天以金人為主也」。屠音儲。
[九]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할 때 신주가 된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장영이 말하기를 “불교신자들이 金人에게 제사한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할 때 金人을 신주로 삼는다.” 했다. ‘屠 ’의 음은 ‘儲(쌓을 저)’이다.
其夏,驃騎將軍與合騎侯敖俱出北地,異道;博望侯張騫、郎中令李廣俱出右北平,異道:皆擊匈奴。郎中令將四千騎先至,博望侯將萬騎在後至。匈奴左賢王將數萬騎圍郎中令,郎中令與戰二日,死者過半,所殺亦過當。博望侯至,匈奴兵引去。博望侯坐行留,當斬,贖為庶人。而驃騎將軍出北地,已遂深入,與合騎侯失道,不相得,驃騎將軍踰居延至祁連山,捕首虜甚多。天子曰:「驃騎將軍踰居延,[一]遂過小月氏,[二]攻祁連山,[三]得酋涂王,[四]以眾降者二千五百人,斬首虜三萬二百級,獲五王,五王母,單于閼氏、王子五十九人,相國、將軍、當戶、都尉六十三人,師大率[五]減什三,[六]益封去病五千戶。賜校尉從至小月氏爵左庶長。鷹擊司馬破奴再從驃騎將軍斬遫濮[七]王,捕稽沮王,[八]千騎將得王、王母各一人,[九]王子以下四十一人,捕虜三千三百三十人,前行捕虜千四百人,以千五百戶封破奴為從驃侯。[一0]校尉句王高不識,[一一]從驃騎將軍捕呼于屠王[一二]王子以下十一人,捕虜千七百六十八人,以千一百戶封不識為宜冠侯。[一三]校尉僕多[一四]有功,封為煇渠侯。」[一五]合騎侯敖坐行留不與驃騎會,當斬,贖為庶人。諸宿將所將士馬兵亦不如驃騎,驃騎所將常選,[一六]然亦敢深入,常與壯騎先其大(將)軍,軍亦有天幸,未嘗困絕也。然而諸宿將常坐留落不遇。[一七]由此驃騎日以親貴,比大將軍。
그 해 여름 표기장군 곽거병과 합기후 공손오가 함께 북지를 나가는데 길을 달리하고, 박망후 장건과 낭중령 이광이 함께 우북평을 나가는데 길을 달리 하였으나 모두 흉노를 쳤다. 낭중령 이광이 4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먼저 이르고, 박망후 장건은 만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에 이르렀다. 흉노의 좌현왕이 수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낭중령 이광을 포위하니 낭중령 이광이 더불어 이틀을 싸웠는데 죽은 자가 반을 지났으나 죽인 자가 또한 죽은 자보다 많았다. 박망후 장건이 이르니 흉노가 군대를 이끌고 갔다. 박망후 장건이 행군에 늦은 죄는 머리를 베는 것에 해당하나 재산을 내고 속죄하여 서인이 되었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북지를 나가 마침내 깊이 들어갔는데 합기후 공손오는 길을 잃고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표기장군 이광이 거연을 넘어 기련산에 이르러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천자가 말하기를 “표기장군 이광이 거연을 넘고 마침내 소월지를 지나 기련산을 공격하여 추도왕을 잡고 항복한 무리가 2천 5백명이고,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3만2백급이고, 다섯 왕과, 다섯 왕모, 선우의 연지(왕비), 왕자 59명, 상국, 장군, 당호, 도위 63명을 잡았는데 군대는 대개 10에 셋을 줄였으니(잃었으니) 곽거병을 봉하여 5천호를 더한다. 교위로 따라서 소월지에 이른 자는 좌서장의 벼슬을 내린다. 응격사마 조파노가 두 번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가 속복왕을 목 베고, 계저왕을 사로잡았고, 천기장은 왕과 왕모 각 1명, 왕자 이하 41명, 포로 3천3백3십명을 잡았는데 앞서 잡았던 포로 1천4백명을 합하여 1천5백호로 조파노를 봉하여 종표후로 삼는다. 교위 구왕 고불식은 표기장군을 따라가 호우저왕과 왕자 이하 11명, 포로 1천7백6십8명을 잡았으므로 1천일백호로 고불식을 봉하여 의관후로 삼는다. 교위 복다도 공이 있으니 봉하여 휘거후로 삼는다.” 했다. 합기후 공손오는 행군에 늦어 표기장군 곽거병과 만나지 못한 죄에 연좌되 머리를 베는 형벌에 해당하나 재물을 내고 속죄하여 서인을 삼았다. 여러 군사적 경험이 많은 장군들이 거느린 장사와 기병들도 또한 표기장군보다는 못하였다. 표기장군은 항상 군대를 선발하여 거느렸지만 그러나 또한 과감하게 깊이 들어가 항상 장사와 기병과 함께 그 대군에 앞섰으며, 군대가 또한 하늘의 행운이 있어 일찍이 곤궁하거나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하되 여러 경험 많은 장군들이 항상 행군에 늦어 만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표기장군 곽거병은 말로 친하고 귀하기다 대장군에 비견되었다.
[一] 集解張晏曰:「水名也。」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물 이름이다.” 했다.
[二] 索隱韋昭云:「音支。」西域傳:「大月氏本居敦煌、祁連閒,餘眾保南山,遂號小月氏。」
[二] 【索隱】 위소가 말하기를 “음은 ‘支’이다.” 했다. 「서역전」에 “대월지는 원래 돈황과 기련산 사이에 살았는데 나머지 무리들이 남산을 지키다가 마침내 소월지라 불렀다.
[三] 索隱小顏云:「即天山也。匈奴謂天[為]祁連。」西河舊事謂白山,天山。祁連恐非即天山也。
[三] 【索隱】 소안이 말하기를 “곧 천산이다. 흉노는 하늘을 ‘기련’이라 한다.” 했다. 「서하구사」에 “흰산을 천산이라 말한다. 기련은 아마도 곧 천산이 아닐 것이다.” 했다.
[四] 集解張晏曰:「胡王也。」 索隱酋音才由反。涂音徒。漢書云「揚武乎鱳得,得單于單桓、酋涂王」,此文省也。
[四]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胡王이다.” 했다. 【索隱】 ‘酋’의 음은 ‘才’와 ‘由’의 反이다. ‘涂(도랑 도)’의 음은 ‘徒’이다. 『한서』에 “역득에서 위엄을 드날리고, 선우 단환과 추도왕을 잡았다.” 했는데 여기서는 글을 생략한 것이다.
[五] 正義率音律也。
[五] 【正義】 ‘率’의 음은 ‘律’이다.
[六] 索隱案:漢書云「減什七」,不同也。小顏云「破匈奴之師,十減其七。一云漢兵亡失之數,下皆類此」。案:後說為是也。
[六]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減什七(10에 7을 덜었다.)”하니 같지 않다. 소안이 말하기를 “흉노의 군대를 깨트려서 10에 그 7을 줄였다. 한편 한의 군대가 도망하고 잃은 수이다. 하니 아래가 모두 이러한 류이다.” 했다. 살펴보니 뒤의 말이 옳다.
[七] 正義速卜二音。
[七] 【正義】 ‘速’ 두 음이다.
[八] 索隱沮音子余反。
[八] 【索隱】 ‘沮’의 음은 ‘子’와 ‘余’의 反이다.
[九] 索隱按:漢書云「右千騎將王」,然則此千騎將漢之將,屬趙破奴,得匈奴五王及王母也。或云右千騎將即匈奴王之名。
[九]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우천기장왕”이라 하니 그렇다면 이 천기장은 한의 장군인데 조파노에게 속하여 흉노 다섯 왕과 왕모를 잡은 것이다. 어떤 이는 천기장은 흉노왕의 이름이라 한다.
[一0] 集解張晏曰:「從驃騎將軍有功,因以為號。」
[一0]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표기장군을 따라 공이 있었으므로 호로 삼은 것이다.” 했다.
[一一] 集解徐廣曰:「句音鉤。匈奴以為號。」 索隱案:二人並匈奴人也。
[一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句’의 음은 ‘鉤(갈고리 구)’이다. 흉노가 호로 삼았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두 사람은 모두 흉노 사람이다.
[一二] 索隱案:三字共為王號。
[一二] 【索隱】 살펴보니 3글자가 모두 왕의 호이다.
