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卷一百一十二
平津侯主父列傳第五十二
丞相公孫弘者,齊菑川國薛縣人也,[一]字季。少時為薛獄吏,有罪,免家貧,牧豕海上。年四十餘,乃學春秋雜說。養後母孝謹。
승상 공순홍은 제의 치천국 설현 사람이다. 자는 계이다. 어렸을 때 설현의 옥리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어 집이 가난하여 바닷가에서 돼지를 길렀다. 나이 40여세에 『춘추』와 잡설들을 배웠다. 계모에게 효도하고 삼갔다.
[一] 索隱案:薛縣屬魯國,漢置菑川國,後割入齊也。正義表云菑川國,文帝分齊置,都劇。括地志云:「故劇城在青州壽光縣南三十一里。故薛城在徐州滕縣界。地理志云薛縣屬魯國。」按:薛與劇隔兗州及太山,未詳。公孫弘墓又在青州北魯縣西二十里也。
[一] 【索隱】 ‘설현’은 노나라에 속하는데 한이 치천국을 두었고, 후에 갈라 제에 들였다. 【正義】 「표」에 “치천국은 문제가 제를 나누어 두었고, 도읍은 극 당이다.” 했다. 『괄지지』에 “옛 극성은 청주 수광현 남쪽 31리에 있다. 옛 설성은 서주 등현 경계에 있다. 「지리지」에 ‘설현은 노나라에 속한다.’” 했다. 살펴보니 설과 극은 예주와 태산의 사이이니 자세하지 않다. 공손홍의 묘는 또한 정주 북쪽 노현 서쪽 20리에 있다.
建元元年,天子初即位,招賢良文學之士。是時弘年六十,徵以賢良為博士。使匈奴,還報,不合上意,上怒,以為不能,弘迺病免歸。
건원 1년 천자가 즉위한 초에 현량과 문학의 선비를 불렀다. 이 때 공손홍의 나이 60이었는데 현량으로서 불러 박사로 삼았다. 흉오에 사신갔다 돌아와 보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합치하지 않자 황제가 노하여 잘하지 못한다. 여기니 공손홍이 술병을 핑계로 면직하고 돌아갔다.
元光五年,有詔徵文學,菑川國復推上公孫弘。弘讓謝國人曰:「臣已嘗西應命,以不能罷歸,願更推選。」國人固推弘,弘至太常。太常令所徵儒士各對策,百餘人,弘第居下。策奏,天子擢弘對為第一。召入見,狀貌甚麗,拜為博士。是時通西南夷道,置郡,巴蜀民苦之,詔使弘視之。還奏事,盛毀西南夷無所用,上不聽。
원광 5년 문학을 부름이 있었으므로 치천국이 다시 황제에게 공손홍을 추천하였다. 공손홍이 국인들에게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이 이미 일찍이 서쪽으로 명에 답하였으나 일을 잘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가려 추천하기를 원합니다.” 했다. 국인들이 굳게 공손홍을 추천하니 공손홍이 태상에 이르렀다. 태상이 불려온 유학자들과 각각 계책에 대답하게 하였는데 100여명 중 공손홍의 차례는 아래에 있었다. 계책을 아뢰니 천자가 공손홍의 계책을 제일로 발탁하였다. 불러 들여 만나니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벼슬을 주어 박사로 삼았다. 이 때 서남쪽의 오랑캐와 통하여 군을 두었는데 파와 촉 땅의 백성들이 괴로워 하였으므로 공손홍에게 명령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돌아가 일을 아뢰니 서남이의 쓸모없음을 성대하게 비판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弘為人恢奇多聞,常稱以為人主病不廣大,人臣病不儉節。弘為布被,食不重肉。後母死,服喪三年。每朝會議,開陳其端,令人主自擇,不肯面折庭爭。於是天子察其行敦厚,辯論有餘,習文法吏事,而又緣飾以儒術,[一]上大說之。二歲中,[二]至左內史。弘奏事,有不可,不庭辯之。嘗與主爵都尉汲黯請閒,汲黯先發之,弘推其後,天子常說,所言皆聽,以此日益親貴。嘗與公卿約議,至上前,皆倍其約以順上旨。汲黯庭詰弘曰:「齊人多詐而無情實,始與臣等建此議,今皆倍之,不忠。」上問弘。弘謝曰:「夫知臣者以臣為忠,不知臣者以臣為不忠。」上然弘言。左右幸臣每毀弘,上益厚遇之。
공손홍의 사람됨은 넓고 뛰어나며 학식이 많았으며 항상 임금이 광대하지 않음과 신하의 절약하고 검소하지 않음을 병폐로 여겼다. 공손홍은 베옷을 입고, 밥먹을 때 2가지 이상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계모가 죽자 3년의 상복을 입었다. 매번 조정에서 의논할 때 그 단서를 열어 펴서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고, 얼굴을 맞대고 꾸짖으며 뜰에서 다투는 것을 하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천자가 그 행실이 도탑고, 변론에 여유가 있으며, 문장과 법, 관리의 일을 익히고 또한 유학으로 꾸민 것을 관찰하고는 황제가 크게 기뻐하였다. 2년 만에 좌내사에 이르렀다. 공손홍이 일을 아뢰어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조정에서 그것을 변론하지 않았다. 일찍이 주작도위 급암과 함께 한가한 틈을 청하여 급암이 먼저 말을 꺼내면 공손홍이 그것을 받쳐주니 천자가 항상 기뻐하면서 말한 것을 모두 들어주니 이로써 날로 더욱 친하고 귀하게 되었다. 일찍이 공경과 함께 의논을 약속하고 황제의 앞에 이르렀는데 모두 그 약속을 배반하고 황제의 뜻을 따랐다. 급암이 공손홍을 조정에서 따져 말하기를 “제나라 사람이(공손홍: 제나라 출신임) 속임이 많고 실제가 없어 처음 신들과 이 논의를 세우기로 하고서는 지금 모두 그것을 배반하니 충성스럽지 못합니다.” 했다.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공손홍이 사과하며 말하기를 “대저 신을 아는 자는 신이 충성스럽다. 하고, 신을 알지 못하는 자는 신을 충성스럽니 않다. 합니다.” 했다. 황제가 공손홍의 말을 그렇다 여겼다. 좌우의 총애 받는 신하들이 매번 공손홍을 비방하였으나 황제는 더욱 두터이 대우하였다.
[一] 索隱謂以儒術飾文法,如衣服之有領緣以為飾也。
[一] 【索隱】 유술로서 문장과 법을 꾸미고 이복의 옷깃 가에 선을 두르는 것으로서 꾸밈을 삼는 것을 말한다.
[二] 集解徐廣曰:「一云一歲。」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편 1년이라 말하기도 한다.” 했다.
元朔三年,張歐免,以弘為御史大夫。是時通西南夷,東置滄海,北築朔方之郡。弘數諫,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發十策,弘不得一。[一]弘迺謝曰:「山東鄙人,不知其便若是,願罷西南夷、滄海而專奉朔方。」上乃許之。
원삭 3년 장구를 면직시키고 공손홍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이 때 서남이와 통하고, 동쪽으로 창해군을 두었다. 북쪽 삭방의 군에 성을 쌓았다. 공손홍이 여러 번 간하면서 황폐하여 중국이 받들어도 쓸 수 없는 땅이니 그만 둘 것을 원한다. 하였다. 이에 천자가 이에 주매신 등으로 하여금 공손홍을 곤란하게 하는 삭방을 두는 편리함을 말하게 하였다. 열 가지 계책을 말하였는데 공손홍이 한 가지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공손홍이 이에 사고하며 말하기를 “산동의 비루한 사람이 그 편리함이 이 같은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서남이와 창해군의 일을 그치고, 오로지 삭방을 받들기를 원합니다.” 했다. 황제가 이에 극서을 허락하였다.
[一] 集解韋昭曰:「以弘之才,非不能得一也,以為不可,不敢逆上耳。」 索隱按:韋昭以弘之才非不能得一,以為不可,不敢逆上故耳。正義顏師古曰:「言其利害十條,弘無以應。」
[一]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공손홍의 재주로 하나도 얻을(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여기고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을 분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위소는 “공손홍의 재주로 하나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을 뿐이다.” 했다. 【正義】 안사고가 말하기를 “그 이로움과 해로운 것 10개조를 공손홍이 대답할 수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했다.
汲黯曰:「弘位在三公,奉祿甚多。然為布被,此詐也。」上問弘。弘謝曰:「有之。夫九卿與臣善者無過黯,然今日庭詰弘,誠中弘之病。夫以三公為布被,誠飾詐欲以釣名。且臣聞管仲相齊,有三歸,侈擬於君,桓公以霸,亦上僭於君。晏嬰相景公,食不重肉,妾不衣絲,齊國亦治,此下比於民。[一]今臣弘位為御史大夫,而為布被,自九卿以下至於小吏,無差,誠如汲黯言。且無汲黯忠,陛下安得聞此言。」天子以為謙讓,愈益厚之。卒以弘為丞相,封平津侯。[二]
급암이 말하기를 “공손홍은 3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녹을 받든 것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베옷을 입는 것은 이는 속이는 것입니다.” 했다.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공송홍이 사과하면서 말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저 9경과 신하로 선한 자로는 급암보다 나은 이가 없지만 오늘 조정에서 저를 질책하니 진실로 저의 병폐에 알맞습니다. 대저 3공으로서 베옷을 입는 것은 진실로 꾸미고 속여서 이름을 낚시질 하려는 것입니다. 또 신이 들으니 관중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고, 三歸를 두어 사치함이 임금에 비견할 만하였고, 환공은 제후의 우두머리로 위로 임금에게 참람하였습니다. 안영은 경공을 도와 밥먹을 때 2가지 이상의 고기를 먹지 않았고, 첩은 비단 옷을 입지 않았음에도 제나라가 또한 다스려졌습니다. 이는 백성에 가까운 것입니다. 지금 신 공손홍의 지위가 어사대부가 되었음에도 베옷을 입어 9경 이하로부터 하급 관리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없으니 진실로 급암의 말과 같습니다. 또한 급암의 충성이 없다면 폐하께서 어찌 이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했다. 천자가 겸손하고 양보한다 여겨 더욱 두터이 대우하였다. 마침내 공손홍이 승상이 되어 평진후에 봉해졌다.
[一] 索隱比音鼻。比者,近也。小顏音「比方」之「比」。
[一] 【索隱】 ‘比’의 음은 ‘鼻’이다. ‘比’는 가까움이다. 소안은 “음이 ‘比方(서로 견주어 봄)’의 ‘比’이다.” 했다.
[二] 集解徐廣曰:「大臣表曰元朔五年十一月乙丑,公孫弘為丞相。功臣表曰元朔(三)[五]年十一月乙丑,封平津侯。」駰案漢書,高成之平津鄉也。索隱案:漢書曰「漢興,皆以列侯為丞相,弘本無爵,乃詔封弘高成之平津鄉六百五十戶為平津侯。丞相封侯,自弘始也」。
[二]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대신표」에 ‘원삭 5년 11월 을축일에 공손홍이 승상이 되었다.’ 했고, 「공신표」에는 ‘원삭 (3){5}년 11월 을축일에 평진후를 봉하였다.’” 했다. 배인이 살펴보니 『한서』에 “고성의 평진향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한서』에 “한이 흥기하여 모두 열후를 승상으로 삼았는데 공손홍이 본래 관작이 없었다. 이에 조칙으로 공손홍을 고성의 평진향 650호에 봉하여 평진후라 한 것이다. 승상을 후로 봉한 것은 공손홍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했다.
弘為人意忌,外寬內深。[一]諸嘗與弘有卻者,雖詳與善,陰報其禍。殺主父偃,徙董仲舒於膠西,皆弘之力也。食一肉脫粟之飯。[二]故人所善賓客,仰衣食,弘奉祿皆以給之,家無所餘。士亦以此賢之。
공손홍의 사람됨은 마음속으로 사람을 의심하고 꺼리고 밖은 너그러우나 안은 깊었다. 일찍이 공손홍과 틈이 있는 자는 비록 거짓으로 잘 지낸 듯하나 뒤로는 그 화를 갚았다. 주보언을 죽이고 동중서를 교서로 옮긴 것(좌천시킨 것)은 모두 공손홍의 힘이었다. 한 가지 고기반찬에 거친 밥을 먹었다. 친구들을 빈객으로 잘 대하여 옷과 먹을 것을 우러르면(청하면) 공손홍이 봉록을 모두 주어 집에 남은 것이 없었다. 선비들이 또한 이것으로 어질다 하였다.
[一] 索隱謂弘外寬內深,意多有忌害也。
[一] 【索隱】 공손홍이 밖으로는 너그럽고 안으로는 깊어 꺼리고 해치는 뜻이 많았음을 말한 것이다.
[二] 索隱案:一肉,言不兼味。脫粟,纔脫穀而已,言不精鑿也。
[二] 【索隱】 살펴보니 ‘一肉’은 맛을 겸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脫粟’은 한번 곡식의 껍질을 벗겼을 뿐이니 정밀하게 각지 않음을 말한다.
淮南、衡山謀反,治黨與方急。弘病甚,自以為無功而封,位至丞相,宜佐明主填撫國家,使人由臣子之道。今諸侯有畔逆之計,此皆宰相奉職不稱,恐竊病死,[一]無以塞責。乃上書曰:「臣聞天下之通道五,所以行之者三。[二]曰君臣,父子,兄弟,夫婦,長幼之序,此五者天下之通道也。智,仁,勇,此三者天下之通德,所以行之者也。故曰『力行近乎仁,好問近乎智,知恥近乎勇』。知此三者,則知所以自治;知所以自治,然後知所以治人。天下未有不能自治而能治人者也,此百世不易之道也。今陛下躬行大孝,鑒三王,建周道,兼文武,厲賢予祿,[三]量能授官。今臣弘罷駑之質,無汗馬之勞,陛下過意擢臣弘卒伍之中,封為列侯,致位三公。臣弘行能不足以稱,素有負薪之病,恐先狗馬填溝壑,終無以報德塞責。願歸侯印,乞骸骨,避賢者路。」 天子報曰:「古者賞有功,褎有德,守成尚文,遭遇右武,[四]未有易此者也。朕宿昔庶幾獲承尊位,懼不能寧,惟所與共為治者,君宜知之。蓋君子善善惡惡,(君宜知之)君若謹行,常在朕躬。君不幸罹霜露之病,何恙不已,[五]迺上書歸侯,乞骸骨,是章朕之不德也。今事少閒,君其省思慮,一精神,輔以醫藥。」因賜告牛酒雜帛。居數月,病有瘳,視事。
회남왕과 형산왕이 모반하니 무리를 다스리는 것이 바야흐로 급하였다. 공손홍이 병이 심하고, 스스로 공이 없이 봉해져 지위가 승상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현명한 임금을 도와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따르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신하의 도리를 따르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지금 제후들이 반역의 계책을 꾸미는 것은 모두 재상이 직책을 받듦에 걸맞지 않고, 병으로 죽어 책임을 막을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글을 몰려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천하의 공통되는 도가 다섯인데 행하는 방법은 셋입니다. 그것은 군신, 부자, 형제, 부부, 장유의 차례를 말하는데 이 다섯 가지는 천하에 공통되는 도입니다. 지, 인,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에 공통되는 덕목으로 그것을 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써 행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깝고, 염치를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아는 것은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이고, 스스로 다스리는 방법을 안후에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천하에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지 않는 것은 백세대에 바뀌지 않는 도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몸소 큰 효를 행하고 삼왕을 볻 받아 주나라의 도를 세우시고, 문무를 겸하시며 어진 이를 면려하고 녹을 주며 능력을 헤아려 관직을 주십니다. 지근 신 공손홍이 쓸모없는 둔한 자질로 말을 땀 흘리게 하는 수고로움이 없는데도 폐하께서 지나친 뜻으로 신 공손홍을 병졸들 가운데서 발탁하시어 열후에 봉하여 지위가 삼공에 이르렀습니다. 신 공손홍의 행실과 능력이 걸맞지 않고 평소 負薪의 병이 있어 기르던 개와 말보다 먼저 죽어 도랑과 골짜기를 채워 끝내 덕에 보답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후의 인을 돌려드리고 사직하여 어진 자에게 길을 피하여주기를 원합니다.” 했다. 천자가 대답하기를 “옛날에는 공이 있음에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이를 표창하고, 이루어 진 것을 지킬 때는 문을 숭상하고, 병란을 만났을 때 무를 존중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짐은 지난 날 요행히 황제 위를 계승하여 편안하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오직 함께 다스릴 것만을 생각하였던 것은 그대도 마땅히 그것을 알고 있다. 대저 군자가 선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는 것을 (그대가 그것을 알고 있으니) 그대는 행실을 삼가고, 늘 나의 옆에 있으라. 그대가 불행히도 서리와 이슬의 병에 걸렸으나 어찌 그치지 않음을 근심하여 이에 글을 올려 후의 지위를 반납하고, 사직을 청하는 것은 나의 덕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정사가 조금 한가하니 그대는 그 생각을 살펴서 정신을 한결같이 하고 의약으로 보충하라.” 했다. 인하여 휴가와 소고기, 술, 여러 비단을 내렸다. 몇 달이 지난 후 병이 낫자 일을 보았다.
[一] 索隱案:人臣委質於君,死生由君。今若一朝病死,是竊死也。
[一] 【索隱】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죽음과 삶이 임금에게서 말미암는다. 지금 만약 하루아침에 병들어 죽는 다면 이는 헛되이 죽는 것이다.
[二] 索隱案:此語出子思子,今見禮記中庸篇。
[二] 【索隱】 살펴보니 이 말은 자사에게서 나왔는데 지금 『예기』 「중용」편에 보인다.
[三] 集解徐廣曰:「厲,一作『廣』也。」
[三]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厲’는 한편으로 ‘廣’이라 쓴다.” 했다.
[四] 索隱小顏云:「右亦上也。言遭遇亂時則上武也。」
[四] 【索隱】 소안이 “‘右’는 또한 上(위의)이다. 어지러움(병란)을 만났을 때는 곧 武를 위로 친다.” 했다.
[五] 集解漢書音義曰:「何恙,喻小疾不以時愈。」 索隱恙,憂也。言罹霜露寒涼之疾,輕,何憂於病不止。禮曰「疾止復初」也。
[五] 【集解】 「한서음의」에 “‘何恙’은 작은 병이 때로 낫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했다. 【索隱】 ‘恙’은 ‘憂(근심)’이다. 서리, 이슬과 추위의 병에 걸렸음을 말한 것이니 병이 가벼워 어찌 병이 낫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를 말한 것이다. 『예기』에 “疾止復初(병이 그쳐 처음을 회복한다.)” 했다.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一]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二]
원수 2년 공손홍이 병들어 마침내 승상으로서 죽었다. 아들 도를 평진후로 삼았다. 도가 산양태수가 된지 10여년에 법을 어겨 후의 지위를 잃었다.
[一] 集解漢書曰:「年八十。」 索隱漢書云凡為御史、丞相六歲,年八十終。
[一] 【集解】 『한서』에 “나이 80이라 했다.” 【索隱】 『한서』에 “무릇 어사와 승상이 된지 6년만에 나이 80세로 죽었다.