[一三] 正義孔文祥云:「從冠軍將軍戰故。宜冠,從驃之類也。」
[一三] 【正義】 공문상이 말하기를 “관군장군을 따라 싸웠기 때문에 ‘의관’이라 하였으니 ‘종표’와 같다.
[一四] 索隱案:漢百官表作「僕朋」,疑多是誤。
[一四] 【索隱】 살펴보니 한 「백관표」에 “僕朋”이라 썼으니 아마도 이는 잘못이 많을 것이다.
[一五] 索隱煇音暉。
[一五] 【索隱】 ‘煇’의 음은 ‘暉(빛 휘)’이다.
[一六] 索隱音宣變反。謂驃騎常選擇取精兵。
[一六] 【索隱】 음은 ‘宣’과 ‘變’의 反이다. 표기장군이 항상 선택하여 정예 군대를 취하였음을 말한다.
[一七] 索隱案:謂遲留零落,不偶合也。
[一七] 【索隱】 살펴보니 더디어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其秋,單于怒渾邪王居西方數為漢所破,亡數萬人,以驃騎之兵也。單于怒,欲召誅渾邪王。渾邪王與休屠王等謀欲降漢,使人先要邊。[一]是時大行李息將城河上,得渾邪王使,即馳傳以聞。天子聞之,於是恐其以詐降而襲邊,乃令驃騎將軍將兵往迎之。驃騎既渡河,與渾邪王眾相望。渾邪王裨將見漢軍而多欲不降者,頗遁去。驃騎乃馳入與渾邪王相見,斬其欲亡者八千人,遂獨遣渾邪王乘傳先詣行在所,盡將其眾渡河,降者數萬,號稱十萬。既至長安,天子所以賞賜者數十巨萬。封渾邪王萬戶,為漯陰侯。[二]封其裨王呼毒尼[三]為下摩侯,鷹庇為煇渠侯,[四]禽梨[五]為河綦侯,大當戶銅離[六]為常樂侯。於是天子嘉驃騎之功曰:「驃騎將軍去病率師攻匈奴西域王渾邪,王及厥眾萌咸相奔,率以軍糧接食,并將控弦萬有餘人,誅獟駻,[七]獲首虜八千餘級,降異國之王三十二人,戰士不離傷,十萬之眾咸懷集服,仍與之勞,爰及河塞,庶幾無患,[八]幸既永綏矣。以千七百戶益封驃騎將軍。」減隴西、北地、上郡戍卒之半,以寬天下之繇。
그 해 가을 선우가 혼사왕이 서방에 있으면서 여러 번 한에게 깨트려지고, 수만 명을 표기장군의 군대에게 잃은 거셍 노하였다. 선우가 노하여 혼사왕을 불러 죽이려 하였다. 혼사왕과 휴도왕 등이 모의하여 한에 항복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먼저 변경에서 한의 사람들을 살펴보게 하였다. 이 때 대행 이식이 하수 가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혼사왕의 사신을 잡고는 곧 전령으로 말을 달려 알리게 하였다. 천자가 듣고 이에 거짓 항복으로 변경을 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표기장군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맞이하게 하였다. 표기장군이 하를 건너 혼사왕의 무리들과 서로 바라보았다. 혼사왕의 비장이 한의 군대를 보고 항복하지 않으려는 자가 많이 도망하여 갔다. 표기장군이 이에 말을 달려 들어가 혼야왕을 서로 만나 그 도망하고자하는 자 8천명을 목베고 마침내 혼야왕을 전하는 말에 태워 먼저 보내 행재소에 나아가게 하고는 모든 무리를 가느리고 하를 건너니 항복한 자가 수만 명이었데 부르기를 10만 명이라 했다. 장안에 이르자 천자가 상으로 내린 것이 수십 거만이었다. 혼사왕을 봉록 1만호에 봉하고 탑음후로 삼았다. 그 비왕 호독니를 봉하여 하마후라 하고, 응비를 휘거후라 하고, 금리를 하기후라 하고, 대당호 동리를 성락후라 하였다. 이에 천자가 표기장군의 공을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 서역왕 혼사를 공격하여 왕과 그 백성들이 서로 달아나니 군량으로 밥 먹여 거느리고, 아울러 말을 타고 활을 쏠 수 있는 사람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날래고 사나운 흉노사람 8천여명을 목베거나 사로잡았으며, 다른 나라의 왕 32명을 항복받았는데 전사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10만의 무리들이 모두 모여 복종하게 하는데 함께 한 수고로움으로 하와 요새에 이르니 거의 근심이 없어져 요행히 길이 편안해졌다. 1천7백호로 표기장군에게 봉을 더한다.” 했다. 농서, 북지, 상군의 지키는 군졸의 반을 줄이는 것으로서 천하의 부역을 가볍게 하였다.
[一] 索隱案:謂先於邊境要候漢人,言其欲降。
[一] 【索隱】 살펴보니 먼저 변경에서 한나라 사람들의 징후를 살펴보고, 그 항복하고자 하는 말을 하려는 것을 말한다.
[二] 索隱漯音他合反。案地理志,縣名,在平原郡。
[二] 【索隱】 ‘漯’의 음은 ‘他’와 ‘合’의 反이다. 「지리지」를 살펴보니 현의 이름으로 평원군에 있다.
[三] 集解文穎曰:「胡王名。」
[三]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오랑캐 왕의 이름이다.”했다.
[四] 集解徐廣曰:「一云『篇訾』。」 索隱漢書鷹作「雁」。庇音必二反,又音疋履反。案:漢書功臣表云元狩二年以煇渠封僕朋,至三年又封鷹庇。其地俱屬魯陽,未詳所以。正義煇渠,表作「順梁」。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篇訾(헐|뜯을 자)’라 쓴다.” 했다. 【索隱】 『한서』에 “‘鷹’은 ‘雁’이라 썼다.” ‘庇(덮을 비)’의 음은 ‘必’과 ‘二’의 反이다. 또 음은 ‘疋’과 ‘履’의 反이다. 살펴보니 『한서』 「공신표」에 “원수 2년 휘거를 복명에 봉하였고, 3년에 이르러 또 응비를 봉하였다. 그 땅은 모두 노양에 속하는데 까닭은 자세하지 않다.” 【正義】 ‘煇渠’는 「표」에 “順梁”이라 썼다.
[五] 集解徐廣曰:「禽,一作『鳥』。」 索隱案:表作「鳥梨」。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禽’은 한편으로 ‘烏’라 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표」에는 ‘烏梨’라 썼다.
[六] 集解徐廣曰:「一作『稠離』也。」 索隱徐廣一作「稠離」,與漢書功臣表同。此文云「銅離」,文異也。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稠(빽빽할 조)離’로 쓴다.” 했다. 【索隱】 서광은 한편으로 ‘稠離’라 쓴다. 했는데 『한서』 「공신표」와 같다. 이글에서는 ‘銅離’라 하니 글이 다르다.
[七] 集解晉灼曰:「獟音欺譙反。」 索隱上音丘昭反。說文作「趬」,行遮貌。遮,一作「疾」。駻音胡旦反。
[七]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獟’의 음은 ‘欺’와 ‘礁(물에 잠긴 바위 초)’의 反이다.” 했다. 【索隱】 위의 음은 ‘丘’와 ‘昭’의 反이다. 『설문』에 ‘趬(사분사뿐 걸을 교)’라 썼는데 가는 것을 막는 모양이다. 한편으로 ‘疾’이라 쓴다. ‘駻’으 음은 ‘胡’와 ‘旦’의 反이다.
[八] 正義言匈奴右地渾邪王降,而塞外並河諸郡之民無憂患也。
[八] 【正義】 흉노 우지의 혼사왕이 항복하여 요새 밖의 하와 군의 백성이 아울러 근심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居頃之,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一]而皆在河南,因其故俗,為屬國。[二]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殺略漢千餘人。
얼마 후 항복한 자들을 변경 5군의 옛 요새 밖에 나누어 옮겼는데 모두 하남에 있었기 때문에 그 옛 풍속을 가지고 나라(한 나라)에 속하였다. 그 다음 해 흉노가 우북평, 정양에 들어와 한나라 사람 일천여 명을 죽이고 약탈했다.
[一] 正義五郡謂隴西、北地、上郡、朔方、雲中,並是故塞外,又在北海西南。
[一] 【正義】 ‘五郡’은 농서, 북지, 상군, 삭방, 운중을 말하는데 모두 옛 요새 밖에 있고, 또 북해 서남쪽에 있다.
[二] 正義以降來之民徙置五郡,各依本國之俗而屬於漢,故言「屬國」也。
[二] 【正義】 항복하여 오는 백성을 5군에 옮겨 두고 각각 본국의 풍속에 의하여 한에 속하게 했으므로 ‘屬國’이라 말한 것이다.
其明年,天子與諸將議曰:「翕侯趙信為單于畫計,常以為漢兵不能度幕輕留,[一]今大發士卒,其勢必得所欲。」是歲元狩四年也。
그 다음 해 천자와 여러 장군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한 계책에 항상 한의 군대가 사막을 건널 수 없다 여겨 가벼이 머물고 있으니 지금 크게 사졸을 일으키면 그 형세가 반드시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이 해는 원수 4년이다.
[一] 索隱案:幕即沙漠,古字少耳。輕留者,謂匈奴以漢軍不能至,故輕易留而不去也。
[一] 【索隱】 살펴보니 ‘幕’은 곧 사막이니 옛 글자가 적었을 뿐이다. ‘輕留’는 흉노가 한의 군대가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가볍고 쉽게 머물러 떠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元狩四年春,上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將各五萬騎,步兵轉者踵軍數十萬,[一]而敢力戰深入之士皆屬驃騎。驃騎始為出定襄,當單于。捕虜言單于東,乃更令驃騎出代郡,令大將軍出定襄。郎中令為前將軍,太僕為左將軍,主爵趙食其為右將軍,平陽侯襄為後將軍,皆屬大將軍。兵即度幕,人馬凡五萬騎,與驃騎等咸擊匈奴單于。趙信為單于謀曰:「漢兵既度幕,人馬罷,匈奴可坐收虜耳。」乃悉遠北其輜重,皆以精兵待幕北。而適值大將軍軍出塞千餘里,見單于兵陳而待,於是大將軍令武剛車[二]自環為營,而縱五千騎往當匈奴。匈奴亦縱可萬騎。會日且入,大風起,沙礫擊面,兩軍不相見,漢益縱左右翼繞單于。單于視漢兵多,而士馬尚彊,戰而匈奴不利,薄莫,單于遂乘六驘,壯騎可數百,直冒漢圍西北馳去。時已昏,漢匈奴相紛挐,[三]殺傷大當。[四]漢軍左校捕虜言單于未昏而去,漢軍因發輕騎夜追之,大將軍軍因隨其後。匈奴兵亦散走。遲明,[五]行二百餘里,不得單于,頗捕斬首虜萬餘級,遂至窴顏山趙信城,[六]得匈奴積粟食軍。軍留一日而還,悉燒其城餘粟以歸。
원수 4년 봄에 황제가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명령하여 각각 5만의 기병을 거느리게 하고, 보병과 군수품을 운반하는 자 수십만 명을 뒤 따르게 하였는데 용감하게 힘서 싸우며 깊이 들어가는 군사는 모두 표기장군 곽거병에 속하였다. 표기장군은 처음 정양을 나가 선우를 대적하였다. 포로들이 선우가 동쪽으로 갔다 말하므로 이에 다시 표기장군으로 하여금 대군을 나가게 하고, 대장군은 정양을 나가게 하였다. 낭중령이 전장군이 되고, 태복은 좌장군이 되고. 주작 조이기는 우장군이 되고, 평양후 조양은 후장군이 되었는데 모두 대장군에게 속하였다. 군대가 곧 사막을 건넜는데 사람과 말이 모두 5만기로 표기장군 등과 함께 흉노 선우를 쳤다. 조신이 선우에게 꾀를 내어 말하기를 “한의 군대가 이미 사막을 건넜으니 사람과 말이 피폐했을 것이니 흉노가 앉아서 포로를 거둘 수 있을 뿐입니다.” 했다. 이에 모두 치중(보급품)을 멀리 북쪽으로 보내고 모두 정예 군대로 사막 북쪽에서 기다렸다. 마침 대장군의 군대가 요새를 나와 천여리를 가다가 선우의 군대가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이에 대장군이 덮개가 있는 수레로 고리처럼 둘러싸게 하여 군영을 삼고 5천의 기병을 풀어 흉노를 대적하게 하였다. 흉노가 또한 1만여기 정도를 풀었다. 해가 또한 들어갈 때(해가 질 때)쯤 크게 바람이 불어 모래와 자갈이 얼굴을 때리니 두 군대가 서로 보지 못하였는데 한이 더욱 좌우 날개를 놓아 선우를 둘러쌓다. 선우가 한의 군대가 많고, 군사와 말이 아직 강함을 보고는 싸워서 흉노가 이롭지 않을 것으로 여겨 해가 질 무렵에 선우가 마침내 여섯 마리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건장한 기병 수백 명 정도와 함께 한의 포위를 무릅쓰고 달려 서북쪽으로 갔다. 때는 이미 어두워진 후 한과 흉노가 서로 어지럽게 얽혀 죽이고 상처 입히며 크게 싸웠다. 한 군대의 좌교가 사로잡은 포로가 선우는 어둡지 않아서 떠날 것이라 말하니 한의 군대가 가벼운 기병을 내어 밤에 뒤쫓게 하고 대장군의 군대도 그 뒤를 따랐다. 흉노의 군대가 또한 흩어져 달아났다. 날이 밝아 올 때 쯤 2백여리를 행군하였으나 선우를 잡지 못하고, 사로잡고 머리를 벤 것이 만여 명이었다. 마침내 전안산 조신성에 이르러 흉노가 쌓아놓은 곡식을 얻어 군대를 먹였다. 군대가 하루를 머문 후 돌아왔는데 그 성의 남은 곡식을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一] 正義言轉運之士及步兵接後又數十萬人。
[一] 【正義】 운반을 담당한 병사와 보병이 뒤를 이은 것이 또한 수십만 명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二] 集解孫吳兵法曰:「有巾有蓋,謂之武剛車也。」
[二] 【集解】 손빈과 오기의 병법에 말하기를 “건이 있고, 덮개가 있는 것을 무강거라 한다.” 했다.
[三] 正義三蒼解詁云:「紛挐,相牽也。」
[三] 【正義】 『삼창해고』에 “紛挐(붙잡을 나)‘는 서로 이끄는 것이다. 했다.
[四] 索隱以言所殺傷大略相當。
[四【索隱】 죽이고, 상처입힌 것이 대략적으로 서로 비슷함을 말한 것이다.
[五] 集解徐廣曰:「遲,一作『黎』。」 索隱上音值,待也。待天欲明,謂平明也。諸本多作「黎明」。鄒氏云「黎,遲也」。然黎,黑也,候天將明猶黑也。正義遲音值。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遲’는 한편으로 ‘黎(검을 려)’라 쓴다.” 했다. 【索隱】 위의 음은 ‘值’이니 기다림이다. ‘待天欲明(하늘이 밝아지려는 것을 기다린다.)’는 平明(해가 뜨는 시각)을 말한다. 여러 본에 많이 ‘黎明’이라 많이 썼다. 추씨가 말하기를 “‘黎’는 느림이다.” 했다. 그러나 ‘黎 ’는 검음이니 하늘이 장차 밝아지려는 것을 보면 오히려 검다. 【正義】 ‘遲’의 음은 ‘值’이다.
[六] 集解徐廣曰:「窴音田。」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窴’의 음은 ‘田’이다.” 했다.
大將軍之與單于會也,而前將軍廣、右將軍食其軍別從東道,或失道,後擊單于。大將軍引還過幕南,乃得前將軍、右將軍。大將軍欲使使歸報,令長史簿責前將軍廣,廣自殺。右將軍至,下吏,贖為庶人。大將軍軍入塞,凡斬捕首虜萬九千級。
대장군이 선우와 만났을 때 전장군 이광, 우장군 이기의 군대는 따로 동쪽 길을 따르거나 혹은 길을 잃어 선우를 치는데 늦었다. 대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사막 남쪽을 지나 돌아와서 전장군과 우장군을 만났다. 대장군이 사자를 시켜 보고하고자 하여 장사로 하여금 전장군 이광에게 책임을 기록하게 하자 이광이 자살하였다. 우장군이 이르자 관리에게 내려 재물로 속죄하고 서인을 삼았다. 대장군의 군대가 요새에 들어갔는데 무릇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1만여급이었다.