[二] 索隱漢書云坐不遣鉅野令史成詣公車,論為城旦。元始中詔復弘後為關內侯也。
[二] 【索隱】 『한서』에 “거야령 사성이 공거에 나아가지 않은 죄에 연루되었는데 낮에는 적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형벌에 논죄되었다. 원시 중에 조칙으로 다시 공손홍을 불러 관내후로 삼았다.
主父偃者,齊臨菑人也。學長短縱橫之術,晚乃學易、春秋、百家言。游齊諸生閒,莫能厚遇也。齊諸儒生相與排擯,不容於齊。家貧,假貸無所得,迺北游燕、趙、中山,皆莫能厚遇,為客甚困。孝武元光元年中,以為諸侯莫足游者,乃西入關見衛將軍。衛將軍數言上,上不召。資用乏,留久,諸公賓客多厭之,乃上書闕下。朝奏,暮召入見。所言九事,其八事為律令,一事諫伐匈奴。其辭曰:臣聞明主不惡切諫以博觀,忠臣不敢避重誅以直諫,是故事無遺策而功流萬世。今臣不敢隱忠避死以效愚計,願陛下幸赦而少察之。司馬法曰:「國雖大,好戰必亡;天下雖平,忘戰必危。」天下既平,天子大凱,[一]春蒐秋獮,諸侯春振旅,秋治兵,所以不忘戰也。[二]且夫怒者逆德也,兵者凶器也,爭者末節也。古之人君一怒必伏尸流血,故聖王重行之。夫務戰勝窮武事者,未有不悔者也。昔秦皇帝任戰勝之威,蠶食天下,并吞戰國,海內為一,功齊三代。務勝不休,欲攻匈奴,李斯諫曰:「不可。夫匈奴無城郭之居,委積之守,遷徙鳥舉,難得而制也。輕兵深入,糧食必絕;踵糧以行,重不及事。得其地不足以為利也,遇其民不可役而守也。勝必殺之,非民父母也。靡獘[三]中國,快心匈奴,非長策也。」秦皇帝不聽,遂使蒙恬將兵攻胡,辟地千里,以河為境。地固澤(鹹)鹵,[四]不生五穀。然後發天下丁男以守北河。暴兵露師十有餘年,死者不可勝數,終不能踰河而北。是豈人眾不足,兵革不備哉?其勢不可也。又使天下蜚芻輓粟,[五]起於黃、腄、[六]琅邪負海之郡,轉輸北河,率三十鍾而致一石。男子疾耕不足於糧饟,女子紡績不足於帷幕。百姓靡敝,孤寡老弱不能相養,道路死者相望,蓋天下始畔秦也。
주부 언은 제 임치 땅 사람이다. 장단종횡의 방법을 배웠고, 늦게 『역경』, 『춘추』, 백가의 말을 매웠다. 제의 여러 생도들 사이에 교류하는데 두터이 대우하는 이가 없었다. 제의 여러 유생들이 밀어내고 물리쳐서 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집이 가난하여 물건을 빌리려 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어 이에 북쪽으로 연, 조, 중산에서 교유하였는데 모두 후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객이 되어 매우 곤궁하였다. 효무제 원광 1년 중에 제후들 중에 교유하기에 충분한자가 없다여겨 이에 서쪽으로 관에 들어가 위청 장군을 만났다. 위청 장군이 여러 번 황제에게 말하였으나 황제가 부르지 않았다. 쓰임을 위한 재물이 결핍하고 오래 머물러도 여러 공들의 빈객이 많이 그를 싫어하니 이에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아침에 아뢰었는데 저녁에 불러 만났다. 아홉 가지를 말하였는데 그 중 여덟 가지를 율령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한 가지 일은 흉노를 치는 것을 간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신이 들으니 현명한 임금은 간절한 감함으로서 넓게 관찰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충신은 “감히 곧게 간하는 것으로 무거운 죽임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일에는 빠진 계책이 없고, 공은 만대에 흐릅니다. 지금 신이 감히 충성을 숨기거나 죽음을 피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을 드리니 폐하께서 요행히 용서하시고 조금이라도 살펴주시기를 원합니다. 「사마법」에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크다 할지라도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평안하여도 사움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하니 천하가 이미 평안해지니 천자는 大凱 음악을 듣고 봄과 가을에 사냥하고 제후는 봄에 적국에 대해 기세를 떨치고 가을에는 군대를 다스리는 것을 전쟁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함이란 덕을 거스르는 것이고, 병기는 흉기이며, 다툼은 마지막에 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임금은 한 번 노하면 반드시 당에 시체가 눕고 피가 흐르게 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왕은 그것을 행하기를 신중하게 합니다. 대저 싸워 이기려 무예의 일을 다하기를 힘쓰고서 뉘우치지 않는 자는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진나라 황제가 싸워 이기는 위엄을 맡아 천하를 잠식하고 戰國을 병탄하여 海內를 하나로 한 것은 공이 三代에 비견되었습니다. 이김에 힘써 쉬지 않고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니 이사가 간하여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대저 흉노는 성곽 안에 살면서 재물을 쌓아 지킴이 없으니 새떼가 일어나듯 옮겨 다니니 얻어도 제재하기 어렵습니다. 가볍고 날랜 군대를 깊이 들어가게 하면 양식이 반드시 끊길 것이고, 양식을 가지고 뒤쫒게하면 무거워 일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 땅을 얻어도 충분히 이로움을 삼을 수 없고, 그 백성을 대우하여도 부려서 지킬 수 없습니다. 이김은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하니 백성들의 부모가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하고 흉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했으나 진나라 황제가 듣지 않고 마침내 몽렴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오랑캐를 공격하게 하여 천리의 땅을 열어 河로서 경계를 삼았습니다. 땅은 굳고 못은 짜서 5곡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천하의 丁男을 징발하여 北河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군사들이 햇볕에 드러나게 한지 10여년에 죽은 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고 마침내 하를 넘어 북쪽으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이 부족하고 병기가 갖추어지지 않아서이겠습니까? 그 형세가 할 수 없었던 때문입니다. 또 천하로 하여금 말 먹이와 곡식을 나르게 하여 황, 수, 낭야의 바다를 등진 군에서 일어나 북하에 운반하는데 30종을 가져가게 하면 이르는 것은 한 석입니다. 남자는 밭을 갈다 병들어도 양식에 부족하고, 여자는 길쌈하여도 장막을 만들기에 부족합니다. 백성이 피폐해져 고아와 과부, 노약자가 서로 봉양하지 못하고 길에는 죽은 자가 서로 바라보이니 대개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한 시작입니다.
[一] 集解應劭曰:「大凱,周禮還師振旅之樂。」
[一]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大凱’는 『주례』에 ‘군대를 돌리고 위엄을 떨치는 음악이다.’ 했다.
[二] 集解宋均曰:「春秋少陽少陰,氣弱未全,須人功而後用,士庶法之,教而後成,宗仁本義。天子諸侯必春秋講武,簡閱車徒,以順時氣,不忘戰也。」 索隱按:宋均云「宗本仁義,助少陰少陽之氣,因而教以簡閱車徒」。
[二] 【集解】 송균이 말하기를 “봄과 가을은 양과 음의 기운이 적어 기운이 약하고 완전하지 않아 반드시 사람이 공을 쌓은 후에 사용하여 士庶가 그것을 본받고, 가르친 후에 완성시키는 것이 인의를 높이고 근본하는 것입니다. 천자와 제후는 반드시 봄과 가을로 무예를 익히고, 수레와 무리를 일일이 가려서 조사하는 것으로서 때의 기를 다라 전쟁을 잊지 않는다.”했다. 【索隱】 살펴보니 송균은 “인의를 높이고 근본하여 음과 양의 기운이 적음을 돕고 인하여 가르치는 것으로서 수레와 무리를 일일이 조사한다.” 했다.
[三] 索隱靡音糜。獘猶凋敝也。
[三] 【索隱】 ‘靡’의 음은 ‘麋(큰 사슴 미)’이다. ‘獘(넘어질 폐)’는 ‘凋(시들 조)蔽(덮을 폐)와 같다.
[四] 集解徐廣曰:「澤,一作『斥』。」瓚曰:「其地多水澤,又有鹵。」
[四]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澤’은 한편으로 ‘斥’이라 쓴다.” 신찬이 말하기를 “그 땅은 물과 늪이 많고 또한 소금기가 있다.” 했다.
[五] 集解文穎曰:「轉芻穀就戰是也。」
[五] 【集解】 문영이 말하기를 “꼴과 곡식을 운반하여 전쟁에 나간다 한 것이 이것이다.” 했다.
[六] 集解徐廣曰:「腄在東萊,音縋。」 索隱縣名,在東萊,音逐瑞反,注音縋。
[六]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腄’는 동래에 있는데 음은 ‘縋(매어달 추)’이다.” 했다. 【索隱】 현 이름이니 동래에 있다. 음은 ‘逐’과 ‘瑞’의 反인데 주음은 ‘縋’이다.