是時匈奴眾失單于十餘日,右谷蠡[一]王聞之,自立為單于。單于後得其眾,右王乃去單于之號。
이 때 흉노의 무리들이 선우를 잃은 지 10여일만에 우곡려왕이 그것을 듣고 스스로 즉위하여 선우가 되었다. 선우가 후에 그 무리를 얻으니 우곡려왕이 이에 선우의 호를 버렸다.
[一] 索隱上音祿;下音梨,又音離。
[一] 【索隱】 위의 음음 ‘祿’이고, 아래 음은 ‘梨’인데 도 음을 ‘離’라 한다.
驃騎將軍亦將五萬騎,車重與大將軍軍等,而無裨將。悉以李敢等為大校,當裨將,出代、右北平千餘里,直左方兵,所斬捕功已多大將軍。軍既還,天子曰:「驃騎將軍去病率師,躬將所獲葷粥之士,[一]約輕齎,絕大幕,涉獲章渠,[二]以誅比車耆,[三]轉擊左大將,[四]斬獲旗鼓,歷涉離侯。[五]濟弓閭,[六]獲屯頭王、[七]韓王等三人,[八]將軍、相國、當戶、都尉八十三人,封狼居胥山,禪於姑衍,[九]登臨翰海。[一0]執鹵獲醜七萬有四百四十三級,師率減什三,取食於敵,逴[一一]行殊遠而糧不絕,以五千八百戶益封驃騎將軍。」右北平太守路博德屬驃騎將軍,會與城,[一二]不失期,從至檮余[一三]山,斬首捕虜二千七百級,以千六百戶封博德為符離侯。北地都尉邢山[一四]從驃騎將軍獲王,以千二百戶封山為義陽侯。故歸義因淳王復陸支、[一五]樓專王[一六]伊即靬[一七]皆從驃騎將軍有功,以千三百戶封復陸支為壯侯,以千八百戶封伊即靬為眾利侯。從驃侯破奴、昌武侯安稽[一八]從驃騎有功,益封各三百戶。校尉敢[一九]得旗鼓,為關內侯,食邑二百戶。校尉自為[二0]爵大庶長。軍吏卒為官,賞賜甚多。而大將軍不得益封,軍吏卒皆無封侯者。
표기장군이 또한 5만의 기병과 수레와 대장군의 군대 등을 거느렸는데 비장은 없었다. 이감 등을 대교로 삼아 비장에 해당하게 하고 대, 우북평 천여리를 나와 곧바로 좌방의 군대를 쳐서 목을 베거나 포로를 잡은 공이 이미 대장군 보다 많았다. 군대가 돌아오고 나서 천자가 말하기를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대를 거느리고 몸소 잡았던 훈죽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벼운 짐을 묶어 사막을 횡단하고 섭수를 건너 획장거를 잡으며, 비거기를 죽이고 돌려서 좌대장을 쳐서 기와 북을 빼앗고 이후를 건넜다. 궁려를 건너 둔두왕, 한왕 등 3명, 장군, 상국, 당호, 도위 83명을 잡고 낭거산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고연에서 산천에 제사하며 바다 옆 산에 올라 한해를 마주하고 바라보았다. 추한 무리를 잡고 노획한 것이 7만 4백 4십3급이었고, 군대를 줄인 비율은 10명에 3명이었고, 적에게서 식량을 취하여 멀리까지 행군하면서도 식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5천8백호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더하여 봉한다.” 했다. 우북평 태수 노박덕은 표기장군에 속하여 여성에서 만나는데 기일에 늦지 않고 따라서 도여산에 이르러 2천7백명을 목 베거나 포로로 잡았으므로 1천6백호의 봉록으로 노박덕을 봉하여 부이후로 삼았다. 북지도위 형산은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왕을 잡았으므로 1천2백호 봉록으로 형산을 봉하여 의양후로 삼았다. 옛날에 귀의하였던 인순왕 복육지, 누전왕 이즉간은 모두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랐으므로 1천3백호의 봉록으로 봉하여 복육지를 장후로 삼고, 봉록 1천8백호의 봉록으로 봉하여 이즉간을 중리후라 했다. 표후 파노, 창무후 안계가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공이 있었으므로 각각 봉록 3백호를 더하였다. 교위 이감은 깃발과 북을 얻었으므로 관내후를 삼고 2백호를 식읍으로 했다. 교위 자위는 대서장의 벼슬을 내렸다. 군리와 사졸을 관리로 삼아 상을 내린 것이 매우 많았다. 대장군은 봉록을 더해주지 않고 군리와 사졸은 모두 후에 봉해진 자가 없었다.
[一] 集解徐廣曰:「粥,一作『允』。」駰案:應劭曰「所降士有材力者」。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粥’은 한편으로 ‘允’이라 쓴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응소가 말하기를 “항복한 士로 재주와 힘이 있는 자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獲,一作『護』。」 索隱小顏云:「涉謂涉水也。章渠,單于之近臣,謂涉水而破獲之。」漢書云「涉獲單于章渠」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獲’은 한편으로 ‘護’라 쓰기도 한다.” 했다. 【索隱】 소안이 말하기를 “‘涉’은 섭수를 말한다. ‘章渠’는 선우의 측근 신하인데 섭수를 건너 깨트리고 잡은 것을 말한다.” 했다. 『한서』에는 “涉獲單于章渠(섭수를 건너 선우 장거를 잡았다.” 했다.
[三] 集解晉灼曰:「王號也。」 索隱比,必耳反。
[三]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왕의 호칭이다.” 했다. 【索隱】 ‘比’는 ‘必’과 ‘耳’의 反이다.
[四] 索隱案:漢書名雙。
[四]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는 이름이 ‘雙’이다.
[五] 索隱漢書作「度難侯」。小顏云「山名」。歷,度也。
[五] 【索隱】 『한서』에는 ‘度難侯’라 썼다. 소안이 말하기를 “산 이름이다.” 했다. ‘歷’은 건넘이다.
[六] 集解晉灼曰:「水名也。」 索隱弓,包愷音穹,亦如字讀。
[六] 【集解】 진작이 말하기를 “물 이름이다.” 【索隱】 ‘弓’은 포개가 음이 ‘穹’이라 하였는데 또한 글자와 같이 읽는다.
[七] 集解漢書音義曰:「胡王號也。」
[七] 【集解】 「한서음의」에 “오랑캐 왕의 호칭이다.” 했다.
[八] 集解徐廣曰:「王,一作『藉』。」 索隱按:漢書云「屯頭韓王等三人」。李奇曰「皆匈奴王號」。
[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王’은 한편으로 ‘藉(깔개 자)’이다.” 했다. 【索隱】 『한서』에 말하기를 “屯頭韓王等三人(둔두 한왕 등 세 사람이다.)” 했다. 이기가 말하기를 “모두 흉노의 왕호이다.” 했다.
[九] 正義積土為壇於山上,封以祭天也。祭地曰禪。
[九] 【正義】 산위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하는 것을 ‘封’이라 하고, 땅에 제사하는 것을 ‘禪’이라 한다.
[一0] 集解張晏曰:「登海邊山以望海也。」 索隱按:崔浩云「北海名,群鳥之所解羽,故云翰海」。廣異志云「在沙漠北」。
[一0]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바닷가 산에 올라 다다를 바라보는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최호가 말하기를 “북해의 이름인데 여러 새가 날개를 풀기 때문에 ‘한해’라 한 것이다.” 했다. 『광이지』에 “사막 북쪽에 있다.” 했다.
[一一] 索隱音與「卓」同。卓,遠也。
[一一] 【索隱】 음은 ‘卓’과 같다. ‘卓’은 멀리 이다.
[一二] 正義與音余。
[一二] 【正義】 ‘與’의 음은 ‘余’이다.
[一三] 索隱音桃徒二音。
[一三] 【索隱】 음은 ‘桃’와 ‘徒’ 두 음이다.
[一四] 集解徐廣曰:「一作『衛山』。」
[一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으로 ‘衛山’이라 쓴다.
[一五] 索隱復,劉氏音伏,小顏音福。
[一五] 【索隱】 ‘復’은 유씨가 음이 ‘伏’이라 했고, 소안은 음이 ‘福’이라 했다.