及至高皇帝定天下,略地於邊,聞匈奴聚於代谷之外而欲擊之。御史成進諫曰:「不可。夫匈奴之性,獸聚而鳥散,從之如搏影。今以陛下盛德攻匈奴,臣竊危之。」高帝不聽,遂北至於代谷,果有平城之圍。高皇帝蓋悔之甚,乃使劉敬往結和親之約,然後天下忘干戈之事。故兵法曰「興師十萬,日費千金」。夫秦常積眾暴兵數十萬人,雖有覆軍殺將係虜單于之功,亦適足以結怨深讎,不足以償天下之費。夫上虛府庫,下敝百姓,甘心於外國,非完事也。夫匈奴難得而制,非一世也。行盜侵驅,所以為業也,天性固然。上及虞夏殷周,固弗程督,禽獸畜之,不屬為人。夫上不觀虞夏殷周之統,而下(脩)[循]近世之失,此臣之所大憂,百姓之所疾苦也。且夫兵久則變生,事苦則慮易。乃使邊境之民獘靡愁苦而有離心,將吏相疑而外市,[一]故尉佗、章邯得以成其私也。夫秦政之所以不行者,權分乎二子,此得失之效也。故周書曰「安危在出令,存亡在所用」。願陛下詳察之,少加意而熟慮焉。
고황제가 천하를 평정하고 변경에서 땅을 빼앗음에 이르러 흉노가 대곡의 밖에 모였다는 것을 듣고 그들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어사 성유가 간하여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대저 흉노의 성품은 짐승이 모이고, 새가 흩어지는 듯하여 그들을 따르는 것은 그림자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성대한 덕으로 흉노를 치는 것에 대하여 저는 적이 위태롭게 여깁니다.’ 했으나 고제가 듣지 않고 마침내 북쪽으로 대곡에 이르렀는데 과연 평성에서의 포위를 당함이 있었습니다. 고황제께서 매우 뉘우쳤습니다. 이에 유경으로 하여금 가서 화친의 약속을 맺은 후에야 천하가 전쟁의 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병법에 ‘군대 10만을 일으키면 하루 천금을 소비한다.’ 했습니다. 대저 진나라가 항상 무리를 모아 사나운 군대 수십만을 두어 비록 군대를 뒤엎고, 장군을 죽이며 선우를 사로잡는 공이 있었으나 또한 마침 원한을 맺고 원수를 깊게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비용을 보상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대저 위로는 창고를 비게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피폐하기 하고, 외국에게는 기꺼운 마음을 주는 것은 일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흉노는 얻을 수 있되 제재하기 어려운 것은 한 세대가 아니었습니다. 도적질하고 침범하고 치달리는 것을 업으로 삼고 천성이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위로는 우, 은, 주가 진실로 범으로 살펴보지 않고, 짐승으로 그들을 길러 사람됨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위로 우, 하, 은, 주의 전통을 관찰하지 않고 근세의 잘못을 따르시니 이는 제가 크게 근심하는 것이고,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군대의 일이 오래되면 변란이 생기고, 일이 괴로우면 곧 생각이 바뀝니다. 이에 변경의 백성들로 하여금 근심과 괴로움에 피폐해져 마음이 떠나게 하고, 장군과 관리들이 서로 의심하고 밖으로 거래하게 되기 때문에 위타, 장한이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저 진나라의 정사가 행해지지 않은 까닭은 권력이 두 아들에게 나뉘어졌기 때문이니 이는 얻고 잃음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주서」에 ‘편안함과 위태로움은 정령에서 나오고, 나라를 보존하는 것과 망함은 쓰는 바에 달려있다.’ 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자세하게 살피셔서 조금의 생각을 더하셔서 깊이 이것들을 생각하십시오. 했다.
[一] 集解張晏曰:「與外國交求利己,若章邯之比。」
[一]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외국과 더불어 사귀어 자기에게 이로움을 구하는 것이니 장한의 무리와 같다.” 했다.
是時趙人徐樂、[一]齊人嚴安[二]俱上書言世務,各一事。徐樂曰:
이 때 조나라 사람 서악과 제나라 사람 엄안이 갖추어 글을 올려 세상에 힘써야 할 것으로 각기 한 가지 일을 말하였다.
[一] 索隱樂音岳。
[一] 【索隱】 ‘樂’의 음은 ‘岳’이다.
[二] 索隱按:本姓莊,避明帝諱,後並改「嚴」也。安及徐樂並拜郎中。樂後為中大夫。
[二] 【索隱】 살펴보니 본래 성은 ‘莊’인데 후에 모두 고쳐 ‘嚴’이라 했다. 엄안과 서악이 모두 낭중에 임명되었다.
臣聞天下之患在於土崩,不在於瓦解,古今一也。何謂土崩?秦之末世是也。陳涉無千乘之尊,尺土之地,身非王公大人名族之後,無鄉曲之譽,非有孔、墨、曾子之賢,陶朱、猗頓之富也,然起窮巷,奮棘矜,[一]偏袒大呼而天下從風,此其故何也?由民困而主不恤,下怨而上不知(也),俗已亂而政不脩,此三者陳涉之所以為資也。是之謂土崩。故曰天下之患在於土崩。何謂瓦解?吳、楚、齊、趙之兵是也。七國謀為大逆,號皆稱萬乘之君,帶甲數十萬,威足以嚴其境內,財足以勸其士民,然不能西攘尺寸之地而身為禽於中原者,此其故何也?非權輕於匹夫而兵弱於陳涉也,當是之時,先帝之德澤未衰而安土樂俗之民眾,故諸侯無境外之助。此之謂瓦解,故曰天下之患不在瓦解。由是觀之,天下誠有土崩之勢,雖布衣窮處之士或首惡而危海內,陳涉是也。況三晉之君或存乎!天下雖未有大治也,誠能無土崩之勢,雖有彊國勁兵不得旋踵而身為禽矣,吳、楚、齊、趙是也。況群臣百姓能為亂乎哉!此二體者,安危之明要也,賢主所留意而深察也。
제가 들으니 ‘천하의 근심은 土崩에 달려있고, 瓦解에 있지 않다.’ 하는데 옛과 지금이 한 가지입니다. 무엇을 일러 땅이 무너진다. 하는가? 진나라의 말기 세상이 이것입니다, 진섭은 수레 천대를 낼 수 있는 존귀함과 한 자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고, 자신은 왕공과 대인, 명망있는 가문의 후예가 아니고 시골구석의 명예도 없고, 공자, 묵자, 증자의 현명함이 없고, 도주, 의돈의 부유함이 없음에도 궁곤한 거리에서 일어나 작대기로 싸우며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크게 부르짖으니 천하가 바람을 따르듯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백성은 궁곤함에도 임금이 구휼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원망하는데도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았고, 세속이 어지러운데도 정사를 닦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으로 이 세 가지는 진섭이 바탕을 삼은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土崩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근심은 土崩에 달려있다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瓦解라 말하는가? 오, 초, 제, 조의 병란이 이것입니다. 7국이 모의하여 대역을 행하면서 부르기를 모두 만승의 임금(황제)를 일컳고, 갑옷 입은 군사 수십만을 대동하여 위엄은 그 경계 안에서 충분하고, 재물은 그 사민을 따르게 하기에 충분하였지만 서쪽으로 한 자, 한 치의 땅을 빼앗지 못하였고, 자신은 중원에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이는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권세가 필부보다 가볍고, 군대가 진섭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돌아가신 황제의 덕과 은택이 쇠퇴하지 않았고, 선비를 편안하게 하고, 세속의 백성을 즐겁게 하였으므로 제후들이 국경의 밖에서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일러 瓦解라 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근심이 와해에 있지 않다.’ 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면 천하에 진실로 土崩의 형세가 있으면 비록 벼슬 없이 구석진 곳에 있는 선비가 혹 악의 우두머리일지라도 천하를 위태롭게 할 수 있으니 진승이 이러한 사람입니다. 하물며 삼진의 임금이 혹 살아있음에랴!(삼진의 임금 같은 이가 있음에랴!) 천하가 비록 아직 크게 다스려짐이 있지 않을 지라도(다스려지지 않을지라도) 진실로 土崩의 형세를 없게 한다면 비록 강한 나라, 굳센 군대를 보유하였을지라도 돌아 뒤따르지 않아 자신이 사로잡히게 될 것이니 오, 초, 제, 조나라가 이것입니다. 하물며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겠는가! 이 두 체재는 편안함과 위태로움의 분명한 요점입니다. 어진 임금께서는 뜻을 두는 곳을 깊이 살피소서!
[一] 集解矜音勤。索隱下音勤。矜,今戟柄。棘,戟也。
[一] 【集解】 ‘矜’의 음은 ‘勸’이다. 【索隱】 아래의 음은 ‘勸’이다. ‘矜’은 지금의 창 자루이다. ‘棘’은 창이다.
閒者關東五穀不登,年歲未復,民多窮困,重之以邊境之事,推數循理而觀之,則民且有不安其處者矣。不安故易動。易動者,土崩之勢也。故賢主獨觀萬化之原,明於安危之機,脩之廟堂之上,而銷未形之患。其要,期使天下無土崩之勢而已矣。故雖有彊國勁兵,陛下逐走獸,射蜚鳥,弘游燕之囿,淫縱恣之觀,極馳騁之樂,自若也。金石絲竹之聲不絕於耳,帷帳之私俳優侏儒之笑不乏於前,而天下無宿憂。名何必湯武,俗何必成康!雖然,臣竊以為陛下天然之聖,寬仁之資,而誠以天下為務,則湯武之名不難侔,而成康之俗可復興也。此二體者立,然後處尊安之實,揚名廣譽於當世,親天下而服四夷,餘恩遺德為數世隆,南面負扆攝袂而揖王公,此陛下之所服也。臣聞圖王不成,其敝足以安。安則陛下何求而不得,何為而不成,何征而不服乎哉!
근래에 관동은 곡식이 익지 않고 농사가 좋지 않아 백성들이 많이 궁곤한데 변경의 일을 거듭하여 미루어 이치에 따라 헤아려 관찰하면 곧 백성들이 또한 그 자리에 편안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움직입니다. 쉽게 움직이는 것은 土崩의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은 다만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을 관찰하고 편안하고 위태로운 기틀을 밝히고 조정의 위에서 형상하지 않은 근심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 요점은 천하로 하여금 土崩의 형세를 없게 하는 것을 기약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강국과 굳센 군대가 있을지라도 폐하께서는 짐승을 쫓고, 날아오르는 새를 쏘며, 놀며 연회하는 동산을 넓히고, 음탕하고 함부로 하는 볼거리와 말을 타고 달리는 즐거움을 지급히 하여 스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쇠, 돌, 실, 대나무로 만든 악기 연주소리가 귀에서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장막의 사사로운 배우와 광대의 웃음소리가 앞에서 모자라지 않을 것으로 천하의 묵은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명예는 탕왕과 무왕일 필요가 없을 것이며, 풍속은 성왕과 강왕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신은 가만히 폐하께서 하늘의 성스러움과 너그럽고 어진 바탕으로 진실로 천하로 힘씀을 삼는다면 곧 탕왕과 무왕의 명예가 짝하기 어렵지 않으며 성왕과 강왕의 풍속을 다시 흥기시킬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 두 體가 세워진 후에 높고 편안함의 실제에 자리하여 지금 세상에서 이름을 드날리고 명예를 넓히며, 천하를 가까이하여 네 오랑캐가 복속할 것이니 남은 은혜와 남은 덕이 여러 세대에 융성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조정에서 남쪽을 향해 앉고, 뒤에는 도끼모양을 수놓은 병풍에 의지하여 옷소매를 거두면서 왕공에게 읍을 받을 것이니 이는 폐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제가 들으니 왕업을 도모하다 이루지 못할지라도 그 피폐함을 편안하게 함에는 충분하다. 합니다. 편안하면 곧 폐하께서 무엇을 구한들 얻지 못할 것이며, 무엇을 한들 이루지 못할 것이며 무엇을 정벌한들 복종하지 않을 것이겠습니까?
嚴安上書曰:臣聞周有天下,其治三百餘歲,成康其隆也,刑錯四十餘年而不用。及其衰也,亦三百餘歲,故五伯更起。五伯者,常佐天子興利除害,誅暴禁邪,匡正海內,以尊天子。五伯既沒,賢聖莫續,天子孤弱,號令不行。諸侯恣行,彊陵弱,眾暴寡,田常篡齊,六卿分晉,並為戰國,此民之始苦也。於是彊國務攻,弱國備守,合從連橫,馳車擊轂,介冑生蟣蝨,民無所告愬。及至秦王,蠶食天下,并吞戰國,稱號曰皇帝,主海內之政,壞諸侯之城,銷其兵,鑄以為鍾虡,[一]示不復用。元元黎民得免於戰國,逢明天子,人人自以為更生。嚮使秦緩其刑罰,薄賦斂,省繇役,貴仁義,賤權利,上篤厚,[二]下智巧,[三]變風易俗,化於海內,則世世必安矣。秦不行是風而(脩)[循]其故俗,為智巧權利者進,篤厚忠信者退;法嚴政峻,諂諛者眾,日聞其美,意廣心軼。欲肆威海外,乃使蒙恬將兵以北攻胡,辟地進境,戍於北河,蜚芻輓粟以隨其後。又使尉(佗)屠睢[四]將樓船之士南攻百越,使監祿[五]鑿渠運糧,深入越,越人遁逃。曠日持久,糧食絕乏,越人擊之,秦兵大敗。秦乃使尉佗將卒以戍越。當是時,秦禍北構於胡,南挂於越,宿兵無用之地,進而不得退。行十餘年,丁男被甲,丁女轉輸,苦不聊生,自經於道樹,死者相望。及秦皇帝崩,天下大叛。陳勝、吳廣舉陳,[六]武臣、張耳舉趙,項梁舉吳,田儋舉齊,景駒舉郢,周市舉魏,韓廣舉燕,窮山通谷豪士並起,不可勝載也。然皆非公侯之後,非長官之吏也。無尺寸之勢,起閭巷,杖棘矜,應時而皆動,不謀而俱起,不約而同會,壤長地進,[七]至于霸王,時教使然也。秦貴為天子,富有天下,滅世絕祀者,窮兵之禍也。故周失之弱,秦失之彊,不變之患也。
엄안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들으니 주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고 300여년을 다스려서 성왕과 강왕 때 융성하여 형벌을 두되 40여년이나 쓰지 않았습니다. 그 쇠퇴함에 이르는 것이 또한 300여년이었는데 五伯(다섯 제후)이 번갈아 일어났습니다. 오백은 항상 천자를 도와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침을 제거하고 사나움을 죽이고 간사함을 금하여 천하를 바로잡는 것으로서 천자를 높였습니다. 오백이 죽고나서 현명하고 성스러운 이가 이어지지 않고, 천자는 어리고 약하여 정령을 내려도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제후가 행실을 함부로 하고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업신여기고, 많은 무리는 적은 이를 사납게 하여 전상은 제나라를 찬탈하였고, 6경이 晉나라를 나누면서 아울러 전국이 되었으니 이는 백성의 괴로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강한 나라는 공격에 힘쓰고, 약한 나라는 지킴을 대비하여 합종과 연횡하며 수레를 달리고 바퀴통을 치며, 늘 갑옷과 투구를 입고 써서 서캐와 이가 생겨나고 백성들은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진나라 왕이 천하를 잠식하고 전국을 병탄하여 칭호를 황제라 하고 천하의 정사를 주관하고 제후의 성을 무너뜨리며 그 병기를 녹여 종과 거는 틀을 주조하여 다시 쓰지 않는 뜻을 보였습니다. 근본인 백성들이 전국을 면하고 현명한 천자를 만날 수 있어 스스로 다시 살아났다 여겼습니다. 가령 진나라가 그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요역을 생략하고 인의를 귀하게 여기며 권세와 이익을 천하게 여기며 돈독하고 두터움을 귀하게 여기고 간사한 지혜를 천하게 여기며 풍속을 변하게 하여 천하를 교화하였다면 곧 대대로 편안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진나라는 이 풍속을 행하지 않고 그 옛 풍속을 따라 간사한 지혜로 권세와 이로움을 행하는 자는 나아가고, 충신을 돈독하고 도타이 하는 자는 물러나게 하고, 법은 엄격하고 정사는 가혹하며 아첨하는 자가 많이 날로 그 아름다움을 듣고 뜻을 넓히고 마음을 느슨하게 하였습니다. 함부로 위엄을 해외에 드러내고자 하여 몽렴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오랑캐를 공격하게 하고 궁벽한 땅에 국경을 나아가 북하에서 지키게 하여 말 먹이와 곡식을 운반하여 그 뒤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또 위 조타와 도휴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월을 공격하게 하고 감어사 록으로 하여금 도랑을 파고 양식을 운반하게 하여 깊이 월에 들어가니 월 사람들이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는 것이 오래되자 양식이 부족할 때 월의 사람들이 치니 진나라 군대가 크게 무너졌습니다. 진나라가 이에 위 조타로 하여금 병졸을 거느리고 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나라는 화를 북쪽으로는 오랑캐에게 맺고, 남쪽으로는 월에 걸리고, 군대가 쓸모없는 땅에 묵으면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였습니다. 10여년을 행하니 정남은 갑옷을 입고, 정녀는 운반하여 괴로움으로 의지하여 믿고 살수 없어 길가 나무에 목을 매니 죽은 자가 서로 바라보였습니다. 진나라 황제가 죽음에 이르러 천하가 크게 배반하였습니다. 진승, 오광이 陳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무신과 장이는 조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항량은 오에서 군대를 일으키며, 전담은 제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경구는 영에서 군사를 일으키며, 주시는 위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한광은 연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깊은 산과 골짜기 마다 호걸들이 모두 일어났으니 이루 다 기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공후의 후예가 아니며 長官의 관리도 아닙니다. 한자 한 치의 세력도 없이 거리에서 일어나 창대를 지팡이 삼고, 때에 맞추어 모두 움직이니 도모하지 않아도 모두 일어나고, 약속하지 않아도 함께 모여 땅을 더하고 나아가 패왕에 이른 것은 때가 그렇게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진나라는 귀하기로는 천자가 되었고,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였음에도 세대를 없애고 제사가 끊어진 것은 군대를 다함의 화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약하여 잃었고, 진나라는 강하여 잃었으니 변하지 않는 근심이라 하겠습니다.
[一] 索隱下音巨。鄒氏本作「鐻」,音同。
[一] 【索隱】 아래의 음은 ‘巨’이다. 추씨가 말하기를 본래 ‘鐻(악기걸이 거)’라 써야하는데 음은 같다.
[二] 索隱上猶尚也,貴也。
[二] 【索隱】 ‘上’은 ‘尙(높일 상)’과 같은데 귀함이다.
[三] 索隱謂智巧為下也。
[三] 【索隱】 지혜가 공교로운 것을 천하게 여김을 말한 것이다.
[四] 索隱案:尉,官也。他,趙他也,音徒何反。屠睢,人姓名。睢音雖。
[四] 【索隱】 살펴보니 ‘尉’는 관직이다. ‘他’는 ‘조타’인데 음은 ‘徒’와 ‘何’의 反이다. ‘도휴’는 사람의 성명이다. ‘睢’의 음은 ‘雖’이다.
[五] 集解韋昭曰:「監御史名祿也。」
[五]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감어사의 이름이 ‘록’이다.” 했다.
[六] 索隱謂勝、廣舉兵於陳。舉音如字。或音據,恐疏也。下同。
[六] 【索隱】 ‘승’과 ‘광’은 진에서 거병하였다. ‘擧’의 음은 본래의 글자와 같다. 혹은 음이 ‘據’라 하나 아마도 알맞지 않다. 아래도 같다.
[七] 集解張晏曰:「長,進益也。」
[七] 【集解】 장안이 말하기를 “‘長’은 더 나아가는 것이다.” 했다.