[一六] 索隱漢書作「剸」,並音專。小顏音之兗反也。
[一六] 【索隱】 『한서』에는 ‘剸’이라 썼는데 모두 음이 ‘專’이다. 소안은 음이 ‘之’와 ‘兌’의 反이다.
[一七] 索隱九言反。
[一七] 【索隱】 ‘九’와 ‘言’의 反이다.
[一八] 集解徐廣曰:「姓趙,故匈奴王。」 索隱故匈奴王,姓趙也。
[一八]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성은 조씨로 옛 흉노의 왕이었다.” 했다. 【索隱】 옛 흉노왕이니 성른 조씨이다.
[一九] 索隱李廣子也。
[一九] 【索隱】 이광의 아들이다.
[二0] 索隱案:徐自為也。
[二0] 【索隱】 살펴보니 서자위이다.
兩軍之出塞,塞閱官及私馬凡十四萬匹,而復入塞者不滿三萬匹。乃益置大司馬位,大將軍、驃騎將軍皆為大司馬。[一]定令,令驃騎將軍秩祿與大將軍等。自是之後,大將軍青日退,而驃騎日益貴。舉大將軍故人門下多去事驃騎,輒得官爵,唯任安不肯。
대장군과 표기장군의 두 군대가 요새를 나가는데 요새에서 관마와 개인소유 말을 살펴보니 모두 14만 필이었는데 다시 요새에 들어온 것은 3만 필을 채우지 못하였다.(3만 필이 되지 않았다.) 이에 대사마의 지위를 두고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을 모두 대사마로 삼았다. 령을 정하여 표기장군 과거병의 질록을 대장군과 균등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 대장군 위청이 날로 물러나고, 표기장군은 날로 귀함을 더하였다. 대장군이 천거하였던 옛 문하들이 많이 떠나 표기장군을 섬기면 문득 관작을 얻었는데 오직 임안만은 좋아하지 않았다.
[一] 集解如淳曰:「大將軍、驃騎將軍皆有大司馬之號也。」 索隱案:如淳云「本無大司馬,今新置耳」。案:前謂太尉,其官又省,今武帝始置此位,衛將軍、霍驃騎皆加此官。
[一]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대장군과 표기장군이 모두 대사마의 호칭이 있었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여순이 말하기를 “본래 대사마가 없었는데 지급 새롭게 두었을 뿐이다.” 했다. 살펴보니 앞에서 태위라 말한 것은 그 관직을 생략한 것이고, 지금 무제가 처음으로 이 지위를 두고 위청장군과 곽거병 표기장군에게 모두 이 관작을 더한 것이다.
驃騎將軍為人少言不泄,[一]有氣敢任。[二]天子嘗欲教之孫吳兵法,對曰:「顧方略何如耳,不至學古兵法。」天子為治第,令驃騎視之,對曰:「匈奴未滅,無以家為也。」由此上益重愛之。然少而侍中,貴,不省士。其從軍,天子為遣太官齎數十乘,既還,重車餘棄粱肉,而士有飢者。其在塞外,卒乏糧,或不能自振,而驃騎尚穿域蹋鞠。[三]事多此類。大將軍為人仁善退讓,以和柔自媚於上,然天下未有稱也。
표기장군의 사람됨은 말이 적고, 말을 옮기지 않으며 기개가 있고, 맡은 일에 과감하였다. 천자가 일찍이 손자와 오자의 병법을 가르치고자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방법과 계략을 돌아보고 어떻게 할 뿐 옛 병법을 배움에 이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했다. 천자가 그를 위해 집을 짓고는 표기장군 곽거병으로 하여금 보게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흉노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집은 필요 없습니다.” 했다. 이로 말미암아 천자가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어려서 시중이 되어 귀하게 되었으므로 士를 살피지 ㅇ낳았다. 그 군대를 따를 때 천자가 태관을 보내 수십 수레에 물품을 실어 보냈는데 돌아올 때 여러 수레의 남은 곡식과 고기를 버렸는데도 士 중에는 주리는 자가 있었다. 그 요새 밖에 있을 때 병졸이 군량이 궁핍하여 혹 스스로 떨치지 못하였는데 표기장군 곽거병은 오히려 땅을 그어 영역을 만들고는 공을 찼으니 일이 많이 이러한 종류였다. 대장군의 사람됨은 어질고 선하며 겸양하며, 옹화하고 부드러움으로써 황제에게 사상을 받았으나 천하에서 칭찬을 하지는 않았다.
[一] 索隱案:孔文祥云「謂質重少言,膽氣在中也。周仁『陰重不泄』,其行亦同也」。
[一] 【索隱】 살펴보니 공문상이 말하기를 “바탕이 진중하고 말이 적으며, 담기가 안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인이 ‘주의 깊고 신중하며 말을 옮기지 않았다.’하니 그 행실이 또한 같은 것이다.” 했다.
[二] 索隱謂果敢任氣也。漢書作「往」,亦作「任」也。
[二] 【索隱】 과감하고 기세가 있음이다. 『한서』에 ‘往’이라 쓰기도 하고 또한 ‘任’이라 쓰기도 한다.
[三] 集解徐廣曰:「穿地為營域。」 索隱穿域蹴鞠。徐氏云「穿地為營域」。蹴鞠書有域說篇,又以杖打,亦有限域也。今之鞠戲,以皮為之,中實以毛,蹴蹋為戲。劉向別錄云「蹋鞠,兵勢,所以陳武事,知有材力也」。漢書作「蹋鞠」。三倉云「鞠毛可蹋以為戲」。鞠音巨六反。 正義按:蹴鞠書有域說篇,即今之打毬也。黃帝所作,起戰國時。程武士,知其材力也,若講武。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당을 파서 영역을 경영함이다.” 했다. 【索隱】 땅에 금을 그어 축국을 함이다. 소씨가 말하기를 “땅을 파서 영역을 경영함이다.” 했다. 「蹴(찰 축)鞠(공국)書」에 域說 편이 있고, 또 지팡이를 쳐서 또한 영역에 제한이 있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鞠戲’는 가죽으로써 만들고, 안을 털로 채워 공을 차는 것으로 놀이를 삼는다. 『유향별록』에 “‘蹋鞠’은 군대의 기세로 무예를 펼치는 일로 재주와 힘을 안다.” 했다. 『한서』에는 ‘蹋鞠’이라 썼다. 삼창이 말하기를 “ 털로 만든 공을 차는 것으로써 놀이를 삼는다.” 했다. ‘鞠’의 음은 ‘巨’와 ‘六’의 反 이다. 【正義】 살펴보니 「축국서」 역설편에 있는데 곧 지금의 타구이다. 黃帝가 만든 것으로 전국시대에 일어났다. 무사를 가늠하여 그 재주와 힘을 알 수 있는데 講武(무예를 강습함)와 같다.
驃騎將軍自四年軍後三年,元狩六年而卒。天子悼之,發屬國玄甲[一]軍,陳自長安至茂陵,為冢象祁連山。[二]謚之,并武與廣地曰景桓侯。[三]子嬗[四]代侯。嬗少,字子侯,上愛之,幸其壯而將之。居六歲,元封元年,嬗卒,謚哀侯。無子,絕,國除。
표기장군 곽거병은 원수 4년부터 전쟁에 나가기 시작하여 3년이 지난 원수 6년에 죽었다. 천자가 슬퍼하여 속국의 현갑군을 일으켜 장안에서부터 무릉에 이르기까지 도열하게 하고, 무덤은 기련산을 형상하였다. 시호는 무예와 땅을 넓힌 것을 아울러 경환후라 했다. 아들 곽선이 후를 대신하였는데 나이가 어렸다. 곽선의 자는 자후로 황제가 사랑하였는데 그 굳건함을 총애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6년이 지난 뒤 원봉 1년 곽선이 죽으니 애후라 시호 하였다. 아들이 없어 끊어지니 나라를 없앴다.
[一] 正義屬國即上分置邊五郡者也。玄甲,鐵甲也。
[一] 【正義】 속국은 곧 황제가 변경에 나누어 둔 다섯 군이다. ‘玄甲’은 ‘鐵甲’이다.