今欲招南夷,朝夜郎,降羌僰,[一]略濊州,[二]建城邑,深入匈奴,燔其蘢城,[三]議者美之。此人臣之利也,非天下之長策也。今中國無狗吠之驚,而外累於遠方之備,靡敝國家,非所以子民也。行無窮之欲,甘心快意,結怨於匈奴,非所以安邊也。禍結而不解,兵休而復起,近者愁苦,遠者驚駭,非所以持久也。今天下鍛甲砥劍,橋箭累弦,轉輸運糧,未見休時,此天下之所共憂也。夫兵久而變起,事煩而慮生。今外郡之地或幾千里,列城數十,形束壤制,[四]旁脅諸侯,非公室之利也。上觀齊晉之所以亡者,公室卑削,六卿大盛也;下觀秦之所以滅者,嚴法刻深,欲大無窮也。今郡守之權,非特六卿之重也;地幾千里,非特閭巷之資也;甲兵器械,非特棘矜之用也:以遭萬世之變,則不可稱諱也。
지금 남이를 부르고, 야랑이 조공하게 하고, 강북을 복종시키며 예주를 경략하여 성읍을 세우고 그 농성을 불태워 의론하는 자들이 그것을 찬미하게 하고자 합니다. 이는 신하의 이로움이지 천하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지금 중국은 개가 짓을 놀라움(소란)도 없는데 밖으로 먼 지방의 대비에 연루되어 국가를 피폐하게 하니 자식과 백성 때문이 아닙니다. 다할 수 없는 욕심을 행하여 마음에 즐거우나 흉노에게 원한을 맺고서 변경을 편안하게 하지 못합니다. 화를 맺어도 풀지 못하면 군대가 쉬어도 다시 일으켜야 하니 가까이 있는 자는 괴로울 것을 근심하고, 멀리 있는 자는 놀랄 것이니 오래동안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살을 바로잡고, 활시위를 점검하며 양식을 운반하여 쉴 때를 보지 못하니 이는 천하가 함께 근심하는 것입니다. 대저 군대가 오래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번거로우면 생각이 일어납니다. 지금 外郡의 땅은 거의 천리이고, 수십 개 성을 나열하고, 그 토지의 형태와 토양을 모두 묶고 제재하는 것이 제후에게 달려 있으며, 곁에 있는 제후를 위협하니 공실의 이로운 점이 아닙니다. 위로 제와 晉이 망한 까닭을 관찰해보면 公室을 낮추고 깍으며 6경이 크게 성대하였기 때문이고, 아래로 秦이 사라진 까닭을 관찰해보면 법을 엄격하고 가혹하게하고, 욕심이 크고, 다함이 없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수의 권세는 6경의 권세보다 무거울 뿐만 아니라 땅은 거의 천리여서 단지 거리를 바탕할 뿐만이 아니고, 갑병과 병기, 기계는 단지 창 자루의 쓰임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만세의 변란을 만난다면 선조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一] 索隱僰,白北反,又皮逼反。
[一] 【索隱】 ‘僰’은 ‘白’과 ‘北’의 反이다. 또 ‘皮’와 ‘逼’의 反이라 한다.
[二] 集解如淳曰:「東夷也。」 索隱濊州,地名,即古濊貊國也。音紆廢反。
[二] 【集解】 여순이 말하기를 “東夷이다.” 했다. 【索隱】 ‘예주’는 지명이니 곧 옛날의 예맥국이다. 음은 ‘紆(굽을 우)’와 ‘廢’의 反이다.
[三] 索隱匈奴城名,音龍。燔音煩。燔,燒也。
[三] 【索隱】 흉노의 성 이름이다. 음은 ‘龍’이다. ‘燔’의 음은 ‘煩’이다. ‘燔’은 불사름이다.
[四] 集解服虔曰:「言所束在郡守,土壤足以專民制。」蘇林曰:「言其土地形勢足以束制其民也。」 索隱案:謂地形及土壤皆束制在諸侯也。
[四] 【集解】 복건이 말하기를 “묶는 것은 군수에게 달려있고, 토양은 백성을 제재하기에 충분함을 말한 것이다.” 했다. 소림이 말하기를 “그 토지의 형세가 그 백성을 묶고 제재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지형과 토양이 모두 묶고 제재하는 것이 제후에게 달려 있음을 말한 것이다.
書奏天子,天子召見三人,謂曰:「公等皆安在?何相見之晚也!」[一]於是上乃拜主父偃、徐樂、嚴安為郎中。[偃]數見,上疏言事,詔拜偃為謁者,遷(樂)為中大夫。一歲中四遷偃。
글을 천자에게 아뢰자 천자가 세 사람을 불러보고 말하기를 “공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는가? 어찌하여 서로 만남이 늦었는가!” 했다. 이에 황제가 곧 주부언, 서악, 엄안에게 벼슬을 주어 낭중으로 삼았다. 주부언이 여러 번 뵙고 상소하여 정사를 말하니 조칙으로 주부언에게 벼슬을 주어 謁者로 삼고, 서악을 옮겨(승진시켜) 중대부로 삼았다. 1년 중에 네 번 주부언을 옮겼다.(승진시켰다.)
[一] 集解徐廣曰:「它史記本皆不見嚴安,此旁所篹者,皆取漢書耳。然漢書不宜乃容大異,或寫史記承闕脫也。」 索隱篹音撰。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다른 『사기』 본에는 모두 엄안이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의지하여 찬술한 것은 모두 『한서』에서 취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한서』와 마땅히 곧 크게 다름을 허용하지 않았을지라도 혹 『사기』를 베끼면서 빠진 것을 이었을 것이다.” 했다. 【索隱】 ‘篹’의 음은 ‘撰’이다.
偃說上曰:「古者諸侯不過百里,彊弱之形易制。今諸侯或連城數十,地方千里,緩則驕奢易為淫亂,急則阻其彊而合從以逆京師。今以法割削之,則逆節萌起,前日晁錯是也。今諸侯子弟或十數,而適嗣代立,餘雖骨肉,無尺寸地封,則仁孝之道不宣。願陛下令諸侯得推恩分子弟,以地侯之。彼人人喜得所願,上以德施,實分其國,不削而稍弱矣。」於是上從其計。[一]又說上曰:「茂陵初立,天下豪桀并兼之家,亂眾之民,皆可徙茂陵,內實京師,外銷姦猾,此所謂不誅而害除。」上又從其計。
주부언이 황제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옛 날의 제후는 땅이 100리를 지나지 않았고, 강하고 약함의 형세를 쉽게 제재할 수 있었습니다. 지근의 제후는 혹 성을 이은 것이 수십 개이고, 땅이 4방 천리나 되어 느슨하게 하면 곧 교만하고 사치하며 쉽게 음란해지고, 급하게 하면 곧 막고 그 강함으로 합종하여 京師를 거스릅니다. 지금 법으로 그것을 나누고 깍으면 곧 반역의 싹이 일어나니 지난날의 조착이 이것입니다. 지금 제후의 자제가 혹 10수명인데 적자가 대를 이어 즉위하니 나머지는 비록 골육일지라도 한 자 한 치의 땅도 봉함이 없으니 곧 인과 효의 도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페하께서는 제후에게 령을 내려 자제에게 은혜를 나누어 베풀어 땅으로서 후를 얻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 사람들은 원하던 것을 얻어 기뻐하고, 폐하께서는 덕을 베푸는 것으로서 실제 그 나라를 나누어 깍지 않아도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했다. 이에 황제가 그 계책을 따랐다. 또 황제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무릉현을 처음 세웠으니 천하의 호걸들과 부호와 난을 일으킨 백성들은 모두 무릉현에 옮겨 안으로 경사를 충실하게 하고, 밖으로 간사하고, 교활한 이를 녹이는 이것이 이른 바 죽이지 않고도 해로움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했다 황제가 또한 그 계책을 따랐다.
[一] 集解徐廣曰:「元朔二年,始令諸侯王分封子弟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원삭 2년 처음 제후왕에게 자제에게 분봉하게 하였였다.” 했다.
尊立衛皇后,及發燕王定國陰事,蓋偃有功焉。大臣皆畏其口,賂遺累千金。人或說偃曰:「太橫矣。」主父曰:「臣結髮游學四十餘年,身不得遂,親不以為子,昆弟不收,賓客棄我,我阨日久矣。且丈夫生不五鼎食,死即五鼎烹耳。吾日暮途遠,故倒行暴施之。」[一]
위황후를 높여 세우고 연왕 유정국이 몰래 한 일을 드러낸 것은 대개 주부언의 공이 있었다. 대신들이 모두 그 입(말)을 두려워하여 뇌물을 보낸 것이 누천금이었다. 어떤 사람이 주부언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크게 횡포합니다.”하자 주부언이 말하기를 “신이 머리털을 묶고 배우러 다닌지 40여년에 자신은 이룸을 얻지 못하였고, 어버이는 자식으로 여기지 않으며, 형제는 거두지 않았고, 빈객은 나를 버려 내가 막혔던 날이 오래되었습니다. 또한 장부가 태어나서 오정의 밥을 먹지 못한다면 오정에 삶겨 죽을 뿐입니다. 나의 날은 저물고 길은 멀기 때문에 행함을 뒤집어 사납게 베풀었습니다.” 했다.
[一] 索隱按:偃言吾日暮途遠,恐赴前途不跌,故須倒行而逆施,乃可及耳。今此本作「暴」。暴者,言已困久得申,須急暴行事以快意也。暴者,卒也,急也。
[一] 【索隱】 살펴보니 주부언이 ‘내 날은 저무는데 길은 멀다.’한 것은 앞의 길을 달리다 넘지 못함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베풀어야 이에 미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 이 본에는 ‘暴’이라 썼는데 자기가 오래도록 곤궁하다 펼 수 있었으므로 반드시 급하고 사납게 일을 행하는 것으로서 뜻을 즐겁게 함을 말한 것이다. ‘暴’은 졸지에(갑자기)이니 급함이다.