[二] 索隱案:崔浩云「去病破昆邪於此山,故令為冢象之以旌功也」。姚氏案:冢在茂陵東北,與衛青冢並。西者是青,東者是去病冢。上有豎石,前有石馬相對,又有石人也。
[二] 【索隱】 살펴보니 최호가 말하기를 “곽거병이 이 산에서 곤사를 깨트렸기 때문에 무덤을 형상하는 것으로써 공을 표시하게 한 것이다.” 했다. 요씨가 살펴보니 무덤은 무릉의 동북쪽에 있는데 위청의 무덤과 나란히 있다. 서쪽은 이 위청이고, 동족은 이 곽거병의 무덤이다. 위에 세운 돌이 있고, 앞에는 돌로 만든 말이 서로 마주하고 또한 돌로 만든 사람이 있다.
[三] 集解蘇林曰:「景,武謚也;桓,廣地謚也。」張晏曰:「謚法『布義行剛曰景,闢土服遠曰桓』。」 索隱案:景,桓,兩謚也。謚法「布義行剛曰景」,是武謚也;又曰「辟土服遠曰桓」,是廣地之謚也。以去病平生有武藝及廣邊地之功,故云「謚之并武與廣地曰景桓侯」。
[三] 【集解】 소림이 말하기를 “‘景’은 무의 시호이고, ‘桓’은 당을 넓힌 시호이다.” 했다. 장안이 말하기를 “시호법에 ‘의를 펴고 굳셈을 행하면 景이라 하고, 땅을 개척하고 멀리 있는 이를 복종시키면 환이라 한다.’” 했다. 이는 땅을 넓힌 시호이다. 곽거병이 평생 무예와 변경의 땅을 넓힌 공이 있었기 때문에 ‘시호를 무예와 땅을 넓힌 것을 아울러 경환후라 했다.’ 한 것이다.
[四] 索隱音市戰反。
[四] 【索隱】 음은 ‘市’와 ‘戰’의 反이다.
自驃騎將軍死後,大將軍長子宜春侯伉坐法失侯。後五歲,伉弟二人,陰安侯不疑及發干侯登皆坐酎金失侯。失侯後二歲,冠軍侯國除。其後四年,大將軍青卒,[一]謚為烈侯。子伉代為長平侯。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고 나서부터 대장군 위청의 맏아들 의춘후 항이 법을 어겨 후를 잃었다. 항의 동생 두 사람인 음안후 불의와 발간후 등이 모두 주금의 죄를 짓고 후를 잃었다. 후를 잃은 지 2년에 관군후의 나라를 없앴다. 그 후 4년 대장군 위청이 죽으니 시호를 열후라 했다. 아들 항이 대신하여 장평후가 되었다.
[一] 集解徐廣曰:「元封五年。」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봉 5년이다.” 했다.
自大將軍圍單于之後,十四年而卒。竟不復擊匈奴者,以漢馬少,而方南誅兩越,東伐朝鮮,擊羌、西南夷,以故久不伐胡。
대장군이 선우를 포위하였던 뒤로부터 14년이 지나 죽었다. 마침내 다시 흉노를 치지 못한 것은 한의 말이 적고, 바야흐로 남쪽의 양월을 주벌하고 동쪽으로 조선을 치며, 강과 서남이를 쳤기 때문에 오래 동안 오랑캐를 치지 못하였다.
大將軍以其得尚平陽長公主[一]故,長平侯伉代侯。六歲,坐法失侯。
대장군이 평양장공주에게 장가들었던 일 때문에 장평후 위항이 후를 대신하였다. 6년만에 범죄에 연루되어 후를 잃었다.
[一] 正義漢書云:「平陽侯曹壽有惡疾,就國,乃詔青尚平陽公主。」如淳云:「本陽信長公主,為平陽侯所尚,故稱平陽公主云。」
[一] 【正義】 『한서』에 “평양후 조수가 나쁜 병이 있고 나라에 나아가니 이에 위청에게 명령하여 평양공주에게 장가들게 한 것이다.” 했다. 여순이 말하기를 “본래 양신장공주가 평양후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평양공주 운운한 것이다.” 했다.
左方兩大將軍及諸裨將名:最[一]大將軍青,凡七出擊匈奴,斬捕首虜五萬餘級。一與單于戰,收河南地,遂置朔方郡,再益封,凡萬一千八百戶。封三子為侯,侯千三百戶。并之,萬五千七百戶。其校尉裨將以從大將軍侯者九人。其裨將及校尉已為將者十四人。[二]為裨將者曰李廣,自有傳。無傳者曰:
아래에 두 대장군과 여러 비장의 이름을 쓴다. 우선 대장군 위청은 모두 일곱 번 흉노를 쳐서 머리를 베거나 포로를 잡은 것이 5만여 명이었다. 첫 번째 선우와 싸워서 하남의 땅을 거두어 마침내 삭방군을 두었으며, 두 번 봉록을 더하여 모두 1만1천8백호이다. 세 아들을 봉하여 후가 되어 봉록이 1천3백호 였다. 이를 합하면 1만5천7백호이다. 그 교위 비장으로서 대장군을 따라 후가 된자는 9명이다. 그 비장과 교위로 장군이 되었던 자는 14명이다. 비장이 된 자로 이광은 전이 있다. 전이 없는 자는 아래와 같다.
[一] 索隱謂凡計也。
[一] 【索隱】 모두 게산함을 말한다.
[二] 索隱案:漢書云「為特將者十五人」,蓋通李廣也。此李廣一人自有傳,若漢書則七人自有傳,八人附見。七人謂李廣、張騫、公孫賀、李蔡、曹襄、韓說、蘇建也。
[二]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다만 장군이 된 자는 15명일뿐이다.”하니 아마도 이광을 포함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는 이광 한사람의 전만 있고, 『한서』에는 곧 7명의 전이 있으며 8명이 붙어 있다. 7명은 이광, 장건, 공손하, 이채, 한설, 소건이다.
將軍公孫賀。賀,義渠人,[一]其先胡種。賀父渾邪,景帝時為平曲侯,[二]坐法失侯。賀,武帝為太子時舍人。武帝立八歲,以太僕為輕車將軍,軍馬邑。後四歲,以輕車將軍出雲中。後五歲,以騎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南窌侯。後一歲,以左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無功。後四歲,以坐酎金失侯。後八歲,[三]以浮沮[四]將軍出五原二千餘里,無功。後八歲,[五]以太僕為丞相,封葛繹侯。賀七為將軍,出擊匈奴無大功,而再侯,為丞相。坐子敬聲與陽石公主姦,[六]為巫蠱,族滅,無後。
장군 공손하. 공손하는 의거사람이니 그 선조는 오랑캐 종족이다. 공손하의 아버지는 혼사이니 경제 때 평곡후가 되었다가 법에 저촉되어 후의 지위를 잃었다. 공손하는 무제 때 태자 사인이 되었다. 무제가 즉위한지 8년 만에 태복으로서 경거장군이 되어 마읍에 주둔하였다. 4년 후 경거장군으로서 운중을 나갔다. 5년 후 기장군으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라 공이 있어 봉하여 남교후가 되었다. 1년 후 좌장군으로서 두 번 대장군 위청을 따라 정양을 나갔으나 공이 없었다. 4년 후 주금의 죄를 지어 후의 지위를 잃었다. 8녕 후 부저장군으로서 오원을 나가 2천리를 갔으나 공이 없었다. 8년 후 태복으로서 승상이 되어 갈역후에 봉해졌다. 공손하는 7번 장군이되어 나가 흉노를 쳤으나 큰 공이 없었고, 두 번 후가 되고, 승상이 되었다. 아들 공손경성과 양석공주가 간통함에 연루되고, 무고되어 족이 멸하여져 후사가 없다.
[一] 正義今慶州,本義渠戎國也。地理志云北義渠道也。
[一] 【正義】 지금의 경주이니 본래 의거는 오랑캐 나라이다. 「지리지」에 “북의거도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為隴西太守。」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농서 태수가 되었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元鼎六年」。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정 6년이다.” 했다.
[四] 索隱沮音子餘反。
[四] 【索隱】 ‘沮’의 음은 ‘子’와 ‘餘’의 反이다.
[五] 集解徐廣曰:「太初二年。」
[五]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태초 2년이다.” 했다.
[六] 集解徐廣曰:「陽石,一云『德邑』。」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양석’은 한편으로 ‘덕읍’이라 한다.” 했다.
將軍李息,郁郅人。[一]事景帝。至武帝立八歲,為材官將軍,軍馬邑;後六歲,為將軍,出代;後三歲,為將軍,從大將軍出朔方:皆無功。凡三為將軍,其後常為大行。
장군 이식은 욱질 사람이다. 경제를 섬겼다. 무제 즉위 8년에 이르로 재관장군이 되어 마음에 주둔하였고, 6년 뒤 장군이 되어 대를 나갔고, 3년 후 장군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삭방을 나갔으나 모두 공이 없었다. 모두 3번 장군이 되었고, 그 후 늘 대행이 되었다.
[一] 集解服虔曰:「郅音窒。」 索隱服虔音窒,小顏音質。案:北地縣名也。正義之栗反。今慶州弘化縣是。
[一]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郅’의 음은 ‘窒’이다.” 했다. 【索隱】 복건은 음이 ‘窒’이라 했고, 소안은 음이 ‘質’이라 했다. 살펴보니 북지의 현 이름이다. 【正義】 ‘之’와 ‘栗’의 反이다. 지금의 경주 홍화현이 이것이다.
將軍公孫敖,義渠人。以郎事武帝。武帝立十二歲,為(驃)騎將軍,出代,亡卒七千人,當斬,贖為庶人。後五歲,以校尉從大將軍有功,封為合騎侯。後一歲,以中將軍從大將軍,再出定襄,無功。後二歲,以將軍出北地,後驃騎期,當斬,贖為庶人。後二歲,以校尉從大將軍,無功。後十四歲,以因杅[一]將軍築受降城。七歲,復以因杅將軍再出擊匈奴,至余吾,[二]亡士卒多,下吏,當斬,詐死,亡居民閒五六歲。後發覺,復繫。坐妻為巫蠱,族。凡四為將軍,出擊匈奴,一侯。
장군 공손오는 의거 사람이다. 낭으로서 무제를 섬겼다. 무제 즉위 12년에 표기장군이 되어 대를 나갔다가 군졸 7천 명을 잃어 머리를 베는 죄에 해당하나 재물을 내어 속죄하고 서인이 되었다. 5년 후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라 공이 있어 봉하여 합기후로 삼았다. 1년 후 중장군으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라 두 번 정양을 나갔으나 공이 없었다. 2년 후 장군으로서 북지를 나가 표기장군과 약속한 기일에 늦어 목을 베는 죄에 해당하나 재물을 내어 속죄하고 서인이 되었다. 2년 후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랐으나 공은 없었다. 14년 후 인우장군으로서 수항성을 쌓았다. 7년에 다시 인우장군으로서 두 번 나가 흉노를 치고, 여오에 이르렀는데 도망한 사졸들이 많았으므로 관리에게 내렸는데 죄가 목을 베는 것에 해당하였으나 죽음을 속이고 백성들 사이에 도망하여 6년을 살았다. 후에 발각되어 다시 묶였다. 처의 무고에 연좌되어 멸족되었다. 모두 4번 장군이 되어 나가 흉노를 쳐서 한 번 후가 되었다.
[一] 索隱音于。
[一] 【索隱】 음은 ‘于’이다.
[二] 索隱余音餘,又音徐。案:水名,在朔方。
[二] 【索隱】 ‘余’의 음은 ‘餘’이고, 또한 ‘徐’이다. 살펴보니 물 이름으로 삭방에 있다.
將軍李沮,[一]雲中人。[二]事景帝。武帝立十七歲,以左內史為彊弩將軍。後一歲,復為彊弩將軍。
장군 이저는 운중 사람이다. 경제를 섬겼다. 무제 즉위 17년 좌내사로 강노장군이 되었다. 1년 후 다시 강노장군이 되었다.
[一] 索隱音「俎豆」之「俎」。
[一] 【索隱】 음은 “‘俎豆’의 ‘俎’이다.
[二] 正義今嵐、勝州也。
[二] 【正義】 지금의 남주와 승주이다.
將軍李蔡,成紀人也。[一]事孝文帝、景帝、武帝。以輕車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樂安侯。已為丞相,坐法死。
장군 이채는 성기 사람이다. 효문제, 경제, 무제를 섬겼다. 경거장군으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라 공이 있어 봉하여 낙안후라 하였다. 승상이 되었다가 법을 어겨 죽음을 당하였다.
[一] 正義秦州縣也。
[一] 【正義】 진주현이다.
將軍張次公,河東人。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封為岸頭侯。其後太后崩,為將軍,軍北軍。後一歲,為將軍,從大將軍,再為將軍,坐法失侯。次公父隆,輕車武射也。以善射,景帝幸近之也。
장군 장차공은 하동 사람이다. 교위로서 위장군 청을 따라 공이 있었으므로 봉하여 안두후라 하였다. 그 후 태후가 죽자 장군이 되었고, 북군에 주둔하였다. 1년 후 장군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랐고, 두 번 장군이 되었다. 법을 어겨 후의 지위를 잃었다. 장차공의 아버지는 장융으로 가벼운 수레를 몰며 활을 잘 쏘았다. 활을 잘 쏘아 경제가 총애하고 가가이 하였다.
將軍蘇建,杜陵人。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為平陵侯,以將軍築朔方。後四歲,為游擊將軍,從大將軍出朔方。後一歲,以右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亡翕侯,失軍,當斬,贖為庶人。其後為代郡太守,卒,冢在大猶鄉。
장군 소건은 두릉 사람이다. 교위로 위장군 청을 따라 공이 있어 평릉후가 되었고, 장군으로서 삭방에 성을 쌓았다. 4년 후 유격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을 나갔다. 1년 후 우장군으로서 두 번 대장군을 따라 정양을 나갔으나 흡후 조신이 도망하고 군대를 잃어 머리를 베는 형벌에 해당하였으나 재물을 내고 속죄하여 서인이 되었다. 그 후 대군 태수가 되었다가 죽으니 무덤은 대유향에 있다.
將軍趙信,以匈奴相國降,為翕侯。武帝立十七歲,為前將軍,與單于戰,敗,降匈奴。
장군 조신은 흉노의 재상으로서 항복하여 흡후가 되었다. 무제 즉위 17년 전장군이 되어 선우와 싸우다 패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將軍張騫,以使通大夏,還,為校尉。從大將軍有功,封為博望侯。後三歲,為將軍,出右北平,失期,當斬,贖為庶人。其後使通烏孫,為大行而卒,冢在漢中。
장군 장건은 사신으로서 대하에 통하고 돌아와 교위가 되었다. 대장군을 따라 공이 있어 봉하여 박망후라 했다. 3년 후 장군이 되어 우북평을 나갔으니 길에 늦어 목을 베는 형벌에 해당하나 재물을 내고 속죄하여 서인이 되었다. 그 후 사신으로 오손을 통하였고, 대행이 되었다가 죽으니 무덤은 한중에 있다.
將軍趙食其,祋祤人也。[一]武帝立二十二歲,以主爵為右將軍,從大將軍出定襄,迷失道,當斬,贖為庶人。
장군 조이기는 대우 사람이다. 무제 즉위 23년 주작으로서 우장군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정양을 나갔으나 길을 잃어 죄가 머리를 베는 것에 해당하나 재물을 내고 속죄하여 서인이 되었다.
[一] 索隱縣名,在馮翊。祋音都活反,又音丁外反。祤音詡。正義上都誨反。雍州同官縣,本漢祋祤縣也。
[一] 【索隱】 현의 이름이니 풍익에 있다. ‘祋’의 음은 ‘都’와 ‘活’의 反이고, 또 음은 ‘丁’과 ‘外’의 反이다. ‘祤’의 음은 ‘詡(자랑할 후)’이다. 【正義】 위는 ‘上’과 ‘都’의 反이다. 옹주 동관현이 본래 한의 대우현이다.
將軍曹襄,以平陽侯為後將軍,從大將軍出定襄。襄,曹參孫也。
장군 조양은 평양후로서 후장군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다라 정양을 나갔다. 조양은 조찬의 손자이다.