偃盛言朔方地肥饒,外阻河,蒙恬城之以逐匈奴,內省轉輸戍漕,廣中國,滅胡之本也。上覽其說,下公卿議,皆言不便。公孫弘曰:「秦時常發三十萬眾築北河,終不可就,已而棄之。」主父偃盛言其便,上竟用主父計,立朔方郡。
주부언이 강력하게 말하기를 “삭방의 땅은 기름지고 풍요로워 밖은 항하가 막고, 몽렴이 성을 쌓아 흉노를 쫓아내었고, 안으로는 운송과 조운을 줄려 중국을 넓히는 것이 오랑캐를 없애는 근본입니다.” 했다. 황제가 그 말을 살펴보고 공경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니 모두 불편하다고 말하였다. 공손홍이 말하기를 “진나라 때 항상 30만의 무리를 징발하여 북하에 성을 쌓았으나 끝내 나아가지 못하다가 이윽고 그것을 버렸습니다.” 했다. 주부언이 강력하게 그 편리함을 말하니 황제가 마침내 주부언의 계책을 써서 삭방군을 세웠다.
元朔二年,主父言齊王內淫佚行僻,上拜主父為齊相。至齊,遍召昆弟賓客,散五百金予之,數之曰:「始吾貧時,昆弟不我衣食,賓客不我內門;今吾相齊,諸君迎我或千里。吾與諸君絕矣,毋復入偃之門!」乃使人以王與姊姦事動王,王以為終不得脫罪,恐效燕王論死,乃自殺。有司以聞。主父始為布衣時,嘗游燕、趙,及其貴,發燕事。趙王恐其為國患,欲上書言其陰事,為偃居中,不敢發。及為齊相,出關,即使人上書,告言主父偃受諸侯金,以故諸侯子弟多以得封者。及齊王自殺,上聞大怒,以為主父劫其王令自殺,乃徵下吏治。主父服受諸侯金,實不劫王令自殺。上欲勿誅,是時公孫弘為御史大夫,乃言曰:「齊王自殺無後,國除為郡,入漢,主父偃本首惡,陛下不誅主父偃,無以謝天下。」乃遂族主父偃。主父方貴幸時,賓客以千數,及其族死,無一人收者,唯獨洨孔車[一]收葬之。天子後聞之,以為孔車長者也。
원삭 2년 주부언이 제왕의 궁내에서의 음란함과 행실의 편벽됨을 말하자 황제가 주부언에게 벼슬을 주어 제의 재상으로 삼았다. 제에 이르러 두루 형제와 빈객들을 불러 500금을 흩어 나누어주고 죄목을 들어 헤아리며 말하기를 “처음 내가 가난했을 때 형제들이 나에게 옷과 밥을 주지 않았고, 빈객은 나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지금 내가 제의 재상이 되자 여러분들이 혹 천리 밖에서 나를 맞이하였다. 나는 여러분과 교류를 끊을 것이니 다시는 나의 집 문에 들어오지 말라!” 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왕과 누이가 간통한 것으로서 왕을 움직이게 하니 왕이 끝내 죄를 벋어날 수 없다 여겨 연왕의 죽음을 논한 것을 본받을까 두려워하여 자살하였다. 담당관청이 알렸다. 주부언이 처음 포의로 있을 때 일찍이 연, 조에 머물렀는데 그 귀해짐에 이르러 연의 일을 드러내었다. 조왕이 그가 나라의 근심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글을 올려 그가 몰래 한 일들을 말하고자 하였는데 주부언이 황궁에 있는 동안에는 감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제의 재생이 되어 관을 나가게 되자 곧 사람을 시켜 글을 올려 주부언이 제후에게 금을 받은 것은 제후의 자제들이 많이 봉하여졌기 때문이라 말하였다. 제왕이 자살함에 이르자 황제가 듣고 크게 노하여 주부언이 그 왕을 겁박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여기고 이에 관리를 불러 다스리게 하였다. 주부언이 제후에게 금을 받은 것은 인정하였으나 실제로 왕을 겁박하여 자살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황제가 죽이지 않으려하니 이 때 공손홍이 어사대부가 되어 이에 말하기를 “제왕이 자살하고 후사가 없어 나라가 없어지면서 군이 되어 한에 편입되었고, 주부언은 본래 악의 우두머리인데 폐하께서 주부언을 죽이지 않으려하시니 천하에 사과할 수 없습니다.” 했다. 이에 마침내 주부언의 일족을 죽였다. 주부언이 막 귀해지고 총애를 받을 때 빈객이 천 수명이었는데 그 일족이 죽음에 이르러 한 사람도 거두는 자가 없었는데 오직 효현의 공차만이 거두어 장사하였다. 천자가 후에 그것을 듣고 공차를 장자로 여겼다.
[一] 集解徐廣曰:「孔車,洨人也。沛有洨縣。」 索隱洨,戶交反。按:縣名,在沛。車,尺奢反。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공차는 효 땅 사람이다. 패에 효현이 있다.” 했다. 【索隱】 ‘洨’는 ‘戶’와 ‘交’의 反이다. 살펴보니 현의 이름인데 ‘沛’에 있다. ‘車’는 ‘尺’과 ‘奢’의 反이다.
太史公曰:公孫弘行義雖脩,然亦遇時。漢興八十餘年矣,[一]上方鄉文學,招俊乂,以廣儒墨,弘為舉首。主父偃當路,諸公皆譽之,及名敗身誅,士爭言其惡。悲夫!
태사공이 말하기를 “공손홍이 의를 행하는 것을 비록 닦았으나 또한 때를 만난 것이다. 한이 흥기하고 80여년이 지나 황제가 문학을 향하고 재주와 슬기가 배어난 사람을 부르며, 儒家와 墨家를 넓힐 때 공손홍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주부언은 관직에 있을 때 여러 공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다가, 이름이 무너지고 몸이 죽음에 이르자 선비들이 다투어 그 악을 말하였다. 슬프다!
[一] 集解徐廣曰:「漢初至元朔二年八十年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한 초부터 원삭 2년까지 80년이다.” 했다.
太皇太后詔大司徒大司空:[一]「蓋聞治國之道,富民為始;富民之要,在於節儉。孝經曰『安上治民,莫善於禮』。『禮,與奢也寧儉』。昔者管仲相齊桓,霸諸侯,有九合一匡之功,而仲尼謂之不知禮,以其奢泰侈擬於君故也。夏禹卑宮室,惡衣服,後聖不循。由此言之,治之盛也,德優矣,莫高於儉。儉化俗民,則尊卑之序得,而骨肉之恩親,爭訟之原息。斯乃家給人足,刑錯之本也歟?可不務哉!夫三公者,百寮之率,萬民之表也。未有樹直表而得曲影者也。孔子不云乎,『子率而正,孰敢不正』。『舉善而教不能則勸』。維漢興以來,股肱宰臣身行儉約,輕財重義,較然著明,[二]未有若故丞相平津侯公孫弘者也。位在丞相而為布被,脫粟之飯,不過一肉。故人所善賓客皆分奉祿以給之,無有所餘。誠內自克約而外從制。汲黯詰之,乃聞于朝,此可謂減於制度[三]而可施行者也。德優則行,否則止,與內奢泰而外為詭服以釣虛譽者殊科。以病乞骸骨,孝武皇帝即制曰『賞有功,褒有德,善善惡惡,君宜知之。其省思慮,存精神,輔以醫藥』。賜告治病,牛酒雜帛。居數月,有瘳,視事。至元狩二年,竟以善終于相位。夫知臣莫若君,此其效也。弘子度嗣爵,後為山陽太守,坐法失侯。夫表德章義,所以率俗厲化,聖王之制,不易之道也。其賜弘後子孫之次當為後者爵關內侯,食邑三百戶,徵詣公車,上名尚書,朕親臨拜焉。」
태황태후가 사도대사공에게 조칙으로 “대개 들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을 삼는다.’ 한다.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요점은 절약하고 검소함에 달려 있다. 『효경』에 ‘윗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는 예보다 좋은 것이 없다.’하고, ‘예는 사치한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함이다.’ 했다. 옛날에 관중이 제의 환공을 도와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게 했을 때 아홉 번 제후들을 모으고 한 번 천자를 바로잡은 공이 있었지만 공자가 ‘예를 알지 못한다.’ 한 것은 그 사치하고 사치함에 편안한 것이 임금에게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하의 우왕은 궁실을 낮게 하고 거친 옷을 입었는데 후의 성스러운 왕들이 따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면 다스림의 성대함은 덕의 두터움인데 검소함보다 높은 것이 없다. 검소함으로 풍속과 백성을 교화하면 곧 尊卑의 차례를 얻고, 骨肉의 은혜와 친함을 가지며, 爭訟의 근원이 쉬게 된다. 이것은 곧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고 사람마다 의식이 풍족하게 하는 것이 형벌의 근본이다.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삼공은 모든 벼슬아치를 인솔하고 만민의 본보기이다. 곧은 표지를 세우고서 굽은 그림자를 얻은 자는 있지 한다. 공자가 ‘그대가 거느리기를 바르게 하면 누군들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잘 하는 이를 받들고 잘 하지 못하는 이를 가르치면 곧 권면하게 된다.’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한이 흥기한 이래로 股肱의 재신들이 몸소 검소함과 절약을 행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중하게 여긴다면 분명히 밝게 드러나 옛 승상 평진후 공손홍과 같은 자는 있지 않을 것이다.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베옷을 입고, 껍질 벗기자 않은 곡식의 밥을 먹으며, 반찬은 한 가지 고기에 지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좋은 점으로는 빈객에게 봉록을 모두 나누어 주어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다. 진실로 안으로는 스스로 지극히 절약하고 밖으로는 제도를 따랐다. 급암이 그에게 따지고 물은 것이 곧 조정에 알려졌으니 이는 제도를 줄여서 시행한 자라 이를만하다. 덕이 넉넉하면 곧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치는 것이니 안으로는 사치하고 편안하며 밖으로는 이상한 옷을 입어 헛된 명에를 저울질하는 자와는 등급을 달리하였다.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가기를 애걸하였으나 효무황제가 곧 제재하여 말하기를, ‘공이 있는 이는 상을 주고, 덕이 있는 이는 기리며, 선한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는 것을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생각을 살피고, 정신을 보존하여 의약으로 보충하라.’하고는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소, 술, 여러 가지 비단을 내렸다. 몇 달 후 병이 나음이 있자 정사를 보았다. 원수 2년에 이르러 마침내 승상의 지위를 마쳤다. 대저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으니 이는 그 본보기이다. 공손홍의 아들 공손도가 작을 이었는데 후에 산양태수가 되었다가 법을 어겨 후의 지위를 잃었다. 대저 덕을 드러내고 의를 빛나게 하는 것은 풍속을 이끌어 교화에 힘쓰는 것은 성스러운 왕의 제도이니 바뀔 수 없는 도이다. 공손홍의 후세 자손으로 차례가 마땅히 후사가 되는 자는 벼슬을 주어 관내후라 하고, 식읍 200호로 하고, 불러 公車에 나아가게 하고 『상서』에 이름을 싣고, 짐이 직접 가서 벼슬을 줄 것이다.” 했다.
[一] 集解徐廣曰:「此詔是平帝元始中王元后詔,後人寫此及班固所稱,以續卷後。」 索隱按:徐廣云「此是平帝元始中詔,以續卷後」,則又非褚先生所錄也。
[一] 【集解】 서광이 말하기를 “이 조서는 평제 원시 중 왕원후의 조서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베껴 반고를 일컳어 권의 뒤에 이어놓았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서광이 말하기를 “이는 평제 원시 중의 조서인데 권 뒤에 붙여놓았다.” 했다. 곧 저선생이 기록한 바가 아니다.
[二] 索隱較音角。較,明也。
[二] 【索隱】 ‘較’의 음은 ‘角’이다. ‘較’는 밝음이다.
[三] 集解應劭曰:「禮,貴有常尊,衣服有常品。」
[三] 【集解】 응소가 말하기를 “禮는 떳떳한 높음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고, 의복에는 떳떳한 등급이 있다.” 했다.
班固稱曰:公孫弘、卜式、兒寬皆以鴻漸之翼困於燕雀,[一]遠跡羊豕之閒,[二]非遇其時,焉能致此位乎?是時漢興六十餘載,海內乂安,[三]府庫充實,而四夷未賓,制度多闕,上方欲用文武,求之如弗及。始以蒲輪迎枚生,[四]見主父而歎息。[五]群臣慕嚮,異人並出。卜式試於芻牧,弘羊擢於賈豎,衛青奮於奴僕,日磾出於降虜,斯亦曩時版築飯牛之朋矣。漢之得人,於茲為盛。儒雅則公孫弘、董仲舒、兒寬,篤行則石建、石慶,質直則汲黯、卜式,推賢則韓安國、鄭當時,定令則趙禹、張湯,文章則司馬遷、相如,滑稽則東方朔、枚皋,應對則嚴助、朱買臣,曆數則唐都、落下閎,協律則李延年,運籌則桑弘羊,奉使則張騫、蘇武,將帥則衛青、霍去病,受遺則霍光、金日磾。其餘不可勝紀。是以興造功業,制度遺文,後世莫及。孝宣承統,纂脩洪業,亦講論六蓺,招選茂異,而蕭望之、梁丘賀、夏侯勝、韋玄成、嚴彭祖、尹更始以儒術進,劉向、王褒以文章顯。將相則張安世、趙充國、魏相、邴吉、于定國、杜延年,治民則黃霸、王成、龔遂、鄭弘、邵信臣、韓延壽、尹翁歸、趙廣漢之屬,皆有功跡見述於後。累其名臣,亦其次也。
반고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공손홍, 복식, 아관은 모두 기러기가 날아오르는 날개로(큰 재주로) 제비와 참새에게 곤욕을 당하고, 멀리서 양과 돼지의 사이에 자취가 있는데(양과 돼지를 길렀는데) 그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어찌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이때는 한이 흥기한지 60여년으로 천하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창고가 채워졌으되 四夷는 아직 빈의 예를 취하지 않았고, 제도가 많이 빠져있어 황제가 바야흐로 문무를 등용하고자 하였는데, (인재를) 구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처음에 수레바퀴에 부들풀을 감아 매생을 맞이하였고, 주부언을 만나고서는 탄식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사모하고 우러르니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들이 아울러 나왔다. 복식은 꼴 베어 가축을 기기르는 것으로 시험하였고, 홍양은 시장에서 장사하다 발탁되었고, 위청은 종에서 떨쳤으며 일제는 항복한 오랑캐에게서 나왔으니 이가 또한 지난 날 성을 쌓던 노예로 발탁된 부열과 소를 먹이던 백리해와 같은 무리들이었다. 한은 사람을 얻음이 이에 성대하였다. 유학에 아름다운 이로는 곧 공손홍, 동중서, 아관이고, 행실을 돈독히 한 이로는 곧 석건, 석경이고, 바탕이 곧은 이로는 급암, 복식이고, 현명한 이를 추천한 이는 곧 한안국, 정당시이고, 令을 정한 이는 조우, 장탕이고, 문장은 곧 사마천, 사마상여이고, 남을 웃게 만든 이는 동박삭, 매고, 응대는 곧 엄조, 주가신이고, 역법과 산식으로는 당도, 낙화굉이고, 음악에는 곧 이연년이고, 계략을 꾸밈에는 곧 상홍양이고, 사신감에는 장건, 소무이고 장수로는 위청, 곽거병이고 유지를 받은 이로는 곽광, 김일제이다. 그 나머지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공을 세우고 대업을 일으키고 제도와 문장을 남긴 것이 후세가 미칠 수 없다. 효선제가 전통을 이어 대업을 새로이 하고 또한 六藝를 강론하며 재능이 빼어난 인재를 불러 가렸으니 소망지, 양구하, 하후승, 위현성, 엄팽조, 유경시는 유가학식으로 나아갔고, 유향, 왕포응 문장으로 드러났다. 장수와 재상으로는 장안세, 조충국, 위상, 병길, 우정국, 두연년이 있고, 백성을 다스림에는 황패, 왕성, 공수, 정홍, 소신신, 한연수, 윤옹귀, 조광한 등이 있는데 모두 공적이 있어 뒤에 서술됨을 볼 수 있다. 이름있는 신하들을 늘어놓고 보면 또한 그 다음이 된다.
[一] 集解李奇曰:「漸,進也。鴻一舉而進千里者,羽翼之材也。弘等皆以大材,初為俗所薄,若燕雀不知鴻鵠之志也。」 索隱按:謂公孫弘等未遇,為時所輕,若飛鴻之未漸,受困於燕雀也。是燕雀安知鴻鵠之志也?
[一] 【集解】 이귀가 말하기를 “‘漸’은 나아감이다. 기러기가 날개를 한번 들어 천리를 나아가는 것은 날개의 재질이다. 공손홍 등이 모두 큰 재질로서 처음에 세속에서 소홀히 대우받은 것은 마치 제비와 참새가 鴻鵠의 뜻을 알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했다. 【索隱】 살펴보니 공손홍 등이 때를 만나지 못하고, 때로 가벼이 여겨져 마치 나는 기러기가 나아가지 못하고, 제비와 참새에게 곤욕을 받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제비와 참새가 홍곡의 뜻을 알겠는가?
[二] 集解韋昭曰:「遠跡謂耕牧在於遠方。」 索隱案:公孫弘牧豕,卜式牧羊也。
[二] 【集解】 위소가 말하기를 “‘遠跡’은 먼 지방에서 밭 갈고 가축을 기르며 있는 것을 말한다.” 했다. 【索隱】 공손홍은 돼지를 길렀고, 복식은 양을 길렀다.
[三] 索隱乂,理也。
[三] 【索隱】 ‘乂’는 ‘理(다스림)’이다.
[四] 索隱案:謂枚乘也。漢始迎申公,亦以蒲輪。謂以蒲裹車輪,恐傷草木也。且蒲是草之美者,故禮有「蒲璧」,蓋畫蒲於輪以為榮飾也。
[四] 【索隱】 살펴보니 매승을 말한다. 한이 처음에 신공을 맞이할 때 또한 수레바퀴를 부들풀로 감쌌다. 부들풀로 수레바퀴를 싸는 것은 풀과 나무가 상할 것을 두려워 한 것을 말한다. 또 부들풀은 풀의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에 “蒲壁‘이 있으니 대개 수레바퀴에 부들풀을 그려 영화로운 꾸밈을 삼는다.
[五] 索隱案:上文嚴安等上書,上曰「公等安在,何相見之晚」是也。
[五] 【索隱】 살펴보니 윗글은 엄안 등이 글을 올리자 황제가 말하기를 “공들은 어디에 있었기에 서로 보는 것이 늦었는가?” 한 것이 이것이다.
【索隱述贊】平津巨儒,晚年始遇。外示寬儉,內懷嫉妒。寵備榮爵,身受肺腑。主父推恩,觀時設度。生食五鼎,死非時蠹。
【索隱述贊】 평진후 공손홍은 큰 유학자로 늘그막에 비로소 때를 만났다. 밖으로는 너그러움과 검소함을 보였고, 안으로 질투를 품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영예로운 벼슬을 갖추었고, 몸으로는 측근이 되었다. 주부언은 은혜를 미루어 시절을 관찰하고 법도를 세웠다. 살아서는 오정의 밥을 먹고 죽어서는 시절의 좀이 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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