將軍韓說,弓高侯庶孫也。以校尉從大將軍有功,為龍額侯,坐酎金失侯。元鼎六年,以待詔為橫海將軍,擊東越有功,為按道侯。以太初三年為游擊將軍,屯於五原外列城。為光祿勳,掘蠱太子宮,衛太子殺之。
장군 한설은 궁고후의 서손이다.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라 공이 있어 용액후가 되었으나 주금의 죄에 연루되어 후의 지위를 잃었다. 원정 6년 조서를 받아 횡매장군이 되어 동월을 쳤는데 공이 있어 안도후가 되었다. 태초 3년 유격장군이 되어 오원 외열성에 주둔하였다. 광록훈이 되었다가 태자궁을 파헤친 일로 위태자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將軍郭昌,雲中人也。以校尉從大將軍。元封四年,以太中大夫為拔胡將軍,屯朔方。還擊昆明,毋功,奪印。
장군 곽창은 운중 사람이다. 교위로서 대장군 위청을 따랐다. 원봉 4년 대중대부로서 발호장군이 되어 삭방에 주둔하였다. 돌아와 곤명을 쳤으나 공이 엇어 인을 빼앗겼다.
將軍荀彘,太原廣武人。以御見,[一]侍中,為校尉,數從大將軍。以元封三年為左將軍擊朝鮮,毋功。以捕樓船將軍坐法死。
장군 순제는 태원 광무 사람이다. 마차를 잘 모는 것으로서 황제를 뵙고, 시중이 되고, 교위가 되어 여러 번 대장군 위청을 따랐다. 원봉 3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을 쳤으나 공이 없었다. 누선장군을 체포한 일로서 법을 어겨 죽음을 당하였다.
[一] 正義以善御求見也。
[一] 【正義】 마차를 잘 모는 것으로서 황제를 뵙기를 구한 것이다.
最驃騎將軍去病,凡六出擊匈奴,其四出以將軍,[一]斬捕首虜十一萬餘級。及渾邪王以眾降數萬,遂開河西酒泉之地,[二]西方益少胡寇。四益封,凡萬五千一百戶。其校吏有功為侯者凡六人,而後為將軍二人。
표기장군 곽거병은 모두 여섯 번 흉노를 쳤는데 그 중 네 번은 아가서 장군으로서 11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혼야왕이 무리 수만과 함께 항복함에 이르자 마침내 하서, 주천의 땅을 개척하여 서쪽이 더욱 오랑캐의 도적질이 적어졌다. 봉fhe을 네 번 더하여 모두 1만5천1백호였다. 그 교리로 공이 있어 후가 된 자가 모두 6명이었고 후에 두 명이 장군이 되었다.
[一] 集解徐廣曰:「再出以剽姚校尉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표도교위로서 두 번 나갔다.” 했다.
[二] 正義河謂隴右蘭州之西河也。[酒泉]謂涼、肅等州。漢書西域傳云驃騎將軍擊破匈奴右地,置酒泉郡,後分置武威、張掖、燉煌等郡。
[二] 【正義】 ‘河’는 농서 난주의 서하를 말한다. [酒泉]은 양주, 숙주 등의 주이다. 『한서』 서역전에 “표기장군이 흉노의 우지를 쳐서 깨트리고 주천군을 두었고, 후에 나누어 무위, 장액, 돈황 등의 군이다.
將軍路博德,平州人。[一]以右北平太守從驃騎將軍有功,為符離侯。驃騎死後,博德以衛尉為伏波將軍,伐破南越,益封。其後坐法失侯。為彊弩都尉,屯居延,卒。
장군 노박덕은 평주 사람이다. 우북평 태수로 표기장군 곽거병을 따라 공이 있어 부리후가 되었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죽은 후 노박덕이 위위로서 복파장군이 되어 남월을 쳐서 깨리고 봉록을 더하였다. 그 후에 법을 어겨 후의 지위를 잃었다. 강노도위가 되어 거연에 주둔하였다가 죽었다.
[一] 正義漢書云西河平州。按:西河郡今汾州。
[一] 【正義】 『한서』에 “서하 평주이다.” 했다. 살펴보니 서하군은 지금의 분주이다.
將軍趙破奴,故九原人。[一]嘗亡入匈奴,已而歸漢,為驃騎將軍司馬。出北地時有功,封為從驃侯。坐酎金失侯。後一歲,為匈河將軍,攻胡至匈河水,無功。後二歲,[二]擊虜樓蘭王,復封為浞野侯。後六歲,[三]為浚稽將軍,將二萬騎擊匈奴左賢王,左賢王與戰,兵八萬騎圍破奴,破奴生為虜所得,遂沒其軍。居匈奴中十歲,復與其太子安國亡入漢。[四]後坐巫蠱,族。
장군 조파노는 옛 구원 사람이다. 일찍이 도망하여 흉노에 들어갔다가 이윽고 한에 돌아와 표기장군 곽거병의 사마가 되었다. 북지를 나갔을 때 공이 있어 봉하여 종표후가 되었다. 주금의 죄를 범하여 후의 지위를 잃었다. 1년 후 흉하장군이 되어 오랑캐를 공격하여 흉하수에 이르렀으나 공이 없었다. 2년 후 오랑캐 누란왕을 쳐서 다시 봉하여 착야후가 되었다. 6년 후 준계장군이 되어 2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 죄현왕을 쳤는데 좌현왕과 싸울 때 좌현왕이 군대 8만기병으로 파노를 포위하여 파노는 산채로 포로가 되고, 마침내 군대가 몰살하엿다. 흉노 안에 10년을 살다가 다시 그 태자 안국과 도망하여 한에 들어왔다. 후에 무고죄에 연루되어 멸족되었다.
[一] 正義今勝州。
[一] 【正義】 지금의 승주이다.
[二] 集解徐廣曰:「元封二年。」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봉 2년이다.” 했다.
[三] 集解徐廣曰:「太初二年。」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태초 2년이다.” 했다.
[四] 集解徐廣曰:「以太初二年入匈奴,天漢元年亡歸,涉四年。」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태초 2년에 흉노에 들어갔다가 천한 1년에 도망하여 돌아오니 4년이 지난 것이다.” 했다.
自衛氏興,大將軍青首封,其後枝屬為五侯。凡二十四歲而五侯盡奪,衛氏無為侯者。
위씨가 흥기함으로부터 대장군 위청이 처음 봉하여졌고, 그 후 일족들이 다섯 후가 되었다. 모두 24년 만에 다섯 후가 모두 후의 지위를 빼앗겨 위씨로 후가 된 자가 없어졌다.
太史公曰:蘇建語余曰:「吾嘗責大將軍至尊重,而天下之賢大夫毋稱焉,[一]願將軍觀古名將所招選擇賢者,勉之哉。大將軍謝曰:『自魏其、武安之厚賓客,天子常切齒。彼親附士大夫,招賢絀不肖者,人主之柄也。人臣奉法遵職而已,何與[二]招士!』」驃騎亦放此意,其為將如此。
태사공이 말하기를 소건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대장군을 책하기를 ‘지극히 높고 소중함에도 천하의 어진 대부들이 이를 칭찬함이 없으니 장군께서는 옛날의 이름 있는 장군이 어진이를 불러 선택하던 것을 힘쓰기를 원합니다.’ 했더니 대장군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이 빈객을 후대함으로부터 천자가 항상 이를 갈았습니다. 저 사대부를 가까이하고 어진이를 부르며 현명하지 못한 이를 물리치는 것은 임금의 권한입니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법을 받들고 직책을 따를 뿐 어찌 선비를 부르는 일에 관여하리오!’ 했습니다.” 했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또한 이러한 뜻과 같았으니 그 장군 됨이 이와 같았다.
[一] 索隱謂不為賢士大夫所稱譽。
[一] 【索隱】 현명한 사대부가 칭찬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二] 索隱音預。
[二] 【索隱】 음은 ‘預’이다.
【索隱述贊】君子豹變,貴賤何常。青本奴虜,忽升戎行。姊配皇極,身尚平陽。寵榮斯僭,取亂彝章。嫖姚繼踵,再靜邊方。
【索隱述贊】 군자는 허물을 말과 행동이 뚜렷이 달라지고, 귀천이 어찌 항상하겠는가? 위청은 본래 오랑캐였는데 홀연히 군대의 행렬을 탔다. 누이는 황제의 짝이 되고, 자신은 평양공주에게 장가들었다. 총애와 영예가 이에 넘치니 어지러움을 취함이 분명하다. 표요교위 곽거병이 뒤를 따라 거듭 변방을 안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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